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3(일)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칼럼
Home >  칼럼  >  Nova Topos

실시간뉴스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1
  • 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1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0
  •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0
  •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9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9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이재명 대통령, G7 정상 무대 데뷔와 트럼프 통화의 정치적 의미
    한국 보수의 딜레마: 변화 없는 현실 안주의 끝은 어디인가 한국 정치의 축 중 하나였던 보수 진영이 지금 겪고 있는 위기는 일시적인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쇠락의 징후다. 변화 없는 현실 안주, 자성 없는 책임 회피, 철학 없는 언어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보수는 더 이상 ‘대안 세력’이 아닌 ‘방해 세력’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하게 된 것은 단순한 외교 일정 그 이상이다. 이는 한국의 국격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현 정권이 국제 사회에서 일정한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수 진영은 이를 부정하거나 깎아내리기 바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윤석열 정부 시절 언론과의 갈등으로 축소되었던 대통령 전용기 언론 탑승 인원이 문재인 정부 수준으로 복원된다는 발표는, 정권의 대외 소통 의지가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 간 첫 통화는 흥미로운 외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 정상은 관세, 무역 등 현안을 논의했을 뿐 아니라, 골프 라운딩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며 관계를 돈독히 했다. 서로가 암살 위기를 겪은 경험을 공유하며 리더십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 또한 이례적이다. 정치의 본질이 결국 ‘사람과 신뢰’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하지만 한국 보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여전히 “부정선거론”이라는 허구에 기대어 이재명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려 하고, 트럼프의 일방적 지지를 상상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외교 현실을 무시하고, 국가의 실익보다 진영 논리에 함몰된 태도에 불과하다. 트럼프조차 이재명 대통령을 “명성이 높은 인물”로 칭하며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데, 보수 진영은 이를 외면한 채 음모론과 혐오 정치에 빠져 있다. 보수 진영의 담론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구호 아래 구체적 정책도, 철학도 없다. “공정”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수사만 있고 내용은 없으며, 비판만 있고 대안은 없다. 변화하자는 말에 “좌클릭이다”라는 반응부터 보이며, 쇄신 요구를 “배신”으로 몰아붙인다. 진정한 보수는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유연함을 갖춰야 한다. 21세기 보수의 생존 조건은 ‘고립된 고집’이 아니라, ‘개방된 사고’에 있다. 과거의 영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고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이다. G7 정상회의 참석, 트럼프와의 신뢰 형성, 언론과의 소통 회복은 모두 시대 변화의 징표다. 이를 외면하고 음모론과 자기위안에 빠져 있는 보수는 더 이상 ‘보수’가 아니다. 그것은 기득권 연합에 불과하다. 국민은 더 이상 이들을 대안 세력으로 보지 않는다. 야당으로서의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이유다. 이제 보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화를 거부하며 고립을 자초할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철학을 구축할 것인가. 쇄신 없는 보수는 언젠가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퇴출될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7
  • 현대 이라크 왕국의 국왕 가지 1세 암살의 미스테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지친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Rashid Ali Al Ghailani)와 황금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과 황금 광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친 영국 정치인을 체포하고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또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가입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한 달도 안 되어 패배하였고, 이라크는 영국에 항복하여 독일이나 이탈리아 연합국 중 가장 먼저 항복한 국가가 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이라크를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8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하다가, 1948년 영국-이라크 조약을 통해 이라크는 주권을 되찾고,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을 통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라크는 1958년 요르단과 연합하여 아라비아 연방을 설립했다. 그러나 1958년 여름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가 레바논 위기로 인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파병되는 이라크 군을 이끌던 육군 장교 아브드 알 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이 7월 14일 바그다드로 방향을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파이살 2세 국왕과 왕실 근위대를 항복시켰다. 결국 아라비아 연방은 해체되고, 이라크에는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파이살 2세를 비롯한 왕족들은 총살당했다. 그러나 카심도 불과 5년 뒤, 바트당 쿠데타로 역시 총살당했다. 하지만 왕정이 군부 쿠데타로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 이라크가 쿠데타와 전쟁, 내분으로 혼란을 빚게 되자 영국에 망명 중인 이라크의 하심 가문의 수장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Sharif Ali Bin Al Hussein)을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시켜 입헌 군주제로 개헌하여 왕정을 복귀시키자는 이야기가 이라크 국내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하고 있다. 샤리프 후세인은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의 3남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의 협력을 받아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아라비아 반란을 이끌었다. 결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몰아냈고, 오스만투르크가 다스리던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군정을 받게 되었다. 1920년 파이살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수립을 선포했으나 시리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를 원한 프랑스가 군사력을 동원해 왕국을 진압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 대신 영국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이라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1932년에는 주권 국가 이라크 왕국을 건국했다. 이라크가 수니파, 시아파 두 교파로 양분되어 대립했으나 그는 별 문제 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1933년 승하하여, 유일한 아들인 가지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가지 1세는 1912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인 헤자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후세인 1세로 아라비아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영국의 제안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으나 영국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가지 1세는 젊어서부터 반영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영국 헤로 스쿨(Hero School)에서 1년 동안 유학했으며 이어 샌드 허스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유학했다. 