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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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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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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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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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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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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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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우크라이나의 강제 동원
    우크라이나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은 대체로 지난 6월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동원 병력들이 대기소로 사용되는 극동 철도 공장 물류 센터에서 동원 대상자들이 사실상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영상에는 일부 강제 동원 대기자들이 군사위원회 징병관들에게 고함치며 화를 내고 대들다가 문을 바리케이드로 막은 다음, 몽동이로 무장하고 탈출하자며 선동했다. 하지만 나중에 문을 부수고 들어온 우크라이나의 군 특수부대와 경찰의 강력한 곤봉 진압으로 인해 이들의 탈출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강제로 최전선인 포크롭스크로 이동되었고, 최전선에 배치되어 러시아군의 총알받이 되게 했다. 요즘 강제 동원에 반기를 든 군인은 무조건 러시아군과 마주하는 최전선에 배치된다고 한다. 이는 징병 거부로 인한 불만을 잠재우고, 우크라이나 군 내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보기로 보여 진다. 더불어 지난 8월에는 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서부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는 동원 대상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로코모티브 경기장을 길거리 강제 동원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문을 부수고 난입한 사건이 그것이다. 필자도 이 사건을 포스팅한 바 있다. 이는 시민들이 분노해 동원 대상자들을 탈출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당황한 징집 사무소 측은 급히 경찰을 불러 주민들의 난입을 봉쇄하고, 동원 대상자들을 서둘러 뒷문으로 빼돌려 바로 전선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류들의 사건은 숫자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진희 기자의 <바이러시아>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인권위원회에 접수된 동원 관련 민원 건수는 1월~10월 사이에 약 5,000건에 달했다고 한다. 전년 대비 50%가 증가한 셈이고 이는 1~5월에 1,600건 정도였지만, 이후 3,400건이 늘어났다. 6월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고 <바이러시아>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 군 당국은 최악의 병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남성을 동원했다. 그러다보니 우크라이나군 병사의 평균 연령은 43세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군의 평균연령 약 38세보다 5세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전쟁 초반 자진 입대했던 젊은 예비군들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서 우크라이나 전투 병력들은 고령화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예비군들의 연령은 앞으로 더 올라갈 예정으로 이미 심각한 수준에 접어들었다. 즉, 필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우크라이나 중년 남성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한 동원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라면 더 이상 현역과 비슷한 예비군이 아닌 민방위도 끝나는 나이대다. 이에 젤렌스키는 물러서면 국가 자체가 사라진다고 주장하여 군에 대한 자진 입대와 결사항전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무려 3년 8개월을 달려온 전쟁에 우크라이나인들은 거의 지쳐가고 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동원 인식에 대해 하루가 다르게 전쟁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어떻게든 해외로 도피하는 것, 혹은 잠적하여 아예 동원을 피하겠다는 분위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더불어 동원을 거부하며 길거리에서 징집관을 폭행하거나 총을 쏘며 도주하는 사태가 잇달으고 있으며 주변에 있던 주민들이 합세해 동원 대상자를 도피시키는 사건까지 온갖 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동원을 거부하는 사태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우크라이나 중부 폴타바 주 크레멘추크에서는 한 남성이 징집 사무소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던 도중에 권총을 꺼내 직원들에 발사하여 2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남성은 길거리에서 강제로 끌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같은 날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서는 징집관들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불심검문을 하던 중 시민들과 시비가 붙으며 충돌해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징집용 차량까지 전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 스타인 안젤리나 졸리가 우크라이나에 방문했는데 그녀의 경호원이 우크라이나 동원 징병관에 의해 군사위원회에 강제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졸리는 이날 니콜라예프에서 헤르손으로 가는 길에 검문검색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동원 사무소로 끌려갔다. 졸리의 일행을 태운 SUV 차량 2대가 전날 밤 니콜라예프 주(州) 피브덴누크라인스크(Південноукраїнськ)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병역 서류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중요 인물'인 졸리를 호송 중이라 설명했지만 검문소 군인들은 막무가내로 그를 징병사무소로 보냈다. 이에 황당한 졸리는 징병 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석방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러시아(https://www.buyrussia21.com)에 의하면 결과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징병 사무소 측은 졸리가 화장실이 급해 찾아왔다는 거짓말로 해명했고, 그녀의 경호원도 석방됐다고 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크라이나 네티즌들로 인해 그녀의 전 남편이자 같은 할리우드 스타인 브레드 피트가 길거리에서 징병관들에게 끌려가는 밈까지 만들어져 등장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 강제동원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졸리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강제동원이 더 이상 가짜뉴스가 아니다라는 것을 오히려 입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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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호주에서 중국인을 차별했던 중국인법(Chinese Act) 제정과 중국인 유입을 막기 위해 도입한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중국인이 처음 호주로 유입된 시기는 호주에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던 1851년으로 이후 20여 년 동안 약 50,000명의 중국인들이 호주로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점차 숫자가 늘어나면서 큰 문제가 되었다. 빅토리아 지역 금광으로 들어온 중국인 숫자는 1854년 약 4,000명 수준에서 1857년 23,623명 수준으로 불어났고 1859년에는 42,000명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이들 중국인들은 백인들과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고 이 와중에 중국인은 비도덕적이고 이교도이며 아편을 피울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금을 중국으로 가져간다는 편견이 확산 되었다. 그러자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들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에 호주 식민지 정부들은 18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의 이주를 제한하려는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실례로 빅토리아 입법부(Victorian Legislative Council)는 1855년 중국인 이주를 제한하기 위해 중국인을 싣고 오는 선주들에게 한 사람당 10파운드의 인두세를 부과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후 1881년에는 이에 더해 중국에서 입항하는 배에 대해 100톤 당 1명씩 중국인 이민을 허용하는 내용의 <중국인법(Chinese Act)>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차별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1851년 호주에서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어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 당시 청나라의 노무자들이 대규모로 호주에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집단으로 거주했다. 그러나 중국계 이주민들은 영국계 중심의 기존 호주 사회와 충돌했고 이에 따라 이들이 저임금 노동을 맡음으로 인해 임금 저하의 원인이 된다며 아시아 인들의 이민을 제한하자는 경제적 주장이 나왔다. 이에 백인 외 인종의 이민을 받지 말자는 인종 차별적인 주장까지 섞여 탄생한 것이 백호주의의 시발점이었다. 따라서 호주가 연방을 구성한 이후로 백호주의는 공식화되었다. 1901년에 제정된 호주 연방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1901)>은 유색 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었으나 구술 시험이나 제조업 취업 금지 조항 등을 통해 특정 인종의 이민을 실질적으로 제한하였다. 특히 이 법안은 호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입항 시 유럽에서 통용되는 언어 가운데 하나로 50자 받아쓰기 시험을 실시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입국하고자 하던 중국인과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호주 정부는 1901년 12월 17일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 법(Pacific Island Labourers Act)>을 제정하여 1904년 3월 31일 이후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들의 호주 입국을 금지하였으며, 이미 호주에 입국한 자들도 1906년 12월 31일 이후에는 호주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당시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인식되었던 외국인은 중국인이었다. 그와 같은 배경으로 아 쉐웅 사건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 쉐웅은 1881년부터 1901년까지 두 번의 짧은 중국 방문 기간을 제외하고 빅토리아에 계속 거주한 중국계 이민자로 빅토리아에서 귀화(Naturalization)한 이후 1901년 중국에 가서 약 5년 동안 지냈다. 이후 1906년 빅토리아로 돌아올 당시 1901년 제정된 연방정부의 <이민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에서 이민자에게 요구하는 받아쓰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입국을 거절당하고 감금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아 쉐웅은 자신은 이민자가 아니라 호주 국적(Australian Nationality)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민 제한법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빅토리아 최고 법원(The Supreme Court of Victoria)에 인신 보호(Habeas Corpus)를 신청하였고 커센(Cussen) 판사는 이를 받아들여 아 쉐웅에 대한 석방을 명령하게 된다. 이후 이 사건은 호주 연방 고등법원에 상고되었고, 호주 연방 고등법원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 국적과 별개로 존재하는 호주 국적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쉐웅에게 <이민제한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로 판결, 당국에 사건 취하(Abandon)를 요구하였으며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 이후, 12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호주의 백호주의와 유사한 형식의 혐중 시위와 혐중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지금 호주에서는 이같은 차별 행위가 법적으로 엄금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아직까지는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법적인 조치가 매우 약한 편이다. 