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05(금)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칼럼
Home >  칼럼  >  Nova Topos

실시간뉴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29
  • 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29
  • 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 칼럼
    • Nova Topos
    2025-11-27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 칼럼
    • Nova Topos
    2025-11-27
  • 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26
  •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26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캄보디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납치 및 피싱 범죄, 그 배후는 누구일까?
    최근 들어 캄보디아 접경 지역과 캄보디아 등에서 중국계들의 납치 범죄들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민들에게 각종 피싱 범죄와 인신매매에 대한 경고가 연일 이어지고 많은 피싱으로 의심되는 문자를 받고 있으며 캄보디아에 대해 갖은 흉흉한 소문들이 들려온다. 2020년대 초반부터 캄보디아의 프놈펜, 시아누크빌 등지를 거점으로 한 국제 범죄조직들이 고수익 일자리를 미끼로 한국인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외국인들을 유인하여 납치하고 범죄 센터에 감금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범죄조직들은 SNS나 온라인 구인 사이트를 통해 고수익 보장, 숙식 제공, 항공권 지원 등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구직자들을 유인했으며 IT 개발, 온라인 마케팅, 카지노 고객 관리 등의 직종으로 유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한 피해자들은 여권을 빼앗기고 외부와 차단된 건물에 감금되었다. 이후 범죄조직의 감시 아래 하루 12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암호화폐 투자 사기 등 범죄 행위를 강요받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저항할 경우 폭행, 전기 충격, 고문 등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했으며, 다른 조직에 팔려가기도 했다. 이에 일부 피해자들은 가족에게 연락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풀려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한국의 각종 범죄자들, 해외의 범죄자들이 서식하기 아주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물가도 저렴하고 여러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흑의 통로도 많은데다 관료들이 부패하면 사기 범죄에 특화될 수 있는 토대라 마련되어진다. 특히 6억 이상의 인구에 대다수의 서민들이 가난하다. 그러다보니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이 범죄 카르텔들을 심고 양산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한국과 중국 관련하여 온갖 불법적인 범죄들이 많이 생성되는데 대개 마약과 사기, 인신매매 범죄가 주를 이룬다. 중국 정부는 자국 내 범죄조직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강화했다. 앞서 포스팅 한 것처럼 안면인식 기술이 발달하고, 지문 날인 등의 범죄 수사 기법이 발달함에 따라 범죄조직들은 그 동력을 상실했다. 이들은 법망이 상대적으로 허술하고 부패가 만연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과 같은 지역은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개발된 경제특구이기에 치안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범죄 조직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범죄조직들이 중국을 빠져나가니 중국 내에서는 범죄가 줄어든 반면, 동남아시아나 한국 등에서 중국인 범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들 조직은 캄보디아 현지 당국이 묵인하기도 하고, 막대한 뇌물을 받고 이들을 비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규모 합숙 시설을 갖추고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었다. 피해자들은 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20~30대 청년층들이 많고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이러한 조직들이 동남아시아, 특히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에 자리잡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최빈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자들의 부패가 이루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범죄 조직들이 만들어내는 수익은 연간 125억에서 190억 달러로, 이는 캄보디아 1인당 GDP의 절반 이상에 해당된다. 이 정도로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기에 가성비도 매우 좋은 곳이 동남아시아, 특히 캄보디아 지역이다. 그래서 각종 흉악한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동남아시아로 도망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성비와 범죄 대상 물색하기에도 좋은데다 뇌물을 적당히 주면 숨어 있기 좋고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진행하여 큰 돈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조직의 운영 주체들은 동남아시아 지역 대규모 마약 밀매에도 연관되어 있는 마약 카르텔들이다. 따라서 이들 범죄조직들을 통해,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운영진 측에서 일부러 납치한 이들을 종속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약을 내부에서 퍼트리고 있다. 이 외에도 인신매매, 대포통장 및 대포차 거래, 무기 밀거래, 야생동물 및 광물 밀수, 금이나 비취 등 귀금속과 보석 밀거래, 불법 벌채 및 개간, 돈세탁, 아동노동 등 기존 동남아시아 범죄조직들이 벌이던 다양한 범죄 행위들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으로 인해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친중 국가들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왔고, 고속도로 등 기본 인프라 사업과 더불어 온갖 카지노 사업체들이 중국 건설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 이유는 중국 본토에서 도박과 대규모 카지노 영업 행위가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집권할 때부터 일부 종목들 정도를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에는 반부패 등을 내세워 이를 명목으로 카지노의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2022년부터 중국 공산당 고위직의 은밀한 돈세탁 경로로 애용되었던 마카오에서는 당시 양회 때 카지노 규제가 강화되기로 결정되면서 중국의 비리로 빼돌려진 돈들이 새로이 세탁할 수 있는 경로를 찾고 있었으며, 가까운데다 국가 상태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는 캄보디아가 새로운 탈세와 횡령 등을 세탁할 수 있는 신종 세탁소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마침 캄보디아도 이로 인해 벌어들일 수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특히 2015년부터 중국에서 넘어오는 온라인 도박 사업자들에게 사업자 등록까지 허가하고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에 해외에 카지노를 건립하여 중국인들을 유치하려는 사업체들이 도박하기 쉬운 곳을 찾다보니 캄보디아가 나타난 것이다. 특히 일대일로로 인해 새로운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시아누크빌에 카지노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정부들이 중국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사업상 권리 및 각종 자격이 되는 라이센스들을 뿌렸기 때문에, 중화권 국가들의 조직폭력계 삼합회를 비롯한 흑사회 조직들까지 이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게 되면서 이러한 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한 단지가 건설된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마카오 스타일의 중국 카지노 건물들은 시아누크빌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퍼지게 된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런 자들에게 해외 투자 알선을 시켜주고 이들이 동의하면 해외로 내보내 사업을 하게 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을 가보면 국경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수의 카지노와 클럽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캄보디아 일대일로의 중심인 시아누크빌은 중국의 카지노와 클럽 등의 유흥 사업장들이 점령해버린지 오래다. 중국의 카지노와 같은 유흥 사업장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국의 범죄조직들은 라오스 남부와 캄보디아 북부 지대의 메콩 강 중류 지역 마약밭에서 나온 다량의 필로폰들과 해로인을 판매하는 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를 유통하고 팔던 범죄조직의 총책은 흑사회였고, 흑사회 조직들은,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언론에서 ‘악마’, 혹은 ‘마약왕’ 등으로 묘사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갑자기 캄보디아 언론에 의해 존경스러운 소수민족을 선도하는 지도자로 둔갑했다. 특히 해당 지역은 다수의 카투족(Katuak)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 카투족들에게 얼마 간의 돈을 주고 마약밭을 관리하는 총책을 맡겼다. 이들 조직들은 중국 지방 정부의 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 마약에 대한 집중 조사가 이루어지고 단속이 강화되면서, 마약을 버리고 뛰어든 사업은 카지노와 클럽, 호텔 등의 유흥사업이었다. 이들은 유흥업소를 넘어 각종 온라인 범죄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온갖 온라인 사기 범죄에 쏠쏠히 재미를 보기 시작했고, 장기 밀매 사업까지 손을 댔다. 그리고 온라인 취업 공고로 사람들을 납치해 범죄에 이용하는 등, 그 수법이 날로 잔혹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중국 국적을 가진 자들, 혹은 중국계인데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과 공권력이 이들 범죄자들의 소탕전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를 이를 해결해야 하는데 중국 정부는 매우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들이 해결한다는 것에 대해 국제법상 내정간섭에 몰릴 수 있다며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최종 보스이자 배후가 중국 정부가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심을 피하려면 중국은 이제라도 제대로 입장 표명을 하며 범죄 조직을 소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데 중국 정부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방법이 캄보디아를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일까? 법무부 2021년 12월말 기준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캄보디아 국적자는 41,525명에 달한다 했고 외교부 홈페이지에는 2024년 기준 63,681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과 캄보디아의 다문화 가족인 "한캄가족"의 수효도 만만치 않다. 첫 번째, 캄보디아가 여행금지국이 되면 '예외적 여권 사용'으로 왕래해야 한다. 여행금지국가 지정 이전에 이미 해당국 영주권이나 거주권(체류자격) 등을 취득한 사람이 이에 해당되고, 나올 때는 개인자격으로 알아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여행금지국가 국민은 한국에 입국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주권이나 국적 취득자, 정상적인 비자를 받아 한국에 체류할 자격이 되는 사람은 외교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입국할 수 있기에 매우 까다롭다. 두 번째, '예외적 여권 사용자"는 대한민국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예외적인 방문 시 주의 사항"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행금지국가에 방문 또는 체류하게 되는 경우, 그 기간 중 본인에 대한 안전상 위해 또는 재산상 불이익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고, 정부에 일체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 말은, 여행금지국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 교민으로써 여러 이해관계와 사업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본인이 책임을 지게 되면서 정부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캄보디아에 기반을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 현지 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현재 외교부에 나와 있는 자료 내 캄보디아 한국 교민은 약 8,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면 꽤 많은 숫자고 러시아 거주 한국 교민보다 많은 숫자다. 