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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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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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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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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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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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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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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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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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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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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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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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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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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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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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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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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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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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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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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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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현재까지 러시아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러시아 버스커들
- 러시아 거리 곳곳에서 버스커들의 연주에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국가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며 평온하기도 하다. 러시아 버스커들은 20세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현재까지 러시아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여겨지게 된 ‘바르드 음악(Бардовская музыка)’의 후예들이다. 바르드 음악은 다른 말로, 영어의 ‘작가(Author)’와 그 뿌리를 같이하는 단어를 포함한 ‘작가의 / 작가주의적 음악(Авторская музыка)’이라고도 불린다. 이 표현에서 느껴지듯, 바르드들은 연행자의 이미지보다는 글을 쓰는 문학가의 정체성으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서점에 가면 시집의 형태로 출판된 바르드들의 작품집이 음악이 아닌 시 코너에 꽃혀 있으며, 작곡가를 뜻하는 캄포지타르(Композитор) 대신 시인을 의미하는 단어(포엣·Поэт)로 분류된다. 바르드들은 그러니까 ‘시 같은’ 가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들인 셈이다. 러시아 친구들을 만나보면 푸시킨으로 대표되는 유구한 러시아어 문학의 전통에 큰 자부심을 표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바르드 음악은 이러한 러시아 시문학 역사의 한 자랑스러운 부분인 셈이다. 어떤 경우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이오시프 브로드스키(Иосиф Бродский)와 같은 시인들의 글이 바르드들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했다. 내 영혼은 지치지 않고 어둠으로 서둘러 가며 다리 위를 스쳐 지날 것이네 페트로그라드의 안개 속에서 4월의 부슬비 속에서 눈은 머리 아래 있고, 목소리 하나가 들릴 것이네. - 바르드들의 노래로 불려온 브로드스키의 시 《스텐시(Стэнси)》 중 ‘벗이여, 안녕히’ 바르드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바르드 음악이 독자적인 장르로 대두된 건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민족음악학자 제임스 도트리(James M. Daughtry)에 따르면, 혹자들은 러시아 땅에 존재해 오던 ‘노래시’의 형태와 바르드 음악의 기원을 연결 짓는다. 또 다른 이들은 ‘로만스(Romans)’와 같은 고유 장르들이 20세기 중엽 서구에서 유행한 기타 중심의 작가주의적 음악과 만나 태동한 일종의 국제적 현상으로 여긴다. 어떤 이들은 바르드 음악이 스탈린 시대 집단수용소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부른 노래들에서 기원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 인텔리 젊은이들의 하위 문화에서 바르드 신(Сцена)이 태어났다고 여긴다. 바르드가 자유 · 비판 · 젊음의 하위 문화와 연관된다는 시각은, 블라디미르 비소츠키(Владимир Высоцкий)나 고려인인 율리 김(Юли Ким) 같은 대표적 바르드들의 노래 속에 있는 날카로운 풍자, 그리고 그들의 저항운동가로서의 행보들을 보면 수긍이 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바르드 음악들이 1980년대 개혁·개방 이전까지는 비공식적으로만 유통되었으며 여러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별과 땅에 대한 애착, 민족애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지기에, 바르드 음악을 저항과 휴머니즘이라는 특정 소재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러시아 시의 문학적 관습이 깊숙이 반영된 가사 쓰기와, 7현 기타 전통에서 나오는 특유한 화성과 멜로디에서 바르드 음악의 특징을 찾는 것이 보다 합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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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현재까지 러시아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러시아 버스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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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토에서 몰디브를 마시며
- 2015년에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을 TV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시청했다. 영화 끝 장면 “우리 모히토에 가서 몰디브나 마시자!”라는 대사가 지금 우리 사회에 꼬여있는 정치 현실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감정이 씁쓸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이 안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법관은 구속하라고 하고, 어떤 법관은 석방하라고 하는 세상이니 어떤 법관의 판단을 믿을 것인가? 세상은 그렇게 둘로 나누어진다. 각자 보는 관점에 따라 어느 한 편은 법이 살아있다고 하고, 또 다른 어느 한 편은 법이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말과 대상의 일치가 어긋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아무 말 대잔치’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다. 시적 언어의 향연은 분명 아니다. 영화 <내부자들>은 정치인, 언론인, 재벌, 깡패가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한 단면을 고발하고 있다. 10년 전에 개봉한 영화이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깡패 대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검찰이 그 역을 대신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정치인과 언론인, 그리고 돈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이 뭉쳐서 권력을 잡으면, 그 사회가 바로 독재사회이다. 우리는 다행히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로 그러한 독재사회의 탄생을 막았지만, 영화 <내부자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여전히 그런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영화에서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현 역)는 유력 대통령 후보 정치인 장필우(이경영 역)와 유명 신문사 주간 이강희(백윤식 역)의 도움으로 조폭 두목이 된 자이다. 그는 대부업체는 물론이고 나이트클럽, 룸살롱, 연예기획사에 이르기까지 문어발식 운영으로 그 세계에서 회장님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재벌 오현수(김홍파 역)가 장필우에게 준 비자금 파일을 활용하여 더 큰 이덕을 얻으려고 하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오른손이 짤리고, 폐인으로 살아가면서 장필우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또 한편에서는 장필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칠 것을 예감한 민정수석 오명환(김병옥 역)은 특수부 부장검사 최충식(정만식 역)에게 장필우를 수사할 것을 지시한다. 최충식은 경찰 출신 검사 우장훈(조승우 역)에게 그 역할을 맡긴다. 