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me >  칼럼 >  Nova Topos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
- 칼럼
- Nova Topos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
- 칼럼
- Nova Topos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
- 칼럼
- Nova Topos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 칼럼
- Nova Topos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
- 칼럼
- Nova Topos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
미얀마의 불교 이야기
- 미얀마 인들은 절에서 기도도 하면서 기원도 하고 빗자루질로 인해 스스로의 성찰과 봉사도 아까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가족들끼리 음식을 가져와 식사도 하면서 오봇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불교는 그냥 삶이자 생활 자체다. 미얀마 문화는 곧 불교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는 미얀마 인들의 생활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미얀마에서 불교를 신봉하는 가정에는 거의가 집안에 빠야씬(Pha yar sin)이라는 불단을 갖추고 있다. 대다수 미얀마 인들의 가정에서 엄수하는 불교 의식 가운데 하나가 ‘신쀼’ (Shinpyu) 의식이다. ‘신쀼’란 7~13세 사이의 남자 아이들을 몇 주 혹은 몇 개월 간 사원으로 보내 승려생활을 체험하도록 하는 제도다. 신쀼 행사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미얀마의 남자 아이들은 이 시기에 불교의 교리와 함께 미래의 지도층으로서 갖추어야 할 극기와 인내, 배려심 등을 체득하게 된다. 미얀마인들이 생활화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식의 하나가 보시(앗흐루, Ah Hlu)이다. 미얀마는 세계에서 기부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이며, 국민의 90% 이상이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기부문화는 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님이나 사찰에 대한 공양은 곧 사회적인 보시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임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 미얀마 인들의 보시행위를 보면 나눔은 물질의 풍요가 아닌, 정신의 풍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얀마 인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가정행사를 절에서 치르거나, 스님이 와서 행사를 주재한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이 결혼식으로, 요즘은 도시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은 서양식 결혼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절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국민들의 교육도 일정 부분 사원이나 수도원에서 담당하고 있다. 특히 8~9세의 어린이는 지방사찰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는 것이 일상적이다. 오랜 군사 독재 하에서 교육이 황폐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문자 해독률이 90%를 넘는 것은 사찰이 운용하는 학교들의 공적이다. 다만 불교의 폐단도 있다. 미얀마 불교 사찰들의 부유함은 어마어마해서 왠만한 대기업들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래서 승려들의 착복과 더불어 부패는 한국의 일부 대형 기독교 목사들보다 심하다 한다. 이렇게 어려운 미얀마 사람들 피빨고 있는 승려들이 성직자라 할 수 있을까? 승려가 여자들을 거느리고 있는건 일도 아니고 전반적으로 사회지도층에 있기 때문에 국가반역죄와 같은 중죄가 아닌 이상 처벌을 할 수 없다. 이곳에서의 승려는 그냥 사회지도층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는 부처인 존재다. 그래서 승려는 미얀마 국법인 세속법에 저촉받지 않는다 했다. 그러한 배경이 있어 미얀마에서 스님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정식 스님이 되려면 꽤 오랫동안 수도원에서 수련해야 하는데 수도승은 정식 승려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으로 인정도 안한다. 그 대신 수도자가 되려는 경쟁율도 엄청 치열하다 한다. 미얀마는 승려가 세속법에 저촉받지 않고 당당히 재물을 취득할 수 있는 나라다.
