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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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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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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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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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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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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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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특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특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특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특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인산산맥에 자리 잡음으로써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흉노선우 묵특을 언급한 것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관한 독도 문제에 글이 다시 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반일종족주의>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당시 동호가 구탈의 황무지를 요구해오니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흉노의 묵특선우의 말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독도가 바위 섬일지라도, 돌 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 해도 독도는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엄연한 우리 국토다. 독도가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엄연히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우리 영토가 맞고 일본이 독도를 노리니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원만한 해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토인데 무슨 원만한 해결을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에도 침묵하라는 것이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선진사회로 진보하는 길인가? 전 세계 어느 선진국이 영토 도발에 침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이런 것이 궤변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다른 보수주의 세력에게 자국 영토 분쟁에 침묵하라는 소리를 하면 그들은 뭐라할까? 보수의 기본은 엄연히 국가(Nation)에 있고 그 기본 이념은 국가주의(Statism) 혹은 Nationalism 에 있다. 이념에 치우쳐 기본을 망각하고 국가(Nation)와 국가주의(Statism)가 안된 보수는 매국 이념에 함몰된 사익 이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좌파가 싫고 친일을 주장해도 국가와 국가 간의 부분에 있어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면 더욱 엄한 잣대가 들어가야 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우리의 땅은 묵특선우가 말한 것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라 풀 한 포기도 줄 수 없다고 맞서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우파다. 그것이 아니면 단지 좌파와 맞서기 위해 대척점을 이루는 수준 밖에 안 되는 집단이 된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터키는 흉노의 묵특선우를 위대한 조상이자 위인으로 가르치는 국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박물관에는 흉노 귀족의 상이 있고 터키의 각 지역마다 묵특선우의 흉상이 있다. 제 아무리 쓸모없는 초원의 황무지라도 절대로 다른 나라에 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해 흉노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고 전 세계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훈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영웅 아틸라를 탄생하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뭐 느끼는 것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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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7
  • 오늘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 세계적인 복지 모델 현(現) 노르웨이의 사회, 경제적인 문제점 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본다면 주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3국을 예로 들고 있고, 광의적으로 북유럽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에스토니아, 러시아로 6국이 포함된다. 예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지리적으로 공유한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핀란드 공국이었고, 언어와 종족도 인도유럽어족인 노르웨이, 스웨덴과 달리 우랄어족으로 나타난다. 11세기 초 스웨덴의 정복 군주인 크누트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 잉글랜드까지 ‘북해제국’으로 묶어 통치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까지 3국 귀족들이 연대하여 칼마르 동맹이라는 연합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동맹은 약 150년 동안 존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3국 화폐(Krona)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삼국의 통합을 추구하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은 항상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위에 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그와 같은 역사들은 늘 순탄하지 않게 흘러갔다. 약체 노르웨이의 시련이 컸다.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약 400년 동안 덴마크 국왕의 통치를 받았었으며, 나폴레옹이 패전한 이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덴마크였기에 1814년 킬(Kiel) 조약으로 인해 노르웨이를 상실했다. 이후 노르웨이는 스웨덴 국왕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다. 두 독립 왕국이 한 국왕의 통치를 받는 형태를 제국주의 및 식민지와 구분하여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독자적 헌법과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외교 및 군사권은 스웨덴 국왕에게 양도했던 사실상 준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 내에서도 독립운동은 꾸준히 발생했고 19세기 내내 이는 양국의 앙금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1902년 노르웨이 의회는 해외 영사 업무를 양도받기 위해 스웨덴 측과 여러 차례 협의하고, 독자적인 법률도 제정했지만 번번히 스웨덴 국왕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의회는 1905년 6월 7일 만장일치로 ‘연합’ 해산을 결의했고, 덴마크 국왕은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따라서 1905년 8월 13일 투표에서 남성 유권자 중 압도적 다수(368,208표)가 스웨덴-노르웨이 왕국의 해체를 원했고, 투표권이 없던 여성들도 서명으로 동조했다. 군대까지 동원한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 양국은 9월 협상을 타결짓게 되었으며 스웨덴 국왕은 10월 26일 공식적으로 노르웨이 왕좌에서 내려오면서 노르웨이는 공식적으로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따라서 올해 10월 26일은 노르웨이 입장에서 볼 때, 독립 120주년이다. 독립 120주년을 맞이한 현재 노르웨이의 상황은 어떨까? 노르웨이는 현재 죽을 맛이다. 한 때 최고의 복지국가였고, 많은 국가들의 복지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저출산, 1980년에 1,000명에 불과했던 노르웨이 무슬림 인구는 이후 급격히 증가해 지금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발칸반도 이민자를 받아들인 데 이어 이라크 난민 등을 수용하면서 반이민 정서가 깊어져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동쪽과 서쪽으로 분류된다. 서쪽은 잘 살고 안전한 노르웨이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런데 오슬로의 동쪽은 가난하고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다. 이는 이민자, 대부분 무슬림들과 발칸에서 이민 온 자들이 살고 았다. 2011년 7월 22일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라는 자가 오슬로 시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했다. 이 테러로 정부청사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어 석유부 건물에도 화재가 발생했으며 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범인은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당시 노르웨이의 집권여당이었던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에서 총기난사를 자행했다. 범인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는 노르웨이 극우 단체 인사였다. 그와 같은 충격에도 노르웨이 어찌 저찌 갈등을 봉합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오슬로의 지하철 동쪽 끝 푸루세트 역에는 1970~80년대에 온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이 노르웨이 출신 현지인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는 이슬람 모스크도 자리잡고 있다. 학교의 학생 40명 가운데 2명이 노르웨이 출신이고, 나머지는 노르웨이어를 몰라 학습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다. 