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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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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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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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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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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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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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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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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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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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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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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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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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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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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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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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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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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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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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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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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티의 근본 이념이자 예멘의 이슬람 정파 자이드파
- 자이드파는 통칭 자이디야 혹은 5이맘파로도 불린다. 제5대 이맘으로 주류 시아파가 섬기는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 Baqir)가 아닌 그의 동생 자이드 알 샤히드(Zaid Al Shahid)를 추종하는 분파다. 본래 여러 반란과 이란 카스피 해 남안에 위치한 타바리스탄 지역에서의 알라비 왕조 수립 등 수니파 중앙 정부와 극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모두 진압되고 대부분 은둔하여 이슬람 세계의 서쪽 끝인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에 이드리스 왕조, 아라비아 반도 남쪽 끝의 예멘에 이맘 왕국인 라시드 왕조를 세워 세력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라시드 왕조는 1962년 공화정 수립 이전까지 세력을 유지했으며 현재도 예멘의 무슬림 중 절반이 자이드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초창기 정통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를 부정하는 다른 시아파와 달리 자이드파는 그들의 이맘 직위를 인정하여 대다수 수니파들과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를 남기긴 했다. 그러나 알리 이븐 아비 탈립(Ali Iben Avi Thalib)의 정통성 우위는 여전히 주장하며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부터의 칼리프들을 단죄하고 비합법적인 칼리프와의 전쟁을 신자로써 당연한 도리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예멘의 북부 지역과 그와 접경한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 지방인 아시르(Asir) 일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흔히 이들을 시아 신앙의 한 분파로 다른 이름으로는 ‘5 이맘파’라고 하며 예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아파의 제4대 이맘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Alī Zayn al-‘Ābidin)이 713년에 사망하자마자 자이드파는 그의 장남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Muḥammad al-Baqir)보다 오히려 작은 아들 자이드(Zaid)를 이맘으로 선택하고 다른 시아파, 즉 절대 다수인 열두 이맘파에게서 분파되어 나왔다. 그들은 우마이야 왕조에 보다 격렬하게 저항하기 위해 자이드에 집결했다. 역대 이슬람 역사에서 주류 파벌에 대해 가장 저항적으로 나왔던 자이드파는 오늘날에는 모든 시아파 중에서 가장 온건하며 수니파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다. 물론, 그들 역시 나름의 법학파(Madhhab)들을 갖고 있다. 그들의 시아 신앙은 알리(Ali)와 그의 후손의 권위와 통치를 정치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에서 나왔다. 또한 열두 이맘 시아파 가운데 발견되는 초자연적 힘에 대한 찬미, 천국에 대한 지식 및 알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 기능은 거의 없거나 전무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시아파의 특징과 유사점이 많아 예멘은 역사적으로 시아파 망명자들, 특히 이스마일파의 소수 분파 집단의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후티가 통치하는 현재도 그러하다. 자이드파가 피지배계층으로 가장 많은 국가는 카스피 해 연안의 다일람(Daylamites) 인들 사이에서 864년부터 1126년까지 많은 침략을 받으며 존속했던 알라비 왕조이다. 10세기 초, 자이드파는 먼저 예멘의 사아다(Sa‘ādah)에 정착했으며 이후에는 사나(Sanā‘a)에 정착했다. 오늘날 자이드파는 예멘 아랍 공화국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종파로 예멘에서만큼은 주류 종파이다. 나머지 예멘인은 수니파의 샤피이(Shafi‘ī) 법학파라 할 수 있다. 