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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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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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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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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10
  •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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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0
  •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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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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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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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대 그리스 정부와 정당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경제 위기
    그리스는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IMF와 EU에게 빌린 돈의 규모가 수백조 원 수준에 이르고 있다. IMF와 EU는 그리스의 국채를 가지고 있는 민간은행의 국채를 상환 의무가 있는 그리스 정부 대신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 정부에 대한 구제 금융을 지원했다. 즉 2015년에 와서는 대부분 그리스의 국채를 민간이 아니라 IMF와 EU, 그 중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 정부는 이들 IMF와 EU, 독일 및 프랑스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IMF와 EU에게 있어서 이 구제 금융 채권 상환은 일종의 구상권 청구인 것과 같다. 그냥 그리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가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도 같은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돈줄을 쥐고 있는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이 엄청나게 손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협상은 순탄치 않게 진행되었다. 벌써부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은 견제에 나서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렉시트라 불리는,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 자체도 용인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돈 갚을 것을 압박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급진좌파인 시리자 정권의 집권 이후 기존의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 내각에서 추진하던 긴축 정책를 철회하는 일환으로 공기업이나 국유 자산의 민영화 및 매각 작업을 속속 철회했다. 사실 이를 덮어씌우게 된 나라가 바로 중국인데 중국은 많은 그리스 자산을 인수하려고 계약까지 한 상황이었다. 계약 직후, 중국의 계약 자체가 무효화되어 번복당하게 된 것이다. 이미 그리스의 경제 위기로 인해 그리스의 주식 시장은 붕괴 상태였지만 그나마도 시리자 당의 집권 이후 연일 폭락의 향연이 벌어졌다. 당시 매일 6~7%, 심하면 9% 이상씩 떨어졌다. 특히 2015년 1월 26일~1월 28일 3일간만 해도 무려 20% 넘게 폭락했다. 주식의 어마어마한 대폭락은 그리스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의 자산 이탈이 심해졌고 2011년 이후 그 빈도수는 높아졌다. 시리자의 급격한 반(反)긴축 성향이 IMF, EU등 채권자와의 갈등을 일으켜 자칫하면 그리스가 디폴트를 맞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수상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평소에 뉴욕타임즈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챙겨보았던 것이 주효한 것인지, 아니면 채무탕감의 명분을 쌓을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리스에 대한 최대 채권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기존 제재의 연장 자체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같이 반대하지 않았다 해도 EU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대응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으로 상징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에 대해서 추가제재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출한 것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러시아에서 그리스에서 요청만 해준다면 재정지원을 해줄수 있다고 밝히게 된다. 이에 대해 그리스의 증시는 다시 반등세를 탔고 러시아도 유가하락과 경제제재로 인해 자국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돈이 남아 돌았던 탓인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때와는 다르게 3700억 달러 수준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러시아가 몇 년 정도를 어렵게 나마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되기는 했다. 외환보유고가 떨어져 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러시아가 이미 경제 제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아는 EU 입장에서는 그저 그리스의 경제를 공략할 명분만 추가될 뿐. 시리자도 이와 같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재 연장에는 찬성했다. 그리스 금융위기 이후 IMF, EU, ECB (European Central Bank)가 구제금융을 하면서 언론에서 이 세 기관을 한 집단으로 묶은 것을 트로이카라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트로이카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보니까 국가부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프랑스에서 부채 관련하여 재협상을 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히게 되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도 그리스의 구제 금융 재협상을 지지했다. 그리스 정부로서도 일단 조금 온건하게 의견을 발표하여 일단 자금 융통에 대해 조금 트여 있는 상황에 있다. 물론 프랑스도 재협상에 응할수 있다고 했지만 그리스 정부에서 요구하는 채무 탕감은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금 융통이 조금 트였다는 얘기일 뿐이다. 프랑스도 그리스 지역에 투자한게 많긴 하지만 2012년 이후 부채 정리가 있었기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로이카와 독일이 요지 부동인 상황이기 때문에 파국은 시간 문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결국 채무탕감 요구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ECB와 독일이 그리스 시리자 정부에서 내놓은 국채 담보 안을 승인하지 않게 되면서 그리스 정부는 2015년 3월 디폴트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월 이전까지 시리자 정부가 ECB, 독일 정부한테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서 그리스 정부는 미국, 러시아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거론하면서 중국에서 돈을 빌려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프라스 총리가 리커창 중국 총리에게 초청 받았다는 것도 공개했다. 그리고 리커창 중국 총리는 차프라스와의 통화에서 시리자에 집권하자 마자 민영화를 취소한다는 식으로 발표하며 뒤엎으려 했고 피레우스 항 프로젝트를 복구하라 요구했다. 그래서 차프라스는 이를 보장하는 답변을 했다. 2015년 2월 12일~13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45.4%를 얻어 2위인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을 크게 앞서게 되었다. 아마도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듯 싶다. 재협상을 앞두고 그리스 곳곳에서 친(親) 정부 시위 또한 발생했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리스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다. 2015년 6월 5일로 예정된 만기까지 3억 700만 유로, 한화 약 3700억 원을 상환해야하는데, 이조차도 없다고 그리스 정부에서 나오고 있다. EU와 IMF가 제시한 긴축 재정은 여전히 실시하지 않으면서, 빚 갚을 생각을 전혀 안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현재 EU와 IMF는 그리스의 디폴트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시리자가 몰락한 다음 이후 선거를 기대하는 실정에 있다. 물론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 뒤, 할 수 있는 선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2015년 7월 5일, 치프라스는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로 진퇴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리스의 여론조사 결과, 지난달 말 카파 리서치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47.2%, 반대 33.0%로 나타났지만 자본 통제 이후에는 반대의 세력들이 시리자에 결집하면서 반대 54% 찬성 33%로 대역전을 일구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수상은 더욱 더 가열차게 반대표 결집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여론조사기관 GPO가 이날 발표한 결과에서는 다시 찬성 47.1%, 반대 43.2%로 뒤집하게 된다. 이는 여러모로 팽팽한 접전이었고 반대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그리스 의회는 여러모로 고민하게 된다. 결국 7월 5일 국민투표가 시리자 내각의 진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어이 2015년 7월 5일 2015년 그리스 구제 금융 국민투표에서 구제 금융 반대 61% 찬성 39%라는 엄청난 득표율 및 일방적인 득표차로 구제 금융을 부결시킴은 물론 시리자 정권의 연장에도 가볍게 성공하게 된다. 출구조사 때까지만 해도 52:48의 근소 우세로 점쳐졌던 것이 순식간에 뒤집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자 정권이 크게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EU 입장에서는 그리스를 자기들에게서 축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긴축에도 견디지 못했다. 이는 그리스 정부의 공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소위 기득권층의 복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상류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은 유럽과 IMF 간에 이해 관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EU측은 부자들이 탈세를 하면 뒤엎어 버리라는 식이지만 IMF는 부자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가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는 재산업화를 추진한 것도 아니다. 부패와 기형적 형태의 정치문화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시리자 정권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시리자가 그 일부에 기여했으며 시리자가 정권을 잡고 집권을 거듭하고도 개혁을 그 동안의 공약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중국은 주식이 폭락했었기에 한국 입장에서는 더욱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자국 시장에 돈을 엄청나게 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여력이 없고, 러시아는 저유가 및 낮은 천연가스 가격으로 인해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크림 및 돈바스 지역에 개입했다가 서방 제재로 인해 GDP가 절반으로 폭락할 정도로 허약한 상황에 있었다. 