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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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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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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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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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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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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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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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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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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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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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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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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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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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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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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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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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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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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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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 왕실 알 칼리파 가문의 내력
- 1970년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바레인에 대한 주권요구를 포기하게 하고 바레인을 독립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되었고, 1971년 8월 15일 바레인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1971년 8월 바레인의 샤이크 이사(Shaikh Isa) 국왕은 토후 명칭을 아미르(Amir)로 바꾸고, 1973년 5월 26일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의회 내 급진 좌익 세력들의 침투로 인해 왕정 위협과 혼란이 우려되었고 이사 국왕은 결국 칙령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및 사법, 행정 등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바레인은 1975년 8월의 국회 해산과 더불어 정당 활동이 일체 금지되어 있고, 강력한 국왕 중심 제도를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레인의 왕가인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역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나타난다. 알 칼리파 가문은 아라비아 종족 연맹체인 바니 우트바(Bani Utbah)를 계승한 수니파 상인 가문 중 하나로 분류되며 1766년 본거지인 쿠웨이트에서 알 주바라, 지금의 카타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카타르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안에는 진주가 많이 생산되어 국고를 채울 수 있었고 1783년 알 칼리파 가문은 오만이 지배하고 있던 카타르 동쪽의 바레인 섬을 침공하여 차지하게 된다. 이 때 카타르의 침공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인물이 아흐메드 빈 무함마드(Ahmed Bin Muhammad)로 그가 카타르의 1대 국왕으로 알려진 알 하킴(Al Haqim)이다. 하킴이라는 이름은 “정복자 아흐메드”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아흐메드 알 파테(Ahmed Al Fate)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알 칼리파 가문이 무력으로 이익을 장악한 것은 이 때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아흐메드의 통치 이후 바레인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에만 신경 썼다. 이집트의 위협도 존재했고 오만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여 오만의 식민 통치를 받기도 했다. 1803~1809년의 시기는 오만의 보호령으로 전락했고 1810년부터는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820년 영국이 중동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바레인에 이르게 되자 바레인 정부는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식 근대 국가 체제가 도입되기 이전인 1920년대까지만 해도 바레인은 부족 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사회 관련 문제는 종교 법정에서 관할했다. 위원회는 진주 생산과 팜 농장, 어업 등 경제 전반을 관여했으며 원하는 만큼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다. 1869년부터 1923년까지 무려 54년 동안 바레인을 통치한 이사 빈 알리(Isabin Ali)는 바레인의 최장기 군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후 1920년대부터 대대적인 행정개혁이 이루어졌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하마드 빈 이사(Hamad Bin Isa, 재위 : 1923~1942)는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Charles Belgrave)를 고문으로 두고 사실상 영국이 통치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레인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막대한 양의 석유다. 바레인 석유회사가 석유 탐사를 시작해 1932년 처음으로 석유가 생산되었다. 이후 바레인 경제는 어업과 진주 생산에서 석유 산업으로 중심을 옮기게 되었고, 오일머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현재 바레인은 시아파가 절대 다수로 나타나고 통치 세력인 수니파는 소수 종파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 되는 의회 해산은 종파 갈등으로 전이되었으며 이후 바레인은 지금까지도 시아파의 끊임없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시아파 수장 국가인 이란과의 관계도 국내 정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1981년에는 이란에서 파생된 ‘바레인 해방 이슬람 전선’이 바레인의 지도 세력을 암살하고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대국의 힘으로 인해 지역 내에서 정치적인 위상을 인정받는 것은 중동의 작은 나라 왕실들의 공통점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도 바레인 왕실은 특히 서구와의 관계 처세에 능숙한 국가다. 민주주의 요구를 묵살하고 전제정치를 강행하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탄생지이면서 모범국가인 영국, 미국과 아주 친한, 친 서구 국가이다. 사실 오늘날 바레인 왕국의 탄생은 영국의 힘이나 다름없다. 중동에서 영국이 만든 두 개의 괴뢰 국가가 있는데 하나는 바레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다. 예부터 상인이던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땅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된 것은 1820년 영국과 일반적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부터다. 1861년에는 영구적인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완전히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그로 인해 이집트,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의 큰 국가들은 바레인 영토를 넘보지 못했다. 영국으로서는 중동 지역에서 소국(小國)들의 입지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강대한 국가가 탄생하여 자국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이탈리아의 바레인 침공을 막아내며 독일 등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1926~1957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바레인의 최고행정관(Chief Administrator)을 역임한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 경은 바레인의 민, 형사 사법체계를 만들고 경찰 기능을 구성했으며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대중화 된 교육을 도입하는데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바레인의 지방분권화와 석유 탐사에도 크게 공헌했다. 당시 중동지역 여학교도 1928년에 처음으로 설립됐고 노예제도 폐지됐다. 전화 도입, 신문 발행, 영화관, 방송국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로 나타난다. 이어 바레인 왕실은 대부분 영국에서 유학, 영국 왕실과도 친밀했다. 2005년 영국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할 때 중동의 군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가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이다. 다른 중동 국가들은 왕자나 공주들을 보냈다. 하마드 국왕은 2011년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의 결혼식에도, 초청받았지만 당시 ‘아랍의 봄’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부득이하게 불참했다. 2012년 5월엔 윈저성에서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비공식 오찬에도 참석할 것이란 소식이 있었으나 반정부 시위를 무력진압한 데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면서 방영이 좌절되었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도 영국 서리(Surrey)에 있는 애플가스 컬리지에 진학했고 이후 케임브리지에 있는 리즈 학교(Leys School)에 다녔다. 이후 햄프셔의 엘더쇼트에 있는 몬스 사관학교에 다니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68년 졸업을 했다. 그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는 영국군 장교로도 복무한다. 하마드 국왕의 아들인 살마 빈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왕세자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마나마에 영국 해군기지를 새로 건설하기로 하고 칼리드 빈 하마드 바레인 외무장관과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이 건축 행사를 열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영국에 의지하던 바레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새로운 질서인 미국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마드 국왕은 영국에서 독립한 다음 해인 1972년 왕세자의 신분으로 미국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빈 살만 왕세자도 대학 학부는 워싱턴D. C. 아메리카 대학 출신으로 알려진다. 미국과의 친분은 중동 내 최대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깊은 관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격화되자 사우디군 1,000여 명이 바레인에 파견되었다. 역시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 역시 500여 명의 경찰을 보내 바레인의 치안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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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 왕실 알 칼리파 가문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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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아프리카 차드 분쟁과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1952~2021), 보코하람과의 항쟁
