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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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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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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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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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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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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태국과 캄보디아, 트럼프가 주선해서 화해시킨다고 양국의 앙금이 풀어질까?
    캄보디아의 주 민족인 크메르족은 본래 남방 인들이 아니라 북방 티베트인들이 어떠한 현상으로 인하여 남하하였고 이곳 인도차이나 반도의 원주민을 정복하여 그들과 혼혈함으로 인해 생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의 외모를 보고 파악한 결과인데 남방의 완전한 검정 피부보다는 북방 인종의 하얀 피부와 혼혈된 피부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 크메르 인의 이동은 북쪽에서 동남아시아의 주요 지역으로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물론 이들의 이동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선사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인류학자들은 원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 살고 있었던 많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타이족보다 훨씬 빠른 시기인 3000년 전, B.C 2000년경에 내왕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티베트계 민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테국학계의 학자들은 중국 티베트 지역이 북쪽의 중앙아시아, 사카계 민족들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밀려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중국 영토 내부에서 오스트로아시아어에 발견되는 어휘나 주요한 강을 따라 이주한 경로를 보면 농경 목적 등으로 침입을 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크메르인은 운남이나 티베트 서부 지역의 묘족과 관련이 깊은 민족으로 추정된다. 태국의 주 민족인 타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보통 타이족은 운남성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운남성 지역은 사천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와 상고시대에는 이 지역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촉문명(古蜀文明)이다. 이러한 고촉문명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문화가 삼성퇴 문화이다. 삼성퇴 문화는 5000년~3000년 전의 고촉문화 유적으로 그 원주민이 어느 민족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점차 강족(羌族)과 저족(氐族)의 문명으로 합의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타이족도 아마 강족과 저족의 사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운남성 지역에는 지금도 여러 종족이 있는데 타이족은 베트남 서북 지역의 홍 강에서 다(Đà) 강, 마(Mã) 강을 지나서 람(Lam) 강 유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선조들은 아주 일찍부터 베트남, 특히 북서부 지역에 정착해서 거주해왔다. 백(白) 타이족이 가장 먼저 이주해 왔고, 그 다음에 흑(黑) 타이족이 현재의 거주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이들이 타이족 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현재 라오스와 태국 그리고 중국 남부에도 거주하고 있다. 타이족은 고대 중국 남방의 백월(百越) 집단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전한(前漢) 시대 역사서에 기록된 전월(滇越)은 타이족 선조의 초기 명칭이었다. 후한(後漢) 시대의 탄(撣), 당송(唐宋) 시대의 금치(金齒), 은치(銀齒), 수면(綉面), 망만(茫蠻), 그리고 원, 명, 청 및 민국 시기의 백의(白衣), 북이(僰夷), 파이(擺彛) 및 파이(擺夷) 등은 타이족 형성과 관계가 깊다. 이들 타이족이 내려와 말레이계 민족들이 자리한 오늘날의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타이족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게 되었고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타이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남하(南下)하여 언제 현재의 태국에 정주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여러 추정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밝혀나가고 있다. 태국에는 반 치앙 문화 때부터 여러 다양한 토착 문화가 존재하여 왔다.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태국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웃한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캄보디아와 태국은 서로 민족 자체가 다르다. 두 민족 사이에서 가장 먼저 치고 나간 민족은 캄보디아인들의 직접적인 선조인 크메르 제국이었다. 790년을 전후해서 세력을 규합한 자야바르만은 주변 영토들을 확장하고 작은 공국들을 통합했으며 수진랍과 육진랍을 통합했다. 이후 분열되어 있던 진랍의 각 세력들을 통합하였으며 여러 차례 거점을 옮기게 되는데, 현재의 프놈펜 롤루오스(Loluos) 지역인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로 천도하면서 제국의 기초를 쌓게 된다. 자이바르만은 바탐방 일대에서 발생한 진랍 후예들을 제압하고 802년 바탐방을 함락시킴으로써 진랍 왕조의 통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고 말았다. 같은 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 참파 북쪽 지역인 임읍국(林邑國)의 통일을 완수한 자야바르만 이비스는 수도를 앙코르 톰의 동북부 지역인 마헨드라파르바타(Mahendraparpata)로 이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황제로 선언한다. 이것이 크메르 제국, 다른 말로 앙코르 제국의 시작이다. 크메르 제국은 9세기~15세기까지 존속했고, 그 세력이 강성할 때는 현재의 태국 동북부, 라오스 및 베트남의 일부까지 광대한 영역을 장악했다. 흔히 캄보디아에 알려진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바로 이 크메르 제국 시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크메르 제국이 한창 강성했을 때는 태국은 당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이후 태국에는 서서히 쇠락하는 크메르 제국의 틈새에서 몬 왕국의 지배 하의 타이계 유통(Uthong) 왕국의 왕자인 라마 티보디(Rama Thibodi)가 전염병을 피해 차오프라야 강 하류 롭부리 지역에 정착해 1350년에 나라를 건국했으니 이것이 아유타야 왕국이다. 라마티보디는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켜, 15세기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골 지역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 하류에 출발한 국가로 수도인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섬인 하중도(河中島)에 만들어졌다. 이 일대는 농업 생산력이 높고 강을 따라 바다로 통하기도 쉬웠으며, 당대의 강국 크메르 제국과 보다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400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면서 태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동안 산재 하고 있던 타이족의 소왕국들을 하나의 권력 아래 집중시켜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한 왕조가 되었다. 이 때부터 동남아시아에 타이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자존심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양국은 숙명과 같은 대립을 꾸준히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후로 캄보디아는 다시 동남아시아 역사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베트남 양쪽으로부터 속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 지역의 명칭 유래가 "'시암(태국)이 평정했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근현대 시기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접수하고 태국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캄보디아는 사실상 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태국과 맺을 조약을 필두로 무책임하고 캄보디아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영토 분할을 했으며 1907년에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관할하고 있던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영토의 측정을 잘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태국 왕실이 이러한 프랑스의 결정적인 오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었고 크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당시 태국 차크리 왕실은 서쪽 미얀마와 남쪽 말레이 연방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영국과 동쪽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두고 있던 프랑스 사이에서 자국을 연명하는 것조차도 힘겨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태국 또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프랑스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태국 왕실은 1908년 그대로 프랑스의 측량을 승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국 측이 땅에 대한 측량 인식에 대한 부재, 그리고 측량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던 태국 왕실의 근대적 지식과 사고의 무지, 영토 측정에 대한 관심의 전무가 불러온 재앙덩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프랑스 측의 측량을 승인한 지 무려 26년 만인 1934년에 대해서야 이와 같은 프랑스 측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태국 왕실은 발견은 했지만 여전히 측량에 대해 무지했기에 프랑스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태국 왕실은 프랑스가 영원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침공하고, 프랑스의 지배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면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크메르족과 타이족이라는 민족성 문제까지 부각되면서 양국의 갈등은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태다. 그러한 와중에 지난 27일 트럼프는 태국과 캄보디아 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재 역할을 했다. 