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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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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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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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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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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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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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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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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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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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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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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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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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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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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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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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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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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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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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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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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980년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에 대한 의미
- 1980년 일본 국회 중의원과 참의원들이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을 비롯하여 <북방 영토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결의(北方領土問題の解決促進に関する決議)>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에 일본의 모든 도도부현 의회와 시정촌 의회, 전국지사회, 전국시의회의장회, 전국시장회, 전국정촌회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결의가 모아지는 것을 계기로 총무청에서는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을 검토하기로 하고 각계 각층의 의견을 듣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1980년 12월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에 대한 간담회가 학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게 된다. 간담회의의 결과에 대해 답신을 받은 일본 내각은 1981년 1월 6일에 열린 내각 회의에서 매년 2월 7일을 북방 영토의 날로 정하는 안을 채택했다. 왜 2월 7일로 설정을 했냐면 가증스럽게도 1855년 2월 7일 에도 막부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사이에 맺은 조약인 러일 화친 조약(露日和親條約)이 체결된 날이 그 날이기 때문이다. 화친(和親)이란, 국어사전적 의미로 볼 때 '서로 의좋게 지내는 정분', 혹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다툼 없이 가까이 지냄' 이라도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친조약을 체결한 2월 7일을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로 지정한 것이다. 사실 이 가증스러운 행위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기념한 날인데 일본은 오랫동안 잃어왔던 자국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의미로 지정한 것에서 그 의미가 맞지 않다고 보여진다. 친하게 지내자는 것은 평화와 우의를 동반하는 것인데 1981년부터 현재까지 41년 동안 2월 7일을 북방 영토의 날로 지정하고 다양한 축제를 비롯해 행사를 거듭하여 일본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평화와 우의의 상징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다. 참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러시아, 일본 두 나라가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다. 양국은 식민지 개척 정책의 일환으로 사할린을 자국 영토라 주장하기 시작하며 마찰을 빚게 된다. 그러자 두 나라는 1855년 2월 7일 러일 화친 조약(露日和親條約)을 맺어 사할린을 공동으로 관할하는 구역으로 만들게 된다. 이어 1875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가 사할린을, 일본이 쿠릴 열도를 차지함으로 합의를 보았다. 일본이 쿠릴열도가 자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는 것을 보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1941년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게 된다. 그러면서 안심하고 때린 것이 진주만이다. 이와 같이 양국 간에 불가침 조약이 있었지만 1945년, 소련은 얄타 회담의 결과에 따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공격을 결정한다. 이로써 소일 불가침조약은 결국 파기되었고 만주 기습 작전으로 일본은 만주, 몽골, 조선 등의 식민지를 상실하게 된다. 소련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에도 평화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양국은 계속 휴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이래, 대일외교가 전면적으로 수정된다. 1956년 흐루시초프는 소일 공동선언을 함과 동시에 외교관계를 회복시켰고 일본은 소련과도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반공을 국시로 소련을 비롯한 모든 공산권 국가들을 차단했던 우리와는 심히 대조적이다. 그러나 공동선언 제9항에서 소련은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 섬을 평화 조약 체결 후 일본에 넘기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에 서명했다는 것에서 후일 북방 영토 분쟁이 갈수록 심화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정치적으로 일본은 소련을 사실상의 주적으로 규정해 소련군의 상륙을 대비해서 홋카이도에 전차를 집중적으로 배치했었지만 문화적, 경제적 교류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나, 푸쉬킨, 도스토예프스끼, 막심 고리키 등의 작품들이 냉전 시대 때 일본에서 별다른 검열 없이 성행했었던 것도 문화 교류들이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후, 2000년대에는 일본이 북방영토 회복 문제를 제기했고, 러시아는 도쿄 근해에 폭격기를 근접 비행시키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가 발생한다. 이와 같은 북방 영토를 두고 일본과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우리 한국의 반일감정을 이용해 일본과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센카쿠 열도, 남중국해 등의 분쟁에 대해서 중국 편을 들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태도에 일본은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제재를 가하고 있다. 이후에도 추가 제재를 단행하거나, 친러시아파 자산을 동결하고 독자 제재까지 검토하기도 하는 등, 생각보다 두 나라의 사이는 골이 깊다. 2019년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에는 러시아가 일본의 태도를 보고 이틀 연속 일본 공해 근처까지 가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당시 한국은 반일 불매 운동 시기였는데 일본의 동해와 독도를 두고 벌인 신경전에서 러시아가 일본의 행위에 대해 더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2012년부터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 소속군함들이 쿠릴열도 지역을 방문했다.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전몰 수병 추모 항해차원으로 쿠릴 열도와 하바로프스크 지역 등을 24일 동안 항해한다고 하는데, 이를 5년 동안 계속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는 실효지배(Effective control over territory) 강화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실효지배는 굉장히 중요한 외교적 용어다. 영유권을 두고 실제로 국가가 직접적인 컨트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자기 땅이라고 하든, 온갖 잡소리를 해도 조용히 무시해버리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실효지배하고 있는 측에게 항상 우위를 내줄 수밖에 없어 실효지배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뭐라 떠들든 신경쓸 바가 아니다. 쿠릴 열도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뭐라 떠들던 러시아는 신경 쓸 필요없이 일본의 도발에 대비해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고 실효 지배를 더욱 강화했다. 우리도 더 이상 말 나오지 않기 위해 일본이 뭐라 떠들던 상관없이 독도와 가까운 울릉도나 독도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 깔끔하다. 그런데 2019년 2월 7일 일본 북방 영토의 날 행사가 열렸다. 여기에는 다른 해의 북방 영토의 날 행사와는 다른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키예프 주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쿠릴열도는 대일본의 영토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우크라이나 방송사가 중계 방송을 했다. 우크라이나는 전략적으로 러시아의 배후인 일본을 움직여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여기에 분쟁이 벌어지면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장악하기 위해 군을 움직이려는 전략을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크라이나는 2019년부터 이를 염두해두고 일본과 손잡으려 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일본 내에도 우크라이나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데 러시아인 공동체의 일부를 이루는 경우도 있어 현재 일본 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반전 시위의 주동이 되어 있다. 이들 네트워크들의 목소리는 일본의 넷우익 같은 극우단체와도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네트워크가 일본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이에 일본은 쿠릴 열도를 반환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한마디로 우크라이나도 이러한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감사함을 표시하며 화답했다. 