-
- 칼럼
- Nova Topos
-
미얀마의 불교 이야기
-
-
미얀마 불교와 양곤의 쉐다곤파고다
- 2019년 미얀마 불교의 본산이자 미얀마의 상징인 쉐다곤 파고다에 왔었다. 전설에 의하면 쉐다곤 파고다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고고학계에 의하면 쉐다곤의 상징인 높이 98m의 불탑은 사실상 6~10세기 사이에 몬족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곳 승려의 기록에 따르면 불탑은 부처가 죽기 전인 B.C 486년에 지었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논란에 있다. 탑은 1300년대에 바고의 빈야우 왕에 의해 18m의 높이로 재건되기 전까지는 파손된 상태였다. 이후 몇 차례의 개축을 거쳐 15세기에 현재의 98m 높이가 되었다. 몬족의 왕은 바고의 쉐마우다우와 쉐다곤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불탑을 소유하고 있었다. 원래는 8m에 불과했으나 1362년에 빈야우 왕에 의해 20m의 높이로 증축되었다. 신사우부 여왕(1453~1472)은 탑의 높이를 40m로 높였다. 16세기 초까지 불탑은 미얀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순례지가 되었다. 미얀마 불교는 상좌부 불교, 또는 초기 불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미얀마 인들의 삶에는 종교가 생활 곳곳에 뿌리박고 있다. 스님들을 존경해서 스님들 차량은 번호판도 달라서 쉽게 식별할 수 있게 되어 있기도 하다. 또 탁발을 통해서 재가자들이 수행자들에게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믿어 마을마다 순번을 정해서 기꺼이 자기의 것을 내어놓고 있다. 불교 신앙 덕분에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아 미얀마의 범죄율은 낮은 편에 속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욕망을 부채질하여 성장 가도를 달려야 하는데 그 부분에 있어 불교 신앙은 그런 부분에 있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있다. 화려한 쉐다곤의 전각들을 보니 대단하고 화려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에는 미얀마 사람들의 대단한 불심, 그리고 얼마나 승려들에게 빨렸을까? 라는 생각들이 동시에 일어난다. 오전 시간 거리로 나가면 붉은색의 가사(승려가 입는 옷)를 걸치고, 줄지어 탁발을 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런 모습에서 미얀마는 불교의 나라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미얀마 인구의 89%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미얀마 전역에는 약 61,000개의 사찰이 있고, 스님의 수는 대략 45~50만 명으로 추정된다. 미얀마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는 자기완성, 즉 개인의 해탈에 주안점을 두고 수행을 하는 불교의 유형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미얀마에서는 불교가 전통적으로 국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불교가 미얀마의 정신적 지주로 정립된 것은 11세기에 바간 왕국을 건국한 아노라타(Anawrahta) 왕(1044~1017년)때다. 몬족 출신의 승려인 ‘싱 아라한’에게 불교를 사사 받은 아노라타왕은 다양한 종교를 상좌부 불교로 통합했다. 아노라타 왕은 최초의 통일국가른 이룬 통치자로서 다양한 민족의 통합을 위해 불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을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 같다. 이 때부터 미얀마의 불교는 바간 왕국의 뒤를 이은 여러 왕조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 속에서 순탄하게 기반을 넓혀 왔다. 미얀마 불교가 최초의 시련을 겪은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1948년까지 60여년 동안 지속된 영국의 식민통치 기간이었다. 영국 식민 통치자들은 불교를 억압했고, 영국을 대리해 미얀마의 관료제와 경제체제를 장악한 이슬람계 로힝야 족들의 불교 탄압도 극심했다. 이렇게 되자 불교계는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1908년 ‘우 오타마’(U Ottama) 스님을 중심으로 미얀마 청년불교도연맹(YMBA) 창설되었고, 이 조직은 반영(反英)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
- 칼럼
- Nova Topos
-
미얀마 불교와 양곤의 쉐다곤파고다
-
-
파푸아뉴기니 소요 사태와 QUAD, 중국의 남태평양 전략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 파푸아뉴기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 현재 태평양 섬 나라인 파푸아뉴기니 수도 포트모르즈비 등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계속되자 파푸아뉴기니 총리인 제임스 마라페(James Marape)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날 마라페 총리는 이날 포트모르즈비에 14일동안 비상사태를 선포한다며 비상령에 따라 경찰 업무를 정지시키고 정부군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 비상사태는 11일부터 이어져 26일에 