칼럼Home >  칼럼 >  Nova Topos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
- 칼럼
- Nova Topos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
- 칼럼
- Nova Topos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
- 칼럼
- Nova Topos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
- 칼럼
- Nova Topos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
- 칼럼
- Nova Topos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구의 반을 나눠 먹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다.
- 대항해 시대 당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발견하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서로 경쟁적으로 인도로 진출하는 길을 찾고 있을 때 두 국가가 전쟁까지 갈 정도로 그 경쟁이 심화되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중재에 나서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라는 도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대양에서 새로 발견되었거나 발견된 땅을 어느 군주에게 귀속시킬지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를 교황에게 승인 받은 상황이었다. 교황의 칙서에 따라 기니(Guinea)와 카보 보자도르(Cabo Bojador) 남쪽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하고 통일하여, 이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콜롬부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는데, 원래 콜롬부스가 발견한 카리브 해의 섬들은 위도 상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되던 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포르투갈 양측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리카 쪽의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 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의 중재로,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아메리카 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 사이의 가운데 지역인 대서양 한 가운데 경선을 기준선으로,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귀속은 서쪽이 스페인으로, 동쪽의 땅은 모두 포르투갈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제2차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는 전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된다.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북아메리카 카리브와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페인의 영토가 되고 브라질 혼자 포르투갈의 영토가 된다. 지금 브라질의 해안가 지역은 기준선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기준선 동쪽의 땅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차지했다. 물론 이 때까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비롯해서 서유럽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막상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긴 했지만 동쪽에는 무슨 국가들이 있는지에 거의 아는 자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존재는 양국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실제로 지구를 양분하자는 생각이 아니라 교황이 그냥 둘이 정쟁을 벌이자 말리고자 했던 하나의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조약을 맺는 과정 중에 당초 교황이 제시한 카보베르데 기준 서쪽 100리그 경선에서, 포르투갈의 강력한 주장으로 370리그 경선으로 더 밀어낸 것과 관련해 콜롬부스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밀어 붙였다는 의문이 아직 남아있다. 공식 기록상으로 브라질은 1500년에 발견되었으나, 이미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서, 인도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난 것도 아니면서 대서양 반대편까지 배를 몰고 갔다는 점과 발견 당시 항해 기록이나 이를 보고 받은 포르투갈 왕실이나 새로운 땅을 발견해 놓고도 아무런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에 물리적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정설이다. 그나마 이러한 진실을 밝혀줄 수 있었을 기밀 항해 기록은 리스본 테주 강변에 위치하던 왕궁의 문서 보관고에 저장되어 있다가, 1755년 11월 1일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과 연이은 지진 해일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수 있는 상태다. 당초 조약대로라면 스페인 측이 보장받은 부분이 훨씬 컸는데도 포르투갈은 후일 남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인 브라질을 차지하였는데 아마존 강 하구가 조약 기준선 기준으로 포르투갈 관할이었던 덕택이다. 당시 유럽인 탐험가들은 배를 타고 다녔고 내륙은 직접 통제하기 어려웠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하필 안데스 산맥에 막혀 거의 아마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동안 바다같이 넓은 아마존 강의 하구를 확보한 포르투갈인 개척자들이 나중에 조약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아마존 상류와 지류를 거슬러 올라 항해하여 아마조니아 곳곳에 깃발을 꽂고 포르투갈어를 이식하여 개척하면서 결국 지금의 거대한 브라질 영토가 완성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렇게 완성된 브라질의 면적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대략 절반 정도 된다. 이에 기아나 지역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남아메리카 대륙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반을 차지한 셈이다. 사실 남아메리카를 벗어나 신대륙 전체로 본다면 북아메리카는 영국의 버지니아,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및 캐나다를 제외하고는 거의 스페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지분이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 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등 서부 지역,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및 앨라배마 연안 지역 등은 모두 원래 스페인의 영토였다. 그리고 프랑스령인 루이지애나도 원래는 스페인이 발견해 차지했었다가 나중에 프랑스에게 넘겼다. 그 대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스페인보다 훨씬 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후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87~1526), 미겔 로페스 레가스피(Miguel Lopez Legazpi, 1502~1572) 등이 동남아시아에도 필리핀 도독령을 설치했다. 이에 태평양 측도 문제가 되어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태평양도 동경 142도까지 경계선을 설정했다. 그 선에서는 서쪽이 포르투갈, 동쪽이 스페인의 영토가 되어 동남아시아는 포르투갈 차지가 된다.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가 스페인 국왕에게 넘어가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되어 조약의 양 당사자 사이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속령의 확보에 나서면서 이 조약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들 나라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기들끼리 맺은 조약을 인정할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종교 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조약의 권위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조약대로라면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모든 서유럽 국가들은 물론 스페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오류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경쟁자였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 국왕에게 이 세계의 반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담의 유언장에 나와 있다면 몇 항 몇 조에 있는지 보여주라며 비아냥거렸고 결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페인은 이 조약을 근거로 19세기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현재는 먼로 독트린을 통하여 촉발된 아메리카 패권 성향이나, 이웃하고 있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장 중남미 지역의 쿠바만 하더라도 스페인이 19세기까지 주권을 유지하였고, 현재도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 3위가 스페인어라는 것에 있다. 이는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언어가 식민 통치 시기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카톨릭과 함께 중남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현대 축구로 유명한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최우선 진출 대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1부 프로축구 리그인 라 리가, 프리메라 리가일 정도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 칼럼
- Nova Topos
-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구의 반을 나눠 먹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다.
