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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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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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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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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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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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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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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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고대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와 조지아의 근원 민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조지아의 원(原) 민족인 카르트벨리아 인의 기원을 보자면 우선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를 파악해야 한다.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은 B.C 3600년에서 B.C 2600년경 유럽의 도나우 강과 우랄산맥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걸쳐서 존재한 인도유럽어족 최초의 청동기 문화를 총칭하는 문명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얌나야 문화의 특징은 주거의 흔적들로 볼 수 있는데 돈 강과 볼가 강 남쪽에서 유라시아 지역을 이동하던 유목민들의 야영지가 발견되었으며 돌로 축조한 성채가 매우 많이 발견되었다. 볼가 강 남쪽의 촘폿(Чомпот)에는 2m 높이의 돌로 쌓은 성벽이 삼각형 모양의 마을을 지키는 형태의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승마용의 목축을 많이 했던 흔적이 있다. 가축은 지방에 따라서 소를 주로 키우거나 양이나 염소를 키우기도 하였다. 말을 키우고 있지만 유목이 아닌 정착되어 있는 것이 얌나야 문화의 큰 특징으로서 말의 뼈는 주거지와 묘지에도 발견되었다. 이는 묘지에서 발견된 말뼈로 볼 때 장례식 당시 희생당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순장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북부 지역의 삼림지대와 계곡에서는 목축보다는 농업이 많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묘지에는 말에 끌게 하여 밭을 가는 쟁기도 발견되었다. 말이나 사람들의 가족들이 탈 수 있는 소 등이 끄는 우마차(牛馬車), 넓은 초원에 사육하기에 적합한 종류의 가축들, 낙타와 사이가 산양(Saiga antelope)을 시작으로 스텝 지역 심층부에 생식하였던 동물의 뼈들, 스텝 지역 심층부에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가족묘지 등등의 발견 등으로 인하여 얌나야 문화는 반(半) 유목식 목축이 행해진 최초 시기 문화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 문화 전에는 반(半) 유목 식 목축이 행해진 흔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얌나야 문화가 이러한 반(半) 유목 식 목축 경제의 최초의 시작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얌나야 문화의 묘소들은 쿠르간이 건축되어 있는 묘에 최초로 나타난 피장자가 있고 그곳에는 다른 피장자들도 이장되어 있지만 그 쿠르간을 더욱 크게 증축하여 새로운 피장자를 이장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얌나야 문화의 기원은 볼가 강 중상류의 크바린스크 문화(Хвалынская культура)와 드네프르 강 중상류 지역의 스레드니 스토그 문화(Среднестоговская культура)에 있다고 보고 있다. 승마용의 말과 가족 이동용 소의 우차(牛車)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이동은 매우 용이하게 가능했다고 추측되며 광대한 지역에 얌나야 문화가 팽창한 것은 이러한 이동이 가능했던 이유로 생각된다. 얌나야 문화 양식의 묘제에 의하면 동쪽에서는 우랄산맥 동쪽 기슭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알타이 산맥과 예니세이 강 지역에 존재했던 아화나시에보 문화(Afanasevo culture)와 분명 관계가 있고 얌나야 문화와 그 주변의 유럽 스텝 지대들에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고 있다.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는 얌나야 문화보다 안드로노보 문화가 오래되었고 아화나시에보 문화는 안드로노보 문화 다음으로 나타난 청동기 문화로 얌나야 문화는 아화나시에보 문화의 성립 시기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J. P 말로리(J. P. Mallory)와 르네 헤레라(Herrera, Rene J)도 마리야 김부타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로 현재까지 얌나야 문화의 성립을 두고 학계에서는 아직 대치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얌나야 문화의 서쪽에서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헝가리에 걸친 도나우 강 하구 지대 일대에도 넓게 펼쳐져 있다. 이렇게 광대한 범위에 걸쳐서 펼쳐져 있는 것과 그 주변 지역이 항상 크게 변동되어 있는 것, 말과 우차(牛車) 같은 생활문화양식으로부터 얌나야 문화는 인도-유럽어족 초기의 매우 중요한 문화 중에 하나라는 추정이 학계에 인정되어 있다.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 정치적인 세력을 확보한 인도-이란어족과 관련 집단들이 점점 유럽 쪽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관련 문화를 생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인 동유럽 스텝 지대에서 넓게 발전한 스텝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볼 때 쿠르간 가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것들이 해소되면서 구상 암포라 문화(Funnelbeaker culture)와 함께 얌나야 문화가 인도-유럽어족 시대에 유럽에 존재했던 매우 중요한 문화라는 것으로 크게 인식되었다. 이들 얌나야 인종으로 본다면 아프리카 일부 지역, 인도네시아와 베이징 등을 비롯한 극소수 지역에서만 인류 최초로 직립 보행을 한 원시 인류가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지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확인된 ‘호모 에렉투스 게오르기쿠스(Homo erectus georgicus)’의 존재는 카프카스 인종의 기원을 인류의 시작까지 끌어올리게 되면서 이 인종이 얌나야 문화를 영위했던 인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에 의거하면 180만~160만 년 전, 카프카스 일대에는 당시 지구에서 보기 어려웠던 존재이며 인류학적으로도 고귀한 존재인 ‘직립보행(Upright walking)’을 하던 인류가 살고 있었다. 이는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인 15,000~12,000년부터 카프카스 지역의 인류는 각자의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 석기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어떠한 문명적 계기를 만나 금속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카프카스 원인(原人)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명을 건설했는데 이 문명이 얌나야 문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얌나야 종족이나 민족들, 대표적으로 돈 강 남쪽 카프카스 지역의 원시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 초기로 정립되던 시기에 철기를 전쟁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C. J 톰센(C. J Thomsen)이 지적하듯이 당시 시대적 분류 기준의 불평등 구조를 만든 주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석기에서 청동기와 철기로 넘어가는 계기를 접했느냐의 여부가 국가 문명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침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그러한 면에서 얌나야 문명에 속해 있던 카프카스 인들의 주요 거주지로서 조지아는 당대 유라시아 지역의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기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B.C 7세기경 조지아는 이미 철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게 되면서 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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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6
  • 향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이후, 러시아의 다음 행보에 대한 예측
    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제압하고 난 다음 목표는 조지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다. 분쟁 지역인 남오세티야의 갈등도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조지아 내에서 반러 감정이 심한데다 방송 앵커까지 푸틴 대통령을 두고 "악취나는 점령자"라고 비난하여 모욕을 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조지아행 항공편을 2019년 7월부터 지금 현재까지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어제 확인해보니 조지아 에어라인은 모스크바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세 편이 있을 정도로 양국 간 왕래는 활발하다. 그저 현재 러시아 항공 아에로플로트만 다니지 않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2020년 3월 5일에 러시아 군 정보국이 조지아 정부와 언론 사이트에 사이버 공격을 가하면서 두 나라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현재 두 나라는 단교 상태이고 이익대표부를 두면서 서로 통고하고 있는 실정에 있어 다른 구소련 국가들보다 러시아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와 같은 조지아 관련 문제도 언젠간 깔끔히 해결하고 싶어한다. 세계적인 화약고에 들어가는 카프카스 일대는 러시아 입장에서 가시 같은 존재이다. 우선 체첸의 카디로프 일가가 현재 러시아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기에 정리된듯 싶지만 남오세티야, 압하시야와 같은 자치공화국이나 조지아와 대립 등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조지아 문제 해결하고 벨라루스와 통합 연방 국가로 통합에 합의하게 되면 푸틴의 과업은 끝날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현 정권 자체가 친러이고 러시아와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어 대다수 국민들의 러소포비아와는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이 마무리 되면 흑해의 최대 패권을 갖고 있는 국가가 러시아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에 조지아가 서방과 접촉하고 싶다해도 쉽지 않을 것이기에 알아서 러시아에 굽힐 가능성이 높다. 