영국 유학 기간 동안 더욱 심한 반영주의자였으며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이라크 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성적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으나 승마와 기계 조작에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932년 부왕인 파이살 1세가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영국인들의 사주를 받은 아시리아 인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파이살 1세가 자주적인 이라크를 건설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영국이 왕정을 약화시키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벌인 것이었다. 가지 1세는 이라크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확장되는 반영 운동에 동조하여 영국의 목표는 이라크를 파멸시키거나 노예화하기 위해 이라크 정부를 약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판단해 아시리아 인 폭도들에게 공습을 감행했다. 가지 1세는 아시리아 인들의 폭동을 진압해 영국의 음모를 분쇄한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1933년 파이살 1세가 서거하자 가지 1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반 문맹으로써 학식이 높지 않고 군대가 민간 정치권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가지 1세는 군주로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국민적인 인기는 대단하였다. 가지 1세는 정치보다는 아시리아 폭동 진압의 영광을 누리는 데 집중하여 국민들을 자주 만나며 인기를 과시했고 군복을 입고 공개석상에 나타나 반영파 장교들을 규합하였다. 이 때부터 이라크 정계는 군부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가지 1세와 영국의 지지를 받는 상류 계층 정치인 및 지방 부족들의 대결장이 되었다. 1934년에서 1935년에 걸쳐 친영파의 사주로 가지 1세에 반대하는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가지 1세는 이를 모두 진압하게 된다. 1936년 가지 1세는 아시리아 폭동을 진압할 때 활약한 바크르 시드키(Bakr Sidqi) 장군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를 지원하여 친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1937년 가지 1세는 자신의 특기인 기계 조작 능력을 활용하여 알 주아워(Al Juawor) 궁전에 라디오 카스르 알 주아워(Qasr Al Juawor) 방송국을 설립했다. 그는 군 장교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여 아라비아의 이념과 반영주의를 중동 전역에 선전하였다. 가지 1세의 방송은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등 방송이 연결되는 모든 아라비아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가지 1세는 아라비아 지역 최고의 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가지 1세는 쿠웨이트와의 합병을 추진했으며 쿠웨이트 입법위원회 위원 14명 중 10명으로부터 이라크와의 합병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받아 내었다. 이는 가지 1세의 인기와 쿠웨이트의 반영주의가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가지 1세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추진하자 영국은 가지 1세를 크게 경계하여 이라크 주재 영국 대사 모리스 패터슨(Morris Peterson)을 통해 알 주아워 방송국 폐쇄를 요청했지만 가지 1세는 패터슨의 면담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영국 정부는 공공연히 가지 1세의 제거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1937년 친위 쿠데타를 주도한 바크르 장군이 암살당하자 추방되었던 친영파들이 대거 귀국하였다. 전 수상 누리 사이드(Nuri Pasha Al-Said)의 아들 사바 사이드(Saba Al-Said)를 비롯한 친영파 정치인들은 가지 1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는데 섭정 위원회 설치, 가지 1세의 삼촌 제이드의 옹립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영국은 가지의 사촌인 친영파 압둘 일라흐(Abdul Ilah)를 즉위시킬 것을 주장했다. 1939년 4월 3일 심야, 참모 2명과 함께 운전을 하던 가지 1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지 1세는 황급히 후송되었으나 끝내 4월 4일 아침에 불과 27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신주를 들이 받아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공식적인 발표와는 달리 가지 1세의 차량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가지 1세가 과속을 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가지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머리의 부상은 자동차 사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시신을 부검한 사에브 사카트(Saeb Saqath) 박사도 가지 1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망증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내무장관 나지 사카트(Nhaji Saqath)는 친영파들의 압력으로 인해 사건을 종결해야 했으며 다시 권력을 장악한 친영파들은 사건 재수사를 철저히 금지했다. 그리고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여 밝히려는 사법부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가지 1세가 사망하면서 4세 밖에 되지 않은 파이살 2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에 대한 이라크 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가지 1세의 장례식 행렬에 바그다드 시민들은 누리 알 사이드를 향해 “당신은 가지 왕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سوف تدفع ثمن الدم الذي سفكه ملك الباذنجان!)”라고 울부 짖으며 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외쳤다. 이에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가 친영파에 대한 쿠데타를 벌이고 추축국에 가입해 영국과 잠시 전투를 벌이는 등 반영 소요 사태가 계속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이라크 왕국은 왕국의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던 가지 1세가 조기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라크 왕국은 1958년에 멸망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7
  • 사하라 사막과 서아프리카에 전래된 문화, 노크 문화(Nok culture)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문화의 요람이며 아프리카의 역사가 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문화의 바탕이 된 몇 가지의 역사적 배경을 지적한다면 사하라 사막의 여러 주민들이 지켜온 전통 문화는 사하라가 사막화되는 과정에서 변화되는 기후와 자연 조건에 순응하면서 창출했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모지인 사하라의 암벽에는 수 만 점의 부조와 동굴에 새겨진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B.C 7,000년경부터 A.D 1,000년에 걸친 벽화들이다. 수렵 장면, 소떼를 쫓는 유목민, 말이 이끄는 두 바퀴 전차(戰車), 전투나 축제 등 일상생활의 풍속도들이 있고 코끼리, 하마, 기린 등의 그림과 종교의식을 위한 거신(巨神) 상도 존재하고 있다. 이들 벽화의 규모는 매우 크며 예술적 감각도 탁월한 부분을 감안하면 오늘날 검은 아프리카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하는 격렬한 표현 의지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B.C 8000년경부터 사하라 사막은 습윤(濕潤) 기후로 점차 숲과 늪이 생겼으며 여기에 코끼리, 하마, 기린 등 야생동물들이 서식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무렵 지중해 연안과 남부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채집하던 수렵민이 들어와 거주하게 된 것이다. 사하라에 남겨진 벽화 등 유적으로 보아 지중해 형 민족과 흑인 계통의 민족이 절반씩 나타났고, 이들 두 계열의 혼성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B.C 6000년경 사하라 주민들의 생업은 목축을 중심으로 수렵과 채집을 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농경의 벽화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하라 사막이 건조하기 시작한 것은 B.C 3000년경부터였다. 이는 제4기 이래 사하라 사막 지대가 말라버린 것은 신석기 시대의 대변혁을 촉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B.C 500년경 사하라 사막은 지금과 같은 사막이 되었다. 이러한 사막의 건조화, 사막화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사하라가 사막이 되자 불모지를 탈출한 사하라의 부족들은 그들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소떼를 몰고 사방으로 흩어져 이동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진 넓은 세상에서 적응하는 것에는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관련 아프리카 학계는 최근 사하라 남쪽의 가장자리에서 농경의 기원을 말해주는 석기시대의 촌락 유적들을 몇 군데 발견하였다. 이들 촌락의 주민들은 아마도 야생잡곡을 채집한 경험을 가졌던 사하라 유목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사하라 사막이 건조해지자 강이나 호수 주변에 집결하여 그곳에서 집약적인 농경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보여 진다. 