자이드파의 이맘 논리에 의하면 알리의 후손은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 물론 1명 이상일 수도 있고,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권력을 장악함으로 인헤 입증된 통치력이 이러한 주장을 강력한 배경으로 하며 이슬람 신학자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이드파의 이맘은 열두 이맘파의 이맘에게 부여된 특권, 신비적인 힘과 초자연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자이드파는 아부 바크르(Abū Bakr)와 우마르(‘Umar)의 칼리프 제위를 인정했지만 우스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그의 칼리프위의 5년 동안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열두 이맘 시아파처럼 자이드파는 무타(Mut‘ah, ‘일시결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무타질리파(Mutazilite), 이성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멘의 자이드파 왕국인 라시드 왕국은 야흐야 이븐 후세인 알 라시(Yaḥyā ibn Ḥusayn al-Rassī)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 왕조는 사나(Sanā‘a) 지역에서 많은 전쟁과 흥망성쇠들을 겪으며 간혹 중단되기도 했으나 10세기부터 1962년까지 통치했다. 그 해에 육군대령 압드 알라 알 살랄(‘Abd Allāh al-Sallāl)에 의해 이 이맘 국가체제는 전복되었다. 공화주의자와 왕정주의자 사이의 예멘 내전은 1972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이맘(Imam)은 그 이전에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곳에서 사망하면서 이맘이 없는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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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티의 근본 이념이자 예멘의 이슬람 정파 자이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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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르포 : 미트로비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 작년 내가 코소보에 있을 때 분쟁의 현장인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지구와 세르비아계 지구를 다녀온 바 있다. 프리슈티나에서 탄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알바니아계 지구이다. 어차피 세르비아-코소보는 국경이 폐쇄되어 세르비아계 지구로 가지도 못한다. 미트로비차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자치주들 간에 균열이 발생했다. 내전은 나토와 서방의 개입으로 1999년에 중단됐으나 세르비아는 코소보 자치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끝내 2006년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저 완전히 붕괴하고,몬테네그로가 독립했다. 그리고 2008년 이곳에서 코소보는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를 자국의 자치주로 보며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들도 독립을 인정하는 국가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로 분열되어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그 비극의 모든 것은 이곳 미트로비차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로비차에 도착하자마자 무슬림 무덤들이 나오고 유고슬라비아 때부터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이 도시가 세르비아 정교와 알바니아 무슬림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임을 말해주고 있다.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던 이곳은 당시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聖地)라는 이유로 알바니아계의 권리를 박탈하자 알바니아계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당국은 언론, 교육을 통제하여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수많은 자치주 내 알바니아계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이후 1992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연방이 붕괴하고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어 세르비아 공화국 관할 자치주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신 유고 연방의 일원이었다가, 신 유고 연방의 차별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계들과 세르비아계가 미트로비차에서 정면 충돌하여 1998년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을 주도했던 코소보인은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1955~1998)를 필두로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가 주축이 되어 세르비아에 항쟁했다. 특히 아뎀 야샤리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코소보를 분리하기 위해 싸웠던 코소보 알바니아 분리주의 민병대인 코소보 해방군(KLA)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그는 당시 미국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91년부터 야샤리는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알바니아로 가기 전, 세르비아 경찰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면서 대놓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1993년에 체포된 야샤리는 알바니아 군대의 구출 작전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나중에 코소보로 돌아와서 유고슬라비아 정권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는데 대부분이 자살폭탄테러로 인한 유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후 1997년 7월, 야샤리는 유고슬라비아 법원에서 궐석 테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은 이후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는 세르비아의 압제에 저항한 합법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세르비아가 이를 탄압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권 침해이자 탄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는 야샤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 그를 체포하거나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경찰은 1998년 3월 프레카즈에 있는 야샤리의 집에 그가 있음을 파악하고 제거 작전에 나섰다. 결국 총격전이 이어졌고 야샤리와 그의 아내, 형제, 아들을 포함하여 야샤리의 가족 57명이 전사했다. KLA의 아버지이자 國父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야샤리(Jashari)는 공동 지도자이자 동료인 하심 타치에 의해 추앙되었고 그는 후일 알바니아 민족에 의해 코소보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는 온건파인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와 전혀 극과 극의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야샤리는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 이후에 "코소보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프리슈티나 국립극장, 프리슈티나 국제공항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및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올림픽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후로 코소보 북부도시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로 모든 것이 갈라지게 된다. 이바르 강의 강북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했고 강남에는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쪽은 세르비아 정부가, 남쪽은 UN이 관할하기에 관할 기관도 다르다. 