다들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인데 그리스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기본적으로 신용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만 그리스를 지원하겠다 말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 집권 정당인 시리자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첫 번째, 국민들의 반대 요구를 무시하고 긴축을 계속하는 것은 EU가 그리스 정부에게 재국민투표를 요구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보았다. 아일랜드도 처음에는 EU 리스본 협약에 사인할 때 국민투표로 부결되었지만, 2009년에 다시 투표를 하여 민주적인 정당성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정권이 퇴진한 뒤 악역을 중도파에게 넘겨 혼란을 주는 것, 세 번째, 그냥 나라가 망하는 길로 종합하여 세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결국 7월 중순, 시리자는 정당의 보존을 위해 고강도 긴축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렉시트를 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으나 그랬다가는 서드 임팩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알아서 붕괴 될 것이니 별 수 없는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2015년 8월 20일 시리자가 구제 금융 찬반으로 인해 분당되자 그리스 국회의 의회를 해산하고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2015년 9월 20일 조기 총선을 시행할 것을 정했으며 당시 여론조사에 의하면 시리자의 지지율은 급락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의 과반보다 못한 1당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나마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이 부진하여 1당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야당이 올곧게 건재했다면 이와 같은 경제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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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22
  • 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1979년 이란에서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란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당시 근본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 시아파 무슬림 정파 세력들에게 축출된 팔레비 왕가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을 필두로 하고 있었으며 장남인 레자 팔레비(Reza Pahlavi)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1980년 모하메드 국왕이 도피한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의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축출되고 그나마 망명 정부처럼 남아 있는 왕실의 제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망명 정부이기에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다. 더불어 1906년에 제정된 이란 팔레비 헌법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 받기 때문인 것도 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왕후로 알려진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이다. 그녀는 1967년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과 결혼했을 당시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왕후에 등극한 호화 대관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획득한 외화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었다. 국영기업 민영화,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인수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계 이란인 인사들이었고, 민영화하여 만든 제품과 수입들이 죄다 유럽과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실질적으로 이란 국내의 기업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을 진흥하고자 했다. 팔레비 왕조가 건립될 당시의 문맹률은 꽤 높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가 대대적으로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육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학교 시설이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무엇보다 선생들의 질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질 좋은 선생이 양으로도 많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이란에서 페르시아어가 완벽한 질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결국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선생을 돈 주고 영입할 수밖에 없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가난한 시골에는 외국 선생은 꿈도 못 꿨다. 부유층 자녀의 외국 유학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또한 상류층의 10분의 1정도만 유학을 갔고 대부분 파리에 머물렀다. 팔레비 왕조는 히잡, 차도르의 착용 금지했지만 테헤란과 이스파한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 투성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대다수의 하층민은 여전히 부르카 쓰고 이슬람 율법에 저촉 받고 살았다. 당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문맹율은 60%에 달했다.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테헤란과 이스파한과 같은 대도시에 국한된 얘기였다. 큰 도시가 아닌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란 여성들은 참정권이 뭔지도, 있는지도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의 여성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으며 문맹에다 전통적인 악습을 달고 살았다. 즉,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고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계층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으며 테헤란이나 이스파한에 살 경제력이 되는 여성들만이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히잡을 벗고 대학까지 다녔다. 이것이 몇몇 대도시와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란 영토 내에서 불균형 현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농지 개혁과 농촌 개발 문제였다. 이란에서 황무지는 국토의 60%를 차지했다. 이는 땅을 다지는 기술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근대화가 도시에 집중되었던 것도 있다. 팔레비 2세는 외국에서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초청하여 녹화하는 사업을 맡긴다. 그리고 이란 영토 내에서 토후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지방 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압수하고 이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는 팔레비가 계획했던 근대자본주의와 대단한 모순이 있었다. 지방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로 뺏어간 것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자율성과 사유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주들로부터 토지 강탈과 일반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의 분배 행위는 소련이나 중공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주로 행했던 사회주의성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즉각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빈민들이 중세 봉건적 시스템인 소작제를 철폐하면서 자영농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영농들의 상당수는 농촌 적자에 허덕이면서 다시 지주에게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분배된 농토들은 자영농들의 식구에 비해 그 소출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관개 시설을 이용해 농지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이란 전국에 분포한 관개 시설은 채 10개도 되지 않았다. 자금 또한 부족했다. 해당 자금들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횡령으로 인해 해외로 빼돌려졌다. 그래서 관개 시설조차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했고, 소작농 시절에 물리지 않던 세금, 종자세, 물세, 시설 비용등이 추가로 발생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영농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영농들을 인공적으로 무수히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주 밑에서 소작농들에게 제공하던 건강과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교육 같은 서비스도 없어졌다. 또한 미국과의 협정으로 인해 미국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최악의 상황이 된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당시, 혁명에 참가한 상당수가 이 때 고생하던 농민들이었다. 결국 일부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협동 농장에 매각하고 도시로 흘러왔으며 이들이 슬럼가를 형성하면서 엄청난 빈부격차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해지는 결과가 되었고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당시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자들이 이맘 성직자들이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던 모스크의 토지까지 팔레비 정부가 몰수하여 분배했기 때문에 엄청난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업에 써야 할 돈들은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 왕후의 개인 돈으로 유용되었다. 그녀는 해외에 재산을 상당수 빼돌렸으며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될 정도로 축적한 재산은 재벌급이었다. 파라 팔라비 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명화들을 수집했다. 파라 팔라비의 컬렉션은 현재 30억 달러(약 4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86년 9월, 이란 PARSI 1 TV에 갑자기 위성 방송이 11분 동안 전파를 탔다. 이 방송에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레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왕후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은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이 위성 방송은 미국 CIA가 기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은 40년 전에도 이와 같은 내부 혼란을 유도하는 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 같은 시기의 CIA는 이란 팔레비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미 의회에서의 폭로도 나오면서 한동안 팔레비 왕실과의 커넥션에 대한 청문회로 몸살을 앓았다.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들을 두고 근거 없다며 일축했다. 팔레비 왕가가 미국 땅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호메이니 혁명 이후, 팔레비 왕가와 함께 이란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의 애국적 행위 덕분이라고 했다. 