- 차드 분쟁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남부 기독교 세력과 북부와 동부의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으나, 1980년대 정권을 취득한 북부 지역의 파벌 간의 내분으로 전이된 내분 형태의 분쟁으로 나타난다. 해당 분쟁의 주요 행위자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나, 이러한 정치 행정권자들은 항상 국가 통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하나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장기화되고 있는 차드 분쟁은 행위자의 변화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 번째, 초기 남북갈등 시기는 1966~1979년이고 두 번째, 북부 구쿠니파로 알려진 국방장관을 지지하고 있는 종파와 대통령을 지지하는 하브레파 간의 분쟁은 1980~1987년,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드리스 데비의 집권 이후 저항세력반군연합(UFR) 간 분쟁은 1990년~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에게서 탈식민화된 이후 대략 5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통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선거가 계속 치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에 따른 불만이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최근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 연장이 가능해지면서 야권의 반발 또한 집중되어 민주주의 당위성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반군이 발생한 것에 대한 이유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이제까지 조직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으로 인해 국내적 불안정정이 고조되어 반군 활동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지자 반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보코하람과 연합도 불사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북부 세력 출신이었던 이드리스 데비가 1990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차드 분쟁은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독재 정권이 이어오고 있는 상기의 요인들이 남아 있는 한, 차드 분쟁은 전쟁 수준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항상 상존하고 있다. 차드 내전의 분쟁 전개에 관해서는 이드리스 데비의 장기집권과 반정부운동으로 이어진 199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차드 내전은 종결되는 듯하였으나, 차드의 통일을 달성한 하브레 정권이 독재 탄압 정치를 자행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 하브레의 최측근이자 군사고문인 이드리스 데비가 1989년 수단으로 망명한 이후 1990년 11월 구제인민운동(MPS)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드리스 데비는 리비아의 남부 반군 세력의 지원을 얻어 하브레 정권에 대한 무력투쟁을 개시함에 따라 차드 내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드리스 데비는 1990년 12월 수도인 은자메나를 공략하여 하브레를 축출하고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1993년 1월 신(新) 헌법 제정을 위해 최고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정 이관을 결정하였고, 1996년 3월 국민투표에서 신(新) 헌법안이 승인되는 등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차드 내전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었다. 1996년 6월에 최초의 복수정당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드리스 데비가 재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이드리스 데비의 구제인민운동(MPS) 당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기타 소수 야당과 대연립 내각을 성립하였다. 1998년 5월 이드리스 데비는 남부 지역의 반군(FARF)과 평화협정을 조인하였고, 반군 세력을 합법, 정당화시키는 등 기존의 반군 세력을 정치권,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3년 리비아에 거점을 둔 저항군 반란연합(UFR)이 반란을 재개하고 투쟁을 선포하였으며 동시에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니제르와 리비아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등 여러 반군 세력들이 내전의 잠재 요인으로 남아 있었다. 차드 정부 또한 주변국에 거점을 두고 세력을 유지하는 반군들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일례로 2006년 12월 리비아의 변화와 합의를 위한 차드전선(Chadian Front for Change and Accord, FACT)이 리비아 정부의 공습을 받아 전멸 위기에 처하자 차드 정부는 리비아 국경을 폐쇄하고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이들의 유입을 방지하려 하였다. 이드라스 데비의 장기집권이 지속됨에 따라 차드 내에서도 반정부에 대한 시위들이 점차 증대되었다. 2016년 2월에는 같은 해, 4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심화되었다. 이에 이드라스 데비 정부는 반정부 시위에서 촉발될 수 있는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대규모 시위를 전면 금지하기도 하였다. 2016년 5월, 두 차례의 선거를 거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8년 데비 정권과 집권 여당의 주도로 대통령 임기 연장을 주축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로, 정치적인 긴장감이 고조되어 왔다. 해당 헌법 개정안은 첫째,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6년 으로 연장하고 둘째, 국무총리제 폐지하여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켰으며 셋째, 국회의원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 등을 명제로 하는 제도적인 개혁으로서,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고 대통령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최대 규모의 반군인 공화국 구원을 위한 군사위원회(Military Command Council for the Salvation of the Republic, CCMSR)는 2018년 8월에 차드 영토 내부 진입에 성공했다. CCMSR은 북부 지역의 군 주둔지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정부군과의 충돌이 저 강도 수준에서 지속되고 있다. 한편 리비아에 주둔하던 UFR 또한 2019년 초 차드 북서부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정부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차드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이 UFR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였고, 250여 명의 반군이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드 국토행정 공공안보부 장관은 같은 해, 3월에 리비아 접경지역인 북부 지역의 국경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차드의 북부, 동부지역에서는 금광업자 간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고,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충돌 등이 역시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공동체 간의 충돌로 인해 사회 불안정이 점증하고 있다. 북부 지역에서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광부업자들 간의 충돌은 정부의 지하자원 발굴 및 국가 이익의 배분 등으로 인해 발생해 왔다. 최근에는 CCMSR 반군 또한 연루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동부 지역에서의 충돌은 2019년에 현저히 빈번해지게 나타났다. 정착민과 아랍 유목민들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민간인이 소지한 무기를 압류하는 조치를 취한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사태가 심화되어 5월 16일에는 사망자 12명, 5월 19일에는 사망자 22명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태이다. 차드 내전에 대한 분석과 저 강도 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지속되던 차드 내전은 1990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저 강도 분쟁의 형태로 완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비록 8~90년대처럼 대규모 전쟁은 발발하지 않고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반군 세력들이 간헐적으로 공격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드 분쟁이 저 강도 수준으로 장기화되는 것은 대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추정된다. 대내적으로는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차드에서는 내전에서의 승리, 혹은 쿠데타를 통해 정부가 구성되어 왔다. 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하브레 정권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권력을 획득하였다. 물론 이드라스 데비는 쿠데타 이후 민주화 정책을 취했으며 남부 지방의 반군들을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권력 획득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는 점, 그리고 수십 년간의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반군이 여전히 유의미한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또는 이웃 국가 내부 상황의 변동에도 영향을 받아 왔다. 차드 분쟁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대외적 요소로는 리비아가 있다. 리비아는 반군에 군사적 지원을 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차드의 반군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리비아의 지원 하에 차드 반군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새로운 안보적 위기가 닥쳐오고 테러리즘, 공동체 간 분쟁이 격화됨이 심화되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정권 안정을 위해 폭정도 불사하게 되었다. 차드는 보코하람에 의한 테러 위협과 공동체 간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와 같은 새로운 안보적인 위협을 겪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안보 이슈들이 차드 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지만 차드 분쟁의 악화 요인이자 전쟁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7년 초, 국제 위기 감시 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보코하람 반군 보고서를 통해 보코하람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실향민이 10만 명 이상임을 밝하기도 하였다. 또한 차드에는 보코하람 위협으로 발생한 난민 7천여 명이 차드로 유입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2017년 이후 급증한 보코하람에 대해 차드 정부는 다국적군의 연합작전에 적극 참여하는 등의 대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코하람은 주요 위협 요인이다.