이 많은 인원이 자신들의 사업을 정리하고 이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 번째, 한캄가족이 캄보디아에 살고 있을 경우다. 캄보디아 부인이나 자식이 한국 국적을 취득 못했거나 결혼비자를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특수 비자를 내줄 수 있겠는가? 내주게 된다면 한국 국내에서 반발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과 일부러 이혼하고 가정 깨고 한국으로 돌아오랴? 비자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고, 이들 가족들이 한꺼번에 한국에 들어오는 것도 좋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한 국가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간혹 잘 알지도 못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행금지국가" 지정 및 "단교"를 스스럼 없이 마구 발언을 남발하는데 한국인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 포용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자기 일이 아니니 마구 뱉어내면 그만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캄보디아 간의 공조로 한국의 공권력이 캄보디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범죄조직 단지들을 무력화시키고 범죄자들과 교전 및 체포하여 국내 법으로 처벌받게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정부가 해결할 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소탕하겠다는 것이다. 범죄자들이 체포에 불응할 시, 사살도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 생각되며 캄보디아 정부 입장에서 볼 때 국제적인 신뢰 문제도 있기에 이러한 협정 조인을 주장하면 조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어느 국가도 범죄 소굴 국가로 낙인 찍히는 것은 원치 않을테니 말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4
  • 중국 강남 개발의 역사 : 수 양제 시대에 건설된 대운하
    위진남북조 시대 약 400여 년 간의 중국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오랜 분단으로 인해 경제 문화적으로 남북 간의 차이가 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을 재통일한 수(隋) 문제(文帝)는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대운하를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인 재정 문제로 인해 계획에만 그쳤다. 하지만 아들인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완성시켰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이는 남북조 시대 등의 분열 시대로 인해 남북 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04년 수나라의 양제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605년에는 대공사를 일으켜 대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공사 계획의 핵심은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였다. 통제거(通濟渠)는 605년 개착되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지금의 낙양 서쪽에서 낙하(洛河)와 곡수(穀水)로 황하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형양(滎陽)의 사수(汜水)에서 출발하여 황허의 물줄기를 따라 변하(汴河)에 이어지며 회화(淮河)와 합류했다. 통제거(通濟渠)로 인해 황하와 회하(淮河)가 연결되자, 그 해 다시 운하를 개착하여 회하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3년 뒤에 다시 대공사를 일으켜 영제거(永濟渠)를 준설하였다. 영제거는 608년 준설되었으며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천진(天津)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영정하(永定河)를 따라 지금의 북경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2년 후, 강남 운하(江南運河)를 개통하여 여항(余杭, 지금의 항주)까지 연결하였다. 이 운하 개통은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2,700km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였다. 양주(揚州)와 진강(鎮江)에서부터 항주(杭州)에 이르는 구간은 모두 400km 정도로 여겨진다. 수도 낙양에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구간을 모두 합하면 1,700km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대사업을 추진한 것에는 수나라 도성인 장안의 식량 문제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나라 장안 주위가 척박한 땅이라 식량이 부족하여 이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수나라 식량의 주생산지였던 강남에서 말과 인부로 운반하기에는 도성까지 거리가 멀어 효율성이 떨어지며 수로로 운반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하 사업 자체는 국가에 필요한 일이긴 했다. 다만, 최소한 서민 경제 문제에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게 기간을 넓게 잡고 노역에 참여시킬 인원을 적당히 조정했어야 했는데, 결과만 좋으면 된다며 백성들을 강제로 투입시킨 게 문제였다. 거기에다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으로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운하에서 저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재림이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서 수 양제의 폭군적인 면모를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한(漢)나라 이후 개발되지 않은 매우 기후가 습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백성들을 매우 가혹하게 징집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는데 당시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발의 살이 썩어 구더기와 모기 유충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의 대운하는 말 그대로 장강과 황하, 회하를 연결한 것에 그칠 뿐이었다. 이는 강물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운하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팔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기술로 인해 2,700km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강물의 흐름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니 운송선이 운행할 때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게다가 운하가 장안까지 가야했지만 200km 동쪽에 있는 삼문협(三門峽)이라는 최악의 지형이 있어서 조운선은 안전을 위해 300km 동방의 낙양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낙양에서 장안까지 운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낙양 함가창(含嘉倉)부터 섬주(陝州)의 태원창(太原倉)까지 300리를 육상을 통해 물자를 이송해야 했는데, 물자 이송에 필요한 양도 매우 엄청나서 이동시 운송량의 반이 소모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수, 당나라 시기에는 대운하 개통 이후 현종(玄宗) 시기까지 비판을 받으면서 낙양을 장안 못지않게 중시했다. 당시에는 직접 황실과 조정이 낙양으로 행행을 했다. 양제나 측천무후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결국 현종 시기인 734년의 낙양 행행 이후 강회하남전운사(江淮河南轉運使)가 된 배요경(裴耀卿)이 삼문협 동쪽에는 집진창(集津倉), 서쪽에는 삼문창(三門倉)을 설치하여 이 두 조창 간에 뚫은 18리의 통로로만 육상 운송으로 이송시키게 했다. 이로 인해 육로 운반으로 소모된 경비를 무려 40만관이나 줄이는데 성공하여 이후 행행이 중단되었으며, 741년에는 섬주자사 이제물(李齊物)이 삼문협에 통로를 내고 강가에서 많은 끈을 이용해 배를 끌어 올리는 토목공사를 해 개원신하(開元新河)가 완공되며 문제를 많이 해소했다. 주전충(朱全忠. 852~912)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이후 세운 후량(後梁)부터 5대 왕조와 송(宋)나라, 금(金)나라까지 변량(汴梁)으로 수도를 옮겼고, 나중에는 갑문을 발명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후일 금나라가 북송을 정복하고 송나라 조정이 강남으로 피신할 때, 송나라 조정은 금나라의 군대가 대운하를 통해 자신들을 추적할 것을 염려해서 대운하의 각종 시설들을 모두 파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1194년, 수나라 양제의 대운하는 끊기고 말았으며, 대운하의 역할은 원(元)나라 시기에는 바닷길이, 명나라 때는 새로 개발된 대운하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다시 수리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수 양제의 대운하는 끊겨 있는 상태에 있다. 대운하는 장강 이남 지방의 개발과도 맞물려 있는데,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기와 대운하가 개통된 시기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강남의 물량을 화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화북 지방이 계속 지니고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14세기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원나라에 방문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대운하를 북경에서 발원하는 강이라 기록했다. 대운하가 개통되어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남쪽이 북쪽과 연결되어 중국 전체의 유통이 원활해졌다. 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대운하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학대했기 때문에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사실 당나라야말로 대운하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자체 생산력으로는 식량을 충당할 수 없었던 장안(長安)이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를 통한 물자 수송 덕택이었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개봉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경제적인 중요성이 높아지고, 이후 북송의 수도가 되었다. 개봉성의 성곽 중심을 운하가 관통하고 있었다. 대운하의 첫 번째 통로는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거 수리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먼저 통제거(通濟渠)를 파서, 북으로 탁군(涿郡)과 통하게 하였고, 이전에 팠던 광통거(廣通渠)와 연결하여 황하(黃河)와 회하(淮河)를 직접 연결하는 수로 교통이 뚫리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한구(邗溝)와 장강 남부의 운하를 개조하여, 장강, 회하의 여러 지류를 가로지르는 운하 체계를 완성했다. 대운하,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명성을 날리고 있는 중국고대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공사로 전 세계에 유명하다. 대운하는 북으로 탁군에서 남으로 항주까지, 북경, 천진의 두 직할시 및 하북, 산동, 강소, 절강의 4개의 성을 지나가며,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대 수계를 관통한다. 전체 길이는 1,784km에 이른다. 수 양제 양광이 건설한 대운하는 세계에서 하류 운수거리가 가장 길고 공사 량이 가장 많으며 역사가 가장 긴 운하중 하나이다. 운하의 건설에 동원된 인력, 물력, 재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형 운하 공사의 건설을 명하였고, 많은 민간의 인력, 물력, 재력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간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은 수나라의 조기 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수 양제 양광 본인에게도 중국 고대 제왕사상 좋지 않은 명성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隋書-煬帝本紀>上, 卷3의 기록에 의하면, 대업 원년, “하남의 각 군의 남녀 백여만을 보내어 통제거를 파게하고, 서원에서 곡, 낙수를 황하에까지 끌어들였다. 대업 4년에는 “정월 을사. 조서를 내려 하북의 여러 군의 남여 100여 만에게 영제거를 파게 하여, 심수를 끌어들여, 남으로 황하에 이르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했다.”라고 하였다. 우선 수 양제는 대운하를 파기 위하여 수백만의 백성을 동원했다. 이 같은 인력동원은 현재라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수 양제가 이처럼 대규모로 대운하를 파게 된 것에 관하여, 중국 민간에서 전해지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는 수 양제 자신이 운하의 수로를 따라 양주로 가서 미인들과 즐기는 것 이 외에도 양제가 수양(睢陽)의 지기(地氣)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때 한옥(韓偓)의 <開河記>에 의하면, “수양에는 왕기가 나왔다. 하늘에 점을 친 경순신은 황제에게 아뢰기를 500년 후에 천자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양제의 처남이자 간의대부(諫議大夫)인 소회정(蕭懷靜)은 운하를 파서 첫째는 광릉까지 가는 길을 열고, 둘째는 왕기를 파버리자고 한다. 