팔레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40년 동안 미국은 이란에 끊임없는 제재를 가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란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내부 혼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움직여 외부적으로 전쟁, 무역적 대립 등으로 끊없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파라 팔레비 왕비나 레자 팔레비 왕세자의 근황을 끊임없이 TV로 송출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균열을 유도했다. 물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 방송했었다.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PARS TV, BBC 페르시안, PARSI 1 등 수십여 개나 되기에 이란 정부를 막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채널들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이 위성 수신기에 대한 단속이 심했지만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인터넷 매체들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라 이란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움직여 또 다시 외부적 혼란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고 있다. 팔레비 정권이 했었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 미니스커트가 어떻고, 히잡이 어떻고 등등, 매우 자유로운 사회였다고만 말한다. 그러니 팔레비 치하의 이란 사회는 매우 모순성이 가득한 사회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인 측면들이 혼재된 사회였으며 왕정 독재에, 기득권들만 배부르고, 부정부패와 비리, 횡령이 일상화 된 사회였다. 빈부 격차도 엄청났고, 그렇기에 근대화 개혁을 하려했지만 안하니만도 못한 사회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약에 팔레비 왕조 치하의 이란 사회가 매우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적인 사회였다면 1979년의 호메이니 혁명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메이니 혁명은 팔레비가 가진 수많은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중동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메네이 정권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팔레비 2세와 바꾸어 팔레비 왕조를 부활시키면 완전히 근대 국가로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하메네이 정권이 무너질리도 없을 뿐더러, 팔레비 2세가 돌아오는 것은 이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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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21
  • 이란의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공습
    이란은 3일 전, 16일 새벽 이스라엘의 하이파 발전소와 정유공장 등 에너지 인프라를 타격했다. 일부 전력망이 파손됐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CNN 방송은 이 날 "텔아비브가 밤새 이란의 집중적인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날이 밝자, 텔아비브의 거리는 공포와 혼란, 불안으로 가득 찼다(Tel Aviv was hit by a barrage of Iranian missiles overnight. As day dawned, the streets of Tel Aviv were filled with fear, chaos and anxiety)."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이란의 탄도 미사일에 피격된 공습 현장에서는 이스라엘 구조대원들과 군인들이 거리에 널려 있는 잔해를 치우고 있다고도 했다. 이와 같은 장면들은 불과 6일 전인 13일 밤,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이란의 피해 상황이 대대적으로 전해질 때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 전개로 나타난다. 서방의 외신들은 당시 파괴된 이란 핵 관련 시설과 군사 기지, 미사일 발사대 등에 관한 영상을 내보내며 이란 핵 전문가와 군 고위 지휘관 수십명을 제거했다고 이스라엘 측 발표를 집중 보도했다. 이스라엘이 드론을 미리 투입하는 '트로이 목마' 작전을 실시했고 이란의 방공망을 사전에 무력화했다 주장하는 전략에도 흥분했다. 하지만 이틀 후인 15일에는 이란의 대 이스라엘 방공망 교란으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방공 미사일이 부메랑처럼 지상으로 떨어지는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방공시스템 아이언돔이 돌파되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네타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테헤란 시민들에게 대피할 것을 촉구하자, 이란은 15일 밤 보복 공격을 예고하면서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안전을 위해 핵 및 에너지 시설과 방사선 연구 센터, 방사성 물질이 있는 위험 지역으로 가지 말라는 요청을 하면서 맞섰다. 이어 이란 최정예부대로 꼽히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IRGC)는 언론 성명을 통해 "주요한 목표물을 겨냥한 집중적인 공격은 이스라엘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스라엘 영토가 곧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니, 일찍 이스라엘을 떠나라(The intensive attacks on key targets will continue until the Israeli regime collapses. Leave Israel early, as Israeli territory will soon become uninhabitable)"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은 이제 겨우 6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서방 언론과 국내 언론은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와 똑같은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뉴스 보도에 의하면 이란은 곧바로 항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격으로 인해 이란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거센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CNN 등 미국 언론에서는 이스라엘이 초기 판세를 잘못 짚었다며 오류들을 정정하는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언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를 하기 때문에 수정을 대체로 잘 하지 않는다. CNN 방송은 16일 퀸시 국가대응전략 연구소 부소장인 트리타 파르시(Trita Parsi)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은 이란의 군부 지도부들이 제거한 이후, 이란의 보복 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분석했다. 파르시 부소장은 CNN에 이스라엘은 이란 군 최고 지휘부 제거에 성공한 이후, 이란의 군 지휘 체제를 흔들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란의 미사일, 당시 러시아 언론에서는 극초음속 미사일로 분류학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3중, 4중 방공 시스템인 아이언 돔을 돌파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같은 결과로 인해 텔아비브 거리는 공포와 혼란, 불안 등으로 소요 사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블룸버그 도 15일에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란 미사일의 파괴력에 충격을 받았으며, 적이 보유한 미사일 규모를 생각하면 그같은 공격이 몇 주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이 전쟁의 끝을 알 수 없다(Many Israelis are shocked by the destructive power of Iranian missiles, and given the size of the enemy’s missile arsenal, they fear that such attacks will continue for weeks, so there is no end in sight to this war.)."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발언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극우주의자로 알려진 요아브 리모르(Yoav Limor)는 자신들의 매체인 이스라엘 하욤(יִשְׂרָאֵל הַיּוֹם) 기관지의 기고에서 이스라엘은 초기의 성공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장기전에 휘말려서도 안 된다라고 언급하며 빨리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크네세트의 집권여당이자 원내 제1당인 리쿠드당의 기관지인 "하욤" 또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 이란은 서로 더욱 강력한 '보복 공격'을 예고했다. 이스라엘은 16일 생방송 중인 이란 국영 방송국을 폭격했다. 이에 여성 앵커가 스튜디오에서 급히 대피하는 생생한 영상이 올라왔다. 이스라엘의 프로파간다용 홍보 효과로는 최상의 영상인 셈이다. 앞으로는 발전소와 정유 시설 등 에너지, 사회 인프라를 파괴하는 공습과 피해 상황들은 영상으로 한꺼번에 공개되지 않고 자신들이 유리한 국면일 때 조금씩 공개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힘들다. 어느 쪽에 유리한 지에 대한 관건은 경제적, 군사적 잠재력에 따라 달려 있다. 누가 더 많은 미사일 보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보충할 능력이 있는지에 군사적 우위 능력이 좌우될 것이다. 그 다음의 관건은 동맹국의 지원이다. 미국은 이미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공중 급유기 수십 대를 유럽 측으로 보냈다고 밀리터리 워치 매거진(Military Watch Magazine )이 지난 16일에 보도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란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정'을 추진 중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할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이미 앞서 필자의 수많이 포스팅과 칼럼에서 밝힌 바 있어 생략한다. 하지만 중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이란에 미사일과 방공 시스템을 보내 지원하고 있다. 실제로 몇 대의 대형트럭들이 중국에서 출발해 파키스탄 국경을 통과해 이란으로 들어오고 있는 장면들이 포착되었다. 따라서 중국은 현대 공중전에서 자국 무기를 시험해 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중국이 이스라엘에서 운용 중인 F-35 전투기와의 교전을 통한 자국 전투기의 성능 확인을 위해 이란에 전투기를 제공할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다. 네타냐후는 이란인들에게 현 정권을 전복할 것을 대놓고 선동했다. 이란의 보수적인 제정일치(祭政一致)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에 호응해 반 정부 시위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란 현 정권에 불만을 가진 세력보다 현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반 정부 세력들에게 하메네이 정권의 전복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는 최고 지도자의 대국민 장악력이 더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고 피해를 입은 이란인들이 하메네이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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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1
