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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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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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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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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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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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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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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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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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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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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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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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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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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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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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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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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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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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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힘의 대선 주자가 김문수 후보로 결정
- 국민의 힘의 대선 주자가 김문수 후보로 결정되었다. 결정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은 김문수의 지지율이 야권의 이재명과 대결하기에는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당적도 갖지 않은 한덕수를 끌어들여 날치기 대타로 삼으려 했겠는가? 그러고 보면 2025. 6.3 대선에 대해 여권이 대단히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경우 그들은 이번 대선을 하나 마나한 선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문수에 대한 여권의 기대가 바닥일수록 야권 입장에서 볼 때는 오래간만에 손에 물 안방을 묻히지 않고 대권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냐고 희희덕 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만약 야권이 그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큰 오산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김문수는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김문수는 민청 세대이자 노동 운동 1세대 출신이다. 그는 이재오와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다가 실패한 후 김영삼이 3당 합당 당시 영입하면서 좌에서 우로 갈아탄 인물이다. 한 마디로 극좌에서 극우로 노선을 전향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 노선 전향만으로도 그가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수단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인지 알아야 한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생각이나 태도도 얼마든지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죽일 듯 살릴 듯 경쟁하던 한덕수를 대선 위원장에다 사부로 삼겠다고 한 것이나 과거 자신의 인기와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전광훈 같은 극우 종교인과도 손을 잡은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이재명을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 이재명 전선을 펼쳐서 빅텐트로 온갖 인물들을 모을 것이다. 이재명 역시 그 못지않게 유연한 편이지만 그가 오른쪽 깜빡이 몇 번 켠 것 가지고 당장 우경화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민주당 측을 보면 김문수 쪽이 한 수 위가 될 수도 있다. 보수의 단점이자 장점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김문수는 이런 일에 특화되어 있는 인물이다. 두 번째, 김문수는 3선 의원에다가 경기도 지사를 2번이나 연임을 했다. <한겨레>가 판검사 출신의 화려한 브랜드가 즐비한 국민의 힘의 보수 세력이 길거리 투사에다 사상도 모호한 김문수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적은 것은 완전히 오산이다. <한겨레>는 여전히 5.3 인천 사태를 주도한 김문수에 머물러 있지만, 김문수는 대구 경북 고와 서울대 출신에다가 그 이상으로 화려한 정치인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이번 경선에서 그가 꺾은 인물들은 나경원과 한동훈, 홍준표와 안철수 등 보수 여권 내 지분을 가진 쟁쟁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경선에서 졌지만 비대위가 후보 바꿔치기를 하려는 것에 분노하면서 일제히 김문수 편을 들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문수의 배경에는 한덕수를 지지한 거대한 음모 세력 못지않은 당내 배경이 뒤받치고 있다. 따라서 김문수가 대선 후보로 나서는 순간 한덕수가 후보 될 때 보다 훨씬 더 국민의 힘이 똘똘 뭉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밀고 들어오는 적진 앞에서 일치단결해 죽기로 싸우려는 세력을 꺾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김문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든 헌신적으로 올인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칸트는 일찍이 선의지가 전제되지 않는 용기와 역량, 성실과 노력 등 고대인들의 덕은 그 자체로 더 큰 악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김문수는 이런 비난의 전형적인 표적이 될 수 있는 인물일지 모른다. 그가 여러 차례 옻을 바꿔 입으면서 했던 일에서 보여주었던 헌신과 희생, 그리고 열정과 노력은 그 방향성만 문제 삼지 않는다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가 경기도 지사로 2번이나 재직할 때 열심히 일한 공적은 쉽게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문수는 2009년 한국 메니페스토 운동 본부에서 평가하는 공약 이행도 평가(공약 이행 2년 차 목표 달성 최우수, 주민소통-민관협력 최우수, 웹소통 최우수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런 인물은 일벌레라고 할 만큼 일 하나만은 죽도록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과거 심상정은 김문수에 대해 "김문수는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전설, 하늘 같은 선배"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런 열정과 헌신을 가지고 그가 이번 대선에 어떻게 임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 김문수는 보이지 않는 세력의 사주를 받은 당 비대위의 날치기 후보 교체로 인해 벼랑 끝까지 밀렸지만 특유의 뚝심과 진정성으로 당원들의 지지를 끌어내어 반전 시나리오를 썼다. 절차적 정의에 호소함으로써 권력 약세를 뒤집은 이번 시나리오는 한국 정당사에 기록될만한 쾌거이다. 이로 인해 그는 단박에 많은 국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면서 중간지대를 견인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현재의 지지율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결코 안 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경우 일단 대선 레이스에 들어가면 단숨에 그 골이 메워지면서 1-2% 수준의 미세한 차이로 진행될 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후보가 중간 지대를 제 편으로 끌어당기느냐에 의해 결정이 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진정성과 헌신 그리고 비전을 어느 후보가 더 잘 보여줄 수 있느냐가 결정하는 것이다. 결코 김문수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기름 장어 한덕수보다 김문수가 열배 이상으로 파괴력이 있다. 이재명은 그의 장단점을 냉정하면서도 치밀하게 분석해서 선거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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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힘의 대선 주자가 김문수 후보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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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지안테프 대지진 당시 한국에서 터키에 보내는 구호품과 기부 문제