양제는 그의 말을 듣고는 아주 좋아하며 대운하를 파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때의 제동야인(齊東野人)도 그의 장회소설 <隋煬帝艷史>에서 장회의 편명을 “경순신이 천자의 기운을 고하고, 소회정은 운하를 파는 계책을 바치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아주 상세하고 그럴듯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은 대운하를 둘러싼 야사이자 전설이다. 이것으로 역사의 근거를 삼을 수는 없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이 풍수상의 원인인지 아닌지는 이미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이유에 대하여 그 자신이 양주(梁州)에 가서 황음한 일을 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민간 전설들로 판단해 보자면, 대운하의 성공적인 건설은 최소한 수 양제로 하여금 그의 황음무도한 생활을 즐기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隋煬帝艷史>에서는 대운하가 개통된 이후, 양광은 양주경화(揚州瓊花)를 구경한다는 빌미로 여러 번 대운하를 따라 강남으로 가서 엽색 행각을 벌였다. 매번 대운하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양안에는 5색 깃발을 휘두르고, 그 기세가 융중했다고 전한다. 대운하가 지나는 소북의 민간에는 지금까지도 양제가 당시 양주에서 미녀와 즐겼던 황음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수나라 때와 수 양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서와 서적들을 조사하다보면, 그중에는 괴이하고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 사서와 서적에서는 야사 전설의 선입관으로 수 양제를 항상 황음무도한 일만 생각하는 후안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양제를 유사 이래 가장 추악하고 가장 잔혹하며 가장 황음한 폭군이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수 양제가 세계에 유명한 대운하 공사를 벌이고 여러 가지 역사적 업적을 쌓은 것과는 아주 배치된다. 마치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도 그 목적이 미녀를 만나기 위함이라든지, 왕기를 없애기 위함이라 폄하하고 있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수 양제는 양주의 미녀들을 모조리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즐기면 되지 굳이 운하를 축조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왕기를 없애는데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운하까지 축조할 이유 또한 없다. 그렇다면 재력이 많이 들고 사람도 많이 동원되는 대운하를 건설한 이유는 남북 지역의 통합을 염두해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수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히 양주로 미인을 보러 가기 위함은 아니었고 수양의 왕기를 없애기 위함도 아닌 국가 통합의 차원이었다고 본다. 오히려 양제는 물자가 풍부한 강남 지역의 많은 물자들을 북으로 운송하여 경도와 황궁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이 순유하고 시찰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에 대한 일례로 대운하를 판 후에, 강남 지역에서 낙양으로 운송되는 쌀, 비단, 진귀한 보물 등이 계속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일부 역사서적에서는 수 양제를 매우 황음하고 지력이 떨어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수 양제가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고, 당시의 문인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후일 양제는 요사스러운 폭군처럼 묘사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양자강 유역을 기준으로 화북 경제권과 강남 경제권이 분리다. 중국 역사에 있어 군웅할거의 주요 무대가 화북 지방에 집중되다 보니 주목받지 못했을 뿐, 수나라로 통일되기 전까지 강남 지역에서도 왕조가 계속 이어지면서 양자강 유역 이남의 개발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는 금(金)나라에 밀린 송(宋)나라가 강남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강남의 경제력은 송나라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반증이 통일 왕조 중의 하나인 수(隋)나라이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해 짧게 유지되다 망한 중국의 왕조로 여겨진다. 수나라는 400여 년 동안 고착화 되어있던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세워졌지만 안정을 회복하기보다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과욕으로 동북아시아의 또 다른 강자였던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력을 과도하게 소모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북의 물자로만은 부족하게 되니 풍요로운 강남을 이용하려 한다. 육로로 강남의 물자를 가져오는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을 파악한 수나라는 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강남 운하다. 현대의 기술로도 어려운 일이기에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엄청난 인원이 동원인 약 1억 5,000만 명으로 추정되어 남북으로 약 2,700km의 길이의 물길을 약 8년 만에 만들어냈다. 그 외에도 토목 사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는데 동원된 백성들의 원망으로 돌아선 민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경제의 중심이었던 여항(黎杭, 항저우)에서 시작된 운하는 정치의 중심 중 하나였었던 낙양(落陽)을 거쳐 북방 군사의 중심이던 탁군(涿郡, 베이징)까지 이어진다. 운하로 강남의 풍요가 화북까지 이어져 전쟁 준비는 마쳤지만 자만으로 시작된 전쟁은 패배는 귀결되었다. 짧았지만 강하고 단순했던 수나라로 인해 이후에 성립된 왕조들은 운하를 이용해 긴 기간 대륙을 통치할 수 있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4
  •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뇌부부터 말단 집단까지 포함한 다른 집단들의 연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하고 지휘할 수 있는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수뇌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콜차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 대도시들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보지 못했다. 병력도 적어 한계가 있는데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다보니 강력한 적군의 무력이 더욱 증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의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 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이 피지배계층이라고 무시하며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이자 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코사크와 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대의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를 유도해 투항시키거나 탈영을 유도했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했다. 백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파기되었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뀌어진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발트 해 국가들이 간섭 군과 더불어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중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 이 외에는 카프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리에 의해 7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이 긴 전쟁을 이미 치루었던 차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였던 데다 간섭 군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新韓村)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920년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부 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적군의 트랴피친(Тряпицын)의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볼셰비키 군에게 패배했고, 이 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 국가로 탄생되었다. 마지막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Анатолий Пепеляев)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볼셰비키의 포로가 된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까지 남아있는 외부 간섭 군대인 일본군도 1924년에는 완젆;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며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이에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들에 괴뢰 국가들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 행위에 영토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것에 급급하여 그러한 비어진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도 했으나 백군과 협동으로 인해 파르티잔들을 진압했고, 자국의 군대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反)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러자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측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1920년 반(反) 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인해 붕괴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4
  • 체코 총선이 끝나면서 부각되고 있는 "체코 이니셔티브"
    지난 10월 3~4일 양일에 걸친 체코 총선에서 ANO 2011과 당수인 안드레이 바비시가 승리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체코 이니셔티브"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체코 이니셔티브"는 2024년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페트르 파벨(Petr Pavel) 체코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 이니셔티브’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에는 80만 발 규모로 시작된 지원 계획이었는데 2024년 4월에 2025년 말까지 180만 발로 대폭 확대하겠다고까지 선언했다. 당시 체코의 야나 체르노초바(Jana Černochová) 국방장관은 2024년에만 다양한 구경의 포탄 150만 발을 공급했다고 발표하면서 이는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될 것임을 언급했다. 체코 정부는 2025년 가을까지 대(對) 우크라니아 지원을 지속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밝혀욌다. 특히 155mm 및 152mm 대구경 포탄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했다. 이는 미국의 군사 원조가 지연된 바 있었던 2024년 초, 우크라이나가 겪었던 포탄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것에 크게 기여했다. 체코 이니셔티브 발표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포탄 수의 격차가 축소되는 추세를 보였었다. 얀 리파브스키(Jan Lipavský) 체코 외교장관은 이와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 간의 포탄 사용 비율이 1:10에서 1:2로 크게 개선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전장 방어 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페트로 피알라와 파벨 대통령이 주선한 성과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영토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자국 영토의 80%를 방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포탄 공급은 전쟁의 향방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체코 이니셔티브"의 추진 과정에서 엄청난 도전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러시아는 "체코 이니셔티브"로 인한 포탄 제공과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유포했는데 주로 러시아 측이 제기한 부분은 품질과 성능에 대한 의혹이다. 