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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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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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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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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7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 칼럼
    • Nova Topos
    2025-11-27
  • 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26
  •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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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26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친정과 숙청
    차르 즉위년에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발생하면서 차르 체제에 대한 견제 및 이반에 대한 반발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시종관인 아다셰프(Алексей Адашев), 사제 실베스트르(Сильвестр), 대주교 마카리(Макарий) 등의 도브랸들을 측근으로 발탁했으며,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라는 기구를 신설하여 보야르들의 ‘귀족의회’인 두마에 대해 대척점을 마련했고 이들과 대대적으로 대립했다. 1547년에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카이사르의 별칭인 차르를 칭하고, 이후 차르 직위는 모든 루스 대공국 왕에게 공통적으로 불리는 명칭이 되었다. 이후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 제국(Царство Российское)이라고 지칭된다. 이반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써 가진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참조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및 드보랸, 일부 청년 지식인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는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차르로 등극한 첫 해에 발생한 모스크바 대화재는 그 피해가 막심했다. 크레믈린에 소재하던 그의 조부인 이반 3세의 종탑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 흥분한 시민들의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를 화재의 진화 및, 차후 3년간 세금 면제 등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개혁 성향의 측근들과 함께 키예프 13공국들의 공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에 노력했다. 당시 이반의 왕권 강화를 도왔던 13공국 공후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인 메르데예프(Мердеев), 페레야슬라블 공후인 벨로도르프(Беллодорв), 체르니코프 공후인 밀레세예프(Милисеев)였다. 이들은 왕후인 아나스타시야,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마카리 등과 더불어 이반 4세의 최측근으로서 초기 개혁 정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해, 이반은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를 도입하여 귀족들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선출회의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귀족 정권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자신을 배경으로 세력을 갖게 된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키워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어 1547년과 1549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 시성식이 있었다. 그 중 농민 출신들도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러한 농민 출신을 시성한 사실은 러시아의 기독교화 작업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에 의해 체계화되고 통일된 기독교 의식이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정교회로 하여금 귀족들을 견제하는 장치로 활용했고 여기에 대다수 시민인 농민들을 그 세력 하에 두어 수백 년간 뿌리 박혀 있던 귀족의 세력들을 전체적으로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의도였다. 차르로 등극한 1548년 이반 4세는 명망 있는 가문 로마노프 집안의 아나스타샤를 신부로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외국과 외교 동맹을 맺을 생각도 했지만, 이반 4세는 국내 안정과 더불어 그 동안 근간을 이루었던 러시아 귀족들을 배려하여 그와 같은 결정을 했다. 이는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을 달래 반란 발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판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이반 4세는 1549년에 서구식 신분제 의회와 유사하며 프랑스의 삼부화와 유사한 ‘전국 회의’,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 법 제정, 지방 행정 개혁 등 주요 사안을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이들에게 승인을 요청하도록 했다.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한 이반 4세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상인과 도시자유민 등의 ‘제3 신분’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보야르들이 자행한 모욕과 부정부패 등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와 비리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결과, 보야르들은 차르에게 굴복했으며 이반 4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시작한다. 이반은 1550년의 개혁 입법으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중앙으로 대거 귀속시키고, 보야르들이 전권을 행사하던 지방 법정에 지방 드보랸과 자유민들을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토지제도를 개편해 귀족의 토지 세습 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각자의 봉토는 차르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승인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와중에 토지 문제만큼은 보야르와 두마의 저항으로 쉽게 현실화되지 못하였으나, 이반 4세는 빠르게 절대 군주로서의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 이전에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을 중심으로 토지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반 4세의 조부인 이반 3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두려워 이를 방관했을 뿐이다. 그가 귀족들의 세력에 굴복한 것은 몽골-타타르 세력과의 전쟁 중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웨덴이나 폴란드의 외세를 공식적으로 끌어들일까 우려한 행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반 3세와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는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차르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귀족들에게 굴복했으며 그들의 사유 재산을 늘리는 부분에 대해 법적으로는 위배되지만 그들의 반발에 두려워 비공식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550년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 법전의 이름을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라 하였는데 이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는 이미 이반 3세 때 공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의 두마의 세력의 월등히 강해 법전을 만들고도 행하지 못했지만 이반 4세는 수제브니크를 다시 회복시켜 몇 가지 법령을 추가해 공표했다. 그러면서 군대 제도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하면서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은 앞으로 바다의 길이 열릴 것을 전망하고 해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정책이었으며 중앙 권력 강화로 인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집권화가 지속되자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다시 연이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했으며 로스토프에서는 대공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윌리스(Gustav Wilis) 공작의 딸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반은 방화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한편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당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인사들을 체포하여 부패, 뇌물, 탐학,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를 방화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Андрей Курбский), 시종관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 등의 측근들을 이용하여 노브고로드에 군사를 보내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 생각하여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체포하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로스토프 대공을 모스크바의 두마 회의 빙자해 불러들였고 이내 체포하여 처형하고 로스토프로 군사를 보내 대공의 가족들을 모두 참살했다. 1551년에는 이른바 ‘100개 조항 회의’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하고, 중앙 집중식 통일된 정교화 작업을 시행했다. 1552년 10월 이반 4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낳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장남 드미트리는 생후 1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후에 그는 7번째 왕비 마리아 나가야(Мария Нагая)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과 관련이 있다. 1553년 이반 4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눕게 되는데 증상에 대해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이반 4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매우 어리다고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Владимир Старлицкий)를 이반의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 집권 초기의 혹독한 중앙 집권에 반발하고 있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 세력인 드보랸과 중소 상인, 지식인들의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반이 사망하고 난 이후를 도모하게 된다. 그 동안 이반을 충실히 보좌해왔던 아다셰프, 실베스트르였지만 이반의 생각과 이와 같이 달랐던 이유는 이반의 전제 정치에 희생만 강요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반의 편에 서서 그 동안 실권을 누렸던 보야르들의 권위에 반발했지만 이는 그들이 기존의 보야르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이 그 기득권을 장악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이반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쿠데타 모의까지 했지만 아직도 이반의 지지 세력이 강력했고 자신들과 적이었던 보야르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기적적으로 쾌차하여 병세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반은 자신이 믿던 측근들이 자신을 배신함을 알고는 분개했고 이들을 모두 숙청하려 하였지만 대주교 마카리(Macarius)가 이들을 용서할 것을 상소하여 이들이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분기를 누르며 이들을 다시 중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숙청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상황에서 이들은 다시 이반의 생각과 달리하여 끝내 이반과 갈등 관계를 형성했다. 