모든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으로 봐야 한다. 현 세계인구는 82억이고, 중국인은 그 중에서 14억을 차지한다. 회교와 해외 중국계까지 합치면 거의 20억 정도 된다. 전 세계 인구의 약 24%가 중국인과 중국계라는 것이고 중국인들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보는게 무방하다. 이는 세계 어딘가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 한국과 중국, 양국이 무비자로 개방되어 있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여행을 하고 있다. 최근 보수우파들도 혐중한답시고 중국 여행하고 온 사람들이 많더라. 그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중국인들은 어떨까? 2021년 3월 기준으로 일본 거주 외국인 중 중국인 인구는 77만 명, 미국 거주 외국인 중 중국인 인구는 2,400만 명, 영국에 사는 중국인은 2021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50만 명 이상이다. 한국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수효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으며 일본, 미국, 영국에서도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숫적으로 훨씬 열세다. 이들에게 공격을 받아도 현지 경찰이나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해도 중국인들은 막대한 자금으로 더 좋은 변호사를 고용할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나가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중국인들에 의해 충분히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대놓고 혐중 시위와 중국인 여행객들에 대한 신변 위협은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해외에 나가서 일하고 돌아오는 것도 언제든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불안한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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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1
  • 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필리핀에서 5만 명의 코피노들을 낳고 잠적한 한국 남자들도 문제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다. 베트남에도 이른바 "라이따이한" 문제가 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베트남으로 파견된 대한민국 국군 혹은 한국인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혼인 관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말하는데 한국군과 한국 노무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 태어난 후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973년 모두 철수하게 되는데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이들을 두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처사라고 하지만 "라이따이한" 또한 세대별로 나뉘고 있다. 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세대는 "라이따이한 1세대"들이다. 문제는 "라이따이한 2세대"들부터다. 베트남이 도이머이로 인한 개방과 더불어 한국과 수교한 90년대부터 베트남에 들어간 한국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부터 문제인데, 라이따이한 2세대들과 그 어머니들은 편모 슬하에서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도 힘든데 자국에서도 심한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콘돔 미착용에서 성관계를 갖거나, 순진한 현지 여성들을 작업해 성관계를 가져 임신시키고, 연락하니 차단하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한국 남자들이 많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3세대"들과 201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4세대"들의 남편들은 더 심하다. 이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있었던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보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더 어렵던 시대였다. 이걸 간파한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에 들어와 성관계를 하고 씨를 뿌리고 도망가면 찾기 힘들었다. 베트남에 한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미혼모인 여성들이 많은데 베트남의 문화상, 피임이나 낙태는 매우 죄악시 되고 있고, 북베트남의 경우, 유교 문화권이 남아 있는 상태로 집안과 친척들의 눈총을 받기에 그냥 낳아 기른다고 한다. 요즘 2020년대 들어서도 그런 인식은 마찬가지긴 한데 2000년이나 2010년대 보다 많이 줄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와 틱톡과 같은 숏츠 영상, 그리고 스마트폰의 발전은 "라이따이한 세대"가 생기기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베트남 여성과의 만남에서 성관계가 활발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남성들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끼리 커뮤니티가 있어 책임 없이 임신시키고 도망가는 한국 남자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 커뮤니티에는 해당 한국 남성들의 정보가 박제되기 때문에 한국에 있더라도 스스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전처럼 요즘 베트남 여성들도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2020년대의 베트남의 MZ 세대들은 굉장히 영악한 아이들이 많다. 특히 동남아시아 각국을 다녀본 필자가 볼 때,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IT 최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없는 행동으로 여성을 작업해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면 바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박제된다. 요즘 아이들일수록 IT와 관련하여 다루는 솜씨들이 한국 아이들 못지 않아 보통이 아니다. 옛날의 베트남 생각하고 베트남 여성을 정액받이 생각하여 접근했다가는 한 순간에 골로 가는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1회성 만남을 즐기고 싶다면 가라오케나 마사지 샵 같은 유흥지들을 가면 된다. 거기선 1회성 만남을 즐기고 그 댓가를 지불하면 깔끔하다. 게다가 베트남 여성들은 자기 남성이 아니면 굉장히 쿨하고 관계에 있어 깨끗이 끝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명 인터넷에서 말하는 베트남에서 "싸튀충(정액을 사정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넷 은어)"의 시대는 끝났다. 잘못 건드려 국가적 개망신을 당하지 않고, 교제하고 싶으면 정당히 진심으로 만남을 갖고 교제하거나 1회성으로 끝내고 싶으면 유흥지들에 가는 것이 좋다. 미디어나 인터넷, SNS, 각종 IT 소셜들의 발달로 인해 베트남 뿐만 아니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IT도 서서히 베트남 수준으로 올라오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더 이상 정액받이 천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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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 캄보디아의 ODA 지원 &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퍼주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캄보디아가 2025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적개발원조(ODA)를 받는 수혜 국가 1위로 올라섰다 한다. 한국은 2025년 총 92개의 협력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할 계획이며, 이 가운데 캄보디아가 지원 규모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고 KOICA에서 밝혔다. 우리가 6.25 전쟁 이후, UN 및 각 국가들로부터 원조 받아 연명했고,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여 오늘날의 경제 부국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가 원조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ODA를 통해 우리보다 못한 나라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국제 사회에 헌신하는 것으로 갚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ODA도 윤석열이 당시 이러한 일환으로 한 것이라 믿는다. KOICA는 <프놈펜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는 2025년 캄보디아에 총 3억 1,500만 달러(약 4,000억 원) 규모의 원조를 제공할 예정이며 주로 교육과 수자원 관리, 보건위생, 교통 및 농촌 개발 등 캄보디아의 주요 개발 분야에 집중 지원될 계획이라 밝혔다. 당시 개발 원조는 27개의 유상 차관 프로젝트와 62개의 무상 원조 프로젝트로 구성되고 있다. 특히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차관을 받아 이루어지는 대형 프로젝트 중 가장 핵심 사업은 양국간 우호의 상징으로 추진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Korea-Cambodia Friendship Bridge)’ 건설에 있다. 이 우정의 다리는 2023년에 훈 센과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캄보디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프놈펜 내 다운펜 지역 야시장 인근부터 쯔로이짱와 반도 끝을 거쳐 껀달 주 아레이 끄삿 지역까지 총 길이 2,375m, 폭 27.5m의 사장교로 건설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 공사는 이미 2024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는 한국수출입은행으로부터 2억 3,500만 달러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받게 되며, 공사 소요 기간은 5년으로 공사 완료 예상 시점은 2030년이다. 우정의 다리의 설계 및 감리는 유신컨소시엄이 1,885만 달러에 수주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그 외 무상 원조 사업으로는 캄보디아 국립 어린이 병원 의료진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 2023년을 시작으로 2027년까지 총 1,600만 불(약 208억원)을 투입하여 프놈펜 소재 국립 어린이병원 내과계에 대한 역량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 안으로는 국립 어린이 병원 내 내과계 병동을 새로 짓고, 최신 의료기 자재들을 지원하며, 병원 운영 및 의료 인력의 역량을 강화에 나선다. 병원 동은 2026년 3분기까지 지상 5층, 전체 면적 8,715㎡, 총 196병상 규모로 준공될 예정이며, 병원 준공에 맞춰 150여 종 1,900여 점의 의료 기자재가 지원되고, 세부 분과별 전문 인력 초청 연수 및 현지 연수도 이루어졌다. 2024년 5월 훈 마넷 총리의 한국 방문 이후 양국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무상원조(ODA) 지원 규모가 두 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윤석열 정부 때 이루어진 것이다. 캄보디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를 맺었다는 것은 캄보디아와 준동맹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북한-러시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와 유사한 관계다. 이처럼 준동맹국 캄보디아와 ODA는 2022년 1,789억원, 2023년 1,805억원, 2024년 2,178억원, 2025년 4,353억원 등으로 매년 큰 폭으로 늘었다. 한국에서 ODA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들은 베트남을 비롯해 캄보디아, 스리랑카, 네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는 훈 센 가문이 대를 이어 장기 독재를 하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해 있다. 독재에 심화되고 부패가 만연한 국가들에게 ODA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으며 이는 해당 국가의 의존성만 커지게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의 국가가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 또한 젤렌스키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한 상태로 EU 국가들이 자국을 희생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미국도 우크라이나를 마찬가지로 지원했었고 이는 젤렌스키와 각종 정부요원들의 비리로 인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있다. 이제 막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고 북한과의 대치로 방위비를 많이 써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게다가 국가부채까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초저출산과 3D 업종 기피현상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외국인들의 본국 송금으로 인한 외화 유출 또한 상당하다. 게다가 이제 미국에 2,000억 불을 투자해야 한다. 