굳이 러시아가 목표를 잡고 조지아를 토벌하지 않아도 알아서 복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한편 조지아의 국민들이 그걸 우려하기 때문에 EU와 나토 가입을 희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흑해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미 절대적인 수준이고 터키 또한 러시아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기에 조지아의 입장에서 별다른 대안도 없다. 비록 아르메니아 파사반 정권이 친서방으로 기울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터키-아제르바이잔 문제에 있어 중재에 서줄 나라는 아무래도 러시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이 친러국가이기에 아르메니아는 사실상 고립된 상태이다. 앞서 말했듯 조지아도 친러 정권인데다 자국민 상당수가 러시아 경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메니아도 오랜 시간 러시아와 척을 지기도 힘들다. 게다가 서구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기 위해 계획을 꾸미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인데다 명분도 없다. 카프카스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알아서 정리될 분위기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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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6
  • 깨어있는 시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몇 년 전에 우연히 국회도서관에 들렀다가 도서관 로비에 진열되어있던 <어떻게 만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로비에는 검색하지 않아도 방문객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진열되어있고, 또한 로비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유료이지만 로비 한쪽에는 복사 시설까지 갖추어져 있다. 처음 방문한 국회도서관에서 붉은색 카바의 그 책은 나를 유혹했다. 그의 유혹은 강렬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는 나를 흥분시켰다. “이 저자는 어쩜 나와 생각이 이렇게 유사할 수 있을까?” 물론 새로운 기술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그 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끈기 없음이 그와의 이별을 재촉했다. 집중력이 흩어지니 책을 더 이상 탐색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읽지 못한 부분은 복사를 해서 집에 보관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붉은색 카바의 그 책이 다시 기억나서 복사한 대목을 읽어보았다. 복사한 부분은 원본의 아우라는 없었지만, 내용은 같기에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복사한 부분도 모두 탐색하였다. 아뿔사! 그러나 앞부분이 기억나지를 않았다. 아련한 기억만 남아있었다. 다행히 그때 그 책을 읽고 쓴 감상문을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고한 적이 있어서 그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 기사의 일부를 아래에 함께 올린다. 아래는 기사의 일부분이다. '집단적 포기'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집단적 포기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잠재적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적 포기의 원인을 이 책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과 두 번째는 이념적 공모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념적 공모는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잠재적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 경우이다. 모든 독재자의 탄생은 주류 정치인들과의 공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에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잠재적 독재자를 가리키는 네 가지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과도 너무나 유사했다. 첫째가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 혹은 규범 준수에 대한 의지 부족이다. 그들은 기본적인 시민권 및 정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가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이다. 상대 정당을 근거 없이 범죄 집단으로 몰아세우면서, 법률 위반을 문제 삼아 그들을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가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노조를 폭력단체로 몰고 가고, 야당의 대표를 사법처리하려고 하고, 시민언론을 탄압하는 현 정부와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을 쓴 저자의 기준으로는 현 정부는 잠재적 독재자의 정권이다. 만약 축구경기를 하는데 심판이 매수당하고, 상대편 주전 선수를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경기 룰을 바꾸면, 그 경기는 공평한 경기가 될 수 없다.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법관을 자기편으로 앉혀서 법 집행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려고 하고,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바꾸어 버리는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잠재적 독재자는 법의 이름으로 자신의 야심 찬 계획을 진행시킨다. 총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키기에 깨어있지 않은 국민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뒤늦게 그 속셈을 알아차린다. 이상이 그 당시의 기사 내용이었다. 최근 읽었던 복사한 부분에는 트럼프의 첫 당선을 두고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이후 미국 미래에 대해 세 가지 전망을 제시한다. 첫 번째가 놀랍게도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와 손을 잡음으로써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공화당 지도부는 극단주의자와의 위험천만한 동침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재빨리 과거의 평판을 되찾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보다 민주주의가 더 발전한 나라일까? 최소한 국민의 전체적인 의식수준은 미국보다 높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힘을 잃어가는 기존의 지배적인 지위를 평화롭게 넘겨준 역사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도 지적한다. 지금 우리의 기득권들의 저항 속에 우리는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미국 사회가 더욱 뚜렷한 양극화 사회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점차 상호 관용과 자제가 무너지고 되돌릴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를 것이라고 진단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런 진단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정치 경쟁자가 적으로 변할 때 정치는 전쟁으로 전락하고, 민주주의 제도는 무기로 바뀐다. 그 결과 사회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게 된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대통령 탄핵으로 말미암은 조기 대선을 눈 앞에 둔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극심한 정치 양극화를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는 길은 엘리트 집단 간의 협력과 타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엘리트 집단이란 것 역시 정치와 한 통속으로 움직이니 그들 역시 정치 집단과 다를 바 없다. 정치가 양극화될수록 정치와 거리를 둔 엘리트 집단에 대한 부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언론도 정치화되어 있기에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엘리트 집단에 대한 스포트 라이트를 켜지 않는다.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의 미래는 한국 국민의 손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도 밝혔듯이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그 운명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국민이 깨어있어야 민주주의는 살아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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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5
  • 조지아의 장미시위와 그 이후 현재 조지아의 실정