  • 현재까지 살아있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국왕은 아테네 근교 프시키코에서 1940년 6월 2일에 탄생했다. 그는 출생 4개월째 되는 해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그 다음 해,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략하며 유년기를 피난지인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1946년에 귀국하였으며, 1947년 아버지 파블로스 1세(Παύλος I, 1901~1964, 재위 : 1947~1964)가 즉위하면서 태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스포츠맨이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역대 올림픽에서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가 금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이 폐지돤 이후에도 IOC 명예 위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4년부터 노르웨이 국왕이자 먼 친척인 하랄 5세와 함께 국제요트연맹 공동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물론 하랄 5세 역시 요트 선수로 활동했지만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8촌, 그 왕비인 아네마리와는 6촌관계에 있다. 그는 1964년 3월 부왕이 암으로 승하하자 즉위하였으며, 9월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콘스탄티노스가 국왕이 된 시기에는 그리스 정치에 있어 좌우 대립이 매우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즉위 한 달 전 열린 총선에서 11년 동안 그리스를 이끌어 오던 우파 내각이 패배하고 중도연합당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가 총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국왕과 나이 많은 수상이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65년 7월 그리스 군부 내 우익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움직임이 있어 국방 장관의 퇴임을 결정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오히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 총리를 해임하고 같은 당 소속의 요르요스 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하자, 그리스는 그리스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양파 간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을 공공연히 부정하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졌으며 국왕이 총리를 지명하면 중도연합당이 장악한 의회가 거부하는 일이 빈번하여 왕정과 내각의 골이 깊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군부의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은 좌파들을 혁파해야 한다며 1967년 4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3일 근왕파 장교들과 동맹을 맺고 역으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쿠데타가 실패하게 되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일단 북부 그리스의 카발라로 파천하였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파파도풀로스는 왕을 추방했지만 측근인 요르요스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왕정을 없애지는 않았다. 이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후 왕당파는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여 반(反) 군사 정권 투쟁을 벌여 정권과 맞서게 된다. 결국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7월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며, 이로써 콘스탄티노스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이 퇴진된 이후 새로 들어선 카라만리스 총리의 과도 정부는 군사 정권의 왕정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을 무효화했지만 그렇다고 1952년 제정된 민주 헌법으로 복귀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왕정 복고 국민 투표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TV 연설로만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결국 7:3으로 왕정 복고가 부결되면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위에 복위하지 못했고, 1975년에 헌법이 제정되어 현 제3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1946년에 벌어진 국민 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유지된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입국 금지를 당한 채, 돌아오지 못하고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으며 당시 서방 정치인들로부터도 '멍청이', '암덩어리' 등의 비난을 들으면서 생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81년 2월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인해 당일치기 방문을 했었고, 1993년 여름에 미초타키스 총리의 배려로 일가족과 휴양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결국 굴복하며 공화정을 인정했지만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에 대한 여론은 매우 냉담했기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2세 총리 시절인 1994년에는 아예 국적까지 박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유럽 왕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리스 정부에서 그에게 적법한 성씨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국적을 부정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 왕의 성씨가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써야 할 때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가문 이름이나 영지의 이름이 성으로 사용되는게 유럽 왕실의 관례였다. 또한 왕실 재산과 관련해서도 그리스 정부와 소송을 벌였는데 그리스 정부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사람이 소송하는 것을 부당하다면서 소송을 받아주지 않으며 그의 갖은 수모를 주었다. 결국 그는 소송을 위해 Κωνσταντίνος της Ελλάδας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리스의 법원에서는 그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 인권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소송 끝에 2000년에 그리스 내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인정받게 된다. 자산은 그리스 정부의 소유로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 정부가 보상금을 옛 왕가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 정계는 이와 같은 보상 과정에 대해 비웃었는데, 이는 그가 탈세한 금액이 많다고 주장한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Constantino de Grecia (그리스의 콘스탄디노스)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에서 외교관의 여권을 발급받아 IOC 위원의 자격으로 입국하게 된다. 덴마크는 덴마크 왕가 후손에게 자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때 여권을 발급해줄 당시 성이 데그레시아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 그리스 방식으로 콘스탄디노스 데그레치아스(Κωνσταντίνος Ντεγκρέτσιας)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아테네 올림픽 당시의 방문을 계기로 그는 그리스 정계와의 사이가 개선되었고 이후 런던과 그리스를 왕래하다가 2013년에 영구 귀국을 허락받아 그 뒤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포르토 헬리(Πορτοχέλι/Porto Heli)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그리스의 경제 위기 등 현재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지자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옛 왕실에 대한 호감이 좀 높아졌다.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그리스의 경제적인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견실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로 왕정이 복고되기까지 갈 정도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있다보니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력도 있고, 2021년 말-2022년 초에는 폐렴 및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 최후의 국왕이지만 군사 쿠데타 이후 추방을 당해 해외 여러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갖은 수모를 당했고 조국인 그리스에서 조차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수모와 비아냥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스에 돌아와 현재 조용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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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0
  • 남인도로 들어간 드라비다 족과 고도의 남인도 문화에 관하여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 인들이 B.C 10세기경에 청동기 문화를 북방에서부터 파생하여 발전시켰다. 그리고 B.C 3세기경에는 북인도로부터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농업을 더욱 발달시켰고 남인도 아열대 기후의 기름진 토양에 벼농사를 짓고 곳곳에 도시도 건설하게 된다. 북인도 지역에서 쿠샨 왕조가 발현되기 전, 데칸 고원 지역에서는 아리아 계통의 안드라(Andra) 족이 사타바하나(Satabahana) 왕조를 세워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해상 무역을 발판으로 삼아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금이나 은으로 만든 화폐를 널리 유통시켰다. 그리고 대다수의 드라비다 족과 타밀족을 흡수하여 인도 남부와 북부의 문화를 서로 연결하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지역에는 안드라 족의 왕조가 오랫동안 통치했으며 점차 아리아 인들에게서 주도권은 드라비다 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데칸 고원 남쪽 인도 남부에는 촐라(Cholla), 체라(Chera), 판디아(Pandia) 왕조가 건국되어 서로 세력 정쟁을 통해 정치, 문화적으로 발전하였다. 촐라 왕조는 면직물을 동남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지역에 수출하여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으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스리랑카의 싱할라 족과 슈리비자야(Shurivijaya)의 해군을 격퇴하면서 벵골 만의 해상을 장악하고 전체적인 인도양 바닷가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다. 체라, 판디아 왕조도 촐라 왕조에 이어 후추와 상아, 진주와 보석, 면화 등을 각지에 수출하며 인도양 해상 로를 장악하였다. 더구나 B.C 1세기 무렵에는 로마 제국과 무역을 한 기록이 있으며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인도 지역의 왕조들은 북인도 왕조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어 드라비다 족 고유의 정치 체제를 마련해 갔으며, 전통적인 무속 신앙을 믿고 자신들만의 장례 풍습을 유지하였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아 전통 신앙이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뱀이나 코끼리 같은 부족의 토템들을 숭배하였고, 카스트 제도가 미약하여 북인도와는 사회 생활의 모습 자체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성행하였지만, 다른 신분과 통혼이 가능하여 새로운 신분이 탄생하기도 하였고 카스트 제도로 엄격했던 북인도와는 달리 남인도는 신분제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여성의 지위가 북인도보다 훨씬 높았으며 여성이 사회와 종교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고, 수티(Sutti)의 풍습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타바하나 왕조 때에는 여성들이 행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가정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조사된다. 따라서 남인도는 현재도 카스트 제도가 통하지 않은 지역이기도 한다. 