끝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현재까지도 비상사태는 계속 연장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처럼 파푸아뉴기니의 소요 사태는 경찰관을 비롯한 공무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에 있어 삭감조치가 나온 것에 관련해 경찰청장과 재무부 관계자 등을 정직 처분한 사태까지 벌어져 여기에 불만을 품은 공직자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경찰이 소득세 인상에 불만을 품고 파업을 진행했으며 이러한 경찰들의 파업으로 인해 치안 공백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폭동이 발생했고 상점들이 잇달아 약탈당하는 등의 범죄까지 발생해 치안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수도인 포트모르즈비에서는 10일 오전부터 경찰과 군인, 교정 공무원 등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없이 2주 치 봉급에서 300키나(약 10만 5천원)의 급여가 줄어들자 파업하겠다며 시위에 나섰다. 물론 이들 공직자들의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됐지만 시위 소식이 소식이 알려지자 상황이 급변했다. 이는 시민들이 치안 공백을 틈타 상점을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았고 각종 범죄가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분한 군중들은 의회와 총리실 앞까지 접근해 경비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같은 상황을 제어할 경찰이 파업하고 없어 군인들이 겨우 치안을 도맡는 등, 이같은 무질서, 무방비에 노출된 사태를 해결할 방안도 나오지 않고 있다. 더불어 포트모르즈비에서 북쪽으로 약 300㎞ 떨어진 제2의 도시 라에에서도 폭동이 일어나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마라페 총리는 1,000명 이상의 병력이 필요한 곳에 투입될 수 있도록 대기 중이라면서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억제하기 위해 방위군이 개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SNS에는 수천 명이 상점에서 물건을 들고나오거나 검은 연기가 도시를 뒤덮은 영상이 올라왔으며 이번 소요 사태로 두 도시에서 16명이 사망했다. 이에 경찰들이 일선에 복귀했지만 소요 사태는 계속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사태가 발생한 배경은 공직자들의 임금을 둘러싼 갈등, 치솟는 물가 및 높은 실업률 등이 한꺼번에 겹쳐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원인은 더 근본적인 부분에 있다. 빈부 격차가 매우 심각하며 솔로몬 제도, 키리바시를 제외하면 오세아니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 볼 수 있다. 파푸아뉴기니의 1인당 GDP는 2023년 IMF 통계 기준으로 가까운 호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인 인도네시아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인도보다도 낮은 2,581달러로 1인당 GDP 순위도 190개국 중 139위에 불과한 나라다. 자국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이 적어 대다수의 상품을 해외에서 수입해오기 때문에 물가도 개발도상국 기준에서는 높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1인당 PPP가 2023년 IMF 통계 기준으로 3,403달러, 191개국 중 163위로 동티모르, 에티오피아보다도 낮다. 국민의 39%가 빈곤한 상태이고 문맹률도 꽤 높다. 학생들이 갑자기 영어로 전환되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문해율은 70%가 약간 안 되는 수준이고 이마저도 다른 태평양 섬 나라들보다는 높은 편에 속하긴 한다. 다만 이웃 호주의 영향으로 복지 제도는 그나마 갖추어져 있는 편이지만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최근에는 중국과 호주의 투자로 경제가 발달하고 있다만 빈부격차는 여전히 해소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동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던 호주가 뒤늦게 투자를 하고 있지만 중국이 파푸아뉴기니에 진출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동부 태평양 지역 지정학적인 부분과 안보의 압박 덕택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의 자본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수도 포트모르즈비에 세워지고 있어 중국에 경제가 잠식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증가하고 있지만 중국의 투자는 파푸아뉴기니 서민들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파푸아뉴기니에 대한 개발을 자국민들에게 맡기지 현지 파푸아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도 없는 이들이 많고 파푸아뉴기니 정부 또한 실업율을 낮추는 것에 관심이 없다. 