이에 체코와 네덜란드 등에 소재하고 있는 독립 조사 기관들이 공동으로 실시한 국제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가 체계적인 허위 정보 캠페인을 통해 "체코 이니셔티브"의 신뢰성을 훼손하려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2024년 가을, 일부 언론들은 "체코 이니셔티브" 책임자들에게 전달된 다수의 서한을 입수하였는데, 이는 155mm 포탄의 신관 메커니즘 결함으로 인하여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를 체코와 우크라이나 정부가 덮고 은폐했다는 주장과 내용이었다. 그러나 토마시 코페치니(Tomáš Kopečný) 체코 정부 대표는 이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러시아의 조직적인 허위정보 유포 시도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실제 조사에서도 품질 관련 문제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와 같은 상세한 조사 과정은 결국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어 중개 기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투명성이 떨어지고 수수료를 횡령했다는 폭로를 하고 있다. 이는 "체코 이니셔티브"를 중개하는 기업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공개 입찰이나 투명한 선정 기준 없이 5개의 체코 기업 만을 선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이는 EU 내에서도 몇 차례 지적되었던 부분이었다. 특히 일부 중개 기업들이 체코 정부 관료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서로 양분하여 나눠 먹을 수 있는 방산 비리의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처럼 체코 현지 기업과 현지 정부 간의 이해 상충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프로젝트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동유럽 특유의 부패 관행은 EU와 영국, 미국조차도 감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언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체코의 공여 자금으로 포탄을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전달하는 중간 역할 수행하고 있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비리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체코 중개기업들이 부과하는 최대 13%의 수수료 또한 의혹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수수료는 우크라이나의 국영 조달기관의 상한선인 3%의 4배 이상이다. 이에 마리나 베즈루코바(Марина Безрукова) 전 우크라이나 국방 조달청장은 유럽 공여국들의 자금이 직접 우크라이나로 이전되지 않는 현행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다만 체코 측은 이와 같은 수수료가 안전한 포탄 운송과 책임 보장을 위한 추가 비용을 포함한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그 사이 관계자들끼리 해먹을 것은 다 해먹고 우크라이나에 보내고 있는 실정일 것으로 본다. 필자가 경험한 동유럽은 충분히 그와 같은 비리가 통용되고도 남을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체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 지원이 널리 확대되었다. 캐나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등 나토 회원국들이 자금을 지원했고, 체코가 포탄을 구매해 우크라이나에 넘겨주고 있는 셈이다. 2025년 4월을 기준으로 유럽 국가들은 "체코 이니셔티브"에 총 8억 3,100만 유로(약 9억 4,30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특히 나토의 회원국인 캐나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등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면서, 안정적인 포탄 공급을 위해 재정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체코 이니셔티브"는 EU가 100만 발 포탄을 조달할 계획과 다르게 EU 역내 시장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 시장에서 포탄을 조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꺼려하는 국가들로부터도 포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전제가 생긴다. 이에 EU의 계획보다 더 효과적인 공급망 구축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10월 체코 총선을 앞둔 2025년 9월까지 매월 정기적으로 포탄 공급이 보장되었다. 이에 얀 리파브스키 외교장관은 현재 확보된 자금으로 2025년 9월까지 매월 정기적인 포탄 공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총 15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체코 이니셔티브"는 EU 회원국과 비회원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 차원의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는 우크라이나의 장기적인 방위력 강화에 기여했지만 러시아군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체코 이니셔티브" 또한 그 효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편, ANO 2011을 중심으로 한 체코 야당은 2025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했을 시, "체코 이니셔티브"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응하여 젤렌스키는 지난 5월 초, 체코를 방문했을 때, 야당 인사들과의 면담을 통해 이니셔티브의 지속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합의 도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젤렌스키는 체코의 지속적인 지원이 우크라이나 방위에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총선에서 ANO 2011이 승리를 거둠에 따라 안드레이 바비시가 총리로 복귀한 즉시, "체코 이니셔티브"는 완전한 종결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4
  • 싱가포르의 강력한 처벌주의인 "싱가포르 법 집행 모델"을 중국인 무비자 입국에 맞춰 적용해야
    싱가포르는 벌금의 나라라 지칭될 정도로 도시 정화와 질서 유지가 매우 엄격한 국가다. 리콴유는 중국인이 갖고 있는 좋지 않은 습관과 관습들을 모두 뜯어 고치겠다며 갖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까지 모두 벌금을 물도록 강력히 규제했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북한이나 원리주의 이슬람을 주창하는 국가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벌칙이 강한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물론 중국과 같은 공산권도 벌칙이 강한 경향이 있으나, 이는 정치범이나 사회적 중범죄에 한하여 강한 경향이 있지만 쓰레기 무단투기와 같은 경미한 환경적 행위나 교통 위반 같은 경범죄의 같은 경우는 오히려 한국에 비해서 중국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외국인들 또한 싱가포르에서 범법행위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 일이 없다. 그런데 지하철 등 대중교통 내에서 취식금지 규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벌금을 쎄게 물고 나서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공공기관, 버스, 박물관, 도서관, 공연장, 엘리베이터, 슈퍼마켓, 백화점, 병원 등은 금연구역이다. 싱가포르는 주택 등 실내에서 흡연이 금지구역이라 층간 흡연 문제가 발생하면 벌금 물게 되어 있다. 누군가가 담배 냄새가 나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건물 내에서 연기를 감지하고 화재경보기가 바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것이 담배 연기로 판명되면 막대한 벌금을 물게 된다. 금연구역 외에는 재떨이가 있는 쓰레기통에서 담배를 태울 수 있는데 싱가포르인의 70%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로 이들 중 애연가들이 많으며 토종 말레이인들도 애연가들이 많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흡연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담배를 혐오하고 있기에 편의점에서 담배는 뭔가 진열장 같은 곳에 가려 놓으며 내놓고 팔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한국이나 일본의 편의점 계산대 뒤에 존재하는 담배 스탠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No ID No Sale” 등의 문구가 적힌 미닫이 문 형태의 진열장에 넣어놓고 판다. 이처럼 싱가포로 정부가 담배를 혐오하는 이유는 리콴유가 생전에 음주, 흡연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만약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곳에서 흡연하다가 적발되면 5,000 싱가포르 달러(SGD)의 벌금이 부과된다. 이 금액은 한화로 약 546만원이다. 한국도 금연구역에서 흡연시 과태료가 부과되는 것은 같지만 10만원 안팎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싱가포르와 비교가 불가하다. 그리고 술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밤 10시 이후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다. 싱가포르가 유독 타 선진국들보다 밤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나마 있는 유흥주점인 KTV도 밤 10시 이후에는 문을 닫아야 한다. 그리고 가벼운 맥주집이나 레스토랑도 밤 10시 이전에 일찍 문을 닫게 되어 있다. 대신 집 안에서 마시는 것은 자유다. 이와 같은 규제가 생성된 계기는 2013년에 리틀 인디아 외국인 노동자 폭동 때문인데 당시 폭도로 돌변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술에 취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을 공원이나 돌아다니면서 마실 경우, 밤에는 100% 경찰서에 끌려가고 낮에는 사람들이 주의를 주며 이를 규제한다. 그리고 음주를 하고 싸움을 벌일 때 폭력 행위는 무조건 강력 처벌한다. 폭행 당사자는 감옥으로 간 이후, 태형을 선고 받고 매를 맞게 된다. 음주하고 싸움이 잦은 차이나타운에는 특히 폭력 행위에 대한 강력 처벌을 강조하는 계도 포스터가 간체자로 된 중국어와 영어로 공동 병기되어 있다. 싱가포르의 도로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다 적발되면 약 300 SGD (한화 약 32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대중교통 탑승 중 생수를 포함한 음식물을 섭취하면 500 SGD (한화 약 54만원) 정도의 벌금을 내야 한다. 그래서 음식물은 왠만하면 어느 건물 내부에서 먹고 대중교통에서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특히 이 같은 규제가 없는 것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이를 어겨 벌금 많이 물고 있다고 한다. 껌의 경우, 의학용 등 일부를 제외하면 전혀 판매하지 않으며 관광객이 자국에서 가져온 경우라도 공공장소나 거리에서는 껌을 씹을 수 없다. 게다가 껌은 싱가포르 내 반입 금지 물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껌 등 지정된 반입 금지 물품을 대량으로 소지하다 적발되었을 경우에도 1,000 SGD (한화 약 109만원)이다. 이어 공중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후 물을 내리지 않는 것 또한 불법으로 규정된다. 싱가포르는 영토가 작고 적도에 가까운 열대 기후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용변을 내리지 않고 방치하면 큰 위생 문제가 될 수 있어 더욱 예민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요즘 싱가포르의 공공 시설들은 보통 센서식 변기가 많다. 그래도 수동으로 변기 내리는 곳도 있기 때문에 경찰들이 잠복했다가 벌금 물리며 화장실에서 껌을 몰래 버리거나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도 같은 불법 위생 혐의가 적용된다. 음주운전 또한 마찬가지로 예비 살인, 혹은 살인 미수로 보여지며 음주운전으로 인명사고를 내면 살인 미수, 혹은 1급 살인죄로 교도소에 들어가 태형을 처벌 받는다. 또한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차량을 통해 월경을 할 때는 자동차 연료 탱크에 연료가 2/3 이상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다. 만약 2/3 미만일 경우에는 역시 벌금을 물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법안이 존재하는 이유는 말레이시아의 물가가 싱가포르보다 훨씬 더 저렴하기 때문에 이를 규제하지 않으면 싱가포르인들이 물가가 저렴한 말레이시아로 가서 기름만 채우고 넘어오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교통법 또한 매우 엄격한데, 보행자 무단 횡단은 잘 잡지는 않은 편이지만 차량이 신호 위반을 할 경우 단속이 심한 편이다. 보행자의 경우, 싱가포르는 불시에 무단 횡단 또한 단속하기 때문에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건너는 것은 당연하다. 교통법규 위반은 3회면 면허 정지를 당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구급차, 소방차의 길을 내어주지 않거나 음주운전을 할 경우 벌금이나 징역과 더불어 태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사기, 마약 운반, 피싱 등은 징역형이나 태형 10대 이상, 심지어 마약으로 인해 사형까지 선고받고 집행되는 것이 일상이다. 참고로 싱가포르는 마약 관련 범죄는 단순 소지나 운반도 무조건 인종 및 성별, 나이 불문하고 무조건 사형에 처해진다. 실제로 싱가포르의 성범죄율이나 강력 범죄율은 타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 선진국들의 오랜 신경을 쓰게 만드는 마약 문제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운 국가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 성범죄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싱가포르라는 나라 자체가 성범죄에 태형을 가하는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징역 몇 년과 더불어 태형 동반(Mandatory Caine)으로 형법상 성범죄 처벌에 대해 태형 집행을 명시했다. 특히 아동 성범죄의 경우, 태형 대 수는 배로 올라간다. 길거리에서 들개나 길고양이, 새, 그리고 수달이나 들닭 등의 야생동물에 멋대로 먹이주는 행동도 엄격히 금지하며 이를 어길 시 막대한 벌금이 부과된다. 싱가포르는 부과된 벌금을 제때 지불하지 않으면 10배가 넘는 2차 티켓이 날라오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싱가포르의 강력한 처벌주의인 "싱가포르 법 집행 모델"을 이제 한국에도 적용시켜야 할 때가 왔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비자 입국에 대응하여 그들의 비도덕적 행위, 무례한 행위, 각종 범법 행위 등에 대해 강력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강력한 "싱가포르형 모델"의 처벌 법으로 도시 청결 및 치안도 안전하게 유지하고 쎄게 물린 벌금은 우리의 국가 내 재정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된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어차피 중국인의 무비자 입국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이미 발생한 사안이라 다시 무비자 입국을 도로 물릴 수도 없다. 결국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이들의 행위들에 대한 대책을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2