우선 이반의 생각은 자신의 장남인 드미트리를 태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완전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 드미트리는 생후 5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아였기 때문에 그를 태자, 혹은 후계자로 낙점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이 혹시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한 생각이었지만 선출회의의 대표들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드미트리에게 반 강제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한 다음 서약을 하지 않는 자를 불충의 죄로 물어 모두 처형해버렸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이에 대한 충격으로 이반은 다시 한 번 후계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왕궁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서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모스크바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을 명령했다. 또한 이반은 문맹의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들을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 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어서 정복의 주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차르와 선출회의의 입장은 다시 충돌했다. 선출회의는 동방으로 더욱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이반은 서방 공략을 염원하여 서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귀족들이 동방 진출을 원했던 이유는 아직 킵차크 칸국의 잔여 세력들이 건재하고 있고 이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토인 13공후 국들의 안전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외교,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쌓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할 힘을 확보하려 했는데 동방 지역 경략을 늦추고 서방 지역 경략을 강화한 이유 역시,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보야르들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의 킵차크 잔적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서방 원정에도 문제 생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해온 카잔 칸국 정벌에 나서 같은 해 12월에 카잔 칸국을 병합했으며,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했다. 이에 러시아 영내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이반 4세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도는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병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자주 노여워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등 심한 광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이반의 평정심과 자제가 완전히 흔들리게 된 것은 1560년 그가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왕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후의 자리를 지키다 3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 주장하며 더욱 포악해지면서 귀족들을 탄압했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귀족들에게 독살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는 이반이 1558년부터 이어진 귀족들의 정복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주장에 반발한 것에 대해 왕비가 마침 사망하자 귀족들에 혐의를 지우고 자신에게 반대한 것에 대한 복수, 혹은 그 세력마저 완전히 제압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발로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반의 중앙집권화와 전제 정치 확립의 일환으로 그와 같은 정적들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반의 광폭한 인격으로 이어졌으며 이반이 동양에서는 “뇌제(雷帝)”로 번역되는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 광폭 통치 때문이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9
  • 세계 10위의 자원부국이자 잠재력이 높은 몽골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 부국이다. 구리와 석탄 매장량이 각각 세계 2위와 4위 규모일 정도로 지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몰리브덴의 매장량도 세계 11위이며 희토류는 전세계의 16%가 몽골에 묻혀있다. 타반 톨고(Taban Tolgoi)에는 석탄, 오유 톨고이(Oyu Tolgoi)에는 구리와 금 등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진 광산들이 사실상 몽골 경제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몽골 GDP에서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4.8%에 달하고 있다. 광업은 2위 농업의 16.5% 보다 훨씬 높다. 특히 수출에서는 광물 자원 비중이 90%가량으로 절대적이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몽골 정부는 2006년 기존의 광물법을 개정하면서 광산을 전략 광산, 일반 광산, 기타 광산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생산 규모가 GDP의 5%를 넘고, 국가 안보 및 경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15개 광산을 전략 광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전략 광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채굴권의 승인, 투자 보장 계약 심의, 정부 지분율 결정 등에는 국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광산 개발 방식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 광산에 반드시 지분을 보유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몽골의 전략 광산에는 구리, 금, 석탄을 비롯하여 철, 우라늄, 몰리브덴, 인, 아연 등 주요 광물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오유 톨고이 지역은 우문 고비 아이막 항복드 솜(Hangbokd Som)에 위치한 80,000ha 면적의 세계 3대 구리 광산 중 하나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구리, 금 등이 주로 생산되고 있으며, 캐나다계 이반호에 미네스(IVANHOE MINES)사에 의해 탐사 되어, 광업 메이저 회사인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울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가 66%, 몽골 정부 34%의 지분을 소유하는 형태로 2009년에 투자 계약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우르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회사는 다국적 광업기업인 리오 틴토(RIO TINTO)가 50.8% 소유함으로 리오 틴토(RIO TINTO)가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확정, 추정 및 예상 매장량을 모두 합산하여 31.1억 톤의 매장량이 보고되고 있으며, 품위는 Cu 0.98%, Au 0.299g/t으로 나타난다. 노천 광산과 지하 광구로 구분되고 있으며, 현재 노천 광산 채굴만 이루어지고 있다. 지하 광구 리프트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25년부터 지하 광구 본격 생산에 들어가면 연간 순 구리 55만 톤, 금 45만 톤으로 세계 3위 구리 광산이다. 따라서 2020년을 기준으로 한 해 동광석 100만 톤을 채굴하여, 69만 톤 동정광을 수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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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8
  • 전왕국(滇王國)과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 북방과의 또 다른 연결고리
    이들 나라 중 전왕국(滇王國)은 고고학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 역시 촉국(蜀國) 만큼이나 독자적인 문화를 나타내 중국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 역시 삼성퇴 문명과 마찬가지로 황하 문명보다는 앞서 있으며 그 동안 서남이 지역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그 문명이 15세기 이후에 발달했다고 추정했던 중국학계는 그들의 연구목록을 대폭 수정 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중심인 곤명(昆明)일대가 전국(戰國)시대 당시 전국(滇國)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경내에 전지(滇池)가 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라는 호상(湖上) 주거 생활을 했는데 무선호(抚仙湖) 일대에서 그러한 유적과 유물이 약간 발견된 것 같다. 또한 묘지와 해당 무덤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발굴이 있었다. 이러한 발굴지의 위치는 호반에서 떨어진 언덕에 자리 잡았었다고 운남성 고고학연구소에서 주장하고 있다. 전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는 사마천이 말하는 것과 같이 야랑과 함께 “왕인(王印)”이 주어진 서남이의 두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한 무제가 하사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명문이 새겨진 도장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 명문의 도장은 학술적으로 한나라와 서남이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연구 가치가 크다. B.C 109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사천(四川) · 운남 방면을 정벌했을 때 한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에 전왕(滇王)에게 왕인(王印)을 주었다. 그러나 서기 전 80년대 서남이의 반란이 일어나 멸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인 전족의 유적인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은 중국 운남성(雲南省) 진녕현(晋寧縣) 석채산에 있는 무덤군으로 전한 초~후한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동물의장이 우수하면서 환조(丸彫) 내지 선각(線刻) 무늬 모양으로 사회생활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 많다. 그 중에는 이 지역의 지배자인 전족에게 조공하고 사역된 피지배민족으로 식별되는 것도 있으며, 기년제사(祈年祭祀) · 공희(共犧) · 농업 · 가내작업 등이 세부적으로 표현된 것도 있어 이 지역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55∼1960년 4회에 걸쳐 운남성 박물관이 50기(基)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석기 · 토기 · 동고(銅鼓) · 편종(編鍾) · 동기 · 철기 · 거울 · 금은기 · 칠기 · 도기 · 화폐 등이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한쪽 날의 돌도끼 · 유견(有肩)돌도끼 · 간돌화살 · 돌송곳 등이 있고, 토기로는 접시 · 항아리 · 바리 · 완(硯) 등이 있다. 무덤은 지방적 색채가 짙은 청동제 무기 · 장신구를 풍부하게 부장한 것이 많으며, 중국 문화의 중심지에서 수입된 유물도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6호분에서 출토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인문(印文)이 있는 금인(金印)은 서기 전 109년 한(漢)나라 무제가 전족(滇族)의 왕에게 사여(賜與)한 것으로 보이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물론 이 도장은 정복자인 한나라에게서 하사받게 된 것으로 이 시기는 전왕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무덤이나 유물이 점점 한나라 양식을 따라가게 되던 때이다. 하지만 한나라에 복속되기 이전의 유물들은 중원의 유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국인들은 대체로 전문적인 야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귀족들의 무덤들은 인상적인 청동 예술작품들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뜻밖에 부분에 있어 이들 지역에 스키타이 인의 영향을 받았는지 북방계 문화도 나타나고 있다. 유물이 출토되는 무덤유지에는 석채산(石寨山), 이가산(李家山), 양포두(羊甫頭) 등이 있는데 이곳 유지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전혀 한족과 관계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북방 유목적 영향 뿐 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영향까지 받았기 때문에 북방과 남방이 교차하면서 혼합되는 양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부분 때문에 서남이는 완벽한 남방계가 아닌 북방과 남방 혼용의 문화로 주장할 수 있다. 5호 16국 이전에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리와 사천 지역의 중간 지역을 두고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은 다소 황당한 명을 장군 장교(莊蹻)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검중(黔中) 이서(以西)의 지역을 경략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지리적으로 전혀 모르는 곳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소위 한족이 표현했던 미개한 서남이(西南夷) 지역이 역사 기록에 출현하게 되었던 첫 번째 사례였다. 