- 내가 이 기사를 보고 참담함을 금치 못했는데 한국에서 기부(Donation)에 대한 의식과 관련된 만연해진 풍조가 있다. 인류 사회에서 어떠한 의식이 형성이 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문화로 자리 잡는다. 기부도 마찬가지다. 기부 문화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평소 그 나라 국민들의 기부에 대한 의식과 인식이 어떤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럼 한국의 기부 문화와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의식이나 인식은 어떨까? 한국에서의 기부(Donation)에 대한 인식은 말 그대로 내가 나보다 못한 자에게 베푸는 일종의 "생색(Patronage)"에 가깝다. 뭔가 내가 베풀었다는 보여주기 식이 대부분인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부를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내가 본 대다수의 사람은 순수한 의미의 기부와 봉사보다는 자신의 커리어를 위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기부나 봉사를 하는 것이다. 이 순수하지 못한 발상은 어떠한 목적이 행해지도록 만든 과정이라는 것에 그칠 뿐, 진정 어린 마음이 없다. 일반적으로 자선이나 대의를 목적으로 대가 없이 내놓는 것이 기부인데 많은 한국의 기부자들은 대가와 보답을 바란다. 물론 대놓고 직접적인 보답이 아닌 간접적인 대가와 보답이다. 예를 들어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기부 중, 이미지 메이킹(mage Making)이나 이를 이용한 이미지 세탁을 위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즉,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이 의미는 프랑스의 작가 겸 정치가인, 레비 공작 피에르 가스통 마르크(Pierre Marc Gaston de Levis, 1764~1830)가 1808년에 『격률과 교훈(Maximes et reflexions sur differents sujets)』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사회주의적, 자유 민주주의적 등의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상류층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사회에 공헌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상류층이 아닌 일반인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의 실천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이를 상류층이 거지에게 적선하듯 베풀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천될 수 없다. 받은게 있으면 솔선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의미를 마치 "적선"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내어 같은 위치에서 그 아픔을 어려움을 함께 나눈다는 식으로 접근해야지 위에서 아래에게 베푼다는 방식은 그 위치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갑질한다는 의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와 구호의 목적은 "같은 위치에서 그 아픔을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져야지 그 외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거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목적을 세우는 것은 결코 좋은 행위가 아니다. 터키와 시리아의 대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보내는 구호품에 더러워진 옷들이나 짝을 잃어버린 여름 신발 등이 가득하다고 한다. 이는 자기가 쓰다가 선심쓰듯이 버릴 곳이 없어서 터키와 시리아에 버리자는 것과 같다. 현재까지 터키로 전달된 국내 구호물품만 40톤 가까이 되는데, 이 가운데 10% 정도는 못 쓰는 물건들이라 한다. 이는 평소 한국인들의 구호 물품 보내거나 기부할 때 자세가 고스란히 나오는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듯이, 이 온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갑질이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제적 이미지를 더럽게 만드는 민낯이다. 한국의 기부문화, 스스로 정제하여 뭔가 바꿔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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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지안테프 대지진 당시 한국에서 터키에 보내는 구호품과 기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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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함 사건으로 인한 국공분열과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 장개석의 종결된 밀월, 네 번째 이야기
- 북벌 문제와 쿠이비셰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장개석과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장개석과 소련 사이에서도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6년 3월에 들어서자 공산당의 정치주임 교관 고어한이 황포군관학교가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하였고 노골적으로 "국민당 안에도 한 사람의 돤치루이(段祺瑞, 청나라 말기 안휘군벌의 수장으로 중화민국의 임시총통으로 지냈다가 숙청된 인물)가 있다. 북방의 돤치루이(段祺瑞)를 타도하려면 먼저 내부의 돤치루이(段祺瑞)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국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월 3일, 장개석과 돈독하게 지내던 미하일 보로딘이 소련 본국의 소환에 따라 귀국한다는 구실로 인해 중국 북방으로 이동하고 적대적인 쿠이비셰프가 소련 고문단장이 되자 장개석의 불안감은 소련에 대한 불신으로 변했고 이러한 불신은 더욱 심화되었다. 소련 당국이 미하일 보로딘을 소환한 것은 중국의 적화가 늦어지고 있다 판단하여 그에 대한 문책으로 소환을 감행한 것이다. 3월 7일, 황푸군관학교 교육장이자 국민혁명군 정치부 주임이었던 덩옌다(鄧演達, 1895~1931)가 장개석을 비방하는 잡지 등이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고 보고하게 된다. 덩옌다는 공산당원으로 훗날 장개석과 대립하다가 장개석에게 처형된 인물이다. 이 시기의 장개석 음해하는 각종 선전, 선동에 대해서 중화민국 측은 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을 정도였다. 조너선 펜비가 저술한 <장개석 평전>에 따르면, 이 때 장개석을 노린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공산당의 갈등을 비롯한 온갖 정치적인 난관으로 인해 장개석은 극도의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었고 중산함 사건 직전에는 산터우(汕頭)로 가서 요양할 것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장제스의 비서가 된 천리푸(陳立夫, 1900~2001)는 장개석이 당시에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에 시달렸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한편 공산당이 북벌에 반대하고 있는 사실에 분노한 장개석은 2월 1일 국민혁명군 총감 임명을 거부하고 2월 2일, 광저우 위수사령관 및 군사위원회 위원 자리도 사직하겠다고 나서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공산당과 정면대결을 벌이려고 했다. 더불어 왕징웨이가 이에 답하지 않자 2월 27일,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찾아 사직서의 수리와 북벌에 반대하는 쿠이비셰프의 귀국 중 선택하라며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장개석과 왕징웨이 간의 관계 악화는 단순히 왕징웨이가 쿠이비셰프 등 소련 고문들의 말에 혹하여 북벌을 외면한다는 장개석 측의 주장보다 더 복잡한 정황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국민당 내부에서 장개석이 가장 강력한 군부에서의 실력자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탄옌카이(譚延闓), 리지선(李濟深), 주페이더(朱培德)를 비롯한 무시할 수 없는 장개석 못지 않은 군사 실력자들이 존재했다. 왕징웨이는 이들 사이를 중재하며 권위를 행사하곤 했는데 이는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장개석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왕징웨이가 여러 군사 실력자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장개석에게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그를 통제하기 어려우니 탄옌카이(譚延闓), 리지선(李濟深), 주페이더(朱培德) 등을 이용해 장개석을 견제했다. 왕징웨이는 이러한 군사적 권위의 확보를 쿠이비셰프와 협력하여 행했고 장개석은 왕징웨이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노하며 그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2월 중순, 장개석은 이와 같은 정치적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왕징웨이와 상의했다. 왕징웨이는 장개석의 소련 외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장개석은 문건을 정리하고 여행비를 홍콩 달러로 환전한 다음, 부두로 향하게 된다. 그때 비서 천리푸가 광저우에 머무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물었고 한참을 고민한 장개석을 차를 다시 광저우로 돌렸다. 그리고 장개석은 자신이 소련 외유를 취소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이때, 만일 내가 광동을 떠나지 않으면 뜻밖의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직이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았다. 만일 스스로 광동을 떠나면 직무를 포기하고 달아난 죄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장개석은 왕징웨이와 소련이 합작하여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이는 끝도 없는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이러한 두 인물의 충돌이 격화된 사건은 왕마오궁(王懋功) 사건이 발단이었다. 원래 왕마오궁은 쉬충즈의 부하 출신으로, 쉬충즈 숙청 이후 제1군 2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장개석은 그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고 있다 생각하여 광저우 위수사령관 대리로 임명할만큼 신뢰했다. 그런데 왕징웨이와 쿠이비셰프가 왕마오궁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3만 위안의 군비를 지급하자 이에 격분한 장개석은 왕마오궁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쿠이비셰프가 사주해 국민당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2월 26일, 왕마오궁을 체포하여 2사단장 자리에서 해임했으며 이 사건을 두고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장개석이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장개석과 왕징웨이, 공산당의 갈등이 깊어지던 가운데 중산함이 출항하게 된다. 중산함은 원래 영풍함 사건 때 쑨원의 목숨을 구할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운 기함인 영풍함으로 쑨원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쑨원의 호인 중산(中山)을 붙여 중산함으로 개명되었다. 중산함이 출항하게 된 경위는 1926년 3월 18일 오후 6시, 황푸군관학교 교통계 직원 리스융이 교장판공청 주임 쿵칭루이에게서 상선 한 척이 습격을 당했으니 순시선 1척과 위병 16명을 파병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이에 리스융은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 사무실에 전화해 순시선 파견을 요청했고 광저우 판사처 교통계 직원 왕쉐천(王薛晨)이 이를 교통계장 어우양중(歐陽中)에게 보고했다. 이때 전화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왕쉐천은 이러한 파견 요청의 주체가 교육장인 덩옌다라고 생각하여 보고하고 해군국에 교섭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교섭을 기다리지 않고 순시선 1척을 파견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해군국을 찾아간 어우양중은 마침 자리를 비운 해군국장 리즈룽 대신에 해군국 참모청 작전과장 쩌주이에게 자신의 직원이 교육장으로부터 교장의 명령을 전달받았다고 하면서 병함 2척을 황푸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을 들은 쩌우이는 상황이 급박할지도 모른다 여겨 보벽함을 황푸로 파견한 다음에 리즈룽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알리고 중산함과 자유함 두척 중 어느 배를 보낼 지 결정해달라고 하였다. 리즈룽은 자유함을 파견하기 위해 함장 셰충젠과 접촉했으나 자유함이 수리 중인지라 중산함을 보내기로 하고 어우양중에게 정식 공문서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보벽함과 중산함 함장에게도 공식 명령서 교부를 요청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순시선 한척 파견 요구가 병함 두어척 파견 요구로 바뀌고, 교장판공청 주임의 요청이 교육장을 통한 교장의 명령으로 바뀐 것이 보인다. 8시 30분, 해군국으로 돌아온 어우양중이 10시에 황푸로 전화해 해군국과 교섭하여 병함(보벽함) 1척을 보냈으니 12시 쯤 도착할 것인데 보초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조치해달라고 전했다. 중산함은 19일 오전 7시에 출항, 황푸에 도착했다. 황푸에 도착한 후 대리함장 장퉁신은 교육장 덩옌다를 만나려 했으나 그와 일정이 맞지 않아 부관 황전우를 대신 만났다. 