현재 노르웨이는 전체 인구 490만 명 가운데 약 11%인 55만 명이 이민자로 구성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출산 수준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일과 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관대한 복지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15년이 넘도록 전반적인 출산 수준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명확한 경제 전망의 부재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높은 실업률 때문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 사태는 노르웨이의 저출산을 더욱 심화되게 만들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는 1990년대 위기 이후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출산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출산 관련 부정적인 영향력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이주민들과 혼혈을 권장하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이용한 이민자들은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하여 취직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성과의 결혼을 적극 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노르웨이 현지인들의 실업률과 취업률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오슬로는 인구의 약 28%가 외국인이다. 절반은 폴란드와 스웨덴 등에서 온 유럽계 백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 인구가 절대다수로 나타난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약 3%가 파키스탄과 이라크, 소말리아 등에서 온 무슬림으로 추정된다. 노르웨이는 시장 개혁을 통해 석유와 가스 자원을 본격적으로 수익화하기 시작한다.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에서 유전이 터진 이후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천연자원 의존형 경제로 탈바꿈했다. 석유 수출 세계 9위, 천연가스 수출은 세계 3위로 나타나며 이는 1인당 GDP는 90,000불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부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로 인해 쓸어담은 자금으로 창안한 국부펀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으로 적립시킨 모델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가 적극 의존하고 있던 북해 유전의 석유와 가스는 가장 고갈 가능성이 높은 자원으로 보고 되고 있다. 영국과 노르웨이 공식 자료에 따르면, 북해 석유 매장량의 절반이 이미 채굴되었고 액체 석유와 천연 가스로 구성된 탄화수소의 혼합물인 브랜드유(Brent oil)는 고갈 직전의 위기에 있다. 현재는 하루 평균 약 60만 배럴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데 앞으로 5년 내로 40만 배럴로 생산률이 내려갈 곳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북해 유전의 고갈로 인한 대책은 아직까지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 약간의 생산률이 줄어들었을지 몰라고 앞으로 미래가 문제다. 노르웨이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5년 9월에 3.6%로 상승했으며, 예상치 및 8월의 3.5%와 비교하여 2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주된 상승 압력은 식품 및 비알코올 음료의 빠른 가격 상승(6.3% 대 5.4%) 및 교통(2.9% 대 2.7%)에서 나왔다. 한편 주택 및 공공요금(6.2% 대 6.3%), 레크리에이션 및 문화(2.5% 대 2.9%), 그리고 음식점 및 호텔(3.2% 대 3.8%)의 인플레이션이 둔화되었는데 이는 다소 일시적이다. 문제는 앞으로에 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될수록 복지로 가는 비용은 절감된다. 2015년 이후 노르웨이의 R&D 투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벤처 창업과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가 역사상 최저 수준이다. 소득 40% 정도의 높은 세율로 인한 금액이 복지에 투입되는데 이 또한 줄어들면서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마찰로 인해 북극항로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과연 노르웨이 이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복지모델의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을 맞아, 현 노르웨이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해 보았다. 노르웨이의 문제점을 보며 우리의 복지 상태도 어느 정도 점검이 필요하고, 노르웨이와 비슷한 사회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지, 그것을 파악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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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7
  • 오늘 아르헨티나 총선 :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오늘 10월 26일에는 아르헨티나의 총선이 벌어진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출신인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2023년 12월에 취임하여 약 2년 동안 강도 높은 구조 조정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대선 기간 동안 각종 폐해를 잘라 버리겠다며 전기톱을 들고 유세장에 등장하여 수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밀레이는 기성 정치권인 "페론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포했다. 이후 밀레이는 취임한 다음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각종 보조금들을 삭감했다. 그리고 공공 일자리들을 축소하는 등 고강도 긴축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밀레이의 경제 개혁은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최대의 문제점으로 나타났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2023년 그가 취임했을 시기보다 훨씬 줄었다. 2024년 4월 289.4%까지 올랐던 물가 상승률은 같은 해 12월 117.8%까지 감소했고, 이는 2025년 8월 기준 34%까지 내려갔다. 2023년 11월 5억 5,900만 달러(한화 약 8,200억 원)에 달했던 무역적자도 취임 1년 만인 지난해 2024년 12월에는 흑자로 전환되었을 정도로 호조를 보였다. 이처럼 겉으로 나타난 성과들은 훌륭했지만 속 안에 쌓여있는 내부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는 빈부격차가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겉으로 나타난 경제 수술을 감행한 셈이 되었다.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지 못한 사실상 모래 위에 구축한 성이 되어버린 셈이 된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밀레이의 "전기톱 개혁"이 겉고름만 겨우 짜낸 "전기톱 대학살"이 됐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인플레이션은 어찌저찌 겨우 잡았지만 심각한 경기 침체와 실업률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기에 여론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2023년 4분기 밀레이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5.7%였던 실업률은 2025년 2분기를 기준하여 7.6%로 올랐고, 여전히 30%대인 물가 상승률 또한 가계에 부담이 크게 나타났다. 이에 영국 이코노미스트(Economist)에 따르면 보조금 축소 등의 여파로 인해 대중교통이나 에너지 수급 관련 요금은 300% 이상 급등하면서 오히려 서민들의 불편을 야기했다. 여기에 안정적인 물가에만 집중한 나머지 환율 방어에 외환을 엄청나게 투입하면서 재정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인위적으로 페소화를 절하하는 과정에서 애초부터 부족했던 외환 보유고는 거의 텅 비다시피했다. 게다가 페소화의 약세로 인해 수출 경쟁력이 줄어들면서 노동집약적 제조업 또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도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것에만 집착한 밀레이는 경제 성장을 저해시키고 수입을 빨아 들이는 구조로 변모시켰으며 엄청난 외채를 상환하는 것에 필요한 달러 재고 구축을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는 2025년 4월 IMF에서 200억 달러를 추가 구제 금융을 받아내는 등 ,여전히 빚에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환율 불안을 막기 위해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여지지 않는다. 경제난으로 인해 전국에서 밀레이 정부에 대한 반발 조짐이 거세지고 있는 상태다. 이는 지난 9월초,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약 40%가 거주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지방 선거에서 밀레이는 대참패를 당했는데 이는 바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밀레이의 정책에 대한 항의성 민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좌파 포퓰리즘 성향의 야당 연합에게 패배한 것은 시장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26일에 벌어질 총선에도 밀레이가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유주의 정책 기조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게 되니 2주 만에 페소화 가치가 10% 더 폭락했다. 그러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은행은 지난 9월 18~20일의 약 3일 간 11억 달러를 투입해 환율을 방어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례적으로 아르헨티나에 전폭적인 지원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망은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밀레이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의 핵심이 초강력 재정 긴축과 엄격한 통화 관리에 있던 만큼 정부가 외환 시장에 대한 개입을 지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밀레이 정부 첫 6개월 동안 이르헨티나 경제부에서 일하다 밀레이 대통령과의 견해차로 인해 사임한 호아킨 코타니(Joaquín Cottani)는 미국이 환율의 변동과 외환보유고 확보 계획 실행, 금리 통제 등을 아르헨티나에 대한 지원 조건으로 내걸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미국의 지원은 정부가 일관된 환율 및 통화 정책을 함께 시행할 경우에만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코타니는 밀레이가 유권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미국과 투자자들에게 희망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한편 스콧 베센트 미국 국무장관은 워싱턴 D.C를 방문한 루이스 카푸토(Luis Caputo) 아르헨티나 경제장관과 4일 동안 회담을 가졌다. 