이래저래 돈 나갈 곳만 많고, 이러한 상황에 ODA는 우리 형편에도 맞지 않다. 윤석열은 캄보디아에 가서 감당 못할 계약을 하고 왔고, 김건희는 빈곤포르노나 찍고 왔다. ODA는 우리 국민의 혈세로 지원된다. 2030 부산세계엑스포 유치를 위해 ODA 약속을 남발한 것도 윤석열 정부고,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전임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도 캄보디아 전문가도 아닌 산업통상자원부 부산엑스포 유치지원단장 출신이었다. 환장할 일이다. 우크라이나에 또 과도하게 퍼준 것도 윤석열 정부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총 23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발표했으며, 2024년 3억 달러는 무상 지원, 2025년 이후 20억 달러는 장기 저리 차관 형식으로 제공된다 했다. 또한, 1억 달러 규모의 차관이 사회 부문 지원을 위해 이미 지원한 상태다. 이것들도 다 국민들의 혈세다. 과도하게 우크라이나에 퍼준 것도 이해 못할 뿐더러, 캄보디아에 퍼준 ODA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퍼준 ODA에 대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ODA 명목상으로 뒷돈 챙겨도 이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도 마찬가지이며 폴란드와의 방산 무역 또한 의심할 부분들이 많다. 대우크라이나 지원, 김건희, 삼부토건 및 각 재건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에 대한 조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벌써 PD 수첩 등 많은 매체들이 폭로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지지부진하다. 나는 폴란드-우크라이나에 젤렌스키와 함께 비자금 조성하고 캄보디아에까지 파이프 라인을 설치하여 검은 돈을 세탁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일찍부터 이중과세 방지와 탈세 및 조세회피 예방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고 했지만 부패한 훈 센 집안의 행태로 본다면 이와 같은 협정은 무의미하다. 부정부패가 일상화 되어 있는 캄보디아 같은 국가는 조세포탈지로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돈을 물쓰듯 쓰기만 한 윤석열 정부가 흑자를 본 부분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리고 캄보디아 ODA와 대우크라이나 지원, 대폴란드 방산 협정 사이에 숨겨진 부패와 비리는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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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 아편전쟁과 광저우, 그리고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임칙서(林則徐, 1785~1850)
    내가 2017년에 중국 광저우에서 잠깐 있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의 첫 번째 전제 국가인 남월(南越)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편전쟁에 대한 연구도 함께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 특히 청나라의 대외무역제도는 매우 독특했다. 1757년부터 아편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동남아 및 서양 세력과의 무역은 광동성(廣東省)의 수도 광저우(廣州)에 국한하여 시행하였다. 1683년 대만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반청복명 세력인 정씨(鄭氏)가 멸망하자 청나라는 이른바 해금(海禁)을 풀고 4개의 항구를 열어 해외 국가들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아모이(澳門, 마카오), 장주(漳州), 영파(寧波), 그리고 운태산(雲台山)이 주요 4개의 항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1757년에 이들 4개 항구를 다시 폐쇄하고 광저우 항구만을 열어 대외무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남아, 이슬람,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에 자유로이 왕래한 것이 아니라 무역 할 수 있는 달인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일정한 조계지 거주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일 이 지역을 재외상관(在外商館, Factory)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광저우의 사면도(沙面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면도(沙面島)의 재외상관은 청나라 정부에서 인공적으로 섬을 만들어 요새화된 외국인 거류지로 원래 해외 특허로 만들어진 회사의 군사력으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재외상관 제도가 청나라에 들어오면서 군사력의 보호라는 명목적인 측면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대외무역제도에는 일정한 기구와 관리들이 있었다. 청나라 측에서 보면 먼저 양광 총독(兩廣總督)과 광동 순무(廣東巡撫) 등의 지방장관들이 있었고 광저우 부근의 해관(海關)은 외해관감독(粤海關監督, 외국인은 Hoppo라고 칭하였다)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하부 조직에서 실제로 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진 청나라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광동 십삼행(廣東十三行)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조합 형태인 길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특허상인을 공행상인(公行商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대외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광저우 지역에 있는 외국인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관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의 징수도 이들 공행상인(公行商人)이 담당하였다. 서양 측에서도 이를 조합한 일정 기구가 있었는데 당시 대청무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국의 경우를 보면 특허 회사인 동인도 회사가 대청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인도회사의 중국 현지 기구로서 관화인 위원회(管貨人委員會, Select Committee of Supercargoes)가 존재하고 있었다. 관화인(管貨人, Supercargo) 중에서 3, 4명으로 구성된 이러한 위원회에는 수석(首席, President)이 있었는데 청나라 정부는 이러한 서양인의 총책임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인도 회사의 대청무역 독점은 1834년에 종료되었다. 랭커셔(Lancashire) 지방의 면업 자본이 자유무역을 계속 주장하여 관철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는 영국 정부가 대청무역을 감독하기 위해 무역 감독관(貿易監督官, Superintendent of Trade)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 무역 감독관은 기존의 관화인위원회 수석이 동인도 회사의 직원인 것과는 달리 영국을 대표하는 국가 관리라는 점에서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하였다. 일찍이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청나라에 통상무역을 요청하러 찾아온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중국은 물자가 풍부하여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했다. 이는 결코 호언이 아니었고, 그것은 약 50년이 지난 아편 전쟁 전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차 아편전쟁 직후인 1842년의 통계를 보면 청나라가 영국에서 면제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 960만 달러를 수입했는데, 영국에 수출하는 상품은 차 1,500만 달러, 비단 920만 달러를 비롯해서 총 2,570만 달러에 달했다. 차와 비단이 당시 영국인들의 식생활과 의생활에 거의 필수적이었던 것에 비해 영국의 상품은 중국인들에게 그리 절실하지 않았으니, 청나라 조정이 “외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화이(華夷)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영국과의 무역에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에는 청나라가 결코 여유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1842년 당시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상품인 아편의 중국 내륙 수입액이 약 2,40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공식 무역수지는 청나라가 영국에 대해 1,610만 달러 흑자였으나, 아편을 계산하면 오히려 800만 달러에 가까운 적자인 셈이었다. 그것은 청나라의 국가와 관민 모두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조정의 권위와 기강이 오랜 기간 동안 평화로운 틈에 매우 헤이해졌으며 부정축재와 더불어 매관매직에 이르기까지 국가 내부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부정축재의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가 큰 고통을 겪었고 이를 배경으로 백련교의 난, 천지회, 삼합회 등의 암약, 소수민족들의 봉기 등이 계속하여 발생하면서 시정이 불안하고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처지였다. 또한 외국에 지불하는 상품 대금들은 은으로 결제되었는데, 은은 정부에 납세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매년 아편으로 인하여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새어나가는 상황은 은의 가격 상승, 나아가 정해진 세금 액의 실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로 인하여 세금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농민이 늘어났고, 그들은 대개 백련교나 천지회 등에 가입해서 반(反) 정부 활동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편이 많은 중원 백성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점을 접어두고라도, 청나라 정부는 아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아편과 같은 마약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한 폐해가 막심하자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아편이 수입되면서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시기로 알려진 이른바 3대의 청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고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청나라 백성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000 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0,000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방황하는 유민 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1773년에 영국제 아편이 들어올 무렵에는 판매량이 1천 상자였던 것이 1839년에는 40,000 상자까지 늘어나 있던 아편을 두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이 격돌하여 조정은 격심한 혼란에 놓이게 된다. 이금론은 아편에 중독된 사람을 완치시키는 일도, 아편 유통과 흡입을 완벽하게 막는 일도 불가능하고 금지할수록 가격만 높아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므로 차라리 관리와 군인을 제외한 일반 백성에게는 아편 흡입을 허용하자는 것과 아편 결제에 은을 쓰지 말도록 하고 국내에서 아편을 재배해 수입품을 대체토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 현실성이 있었으나, 오랜 유교 론으로 볼 때 백성들을 지극한 덕으로 다스려야 할 황제가 취할 정책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볼 때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은 약 4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대해 황작자(黃爵滋), 임칙서(林則徐, 1785~1850) 등이 이금론을 반박 주장한 엄금론은 아편 흡입 자에게 1년의 기한을 주어 아편을 끊도록 하고, 그래도 끊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며,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엄중히 단속하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임칙서는 호광성(湖廣省) 총독을 지내며 독자적으로 아편을 근절시킨 업적이 있었고, 도광제(道光帝)에게 올린 상소에서 아편을 방치할 경우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 이라고 토로한 인물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엄금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고, 1839년 3월에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서양의 수송선이 들어오던 광동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5월에는『아편흡입엄금장정(嚴禁阿片烟章程)』39조를 반포하고 전국적으로 강도 높은 아편 단속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아편무역에 대한 청나라의 강경한 대응에 반하여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입장에서 중국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비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사이에 중국을 방문하거나 오랫동안 체류한 사람이 많아지며 이에 많아진 정보 덕택에 영국의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부분은 중국인과 그 문화에 대한 혐오스러움이었다. 