-
-
근대 시기 유럽의 대외 무역으로 인한 중동의 변화
- 17~18세기 동안, 유럽의 대외 무역은 꾸준히 성장하여 자국 영사의 보호 아래 시리아와 이집트 항구들 그리고 기타 도시에 무역업자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18세기에 이집트가 참여한 동양의 향신료와 실크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손에 대양의 교역로가 좌우되면서 점점 감소하게 됐다. 프랑스인들의 이집트 통치는 비록 3년 만에 끝이 났으나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서구가 큰 경제 · 사회 ·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고 아라비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속으로는 문화적 착취, 겉으로는 부흥이란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가 손쉽게 승리하면서 그동안 도전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이슬람의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게 되자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중대한 재조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발생된 심리적 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하여 이집트 출신으로 이슬람 역사학자인 알 자바르티(al-Jabarti)는 이집트가 당한 충격과 프랑스와 이집트 사이의 힘의 차이를 느끼며 그 도전에 맞서려는 이집트 통치자들의 무력감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기록했다. 프랑스가 철수하고 나서 이어진 무정부 상태는 1803년 발칸 지역 알바니아 출신이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새로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는 것에 성공하였다. 비록 이집트의 독립과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그 나름대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새로운 유럽형 군대를 보유하고자 경제 및 교육에서의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였다. 산업화 정책은 실패하였으나 농업을 합리적으로 확장하는 등 봉건제도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곳에 유럽의 교사들을 초청했다. 서구의 도서 번역을 지원하였고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유럽에 최초로 유학단을 파견했다. 면화 경작을 늘려 영국 등 서유럽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시켰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학단의 교육을 통해 알려진 유럽의 언어와 문화들이 퍼지면서 전통적 견해는 새 문화와 견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 스스로 터키어를 구사하는 오스만투르크의 인물이지 아라비아 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브라힘은 아라비아어로 말하고 아라비아 제국의 존립에 대해 걱정했다. 시리아는 1840년 무함마드 알리 군대의 철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봉건제도를 파괴하고 중앙 집권화 된 행정체제로 대체하는 일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 하에 계속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은 중앙집권화의 척도를 증가시켰다. 지방은 더 이상 군 파샤(Military Pashas)가 보유한 봉토가 아니었으며, 행정 구역은 중앙정부 관리들이 관리했다. 지주 계층은 봉건 제도상의 특권과 법의 집행력은 탈취 당했더라도 사회 · 경제적 우월성은 보유했으며 경제 및 행정 분야에서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유럽의 경제 활동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무역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원과 서비스, 특히 통신의 개발과 통제에 관심을 가졌다. 바스코 다 가마 시대부터 유럽은 무역이든, 전쟁이든, 인도를 접근할 때 희망봉을 경유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증기선의 출현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럽의 선박들은 인도의 제품을 수세기 동안 홍해와 걸프 만을 관통하여 바스라, 제다, 수에즈 시장으로 가져갔다. 영국 회사들은 인도에서 바스라와 수에즈까지 선박 운송 업무를 했다. 그 운항의 안전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해군이 아라비아 해에서 해적 행위를 진압하고 동시에 석탄 공급 항구와 전략적 감시소들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패권을 확립시켰다. 1869년 11월 17일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이집트는 이집트-홍해 루트가 복원되면서 요충지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영국이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 통신의 발달은 더 지지부진했으며 시기도 늦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도로와 철도를 건설했고, 터키는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잇는 히자즈(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철도 건설에 공헌했다. 또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1914년에 대부분 완성하는 등 이 지역에서 항구, 교량, 운하, 전신 및 기타 서비스 분야가 발전했다. 이러한 방대한 개발은 본질적으로 운송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경유하는 국가들에게는 제한된 이익이 주어졌다. 따라서 아랍 지역의 주요 자원 개발은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비의 출현으로 관개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거대한 시장 접근을 가능하게 한 새 철도와 도로, 항구 때문에 이집트에서 면화 및 설탕의 재배가 확대된 점이다. 20세기의 변화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 훨씬 더 급진적이다. 내부에서 연소하는 엔진이 등장해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비행기, 자동차, 대형 화물차(lorry)가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통신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으며 인간, 물자와 사상의 급속한 교류가 가능케 되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에서 이제 외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 석유 개발이 이루어졌다. 유럽으로부터의 문화적 침투는 기독교인을 통해 주로 종교적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바티칸은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Maronite Catholics)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카푸친회(Capuchins) 수도사들과 예수회 수사들은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들은 아랍어나 터키어로 된 인쇄를 오랫동안 금지하였다. 그래서 아랍어 서적은 서구에서 인쇄하여 아라비아 이슬람 지역에 배부되었다. 아라비아 세계에 등장한 첫 번째 인쇄기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인쇄기’로 1822년에 설치됐으며 학교 교재들이 주로 인쇄되었다. 19세기, 주요 성지와 기독교 소수파들에 대한 보호 문제에 강대국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아라비아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예수회 수사들과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이었으며 그들은 아랍어 인쇄기를 설치하고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그들은 거의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고전을 복원시켜주었고 몇몇 서구의 지식들을 아라비아 인들을 위해 번역하였다. 또한 아라비아의 신세대를 교육시켰다.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유산에 대해 자각하였고 유럽의 영향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에 대한 사회적 영향은 기대보다는 크게 제한적이었다. 무역업자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토종 신(新)중산층들은 주로 소수파 출신들이며 지위의 불안정과 전반적으로 주민들과 분리되기 때문에 완전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산층은 아랍어로 쓰고 말했다.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 신문과 잡지사를 설립하였고 경제 및 사회 변화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에게 더욱 더 광범위하게 다가갔다. 아라비아 민족주의가 태동한 것은 이 시기였다. 터키인과 이질적인 침략주의자 유럽인을 혐오하는 아랍인들은 유럽의 민족주의 개념을 수용하고 아랍어와 아라비아 문화의 부활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주의는 무슬림의 단일성에 영향을 덜 받고 경제 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강했다. 기독교인들은 옛 이슬람 공동체의 현대판 정치적 표현인 범 이슬람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종교보다는 민족적인 용어로 침략자 서양에 대항할 동양의 결속과 불쾌감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정체성의 기본적 정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이슬람의 완전한 사회는 때로는 민족주의 용어로, 때로는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됐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인들을 직접 통제하자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은 가속화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비아 세계 변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1839년 영국이 아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서구 열강들은 이들을 통제하다가 나중에는 아라비아의 중심 지역들을 통제하였다. 드디어 1882년 영국은 아라비아의 중심지역인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 점령으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에는 훨씬 구체적인 불만의 씨와 목적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지역적이었다. 그 때까지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계와 정당 등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전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표출했던 방식이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와하비야 운동이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압둘 아지즈 빈 사우드가 열렬한 와하비야 전사들과 나즈드 통치 지역을 확장시킬 때였다. 그는 하사를 1913년에 점령했으며 샴마르를 1921년에 병합했고 히자즈를 1924~25년에 병합하였다. 이후,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고 와하비즘(Wahhbism)을 국가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날 충성과 연합의 형태로 복귀하려는 호전적인 이슬람 형제단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아라비아 국가에서 보여준 주요 행동은 서구에서처럼 정치적이었다. 공공생활의 서구화는 엄청나게 피상적이었다. 진정한 사회 기반은 아직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지주와 농민 간의 실질적인 봉건적 관계는 법적으로 폐기되었으나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지주들은 주도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비 무슬림들로 구성된 무역 종사자들은 투쟁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 계층은 이전처럼 변함없는 기본적인 문화 창출적인 면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권위의 상징들인 의회, 선거, 정당, 정강, 신문 및 여론에 대한 호소라는 서구식 정치적 기구와 표현들은 그대로 도입되었으나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직도 무슬림의 감정이 우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에서 대부분의 아라비아 무슬림들은 터키 쪽을 동정하며 편을 들었으나 아라비아 민족주의도 급속히 발전하였다. 1916년, 영국은 히자즈에서 아라비아의 반란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각적인 물자 원조와 전후 아라비아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가로 아라비아 유목민 부대는 영국의 시리아 점령을 도왔다. 영국으로 인한 평화적인 정착은 아라비아 인들의 희망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아라비아 인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에 신흥 국가들이 설립됐으며 연합군은 터키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이 연기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가 실시됐다. 교전 기간 중 급속한 경제 및 문화의 발달로 인해 더욱 강한 여론을 갖게 된 아라비아의 서구에 대한 실망은 일련의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표출됐다. 그 운동은 비록 여전히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으며, 통치력과 많은 정책들이 옛 사회 질서에 의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중 운동이었으며, 교육받고 정치적 자각이 있는 소수 계층에서부터 문맹이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투쟁은 보다 격렬했으며 지속적이었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곧 이집트와 이라크는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며 반(反) 제국주의 주요 투쟁은 레바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집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와 레바논이 독립했으며 1945년에는 아랍 연맹이 공식적으로 발족됐다. 1950~1960년대에 나머지 아라비아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아랍 연맹에도 가입되었다.