본 협정에는 협정에는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태국은 초기 휴전이 성립된 이후 포로로 잡은 캄보디아인 18명을 석방할 예정이며 두 국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수개월 전부터 추진해온 우호적인 이웃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분쟁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이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국경 분쟁의 중심이었던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영유권 문제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본래 분쟁의 해결은 분쟁의 쟁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쟁점은 논의되지 않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와 같은 본질을 비껴간 내용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우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볼 때, 태국이면 모를까, 과거 호치민 루트 시절에 깔아 놓은 지뢰조차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캄보디아가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를 보자면 우선 국경 지역에서는 뺄 수 있겠지만 차후 다시 벌어질 분쟁에서 재등장할 확률이 높다. 앞서 언급한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소유권 문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 또한 범죄단지와 결탁하고 있는 훈 센 가문이 과연 적극적으로 협력할 지도 의문이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문제는 상호간의 역사적 앙금과,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 그리고 영유권 다툼으로 인한 국경 분쟁 등,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태 트럼프는 세계 곳곳의 분쟁을 종식시키겠다며 여기 저기 발을 걸치고 있는데 제대로 된 곳은 한 곳도 없다. 이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다, 이를 해결할 방안도, 묘책도 없고, 무엇보다 분쟁 자체의 근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쟁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중재에 나선다면 당장은 중재국의 힘이 두려워 화의를 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한계는 명확해질 것이다. 그리고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작 분쟁의 근원과 원인은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지금은 미국의 힘과 트럼프의 관세가 두려워 표면적으로 악수를 할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관심이 끊기는 순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해 휴전을 어기고 폭격을 재개한 것처럼 이들 간의 분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겉장식으로 덮으려다 생긴 최악의 인명 손실은 전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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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28
  • 고대 카르타고의 영웅이자 포에니 전쟁의 상징, 한니발의 연승과 로마의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
    지중해의 여왕, 지중해 최대의 부자 도시로 불렸던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던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지중해 일대를 탐험한 끝에 이베리아 반도를 발견하여 차지하게 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엄청난 부, 특히 스페인 은광으로부터의 상당한 양의 부를 얻어 서유럽 팽창 정책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한니발이 탄생하고 유년 시기의 일설에 의하면 하밀카르가 살아 있을 당시 어린 아들인 한니발을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절대로 로마인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하였으며 한니발은 때가 되면 불과 쇠로서 로마인들의 운명을 정지하게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한니발의 삼촌인 하스드루발은 이후 로마와 협정을 맺었는데, 현재 스페인의 북쪽에 있는 에브로 강을 경계로 하고 서로 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고 히스파니아는 한니발의 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도시인 사군툼을 보호령으로 삼자 장성한 한니발은 협정 위반을 구실로 삼아 사군툼을 공격하였다. 사군툼은 로마의 동맹국으로 로마는 한니발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로마는 이에 즉각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단지 로마군의 공격을 방어하기보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B.C 218년에 원정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카르타고의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한니발은 보병 5만과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기 시작하였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와 더불어 좁은 도로 옆의 낙석지대, 그리고 외부 인들을 경계하는 갈리아 인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보병 중 1만 2천 명을 잃었고, 기병 역시 4천 명이나 죽은 상태였다. 코끼리들의 피해는 더 심각하여 거의 다 죽고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의 군대라 볼 수 없는 거지와 같은 형태로 변해있었다. 더구나 이 때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는 히스파니아 원주민인 이베리아 인들을 포함하여 갈리아 남부에서 전리품을 약속하고 융합한 갈리아 전사들, 누미디아 출신 기병, 지중해의 바레아레스(Islas Baleares) 군도 출신의 투석병과 카르타고 본토 출신의 소위 아프리카 보병으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병진을 닮은 군대로 이루어졌고 이들을 각종혼합 형태의 군대, 혹은 여러 군대가 섞인 잡군(雜軍)이었다. 그러한 군대는 수효만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처럼 여러 족속들이 혼합된 혼성군은 서로 간의 이해득실 관계에 따라 군 자체가 와해 될 수 있는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 있었다. 본래 군대에 간 군인들이 같은 병영 안에서 같은 부대 명을 사용하고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같은 목적과 그에 대한 동기부여 및 명분이라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혼성군의 경우는 이러한 연대성이 절실하기 때문에 군 통솔자가 군 집단에 투여하는 연대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 그로 인한 강한 규율로써의 통제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동료들과 자신이 하나의 집단에 속해있다는 의식과 명분은 병사들이 동료를 서로 도와 전투를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당시의 로마군이 그러한 형태였다. 자신들이 스스로 땅을 가지면서 로마라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위기에는 로마를 위하여 참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군이었다. 이는 같은 집단, 공동체를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과 동질 의식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상급자에 대한 충성과 더불어 공동체에 대한 수호의 이유도 이와 같았던 것이었고 그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열세를 극복하여 승리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러한 부대원 간의 화합만을 놓고 보자면 한니발 군은 로마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군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나라와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급조된 잡군들은 대개 전리품을 약속받고 전쟁에 동원되는데, 한니발은 단순히 전리품으로 용병들을 유혹하거나 카르타고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보다는 한니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하였다. 보장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군대의 결속과 자발성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 통솔력은 이후 강력한 로마 육군을 연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한니발을 상대로 육전에서 맞서는 로마 군의 지휘관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로 그는 앞서 본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으며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한니발이 나타나지 않자 다급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행방을 찾았으나 그가 알프스를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예상을 벗어나 알프스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자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고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한니발은 갈리아 포로들을 통해 스키피오가 이탈리아로 회군했다는 첩보를 접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B.C 218년 11월 로마군의 척후병이 우연히 티키누스(Tikinus) 강 근처에서 한니발을 발견했고 마침내 양군은 진지를 편성했다. 다음 날 양군은 전투를 벌였고 이에 먼저 양군의 기병대가 전선의 중앙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자신의 누미디아 기병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전투 후반기에 가담시켜 로마의 경보병을 공략하게 했다. 양 측면에서 누미디아 기병의 가담으로 로마군보병의 전열이 붕괴되었고 자신의 진지로 후퇴했다. 지휘관인 스키피오도 중상을 입고 도주했다. 비록 양쪽 군대 모두 정예 주 전력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이 전투의 승리로 갈리아의 많은 부족을 카르타고의 편으로 복귀시킬 수 있었다. 한편 스키피오는 동료 집정관인 셈프로니우스(Sempronius)에게 합류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 때 로마군은 한니발의 기병이 막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이탈리아 본토에서 처음 벌어진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은 처음으로 한니발의 군대를 경험했다. 스키피오는 퇴각하여 트레비아 강까지 밀리게 되었고 공동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Tiberius Sempronius)는 군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의 캠프에 합류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추격하다가 군대의 보급을 위해 후방에 남았고 이제 두 명의 집정관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가 성급하고 충동적인 기질인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보다는 상대하기 편하다 생각하고 전투 준비를 하였다. 스키피오는 아직 티키누스 전투의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가 회복하여 다시 지휘권을 가지기 전에 한니발을 몰아내기 위해 성급히 군대를 움직였다. 특히 다음 해의 집정관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 싶었던 셈프로니우스는 평범한 전투로 생각하고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기병을 조심하라는 충고도 듣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한니발은 지형을 정찰하고 동생 마고 바르카에게 기병 1,000명과 경 보병 1,000명을 주어 강변의 숲속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모든 카르타고 군에게 충분한 식량과 휴식을 주었다. 