우장훈은 경찰에서도 경찰대 출신이 아니라서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검찰로 옮겼지만, 검찰조직에서도 줄도 없고 빽도 없는 무족보 검사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직속상관 최충식에게 충성을 바쳐 일하고 있었다. 까라면 까고, 덮으라면 덮는 검찰조직에 충성을 다했다. 그런 그에게 거물 정치인 장필우에 대한 조사는 자신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장훈은 장필우를 조사하다가 안상수가 오현수의 비자금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파일을 확보하려고 그에게 접근한다. 우장훈이 안상수에게 하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너는 복수를 원하고 나는 정의를 원한다. 나는 검사니깐!” 하지만 우장훈은 검사니깐 정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출세를 위한 도구로 정의라는 가면을 쓸 뿐이었다. 영화 속에는 우장훈이 피고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심문으로 말미암아 피고인이 자살하는 장면도 등장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우장훈은 고압적인 자세를 연출한다. 우장훈이 보여주는 영화 속의 케릭트는 정의와는 무관했다. 이 땅의 모든 검사가 우장훈과 같지는 않겠지만, 많은 검사들이 우장훈과 유사한 행동을 하리라 짐작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부정의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검사 우장훈이 언론인 이강희를 심문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그 장면에서 이강희의 대사도 의미심장했다. 그는 우장훈에게 팩트만 말하자고 하면서 “말은 권력이고 힘이다. 누가 깡패가 하는 말을 믿겠는가?”라고 한다. 그는 언론을 이용하여 안상구와 관련이 있는 여성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그 원인을 안상구의 강간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자살로 보도한다. 하지만 여성의 죽음만 팩트일 뿐, 그녀의 죽음은 타살이었다. 언론의 왜곡 보도는 사실을 허위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그 힘은 막강했다. 또한 그는 안상구가 청부살인업자였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안상구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를 떨어트린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기자회견을 한 안상구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트리면서, 자신은 모든 의혹에서 풀려난다. 오늘날의 언론도 팩트를 왜곡하면서 우리의 눈과 귀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본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또 다른 반전을 보여준다. 장필우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우장훈이 검사직을 박탈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자, 우장훈은 이강희를 찾아가서 다시 검사직을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이었다. 영화 제목 ‘내부자’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우장훈은 언론인 이강희와 유력 대선후보 장필우, 재벌 오현수와 함께 고급 요정에서 나체로 등장한 접대부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 그곳에서 오현수는 이강희에게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 돈으로 안되는 것이 어디있노? 너도 내 돈으로 글도 쓰고 밥도 묵는 거 아이가!” 그 장면이 모두 녹화되어 SNS에 퍼진다. 그것으로 장필우와 이강희, 오현수는 종말을 맞이한다. 우장훈도 검사직을 버리고 변호사로 살아간다. 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온 안상구가 우장훈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여의도 건물을 바라보면서 나눈 마지막 대화가 “모히토에 가서 몰디브나 마시자!”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의 경계가 모호함을 상징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안개는 악이 가장 좋아하는 은신처다. 두려움이라는 증기가 만들어낸 안개는 악의 냄새를 풍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불안의 기원』에 나오는 말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두려운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함이고, 그로 인한 무감각과 무관심이다. 그 속에 조용한 독재는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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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토에서 몰디브를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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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의 25% 관세 및 투자 금액 3,500억 달러 선불 지급에 대한 대책
- 현재 3,500억 달러 선불 지급 요구에 대해 지금은 트럼프에게 1원 한 푼 안 주고 버티는 것이 최상이다. 관세 25% 맞고 대미 수출과 투자 줄이면서 러시아와 관계 개선하여 증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로 투자와 수출을 늘리면 된다. 러시아-중앙아시아 합치면 인구 2억 넘고, 동남아시아 6억. 인도권은 19억, 중동은 5억 가까이 된다. 우리가 대미, 대중 무역에 집중해서 이들 국가들과 무역이 소규모였을 뿐, 무역, 교류 다변화로 늘리면 수출과 투자가 분산될 수 있어 일부 국가의 독점 및 횡포를 막을 수 있다. 더불어 다양한 시장도 개척할 수 있는 장점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한국 사람들, 아니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역, 교류 다변화로 늘리자는 것이 어떻게 달러를 버리고 브릭스나 일대일로로 갈아 타자는 제안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는지, 어떻게 교육을 받고 지식을 습득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참 이해하기 어렵다. 브릭스의 국가들은 브릭스 자체의 화폐가 현재 없기 때문에 달러와 유로를 포기하는 나라가 아무도 없다. 대신 러시아와 중국은 달러 국채를 팔고 있지만 이들 국가들한테도 달러를 들고 오면 환전을 해주기에 달러는 여전히 러시아와 중국에 있어 예비로라도 필요한 존재다. 그리고 일대일로는 갈아 타는게 아니라 필요하면 받아들이는 정책이다. 일대일로는 한국과 같이 경제적으로 발달한 국가한테는 필요가 없다. 일대일로를 받아들인 국가들은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들이다. 모두 자국의 인프라들을 개선하고 싶어도 자국의 돈이 없어 못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이들은 중국 돈을 빌리거나 중국 기업들과 계약을 맺고 일대일로를 받아들였다. 우리가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도 아니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프라를 개발할 수 있는데 일대일로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안보, 환율, 수출입 결제, 식량 및 에너지 수입, 국내 유치된 외국자본, 국내기업들 생존, 국제 신용도 등등, 3,500억 불을 트럼프에게 주면 그 모든 게 정상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라 생각하나? 그러다가 외환 위기 생기면 IMF 때보다 더 비참해질 것이다. 그 책임은 당신들이 질 것인가? 미국에 있는 한인들이야 자신들의 알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미국 시민권으로 갈아타면 된다. 미국이 우리를 이용할 이용가치가 있을 때는, 우리가 경제 선진국이고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외환 보유고의 금액을 다 가져가고 나면 미국에게 있어 경제적으로 이용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그 다음에는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어떻게 되든 지 알 바가 아니게 된다. 여차하면 주한 미군을 일본으로 빼내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현해탄과 동해를 반으로 갈라 신(新) 에치슨 라인을 설정하면 그만이다. 굳이 한국에 목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북한이 남조선을 한반도의 대한민국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은 독자적인 국가로 발판을 다지고 있는 상황에서 외환보유고 텅 빈 한국이 미국에게 있어 무슨 이용가치가 있겠는가? 미국에게 3,500억 불을 내주는 순간, 우리는 경제 선진국이자 K-한류의 나라에서 남미의 아르헨티나 같은 국가처럼 끝임없이 빨대 꽂히는 기계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팜파스의 비옥한 농경지와 축산지라도 있지,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과 동남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도 팍스 아매리카나로 기어 들어가고 있다며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것이 1990년대라면 그 발언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그 후로 30년이 지난 지금은 2020년대다. 중동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가 미국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을 너무 도외시 한 평가다. 중동은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있는 상태고 아프리카는 중국이 장악한지 오래다. 아프리카에 중국의 일대일로로 인해 각종 인프라가 바뀌어 가고 있다. 서아프리카는 프랑스가 쫓겨가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못듣고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그런 뉴스가 전혀 나오지 않거나 중요 뉴스가 아니기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미국이 30년 전, 슈퍼맨, 캡틴 아메리카처럼 세상 유일한 구세주인 국가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어떻게 변하든 관심이 없다. 