초나라 장수 장교는 협로를 뚫고 들어가 서남이를 정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초나라의 경양왕(頃襄王) 22년 (B.C 277년)에 진(秦)나라가 초나라의 검중군(黔中郡)을 차지하여 길이 끊기게 되면서 돌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현지의 왕이 되었다. 위왕 시기와 경양왕 22년 전후 50년의 간격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장교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그 후손이 왕이 되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관련된 사료『사기(史記)』「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중에서 큰 나라로 기록된 것이 야랑(夜郞), 전(滇), 공도(邛都), 사(徙), 작도(筰都), 애방(厓駹), 백마(白馬) 등이다. 남월(南越)의 경우 조타(趙佗) 시대에 재물을 동원해 동서 만 여리에 이르는 지역을 역속(役屬)시켰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데 야랑 역시 그렇게 역속 되었던 나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한 무제가 월(越)을 평정하고 9군을 설치할 때는 역으로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파촉(巴蜀)의 죄수병과 야랑(夜郞)의 군사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이 때의 여파로 서남이 지역에도 공도(邛都)를 월휴군(越巂郡),작도(筰都)를 침리군(沈犁郡),애방(厓駹)을 문산군(汶山郡),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설치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주로 한 무제(漢武帝)는 서남이로 가는 길을 뚫을 때 파촉 지방의 재력을 이용하다 그 지역의 민생이 피폐해 지자, 흉노를 방비하는데 전력하고자 야랑(夜郞)의 2개 현(縣)과 1개의 도위(都尉)를 제하고는 그 지역에서 물러난 실패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서남이인들은 그 후로는 스스로 나라를 이루어 당대(唐代)에는 남조(南詔), 송대(宋代)에는 대리(大理) 등을 세웠고 현재도 그 후예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서남이의 여러 종족들은 일찍부터 중원 왕조에 종속되었다. 한 무제 건원(建元) 6년(B.C 135년)에 한왕실에서는 야랑에 건위군(犍爲郡)을 설치하여 행정을 관할하였으며, 그 후에 계속하여 공(邛) · 작(笮) 등에도 하나의 도위(都尉)와 10여개의 현(縣)을 설치하여 촉군(蜀郡)에 예속시켰다. 한대 원정(元鼎) 6년(B.C 111년)에는 지금의 운남성 동부와 귀주성 서부 지역에 장가군(장가郡, 장=조각장+羊, 가=조각장+可)을 설치하고 야랑후(夜郞侯)를 야랑왕(夜郞王)에 봉하였다. 서남이의 다른 부락들도 이것을 보고 모두 귀순을 청하였다. 한 무제는 마침내 공도(邛都)를 월수군(越수郡)으로, 작도(笮都)를 침려군(沈黎郡)으로, 염방을 급산군(汲山郡)으로,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고쳤다. 서남이는 부족 간에 균형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격차가 심하였다. 그 중에서 야랑 · 전 · 공 등의 부족이 비교적 발달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머리를 감아올리고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촌락을 형성하여 모여 살았다. 수 · 곤명 등은 모두 변발을 땋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도 · 작도 · 염방 등은 농업을 경영하면서 유목생활도 하였다. 서남이는 상업에도 활발하게 움직여 인접한 촉(蜀)나라와 무역을 하였는데, 그들의 주요 생산품인 작마(笮馬) · 야크털 · 금 · 은 · 동 · 상아 등을 가지고 그들에게 필요한 비단 · 철 · 소금 · 대 · 레몬잼 및 일용품과 교환했다. 원봉(元封) 2년(B.C 109년)에 한 왕조는 군대를 동원하여 전족(滇族)을 토벌하였다. 이에 전왕(滇王)이 항복하자 전(滇)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전왕에게 옥새를 하사하여 그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전족에 관한 업무를 계속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야랑왕 흥(興)과 구정(鉤町)의 전우(田禹), 누와후(漏臥侯) 유(兪)가 여러 해 동안 교전을 벌이자 한나라 황실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주선하였으나 그들은 거기에 대응하지 않았다. 한 성제(成帝) 하평(河平) 2년 (B.C 27년) 장가태수 진립(陳立)이 야랑왕 흥을 죽임으로써 야랑국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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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8
  • 미국의 농산물, 혹은 농지(농장)의 현황과 콩(대두), 중국 수출 문제
    미국은 세계 주요 콩 생산국 중 하나로, 2020년대, 1년 평균 기준으로 약 43억 부셸의 콩을 생산했다. 콩은 식품, 연료 및 급여로 사용되며 미국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콩은 항상 주요 미국 농작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소수의 농민들이 실험적으로 콩을 재배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콩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콩 수출국이다. 미국의 농업 유형을 분석해보면 기본적으로 상업농이라 볼 수 있다. 상업농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모든 수준에서 고도화된 기계화로 나타난다. 엄청난 크기의 트랙터와 같은 장비는 단순해 보이나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작업에 따라 트랙터에는 GPS 통합, 드론 제어 터미널, 실시간 위성 이미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도 미국에 방문했을 때, 캘리포니아에서 엄청난 넓이의 옥수수밭을 본적 있다. 그 때 옥수수밭이 너무 넓어 엄청난 크기의 트렉터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트렉터 크기가 왠만한 2층 버스 높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미국의 농업은 현재 상업농의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나지만 미국 초기 역사에서는 자급자족의 농업이 흔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만이 이를 자급화를 실천했다. 자급농 위주였던 아메리카 대륙에 영국인들이 진출했고 영국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농업 방식을 도입했다. 이 때부터 산업혁명 등의 영향으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농업 수익성은 높아졌고, 모든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농장에서 일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현재도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기타 그룹들은 오래된 농업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유럽의 기독교 운동에서 유래한 미국의 종교 및 문화 집단인 아미쉬(Amish) 중 일부 그룹들은 현대 농업 장비를 거부하고 농장에서 동물과 수작업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아미쉬 같은 자급농과 소규모 농장이 존재하고 있으나 평균 농장 규모는 441에이커로 178.5ha이며, 평으로 환산하면 약 539,861평이다. 농장 규모가 대형으로 커짐에 따라 갈수록 농업기계와 장비는 농업 운영의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농업 기계화에 의해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과 비례하여 농기계의 활용과 투자 비율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기계화에 의해 생산성이 높아진다 할지라도 소규모 농장에서 볼 때 생산성으로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이는 비용이 증가되기 때문에 농업 혁신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미국 농무부가 발표한 2024년을 기준으로 약 200만 개가 넘는 농장이 있는데, 가족 농장이 전체의 97.3%, 면적으로는 92.7%, 판매액으로는 89.6%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수치로만 환산하면 미국에서는 가족 농장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농업은 가족 농장이 중심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6%이며, 판매 금액에서 소규모 가족 농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19%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국의 농업은 대규모 가족 농장과 중소 규모의 가족 농장들이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규모 가족 농장은 3.4%, 농지면적은 24.8%에 불과하지만 판매 금액에서 차지하는 비율로는 51.8%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500만 달러 이상의 판매액을 가진 8,134개 농장이 전 판매 금액의 22.8%를 차지하고 있다. 비가족 농장은 나머지 2.7%로 판매 금액은 10.4%에 불과하다. 특히 해외 수출되는 작물 중에 옥수수와 콩은 가족 농장에서 소출된 것으로 내보내 지는데 콩(대두)의 경우, 2018년에 나타난 미, 중간의 무역 분쟁으로 볼 때 미국의 중국을 대한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콩(대두) 수출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중국은 주로 브라질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콩의 국내 수요를 늘리고 다양한 용도로 콩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콩 기름은 바이오 연료 및 재생 디젤 연료 산업에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콩(대두) 재배 지역과 전통적인 무역 경로가 변할 수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이와 같은 미래의 도전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대두를 사들이지 않고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부터 수입을 늘려 가기 시작하자 트럼프가 중국에 미국산 ‘대두(Soybean)’ 수입 재개를 요구하겠다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와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콩은 그리 간단한 농산물이 아니다. 이는 대두 농가가 공화당의 지지 기반에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의 수입 중단 문제는 자칫 내년 11월 3일에 있을 미국 중간선거의 결과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대두는 14억 중국인들에게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지난 해까지만 해도 매년 미국산 대두의 25% 이상을 구매하는 최대 수입국이었다.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수입한 규모는 지난 해에만 126억 달러(약 17조 8,000억 원)에 달했다. 중국은 그 이전까지 매년 10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북반구의 미국산 가을 대두를 수입한 이후, 3월부터 남반구의 남미 국가에서도 대두를 사들였다. 대개 미국산 대두 구매 예약은 10월이 되기 몇 개월 전에 이미 마무리되어 미국은 각 가족 농장에서 최대한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미국 대두가 대풍작인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무역에서 희토류 수출 제한 이상으로 대두 수입은 미국을 충분히 압박할 수 있는 카드로 쓸 수 있다. 중국은 이미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의 미국 사업권을 이양시켰고,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는 등, 미국에 여러 양보 안을 제시했다. 따라서 시진핑은 대두 수입을 가지고 미국에 다른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셈이다. 중국은 트럼프의 이른바 ‘관세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올해부터 BRICS 국가들 소속의 브라질 등 남미에서 생산한 대두 수입량을 대폭 늘렸다. 지난 8월 브라질산 대두 수입은 지난해 같은 8월 때보다 2.4% 늘어난 1,049만 톤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대두 수입 물량의 85.4%에 달하는 수치였다. 중국의 8월 미국산 대두 수입은 2024년의 같은 시기보다 12.3%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브라질이 대두를 수확하는 시기가 지연되는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 정도다. 중국은 새로 수확되는 미국산 대두에 대해서는 구매 예약을 하지 않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산을 계속 수입하고 있다. 미국 농가가 대두 수확기에 들어간 지 2주 이상 지난 9월 11일까지도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단 1건도 예약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당국이 미국산 대두 주문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난 상반기 때 미국의 중국 대두 수출 누적량도 작년인 2024년 같은 기간보다 51% 감소했다. 중국으로의 수출이 사실상 막히면서 미국의 2025년 대두 수출은 23% 이상 급감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두 가격은 폭락했고, 재고가 증가함으로써 옥수수 등 다른 작물들을 저장할 공간마저 부족해진 상태다. 블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미국 농무부 자료를 인용해 중국이 이 시기까지 미국의 대두 구매를 예약하지 않은 것은 1999년 이후로 처음이라고 했다. 중국은 아르헨티나에서도 35건 이상의 대두 화물 선적을 예약했다. 11월에 선적될 예정인 계약분만 227만 톤 이상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이전까지 중국의 남미산 대두 수입량 최대치가 2015년 7월 223만 톤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번에 사상 최대의 계약을 맺은 셈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생각지도 못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분노한 트럼프는 브라질에 대한 관세를 올리고 아르헨티나에 관세를 100% 이상 올린다고 협박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중국에 대두 팔지말라고 협박하는 카드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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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7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초창기 유년 시절 : 이반 4세의 차르 권력 강화 과정