-
- 칼럼
- Nova Topos
-
근대 시기 유럽의 대외 무역으로 인한 중동의 변화
-
-
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명나라의 유신(遺臣)인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廸)이 1679년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낭 항에 이주했다. 베트남의 광남 응우옌 왕조(廣南阮朝)에 망명한 명나라 유신의 일파는 호이안에 머물면서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설립하고, 진상천과 양언적 일파는 메콩델타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이들의 정주는 베트남 중남부의 교통 요소에 ‘중국계 이민’의 집주지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국계 이민은 베트남 남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7세기 말 베트남의 판도에 포함된 현재의 호치민과 비엔호아에서 명향사와 청하사(淸河社)를 설립했다. 『대남실록전편(大南實錄前編)』의 기사에 따르면 1679년,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迪)이 공동으로 이끄는 중국 선단에 속한 선박 50척과 사람 3,000명이 도착했다고 한다. 대남식록전편에 의하면 이들 광동인 집단은 망명하길 원했으나, 언어와 풍습이 너무 달라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현주(賢主) 완복빈(阮福瀕)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이 가정(嘉定)-동나이(同奈) 지역으로 남하한다면, 캄보디아의 번왕 앙 논에게 말을 넣어 실향민이 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였고,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두 집단으로 흩어졌다. 양언적이 이끈 집단은 미 토(Mỹ Tho)를 설립하였고, 다른 집단은 훗날 사이공이 될 장소 근처인 비엔 호아(Biên Hóa, 邊和)로 간 것이다. 명향사와 청하사는 하나의 중국인 마을을 형성했으며, 출신지별로 5개의 방회(幇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명향사에 적을 둔 중국인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조직 내 자치가 용인되었고, 과거 응시의 자격이 부여되었고, 토지취득의 권리가 부여되는 우대조치를 향유했다. 프랑스의 통치 시기(1887~1945)의 식민지 정부는 응우옌 왕조의 정책을 답습하여 프랑스와 중국 간에 ‘중국계 이민’의 국적 문제가 발생하자, 명향의 신분은 ‘베트남인’과 ‘아시아 외국인(중국계 이민)’ 사이에서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명향(明鄕)은 명향사에서 나온 단어로 이들 중국계 이민의 자손을 말하거나, 중국계 이민 남성과 현지에서 베트남 인 혹은 크메르 인 여성 사이에 탄생한 혼혈의 자식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 명향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54개 민족 가운데 화족(華族)이 아닌 베트남 낀족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민망 년간(1820-1841) 중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明香’은 ‘明鄕’으로 표기법이 바뀌었다. 중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나라의 향화’라는 단어 대신 ‘명나라의 후손 또는 유민의 고향’ 즉, 베트남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뀐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베트남어로 발음 및 성조까지 같다. 이는 두 지역에 ‘한풍(漢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1698년 남방 지배를 위한 기구로 가정부(嘉定府)가 들어선 이후에 동나이 지역 중국인은 청하사(淸河社), 사이공에 살고 있던 중국인은 명향사(明香社)로 조직됨으로서 명나라 유민들의 베트남 정착이 완료된 것처럼 보인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시 명향사의 조직은 해체되었고, 회사(社)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등의 재산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최근 호이안의 명향과 화교 관련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명향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인도네시아의 콘밍(Khonming)과 베트남의 명향 사이에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콘밍은 인도네시아의 정책에 따라 보호받기는 했지만, 명향처럼 베트남 남부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에 적극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향은 출신지 별로 방회(幇會)를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동향단체를 만들었지만 콘밍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명향은 프랑스 통치 시대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콘밍은 일제 시대에 그러한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되어 버렸다. 명향은 그들만의 모임을 형성 및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향회관, 관제묘와 같은 시설이 존재한 반면, 콘밍에게는 이와 같은 공동체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청(淸)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이주할 경우 반역자로 취급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만주족에 굴복하기 싫은 한족과 삶의 한계 상황에 이른 극빈층들이 정크선을 타고 남쪽 섬나라로 도주해 갔다.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상부상조로 현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시켰다. 이 때 청나라 남부 한족들이 베트남으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베트남인들을 지배하는 쪽에 섰으며 일반 베트남인들에 비해 부유하고 권력이 강한 편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한 이후, 공산주의 성향 화교들은 북베트남을, 반공주의 성향의 화교들은 남베트남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시킨 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는 화교들의 상당수를 중국 본토나 대만, 홍콩 등 중화권 및 이웃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로 추방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 소위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자들의 상당수가 화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호주의 베트남계 호주인, 미국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화교 혈통인 경우가 매우 많은 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많은 수가 귀국했으나 현 베트남 공산정권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들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화교들과 다르게 베트남 경제를 장악하고 있지 않지만 2020년대 들어서 화교들이 중국-베트남 전쟁 이전처럼 남부 호치민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
- 칼럼
- Nova Topos
-
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
-
이재명 대통령, G7 정상 무대 데뷔와 트럼프 통화의 정치적 의미
- 한국 보수의 딜레마: 변화 없는 현실 안주의 끝은 어디인가 한국 정치의 축 중 하나였던 보수 진영이 지금 겪고 있는 위기는 일시적인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쇠락의 징후다. 변화 없는 현실 안주, 자성 없는 책임 회피, 철학 없는 언어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보수는 더 이상 ‘대안 세력’이 아닌 ‘방해 세력’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하게 된 것은 단순한 외교 일정 그 이상이다. 이는 한국의 국격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현 정권이 국제 사회에서 일정한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수 진영은 이를 부정하거나 깎아내리기 바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윤석열 정부 시절 언론과의 갈등으로 축소되었던 대통령 전용기 언론 탑승 인원이 문재인 정부 수준으로 복원된다는 발표는, 정권의 대외 소통 의지가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 간 첫 통화는 흥미로운 외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 정상은 관세, 무역 등 현안을 논의했을 뿐 아니라, 골프 라운딩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며 관계를 돈독히 했다. 서로가 암살 위기를 겪은 경험을 공유하며 리더십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 또한 이례적이다. 정치의 본질이 결국 ‘사람과 신뢰’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하지만 한국 보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여전히 “부정선거론”이라는 허구에 기대어 이재명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려 하고, 트럼프의 일방적 지지를 상상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외교 현실을 무시하고, 국가의 실익보다 진영 논리에 함몰된 태도에 불과하다. 트럼프조차 이재명 대통령을 “명성이 높은 인물”로 칭하며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데, 보수 진영은 이를 외면한 채 음모론과 혐오 정치에 빠져 있다. 보수 진영의 담론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구호 아래 구체적 정책도, 철학도 없다. “공정”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수사만 있고 내용은 없으며, 비판만 있고 대안은 없다. 변화하자는 말에 “좌클릭이다”라는 반응부터 보이며, 쇄신 요구를 “배신”으로 몰아붙인다. 진정한 보수는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유연함을 갖춰야 한다. 21세기 보수의 생존 조건은 ‘고립된 고집’이 아니라, ‘개방된 사고’에 있다. 과거의 영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고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이다. G7 정상회의 참석, 트럼프와의 신뢰 형성, 언론과의 소통 회복은 모두 시대 변화의 징표다. 이를 외면하고 음모론과 자기위안에 빠져 있는 보수는 더 이상 ‘보수’가 아니다. 그것은 기득권 연합에 불과하다. 국민은 더 이상 이들을 대안 세력으로 보지 않는다. 야당으로서의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이유다. 이제 보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화를 거부하며 고립을 자초할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철학을 구축할 것인가. 쇄신 없는 보수는 언젠가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퇴출될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
- 칼럼
- Nova Topos
-
이재명 대통령, G7 정상 무대 데뷔와 트럼프 통화의 정치적 의미
-
-