장퉁신은 황전우에게 리즈룽의 명령서를 황전우에게 보여주고 장개석의 명령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리즈룽은 소련의 조사단이 중산함을 시찰하려 한다는 쩌우이의 보고를 받고 장개석에게 중산함을 회항시켜도 되겠느냐고 전화로 묻게 되었다. 당연히 배의 출항을 명령한 적이 없었던 장개석은 매우 경악하게 된다. 이처럼 중산함의 출항은 오해로 빚어진 단순 사고로 보였다. 그런데 장개석의 주변에는 매우 정황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1926년 3월 18일 아침,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장제스의 집에 2시간 동안 5차례나 전화하여 장제스의 일정에 대해 물은 일이 발생했다. 전화가 왔을 때 장제스는 부재 중이어서 장제스의 아내 천제루가 전화를 받았다. 천비쥔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전화했다고 하면서 장제스가 언제 황푸로 가는지, 어느 부두로 가는지를 물었다. 천비쥔은 매우 부유한 상속녀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장개석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해서 적대적인 회고록을 남긴 천제루조차도 그 날 천비쥔의 전화는 매우 수상했다는 회고를 했을 정도다.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에 전화를 걸자 중산함이 황푸 섬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공산당원 후궁몐 긴급하게 대화를 나눈 뒤, 정체불명의 전화가 장개석의 행방을 추궁하자 그는 집을 뛰쳐나갔다. 그 사이 덩옌다가 장개석의 집을 방문했고 비서인 천리푸는 "덩옌다가 장제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마치 그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사전에 알고 있는 듯했다." 라며 그가 가장 의심스러웠다고 전한다. 장개석이 집에 돌아온 뒤인 오전 10시, 리즈룽이 전화 상으로 전날 밤 황푸에 파견한 중산함을 돌아오게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장개석은 회항을 허가한다. 저녁 6시가 되어 중산함은 광저우로 돌아가긴 했으나 군함의 증기를 끊지도 않고 무기도 전투대형으로 배치해 놓게 되자 장개석은 자신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해 장개석은 광저우로 가게 된다. 해군학교 부교장이자 쑨원주의학회 회원 어우양거(歐陽格)에게 함대사령 권한을 부여하여 중산함을 진압하고 리즈룽을 구속, 심문할 것을 지시하여 그를 체포했다. 평소에도 자신의 군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공산당이라는 것을 파악한 장개석은 국민당 곳곳에서 형성된 공산 세력을 돌파하기 위해 1926년 3월 20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산함 사건에 이은 3.20 쿠데타로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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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함 사건으로 인한 국공분열과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 장개석의 종결된 밀월, 네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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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한민족 조상들이 전염병을 대처한 자세
- 문화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전염병은 중세 유럽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전염병의 공포로 인해 호환마마(虎患媽媽)라는 성어가 나타났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유행했던 페스트보다는 그 임펙트가 약했지만 전염병으로 인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다. 호열자(虎列刺)와 같은 콜레라 증상이 한동안 조선 시대를 강타했던 적이 있었으며 호흡기 질환을 총칭하는 역병(疫病)이 동아시아권 전체를 뒤덮은 적도 있었다. 기근과 전염병 및 역병은 거의 동반되어 오는 편이 많고 기근으로 인하여 잘 먹지 못했기 때문에 면역력도 약화되어 희생자도 상당수 나왔다. 천연두의 경우, 요행히 낫는다고 할지라도 이마에 마마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을 정도로 신체에 생체기도 생기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전염병에 약도 없었지만 일찍 주민들을 격리시키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과 가옥은 모두 불태웠으며 사방 수십리에 걸쳐 방역에 힘써왔다. 그리고 옷을 자주 빨아입었고 화장실 (칙간) 이라는 것도 존재했으며 목욕도 의외로 자주했다. 그에 비하면 서양은 옷이 더러워지면 귀족의 경우, 새 옷을 입고 더러워진 옷은 버리는게 일상이었으며 일반인들은 귀족이 버린 더러워진을 옷을 주워 입고 마르고 닳도록 자손들에게 대물림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목욕은 이교도의 풍습이라 하여 자주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으슥한 곳 어딘가에서 용변을 보기도 했다. 그러한 비위생적인 풍경은 현재 인도에 가면 시골 어디든 볼 수 있는데 인도의 그 비위생적인 풍경이 유럽 중세 시대 풍경과 비슷하다 보면 될 것 같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돌았을 때 격리 장소는 성 안 통로 어딘가였지만 우리는 조선 시대만 해도 마을 밖 수십리 떨어진 곳에 격리시켰고 역병이 발생한 마을을 모두 소개시켰다. 그러나 유럽은 성 내부였기 때문에 소개 자체가 불가능했고 격리 방식도 집단으로 몰아 넣었기 때문에 집단 감염자들이 속출해 성 전체로 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시대 때 여러 명을 한꺼번에 집단으로 격리시키지 않고 한 집당 같은 증상을 보이는 자 3명 이내로 축소해서 격리시켰다. 조선 시대 효종 때인 1653년 봄 황해도에 문둥병이 크게 유행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자 임금이 어의 안경창에게 명하여 당시에 유행하는 전염병의 특성과 조선의 실정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풍토와 조선인의 체질에 알맞은 치료법을 담은 책을 펴냈다. 효종 때 지어진 <벽온신방(壁瘟新方)>은 전염병과 기근 등 재난에 대비한 방역전문서로 현존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런 방역전문서가 같은 시기 중세 시대나 심지어 18세기까지 전무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역사상 최고의 명의(名醫)로 알려진 허준은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이란 의서를 편찬하여 보급했다. ‘벽온방’은 온역(溫疫) 즉 전염병을 막는 비방이라는 뜻이다. 광해군 때 전염병이 돌면 백성들한테 전염병 예방 의서인 <간이벽온방>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전국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백성들 모두가 이 이 의서를 읽고 병에 대처하라고 한 것이다. 역대 조선의 왕들은 전염병에 대한 대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왕조실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히 일례로 <세종실록>에도 전염병에 대한 세종대왕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고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도 전염병 구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은 기록에서 전염병을 구제하고 약을 보내게 한 기록도 많으며 발병과 사망자 수 상황을 파악하려는 노력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초기 발병을 진화하는 노력과 보고를 소홀히 한 관리에게는 엄한 꾸중을 했던 기록도 있다. 이런 기록들로 보면 서양과는 다르게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염병에 대한 대처가 매우 기민하고 그 지침도 구체적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 비교했을 때 각종 전염병의 대처 상황을 문화적인 미개함과 발전함의 우생론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전염병에 대한 대처 문화, 그리고 시민들의 전염병에 대한 인식 수준 차이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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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한민족 조상들이 전염병을 대처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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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 전승절 행사 이후에 나온 행진의 의미
- 매년 5월 9일은 러시아의 승전기념일이다. 여기서의 전쟁은 나치 독일군의 공격을 물리친 제2차 세계대전이다. 아시아 지역에 있는 우리나라는 일본이 항복했던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지만, 유럽에서는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 혹은 9일을 승전기념일로 축하한다. 날짜가 다른 건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시점의 현지 시간을 고려한 것이다. 즉 독일보다 시간이 빠른 러시아는 구소련국가들과 더불어 9일에 기념하고, 다른 서유럽 국가들은 8일에 기념하고 있다. 1940년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한 후 프랑스로 진격하여 파리를 점령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주 반에 불과했다. 반면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던 소련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들어온 1941년 6월 22일부터 소련군이 프루트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진격해 나간 1944년 4월 8일까지 소련군과 시민들은 소련 땅에서 독일군 주력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년에 달했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이었던 것은 사망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5,000만~7,0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중 소련인 사망자 수가 2,500만~2,70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략적으로 말해, 전체 사망자 수의 절반이 소련인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포위하에 2년 반 동안 봉쇄되었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만 해도 적게는 64만명, 많게는 15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량, 연료, 의료품의 공급이 끊긴 상태로 버텨야만 했으니 아사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 또한 매우 격렬했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소련 침공 10여 일 뒤인 1941년 7월 3일 대국민 라디오 연설에서 "이는 보통 전쟁이 아니라 총력전, 전체 소련 인민의 전쟁이다. 소련의 자유냐, 독일 지배하의 지배하에 복종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Это не обычная война, а тотальная война, война всего советского народа. Выбор стоит между свободой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и подчинением немецкому господству)." 라고 소련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과 전쟁에서의 공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제3국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랫동안 소련과 대결한 서방 진영에 속한 국가들은 흔히 제2차 세계대전을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과 나치 독일군의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다. 