  • 2025년 체코 총선,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의 재등장과 대(對) EU, 우크라이나 관련 정책 변화 가능성 (하)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는 올 9월 들어 지지율이 최고조 올라오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1일 의회선거 유세 집회 중에 괴한에게 금속제 둔기로 머리를 맞는 테러를 당해 병원으로 후송됐기 때문이다. 바비시는 체코 동부의 도브라시에서 이날 오후 지원 유세 중에 한 남성이 금속제 의수로 머리를 내리치는 테러를 당했다. 체코 경찰은 현장에서 테러공격 용의자를 즉시 체포했다. 이 날 현장에서는 바비시 외에도 여성 한 명이 다쳐서 치료를 받았다. 우선 바비시는 뇌 CT 촬영 등 모든 검사를 마치고 일단 퇴원했다. 바비시는 그날 밤 소셜미디어 X를 통해 "이번 테러 때문에 2일 선거운동 일정을 취소한다. 여러 가지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고 의사들도 휴식을 권해서 불행하게도 선거유세를 중지해야 한다. 올로모우츠 주 지역의 일정은 취소가 불가피하다(Kvůli tomuto teroristickému útoku jsem zrušil svůj dvoudenní kampaň. Musím počkat na výsledky různých testů a lékaři mi doporučili odpočinek, takže bohužel musím kampaň pozastavit. Zrušení mého programu v Olomouckém kraji je nevyhnutelné)."고 밝혔다. 우선 경찰은 일련의 테러 사건을 정신 이상자의 공격 범죄로 보고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의 카렐 하블리첵 부의장은 자신의 X 계정에 "이번 일은 선거 폭력이며 정치적 동기에 의해 경쟁자들이 가하는 폭력 테러"라고 주장했다. 체코의 선거는 10월 3, 4일 치러지는 의회 하원 선거로 치열한 선거전이 계속되면서 야당 의원들에게 테러 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공격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국의 트럼프도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 암살 위기를 겪었다. 하물며 체코에서도 반(反) EU 성향인 바비시를 EU에서도 좋게 볼 리 없다. 특히 벤자민 롤이 이끄는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과 같은 NGO 단체들은 과격행위를 해서라도 바비시의 총리 등극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괴한의 정체는 정신이상자라기 보다, 벤자민 롤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시 집권 총리가 친 EU 계열인 페트로 피알라라는 것을 감안할 때, 제대로 된 수사나, 정신 이상자의 공격 범죄라는 단순 범죄로 끝내려 했을 가능성 높다. 여기에서 바비시는 우선 그 괴한늘 쿨하게 용서했다. 괴한은 사건 후, 이틀 뒤 바비시에게 사과했고, 바비시는 허위 정보에 현혹된 것이라며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테러와 바비시의 쿨하게 용서한 행위 등은 오히려 체코 시민들의 지지율을 높게 만들었다. 바비시는 필자가 지난 상편에 언급했던 그의 회사인 에그로퍼트의 EU 보조금 관련 사기 혐의 등 법적 리스크에 직면해 있는 상태였지만 유권자들에게 세금을 감면하고, 연금을 인상시킬 것이며, 에너지 가격에 상한제를 둔다는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급여 동결시키는 등, 유권자들이 원하는 부분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EU가 강권하다시피하던 불법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와 기후 변화 정책에도 반대했다. 이어 피알라 정부가 체코의 어머니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며 우크라이나 지원 정책에 대한 반발심을 드러냈다. 체코의 우크라이나 탄약 지원 계획에 투명성이 부족하다며 폐기도 공언함으로써 우크라이나에 대한 체코의 무기 지원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바비시는 본인의 SNS인 X에서도 "체코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끌려가고 있다(Česká republika je zatahována do Ukrajinské války)"라고 주장하면서 체코 정부는 슬로바키아 정부와 공동으로 상호 발전을 위한 여러 안건들을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토 피초 총리와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피알라 정권의 얀 리파브스키(Jan Lipavsky) 체코 외무장관은 바비시 전 총리를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친러주의자라 비판했다. 이에 바비시는 리파브스키 외무장관에 대해 갖은 비하 발언을 쏟아내었고, 장관의 가족들을 조사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긴 이메일이 유출되면서 크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ANO 2011이 여론조사에서 큰 격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고, 이에 체코 정계의 전문가들은 향후 바비시가 체코의 외교 정책을 재편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지만 슬로바키아의 피초와 헝가리의 오르반과 함께 EU보다는 친러로 다른 EU 국가들과 대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는 최근 친러 성향을 갖고 있는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과 유사한 행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슬로바키아의 외교 정책 기조를 전환한 로베르트 피초(Robert Fico) 총리에 대해 바비스가 지지를 보내는 등 향후 체코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그러면서 다가온 10월 3~4일 총선에서 체코 통계청이 약 98% 투표소에서 개표한 결과 바비시의 ANO 2011은 35%의 득표율을 기록해 1위를 차지했다. ANO 2011은 수도 프라하를 제외한 13개 주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득표율에 따라 바비시의 ANO 2011은 전체 200석에서 80석을 확보했다. 반대로 페트로 피알라 총리의 중도 보수 스폴루(SPOLU)는 23%로 2위에 그쳤으며 피알라 연정에 참여하는 STAN당은 11.1%, 진보 성향의 해적당은 8.7% 득표하면서 ANO 2011에 크게 밀렸다. 득표율 5%를 넘기지 못한 다른 정당들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그러나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연정 구성을 위한 회담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며 SPD와 운전자당의 지지를 확보해 단독으로 소수정부를 꾸리고 조금씩 EU와 거리를 두겠다는 발표를 했다. 체코 운전자당(Motoristé sobě)은 친(親)석탄과 자유시장 노선을 지지하며, 자전거 정책에 반대하고 있는 정당이다. 강한 EU에 대한 회의주의 시각을 갖고 있고, 유로화 도입, 유럽 그린딜(녹색 정치), 젠더 이데올로기, 다문화주의에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 정체성과 문화 보존을 강조하며 이를 적극 장려한다. 전반적으로 국민보수주의와 우익대중주의가 혼합되어 있는 정당이라 볼 수 있다. SPD는 자유와 직접 민주주의(Svoboda a Přímá Demokracie)라는 정당의 축약어로 반(反) 이민, 반(反) 난민, 반(反) 이슬람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SPD는 이민자들이 주축이 된, 체코에서 매우 특이한 정당이다. 당수는 토미오 오카무라(岡村富夫, Tomio Okamura)라는 일본 출신의 체코인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토미오 오카무라는 일본인 출신이지만 재일교포 3세라는 특이성까지 갖고 있다. 첨언하자면 토미오 오카무라는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인 오카무라 헬레나는 체코 모라비아 왈라키아 출신으로 1966년 그의 한국계 일본인이었던 부친 마스 오카무라(益岡村)와의 결혼하여 따라 도쿄로 이사했다. 어머니가 체코슬로바키아로 아들인 토미오와 함께 돌아오기 전까지 생애 첫 10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체코 국적으로 귀화하여 2012년 체코 원로원(체코 상원) 즐린 선거구 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체코 정계에 나서게 된다. 그는 2014년 3월 의회 연설에서 그린카드를 받은 외국인이라도 직업을 얻지 못하면 귀국해야 하며, 체코 내에서도 사회보장 혜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우익적인 주장을 펼치며 체코 내, 강성 보수 우익 인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ANO 2011과 SPD, 운전자 당과 같은 연립 정당들은 헝가리 피데스(Fidesz), 마린 르펜의 프랑스 국민연합(RN),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 독일의 AfD 등과 함께 유럽을 위한 애국자(PfE)라는 이름의 EU 의회 교섭 단체를 만들며 우파들끼리 연계하고 있다. PfE 소속 정당들은 하나 같이 EU 통합과 대(對)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바비시는 자신을 평화주의자라 내세우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종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비시의 이력과 그가 총리 1기 때 했던 정책들을 봤을 때, 평화주의보다 체코, 자국 위주의 실용주의적인 면이 더 돋보였던 인물이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체코 정국의 안정과 자신이 가질 총리직, 그리고 체코만큼은 LGBTQ와 같은 비상식적인 젠더 놀음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바비시가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나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처럼 친(親) 러시아 색채를 대놓고 드러낸적은 없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 역시 전면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체코는 거기에서 빠지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체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중도보수 연정과 나토 군사위원장 출신인 페트로 파벨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전폭 지원하고 있었다. 피알라와 파벨은 2024년부터 서방 각국에서 돈을 모아 우크라이나에 탄약을 사주는 일명 '체코 이니셔티브'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체코 이니셔티브는 체코의 피알라-파벨이 주도한 EU와 나토로부터 탄약과 포탄을 구매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방식이다. 당초 80만 발 규모로 시작된 지원 계획을 2025년 말까지 180만 발로 대폭 확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인데 야나 체르노초바(Jana Černochová) 체코 국방장관은 2024년에만 다양한 구경의 포탄 150만 발을 공급했다면서 시작 테이프를 끊었다. 우크라이나는 체코로 인해 155mm 및 152mm 대구경 포탄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했으며 포탄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총 15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체코 이니셔티브는 EU 회원국과 비회원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 차원의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얀 리파브스키 외교장관은 현재 확보된 자금으로 2025년 9월까지 매월 정기적인 포탄 공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ANO 2011의 총선 승리로 인해 체코 이니셔티브는 막을 내릴 것으로 보여 진다. 총선에 앞서 체코 피알라 정부는 반러 조치도 단행했다. 9월 30일 체코 외무부는 안보 우려를 들이대면서 국제공항 6곳에서 러시아 외교 및 공무 여권 소지자에 대한 입국금지 조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체코 정부의 승인이 있거나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경우에는 입국이 허용되지만, 러시아 정부가 발급한 외교 및 공무 여권의 효력을 통째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조치는 EU 국가에서 체코가 처음이다. 체코 외무부는 이어 지난 8월 1일에는 러시아 내 모든 체코 비자 신청 센터에서 비자 신청 접수를 중단했다. 그러나 바비시는 이를 원상태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여러 인터뷰에서 러시아와의 더 큰 전쟁을 피하기 위해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도 강조했다. 최근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드론이 침범했던 사례 등으로 대러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에 체코의 여당 측은 대대적인 "러시아풍"을 내세우며 안보 위기를 선거 유세의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선동했다. 피알라는 유세 도중 "체코 공화국이 완전한 자유, 번영와 함께하며 확고하게 서방의 한 부분인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것인가, 또는 동쪽의 어떤 곳으로 전환할 것인가(Otázkou je, zda Česká republika zůstane silnou demokracií, pevně součástí Západu, s úplnou svobodou a prosperitou, nebo se obrátí k něčemu dále na východ, kam zamíří)"를 주장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개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바비시와 ANO 2011의 손을 들어줬다. 체코는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함께 한 배를 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2