말 그대로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이후, 적극적인 친일 국가인 것이다. 이런 추세로 일본은 쿠릴 열도 뿐 아니라 독도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우크라이나의 동의를 구할 것은 뻔한 일이다. 러시아는 로마노프 제국 시절부터 해군성 수로국이 팔라다 함대의 탐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1857년 '조선 동해안 지도'를 발간하여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공식 인정했다. 최근에도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영공을 두 차례 침범하여 우리 정부가 러시아에 항의하자 러시아는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다가 "영공 침범 안했다"고 입장을 바꾸긴 했지만 같은 항의를 했던 일본한테는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이는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외로 독도가 한국 영토로 인식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독도를 다케시마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더 많다는게 해외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격이 되었다. 그런데 2년전까지만 해도 반일 불매운동 하던 한국 사람들은 이런 점에 있어 굉장히 무감각하디. 반일 불매운동에 열성적이었던 한국인들이 독도가 우리 영토라고 인정했던 러시아를 배격하고 친일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물론 침략은 어떠한 행위로도 정당화 할 수 없지만 우크라이나와 일본 간의 깊숙한 관계, 북방 영토를 일본 영토로 인정하면 우리 독도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북한 미사일에 우크라이나 엔진이나 기술이 들어가 있다는 것, 등의 여러 문제를 고려해서 최소한 한국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감정적으로만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보여 진다. 러시아와 관계는 푸틴과의 관계를 떠나서 매우 중요하다. 솔직히 러시아와 푸틴이 우리에게 잘못한게 뭐가 있나? 우리 기업들 기 살려주고 투자할 수 있게 해주고 한국 제품 마음껏 사줬지, 독도는 우리 땅 지지해줬지, 러시아 땅 어디든 무비자로 자유 여행할 수 있게 해줬지, 고려인들 위치도 많이 올려줬지, 도대체 러시아가 우리에게 뭘 더 잘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늘 고마움을 편중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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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980년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에 대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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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서도 유태인 이주 플렌이 존재, 일본 제국이 추진한 유태인 이주 계획, 복어 계획(河豚計画)
- 1933년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 및 독일의 점령 지역에서는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른 국가들로 이주하려 했다. 한편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공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지역에 대한 개척을 위해 대규모의 인구 및 자본 유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때 유럽의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의 학정을 피해 대거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 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만주 지역에 유태인들을 이주시킴으로서 만주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자 했다. 유태계 외국인, 특히 유태계 미국인들의 자본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복어 계획(河豚計画)이다. 이에 대한 특이한 점으로 이 계획의 입안자들은 시온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의 내용을 믿으면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유태인 조직의 정보망 및 자금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이들은 유태인들에게 만주국이라는 도피처를 제공함으로써 유태계 인사들로부터 확실한 호의와 물질적인 지원을 약속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나 의외로 유태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었다. 우선 일본은 동양 국가의 특성상 유태인과 역사적으로 접촉한 기간이 아주 짧았으며 일본 내에도 유태인 사회가 전무했기 때문에 일본 내 반유태주의가 횡행할 리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제국이 이미 러일전쟁 당시 유태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국채를 발행했지만 동양 국가인 일본을 얕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당연히 일본 제국이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어느 누구도 일본 국채를 매입하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전비 고갈로 패배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일본 제국을 구원한 것이 거물 유태인 금융가인 제이콥 쉬프(Jacob Schiff, 1847~1920)였다. 쉬프는 포그롬으로 유태인을 탄압하여 유태인들의 적이었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붕괴시키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하고 있던 일본의 국채를 매입했다. 이 때 쉬프는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서 일어난 일본 제국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하며 일본 제국을 찬양했다. 쉬프가 일본 국채를 매입하고 다른 유태인 금융가들에게도 일본 국채를 매입하도록 주선하여 일본의 전비를 조달해주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조선에서의 경쟁 세력인 러시아를 물리치며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이로써 일본 제국은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거듭났으며 서구 국가들에게도 일본은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 제국이 열강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른바 유태인 금융자본의 도움을 크게 받은 것이다. 제이콥 쉬프의 도움을 받았던 일본 제국이 유태인 자본의 힘을 높게 평가하고 유태인들의 힘을 빌리려 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복어계획을 입안한 사람은 일본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犬塚惟重, 1890~ 1965) 이 외에도 야스에 노리히로(安江仙弘, 1888~ 1950) 육군 대좌, 히구치 기이치로(樋口季一郎, 1888~1970) 육군 대좌, 닛산(日産) 그룹의 전신인 닛산 콘체른의 총수인 아이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 1880~1967) 등이다. 이들은 당시 일본 국내에서 유태인에 대한 전문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이 외에도 전부터 만주 및 중국 침략을 주장하던 관동군 내 일부 인사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계획의 명칭인 복어는 생선 복어에서 따온 것으로, 계획 입안자 중 한 명인 이누즈카 제독의 연설에서 이 계획이 상당히 위험하긴 하지만 성공할 경우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며 이를 맛은 좋지만 비싸고 맹독을 지닌 복어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복어 계획을 세운 입안자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유태인 인사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유태인 자치구 건설을 위해 유태인 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하지만 복어 계획은 중대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다. 1936년 독일과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을 맺는 등 독일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점점 돈독해지고 있었고, 유태인에 대한 옹호 정책은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요인 때문에 이를 심각히 고심하게 된 것이다. 1938년 일본 정부는 논의를 벌인 끝에 유태인 대책 요강이라는 합의문을 만들었는데, 이는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유태인에 대한 배척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전제 하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합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현재 일본 및 만주 지역에 있는 유태인은 타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 ② 일본 및 만주에 입국하는 유태인에 대해서는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출입국 규칙에 따라 조치할 것. ③ 적극적인 유태인들의 이민은 피하면서 기술이나 자본 유치 등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엔 허용할 것. 이와 같은 3개조의 합의문이 발표된 이후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유태인들을 일본 및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키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또 일본 주 리투아니아 영사인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1900~1986) 등 나치에 맞서 유태인들을 구한 일본인들도 소수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0년 추축국 동맹에 일본이 가입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유럽의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후 1942년 일본은 유태인들에 대한 이주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지하고, 유태인 대책 요강을 무효화하게 된다. 독일 측에서는 상하이 등 일본 점령지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을 처리 할 것을 일본 측에 건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게토에 유태인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는 선에서 끝냈다. 일본의 유태인 학살은 없었지만 게토의 거주 및 경제적 환경은 매우 열악해서 병으로 사망하거나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유태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복어 계획은 유태인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발상으로만 입안된 것은 아니다. 나치에게 유태인들이 박해받는 처지를 이용해 유태인들을 괴뢰국인 만주국의 경영에 이용하여 일본의 국익을 도모하려는 의도에 있었다. 물론 입안자들은 시온 의정서를 믿었기 때문에 유태인들의 경제적인 능력을 과대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 이주하기를 원하는 유태인들은 그들 특유의 금융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유태인들의 이주로 인한 경제적 혜택을 원하던 일본 국내의 지지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계획은 실패로 종결되었다. 물론 이 계획은 당시 나치 독일의 심각한 박해를 받던 유태인들에게 비록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몇 안 되는 구원책 중에 하나였다. 실제로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등의 노력으로 인해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중국 및 미국 등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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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서도 유태인 이주 플렌이 존재, 일본 제국이 추진한 유태인 이주 계획, 복어 계획(河豚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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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눈물