또한 서아프리카의 재배 기술을 아프리카 도처의 사바나 지역으로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리타니 남쪽에 있는 다르 티체트(Dar Tichet)에서는 B.C 1500년~500년경에 걸친 여러 단계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유목 가축으로 소와 염소는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왔으며 재배 작물로서는 기장이 있었는데 이 잡곡은 B.C 1200년경부터 식용으로 사용해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적지에는 무장한 베르베르 족이 지나간 흔적도 남아있었다. 이로써 청동기 시대의 지중해 연안과 사하라 이남을 연결한 교역로도 사하라 사막이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또한 일찍 사하라 사막과 서부 아프리카로 들어온 북아프리카 인들은 서부 수단에서 흑인과 접촉하게 되었다. 한편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니제르 강과 베누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수 백 점의 테라코타 토기가 철기, 마제석기와 함께 발굴되었다. 처음 발굴 지점인 노크(Nok) 마을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를 노크 문화로 명명하였다. 이들 테라코타는 연대적으로 B.C 1000년부터 A.D 200년까지의 것으로 추정되며 후기 석기 시대에서 철기시대에 걸친 여러 부족사회의 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노크문화는 또한 사하라가 사막화됨에 따라 남하해온 흑인 부족들이 사바나와 산림지대에서 농경으로 정착하면서 공예기술을 양성하여 분업 사회를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노크문화가 검은 아프리카 문화의 원형이었지만 여러 부족이 수천 년에 걸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그 원형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하여 발전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7
  • 러시아 최초의 의회인 노브고로드 민회(民會)와 선거제도
    키예프 루스 말기에 키예프의 한 대공이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의 공으로 제위 시키려 했다. 이는 키예프의 다음 공후를 자신의 아들로 세습하려던 뜻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브고로트의 민회는 대공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귀공도 또 귀공의 아드님도 바라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공후께 전합니다. 만약 공자께서 머리가 둘로 생각하신다면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위의 인용문 일화에서도 나타난 것과 같이 당시 키예프 공국 체제에서 제2의 도시로 각광을 받던 노브고로드는 키예프 공국 말기에서 몽골 지배 초기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으로 유라시아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후의 권한이 점점 강력해지면서 전제군주가 태동하던 블라디미르 등지의 북동부 지역이나, 귀족들의 세력이 커져 귀족지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던 남서부 체르니코프, 페레야슬라브 지역과 달리, 북부의 노브고로트에서는 시민과 민회의 세력이 강화되어 반(半) 공화제 정치 체제의 경향을 보였다. 정치체제와 시민생활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흡사했다. 전통사학에서 언급하기로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정치, 사회 체제에 대하여 고도로 제도화된 베쩨(Вече)라는 일종의 민회와 노브고로드의 시장 역할과 더불어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천인대장이면서 도시 민병대의 수장인 띠샤쯔끼(Тысяцкий), 다른 귀족 가문의 일원들, 노브고로드 대주교 등으로 구성된 정부였다. 이러한 독특한 정부체제는 전제왕권을 지닌 국가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부유한 상인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띠샤쯔끼(Тысяцкий)는 초창기에는 군을 담당했지만 법률 및 상업적인 관리를 포사드니크에게 이양 받음에 따라 그들은 군과 경찰, 사법적인 부분은 관장하는 직책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정확한 헌정체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존재가 확실한 노브고로드의 최소한 명목상으로 존재한 지도자는 노브고로드 대공 공작이었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주위 국가들에서 명망 높은 공작을 모셔왔으며, 국력이 약해진 13세기와 14세기 초에도 여전히 외부에서 공작을 영입해왔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정부 행정의 수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관리들의 정확한 권한을 밝혀내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이는 이반 3세가 침공하여 노브고로드를 점령했을 당시 다수의 문서들이 소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정 수반은 여전히 대주교로 국정에 관한 회의들을 주재했으며 대주교 궁으로 알려진 다면궁에서 열린 “귀족평의회(Совет Госпо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최근 사학자인 J. 글렌버그(J. Granberg)는 실제로 그러한 기구가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재기했다. 글렌버그는 이러한 대주교 중심의 정부 개념의 이해를 파악할 때 역사학자들이 희박한 사료에 많은 몰입을 시도한 결과 추정되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론들로 인하여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공국의 실제 권력자 혹은 행정수반이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특성상 어느 경우든지 대주교가 도시의 주요한 관리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주교는 노브고로드의 교회들을 감독할 뿐 아니라, 대사관을 대표하고, 세속적인 법정 판결을 감독했으며,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세속적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보야르들과 함께 노브고로드의 여러 회의들을 거쳐 그 의견들을 수렴한 것으로 생각되며, 대주교가 단독행동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러한 대주교는 외부에서 임명되지 않고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후 키예프 정교회 모스크바 관구장 주교에게 재가를 받는 식으로 임용되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는 아마도 노브고로드에서 가장 부유한 단일 지주였을 것이며, 법정 수수료와 시장의 저울 사용 비용,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들을 활용하여 재산을 축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노브고로드 대주교 재산 축적의 원천은 노브고로드의 지리적 위치와 상인들과 결탁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노브고로드는 발트 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바리야기(Барияги)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의 북쪽 중심지였고 볼가 강 수로를 통해 동방과도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노브고로드가 일찍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유화는 정치적인 위상도 격상시켜 키예프 대공은 대대로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 대공에 임명하여 도시를 장악하려 했다.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두 대공인 블라디미르 1세와 야로슬라프 1세도 한 때 노브고로드 공이었고, 야로슬라프 1세의 법전『루스까야 쁘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가 만들어진 것도 이 노브고로드에서 주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공들은 결국 노브로고드에서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의 정치적 실권은 점차 토착 귀족층인 보야르와 상류층 시민들에게 옮겨갔다. 그와 함께 민회(民會)가 도시의 최고 권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1136년에는 민회가 공을 추방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1156년에는 자신의 대주교를 선출하는 권리까지도 받아낸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정부 체계에 따른 민회(民會)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노브고로드에서 중요한 정무관으로는 베쩨(Вече ; 민회)를 주재하는 노브고로드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 시장)가 있다. 베쩨에서는 공작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세금 징수와 도시의 여러 안건과 시외의 문제들을 논하는 자리이다. 그러한 민회의 존재로 인해 공작의 주요한 결정 사항들은 대부분 시장인 포사드니크의 재가를 받아야했다. 이러한 체계는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14세기 중반부터는 시장을 한 명만 두지 않고, 민회에서 한번에 6명을 선출했다. 6명의 시장은 종신직이었으며, 매해 그들 중에서 수석시장인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를 선출했다. 