파푸아뉴기니 토종 기업도 거의 없고 서민들이 막노동하며 벌어들이는 돈은 하루에 3달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계속되는 실직 상태 및 물가 상승 압박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파푸아 주민들에게 일자리는커녕 물가를 상승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 기업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그래서 이번 소요 사태 때 중국 대사관 또한 여러 중국 기업들이 공격받았고 중국인 몇 명이 부상당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더불어 마라페 총리는 대표적인 친중인사다. 작년 2023년 12월 11일 마라페 총리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자원 투자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그는 중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지난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3회 일대일로(一帶一路 :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 · 해상 실크로드) 정상 포럼에 참석했던 것을 언급하며 당시 중국과 안보 관련 논의는 없었고 경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받아 들이겠다는 발언도 했다. 중국은 최근 몇 년 동안 파푸아뉴기니에 고속도로 건설과 부동산 개발 등에 투자하고 있는데 마라페 총리는 중국의 이러한 투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마라페는 파푸아뉴기니의 농산물 수출 절반은 중국으로 가고 있다며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마침 2022년 4월 중국과 솔로몬 제도가 안보에 관련된 남태평양 협정을 체결하면서 남태평양 지역에 영향력을 확장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막으려는 미국, 호주 등은 QUAD (인도·태평양 국제 기구)를 통해 중국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오세아니아에서 호주 다음으로 국토 면적이 큰 파푸아뉴기니는 QUAD와 중국의 남태평양 전략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파푸아뉴기니에는 니켈과 구리, 액화천연가스(LNG)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자원 쟁탈전에도 QUAD와 중국이 충돌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푸아뉴기니에서 중국은 서민들의 인심을 얻는데 실패했고 치솟는 물가와 실업률 속 경제가 침체되면서 마라페 총리는 다방면으로 압박받고 있다. 마라페는 이같은 서민들의 불만을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작년 5월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했고, 12월 7일에는 호주와 경찰력 지원 등 치안 협력에 초점을 맞춤 안보 협정을 맺었다. 안보 영역에서만큼은 중국과 거리두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유엔 인간개발지수에서 최하위권에 속할 정도로 발전이 뒤처져 있어 경제 발전 관련 중국과의 협력은 강화하길 기대하는 분위기이다. 사실 파푸아뉴기니는 매우 풍부한 자원과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인구로 치안 상태와 부정부패 등이 개선된다면 앞으로 개발도상국 상태까지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다. 파푸아뉴기니의 인구 증가율은 상당하여, 2000년에는 570만 명이었던 인구가 2021년 918만 명까지 증가할 정도이다. 따라서 몇 년 뒤에는 인구가 1,000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파푸아뉴기니의 평균 연령은 동남아시아보다도 훨씬 젊은 편으로 현재 평균 연령은 무려 22.5세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젊은 편에 속한다. 물론 충분히 선진적인 교육 받은 엘리트들과 문맹률을 낮추고 어느정도 교육수준이 평이한 인구가 많아져야 인구 증가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더불어 QUAD와 중국이 충돌하고 있는 지정학적으로 우세한 요인들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현재와 같은 소요 사태도 점차 사라지고 경제적으로도 성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달려 있고 2월 총리 불신임 투표 시행을 촉구하고 있는 야당을 어떻게 달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
- 칼럼
- Nova Topos
-
파푸아뉴기니 소요 사태와 QUAD, 중국의 남태평양 전략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 파푸아뉴기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
-