현대 이라크 왕국의 국왕 가지 1세 암살의 미스테리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지친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Rashid Ali Al Ghailani)와 황금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과 황금 광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친 영국 정치인을 체포하고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또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가입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한 달도 안 되어 패배하였고, 이라크는 영국에 항복하여 독일이나 이탈리아 연합국 중 가장 먼저 항복한 국가가 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이라크를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8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하다가, 1948년 영국-이라크 조약을 통해 이라크는 주권을 되찾고,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을 통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라크는 1958년 요르단과 연합하여 아라비아 연방을 설립했다. 그러나 1958년 여름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가 레바논 위기로 인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파병되는 이라크 군을 이끌던 육군 장교 아브드 알 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이 7월 14일 바그다드로 방향을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파이살 2세 국왕과 왕실 근위대를 항복시켰다. 결국 아라비아 연방은 해체되고, 이라크에는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파이살 2세를 비롯한 왕족들은 총살당했다. 그러나 카심도 불과 5년 뒤, 바트당 쿠데타로 역시 총살당했다. 하지만 왕정이 군부 쿠데타로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 이라크가 쿠데타와 전쟁, 내분으로 혼란을 빚게 되자 영국에 망명 중인 이라크의 하심 가문의 수장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Sharif Ali Bin Al Hussein)을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시켜 입헌 군주제로 개헌하여 왕정을 복귀시키자는 이야기가 이라크 국내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하고 있다. 샤리프 후세인은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의 3남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의 협력을 받아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아라비아 반란을 이끌었다. 결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몰아냈고, 오스만투르크가 다스리던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군정을 받게 되었다. 1920년 파이살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수립을 선포했으나 시리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를 원한 프랑스가 군사력을 동원해 왕국을 진압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 대신 영국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이라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1932년에는 주권 국가 이라크 왕국을 건국했다. 이라크가 수니파, 시아파 두 교파로 양분되어 대립했으나 그는 별 문제 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1933년 승하하여, 유일한 아들인 가지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가지 1세는 1912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인 헤자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후세인 1세로 아라비아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영국의 제안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으나 영국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가지 1세는 젊어서부터 반영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영국 헤로 스쿨(Hero School)에서 1년 동안 유학했으며 이어 샌드 허스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유학했다. 영국 유학 기간 동안 더욱 심한 반영주의자였으며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이라크 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성적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으나 승마와 기계 조작에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932년 부왕인 파이살 1세가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영국인들의 사주를 받은 아시리아 인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파이살 1세가 자주적인 이라크를 건설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영국이 왕정을 약화시키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벌인 것이었다. 가지 1세는 이라크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확장되는 반영 운동에 동조하여 영국의 목표는 이라크를 파멸시키거나 노예화하기 위해 이라크 정부를 약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판단해 아시리아 인 폭도들에게 공습을 감행했다. 가지 1세는 아시리아 인들의 폭동을 진압해 영국의 음모를 분쇄한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1933년 파이살 1세가 서거하자 가지 1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반 문맹으로써 학식이 높지 않고 군대가 민간 정치권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가지 1세는 군주로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국민적인 인기는 대단하였다. 가지 1세는 정치보다는 아시리아 폭동 진압의 영광을 누리는 데 집중하여 국민들을 자주 만나며 인기를 과시했고 군복을 입고 공개석상에 나타나 반영파 장교들을 규합하였다. 이 때부터 이라크 정계는 군부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가지 1세와 영국의 지지를 받는 상류 계층 정치인 및 지방 부족들의 대결장이 되었다. 1934년에서 1935년에 걸쳐 친영파의 사주로 가지 1세에 반대하는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가지 1세는 이를 모두 진압하게 된다. 1936년 가지 1세는 아시리아 폭동을 진압할 때 활약한 바크르 시드키(Bakr Sidqi) 장군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를 지원하여 친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1937년 가지 1세는 자신의 특기인 기계 조작 능력을 활용하여 알 주아워(Al Juawor) 궁전에 라디오 카스르 알 주아워(Qasr Al Juawor) 방송국을 설립했다. 그는 군 장교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여 아라비아의 이념과 반영주의를 중동 전역에 선전하였다. 가지 1세의 방송은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등 방송이 연결되는 모든 아라비아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가지 1세는 아라비아 지역 최고의 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가지 1세는 쿠웨이트와의 합병을 추진했으며 쿠웨이트 입법위원회 위원 14명 중 10명으로부터 이라크와의 합병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받아 내었다. 이는 가지 1세의 인기와 쿠웨이트의 반영주의가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가지 1세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추진하자 영국은 가지 1세를 크게 경계하여 이라크 주재 영국 대사 모리스 패터슨(Morris Peterson)을 통해 알 주아워 방송국 폐쇄를 요청했지만 가지 1세는 패터슨의 면담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영국 정부는 공공연히 가지 1세의 제거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1937년 친위 쿠데타를 주도한 바크르 장군이 암살당하자 추방되었던 친영파들이 대거 귀국하였다. 전 수상 누리 사이드(Nuri Pasha Al-Said)의 아들 사바 사이드(Saba Al-Said)를 비롯한 친영파 정치인들은 가지 1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는데 섭정 위원회 설치, 가지 1세의 삼촌 제이드의 옹립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영국은 가지의 사촌인 친영파 압둘 일라흐(Abdul Ilah)를 즉위시킬 것을 주장했다. 1939년 4월 3일 심야, 참모 2명과 함께 운전을 하던 가지 1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지 1세는 황급히 후송되었으나 끝내 4월 4일 아침에 불과 27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신주를 들이 받아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공식적인 발표와는 달리 가지 1세의 차량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가지 1세가 과속을 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가지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머리의 부상은 자동차 사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시신을 부검한 사에브 사카트(Saeb Saqath) 박사도 가지 1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망증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내무장관 나지 사카트(Nhaji Saqath)는 친영파들의 압력으로 인해 사건을 종결해야 했으며 다시 권력을 장악한 친영파들은 사건 재수사를 철저히 금지했다. 그리고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여 밝히려는 사법부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가지 1세가 사망하면서 4세 밖에 되지 않은 파이살 2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에 대한 이라크 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가지 1세의 장례식 행렬에 바그다드 시민들은 누리 알 사이드를 향해 “당신은 가지 왕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سوف تدفع ثمن الدم الذي سفكه ملك الباذنجان!)”라고 울부 짖으며 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외쳤다. 이에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가 친영파에 대한 쿠데타를 벌이고 추축국에 가입해 영국과 잠시 전투를 벌이는 등 반영 소요 사태가 계속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이라크 왕국은 왕국의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던 가지 1세가 조기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라크 왕국은 1958년에 멸망했다.