독일군이 패한 것도 1944년 6월 미국과 영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전황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체 사망자는 6,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중 40% 이상이 소련인이었다. 군인들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물론 일반인들이 후방 유격대 활동, 적군의 보복, 강제 노역, 포격, 굶주림과 추위 등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처럼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기억이 비통하고 엄숙할 수밖에 없고, 승전 기념일이 가장 큰 국경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대조국 전쟁은 애국심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은 소개되지 않은 채 그 처참한 전쟁터 속에서 살았으니, 아이들은 얼어붙어 있는 시체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수하고 획득한 승리인 것이다. 소련군 지휘관과 사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심한 기아를 겪으면서도 버텨 준 레닌그라드 시민들,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목숨 걸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게릴라 대원들, 여성임에도 전쟁터에 자원해서 간호병, 통신병, 심지어 전투원이 된 그녀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련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오늘날 ‘대조국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자국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꼽는다. 그래서 매년 5월 9일이 되면 전 세계의 러시아인들은 광장에 집결하여 대조국 전쟁 (소독전쟁)에서 희생한 자신의 가족, 친지, 그 외의 인물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거리를 행진한다. 서서히 돌아가신 분들의 희생과 대조국 전쟁이 잊혀갈 때쯤 파시즘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의 넋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몫임을 깨닫고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면서 2차 대전의 사건들이 왜곡되는 것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 시민들은 거리에 나섰다. 이것을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라고 하는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이 행진에 가장 선두에 선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인 드미트리 안드레예프(Дмитрий Андреев)는 현재의 러시아에 있어 승전 기념일은 러시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민족 통합 전략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승전기념일과 그를 둘러싼 기억 공간은 국민적 화합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군사 퍼레이드, 불꽃놀이, ‘불멸의 연대’ 행진 등, 이러한 의식들을 통해 공동의 기억으로 인해 사람들을 하나로 단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이러한 의식들을 국민들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최대한 활용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군사 퍼레이드 개최 등 승전기념일을 최대한 성대하게 치르려는 러시아 당국의 노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현장에서 퍼레이드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때로는 불만을 늘어 놓기도 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블로거 일리야 바를라모프(Илья Варламов)에 의하면 행사에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사람들이 아니라 TV 화면을 위한 행사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또한 당국이 ‘기억과 추모의 날’인 승전 기념일을 ‘군사력 과시’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우리 한국도 국군의 날에 군사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이런 퍼레이드하면 전체주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폭주할텐데 이 퍼레이드 기간동안 오히려 잠잠하다. 한국의 보수우파들 내에서도 비난이 많을 것 같은데 오히려 이에 대한 비난은 없다. 소위 문재인이나 이재명이 아닌 윤석열이 대통령이었던 시절에도 보수우파들은 비난하지 않고 따라가는 분위기다.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전유물인 군사 퍼레이드에 대해 비난이 없는 것을 보니까 대한민국의 보수우파는 그저 좌파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용인되는 집단이 맞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문재인이나 이재명이 이러한 퍼레이드를 했다면 아마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전유물인 군사 퍼레이드를 한다고 역시 공산주의자가 맞다며 비난했을 것이다. 이처럼 소위 "빨갱이"의 전유물인 군사 퍼레이드도 보수우파에서 출마해 당선된 대통령이면 보수우파들의 비난도 사라진다. 그런데 국군의 날, 군사 퍼레이드를 기획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할려면 제대로 해야한다. 러시아는 이 행사가 끝나면 "불멸의 연대" 행사와 행진을 한다. 시민들이 전쟁에서 전사한 애국 장병들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도 6.25 때 전사한 장병들, 연평해전, 천안함 사진들 있다. 들고 나와 행진하면 된다. 이와 같은 행사까지 하면 완벽하다. 이와 같은 행사들을 벤치마킹하여 한국 만의 것으로 만들어 그 전통을 가지면 아이들에게 애국심도 키워주고, 어른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싸웠던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것이 되니 그로 인해 국민 대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다. 정치적으로는 내부결속을 다지고 외부에는 주적인 국가들에게 대한민국도 이 정도의 국방력을 가지고 있다며 일종의 보여주기식 무력시위도 될테니 이와 같은 퍼레이드 행사는 일거양득(一擧兩得), 양수겸장(兩手兼將)이다. 대한민국도 러시아가 울고 갈, 아주 멋있는 퍼레이드를 광복 80주년인 올해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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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 전승절 행사 이후에 나온 행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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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2025년 현재의 분쟁, 2019년의 분쟁과 유사한 성격
-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유권 분쟁 중인 카슈미르 지역에서 총기 테러가 발생한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무력 충돌이 지속되어 민간인들의 피해가 계속 커지고 있다. 어제 7일에는 인도군은 이날 새벽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내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는 기반 시설 등 9곳을 공격하는 ‘신두르 작전’을 개시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신두르는 인도 여성들의 미간에 붉은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결혼한 여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작전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마도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된다. 인도 이미 결혼한 신부나 마찬가지인 카슈미르를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간에 점을 찍기 때문에 테러 분자들의 중심지를 공격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 하겠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참모총장의 발표에 의하면 이날 인도의 위법적인 군사 행동으로 인해 민간인 26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인도 경찰 역시 파키스탄의 맞대응 포격으로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10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이를 종합하면 현재까지 집계된 양국 사망자 수는 36명, 부상자는 94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양국은 핵을 가진 핵 보유국이다. 언제든,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위험성이 감지되고 있는 국가들이라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 모두 핵 전쟁은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핵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분쟁을 보면 묘하게 6년 전에 발생했던 카슈미르 분쟁과 닮아있다. 때는 2019년 2월 14일, 인도의 잠무-카슈미르 지방 경찰학교에서 차량을 이용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인도 경찰 36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5년에는 총기 난사로 인한 사건이지만 이 때는 자살폭탄 테러로 인한 사건일 뿐, 테러의 매개체 다를 뿐이지 일어난 상황은 2025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도 인도 당국은 테러의 배후지로 파키스탄을 지목하게 되는데 이 때도 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한 보복을 천명하여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2019년 2월 26일, 인도 공군은 1971년 이후 48년 만에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미라주 2000 전투기 12대로 접경 지역인 카슈미르 주 바라코트 지역에 있는 테러리스트 단체 '자이시 에 무함마드(Jaesi-e-Muhammad)'의 캠프에 SPICE-2000 유도 폭탄 수 발을 폭격했다. 당시 인도 공군 측에서는 공습 대상이 잠무-카슈미르에서 폭탄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파키스탄의 테러 조직 훈련 캠프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측에서는 애초에 그와 같은 테러 시설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당시 인도군의 발표에 의하면 이 공습으로 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양국간 총격전까지 발생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도군의 공습은 숲에 떨어져 숲의 나무들만 상했다. 즉, 목표였던 테러단체 캠프가 아닌 것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환경파괴 혐의로 유엔에 인도를 제소하겠다고 조롱하기도 했는데 이는 인도 측이 테러단체를 노린 것보다는 파키스탄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고자 하는 일종의 메시지라는 측면이 더 강했다. 이에 2019년 2월 27일, 파키스탄 공군은 전날 있었던 인도의 공습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파키스탄 공군 전투기들은 인도 영내의 공터를 폭격했으며, 이 같은 공격 과정에서 자국 영공에 침입한 인도 공군의 MiG-21 2기를 격추시켰다고 발표했다. 1대는 파키스탄 영토에 떨어졌고 나머지 1대는 인도 영토에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더불어 파키스탄 군 대변인 가푸르 소장은 인도 측 조종사 1명을 지상에서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파키스탄은 영공을 봉쇄하였으며, 인도 역시 델리 이북의 민항기 이륙을 모두 금지시키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시 인도 공군의 발표에 의하면 인도의 MiG-21이 파키스탄의 F-16 1기를 격추시켰으며 이후 파키스탄 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한다. 