이러한 남인도 앞에 놓여 진 바다는 오래 전부터 남인도를 지배한 드라비다 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아라비아 해를 거쳐 서아시아와 이집트로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역하기 위해 배를 건조했다고 하며, 인더스 문명 시절에서부터 나타나는 석조 인장이 서아시아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B.C 6세기에 남인도 상인들은 금, 은 같은 보석을 찾아 미얀마와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얻은 금속과 향나무, 상아 등을 가지고 페르시아나 중국 상인들과 거래하기도 하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 무역은 대부분 남인도를 거쳐 갔는데, 이는 인도가 자체의 물자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동서 무역 해상 항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외부 문화에 의해 옷감 짜는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염색 기술도 개발되어 인디고(Indigo)라는 물감이 멀리 유럽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인도의 면화는 세계적인 수출품이 되었으며 현재에도 남인도의 면화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남인도의 무역에 대해 북인도 불교 석가모니에 관한 기록들에는 남인도 드라비다 인들의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를 재패하고 있다는 설명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이 드라비다 인들의 해상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로 서술되고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후 2세기경 북인도의 쿠샨 왕조는 남인도 지역을 무역 기지로 삼아 후추, 진주 등을 로마에 수출하였는데, 로마가 이러한 수출품의 가격을 정하고 이를 교역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고충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해상 무역으로 인하여 남인도 문화는 북인도 만큼이나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남인도 국가들은 활발한 상업적인 교역과 농경의 발달로 인해 오직 농업 중심으로 일관한 북인도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꾸준히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드라비다 족 고유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인도양 무역의 중심으로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촐라 왕조는 몇 차례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였지만, 여러 차례 남인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드라비다 종족 체제로 전환했다. 특히 1세기 촐라 왕조의 카리칼란(Karikalan) 왕은 북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외래 학문을 장려하고 남인도의 학문을 융합하여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다에 면해 있는 국가들과의 문물 교류도 활발히 하여 재정을 확충했다. 후일 촐라 왕조를 여행하였던 중국 당나라의 현장 법사가 남인도를 극찬하여 “이곳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널려 있었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9세기에 다시 부활하여 성장한 촐라 왕조는 10세기경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맞아 이후 약 200년간 강성한 문화 대국의 모습을 보이며 유지했다. 특히 드라비다 족 고유의 언어인 타밀어로 서술된 타밀 문학이 이 시기에 발전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양 교역의 또 다른 중심지인 스리랑카에서는 B.C 6세기에 북인도의 싱할라족이 실론 섬으로 들어와 첫 왕조를 건국했다. 그러면서 B.C 3세기 무렵에 불교를 받아들여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apura)를 불교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면서 나름 드라비다와 대치되는 강한 나라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싱할라 왕국은 1세기경에는 그리스-헬레니즘 세계와 교역하면서 알려졌고, 중국 기록에도 사자국(獅子國), 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드라비다와의 장기간 남인도에서의 세력 정쟁은 싱할라 왕국의 입장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이게 되었고 결국 싱할라족의 거주지는 스리랑카로 알려진 실론 섬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실론 섬은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해, 지중해로 연결되는 동서 무역의 핵심 고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드라비다에 편입되지 않고 나름 독립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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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0
  • 말레이시아 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그리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말레이시아 화교)
    말레이시아 내의 인도인 공동체는 고대 촐라 왕조 시절부터로 추정될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말레이인들과 혼혈하면서 문자와 힌두교, 불교가 전파되고 말레이어에도 상당수의 산스크리트어 어휘가 유입되었다. 다만 당대에 종이를 대신해 쓰였던 패엽이 장기보존하기에는 좋지 않다보니 역사적인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이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와중에 고아(인도)에서 많은 인도계 카톨릭 신도들이 유입되고 인도계 용병들이 정착하면서 말라카 반도의 소수민족 크리스탕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인도계 대량 이주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말레이시아에 주둔하던 영국군 중에는 시크교도 펀자브인 등 인도인들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한 대신 인도인 노동자들(타밀족)을 고무 농장에서 저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레이시아에 데려오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인 이민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가 독립하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계 이민자들 역시 말레이시아의 국민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 말레이인들은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부미푸트라 정책을 통해 이들의 권리를 다소 제한하였다. 말레이시아 독립 초창기 시절에는 말레이인 상당수는 농민이고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이 도회지의 상권을 장악한 상황이라 교육 격차와 소득 격차가 심했다고 한다. 한편 영국이 중국인들을 이민으로 받아 채우기로 하자 현재의 말레이시아인 말레이 반도와 부속도서인 싱가포르, 페낭, 사바 일대로 중국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특히 19세기부터 이민이 활발하였는데 이는 중국 내부의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1790년대 3억 명이던 청나라 인구가 1850년 무렵 4억 2천만 여 명으로 급증하면서 쌀 가격이 폭등하였고 인플레이션 효과로 실질소득이 줄어들었다.납세 수단인 은과 관련하여 청나라 조정은 동전을 평가절하하면서 농민들의 생활 조건은 더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소작농 상당수가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영국령 말레이 반도 식민지가 태평양 전쟁 연간에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이 때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화교들을 탄압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화교들에 대한 학살도 벌어졌으며 위안부로 끌려간 화교 여성들도 많았다. 현재에는 일본과의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고 일본 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겉으로 반감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소개하여 일본의 역사적 만행을 잊지 말자고 가르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발전 과정으로 볼 때, 동남아시아 특유의 복합 사회의 특성을 나타냈다. 우선 말레이인 국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오랫동안 중국계 말레이인, 즉 말레이 차이니즈들이 인구 60% 정도의 다수를 차지했다. 애당초 도시로서의 콸라룸푸르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처음 개척했던 곳이다. 다만 최근에는 말레이계 비중이 높아져서 지금은 중국인 혈통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45% 정도로 43% 정도의 말레이인보다 약간 우위에 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비슷한데 대부분이 복건성과 광동성, 해남성 출신들이며 주로 민남어, 광동어, 조주어, 객가어 등을 가정에서 사용하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상호 간에는 표준 중국어를 써서 소통하며 밖에선 영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표기는 간체자로 표기한다. 인도인 혈통인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은 10%으로 상당수이며 이들은 대부분 타밀어를 사용한다. 그밖에 유럽 혈통인 영국인 잔류 백인들, 한국인, 일본인, 아랍인들도 소수지만 있다. 이들은 저마다 역사적으로 거주구역을 달리하고 종교 및 언어, 직업, 생활 수준 등에서도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공업 종사자는 중국계가 압도적으로 많고 있으나 하급 관리 및 경찰, 군인 등은 말레이계, 택시 등 교통운수 종사자는 인도계가 많다. 그리고 종교에서도 불교나 기독교를 믿거나 무종교인 중국계,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 100% 무슬림인 말레이계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이들 중국계 말레이시아 화교들을 이용해 현 중국 정부는 말레이시아 내에서 일대일로 사업을 재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말레이 반도 동부 해안 철도 연결(ECRL)" 프로젝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건설이 확정되었지만 비용 문제 등으로 미루어오다가 2020년부터 첫 삽을 떴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2023년부터 현 철도 건설 사업이 재개되었다. 2024년에는 양국이 운영 및 유지 보수를 위한 합작 회사를 설립하면서 비용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말레이시아 레일 링크(Malaysia Rail Link, MRL)가 ECRL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중국 교통건설 ECRL(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ECRL, CCCE)과 운영·유지보수를 위한 합작회사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MRL은 말레이시아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ECRL 프로젝트 시행을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MRL과 CCCE는 이번 합작 회사에서 각각 지분 50%를 보유하며, 운영 적자에 대한 책임을 공동 부담할 예정에 있다. 이 방식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재정적 위험을 줄이고, 프로젝트 운영을 위한 공동 책임을 강화하고 있으며 MRL은 ECRL의 모든 자산을 완전 소유해 국가 이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제 파트너의 전문성을 활용할 계획에 있다. 참고로 ECRL 프로젝트는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포트클랑과 콸라룸푸르를 동해안 쿠안탄, 트렝가누, 코타바루 등으로 연결하는 총 연장 665㎞ 노선 건설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 공정률은 77%로 나타난다. 이 중 코타바루에서 콸라룸푸르 곰박 통합 교통 터미널를 연결하는 구간은 2026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27년 1월부터 운행 개시할 예정이다. 