-
- 칼럼
- Nova Topos
-
현대 이라크 왕국의 국왕 가지 1세 암살의 미스테리
-
-
사하라 사막과 서아프리카에 전래된 문화, 노크 문화(Nok culture)
-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문화의 요람이며 아프리카의 역사가 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문화의 바탕이 된 몇 가지의 역사적 배경을 지적한다면 사하라 사막의 여러 주민들이 지켜온 전통 문화는 사하라가 사막화되는 과정에서 변화되는 기후와 자연 조건에 순응하면서 창출했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모지인 사하라의 암벽에는 수 만 점의 부조와 동굴에 새겨진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B.C 7,000년경부터 A.D 1,000년에 걸친 벽화들이다. 수렵 장면, 소떼를 쫓는 유목민, 말이 이끄는 두 바퀴 전차(戰車), 전투나 축제 등 일상생활의 풍속도들이 있고 코끼리, 하마, 기린 등의 그림과 종교의식을 위한 거신(巨神) 상도 존재하고 있다. 이들 벽화의 규모는 매우 크며 예술적 감각도 탁월한 부분을 감안하면 오늘날 검은 아프리카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하는 격렬한 표현 의지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B.C 8000년경부터 사하라 사막은 습윤(濕潤) 기후로 점차 숲과 늪이 생겼으며 여기에 코끼리, 하마, 기린 등 야생동물들이 서식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무렵 지중해 연안과 남부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채집하던 수렵민이 들어와 거주하게 된 것이다. 사하라에 남겨진 벽화 등 유적으로 보아 지중해 형 민족과 흑인 계통의 민족이 절반씩 나타났고, 이들 두 계열의 혼성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B.C 6000년경 사하라 주민들의 생업은 목축을 중심으로 수렵과 채집을 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농경의 벽화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하라 사막이 건조하기 시작한 것은 B.C 3000년경부터였다. 이는 제4기 이래 사하라 사막 지대가 말라버린 것은 신석기 시대의 대변혁을 촉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B.C 500년경 사하라 사막은 지금과 같은 사막이 되었다. 이러한 사막의 건조화, 사막화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사하라가 사막이 되자 불모지를 탈출한 사하라의 부족들은 그들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소떼를 몰고 사방으로 흩어져 이동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진 넓은 세상에서 적응하는 것에는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관련 아프리카 학계는 최근 사하라 남쪽의 가장자리에서 농경의 기원을 말해주는 석기시대의 촌락 유적들을 몇 군데 발견하였다. 이들 촌락의 주민들은 아마도 야생잡곡을 채집한 경험을 가졌던 사하라 유목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사하라 사막이 건조해지자 강이나 호수 주변에 집결하여 그곳에서 집약적인 농경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보여 진다. 또한 서아프리카의 재배 기술을 아프리카 도처의 사바나 지역으로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리타니 남쪽에 있는 다르 티체트(Dar Tichet)에서는 B.C 1500년~500년경에 걸친 여러 단계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유목 가축으로 소와 염소는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왔으며 재배 작물로서는 기장이 있었는데 이 잡곡은 B.C 1200년경부터 식용으로 사용해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적지에는 무장한 베르베르 족이 지나간 흔적도 남아있었다. 이로써 청동기 시대의 지중해 연안과 사하라 이남을 연결한 교역로도 사하라 사막이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또한 일찍 사하라 사막과 서부 아프리카로 들어온 북아프리카 인들은 서부 수단에서 흑인과 접촉하게 되었다. 한편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니제르 강과 베누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수 백 점의 테라코타 토기가 철기, 마제석기와 함께 발굴되었다. 처음 발굴 지점인 노크(Nok) 마을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를 노크 문화로 명명하였다. 이들 테라코타는 연대적으로 B.C 1000년부터 A.D 200년까지의 것으로 추정되며 후기 석기 시대에서 철기시대에 걸친 여러 부족사회의 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노크문화는 또한 사하라가 사막화됨에 따라 남하해온 흑인 부족들이 사바나와 산림지대에서 농경으로 정착하면서 공예기술을 양성하여 분업 사회를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노크문화가 검은 아프리카 문화의 원형이었지만 여러 부족이 수천 년에 걸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그 원형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하여 발전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
- 칼럼
- Nova Topos
-
사하라 사막과 서아프리카에 전래된 문화, 노크 문화(Nok culture)
-
-
러시아 최초의 의회인 노브고로드 민회(民會)와 선거제도
- 키예프 루스 말기에 키예프의 한 대공이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의 공으로 제위 시키려 했다. 이는 키예프의 다음 공후를 자신의 아들로 세습하려던 뜻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브고로트의 민회는 대공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귀공도 또 귀공의 아드님도 바라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공후께 전합니다. 만약 공자께서 머리가 둘로 생각하신다면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위의 인용문 일화에서도 나타난 것과 같이 당시 키예프 공국 체제에서 제2의 도시로 각광을 받던 노브고로드는 키예프 공국 말기에서 몽골 지배 초기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으로 유라시아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후의 권한이 점점 강력해지면서 전제군주가 태동하던 블라디미르 등지의 북동부 지역이나, 귀족들의 세력이 커져 귀족지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던 남서부 체르니코프, 페레야슬라브 지역과 달리, 북부의 노브고로트에서는 시민과 민회의 세력이 강화되어 반(半) 공화제 정치 체제의 경향을 보였다. 정치체제와 시민생활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흡사했다. 전통사학에서 언급하기로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정치, 사회 체제에 대하여 고도로 제도화된 베쩨(Вече)라는 일종의 민회와 노브고로드의 시장 역할과 더불어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천인대장이면서 도시 민병대의 수장인 띠샤쯔끼(Тысяцкий), 다른 귀족 가문의 일원들, 노브고로드 대주교 등으로 구성된 정부였다. 이러한 독특한 정부체제는 전제왕권을 지닌 국가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부유한 상인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띠샤쯔끼(Тысяцкий)는 초창기에는 군을 담당했지만 법률 및 상업적인 관리를 포사드니크에게 이양 받음에 따라 그들은 군과 경찰, 사법적인 부분은 관장하는 직책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정확한 헌정체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존재가 확실한 노브고로드의 최소한 명목상으로 존재한 지도자는 노브고로드 대공 공작이었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주위 국가들에서 명망 높은 공작을 모셔왔으며, 국력이 약해진 13세기와 14세기 초에도 여전히 외부에서 공작을 영입해왔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정부 행정의 수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관리들의 정확한 권한을 밝혀내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이는 이반 3세가 침공하여 노브고로드를 점령했을 당시 다수의 문서들이 소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정 수반은 여전히 대주교로 국정에 관한 회의들을 주재했으며 대주교 궁으로 알려진 다면궁에서 열린 “귀족평의회(Совет Госпо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최근 사학자인 J. 글렌버그(J. Granberg)는 실제로 그러한 기구가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재기했다. 