자신들과 워낙 다른 피부색과 언어, 몸차림 등은 혐오대상은 아니었지만 중국 상인과 관료들을 접한 경험은 불친절, 교만, 부정부패, 무사안일, 허례허식 등의 나쁜 인상을 길이 남겼다. 그것은 당시 영국의 시민문화가 근대적 사회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무절제함이나 무교양 등을 혐오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자리 잡은 한편, 사대부 가문들이 알려주는 중국의 교양과 예의범절은 ‘복잡하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광대놀음(Complicated and incomprehensible play clown)’ 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인의 눈에도 영국인의 행동거지가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전혀 서로를 모를 때보다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될 때 발생하는 혐오감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대다수 영국인의 인식과는 달리 소수의 지식인과 선교사들은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깊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고, 따라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말과 같이 “오직 황제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인(Only the emperor is free and all are slaves)” 이라는 중국의 정치와 사상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기독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당시 동양철학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일반인이나 지식인 모두 다소 거친 방법을 쓰더라도 중국인들을 ‘해방(Liberation)’시키고 ‘계몽(Enlightenment)’시킬 필요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편전쟁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막연한 생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국을 자국과 다를 바 없는 문명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면, 이러한 전쟁이라는 결정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여러 정황들에 있어 전쟁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인도와 영국 본토의 무역수지를 유지하려면 다소 부도덕한 면이 있어도 아편 무역에 의지해야 했고, 또한 잠재력이 풍부한 중국 시장을 아편 이외의 영국 상품으로도 본격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청나라의 관세가 정부의 방침대로 정해지는 일과 무역항이 광주(廣州) 하나로만 국한된 일, 그리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조합이 무역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폭리를 취하고 있는 일 등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오랜 숙원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열강과 식민지인들 앞에서 대영제국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는 정치적인 고려도 존재했고 막대한 부와 많은 인구에 비하여 많이 약화되어 보이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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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9
  • 미국의 역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에서 실패와 중국과의 펜타닐 관세, 베네수엘라 위기
    미국에서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이 발발한 시기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마약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나타난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닉슨 이후에 등장한 모든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공화당의 로날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는 마약과의 전쟁을 더욱 심화시켰고, 가수인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967~1994)의 죽음으로 인해 민주당인 빌 클린턴마저 가담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결과적으로 마약 이용자를 전혀 줄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폭력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흑인민권운동으로 그 위상이 신장된 미국 흑인들의 삶을 사회적, 경제적, 비공식적 차별로 새롭게 생성하여 결국 미국을 마약 천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미국 흑인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은 민권 운동 이전보다 오히려 하락했고, 이들의 권리를 찾는 운동은 폭동과 폭력 시위로 점철되어 갔다. 그저 금지된 약물인 마약을 투약했을 뿐, 폭력적이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을 전과자로 만들었고, 이들이 약물로 인한 전과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서 빈민층이 늘어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이들을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데 엄청난 세금을 써야 했다. 이처럼 폭증하는 재소자들로 인해 미국의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는 교도소와 교도관들을 늘려야만 했고, 이는 미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인구 10만 명당 수감자가 531명 정도의 비율을 갖고 있으며 이는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중국, 이란, 쿠바 같은 국가들보다 수감자들의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미국은 수십 년째 수감자 인구와 인구 대비 수감자 비율에서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감소세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 비율은 5위로 줄어들지만 다시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계속 시설을 증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재소자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형기를 못 채운 잡범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수용 한계를 넘어선 재소자들로 인해 관리 부실로 갱단간의 전쟁, 마약 유통, 살인 등 미국의 교도소는 범죄의 집합소가 된지 오래이고, 경범죄로 들어간 잡범들이 폭력적인 갱단 흉악범으로 변해 출소하는 범죄의 학교가 되어 버렸다. 단순한 마약 투약자가 교도소에 들어가서 갱단 조직원이 되어 출소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교도소가 오히려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미국에 존재하던 인종 간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닉들은 꿈도 희망도 없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치안 위협이 극도로 높아지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 사회에 큰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내부에서 이 정책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비폭력 단순 마약사범을 무조건 감옥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사용자 처벌, 대량 투옥 위주의 미국 사법 체계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현 2025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개선된 바 없다. 미국 정치권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금지한 약물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은 헤로인(Heroin), 코카인(Cocaine), LSD, 엑스터시(Ecstasy),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 마리화나(Marijuana), 환각버섯(Psilocybin mushroom), 펜타닐(Fentanyl) 등이다. 여기에서 큰 문제는 펜타닐(Fentanyl)이다. 만약 중국의 펜타닐 원료 수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미국의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결론적으로는 아니다(No!)이다. 인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이 중국 대신 펜타닐의 원료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미국 정치인들이 미국 마약의 문제를 볼 때, 마약의 무차별적인 공급에 있다고 주장하며 마약의 원료 생산지를 제거하거나 멕시코, 중국 등 공급 측을 제재하는 생산 차단에 주력해왔다. 최근에는 중국이 펜타닐 차단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 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경주 APEC의 미국-중국 회담에서 트럼프는 중국이 합성마약 펜타닐과 그 원료의 밀수출을 단속하면 펜타닐과 관련해 중국에 부과한 관세에 한해 완전히 폐지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중국은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난 정말로 중국이 그럴 인센티브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중국 정부의 펜타닐 단속을 보는 대로 미국 정부는 나머지 10%를 없앨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와 같은 단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과는 전부 처참하게 실패했다. 소비만 있으면 공급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마약을 구입해주는 미국이라는 세계 최대의 마약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조직들은 아무리 처벌을 강화하고 마약 공급업자들을 체포한다고 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마약을 조달해 와 미국에 유통시켰다. 오히려 규제와 처벌의 강화로 인해 마약의 가격이 올라 수익성이 증가하고 마약의 공급이 더더욱 증가하는 악순환만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마약 수요 원인인 미국 사회의 내부에서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급자와 판매 수단만 체포하고 단속한들 또 다른 공급자 및 수단이 등장해 대체할 뿐이다. 사실상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수요가 감소되지 않아서 마약 판매가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게 해 준다면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시장에 어떤 수단으로든지 끊임없이 제품 공급이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마약과의 전쟁은 처음부터 마약 중독자들의 숫자를 갖은 형벌과 체포를 통해 감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사실 이는 마약의 특성, 특히 미국에서 중독성과 해악으로 인해 처벌 및 관리 대상인 코카인, 헤로인, 펜타닐을 비롯한 마약성 진통제(Opioids), 메스암페타민 등의 약물들이 어떤 약물들인지 이해가 부족했었다. 일단 한 번 흡입하거나 사용하게 되면 단순히 그 주변이 공포와 폭력으로 인해 사용을 억제하거나, 혹은 자기 절제를 통해 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약이라 부르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심각한 경각심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마약 투약자들을 투옥시키면 해결이 된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효과는 매우 미미했다.당연히, 한 번 맛을 본 마약 중독자들은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소하여도 대부분 쉽게 마약을 끊지 못하고 상용하는 수준이 되었다. 약을 끊은 사람들조차도 단순히 처벌을 통해 마약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단순히 투약했전 투약자들조차도 투옥시키는 현실이 지속되자, 교도소의 숫자는 그만큼 늘어났지만, 당연히 단위면적당 수감자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났고, 이를 관리할 인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마약중독자들과 함께 격리되어야 할 마약이 교도소로 유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관리가 되지 않을수록 교도소 내 범죄조직들은 간수들을 매수하기 쉬워졌고, 아주 극악의 환경에 마약까지 유통되니 죄수들 간의 폭력이나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강제라도 마약을 끊어야 할 중독자들의 중독 상태는 지속되어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이에 마약 범죄가 아닌 상태로 들어온 죄수들조차도 교도소에서 마약을 접하고 마약중독자가 되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 된 것이다. 거기에 수감 생활 동안 겪었던 심리적,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마약에 대한 유혹에 더더욱 취약해졌다. 특히 교도소 내 범죄 문제는, 도저히 교도소 자체의 인력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감옥의 겉모습은 간수들이 관리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감옥에 생성된 범죄조직들이 교도소를 반 정도 지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불어 관리 인력의 문제로 인해 부패 문제, 관리 소홀 문제 또한 심각했다. 