베센트는 SNS에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경제 리더십은 공정한 무역과 미국 투자를 환영하는 동맹을 강화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심각한 유동성 부족의 순간에 직면해 있고, 이를 신속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총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최종 확정했고, 아르헨티나 페소를 직접 매입했다고 했다. 미국이 상대국의 외환 시장을 구제하기 위해 IMF 등과 공조하지 않고 페소화를 직접 매입과 같은 일방적인 지원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조치가 발표되자 아르헨티나 국채 가격은 급등했으며 페소화도 0.6% 상승하며 1주일 만에 가장 강한 수준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가 아르헨티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는 마가(MAGA) 진영과 가까운 밀레이의 우파 정부가 경제 위기로 인해 붕괴될 위험, 가장 가깝게 지방 선거의 패배에 이은 총선에서 패배할 것 같은 불안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베센트는 자신들의 정치 동맹인 밀레이가 10·26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을 돕고, 밀레이의 패배가 예상된다는 불안한 시장을 안정적으로 돌리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미국 내에서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유례 없는 이번 조치를 두고 세금을 외국 정부 지원에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평소 트럼프와 마가 진영에서 내세우는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의 기조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밀레이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밀레이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유세 지원에 나섰다가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을 뻔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지역에서 밀레이가 유세 차량을 타고 여당의 총선 출마자들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던 중 시위대가 던진 돌이 밀레이의 머리 쪽으로 날아 들어온 사건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밀레이와 수행단은 곧바로 다른 차량에 옮겨 탑승한 뒤 현장을 빠져 나갔다. 이와 같은 유세 현장에서 군중들 사이에는 몸싸움도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밀레이 대통령의 여동생이자 비서실장인 카리나 밀레이(Karina Milei)는 2025년 8월 의약품 조달과 관련하여 뇌물수수 의혹에 휩싸이며 국민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다. 밀레이의 친구인 디에고 스파뇰로(Diego Spagnolo) 국립 장애인 청장이 현지 제약회사인 스위소 아르헨티나(Suizo Argentina SA)에 정부와 장애인 공공 의료품 구매 계약을 맺을 경우 계약금의 8%를 뇌물로 요구하는 녹취가 최근 공개되었는데 이중 3%가 카리나의 몫으로 떼어달라는 내용이 있어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밀레이의 여당인 자유당(Libertarian Party)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결국 밀레이는 이번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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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6
  • 새로운 남미의 마약 카르텔 거점으로 부상한 에콰도르
    중남미 국가 중에서도 에콰도르는 그 역사적 부침이 매우 심한 국가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은 16세기부터 300여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19세기 이후 유럽의 인구 증가와 농토 부족, 저임금 중노동에 지친 스페인 본토의 빈농, 빈민들이 남미 각지의 식민지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현지 귀족이었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빈농들이 자신보다 더 공식 계급이 높다는 점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본국이 나폴레옹 전쟁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남미 식민지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자 누에바 그라나다를 포함한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은 독립을 준비하게 된다. 남미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1783~1830)는 식민지 개척자 및 정복자의 후손인 크리올(Criollo)의 지지를 받아 스페인 군을 축출하고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를 세우고 대통령이 된다. 그란 콜롬비아는 현재의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의 영토를 합친 국가다. 시몬 볼리바르의 사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와 함께 1830년에 분리 독립하였으며 독립 직후에는 플로레스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립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전과 주변국들인 콜롬비아, 페루와의 전쟁으로 인해 상당수 영토를 잃어버리면서 영토가 현재와 같은 크기가 되었다. 플로레스 정부는 키토의 과두지배층을 중심으로한 기득권 집단을 지지계층으로 두고 있었지만 매우 독선적이었고 1845년 쿠데타가 일어나 플로레스 정권은 전복되었다. 이후 정부의 혼란은 약 130년 동안 지속되었고 1972년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기예르모 로드리게스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이 집권하게 된다. 군부는 토지개혁을 약속하면서 석유개발도 본격화 되었다 하지만 정작 석유로 인한 수입은 늘어나면서도 토지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1979년 민주 정권으로 정권이이양되면서 군부 독재는 막을 내렸다. 민주화 이후의 첫 째 민선 대통령인 하이메 롤도스가 1981년에 비행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1982년 중남미 외채위기에 에콰도르는 디폴트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엘니뇨까지 겹치며 에콰도르는 다시금 어려움에 봉착했다. 결국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으며 1986년부터 진행된 저유가와 1987년의 대지진, 연간 수십%가량에 달하는 엄청난 고인플레이션과 임금수준의 실질적인 침체 밎 삭감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1988년에 민주좌파당의 로드리고 보르하가 당선되었지만 경제정책은 달라지지 않았고 1990년대 초중반와서는 지속적인 경제위기에 어느 정도 면역성이 생기면서 에콰도르의 경제가 지표상으로는 그럭저럭 안정세를 찾아갔지만 대신 빈부격차는 매우 심화되었다. 그러면서 사회적 불안감이 심화되었고 치안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2000년부터는 자국 화폐인 수크레화를 포기하고 그냥 미국 달러를 가져다 쓰게 되면서 이전에 세자릿수였던 물가상승률도 한자릿수대로 떨어졌고 이후로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대를 넘본적이 한번도 없을정도로 물가가 안정되었다. 이 때부터 에콰도르는 중남미에서 치안은 상대적으로 좋아졌으며 소득수준도 아주 낮지 않기 때문에 은퇴 이민자들이 머물러 살기 좋은 나라 순위권에 자주 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는 석유값 하락으로 인한 세수감소와 달러화 강세에 따른 수출부진, 2016년 지진의 여파로 인한 재정지출의 급속한 증가로 경기침체로 이어지면서 다시 치안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갱단이 점점 강성해지고 총격전과 살인이 빈발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대선을 불과 10여 일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이자 무소속인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Fernando Villavicencio)가 당일 수도 키토에서 선거 유세 중 총에 맞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피토’라는 별명을 가진 아돌포 마시아스가 이끄는 에콰도르 마약 밀매 카르텔인 ‘로스 초네로스’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BBC는 에콰도르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석유 무역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지난 5년 동안 갱단들의 폭력에 시달렸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일간 '클라린'은 국가의 강력범죄가 마약 밀매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서로 다른 마약 집단 간의 무력 충돌로 사망률과 범죄율이 치솟았다라고 한다. 이 총격 사건을 두고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조만간 대통령 선거를 치를 예정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사건 당일 멕시코 외무부는 소셜 플랫폼에서 "에콰도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폭력적 행위"를 규탄했고, 페루 외무부 역시 에콰도르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폭력 및 위협 행위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표명하고 평화회복을 촉구하였다. 또한 이반 두케 전 콜롬비아 대통령은 에콰도르 국민의 편에 굳건히 서겠다고 밝히고 에콰도르 당국에 조속히 사건을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남미 어느 국가든, 이 사건 및 유사사건조차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남미 각국의 정상들과 정치권들은 마약 밀매 카르텔과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지하 경제 활성화로 인해 서로 공생관계가 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남미의 마약 카르텔과 뒤를 봐주는 자들은 미국 네오콘들이고 이들 또한 공생관계에 있다. 그러니 제대로된 수사가 될리 있겠는가? 게다가 FBI가 암살 사건 수사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도 수상한 부분이다. 미국 연방수사국이 자국 범죄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텐데 여긴 미국과 다른 나라다. 후안 사파타 에콰도르 내무부 장관은 FBI 요원들이 이날 자국 경찰 간부들과 회동했고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들과도 곧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6명의 피의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한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피의자들 모두 콜롬비아 국적이라 하니 이권에 위협을 받을만한 거대 조직의 사주가 있었을 것은 충분히 의심해 볼 만 하다. 현지 경찰은 이들이 범죄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더 거대 세력과 연결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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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6