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은 국내적 불안 정정을 높임으로 인해 반군 활동에 더욱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분쟁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공동체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는 차드 북부 지방의 티베스티(Tibesti) 지역과 동부 와다이(Ouaddai) 및 실라(Sila) 지역을 중심으로 발발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실라 및 와다이 지방에서 목축업자와 유목민 간에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범국가적인 우려라고 규정하였으며 2019년 8월에는 해당 지방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공동체 간의 폭력 사태는 차드 정부가 국내의 만성적 가난을 극복하지 못해 시민들의 사회 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 현상은 차드로 유입된 반군들의 세력 확장에 더욱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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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아프리카 차드 분쟁과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1952~2021), 보코하람과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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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 방글라데시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가 우세했다. 그러나 묵타비하니는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묵타비하니는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 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으며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거나 불태우고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파키스탄군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해 동파키스탄 다카 대학교에서는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운동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키스탄 군이 다카 대학에 진입하는 도중 여학생 기숙사를 방화한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개전 당시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큰 비판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지역 독립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점도 존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사실상 동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벵골의 현지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살육과 각종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파키스탄 정부를 비난하고 미국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는 이미 서파키스탄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아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측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자 이러한 서파키스탄의 만행에 대해 국제적으로 심각히 우려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올라온 서파키스탄 측의 잇달은 전쟁 범죄 유엔 보고들은 국제 사회의 서파키스탄에 대대한 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 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피난오면서 인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도는 이미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양 파키스탄의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점점 인도 접경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인도 국경 근처에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인도 입장에서도 신경이 곤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많은 인도 입장에서 서파키스탄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 명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해 두 나라를 갈라 서게 만들고 전쟁을 빨리 종전시키는 것이 낫다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이라는 계산도 이미 서 있었던 상태였다.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하필이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하는 것은 파키스탄에서는 학살당할 것이 뻔했고 국내에서는 같은 힌두교도들을 차별한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무슬림들도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표는 같은 무슬림이 아닌 그나마 인종청소에 부담이 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간질의 배경에는 인도 정부가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표적 학살에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한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이 적지 않은 성과를 내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키스탄 군의 인도 국경에 대한 폭격은 오히려 인도 정부의 분노를 불러와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앙숙인 파키스탄을 분열 및 소멸을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묵티바히니에 무기를 보급하여 지원하는 것과 인도 영토 내 묵티바히니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군에 의해 국경지대가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당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면서 참전을 천명했다. 이는 서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전황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군인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와 파키스탄 군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종전까지 벌어진 전투를 두고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명명되었으며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게 된다. 12월 4일 새벽, 인도 해군이 먼저 서파키스탄에 대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게 된더. 소련제 오사급 고속정들로 구성된 인도의 함대가 서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카라치를 급습해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하일바와 소해함 무하피즈를 격침시키고 구축함 샤 자한을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인도의 오사급은 남은 П-15 «Термит» 대함 미사일들을 항구를 향해 발사해 유조선 1척을 격침시키고 유류저장고를 격파함으로써 파키스탄의 전쟁 수행 능력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인도 해군의 오사급은 12월 8일과 9일, 양일 간에 추가적인 기습공격을 수행하여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 창고까지 격파하고 상선 4척을 격침시켜 파키스탄의 물류망을 마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해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공격을 수행했으나 오히려 자국 해군의 줄피카르 호위함을 오폭하여 장교 여러 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분노한 파키스탄 해군은 프랑스제 다프네급 잠수함 한고르를 보내 인도 해군의 14형 호위함 쿠크리를 격침시켰고 이에 승조원 194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인도 해군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한편 항공모함 비크란트가 이끄는 항모전단이 전개되어 호커 시호크 함재기들이 동파키스탄 해안의 군사 거점들을 폭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의 항구와 비행장을 비롯한 전략거점들이 모두 파괴되어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파키스탄 군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파키스탄 해군은 텐치급 잠수함 가지를 보내어 대응했지만 갑자기 스스로 유폭되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파키스탄 잠수함이 스스로 유폭된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결국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에게 해군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면서 처절하게 대패했다. 이 때부터 성공적인 항모전단 사용법을 터득한 인도군은 이후에도 꾸준하게 항공모함 세력을 유지하면서 해군을 보강하게 되면서 남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하늘에서도 끝없이 이어졌다. 12월 3일 금요일 17시 30분경, 파키스탄은 해군보다 앞서 공군을 먼저 움직여 칭기즈칸 작전을 통해 국경 지대의 주요 인도 공군 기지들을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F-86과 B-57을 동원해 폭격에 나섰지만 인도 공군이 입은 피해는 활주로가 손상되는 수준 정도였고 인도 공군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활주로를 복구하며 반격을 가하게 된다. 12월 4일, 인도 공군의 MiG-21 전투기들은 다카에서 파키스탄 공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인도 공군은 F-86 2대를 격추하고 공습을 통해 다카 비행장의 기반 시설들을 타격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공군의 호커 헌터와 Su-7도 동파키스탄의 주요 군사적 거점과 CAS에 동원되었지만 파키스탄 군의 반격으로 인해 호커 헌터 6대와 Su-7 1대를 잃었다. 공중전과 공항, 공군 기지들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자 UN은 외국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외국 민간인이 공중회랑을 통해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UN의 권고에 의해 하루 동안 양측 공군은 휴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6일에 다시 공중전은 격화된다. 인도 공군 MiG-21들은 파키스탄 공군 테즈가온 공군기지를 활주로 파괴 폭탄을 떨구어 무력화시켰고 후속한 호커 헌터들이 네이팜탄으로 테즈가온 기지를 타격해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지속적으로 맹폭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공군기를 띄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공중전 전역에서도 인도 공군은 1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동파키스탄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이는 동파키스탄 공군이 선전했고 초기에는 파키스탄 군이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적 열세를 동파키스탄 공군이 극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인도 공군이 공중전 또한 서파키스탄 공군을 직접 맞붙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육상에서도 12월 8~14일에 걸쳐 카슈미르 투르툭(Turtuk)에서 인도-파키스탄의 지상군이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동남쪽 국경 마을에 위치한 투르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투르툭 주민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었고, 시아첸 빙하의 남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동파키스탄에 진주한 지상군을 지원해야 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매우 결정적인 손실이었다. 이처럼 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에서 파키스탄은 인도와 약 2주일 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양분화 된 전선은 서파키스탄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했고, 카슈미르 투르툭을 잃으면서 동파키스탄에서 격전을 벌이던 서파키스탄 지상군에게 전달할 보급이 어려워졌다. 결국 UN의 중재로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 군 지도부가 마침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를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갈등은 1972년 심라 협정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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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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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