대표적인 유럽의 인종차별과 의도적 폐쇄성 지닌 공간, 게토(Ghetto)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폴란드 총독부를 비롯한 동유럽 점령지의 도시들에서 부활시켜 유대인을 몰아넣을 수용구역으로 이용했으며 이는 엄청난 악명을 떨쳤다. 바르샤바 게토가 수용인구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고, 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이들 대도시 외에 여러 중소도시에도 게토가 세워졌다. 이 게토와 이전의 역사적 의미의 게토의 다른 점은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유럽의 다른 토착 기독교도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좁은 구역에서 거주하게 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이후에 있을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위해 세웠다는 점. 당연히 이전의 게토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인구 밀도가 높고 비위생적이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3.4㎢의 면적에 45만 명을 수용하여 인구밀도가 10만명/㎢을 넘었다. 더불어 사망률도 비할 수 없이 높았다.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2차 대전 당시의 게토는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있었다. 상하이(上海) 등 일본군의 점령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 또한 일정 구역의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이곳의 주거 환경 역시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홀로코스트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나치 독일이 점점 패망하면서 폴란드의 게토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 봉기를 시발점으로 무기를 밀수하여 그곳에 있던 나치 독일군들과 해방 전투를 벌였는데 아쉽게도 진압당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 유대인들도 나치 독일군들에게 희생당하게 된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그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은 도저히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나치 독일군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돈을 별로 못 받아 먹을 걸 먹지 못한 나머지 아사(餓死)한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의 아버지가 감자를 가지고 돌아오던 도중에 나치 장교가 인사를 안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나치 독일 통치하의 게토는 심각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도리어 유대인들끼리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거나 나치군에게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광대같은 짓을 하는 등, 게토에서의 생활을 잘 표현했다. 게토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영화 <피아니스트>를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를 찍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유대계였기 때문에 고증에 신경써서 찍은 편이다.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 에서도 초반에 비중있게 나온다. 독일인 군수사업가로서 유대인 인력을 이용하러 온 상황에서 고급 숙소를 제공 받는 쉰들러와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진 강제 이주 유대인들의 상황이 대비된다. 그나마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은 한 집을 단독으로 배정받았지만,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아예 한 집에 서로 연고도 없는 여러 가구가 집어 넣어진 상황들이 묘사된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은 게토를 끝장내고, 여러 차례에 걸쳐 수색해 소개령에 응하지 않고 숨어 있던 유대인들까지 철저히 학살했다. 라트비아 리가의 홀로코스트에는 독일과 라트비아인들이 유대인들 가두고 학살한 전쟁범죄의 장소다. 라트비아인들은 유태인을 색출해 4만 명이 넘는 숫자의 유태인들을 체포하고 대부분 처형했다. 이같은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도 라트비아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사과 한 번 한적이 없다. 따라서 라트비아의 네오나치들이 소수 활동하고 있음에도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의식이 그다지 많지 않다.
-
- 칼럼
- Nova Topos
-
대표적인 유럽의 인종차별과 의도적 폐쇄성 지닌 공간, 게토(Ghetto)
-
-
벵골인들이 많이 사는 곳, 벵골인의 땅, 방글라데시