    이반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Василия III)의 장남으로 탄생했다. 그의 모친은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였는데, 그녀는 바실리 3세의 후비로 들어온 왕녀였고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반 4세의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남슬라브 세르비아인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루스의 귀족 가문인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집안의 장녀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반 4세는 아버지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1530년 8월 태어났는데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가 종래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키예프 대공 집안인 사부로브스키(Сабуровский)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옛 키예프 세력들과 정치적 연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물론 바실리 3세에게는 서자가 몇 명 있었지만 이반은 바실리 3세의 첫 적장자였기 때문에 후일 공후 승계 문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공후들의 반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직책들을 가지고 있던 각 보야르(Боярин)들 사이에 반발이 대단했는데, 이들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대공국의 기능을 상실한 키예프와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키예프의 솔로모니야(Соломония)와 연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던 데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정교회의 비잔틴 십자가와 성모상이 키예프에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경우,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가문이 정교회를 숭상하는 집안이 아닌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러시아정교회의 반대를 억지로 무마하고 재혼한 이유는 아직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옛 대공국을 구성하는 공후들과 보야르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이들에게서 벗어나 강력한 전제정권을 구사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실리 3세의 움직임과 달리 어린 이반 4세는 출생 전부터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불길한 아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고 각 보야르들의 음해성 공격 및 암살 위협도 받았다. 그러한 배경들이 이반 4세의 정신적인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과 옛 키예프 공후들, 각 지방 및 모스크바 대공국 내부의 보야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끊임없이 어린 이반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어 1533년 이반 4세가 3살 되던 해에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발전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이반을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은 모친인 엘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엘레나도 정통 러시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허약했다. 그러한 잦은 정치적인 암투로 인하여 오히려 어린 이반이 유년기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을 학습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실리 3세는 사망하기 전에 어린 두 아들 이반과 유리(Юрий)의 장래를 걱정하며,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그녀의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 공후에게 그들을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 대한 위협 등을 염려하여 왕족 및 보야르 등을 모두 불러 어린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반에게는 형제인 남동생 유리(Юрий)와 여동생 한 명이 있었고 그 밖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서출 형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는 왕권에 전혀 관심 없는 자였다. 그리고 남동생 유리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어 모든 권력적 상황이 이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친의 유언에 의해 이반 4세는 바실리 3세 사망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3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와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모친인 엘레나는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 공후에게 처음에는 많이 의존했다가 이반 옵치나 오볼렌스키(Иван Овчина Оболенский) 공후와의 치정 관계로 인하여 미하일 글린스키와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Андрей Старицкий) 등 일부 보야르들은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를 포섭하여 그를 대공 직위에 올리려 했다가 이 역시 사전에 엘레나와 옵치나 공후에게 발각되었고 미하일 글린스키는 역모 죄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글렌스키야 가문 외에도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 벨스키(Бельский) 가문 등 유력 보야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나는 자신의 친정 측에 원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삼촌 미하일 글렌스키야를 제거하면서 친정과의 연대는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고변을 사건을 일으킨 엘레나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했으며 많은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는 등의 폭정을 펼쳤다. 특히 이반의 삼촌인 유리 이바노비치(Юрий Иванович)는 충성 맹약을 번복했기 때문에 엘레나의 노여움을 사고 투옥되었으며 1536년 처형되었다. 또 다른 삼촌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역시 이반의 대공 지위를 노렸다. 그러자 이는 엘레나에게 발각되어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투옥시키려 했다. 그러자 삼촌 안드레이는 도망치려다가 국경에서 잡혀 1537년 투옥되고, 그 해 11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바실리 3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리투아니아 공국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략해왔다. 루스의 공후들이 리투아니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어린 이반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는 엘레나는 같은 카톨릭 측이라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와 1538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보야르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그녀의 계속되는 실정(失政) 및 폭정과 카톨릭 및 폴란드 이주민들에게 대한 우대, 그리고 리투아니아와의 독단적인 평화 조약 체결 및 옵치나 공후에 대해 과도한 이권을 몰아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그녀의 차에 독을 타 독살했다. 모친인 엘레나가 보야르들과 키예프의 13공후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이반 4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지만, 어리지만 영민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던 그는 이러한 보야르들의 음모로 인해 모친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옵치니 공후가 섭정을 하였으나, 슈이스키 가문의 영수 바실리 슈이스키(Василий Шуйские)는 옵치나 오볼렌스키를 투옥시켰다가 석방시켰고 자객들을 보내어 자는 도중 그의 집에서 살해했다.이 때 경쟁자 가문인 벨스키 가문의 이반 벨스키(Иван Бельский)를 옵치나와의 공모 혐의를 적용하여 숙청했으며 그를 투옥시킨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몇 년 후 이반 벨스키를 석방시켰으나, 세력의 재규합을 우려해 그를 다시 투옥시킨 뒤 살해했다. 이와 같이 옵치니 공후를 축출하고 권력을 확보한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은 각기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블 지역을 영지로 하고 있었던 대 공후들이었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다른 공후들의 협조도 가능했던 막강한 대외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이오아사프(Иоacaв)가 추방된 관계로 인하여 비어있던 총대주교 지위는 막심 그렉(Максим Грек)에게 돌아갔고 막심 그렉은 1538년부터 1547년까지 섭정을 하여 바실리 슈이스키와 공동 통치를 했다. 한편은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이반이 10세 때 그의 유일한 여동생인 엘리자베타가 갑자기 사망했다. 엘리자베타의 경우에는 슈이스키가 독살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유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반은 대공 지위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대적인 보야르들의 늘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대공으로써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며 근처 보야르들의 심한 감시도 함께 받았다. 이 때부터 이반 4세는 두 살 어린 동생 유리와 함께 귀족의 권력 암투 속에서 그들의 양면성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이반 4세의 앞에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한 편지에 의하면 자신이 8세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 당했고 그들이 대공 지위의 이반에게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불운한 소년이 머지않아 폐위되거나 암살될 거라고 여겼지만 러시아 내부의 묘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하여 이반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물론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 공후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의 어린 공후 형제들을 심문한 뒤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왕실 행사가 있는 날로, 이 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한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아직 대공이 건재하고 있다는 대외적인 홍보와 더불어 대공에게 최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 내에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 등을 여과 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매우 포악하게 변모했다.