- 5세기경 니제르 강 상류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가나 왕국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흑인 원주민인 말링케 족을 다스려 이들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황금을 비롯한 서부 수단 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교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아랍 권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대신 이들 지역의 상품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흑인들이 경작하는 잡곡에만 의존했던 식량을 외부에서도 공급받게 되었으며, 서부 수단 내 흑인들의 경작 지역이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세력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들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는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인 향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지며 연결된 곳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보여 진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가나 왕국은 간혹 베르베르 일족들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1076년경 알 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지만, 알 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족의 순디아타(Sundiata)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 족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말리 왕국이었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의 팀북투와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 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 족이 1804~10년에 왕국을 건국했다. 이와 같이 세워진 두 나라가 소코토 왕국과 간도 왕국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에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 집단들이 동서로 분리된 두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는 사하라 남부 종단 지역을 따라 발달된 사바나 지역과 대서양에 면한 해안선 일대의 열대우림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거대하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 사회에게 결집되어 있었다. 사바나 주민들 중 보다 중요한 부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데 종족집단인 세네갈, 말리에 살고 있는 부족과 밤바라 족, 말링케 족, 소닝케 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인 세누포 족, 로비 족, 구룬시 족, 도곤 족, 모시 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과 고산 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비(非) 이슬람교도들인 여러 소수 부족 집단들이다. 이 서아프리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 족이 사방으로 무리를 지어 거주하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남쪽이자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투아레그 족과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 그리고 차드 호의 카누리 족, 셈어 계통의 베두인 아랍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 지역 일대의 지역 사회들 역시 대부분의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 티브, 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 족이 거주하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한 곳에 있으며 가장 큰 집단은 아샨티 족이다. 해안지역에는 에웨 족, 가족, 판티 족, 아니이 족이 거주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 족과 템네 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 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우오로프 족, 세레르 족, 디울라 족 및 기타 부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 미주로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 족이 살고 있다. 특히 투아레그(Tuareg) 족의 조상은 북아프리카의 함 계인 베르베르족에 속하며 그들이 백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사막에서 캐레반사라이, 낙타 대상과 유목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다. 13~15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사막을 넘어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올 때, 백인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이들에게 푸른 옷을 입은 부족이니 복면을 쓴 전사들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투아레그 족은 고대 이집트 남부에 거주했던 이사바텐(Isabaten) 부족이라는 설도 있고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에 이주한 아라비아 계열에 속한다는 설도 있으나 종합해 보면 베르베르 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의 복합적 혼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아프리카 지역민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흑인 소수 부족과는 구별되는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흑인 노예를 두는 등 수준 높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곳에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유목을 하며 사막 근거지들을 이동해 왔다. 이로 인해 오늘날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의 중앙부와 그 남쪽의 사헬 지역에 걸쳐 총 130만 명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국가 별로 보면 리비아 서남부, 알제리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부에 조금씩 있고 말리 동부 인구 약 40만과 니제르 북서부 약 80만 인구가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 중세 시기에는 투아레그 집단에서 피부색이 백인 혈통들이 다수였으나 현재 니제르 북부의 켈 아이르(Kel Air)와 알제리 남부의 켈 호갈(Kel Hoggar)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거의 모두가 흑인 혈통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하라 북부의 켈 호갈 지역으로 정착한 부족은 이사바텐(Isabaten)족이었다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라틴어로 아스비테스(Asbytes)들이라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B.C 11세기경 람세스 Ⅲ세가 정복한 부족으로 이들은 당시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는 등 강력한 무력을 갖춘 기사들로 인하여 토후국을 건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Ⅲ세에게 패한 이들 토후국은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이주하였다. B.C 2세기경에는 이사바텐 족의 여왕이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알프스 산을 넘는 로마를 침공하는 대장정에 나섰는데 아쉽게도 스페인의 사곤테(Sagonte)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B.C 11세기~B.C 2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북부 사하라를 재치고 다녔던 이들 전차의 주인공들이 투아레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학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사바텐 족 다음으로 북부 사하라에 도착한 부족은 모로코 남부에서 B.C 4세기경에 서아프리카로 이주해온 두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들은 켈 호갈의 쿠디아(Koudia)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티 은 히나네(Ti-n-Hinane) 여왕이 부족사회에서 수장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A.D 4세기까지 투아레그 족 연방에 훌륭한 수장들을 속출하게 하여 대를 이어주게 하였다. 투아레그 족 사회는 아메노칼(Amenokal)의 영도 아래 타 부족이나 불청객이 그들의 주거지인 쿠디아로 접근하거나 정착하려고 할 때는 거족적으로 단결하여 이를 경계하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 인해 켈 호갈을 중심으로 한 사하라 북부에는 투아레그 족 이 외에 어떠한 다른 부족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타 부족들의 세력이 이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의 근거지인 켈 호갈을 벗어나서 동쪽의 칼 아제르, 남쪽은 켈 아이르를 지나 말리의 북부 중심도시인 팀북투에까지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당시 사막 유목민의 행동반경들이 그와 같이 광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을 주 무대로 날쌘 낙타를 이용한 기습 부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 사하라 사막에 약 8세기경에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 흑인 왕국들은 현재의 모리타니 남동부를 중심으로 말리, 알제리의 일부에 걸쳐 판도를 형성했다. 특히 가나 지역에 자리 잡은 가나 왕국은 원래 왕의 호칭으로 인해 국가를 아우칼(Aukal)이라 지칭했다. 사하라 남쪽 초원에 형성된 말리, 송가이 등 흑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교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과 경제적 기반이었다. 교역의 중심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소금을 발굴하여 운반하던 암염과 서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채굴하던 금이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금에 대해서는 이란 출신의 지지가 이븐 알 파끼(Ibn al-Faqīh)가 언급하기를 ‘가나에서 금은 모래 속에서 당근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벽에 채취하러 간다.’고 10세기 초에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과장된 소문까지 퍼졌다. 한편 황금의 산지인 사하라 남쪽의 이 흑인 국가에서는 소금이 부족했다. 이 소금과 금의 교역으로 인해 가나를 비롯한 초기 흑인 국가들이 형성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가나에 대해서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비아 지지가인 알 바크리(Al-Bakri)는 ‘왕은 국가로 들어오는 소금은 당나귀 한 마리의 짐에 1디나르의 금을, 밖으로 나가는 소금에 대해서는 2디나르의 금을 징수한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주민에게 맡기나 금괴는 왕의 소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나의 도시들은 비(非) 이슬람 교도였던 왕과 신하, 기마병이 존재했고 가나 왕은 전쟁이 있으면 20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술사 등이 사는 마을로 여기서 6,000보 떨어진 장소에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 생겨났다. 그 이후 이 지방의 건조화와 장거리 교역 중개지의 동방 이동에 의해서 가나 왕국은 쇠퇴했고 1076~1077년에 이슬람교도인 무라비트 왕조의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13세기 이후에는 가나 남방에 새로 발생한 말리 제국의 세력 하에서 하나의 지방 국가로 존속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서아프라카는 유럽 세계나 미국 따위의 국가가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의 화려한 문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감히 미개하다며 비하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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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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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이 니제르 내전에 끼쳤던 영향