    2003년 11월 23일 조지아 시민들이 손에 장미를 들고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예두아르트 세바르드나제 당시 대통령의 부정부패가 도를 넘어서고 집권 여당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모의하자 시민혁명인 '장미시위'가 발발한 것으로 포장되었지만 이 또한 남오세티아 전쟁처럼 집단 서방의 획책인 대표적인 색깔혁명이다. 장미시위 이후 조지아는 경제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렸고 정치적으로도 친(親) 서방 정권이 들어서면서 옛 소련에서 완전히 독립했지만 부정부패는 여전했고 친 서방 경제 노선은 한계를 보여 조지아 화폐인 라리는 어디든 취급받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장미시위는 200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정권 전복 운동인 '오렌지 폭동'이나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그러나 장미사태 10년을 맞아 조지아에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서방 정책은 무너지고 다시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장미사태는 미완의 혁명이라는 집단 서방의 안타까움이 극에 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강력한 러시아 부활을 꿈꾸는 푸틴 대통령의 뚝심에 집단 서방이 공들여 놓은 조지아의 지난 10년 간의 친서방 정책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조지아는 혁명 이후 옛 소련권 국가 중 개방ㆍ시장 경제 체제 측면에서 가장 앞선 곳으로 평가받았다. 세계은행이 183개국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사업하기 편한 나라' 순위에서 2005년 112위에서 2012년에는 16위로 급상승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자료에 따르면 경제성장률이 2010년 6.3%, 2011년 7.2%, 2012년 6.5%로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미 사태 이후 지도자로 올라선 미하일 사카슈빌리는 미국에서 유학한 변호사 출신이며, 친미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조지아 경제는 급속히 추락했고 조지아 특유의 폐쇄적인 사회는 "사업하기 편한 나라"라는 이름에서 가장 불편한 나라로 변모했다. 포스트코로나 이후 친러정권으로 바뀌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대러제재를 거부함으로써 현재 조지아는 러시아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조지아 경제에 있어 주된 산업 생산물은 농업과 광업, 식품업, 주조업에서 나온다. 에너지 운송업 또한 조지아의 주요 산업이다. 조지아가 수입하는 물품은 에너지와 관련된 상품들이 많다. 원유와 천연가스, 원자재 등을 주로 수입한다. 러시아가 수출입이 가장 많은 나라였지만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몰도바와 함께 유럽 연합과 FTA를 포함한 협정을 맺었다. 이어 2017년에는 중국과 FTA를 체결하는 등 점차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터키, 아제르바이잔 같은 이웃 나라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 또한 높은 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러시아 없는 조지아의 경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조지아는 현재 인플레가 높고 젊은 인구는 국외로 계속 유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지아 내에서 할게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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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5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1편
    1611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마술리파트남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대륙에 진출한 영국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무굴제국 연합군을 상대로 플레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인해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세포이 항쟁 직후인 1858년에는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화 하게 되었다. 이후 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퇴진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들과 해외 영토들이 상호 간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가 총리에 당선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 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 하에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에 의해 같이 탄압 받고 있었던 시크교-자이나교 비무슬림 세력, 그리고 기타 무슬림 세력들 간의 종교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무슬림 세력들이 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하자 비무슬림 세력이 이를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도 대륙 전역이 비무슬림과 무슬림 간의 충돌과 보복 학살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수십만 명이 살해되는 등 인도는 종교 집단 간의 극심한 갈등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도 내부의 종교 간의 갈등과 유혈 분쟁이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영국은 결국 인도 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1947년 8월 14일에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 강 유역과 동부 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독립했고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교적 갈등 속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통일 인도와 종교간의 화합을 주장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분열을 막는데 실패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간디는 1948년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라는 힌두교 급진파 청년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격렬한 전쟁을 벌이며 최악의 원수 관계가 되었다. 한편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인도와 분리되어진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일대의 서부 파키스탄과 갠지스 강 삼각주 일대의 동부 파키스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두 지역 간의 갈등이 곧 시작되었다. 사실 서부 파키스탄과 동부 파키스탄은 종교 및 종파만 같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을 뿐, 문화와 인종,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특히 동부 파키스탄의 경우, 오히려 인도의 힌두교도들과의 공통점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두 파키스탄 사이에 인도가 존재했기에 서부 파키스탄과 동부 파키스탄이 아주 멀리서 나뉘고 있었기에 교류 또한 빈번하지 못했다. 참고로 두 국가 간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00㎞로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한편 서부 파키스탄의 독립을 이끌었던 무함마드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는 당시 인도 총독인 루이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1900~1979)에게 제시받은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에 큰 충격을 받아 분리 독립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가 수상이 될 수 없게 방해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며, 공개석상 자리에서 공공연히 강경한 어조로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영국인들을 끈질기게 괴롭혀 네루에게 권력을 주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지 않겠냐는 식의 발언을 측근들에게 자주 했다. 진나는 그러면서 인도 제국 총참모부 측에 파키스탄의 지정학적인 구도가 생존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계속 문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도 제국군 총참모부 측은 캘커타가 파키스탄에 포함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며, 캘커타가 파키스탄 영토에 포함되어도 소련이 침공할 경우,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정작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시작 단계로 전환되면서 진나는 파키스탄의 문화적 정체성이 무슬림 신앙에 우선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서부 파키스탄의 영토를 최대한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인도 총독 마운트배튼은 이를 거절했고, 최소한 펀자브 주와 벵골 주 전체를 파키스탄에 포함시키려 했던 진나의 의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당시 마운트배튼은 파키스탄이 당시와 같은 기형적인 국토로 25년 이상 국가로써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고, 실제로 파키스탄 건국 24년 만에 동부 벵골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국가인 방글라데시를 건국하면서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우선 벵골 지역의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우선 무굴 제국이 붕괴된 이후 그 전까지 무슬림에게 탄압을 받던 힌두교도들이 영국의 통치 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기술자, 의사가 되어 무슬림보다 부유해져 있었다. 무슬림들은 이와 같은 부분을 매우 불평등하게 보았으며 벵골의 힌두교인 지주들의 착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독립 파키스탄 수뇌부들은 진나를 비롯한 서부 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했기 때문에 동부 파키스탄의 영향력이 현저히 약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철저히 서부 파키스탄 위주로 운영되었고, 심지어 동부 파키스탄에서조차 고위 공직은 서부 파키스탄 출신들이 차지하고 중간 관리직위로는 인도에서 동부 파키스탄으로 피난 온 무하지르들을 우대하는 등, 토착 벵골인들은 거의 배제당하다시피 했다. 동부 파키스탄은 서부 파키스탄으로부터 공공연하게 무식한 사람들, 혹은 검은 유인원 소굴이라는 형식으로 비하 당했으며, 쌀, 소고기, 생선, 열대 과일 등 모든 식량 자원들을 서부 파키스탄에 수탈당했다. 그리고 동부 파키스탄에 배정되는 예산은 서부 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 정도 선에 불과하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받았다. 문제는 인구 자체는 동부 파키스탄이 더 많았다는 것에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직전 파키스탄의 인구가 서부 파키스탄은 6,000만, 동부 파키스탄은 6,800만으로 동부 파키스탄이 인구 수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21세기에는 파키스탄의 인구가 방글라데시보다 훨씬 많아졌으며 이러한 서부 파키스탄의 인구 증가 이유는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이후 대부분 인도 대륙의 인프라들이 파키스탄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어 인구 증가가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반면에 파키스탄은 상대적으로 살 만한데다 이슬람 극단주의 정권의 우민화 정책으로 인해 인구증가가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부 파키스탄 주민들의 서부 파키스탄 주도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고 이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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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5
  • 독일 연방 헌법 수호청, 극우 정당에 대한 극단주의 단체 지정으로 정당 해산으로 이어질 것인가?