다음 날 새벽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군을 급습했고 셈프로니우스는 휘하 기병에게 격퇴를 명령했는데 카르타고 기병이 밀리는 것을 보자마자 성급하게도 모든 보병에게도 추격을 명하였다. 트레비아 강을 건너 카르타고 군을 추격하던 로마군은 중앙에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배치하고 적진을 돌파하기 위한 진형을 설치했다. 카르타고 군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갈리아 경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 측면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군은 중앙에서 거의 카르타고 군을 격퇴하는 것 같았으나 강을 건너 몸이 젖은데다 추위와 허기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고 기병은 강력한 카르타고 기병에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숲속에 매복해있던 마고의 기병과 보병이 나타나 로마군을 포위했다. 중앙의 로마 중무장 보병의 선전으로 한니발 군은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할 수 없었지만 거의 2만 명의 로마군이 포위 속에서 살육 당했다. 살아서 포위를 풀고 도주한 로마 병사는 1만 5천명 정도였다. 한니발의 탁월한 전술의 승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승리로 인하여 그때까지 한니발과 합류하는 것을 망설이던 많은 갈리아 부족이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로마는 계속 한니발 군에 밀리게 되었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가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하고 난 후 B.C 217년의 집정관으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Plaminius)와 세르빌리우스(Serbilius)가 선출되었고 이들은 각각 셈프로니우스와 스키피오의 군단을 승계 받았다. 평민 출신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원하고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은 각각 군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한니발의 예상 공격 경로를 찾아 저지하려고 했다. 한니발 역시 로마군이 예상하지 못한 행군로를 빠르게 행군하여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고 지나갔다. 이것은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반기를 들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한니발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이 에트루리아를 유린하는 것을 보면서 한니발을 추격하였고 세르빌리우스에게 남하하여 합류하자고 요청하였다. 양쪽 집정관은 페루시아에서 한니발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고 한니발은 두 군대가 만나게 되면 전력상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이들을 만나게 하지 않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니발은 트라시메누스(Trasimene) 호수에 도착하자 이곳이 매복하기 적당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군대를 매복시키면서 불을 피우는 것도 금지하고 군사를 배치했다. 호반을 남쪽으로 하고 북쪽의 숲속에서 로마군이 진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군은 호수 인근에 도착하여 야영을 한 이후 다음날 아침 안개 속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물론 카르타고 군이 숲속에 매복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안개와 좁은 호수 길을 따라 진군하였다. 이어 한니발 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양쪽의 로마군 행군로를 봉쇄하고 무차별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종의 살육에 가까웠던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호수로 밀렸고 카르타고 군의 칼에 죽거나 호수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6천 명의 전위 부대는 포위를 뚫고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기병대에게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약 2만 5천 명의 로마 병력 중 살아서 로마로 돌아간 것은 2천 명에 불과했다. 집정관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결국 로마의 완패로 끝났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을 내주었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 집정관에 임명하고 병력을 보충할 때까지 지연 전술인 파비우스 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히스페니아에 군을 보내 사군툼을 공격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큰 전투인 사군툼 전투에서 동원된 4만 중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대패하였다. 그나마 사군툼의 중앙부를 맡았던 중군(中軍)만이 근처의 발렌시아 요새로 대피하여 증원 군을 기다렸다. 패전의 소식에 히스페니아 시민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였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아직 15개 이상 군단 10만 병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바르카스 왕국의 의회와 군부는 침착하게 다음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트라시메노의 대패 이후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Favius Maximus)는 이탈리아에서는 전투를 지연시키는 소모전을 통해 상대편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펼치면서 히스파니아에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후일 서양전술사에서는 이와 같은 지연 전술을 그의 이름을 차용해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이라고 불렀다. 로마 의회는 새 집정관인 파비우스에게 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주면서 히스파니아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 파비우스는 사군툼에서 승전한 병력과 새로이 동원된 4개 군단을 합쳐 약 4만의 병력으로 히스파니아 북쪽 일대인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방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파비우스의 명을 받아 히스파니아 원정군을 지휘하는 클라우디우스의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병력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과 정면 대결보다는 매복전을 통한 기습을 준비하였다. 아라곤 지방에 있는 사라고사를 지나던 클라우디우스의 군은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군이 근처까지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사라고사의 숲에서 카르타고 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하스드루발은 급한 마음에 군을 이끌고 아침 안개가 자욱한 숲의 길을 따라 클라우디우스를 추격했다. 마침 소규모의 로마 1개 군단이 하스드루발에 나타났고 카르타고 군의 선봉이 후퇴하는 소규모 로마 군단을 추격하는 상황에서 하스드루발의 군은 선봉과 중군, 그리고 후미가 나뉘게 되었다. 이 때 클라우디우스는 호수 위의 언덕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병력들에게 총공격을 명하였다. 전투 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행군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카르타고 군은 완전히 붕괴하였고 4만의 병력 중 반 이상이 로마군에 의해 몰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바르카스 왕국이 다스리는 히스파니아 북부 지역은 로마의 공격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고 로마군은 지금의 이베리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한니발은 히스파니아로부터 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로마 해군이 다시 히스파니아에 있던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해군을 카르타헤나에서 격퇴하고 지중해로 전달되는 한니발의 보급로를 차단했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는 여전히 한니발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 때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최남단 지방으로 진군하여 최근에 로마에 복속된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키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간간히 몇몇 전투가 있었지만 파비우스의 방침에 따라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적과 전투를 벌여 이기는 것이 전통인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렵게 전투를 벌여 복속시킨 동맹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넘어가는 것은 더욱 인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로마에서 인기가 하락한 파비우스는 집정관 연임에 실패하였고 B.C 216년에 로마 상원은 파비우스 대신 타렌티우스 바로(Tarentius Varro)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후 8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한다. 당시 한니발 군의 수는 약 4만에서 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대승을 만들어냈다.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으나, 또 다른 집정관 바로는 결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의 칸나에 부근에서 당일 최고 지휘관이 된 바로와 한니발이 격돌하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8