- 인도 꼴카타의 숙소가 있는 골목의 현지인들이 말하길 스스로 자신들을 벵갈인이라고 했다. 벵갈은 이곳 언어고 벵골은 영문식 발음이다. 이들은 기존의 힌두어 말고 벵골어가 따로 있고 벵골 문자(বাঙালি)라 불리는 방갈라라는 문자를 쓴다.벵갈이라는 뜻은 브리흐만어로 "깊이 들어간 땅" 이라는 뜻이다. 벵갈, 벵골의 갈과 골은 들어가다라는 뜻이 있는데 우리 말로 움푹 들어간 것을 "골이졌다", "골이 파였다"와 같은 뜻이라 보면 된다. 벵이라는 말은 "혼란스러운", "혼돈" 이라는 뜻도 갖고 있는데 우리말로 "벵벵 돌았다" 와 유사한 뜻과 음원이라 보면 된다. 하나하나 의미를 되새김해 보면 이상하게 우리말과 연관되는 부분이 많은것 같다. 벵골인들이 많이 사는곳, 벵골인의 땅이라는 뜻은 방글라데시다. 이들은 대체로 인도-아리안계로 몽골-티베트계와 대치되는 혈통이다. 바로 옆국가 미얀마의 조상인 몽골-티베트계 민족에 대해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벵골 땅과 민족을 지켜왔다. 물론 그들도 겐지스 문화를 정복한 아리안 정복민족이긴 하지만 무려 2,500년간 뱅골을 지켜왔다는 자부심 하나는 대단하다. 꼴까타 시내를 돌아다니는 겉보기에 고풍스러운 택시들은 영국 식민지 시기의 차량을 모방한 택시들인데 고풍스러워 타볼만 하지만 미터기가 없어 흥정해야 한다. 게다가 에어콘도 없고 뜨거운 여름을 창문 열고 다닌다. 골까타도 지금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진행 중이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습도도 쎄다. 필자의 숙소가 있는 곳은 파크스트리트라고 헤이스팅스 지구 빅토리아 공원과 인접해 있다. 빅토리아 공원은 꼴까타의 심장과 같은 공원이다. 이름도 그러하듯이 영국 식민지 시대 이름 그대로를 쓰고 있다. 숨쉬는 것 빼면 사기 천국인 꼴까타에서 살아 남으려면 99.99%의 사기 확률로 접근해 오는 호객꾼들을 상대하지 말아야한다. 한국말로 말하며 접근해오는 호객꾼들 99.99%는 사기꾼일 확률이 높고 생수 한 병을 사더라도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생수는 반드시 뚜껑의 상태를 확인해야하고 페트병의 상태도 확인해야 한다. 뚜껑이 열려있는 생수는 100% 위험하다보면 된다. 거기다 약 넣고 기절시켜 강도짓 하는 놈이 대표적이고 마약 성분을 넣고 환각을 일으키게 만들어 강도짓 하는 자들도 있어 경계를 요해야 한다. 게다가 겐지스 강의 그 오물과 바라나시의 화장도 채 다 안한 상태로 떠다니는 시체의 물을 넣고 식수라고 사기치며 장사하는 자들도 있다. 생수 들어 있는 페트병이 구겨져 있거나 겉표면이 지저분하거나 플라스틱 라벨이 벗겨져 있다든가 하는 것들은 누군가 한번 쓰고나서 어떠한 위생적 처분도 하지 않고 물 담아 장사하고 있는 것들이니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좋더.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 생수와 섞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위생 관념 자체가 절벽인 인도에는 그 무엇도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 칼럼
- Nova Topos
-
벵골인들이 많이 사는 곳, 벵골인의 땅, 방글라데시
-
-
미하일 마로코비치 보르딘(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1884~1951), 벨라루스 출생으로 유년 시절을 라트비아에서 보냈던 러시아계 유대인 인사
-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사를 볼 때 이 두 나라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간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청나라 때는 러시아와 청나라는 적국이면서도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아 간 나라였고 청나라가 무너진 후, 중화민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13년에 최초로 수교를 맺었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제국이 붕괴되고 러시아 임시정부에 이어 소비에트 볼셰비키 연방이 세워지자 수장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3 세계의 민족주의를 지원함으로써 고립을 벗어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제3 세계 민족주의 대한 지원은 쑨원이 내세운 국공합작 노선과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쑨원은 공산당에 대해서도 매우 유화적인 인물로 유명했으며 공산당을 포용하려 했다. 이는 쑨원이 공산당 자체에 대해 잘 몰랐던 부분도 있지만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내세워 국공 통합을 실현하려 했고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를 함께 발현시킬 수 있는 파트너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공 전국 쑨원기념관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소련은 이러한 쑨원의 정책에 대대적인 환영의사를 밝히고 군사고문 등을 내전 상황에 놓여 있던 중국에 파견했으며, 이 관계는 장개석 통치 때까지 지속된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을 통한 당대당의 지원을 하는 한편 국민당에게는 군사고문 등을 파견했다. 이와 같은 양다리 외교 작업을 한 이유는 당시 분열 중인 중국보다는 일본의 세력이 더욱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적백 내전의 혼란기 당시 일본이 바이칼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넘보려 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을 점령하고 연해주를 휩쓸었던 전력이 있었다. 겨우 러시아 전토를 적화하는데 성공한 소련은 이와 같이 동아시아에서 위세를 부 리는 일본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당의 장개석이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을 깨고 국민당 내 공산당원들을 숙청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냉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과의 관계는 파쇄하지 않았다. 