- 카메룬 가루아 일대를 반경으로 보코하람 반란(Boko Haram insurgency), 혹은 나이지리아 샤리아 분쟁 (Nigeria Sharia conflict)이 주로 발생했는데 이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보코하람으로부터 시작된 나이지리아의 내전으로 비롯되고 있다. 2009년 이후 갈등 상황이 여러 부문으로 더욱 확대되면서 3년 안에 3,6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인구학적 측면에서 종교와 연관하여 연구한 결과 나이지리아 인구 중 이슬람교도는 50.5% 정도를 차지하는데 북부 지방에 분포하며 대다수는 수니파이다. 기독교 신자는 48.2%이며 중남부 지역에 고루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반해 무교의 비율은 1.4%에 그치고 있다. 이슬람교도가 절반을 조금 넘는 상황에서 이슬람교도의 요구사항은 샤리아, 이슬람 율법을 나이지리아 입법 과정에 공식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12개의 북부의 주는 사법부 및 행정부에 이슬람교의 특성을 반영하도록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2013년 5월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보르노 지역을 기습하여 보코하람 무장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5월 14일 긴급 상황이 선포됐다. 초기 공격은 성공했지만 반군은 다시 세력을 모아 8월 5일에 역습하여 35명을 사살했다. 2014년 3월 2일, 보코하람의 발상지인 북서부 마이두구리와 인근 마을에서 주말에 두 차례 차량폭탄 테러 등이 발생해 최소 90명이 숨졌다고 현지 적십자 관계자가 밝혔다. 이러한 보코하람의 테러는 현 니제르 분쟁과 연결되어 니제르 반군과 세력을 연합하여 니제르로 넘어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벗어나 인근 국가들의 분쟁에도 참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현 니제르 분쟁은 1980년대 투아레그 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내전화되며 촉발되었던 1차 분쟁과는 달리,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초국경적 테러조직인 보코하람이 니제르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촉발되었다. 과거의 분쟁은 프랑스의 탈식민화 이후 국가와 국민 건설의 과정에서 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현재의 분쟁은 21세기에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테러리즘이 니제르 국내로 소환된 결과로 나타난다. 1980년대에 발발하였던 니제르에서의 분쟁은 전통적 안보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라면 현재의 분쟁은 새로운 안보 현상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적인 테러 조직이 니제르 내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분쟁이 1994년 평화협정과 1995년 내전 종결 선언을 통해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으로 촉발된 내부 불안 요소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니제르에서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로 군부 쿠데타의 시기를 겪기도 하였다. 1996년 메이나사라(Meinasara) 장군에 의한 1차 쿠데타, 1999년 대통령 경호 부대의 완크(Wank) 장군이 주도한 2차 쿠데타, 그리고 2010년 군부에 의한 3차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현재의 정권은 3차 쿠데타 이후 군부가 민간 정부로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고, 마하마두 이수푸(Mahamadou Issoufou) 대통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비록 이수푸 대통령이 집권하며 정국이 안정화되는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니제르 정부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난과 부패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니제르의 내부 불안의 요소들은 반군의 존재,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의 지속, 선거 전후 국내 안보 상황 악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일례로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쿠데타의 시도가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부 정정 불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니제르는 테러 세력인 보코하람에 있어 영역을 확장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니제르는 사막이 국토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척박한 지형 조건은 테러 조직의 침투가 더욱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제르는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 주요국들과 에너지 및 자원 협력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보코하람의 경우, 우라늄 광산을 노리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우라늄 광산에 대한 공격을 가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니제르 정부군과의 교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에 니제르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보코하람 타도 전선을 공동으로 체결하여 토벌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2015년 2월, 보코하람은 니제르의 디파 지역에서 최초로 테러 공격을 개시하였다. 니제르 남부에 위치한 디파는 보코하람의 근거지인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니제르 정부는 테러리즘 위협이 국내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속히 디파 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다. 이후 정부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보코하람의 자금 출처인 후추 등의 해외 식품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보코하람에 대한 니제르 정부의 대응으로 인해 두 집단 간의 분쟁이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2015년 2~5월 체포된 보코하람 관계자들은 643명이었다고 집계되었고, 이에 타격을 입은 2015년 말 보코하람에 의한 공격은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보코하람의 활동 영역은 사헬 지역의 베냉,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 인근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2017년은 보코하람으로 인한 안보 위협이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인 서부 지역으로도 확대되며 안보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던 해로 비롯된다. 이러한 악화상황은 201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국제연합(UN)에 의하면 2018년 니제르의 서부 지역에서만 5만 2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니제르 정부의 대테러 작전 또한 다각도 변화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니제르 정부는 2017년 3월, 서부의 틸라베리(Tillaberi), 타우아(Taua) 주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미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다국적군과의 군사 작전도 병행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2019년 6월, 디파 및 수도인 니아메 등지에서 테러 공격 시도를 사전에 봉쇄한 적이 있다. 정부는 당시 자살 폭탄테러 및 개인 화기로 무장한 테러 집단의 일당 8명을 적발하였다고 밝혔으며, 이들은 종교 시설 및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을 모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같은 날, 정부는 차드 호 인근에서 다국적 임시군(MNJTF)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이슬람 무장 대원 5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에는 틸라베리 지역에서 IS대 사하라지부 소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군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소 18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니제르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정부의 반격 및 선제대응은 각각 평행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니제르 분쟁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테러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 니제르 분쟁은 2015년 보코하람의 등장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절되지 않고 있던 테러 공격이 2019년 전후로 반등하게 된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서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공격이 반등한 것은 보코하람 내에서 발생한 지도부의 교체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코하람은 2016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지도부의 교체 과정은 조직적 변화를 초래하거나 새로이 분파를 생성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와 같은 보코하람 분파의 다양화는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ISS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보코하람이 무장 대원의 활동 선택지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슬람 테러 조직과의 협상 및 동맹 등 여러 경우의 수도 많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지도부의 교체는 오히려 보코하람의 조직 운영 능력을 더욱 증대시켜 조직의 탄력을 높여 주었다는 분석에 있다. 이는 다각적으로 벌어지는 각 국 정부의 대테러활동에도 불구하고 보코하람의 공격이 최근에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 다른 특징으로 최근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위협 중에도 급조된 폭발물(IED)에 의한 공격이 증대되고 있다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19년에는 틸라베리와 타후아 지역을 중심으로 급조된 폭발물에 의한 테러 공격이 9배나 증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테러집단을 포함한 비(非) 국가 행위자가 니제르 내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 수단이 다양화되었다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보코하람에게도 보다 자유롭게 테러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테러 공격이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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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이 니제르 내전에 끼쳤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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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 : 바이든 일가의 조사는 아직 진행하지 않고 있다.