이는 교도소에 들어갈 예산이 날이 거듭될수록 부족하다보니 교도관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이나 복지 예산 또한 좋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이는 교도관이 열심히 일했을 때 주는 인센티브는 없는데, 일은 매우 고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교도관들도 관리에 대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약 중독 문제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온 죄수들은 직업을 잃고 노숙자가 되거나, 아니면 교도소 내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 더 심각하고 위험한 범죄자가 되어 사회로 돌아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에 투입된 예산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마약 투약자 및 판매자에 대한 체포 및 처벌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마약 투약자를 치료하고 재활하여 본질적으로 마약을 끊게 만드는 것이 교도관이나 경찰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 이는 고스란히 시민 사회의 몫이 되었고, 날로 늘어가는 치료 및 재활에 들어가는 비용과 중독자 수에 비해, 관련 예산과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약과의 전쟁을 하면서 주 정부나 연방 정부는 이들을 지원할 역량이 되지 않고 여력도 되지 않으니 중독자 수가 줄지 않고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이어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마약성 진통제 문제로 여겨진다. 마약성 진통제로 인한 사망자 수와 상용자 수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의 시발점이 되었던 미국의 열악한 의료 보험 제도, 각종 사회 복지 제도와 제약 회사들이 엮여 발생한 재앙 중 하나가 마약 문제보다 더 심각한 마약성 진통제 문제다. 이는 단순히 사용자나 판매자를 처벌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 또한 규제 대상이며, 이를 팔거나 쓰는 것 또한 처벌 대상이다. 그리고 그 강도 또한 낮지 않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많은 마약들을 불법으로 간주함으로 인해, 당연히 마약의 생산과 유통은 범죄조직들이 도맡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과 비교적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쉽게 닿지 않는 중남미 지역에 상당수의 마약 공장을 건조했다. 이들 범죄조직은 마약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된 현지 중남미 지역 범죄조직들은 엄청난 자금력을 지닌 초대형 마약 카르텔들로 진화했다. 이들은 국가의 정치, 경제, 사법,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멕시코, 브라질 등은 국가의 치안이 완전히 붕괴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대 미국 마약 밀수 카르텔들을 방조하거나 지원하고 있다 주장하며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에게 "세계 최대의 마약 밀수범"이라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두로에 걸린 현상금을 2,500만 달러에서 5,000만 달러로 인상했다. 물론 이 같은 트럼프의 지적은 틀린 말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군부는 1990년대부터 베네수엘라의 태양 카르텔(Cártel de los Soles)이라는 범죄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었다. 태양 카르텔의 경우 미국에서 테러조직이자 범죄조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두로는 태양 카르텔과 연루된 군 장성 상당수를 정부요직에 임명하였고 태양 카르텔의 수익을 공유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여기에 트럼프는 태양 카르텔이 미국의 마약 밀수에 큰 지분을 차지하는 멕시코의 시날로아 카르텔(Cártel de Sinaloa)과 연관이 있다 주장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Claudia Sheinbaum) 대통령은 이러한 트럼프의 의혹에 발끈하여 이는 사실이 아니라 반박 공표했다. 한편 베네수엘라의 외무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를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아 비난했다. 또한 트럼프가 자신과 연루된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이 저지른 아동 성범죄 사건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외무부의 주장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2025년 6월 5일, 정부효율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SNS에서 트럼프 대통령와 설전을 벌이던 일론 머스크가 엡스타인 파일에 트럼프의 이름이 들어있다면서 그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추잡한 사건에 대해 트럼프는 침묵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외무부 측이 주장한 표면적인 이유로는 그것이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는 진짜 이유일 수 있다. 내부 정치적인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큰 사건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앞 바다인 카리브해에 다수의 군함들과 미사일 90기를 급파하며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또한 상륙 준비단 4,500명 가량을 베네수엘라 앞 바다에 배치하는 등 침공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에 마두로 대통령은 같은 날 450만 명의 민병대에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현재까지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베네수엘라의 마약 카르텔을 청소하고 소위 갱단 두목이라 불리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처단한다는 것이지만 진짜 이유는 제프리 엡스타인과 성범죄 연루를 덮고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털어가는 등,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8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 활동하였다. 159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교역을 시도하려는 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20일 이들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귀금속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바타비아를 수도로 삼았다.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암본을 탈취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후 동아시아의 향신료인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 이 중 특히 육두구 열매에서 얻는 육두구와 메이스의 경우, 18세기 중반까지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반다 제도의 룬섬(Run island)을 점령한 이후, 세계 시장에서 육두구는 근 150년 동안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총독의 재임 시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경영의 구체적인 지침이 마련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원조해주는 대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기반으로 식민지 경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경쟁국들 외에도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존재했다. 쿤 총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들을 공격하였다. 1619년 쿤 총독과 네덜란드의 군대는 영국 동인도 회사 및 이들과 연합해 일시적으로 네덜란드와 반목했던 지역의 반튼 술탄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반튼의 유력한 무역항인 자야카르타(Jayakarta)를 획득, 바타비아(Batavia)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암보이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토착 세력도 네덜란드에는 큰 위협 요인이었다. 17세기 초에 술탄 아궁(Agung)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부 자바의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바야를 점령하는 등 동부 자바를 평정하고, 자바 섬을 통일할 목적으로 서진하고 있었다. 술탄 아궁에게 수라바야를 지원했던 네덜란드 세력은 위협적이었고, 이어 마타람의 군대가 1628년과 1629년 두 차례에 걸쳐 바타비아를 포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 군은 쿤 총독의 지휘 하에 완강하게 수성에 성공했다. 1641년 네덜란드는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을 대만 섬 북부에서 축출하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 곳들을 연결하는 교류 망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외에도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에 1658년 암스테르담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1636년에는 솔로르 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점령하고 17세기 동안 티모르 섬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이하에서 회사령 인도라 불리는 네덜란드령 인도는 동인도 지역과 겹쳐지지 않지만, 인도에서 동인도에 걸쳐 있던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 세력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인도에 국한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차원에서 함께 서술하려 한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 세력은 기존의 스페인, 포르투갈 세력을 말레이 반도, 술라웨시 섬,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했고 자바 섬에도 바타비아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얻었지만, 네덜란드 세력은 이베리아 계 세력을 결국 완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초부터 여러 차례 필리핀의 스페인 세력을 공격하였지만 육상 전, 해상 전 모두 패배하였다. 특히 1646년의 마닐라 해전에서는 스페인 함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가지고도 네덜란드 함대는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포르투갈 세력도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플로레스 섬 등 소 순다 열도의 동부 도서 지역들을 보유하였고, 티모르 섬에서도 네덜란드와 섬의 분할을 두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었다. 토착 세력을 상대로 한 원정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가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3~1644년 간 진행된 캄보디아와의 소규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캄보디아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바 섬에서는 신중하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연이어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7세기 중반, 자바에서 가장 강성한 마타람 술탄국이 군주 아망쿠랏 1세(Amangkurat I)의 실정으로 내분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를 주시하던 자바 서부의 반튼 술탄국이 마타람의 세력권을 잠식하던 와중 마타람에 치명적인 트루나자야 봉기(Trunajaya Uprising, 1674~1681)가 발생했다. 트루나자야 반란군에게 패퇴하고 수도가 함락당한 아망쿠랏 1세는 그나마 자바에 이해관계가 적은 외부 세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구원 요청을 보냈으며, 동인도 회사는 이에 응하여 반란군에 승리를 거두고 마타람의 내정에 개입하며 1670년대 말 마타람으로부터 자바 서부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비슷한 사건들이 1680년대에 이번에는 반튼 술탄국에 일어났는데, 술탄과 왕자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왕자의 편으로 개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승리하였으며 1687년까지 반튼 술탄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강성한 마타람은 즉시 동인도 회사의 보호국이 되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세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며 서서히 자바의 외곽 영토를 전쟁에 개입한 동인도 회사에 점령되어갔다. 18세기 중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Java War of Succession, 1749~1757)의 결과로 인해 결국 남은 영토마저 네덜란드 산하 번왕국들로 분리되었고, 각각의 번왕국은 보호국이 되었다. 