  • 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특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특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특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특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인산산맥에 자리 잡음으로써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흉노선우 묵특을 언급한 것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관한 독도 문제에 글이 다시 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반일종족주의>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당시 동호가 구탈의 황무지를 요구해오니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흉노의 묵특선우의 말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독도가 바위 섬일지라도, 돌 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 해도 독도는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엄연한 우리 국토다. 독도가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엄연히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우리 영토가 맞고 일본이 독도를 노리니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원만한 해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토인데 무슨 원만한 해결을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에도 침묵하라는 것이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선진사회로 진보하는 길인가? 전 세계 어느 선진국이 영토 도발에 침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이런 것이 궤변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다른 보수주의 세력에게 자국 영토 분쟁에 침묵하라는 소리를 하면 그들은 뭐라할까? 보수의 기본은 엄연히 국가(Nation)에 있고 그 기본 이념은 국가주의(Statism) 혹은 Nationalism 에 있다. 이념에 치우쳐 기본을 망각하고 국가(Nation)와 국가주의(Statism)가 안된 보수는 매국 이념에 함몰된 사익 이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좌파가 싫고 친일을 주장해도 국가와 국가 간의 부분에 있어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면 더욱 엄한 잣대가 들어가야 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우리의 땅은 묵특선우가 말한 것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라 풀 한 포기도 줄 수 없다고 맞서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우파다. 그것이 아니면 단지 좌파와 맞서기 위해 대척점을 이루는 수준 밖에 안 되는 집단이 된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터키는 흉노의 묵특선우를 위대한 조상이자 위인으로 가르치는 국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박물관에는 흉노 귀족의 상이 있고 터키의 각 지역마다 묵특선우의 흉상이 있다. 제 아무리 쓸모없는 초원의 황무지라도 절대로 다른 나라에 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해 흉노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고 전 세계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훈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영웅 아틸라를 탄생하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뭐 느끼는 것이 없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5-10-27
  • 오늘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 세계적인 복지 모델 현(現) 노르웨이의 사회, 경제적인 문제점 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본다면 주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3국을 예로 들고 있고, 광의적으로 북유럽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에스토니아, 러시아로 6국이 포함된다. 예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지리적으로 공유한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핀란드 공국이었고, 언어와 종족도 인도유럽어족인 노르웨이, 스웨덴과 달리 우랄어족으로 나타난다. 11세기 초 스웨덴의 정복 군주인 크누트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 잉글랜드까지 ‘북해제국’으로 묶어 통치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까지 3국 귀족들이 연대하여 칼마르 동맹이라는 연합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동맹은 약 150년 동안 존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3국 화폐(Krona)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삼국의 통합을 추구하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은 항상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위에 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그와 같은 역사들은 늘 순탄하지 않게 흘러갔다. 약체 노르웨이의 시련이 컸다.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약 400년 동안 덴마크 국왕의 통치를 받았었으며, 나폴레옹이 패전한 이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덴마크였기에 1814년 킬(Kiel) 조약으로 인해 노르웨이를 상실했다. 이후 노르웨이는 스웨덴 국왕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다. 두 독립 왕국이 한 국왕의 통치를 받는 형태를 제국주의 및 식민지와 구분하여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독자적 헌법과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외교 및 군사권은 스웨덴 국왕에게 양도했던 사실상 준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 내에서도 독립운동은 꾸준히 발생했고 19세기 내내 이는 양국의 앙금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1902년 노르웨이 의회는 해외 영사 업무를 양도받기 위해 스웨덴 측과 여러 차례 협의하고, 독자적인 법률도 제정했지만 번번히 스웨덴 국왕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의회는 1905년 6월 7일 만장일치로 ‘연합’ 해산을 결의했고, 덴마크 국왕은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따라서 1905년 8월 13일 투표에서 남성 유권자 중 압도적 다수(368,208표)가 스웨덴-노르웨이 왕국의 해체를 원했고, 투표권이 없던 여성들도 서명으로 동조했다. 군대까지 동원한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 양국은 9월 협상을 타결짓게 되었으며 스웨덴 국왕은 10월 26일 공식적으로 노르웨이 왕좌에서 내려오면서 노르웨이는 공식적으로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따라서 올해 10월 26일은 노르웨이 입장에서 볼 때, 독립 120주년이다. 독립 120주년을 맞이한 현재 노르웨이의 상황은 어떨까? 노르웨이는 현재 죽을 맛이다. 한 때 최고의 복지국가였고, 많은 국가들의 복지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저출산, 1980년에 1,000명에 불과했던 노르웨이 무슬림 인구는 이후 급격히 증가해 지금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발칸반도 이민자를 받아들인 데 이어 이라크 난민 등을 수용하면서 반이민 정서가 깊어져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동쪽과 서쪽으로 분류된다. 서쪽은 잘 살고 안전한 노르웨이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런데 오슬로의 동쪽은 가난하고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다. 이는 이민자, 대부분 무슬림들과 발칸에서 이민 온 자들이 살고 았다. 2011년 7월 22일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라는 자가 오슬로 시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했다. 이 테러로 정부청사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어 석유부 건물에도 화재가 발생했으며 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범인은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당시 노르웨이의 집권여당이었던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에서 총기난사를 자행했다. 범인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는 노르웨이 극우 단체 인사였다. 그와 같은 충격에도 노르웨이 어찌 저찌 갈등을 봉합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오슬로의 지하철 동쪽 끝 푸루세트 역에는 1970~80년대에 온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이 노르웨이 출신 현지인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는 이슬람 모스크도 자리잡고 있다. 학교의 학생 40명 가운데 2명이 노르웨이 출신이고, 나머지는 노르웨이어를 몰라 학습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다. 현재 노르웨이는 전체 인구 490만 명 가운데 약 11%인 55만 명이 이민자로 구성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출산 수준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일과 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관대한 복지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15년이 넘도록 전반적인 출산 수준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명확한 경제 전망의 부재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높은 실업률 때문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 사태는 노르웨이의 저출산을 더욱 심화되게 만들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는 1990년대 위기 이후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출산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출산 관련 부정적인 영향력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이주민들과 혼혈을 권장하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이용한 이민자들은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하여 취직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성과의 결혼을 적극 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노르웨이 현지인들의 실업률과 취업률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오슬로는 인구의 약 28%가 외국인이다. 절반은 폴란드와 스웨덴 등에서 온 유럽계 백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 인구가 절대다수로 나타난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약 3%가 파키스탄과 이라크, 소말리아 등에서 온 무슬림으로 추정된다. 노르웨이는 시장 개혁을 통해 석유와 가스 자원을 본격적으로 수익화하기 시작한다.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에서 유전이 터진 이후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천연자원 의존형 경제로 탈바꿈했다. 석유 수출 세계 9위, 천연가스 수출은 세계 3위로 나타나며 이는 1인당 GDP는 90,000불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부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로 인해 쓸어담은 자금으로 창안한 국부펀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으로 적립시킨 모델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가 적극 의존하고 있던 북해 유전의 석유와 가스는 가장 고갈 가능성이 높은 자원으로 보고 되고 있다. 영국과 노르웨이 공식 자료에 따르면, 북해 석유 매장량의 절반이 이미 채굴되었고 액체 석유와 천연 가스로 구성된 탄화수소의 혼합물인 브랜드유(Brent oil)는 고갈 직전의 위기에 있다. 현재는 하루 평균 약 60만 배럴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데 앞으로 5년 내로 40만 배럴로 생산률이 내려갈 곳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북해 유전의 고갈로 인한 대책은 아직까지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 약간의 생산률이 줄어들었을지 몰라고 앞으로 미래가 문제다. 노르웨이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5년 9월에 3.6%로 상승했으며, 예상치 및 8월의 3.5%와 비교하여 2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주된 상승 압력은 식품 및 비알코올 음료의 빠른 가격 상승(6.3% 대 5.4%) 및 교통(2.9% 대 2.7%)에서 나왔다. 한편 주택 및 공공요금(6.2% 대 6.3%), 레크리에이션 및 문화(2.5% 대 2.9%), 그리고 음식점 및 호텔(3.2% 대 3.8%)의 인플레이션이 둔화되었는데 이는 다소 일시적이다. 문제는 앞으로에 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될수록 복지로 가는 비용은 절감된다. 2015년 이후 노르웨이의 R&D 투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벤처 창업과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가 역사상 최저 수준이다. 소득 40% 정도의 높은 세율로 인한 금액이 복지에 투입되는데 이 또한 줄어들면서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마찰로 인해 북극항로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과연 노르웨이 이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복지모델의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을 맞아, 현 노르웨이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해 보았다. 노르웨이의 문제점을 보며 우리의 복지 상태도 어느 정도 점검이 필요하고, 노르웨이와 비슷한 사회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지, 그것을 파악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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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7