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으며 정무는 각 두마와 보야르들이 관장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권한은 전무했다. 한편 슈이스키 가문 등의 유력 보야르들이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파벌 경쟁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적으로 차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권위를 무시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 두고 강제로 신게 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 이반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높은 성 옥상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키예프 13공후에 속하지 않은 지방 귀족인 드보랸(Дворян)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었지만 이반은 자신의 세력으로 몰래 드보랸(Дворян)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보야르 및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과 친해지면서 자신의 세력을 몰래 강화했으며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이러한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해 두마 회의 당시 크레믈린 궁 주변에 매복시켰다. 크리스마스에 이반은 회의 자리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그를 무시하며 조롱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들 순간적인 명령이라 당황했었지만 이반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죽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대다수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명으로 매복한 보야르와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로 하여금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해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넘겼고 맹견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했다. 이어 두마 회의가 끝나자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 귀족들을 잡아들여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후로 이반에 대해 보야르, 제후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방자하게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령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이 강력하게 성장했음을 파악하고 그에게 친정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친정에 대한 기본적인 통치 관념이 없어서 이를 두려워한 이반은 일단 보론초프(Волончёв)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지만 1546년 이반은 보론초프 가문도 숙청하고 말았다. 지방 귀족인 드보랸들과 지식인, 상인 계층에서는 이반의 아버지 바실리 3세 시기부터 내심 보야르 및 두마 의원, 중앙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오랫동안 원했고, 상인들은 각 지역마다 다른 상법들을 정비하여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의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오랫동안 호의를 보여 왔고 이반 4세 그리고 그가 친정하자마자 그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1545년 이반 4세는 블라디미르에 군사를 내어 실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의 세력들을 제거하도록 명을 내렸고 이들 드보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항쟁했으나 이반의 군사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했다. 블라디미르의 세력들을 제거한 이후, 이반은 1546년 12월 내년에 혼인할 것이고 차르로서,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를 선택,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서적을 통해 대관 의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는 1547년, 교회를 통해 대관식을 치르고 ‘전 러시아의 차르’로 등극했다. 이러한 부분이 실현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린 왕의 통치기에 보야르들의 숫자와 권력이 크게 늘어났기에, 그들끼리 파벌과 다툼이 생겼으므로 보야르가 단결해서 왕권을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귀족 내지 지방 귀족을 의미하는 드보랸들은 보야르의 횡포를 억제해줄 강력한 왕권을 기대했고, 상인들은 러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동일한 상법의 적용을 받는 상권이 탄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반 4세의 차르 즉위를 지지했다. 그리고 17세이던 1547년 6월 말에 벨스키 가문을 정벌하기 위하여 야로슬라블로 군사를 보내 벨스키 가문을 공격해 멸족시켰고 야로슬라블의 대부분 구역을 파괴했다. 1548년 1월부터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서 이반 4세의 내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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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7
  • 트럼프 대통령, 가자 전쟁 종식 선언, 과연 중동의 평화가 오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벌인 가자 전쟁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집트의 홍해 휴양지인 샤름엘셰이크에서 트럼프는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세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함께 가자 전쟁 휴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이 구상했던 평화안에 자축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휴전중재국 전상들 외에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캐나다, 헝가리 등의 정상들과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과 요르단, 바레인, 파키스탄 등의 정상들을 포함해서 34명이 참여함으로써 ‘가자 평화 선언’을 지지했고, 트럼프에게 거대한 병풍을 쳐주었다. 그런데 이번 ‘가자 평화 정상 회의’에 정작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불참했으며, 이란도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단조차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중동의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중동의 평화가 왔다고 하면서 모든 성과를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면서 승리를 자축했으며, 유럽과 아랍의 정상들은 트럼프의 들러리를 서면서 아양을 떨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 정상 회의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당연히 존재감을 돋보이는 국가는 튀르키예다. 에르도안은 네타냐후 총리가 참석한다면, 이번 정상 회의에 불참을 예고하면서 트럼프가 자신과 사전에 조율하지 않은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트럼프는 엘시시와 별도로 회담하면서 네타냐후가 이번 정상 회의에 참석하기를 희망했다. 에르도안은 네타냐후를 히틀러라고 거칠게 불렀고, 이스라엘과 무역 중단도 단행했기 때문에, 네타냐후와 만남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에르도안은 전용기에 머물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결국 네타냐후는 불과 1시간 만에 회의 참석을 철회했다. 사실 이번 평화안을 하마스가 수용한 것도 에르도안의 설득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하마스는 처음부터 이전 정상 회의에 불참을 선언했고, 튀르키예와 카타르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이번 평화안은 문서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총 20개의 항목을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것인데, 1단계는 대체로 군사작전 중지, 이스라엘 군의 부분 철수, 인질-수감자 석방, 가자 지구에 인도적 물품 반입 등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수감자 1,900여 명을, 하마스는 생존 이스라엘 인질 20명을 서로 석방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마스는 생존 인질들을 전부 석방했지만, 사망한 인질들의 유해 28구 중 9구만 송환되어 난항을 겪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은 인도적 물품 반입을 부분적으로 통제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총론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합의했지만, 각론에서는 아직 1단계에서 벌써 삐꺽거림이 나타나는 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양측 서로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하마스가 그렇게 한 까닭은 나머지 유해들이 자신들이 살해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인질들임을 드러내고, 유해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신들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들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리저리 지하로 피해 다니고 있는데, 나머지 유해들이 어디에 있는지, 더 나아가 이미 공습으로 나머지 유해들이 사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뒤섞여 있는데 어떻게 그 유해들이 이스라엘 인질들의 유해들인지 알 수 없다는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이 인도적 물품 반입을 부분적으로 통제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하마스가 인도적으로 반입되는 물품들이 가자 주민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마스가 이를 빼돌리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를 하마스가 합의사항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하마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 위협했으며, 더 나아가 물품 반입도 지연하거나 줄일 것이라고 유엔에 통보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미국은 한 발을 빼면서 시신 인도 문제는 합의사항이 아니라고 했는데, 미국은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콧물을 떨어뜨리기가 싫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나친 억지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모한 포격으로 희생된 팔레스타인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데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에게 히든 카드를 들고서 다음 2단계에서 서로 주도권을 행사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이번 평화협정은 1단계가 완전히 끝나면 2단계로 들어가고 마지막 3단계로 이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2단계는 하마스의 무장 해제, 이스라엘의 단계적 철수, 가지 지구 전후 통치 방식 등이고, 3단계는 영구 휴전, 가자 지구 재건, 국제 평화 위원회 구성 등이다. 그런데 이 단계별 평화안을 보면 1단계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서로의 신뢰를 보여주지 못한데, 어떻게 2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지에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1단계에서 이행되지 못한 사항들이 2단계에서 추가로 논의하게 되면 이것이 2단계의 다른 사항들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평화안은 2단계가 핵심이라고 보이는데, 벌써 세부 사항별로 1단계보다 더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하마스는 이미 약 7,000명 정도를 가자 지구로 소집해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전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다. 하마스가 이렇게 한 까닭은 일부 보도에 따르면 가자 전쟁 중 친이스라엘 민병대 조직원들을 색출함으로써, 설령 가자 지구 통치권을 이양하더라도 팔레스타인 과도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훗날을 대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랍 중재국들도 훈련된 팔레스타인 출신들을 경찰로 만들어서 1,000명 정도를 가자 지구에 투입하고 이후 최대 10,000명 정도까지 확대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어쩌면 가자 지구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그 나름의 노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2단계 협상의 큰 걸림돌은 하마스의 무장 해제라고 하겠는데, 미국에서는 하마스가 무장 해제를 하지 않을 시에 폭력적으로라도 해제시킬 것이라고 엄포놓으면서 하마스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하마스는 내부적으로 합의가 서로 안 되니 시간을 끌면서 재기를 노릴 것이다. 