반튼 술탄국은 보호국 위치로 존속하다 1813년에 해산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마트라 섬과 보르네오 섬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비록 이 시기에 대체로 내륙으로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해안 도시를 거점으로 한 지역의 여러 부유한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시키고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자바의 반튼 술탄국을 굴복시킴으로써 반튼 산하에 있던 수마트라 남부 람풍(Lampung) 후추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으며, 보르네오 남부의 후추 무역을 통제하던 반자르 술탄국도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간섭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도 아체 술탄국과 경쟁하며 아체 술탄국 산하에 있던 들리 술탄국 등을 네덜란드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며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아시아 대륙에도 상관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인도에 진출하여 인도 남동해안인 코로만델 해안에 네덜란드령 코로만델을 확보한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가던 시기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스리랑카에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1658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던 포르투갈령 실론의 수도 콜롬보를 점령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관리하는 네덜란드령 실론이 현대 스리랑카의 서부 절반 지역에 성립되었다. 스리랑카 식민지를 확보한 여세를 몰아 네덜란드 세력은 인도 남서 해안인 말라바르 해안(Malabar Coast)에도 진출하여 1661년 포르투갈령이었던 콜람(Colam) 항구, 1662년 코친(Cochin) 항구를 함락해 네덜란드령 말라바르를 창설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네덜란드의 군사적인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는데, 1638년 포르투갈령 고아에 대한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은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인도 식민지는 앞에서 열거한 네덜란드령 실론, 네덜란드령 말라바르, 네덜란드령 코로만델 외에도 소규모로 유지된 북동부의 네덜란드령 벵골과 북서부의 네덜란드령 구자라트도 존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를 제외한 인도 본토의 회사령은 이주와 장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의 상관과 공장 지대였다. 항구 도시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유지 되어 인도양에서 회사령 케이프 식민지와 회사령 동인도를 이어주는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령 말라바르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코친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토착 왕국과 세력 경쟁을 벌이며 내륙으로 확장하려 시도했던 적은 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말라바르 해안의 토착 세력 트라방코르(Travancore) 왕국에 대해 후추 무역 독점권에 대한 알력으로 트라방코르–네덜란드 전쟁(1739~1741)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네덜란드 군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1741년 8월, 식민지 전쟁으로서는 매우 큰 동원 규모인 네덜란드 군 6,000명(유럽인 2,400명)의 병력이 트라방코르군 12,000명~15,000명가량과 벌인 콜라첼(Colachel)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쟁은 동인도 회사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 패전으로 인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동인도 회사는 트라방코르 군에게 크빌론(Cbilon, 콜람)을 함락당하는 상황마저 우려하게 되었다. 이듬해 네덜란드가 말라바르 해안에서 아팅갈(Attingal) 인근의 작은 항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 본토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트라방코르와 네덜란드 세력 간의 긴장은 콜라첼 전투 후 일시적으로 휴전이 합의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이 때 네덜란드 영향 하에 있던 콜람의 군주가 독자적으로 트라방코르와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일시 이탈하기도 했다. 1740년대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은 한 때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고, 실제로 트라방코르 군이 1742년 6월, 네덜란드 영향 하의 콜람을 공격했다. 이에 네덜란드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은 지역의 영주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막아냈다. 트라방코르 군주는 나아가 네덜란드 지배하의 코친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입안하였으나 착수에 이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와 트라방코르 간에는 콜라첼 전투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저강도 분쟁이 계속 이어졌고, 꾸준히 평화 협정을 위한 협상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궁극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말라바르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이에 착종된 네덜란드의 이권이 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은 1740년대 내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의 후추 무역을 방해해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결국 1753년 8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트라방코르 왕국의 군주 마르탄다와르마 간 마웰리카라(Mavelikkara) 조약이 체결되어 양 세력의 대립이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말라바르 해안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졌고, 이후 네덜란드 식민 제국은 인도에서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대만에 진출했는데 일반적으로 포르모사라고도 알려진 대만은 1624년부터 1662년까지 그리고 1664년부터 1668년까지 부분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에도 막부와 무역을 하였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과 동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대만에 존재를 확립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보편적으로 대만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원주민들과 최근 한족들의 봉기는 네덜란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의 부상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대신 청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1662년 정성공의 군대에 의해 젤란디아 요새가 포위된 후 네덜란드 식민지를 해체하고, 네덜란드 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충신이자 반(反) 청나라 제국인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웠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를 맞이해 인도에 새로운 항로 개척이 진행되어,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가 크게 단축되었다. 대만도 이 국제 정세에 포함되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반에 일부의 일본인과 한족이 대만에 진출하였으며, 다른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도 대만의 정치 지형에 주목하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8
  • 11월 4일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살해된지 30주년 되는 날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팔레스타인 및 가자지구와 문제에서 휴전과 화의를 이룰 때 늘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는 총리 재임기에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증진을 위해 노력하며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협정 당사자들인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와 함께 노벨평화상까지 수상받았다. 사실 노벨평화상의 가치를 높여준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츠하크 라빈이다. 그러나 라빈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라빈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제거를 지시하고 테러조직을 지원하는 이란을 맹비난했으며, 또한 제1차 인티파다를 강경진압하도록 명령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엄청난 양면성이 있는 인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역사에서 라빈만큼 이스라엘 총리 중에 팔레스타인과 평화를 이룩하고자 노력했는 인물은 전에도, 후에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이스라엘 네타냐후의 행태를 본다면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평화 구축 노력과 하마스 집단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대비하여 아랍 측과 유화적인 태도 등으로 볼 때 훨씬 천사 같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이후,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 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후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하레디 청년인 이갈 아미르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이전부터 유태교 근본주의를 강조하는 극우 강경파가 암살을 목적으로 테러를 벌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었다. 그러나 라빈은 자신과 같은 유태인들을 믿는다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현실은 라빈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험악했다. 하레디(Haredi)는 극보수주의 유태교 종파를 숭상하는 유태인 집단을 통칭하는 단체를 말한다. 하레디는 일부 종파를 제외하면 대개 폐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은 토종 유태인들이 아니라 아슈케나지 유태인에 속해 있다. 게다가 매우 배타적이고 과격함으로 인해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당시 월간조선에서 근무하던 언론인인 조갑제씨가 라빈을 인터뷰했는데, 인터뷰를 마친 뒤 34시간 후에 암살당했다. 뜻하지 않게 조갑제씨가 한 인터뷰는 라빈의 생전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되고 말았으며, 해당 기록은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수록되었다. 라빈을 암살했던 암살범 이갈 아미르는 유태인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하레디 소속의 청년이다. 암살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아미르는 정부 수반을 살해한 혐의로 인해 유죄 판결 및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현재도 감옥에서 복역 중에 있으며 아미르는 총리를 암살한 자신의 행동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독방에 가둔 처분은 매우 가혹하며 팔레스타인 수감자들도 이렇게까지 생활하지는 않는다며 아주 적반하장식의 망언을 일삼았다. 게다가 아미르는 같은 종파인 하레디가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독방 수감이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생활상의 불편함도 크게 없다고 한다. 감옥 외곽에서 아미르의 이미지는 배신자인 라빈을 죽인 애국자라는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이 라빈 살해 사건 직후, 아미르 결혼하겠다는 유태인 여성들의 러브레터와 청혼 신청이 쇄도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아미르는 법적으로 혼인 관계인 여성과 면회를 통해 감옥 안에서 성관계를 맺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라빈을 뻔뻔스럽게 살해하고 감옥 안에서 이같은 최고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웃기지도 않은 대우에 대해 방치하고 있는 것은 네타냐후 정부다. 그러니 네타냐후의 배후 지원설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다. 아미르의 이와 같은 뻔뻔한 태도와 옥중 기행에 대해 당시 정치권은 겉으론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네타냐후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이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사건에 대해 침묵은 곧 뒤를 봐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 라빈의 정치적 반대파인 보수우파 인사들도 한 나라의 정부 수반을 죽인 그가 저렇게 당당하게 애국자로 여겨지는 행태가 개탄스럽다며 탄식했다 하지만 이 또한 대외적으로 보여지기 위한 정치적인 쇼에 불과했다. 