    현재 독일 정가에서 뜨거운 이슈는 아마도 독일 연방 정부의 내무부 소속 연방 헌법 수호청(Bundesamt für für Verfassungsschutz: BfV)이 이른바 극우파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함에 따라 이 정당의 해산을 놓고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AfD는 올해 조기 총선 결과에서 나타났듯이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연합에 이어 원내 2당으로 급부상했는데, 기민당만 떼어 놓고 보면 AfD가 사실상 원내 제1당이 된다. BfV가 그렇게 지정한 까닭은 2019년부터 AfD에 대해 약 3년간 강도 높게 이 정당의 독일 헌법 위반 여부를 조사한 결과, 당내 만연한 민족주의와 혈통주의가 민주적 질서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연정에서 의회가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한다고 해서 정당 해산에 관한 결정이 바로 진행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이때 대체로 민주적 질서에 대한 실질적 위협이 존재했는지, 단순히 이념이 아니라 민주적 질서를 파괴할 구체적 행동이 있었는지 등을 검토해서 정당 해산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당장 AfD는 이 결정이 민주주의에 반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또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AfD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총선에 편승해서 현재의 독일의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다고 주장하면서 AfD의 집권이 마치 독일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전형적인 나치의 수법이다. 그런데 극우 정당의 해산과 관련해서 한 가지 분명한 사례가 있다. 2001년 슈뢰더 총리 시절 연방 정부는 독일 민족민주당(NPD)이 헌법을 위반했다며 정당 금지 가처분을 허락해 달라며 제소했고, 당시에 연방 상·하원 모두 정당 금지요청서를 제출했다. 그때는 이민자들이나 난민들, 외국인들에 대한 극우파의 범죄들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필자의 유학 시절이었는데, 슈뢰더 총리가 그와 같은 범죄가 독일의 국제적 이미지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언론에서도 극우파를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반극우주의 시위가 빈번하게 있었다. 당시에는 NPD와 같은 정당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독일의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한 측면도 있어서 극우파는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2017년 헌법재판소에서 NPD의 정당 해산 청구를 최종적으로 기각했다. 그러나 이때는 NPD가 아직 현재의 AfD와 같은 영향력이 별로 없어서 소수에 불과한 NPD에 대한 경계심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독일이 히틀러의 나치 정권 패망 이후에 극우파에 대한 여러 가지 조치를 계속해 왔지만, 일부 나치 추종자들 혹은 신나치주의자들이 여전히 독일 사회에 침투해 있다. AfD가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되면서, 이와 관련된 많은 사람, 공무원들이나 경찰들이 당국의 조사를 받는 것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아직도 잔재로 남아 있는 나치즘 혹은 신나치즘의 광기는 언제든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히틀러 시대처럼 되지 않은 것인데, 그 까닭은 상식이 있는 독일 국민이라면 나치즘의 광기가 결국 파멸이라는 판단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의 극우파 문제는 나치즘과 관련된 것 외에도 왕당파에 기반한 제1제국의 부활을 획책하는 시도로도 나타났다. 물론 사전에 발각되어서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기는 했지만, 21세기에도 이런 망상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보면 메르츠 총리의 입장에서는 이번 결정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메르츠는 연정 합의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깨고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해, 2차 투표에서 겨우 과반수를 넘겨 의회에서 총리로 인준을 받았다. 이번 AfD에 대한 연방 헌법 수호청의 결정에 대해 메르츠 총리가 다소 얼쩡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는 좌우로부터 상당한 공격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과연 대연정을 잘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메르츠 총리에게는 중요한 정치적 시험대가 될 것이다. 현재의 이 문제에 관해 가장 반색하고 강하게 이를 지지하는 사민당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사민당은 아마도 메르츠가 극우파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 아마도 1차 투표에서 일탈표로 나타났던 것일 수도 있다. 이번 BfV가 AfD를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한 것이 왜 지금이냐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만일 이러한 점에 우리가 치중하다 보면 마치 BfV가 정치에 개입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할 것인데, 이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독일 연방 정부의 내무부 장관도 분명히 독립적인 자체 결정이라고 했으며, 최종적인 판단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만 판단하면 될 것이다. AfD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데, 사실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되면, 정당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독일에서는 나치와 관련된 특정한 행위라든지, 특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지난 총선에서 AfD는 몇몇 사람들이 그와 같은 행태를 보이면서 나치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어쩌면 표면적으로 승리했지만, 결국 집권에는 실패했다. AfD는 과연 정당 해산으로 끝날 것인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번 BfV의 결정은 분명히 극우파에 대한 엄중한 경고인데, 어떤 정당이든 헌법에 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또다시 상기시키는 조치라고 하겠다. AfD를 놓고 정상적인 당을 대우할 것일 주장하는 쪽과 민주주의의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할 책임을 강조하는 쪽이 서로 맞서고 있다. 전자의 입장은 총선으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된 공당이 극단주의적 성향이 있을지 몰라도 이를 한갓 단체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AfD의 정책이 민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극단적 행위들이나 정책들이 민주주의 위협으로 보고 이것이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정당 해산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이 문제는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AfD의 득세는 분명히 독일의 현재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지난 정권에 대한 민심이 표심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민주적 질서와 헌법에 따른 정당한 절차와 과정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번 BfV의 결정은 총선 결과와 무관한 것임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내 정당을 해산하기 위한 결정은 매우 신중할 필요는 있다. 필자는 여러 번 극우파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극우파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몰락의 길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AfD가 현재 독일의 상황에서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민심을 심리적으로 자극하면서 상당히 세력을 불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당을 단순히 과거와 같은 잣대로 평가절하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 AfD는 외국인, 이민자와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증오, 그리고 나치즘에 대한 동경과 향수로 얼룩져 있다. 거기에 정당 운영도 엄격히 말해 외관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상당히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포퓰리즘적이기도 하다. 물론 독일 사회는 여전히 이에 대한 방화벽을 갖고 있으며, 시스템을 통해 견제하고 방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독일의 시민사회가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언론도 학계도 정당도 마찬가지다. 이번 BfV가 AfD를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한 것은 그동안의 극우파에 대한 경각심이 늦추어진 탓에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일정 정도 통제할 필요성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이번 결정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결정이라는 AfD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BfV가 헌법과 법률에 위반하는 조치여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BfV는 임의로 급조된 것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정당한 절차와 조사에 따라 AfD가 헌법 위반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제 AfD의 정당 해산 결정 청구에 대한 판결은 BfV의 손을 떠나서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이 판결에 따라 AfD의 정치적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 어떤 것도 헌법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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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4