더 나아가 하마스는 최소한의 아무런 무장도 없이 자위권을 보장하지 못하면 언제든 중동의 평화가 깨질 수 있다고 경고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이 문제에 관해 하마스가 만들어 놓은 지하 터널의 완전한 파괴 및 외부로부터 무기들의 반입 금지 등을 주장할 것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군의 철수도 이를 지렛대로 삼아 협상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냉정히 말하면 협상 중재국들이 나설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직접 협상할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양측의 직접 협상하기에 상호 신뢰가 없다는 점이다. 설령 협상이 되더라도 준수 여부도 불투명하고 돌발 사태에 대해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의회 연설 중 두 명의 의원이 항의하기도 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아랍계로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라는 글씨로, 다른 한 명은 좌파로 집단 학살이라는 글씨로 항의했다. 트럼프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분명히 거부했으며,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가자 전쟁에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이 두 의원의 항의는 매우 당연하다. 트럼프의 관심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면서 노벨 평화상을 노리고, 가자 전쟁 이후 재건 사업에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갖고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아랍국가들도 한몫 챙기겠다는 생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해 왔던 책임을 다소나마 무마하려고만 할 뿐이다. 전쟁 당사국이 빠진 채로 ‘트럼프의 쇼’가 진정한 평화로 이어질지는 안갯속이다. 전쟁 당사국이 빠진 채로 2단계 협상에 돌입한 것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자 전쟁 종식에만 집중하는 듯하다. 가자에 이후에도 전쟁 대신 평화가 오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 수준에서 하나의 해법이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를 반대하겠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증오와 분노만으로 피로 얼룩진 분쟁의 씨앗은 단연코 사라질 리가 없다. 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히 지속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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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는 국가적 안전을 보증하였다. 이반 뇌제는 코사크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보내 시베리아를 경략하도록 했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코사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치이들은 용병처럼 활약하였으며, 캄차트카, 베링해, 태평양까지 러시아의 국경을 확대하였다. 러시아가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은 코사크 인들 덕택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식민지가 창출되면서, 러시아의 중앙부 농민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국가와 지주의 권위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과감히 이주하거나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베리아의 군대 총독들은 이주하거나 탈출한 농민들을 수비대로 재편성하거나 농업 활동에 종사시켰다. 소련 학자들은 이들이 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고 현재도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왜 아시아로 팽창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농노화가 진행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변방 지대 진출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도 농민들에게 토양을 제공하고, 농촌 경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새로운 땅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뇌제가 시베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베리아산 풍부한 모피는 내외적으로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손상을 오랜 시기동안 받았다고 간주한 러시아는 동방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몽골의 후계 칸국 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16세기에도 변방 유목민족들의 공격으로 러시아는 국경지대에서 방어적인 공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방어적 작전에서 이민족을 향한 공격적 자세로 전면적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시베리아를 경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민족은 총 18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중 105개의 종족이 시베리아에 산다. 워낙 많은 민족들이 있는 관계로 러시아 내 민족학 연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지만 가장 전수조사가 어렵기도 한다. 오히려 민족학 연구자들은 연구할게 워낙 많다는 학문적 산실이 시베리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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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중국 수, 당, 송나라 시대의 강남 개발과 강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 제도들의 도입 및 개편
    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나라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 북중국에서의 상쟁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세력 경쟁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북주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로 인해 다시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변동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북주 내부에서 정권의 교체가 발생하게 된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한족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했다. 이어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 정비에 따라 수나라의 국력은 급속히 강해졌으며, 이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588년에 수 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진(陳)나라를 정복하였다. 수나라에 의한 진(陳)나라의 병합은 당시의 국제질서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세력이 통일되어 그 강력한 힘이 외부로 향할 경우,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88년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수나라 건국 초기에 한 때 수나라와 충돌하던 토욕혼(吐谷渾)은 진(陳)나라의 멸망 소식을 접하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송나라 시기까지 변혁론(変革論)이라는 인식론이 나타난다. 이 변혁론은 중국사에서 755년 안사의 난으로부터 11세기 말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에 이르는 시기까지 단순한 왕조의 교체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역사 인식론이다. 이는 고대에서 중세, 이어 근대까지 이행하는 세계사적 보편 발전 과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변혁론은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혹은 당나라 말기 5대 10국까지를 고대 혹은 중세로 볼 것인가, 혹은 송나라 시대 이후를 중세 혹은 근세로 볼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다. 그 쟁점은 송나라 시대 토지 소유 형태, 전호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와 법적 신분 등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해서는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가 발달하면서 지주 및 전호 관계가 지배적이었음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대토지 소유가 서구 중세의 장원제에 비견되는 일원적 경영이었는지, 혹은 명칭만 장원(莊園)이었을 뿐 실제로는 소규모 영세 토지를 집적한 소농 경영에 불과했는가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송나라 이후 봉건론(封建論), 혹은 중세론(中世論)은 일본의 카토 시게루(加藤繁), 슈토 요시유키(周藤吉之),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등이 주장하였고, 주로 도쿄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도쿄학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당나라 이후 균전제(均田制)가 붕괴되고 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기반으로 장원제가 발달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송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시기의 중국 사회를 봉건 후기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슈토 요시유키는 송나라 시대에 대토지 소유가 발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생산자로서 전호는 토지에 매여 있으면서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강하게 예속된 존재로 간주하였다. 곧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경제적 관계이면서도 경제외적 강제가 포함된 봉건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론(近世論)은 1918년경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주창한 이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에 의해 확고하게 나타났다. 교토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교토학파’들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이후 서양의 중국 사가들이 여기에 가세하였고 한국학계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편이다. 이 사론(史論)은 송나라 시대 군주 독재권이 확립되고 관료의 지위가 고양되었으며 인민들의 사유 재산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크게 진작되는 등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의 전환기에 사회 및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역사적 변화를 근세(近世, The Early Modern Period)로 설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근세론은 전호제(佃戶制)를 근간으로 한 대토지 소유제를 인정하며 이 때 지주와 전호는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는 명목상 장원이지만 실제로는 근세적 자본주의적 경영이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에 더하여 지주와 전호는 봉건적 주종 및 예속 관계가 아닌 순수한 경제적 관계이자, 자유농민과 지주 사이의 자유 계약 관계, 일종의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라고 적극 평가하고 있다. 전호의 거주 이전 제한은 그의 도주나 계약 위반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근세론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까지 토지 소유는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고 자손을 위한 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송나라 이후 토지는 일종의 투자 대상이었으며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거의 순수한 경제적 관계였다. 