  • 오늘 10월 10일은 대만에서는 쌍십절(雙十節), 우창 봉기로 인한 신해혁명(辛亥革命) 114주년
    청나라 말기인 1911년 당시에는 이홍장과 서태후라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 모두 사라진 상태로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을 노리며 넓은 대륙을 잠식해 들어오던 도중에 청나라의 지식층들은 황실을 사수하여 열강들로부터 중국을 방어하자는 수구파와 서구의 영향으로 입헌군주제로 돌리고 영국처럼 의원내각제 가야 한다는 입헌파, 그리고 민주적인 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 등으로 3분할 되어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각종 한족과 중화사상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 비밀결사 등이 개입하면서 중원의 혼란상은 날로 극심해져만 갔다. 1911년 5월 8일 황족인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Aisin-Gioro Yikuang)을 초대 총리대신으로 출범시킨 청나라의 첫 번째 헌정 내각은 많은 개혁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청나라의 일부 전향적 조치에 기대하고 입헌내각운동을 벌이던 자들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내각에서 한족은 13명 중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만주족들의 각료 가운데도 수상인 경친왕을 제외하더라도 7명이 황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개혁과 반대로, 만주족 귀족들과 황족들이 청나라 내, 이권을 완전히 독식하려는 의도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우전부(郵傳夫, 우체-통신부) 대신이었던 성선회(盛宣懷, 성쉬안화이)라는 인물이다. 청나라의 지도층은 성선회의 주도로 민영으로 돌아가던 자국의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담보로 삼아 열강들에게 차관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는 고스란히 빚이 되어 쌓여만 간다는게 문제였다. 중국의 장거리 철도가 제대로 부설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예산은 서태후가 이화원 중건과 더불어 회갑연 등에 사용한 예산이었다. 이 예산은 명목상으로 해군예산이었지만 이 중에는 텐진에서 산해관, 봉천(奉天)을 거쳐 길림까지 부설하려던 철도 건설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때만 해도 해군아문(海軍衛門)에서 철도 부설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철도 건설 예산도 함께 편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산 편성도 서태후의 이화원 중건으로 탕진하는 바람에 청나라는 한반도로 대규모 병력을 전개시키지 못해 청일전쟁의 패배를 야기했다. 참고로 청나라가 철도 부설하려고 여순에서 생산했던 6,000톤의 레일은 결국 청일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전리품으로 넘어갔다. 중국이 건설한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唐山, 현 탕산시)에서 석탄산지 서각장(胥各庄)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 후일 이 철도는 톈진까지 이어졌다. 이 철도는 6월 9일에 개통되었으며 개통일인 1881년 6월 9일은 조지 스티븐슨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날을 개통식으로 삼은 것은 이홍장의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또한 중국인이 설계하고 공사한 최초의 철도는 첨천우(詹天佑)가 건설한 북경에서 장자커우(張家口)까지 180km의 거리로 이루어진 경장선(京張線)이었으며 1905년부터 1909년까지 건설했다. 북경에서 한구(漢口)까지 경한선(京漢線)이 건설된 정도였다. 그 외에는 북경에서 남경(南京)과 연결된 경포선(京滬線), 북경에서 봉천까지 연결된 경봉선(京奉線)을 1912년까지 건설하는 상태에 있었다. 특히 길이 1,212km의 경한선(京漢線)은 개통 첫 해인 1906년에만 350만 냥이 넘는 수입을 올리면서 철도가 어느 정도 돈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이는 철도 건설이 붐이 일었을 정도로 청나라 전국에서 철도 건설 사업이 이어졌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청나라의 철도 총연장은 9,000km에 이르렀을 정도로 광범위해졌다. 1897년 당시 양자강을 지나는 지역에 철도 관련 부설 이익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광저우(廣州)에서 한구까지 이어지는 철도인 월한선(越漢線)을 부설하는 것을 제안했다. 40년 동안 청나라를 부국강병 시키키 위해 전력을 다한 성선회는 이를 영국의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철로 부설권을 영국이 가지게 되면, 청나라는 주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상황에서 1900년 미국 자본(미국합흥회사)을 빌려 철도 국유화를 추진했다. 영국에게 받은 차관 400만 파운드를 연 5.9%로 철도 운영을 통해 30년 동안 갚아 나가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일이 잘 된다면 북쪽의 북경에서 내려오는 경한선과 남쪽의 월한선이 이어지면서 북경에서 광저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이 완성되는 것이었고 아마 광동 지역 개발도 동시에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이 철도 건설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었다. 첫 번째, 기술의 문제였다. 신해혁명이 발생한 1911년 당시 월한선 철도는 광저우에서 광동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와 주저우(株洲)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구간이 1911년에 간신히 개통되었고 우한에서 장사를 연결하는 구간의 공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 역사적으로 월한선은 여러차례의 중단 사태를 거쳐 1916년에 광저우 북쪽 삼수(三水)에서 소관(韶關)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1918년에는 우한-장사 구간이 완성되고 마지막 남은 소관-주저우 구간은 북벌로 인해 국민당 정부가 들어선 1929년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시작되어 1936년에 전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중국을 남북으로 철도를 연결시키겠다는 발상은 우한에 양자강 철교가 지어지는 1957년에 완성되었다. 이런 부분들은 지속되는 전쟁과 국내 혼란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두 번째로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와 같은 국유화 작업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민간 자본으로 실시하는 철도 부설하는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1903년 당시 사천성(四川) 총독이었던 석량(錫良, 시량)은 횡으로 이어진 철도인 사천-한구를 연결하는 천한선(川漢線)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외채가 아닌 민간자본에 의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그러자 이러한 의견을 청나라에서는 "철로간명장정(鐵路簡明章程)"으로 철로의 민간부설을 허가하게 된다. 그리고 1905년 서태후가 총애했던 신하인 장지동(張之洞)은 호북(湖北), 호남(湖南), 광저우의 대표들을 모아 신상회의(紳商會議)를 소집하여 월한철도 부설권을 회수하게 된다. 이에 미국합흥공사에 675만 달러까지 돌려주면서 상인들의 주도로 일부는 관청과 합작하여 대량의 민간철도들이 부설되었다. 게다가 이는 단순히 중국의 유지, 유한 계급들의 금액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서민들과 거지들의 돈까지 모았는데 이것이 후일 폭동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성선회의 입장에서는 민영자본에게 이를 맡긴다는 것은 철도를 오히려 망치는 것이라 판단했다. 성선회의 원칙은 철도는 국력이기 때문에 지분 분할보다는 차관으로 외국자본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투자 회수가 길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철도 산업이 국영화가 필요하다는 성선회의 견해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 주도로 넘어간 이후, 중국의 철도는 더더욱 개설이 늦어지게 된 것이다. 성선회는 장지동을 설득하여 민간 부설권을 회수해 1909년 독일, 영국, 프랑스 은행의 돈 550만 파운드를 빌려 지금의 호남 지방과 호북 지방의 철도 차관 계약을 실현했다. 물론 민간 진영들의 반대는 매우 심각했고 결국 장지동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성선회는 민간 진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도 국유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차에 성선회가 새로운 내각의 우선부대신으로 오른 것이다. 그는 1911년 5월 민영화된 월한선과 천한선 전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조정에 주청했으며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직예(直隷), 호광(湖廣) 총독을 거친 단방(端方)을 내려보내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러나 갑자기 언제 돌려줄지 모르는 국가 보증만을 남기고 재산이 휴지조각이 된 자들은 여기에 가만 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식을 대신한 공채들은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보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4개 국 은행단에 600만 파운드를 연리 5%, 40년 안에 상환하기로 하면서 사천, 광동, 호남, 호북의 염세와 이금, 탄광까지 담보로 맡겼다. 결국 청나라의 민중들에게 있어 철도의 국유화가 오히려 철도를 외세에 팔아먹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일부 지역인 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 구간의 철도 공사는 중단되기도 했다. 결국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4일 창사에서 국유화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창사에서 주저우까지 철도 노동자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각지에서 서민들의 이권수호운동이 발생했는데 이를 보로운동(保路運動)이라고 한다. 이를 조직화된 것이 바로 보로운동회(保路運動會)다. 이어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도 나타났다. 특히 성선회를 민족의 역적으로 인식하여 그를 능지처참하자는 분위기가 사천성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결국 9월 7일에는 강력 토벌에 나선 경찰들로 인해 보로운동의 수뇌부가 체포되었고, 이에 사천성에서 일어난 10만 명이 넘는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경찰과 서민들 사이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강에 띄운 유동나무 목판인 "수전보(水轉報)"는 수백판이 금강을 따라 떠내려가며 소식이 삽시간에 사천성 전역에 전달되었고 이어 보로운동회의 봉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9월 말 사천 영현(榮縣)에서 첫 봉기가 성공하였다. 이어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의 도시 기능이 마비되면서 사태는 사천성만으로 축소시키기에는 무리가 되었다. 결국 이를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군대가 민중 봉기의 거점인 사천성으로 투입되었고 이로서 호북 지역의 중요한 군사 거점인 우창에는 군대가 비어 있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명분을 얻은 우창의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인 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는 정부군의 파병을 구실로 1911년 10월 10일, 마침내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우창의 8사단 공병 제8 대대의 부사관과 사병들부터 시작하여 보병, 포병, 사관생도까지 가세했다. 총독 서징(瑞澂)이 도주했고 혁명군은 당일 우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민주공화정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 정부 수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 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라 지칭되고 있다. 신해혁명이 1911년 10월 10일에 일어나 십(十)이 두 번 들어가서 쌍십절(雙十節)이라 붙여지고 중화민국(中華民國), 현 대만 정부는 오늘을 중요한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1