- 이 내용은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으로 Хантер Байден, увольнение генпрокурора Украины и коррупция в Бурисма (헌터 바이든, 우크라이나 검찰총장 해임과 부리스마의 부패)라는 내용으로 널리 알려졌다. 헌터 바이든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현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의 후광으로 2014년 우크라이나의 가스회사인 부리스마(Бурисма) 홀딩스의 이사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5년간 부리스마 이사로 일하며 매달 8만 달러 이상의 보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헌터 바이든은 자신이 이사가 된 것이 아버지의 후광이었음을 인정했다.. 헌터 바이든은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분야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말 자체는 트럼프 측이 재기한 부분에서 아버지 덕에 부당하게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고 주장한 것이 크게 힘을 받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비리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이사가 되어 고액의 보수를 받은 것 자체가 부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이사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인사 비리(Personnel corruption)"이다. 게다가 헌터는 우크라이나에서 사업한 경험도 없었고, 아버지 조 바이든의 지역구인 델라웨어에서 주 정부 허가를 요구하는 업체의 로비를 하는 등 누가 봐도 뒤가 구린 인물이었다. 부리스마 홀딩스 자체가 미국과 절대적인 유착이 있었던 그룹이었기에 조 바이든의 아들인 헌터 바이든이 인사 비리로 인한 이사로 재직이 가능했다.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하고 있는 지역은 러시아의 가스관 "투르크스트림"과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들어가고 있는 지역과 일치한 부분이다. 게다가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해서 공급하는 가스보다 러시아가 가스관으로 보내주는 천연가스가 무려 3,5배가 더 저렴했다. 그러다보니 부리스마 홀딩스가 얻는 이득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미국 정부의 개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흑해 위기와 돈바스 전쟁 등은 미국의 입김과 이에 반발하는 러시아 간의 간접적인 충돌로 빚어진다. 이렇게 뒤가 구린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검찰에서 이를 수사하려 했다. 그러자 조 바이든은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총장 빅토르 쇼킨을 해임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10억 달러의 대출 보증을 철회하겠다고 압력을 넣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자주 독립 국가이자 민주적인 국가였다면 이와 같은 미국의 압력이 들어올리가 있었겠는가? 이 또한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명백한 내정 간섭이다. 그리고 이 불법적인 내정간섭으로 인해 수사를 지휘하던 검찰총장인 빅토르 쇼킨은 바로 해임되었다. 우크라이나에 미국의 입김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국제법으로 명백한 위헌인 내정간섭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러시아의 돈바스 진입, 소위 저들이 말하는 "침공(Invasion)"이라 떠들면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생비난을 해오고 있다. 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을 압박해 퇴진시켰다는 의혹이 있지만 바이든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압수 수색이나 특검 등의 수사라곤 전혀 하지 않았는데 무슨 증거가 나오겠는가? 그 외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푸틴이 말한 것과 비슷하게 당시 "우크라이나 부패 척결을 위해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이 비판은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쇼킨이 해임되고 난 후, 유리 루첸코가 새 검찰총장이 되어 부리스마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지만 하나 마나한 상황, 그 사이에 부리스마 홀딩스는 증거를 인멸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구린지 갑자기 검찰총장인 유리 루첸코마저 해임됐다. 해임된 사유는 정확히 밝혀진건 아니지만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였던 루돌프 줄리아니와 접촉해 바이든 비리 혐의 증거 자료를 모으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나서 이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해 내부고발이 터졌다. 누군가가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정보 당국의 감사관은 조지프 매과이어 국가 정보국 국장 대행에게 ‘긴급’ 사안이라고 통지했지만 사태가 긴박하지 않다고 생각해 의회에 통보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지프 매과이어가 이 사건에 대해 미적지근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정식으로 특검이 들어가 수사할 수 있는 기회는 또 날라갔다. 이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100% 신뢰한다고 믿었던 루슬란 랴보샤프카 검찰총장의 주도 하에, 과거 수사의 적절성에 대해 재검토한 결과, 우크라이나 검찰은 헌터 바이든이 해당 사건에 연루된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하였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미 사건의 증거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 인멸된 상태였다. 이런 사건들로 볼 때 미국의 입김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치가들, 경제, 사법 전 분야에 걸쳐 영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정도까지 본다면 우크라이나를 먹으려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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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 : 바이든 일가의 조사는 아직 진행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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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 오이라트 계통 준가르 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강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回族) 농민들, 남쪽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 족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준가르 제국의 거점 중 토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이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과 같이 중범죄자들을 우루무치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가리아로 지방으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 족(錫伯族)이나 살라르 족(撒拉族)이 중요한 예시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강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강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 족들은 쿨자 인근에서 직접적으로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원래는 시버 족 이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의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강 북부 지역과 과거 준가르 제국의 중심인 지역에 집중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부터 돌아온 칼믹 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 인들이 주축이 된 칼믹 족들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강 북부 지역으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 칸국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칼믹 족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 유목민들은 칼믹 족의 친척인 준가르 인들이 많은 카자흐 족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믹 족들이 카자흐 초원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리 또한 만무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부터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 족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나라의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이는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위구르 족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 족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 제국의 압제로부터 위구르 족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러한 민족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 인들은 거의 멸족된 상태이며 만주족들은 신강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청나라 정부에 저항할 강력한 세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영토인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속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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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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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의 전면적인 등장과 서기장이 되기 이전까지 그의 행적