나머지 구간은 2027년 12월 완공 될 전망으로 앞으로 말레이시아 전 구간이 철도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기회를 말레이시아 내 중국 정부의 투자와 사업에 계속 잭팟이 터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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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 이란-이스라엘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유사성 : 가짜 프로파간다 정보로 인한 심리전의 강화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니 마치 2022년 2월 24일부터 발생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판박이로 돌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파간다로 인한 심리전이다. 푸틴 대통령이 말한적도 없는 3일만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겠다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똑같이 돌아간다.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내용들에 의하면 현재 테헤란 시내 ATM은 사이버 공격으로 전부 마비, 러시아 대사관은 철수 명령 내려와서 철수 중이라 한다. 근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우크라이나의 사이버 공격으로 ATM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이미 Swift 제재도 들어간 상황에 사이버 공격이 계속되어 러시아의 국방부도 해커인 "어나니머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키예프에는 러시아군의 공습과 진입이 시작된다며 각 국 대사들과 체류 국민들을 대피시켰다. 당시 러시아군은 수도 키예프에서 불과 34km 떨어진 이르핀과 부차에 와 있었다. 그러니 키예프 소재 각국 대사관과 체류 국민들을 부랴부랴 대피시킨 것이고, 당시 부차에서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가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프로파간다를 오지게 뿌려대서 부차는 러시아 학살 피해의 성지(聖地)로 둔갑했다. 그리고 판박이로 이번에는 미군의 공중급유기와 일부 항공기 40대가 서쪽으로 이동했고 20대가 이스라엘로 향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 B2 폭격기 수대가 이란 핵시설 타격을 위해 초대형 벙커 버스터 연속 폭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과 키예프 인근 부차와 이르핀까지 진군한 러시아군의 위협과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미국이 직접 B2로 폭격하려는 상황도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미군 폭격기로 러시아 돈바스와 모스크바를 직접 타격하려고 하는 모습을 전쟁 초창기 때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미군 폭격기로 아무것도 못했다. 인도-태평양 미군 기지들에게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되어 경계 태세가 강화된 것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대량으로 중동에 빠져나간 상태에서 중국군이 어찌 움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태평양의 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타이완 (대만)을 상대로 중국이 어떤 작전을 벌일지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도련선을 통과하기도 했던 중국 함대가 어찌 나올지 미국조차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의식한다면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테헤란 영상들 보면 현재 소개 명령으로 고속도로가 장난이 아닌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공격이 심화될 때, 전쟁 초, 이웃 국경으로 고속도로와 기차가 넘어갔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난민이 되었다. 러시아 또한 부분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군대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탈출하는 러시아인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고속도로의 정체가 장난 아니었다. 결국 이것도 유야무야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란의 내부 시위도 이스라엘 폭격과 함께 격화되는 중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는 반전 시위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알렉세이 나발니를 중심으로 반전 시위를 했고 이 또한 격화되어 푸틴의 목숨이 오늘 내일한다고 프로파간다 방송을 한 것도 미국을 위시한 서구와 우크라이나였다. 과거의 왕정시대의 자유로원던 이란의 모습 비디오들이 엄청 방류 중이라는데 러시아군이 패배하는 방송만 열심히 띄운 것도 미국이나 서구, 우크라이나의 합작품이다. 다들 그거보고 세계 2위의 군사력이 별거 아니라며 한국인들은 떠들어 러시아를 우습게 보았고 러시아의 무력이 쓰레기이자 그 무기들이 거품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냐고 떠들기도 했다. 탱크와 전차가 다 작살나서 없다고 보고한 것도 그들이고 냉장고의 부품을 뜯어 탱크와 전차에 사용했다고 했던 자들도 그들이며, 멀쩡히 있던 러시아의 마트가 사재기로 물건이 없어 난리라고 거짓 보도했던 자들도 그들이었다. 그들의 프로파간다로 인해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망할 줄 알았을 것이다. 푸틴이 참수되고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해체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이란-이스라엘 전쟁의 프로파간다에 또 다시 데자뷰로 나타나고 있다. 그 때도 내일이면 러시아가 망할수도 있다고 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결국 러시아의 절대적인 우세로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고,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네타냐후는 서구 유럽과 미국에게 도와 달라고 손 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역전이 되었는지 내일이면 이란이 망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란이 같을 수 없겠지만 이란은 자원부국에 8,5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동안 무기를 축적해왔고, 최근 이란이 벌인 전쟁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 러시아-중국-북한-시리아와 가까워지면서 그들과 연계를 통해 전략, 전술, 무기 등을 착실히 축적해왔고, 미국의 공격을 받을 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40년 넘게 훈련을 거듭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왔던 이란이다. 그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란은 러시아처럼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나라다. 아마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의 데자뷰처럼 남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초기, 필자의 분석을 두고, 러뽕이니, 러시아 간첩이니 하면서 믿지 않고 오히려 조롱과 조소를 했던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몰리면서 러시가 이기고 있는 것이 보이니 일제히 입을 함구하고 있다. 필자는 필자의 분석이 옳았다는 것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증명했고, 이번에도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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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 G7 논란 속 한국 외교, 품격과 실용 사이의 선택
    지정학적 변환기, 한국 외교의 실용주의 전략과 품격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최근 G7 정상회의를 전후해 대한민국 대통령의 외교 행보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외교적 고립, 레드카펫 미제공, 인디언 지도자와의 만남 등을 소재로 한 일부 반정부 성향 인사들의 조롱성 비판은 단순한 사실 왜곡을 넘어 국가 이미지에 심각한 손상을 주고 있다. 이는 조지 프리드먼이 강조한 "전략적 민첩성"과는 정반대의 내적 분열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국내 여론 갈등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대응력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냉정한 외교 분석과 감정적 비난은 구분되어야 하며, 국민 모두가 국익의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세계는 지금 ‘전략적 다극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은 자국 이익 중심의 ‘전략적 실용주의’로 전환 중이며, 중국은 내적 경제 불균형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일본은 사회적 안정과 군사력 강화를 기반으로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러시아와 이란은 서방의 제재에 맞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조지 프리드먼은 이러한 복합적 질서 변화 속에서 한국은 민첩성과 균형을 갖춘 이중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일방적 의존은 리스크를 증폭시키며, 복잡다변한 외교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예측이 아닌 빠른 대응’이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국제 사회에서 대통령의 외교 무대는 단순한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국가 이미지의 총체적 표현이다. 하지만 최근 일부 보수 진영 내에서도 나타난 조롱성 비판은 국익의 관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레드카펫을 받지 못해 왕따를 당했다”, “인디언과 만난 것이 수치스럽다”는 식의 주장들은 사실관계에 기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한국 대통령을 폄하하면서 국가 이미지를 자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 이번 G7에서는 어느 정상에게도 레드카펫을 제공하지 않았고, 캐나다 총리는 마크 카니로 교체된 지 3개월이 지났으며, 독일, 영국 총리 역시 회담 이전에 이미 교체된 상태였다. 이러한 기본적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조롱을 일삼는 행위는 비판의 수준과 품격을 떨어뜨리고, 내부 분열만 심화시킬 뿐이다. 한국은 미중 전략 경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미국은 한국을 태평양 전략의 핵심축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중국은 기술과 자원, 정치적 영향력 측면에서 한국을 견제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한국은 이러한 경쟁 속에서 전략적 중립과 유연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일부 세력은 대통령의 외교 활동을 희화화하고, 근거 없는 비난을 퍼뜨리는 데 주력한다. 이는 단순한 야권의 정권 비판을 넘어, 국가 전체의 외교력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한국이 국제 무대에서 존중받는 국가로 자리 잡기 위해선, 내외부적으로 일관된 품격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부는 사실 기반에 근거한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외교 일정과 의전의 구체적 사실을 국민에게 정확히 전달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된 정보를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선 명확한 반론과 정보 제공이 필수다. 또한, 언론과 정당, 시민사회 역시 외교 문제에 대해선 ‘정파적 접근’이 아닌 ‘국익 중심의 판단’을 우선시해야 한다. 외교는 국가의 체면이자 안보이며, 정권이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일이다. 정부는 비판을 수용하되, 국익을 해치는 왜곡에 대해선 단호하고도 품격 있게 대응해야 한다. 외교는 국익의 예술이다. 지금과 같이 지정학의 중심에서 한국이 전략적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외부와의 경쟁 못지않게 내부의 단결이 중요하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국격을 해치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 조지 프리드먼은 “한국은 마키아벨리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며, 현실을 직시하고 기민하게 움직일 것을 주문했다. 그 기민함은 외교 전략뿐 아니라 국민 여론을 아우르는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국민 모두가 진영 논리를 넘어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칠 때, 한국은 진정한 전략 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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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8