이러한 양각 관계에 있어 중심이 되어 축을 유지한 인물이 바로 미하일 마로코비치 보르딘(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1884~1951)이었다. 미하일 보르딘은 1884년 7월 9일 오늘날의 벨라루스에 해당되는 러시아 서부 비텝스크 주의 야노비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유대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태인으로 3세에 아버지를 따라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내다 러시아의 중등 학교에 입학했고 16세의 어린 나이에 공산당 사상에 감명을 받아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면서 혁명가 활동을 시작했게 된다. 물론 보르딘은 벨라루스 출신의 라트비아 유대인 출신이라는 같은 볼셰비키 내에서도 차별을 받긴 했지만 각종 지하공작에 참여했고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 레닌을 만나 발트 지역에서 공산 활동에 대해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이후, 러시아 제국 내의 경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되었지만 이내 석방된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여 10년 이상 시카고와 보스턴에서 생활하여 미국 내 좌익활동을 이끌게 된다. 이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미국 사회당에 가입했고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 혁명의 완수 이후 1918년 7월 모스크바에 귀국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체류 경험으로 인해 영어에 능통한 보르딘은 레닌의 저작물을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전파했고 중국으로 파견 후에는 국민당에 협력하면서 쑨원 등과 영어로 소통하기도 했다. 보르딘은 코민테른이 창설되자 그는 1차 대표 회의에 참여했으며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미주 지역에 파견되어 정치와 재무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도 브란트바인이란 가명을 쓰고 멕시코 공산당을 창설하고 이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인도 공산당원인 마헨드라나트 로이와 알게 되면서 인도 공산당의 창설에도 기여했다. 보르딘은 로이에게 소련에 가서 2차 코민테른 대표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추천했고, 1921년에는 오스만투르크로 가서 터키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빨치산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1922년에는 조지 브라운이란 가명을 쓰며 영국에서 영국 공산당을 조직하는 혁명활동을 전개하다가 1922년 8월에 체포되어 글래스고에서 복역했으면 6개월 후 석방되어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보르딘은 미국, 멕시코, 스페인, 독일, 영국, 터키 등에서 혁명 활동을 후원하여 코민테른의 해외 요원으로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최정예 해외 요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마침 이 때 중화민국의 쑨원은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 등, 제1, 2차 호법 운동 등의 쿠데타 이후 해외 화교의 후원 이 외에도 각종 재정 수입과 자체 군사력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유일하게 자신들을 지원할 만한 국가와 세력을 찾게 되었고 열강 중에 하나인 소련은 그와 맞는 파트너라 판단하여 소련과의 제휴에 집중하게 되었다. 1922년 12월 20일 쑨원은 중국 주재 소련 전권 대표인 아돌프 요페(Адольф Иоффе, 1883~1927)에게 무기, 화기, 기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소련 정부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하게 된다. 그리고 12월 말에 10만 명의 군대로 사천과 감숙에서 외몽골로 진입해 베이징을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게 되면서 무기, 장비, 고문단의 파견을 요청하게 된다. 1923년 2월에도 쑨원은 소련 정부의 원조에 대해 요청했다. 소련 역시 동방 전략의 일환으로 쑨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양자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게다가 중화민국을 어느정도 지원하면 막강한 일본을 상대로 소련 인민이 피를 흘릴 이유도 없게 된다. 여러 문제들을 숙고한 끝에 1923년 3월 소련 정부는 쑨원에게 가능한 모든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하였고, 200만 루블의 현금과 일본제 소총 8천정, 기관총 15정, 대포 4문, 장갑차 2대, 훈련원 1명을 중국의 통일과 민족 독립의 쟁취를 명목으로 파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쑨원은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8월 16일 장개석 등을 소련에 파견하여 3개월 간 소련을 방문하게 했고 1923년 여름부터는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파견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최정예 요원이 필요한 스탈린에게 1923년 7월 31일 레프 카라한(Лев Карахан, 1889~1937)에게서 보로딘을 소개 받게 된다. 