  • 내일 15일에 있을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이스탄불 회담에 대해
    미국은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이후 최근까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양국을 오가는 이른바 '셔틀 외교'에 매진해온 상태이다. 하지만 전쟁을 종식하는 방안에 대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의견 차이가 매우 심하고, 또한 서로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직접적인 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즉, 이는 미국 입장에서 양국 스스로의 해결을 원한 것이다. 더불어 이와 같은 '셔틀 외교'를 통해 '30일 휴전'을 조기에 성사시키기 위해 트럼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을 압박해 왔다. 그러면서 휴전 중재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게 '30일 휴전'과 '스스로의 협상'을 수락하게끔 몰아 세우며 전쟁 종식을 통한 이득을 노리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도록 여러 문제에 관여했던 당사자다. 넓게 봐서 오바마 정권 때부터 본격적인 확전이 진행되었던 바이든 정권 때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여러모로 이 전쟁에 관여해왔다. 우크라이나에게 무기 지원을 해가며 대리전을 수행해왔고, 이와 같은 대리전에서 미국은 참패를 거듭했다. 한 때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며 전쟁을 독려했던 미국이 대리전 패전의 책임을 덮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중재자로 전환하고 있는 입장이다.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던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의 전략적 전환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이런 판국에 미국 트럼프의 30일 휴전 및 양국의 자발적 협상 제안을 두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 가소로울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러한 미국을 두고 좀 더 유화적으로 가기로 한 모양새다. 이는 미국이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먼저 놀자고 했으니 피할 이유가 없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제안한 휴전과 협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당사자들에게 서로 배치된다는 것에 있다. 직접적인 협상을 통해 휴전할 것인지, 혹은 휴전한 이후에 직접적인 협상에 나설 것인지는 전혀 다른 얘기다. 러시아는 전자, 우크라이나와 유럽 측에 후자를 바라고 있다. 결국 미국이 나서서 이를 정리를 할 수 밖에 없는데 미국이 나선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미국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러시아에 유리하게 직접 중재하려다 우크라이나와 광물 협정 체결 이후, 교착 사태에 놓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트럼프에 대한 불신은 높은 상태다. 당시 미국은 성사가 불투명한 직접적이며 스스로 협상하여 해결을 원했지만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자 30일 휴전 안을 내세워 젤렌스키로 하여금 이를 관철하게 했다. 4일 전, 10일 키예프를 방문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은 젤렌스키와 함께 러시아를 대해 30일 휴전을 관철시키기 위한 최후통첩성 성명을 논의하던 중,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통해 이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키스 켈로그 우크라이나 특사도 직접적인 협상에 앞서 30일 휴전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힘을 실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젤렌스키에게 러시아와 직접적인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면서 유럽과 준비 중인 30일 휴전 안을 틀어버렸다. 트럼프는 지난 5월 10일 젤렌스키에게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협상에 즉시 동의하라고 요구했고 이를 통해 최소한의 협상이 가능한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유럽과 미국이 제반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이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학살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을 협상하기 위해 터키에서 만나는 것으로 제안했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동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직접 협상 쪽으로 기운 것을 확인한 젤렌스키는 자신의 텔레그램에 유럽 4개국 정상들과 합의한 지난 12일부터 30일 동안 휴전을 개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목요일인 내일 15일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푸틴 대통령을 기다리겠다고 서술했다. 물론 젤렌스키와 푸틴 대통령이 맞대면 할 가능성은 매우 적은 상태다. 우선 지난 12일부터 휴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이러한 제안에 처음에 러시아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이기고 있는 전쟁에 굳이 평화 협상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러시아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젤렌스키가 터키 이스탄불에 날아가지 않는 것은 확실시 될 듯 싶다. 푸틴 대통령 또한 젤렌스키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러시아는 젤렌스키를 협상 대상자가 아님을 적시한 바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15일 이스탄불 협상에서 양국 간의 300여 년에 걸친 민족적 문제를 이 한 번에 풀 수 있는지에 대해서 또한 매우 회의적이다. 물론 러시아가 실무 대표단만 터키로 보낸다면 우크라이나 또한 이에 응할지 알 수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정상회담은 젤렌스키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열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표단 실무 협상이 이루어져 이 협상이 만약에 결렬될 경우, 미국이 어떤 방책을 세우고 행동할지 예측하기 어려우며 중재자 역할을 하던 미국 입장에서도 더 이상 나올 수 있는 카드가 없게 된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푸틴 대통령이 젤렌스키 를 직접 만나는 것을 거부할 것이며 이들은 이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스탄불 협상이 무산되면 구 책임은 러시아에게 있다는 전략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직접 협상을 먼저하고 이후 휴전을 논의하자 주장한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 손을 들어 줬기에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도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여 진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트럼프의 다음 행보를 전망하면서, 그가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협상 제안을 지지할 경우, 모든 것은 미국과 러시아의 차후 협상으로 모든 것이 일임될 것으로 예측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안에 대해 러시아-미국 양국은 아래와 같이 거래를 통해 안건 합의들이 나와야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미국이 러시아에 양보할 수 있는 것을 본다면 ①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토 인정, ②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 ③ 대(對) 우크라이나 무기 제공 중단, ④ 대(對) 러시아 제재 해제 등이다. 반대로 러시아가 양보할 것을 본다면 ①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는 돈바스의 4개 주(도네츠크, 루간스크, 자포로제, 헤르손 주)를 합병하는 것을 철회, ② 최전선에서의 무조건 휴전, ③ 자포로제 원전 등 전력 생산 시설 통제권을 미국이나 우크라이나 측에 이양하는 문제 등의 내용들이 협의 될 때 휴전 협정의 도출이라는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간 러시아와 미국의 평화 협상은 이미 교착 상태에 놓여 있기에 트럼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에 직접적인 협상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계획한 상태에서 푸틴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태도를 바꿔 직접 협상을 먼저 제안했다. 이는 트럼프 측의 입장에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직접 협상에서 내놓은 조건을 수용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러시아가 지난 2022년 3월의 '이스탄불 평화 협정 초안'을 기본 안건으로 삼으며 달라진 현실을 감안해 새로운 안을 주장할 경우, 이스탄불 재협상도 결렬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협상의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안건들이 트럼프에게 새롭게 제시할 러시아와의 거래 아이디어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직접적인 협상을 촉구하는 SNS의 글에서 유럽과 미국이 제반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 쓴 이유로 보인다. 현재로 볼 때 트럼프가 셔틀 외교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직접적인 협상에서 나타난 모든 상황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미국이 최종 평화 안을 만들어 양측에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양국 모두 제재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수만 건의 제재가 있었지만 그 동안 이루어졌던 제재는 현재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이 러시아 제재를 강화한다 해도 더 이상의 제재 카드는 의미가 없음이 입증되었다. 결국 공염불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내일의 이스탄불 회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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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4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20세기 최악의 비극, 사라예보의 봉쇄전