미국이 세계 최강이고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데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제 정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미국에 넘쳐나는 것은 오늘날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당장에 닥치고 있는 미국의 위기 또한 이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CNN, FOX, NYT, ABC, AP통신, 로이터 등, 미국의 주류 매체들은 이런 얘기를 하지 않거나 했다 해도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이상 남의 나라 얘기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땅덩이가 크고, 각 주마다 다르다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러니 다른 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건 남의 일이다. 우리 주만 잘 되고, 나와 내 가족만 잘 되면 되는거고, 은퇴하고 나서 나한테 떨어지는 연금만 꼬박꼬박 통장에 잘 꽂히면 그만이다. 그러니 해외가 어찌 돌아가든, 내 일이 아니기에 관심이 없다. 라틴 아메리카 또한 미국이 패권을 쥐고 있다면 베네수엘라에서 트럼프가 왜 작전을 실행하려 할까? 진정한 패권자는 굳이 보여 줄 필요없이 말로 해도 알아서 설설 기어가게 만들어야 하는것이다. 이는 1980~1990년대 미국이 그러했다. 1980~1990년대 미국이 성을 내면, 전 세계가 그 눈치를 보고 기었다. 그러나 2020년대는 미국이 성낸다고 기어갈 나라는 몇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미국이 성 내면 브릭스나 SCO와 같은 대체 기구들이 넘쳐난다. 굳이 미국 말을 들으면서 모욕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을 안 듣는 것이고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그만큼 통제를 못한다는 얘기다. 동남아시아의 인도-태평양 전략도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중국이 제2 도련선 돌파해도 아무런 대응 못하는게 현재 미국이다. 8~90년대 미국 같았으면 강한 경고와 더불어 항공모함 2~3대라도 출격시키고, 미사일들을 타격 준비를 이미 마치고 백악권을 승락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동남아시아와 중동 가봤음 이런 얘기가 절대 나올 수 없다. 시리아는 HTS, 터키 측이 장악하고 있고, 요르단이나 UAE,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같은 작은 나라들은 친미 기조보다 중립 기조를 유지한지 오래됐다. 대표적인게 이스라엘의 카타르 공습,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다. 여기에 대한 불만 등은 이스라엘이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자행해도 가만히 있는 미국에 대한 불만과 실망으로 인해 이제는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있는게 현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애초부터 중립을 달리고 있고, 러시아의 대공 무기와 중국의 잰 시리즈 전투기 등을 사들이고 있으며 터키는 대놓고 중립 외교하면서 러시아 S-400을 구매하고 미국에게는 약속한 F-35의 양도를 요구하고 있다. 1980~1990년대 미국이었으면 이와 같이 대놓고 하는 중립 외교 국가에 대해 강력한 제재와 더불어 에르도안은 다음 날 아침, 사망자로 발견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미국은 "늙은 사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늙은 사자"는 "젊은 사자"에 비해 근력이 쇠락하고, 운동량 또한 예전 같지 않다. 결국 "젊은 사자"에게 밀려나게 되어 있고, "늙은 사자"는 뒷방의 늙은이처럼 물러나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미국이 지금 "젊은 사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게 될 위기에 있는 것이다. 최근 동남아시아는 미국의 영향력이 확실히 줄었음이 느껴지고 있다. 라오스-태국-베트남을 연결하는 고속철도가 중국의 주도로 진행중이고, 거리마다 중국 문자와 현지 문자가 병행해서 쓰는 곳이 늘어났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에 오면 여기가 동남아시아인지 중국인지 햇갈릴 정도로 많이 늘어났다. 그런데 미국이 정말 패권이 살아 있다면 동남아시아의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인도-태평양 전략에 당장 위기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인데 1980~1990년대 미국 같았음 이를 결코 두고보지 않았다. 중국이 대놓고 동남아시아를 중국화 시키고 있는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에서 하고 있는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그 영향력이 실로 미미하다. 사실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은 아무것도 못하고 동남아시아가 중국화 되는 과정을 보고만 있는게 현실인데 팍스 아메리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주장을 보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동남아시아에서 중동에서,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경악할 지경인데 정작 미국에 있는 한인들은 이같은 사태들을 잘 모르고 매우 안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8~90년대 캡틴 아메리카의 미국은 202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강대국 아메리카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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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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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의 25% 관세 및 투자 금액 3,500억 달러 선불 지급에 대한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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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류학에서 바라본 부정부패의 의미
- 부정부패를 가지고 이념으로 재단하는 사람들도 있고, 대한민국은 참 별의 별 단세포적인 사람들이 SNS를 통해 설치고 있는 재미있는 나라다. 부패는 민주당이나 좌파만 하는게 아니라 우파도 국힘도 하며 보수도 한다. 부패는 인류학에서 인류가 관료사회를 이루고 상류층이라는 서열 문화가 생성될 때부터 존재해왔다. 사회인류학(Social Anthropology)에서 부패는 흔히 4가지 접근으로 나누어진다. ① 도덕적 접근(Moral Approach) : 개인의 성격이나 특성으로 인해 공무원이 국민의 봉사자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해당 권한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남용한다. 대체적으로 스스로가 정부에서 일하는 것을 상류층에 올라왔다는 착각으로 인한 윤리적 가치관의 흠결이다. ② 사회문화적 접근(Sociocultural Approach) : 사회의 관습적인 부분, 통념적이면서 비정상적인 관례들이 부패를 조장하고 있다. 집단주의적이고 매우 권위주의적인 행정 문화 내에서는 하위직을 갖고 있는 자들이 고위직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기 힘들고 오히려 조직 내 정체성과 관례 등을 이유로 같이 투영되어지는 절차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전관예우라 볼 수 있겠다. ③ 제도적 접근(Institutional Approach) : 국가 사회의 법이나 제도적인 부분에서 결함이 있어 이를 악용한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벌어진다. 특히 지역구 국회의원 등의 상급자들이 보내는 쪽지예산 등의 청탁을 거절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내부고발자 제도 같은 경우, 내부적인 정화가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만 고발자 보호가 매우 취약하고 집단주의 문화가 완전히 자리 잡은 한국에서는 오히려 고발자의 입장에서 매우 불리하다. 이어 녹봉과 재취업 문제가 있다. 하는 일에 비해서 임금이 상대적으로 적은 고위 공무원 직종은 피규제 집단의 고위직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 같이 개발도상국의 공무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스스로 피규제 집단에게 종속되도록 분위기상 만들어져 간다. 물론 능력있는 자의 재취업은 사회적으로 권장되어야 하고 국가 인재로 재활용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전문가로써 더 높은 자리를 가기 위해 임시적으로 배치되는 낙하산 인사들은 과거 감독 기관의 고위직인 경우가 많아 감독 기관과의 관계가 원활하기에 비리에 유혹받을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다만 이와 같은 부정부패와 비리에서 국가 인재를 재취업을 해주고 이들을 지켜주려묜 관한 법률의 개정 및 피규제 집단의 포획을 방지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물론 고위 공무원의 연봉을 사기업 이상으로 주는 방안도 존재하고 있는데 현재 국가청렴도 아시아 1위인 싱가포르가 이와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부패를 방지하고 있다. ④ 체제적 접근(Systemic Approach) :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 있어 중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부패라는 것은 국가 발전이나 산업화의 부산물이라는 것이 산업 체제적 접근이라 볼 수 있겠다. 부패를 중진국으로, 혹은 중진국이 중상위권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종속 변수로서 필요악, 혹은 그와 같은 급성장으로 인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산물들, 이를 선천적인 문화적 유산으로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며 특히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한국에 그와 같은 결과론을 중시해왔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순기능적으로 활용되며 공무원의 창의력이나 유연성, 적극성을 제고할 수 있다. 다만 저개발국가가 성장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체제적인 접근으로 인한 부패는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을 극복하는데 있어 큰 장애가 된다. 이와 같이 부패는 이념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인류 사회 어디든 존재하며 미국 같은 세계 최강국에도 존재하는 것이 비리와 부패다. 이것을 두고 좌냐, 우냐 등의 이념으로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는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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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류학에서 바라본 부정부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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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그는 사임해야 분명한 이유가 있다!