이러한 민회인 베쩨의 정확한 실체 역시 불확실하나, 자유농민을 포함한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민회가 민주적 기구였는지 보야르 귀족들에 의해 주도된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여러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는 물론 노브고로드 대주교나 주교 역시 민회에 의해 선출되거나 적어도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시(市)는 민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5개 구로 분할했고, 광범한 자율권을 가진 각각의 구는 도시의 테두리를 넘어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각각의 주 농촌을 관할했다. 5개 주 바깥의 새로 획득된 넓은 대지는 도시 전체가 관리했다. 노브고로드에서도 최고의 직위는 사법, 행정, 군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대공이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대주교에게 있었다. 그러나 1136년의 민중혁명이 발생하면서 민회가 대공의 권력과 활동에 세세하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의 권력은 서서히 미미해지고 시민들의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이를 통한 민회 역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민회는 공후를 임명하고 해임했으며,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를 선출했고, 대주교 지위에 합당한 세 후보를 선출하여 사실상 대주교의 선임을 결정했다. 또한 민회는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고, 법률 선포, 세금 조달 등을 관장하는 도시의 최고 권력이었다. 민회의 성원 자격은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 가장이었으며, 단 한 사람의 시민이 종을 울려 민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다. 민회에서 선출된 포사드니크는 공과 행정업무를 분담했고, 공후의 협력자 또는 부관 역할을 하면서 공후의 대한 전제적 통치에서 도시의 이익을 보호했으며, 공후의 부재 시에 역할을 대행했다. 티샤츠키는 자유민 1,000명의 대표로서 상업적 분쟁 등을 처리했다. 대주교는 성직자 고유의 역할 외에도 세속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서로 적대하는 당파를 화해시키며 해외 사절단을 조직하고 거느리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기관으로는 명사위원회가 있었다. 노브고로드와 부와 세력이 반영된 기관으로서, 귀족층, 전, 현직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 각 구와 거리의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민회에서 논의 또는 제정한 법과 그에 행한 조치들을 정교하게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노브고로드 정치의 흐름을 면밀히 조절했다. 사법 체계 역시 상당히 치밀하고 인도주의적이었다. 여러 단계의 법정에 민주적인 배심원 제도와 중재 제도 등을 두어 사건을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민주적인 제도 하에서 노브고로드는 교역도 크게 성장하고, 키예프의 유산을 승계하여 문화도 크게 발전시키면서 15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하나의 예로, 노브고로트에서 발견된 500여 개의 자작나무 껍질 문서들은 시민들 사이에 읽고 쓰는 능력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상공업에 종사한 자영업 상인들과 장인들도 역시 노브고로드의 정치적 문제에 참여했다. 이에 전통적인 학자들은 그들이 콘치(Kонец ; 복수형 Kонцы)라 불리는 5개 자치구에 분산하여 거주했으며 또한 그 자치구별로 상업적인 조직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특정 골목과 거리, 도시의 어떤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지에 따라 해당 골목, 혹은 거리의 명칭이 정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인 집단들은 쏘뜨냐(Cотня ; 100인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했다. 이것은 최초의 러시아에서 길드(Guild)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루스 민족의 여러 나라들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성격의 길드가 존재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노브고로드 중세사에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공업자들의 조직의 실체 역시 불명확하기 때문에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보다 조직화된 길드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노브고로드의 골목(Alley)이나 거리(Distance)는 길드나 조합이라기보다는 단순한 행정 단위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거리 조직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교회를 짓거나 돌림병일 들 때 죽어나간 이웃 주민들을 매장하거나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활동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역시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러시아 최초의 길드라고 하는 이반(Иван)의 Cотня (100인대) 같은 경우에도 그 실체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거리와 골목에 속해 있는 상인 세력들은 특정 귀족 파벌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이해를 보호하면서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조약과 그 외의 규약들에서 상인들, 속칭 “원로(Elder)”들이 간혹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규약들 중 불과 100여개 정도만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 12개의 자작나무 껍질로 서술된 규약들은 12세기의 것으로 나타났고 나머지 대부분은 1262년 이후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노브고로드의 정치 조직을 이해하고 가늠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노브고로드 공작은 다른 루스의 공국들과는 달리 세습 직이 아니었고 그 권력 역시 상당히 제한적이었지만 여전히 공작은 노브고로드 시민의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100여명의 노브고로드 공작들 중 다수는 노브고로드 시민들에 의해 초빙되거나 폐위되었다. 그 중 일부는 랴드(Pяд)라 불리는 계약에 서명하면서 계약에 따른 내용들을 인정하게 했다. 이러한 랴드라는 것은 노브고로드의 보야르들의 이해를 보호하고 공작의 권리와 의무를 정해 놓은 계약으로 판단된다. 현재 모스크바 문서보관소에 보존된 랴드는 초빙된 공작 12명과 노브고로드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문서보관소에 서술된 12명의 공작 중 5명은 트베리, 4명은 모스크바, 3명은 리투아니아에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노브고로드 공작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군사적 지도자였다. 또한 공작은 도시의 교회들을 후원하고 재판소를 유지했으며 공작이 노브고로드에 부재할 시, 공작 지위의 나메쯔니크(Намечник)나 빠사드니크가 대신 업무를 보았다. 재판에는 빠사드니크가 항상 참석했고, 빠사드니크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판결도 내려질 수 없었다. 또한 시장의 허가가 없이는 공작이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분할하거나 법을 만들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공작은 노브고로드에 자신의 사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노브고로드의 영토에서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노브고로드 공작은 도시에서 그에게 지불하는 돈만 받아가는 일명 월급쟁이 사장과 같았다. 여러 리아드에 의하면 공작은 노브고로드 영토 밖에서 노브고로드 시민을 체포하거나 재판에 기소할 수 없었다. 그러한 노브고로드에 공작의 거처는 두 곳 있었는데, 하나는 시장 터에 있었다. 이 저택은 야로슬라프 1세의 이름을 인용하여 야로슬라프 궁전이라 하였다. 다른 공작의 거처는 남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고라디쎼(Городище)였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행정구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공화국은 수 개의 띠샤짜스(Тысячаc, 나라의 핵심 영토)와 볼로츠(Волоц, 북부와 동부의 식민지 또는 공물을 바치던 지역)로 분할되었다. 노브고로드 시와 그 주위를 비롯한 도시들은 이러한 구역들에 포함되지 않았다. 프스코프는 13세기 이후로 노브고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냈으며, 1348년 볼로또바(Болотово)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 외의 다른 도시들도 노브고로드 그리고 자신들의 이웃 도시들과 연대하면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6
  •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6