    1992년 3월 1일, 한 세르비아인 결혼식장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한다. 이 당시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과 무슬림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반대한 국민투표 당일 사라예보의 바슈차르시아에서 세르비아의 국기가 휘날렸는데 이는 무슬림들에게는 도발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날 바슈차르시아 광장에서 일어난 총격전은 엄청난 비극을 양산했다. 당시 신랑 측 아버지인 니콜라 가르도비치(Nikola Gardović)가 사망하고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는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총격 사건의 목격자들은 살인범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붕괴 이후 범죄자로 활동했던 폭력단 단원이자 보스니아 내 보슈냐크인 계열 준 군사 조직이었던 그린베레의 일원이며, "첼로"라는 가명으로도 알려진 라미즈 델랄리치(Ramiz Dellalić)였다. 델랄리치와 공범들에게는 곧바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밀로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주당(SDS)에서는 이와 같은 총격 살인 사건을 비난하며 살인범을 체포하지 못한 것은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보스니아 민주행동당(SDA)이 이끄는 보스니아 정부가 범인과 공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제트베고비치의 대변인은 세르비아인이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 있으며 독립국인 보스니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라 주장하며 이러한 공모 주장에 반박했다. 그러나 애국연맹의 창립인 중 한 명이자 보스니아 육군대령인 세페르 할릴로비치(Sefer Halilović)는 이 사건이 결혼식이 아니라 도발이었으며 결혼식 하객들이 밀로세비치를 추종하는 세르비아 민주당 소속의 운동가들이라 비난했다. 그러자 다음 날 새벽부터 시내 주요 번화가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세르비아 민병대들은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하고 복면을 썼다. 이들 민병대들은 세르비아 민주당(SDS)의 지지자들로 친 세르비아계 인사들의 저택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현재 사라예보에는 그 사건이 벌어진 저택인 집, 당시 결혼식이 이루어졌던 곳이 보존되어 있다. 1992년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사라예보 의회 건물 근처에서 바리케이드 및 저격수를 배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쿠데타와 같은 위협은 사라예보 시민 수천명이 저격수 앞으로 행진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1992년 3월 3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보스니아 전 지역에서 세르비아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산발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게다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 국가로서의 승인을 앞두면서 이 충돌은 계속되었다. 4월 5일에는 세르비아 민족 출신의 경찰관이 경찰서를 공격한 이후, 보스니아의 내무부 사관학교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장교 2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그러자 다음 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의장단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내전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날 이후, 사라예보의 세르비아 민병대들은 지난 달에 했던 행동들을 반복했다. 이 때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시민들 중 50,000명에서 100,000명 가까이의 시위대들이 행진하면서 다시 또 철수했다. 가장 큰 시위대 무리가 의회 건물을 향해 이동하자, 무장 괴한들이 이들을 향해 사격을 가하기 시작해 수아다 딜베로비치(Suada Dilberović)와 올가 수치치(Olga Suchići)로 이름이 알려진 젊은 여성 2명이 사망했다. 이 두 명은 포위전의 최초 사망자로 기록되었다. 이 여성들을 죽인 무장 괴한들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여러 증언들로 보아 이들은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단체들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유고슬라비아를 해체시키려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 일원들이 이들을 지원했을 가능성은 훗날 보스니아 내전으로 알려진 참혹한 전쟁에서의 그들의 역할로 미루어 볼 때 매우 높다고 본다. 한편 그녀들이 살해당한 브라바냐 다리는 이후 그들의 이름을 따서 딜베로비치-수치치 다리라고 명칭이 바뀌게 된다. 한편 1992년 4월 6일, 미국과 유럽 공동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보스니아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이탈이 사실상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되자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후 스르브스카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는 미국과 유럽 공동체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독립 승인을 확인하고, 1992년 4월 6일 14시부터 연방 주도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원 하에 세르비아 접경 도시인 팔레(Pale)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의 이름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8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분할한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되면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직접적인 개입보다 스르브스카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 3월 18일에는 보스니아 내의 3개 세력의 대표인 보스니아 측 대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ć), 세르비아 측 대표 라도반 카라지치, 크로아티아 측 대표인 마테 보반(Mate Bovan) 등은 모두 리스본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하지만 1992년 3월 28일 이제트베고비치는 사라예보에서 당시 주 유고슬라비아 미국 대사인 워런 짐머만(Warren Zimmermann)을 만난 이후 협정 서명을 없었던 일로 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 내 모든 인종 간의 분열을 반대하고 통합 국가만을 추구한다고 언급했다. 이 때 당시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했는지, 또한 누가 말했는지 아직도 불분명하다. 다만 짐머만이 이후에도 회고하기를 이제트베고비치에게 협정 서명을 철회한다면 미국은 보스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논쟁 여지가 없는 이유는 같은 날 이제트베고비치가 협정 서명을 철회하고 합의안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에 진실은 두 사람만의 비밀 회동이었 때문에 두 사람만이 알고 있다. 한편 1992년 4월 6일, 유럽 연합 외무장관 12명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독립국으로 인정한다고 통보했다. 이어 미국은 그 다음날 보스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그러자 보스니아 내에서는 곧바로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브라세의 사관학교 훈련소를 공격하고, 박격포, 대포, 전차를 동원하여 시내 중앙의 트램 전차기지와 구시가지를 포격했으며, 사라예보의 공항을 점령했다. 보스니아 정부군은 독립국으로 인정한 이후 UN이 평화유지군을 파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전쟁이 보스니아 전역으로 확대될 때까지 군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1992년 5월 2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군이 사라예보의 봉쇄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요 도로를 막으면서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막았으며 도시로 향하는 전기, 물, 난방 등의 공급 처리 시설도 막아버렸다. 이 세르비아 군은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를 방어하고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군에 비해 크게 열세에 놓여 있었다. 수많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장갑 부대 대열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후, 세르비아군은 약 200회의 포격전으로 주변 고지의 벙커와 방어 진지들을 공격하면서 방어력을 약화시키는데 집중했다. 이에 노보 사라예보를 장악하기 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의 공세는 수차례 이어졌다. 이와 같은 포위전을 견제하기 위해 1992년 5월 30일에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안전 지역 내로 편입시킬 것을 요구했고, 6월 말부터는 유엔의 공수 물품이 들어오게 되면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 보급품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포위하고 있는 세르비아 군에 비해 보스니아 정부군은 매우 미약한 무장만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보스니아에서의 암시장에서는 전쟁 초기에 참전했던 보스니아 군의 무기들을 불법적으로 밀수하거나 세르비아군을 습격하여 노획한 무기를 판매했다. 1993년 중반에 완공한 사라예보 터널은 사라예보의 방어군을 포함한 보스니아 전쟁에 참여한 모든 세력들에게 국제적인 무기 금수 조치를 우회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터널은 도시의 수비군들에게 필요한 무기 및 여러 생활 용품들을 보급했으며, 이 터널을 통해 일부 시민들이 사라예보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이 터널로 인해 사라예보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그곳을 사라예보의 "희망의 터널"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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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4