- 현재 프랑스의 정국은 혼란스럽다.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가 사임한 이후 임명된 세바스티앙르코르뉘 총리가 불과 27일 만에 사임하면서 당분간 혼란은 불가피하다. 르코르뉘 총리는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고 물러났다. 그는 사실 마크롱의 최측근이면서 나름대로 전임 바이루 총리의 정책 수행을 이어가면서도 일부 내용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면서 사회당과도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부자증세’라는 사회당의 안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우파인 공화당파인 그가 부자증세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고, 사회당과의 협상 결렬은 어느 정도 예고된 바다. 바이루 전 총리는 프랑스의 공공부채가 GDP 대비 115.6%로 달할 정도로 재정건전성이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긴축 재정’을 밀어붙였다. 바이루 총리가 편성한 예산안에 따르면 440억 유로를 삭감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의료 및 연금과 복지 등 관련 항목에 관한 예산삭감이 핵심이었다. 물론 관점에 따라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있을 수 있고, 정말 필요하다면 이것은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한 방향으로 나가야 했었다. 일부 진영에서는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긴축예산 편성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입장은 프랑스의 상황을 너무나 쉽게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은퇴 이후에도 프랑스 국민들은 이러한 사회 안전망 덕분에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대안 없이 무조건 예산을 줄이면 달리 별다른 수익이 없는 프랑스 국민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이미 총선에서 집권당의 패배는 마크롱 정부의 실정을 심판한 것인데, 이를 거부하고 마크롱의 자신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재 프랑스의 재정 악화의 근본적 원인은 마크롱 때문이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정도라 하겠는데, 첫째 마크롱은 부유세를 폐지하고 법인세를 33%에서 25%로 내렸다. 자본 소득세와 부동산 부유세도 완화되었고, 1주택 거주자의 주민세도 폐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부자들의 감세라는 꼬리표를 달았고, 감세 정책으로 효과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세수가 줄어든 상황에서 재정지출은 그대로 하다 보니 만성적 재정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다. 둘째, 코로나 19 및 에너지 위기 대응으로 2,400억 유로 이상이 지출되었으며, 1,700억 유로가 코로나 19에, 700억 유로가 에너지 위기 대응에 지출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별 차이가 없어서 그 자체론 별문제가 없지만, 첫 번째 경우에 마크롱 정부가 감세하면서 그때 재정지출을 줄이지 못하고 그대로 지출만 하다 보니 결국 두 번째 문제와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재정 건전성에 치명타가 된 것이다. 르코르뉘도 바로 이점 때문에 이른바 부유세 도입, 이른바 쥐크만세 도입을 추진했다. 쥐크만세란 프랑스의 경제학인 가브리엘 쥐크만 – 그는 토마 피케티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 이 주장한 것으로 1억 유로를 초과하는 자산가에게 최소 2%의 세금을 부과해서 연간 200억 유로의 세수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것은 부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다른 정파들과의 협상도 실패하고 말았다. 우파로서 그는 상당히 진중하면서도 절제된 성품으로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지만, 결국 다수의 야당 앞에서 자신의 타협안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마크롱의 최측근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함으로써 마크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 처했다. 9월 말부터 10월 초에 이루어진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는 일색으로 마크롱의 퇴진을 압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프랑스의 상황은 정치력의 부재로 정국 혼란이 가중되면서 프랑스 신용 등급이 하락했으며, 지금도 국가 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가만히 이러한 상황을 되짚어 보면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바로 마크롱 자신이다. 마크롱은 총선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기보다는 이를 뒤집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우파와 손을 잡으면서, 총리도 전부 우파로만 채웠다. 그 결과는 2기 집권 기간에 총리만 다섯 번 바뀌다 보니 그야말로 민심은 마크롱을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형적인 행정관료 출신인 그는 당대표라든지 파리 시장 등의 선출직 이력이 없어 정문적 판단을 종종 하지 못하고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일단 발등에 불 떨어지면 아차 싶어서 부리나케 허둥지둥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좀처럼 굽힌 적이 별로 없었다. 정치란 타협의 정신이 필요한데, 야당이 의회의 다수라면 이들과 정치적 타협을 해서 어쨌든 정치 일정을 서로 맞잡고 논의를 하는 것이 정도(程度)일 진데, 마크롱은 계속 사임을 거부하면서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 버틴다고 해서 그것이 뭔가 마크롱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마크롱은 사실 좌파에서 출발해서 중도 우파로 전향하면서 나름대로 괴이한 ‘프랑스의 희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임도 성공했지만, 현재 상황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잔불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좌파와 협상하는 것인데, 우파가 아니라면 왜 좌파와 협상을 못할 까닭이 없다. 거기에서 좌파가 총리가 되면, 일단 부자 증세안이 관철될 것이고, 당장 발등의 불이 꺼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가 요구하는 조기 대선도 피하면서, 마크롱이 대통령 임기까지 일절 국내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중도파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이제 더 이상 마크롱 편이 아니다. 그런데 달리 보면 아직 마크롱의 대통령 임기가 1년 이상 남아 있어서 잔여 임기를 채우는 것은 능사(能事)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민심을 달래는 것인데, 획기적인 대안이나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해결사로서 정치인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면 우파보다는 좌파가 더 필요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프랑스는 기축통화인 유로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번에 위기는 정치적으로만 타협이 되면 어느 정도 해소될 여지가 없지는 않다. 재정 적자 문제도 그리스나 이탈리아보다는 적지만, 문제는 적자 증가 속도에 있다. 영국이 금융위기로, 독일이 제조업 쇠퇴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 프랑스는 재정 적자로 시름하고 있다. 프랑스가 이 두 국가에 비해 재정 적자 규모가 크다는 것도 문제다. 이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하지만, 사회적 타협 없이 일방적으로 제정을 축소 편성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에 있다. 민심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고 정치인이라면 이를 겸허히 수용하고 대안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타협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마크롱은 이와 달리 자신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 드러났음에도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 결과로 마크롱이 이미 의회로부터 탄핵을 당하기도 했고 – 물론 실제로 탄핵이 되지는 않았다 - 집권당의 무기력한 정치력으로 그 어느 쪽도 추가로 지지 정당을 확보하지 못했고, 성난 민심을 적극적으로 수습하기보다 오히려 무늬만 바꾸거나 민심을 기만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제 마크롱은 프랑스에서 더 이상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기 어렵게 되었다. 민심을 잃은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라면, 솔직히 마크롱은 자진 사임해야만 한다. 그 이유도 또한 너무나 명백하다. 필자는 마크롱이 조만간 담화를 통해 사임을 선언하고 향후 정치 일정에 관한 로드맵을 제시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최소한의 정치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르코르뉘 사임 이후에도 아직 마크롱은 침묵하고 있다. 그의 침묵이 자포자기인지 아니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사임해야 하는 것으로 굳어져서 조만간 입장을 밝히기 위한 것인지 현재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작 15%의 지지율로 민심으로부터 고립된 마크롱의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 정국 불안은 근본적으로 마크롱의 잘못된 정책으로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어느 국가이든지 예외 없이 정책에 대한 오판으로 정국의 불안정해질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정국 안정을 위해 대통령이 이를 수습하고 잘못된 정책이라면 이를 철회하는 것에 한치의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정치인이라면 과감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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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그는 사임해야 분명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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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미래와 동남아시아 최대 영토를 가진 국가의 명(明)과 암(暗)