  • 2025년 체코 총선,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의 재등장과 대(對) EU, 우크라이나 관련 정책 변화 가능성 (상)
    지난 10월 3일, 4일의 양일간에 체코에서 총선이 있었다. 이 총선에서 우파 정당인 ANO 2011이 압승을 거두며 기존 동유럽에서 EU의 영향력에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4년 만에 여당에 복귀한 ANO 2011은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다 2011년에 설립한 정당이다. ANO는 체코어로 '맞아'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불만족스러운 시민의 행동(Akce Nespokojených Občanů)'의 약칭이기도 하다. 이 정당은 체코 제1의 부자인 바비시가 좌파를 극도로 혐오하여 급조한 정당이었는데 점차 체코 정계의 지평을 넓혀가면서 각계를 대표하는 대표 정당에까지 올라섰다. 여기에 바비시의 철학이 결집되어 있는데 우선 국가의 부패를 척결하고, 정치인에 대한 면책특권을 폐지하며, 실업과 싸우고, 교통 인프라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념적으로 볼 때, 당은 종종 극우로 기울어지기 보다는 중도우파 성향에 가깝고, 이러한 부분에 있어 체코 기민당(KDU-ČSL)과 정치적으로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안드레이 바비시는 늘 체코 공화국이 유로화를 채택하는 것에 반대해왔다. ANO는 더 이상의 유럽 통합과 더불어 "브뤼셀 관료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안드레이 바비시는 나중에 체코 공화국이 경제적으로 균형 잡힌 예산을 갖게 되면 유로화를 채택할 수 있다 밝히기도 했다. 이는 약간의 이중적인 면이 있긴 한데 유로에 가입해 있으되, 제3 세계의 동향을 보고 그때가서 움직이겠다는 신중론이 들어가 있다. 필자가 공부하고 연구한 바비시는 경제적으로도, 정치 정책적으로도 매우 신중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독일과의 긴밀한 유대를 위해 독일과 재정 콤팩트(Fiscal Compact)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재정 콤팩트 조약(Fiscal Compact)은 유로존 국가들이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2012년 체결한 EU의 협약으로, 회원국의 재정 적자를 GDP의 3% 이하, 국가 부채를 GDP의 60% 이하로 유지하는 등 엄격한 재정 준칙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조세정책 등 일부 분야에서 바비시는 자영업자에 대한 부분 세제를 폐지하고, 취업 연금 수급자에 대한 부분세제의 부활 등 중도 좌파의 요소를 운동 정치에 재도입했다. 그는 또 당초 교육부의 1.1% 인상 제안과는 달리 학교 교사 임금을 2.2% 인상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의료 분야에서 바비시는 공공 의료 보험 회사들의 막대한 지출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ANO의 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정치가와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파 정치인과 전문가들은 ANO 2011을 좌파에 두었으며 정치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중도 우파에 두고 있다. 그러자 안드레이 바비시는 인터뷰에서 ANO 2011은 "사회공감을 가진 우파 정당"이라 언급했다. ANO 2011은 2017년 총선 이전에 유로화 반대, 그리고 EU로 모든 것을 통합하는 문제, 이민 쿼터 등과 같은 유로화에 회의적 입장을 채택했다. 그러나 ANO 2011은 집권 이후 더욱 친 EU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유로화 문제와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반대했다. Echo24의 언론인 다니엘 카이저(Daniel Kaiser)는 EU에 대한 ANO 2011의 입장을 "유로-기회주의(Euro-opportunism)"라 불렀다. 그렇다면 ANO 2011의 수장인 안드레이 바바시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1954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바바시는 1980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동유럽 혁명이 벌어지는 도중, 1989년에 공산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민주화로 인해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내 상황에서 사업에 치중했고, 유럽의 대형 농화학 및 농기계 기업인 애그로퍼트(Agrofert)를 창업해 억만장자로 동유럽에 몇 안 되는 올리가르흐가 되었다. 2018년을 기준으로 볼 때, 바비시의 재산은 4억 달러(한화 약 5,600억원) 정도다. 그러나 안드레이 바비시는 재산을 모을 때에 탈세, 뇌물, 자살로 위장한 경쟁자를 살인하거나, 갑질하는 등의 온갖 부정부패로 고발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고 재판마다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2011년 ANO 2011이라는 정당을 창당하면서 대표가 되었다. 바바시는 2013년, 2017년 두 차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여당 대표로 체코의 총리 지위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바비시는 체코 총리가 되었다. 당시 바바시는 친유로에서 난민 수용 반대, LGBTQ 반대, 유로화 화폐 도입 반대 등을 내세웠고,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벌이는 등, 대놓고 친러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2019년, 바비시는 자신이 소유한 기업에 200만 유로의 EU 보조금을 불법으로 지급했다는 고발을 당하게 된다. 이에 관해, 유로 형사재판소에서 바비시는 기소를 당하게 되었고 여기에 저항한 바비시는 법무장관을 해임하고 마리 베네쇼바(Marie Benešová)를 법무장관에 임용하면서 사법 조작 논란까지 불거지게 된다. 바비시는 당시 이를 두고 "나를 끌어내려는 정치적 음모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임하지 않는다(Nikdy neodstoupím, protože je to politické spiknutí s cílem mě svrhnout)."고 말하며 자신에 대한 음해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에 친 EU 세력과 야당이 합세해 바비시 총리의 탄핵을 선동했고, 이에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는 약 25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제2의 벨벳 시위"를 일으키고자 했다. 당시 시위는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공산주의 정권을 종식시킨 '벨벳혁명'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러한 시위에도 바바시는 끝까지 버텨냈다. 애그로퍼트는 2018년에만 최소 8,200만 유로(약 1,067억원)의 EU 보조금을 타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보조금 스캔들과 바비시 총리의 ‘이해충돌’ 문제를 지적한 EU 감사보고서가 유출되었다. 필자가 볼 때, 이는 극도의 친러 정책을 이끌고 있는 바비시를 끌어내리기 위하여 EU 측이 브랙시트로 EU를 탈퇴한 영국의 가디언에게 이를 일부러 흘린 것으로 보고 있다. 가디언은 이를 매우 자극적으로 기사를 썼고, 8,200만 유로의 EU 보조금을 체코의 납세자들이 상환할 처지에 놓였다고 서술하자 이를 본 체코의 시민들이 11월 17일에는 벨벳 혁명 30주년을 맞이해 들불 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NGO 단체가 존재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수백만의 순간(Milion chvilek pro democratii)’, 일명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이라는 단체였다. 이 시위를 선동한 단체의 대표는 벤자민 롤(Benjamin Roll)이라는 인물이다. 벤자민 롤(Benjamin Roll)과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이라는 단체는 매우 수상한 단체다. 벤자민은 카를 대학 복음주의 신학부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전공한 복음주의 기독교 목사다. 그는 2018년에는 동성 결혼 제도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고 로고스 조직의 지원 호소에도 서명했던 인물이다. 이쯤되면 그는 LGBTQ 추종자에 친 EU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난민 수용에 적극 찬성하고 러시아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다. 이 NGO는 EU 산하에 들어가 있는 단체로, 국제 엠네스티와 더불어 EU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이들을 감독하고 지휘하는 단체가 EU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이고, 단장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이다. 마침 2019년 11월 1일 폰 데어 라이엔이 EU 집행위원장이 되어 주도한 첫 사건이 11월 17일 체코 벨벳 혁명 30주년 집회인 셈이다. 이런 정도면 EU가 이 집회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벤자민 롤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몇몇 정치인은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모르고, 일부는 주말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Some politicians don't understand why we're here, and some think we're ruining their weekend. But the fight for freedom and democracy will never end).”라며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 했다. 벤자민 롤(Benjamin Roll)과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은 선거에 불복하여 조만간 다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들은 EU의 지원을 받고 있고, 반(反) 바비시 전선의 최일선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 등으로 인해 바비시와 ANO 2011은 지지율이 갈수록 떨어져 갔다. 체코 시민민주당(Občanská demokratická strana, ODS)과 체코 해적당(Česká pirátská strana, CPS)의 지지율 합이 50%에 육박하고 둘 다 반(反) 바비시 성향을 갖고 있기에 바바시는 실각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2021년 10월 8일부터 9일 양일간 진행된 총선에서 바비시 총리가 이끄는 ANO 2011이 6석을 잃으면서 패배했고, 바비시는 ODS의 페트르 피알라(Petr Fiala)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나게 됐다. 다만 밀로시 제만(Miloš Zeman) 대통령의 내각 인준 거부 사태로 인해 피알라 내각 출범이 지연되면서 보름 정도가 지난 12월 17일에 퇴임하게 되었다. 이후 바바시는 제만 대통령의 후임을 뽑는 2023년 체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차 투표에서 34.99%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해 결선투표로 진출했다. 그러나 결선투표를 앞둔 여론조사에서 현 연립 여당의 지지를 받는 군 출신 무소속 페트르 파벨(Petr Pavel) 후보에게 큰 격차로 밀려 결선투표에서 41.32%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2023년 2월 열린 ANO 2011 집행부 회의에서 그는 더 이상 야당이 집권할 것을 예상하여 미리 구성하는 내각인의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의 예비 총리를 맡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뒤를 이어 제1 부대표인 카렐 하블리첵(Karel Havlíček)이 예비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바비시가 창당한 당이기 때문에 그의 당내 입지는 여전히 강력했다. 결국 1년 뒤인 2024년 2월에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대의원 98표 가운데 88표를 얻어 다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마침 제조업 강국이었던 체코의 제조업 침체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지원 및 개입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만이 상당한 상태였다. 이와 같이 집권 여당의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면서 반사 이익을 얻은 바비시와 ANO 2011의 지지율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게다가 바비시는 체코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비판하고 정부의 외교 정책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지율이 급등했고 결국 2024년 6월 EU 의회 선거에서 7석을 차지하며 제1당에 올랐다. 이는 2025년 10월 총선에서 정권 탈환을 향한 신호탄이 되었으며 결국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 직위 탈환을 앞두고 있다. - 2025년 체코 총선,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의 재등장과 대(對) EU, 우크라이나 관련 정책 변화 가능성 (하) - 체코의 국제 정세 지형이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더불어 친러로 바뀔 것인가? -
    • 칼럼
    • Nova Topos
    2025-10-11
  • 조지아의 여당 "조지아의 꿈"의 승리로 끝난 지방선거, 이어 발생한 불복 시위는 미국 NED가 기획한 색깔혁명의 시도인가?