당시 이스라엘 정치권은 자신들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던 이웃 나라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안와르 엘 사다트(Muhammad Anwar es-Sadat, 1918~1981) 대통령이 1981년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자신들의 나라 대통령을 스스로 암살하는 것 자체가 후진국이라며 비웃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14년 만에 그 비웃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고, 아랍 국가들로부터 내로남불이라는 국제적인 비웃음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를 비판하고, 또한 스스로 개탄하는 국제적인 쇼(Show)를 벌인 것이다. 라빈 총리의 암살범 이갈 아미르는 지금까지 살아있으며, 여전히 감옥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한편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한 할리드 이슬람불리(Khalid Islambuli)는 재판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집트에서는 자신들의 나라 대통령을 암살하고도 암살범을 살려 두며 최고 대접해주는 자신들보다 더한 나라가 있다며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있는 상태이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정부는 11월 5~6일을 국민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내걸었으며,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한국에서도 라빈의 무덤을 참배하던 히잡을 쓴 팔레스타인 여성이 울며 안타까워하는 사진이 보도된 바 있긴 하지만 이 또한 정치적인 쇼일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는 편이다. 이는 라빈과 아라파트가 체결한 오슬로 협정이 전쟁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의문스러운 협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들과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John Major)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Helmut Kohl)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Roman Herzog)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Jean Chrétien)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Виктор Черномырдин) 러시아 총리, 폴 키팅(Paul Keating)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Boutros Boutros-Ghali)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Hussein bin Talal)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엄수되었다. 그와 함께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했으며 이스라엘 하레디들의 테러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끝내 불참했지만 유족들에게 애도의 편지를 보냈다. 손녀 노아 벤아르치(Noah Ben-Archi)는 자신을 극진히 아껴준 할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매우 컸기에 그 안에 복수심마저 자리 잡지 못했다며 눈물의 연설을 했다. 하관식 때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미국 상원의원이 라빈의 관에 형인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F. 케네디의 묘역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기도 했다. 사건 이후 이스라엘 은행에서는 인플레를 대비한 고액권 발행 겸 그의 추모를 위해 500셰켈 지폐를 발행하면서 여기에 라빈의 초상화를 넣으려고 했으나 예상 외로 물가가 매우 안정되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자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는데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를 실행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부분인데 네타냐후가 이를 백지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라빈에 암살에 대해 필자는 그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고, 그는 라빈의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그럼 미국은 어떨까? 빌 클린턴 자체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만큼은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라빈과 아라파트 사이에 오슬로 협정 체결을 이끌어 냈고 2000년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양측의 평화를 이끌어내려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츠하크 라빈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지위 및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등 핵심 쟁점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겉돌기만 한 협정은 향후, 더 큰 분쟁의 불씨를 야기하는 결과가 되었다. 현 네타냐후가 하는 행위를 보면 라빈이 관뚜껑을 부수고 나와 통곡할 일이다. 그간 그가 노력했던 것이 네타냐후에 의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억지로 갈등을 봉합하려 하지만 라빈과 클린턴처럼 해도 쉽지 않은데 억지로 한다고 되겠는가? 결국 더 크게 터질 불씨는 키우는 셈이다. 현재 11월 4일은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Yom Hazikaron leYitzhak Rabin)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현재, 이스라엘은 이에 대해 어떠한 추모와, 팔레스타인과 평화 등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결국 그저 그런 날로 변해버린 이날은 중동의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씁쓸하게 곱씹고 있는 그런 날이 되었다. 그리고 30주년인 이날따라,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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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8
  • 202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의 당선과 우간다-인도계 미국인
    미국의 뉴욕 시장은 시의 공공서비스, 경찰, 소방 등 뉴욕시의 공공기관 및 법률을 집행할 권한을 갖는다. 임기는 4년 중임제이고 연임은 2번까지 가능하지만 재선 임기 종료 4년 후 재도전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본래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2008년에 연임 제한을 2번에서 3번으로 늘리는 안이 시의회에서 통과되었다. 하지만 2010년 주민투표를 통해 다시 2연임제로 돌아왔다. 2010년 주민투표 이전에는 3선 시장도 매우 많았는데, 피오렐로 라 과디아(Fiorello La Guardia, 1882~1947), 로버트 F. 와그너 주니어(obert F. Wagner Jr. 1910~1991), 에드워드 카치(Edward Koch, 1924~2013),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가 3선 시장을 지냈다. 그런데 와그너와 카치는 4선까지 도전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패배해 3선에 머물러야 했다. 미국 최대 도시의 대표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역임한 사람은 이후 고위 공직자로 선출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존재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힘든 직업이라면 별칭이 있을 정도다. 시카고 시장과 마찬가지로 역대 시장 중 괜찮은 평가를 받은 시장이 드문 것으로 악명 높은데 그 중에서 에드워드 카치(Edward Koch, 1924~2013) 정도가 괜찮은 평을 얻었다. 카치는 뛰어난 소통 능력과 탁월한 업무 수행 능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3기 임기 때는 조금 평가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루디 줄리아니(Rudy Giuliani)가 가장 좋았다는 평이 있다. 그는 "뉴욕의 영웅"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또한 퇴임 이후 최악으로 나락가고 있다. 그런데 이번 202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가 당선됐다. 이전의 뉴욕 시장의 상당수가 이탈리아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번에는 좀 특이하다. 그는 우간다와 인도계이고, 종교는 이슬람이다.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 시장에 이슬람계 인사가 당선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그의 나이 33세로써 100여 년 만의 최연소 시장이다. 미국의 이민 시장이나 이민자 출신들로 채워진 미국 사회로 볼 때 그리 이상한 부분은 아니지만 아시아계나 아프리카계, 그리고 이슬람에 대해 민감한 미국으로 볼 때, 이는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러나 미국에 늘어나고 있는 인도인들의 숫자와 그들이 미국 사회 중심부로 진출하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는 현재, 필자가 볼 때,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 1899년부터 1914년까지 영국령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캘리포니아를 개척할 쿨리들이 대거 미국에 들어오면서 인도계 이민자들의 역사가 시작된다. 인도계 쿨리들은 주로 새로운 대륙인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호주 대륙 등에 이주한 중국계와 달리 인도계는 동아프리카와 카리브 해 등으로 주로 이주했다. 1895년 영국은 케냐를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보호령을 창설하였다. 영국은 인구가 200만 명밖에 지나지 않았던 그 시절 케냐에 인도인들을 대거 이주시킬 계획으로 동아프리카 보호령에서 루피를 공식 통화로 지정하고 법률 체계를 영국령 인도 제국과 상당 부분 맞추어 놓았다. 영국에서는 케냐 현지 행정을 고아(인도)그 근교 콘칸(Conkan) 지방에서 온 카톨릭 신도 혹은 구자라트 지방 출신 파르시나 자이나교도 상인들에게 맡기고 경찰력이나 군인들은 펀자브인 시크교 신도들로 채웠다. 이미 케냐, 탄자니아의 스와힐리 해안 지대는 영국이 식민화하기 한참 이전 중세시대부터 인도계 상인들과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 벵골 지역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약 2,000만 명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인 1896년에서 1901년 사이에 약 32,000명에 달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이 우간다에 철도를 건설할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이송되었다. 반면 인도계 쿨리인 철도 노동자들은 오늘날 펀자브(파키스탄) 지방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라호르에서 모집되었다. 당시 철도 건설 과정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 및 맹수들의 습격 등으로 트랙 1마일 당 약 4명에 해당하는 2,5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철도의 완성 이후 철도 노동자들 중 고향에 재산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가족들을 데려오고 이들은 곧 케냐에 거주하는 친척들과 함께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1962년 기준 나이로비의 인구 중 3분의 1이 인도계였으며 케냐 전역에서 농업 이외에 다른 산업 분야의 4분의 3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63년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당시 케냐에 거주하던 인도계 대부분은 현지 국적을 포기하고 영국, 캐나다, 남아공, 호주, 미국 등으로 재 이민하여 오늘날의 인도계 영국인, 인도계 캐나다인, 인도계 미국인, 인도계 호주인, 인도계 남아프리카인 인구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다. 특히 우간다를 통해 온 인도계 후손이 미국에 정착했고, 이들중 하나가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라 생각된다. 같은 인도계로 이번에 트럼프와 지난 대선에 맞선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와 유명 뮤지션인 니키 미나즈(Nicki Minaj)가 있는데 맘다니와 다른 점은 트리니다드토바고에 정착한 인도계와 흑인 사이의 혼혈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 이후에 아시아계 이민이 대거 시작되면서 1980년에 인도계들의 숫자는 무려 30만으로 불어났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80만을 넘어섰고 2000년대에는 그 2배인 160만, 2010년에는 280만, 2020년대에는 440만 명에 이르게 된다. 인도계들의 이민이 많은 것은 인도라는 나라 자체가 영어를 지역 간 의사소통으로 쓰고 있지만 비즈니스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리핀계 미국인들과 같이 영어가 되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보다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도계 미국인의 소득과 수입, 교육수준은 아시아계 미국인 중 최고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상류계층 인도인보다 요즘에는 그다지 미국 정부나 기업에서 활용할 인재가 아닌 교육 수준과 문화적 매너가 형편없이 떨어지는 자들이 유입이 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순수 인도계 주민의 수가 처음으로 중국계를 앞지르면서 인구 기준 아시아계 1위로 올라섰다. 