- “예수믿고 구원받으라!” 지하철 서울역에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서울역사를 올라갈 때마다 듣는 소리이다. 소음에 가깝다. 서울역사 앞에 확성기를 켜놓고 예수 믿으라고 떠드는 종교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 광경이 신기해서 그 근처를 둘러보았다. 3곳이나 천막을 펼쳐놓고, 천막 안에는 테이블도 갖춰 놓고, 천막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춤추는 신도들도 있었다. 다행히 호객행위는 하지 않았다. 저들은 왜 저럴까? 내 눈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들의 행위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미소가 넘치기조차 한다. 그들 눈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내가 아픈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천막에 써놓은 글씨로 봐서는 예수 전도회, 천리교라는 단체로 보인다. 서울역사를 방문할 때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하루는 지인과 함께 서울역사에서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지인이 말한다.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거야? 매번 저러고 있어요!”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렇게 열심히 예수를 찾으니 예수가 사는 천국에 가면 저 사람들은 분명히 큰 상을 받을 것 같아요.” 확성기를 통해 전달되는 말의 내용은 단순하다. “예수는 다시 이 땅에 오신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받으라.” “천국의 백성이 되어라. 예수믿고, 구원받으라. 할렐루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선교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왠지 모르게 사이비종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교의 자유는 인정하겠지만, 확성기의 소음은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고 관할 경찰서에 문의해 봤지만, 법적 권한이 없기에 자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다.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반성이 없을 때 사이비가 탄생할 것이다. 자기 편향에 매몰되어 비판적으로 자기반성을 할 수 없기에 맹신이나 맹종의 싹이 움튼다. 사이비종교는 그런 토양에서 자란다. 저들이 믿는 하느님의 자리에 히틀러가 자리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저들은 현대판 나찌즘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에는 아직도 나찌즘들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히틀러가 나찌즘은 만든 것이 아니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나약한 개인들이 나찌즘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여러분의 모든 것은 나의 덕택이고, 나의 모든 것은 여러분의 덕택입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대중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대중과 히틀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 상호의존적인 관계였다. 전체주의는 그런 곳에서 탄생한다. 아렌트는 유럽 계급체계의 붕괴에서 나타난 대중적 인간의 고독한 심리적 상황에서 전체주의의 뿌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100여 년 전 유럽에서 전체주의가 탄생한 것은 국민을 국가에 묶어두었던 보이지 않는 끈들이 모두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들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뿌리뽑힌 대중들이었다. 잉여존재였다. 그들은 그들의 공허함을 채워 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전체주의 운동은 그러한 그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았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사이비종교가 판을 치는 것도 그러한 운동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유럽에서의 계급 붕괴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오늘날 현대는 계급의 붕괴가 아니라 정체성 혼란의 위기를 맞이하는 것 같다. 끝도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사회이다 보니 경쟁에서 낙오된 자들이 갈 곳이 없어진다. 그들이 설 수 있는 땅이 사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찾아오는 개인의 고독이나, 외로움, 그리고 불안이라는 감정이 맹신과 맹종을 낳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맹신이나 맹종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현상이다. 사이비와 정통의 기준이 참된 자기반성으로 본다면, 태극기부대는 왠지 모르게 사이비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들의 집회에 성조기도 보이고, 이스라엘 국기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인보다 미국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특히 정치적인 분야에서 사이비들이 많다. 민주당의 친문, 비문이나 친명, 비명이라는 구분도 일반 시민이 바라보기에 우습게 보인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건국전쟁>을 언급하면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에 의해 객관적인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일부 역사가들도 있다. 그들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나 차이점이 무엇일까? 전체주의는 개인을 조직적으로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자기들끼리의 강한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강철의 끈으로 서로를 강하게 결속시킨다. 그곳에서는 생각의 자유를 누릴 공간이 없어진다. 그 속에서는 자유가 박탈당한다. 그들만 모를 뿐이다.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야 하지만, 그들은 현실에서 뿌리뽑힌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기대어 설 땅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유하는 인간들이다. 전체주의는 과거의 역사적인 한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조건만 형성된다면 전체주의는 다시 탄생할 수 있다. 서울역 광장에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선교하는 집단이 바로 전체주의를 탄생시킬 수 있는 조건일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온다면 그들을 위하여 서울역 어느 한 곳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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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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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발다이 클럽 연설에서 나타난 한국의 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관한 경고의 의미
- 푸틴 대통령이 지난 발다이 클럽의 연설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그 기본 입장에 살상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폴란드와 방산 계약을 체결했고 무기는 폴란드로 인도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 결정했다는 이야긴 전혀 모르는 내용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정치적 입장에서 압박하기 위해 이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이런 무기 지원설이 나온 이유는 체코 일간지 '믈라다 프론타 드네스'(Mladá fronta DNES)의 온라인 매체에서 보도 때문이다. 믈라다 프론타 드네스(Mladá fronta DNES)는 영국의 가디언, 더 썬이나 미국의 타블로이드 종류급의 신문이 아니다. 믈라다 프론타 드네스(Mladá fronta DNES)는 역사도 77년을 이어오고 있는 체코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져오고 있는 신문 중 하나다. 이 신문은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프라하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사회주의 청년동맹(Socialistického svazu mládeže)이라는 단체가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대통령의 후원을 받아 Mladá fronta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 선전용 언론으로 일간지가 만들어졌다. 그들의 목적은 체코 청년들에게 체코 공산주의에 협력을 촉구하는 기관지에 지나지 않았지만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가 환란에 닥치고 언론사들이 부도나기 시작하면서 Mladá fronta 또한 프랑스 언론회사인 Socpresse에 매각되었다. 이후 독일의 RBDV 라는 회사에 재매각되었고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라는 기업가가 2013년에 다시 인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신문사는 프라하의 중앙 뉴스룸과 14개의 지역 뉴스룸으로 구성되어 있고 편집장은 야로슬라브 프레슬(Jaroslav Plesl)로 한 때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언론인으로 그가 믈라다 프론타 드네스(Mladá fronta DNES)를 담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신문사가 체코 각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결코 가벼이 볼 수 있는 신문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매체에서 지난 9월 29일 기사로 "Tajný obchod. Korejské zbraně za 75 miliard zamíří na Ukrajinu přes Česko (비밀 거래. 750억 상당 한국 무기, 체코 경유 우크라이나로 간다)라고 되어 있다. 이 750억이 체코 화폐인 코루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매체의 말로는 "동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으며 공격받은 국가는 반격을 위한 새로운 무기 공급이 필요하다. 체코는 현재 완성되고 있는 것 중, 큰 사업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인데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려는 계획이 합의되었다."라고 발표하면서 "한국 무기가 체코를 경유해서 우크라이나로 갈 것이며 미국이 이 비용을 지급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속적으로 방공무기를 서방에 요구해왔다. 이들은 주로 헬리콥터와 같은 저공비행에 방어할 수 있는 방어망 구축을 원했다. 게다가 계속 이란제 드론으로 폭격받고 있으니 이를 방어할 수 있는 대공 시스템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 방어시스템을 구축하기로는 우리의 현궁과 신궁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에 대한 도입을 원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본 매체도 미국이 지대공 미사일 등 30억 달러 상당의 한국산 무기를 구매해 체코를 통해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10월 1일에 보도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러시아가 문제 삼는 것은 그동안 한국과 잘 지내왔는데 왜 이런 문제에 한국이 관여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크라이나가 어찌 되건 한국 국익과는 별 상관이 없다. 