  • 통합과 조화의 정치, 공동체 삶의 회복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어제 21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재명은 취임 첫날 비상경제점검 TF를 구성하여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회의를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러진 대선이라서 취임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취임 첫날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보여주었다. 어제 이재명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의 첫 출발은 현충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이했던 점은 인천 계양에서 출발하여 현충원까지 가는 길에 올림픽 대로 4차선 중 2차선만 통제하고 나머지 차선은 통제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시민들의 불편을 배려한 조치로 보였다. 국민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대통령다웠다. 현충원 방명록에 쓴 글씨가 그의 진심을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한다. “함께 사는 세상,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국민과 함께 만들겠습니다.” 어떤 특정 계급에 매몰된 사람과 달리 그는 가난을 극복한 사람답게 그의 행보에는 사람 냄새가 났다. 국회 로텐더 홀에서의 취임연설 광경도 지켜봤다.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서 내빈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 중 조희대 대법원장과 악수 나누는 장면에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재명의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하고자 했던 대법원장의 시도와 그러한 장벽을 뚫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재명과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의 삶이 저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옹지마이다. 한 길 앞도 내다볼 수 없다면 오늘 나의 행동에 조심해야 함을 생각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기에, 조희대 역시 선한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봤다. 그 옆에 자리한 김형두 헌재소장 권한대행과의 만남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였던 것 같았다. 서로 밝은 웃음으로 맞이한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다. 헌법재판소의 8:0이라는 대통령 파면 결정이 없었다면, 이런 자리가 마련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명문으로 기억된다. 특히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 큰 울림으로 기억에 남았다. 통합은 유능의 지표이고 분열은 무능의 결과라는 말도 명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대통령 취임 선언문 전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다소 문학적인 글도 있었다. “그늘진 담장 밑에서도 기필코 해를 찾아 피어나는 6월의 장미처럼, 우리 국민은 혼돈과 절망 속에서도 나아갈 방향을 찾았습니다.” 어쩌면 대통령이 된 인간 이재명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역시 어둠을 해치고 밝은 태양으로 나아가는 저력이 있는 국민들이 뭉쳐있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흥이 나면 어떠한 무서운 괴물도 물리칠 수 있는 저력을 가지 백성들의 나라이다. 전 세계가 이 나라를 경이로운 눈길로 보고 있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에 나타난 그가 꿈꾸는 나라는 이렇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다시 힘차게 성장 발전하는 나라, 국민 모두 함께 잘사는 나라, 문화가 꽃피는 나라,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이다. 그의 연설은 주권자인 국민의 충직한 일꾼으로서,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위탁받은 대리인으로서 대통령으로 주어진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고 있다. 특히 평화과 관련된 언급을 했을 때, “아무리 비싼 평화도 전쟁보다 낫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낫고,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입니다.”라는 말에 많은 공감을 했었다. 물론 서양 사회에서는 “평화를 지키고 싶으면,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옛 격언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 말을 삶을 견디고 싶으면 죽음을 대비하라고 바꾸어 말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선과 악이 인간의 내면에 함께 존재하는 동전의 양면이듯이 평화와 전쟁 역시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삶과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악이 있어, 전쟁이 있어, 죽음이 있어 그만큼 더 선과 평화와 삶이 소중한 것이다. 어제 있었던 대통령 취임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 때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모된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더욱 공동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민에 대한 강조는 공동의 삶에 대한 강조이다. 국민 모두의 행복은 수량적인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살아 가지만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공간을 염두에 둘 때,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다. 즉 공동의 공간을 존중할 때 우리는 상호인정과 다른 의견에 대한 타협과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이재명 대통령이 꿈꾸는 나라가 아닐까? 견제와 균형은 결코 수량으로 도식화할 수 없다. 견제와 균형은 오히려 조화이다. 5:5가 조화가 아니라 10:0이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제 소수 야당은 견제와 균형을 언급하면서 다수 야당을 만들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할 것 같다. 하지만 견제와 균형의 초점은 조화에 있다. 수량적으로 5:5일지라도 악의 무리가 어느 한쪽을 지배하면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지금 비록 소수 야당일지라도 조화를 추구한다면 국민은 알아서 그들에게 많은 표를 줄 것이다. 21대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으로 새로운 나라를 향한 첫 발걸음을 축하하면서 새로운 통합 속에서 조화가 꽃피는 나라, 새로운 행복의 나라를 꿈꾸어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5
  • 최근 러시아 연해주-극동 지역의 동향과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 아무르 엑스포(Amur Expo)
    러시아 정부가 최근 연해주의 메가 프로젝트로 추진 중인 국제운송회랑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Ⅱ 프로젝트 사업의 기본 계획을 보완 및 승인하며 향후 프로젝트 추진에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의 주요 육, 해상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복합 물류 인프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Ⅰ은 중국 수이펀 하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인 뽀그라니찌니(Пограничный, 육로), 그로데꼬보(Гродеково, 철도)를 통해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나호드까(Находка) 항 및 보스또찌니(Восточный) 항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프리모리예(Приморье) Ⅱ 역시 중국과 연해주의 물류 기반을 이어주는 사업으로 중국 훈춘에서 연해주 남서해안 지역인 끄라스끼노(Краскино), 뽀시예뜨(Посьет) 항, 자루비노(Зарубино) 항, 슬라뱐까(Славянка)를 연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기본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에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중국 동북 3성의 해로를 러시아 연해주의 육, 해상로를 적극 활용하여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확대할 수 있는 물류 노선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항구가 없는 중국의 동북 2성(길림성, 흑룡강성)은 러시아 연해주 항만을 통해 수송로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한데, 이는 지역 발전을 노리고 이를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 경쟁력 있는 해상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 연해주 또한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물동량 확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리모리예 Ⅰ,Ⅱ 사업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 항법에 근거한 연해주 항만의 개발과 선도 개발구역 발전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교통 인프라 사업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연해주와 기타 극동 지역인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발전 및 추가 개발을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방으로 진출을 천명한 푸틴 대통령의 의지와 북극항로의 개발 등이 맞물려 모스크바 광역으로 치우친 러시아의 지역 GDP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인 프로젝트로도 볼 수 있겠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밀착하기 위해 벌이는 도로 프로젝트 사업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말고도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르 지역 개발 사업은 러시아와 중국, 양국이 추진하고 있는 최초의 지역 개발 사업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간의 협정으로 추진하는 극동 지역 사업으로는 극동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철교 건설 사업이 시초로 시작된 것이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이다. 