글렌버그는 이러한 대주교 중심의 정부 개념의 이해를 파악할 때 역사학자들이 희박한 사료에 많은 몰입을 시도한 결과 추정되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론들로 인하여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공국의 실제 권력자 혹은 행정수반이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특성상 어느 경우든지 대주교가 도시의 주요한 관리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주교는 노브고로드의 교회들을 감독할 뿐 아니라, 대사관을 대표하고, 세속적인 법정 판결을 감독했으며,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세속적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보야르들과 함께 노브고로드의 여러 회의들을 거쳐 그 의견들을 수렴한 것으로 생각되며, 대주교가 단독행동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러한 대주교는 외부에서 임명되지 않고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후 키예프 정교회 모스크바 관구장 주교에게 재가를 받는 식으로 임용되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는 아마도 노브고로드에서 가장 부유한 단일 지주였을 것이며, 법정 수수료와 시장의 저울 사용 비용,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들을 활용하여 재산을 축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노브고로드 대주교 재산 축적의 원천은 노브고로드의 지리적 위치와 상인들과 결탁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노브고로드는 발트 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바리야기(Барияги)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의 북쪽 중심지였고 볼가 강 수로를 통해 동방과도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노브고로드가 일찍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유화는 정치적인 위상도 격상시켜 키예프 대공은 대대로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 대공에 임명하여 도시를 장악하려 했다.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두 대공인 블라디미르 1세와 야로슬라프 1세도 한 때 노브고로드 공이었고, 야로슬라프 1세의 법전『루스까야 쁘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가 만들어진 것도 이 노브고로드에서 주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공들은 결국 노브로고드에서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의 정치적 실권은 점차 토착 귀족층인 보야르와 상류층 시민들에게 옮겨갔다. 그와 함께 민회(民會)가 도시의 최고 권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1136년에는 민회가 공을 추방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1156년에는 자신의 대주교를 선출하는 권리까지도 받아낸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정부 체계에 따른 민회(民會)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노브고로드에서 중요한 정무관으로는 베쩨(Вече ; 민회)를 주재하는 노브고로드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 시장)가 있다. 베쩨에서는 공작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세금 징수와 도시의 여러 안건과 시외의 문제들을 논하는 자리이다. 그러한 민회의 존재로 인해 공작의 주요한 결정 사항들은 대부분 시장인 포사드니크의 재가를 받아야했다. 이러한 체계는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14세기 중반부터는 시장을 한 명만 두지 않고, 민회에서 한번에 6명을 선출했다. 6명의 시장은 종신직이었으며, 매해 그들 중에서 수석시장인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를 선출했다. 이러한 민회인 베쩨의 정확한 실체 역시 불확실하나, 자유농민을 포함한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민회가 민주적 기구였는지 보야르 귀족들에 의해 주도된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여러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는 물론 노브고로드 대주교나 주교 역시 민회에 의해 선출되거나 적어도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시(市)는 민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5개 구로 분할했고, 광범한 자율권을 가진 각각의 구는 도시의 테두리를 넘어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각각의 주 농촌을 관할했다. 5개 주 바깥의 새로 획득된 넓은 대지는 도시 전체가 관리했다. 노브고로드에서도 최고의 직위는 사법, 행정, 군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대공이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대주교에게 있었다. 그러나 1136년의 민중혁명이 발생하면서 민회가 대공의 권력과 활동에 세세하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의 권력은 서서히 미미해지고 시민들의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이를 통한 민회 역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민회는 공후를 임명하고 해임했으며,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를 선출했고, 대주교 지위에 합당한 세 후보를 선출하여 사실상 대주교의 선임을 결정했다. 또한 민회는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고, 법률 선포, 세금 조달 등을 관장하는 도시의 최고 권력이었다. 민회의 성원 자격은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 가장이었으며, 단 한 사람의 시민이 종을 울려 민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다. 민회에서 선출된 포사드니크는 공과 행정업무를 분담했고, 공후의 협력자 또는 부관 역할을 하면서 공후의 대한 전제적 통치에서 도시의 이익을 보호했으며, 공후의 부재 시에 역할을 대행했다. 티샤츠키는 자유민 1,000명의 대표로서 상업적 분쟁 등을 처리했다. 대주교는 성직자 고유의 역할 외에도 세속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서로 적대하는 당파를 화해시키며 해외 사절단을 조직하고 거느리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기관으로는 명사위원회가 있었다. 노브고로드와 부와 세력이 반영된 기관으로서, 귀족층, 전, 현직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 각 구와 거리의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민회에서 논의 또는 제정한 법과 그에 행한 조치들을 정교하게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노브고로드 정치의 흐름을 면밀히 조절했다. 사법 체계 역시 상당히 치밀하고 인도주의적이었다. 여러 단계의 법정에 민주적인 배심원 제도와 중재 제도 등을 두어 사건을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민주적인 제도 하에서 노브고로드는 교역도 크게 성장하고, 키예프의 유산을 승계하여 문화도 크게 발전시키면서 15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하나의 예로, 노브고로트에서 발견된 500여 개의 자작나무 껍질 문서들은 시민들 사이에 읽고 쓰는 능력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상공업에 종사한 자영업 상인들과 장인들도 역시 노브고로드의 정치적 문제에 참여했다. 이에 전통적인 학자들은 그들이 콘치(Kонец ; 복수형 Kонцы)라 불리는 5개 자치구에 분산하여 거주했으며 또한 그 자치구별로 상업적인 조직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특정 골목과 거리, 도시의 어떤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지에 따라 해당 골목, 혹은 거리의 명칭이 정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인 집단들은 쏘뜨냐(Cотня ; 100인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했다. 이것은 최초의 러시아에서 길드(Guild)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루스 민족의 여러 나라들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성격의 길드가 존재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노브고로드 중세사에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공업자들의 조직의 실체 역시 불명확하기 때문에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보다 조직화된 길드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노브고로드의 골목(Alley)이나 거리(Distance)는 길드나 조합이라기보다는 단순한 행정 단위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거리 조직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교회를 짓거나 돌림병일 들 때 죽어나간 이웃 주민들을 매장하거나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활동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역시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러시아 최초의 길드라고 하는 이반(Иван)의 Cотня (100인대) 같은 경우에도 그 실체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거리와 골목에 속해 있는 상인 세력들은 특정 귀족 파벌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이해를 보호하면서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조약과 그 외의 규약들에서 상인들, 속칭 “원로(Elder)”들이 간혹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규약들 중 불과 100여개 정도만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 12개의 자작나무 껍질로 서술된 규약들은 12세기의 것으로 나타났고 나머지 대부분은 1262년 이후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노브고로드의 정치 조직을 이해하고 가늠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노브고로드 공작은 다른 루스의 공국들과는 달리 세습 직이 아니었고 그 권력 역시 상당히 제한적이었지만 여전히 공작은 노브고로드 시민의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100여명의 노브고로드 공작들 중 다수는 노브고로드 시민들에 의해 초빙되거나 폐위되었다. 그 중 일부는 랴드(Pяд)라 불리는 계약에 서명하면서 계약에 따른 내용들을 인정하게 했다. 