우크라이나에 들어가 있는 한국 기업보다 러시아에 들어가 있는 한국 기업이 훨씬 많고 교민들 숫자도 비교 불가의 수준이다.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한국은 사면초가에 몰릴 수밖에 없다. 가장 큰 건 에너지 문제다. 중국과 대만의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중동에서부터 들어오는 석유와 가스가 일시적으로 차단될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유럽보다 더한 에너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국과의 관계는 유지하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러시아와의 관계도 언제든 회복할 가능성도 남겨놔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이 매우 중요한 현실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주거하는 교민이나 기업들, 유학생들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으며 이미 비우호국가로 찍힌 이상 많은 걱정과 우려 속에 지내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만약 체코를 통해 우회적으로 모종의 밀거래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에 있는 모든 한국인, 기업들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체코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 같은 보도가 나오고 있는 문제라면 겉으로는 살상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지 않는다는 기본 입장을 변함없이 유지할 것이라 했던 것은 거짓말이 된다. 이어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비무기체계와 인도적 지원만을 시행해 왔다고 하지만 뒤에서 모종의 거래로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지원하려 한다는 얘기이니 이것은 최악의 상황이나 진배없다. 러시아의 정보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따위 모종의 밀거래 정도는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 체코군의 무장을 위해 무기 수출이라면 정당한 국익의 문제로 특정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모종의 밀거래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우회적으로 무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면 당장 중단해야 할 것이다. 수출한 무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는 우리의 관심 밖이다. 하지만 국제 정세 속 아시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만이 러시아를 제재하고 반러주의를 표방하게 되며 고립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재 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 편들고 있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 대만, 싱카포르 정도이다. 대부분은 중립, 아니면 중동과 같이 러시아에 넘어간 상황이라 좀 더 포괄적이고 냉철하게 국익을 위해 따져야 하는 시간이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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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발다이 클럽 연설에서 나타난 한국의 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관한 경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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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 짓고 소련의 참전을 확정 지은 포츠담 회담
- 5개월 전이었던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부터 서서히 시작을 알렸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부 유럽 곳곳에 소련은 자신의 위성국가들을 세우게 되면서 소련과 서방은 서로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후처리 문제로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체칠리엔호프 궁전(Schloss Cecilienhof)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이 5월 9일 나치 독일의 항복 이후 유럽의 재건과 태평양 전선 종결을 위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회담에는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영국 대표로 처음에 참석한 인물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당시 영국은 1940년 5월 이래 독일과의 전시 거국 내각으로서 보수와 노동 연립 정권이 유지 중이었지만 독일의 항복 이후 자연스럽게 연립 내각이 해체되고 7월 5일에 총선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영국의 개표 결과는 처칠이 포츠담으로 출발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유럽 대륙에 주둔 중이거나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장병들의 투표권 문제를 위해 개표가 매우 지연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처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보수당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 주역이었기 때문에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해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다. 그러나 포츠담에서 그만 선거에서 노동당에게 패배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정상들과 사진 한 장만 찍고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승리한 클레멘트 애틀리가 급히 포츠담으로 날아가 처칠과 바톤 터치를 한 셈이 되었다. 중국 대표 장개석도 참가하기로 되어 있으나 당시 중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독일 영토인 포츠담까지 가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하여 전쟁 이후에 서명한다며 참가국들의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이 때문에 포츠담 회담은 미국, 영국, 소련이 참가했고 회담 중인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미국과 영국, 중국의 서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포츠담 선언 때 소련이 제외된 이유는 당시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불참한 것이다. 소련은 이때까지만 해도 형식적으로 일본과의 중립 조약 및 불가침 조약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소련 내부에서는 대일본 전 준비가 빠르게 진행 중이었지만 소련의 기습 참전을 일본에 알리면 안 되는 군 기밀 사항으로 포츠담 선언에 불참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 때문에 보통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중에는 포츠담 회담을 미국, 영국, 중국과 했다는 서술한 경우가 있다. 정확히는 회담장에 참석한 것은 미국, 영국, 소련이었고 일본에 대한 대외 압박을 감행했던 선언에 참석한 것은 미국, 영국, 중국이었기에 이를 확실히 분리해 싣는 것이 정확하다. 우선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강제 합병된 오스트리아에 대한 처리에 대해서는 독일, 오스트리아가 4개의 구역으로 나뉘며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이 각각 한 구역씩을 통치하기로 결정된다. 다만 베를린과 비엔나의 경우, 한 나라의 수도라는 위상을 고려하여 따로 4등 분해 통치하기로 했다.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의 명확한 영역이 정해졌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방 영토를 내주게 되었으며 이 영토들은 자연스럽게 폴란드와 소련에 귀속되었다.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독일이 전후 상실한 영토는 1937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 이전인 독일 영토의 약 25%가량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양차 대전의 결과 1914년 이전 독일 제국 영역의 1/3을 상실한 셈이 되었다. 전쟁 당시 피난 갔던 피난민들을 포함하여 오데르-나이세 선 외곽에 거주하고 있던 800만 명의 독일인은 이 때문에 순식간에 고향을 잃었다. 그 밖에도 중동 유럽 일대에 거주하던 700만 명의 독일인이 추가로 소련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다른 나라에서 강탈한 영토, 특히 폴란드 서부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의 영토 원상 복귀가 이루어졌다. 이어 전쟁 배상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독일은 대략 230억 달러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연합군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상금들은 화폐류보다 주로 산업시설과 기계류들을 압류하는 차원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스탈린은 소련의 점령 지역이 작센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덜 이루어진 동부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에 대한 불만을 제시했다. 그러한 이유로 스탈린은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모조리 압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처칠은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지나치게 가혹하게 패전국을 대했던 프랑스의 예를 들어 매우 가혹하게 수탈할 경우, 3차 대전을 초래할 수 있다며 “말에 채찍질을 하려면 적어도 말이 먹을 건초는 남겨둬야 한다”라고 스탈린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서방 연합국은 자신들의 몫으로 가져갈 산업시설 중 10%를 소련에 넘겨주고 합의를 보게 된다. 즉, 처칠 때문에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처럼 막대하게 뜯겨 갈 수 있는 것을 비교적 온화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막아준 셈이 되었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의 전쟁 재도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에서 나치 세력을 일소하고 전 군대의 무장 해제와 동독일에서의 민주화, 비중앙집권화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에는 10만 명의 군 보유를 허용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완전 해제를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치 전범 처리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리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탱크, 항공기 등을 생산해낼 수 있는 중공업 산업 시설들 역시 모두 해체되어 연합국들이 전리품으로 나눠 가졌다. 연합국은 독일의 경제력을 유럽 평균치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아예 독일을 경공업, 농업 기반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으로부터의 방패막이가 필요한 서방 세력에 의해 전면 백지화되었다. 사실상 공산주의,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전선이 서독이었던데다 서독의 중공업이 받쳐줘야 소련 및 바르샤바 측과 전략적 완충 지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물론 독일 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추축국이었던 이들에 대한 공업 대국화를 철저하게 막으려 했던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게 된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는 모조리 백지화되었다. 북한, 중공과 싸우기 위해서는 참전 유엔군에 대한 보급과 파쇄된 전쟁 무기에 대한 수리가 필요했기에 산업시설들이 마구 들어서게 된다. 