  • 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민의 결과로 인해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현지 아랍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식민 정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 정부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태인들의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념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태인 분트(Bund)이자 각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유태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들이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본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 나흐만 쉬르킨(Nachman Shurkin), 베르 보로호프(Ber Borohov)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같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베를 카츠넬슨(Berl Katznelson),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골다 메이어(Golda Meir)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도자들 또한 평생동안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살았었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과 유태인들의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술한 책과 글들을 보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가 만들졌던 것처럼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 받는 같은 피착취 계급 처지로서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민족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주의의 낙관적 계몽주의(Optimistic Enlightenment)에 기반해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마주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취급했다. 특히 20세기 초, 수정 시오니스트들은 사민 정책을 통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어 이들을 착취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학살 및 추방한다 해도 이는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노동 시오니즘은 아랍인 중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유태인의 지류로 정의했고 그들을 공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다른 아랍인은 공생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는 시오니즘 사상의 한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탈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은 현재까지도 다른 아랍인과 더불어 타민족의 이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마구 등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는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게 되자 이에 대해 아랍인들이 유태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Ahad Ha'am)과 같은 일부 문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절대적인 공존을 천명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극도로 존중하여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태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너 그와 같은 공존론자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주장은 파급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 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新) 보수주의가 세계화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인 색채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정착된다. 이는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시오니즘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미국은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6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미국에서 시작된 신(新) 보수주의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쳐 수정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정계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려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살아 오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유태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유혈 충돌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엘리트들은 영국을 매우 미워하여 영국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유태인들을 환영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오니즘의 근간인 선민의식이 폐해가 어떤건지, 당시 아랍인들은 알지 못했고, 유태인들을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유럽에 팽배해진 반유태주의로 인해 빠르게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 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 시오니스트들의 관점과 맞물려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의 이민은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유태인들의 수효가 급증하고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건설되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아랍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토착 아랍인들에게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강요하게 되자 유럽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와 같은 시오니즘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과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 Husseini)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와 같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수정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영국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식민 당국인 영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적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측을 중재한 트럼프는 10일전,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양측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휴전 성사 이후에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병사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이 보복 공습을 감행해 가자지구 전역에서 최소 45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공보국은 휴전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을 80회 위반했으며, 팔레스타인인 최소 9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 이후 군 철수 경계선(Yellow Line)을 넘은 차량을 폭격해 일가족 11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격 이후, 휴전을 재개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또한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정 시오니스트들이 쏘아올린 아랍인과의 반목과 불신, 그리고 아랍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처절한 저항,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으며 이를 이용해 아랍인들을 미개한 2등 시민으로 취급하려는 이스라엘, 이들간의 관계에 있어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아무리 평화 협상을 주도한다 해도 상호 반목으로 인한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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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5