이러한 랴드라는 것은 노브고로드의 보야르들의 이해를 보호하고 공작의 권리와 의무를 정해 놓은 계약으로 판단된다. 현재 모스크바 문서보관소에 보존된 랴드는 초빙된 공작 12명과 노브고로드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문서보관소에 서술된 12명의 공작 중 5명은 트베리, 4명은 모스크바, 3명은 리투아니아에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노브고로드 공작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군사적 지도자였다. 또한 공작은 도시의 교회들을 후원하고 재판소를 유지했으며 공작이 노브고로드에 부재할 시, 공작 지위의 나메쯔니크(Намечник)나 빠사드니크가 대신 업무를 보았다. 재판에는 빠사드니크가 항상 참석했고, 빠사드니크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판결도 내려질 수 없었다. 또한 시장의 허가가 없이는 공작이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분할하거나 법을 만들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공작은 노브고로드에 자신의 사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노브고로드의 영토에서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노브고로드 공작은 도시에서 그에게 지불하는 돈만 받아가는 일명 월급쟁이 사장과 같았다. 여러 리아드에 의하면 공작은 노브고로드 영토 밖에서 노브고로드 시민을 체포하거나 재판에 기소할 수 없었다. 그러한 노브고로드에 공작의 거처는 두 곳 있었는데, 하나는 시장 터에 있었다. 이 저택은 야로슬라프 1세의 이름을 인용하여 야로슬라프 궁전이라 하였다. 다른 공작의 거처는 남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고라디쎼(Городище)였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행정구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공화국은 수 개의 띠샤짜스(Тысячаc, 나라의 핵심 영토)와 볼로츠(Волоц, 북부와 동부의 식민지 또는 공물을 바치던 지역)로 분할되었다. 노브고로드 시와 그 주위를 비롯한 도시들은 이러한 구역들에 포함되지 않았다. 프스코프는 13세기 이후로 노브고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냈으며, 1348년 볼로또바(Болотово)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 외의 다른 도시들도 노브고로드 그리고 자신들의 이웃 도시들과 연대하면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러시아 최초의 의회인 노브고로드 민회(民會)와 선거제도
-
-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
- 칼럼
- Nova Topos
-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
-
통합과 조화의 정치, 공동체 삶의 회복
-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어제 21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재명은 취임 첫날 비상경제점검 TF를 구성하여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회의를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러진 대선이라서 취임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취임 첫날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보여주었다. 어제 이재명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의 첫 출발은 현충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이했던 점은 인천 계양에서 출발하여 현충원까지 가는 길에 올림픽 대로 4차선 중 2차선만 통제하고 나머지 차선은 통제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시민들의 불편을 배려한 조치로 보였다. 국민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대통령다웠다. 현충원 방명록에 쓴 글씨가 그의 진심을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한다. “함께 사는 세상,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국민과 함께 만들겠습니다.” 어떤 특정 계급에 매몰된 사람과 달리 그는 가난을 극복한 사람답게 그의 행보에는 사람 냄새가 났다. 국회 로텐더 홀에서의 취임연설 광경도 지켜봤다.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서 내빈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 중 조희대 대법원장과 악수 나누는 장면에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재명의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하고자 했던 대법원장의 시도와 그러한 장벽을 뚫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재명과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의 삶이 저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옹지마이다. 한 길 앞도 내다볼 수 없다면 오늘 나의 행동에 조심해야 함을 생각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기에, 조희대 역시 선한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봤다. 그 옆에 자리한 김형두 헌재소장 권한대행과의 만남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였던 것 같았다. 서로 밝은 웃음으로 맞이한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다. 헌법재판소의 8:0이라는 대통령 파면 결정이 없었다면, 이런 자리가 마련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명문으로 기억된다. 특히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 큰 울림으로 기억에 남았다. 통합은 유능의 지표이고 분열은 무능의 결과라는 말도 명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대통령 취임 선언문 전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다소 문학적인 글도 있었다. “그늘진 담장 밑에서도 기필코 해를 찾아 피어나는 6월의 장미처럼, 우리 국민은 혼돈과 절망 속에서도 나아갈 방향을 찾았습니다.” 어쩌면 대통령이 된 인간 이재명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역시 어둠을 해치고 밝은 태양으로 나아가는 저력이 있는 국민들이 뭉쳐있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흥이 나면 어떠한 무서운 괴물도 물리칠 수 있는 저력을 가지 백성들의 나라이다. 전 세계가 이 나라를 경이로운 눈길로 보고 있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에 나타난 그가 꿈꾸는 나라는 이렇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다시 힘차게 성장 발전하는 나라, 국민 모두 함께 잘사는 나라, 문화가 꽃피는 나라,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이다. 그의 연설은 주권자인 국민의 충직한 일꾼으로서,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위탁받은 대리인으로서 대통령으로 주어진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고 있다. 특히 평화과 관련된 언급을 했을 때, “아무리 비싼 평화도 전쟁보다 낫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낫고,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입니다.”라는 말에 많은 공감을 했었다. 물론 서양 사회에서는 “평화를 지키고 싶으면,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옛 격언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 말을 삶을 견디고 싶으면 죽음을 대비하라고 바꾸어 말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선과 악이 인간의 내면에 함께 존재하는 동전의 양면이듯이 평화와 전쟁 역시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삶과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악이 있어, 전쟁이 있어, 죽음이 있어 그만큼 더 선과 평화와 삶이 소중한 것이다. 어제 있었던 대통령 취임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 때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모된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더욱 공동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민에 대한 강조는 공동의 삶에 대한 강조이다. 국민 모두의 행복은 수량적인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살아 가지만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공간을 염두에 둘 때,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다. 즉 공동의 공간을 존중할 때 우리는 상호인정과 다른 의견에 대한 타협과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이재명 대통령이 꿈꾸는 나라가 아닐까? 견제와 균형은 결코 수량으로 도식화할 수 없다. 견제와 균형은 오히려 조화이다. 5:5가 조화가 아니라 10:0이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제 소수 야당은 견제와 균형을 언급하면서 다수 야당을 만들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할 것 같다. 하지만 견제와 균형의 초점은 조화에 있다. 수량적으로 5:5일지라도 악의 무리가 어느 한쪽을 지배하면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지금 비록 소수 야당일지라도 조화를 추구한다면 국민은 알아서 그들에게 많은 표를 줄 것이다. 21대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으로 새로운 나라를 향한 첫 발걸음을 축하하면서 새로운 통합 속에서 조화가 꽃피는 나라, 새로운 행복의 나라를 꿈꾸어 본다.