- 필자는 인도네시아를 3년 전에 답사하면서 명과 암을 느꼈다. 2억 7,000만이 넘는 인구와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나라, 다양한 천연자원을 가진 국가로써 여러모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나라다. 지리적으로도 말라카 해협 근처, 인도양과 태평양, 남중국해와 고루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기에 국제 해상무역의 주요 경유지로도 기능하고 있어 여러모로 경제적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나라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는 각종 원자재와 1차 산업 부문이 발전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며 세계 선진국들이 주로 투자를 하고 있는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2010년대 후반 들어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이자 세계 최대 팜유 생산국이며, 태국 다음의 세계 2위 고무 생산국이고, 브라질, 베트남 다음의 세계 3~4위 커피 생산국이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상당한 규모의 에너지 부문 수출국이기도 하다. 근대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각종 향신료의 주요 수출국이기 때문에 꽤 번성한 곳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가 산유국이기는 하지만 국가 규모와 매장량 양쪽의 문제로 인해 경제 성장 초기 단계 이후에는 원유에만 크게 의존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운영을 할 수 없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인도네시아 국내 소비량 증가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계속해서 원유 순수입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비식량 농업 부문, 비에너지 광업 부문, 경공업, 중공업, IT 산업 등도 지속적으로 발달시켜 왔으며 앞으로도 그 가능성 무궁무진함을 체험하고 왔다. 만약에 베트남에서 삼성전자가 갈곳을 잃게 되거나 새로 투자하여 본사로 자리잡길 원한다면 인도네시아로 오는게 합리적이라 보여 진다. 오히려 베트남보다 인프라가 넓고 인구도 많으며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인해 각 중공업이 성장할 요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레카 해협 및 순다 해협의 지리적 장점도 베트남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 성격도 순하고 정치 형태도 비교적 동남아시아 국가 치고는 안정적이다. 해상 실크로드의 교역 중심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국가 정책 차원에서 반드시 치고 들어가야 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문제는 빈곤율이 높다는 것에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가 정부가 발표한 빈곤층 인구가 2,777만이지만 실상은 더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 인구가 2억 7,000만인 것을 감안하면 국민의 10%가 빈곤층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수치이지만 이 또한 전체를 확인하여 낸 통계가 아니기 때문에 참고용으로 삼아야 하며 믿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눈에 보이는 통계를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고 과도하게 숫자에 집착한다. 그러나 숫자보다 보이지 않는 통계, 통계 외적인 부분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빈곤율이 높다보니 국내의 빈부격차가 매우 심각하다. 얼마나 심하냐면 인도네시아 부호 상위 4명의 재산이 인도네시아 인구 40%의 재산과 맞먹을 정도라고 한다. 필자 또한 자카르타를 벗어나 제2의 도시인 수라바야를 방문했을 때, 거리 곳곳에 널려있는 할렘가 수준보다 못한 판자촌들, 온갖 각종 쓰레기 냄세, 쥐가 곳곳에서 바글거리며 청결하지 못한 거리들, 그 사이에 비춰진 구(舊) 네덜란드 총독부가 자리했던 온통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중심 번화가와의 비교 모습 등은 아직 인도네시아의 갈 길은 매우 멀어보인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또한 정계와 제계의 부정부패도 매우 심각한 편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작성한 부패인식지수에서 인도네시아는 평가대상 177개국 중 114위를 기록했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부정부패가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지적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국회가 여러 당이 난립하는 형태다 보니 여당이 과반을 차지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점도 발목을 잡고 있다. 당시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가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성향의 보수주의 정당들과 항상 마찰을 일으켜 대통령으로써 권한행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래도 당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에서 훌륭한 치적을 남긴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 등 악재 속에서도 연간 7% 성장이라는 대선 공약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연간 5% 이상의 탄탄한 성장세를 유지했고, 인도네시아 빈곤율도 역대 최저치인 10% 미만으로 낮추었으며 실업률도 5.6%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는 수라카르타 시장 시절부터 엘리트가 아닌 서민을 대변하고, 소통을 중시한다는 평판을 얻었고, 이에 힘입어 결국 자카르타 주지사와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까지 올라갔다. 자카르타 반부패 개혁, 인프라 개선, 도시 미관 개선, 치수 사업을 통한 홍수 피해 완화 등과 더불어 의료보험을 보편화시켰다. 더불어 지난 2022년 11월 1일에 발리 섬에서 벌어지는 G20 회의에서 푸틴과 젤렌스키의 대면 회담을 중재 및 전쟁 종결을 주선시킨다면 그와 더불어 21세기의 큰 전쟁 중 하나를 종식시켰다는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22년 G20에서 푸틴과 젤렌스키는 결국 대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업적은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위상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대한민국 군수산업의 큰 손이기도 하다. 잠수함부터 시작해서 전투기도 수입해갔다. 이에 대한 대응인지 한국 또한 2011년 해경이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된 CN-235 4대를 도입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에서 1,200t 급 잠수함을 구매하기도 했으며 2015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양국 공군이 운용할 4.5세대 전투기 KF-X (인도네시아에서는 IF-X라고 부른다)의 공동개발도 시작되었다. 한국 공군이 120여 대를, 인도네시아 공군이 50여 대를 도입할 예정에 있다. 그리고 무기 말고도 한국이 대 인도네시아의 수입품목은 천연 가스, 유연탄, 원유, 동광 등 자원 및 원자재가 전체수입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는 국가, 그리고 국가 경제 산업, 원자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 전투기 공동제작을 억지로 끌고 오고 있으니 손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KF-21 전투기 사업을,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냐면서 KF-21 전투기 시험 비행 때 전투기에 태극기와 인도네시아 국기가 같이 있으니 지우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어 인도네시아하고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남아시아 손절하면 한국은 어디하고 손잡고 무역하며 외교할 수 있을까? 러시아, 중국도 싫고 일본도 싫고 동남아시아도 싫다면 어디로 해야 하나? 결국은 수천 km 떨어진 미국 외에는 답이 없다는 얘긴데 25%의 관세, 3,500억 불을 내시고, 각종 기술들을 강탈당하면서 미국의 경제 식민지가 되자는 말고 같다. 언제부터 한국이 잘 살았다고 동남아시아를 무시하는지 모르겠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싱가포르 GDP의 4분의 1 수준 밖에 안 됐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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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미래와 동남아시아 최대 영토를 가진 국가의 명(明)과 암(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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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의미 : 미국에 전파된 한국영화와 한류에까지 관세 부과하려 하는 트럼프