다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점령된 상황이라 소련의 영향력은 철저히 배제된 상태로 전락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결국 미국과 경쟁하여 때로는 대립각을 세우며 독자적인 열강으로 남으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무역망에 편입된 서독과 일본에 경제적으로 추월당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유럽에서의 전쟁은 5월 9일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이 분명한 상황이었음에도 1억 총 옥쇄와 같은 구호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 포츠담 회담에서는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물론 일본은 이와 같은 포츠담 선언을 단번에 거절했다. 카이로 회담 이후로 조건부 항복 협상이라도 시도했다면 나을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일본 군부는 이미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와 같은 저항의 결과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과 전무후무한 핵 공격의 재앙이었다. 당시 트루먼은 회담 도중 스탈린에게 강력한 신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다며 소련에 대한 기선 제압하는 형식으로 알려 주었는데, 이미 각종 스파이를 통해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무기를 일본에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바란다며 반격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다. 한편 당시 회담 때 일본 내부의 안정을 위해 연합국 내부에서도 천황제는 유지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으나 이를 일본에 알리진 않았다고 한다. 천황제를 내세워 더 저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범인 히로히토에 대한 처벌이 포츠담에서 논의되었지만, 히로히토를 전범으로서 처벌하는 문제와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이는 천황 개인과 제도로서의 천황제를 구분해야 한다고 일본 문화에 잘 알고 있던 미국, 영국의 외교관들이 주장했다. 사실 일본이 유지하고 싶었던 것은 히로히토 개인이 아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천황제의 전통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에 천황제를 유지할 것을 허용한다는 것을 일본에 내비쳤다면 일본이 7월에 항복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패전이 명확한 상황에서 일본이 끝까지 강화 교섭에 매달렸던 이유도 다름 아닌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있어서는 천황제 유지가 최우선 조건이었고 조선, 대만 등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는 문제는 차선이었다. 그리고 만주국이나 동남아시아, 중국의 점령지들을 내주는 문제는 마지막 순위였다. 결국 일본에 대한 처결 문제는 8월 14일, 히로히토 일왕의 포츠담 선언 수용과 무조건 항복 이후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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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 짓고 소련의 참전을 확정 지은 포츠담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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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러시아와 대만 (중화민국)이 수교 맺은지 110년째 되는 해,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사를 볼 때 이 두 나라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간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청나라 때는 러시아와 청나라는 적국이면서도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아 간 나라였고 청나라가 무너진 후, 중화민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13년에 최초로 수교를 맺었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제국이 붕괴됐다. 그리고 러시아 임시정부에 이어 소비에트 볼셰비키 연방이 세워지자 수장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3 세계의 민족주의를 지원함으로써 고립을 벗어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제3 세계 민족주의 대한 지원은 쑨원이 내세운 국공합작 노선과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쑨원은 공산당에 대해서도 매우 유화적인 인물로 유명했으며 공산당을 포용하려 했다. 이는 쑨원이 공산당 자체에 대해 잘 몰랐던 부분도 있지만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내세워 국공 통합을 실현하려 했고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를 함께 발현시킬 수 있는 파트너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중공 전국 쑨원 기념관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소련은 이러한 쑨원의 정책에 대대적인 환영 의사를 밝히고 군사고문 등을 내전 상황에 놓여 있던 중국에 파견했다. 이 관계는 장개석 통치 때까지 지속된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을 통한 당대당을 지원하는 한편 국민당에는 군사고문 등을 파견했다. 이와 같은 양다리 외교 작업을 한 이유는 당시 분열 중인 중국보다는 일본의 세력이 더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적백 내전의 혼란기 당시 일본이 바이칼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넘보려 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을 점령하고 연해주를 휩쓸었던 전력이 있었다. 겨우 러시아 전토를 적화에 성공한 소련은 이같이 동아시아에서 위세를 부리는 일본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당의 장개석이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을 깨고 국민당 내 공산당원들을 숙청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과의 관계는 파쇄하지 않았다. 이러한 양각 관계에 있어 중심이 되어 축을 유지한 인물이 바로 미하일 마로코비치 보르딘(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1884~1951)이었다. 미하일 보르딘은 1884년 7월 9일 오늘날의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러시아 서부 비텝스크 주의 야노비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유대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태인으로 3세에 아버지를 따라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내다 러시아의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공산당 사상에 감명받아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며 혁명가 활동을 시작했게 된다. 물론 보르딘은 벨라루스 출신의 라트비아 유대인 출신이라는 같은 볼셰비키 내에서 차별받긴 했다. 각종 지하 공작에 참여했고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 레닌을 만나 발트 지역에서 공산 활동에 대해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이후, 러시아 제국 내의 경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되었지만 이내 석방된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여 10년 이상 시카고와 보스턴에서 생활하여 미국 내 좌익활동을 이끌게 된다. 이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미국 사회당에 가입했고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 혁명의 완수 이후 1918년 7월 모스크바에 귀국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체류 경험으로 인해 영어에 능통한 보르딘은 레닌의 저작물을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전파했고 중국으로 파견 후에는 국민당에 협력하면서 쑨원 등과 영어로 소통하기도 했다. 보르딘은 코민테른이 창설되자 그는 1차 대표 회의에 참여했으며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미주 지역에 파견되어 정치와 재무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도 브란트바인이란 가명을 쓰고 멕시코 공산당을 창설하고 이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인도 공산당원인 마헨드라나트 로이와 알게 되면서 인도 공산당의 창설에도 기여했다. 보르딘은 로이에게 소련에 가서 2차 코민테른 대표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추천했고, 1921년에는 오스만투르크로 가서 터키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빨치산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1922년에는 조지 브라운이란 가명을 쓰며 영국에서 영국 공산당을 조직하는 혁명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2년 8월에 체포되어 글래스고에서 복역했으면 6개월 후 석방되어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보르딘은 미국, 멕시코, 스페인, 독일, 영국, 터키 등에서 혁명 활동을 후원하여 코민테른의 해외 요원으로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최정예 해외 요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침 이때 중화민국의 쑨원은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 등, 제1, 2차 호법 운동 등의 쿠데타 이후 해외 화교의 후원 이외에도 각종 재정 수입과 자체 군사력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유일하게 자신들을 지원할 만한 국가와 세력을 찾게 되었고 열강 중 하나인 소련은 그와 맞는 파트너라 판단하여 소련과의 제휴에 집중하게 되었다. 1922년 12월 20일 쑨원은 중국 주재 소련 전권대표인 아돌프 요페(Адольф Иоффе, 1883~1927)에게 무기, 화기, 기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소련 정부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하게 된다. 그리고 12월 말에 10만 명의 군대로 사천과 감숙에서 외몽골로 진입해 베이징을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게 되면서 무기, 장비, 고문단의 파견을 요청하게 된다. 1923년 2월에도 쑨원은 소련 정부의 원조에 대해 요청했다. 소련 역시 동방 전략의 일환으로서 쑨원을 지원 결정하면서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중화민국을 어느 정도 지원하면 막강한 일본을 상대로 소련 인민이 피를 흘릴 이유도 없게 된다. 여러 문제를 숙고한 끝에 1923년 3월 소련 정부는 쑨원에게 가능한 모든 원조 제공을 결정해 200만 루블의 현금과 일본제 소총 8천 정, 기관총 15정, 대포 4문, 장갑차 2대, 훈련원 1명을 중국의 통일과 민족 독립의 쟁취를 명목으로 파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쑨원은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8월 16일 장개석 등을 소련에 파견하여 3개월간 소련을 방문하게 했고 1923년 여름부터는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파견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최정예 요원이 필요한 스탈린에게 1923년 7월 31일 레프 카라한(Лев Карахан, 1889~1937)에게서 보로딘을 소개받게 된다. 이에 정치국원들과의 회의를 통해 8월 2일에 이를 비준하여 보로딘을 쑨원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하여 파견하게 된다. 이 외에도 보로딘은 베이징 주재 소련 전권대표 카라한과 협조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모스크바와 서신 왕래를 하며 매월 1회 정기적으로 업무 보고를 한다는 것 등을 결정받고 중국에 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와 코민테른의 대외 정책을 숙지하면서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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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러시아와 대만 (중화민국)이 수교 맺은지 110년째 되는 해,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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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의 퇴진과 훈 마넷 정권에 대한 전망