  • 오늘 아르헨티나 총선 :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오늘 10월 26일에는 아르헨티나의 총선이 벌어진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출신인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2023년 12월에 취임하여 약 2년 동안 강도 높은 구조 조정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대선 기간 동안 각종 폐해를 잘라 버리겠다며 전기톱을 들고 유세장에 등장하여 수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밀레이는 기성 정치권인 "페론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포했다. 이후 밀레이는 취임한 다음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각종 보조금들을 삭감했다. 그리고 공공 일자리들을 축소하는 등 고강도 긴축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밀레이의 경제 개혁은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최대의 문제점으로 나타났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2023년 그가 취임했을 시기보다 훨씬 줄었다. 2024년 4월 289.4%까지 올랐던 물가 상승률은 같은 해 12월 117.8%까지 감소했고, 이는 2025년 8월 기준 34%까지 내려갔다. 2023년 11월 5억 5,900만 달러(한화 약 8,200억 원)에 달했던 무역적자도 취임 1년 만인 지난해 2024년 12월에는 흑자로 전환되었을 정도로 호조를 보였다. 이처럼 겉으로 나타난 성과들은 훌륭했지만 속 안에 쌓여있는 내부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는 빈부격차가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겉으로 나타난 경제 수술을 감행한 셈이 되었다.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지 못한 사실상 모래 위에 구축한 성이 되어버린 셈이 된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밀레이의 "전기톱 개혁"이 겉고름만 겨우 짜낸 "전기톱 대학살"이 됐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인플레이션은 어찌저찌 겨우 잡았지만 심각한 경기 침체와 실업률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기에 여론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2023년 4분기 밀레이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5.7%였던 실업률은 2025년 2분기를 기준하여 7.6%로 올랐고, 여전히 30%대인 물가 상승률 또한 가계에 부담이 크게 나타났다. 이에 영국 이코노미스트(Economist)에 따르면 보조금 축소 등의 여파로 인해 대중교통이나 에너지 수급 관련 요금은 300% 이상 급등하면서 오히려 서민들의 불편을 야기했다. 여기에 안정적인 물가에만 집중한 나머지 환율 방어에 외환을 엄청나게 투입하면서 재정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인위적으로 페소화를 절하하는 과정에서 애초부터 부족했던 외환 보유고는 거의 텅 비다시피했다. 게다가 페소화의 약세로 인해 수출 경쟁력이 줄어들면서 노동집약적 제조업 또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도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것에만 집착한 밀레이는 경제 성장을 저해시키고 수입을 빨아 들이는 구조로 변모시켰으며 엄청난 외채를 상환하는 것에 필요한 달러 재고 구축을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는 2025년 4월 IMF에서 200억 달러를 추가 구제 금융을 받아내는 등 ,여전히 빚에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환율 불안을 막기 위해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여지지 않는다. 경제난으로 인해 전국에서 밀레이 정부에 대한 반발 조짐이 거세지고 있는 상태다. 이는 지난 9월초,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약 40%가 거주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지방 선거에서 밀레이는 대참패를 당했는데 이는 바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밀레이의 정책에 대한 항의성 민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좌파 포퓰리즘 성향의 야당 연합에게 패배한 것은 시장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26일에 벌어질 총선에도 밀레이가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유주의 정책 기조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게 되니 2주 만에 페소화 가치가 10% 더 폭락했다. 그러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은행은 지난 9월 18~20일의 약 3일 간 11억 달러를 투입해 환율을 방어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례적으로 아르헨티나에 전폭적인 지원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망은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밀레이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의 핵심이 초강력 재정 긴축과 엄격한 통화 관리에 있던 만큼 정부가 외환 시장에 대한 개입을 지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밀레이 정부 첫 6개월 동안 이르헨티나 경제부에서 일하다 밀레이 대통령과의 견해차로 인해 사임한 호아킨 코타니(Joaquín Cottani)는 미국이 환율의 변동과 외환보유고 확보 계획 실행, 금리 통제 등을 아르헨티나에 대한 지원 조건으로 내걸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미국의 지원은 정부가 일관된 환율 및 통화 정책을 함께 시행할 경우에만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코타니는 밀레이가 유권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미국과 투자자들에게 희망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한편 스콧 베센트 미국 국무장관은 워싱턴 D.C를 방문한 루이스 카푸토(Luis Caputo) 아르헨티나 경제장관과 4일 동안 회담을 가졌다. 베센트는 SNS에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경제 리더십은 공정한 무역과 미국 투자를 환영하는 동맹을 강화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심각한 유동성 부족의 순간에 직면해 있고, 이를 신속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총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최종 확정했고, 아르헨티나 페소를 직접 매입했다고 했다. 미국이 상대국의 외환 시장을 구제하기 위해 IMF 등과 공조하지 않고 페소화를 직접 매입과 같은 일방적인 지원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조치가 발표되자 아르헨티나 국채 가격은 급등했으며 페소화도 0.6% 상승하며 1주일 만에 가장 강한 수준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가 아르헨티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는 마가(MAGA) 진영과 가까운 밀레이의 우파 정부가 경제 위기로 인해 붕괴될 위험, 가장 가깝게 지방 선거의 패배에 이은 총선에서 패배할 것 같은 불안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베센트는 자신들의 정치 동맹인 밀레이가 10·26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을 돕고, 밀레이의 패배가 예상된다는 불안한 시장을 안정적으로 돌리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미국 내에서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유례 없는 이번 조치를 두고 세금을 외국 정부 지원에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평소 트럼프와 마가 진영에서 내세우는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의 기조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밀레이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밀레이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유세 지원에 나섰다가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을 뻔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지역에서 밀레이가 유세 차량을 타고 여당의 총선 출마자들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던 중 시위대가 던진 돌이 밀레이의 머리 쪽으로 날아 들어온 사건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밀레이와 수행단은 곧바로 다른 차량에 옮겨 탑승한 뒤 현장을 빠져 나갔다. 이와 같은 유세 현장에서 군중들 사이에는 몸싸움도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밀레이 대통령의 여동생이자 비서실장인 카리나 밀레이(Karina Milei)는 2025년 8월 의약품 조달과 관련하여 뇌물수수 의혹에 휩싸이며 국민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다. 밀레이의 친구인 디에고 스파뇰로(Diego Spagnolo) 국립 장애인 청장이 현지 제약회사인 스위소 아르헨티나(Suizo Argentina SA)에 정부와 장애인 공공 의료품 구매 계약을 맺을 경우 계약금의 8%를 뇌물로 요구하는 녹취가 최근 공개되었는데 이중 3%가 카리나의 몫으로 떼어달라는 내용이 있어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밀레이의 여당인 자유당(Libertarian Party)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결국 밀레이는 이번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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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6
  • 새로운 남미의 마약 카르텔 거점으로 부상한 에콰도르