이는 전제 군주의 독재체제 아래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소유와 촌락 사회 위에서 송나라 시대 근세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만을 근세로 간주하는 논자도 있는 것과 같이, 송나라 이후 중국사 전체를 단일한 근세 사회로 확언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지주와 전호가 순수 경제적 계약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호가 법률상 양민으로서 독립된 경영 주체였지만 지주로부터 이탈이 금지되는 등 신분적으로 지주에 예속되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일한 대토지 소유, 혹은 지주와 전호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강남과 변경 지역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의 자본주의 관점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개념과 같지 않다. 근세 자본주의는 전기(前期)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에 기반을 두었던 유통 경제를 상정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근세 성립기 중국 사회의 선진 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정체성과 표리 관계에 있다. 그는 스승 나이토가 중국 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긍정하는 한계를 보인 것과 맥락을 같이 했다. 고대에서 중세로든, 혹은 중세에서 근세로든 간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교체 시대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송나라 시대 이후의 사회는 삼국 시대에서 당나라 시대까지와 크게 다르며 명나라 및 청나라 시대와 동질성이 더 많이 관찰된다. 결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변혁 문제는 황제 및 관료 지배의 전통과 자작농의 끊임없는 재생산, 거듭된 왕조 말기의 반란 등 중국사에서의 장기 지속적 요소들을 구체적 역사 맥락 위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황제 지배의 성격, 개별 인신적 황제 지배 및 귀족제 하의 황제권, 그리고 전제권이 성립된 사대부 사회의 황제나 관료의 성격, 향거리선(鄕擧里選)으로 충원된 관료,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하 문벌 귀족 사회의 관료, 과거제 하의 사대부 관료, 지배층의 성격인 호족, 문벌 귀족, 사대부 및 신사 등을 둘러싸고 일련의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일례로 후주(後周 : 951~960)의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은 960년 거란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출병하였다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의 동북쪽으로 40리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 정변을 통해 송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 강화된 번진(藩鎭) 체제와 5대 10국의 군벌 체제를 증식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송나라 태조는 당나라 말기 번진의 할거 이래 황제의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병권 및 재정권, 혹은 민정권의 회수에 주력하였다. 그는 특히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금군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특히 인종(仁宗) 시기의 80여 만 명, 병권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권화하고 그 통수권은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그 공정성과 개방성을 넓히는 한편, 황제가 과거의 최종 합격자를 직접 선발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채택하여 과거 합격자들과 군주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였다. 과거제를 발판으로 송나라는 군대와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실권자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는 문신 관료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황제는 권신의 집단화를 억제하기 위해 관료들이 재상의 사저(私邸)를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알금제(謁禁制)와 관리의 출신지 부임을 금하는 회피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강력한 첩보망을 동원하여 황제 권력에 반하는 관료나 군사 지휘권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관료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송나라 시대 근세론을 정치적인 배경을 갖춘 군주 독재 체제설의 토대가 되었다. 재상권과 신권을 축소하는 한편 제도적으로 황제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의 최종 결정권을 황제에 집중시키는 송나라 시대의 독재 군주권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독재 권력을 행사한 진(秦)나라의 시황제, 한(漢) 무제(武帝), 수 양제, 당(唐) 태종(太宗) 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송나라 시대 황제 권력은 당나라의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당나라 말기에서 5대 10국에 새로 등장한 형세호(形勢戶)를 기반으로 나타난 사대부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사대부는 과거를 통하여 황제의 인적 기반인 관료로 진출하여 사대부 문신 관료 체제를 구축하였다. 호족과 문벌 귀족은 가문과 출신에 의해 그 신분이 규정되었던 반면, 사대부는 원칙적으로 출신과 무관하며 자신의 능력, 곧 유교 경전 지식과 문필 능력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사대부의 계층 유동성은 송나라 시대 과거 급제자들 가운데 본인의 앞 3대 이내에 관료를 배출하지 못한 비(非) 관료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 시험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대부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사대부가 사실상 중소 지주 이상의 경제력 보유자 혹은 상인 출신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곧 사대부는 국가 권력에 의한 승인과 경제적 부를 존립 기반으로 지식과 교양을 사회적 특권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세력이었다. 지주로서 사대부는 농업 생산을 매개로 지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부(陳尃)의 <농서(農書)>의 사례와 같이 농서의 간행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남에서는 수리 개발에 적극 개입하였다. 수리 개발은 기본적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에 책임을 지었으나 실제 사업 수행에서 부담은 사대부 등 지역 사회 구성원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 아래 북송 당시 여대균(呂大鈞, 1031~1082)이 섬서 지역에서 향약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교화와 상호 부조를 통하여 지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향약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정비되어 이후 명나라 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주희에 의해 정착된 사창(社倉)은 사대부가 주도하는 지역 사회의 자치적 구휼 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사대부의 활동은 그들의 정치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며,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여 사대부가 황제를 대신하여 천하 통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치자(治者) 의식을 강조하였다. 반면, 천하를 향한 근심은 오직 하늘(天)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황제만의 소관이고, 관료는 천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머무는 피동적 존재라는 인식도 공존하였다. 그래서 관료는 황제 권력과 경쟁학기도 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문치주의는 관료 기구의 비대화를 낳았고 행정과 재정의 효율성을 저해하였다. 송나라 태조의 문치주의는 분권적 절도사 체제를 중앙집권적 문신 관료체제로 전환하여 황제 지배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강력한 유목 국가의 출현에 직면하여 송나라 이들에게 줄곧 고전하였다. 거란 요(遼)나라의 7년에 걸친 전쟁 끝에 1004년 송나라는 요나라에 현 북경과 천진, 산서 등의 16개 주(州)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양도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보내기로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 길지 않은 평화가 찾아온 뒤 1126년에는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어 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이후 고종(高宗)에 의해 남송(南宋)이 재건되었지만, 1279년에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 병합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남송의 문인 사대부들은 송나라를 향한 이상적 충절과 현실 타협의 사이에 갈등하면서 원나라의 질서에 편입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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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조선 방문기에 대해
    러시아의 울랴노프스크(Ульяновск)에는 러시아 제국 시절 유명 문학가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이름을 차용한 거리가 있다. 곤차로프는 소설가로 볼가 강 연안의 울랴노프스크에서 상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과 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846년 비사리온 벨린스키(Виссарион Белинский, 1811~1848)과 절친이 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47년에 첫 작품인 <평범한 이야기(Обыкновенная история)>를 발표해서 문단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도예프(Адоев)라는 시적인 한 청년이 수많은 공상과 정열을 품고 있지만, 숙부의 냉담한 설득에 의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결국은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경로를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문단에 러시아 문학 내 이상주의를 환기했다. 그는 예프게니 뿌쨔친(Е. В. Путятин) 제독의 비서로서 세계일주에 올랐고, 1858년에 여행기인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를 발표했다. 당시 곤차로프가 여행한 팔라다 호는 1852년 10월 7일 청나라 5개 항구의 통상권 교섭, 러시아와 일본의 수교라는 임무를 갖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홍콩, 중국, 일본을 차례로 항해하던 팔라다 호는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1853년 8월 9일과 10일 사이 나가사키(長崎)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1차로 방문했다. 이후로 팔라다 호는 일본 정부와의 수교 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5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정하고 11월 11일 출발하였다. 그 후 팔라다호는 상하이 근처 새들 군도(Saddle Islands)를 출발하여 1853년 12월 24일 나카사키에 정박하여 일본을 2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2월 27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5월 22일 시베리아 해안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사이 1854년 4월 2일 안전 문제로 인해 조선의 작은 섬인 거문도에 임시 정박하여 4월 7일까지 머물렀다. 곤차로프는 당시 조선 땅과 조선인들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초가 지붕 뿐이고, 드물게 군데 군데 주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가장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류큐(현 오키나와)인에 비해 체격이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검고 투명해 햇볕을 전혀 차단하지 못하는 이상한 모자(갓)를 쓰고 있다는 점, 담장 쌓는 솜씨가 형편 없는 걸로 보아 게으른 민족일 것이란 추측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그는 조선의 지도 보완 등을 이유로 거문도와 동해안을 방문하고 조사하였는데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조선의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였다. 곤차로프는 조선 주민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헐벗은 산지 등에 실망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외세에 별 거부감이 없는 모습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곤차로프는 이어 자신이 쓴 수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든 것이 벌거벗었고, 궁핍하고 서글프게 보였다. 