    조지아의 선거에 이은 선거 불복 시위는 끝이 없는듯 싶다. 이번 10월 4일에 있었던 조지아의 지방선거에서는 여당이자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이 압승을 거뒀다. 이는 작년인 2024년 10월 26일 개최된 총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친 EU 정당인 야당이 맥을 못 추고 있었는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패배하자 조지아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 당과 조지아 4개 야당이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당시 조지아의 꿈 당은 총선에서 전체 투표수의 약 54%를 얻으며 4차례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 150개의 의석 중 조지아의 꿈 당은 직전 총선 결과인 90석보다는 적지만 과반을 넘는 89석을 차지했다. 4개 야권 정당이 뭉친 야권 연합은 총 61석을 획득했다. 야권은 광범위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총선 결과에 강력히 반발했고, 선거 다음 날인 10월 27일 선거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불복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총선 결과가 알려지자 10월 28일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조지아와 EU 깃발을 흔들면서 시위를 벌였다. 친서방 성향의 무소속 살로메 주라비슈빌리(Salome Zourabichvili) 전 대통령은 10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은 국민의 표를 훔친 사건이라 비판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현재, 작년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조지아의 서부인 아자리야 지역은 본래부터 친러 지역이었기에 대다수를 석권하는데 성공했고, 관건이었던 동부 지역 또한 몇 지역에서 접전이 있었지만 결국 64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승리를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조지아 선관위에서 55%의 투표용지를 집계한 결과, 조지아의 꿈은 전체 투표의 80% 이상을 획득했으며, 특히 접전이 예상됐던 수도 트빌리시 시장 선거에서 현 시장인 카하 칼라제(Kakha Kaladze) 후보가 73% 이상 개표 기준으로 7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무난히 압승했다. 물론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압승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압도적인 패배에, 야당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거져 나오는게 있다. 바로 "부정선거 논란"이다. 이전 여론조사에서는 친유럽 성향의 야권이 주장하던 EU 가입에 대한 찬성이 80% 이상을 차지했었다. 특히 13년 전인 2012년 총선에서 조지아의 꿈에게 패배해 정권을 빼앗긴 통합국민운동(UNM) 측이 지방 선거 결과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했다. 조지아 제1 야당인 통합국민운동(UNM)은 전 대통령인 미하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정당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미국 국립민주주의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이 있다. NED, 이 간악한 집단은 명목상으로는 ‘NGO’에 속해 있는 집단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집단은 미국 CIA에 막대한 지원를 받고있다. 그 동안 NED 집단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크게 공헌한 집단이고,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다. NED가 내세운 인물이 바로 미하일 사카슈빌리이다. 사카슈빌리는 어릴 때부터 미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컬럼비아 대학교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2003년 11월 23일, NED의 선동과 더불어 사카슈빌리는 친미, 친서방주의자들과 함께 손에 장미를 들고 시위에 나서 셰바르드나제의 정부를 불법적으로 뒤엎었다. 이것이 이른비 "조지아 장미혁명"이라는 CIA의 지원, NED의 기획, 행동대장 사카슈빌리와 UNM의 액션으로 "색깔혁명"을 일으켜 뒤엎어 버린 것이다. 특히 NED는 유럽에서 러시아와 맞서는 매파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한 온갖 악마화를 주도적으로 한 가짜 NGO 단체인 셈이다. 10월 4일 개표 이후, UNM은 기자회견을 통해 “선거관리위원회와 여당이 조지아 국민의 승리를 훔쳤다(საარჩევნო კომისიამ და მმართველმა პარტიამ გამარჯვება წაართვეს ქართველ ხალხს).”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어 또 다른 야당인 변화를 위한 연합(Coalition for Change)의 니카 그바라미아(Nika Gvaramia) 당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가 ‘헌법적 쿠데타(კონსტიტუციური გადატრიალება)’라고 강조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조지아의 독립 선거 모니터링 단체인 공정 선거 및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사회(ISFED : International Society for Fair Elections and Democracy)는 지방 곳곳에서 유권자들을 협박했고 표를 매수한 행위 등, 부정행위가 여러 건 적발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지아 선관위는 지방선거가 각 지역에서 평화롭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고 재차 강조했으며 비록 투표율이 41%로 적긴 했지만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참고로 ISFED 또한 EU와 NED의 끈이 연결된 단체다. 그리고 이들은 작년 총선부터 올해 지방선거까지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익숙한 상황이다. 얼마 전에 끝난 몰도바 총선에서 "러시아가 개입했다"고 선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에도 어김없이 "러시아풍"을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체코 총선도 마찬가지고, 동유럽에서 선거는 "러시아풍"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동유럽의 각 집권당들은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강조하며 이를 적절히 이용해 집권을 이어 나가려 한다. 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모두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가지고 EU를 멀리하자는 "급진적 변화(Radical Change)"보다 EU가 있는 상태에서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비하자는 "안정(Stability)"에 포커스를 두었다.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잇다른 경제 위기에 지친 시민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이를 억지로라도 눌러 오로지 "안정(Stability)"만이 국가와 국민을 구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소위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러시아가 예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 시켰던 것처럼, 러시아 또한 동유럽을 침공할 것이라 선전하여 국민들을 선동한다. 이번 조지아 지방 선거도 마찬가지다. 결국 UNM은 러시아가 개입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야당을 지지하는 전 국민들이 시위에 참여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불법적인 의회에 불참할 것이며, 국제 선거관리단의 진행 하에 총선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조지아의 전 총리이자 '조지아의 꿈'을 창당하고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여당의 비선실세인 비지나 이바니슈빌리(Bidzina Ivanishvili)가 나섰다. 그는 명예총재로써 존재하고 있는 인물로 조지아 GDP의 30%나 되는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바니슈빌리는 원래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친러 논란을 지우기 위해 2011년에 와서야 러시아 국적을 포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지아에서는 사실상 현 총리인 이라클리 코바히제(Irakli Kobakhidze)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이바니슈빌리가 실질적인 실권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거둔 지방 선거의 승리는 세계적인 사건이며 국민의 뛰어난 역량을 제시하는 지표"라고 평가하며 여당을 두둔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바니슈빌리의 이러한 발언은 조지아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야당은 이바니슈빌리가 러시아어로 이 발언을 한 것에 분노하여 여당인 "조지아의 꿈"을 러시아가 적극 지원하고 있다며 트집을 잡았다. 결국 야권 세력과 NED 등의 NGO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평화적 혁명'을 구호로 내세워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외치는 것은 평화적 혁명이 아니라 심각한 폭력이 동반된 폭동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부패와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대통령 관저 인근으로 행진했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위는 루스타벨리 대로와 자유광장 일대에 모여 정권 교체와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시위는 현지시간 오후 4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도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조지아 의회 건물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또 다른 그룹은 자유광장 에 모여 성 게오르기 동상 앞에 무대를 설치하고 집회를 이어니갔다. 한편, 트빌리시 국립 제1 대학에서 출발한 학생 행진대는 멜리키슈빌리 대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When injustice becomes law, resistance becomes a duty).”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조지아 국기를 들고 “그루지야! 그루지야!”를 연호하며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극단주의 시위대가 대통령궁 울타리를 넘어 울타리 일부를 파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처럼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시위로 인해 전면 충돌로 비화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처음에는 '평화적 혁명'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대통령 궁의 울타리를 넘으며 경찰과 충돌을 야기했다. 평화시위라도 어떠한 선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와 같은 선을 이미 넘어버렸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대통령 궁 울타리를 시위대가 뛰어 넘어 진입하는 "평화 시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러시아 매체 RT에서 기가 막힌 장면을 포착했다. 이 울타리를 뛰어 넘어 폭동을 조장하는 자들이 "가면을 쓴 정체 모를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입수한 마지막 5번째 사진이 이들인데 이들은 가장 앞장 서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 이렇게 되면 경찰도 흥분하게 되어 있고,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경찰은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려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 차량 여러 대를 투입하면서 폭도들과 전투 아닌 전투를 벌여 이들을 대통령궁에서 쫓아냈다. 이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은 근처 카페와 트빌리시 거리 곳곳을 공격하여 창문을 부수고, 가구를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러시아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조지아 내무부는 이번 사태로 경찰관 21명과 시위 참가자 6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라클리 코바히제 총리는 "부상자 중 경찰관 1명이 위중한 상태"라고 전했다. 부상자 다수가 최루탄, 고무탄 등으로 인해 타박상을 입어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내무부는 "시위가 평화적 범위를 벗어나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폭력 행위로 변질됐다"며 주최 측 인사들이 체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결국 UNM 소속 이라클리 나디라제(Irakli Nadiradze) 전 트빌리시 시의원, 야권 정치위원회 소속 무르타즈 조델라바(Murtaz Jodelabar) 전 검찰총장 등 야권 핵심 인사 5명이 정권 전복 선동 및 집단으로 폭력단을 조직한 혐의, 그리고 폭동을 획책한 죄목으로 전격 구속했다. 이들은 조지아 형법으로 유죄 판결 시 최대 9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이 NED의 맴버들이라 추측하고 있다. 아마 뒤에는 미국 CIA가 최종 보스일 것으로 보여 진다. 6일 현재 시위는 잦아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끊임없이 조지아의 내부분열을 획책하여 제2의 우크라이나로 만들려는 미 행정부의 속셈은 무엇일까?
    • 칼럼
    • Nova Topos
    2025-10-10
  •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공원 묘역에서, 42년 전 오늘,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있있다.
    오늘은 아웅산 테러 42주년. 한국은 한글날이지만 42년 전에는 미얀마 양곤 아웅산 묘지에서 북한에 의한 테러 사건의 비극이 있었다. 아웅산 묘지 공원에는 미얀마의 실질적인 국부라 할 수 있는 아웅산 장군이 잠들어 있는 신성한 곳이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이라 불리는데 1983년 10월 9일 이곳 아웅산 묘역에서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상대로 북한이 테러를 저질러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1970~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제3 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면서 상대방 국가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해 양측이 냉전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미얀마는 제3 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북한과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감안하여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가장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시아와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순방에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지정했다. 당시 정부 핵심 관료들, 특히 외교에 밝은 노신영, 이범석 장관 등이 미얀마 방문을 반대했다. 미얀마가 국력이 약한 국가에, 군사 독재 국가의 특성상 외교를 통해 얻을 만한 실리적인 부분과 국제적 위상이 떨어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했고, 결정적으로 북한을 더 지지하는 성향의 국가라는 것을 감안할 때 한국과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테러 위협이 상존하는 지역이라 더욱 위험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서울을 떠나 양곤으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양곤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U San Yu)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 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 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 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 차량을 선두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한 후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아졌다. 창문이 선팅되어 있어 차량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이었다. 수행원들끼리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고 이후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했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했다. 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행사 진행 전 시범 삼아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었다고 한다.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러를 진행했다. 나팔수가 시범 연주를 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폭탄 테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폭발 이후, 한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인 김재익(金在益, 1938~1983) 씨도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김재익씨는 대한민국을 오늘의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경제 천재였던 인물이다. 그는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 정책, 정보화 정책, OECD 가입, 수입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했고 한국 사회의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하여 금융과 재정을 긴축하고, 수입을 자유화하며, 임금 상승은 생산성 증가의 범위 내로 억제하고, 환율과 금리는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또한 경제의 능률 향상을 위해서는 개방과 경쟁이 필수적이고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졌다. 김재익 덕분에 물가상승률은 20%에서 3.2%로 줄었고 경재성장률이 1980년을 제외하고 모두 10%를 넘었을 정도로 그는 5공 시대에 국가 경제를 활성화시켰던 아까운 인물이었다. 테러 사건 직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당시 미얀마는 군부가 통치하는 공산주의 국가였고 사실 우리보다 북한이 더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탑승한 차량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고, 세계 최빈국인 미얀마 특성상 택시가 주변에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것이 늦어지면서 오히려 전두환 대통령의 지각은 불가피했다.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으니 전두환이 영접 요원들과 인사하거 향후 스케줄이 늦어지게 된 것이 테러를 당하지 않은 원인이 되었다. 이어 전두환 대통령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주 미얀마 한국 대사이자 비서실장인 이계철 대사가 태극기가 휘날리는 차를 타고 먼저 도착했으며 당시 경호실장과 처장의 시범 연주를 지시했고 진혼곡 나팔 소리가 나오자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착각한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 묘역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은 참을 수 없는 무례였고, 이에 미얀마 정부를 포함하여 전 국민들 또한 격노했다. 이에 미얀마는 북한과의 국교를 즉시 단절했다. 그리고 공산권 국가로 최초로 북한을 국가 승인까지 취소했다. 이어 테러리스트 3명 중 2명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1명 또한 북한에 돌아가지 못하고 복역 중에 사망했다 전해진다. 이후 아웅산 공원은 2012년까지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2012년 5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방문하여 당시 테러 때 희생된 관료들의 넋을 위로함과 동시 다시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필자는 2019년 4월 6일에 미얀마 방문 때, 양곤의 아웅산 공원 묘소를 일부러 찾아 헌화했다. 당시 희생된 한국의 정치인과 기타 분들을 위해 짧게나마 묵념을 드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