  • 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서아프리카의 대국 코트디부아르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다. 한 때 1970~80년대는 경제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카카오 생산국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먼저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 147.3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72년 309.3달러였다가 1979년 1,225.4달러로 7년 만에 4배나 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1,025.9달러로 처음으로 1,000달러를 넘겼을 정도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치고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국가였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장을 짓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하는 등, 프랑스의 제조업이 코트디부아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석유, 천연가스, 금, 망간, 다이아몬드, 구리, 철광석이 풍부하고 해상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하다. 물론 해저유전이나 가스전은 거의 프랑스가 위탁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러시아가 프랑스에 가스 수출을 중지했어도 프랑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로도 친프랑스 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왔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에 여러 부분에서 개입하고 간섭함으로 인해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립했어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00년대 들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국가다. 장기적인 정치 위기의 늪에 빠져 있었던데다 2002년의 민중 봉기에 이어 국토가 분할된 상태로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5년과 20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모두 정상적인 조건에서 치러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1999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권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특히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안정적인 독재에서 다원주의 정치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이 깨지게 된 것은 198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서부터다.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의 핵심부문을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경기 향방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978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화를 빌리면서까지 투자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왔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도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차용하여 카카오의 가격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 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나가자 외국 기업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단체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 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으며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보건소에 다녀오려면 돈을 내야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리니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의료 복지를 도입하다 실패하게 되었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 되어 대규모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고 결국 외국 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한 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독보적으로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내려 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자 거의 헐값으로 일하다시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폭동으로 번졌다. 이 때 많은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웃 국가인 말리나, 차드, 니제르 등 여러 이웃 국가들에서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부모를 당시에 잃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코트디부아르의 추락은 건국 이후, 무려 33년 동안 독재를 행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도 해결하지 못했다. 구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2023)가 대통령이 된다. 당시 재무장관이 현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였지만 베디에 대통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디에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친프랑스계파였다. 게다가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코트디부아르 경제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이끌었다. 그러나 베디에의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의존형 정책이었다. 프랑스의 복지를 코트디부아르에 정착시키려 했으며 상당수의 기업들과 공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를 파탄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와타라가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와타라는 프랑스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다변화 하는 경제 체제 및 미국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경제 침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와타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친미파로 분류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에 IMF 근무라면, 네오콘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와타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 와타라는 총리 겸 재무장관이었지만 1995년 12월 9일 알라산 와타라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만큼 장기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통치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에 북부 지역 무슬림과 이주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외국인을 배격했던 당시의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의 뜻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유지했지만 경제 정책은 여전히 프랑스 의존형을 유지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1999년 12월 24일 투오 포지에(Tuo Fozié)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고 로베르 게이(Robert Guéï, 1941~2002)가 대통령이 되었다. 권좌에서 추방된 베디에는 2000년 토고를 통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면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코트디부아르 헌법재판소에 의해 출마가 금지되었고 결국 대선을 보이콧하게 된다. 그런데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선거 현황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거대한 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이에 3일 동안 민중 봉기가 발생하여 로베르 게이 장군이 추방되고 그바그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추방된 로베르 게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사하라 지대로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그바그보의 정부군과 게릴라 전을 벌였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장기간 계속되고 결국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영광은 바닥에 쳐박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코트디부아르를 바로 잡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이가 전임 총리였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다. 그러나 그바그보에 의해 개정된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와타라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에 당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었던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는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007년에 대통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다. 본래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은 내전으로 인해 201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고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제3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놓였지만 더 이상의 내전을 바라지 않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와타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행히 와타라가 대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이 때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예전 6~70년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을 앞세워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번 해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코트디부아르 집권당(RHDP)에서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고,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 찰스 블레 구데, 기욤 소로 전 총리 등 다른 야당 후보 3명이 출마를 포기했고 야당 지도자 티잔 티엄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대표가 이중 국적 문제로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와타라의 4선 당선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여 진다. 결국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부흥을 성공시켰지만 2020년 3선 당시, 헌법의 자의적 억지해석으로 출마해 독재의 기반을 쌓았더니, 이번에도 4선을 통해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여겨 진다. 현재 그의 나이는 83세로 고령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88세까지 권좌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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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5