인도군 MiG-21 조종사는 비상탈출했으나 파키스탄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집단 폭행을 당하다 파키스탄 군에게 구출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반면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기 2기를 격추했으며 자국 공군의 손실은 전무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작전 보안상의 문제로 전투 참가 기종들 중 어떤 기종이 출격했는지에 대해 비밀에 붙였다. 따라서 F-16이 전투에 참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 부인했는데, 파키스탄은 미제 F-16을 인도와의 전투에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았기 때문에 전면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도는 파키스탄 공군의 주장은 거짓말이고 미제 AMRAAM 공대공 미사일 파편이 인도 측 잠무-카슈미르에 떨어져 있는 것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F-16이 격추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암람 잔해는 양국 공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암람을 운용 가능한 F-16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증거는 되었지만 이를 두고 F-16을 격추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당시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영내로 추락했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어찌됐든 현재까지 조사에 의하면 물증이 없는 상태이다. 현재 F-16의 제조사인 록히드 마틴에 의하면 F-16의 최신 모델을 F-21로 이름을 바꾸어 인도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록히드 마틴은 F-21을 210억 달러에 114기를 인도 공군에 판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 때 파키스탄과 인도 측의 발표로 인해 미제 전투기의 성능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 판매 전망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인도 공군이 F-16을 MiG-21로 격추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계열형인 F-16의 이미지가 인도 내에서 좋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도가 운용 중이었던 MiG-21은 현대화된 MiG-21 Bison 모델이기 때문에 조종사의 기량에 따라 충분히 F-16을 상대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인도가 당시 F-16이 추락한 잔해라며 항공기 잔해 사진을 공개했지만 이를 자세히 분석한 결과 오히려 인도 측의 미그기 잔해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인도 측은 F-16을 격추했다는 확실하게 입증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 항공 분야 전문가들이 파키스탄에 초청 받아 76대의 F-16을 모두 세어 본 결과, 공중전에서 손실이 없다는 파키스탄 공군의 주장은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수십년 만에 인도-파키스탄 공군 간에 공중전이 벌어졌다는 것에서 중요한 실전 임무에 MiG-21이나 미라지 2000 등 인도 공군이 가장 구식이면서 성능이 낮은 전투기들을 투입했다는 것에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인도는 Su-30MK등 MiG-21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신예기종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인도 공군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Su-30 역시 전투에 참가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의 F-16에게 암람으로 공격받았으나 적절한 기동으로 모두 회피했다고 알려져 러시아제 수호이 전투기의 성능이 훨씬 훌륭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어 2월 28일, 파키스탄 공군 측은 포로로 잡은 인도군 조종사의 신원을 공개했다. 포로가 된 조종사는 아비난단 바르타만(Abinandan Bartaman)이라는 인물로 파키스탄 공군이 공개한 영상에 의하면 격추된 이후, 파키스탄 군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심각한 부상들을 입고 있었다. 파키스탄 군이 당시 촬영한 영상에서 파키스탄 군이 성난 파키스탄 군중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줘서 겨우 살 수 있었으며, 파키스탄 군에게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바르타만의 인터뷰가 실렸다는 것에 있다. 당시 인도 정부는 이 영상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이에 파키스탄 군은 즉각 영상을 내리고 상호 간에 긴장을 완화할 의지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더불어 같은 날 샤 메흐무드 쿠레시(Sha Mehmed Qureshi)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인도 측과 대화를 나눌 의향이 있으며, 포로가 된 인도군 조종사의 송환을 적극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파키스탄 총리도 평화를 위한 유화 현상으로 인도 조종사를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며, 2019년 3월 2일, 파키스탄 정부는 억류된 인도군 조종사를 송환했다. 그러나 여전히 접경 지대에서는 포격전이 계속되었으며 인도군과 파키스탄 군은 카슈미르에서 서로 포격을 가해 민간인 6명과 파키스탄 군인 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후 전직 파키스탄 공군 조종사가 공중전 경과를 상세히 밝힌 것에 따르면 양측은 모두 정교한 현대 공중전 기술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운용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파키스탄 공군의 역량이 당시에는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여지며 공중전 격추 전과는 F-16이 올렸고 JF-17은 폭격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처럼 핵 보유국 사이에서 이틀 연속으로 공습을 주고 받은 것이 역사상 처음이라 로이터 통신이 발표했지만 핵 보유국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군사적 충돌은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이 분쟁이 발생하기 무려 5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중국-소련 국경 분쟁은 난투극으로 시작하여 지상전으로 승화된 사례인 반면, 인도-파키스탄 분쟁은 처음부터 공군력을 이용한 대규모 공습을 실시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발등 불 떨어진 국가는 미국이다. 분쟁 중에 자국산 전투기인 F-16을 파키스탄이 실제로 동원했는지를 조사했다. 문제는 F-16이나 F-21이 실제로 격추되어 추락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미국은 이미 2016년 이후 파키스탄에게 미국산 무기의 수출을 제재하고 있었으며 파키스탄의 F-16은 이 제재 이전에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대외군사판매(FMS) 합의에 따라 대테러 임무에만 한정하기로 미국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이 이 분쟁에 끼어들 명분이 생긴 셈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 인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중국이 일대일로를 시도 중이자 친중 국가인 파키스탄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 미국 전투기의 성능에 대한 의구심 차단, 그리고 군사력을 강화 중인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미제 전투기들이 경쟁력이 있는지 등에 대해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파키스탄과 맺은 계약보다 위와 같은 부분이 매우 중요했다. 어찌됐던 중국, 러시아의 전투기보다 미제 전투기가 훨씬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무기를 판매에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6년 뒤, 현재 거의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만약 실제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면전에 들어간다면 전쟁은 인도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인도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인더스 강의 수운을 통제하고 있다. 즉, 단기전에서 파키스탄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전으로 갈수록 인도가 유리하다는 것이다. 인도는 인더스 강의 수운을 통제함으로써 파키스탄 내 경제를 파탄시켜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들고, 장기적으로 이같은 사태를 끌고 간다면 파키스탄을 오히려 정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파키스탄에는 두 가지 변수가 존재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파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존재다. 핵무기는 인도가 장기전의 수행을 가로 막게 만드는 최상의 무기이다. 전체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인도보다 한참 못 미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매개라 볼 수 있다. 파키스탄이 갖고 있는 핵무기의 존재는 인도, 주변의 이란 및 아프가니스탄,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의 긴장을 불러올 수 있다. 두 번째 변수는 중국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은 중국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다. 중국이 아라비아 해로 진출해 중동으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일대일로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파키스탄이다. 따라서 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파키스탄에 공을 들여왔다. 중국의 사업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중국군이 참전할 명분을 주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핵을 가진 3개의 국가가 모이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인도 또한 그와 같은 최악의 연출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부분들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번에도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행여나 전면전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카슈미르 일대를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2019년처럼 흐지부지 넘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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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2025년 현재의 분쟁, 2019년의 분쟁과 유사한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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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5.9 전승절에는 어떤 행사가 벌어질까?