- 루마니아에서는 1965년 3월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사망하고 당 제1서기의 후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가, 국가 평의회 의장의 후임에는 키부 스토이카(Chivu Stoica)가 각각 취임했다. 그 중에서도 차우셰스쿠는 게오르기우데지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1954년에 당 서기에 올랐으며 다음 해에 정치국원에 임용되고, 수년 동안 당 조직 문제의 책임자로서 지위를 견고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독자적 경제 건설, 민족주의적 입장, 신중한 민주화라는 '게오르기우데지 노선'을 계승하면서, 당내와 외교의 양면에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차우셰스쿠 노선을 확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희대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1918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였던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차우셰스쿠에게는 1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안드루처(Andruță)는 3헥타르의 경작지와 양 몇 마리만 가지고 있던 가난뱅이였다. 그와 같이 가난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의 부모님은 농사 이 외에도 마름질을 하면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차우셰스쿠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리나(Alexandrina)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집안 출신이었던 반면에 아버지 안드루처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 후반 희대의 독재자들을 모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던 BBC가 차우셰스쿠를 조명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스코르니체슈티를 방문해 그와 그의 부친인 안드루처를 알고 있다는 한 정교 신부를 인터뷰한 바 있었다. 신부는 차우셰스쿠의 아버지에 관해 "자기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도둑질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싸워서 다치기 일쑤였던 인물." 이라 하였다. 차우셰스쿠가 희대의 광기 어린 독재자가 된 이유는 이와 같은 불우한 어린 시절의 환경적인 요소도 분명 자리했을 것이다. 유년기 차우셰스쿠의 집은 10명의 형제와 부모가 함께 살기에는 매우 공간이 협소했다. 방은 겨우 2칸이었으며 루마니아의 전통음식인 옥수수죽으로 알려진 머멀리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차우셰스쿠는 마을에 있는 한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도 역시 루마니아 시골의 어려운 삶과 같이 별로 좋지 못했다. 해당 학교의 선생님은 한 교실에서 동시에 여러 반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차우셰스쿠는 책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학교에는 거의 맨발로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10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고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이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없었으며 성격 또한 거칠고 내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그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사람들이 증언했다. 차우셰스쿠는 11세에 부쿠레슈티로 갔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증언하기로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고향에서 도망쳤다고 했지만 대체로 아버지인 안드루처가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을 학대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보통 광기 어린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1. 집안 환경이 불우했고, 2.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3. 아버지가 주정뱅이에 가족들에 심하게 폭력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한 환경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권력이 정점이 되었을 때 내제되어 있는 그 불만들이 폭발하는 것이다. 이 조건들에 부합했던 것은 히틀러도 그랬고 스탈린도, 게오르기우데지나 체코의 노보트니, 북한의 김일성, 차우셰스쿠, 심지어는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집안 자체가 그러했었다. 우선 차우셰스쿠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차우셰스쿠는 숙모인 니쿨리나 루세스쿠(Niculina Rusescu)와 함께 살다가 신발 공장에 취직해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루마니아 공산당(PCR : Partidul Comunist Roman)의 열성당원이었던 알렉산드루 선둘레스쿠(Alexandru Săndulescu)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러자 선둘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비밀 임무를 띈 수습생 형태로 취직시켜 주었다고 한다. 1932년에 차우셰스쿠는 마침내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루마니아 공산당은 루마니아에서 불법 단체로 인정되었던 데다가 아직 10대였던 차우셰스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일들만 맡겨질 뿐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그와 같은 잡일은 당시 루마니아 왕국으로 볼 때 매우 불법적인 일들이었다. 그러던 중 차우셰스쿠는 1933년 일련의 파업들을 주도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3년 첫 번째 체포 이후 차우셰스쿠의 감옥 생활이 시작된다. 이듬 해인 1934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감된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석방 탄원서에 시민들의 서명을 받다 체포되었는데 차우셰스쿠는 이와 같은 활동을 두 번이나 더 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30년대 중반까지 수도 부쿠레슈티 이외에도 크라이오바, 큼풀룽그, 름니쿠 블체아 등 루마니아의 여러 도시들에 파견되어 공산당과 관련된 임무들을 수행하였으며 수 차례에 걸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들과 잦은 수감생활로 인해 루마니아 정부 당국은 차우셰스쿠에 대하여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와 반(反) 파시스트의 활동적인 보급책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를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여기게 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차우셰스쿠와 같은 방에 수감된 감옥 동기가 있었는데 이 동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차우셰스쿠는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독종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교도관들의 폭행에도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하며 교도관들이 폭력과 고문으로 죄수들 통제하는 방법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동기도 차우셰스쿠에게 루마니아 민중의 분노를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가 독살당할 뻔하자 해외로 망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공산당을 위한 지하활동을 위해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1936년 6월 6일 브라쇼브의 법원으로부터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도프타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차우셰스쿠의 후원자인 블라디슬라브 타르노브스키(Vladislav Tarnovski)의 집에서 그가 거주했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루마니아 정부에 대한 반란과 봉기를 선동한 전단지가 발견되었고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차우셰스쿠를 기소했던 검사의 기소장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피의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사실상 유죄 1936년 1월 15일 고의적이며 사기성이 짙은 의도를 가지고 자극적이고 비밀스런 책자를 소지했으며 그것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하였고 시민들에게 사회 투쟁을 유발하려 한 점에서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구두 수선공의 수습생이었지만 당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차우셰스쿠는 반(反) 정부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감옥을 자기 집처럼 왕래했을 정도로 수감 생활이 화려했으며 일명 대단한 빨갱이였다. 이 때에 감옥에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에 더욱 심취하였고 고등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의 내용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던 중 같은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와 만나 결혼하면서 더욱 경도되었다. 이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총애를 받아 그의 심복이 되면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 된 이후 여러 직책을 거치다 초대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말년에 심각한 의심병으로 인해 차우셰스쿠만 믿게 되면서 그는 서서히 권력을 잡아 루마니아 정계 2인자로 올라섰고 1965년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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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의 전면적인 등장과 서기장이 되기 이전까지 그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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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만의 독특한 화법, 세밀화 예술에 대한 이야기