    중남미 국가 중에서도 에콰도르는 그 역사적 부침이 매우 심한 국가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은 16세기부터 300여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19세기 이후 유럽의 인구 증가와 농토 부족, 저임금 중노동에 지친 스페인 본토의 빈농, 빈민들이 남미 각지의 식민지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현지 귀족이었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빈농들이 자신보다 더 공식 계급이 높다는 점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본국이 나폴레옹 전쟁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남미 식민지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자 누에바 그라나다를 포함한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은 독립을 준비하게 된다. 남미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1783~1830)는 식민지 개척자 및 정복자의 후손인 크리올(Criollo)의 지지를 받아 스페인 군을 축출하고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를 세우고 대통령이 된다. 그란 콜롬비아는 현재의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의 영토를 합친 국가다. 시몬 볼리바르의 사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와 함께 1830년에 분리 독립하였으며 독립 직후에는 플로레스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립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전과 주변국들인 콜롬비아, 페루와의 전쟁으로 인해 상당수 영토를 잃어버리면서 영토가 현재와 같은 크기가 되었다. 플로레스 정부는 키토의 과두지배층을 중심으로한 기득권 집단을 지지계층으로 두고 있었지만 매우 독선적이었고 1845년 쿠데타가 일어나 플로레스 정권은 전복되었다. 이후 정부의 혼란은 약 130년 동안 지속되었고 1972년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기예르모 로드리게스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이 집권하게 된다. 군부는 토지개혁을 약속하면서 석유개발도 본격화 되었다 하지만 정작 석유로 인한 수입은 늘어나면서도 토지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1979년 민주 정권으로 정권이이양되면서 군부 독재는 막을 내렸다. 민주화 이후의 첫 째 민선 대통령인 하이메 롤도스가 1981년에 비행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1982년 중남미 외채위기에 에콰도르는 디폴트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엘니뇨까지 겹치며 에콰도르는 다시금 어려움에 봉착했다. 결국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으며 1986년부터 진행된 저유가와 1987년의 대지진, 연간 수십%가량에 달하는 엄청난 고인플레이션과 임금수준의 실질적인 침체 밎 삭감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1988년에 민주좌파당의 로드리고 보르하가 당선되었지만 경제정책은 달라지지 않았고 1990년대 초중반와서는 지속적인 경제위기에 어느 정도 면역성이 생기면서 에콰도르의 경제가 지표상으로는 그럭저럭 안정세를 찾아갔지만 대신 빈부격차는 매우 심화되었다. 그러면서 사회적 불안감이 심화되었고 치안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2000년부터는 자국 화폐인 수크레화를 포기하고 그냥 미국 달러를 가져다 쓰게 되면서 이전에 세자릿수였던 물가상승률도 한자릿수대로 떨어졌고 이후로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대를 넘본적이 한번도 없을정도로 물가가 안정되었다. 이 때부터 에콰도르는 중남미에서 치안은 상대적으로 좋아졌으며 소득수준도 아주 낮지 않기 때문에 은퇴 이민자들이 머물러 살기 좋은 나라 순위권에 자주 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는 석유값 하락으로 인한 세수감소와 달러화 강세에 따른 수출부진, 2016년 지진의 여파로 인한 재정지출의 급속한 증가로 경기침체로 이어지면서 다시 치안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갱단이 점점 강성해지고 총격전과 살인이 빈발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대선을 불과 10여 일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이자 무소속인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Fernando Villavicencio)가 당일 수도 키토에서 선거 유세 중 총에 맞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피토’라는 별명을 가진 아돌포 마시아스가 이끄는 에콰도르 마약 밀매 카르텔인 ‘로스 초네로스’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BBC는 에콰도르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석유 무역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지난 5년 동안 갱단들의 폭력에 시달렸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일간 '클라린'은 국가의 강력범죄가 마약 밀매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서로 다른 마약 집단 간의 무력 충돌로 사망률과 범죄율이 치솟았다라고 한다. 이 총격 사건을 두고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조만간 대통령 선거를 치를 예정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사건 당일 멕시코 외무부는 소셜 플랫폼에서 "에콰도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폭력적 행위"를 규탄했고, 페루 외무부 역시 에콰도르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폭력 및 위협 행위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표명하고 평화회복을 촉구하였다. 또한 이반 두케 전 콜롬비아 대통령은 에콰도르 국민의 편에 굳건히 서겠다고 밝히고 에콰도르 당국에 조속히 사건을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남미 어느 국가든, 이 사건 및 유사사건조차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남미 각국의 정상들과 정치권들은 마약 밀매 카르텔과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지하 경제 활성화로 인해 서로 공생관계가 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남미의 마약 카르텔과 뒤를 봐주는 자들은 미국 네오콘들이고 이들 또한 공생관계에 있다. 그러니 제대로된 수사가 될리 있겠는가? 게다가 FBI가 암살 사건 수사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도 수상한 부분이다. 미국 연방수사국이 자국 범죄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텐데 여긴 미국과 다른 나라다. 후안 사파타 에콰도르 내무부 장관은 FBI 요원들이 이날 자국 경찰 간부들과 회동했고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들과도 곧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6명의 피의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한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피의자들 모두 콜롬비아 국적이라 하니 이권에 위협을 받을만한 거대 조직의 사주가 있었을 것은 충분히 의심해 볼 만 하다. 현지 경찰은 이들이 범죄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더 거대 세력과 연결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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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6
  • 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민의 결과로 인해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현지 아랍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식민 정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 정부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태인들의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념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태인 분트(Bund)이자 각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유태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들이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본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 나흐만 쉬르킨(Nachman Shurkin), 베르 보로호프(Ber Borohov)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같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베를 카츠넬슨(Berl Katznelson),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골다 메이어(Golda Meir)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도자들 또한 평생동안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살았었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과 유태인들의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술한 책과 글들을 보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가 만들졌던 것처럼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 받는 같은 피착취 계급 처지로서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민족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주의의 낙관적 계몽주의(Optimistic Enlightenment)에 기반해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마주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취급했다. 특히 20세기 초, 수정 시오니스트들은 사민 정책을 통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어 이들을 착취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학살 및 추방한다 해도 이는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노동 시오니즘은 아랍인 중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유태인의 지류로 정의했고 그들을 공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다른 아랍인은 공생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는 시오니즘 사상의 한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탈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은 현재까지도 다른 아랍인과 더불어 타민족의 이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마구 등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는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게 되자 이에 대해 아랍인들이 유태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Ahad Ha'am)과 같은 일부 문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절대적인 공존을 천명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극도로 존중하여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태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너 그와 같은 공존론자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주장은 파급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 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新) 보수주의가 세계화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인 색채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정착된다. 