  •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지난 14일, 세계경제질서와 APEC 발전방안을 주제로, 현대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론에서부터 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와 APEC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단극 체제(Unipolarity)'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전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점에 있어 동의한다. APEC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세계의 다극으로 손꼽히는 4극 중, 3극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3극은 미국이 그동안 끌고 갔던 단극처럼 융화되기 힘들다. APEC은 QUAD와 AUKUS, OPEC, EU와 나토, BRICS7, G7, G20이 아니다. QUAD와 AUKUS, 나토는 미국이라는 단극이 주도해 나가지만 APEC은 아시아-테평양에 면해 있는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APEC은 중국과 러시아가 침체기 때 미국이 단극으로 끌고 갔지만 이제는 3극이 서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온전히 APEC이 단극의 편을 들고 가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고, 제1, 2, 3 도련선 내애는 중국의 편을 들지, 미국의 편을 들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 다극의 세계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APEC 소속 국가들의 입장 또한 국익과 필요에 따라서 다극에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곧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리멸렬 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다극화 시대에 과거 냉전처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제한된 질서(Bounded Order)가 생겨난다고 했다. 보통 강대국들이 언제나 그렇듯 질서와 거기에 편성된 룰을 만들어 나간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룰에 속해 있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선택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어샤이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전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또한 최소 이 점은 동의하고 있다. 다만 미어샤이머와 교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나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선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다. 중국, 북한, 러시아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에는 매우 멀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국과 절대적으로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을 이용해 이 세 나라를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핵이 들어온다면 이 국가들이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되어 상호간의 즉각 공조를 통해 압박할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긴장상태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미군과 미국의 자산들을 최대한 보호 및 축적할 수 있고, 최후방 기지로 일본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한국을 소모시켜가면서 미국의 동북아시아 내 영향력의 최전선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양을 발판으로 최대한 최전선을 구축할 수 있기에 한국은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에 미군을 위협하거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해에서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남한을 쥐고 있으면 북한을 고립시켜 속국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면 북한, 러시아, 미국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대만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는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그 세가 함께 약화된다. 그래서 내가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중국화시켜서 장악에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시키거나 영유화 시키고, 영향권 하에 놓게 된다면 미국은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가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북극항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미국을 일본에 묶어 둘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게다가 동해를 내해화 할 수 있게 되니 일본은 동해가 아닌 태평양으로 진출로를 자연히 바꿀 수 밖에 없게 되고, 북한 또한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전력이 일본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늘 말했듯, 이는 미국이라는 거대 강국 때문이다. 다극 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러-중 관계는 경쟁관계로 변화된다. 역대 역사적으로, 인류의 특성과 국가라는 집단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필연적이다. 이 때 서로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다극 강대국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키면 북극항로의 항행이 매우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권은 세계 3극의 헤게모니의 장이 될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인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한 현실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미야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맞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냉혹한 강대국" 3개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 비전도 명확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빈 니블릿 소장의 얘기는 그냥 미국과 밀착 동맹하여 모든 기간 산업들을 그냥 미국에 바치라는 그런 얘기들이라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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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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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24
  • 세계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 가고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 100세까지 임기가 보장된 92세의 현직 대통령의 8선째 당선
    지난 10월 12일 서아프리카의 또 다른 국가 카메룬에서 대선이 있었다. 이 대선에서 지난 11대 대통령이었던 폴 비야(Paul Biya)가 다시 한 번 당선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무려 8선이나 대통령을 해먹었고, 현 나이 92세로 세계 최고령 현직 대통령으로 세계 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카메룬의 대통령 임기는 7년이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 등록 제한 규정이 없어 무제한으로 후보 등록이 가능한 셈이다. 총리 재임 중이던 1982년 폴 비야는 대통령의 사임으로 직을 물려받은 이후, 43년째 집권 중이다. 이미 7년 전, 직전 선거에서도 71%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는 야권 후보가 11명이나 난립했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야권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등록을 거부하고 헌법위원회가 이를 인정하는 바람에 출마가 무산됐다. 사실상 폴 비야에게 대항할 의미 있는 경쟁자가 없어진 셈이다. 폴 비야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선거 유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또 다시 당선되고 난 후, 1933년 2월 생인 그가 사실상 100세까지 현직 대통령 직위를 보장 받게 된 셈이다. 이 같은 사태는 어느 누구라도 사실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은 지리적으로 사막과 밀림, 고원, 대서양 연안의 해안 지대끼지 다양한 기후 지역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한 국가 안에 열대지방, 온대지방, 해양성기후에 아열대 기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국가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250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프리카 대륙의 축소판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룬에서 100세까지 임기를 거칠 대통령이 출현하는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현 선거 결과 폴 비야 대통령은 승리했고, 내년 2026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임기가 시작된다. 폴 비야는 1982년 11월 4일에 첫 대통령인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Ahmadou Babatoura Ahidjo, 1924~1989)가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사의를 발표했기 때문에 총리였던 폴 비야가 1982년 11월 6일에 대통령에 등극했다. 