- 보통 5.9 전승절에는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불멸의 연대를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각계, 각 인사들에게 악수하며 인사하고 붉은 광장을 걸어 크레믈린 성곽 주변을 통과해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으로 가게 된다.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은 러시아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각료들은 그곳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忠)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잡는다. 일각에서는 저것 또한 정치적인 쇼로 보지만 러시아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말하고 싶다. 러시아에서 군인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각별하다. 각 가정마다 군인이 있다하면 매우 자랑스러워 했으며 로마노프 제국 시절 때는 군인 집안이면 모든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군에 대한 국가의 대우와 예우도 아주 높은 편이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군의 체계를 비웃으면서 형편없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만약에 그 대우가 정말로 썩 좋지 않다면 러시아 내에서는 벌써 폭동이 일어나 푸틴 정권이 교체되었어야 했다. 러시아 시민들이 군대, 군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에 군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다면 러시아 시민들의 성격상 절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군에서도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여 군 쿠데타가 발생해 현 정권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하느니 한다는 것은 러시아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군은 시민들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세계 최강 몽골군을 몰아냈고,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프랑스 나폴레옹도 격파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으며 나치 독일도 격파했다. 세계에서 이름 높은 역사적인 최강국들을 세 차례나 꺾었으니 시민들이 생각하는 러시아의 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여군들을 보자면 제1차 세계 대전, 대조국 전쟁 때마다 급하게 투입했지만 이 때 큰 활약을 펼쳤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는 여군을 양성하는 것에 아주 적극적이다. 소련도 일반 소총수로는 여군을 배치하지 않았지만 소련의 여군은 통신병이나 간호병과 같은 전통적인 여군의 영역은 물론, 전차병, 저격수나 전투기 조종사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영웅이 된 한 여성 저격수가 말하길 저격수는 인내심과 꼼꼼함이 요구되기 때문에 여성에 맞는 병과라면서 군의 커리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소련의 여군은 대조국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고 많은 여군들이 소련 영웅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군들도 대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퇴역 조치가 내려졌다.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에도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가 된 대조국 전쟁 참전용사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를 비롯한 주변 CIS 국가에서 모두 존경을 받고 있는 편이다. 다만 당대 소련 여군들은 승전의 영광을 남성 군인들에게 빼앗긴 채 침묵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PTSD 장애를 앓았던 군인들이 많았으며 군대에서 상대 남성 군인들을 성폭행 했던 문란한 여자라는 지역 사회의 편견 때문에 고통 받은 여군들이 많았다. 특히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벨라루스의 여류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의 대표작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У войны не женское лицо)>는 대조국 전쟁에서 활약한 여군 용사 200여 명 이상을 인터뷰한 논픽션으로 작품으로, 당시 여군들이 겪은 고통과 투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여군들의 활약은 후세의 여군들에게도 계승되고 있으며 이에 일정한 영향력과 전통으로 남아,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사관학교에서 따로 여성을 받아 들이고 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중학생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하는 여군 학교까지 존재하고 있다. 물론 여군학교 생도들의 평균 연령은 14세 정도이고 러시아에서 여성은 징병 대상이 아니다. 현재 러시아 국방부의 여자 기숙 학교는 군인의 딸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20년 이상 근속한 군인 및 병역 의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군인의 딸들에게 우선 입학권이 주어진다고 한다. 매년 11세 소녀 120명 이 입학하지만 희망자는 훨씬 더 많다. 경쟁률은 6대 1이지만 40대 1까지 되기도 하는데, 이는 러시아 최고 대학들의 경쟁률과 비슷하다. 물론 기숙학교를 다니려면 부모의 공적이라는 배경만 가지고 뽑히지 않는다. 건강과 쉬꼴라(러시아의 중등학교) 기간 동안의 학업 성취도 면에서도 뛰어나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여자 군 기숙학교 후보자들을 테스트하며, 교육자들이 러시아어, 수학 및 각종 외국어 지식들도 테스트를 거친다. 모스크바에 있는 군 기숙 사관학교 학생 840명은 완전 국비 지원을 받으며 방학 때만 집에 갈 수 있다. 교육부가 아니라 국방부가 승인한 계획에 따라 공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도들은 군사과목도 배우지만 수영, 승마, 피겨 스케이팅, 레슬링, 심지어 펜싱까지 각종 운동도 익히고 화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악기 연주도 가르치며 기숙학교에는 여러 대회에 참가하는 드러머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구원의 탑(Спасская башня)’ 음악 축제에 참가한다. 이처럼 여군 사관학교는 군대에 관해 최고의 엘리트들을 키워낸다. 현대 러시아는 약 5만 명의 여군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대조국 전쟁 이후에는 직접 전투에는 참여시키지 않고 있다. 물론 여성을 전투와 비전투로 구분하는 규범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불문율은 모든 부대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진다고 한다. 그리고 분쟁지역에서 파병은 이루어지지만 전투참여는 하지 않는다. 사실 대조국 전쟁 이후 인구를 늘릴 필요가 있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할 중요한 여성들을 전투에 내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9년 이후로는 러시아 병역법이 바뀌어 여군도 보병, 저격, 전차병, 포병 등 전투 병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 특공 및 특임대와 특수부대는 지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러시아 여군 장병들 자체는 남성 군대에 뒤지지 않는 애국심과 전우애가 투철하고 강인한 병력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실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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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5.9 전승절에는 어떤 행사가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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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대한 공격을 자행할까?