이는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시오니즘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미국은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6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미국에서 시작된 신(新) 보수주의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쳐 수정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정계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려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살아 오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유태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유혈 충돌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엘리트들은 영국을 매우 미워하여 영국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유태인들을 환영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오니즘의 근간인 선민의식이 폐해가 어떤건지, 당시 아랍인들은 알지 못했고, 유태인들을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유럽에 팽배해진 반유태주의로 인해 빠르게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 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 시오니스트들의 관점과 맞물려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의 이민은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유태인들의 수효가 급증하고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건설되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아랍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토착 아랍인들에게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강요하게 되자 유럽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와 같은 시오니즘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과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 Husseini)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와 같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수정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영국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식민 당국인 영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적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측을 중재한 트럼프는 10일전,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양측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휴전 성사 이후에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병사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이 보복 공습을 감행해 가자지구 전역에서 최소 45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공보국은 휴전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을 80회 위반했으며, 팔레스타인인 최소 9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 이후 군 철수 경계선(Yellow Line)을 넘은 차량을 폭격해 일가족 11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격 이후, 휴전을 재개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또한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정 시오니스트들이 쏘아올린 아랍인과의 반목과 불신, 그리고 아랍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처절한 저항,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으며 이를 이용해 아랍인들을 미개한 2등 시민으로 취급하려는 이스라엘, 이들간의 관계에 있어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아무리 평화 협상을 주도한다 해도 상호 반목으로 인한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5
  • 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서아프리카의 대국 코트디부아르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다. 한 때 1970~80년대는 경제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카카오 생산국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먼저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 147.3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72년 309.3달러였다가 1979년 1,225.4달러로 7년 만에 4배나 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1,025.9달러로 처음으로 1,000달러를 넘겼을 정도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치고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국가였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장을 짓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하는 등, 프랑스의 제조업이 코트디부아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석유, 천연가스, 금, 망간, 다이아몬드, 구리, 철광석이 풍부하고 해상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하다. 물론 해저유전이나 가스전은 거의 프랑스가 위탁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러시아가 프랑스에 가스 수출을 중지했어도 프랑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로도 친프랑스 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왔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에 여러 부분에서 개입하고 간섭함으로 인해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립했어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00년대 들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국가다. 장기적인 정치 위기의 늪에 빠져 있었던데다 2002년의 민중 봉기에 이어 국토가 분할된 상태로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5년과 20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모두 정상적인 조건에서 치러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1999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권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특히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안정적인 독재에서 다원주의 정치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이 깨지게 된 것은 198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서부터다.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의 핵심부문을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경기 향방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978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화를 빌리면서까지 투자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왔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도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차용하여 카카오의 가격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 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나가자 외국 기업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단체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 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으며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보건소에 다녀오려면 돈을 내야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리니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의료 복지를 도입하다 실패하게 되었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 되어 대규모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고 결국 외국 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한 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독보적으로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내려 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자 거의 헐값으로 일하다시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폭동으로 번졌다. 이 때 많은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웃 국가인 말리나, 차드, 니제르 등 여러 이웃 국가들에서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부모를 당시에 잃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코트디부아르의 추락은 건국 이후, 무려 33년 동안 독재를 행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도 해결하지 못했다. 구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2023)가 대통령이 된다. 당시 재무장관이 현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였지만 베디에 대통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디에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친프랑스계파였다. 게다가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코트디부아르 경제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이끌었다. 그러나 베디에의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의존형 정책이었다. 프랑스의 복지를 코트디부아르에 정착시키려 했으며 상당수의 기업들과 공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를 파탄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와타라가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와타라는 프랑스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다변화 하는 경제 체제 및 미국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경제 침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와타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친미파로 분류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에 IMF 근무라면, 네오콘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와타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 와타라는 총리 겸 재무장관이었지만 1995년 12월 9일 알라산 와타라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만큼 장기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통치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에 북부 지역 무슬림과 이주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외국인을 배격했던 당시의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의 뜻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유지했지만 경제 정책은 여전히 프랑스 의존형을 유지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1999년 12월 24일 투오 포지에(Tuo Fozié)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고 로베르 게이(Robert Guéï, 1941~2002)가 대통령이 되었다. 