이후 아히조는 1983년 4월에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다. 카메룬은 아프리카 내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는 아히조와 비야가 현재까지 카메룬의 국권을 지키며 내실을 든든히 다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된다. 1984년 1월 14일에 비야는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서 99.98%라는 경이적인 득표수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이는 북한에서 있을 법한 엄청난 득표율이다. 당연히 부정선거는 물론이고, 정상적으로 민주적인 선거기 치뤄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 때부터 폴 비야가 대놓고 권력투쟁에서 아히조를 압살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고, 카메룬을 통일시킨 공로를 가진 아히조에 비해 폴 비야는 파리정치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카메룬의 독립에 기여헸단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 폴 비야의 세력이 강해지자 아히조는 위기에 몰려 결국 병을 핑계로 사임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1983년에 군부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아히조가 관여했을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비야는 아히조의 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했고, 결국 아히조는 1989년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객사한 이후 현재까지도 고국인 카메룬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묻혀 있다. 이후, 1984년 아히조 대통령의 복귀를 노린 쿠데타가 있었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1988년 4월 24일에 카메룬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1982년에 집권한 이래, 1990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폴 비야는 다당제와 서구식 선거제도 등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이를 이용해 부정선거를 저질러 계속 대통령에 재선해 독재자로 변모했고, 2008년에는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며 영구 집권을 하게되었다. 이후 나이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통치 능력에서 문제가 있다는 논란과 경제난 속에 각계에서 사임 요구들이 지속되었지만, 비야는 이를 일축하면 독재를 계속했다. 지난 12일에 치뤄진 카메룬 대선은 왕정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자들이 집중되어 몰려 있는 말 그대로 고인 물의 아프리카 정치 상황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 세계에서 30년 이상 집권 중인 현직 대통령의 7명 중 5명이 아프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적도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대통령은 현재 나이로 83세로 계속 집권 중이고, 1979년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이던 숙부를 몰아내고 집권한 뒤 46년 동안 권좌를 수성하고 있으며, 아들을 부통령으로 앉히기도 했다. 그리고 콩고 공화국의 드니 사수응게소(Denis Sassou Nguesso) 대통령은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지만, 반군을 이끌고 내전을 일으켜 1997년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현 나이 81세다. 1986년 집권한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은 두 차례 헌법을 수정하여 3선 제한과 75세 출마 금지 조항을 모두 삭제해 40년 집권 시대를 열었고 현재 나이 81세이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내년 1월의 열일 우간다의 대통령 선거에도 재출마를 선언했다.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aias Afwerki) 대통령은 올해 나이 79세로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는 초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일 언급할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 또한 앞서 언급한 대통령에 미치지 못하지만 15년을 독재했고, 곧 있을 25일 대선에도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돼, 장기집권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와타라 대통령 또한 나이가 83세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 유독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독특한 지정학적인 배경과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장기 집권자들은 비판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면서도, 유력 인사들에게는 그만한 자리와 국가 이권 및 금전적 보상을 두둑히 쥐어주며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 토대를 구축했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부족적 혈연, 그리고 가족 중심의 씨족들과 향토 지역끼리 똘똘 뭉치는 연고주의 등을 이용해 가장 강력한 충성 엘리트 집단을 설계한다. 그러면서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군사쿠데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규군과 별개로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친위 부대들을 운영해 이들로 하여금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당수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근대 국가 역사는 매우 짧아 완연한 안정세가 필요하다는 점도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이처럼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들은 자신을 서구 열강에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끈 영웅이자 해방자 등으로 포장시켜 국민들에게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북한과도 매우 비슷하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을 독립투사 중 하나로 포장하여 영웅이자 해방자가 되었고, 그가 아니면 북한이라는 국가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삼았었다. 이런 것으로 보면 후진국과 후진국의 수장들이 독재를 일삼는 정치적 정당성은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불어 2011년 장기 집권 권력자들을 연이어 축출되었던 ‘아랍의 봄’은 사하라 이남으로 번지지 않은 이유가 인종과 종교, 사회 구조들이 이슬람 중심의 북아프리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정치적 민주화가 어렵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다. 아랍의 봄이 본격화 되던 2011년 UN의 도움으로 수단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남수단의 초대 지도자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대통령 또한 예정된 선거를 미루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의 길을 따라가려 한다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다. 참고로 그 또한 올해 나이 74세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지켜본 결과, 장기 집권하고 있던 아프리카 권력자들이 간간히 축출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가봉에서는 56년 동안 이어졌던 봉고 부자 대통령 시대가 2023년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완전히 종결되었다. 짐바브웨를 37년 동안 철권 통치한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1924~2019)도 2017년 서방이 조작한 색깔혁명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된 반정부 시위로 축출되었고 수단을 30년 동안 장기 통치한 오마르 알 바시르(Omar al-Bashir)도 2019년 쿠데타로 추방되어야 했다. 게다가 다른 대륙에 비해 전체 인구 중 젊은 세대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확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정치가 인터넷과 IT의 발달로 인해 선진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한다. 아프리카 각 국 국민들이 시위를 벌여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하거나 장기 집권이 저지되는 사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나 틱톡 같은 영상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예전처럼 철권 통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인도양의 섬나라인 세이셸은 지난 주에 벌어진 대선에서 야당 후보 패트릭 에르미니(Patrick Ermini)가 현직 와벨 람칼라완(Wavel Ramkalawan) 대통령을 누르고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2024년 마키 살(Macky Sall) 당시 대통령이 예정되어진 대선을 연기하고 장기 집권을 노리는 꼼수를 벌이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아프리카의 갈 길은 멀다. 카메룬의 폴 비야 대통령의 8선째 재선을 보며 카메룬의 미래가 암담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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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 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12세기 초에 편찬된『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최초의 루시 가문이 중심이 된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건국 배경에 대하여 여러 설화와 같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노르만 인과 슬라브 인의 통합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남하하였고 남쪽의 키예프를 장악하기까지 많은 통합전쟁이 있었다.