철교는 비록 2021년에 완성하고 개통되었지만 낙후한 아무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불가피해 이에 대한 연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력이다. 마침 연해주 이민 정책청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만들어져 2025년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이는 지역 노동 시장에서 외국인 인력 합법화를 주요 목표로 지정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 양국 시민이 아닌 타국 인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는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외국 인력으로 북한 노동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연해주 측은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것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지역 인력 시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의료, 문화, 스포츠 및 주거 시설을 확충했다. 이는 인력 수요를 외국 노동력을 유치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인프라 확충을 통해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유치 과정에 외국인들의 러시아 법률 준수 여부 및 고용주와 규제 당국 간 다양한 행정적, 사회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기에, 이민정책청은 지역, 연방 감독 당국을 모든 부분에서 지원하고, 외국인들의 러시아 생활에 대해 적응이 빠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작년 12월 연해주 정부는 지역 당국과 사회, 비영리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연해주에 이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 방법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세미나에서 알렉산드르 후돌로즈니(Александр Худоложный) 연해주 내무 정책부 장관은 여러 분야의 지역 산업에 종사 중에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연방 법과 프리모르스키예 주 법률을 숙지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관련 대책이 필요함을 지적했다. 이고르 사브첸코(Игорь Савченко) 지역 테러 방지 위원회장도 주 정부가 테러 및 극단주의 관련 문제를 안정적으로 통제 중에 있으나, 영주권, 노동 비자 등 체류 자격 관련 문서 위조 및 매매 관련 범죄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이 해결 방안을 고심 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올렉 바흐티나(Олег Вахтина) 극동 개발부 투자개발 및 국제협력국장은 류쥔 주 러시아 중국 공사와 하바로프스크 주 양국 국경 지역에 위치한 볼쇼이 우수리스크(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 섬의 국경 인프라 및 검문소 건설 문제를 논의하면서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안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러시아와 중국 측은 아무르 지역이 2030년까지 연간 화물이 약 130만 톤 가량 처리되고 관광객이 최대 140만 명이 출입국 할 가능성을 높이 보았으며 아무르 지역이 양국 간 전략적 중요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국 간의 통합된 개발 계획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해당 공사는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 국제 선도 개발 구역을 통해 농업분야 첨단 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극동개발부는 이와 관련한 추가 논의를 위해 지난 5월 23~25일에 블라고베셴스크에서 ‘Amur Expo’ 러시아-중국 경제 포럼을 열어 중국 대표단을 초청해 논의하기도 했다. Amur Expo는 아무르 주와 중국 흑하(黑河)시가 매년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로, 2023년부터 동방경제포럼 부분 세션으로 통합되어 진행 중에 있으며, 올해에는 러시아, 중국, 몽골, 인도, 파키스탄, 말레시아, 싱가포르, 네팔 총 8개국이 참가했다. Amur Expo는 지역 협력을 위한 핵심 부분을 논의하는 주요 국제 행사로, 흑하 시 정부도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얼빈 국제 투자 경제 박람회의 일부분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했다. 한편 러시아는 앞으로 중국 측과 기본적 합의 과정을 거쳐 공식 협상 채널에서 세부 조건들을 조율하여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실질적 준비를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와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양국이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단순한 셈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할 것이고 비용은 각각 3조 4,000억 원, 6,000억 원 수준의 비용이 예상되고 있다. 당초 러시아 연해주 정부, 블라디보스토크 시, 하바로프스크 시 등의 지방 정부 차원에서 프로젝트가 발의됐지만, 지금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 넘어가 중국 정부와 이 사업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조만간 북한 또한 여기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내년부터는 우리 한국도 Amur Expo, 프리모리예 프로젝트, 아무르 지역 개발 프로젝트 등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 연해주-극동 지역 개발에 대한 개발권을 따내야 한다고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5
  • 현재까지 남아있는 무함마드의 직계, 현 요르단 하심(Hashim) 왕가
    하심 가문은 현대 요르단의 왕가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헤자즈 왕국,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이라크 왕국의 왕가이기도 하였다. 하심 가문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 이름의 유래는 무함마드의 증조부 이름인 “하심”에서 유래된다. 다만 무함마드의 증조부 씨족인 “하심 씨족(بنو هاشم‎, Banu Hashim)”과 현대에 지칭되어지는 하심 가문(الهاشميون, Hashemites)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들 하심 씨족들은 하심의 자손들 전반적인 면들을 포함하지만, 하심 가문은 메카 아미르 작위를 세습했던 무함마드의 혈통만을 중시하고 더 좁게는 아라비아 반란을 일으켜 이라크와 요르단의 건국 시조가 된 후세인 빈 알리(Husein Bin Ali, 샤리프 후세인)의 후손들만으로 한정된다. 1916년, 메카의 태수였던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가 토착 군대를 이끌고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아라비아 반란을 성공시키면서 오스만투르크를 축출하고 나라를 세웠다. 1924년 3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칼리프 제도가 폐지되자,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 칼리프임을 선포하게 된다. 이른바 요르단과 시리아 지역의 샤리프 칼리프 왕국이라 하는데 국제적인 인정은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0월, 후세인의 칼리프 참칭을 빌미로 이븐 사우드(Ibn Saude,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사우드 왕조의 시조)가 침략해왔고, 패배가 임박하자 장남인 알리 빈 후세인(Ali Bin Husein)에게 양위했다. 하지만 이듬해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정복당하면서 헤자즈 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헤자즈 왕실은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로 도피했다. 헤자즈 지역을 정벌한 네지드 토후국의 경우, 1926년 헤자즈-네지드 왕국(مملكة الحجاز ونجد)으로 개편했다가 2개 국가 왕위를 1932년에 통합하여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수립하게 한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단 4개월 동안만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1918년 10월 5일 건국을 선언했고, 1919년 11월 26일 영국이 시리아 남부 지역에서 철수하자 토후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 왕국으로서 새롭게 건국되었다.