주민들이 우리에게 식료품을 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겨우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유럽인에 대한 불신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고, 조선 정부가 외국인과의 통상을 금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때인 지금 관계를 맺는 것이 더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유리병과 동으로 만든 단추, 도자기를 보고 달려들었다.” 아마 이는 곤차로프가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고, 안동김씨 세도정권 하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민중을 본듯 싶다. 그가 조선을 관찰한 시기가, 1854년(철종 5년)이니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할 시기였다. 때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 곤차로프가 본 조선인들은 안동김씨 정권에 수탈된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외에도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조선 등의 과거와 현재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특히 곤차로프는 계층 사회로 이루어진 일본의 관료주의, 쇼군과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에 대한 서민들의 공포심 등을 보고 크게 비판하였다. 곤차로프는 개인주의로 팽배한 중국 청나라 또한 뇌물로 부패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중국인이 더 이상 발전을 꿈꾸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또한 비판했다. 곤차로프는 중국이 단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여 개인주의와 불합리성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 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Любопытство вещей)’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갈망(Желание и тоска по переменам)’으로 파악했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유구(琉球), 조선 등의 민족을 하나의 가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곤차로프는 4개 민족 모두가 외모, 성격, 사고방식 등 공통되는 정신적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이 민족들이 갖고 있는 장점보다 ‘황폐하고 비참한 문명사회(Опустошенное и несчастное цивилизованное общество)’라는 시각을 갖고 4개 민족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차로프는 기본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이 인접성의 장점 때문에 유럽과 연결된 동북아시아의 상업적 미래는 매우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일본과 조선이 가깝고, 두 나라는 상하이와 가깝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곤차로프는 삼국이 유럽의 무역과 항해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고 있다. 곤차로프와 뿌챠찐 제독은 1854년 4월 6일 동해안을 탐사 도중에 러시아 함대 팔라다 호 소속 올리부차(Олибуча) 호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을 발견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아침에 발견한 두 개의 높은 바위는 반나절 동안 시야에 있었으며, 이제 명확해졌다. 두 개의 제법 높고 예각의 벌거벗은 바위는 약 300 사젠(642m) 떨어져 있었다. 이들 중 더 높은 서쪽 섬을 ‘올리부차(Олибуча)’라 명명했다. 동쪽 섬을…‘메넬라이(Менелай)’라고 불렀다.” 참고로 올리부차(Олибуча)로 명명된 서쪽 섬은 독도의 서도, 메넬라이(Менелай)로 이름 지어진 동쪽 섬은 동도로 나타나며 아는 서양이 최초로 명명한 독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러시아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팔라다호가 항해를 마친 2년 뒤인 1857년 러시아 해군부가 조선 동해안도를 그릴 때 독도를 포함시켰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 중에 하나인 것이다. 1858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생생히 기록한 여행기라는 점에서 문학가 안똔 쩨홉을 비롯해 여행을 동경했던 당대 러시아인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말미의 조선 불시착기는, 전체 여행 일정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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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캄보디아의 노르돔 시아누크 왕의 일생
    1922년 캄보디아 왕족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아누크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인으로써 당시 왕이 될 적임자는 아니었던 인물이다. 그러한 점이 식민통치를 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최고 적격자로 보였다. 하지만 왕로 즉위하자마자 주변의 예상을 깨고 정략적 외교술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동남아시아 근대사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현대사를 정면으로 돌파한 현실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에 발생한 식민과 독립, 열전과 냉전,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와 내전, 전쟁과 협상, 학살과 화해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정치적 격변에서 때로는 주역으로, 때로는 패배자로, 종국적으로 중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아누크는 이 과정에서 주변 강대국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세력을 상대로 동맹과 투쟁, 연대와 배신을 번갈아가며 결국 협상으로써 약소국인 조국 캄보디아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 노력했다. 1953년 프랑스 보호국이던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는 군사 동맹 불 체결 조약을 선언했다. 1957년 영세중립법을 공포하고 1961년 라오스 국제회의를 제창하는 등 국가의 중립화에 공헌했다. 시아누크는 가난한 나라의 군주였지만, 향락적이고 사치스런 생활도 많이 했다. 뜬금없는 정치 행보와 교묘한 말 바꾸기로 인해 종종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는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렸고, 공식 발표된 아들의 수만도 14명에 이를 정도로 문란한 생활을 했다. 장남인 라나리드 왕자는 첫 부인의 소생이지만, 현 시하모니 왕의 어머니인 모니크(Monik) 왕대비는 공식적으로는 6번째 부인이다. 결혼 당시 이미 여러 명의 부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나서고 있는 미인 대회 입상자를 지금의 왕비로 삼았다. 모니크 상왕비는 프랑스계 이탈리아 사업가와 캄보디아 왕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시아누크는 서방 문화와 동양 왕실 문화에 물든 국제 외교가의 대표적 호사가이기도 했다. 프랑스 와인과 음식 애호가로 시아누크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1967년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Jacqueline Kennedy Onassis)은 시아누크의 주관 하에 연일 이어지는 서양식 연회에 질려 했을 정도다. 독립 이후, 1955년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시아누크는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하여 8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 전 의석을 석권하는 등 첫 총선을 대승으로 장식했고, 국가 주석, 총리, 외교 장관을 겸임하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그의 인생에서 있어서 최대 전성기였다. 시아누크는 1960년대 냉전 상황에서 제3 세계 비동맹 운동의 한 주역으로 활약하며, 캄보디아를 한 강대국의 일방적 세력권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가열되는 베트남 전쟁은 시아누크와 캄보디아를 쇠퇴일로로 안내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시아누크의 묵인 하에 캄보디아 영내를 호치민 루트로 잘 알려진 병참 수송로로 활용했고, 1970년 미국은 친미 정치인 론 놀 장군을 부추겨 베트남 전쟁에 비협조적이던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베이징으로 망명한 시아누크는 그 이후 영욕이 교차하는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나마 망명객을 친구로서 맞아주던 중공의 총리 주은래(周恩來)가 1976년 지병으로 죽자, 그는 의형제를 맺고 지내던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도움으로 북한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시아누크를 위해 주석궁을 차용하여 지은 별장식 궁전도 평양 인근에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말년에는 평양을 자주 방문해 요양을 했다. 시아누크는 생전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비동맹 회의에서 처음 만나 북한을 적극 지지해준 것이 인인이 되어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북한은 시아누크의 망명 생활 중 장수원(長壽院)이라는 궁전을 지어주어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프놈펜 도심에는 현재에도 김일성 대원수 거리가 있으며, 시아누크는 2012년 1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 태양절을 즈음하여 국제 김일성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망명객의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에게도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 이후 친미 정권인 론 놀 정부가 붕괴되고 1975년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낙원을 주창한 크메르 루주에 의해 장악되자, 폴 포트가 이끄는 정권의 상징적인 국가수반이 되어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 세력인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의 이름뿐인 군주에 지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인 폴 포트는 시아누크를 다시 왕으로 추대해 절대 왕정 국가로 회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폴 포트는 다만 시아누크의 명성과 인기를 적절히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시아누크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채 결국 1년 만에 크메르 루주에 의해 직위를 찬탈당하고 정치적인 은퇴를 강요당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에 처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중공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 루주 정권을 타도했으나, 캄보디아의 베트남 속국 화를 우려한 시아누크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 사회를 상대로 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2년 동안의 시아누크의 외교 활동으로 인해 캄보디아는 1991년 결국 유엔 중재로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4개 정파가 모인 가운데 종전 협상을 타결 지었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캄보디아 과도 정부 수반에 선출됐으며, 2년 뒤 유엔(UN) 감시 감독 하에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첫 총선에서 큰아들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정당이 예상을 깨고 압승하자, 실력자 훈 센은 내전 재발을 협박했다. 이에 시아누크는 아들에게 공동 총리 제도를 설득해 제1총리 직은 라나리드 왕자가, 제2총리 직은 훈 센이 나누어 가지는 등 양두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9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해 시아누크는 왕위에 복귀했다. 그 이후 1997년 훈 센 측과 라나리드 진영의 권력 다툼 속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 왕당파인 라나리드 진영이 훈 센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그는 더 이상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그의 장기인 캄보디아 정파들의 중재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노인이 된 시아누크 왕은 전립선암을 겪었으며, 전해진 바에 의하면 1996년에는 가벼운 뇌졸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10월 15일 시아누크는 건강 악화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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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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