『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했고 대다수의 북방 슬라브 인들과 루시 가문, 슬레비엔 가문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그가 키예프 지역에서 왕국을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노르만 인들을 초빙해서 통합 왕국을 세웠다는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 가문의 나라(Country family of the Rus)’가 건국된 것은 사실이나 건국설화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로마노프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사료 재(再)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류리크 왕조와 노르만 인으로 알려진 바랑기아 인들의 설화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어 진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가 엮여 있는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공후는 6세기 말에 나타난 폴리야닌(Poliyanin) 부족의 한 공후로 알려진 키 쉬체크(Kyi Shchek)와 키 코리브(Kyi Khoryv) 형제들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들어와 성을 축조했고 이들 형제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키의 형제들(Kyi of brothers)” 이라는 뜻의 키예프(Kive)로 전해지고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아바르 족과 하자르 제국 등 유목민족들과 유목국가들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반면에 다뉴브 강 유역과 비잔틴 제국 가까이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역으로 비잔틴 제국과 발칸 지역을 공격하는 공방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키예프 주변의 동 슬라브인들은 점점 내부 결속력을 다져갔다. 이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라는 연맹체의 시작이고 이 연맹체는 9세기 초에 이르러 동슬라브 여러 부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 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 인의 당시 남부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 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훈족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 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잔틴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911년 이후, 올레그는 912년 다시 5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크림 반도의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고르로 하여금 하자르 제국을 습격하여 하자르의 남동부 영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의 압박에 세력이 약화된 하자르 인들은 칸과 더불어 몇몇 영주들의 지휘 하에 서부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의 버리고 간 하자르 제국의 영토에는 키예프 공국이 접수하여 관할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자르 제국의 영역은 대부분 대(大) 모라비아 왕국이나 남부 판노니아 공국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건국되며 슬라브 화되거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자르 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하자르 제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968년에 보이는데 이후 하자르 족은 판노니아로 밀려들어온 마자르족에게 동화되거나 페체네그, 킵차크 인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2년 크림반도를 공격에 나선 올레그는 북 카프카스 인근까지 육, 해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전에 항복했던 아바르 족과 불가리아 제국의 포로들을 해군을 앞세워 키예프 공국의 남하를 막았다. 이로 인하여 아바르 인들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북 카프카스에는 아바르 족이라 불려지는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아바르 인들과 불가리아 포로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3세기부터 몽골 인들의 침입 시기부터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게 된다. 올레그는 바다에서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고 아바르 인과 불가리아 인들의 파상 공세로 인하여 해군으로써 크림반도 상륙에 실패했다. 그러자 육군은 크림반도 입구에까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도륙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약탈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크림반도 입구 지역으로 이주시켜 비잔틴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유도했다. 한편 판노니아 지역의 마자르 족은 키예프 공국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키예프 공국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자 올레그는 913년 초 마자르 족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했고 출정 도중 사망했다. 이러한 올레그는 영웅상은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은 불명확해보이나 르네 그루쎄 등의 유라시아 유목사학자들은 이러한 올레그에 대해 카프카스의 비잔틴을 공격했던 영웅이라는 북 카프카스 지역의 설화를 일례로 들어 올레그의 영웅상이 실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Kokovtsov P. S. 는 올레그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을 참칭한 자라고 발표하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와 가까운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Gregoire, H.는 올레그를 슬라브 인이 아닌 다른 민족, 노르만 인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보이며 10세기경 자료들이 상당수가 북유럽과 폴란드의 노르만으로 정의하고 기존의 한자 동맹 출신의 노르만 인들과 분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이들의 언어는 어족부터가 중세 슬라브어와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노르만인이 지배층이고 슬라브인이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올레그가 913년에 사망하자 루리크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올레그의 손에서 키워진 이고르(Igor)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고르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헌과 라틴 문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인생의 절반 정도는 전설적인 올레그에 비하여 이고르는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으로 검증된 보다 실증적인 통치자라고 하겠다. 이고르란 이름은 영어 기준으로 철자가 Igor 로 우크라이나에서는 Igori 라고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노르만 형식의 이름으로 북유럽의 뛰어난 전사를 Igoru 라고 한다. 이는 아스가르드를 지키던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Tore)를 노르웨이에서 바다의 전사라 하여 Igoru 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알려진 노르웨이 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고르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리며 그를 노르웨이계로 추정했다. 그래서 류리크의 유일한 직계 혈통으로 노르만계가 최초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지위를 승계하게 된 것이다. 이고르는 주변의 투르크계, 슬라브계, 아바르 인을 통합하여 이들 족장의 딸과 연속으로 결혼했다. 이는 혈통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혈족 중심의 왕조를 운영하고자 하는 포석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이고르는 페체네그 등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을 키예프 공국에서 최고위 관료의 칭호 겸 동부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칭호인 지기트(Jigit)를 하사했는데 이 지기트는 ‘외로운 늑대’ 혹은 ‘카프카스의 전사’를 뜻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고르는 94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내치를 다지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처럼 우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대(對)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개감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를 위해 러시아 각 평원의 경우 유목경제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에 대해 소탕하면서 내부의 위협을 방지했는데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연도가 각 학계의 연구에 따라 갈리고 있다. 특히 헝가리 학계에서는 970년대로 잡는 반면 러시아 자료는 930년대 초반을 소멸 연대로 잡고 있다. 이고르는 일부 정착세력과 옛 로마인들로부터 농업을 장려했다. 특히 서프랑크 제국의 사절들은 농업적인 부분에 있어 생산력 증대에 관한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 인하여 키예프 공국의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동프랑크 제국의 사절에게는 라틴어를 보급 받음으로 인하여 공식 문서를 라틴어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라틴어 문서들은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로부터 키릴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개종을 신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락하여 로마에서 보내진 비토리오(Vitorio)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고르가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카톨릭 관할구가 생성되었고 이후 헝가리 왕국이 세워지면서 헝가리 카톨릭 관할구에 합병된다. 그리고 이고르는 판노니아를 장악한 마자르 족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르 족과 동맹에 이어 발칸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왕국과 연달아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발칸 지역과 마자르의 문화 받아들였고 반면 카프카스 지방과 비잔틴 제국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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