현재도 고숙련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H1B 취업 비자 신청자의 75%를 인도인이 차지할 정도로 인도계 이민자가 늘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이 정말 고숙련 기술자들일까? 대개 보면 이렇게 들어온 인도인들 대부분이 3D 업계로 가서 일하고 있다. 이는 미국 젊은 층들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힘든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은 미국 MZ 세대들의 빈 자리를 인도인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도계 인구의 증가로 인해 이들의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그런 가운데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가 뉴욕 시장에 당선된 것은 어쩌고 보면 예정된 수순이 아닐까 싶다. 이제 두고 보면 안다. 곧 있으면 LA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3대 대도시의 시장도 죄다 인도계로 바뀔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전에 영국에 총리였던 리시 수낙이 있었던 것만 해도 이를 반증한다. 곧있음 프랑스 대통령, 독일 수상도 인도계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혹시 또 모른다. 미국의 대통령도 인도계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한다. 이 모든게 세계적 부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를 정복하고 축적했던 서구 열강들의 업보다. 과거 식민지가 되었던 그들이 이제는 서구의 주류가 되면서 역으로 서구를 주무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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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8
  • 남명(南明) 정권 말기, 대만으로 이주한 정성공 및 정씨(鄭氏) 일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화교 2세대들
    남명의 한족 국가는 위기에 놓였을 때 새로운 영웅인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탄생되었다. 정성공은 부친 덕택에 매우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비범한 소년이었다. 21세에 남명 정권의 귀족이 되고, 22세에 반청운동 지도자가 되었으며, 30세에 왕으로 책봉되기 이른다. 그는 바다의 제왕이 되어 중국 심장부인 남경(南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정성공은 당시에는 국제화된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경호병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인디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탈리아 인을 특사로 활용했다. 그의 부대에는 독일인과 프랑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대적한 세력은 네덜란드로, 당대 세계 최강의 해양 국가였다. 한편 그가 장성한 뒤인 1644년 명나라는 북경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고, 아버지 정지룡은 3년 뒤인 1647년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정성공은 부친의 세력을 물려받아 오히려 청나라에 대항해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남명의 융무제는 정성공을 좋게 보았다. 얼마 안가 정성공에게 충효백(忠孝伯)으로 작위를 올리고 초토대장군이란 관직을 내렸다. 하지만 부친인 정지룡의 마음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1646년 섭정왕 도르곤은 조카 볼로를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남명 정권 잔당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볼로에게는 성에 남아있는 정씨 세력만 제거하면 숙원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고, 정지룡에게 전투를 벌이지 말자고 제의했다. 정지룡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허울만 남은 남명 정권의 융무제에 충성을 하느냐, 투항해 가문을 지키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북쪽에서는 명나라 유신들이 대거 투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할 경우, 변발만 하면 끝이다. 볼로는 항복을 하면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고 중국 남동해안의 실력자 지위를 유지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 때 정성공은 소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중원에서 복건성으로 내려오는 길목인 선하령(仙霞嶺)을 지키다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정지룡은 “나는 황제폐하가 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볼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고 사용했다. 정성공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을 따를 것인지와 나라를 지킬 것인지, 그리고 충(忠)과 효(孝)가 배치되는 순간에 정성공은 충(忠)을 따르기로 했다. 삼촌들도 육지에서 승전하기 힘들면 바다로 나가 항전을 계속하자는 입장이었다. 정지룡은 마침내 남명 황제를 배신하고, 적이었던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정성공은 해외 무역 및 해적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반청운동에 쏟아 부었다. 1659년에는 장강 일대를 따라 난징 일대까지 함락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내 청나라 군의 토벌군과 맞서 연패하면서 주요 점령지들이 함락당하고 고립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정성공은 1661년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당시 네덜란드 상관이 점거한 상태였던 대만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 인들은 정성공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학살되거나 노예가 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서양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정성공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 총독부와도 알력을 벌이다가 1662년 대대적인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망명정부였던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가 미얀마에서 청나라 군에 사로잡혀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병사하고 말았다. 정성공의 활약 속에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 역사는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청나라는 대만을 고립시키기 위해 바다로 나무 조각 하나 띄울 수 없다는 강경한 해금(海禁)정책을 펴게 됐으며, 이것은 명나라 시대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중국의 해상무역을 크게 후퇴시키고 대운하를 중심으로 한 내륙운송 무역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성공의 해적 활동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교역로를 접게 되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 인들이 일본 무역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성공의 사망 이후부터 그의 해상 세력은 방향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잠시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였던 오삼계가 일으킨 삼번의 난 당시 오삼계 세력에 합류하며 복건성 공격에 나서기도 했으나 청나라 군에게 참패했다. 결국 1683년 청나라 군에 의해 대만이 함락되면서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현대 중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끝내 충절을 지킨 충성스런 장수로 남아 영웅으로 추도되고 있으며, 대만에서도 네덜란드 인을 추방하고 대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추대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1895년 대만을 식민지를 삼은 이후부터 나가사키의 중요한 인물로 다루기도 했다. 정성공이 나가사키 태생이고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자랐다는 부분을 강조해 대만을 처음 정복한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선전시키기도 했다. 중국, 일본, 대만 삼국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영웅으로 추대하긴 했지만, 그의 일대기는 17세기 동아시아 해상 무역사의 면면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한 이후, 대만으로 간 정성공 및 정씨 일족 이외에 한족들은 다시 만주족의 청나라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와 각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주한 지역에 자리잡고 화교, 혹은 화인 2세대가 된다. 화교들은 주요 이주 지역인 동남아시아 및 미주 대륙의 국적법이 속지주의(屬地主義)인 반면에, 중국에서는 원칙적으로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이중 국적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화교들의 경제력이 막강하여 심지어 한 국가의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위협이 되었다. 화교 배척 운동과 더불어 화교들에게 현지 국적의 취득을 강요하며 거부할 때는 강제 출국이나 재산 몰수와 같은 강경책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교들은 현지 국적을 취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중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 국적의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5년 인도네시아와 중국과 인도네시아 이중 국적 문제조약을 체결하여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쪽 국적만을 인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동남아시아 각국이 중국과의 국교 수립에서 이중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준이 되었다. 각종 통계에 의하면 화교들이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33개국에 약 2,200만 명, 미주 32개국에 230만 명, 유럽 24개국에 67만 명, 대양주 15개국에 34만 명, 아프리카 32개국에 10만 명이 각기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상당수의 화교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현지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외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 연안 지방에 거주하던 농민과 어민이었다. 그들은 국내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수입이 적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생존의 목적으로 해외 여러 나라로 이주했으며, 이는 현대적 의미의 이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현재 전 세계 화교인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하여 자본의 규모는 일본 국민총생산(GDP)의 5분의 1 정도에 달하며, 그들의 대부분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지역 화교의 총 자산은 전 세계 화교 자산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며, 현지 민족 자본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제학계의 추산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산업의 50%~80%와 대외무역의 40%정도를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경우, 화교경제는 이미 소규모의 음식점, 세탁소 등의 영세 업종에서 탈피한 지 오래이며, 기존의 금융과 부동산, 유통 등에 기초하여 첨단 기술 분야인 전자와 정보통신, 화학공업, 정밀기기, 강철 등의 산업에서 이미 국제적인 수준의 기업가를 배출하고 있다. 특히 화교 기업은 정보통신산업을 21세기를 향한 전략산업으로 간주하여 빠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화교의 정보통신 산업의 기원은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실리콘벨리에서는 하이테크분야에서 벤처기업을 일으켜 사업에 성공한 화교기업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소프트웨어 회사인 컴퓨터 아소시에이즈(CA)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가 자루즈 왕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비스 Yahoo를 경영하고 있는 창업자 지에리 양이 화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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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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