- 2023년 7월 26일,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가 만 39년의 집권을 끝내고 퇴진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훈 센은 동남아시아 현대사에 있어 역사적으로 한 획을 그었던 거물급 위인이다. 그는 크메르루주와 폴 포트로 인해 "킬링필드"로 초토화되었던 캄보디아를 현재의 위치까지 일으켜 세운 공로가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훈 센을 평가하자면 명과 암이 확실한 인물이다. 훈 센은 베트남과 가까운 메콩강 일대의 캄퐁참 지역 출신이다. 그 또한 크메르루주 출신으로 중공 베이징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철저히 사상 교육받았다. 그러나 크메르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을 저지르자 그는 점차 크메르루주를 멀리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지대 자국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크메르루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1977년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이후 베트남에서 게릴라 훈련을 하며 반 크메르루주 군대를 양성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와 함께했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과 함께 크메르루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고 그는 베트남의 후원을 받아 캄보디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1985년 만 32세의 나이로 캄보디아의 총리가 되어 현재까지 캄보디아를 이끌어 왔다. 그리고 1997년 7월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노로돔 시아누크 왕의 아들이자 원내 1당 주석인 노로돔 라나리드 제1 수상을 축출하고 절대 권력자가 된다. 캄보디아를 철권 통치하게 된 훈 센의 공적은 현재 캄보디아를 있게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킬링필드"로 인해 지식인들이 모두 학살당하고 국가의 인재 풀이 말라 국가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국가가 캄보디아였다. 당시 외신에서는 이러다가 캄보디아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훈 센은 베트남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킬링필드"로 인해 초토화된 캄보디아를 정상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힘을 쏟았다. "킬링필드"의 여파는 엄청났다. 우선 인재들이 없었기 때문에 캄보디아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키워내는데 엄청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여파는 킬링필드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훈 센은 캄보디아라는 국가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 각종 정책, 외교, 동남아시아에서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했다. 캄보디아를 현재 그나마 국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훈센 총리가 39년을 집권하면서 해 놓은 그의 최대 공로라 할 수 있다. 훈 센 총리가 아니었으면, 그의 결단에 따라 "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캄보디아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장기 집권에 따른 부작용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결국 농민들은 토지들을 국가 소유로 빼앗겨야 했다.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왔지만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의류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8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경찰과 공수여단을 투입해 진압하면서 최소 5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째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했다. 훈 센 수상의 큰아들 훈 마넷 중장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야당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은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결과를 낳았다. 2013년 7월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 조작 의혹이 생기면서 부정선거의 의혹을 받기도 했다. 2015년에는 자기 아들 세 명을 당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는데 훈 센 수상의 이 같은 조치에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려 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당시에도 차기 권력자는 장남인 훈 마넷이 세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훈 센은 정책 홍보와 이미지 관리에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반정부 목소리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7개월 사이에 캄보디아 당국이 온라인상의 글을 문제 삼아 최소 7명을 체포했으며 적어도 23명이 반정부적 글 내용으로 인해 공개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2015년 8월에는 한 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과거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선 합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훈 센 수상의 지시로 체포했다. 또 제1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CNRP)의 삼랭시 주석에게 입국 금지 조치했다. 이러한 조치로 2016년 11월 27일에는 유엔 인권기구와 갈등을 빚으면서 캄보디아 정부는 내정불간섭을 약속하지 않으면 유엔 인권사무소를 폐쇄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훈 센의 외교 성향은 친중·반미 성향을 띄고 있다. 옆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더 유용한 우호국인 베트남과도 관계가 깊다. 훈 센의 친중 경향은 장남 훈 마넷에게 세습하기 위해서라는 측면이 지배적이었지만 훈 센 일가의 강건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국 정부의 협력은 필수적인 요소다. 그 결과 캄보디아는 거의 경제적인 부분으로 볼 때 중국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인 형태가 되어 가고 있다. 문제는 이번에 권력을 승계받은 훈 마넷 역시 친중 행보로 진행하고 있다. 훈 마넷은 최근 베이징에 방문하면서 중국의 당 인사들과 여러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중국 자본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렸다. 캄보디아는 2005년에 석유와 천연 가스매장이 확인되었으며, 상업적인 채굴은 2011년부터 개시가 되었는데 여기에 입찰하는 기업은 모두 중국 기업이다. 그리고 2020년부터는 산유국이 될 전망이지만 상당수의 이익이 중국으로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훈 마넷 시대의 캄보디아는 훈 센 총리 시절과 비교하여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까? 문제는 훈 마넷은 군 경험은 풍부하나 정치 경험이 일천 하여 경제적인 부분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도 없다. 훈 센은 훈 마넷을 차기 권력자로 점찍고 2015년부터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후계자수업을 했다. 하지만 아직은 뭔가 보여준 것이 없다. 다만 훈 센보다 더 친중에 가까운 인사이기에 아마도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이전보다 더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훈 마넷 정권의 미래는 현상 유지 아니면 훈 센 때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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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의 퇴진과 훈 마넷 정권에 대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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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들의 잔혹사 "우서 학살 사건"
- 때는 2011년, 베니스 영화제나 토론토 영화제 등 메이저 영화제 등에서 한 영화가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영화 이름은 "시디크 발레(Seediq Bale)", 이 영화는 2011년 오우삼이 제작한 홍콩 자본 합작으로 장장 러닝타임 276분의 시간동안 우서 사건의 비극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제48회 타이완 금마장 영화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워리어스 레인보우"라는 이름으로 1, 2편으로 나누어 국내에도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인 우서 사건은 어떤 비극을 말하는 것일까? 대만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제 지배의 치하에서 유화적인 정책의 결과물이다. 역사적으로 대만인들은 지속적으로 식민통치를 경험해 왔다. 여기애서 언급되는 대만인들은 오늘했었던 강의에서도 분명히 밝혀두었지만 대만 원주민들을 말하는 것이고 현재 대만을 실효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중국 한족이다. 이들 또한 본성인과 외성인으로 구분되고 있고 외성인들의 대부분은 1949년 국공내전 종결 이후, 이주해 온 한족들이고 본성인들은 훨씬 이전부터 이주를 진행했던 한족들이 많다. 이러한 본성인들 중에 복건성 민월인과 객가인, 그리고 광동인과 리족, 좡족과 같은 대륙 소수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대만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혈통과 언어가 한족과 다른, 동남아시아 계열인 오스트로네시아계 인종들이다. 그들 대만 원주민들인 대만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을 지배했던 네덜란드나 청나라, 일본, 중국 국민당 모두 다 외래 정부일 뿐이다. 이러한 대만인들이 유일하게 독립국가로 건재했던 왕국은 17~18세기에 존재한 다두 왕국이다. 이 다두 왕국은 비록 청나라에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오히려 수만 명의 대만인을 희생시킨 국민당의 철권통치는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 시절이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식민지 시절 일본의 유화 정책의 영향이었다. 일본에 한반도는 식량 및 지하자원 수탈의 대상이자 대륙 침략의 발판이었지만 대만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받은 열도의 연장선상으로 이어지는 섬에 북해도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경략을 통해 확장한 영토로 인식했다. 그래서 한반도와는 달리 일본은 대만에 강압적인 통치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일본의 이러한 대만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의 실상은 식민지배의 공고화와 더불어 또 다른 차별의 연속이었다. 일본인들은 고산 지대에 사는 대만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하며 짐승만도 못하게 여겼다. 원주민들 삶의 터전인 숲의 나무와 천연자원들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대만 원주민이 사는 고산 지역의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베어내 본토로 실어 날랐으며 이러한 일제의 정책에서 대만 원주민들이 겪은 일제강점시기는 유화책이라는 일본 정부의 기조 정책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자신들의 산과 계곡, 사냥터를 온전히 지키고 그곳에 들어온 침입자의 목을 베어야만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 조상들의 영혼이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대만 고산족들은 그러한 전설로 인해 "무지개 다리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당시 14개의 종족으로 분류되는 대만 내 원주민들 중 가장 용맹한 부족으로 알려진 시디크 족은 일본인들의 침입에 누구보다 분개했다. 