- 러시아가 현재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 기념식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제 행사의 하루 남았다. 이에 젤렌스키는 러시아 영토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책임질 수 없다 주장하며 공격을 가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는 "몇몇 나라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안전 조치를 요청했다"면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이는 당국의 책임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자작극을 꾸밀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승절 당일에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앞서 러시아는 80주년 전승절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전승절 '사흘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행사 참석 귀빈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협박까지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한 최고라다 의원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군사 퍼레이드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은 장거리 드론이나 미사일로 모스크바를 공격할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파악되고 있긴 하다. 이는 지난 2023년 모스크바를 공격한 우크라이나 드론이 크레믈린 지붕 위에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러시아의 행사 주최 측은 비상이 걸렸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행사 참석을 위해 7∼10일 러시아를 국빈 방문하기로 공식 발표했고 오늘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일부 국가 정상들의 참석이 불투명해졌다. 물론 이는 우크라이나의 위협 때문이 아니다. 우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행사 참석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전승절에 김정은을 대신해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의 인사가 대리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파키스탄과 국경 충돌로 인해 급박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불참이 유력하다. 세르비아의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과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불참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부치치 대통령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인증샷을 남기며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내일 있을 전승절 행사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에 올 것으로 예상되는 정상급 인사는 약 20명으로 여겨진다. CIS 국가들 정상들 외에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이브라히마 트라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또 람 베트남 총서기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젤렌스키의 협박으로 인해 러시아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남기며 우크라이나에 강력히 경고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텔레그램을 통해 전승절을 맞이해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도발이 발생하면, 그 누구도 키예프는 5월 10일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마리아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 또한 국제적 테러리스트의 전형적 협박이라 주장하며 젤렌스키가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려는 외국 정상들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는 테러리스트들의 불법 행위라며 비난했다. 띠라서 혹시나 모를 젤렌스키의 도발에 푸틴 대통령은 마침내 키예프를 향해 오레슈닉 미사일을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지시했다. 잘못하면 핵무기에 준하는 오레슈닉 미사일이 키예프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행사장을 드론이나 미사일로 공격한다면, 그 피해는 무지막지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 키예프를 방문한 일부 정상급 인사들이 회담 중, 공습 경보에 놀라 방공호로 대피한 사건이 있었지만,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대규모 인파가 몰린 가운데 열리는 행사장에 우크라이나의 드론과 미사일이 떨어지게 된다면 초토화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러시아는 오레슈닉이 아닌 핵을 우크라이나로 발사할 가능성이 높다. 여태까지 우크라이나의 각종 도발에 참고 있던 러시아의 핵 버튼이 이 때 눌러질 수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핵 버튼이 눌러진다면 우크라이나 자체가 메드베제프가 말한 것처럼 다음 날인 5월 10일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전승절 행사장을 공격할 수 있을까? 이런 우크라이나가 태도를 극적으로 바꿀 가능성도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일부 매체에 따르면 미국 행정부의 고위 대표 중 한 명이 모스크바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있다. 물론, 이에 대해 크레믈린이나 백악관으로부터 공식적으러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 해당 인사는 푸틴 대통령을 앞서 4차례 만난 스티브 위트코프 트럼프 대통령 중동 특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고위직 미국인 인사가 참석한다면 미국과 광물협정을 극적으로 타결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유보하고 사흘 동안의 휴전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한 워싱턴의 고위 인사가 이 행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이 아직은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고 보고 있다. 워싱턴에서 위트코프가 모스크바에 간다면, 우크라이나는 휴전에 동의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는 80년 전과 마찬가지로 유럽 파시즘이나 나치즘에 맞서 함께 싸웠던 과거의 역사적 동질감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미국 대표를 불러올 수 있는지에 대해 러시아의 외교적 역량을 시험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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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대한 공격을 자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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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승절의 역사와 러-중 간의 협력
- 전승절은 1941-1945 대조국 전쟁, 혹은 대독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실제로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5월 8일 오전에 군사행동을 종료한다는 항복문서를 서명했지만,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은 소련군이 참가하지 않은 서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5월 8일 밤인 러시아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 00:43에 재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 날 전승기념일로 간주한다.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라고 할 만큼 러시아 최대의 공휴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인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많은 러시아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2,700만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치뤄진다. 오전 10시 Спасская башня (스빠스스까야 바쉬냐) 타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시작이 된다. 오전 10시에 이루어진 이유는 소련군이 5월 9일 베를린에 입성해 오전 10시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 꽂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 군사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ypa! (우라!,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어)하면 전 장병들이 ypa 삼창을 외치고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엄함은 그 압도적인 장관에 온 몸에 소름 돋을 정도다. 더불어 이번에는 작년인 2024년과 마찬가지로 "그때 승리했고, 지금도 이기고 있다(Победили тогда, победим и сейчас)"라는 구호까지 붙였다. 80년전 나치 독일에 대한 승전 기분을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이어가게끔 연출한 셈이다. 올해는 80주년인데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 전승절에는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세계인들이 여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계 20개국의 정상들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퍼레이드는 중국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참관한다. 시진핑이 참관으로 볼 때 현재까지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동맹관계라기 보다는 동상이몽 관계로서 단지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일시적으로 협력하는 관계라고 평가하는게 더 옳다는 의견이 존재하는데 이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다만 푸틴 대통령은 중국과 향후 군사동맹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중국은 양국의 국경 문제를 확정했기 때문에 마찰을 일으킬 여지가 크게 줄어들었고, 러시아는 유럽 방면의 나토가, 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미국과 일본이 더 큰 주적이므로 공통의 적을 두고 손을 잡은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있기도 하며 더욱이 양국 국민들의 정서 또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남중국해 분쟁 이후 양국이 서방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를 적극 지원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서방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자국의 기여를 평가절하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을 비호한다고 불신하는 양국의 공통적인 인식도 내일 있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을 전후로 여러 역사 관련 이벤트가 벌어지는 와중에 러중 협력이 가속화되는데 일조하고 있다. 실제로 시진핑 주석의 모스크바 방문과 의장대 파견에 화답하여 중국의 전승절 초청에 가장 먼저 참석과 의장대 파견을 결정한 것도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두 정상은 양국 수교 75주년이었던 2024년 세 차례 만나 '중국과 러시아의 신(新) 시대 전면적 전략적 협조 동반자 관계' 공고화에 합의했다. 또한 5월의 러시아 전승절 행사와 9월의 중국 전승절 행사에 서로를 초대하고 흔쾌히 수락했다. 시 주석의 방러 준비를 위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이 지난 달 1일 러시아를 방문한 바 있다. 오늘 있었던 중국과 러시아 정상은 회담에서 양국 관계 및 미국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 그리고 미국-중국과의 관세 전쟁과 이에 대한 후과를 대비해 에너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논의했다. 푸틴 대통령은 회담 이후 성명을 통해 시진핑 주석과 회담은 매우 유익하고 생산적이었다고 했다. 이후 있었던 양국의 공동 성명을 통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전쟁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시진핑도 알고 있는 해결 방법을 트럼프는 무턱대고 24시간 안에 종결한다는 섣부른 과오를 범한 셈이다. 특히 반러와 반중을 내세운 국가들과 연대, 특히 핵을 통한 블록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및 프랑스와 독일의 핵 공유 추진하겠다는 의미와 한국과 일본 등이 핵을 무장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고 견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미군의 방위비 부담 및 트럼프의 관세 정책 등, 여러 행보들에 대해 미군을 내보내고 핵 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핵 무장에 대해 미국이 찬성한다 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합심해 대한민국을 경제적으로 제재하고 견제한다면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러시아를 적으로 돌린 사태가 러-중 간의 더 강력해진 밀착으로 다가왔고, 냉랭했던 러시아와 북한의 사이를 화해 무드로 만들어 견고한 동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핵 무장을 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경제 제재에 나서면서 대한민국은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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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승절의 역사와 러-중 간의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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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쑨원, 장개석과의 밀월 관계,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의 세 번째 이야기