- 한류는 우리 문화 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큰 컨텐츠이다.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방향성과 깊이, 그리고 세계 유수의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 한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K-POP이나 K-DRAMA와 영화만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화적 정체성을 포괄하는 단어가 한류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몇몇 분야에서만 범칭되어질 수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과의 적대관계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전략적 파트너쉽으로 함께 가야 한다. 중국은 우리의 문화를 가져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자들이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한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실질적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많은 외화벌이를 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기 때문이고 일본을 타고 미국과 남미로 건너가는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를 통해 중앙아시아, 유럽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통과하여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로의 진출을 타진하고 있는 것이 엔터테인먼트 전략의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한 유라시아 역사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타고 중동과 유럽으로 진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교류하여 우리의 연구분야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는 약 15억 명이다. 국제연합(UN) 가입국 중 57개가 이슬람 국가로 등록돼 있다. 최근 중동 전역에 한류 열풍이 몰아치면서 중동 사람 대부분이 ‘코리아(Korea)’ 브랜드에 열광하고 있다. 최근 동남아시아 지역에 영화, 드라마, 가요 등 한국 대중문화와 패션, 핸드폰, TV세트 등 가전제품 심지어 김치, 고추장 등 한국 전통 음식에 대한 선호 현상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 근현대사만 놓고 볼 때 우리가 중국,일본, 미국 등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다가 이제는 오히려 우리 문화가 역 수출되는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류 열풍의 원인과 배경은 우선 국제 관계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문화적 정체성으로 혼돈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한류 열풍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진다. 이 지역에서 문화적 종주국 행세를 해온 중국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국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개혁, 개방 노선과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그 동안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화적 기지 역할을 해왔던 홍콩 역시 지난 97년 본토 편입 이후 문화 산업이 할리우드로 기지를 옮겨가 그 영향력을 잃은 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대중 문화는 자본주의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으나 문화적 정체성에 혼돈을 겪고 있는 이들 지역 국가에서, 특히 신세대를 대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베트남에서의 한류 현상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중심으로 일고 있으며 그 영향은 패션과 가정용 소비 제품 선택에도 미치고 있다. 베트남에서 일고 있는 “한류” 열풍을 일컬을 때,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베트남이야말로 한류의 원류라는 주장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아마도 베트남에 일정 기간 거주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양국 민간의 정서상 친근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사실 이곳에 거주하다 보면 한국인과 베트남인 간에는 유사한 정서를 많이 느끼게 된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자주 이야기 한다. 이는 무엇보다 한국인과 비교할 때 훨씬 개방적인 베트남 사람들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가 큰 것 같다. 러시아 같은 경우, 스마트폰은 아이폰보다 갤럭시가 더 많이 팔린다. 왠만한 가정집에서는 삼성이나 LG의 냉장고, TV, 전자레인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가지고 있다. 경동나비엔은 러시아 상공회의소 주관 조사에서 난방기기 부문 러시아 국민브랜드로 3년 연속 선정될 정도이고 한국 마요네즈나 초코파이가 인기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팔도의 도시락 컵라면은 한국에서보다 러시아에서 50배나 많이 팔린다.삼성전자는 전쟁 전까지 러시아에서 몇 년째 1등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MZ 세대 한류의 성지(聖地)인 CHICKO도 있다. 상식적으로 이런 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우리 물건 더 팔아야 하는건 당연한거 아닌가? 대한민국에서는 미국의 트럼프가 이제 한류와 K-무비 및 K-드라마, K-POP까지 건들려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트럼프가 트루스소셜에서 해외 제작 영화에도 관세를 100% 물린다고 했다. 이건 보나마나 우리 한류를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미국 트럼프가 우리 한류에 대해서도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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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의미 : 미국에 전파된 한국영화와 한류에까지 관세 부과하려 하는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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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
- 필자는 여태껏 전 세계 91개국을 다녀봤지만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를 방종인지, 자유인지, 구분이 안 가게끔 마음껏 누리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의 사전적인 의미는 "견해와 사상을 발표하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적용"한다는 것에 있다. 즉, 담화나 연설, 토론과 같이 구두로 표현하는 경우를 두고 흔히 "언론의 자유(Freedom of the press)"라 칭한다. 그리고 책이나 발행물 같이 문서로 표현하여 남기는 경우는 "출판의 자유(Freedom of publishing)"라고 정의한다. 그 외에도 연설, 인터넷을 통한 표현, 회화, 음악 등의 예술 작품 등도 모두 같은 권리로써 이 모든 것을 통칭한 것을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라고 한다. 최근들어 인터넷이나, SNS, 유튜브, 틱톡, 릴스 등의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표현은 예전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SNS, 동영상 플렛폼 등 여러 사람들의 표현이 보다 쉽게 전달되어 진위 여부에 대한 문제점과 타인에 대한 비난과 모독과 같은 부작용이 부각되기도 한다. 최근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가짜 뉴스의 규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악의적인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반 나치법과 같은 의미에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표현의 자유가 나타나는 상징적인 의미는 페미니즘이고 인권(Human rights)에 대한 강조이며 자유를 빙자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절대 다수에게 피해를 입히는 방종(License)이 문제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권, 혹은 표현의 자유 등은 강자에게서 억압 받는 약자들을 위하거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며 비평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여 타인에게 의사를 전달한다는 사전적인 의미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침해하면 인권탄압(Human rights violation)이자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여 공산주의 사회냐고 울부짖는다. 이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다. 그 동안 한국은 보수적인 가치관을 우선으로 삼아왔고 진보적인 가치관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이 이념전쟁의 최전선에 서있으니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기조가 섞이고 있다. 기존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깨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물론 옳은 말이다. 나도 기존에 갖고 있던 틀을 현대화 적인 방식으로 고쳐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책임(Responsibility)과 의무(Obligation)가 들어가고 방종(License)을 방지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통제력(Control)이 들어가야 한다. 