시디크 족 마을 중 마흐푸 마을의 족장이자 침입자의 목을 가장 많이 베어 대만의 최고의 전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모우나 루도는 부족과 함께 산 위에서 숲과 구름과 안개, 비를 이용하여 숲에 몸을 숨기는 게릴라 전을 감행해 아래 계곡을 따라 침입하는 일본군을 처단했다. 그러나 적의 머리를 베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려는 시디크 족의 용맹성은 일본이 동원한 근현대적 무기로 인해 패배가 이어지고 자신들이 살고 있던 터전들도 일본군에 내줘야 했다. 모우나 루도 족장은 본래부터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그의 아끼는 여동생이 일본 경찰관의 부인이 되었으나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성적노리개로 유린당하게 되면서 자식들과 함께 버려졌던 일이 생기자 모우다 루도는 일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 10월 9일 모우다 루도는 루산 지역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열고 있었는데 마침 이 일대를 순찰 돌고 있었던 일본 경관 요시무라가 모나 루다오의 아들 다호 모나의 결혼식에 들려 참석하게 된다. 다호 모나는 포도주를 잔에 따라 요시무라에게 받아 마시기를 권유했으나 요시무라는 짐승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으며 이는 명백한 인종차별성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호 모나가 계속 잔을 받아 마시기를 권하자 요시무라는 곤봉으로 그를 후려쳤고, 이에 결혼식장에서 큰 싸움이 발생해 요시무라는 부상당하게 된다. 그 다음 날 모우다 루도는 일본 측에 사과하기 위해 요시무라에게 포도주를 다시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거절당하게 된다. 10월 27일 우서소학교에는 때마침 육상 경기가 있어 일본인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는데, 모우다 루도는 자신의 아들인 다호 모나가 심각한 폭행을 당했던 당시 일에 대한 보복을 위해 3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학교를 습격해서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중국 본성인들을 살해했다. 모우나 루도는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성냥의 화약 부분을 벗겨 수십 년간 모았다. 시디크 족에 대한 멸시와 폭력, 노동 착취, 차별을 일삼던 일본에 언젠가는 성냥을 모아 화약을 만들었다. 한편 대만총독부는 2,000명의 병력을 우서로 보내고 심지어 독가스가 주입된 시디크 족이 거주하는 산간 지대에 산탄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측에 항복한 일부 시디크 족에게 반란을 일으킨 나머지 시디크 족에 대해 머리를 베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행위를 임시적으로 허용하기도 하였다. 시디크 족도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서 일본군에 저항했다. 일본이 동원한 군대와 기관총 대포 등 중화기에 좌절하여 시디크 족의 1,200명의 전사 중 644명이 살해되었다. 3주 동안에 이어진 봉기를 벌인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죽기 싫었던 원주민들은 가족 모두가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숲 속 큰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항전을 계획할 때 이미 부족 대부분이 죽을 것이라 예상했던 모우나 루도도 자결했다. 일본군과 싸웠던 시디크 족은 우서 사건이 끝난 이후 1,600여 명 중 겨우 298명만이 살아 남았다. 1931년 들어 우서 봉기는 진압되고 남은 시디크 족 500여명도 항복했으나 4월 25일 일본 측에 넘어간 원주민들에 의해 시디크 족 생존자들이 습격 당해 216명이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종차별적 발언에 의해 벌어진 일본군의 잔인한 우서 학살 사건은 이후, 국민당 정권이 대만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통치보다 더 무자비한 학살로도 이어지며 거의 잊혀진 사건이 되었다. 이런 국민당의 강압적 통치는 대만 본성인(本省人)들은 물론이고 원주민들까지 반대급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그리워했다. 적어도 일본의 지배자들은 유화책을 쓰며 대만인들을 달래는 정책을 행했기 때문에 유화책 없이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국민당보다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는 말이 나오게 되면서 정치, 사회적인 차별 등 일본 식민정치의 폐해들이 잊혀질 정도였다. 2.28 학살사건 이후, 국민당 정권은 나라의 안정을 이유로 본성인과 원주민 수만 명을 학살했다. 결국 국민당 정권으로 잊혀진 우서 사건이 2011년 "시디크 발레(Seediq Bale)" 라는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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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들의 잔혹사 "우서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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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현재, 보 반 트엉(Vo Van Thuong) 정치국원 겸 서기국 상임비서가 베트남의 새 국가주석 선출 관련
- 2023년 지난 3월 2일에 벌어진 임시국회에서 국가 총 서기장 응우옌 푸쫑은 보 반 트엉 후보자를 새로운 국가 주석으로 지명해 발표했고 직후 이루어진 표결에서 참석 의원 488명중 487명이 이에 찬성한으로써 2021~2026년으로 이어지는 전임 응우옌 쑤언푹의 남은 임기 동안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아마 큰 이변이 없는 한, 보 반 트엉이 2026년에 국가 주석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응우옌 푸쫑의 뒤를 이어 국가 총 서기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의 장점은 풍부한 정무 경험 뿐 아니라 1970년 생으로 현 나이 52세, 매우 젊은 지도자라는 것에 있다. 2026년에 그가 서기장이 된다면 그는 56세의 나이로 응우옌 푸쫑의 뒤를 잇게 되는 것이다. 정치계에서 전도 유망한 트엉의 경우, 베트남 정권 내에서 개혁의 혁신을 이끌어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다. 트엉은 배트남 남쪽 호치민 인근의 빈롱성(Vinh Long) 망띳현(Mang Thit) 출신으로 이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 북부 하이즈엉으로 올라와 살았다고 한다. . 부친이 남쪽 일대에서 유명한 남부 전선 게릴라 출신이기에 북을 돌아가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88년에 다시 호치민으로 내려가 호치민 국립 인문사회과학대학교 철학과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전공했으며 철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1999년 생활윤리학 논문으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한 인연으로 그는 1993년 베트남 공산당에 입당해 이듬해 정식 당원이 된다. 1995년 10월에는 공산 청년 연합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새로 설립된 호치민 시 학생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베트남 학생회 중앙사무국 위원을 겸임하면서 청년 정치인으로 당의 주목을 받게 된다. 2002년 11월 호치민 시 청년동맹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03년 3월 그는 호치민 시 청년동맹 서기였으며 2003년 10월부터 호치민 시 당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004년까지 이 직책을 맡으면서 호치민에서 자신의 역량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트엉은 호치민 시 12구역 당 위원회 비서로 임명되면서 호치민을 배경으로 한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자신의 성장 배경이 호치민이었던터라 그의 성향을 두고 친서방, 혹은 응우옌 푸쫑과 마찬가지로 친미 성향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으나 호치민 청년 경제 분야를 맡으며 호치민 내 젊은 기업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이 중에는 화교들이 많았다. 트엉은 실제로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화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이미 호치민과 남부 지역 화교들이 경제적으로 성장세를 보이며 남부 지역의 주축으로 자리 잡아갈 때 트엉이 이들 화교에 대한 권익을 많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친중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노이에 올라가서 상임국장을 하면서도 친중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관계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후 2018년 트엉은 언론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으로 유명한 공산당 중앙선전부장 직위에 오름으로써 하노이 내 정계 실세가 되었다. 게다가 응우옌 쑤언푹과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관계였던 푸쫑에 의해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쑤언푹이 몰락했고 트엉이 쑤언푹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트엉이 베트남 공산당 반부패 중앙운영위원회 위원이었기 때문에 쑤언푹은 트엉의 견제 및 조사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 2021년 2월 5일, 트엉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외교권까지 틀어쥐었다. 2022년 7월과 11월 라오스를 방문하기 위해 두 차례 비엔티안을 방문하여 통룬 시술릿 사무총장 겸 대통령, 라오스 판캄 비파반 총리, 자이솜폰 폼비한 국회의장을 만나 인도차이나 국가들 간의 연대를 확고히 했다. 더불어 양국간 경제 파트너십 협력을 통해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베트남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앞장 서기도 했고 2022년 말 캄보디아를 방문해 훈센 캄보디아 총리와 고위급 대표단을 만나 향후 있을 외교적 현안에 대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2022년 11월 푸쫑과 함께 중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여 일정 내 트엉은 중국 내 정치국 상임위원이자 중앙위원회 사무국 서기와 대화를 하면서 중국과의 협력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10시, 그는 국가 주석이 되었다. 트엉이 국가 주석과 푸쫑의 후계자로써 향후 전망되는 것은 세 가지다. 1. 부패와의 전쟁 트엉은 올해 2023년 2월 초, 전국 65개 주의 서기들과 가진 회동에서 어떤 나라도 사임을 문화로 삼지 않았다며 응우옌 쑤언푹과 그의 주변 관리들에 대한 부패를 지적해 쑤언푹의 사임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위반, 부패를 저지르는 간부들이 사임을 하게끔 당에서 위법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과 정치 체제를 건설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잘 수행하면서 정치 이념과 도덕이 악화되는 징후에 맞서 단호하게 싸우며 엄격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강조했다. 내부 자체 변환과 더불어 부패, 개인주의, 기회주의, 이기주의, 집단 이익, 관료주의, 국민으로부터의 소외, 어려움에 대한 무감각, 국민의 좌절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동시에 간부와 당원, 특히 수장의 모범적인 역할을 수호하여 당, 국가, 정권에 대한 인민의 신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도록 촉구했다. 이러한 트엉의 주장과 그 성향으로 볼 때, 베트남 공무원들의 부패에 대해 엄격한 잣대가 드리워 질 것으로 예상된다. 2. 베트남 경제특구 관련 트엉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존의 북부, 하노이 중심의 공산당 체제와 달리 호치민과 남부 지역에서 대대적 기반을 배경으로 이 자리까지 온 인물이다. 물론 그가 호치민 청년 서기 시절에 경제특구법 초안을 만들어 일부 온라인 소식통들을 인용하여 의해 99년 동안 외국인들에게 토지를 판매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확대 해석이라며 자세한 언급은 기피되었지만 베트남 남부 지역에 대한 경제 특구로 지정하여 호치민을 제2의 홍콩과 같이 만들겠다고 하는 주장은 그대로인 것으로 보여 진다. 