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Faysal I)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이크스-피크 협정 당시 1920년 7월 25일 프랑스 제3 공화국에 항복하여 멸망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1920년 세브르 조약에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영국에게 이라크의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영국은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를 설립하게 된다. 1921년 카이로 평화회담을 통해 이라크에 군주제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하여 이라크 왕국을 건설하게 하였다. 파이살 1세는 이라크에 온 적도 없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영국에서 일부러 내세운 인물이었다. 파이살은 얼마 전까지만 시리아 왕국의 왕이었지만 영국은 시리아를 프랑스한테 넘기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시리아 왕국은 탄생한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복속되었다. 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명성이 있었지만 이라크 지역 주민이 아니었던 데다 실세는 영국이다 보니 초기부터 저항이 크게 발생했다. 또한 파이살은 수니파였고 이라크에는 시아파가 더 많았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시아파 지역은 수니파 지역과 분리되어 통치되기를 바랬었지만 영국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질적인 지역들을 한 통합했다. 영국은 파이살 1세를 자신들의 허수아비로 내세운 이후, 시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수니파와 유태인,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이에 반발한 시아파를 중심으로 1920년 바그다드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라크인 453명이 사망하고 영국인도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때 영국은 독가스를 살포했으며 민간인들을 공습하는 등,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라크의 봉기를 진압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쿠르드 독립 국가 건설,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기독교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관료 우대 정책을 펼쳐 시아파의 반발을 샀고 파이살 1세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시아파와 수니파의 화해와 국방력 건설, 자주권 확보에 노력하게 되자 영국은 각 부족들의 친영국파 내각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1932년 이라크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지만 실상은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요르단은 하심(Hashim)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아라비아 왕정국가로 나타난다. 하심 가문은 7세기 무렵 이슬람을 창시했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속한 가계로서,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무함마드의 43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하심 가문은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반도 홍해 연안의 서부 지역인 히자즈에서 통치 가문으로의 역할을 해왔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히자즈 지역을 정복했지만 하심 가문에게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멸망하자 하심 가문은 영국의 지원 하에 히자즈 왕국(1916~1925), 이라크 왕국(1921~1958), 요르단 왕국(1921~현재) 등을 차례로 건국했다. 이 가운데 요르단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심 왕국이다. 과거에 요르단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용어로 팔레스타인 지역 중 요르단 동편을 지칭한다. 1921년 요르단은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라는 국명으로 영국의 보호령 하에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46년 5월 25일 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국명을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게 된다. 그 이후 1949년 4월 요르단은 다시 오늘날의 국명인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었다. 요르단은 현재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국왕은 행정 및 입법 부문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요르단 국왕은 국가 원수인 동시에 최고 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총리, 내각 장관, 도지사 등 행정부 주요 요직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있으며 국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요르단은 기독교도, 유태교도, 무슬림이 聖地라고 부르는 지역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요르단은 중요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아라비아 지역의 국가 중 이집트와 더불어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국가이기도 하다. 1946년에 독립한 이후 요르단은 총 4명의 왕이 통치했고 세 차례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 형식상 요르단의 하심 왕가는 부친이 사망한 이후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1년 건국자이자 1대 국왕인 압둘라 1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탈랄 빈 압둘라(Talal Bin Abdullah)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탈랄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유로 즉위 13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그의 아들인 후세인 1세가 1952년에 왕위에 올랐다. 후세인 1세는 1952년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요르단을 통치했고, 1965년에 자신의 동생인 하산 빈 알 탈랄(Hassan Bin Al Talal)을 왕세제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후세인 1세는 사망하기 2주일 전인 1999년 1월 25일에 34년 동안 왕세제를 역임해 왔던 하산을 전격 해임하고 자신의 큰 아들인 압둘라 2세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부친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된 지 2주 후인 1999년 2월 7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압둘라 2세의 왕위 등극은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매우 급작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후세인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이 이미 왕세제로 책봉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압둘라 2세의 모친은 영국인 출신으로 후세인 1세의 두 번째 아내였으나 1971년에 이혼한 상태였다. 후세인 1세는 말년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였던 누르 왕비를 총애했고, 따라서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에게 어떠한 사건이 생길 경우, 그녀의 장남이었던 함자 빈 알 후세인(Hamza bin Al Hussein)이 차기 왕위에 오를 것이 유력했다. 1999년 후계자 선정 문제를 두고 후세인 1세는 많은 갈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후계자를 동생 하산 빈 알 탈랄 대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선택하고 싶어 했다. 당시 그는 누르 왕비의 청원에 따라 그녀의 아들 함자를 후계자로서 신중히 고민했다. 하지만 당시 함자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하여 왕위를 승계받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그는 37살이었던 장자인 압둘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대신 함자를 차기 후계자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압둘라 2세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이복동생 함자를 1999년 2월 7일 왕세제로 책봉했다. 그러나 2004년 11월 28일 압둘라 2세는 전격적으로 함자를 왕세제로부터 해임했다. 당시 그는 함자에게 서한을 보내 “상징적인 직위 때문에 너는 행동의 자유를 구속받아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네가 충분히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무도 맡기지 못하게 되었다 (Because of your symbolic position, you have been restricted in your freedom of action. And because of that, you have not been given any responsibility, even though you are more than qualified to do so).”고 말하며 해임의 사유를 밝혔다. 그는 함자의 해임 이후 약 5년 동안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가 2009년 2월 당시 15살이었던 장남 후세인 빈 압둘라(Hussein bin Abdullah)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5