마약, 젠더문제, 미성년자 성관계, 과도하게 관심을 끌기 위해 SNS나 개인 방송을 이용한 가짜뉴스 살포, 관심을 끌기 위한 유튜브, 릴스, 틱톡 등의 숏츠 방송 등으로 사진에서와 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등, 사회 전반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하다. 인간은 "악용의 동물"이다. 얽매이는 규제를 싫어하고 규정 같은 것은 자신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 같아서 사회적 염증을 내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동물은 자유롭게 구속력이 없이 살아가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동물에 비해 아주 복잡한 사회구조상, 집단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회적 규범(Social norm)"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규범이 필요하다는 것,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그 인식의 이면으로는 이를 매우 피곤해 한다. 그러니 규범의 사각지대, 혹은 합법을 가장하여 자신의 유리에게 이끌려고 악용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로 도출된 규범이라는 것 또한 인간들이 만든 것이기에 완전하지 않고, 이를 잘 아는 인간들은 합법과 불법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그 안에서 자유를 찾는다. 이 또한 수많은 방종 형태의 일부분이다. 물론 자유와 방종의 차이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학습이 필요한 부분이다. 물론 지금 당장 없애기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유와 방종에 대한 구분,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자신이 행한 자유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교육은 학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교육이다. 자유라는 것은 항상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책임과 의무, 그에 따른 통제는 자신이 어떤 자유를 행했느냐에 따라 댓가의 강도가 달라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표현의 자유"는 규제와 자유 사이에 있어 매우 민감한 문제다. 이런 것들에 대한 통제에 있어, 사회적 규범 중 하나에 합의해야 하는, 이른바 명확성 원칙(Vagueness doctrine)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수행하는 역할과 그 기능의 민감성 등을 볼 때 불명확한 규범에 의한 규제는 법적으로 보호 받는 표현에 대한 위축적인 효과를 수반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규범들은 표현에 위축적인 효과가 미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을 세밀하고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인터넷 방송 등으로 인한 방종은 이미 그 심각성을 넘었다. 이는 법적인 부분과 사회적인 부분에서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불특정 다수만의 자유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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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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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이후, 삼국간섭 : 러시아와 관계 악화의 배경
- 일본은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주 조선 공사로 보내어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 일본은 잠정 합동 조관을 근거로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 교관의 파견했으며 일본 통화의 유통과 더불어 방곡령 금지 등을 통해 전쟁 협력으로 인해 내정 개혁에 직접적으로 간여하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기보다 명목적으로 조선 독립의 보장을 빙자하여 간섭하고자 했다. 이들은 영국의 이집트 보호와 같은 간접적인 보호국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1894년 하반기부터 1895년 3월까지 진행된 제2차 갑오개혁 당시 국채 도입은 개혁 관료들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내정 간섭과 통상권익 확보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앙 및 지방 행정 제도의 개혁, 그리고 재정 일원화 등 개혁 정책은 일본으로부터 재정 차관의 도입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증가하는 일본인 고문관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조선의 대일 정치 경제적 종속화 및 일본의 간접적인 보호국화는 영국, 미국 등 서구 열강에게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각하께서 더욱 주목하실 제가 수집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자유로운 수중에 두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희망은 그 나라에 보호국(Protectorate)을 설치하거나 일본의 종주권(Suzerain) (下의) 국가나 봉신국(Vassal State), 또는 조공국(Tributary State)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교섭 과정에서 독일, 러시아, 프랑스는 일본에 대해 압력을 넣었지만, 이는 조약 체결에 있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한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승전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전후 열강과의 협동이라는 방침은 불가피했다. 러시아 외상 알렉세이 로바노프(Алексей Лобанов)는 조약 체결과 동시에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에게 러시아에 동조하여 요동 반도 점령에 항의할 것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확고한 러불 동맹의 전제에 따라 협조하였고, 영국은 친일적인 국내 여론과 대 러시아 견제라는 노선에 따라 불간섭 정책을 지속하고자 했다. 오래 전부터 중국 항구의 조차를 통해 무역과 군사 거점을 원했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불간섭 노선을 확신하고 외교부로 하여금 주일 독일 공사에게 러불동맹에 협조할 것을 신속하게 결정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4월 23일에 이르러 주일 독일 공사, 러시아 공사, 프랑스 공사는 외무성을 방문해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와 회동해 요동 반도의 점령을 비롯해서 조약의 전면적인 재고를 요구했다. 삼국동맹은 일본의 요동 반도 점령을 조선의 독립을 유명무실화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선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대응했다. 삼국간섭에 대해 미국의 전통적인 불간섭 정책과 일본의 기대와 다른 영국의 냉담에 일본은 러시아와 외교적인 타협이라는 대안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아시아를 두고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었지만, 삼국과의 관계 악화까지 감수하면서 일본에 협조할 의향은 없었다. 4월 29월, 영국 외상의 킴벌리(Kimberley) 백작 존 워드하우스(John Wodehouse)는 주영일본공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에 대해, 영국은 중립을 지키고, 일본에는 원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한편 궁지에 몰린 이토 히로부미 등은 청나라 황제가 시모노세키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는 것을 염려했다. 결국 일본은 여순구(旅順口)를 제외한 요동 반도의 점령 포기 의사를 밝혔지만, 러시아는 그에 응답하지 않고 청나라도 삼국간섭을 빌미로 비준서 교환을 연기하고자 했다. 대안이 없었던 일본 정부는 5월 4일 각의에서 여순구도 포함한 전 요동 반도의 포기를 결정하고 다음 5월 5일 주일 독일, 러시아, 프랑스 공사에게 이러한 결의를 통고했다. 5월 8일, 예정대로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고, 한편으로는 조약의 발효에 따라 요동 반도의 환부를 두고 청일 양국은 교섭에 돌입하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요동 반도를 할양받게 되고 영국과 영일동맹마저 맺으며 확고한 지배권을 형성하려하자 부동항을 얻기 위해 동아시아를 지켜보다가 일본의 팽창에 위기를 느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독일 제국과 프랑스를 설득해 이 3국이 일본 제국에 대대적인 외교적인 압력을 행사한 사건이 삼국 간섭이다. 만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는 그곳에서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청도와 산동반도에 세력을 갖고 있던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와 영일동맹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끌어들여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에서 6일이 지난 1895년 4월 23일 각국 대사들과 함께 일본 외무차관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삼국의 압력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크게 세 가지 방안을 검토했다. 