권좌에서 추방된 베디에는 2000년 토고를 통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면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코트디부아르 헌법재판소에 의해 출마가 금지되었고 결국 대선을 보이콧하게 된다. 그런데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선거 현황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거대한 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이에 3일 동안 민중 봉기가 발생하여 로베르 게이 장군이 추방되고 그바그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추방된 로베르 게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사하라 지대로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그바그보의 정부군과 게릴라 전을 벌였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장기간 계속되고 결국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영광은 바닥에 쳐박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코트디부아르를 바로 잡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이가 전임 총리였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다. 그러나 그바그보에 의해 개정된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와타라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에 당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었던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는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007년에 대통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다. 본래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은 내전으로 인해 201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고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제3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놓였지만 더 이상의 내전을 바라지 않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와타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행히 와타라가 대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이 때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예전 6~70년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을 앞세워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번 해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코트디부아르 집권당(RHDP)에서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고,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 찰스 블레 구데, 기욤 소로 전 총리 등 다른 야당 후보 3명이 출마를 포기했고 야당 지도자 티잔 티엄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대표가 이중 국적 문제로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와타라의 4선 당선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여 진다. 결국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부흥을 성공시켰지만 2020년 3선 당시, 헌법의 자의적 억지해석으로 출마해 독재의 기반을 쌓았더니, 이번에도 4선을 통해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여겨 진다. 현재 그의 나이는 83세로 고령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88세까지 권좌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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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5
  •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지난 14일, 세계경제질서와 APEC 발전방안을 주제로, 현대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론에서부터 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와 APEC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단극 체제(Unipolarity)'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전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점에 있어 동의한다. APEC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세계의 다극으로 손꼽히는 4극 중, 3극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3극은 미국이 그동안 끌고 갔던 단극처럼 융화되기 힘들다. APEC은 QUAD와 AUKUS, OPEC, EU와 나토, BRICS7, G7, G20이 아니다. QUAD와 AUKUS, 나토는 미국이라는 단극이 주도해 나가지만 APEC은 아시아-테평양에 면해 있는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APEC은 중국과 러시아가 침체기 때 미국이 단극으로 끌고 갔지만 이제는 3극이 서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온전히 APEC이 단극의 편을 들고 가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고, 제1, 2, 3 도련선 내애는 중국의 편을 들지, 미국의 편을 들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 다극의 세계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APEC 소속 국가들의 입장 또한 국익과 필요에 따라서 다극에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곧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리멸렬 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다극화 시대에 과거 냉전처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제한된 질서(Bounded Order)가 생겨난다고 했다. 보통 강대국들이 언제나 그렇듯 질서와 거기에 편성된 룰을 만들어 나간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룰에 속해 있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선택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어샤이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전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또한 최소 이 점은 동의하고 있다. 다만 미어샤이머와 교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나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선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다. 중국, 북한, 러시아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에는 매우 멀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국과 절대적으로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을 이용해 이 세 나라를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핵이 들어온다면 이 국가들이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되어 상호간의 즉각 공조를 통해 압박할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긴장상태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미군과 미국의 자산들을 최대한 보호 및 축적할 수 있고, 최후방 기지로 일본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한국을 소모시켜가면서 미국의 동북아시아 내 영향력의 최전선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양을 발판으로 최대한 최전선을 구축할 수 있기에 한국은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에 미군을 위협하거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해에서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남한을 쥐고 있으면 북한을 고립시켜 속국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면 북한, 러시아, 미국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대만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는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그 세가 함께 약화된다. 그래서 내가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중국화시켜서 장악에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시키거나 영유화 시키고, 영향권 하에 놓게 된다면 미국은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가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북극항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미국을 일본에 묶어 둘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게다가 동해를 내해화 할 수 있게 되니 일본은 동해가 아닌 태평양으로 진출로를 자연히 바꿀 수 밖에 없게 되고, 북한 또한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전력이 일본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늘 말했듯, 이는 미국이라는 거대 강국 때문이다. 다극 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러-중 관계는 경쟁관계로 변화된다. 역대 역사적으로, 인류의 특성과 국가라는 집단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필연적이다. 이 때 서로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다극 강대국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키면 북극항로의 항행이 매우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권은 세계 3극의 헤게모니의 장이 될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인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한 현실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미야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맞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냉혹한 강대국" 3개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 비전도 명확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빈 니블릿 소장의 얘기는 그냥 미국과 밀착 동맹하여 모든 기간 산업들을 그냥 미국에 바치라는 그런 얘기들이라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4
  •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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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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