  •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이 이란 테헤란에 대해 선제 공격에 나서자 푸틴 대통령은 6월 13일에 급히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았으며 뉴욕에서는 긴급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지만, 격분한 양측의 감정을 두고 양측의 공방전은 당분한 계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란의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미국이 주변에 배치하고 있는 해상 및 공중 자산들을 총동원하면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경우와 미군 기지를 공격할 가능성이 농후하게 되었다. 이럴 경우, 중동은 제3차 세계대전까지 확대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급습한 2023년 10월 7일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이란 기습 공격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는 우크라이나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핵심 지원 국가들의 관심과 이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대다수의 지원은 중동 지역으로 집중되고, 국제 유가가 계속 오를 경우, 러시아의 에너지 수입이 늘어나면서 우크라이나에게 최악으로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 사회의 관심이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몰리고 있는 사이, 러시아군이 키예프 등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과 드론 공습을 더욱 강화할 가능성도 높아져 우크라이나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스트라나.ua는 지난 13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 기사 중 '이스라엘의 공습이 세계와 우크라이나에 미치는 영향(Последствия для мира и Украины)'이라는 기사에서 "중동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키예프에게는 매우 불리하다. 서방의 관심과 지원이 분산되고, 유가가 상승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강화되지만 유럽의 경제는 크게 약화될 것(Якщо напруженість на Близькому Сході зросте, це буде дуже погано для Києва. Увага та підтримка Заходу будуть перенаправлені, і хоча ціни на нафту зростатимуть, російська економіка зміцниться, а економіка Європи значно ослабне)"이라 예측했다. 특히 트럼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최대한 거리를 두고, 중동 문제에 집중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뒷전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도 이와 관련된 기자 브리핑에서 이와 같은 우려가 있음을 인정했다. 러시아는 석유 수출로 큰 수익을 거두면서 강해질 것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의 원조 증가로 인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까 걱정이 되니 절대로 줄어들지 않기 바라는 것이 젤렌스키의 바램이었다. 반대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이같은 중동 사태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이 줄어들면 더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우크라이나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분쟁의 지속 기간과 더불어 그 규모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있다. 우크라이나가 꿈꾸는 최악의 악몽은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면서 이란이 핵 무기 개발에 성공해, 집단서방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경우다. 반면 우크리이나가 생각하는 최선은 이란이 트럼프의 요구 조건에 응해 협상을 이루거나 이스라엘의 바람대로 하메네이 이란 정권이 내부 혼란으로 인해 완전히 전복되는 경우가 최선이다. 이는 집단서방의 큰 군사 지원 없이 마무리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악과 최선의 경우는 현실화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란의 대처 방식을 학습하여 우크라이나에 핵을 앞세워 공격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매파들은 이스라엘의 대응 방식을 학습하여 서방 측에 더욱 가혹한 대러 제재 및 공격 수단을 도입할 수 있도록 트럼프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 물론 관건은 푸틴 대통령과 젤렌스키가 가진 미국에 들이밀 수 있는 유력한 카드다. 이란-이스라엘 양쪽 정상과 급하게 통화한 것에서 보듯이, 푸틴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카드는 명확하고 효력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당초 이스라엘의 이란 폭격에 반대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더 많아진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하면서 대화의 절반 이상을 이란 핵 문제에 할애했다. 미국이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 지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외에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다. 터커 칼슨은 지난 3일 전에, 미국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메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주장했다. 터커 칼슨은 뉴 리퍼블릭(New Republic) 잡지에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격에 몰래 도움을 주었고, 이로 인해 미국이 깊이 관여했다고 하였다. 한편 1+1 등, 우크라이나 언론들은 미국이 중동 전쟁에 휘말리는 것이 트럼프에게 있어 이는 매우 부정적인 전망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첫째, 재정 적자가 심각한 상황에서 적자 폭이 더 늘어나고 있으며, 둘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 온 외교 전략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셋째, 중동의 미군 시설들이 이란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중동 내 미군 전력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넷째, 이민자들을 추방함으로 인해 미국 내 갈등들이 내전, 혹은 엇비슷한 상태로 치달아 트럼프의 국내 정치적인 입지를 크게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 아후,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한 트럼프의 발언은 우크라이나에게는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트럼프는 14일 통화에서 "푸틴 대통령이 오늘 아침 생일 축하 전화를 해왔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아주 잘 아는 이란에 대해 오랫동안 협의했다.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적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그것은 다음 주에 이야기 하기로 했다(President Putin called me this morning to wish me a happy birthday. More importantly, we had a long discussion about Iran, which he knows very well. We spent much less time on Ukraine, which we will talk about next week)"고 했다. 우선 이란-이스라엘의 충돌 사태가 최우선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사태를 두고 중동 문제를 푸틴 대통령과 논의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문제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리면서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게 되었다. 푸틴과 트럼프의 통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해 '다음 주'에 이야기 하자는 트럼프의 발언이었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은 이 날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의 통화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러시아는 6월 22일 이후 합의에 이르른 대로 우크라이나와의 협상을 계속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고, 트럼프도 이를 주목하면서 조속한 적대 행위 종식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젤렌스키도 이 날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포로 교환은 20~21일에 종료된다고 했으며 이후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추가로 3차 협상 때 참여할지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추가 협상에 관하여 같은 날짜에 우연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양측에서 동시에 나온 것이다. 우샤코프 보좌관이 6월 22일이라는 날짜가 이전에 합의한 대로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샤코프 발언의 맥락으로 볼 때, 트럼프와 푸틴 대통령 사이에서는 이전에 무엇인가가 논의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와 같은 분석은 트럼프 대통령이 참여하는 서방의 주요 회담의 일정을 보면 매우 당연하게 들린다. 우선 젤렌스키와 트럼프가 만나는 G7 정상회의는 오는 17일에 종결된다. 이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4일 미국이 이번 G7 정상회의에서 EU와의 무역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중단 카드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EU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봉착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G7 정상회의에서는 이란-이스라엘의 충돌을 배경으로 한 유럽 주요 국가들의 대 우크라이나 관련된 각종 생각들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후 6월 24일에는 나토 정상회담이 시작된다. 참석 여부가 일단 모호했었던 젤렌스키도 나토 정상회담에 초대 받았다. 이에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만남은 피할 수 없고, 신경전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발발된 상황에서 젤렌스키가 운신할 폭이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G7 정상회의가 끝나고 나토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에는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유럽 주요 국가들의 입장과 상황 등을 감안하여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러시아의 휴전 및 종전 요구 조건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해 그 방향성이 정해질 수도 있다. 스트라나.ua는 나토가 정상회담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어떤 식으로든 거부한다면, 전쟁 종식은 더 가까워질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일정을 감안한다면, 젤렌스키는 사활을 걸고 미국과 G7, 나토 정상회담에서 예상되는 분위기의 반전을 막아서야 할 입장이지만 이스라엘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네타냐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 내부의 상황 및 트럼프의 입장을 고려할 처지가 아니다. 