  • 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필자는 얼마 전에 고려인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가슴에 맺힌 말이 떠올랐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러시아어로 된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읽는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고려인들의 집념은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제 이주 직후 소련에서 적성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김병화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라 불리는 집단 농장의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었다. 이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도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이주 이후, 열심히 일구었던 터전, 부모의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김병화 선생님은 연해주의 대한제국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Кулак, 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숙명이었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 가야만 했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 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적군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비록 고향 땅 연해주는 아니었지만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선생은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군부대에서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선생은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향했다. 김병화 선생은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해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 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브까 지구의 리뽀브까 마을에 김병화 농장의 시초인 북극성 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 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주 중치르칙 구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북극성 농장의 농업 개척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김병화 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대표인 김병화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 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 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했다. 북극성 농장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었고, 소련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당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들에게 초가집을 짓고 살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기본으로 바닥에 온돌을 깔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지붕을 초가를 얹었다 한다. 그러한 덕택에 카자흐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얼어죽은 고려인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 선생은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소련 시대 통틀어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 차례, 2중으로 받은 고려인은 김병화 선생이 유일하다. 한편 북극성 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 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방직, 전자제품의 생산성,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생산량을 높이고 옥수수를 다량 재배하여 굶주리는 소련 인민들에게 다량의 배급품으로 보내는 등, 사회적 공헌도와 기여도도 높았다. 대조국 전쟁이 끝나고 소련 전체에서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 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 물론이고 비료조차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 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병화 선생을 도와준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 지도자들도존재했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니콜라이 리, 니콜라이 김, 세르게이 허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창세 선생은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니콜라이 김은 벼나 면화 재배 이 외에도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김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게 된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및 통합을 거듭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Ахунбабаев)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들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내부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 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 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했다. 김병화 농장의 주민들의 문화 생활은 노동시간이 끝난 이후 이루어졌다. 한복 입은 공연팀은 멀리 공연 나가기도 했는데 모든 고려인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은 계속 예술업에 종사하게 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은 운동선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복 입은 공연팀은 공연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전 지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연을 했고 북한 평양도 다녀온적이 있다 한다. 이후 김병화 선생은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를 수여 받았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농장의 대표인 김병화 선생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북극성 농장은 우즈베키스탄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거리의 이름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명명되었다. 김병화 선생 이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콜호즈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토젤 콜호즈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즈의 드미트리 김, 드미트로프 콜호즈의 안톤 최,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 내에서 소수 민족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옥수수 농장이 바로 김병화 농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옥수수 재배법을 우즈벡 인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고려인들이다.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련 정부가 붙여준 ‘김병화 농장’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거리도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들은 구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한 편에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권력의 핵심인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핏줄의 근원인 한반도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조상의 고향인 북한에 더 가깝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모국으로 여기고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었고 우즈베키스탄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 등으로 인해 요즘 고려인 젊은 세대들로부터 다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 한류가 잇달아 중앙아시아에 상륙하면서 이를 향유하는 요즘 고려인 세대들이 늘고 있다. 자신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 이렇게라도 관심이 증폭되어 오히려 한류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적 지원을 더욱 늘려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면 조상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4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