남북간에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바르 강의 다리는 두 곳이 존재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바르 강은 정확히 민족, 인종 간의 경계선이 됐다. 종전 이후, 세르비아군이 철수하자 그간 세르비아에 박해를 받아 온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보복 공격을 자행했다. 미트로비차의 참극은 코소보 전쟁의 시작점인 곳이었지만 종전 이후에도 두고 두고 유혈사태가 이어졌다. 참고로 미트로비차는 현재도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지정한 "철수 권고" 지역이다.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선으로 코소보 인종 분리의 상징이 됐다. 미트로비차 문제의 본질은 양측의 공존공생 모색에 있고 이 공존공생에 대한 해결 대안은 ‘자치 도시’를 만드는 것에 있다. 두 개의 자치도시를 만들면서 코소보 내에서 국제 관할 아래 두자는 것이 알바니아인들의 생각인 데 비해 세르비아인은 완전히 두 개의 자치도시로 분리해 북쪽은 세르비아에 귀속시키자는 입장에 있다. 세르비아인들의 요구 사항은 자치 도시 설립의 주요 목적으로 난민들의 고향 복귀와 안전 및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있다. 세르비아군의 철수 이후 25년 가까이 알바니아인들의 핍박과 박해 속에서 살아온 세르비아인들의 정상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알바니아 측은 자족적이며 지속 가능한 자치 도시 방안을 고수하고 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은 이바르 강을 북미트로비차의 코소보 편입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다. 이에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지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도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할지언정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민간인들의 자체 군사력 보유와 북미트로비차 합병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에 있다고 한다. 이에 집단서방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접촉 그룹은 세르비아에 대한 압박과 회유로 해법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만 양측 모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에 있다. 필자가 방문하기 얼마 전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세르비아 거주 지역을 침공해 세르비아 국기를 걸레로 만들고 몇몇 상점들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를 했다. 이 때 총 4명이 부상을 입고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일 동안 화염병 투척 당한 건물은 복구조차도 안 되고 있다. 이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정부가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려 있는 도로의 세르비아 국기마다 걸레처럼 변했다. 전쟁 전 코소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나토의 폭격 이후, 이바르 강 다리를 건너 피난해야 했다. 25만 명의 코소보 세르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큰 도시들로 피난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미트로비차 강북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미토로비차의 강북과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용하는 돈도 달라졌고 전화번호의 지역 번호조차 달라졌다. 지금은 물론 똑같은 유로를 내지만 미트로비차 북쪽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는 세르비아 디나르 화폐도 통용된다. 세르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인 미트로비차 강북에는 중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장갑차나 지프들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무장군인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하는 순찰 외에는 정상적인 납세나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어 무법상태와 마찬가지다. 강남의 알바니아 쪽에서는 강북의 세르비아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벌이며 침공해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두 계통 시민들 충돌의 현장, 필자는 이 비극의 현대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는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끊임없이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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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르포 : 미트로비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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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중국의 관세 협상 결과,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은 많은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빅딜’ 협상을 통해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미국이 중국에 부과한 145% 관세를 30%로, 중국이 미국에 부과한 125% 관세를 10%로 낮추기로 서로 합의했으며, 관세 인하 시한을 또한 90일로 정한 이후 추후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의 의문은 대다수 전문가의 예상을 뒤집고 일종의 깜짝쇼처럼 비출 수 있는 합의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국에 보복성 관세를 부과하면서 마치 어느 쪽도 물러날 뜻이 없이 끝까지 간다는 발언들이 나왔던 시점에서 보면 선뜻 이번 합의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이번 회담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고 덧붙이고 있고, 미국은 중국이 경제가 붕괴하고 있어서 중국 관리들이 미국과 거래를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진술을 보면 공통으로 상대방의 사정으로 이번 회담은 성사될 명분은 충분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보복성 관세를 계속 부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현재 서로의 문제를 교착화만 시킬 뿐 서로에게 피해만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당장 상품 수출이 막히게 되니까 그대로 수출 상품이 창고에 쌓이게 되고, 이와 대로 미국은 소비재가 공급부족에 따라 물가 상승에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각각 협상 타결의 필요성이 절실했지만, 상대방의 양보를 얼마나 얻어내느냐에 있어서 말하자면 계산이 분명히 서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은 노동절 연휴와 러시아 전승절 참석 이후가 미국과의 협상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 당국은 노동절 연휴에 내수경기를, 러시아 전승절 참석으로 수출 시장의 다변화를 일단 한번 보고 나서 어느 정도 대비를 하면서 대비 협상에 임했을 수 있다. 또 중국은 자국의 생산기지를 일부 동남아로 옮기면서 미국으로부터 각종 제재를 피하면서 실속을 챙기고자 했을 것이다. 