첫 번째는 지금 당장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자는 것이었지만 청일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매우 컸으며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국력은 당시 일본이 상대하기도 역부족이었기에 이러한 의견을 지지하는 측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는 곧바로 요동반도를 반납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요동을 청나라에 돌려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돌려주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 일단 회담을 연 뒤에 여기서 돌려주는 방식을 채택하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가 회담을 벌이면 다른 문제가 제기되어 얻은 것도 놓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두 번째 안이 채택되었다. 청일전쟁에서 할양 받은 대만 섬, 펑후 열도와 더불어 해남도를 요동반도 대신 받으려고 했으나 매우 멀어 결국 배상금을 3,000만 냥을 더 받는 선에서 타협을 봤다. 결과적으로 볼 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했다. 청나라는 러시아 제국에게 감사를 표하며 산동반도를 군사 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당연히 일방적인 국력차로 물러나게 되며 일본 대중과 일본군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반감과 분노를 지니게 되었으며 특히 1898년에 러시아 제국이 일본이 반환한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여 군항으로 활용하게 되자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한 일본의 반러 여론이 형성되었고 러시아와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결국 러일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1687년 8월, 러시아의 전권 대사 골로빈은 셀렌긴스키(바이칼 호 근처. 현 부리야트 공화국)에 도착해 강희제에게 서신을 보낸다. 러시아는 셀렌긴스키에서 회담을 갖고 싶었지만 갈단 체렝(준가르 부)을 걱정한 청나라는 거부했고 결국 네르친스크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1689년 6월, 청나라 협상 대표단 허서리 송고투는 골로빈에게 도착했음을 알리고 8월 19일 회담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골로빈과 정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하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에 압력을 가해 퇴각하게 해준 러시아에 관심을 가지고 러시아 공사관 카를 베베르(Карл Вебер)를 자주 불러들여 우호적인 외교를 했다. 삼국 간섭 이전부터 조선은 러시아와 접촉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조선의 종주국 역할을 했던 청나라와 빠르게 부상하던 일본 모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청일전쟁 전까지 적극적으로 고종을 돕기 보다는 조선의 요구에 직답을 피하고 자신들이 당면한 유럽 문제에 집중하며 조선의 가치를 두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당연히 겨우 친일 조정을 구성한 조선에 대해 일본은 좋지 않은 면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조선마저 러시아에게 장악 당한다는 위기심이 확고하게 된다. 일본 공사관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친일 내각의 힘이 약화되고 김홍집(金弘集)과 박영효(朴泳孝)가 알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데다 김홍집이 총리에서 사퇴하여 친일파의 세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이 때의 박영효는 친러 성향을 보였고 친러파가 대두했으며 이 친러파 중 후일 악명 높은 친일파 이완용(李完用)도 있었다. 다만 박영효 역시 김홍집과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등에 의해 축출 당했고 김홍집은 다시 내각 총리가 되었지만 세력은 친러파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다시 친일로 기울어진 박영효가 역모를 시도한 사건을 계기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일본에 돌아와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를 다시 급파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은 한성신보(漢城新報)를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연일 비방했고 일본군에게 훈련받던 훈련대를 고의로 조선 순검과 충돌시켜 여론을 호도하는 등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퇴임한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를 신임 주한공사로 삼아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친러 내각을 친일 내각으로 재구성시켰다. 이에 친정부 어용 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峯)는 청년 시절 자유 민권운동 언론가이자 사상가로서 평민주의를 주장하고 팽창주의를 비판했는데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삼국간섭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저술했다. 그러나 그는 삼국간섭 이전인 청일전쟁 개시 때부터 언론을 통해 제국주의와 팽창, 대일본주의 이념을 국민들에게 침투시키려고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청일전쟁 말에는 대일본 팽창론을 통해 요동뿐만 아니라 산동과 대만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전쟁을 벌여야 된다고 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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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이후, 삼국간섭 : 러시아와 관계 악화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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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근대 유럽에서의 가발은 권위의 상징
- 전 근대 유럽에서의 가발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귀족이나 장군, 제독과 같은 고위 장교와 고위 공무원들은 공식 석상에서 가발을 애용했다. 이러한 머리를 '퍼루크' 라고 한다. 유럽 근세 시대에서 근대 시대의 역사적 인물들 초상화를 보면 많은 왕이나 정치인, 군인 등 귀족들 대다수가 풍성한 가발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루이 14세는 크고 아름다운 가발을 착용하여 전 유럽의 주목을 받았는데, 절대왕정을 추구한 프리드리히 1세 등 후대의 프로이센 군주들 역시도 루이 14세의 헤어스타일을 동경하였다. 이들은 매우 비슷한 모양의 가발들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도 가발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가발들은 흰색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주고 묶어서 롤처럼 말린 형태가 선호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푸들이나 양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대표적인 예가 헨델의 초상화를 들 수 있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매우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이 가발들도 당시에는 수공업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비싸 가발 도둑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가발을 훔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흔한 방법이 천으로 가린 큰 바구니에 어린 아이들을 싣고 그 바구니를 머리 위로 든 여성이 도둑질을 목표로 찍어둔 가발 쓴 사람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 빠르게 바구니 안의 아이가 가발을 낚아 채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발을 대상으로 한 절도 범죄가 끊이지 않았고 가발 쓴 사람들은 바구니를 머리에 올려둔 여인이 다가오면 피했다고 한다. 군인들도 하얀 가발을 착용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았다. 그나마 돈이 없으면 맨 머리에 밀가루를 뿌려 흰색을 내야 했는데, 올백을 기본으로 하고 포니테일 방식의 머리 모양은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 번 해두면 상당기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밀가루가 땀과 머리카락 기름 등에 반응해 썩는 경우가 생겼던대다 쥐가 한밤중에 파먹으러 달려들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피부병이 생기는 등의 고생을 했다. 영국이나 몇몇 영연방 국가의 판사들과 변호사들은 현재에도 하얀 말총 모양의 가발을 쓴다. 나름의 전통으로 이어지기는 하였으나,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하고 있고, 대단히 비싼 가격의 가발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법조인들도 있어서 이에 대해 찬반 논란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같은 유럽 문화권에서도 이에 대해 귄위주의적인 부분으로 보며 이에 비판적이기도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2008년부터 형법을 제외한 재판들에서 변호사들이 가발을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판사는 형사 재판이 아니더라도 아직도 전통을 고수하여 착용해야 한다. 어쩌면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가발을 쓰는 것이 아닐지. 여태까지 권위의식을 가장한 유럽의 가발이라는 행태 등으로 볼 때, 유럽 근현대 시대의 가발이라고 하는 것은 신분계층의 상류층으로써 권위적인 면을 앞세워 서민들을 찍어 누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임을 강조하기 위한 권력의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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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근대 유럽에서의 가발은 권위의 상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