  • 러시아-베트남의 정상회담에 대한 의미
    전날인 11일, 러시아와 베트남은 전승절 이후,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또 람 총비서 간의 소규모 대화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두 나라 대표단 구성원이 참석한 공식 조찬 형식으로 이어졌다. 회담 이후 두 정상은 러시아-베트남 간 주요 방향성에 대해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공동성명들 중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베트남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관한 문제이다. 베트남은 지난 2023년 여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한 차례 최악의 전력난을 겪었었다. 더불어 베트남은 지속적인 전력난으로 인해 정전이 잦은 편이다. 베트남 전국에서 전기를 사용하는 2,600만여 가구 중에서 5월의 전력량 사용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5월부터 베트남의 더위는 심해지기에 에어컨 사용이 급증하게 된다. 베트남의 시골에는 이유 없이 전기가 나가 1시간 가까이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도시의 경우, 태풍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아니고는 발생하지 않는 일이지만,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전기가 나가는 상황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전 용량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을 내 전기를 수급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되지만 여하튼 잠깐씩 나가는 전기 때문에 불편한 상황을 겪은 것이 여러 차례 존재한다. 베트남은 주로 화력발전과 수력발전을 통해 전기를 충당하고 있다. 2024년 12월 기준 베트남 전체 전력 생산량에서 수력 발전은 37.6%를 차지했고 석탄과 가스가 각각 34.3%, 17.8%로 뒤를 이었다. 화력 발전이야 연료를 때서 전기를 만드는 것이니 비중이 높은 것이 이해가 가지만 수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놀라울 정도이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베트남은 남부 메콩 강 인근에서 활발한 수력 발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에 의지해야 하는 수력 발전은 부침이 심한 편인데 이는 중국이 메콩 강을 수운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베트남은 심각한 가뭄으로 수력발전소 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베트남 남부 꽝남에 위치한 붕강 4번 수력발전소가 강물이 메말라 운영이 어려운 상태에 빠졌고 2번 수력발전소도 역시 물 저장량이 25~30%까지 떨어져 운영을 중단한 바 있다. 서북부 호아빈 다강에 위치한 베트남 최대 수력발전소인 '호아빈' 역시 댐 수위가 3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바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라오스에서 올해 200㎿의 전력을 추가 수입하기로 결정하는 등 전력난 해소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 산업통상부는 베트남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공산당 정치국이 원자력 발전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산업통산부는 국가 전력 개발 계획(PDP8)상의 주요 전력원을 검토한 결과 2026년~2030년 국가 전력망의 전력 용량이 부족해질 위험이 상당하며, 이는 에너지 안보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 전력 개발 계획은 전국 발전 가능 용량을 지난해 말 80GW(기가와트)에서 2030년까지 150GW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베트남 정부는 풍력과 액화천연가스(LNG)를 통해 전력을 보강한다는 계획이었지만, 규제와 비용 등의 문제로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베트남은 지난 2009년 원전 2기 개발 계획을 승인하고 2030년까지 원전 총 14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안전성 논란이 커지자 2016년 원전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베트남 정부와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에서 협력하기로 하고 한국전력이 주도하는 ‘팀 코리아’가 베트남 원전을 수주하려 했다. 그래서 산업통상자원부 안덕근 장관이 베트남으로 건너가 원전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한전과 두산에너빌리티, 현대건설 등 팀 코리아가 베트남 산업부와 원전 발주처를 상대로 기술설명회를 열었었다. 베트남 또한 2009년 베트남의 첫 원전 사업으로 추진한 닌투언1, 2원전 프로젝트를 되살리기 위해 원자력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올렸던 한전을 끌어들여 대한민국의 원자력 기술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 2025년 1월 14일 러시아의 미하일 미슈스틴(Михаил Мишустин) 총리가 하노이에 방문하여 원자력 에너지 협정을 체결했다. 러시아의 로사톰 측은 ① 원자력 발전소 건설, ② 첨단 원자력 연구센터 설립, ③ 기술 이전, ④ 자력 제품의 현지화, ⑤ 원자력 과학 및 산업 발전 등을 포함한 장기적 협력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베트남의 원자력 인력 양성을 위해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기술 이전을 통해 베트남의 자체적인 원자력 기술 역량 강화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에서 러시아는 베트남과 협력하기로 하고 베트남 원전을 정식으로 수주했다. 이는 즉, 대한민국의 한전이 수주하기로 한 것이 러시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이는 한전이 원전 수주한 것이 유력했던 것이 이날 러시아와 베트남의 밀착으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베트남이 대한민국에서 러시아로 원자력 관련하여 사업 수주를 급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이 베트남의 안보와도 직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중국의 메콩 강 통제로 인한 실존적인 위협을 받고 있으며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있어서도 중국과 치열하게 대립 중이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 맞서기 위해 시진핑이 직접 베트남을 방문해 연대 협력을 요청했지만 베트남은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은 베트남에 무지막지한 투자러쉬로 베트남 경제를 잠식시키려 하고 있고 베트남에서는 이를 매우 위협적으로 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오랜 우방이자 혈맹인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는 급선무다. 중국이 베트남에 자행하는 위협적인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시도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였고, 2030년까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CSP: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를 체결함으로서 든든한 보험까지 들었다. 베트남은 미국을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오히려 베트남에 관세를 부과하고 혹시나 모를 중국의 위협과 영향력 행사에 적극적인 면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에 중국을 견제할 파트너로써 러시아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러시아 또한 베트남을 동남아시아 지역의 핵심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베트남은 러시아에 군사무기 수입량을 늘렸다. 실제로 러시아는 1995년부터 2023년까지 베트남 무기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영토와 영해 보전을 위해 러시아로부터 수호이 전투기들과 미사일 등의 무기들을 추가 구입할 예정이다. 거기에 러시아로부터 베트남 원전 건설 이면에 기술 이전까지 약속받았다. 러시아로부터 베트남에 원자력 기술이 이전되면 베트남 입장에서는 플루토늄을 만드는 것은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핵 연료 재처리(Nuclear reprocessing) 과정이 끝난 뒤, 사용이 끝난 핵 연료를 녹인 후 쓸모 있는 우라늄, 플루토늄을 뽑아내는 기술이 장착되면 핵 무장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해지는 것이다. 원전만 지어주고 기술 이전에 대해 즉답을 피한 대한민국의 한전에 비해 기술 이전까지 시켜주려는 러시아 측으로 베트남이 돌아선 것은 어쩌고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이 미적거리는 동안 그 사이를 러시아가 파고 들었고 결국 베트남은 러시아로 인해 자국의 안보 및 핵 무장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과 상호 협력을 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미적거리다가 선수를 빼앗긴 셈이 되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의 집단들 중 무능하지 않은 집단이 없다고 봐야할까?