거기에 중국은 쉽게 말해 미국과 거래를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거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점에 따라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은 경기 침체와 성장률 둔화, 내수 침체에 따라 민심을 안정시키고 돈 풀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은 우선 관세 전쟁에 따른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경기 위축 등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사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대미무역 흑자국에 대해 강력한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중국은 미국의 최대 무역 적자국인데, 중국이 수입하는 중국산 품목은 전자제품(컴퓨터, 휴대폰, TV), 가전제품(냉장고, 세탁기 등), 의류 및 섬유(의류, 신발 등), 가구(사무용, 가정용), 장난감(완구류 등), 배터리(전기차용, 기타), 철강 및 알루미늄(건축 및 제조업용), 반도체, 핵심 광물(희토류 등) 등이다. 중국은 그동안 이들 품목을 싼 가격으로 미국으로 대량 수출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취득했고 그러다 보니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액은 약 2,956억 달러로 유럽연합이나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중국상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 정도로 그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과 반대로 미국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상품 품목은 곡물 및 종자류(대두, 옥수수, 밀 등), 석유 및 천연 가스, 기계 부품, 의약품, 항공 및 우주 관련 장비 등이며, 약 1,50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은 대중국 무역적자 외에도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지적하고, 중국의 기술 향상과 경제적 영향력으로 농수산물 분야를 제외하면 미국산이 중국에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아직 최첨단 분야에서는 중국이 아직 미국에 뒤처져 있기는 하지만, 차후에는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대중국 무역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을 관세라고 보고, 이를 잣대로 중국을 압박했지만, 시진핑 주석은 미국의 압박을 버티면서, 오히려 미국에도 보복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처음부터 관세로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다. 하여튼 미국과 중국의 이번 합의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의 득실을 따져 보면 중국은 오히려 소매 판매와 산업 생산이 모두 상승하고, 동남아와 유럽연합에 대한 수출을 늘렸다.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소비가 문제였지 생산이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어떤가? 미국은 물가 상승에다 국가 신용등급 강등, 재정적자라는 트레마(3중 딜레마)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경기 침체 가능성으로 인해 미국의 주식·채권·달러를 팔고 안전자산인 금으로 큰 손들이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여전히 관세 카드를 이용해서 미국에 대한 무역 흑자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의 다음 상대는 어디인가? 한국의 대선 후보들도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모 후보는 트럼프에 대한 막연한 신뢰로 직접 정상회담을 주장하는가 하면 모 후보는 반트럼프 전선으로 세계와 연대를 통해 대응하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친중국 정책이 대미협상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실용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하자는 논지를 펼쳤다. 여러 주장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별로 신통치는 않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였다. 이번 미국과 중국의 관세 협상은 차후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있어 하나의 카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협상 태도는 치밀한 계산과 집요한 버티기를 통해 오히려 미국에 명분과 체면을 세워 주었다. 중국은 겉으론 손해를 보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손해보다는 실속을 챙긴 셈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성급할 필요가 없고, 철저한 준비와 대응책을 충분히 갖고 미국과 협상을 제대로 해야 한다. 미국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섣불리 미국과 협상에 임했다간 자칫 한국은 미국의 의도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수출 위주의 한국 경제가 만일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난 3년 동안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치중한 탓에, 한국의 입지가 좁아져서 현재 상황으로 보면 한국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여기에서 관건은 미국이 관세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주한 미군의 방위비 인상을 강하게 압박함으로써 한국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입장에 맞서 한국이 이를 분리해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관세율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느냐에 있다. 일본도 처음에는 미국과의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가 현재는 관망하는 태도로 선회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그대로 관세를 부과한 것을 보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아무것도 미국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손해만 보았다는 생각에 결국 미국과의 협상에서 관망하는 태도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여기에서 우리가 심사숙고할 사항은 대미협상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철저한 준비와 대안을 갖고 서둘려 협상에 나서기보다 차분히 상황을 주시면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은 아마도 최악의 상황에 봉착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되었음을 뜻한다. 아직도 성장 일변도 정책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향에 눈을 감고 있다. 