- 좁은 캔버스에 사물을 축소해 화려하게 표현하는 이슬람 세밀화는 회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이슬람 미술사의 백미로 불린다. 신神이 아닌 인간이 형상을 창조하는 행위를 금기시했던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고도로 상징화된 문양과 다양한 서예 기법이 발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건물과 동식물은 물론 인물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낸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예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상 표현에 대한 무슬림들의 두려움은, 실제로 『꾸란』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부인 아이샤가 동물이 장식된 걸개를 집에 장식하자 불같이 화를 내었지만, 아이샤가 그 걸개를 방석으로 만들자 흡족해했다고 한다. 즉 생명을 묘사하더라도 그것이 숭배나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분명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면 형상 표현의 금기는 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이 무슬림들의 삶 전반에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이슬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형상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에서는 일반적으로 모스크 건축이나 코란의 필사와 같은 종교의 영역과 왕궁의 건축이나 서책과 같은 세속의 영역이 구분되었으며, 세속의 영역에서는 그 쓰임에 따라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대상의 묘사가 가능했다. 용도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은 이슬람 미술에서 독립된 조각이나 회화가 등장하지 못하는 제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슬람 미술가들에게 형상 창조의 자유를 선사한 가림막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슬람 미술의 모순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가 이슬람 세밀화이다. 인물을 묘사하는 행위에 대한 교리적 해석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회화는 열렬히 숭배받기도, 때로는 훼손되거나 심지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순과 긴장 속에서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독특한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1335년, 일한국이 몰락하면서 이슬람 세밀화는 지방정권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했다. 특히 인주왕조(1335~1357)의 수도였던 시라즈가 대표적이었다. 시라즈에서는 타브리즈의 궁정양식과 전혀 다른 전통적인 세밀화가 발달하였다. 시라즈의 세밀화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노랑, 파랑, 빨강 등 원색을 다채롭게 배경에 사용하고 구성은 단순하다. 선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거대한 꽃으로 공간을 채우는 등 왕실 공방에서 벗어난 독창성을 보여준다. 이후 인주 왕조가 무자파드 왕조(1335~1393)에 점령되면서 시라즈 세밀화에는 무자파드 양식이 나타난다. 수평선은 높고, 둥근 산맥 위에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었다. ‘쿨라’라고 불리는 무자파드 특유의 터번이 등장하며 인주 시기와는 다르게 작고 세밀한 초목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말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작고, 사람은 반대로 머리가 크게 표현되었다. 눈과 입은 비교적 작게 그리고 수평의 뾰족한 콧수염을 더해서 무자파드 양식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잘라이르 왕조(1336~1432)가 있었던 바그다드에서는 14세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시인 크와주 케르마니가 쓴 세 편의 시의 필사본에 포함된 10편의 삽화가 가장 유명하다. 섬세하게 장식된 복식을 입은 우아한 주인공들은 치밀하게 구성된 자연물과 건축물에 둘러싸여 있다. 세심하게 묘사된 다양한 초목은 화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필사본의 몇몇 삽화에는 화가 주나이드의 서명이 남아있는데, 이는 과거 서예가들만 주목하던 것과 달리 이슬람 미술사에서 회화와 화가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오스만의 궁정화가 레브니(Levni)가 유명한데 그는 오스만 제국(Osmanlı İmparatorluğ u)의 에디르네(Edirne)에서 태어났다. 레브니의 본명은 압두셀리 첼레비(Abdülcelil Çelebi)이며, 색의 다채로움을 의미하는 '레브니'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레브니는 어린 시절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스탄불에서 레브니는 초기에 음악과 시를 공부했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의 작업장에 들어가 테즈힙(Tezhip)을 배우고 테즈힙 예술가로 일했다. 테즈힙은 책의 표지와 한 챕터의 다음 장을 식물 모티프와 기하학적인 모티프로 장식하는 이슬람 미술의 한 종류이다. 테즈힙은 금과 선명한 채색을 써서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레브니는 술탄 무스타파 2세(Mustafa II)가 집권한 1695년과 1703년 사이에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가 사망하고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III, 재위 1703년~1730년)가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 궁정화가로 일하였다. 레브니는 오스만 제국의 궁정화가로서 디미트리 칸테미르(Dimitri Kantemir)가 집필한 오스만 역사서의 세밀화(Miniature)를 제작했으며, 무스타파 2세 이전에 통치한 군주 21명과 무스타파 2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밖에도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의 사후에 제작한 '무스타파 2세의 사후 초상'(Portrait posthume de Mustafa II, 18세기경)을 남겼다. 레브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톱카피 궁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시인 세이드 베흐비(Seyyid Vehbi)가 쓴 산문집인 '술내임-베흐비1세'(Surname-i Vehbi: 술내임은 술탄의 자녀들과 관련된 축제를 주제로 한 문학 장르를 뜻함)에 실린 세밀화가 있다. 이 세밀화들은 1720년에 있었던 아흐메드 3세의 네 아들의 할례를 기념하는 15일간의 축제를 날짜순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브니는 자신의 필명에 걸맞게 아주 다양한 색을 써서 인물 군상과 지물들을 표현했으며, 몇몇 세밀화에는 원근법을 적용하였다. 16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의 궁정 화원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이야기에 알맞은 그림을 촘촘하게 그려내는 ‘세밀화’가 공식적이고도 전통적인 화풍으로 인정받았다. 이 그림들은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바라보듯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신의 관점’에 입각한 화폭 구성에 따라 대체로 평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이끌어간 것은 이슬람 세밀화의 대가 ‘비흐자드’를 중심으로 하는 ‘헤라트 파’였다. 한편 같은 시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서는 르네상스가 만개했고, 이는 회화에 있어서도 ‘원근법’이라는 ‘인간중심적인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화풍을 유행시켰다. 그리고 이 유럽의 화풍은 오스만 제국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심지어 술탄마저도 그에 매혹되어 유럽의 화풍을 좇았으며, 이로 인해 실제로 유럽의 화가가 이스탄불의 궁중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 세밀화의 시초는 15세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파티흐 술탄(1432~1481, 오스만 제국 제7대 술탄) 시기에 이르러 독특한 스타일을 갖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책 속에 술탄의 초상화가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셀주크 투르크 시기처럼 술탄, 귀족 등의 후원자들은 궁전 근처에 화원을 만들어 세밀화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세밀화는 궁중화원(나카시하네)에서 제작되었다. 나카시하네는 궁중의 장인단(匠人團)에서 가장 중요한 분파였다. 화가들은 수사본에 삽화를 그리거나 채색하는 일만 맡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책 장정과 예술품에 장식을 그려 넣는 일도 했고 중전이나 종교 건축물의 천정과 돔을 장식하는 그림도 구상했다. 또한 도자기 제조인이나 직물과 양탄자를 만드는 작업장에도 장식 문양의 밑그림을 제공했다. 나카시하네의 이러한 주도적인 역할 덕분에 이스탄불에서 제작된 수사본이든 이즈닉의 도자기든 부르사의 벨벳이나 비단이든 간에 오스만 예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식은 유사성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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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만의 독특한 화법, 세밀화 예술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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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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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