    • 칼럼
    • Nova Topos
    2025-05-13
  • 카프카스인들과 조지아의 기원
    고도로 발전된 철제 기술력들을 기반으로 카프카스인들은 B.C 12~8세기경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흑해 연안과 아르메니아 인근에 자신들의 최초 국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인류 시원과 연결되어 있고, 강력한 기술력을 보유했던 카프카스 인들은 막강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문명에 의해 끊임없이 침탈을 당했기 때문이다. B.C 8세기에는 킴메르가 공격해왔고, 이후 흑해 해안 지대에는 그리스계 민족들이 상륙하여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한 민족들의 공격에 카프카스 인들은 이들의 세력과 혼혈하여 토착민으로 거듭났다. 이들 토착민들을 카르트벨리아 인들이라 불리게 된다. 이들은 콜키스와 이베리아로 나뉘어 카프카스 일대를 지배했다. B,C 7세기에는 스키타이가 공격해왔으며 B.C 6~2세기에는 사르마트와 마케도니아, A.D 1세기에는 로마, 3세기에는 동고트족, 5세기 후반부터 10세기까지는 비잔틴 제국의 침략과 강점을 거쳤다. 고대 시대부터 유라시아 유목 부족들과 고대 슬라브 인들이 모두 카프카스 일대를 공격했고, 강제로 점령하기도 했다. 결국 고대부터 근현대시기까지 조지아와 조지아 인들의 역사는 외부의 강점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지아는 러시아어로는 ‘그루지야(Грузия)’라고 지칭되고 있으며, 조지아어로는 ‘사카르트벨로(Сакартвело)’라고 명명된다. 사카르트벨로는 조지아 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카르트벨리(Kартвелы)와 장소를 뜻하는 접사 ‘사(Cа-)’와 ‘오(-O)’가 결합한 말이다. 결국 사카르트벨로란 ‘카르트벨리가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어에서는 조지아의 국가 명칭을 ‘그루지야(Грузия)’, 조지아 민족을 ‘그루진(Грузин)’이라고 불렀으며,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러시아어 명칭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1389년 사제 이그나티 스몰냐닌(Игнатий Смольнянин)의 팔레스타인 여행기에서 구르지(Гурзи)에 대한 언급되고 있으며 아파나시 니키틴(Afanasi Nikitin)의『삼대양으로의 여행(Хожение за три моря Афанасия Никитина, 1466~1472)』에서 구르지야 땅(Гурзыньская земля)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이후 구르지(Гурзи)라는 용어는 러시아어에서 자모 교체 현상이 발생해서 그루지니(Грузины)로 변경되었다가 전통적으로 국가의 명칭을 뜻하는 러시아어 접미사 ‘이야(-ия)’가 붙어서 ‘그루지야(Грузия)’가 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그루지야는 조지아(Georgia)라고 부르며 일부 국가에서는 ‘게오르기야’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 명칭은 터키어로 그루지야 인을 뜻하는 구르지(Gurdzi) / 규르지(Гюрджи, Gurdzi)에서 차용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참고로 13세기 마르코 폴로는 ‘그루지야’를 조다니(Jorganie)라고 했고, 현대 터키어로는 구레이스탄(Gureista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조지아, 혹은 그루지야 / 게오르기야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여러 학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곡물 경작지’를 뜻하는 ‘게오르기야’에서 파생되었다는 학설도 있고, 그리스어로 ‘농부’를 지시하는 ‘게오르고스’에서 유래했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 시대 수많은 사원의 이름으로 사용됐던 ‘성 게오르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고, 조지아를 통치하는 통치자 중 무려 12명이 ‘게오르기’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결과로 ‘게오르기야’가 국명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오늘날 조지아 영토인 이베리아 지역의 영토에 대한 최초 거주는 여러 근거로 볼 때 현 조지아 남동부에 존재하는 드마니시(Dmanisi) 지역의 발굴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약 18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 대한 구석기 유적의 발굴로 나타난다. 이는 후기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된 아슐(Ashul) 문화로 알려진 무스테리안(Musterian) 시기의 것인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은 조지아에서 무수히 많은 동굴과 옥외 유적지들로부터 발굴되었다. 최초의 농경 신석기 시대 거주는 B.C 6000~5000년 사이의 시기로 추정되며 이에 대해 여러 도구기 나타나고 있는데 해당 지역의 흑요석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가축들을 키웠으며 포도를 포함한 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슐라베리-쇼무(Shulaberi-Shomu) 문화로도 알려진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이 문화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소와 양, 돼지와 같은 가축들을 방목하여 목축을 주로 행했으며 포도를 포함한 과수와 밀과 같은 곡류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슐라베리-쇼무(Shulaberi-Shomu) 문화로 알려진 곳에는 카프카스 인들의 대규모 정착을 근거하는 수많은 동굴들은 1960년대부터 발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에 발굴된 동굴들은 동부 조지아의 이미리스-고라(Imiris-Gora) 지역에 주로 분포해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B.C 5000년 시기로 알려졌고 이 동굴들에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집들을 포함한 많은 고대 정착지들이 나타났다. 그 주거지들은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기둥과 굴뚝이 있는 특이한 유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한 형태들과 함께 향후에는 조지아의 주거지들과 다르바지(Darbazi) 형식으로 형성된 건축지들이 발달하였다. B.C 4000~3000년 시기의 동석기(銅石器) 시대 기간 동안으로 놓고 볼 때 조지아와 소아시아는 쿠라-아락세스(Kura-Arakses) 문화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쿠라-아락세스(Kura-Arakses) 문화는 B.C 2000년 시기의 트리알레티(Trialety) 문화로까지 이어진다. 동석기 문화에 속해 있는 동굴들은 베슈타셰니(Beshutasehni)와 오즈니(Ozni) 정착 유적으로도 나타났고 탄소 연대로 밝혀진 연대로는 B.C 4000~3000년 시기의 정착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후에도 아르트빈 지역에 위치한 트살카(Tsarka)의 트리알레티(Trialety) 주(州)에 있는 매장식 무덤이 존재하는데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B.C 2000년의 시기들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 유적들 모두 진보되고 잘 발달된 무덤과 매장 양식이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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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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