-
- 칼럼
- Nova Topos
-
통합과 조화의 정치, 공동체 삶의 회복
-
-
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 러시아 정부가 최근 연해주의 메가 프로젝트로 추진 중인 국제운송회랑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사업의 기본 계획을 보완 및 승인하며 향후 프로젝트 추진에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의 주요 육, 해상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복합 물류 인프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은 중국 수이펀 하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인 뽀그라니찌니(Пограничный, 육로), 그로데꼬보(Гродеково, 철도)를 통해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나호드까(Находка) 항 및 보스또찌니(Восточный) 항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 Ⅱ 역시 중국과 연해주의 물류 기반을 이어주는 사업으로 중국 훈춘에서 연해주 남서해안 지역인 끄라스끼노(Краскино), 뽀시예뜨(Посьет) 항, 자루비노(Зарубино) 항, 슬라뱐까(Славянка)를 연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기본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에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중국 동북 3성의 해로를 러시아 연해주의 육, 해상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확대할 수 있는 물류 노선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항구가 없는 중국의 동북 2성(길림성, 흑룡강성)은 러시아 연해주 항만을 통해 수송로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데, 이는 지역 발전을 노리고 이를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 경쟁력 있는 해상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 연해주 또한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물동량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리모리예 Ⅰ,Ⅱ 사업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 항법에 근거한 연해주 항만의 개발과 선도 개발구역 발전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교통 인프라 사업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연해주와 기타 극동 지역인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발전 및 추가 개발을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방으로 진출을 천명한 푸틴 대통령의 의지와 북극항로의 개발 등이 맞물려 모스크바 광역으로 치우친 러시아의 지역 GDP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인 프로젝트로도 볼 수 있겠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밀착하기 위해 벌이는 도로 프로젝트 사업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말고도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은 러시아와 중국, 양국이 추진하고 있는 최초의 지역 개발 사업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간의 협정으로 추진하는 극동 지역 사업으로는 극동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철교 건설 사업이 시초로 시작된 것이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이다. 철교는 비록 2021년에 완성하고 개통되었지만 낙후한 아무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불가피해 이에 대한 연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력이다. 마침 연해주 이민 정책청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만들어져 2025년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이는 지역 노동 시장에서 외국인 인력 합법화를 주요 목표로 지정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 양국 시민이 아닌 타국 인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외국 인력으로 북한 노동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연해주 측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것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지역 인력 시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의료, 문화, 스포츠 및 주거 시설을 확충했다. 이는 인력 수요를 외국 노동력을 유치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인프라 확충을 통해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유치 과정에 외국인들의 러시아 법률 준수 여부 및 고용주와 규제 당국 간 다양한 행정적, 사회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기에, 이민정책청은 지역, 연방 감독 당국을 모든 부분에서 지원하고, 외국인들의 러시아 생활에 대해 적응이 빠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작년 12월 연해주 정부는 지역 당국과 사회, 비영리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연해주에 이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 방법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세미나에서 알렉산드르 후돌로즈니(Александр Худоложный) 연해주 내무 정책부 장관은 여러 분야의 지역 산업에 종사 중에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연방 법과 프리모르스키예 주 법률을 숙지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관련 대책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이고르 사브첸코(Игорь Савченко) 지역 테러 방지 위원회장도 주 정부가 테러 및 극단주의 관련 문제를 안정적으로 통제 중에 있으나, 영주권, 노동 비자 등 체류 자격 관련 문서 위조 및 매매 관련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이 해결 방안을 고심 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올렉 바흐티나(Олег Вахтина) 극동 개발부 투자개발 및 국제협력국장은 류쥔 주 러시아 중국 공사와 하바로프스크 주 양국 국경 지역에 위치한 볼쇼이 우수리스크(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 섬의 국경 인프라 및 검문소 건설 문제를 논의하면서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와 중국 측은 아무르 지역이 2030년까지 연간 화물이 약 130만 톤 가량 처리되고 관광객이 최대 140만 명이 출입국 할 가능성을 높이 보았으며 아무르 지역이 양국 간 전략적 중요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국 간의 통합된 개발 계획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해당 공사는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 국제 선도 개발 구역을 통해 농업분야 첨단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극동개발부는 이와 관련한 추가 논의를 위해 지난 5월 23~25일에 블라고베셴스크에서 ‘Amur Expo’ 러시아-중국 경제 포럼을 열어 중국 대표단을 초청해 논의하기도 했다. Amur Expo는 아무르 주와 중국 흑하(黑河)시가 매년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로, 2023년부터 동방경제포럼 부분 세션으로 통합되어 진행 중에 있으며, 올해에는 러시아, 중국, 몽골, 인도, 파키스탄, 말레시아, 싱가포르, 네팔 총 8개국이 참가했다. Amur Expo는 지역 협력을 위한 핵심 부분을 논의하는 주요 국제 행사로, 흑하 시 정부도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얼빈 국제 투자 경제 박람회의 일부분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했다. 한편 러시아는 앞으로 중국 측과 기본적 합의 과정을 거쳐 공식 협상 채널에서 세부 조건들을 조율하여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실질적 준비를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양국이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단순한 셈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할 것이고 비용은 각각 3조 4,000억 원, 6,000억 원 수준의 비용이 예상되고 있다. 당초 러시아 연해주 정부, 블라디보스토크 시, 하바로프스크 시 등의 지방 정부 차원에서 프로젝트가 발의됐지만, 지금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 넘어가 중국 정부와 이 사업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조만간 북한 또한 여기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내년부터는 우리 한국도 Amur Expo,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 등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 연해주-극동 지역 개발에 대한 개발권을 따내야 한다고 본다.
-
- 칼럼
- Nova Topos
-
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