이란의 반격이 시작된 현재, 이스라엘은 모든 화력을 쏟아 부어야 어느 정도 버티는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미국을 이번 분쟁으로 끌어들여야 승산이 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따위가 아닌 중동 분쟁이 G7과 나토 정상회의에서 최우선 의제가 될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젤렌스키는 비록 두 정상회의에 참석하긴 하지만, 서방 측의 지원을 두고 네타냐후와 경쟁해야 할 입장에 몰리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에 의해 의제를 선점 당해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거의 의제에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보다는 이란-이스라엘 전쟁에 더 전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G7도, 나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의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14일 FOX 뉴스와 인터뷰하기를 중동에 있는 미군 기지를 보호하기 위해 미군의 방공 시스템을 키예프가 통제하는 지역에서 철수했다고 밝혔다. 이는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리다. 헤그세스는 상원 청문회에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방공 시스템을 중동으로 이전했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는 "그렇다"고 응답했다. 따라서 미국은 전세계에 있는 미국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젤렌스키는 과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샤헤드 드론에 맞서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주기로 약속한 요격 미사일 20,000발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초반에 중동으로 이전했다고 비난한 전적이 있었다. 젤렌스키에게 더욱 절망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중동의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장기 소모전으로 가는 상황에 있다. 이스라엘이 미국을 참전시킨다 하더라도, 지난 2003년 이라크 점령 작전을 재현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공습과 폭격만으로 한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예멘의 후티 군대와 하마스, 헤즈볼라도 미국과 이스라엘이 완전히 무력화하지 못했다. 이란이 앞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방공 시스템을 개선한다면 더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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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8
  • 트럼프의 난민 통제 정책으로 인한 여러 논란들과 떨고 있는 미국 내 우크라이나 난민들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인도주의적인 사유로 허용되었던 난민들에 대한 임시 보호 조치들을 트럼프 정부에서 전격적으로 폐기하면서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바이든이 대통령 재임 시기 때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우크라이나인 약 24만 명에게 부여했던 임시적인 합법 체류 자격을 2025년 4월부터 전면 취소하면서 이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우크라이나로 대거 강제 귀환당할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과 몇 년 전, 전쟁을 피해 미국에 안착했던 수십만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다시 추방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고 이는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포용 정책을 뒤집는 결과로 나타났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뿐만 아니라 쿠바, 아이티,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출신 53만여 명에 대한 패롤(Parole)에 대해서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트럼프는 패롤(Parole)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남미와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이민 신청을 전면적으로 중단했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이민자들은 주로 2년 동안의 임시 취업 허가와 추방 유예를 받았으며, 이 기간 내에 영주권이나 망명 등 추가적인 이민 혜택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이민 신청 절차가 중단되면서 미국에서 법적 신분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편 탈레반 정권을 피해 난민 신청을 해썬 아프가니스탄인 7만여 명에 대한 임시 체류도 재고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총 180만 명 이상의 중동 지역과 남아시아 지역의 이민자들의 법적 지위 박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모두 트럼프가 바이든의 이민 정책은 법치를 넘어선 것이라 주장하며 선거 기간부터 공약을 펼친 바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2025년 1월 20일에 서명된 행정 명령을 통해 모든 카테고리별 패롤 프로그램 종료가 공식화 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추방 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는데 이것이 현재 나타난 LA 폭동이라 보면 된다. 이에 우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이나 탄압을 피해 온 난민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전통적인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와 정의를 수호한다는 역할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경우, 현지로 송환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책임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미군에게 도움을 주었던 전 아프가니스탄 정보 요원 중 한 명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체류 자격이 취소되어 구금되자 미국과 동맹을 맺고 싸웠던 자신이 트럼프에게 배신당했다고 탄식했다. 그는 자신과 아프가니스탄 민주정부는 목숨 걸고 미국을 도운 대가가 결국 미국에서의 추방이라면 충격적이라며 실망을 표했는데, 이러한 사연이 마침내 언론에 보도되어 많은 미국인들에게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 역시 미국의 이와 같은 송환 움직임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젤렌스키와 트럼프 대통령 간의 불화가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우크라이나인 난민까지 돌려보내려 하자 키예프 당국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실망과 유감을 표명했다. 따라서 유럽의 인권 단체들 또한 세계 난민들의 위기 속에 미국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민자들을 위험한 상황에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필자는 가족 초청으로 인해 합법적인 형태로 들어온 한국국적 영주권자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자신의 경력을 늘리고 자본금을 축적하기 위해 6개월 정도 미국에 방문하며 왕래했던 나오는 사람들도 거주 의사가 없어보인다며 세컨더리 룸에 체포되어 끌려갔다는 소문들이 돌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들었다. 이 외에 영주권을 지닌 대학 교수의 부인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하는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연좌제로 추방 조치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난민 정책에 대해 미국 국내 정치 차원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공화당 내 강경파와 트럼프 지지층들은 불법 이민을 억제하는 것과 법 집행을 강조하며 대규모 추방을 지지하고 있지만 민주당과 인권 옹호 단체들은 비인도적인 조치라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 주지사들과 시장들은 가혹한 대대적인 추방 작전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들은 주 경찰과 교정 당국으로 하여금 연방의 대규모 이민 단속에 동참하지 않도록 지시하고, 일부 이민자 보호 도시 정책을 강화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민주당 내에서도 지난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난민 정책에 대해 일부 노선을 변화하려는 조짐이 있어, 무제한적인 이민 옹호에서 벗어나 하마스를 비롯한 테러범 동조 및 중범죄 이민자 추방에는 협조하겠다는 스탠스를 선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몇몇 민주당 인사들은 범죄를 저지른 불법이민자 추방은 모두가 지지할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무차별 단속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죄 없는 사람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추방 정책이 일괄적인 접근으로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들을 반영하며 이민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패롤 철회 조치에 대해 소송까지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연방 법원이 제동을 걸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으며, 18세기 제정된 '적성국 국민법(AEA)'을 난민들에게 적용한 것은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 남용이라는 미국 연방 법원의 첫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몇몇 미국 내 학자들은 무차별적인 대규모 추방은 미국 내 노동력 부족을 심화시키고 일부 산업, 농축산이나 건설 등 노무자들의 부족으로 인한 인력난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지하에 숨어 지내던 불법체류자들이 더욱 음지화되어 지역 사회와의 단절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이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해 온 이민자를 포용하는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국제 도덕적 리더십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향후 수개월 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이민 단속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인권 침해 사례들이 추가적인 정치적 쟁점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의견을 표명한 외국계 학생들이 미국의 이민 세관단 속국(ICE)에 의해 연이어 체포되고 있는데, 일례로 한 터키계 유학생은 길을 걷다 사복 차림의 이민국 요원에게 체포되어 손이 묶인 채, 표시가 없는 차에 태워진 후 구금되었다. 체포에 대한 근거로 하마스를 지지한 것을 들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반이스라엘 시위로 비자가 취소된 대학생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입국장은 SNS를 검열했다고 하며 이 중에 반유대주의나 트럼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가에 적대적이라며 입국을 거부한 사례도 나타났다. 반대로 독재와 인권 탄압 국가로 미국이나 서방 국가들이 비난하는 러시아는 SNS 검열을 하지 않으며 푸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는 치졸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을 비판한 전력이 있는 하버드 대학 소속 러시아인 과학자가 미국에 재입국하는 과정에서 미국 이민 당국에 구금된 사례가 나오면서 문제가 되었다. 사실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은 그 명분도 좋고 불법 이민은 강력하게 단속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강도가 매우 강하고 심지어 각 주에 위치한 국경 심사대에게 성과 할당제를 부여했다는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매우 강압적인 형태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던 사람이 갑자기 세컨더리 룸에 끌려 가서 겁박을 당했다는 사례들이 끝도 없이 올라 오고 있다. 정작 중국인이나 베트남 불법 이민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은 대한민국도 저렇게 해야한다며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에 상당히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민 단속은 적법한 절차와 합법적으로 국적을 취득한 외국계 모두에게도 위협을 주고 있어 그 논란은 매우 커질 것으로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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