고도의 성장률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과 비전을 갖고 전진하는 도전의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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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중국의 관세 협상 결과,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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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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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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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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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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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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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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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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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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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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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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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 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점을 본다면 정말 미국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항상 코소보를 가서 보면 자국 국가 옆에 미국 성조기를 꼭 내건다. 코소보 현지인들에게 미국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친미주의 한국인들 대답과 똑같다.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 때문에 독립해서 이렇게 살게 되어서 항상 고마운 나라라고 한다. 코소보의 젊은이들은 제2 외국어가 아니라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하는데 억양을 들어보면 어김없이 미국식 억양이다. 그래서 코소보의 젊은이들과 대화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내 또래에서부터 그 윗 나이대 분들은 영어를 잘 못하기에 의사 소통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미국은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가장 먼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다. 부시는 또 2007년 6월에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코소보를 방문하여 정치, 외교적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부시는 당시 유럽 각국에서 가는 곳마다 극심한 반미 시위를 겪어야 했지만, 코소보에서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3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수바 레카(Suva Reka)까지 찾아와 길거리에서 촌부들을 껴안고 악수하는 자상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오바마 취임식에 앞서 부시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 방송되자 수바 레카(Suva Reka) 마을의 모든 주민이 TV를 보며 부시를 회고하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2009년에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코소보를 방문하였으며 바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코소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2016년에는 다시 코소보를 방문하기도 하여 코소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프리슈티나에는 '빌 클린턴 거리'가 있다. 공항에서 프리슈티나로 들어서는 입구 왕복 8차선 도로의 이름이 그것이다. 지난 200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 미국이 나토 군대를 이끌고 와 세르비아계 군대를 몰아내준 것에 대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빌 클린턴 거리 입구의 한 대형 건물 벽에는 클린턴이 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붙어있다. 프리슈티나의 시민 중 한 명은 "클린턴은 코소보에서는 영웅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거리 맨 끝부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가게가 있다. 힐러리 여사가 남편이 프리슈티나에서 바람을 필까 감시하기 위해 만든 가게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점이다. 코소보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르는 나라다. 작년 미국 독립기념일 때는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렸다. 코소보 현지의 인기 가수 등이 출연해 "나의 사랑, 미국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노래를 불렀다. 프리슈티나 주둔 미군 부대 밴드가 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인기 팝송을 불러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3.5m, 무게 900kg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동상 모습은 클린턴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클린턴은 코소보의 독립을 갈망하는 알바니아계와 전쟁을 벌인 세르비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 1999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폭격작전을 주도해, 알바니아계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판과 잡음도 많았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프리슈티나에는 로버트 조셉 돌(Robert Joseph Dole, 1923~2021), 일명 밥 돌(Bob Dole)의 동상도 존재한다. 클린턴과 1996년인가? 미 대선에서 겨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동상이 왜 코소보에 있을까? 그가 2009년 9월, 교착상태에 빠진 코소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프리슈티나에 왔다. 그가 온 이유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클린턴이 밥 돌에게 미국 외교의 최대 난제(難題) 중 하나인 코소보 사태 해결을 맡기자 워싱턴 정가는 “국익을 위해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한 결정을 내렸다”며 환영했다 한다. 미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적 라이벌에게 외교특사를 맡기는 경우가 흔하다. 밥 돌은 코소보 내전 당시 두 차례 프리슈티나를 방문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시민들이 제막했던 것이다. 한편 빌 클린턴이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은 자신이 르윈스키 성추행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의회가 탄핵을 준비 중이던 때 벌어졌기에 이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시민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건 것이다. 클린턴이나 밥 돌은 그저 네오콘의 소시오패스들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네오콘의 99%를 소시오패스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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