하노이에 비해 호치민은 그 동안 베트남 정부 정책에서 상당히 천시받은 느낌이 강했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 호치민을 비롯한 인근 도서들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경제 특구로 지정하여 급격한 발전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현재 베트남에서 소득 수준 1위를 달리고 있는 빈 즈엉 지역의 개발은 급물살 탈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앞으로의 경제 중심은 하노이에서 호치민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3. 외교 노선의 변화 (친미에서 친중, 친러로) 트엉은 친충, 친러파로 공산주의 정치 성격을 지향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강화로 인한 정치, 외교, 경제적 협력과 러시아와는 경제, 군사적 협력을 중점적으로 둘 가능성이 높아졌다. 중국의 양안 문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상황 등이 전방위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겨우 어느 정도 중립을 지키고 있던 푸쫑 정권은 트엉이 푸쫑의 직무와 관련해 상당 부분의 권력을 이양 받음에 따라 그 동안 친미로 일관했던 정책이 중국과 러시아로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대만과의 협력보다는 중국과 관계 강화에 앞장 설 것이며 대만이 향후 위기를 겪더라도 베트남은 이에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이제는 베트남까지 친중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며 대만은 이제 상당한 위기감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으로도 호치민을 중심으로 중국 기업들이 다수 투자가 강화될 것으로 보여지며 이는 현재 일대일로가 강화되고 있는 캄보디아, 라오스와의 연계로도 이어질 것이다. 즉, 캄보디아의 항구인 시아누크빌과의 연결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해서는 대놓고 군사적으로는 중립,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관계 강화가 예상되며 냐짱 일대와 푸꿕 일대를 중심으로 러시아와의 관광업도 활성화 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북극항로가 개발되면 동남아시아와 연결되는 물류허브로 베트남의 몇 개 항구를 열어줘 경제적으로 급격히 성장할 토대도 마련할 수 있다. 더불어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경제 특구, 그리고 하이퐁, 다낭, 냐짱 쪽의 경제 물류 변동이 크게 나타날 것으로 전망되며 트엉의 결정으로 인해 조만간 호치민 지하철 건설도 재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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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현재, 보 반 트엉(Vo Van Thuong) 정치국원 겸 서기국 상임비서가 베트남의 새 국가주석 선출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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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대한민국의 요소수 문제
- 지난 2023년 9월 7일 중국이 요소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한국 요소수 시장이 혼란스러워졌다. 2021년 사태 끝에 타국에서도 요소수를 수입해 중국 의존도를 97%에서 60%대까지 끌어내렸지만, 중국과의 가격 경쟁에 있어 타국이 밀리게 되자 2022년까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의 비중이 있었지만 2023년에 들어 두 국가에서 수입하는 양이 없어졌다. 실제로 지난 6일부터 12일까지 판매된 요소수의 거래액과 판매량은 지난 주 대비 각각 1700%, 1322%나 증가했다. 이 때문에 중간 유통 업체들이 물량을 갖고 있어 물류 회사들이나 운송 기사들이 요소수를 구하기 어렵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요소수는 많이 분들이 아는 것과 같이 주로 농업용, 산업용, 경유(디젤) 차량용으로 쓰인다. 하지만 요소는 경제성 때문에 2010년대 초부터 중국 내의 석탄으로부터 주로 생산되어 왔다. 그런데 2021년 중국 내 석탄이 부족해지자, 중국 정부가 석탄과 더불어 요소 등 석탄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물질의 생산과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세계적으로 요소 부족 현상이 발생했으며 지난 2021년 요소 수입량의 97%를 중국에 의존하던 우리 한국에서도 요소수 품귀 현상으로 인한 대란이 발생하게 된다. 2008년 유럽 배출가스 기준의 유로4 등급부터 일부 대형 화물차 등 고출력 디젤 엔진에 SCR이 적용되면서 요소수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환경규제에 따라 중, 소형 화물차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현재 출고되는 대부분의 경유(디젤)차량에 있어서 필수화 되었다. 요소수는 요소와 정제수의 혼합으로 이는 만들기 쉽고 한국도 생산 설비가 있는데 문제는 그 원료인 요소에 있다. 요소는 이산화탄소와 암모니아의 화합물로 암모니아는 수소와 질소의 화합물이다. 이산화탄소는 세계 모든 분야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를 포집해 쓰면 된다. 특히 실제로는 천연가스를 태워 얻는 경우가 많다. 질소는 공기를 활성탄에 불어주면 생산되는데 활성탄의 재료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이산화탄소와 암모니아의 화합법과 수소와 질소의 화합법은 거의 정해져 있다. 따라서 문제는 수소 생산의 경제성에 있다. 중국의 석탄은 풍부하고 매우 저렴하고 중국 석탄을 이용한 수소 생산에 전 세계가 의존하고 있다.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전기분해로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그린 수소)과 화석연료로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그레이 수소)이 있다. 또 하나의 방법으로는 탄소를 포집하는 경우인데 이를 블루 수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재는 그레이 수소가 수소 생산량의 99%에 달한다. 이로 인해 수소 경제가 아직은 비환경적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석탄을 통한 수소 생산으로 보면 중국이 세계 석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전 세계가 의존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2010년을 마지막으로 전라남도 화순 탄광이 폐쇄되었고, 석탄 생산이 중단되었다. 천연가스를 통한 수소 생산으로 보자면 이는 유럽이 주로 하는 방식이었고, 유전이나 가스전에 남아 있는 가스를 태워 버리는 유증기(플레어 가스)를 포집해 수소 생산에 활용하자는 방안이 연구 중이지만 천연가스는 주로 러시아에게서 사오기 때문에 제재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석유를 통한 수소 생산으로 볼 때 한국에서 정유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해왔던 방식이다. 이는 나프타 생산 과정에서 수소가 부산물로 나오는데, 이를 이용하는 것이다. 1964년에 삼성이 세웠으나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국유화된 한국비료공업이 주로 요소를 생산해 왔으며, 1994년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한국비료공업을 민영화하기로 결정되자 삼성은 창업주인 이병철이 세운 회사이기에 시가의 3배를 주고 사와서 삼성정밀화학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0년 대 들어 중국산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분기 적자 10억 원이 나오는 상황에서 창업주 이병철이 중시했던 사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요소 생산을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결국 2011년에 사업을 접었고 이후 삼성정밀화학은 2015년 롯데에 매각되어 롯데정밀화학으로 회사 명칭이 변경된다. 이 회사는 여전히 한국 최고의 암모니아 수입 및 요소수 생산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2018년 7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녹색성장의 선도국임을 알리기 위해 푸른 하늘 계획(청천계획)을 시작하면서 석탄 생산을 줄이게 되었다. 2020년 5월, 호주와 중국 무역 분쟁으로 중국에 호주산 석탄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2019년을 기준으로 중국은 석탄을 자국에서 38억 톤을 생산했다. 그리고 외국에서 2억톤 수입을 했는데 상당수가 몽골과 러시아이다. 이 중 호주는 3~4천만 톤 가량이며, 다소 비싸지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와 러시아산 석탄으로 물량이 대체되었다. 그래서 202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2030년까지 탄소 배출 감소로 전환하여 2060년 탄소 중립을 약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중국의 각 성마다 수천만 톤의 생산량을 줄이게 된다. 2021년 여름에는 전 세계가 위드 코로나로 전환함에 따라 제조업 전력이 많이 필요해졌으며 지구 온난화로 인해 냉방 전력도 많이 필요해져 예상보다 석탄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2021년 9월, 중국의 석탄 수입 차선책이었던 아프리카 기니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중국은 석탄을 수급하지 못했으며 10월에는 산서성에서 대홍수가 발생해 중국 내의 석탄 채굴장들이 침수당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중국 내에서의 석탄 부족은 전기 생산과 겨울철 가정 난방, 화학 산업 등에 큰 차질을 불러왔다. 게다가 국제 요소 비료 가격이 계속 오르자 중국 업체들이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요소 비료를 수출하면서 요소 재고량도 역대 최저치로 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중국 정부는 수출입 통관 업무를 총괄하는 해관총서(海关总署)를 통해 2021년 10월 11일, 요소를 포함해 29개 화학 비료 관련 원료 품목들에 대해 검사 절차를 추가하는 규제를 신설했으며 2021년 10월 15일부터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은 중국에게서 97%를 수입한다. 한국이 요소 대란 피해가 큰 것은 SCR 장착 경유(디젤) 차량의 비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형 화물차에서 주로 적용됐던 SCR 방식이 점진적으로 현대 마이티 등의 중형급, 심지어 2020년식부터 현대 포터, 기아 봉고, 현대 스타렉스(현대 스타리아) 등 소형급 차량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화물운송, 여객운송, 건설, 소방차 등 특수활동 등을 할 경우, 요소수 완충 후 다음 요소수 보충시기가 짧아 화물 운영중단 또는 감소에 따른 물류대란, 여객수송 문제, 각종 산업현장에서의 차량가동 중단 등으로 이어진다. 요소수는 SCR 장착 차량, 특히 산업 현장에서의 대형 상용 차량에 있어서는 경유를 주유할 때 마다 매번 같이 상당량을 넣어줘야 한다. 따라서 기름과 같은 국가적 핵심 필수재에 가까운 존재이다. 한국 기업들은 시장원리에 따라 2011년 요소의 국내 생산을 중단했고, 이후 요소의 원료가 되는 암모니아도 국내 생산을 중단한 뒤 전량 수입으로 공급 방침을 전환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2021년의 대참사였다. 정부는 중국이 요소 수출을 제한한 직후 요소 공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인지했으나, 안일한 대응으로 일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피해는 더 컸다. 그리고 관세청에 따르면 2022년 중국 요소 수입액을 67%까지 낮췄으나, 다른 국가에서 수입하는 요소보다 중국산 요소의 가격이 더 저렴한 이유로 다시 중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요소 수출을 내년 1분기까지 제한시키자 우리는 비축하고 있을지 주목된다. 다원화적인 입장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좋았다면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적대한 이상,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을 늘리는 수밖에 없는데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여의치 않다고 한다. 정부에 따르면 중국 외 일본이나 베트남에서 수입될 물량을 포함해 현재 국내 차량용 요소와 요소수의 재고는 3개월치라고 하는데 요즘 정부가 하는 일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 말이 3개월치라 하지만 실제로는 한 달 분 밖에 없어 여기저기 구걸하고 다녀야 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의 말을 믿을 수도 없고, 역대 정권에서 이렇게 신뢰가 바닥인 정권이 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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