- 보로딘은 쑨원에게 당 규약 개정 초안을 제출하며 국민당을 레닌주의 노선으로 개조할 것을 건의했다. 마침 이 시기에 천중밍이 광저우를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토지 재분배, 최저임금제, 주 6일 근무, 하루 8시간 근무제를 시행하여 농민과 노동자들로 하여금 전투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방어 부대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상인 및 향신 출신 당원들은 이와 같은 볼셰비키화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상인 및 향신 출신 당원들은 청나라 말기 때부터 지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홍콩을 이용해 영국, 프랑스, 독일과의 직접적인 교역으로 인해 많은 부와 토지를 독점했으며 이들이 혁명의 당위성으로 세운 것은 신해년의 혁명 때부터 남방 지주들의 이익을 보전해주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이들의 합류로 인해 벌어진 혁명이었다. 이들이 격렬히 반발한 것은 이와 같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토지를 재분배하라는 것에서 이미 심한 반발이 야기되고 있었다. 중국 남방 군벌이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쑨원과 보로딘과 더불어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를 주도했던 랴오중카이(廖恩煦)조차도 갑작스러운 볼셰비키화는 주요 지지자들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보로딘이 국민당을 볼셰비키화 시키는 1차 시도는 실패했지만 당시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과 중국 남방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쑨원과 랴오중카이를 이해하고 넘어갔다. 천중밍의 군대가 철수한 이후 쑨원은 보로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기 때문에 보로딘이 적화를 미루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천중밍의 군대가 물러간 후, 1924년 1월 20일부터 1월 30일까지 보로딘의 지휘 아래에 국민당 1차 전국 대표 회의가 광저우에서 열리게 된다. 보로딘은 쑨원의 부탁을 받고 직접 중국 국민당 당약을 개정하여 당 조직 개편 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소련 볼셰비키 당 조직을 모방하였기에 거의 적화되다시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국민당은 삼민주의와 오권분립을 창시한 쑨원을 총리로 하며, 쑨원을 전국 대표 대회와 중앙 집행 위원회의 당 연직 주석으로서 양 기구의 결의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는 천두슈(陳乾生)를 비롯한 공산당에게 총리 자리 및 국민당의 주도권이 넘어길 것을 우려한 국민당 우파를 고려해서 나타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보로딘도 천두슈(陳乾生)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작용했다.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인 보로딘에 비해 천두슈(陳乾生)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 스탈린이 그다지 트로츠키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때, 보로딘에게 있어 천두슈(陳乾生)가 총통 직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같은 공산주의자여도 매우 껄끄러웠던 것은 분명하다. 국민당 1차 전국 대표 회의에서 쑨원은 종신직을 보장받게 되었고, 국민당은 레닌이 주창한 민주주의적 중앙 집권제를 갖춘 혁명 정당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트로츠키주의와도 대치되는 부분이었기에 천두슈는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하자 반대를 표명했던 것이다. 그는 1923년 3차 광동 정부가 수립되어 선전주임을 맡았지만 보로딘과의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일찍부터 갈라 설 준비하게 된다. 당시 청년이었던 모택동(毛澤東)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선전부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회에서 41석의 위원 중 10석을 공산당이 차지하게 된다. 또한 전국 대표 회의 운영의 경험이 없던 국민당에 대표 회의 체제를 이식하고 전국 대표 회의 주석단을 설치함으로 제법 건실한 조직을 갖추게 된다. 재건 대회의 결과로 국민당은 소련의 정부 기관처럼 이중 권력 구조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보로딘은 자유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옛날의 국민당은 죽었다고 호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에는 수많은 비좌익 계열 당원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쑨원이 공산당에게 지나치게 양보를 하는 것을 크게 불만을 가졌다. 이러한 이루질 수 없는 무리한 좌우 합작은 후일 국공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고, 1925년 8월 20일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외교부장 후한민(胡漢民), 군정부장 쉬충즈(許崇智)가 숙청된 이후 린썬(林森), 쩌우루(居正) 등이 화북으로 추방되자 격노하여 1925년 11월 서산회의(西山會議)를 개최하여 상하이 당 중앙을 수립함으로 인해 서산회의파로 분열되었다. 그들이 추방된 자리에는 담평산(譚平山)과 임조(林祖)를 비롯한 공산당원이 차지했다. 이로 인해 국민당 수뇌부의 우파는 가히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좌파 및 공산당이 국민당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황푸군관학교(黄埔軍校舊址)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를 중심으로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창설에 기여했다.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은 오늘날 대만, 중화민국 국군의 시초로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던 대만의 군대를 볼셰비키의 미하일 보로딘의 건의에 의해 정예군을 탄생된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이에 국민당 우파의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한 공산당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중심으로 중국 볼셰비키로 하여금 독자적인 무력을 갖추게 해달라고 보로딘에게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보로딘은 국공합작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했기에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보로딘과 볼셰비키, 공산 세력을 지지해 주었던 쑨원이 1925년에 사망한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좌익의 거물이자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국민당 우파에 의해 암살되면서 겨우 이루었던 국공합작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보로딘은 왕징웨이(汪精衛), 장개석을 지원하여 적화에 우환거리였던 국민당 우파들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들의 용의자들로 몰아 숙청해버렸다. 이들은 국민당을 장악하여 3두 정치를 이끌게 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장개석과의 사이가 매우 좋아 소련 당국에도 장개석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하며 보고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개석의 정계 포지션은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이었지만 보로딘과의 돈독한 관계는 오히려 장개석이 쑨원의 후계자로써위치를 부각시켜었다. 그랬기에 냉철하기로 소문난 보로딘조차도 장개석과의 사이가 깨질 염려가 없다고 호언장담했을 정도였다. 장개석은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와 천중밍을 상대로 한 2차례의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천중밍을 축출하자 국민당에서 최고의 군사실력자로 자리잡으며 국민당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의 고문들는 장개석을 두고 '너무 쉽게 격정에 휩싸이고 난 뒤 똑같이 너무나 쉽게 의기소침해져 중용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냉정함과 확고부동한 면이 부족하다'며 혹평했다. 그러나 장개석 외에 왕징웨이를 매우 우유부단하다 평가했기에 소련은 장개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장개석을 두고 "파탄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긴밀한 사람'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장개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기에 보로딘과의 돈독한 관계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장개석은 1926년 1월 1일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 왕징웨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어 중앙 집행 위원회에 당선되었다. 이는 소련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소련 덕택에 정치적 입지를 닦은 장개석은 북방 군벌들이 내분에 휩싸여있는 틈을 타서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시행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과 소련은 국민당의 기반과 노동자, 농민 정책의 실시가 불충분하여 북벌을 실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반대하였고 그동안 장개석의 행보에 강한 의문을 품어온 공산당 당원들 또한 장개석에 대한 반장, 도장 분위기를 연출하며 장개석을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개석의 북벌에 가장 심한 반대를 한 사람이 소련의 수석 군사 고문인 발레리안 쿠이비셰프(Валериан Куйбышев, 1888~1935)였다. 쿠이비셰프는 노골적으로 장개석의 북벌에 반대하며 북벌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장개석을 배제하고 왕징웨이와 다른 군사 실력자들을 지원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벌 문제와 더불어 쿠이비셰프와의 갈등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졌고 불안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1차 국공합작의 분열은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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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쑨원, 장개석과의 밀월 관계,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의 세 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