이에 정치 국원들과의 회의를 통해 8월 2일에 이를 비준하여 보로딘을 쑨원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하여 파견하게 된다. 이 외에도 보로딘은 베이징 주재 소련 전권대표 카라한과 협조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모스크바와 서신 왕래를 하며 매월 1회 정기적으로 업무 보고를 한다는 것 등을 결정 받고 중국에 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와 코민테른의 대외 정책을 숙지하면서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미하일 마로코비치 보르딘(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1884~1951), 벨라루스 출생으로 유년 시절을 라트비아에서 보냈던 러시아계 유대인 인사
-
-
명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비선실세 엄숭(嚴嵩)과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
- 명나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북로인 오이라트와 싸워 나라를 구한 우겸과 같은 충직하고 청렴한 관리가 있었던 것에 반해 이러한 인물들의 최후는 대부분 편안하지 못했다. 반면 이러한 인물들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간신배들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원 한족들이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를 세워 통일했지만 이들 나라 중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나라는 명나라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부패함과 무능함을 주도했던 간신들은 환관들이었다. 물론 정화와 같은 인물은 해외로 원정하여 명나라의 위세를 끌어 올렸지만 그와 같은 인물은 사실 드물었다. 엄숭(嚴嵩)은 강서(江西) 신여시(新餘市) 분의현(分宜縣) 사람으로 자는 유중(惟中), 호는 면암(勉庵), 개계(介溪), 분의(分宜)이다. 언뜻 보면 상당히 위세를 떨친 인물로 생각되지만 실제 이 인물의 내력을 보면 문필력 하나는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다. 이는 그의 문집인『검산당집(鈐山堂集)』에서 나타나는데 그가 25살 때이던 1505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급제했다는 등을 볼 때 그는 명나라에서 수재 측에 들어가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엄숭에게는 중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막강한 성리학 계통의 학통들이 중앙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에 의해 황제의 권력 자체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토목보의 변 이후, 헌종 성화제(憲宗, 成化帝), 효종 홍치제(孝宗, 弘治帝) 시대에 어느 정도 세력을 되찾았다. 특히 효종 때는 대명률(大明律)을 개정하여 문형조례(問刑條例)를 반포하였고 법규를 정비하기 위해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개정하는 한편 서부(徐溥), 유건(劉健), 이동양(李東陽), 왕서(王恕), 마문승(馬文升), 구준(丘浚) 등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구준이 헌정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수렴하였고, 마문숭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그러한 시기였기 때문에 엄숭이 중앙으로 파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종 정덕제(武宗, 正德帝)에 이어 세종 가정제(世宗, 嘉靖帝)가 즉위했다. 세종은 헌종 성화제의 손자이자 흥헌왕 주우원의 둘째 아들로 본래는 황위 계승과 상관없는 인물이었지만 형 주후희는 태어난지 5일만에 요절하였고 그가 부왕으로부터 흥헌왕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사촌형인 무종 정덕제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그는 황제로 추대되어 등극하게 된다. 세종 가정제는 전임 정덕제의 아들이나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동생으로 방계로부터 들어와 즉위했기 때문에 황제로써 누구의 뒤를 승계했는지에 관한 문제와 사촌형인 정덕제나 백부인 홍치제의 양자로 입적이 된다면 생부인 홍헌왕의 처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큰 관건이 되었다. 물론 <주자가례> 에 의하면 황제나 왕의 지위를 계승한 자는 그 전임자 사자가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임자의 아들이나 다름 없는 위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가례>의 원칙을 중시하는 양정화(楊廷和) 등을 위시한 성리학 체제의 관료들은 일부 절충하여 정덕제 대신 백부 뻘인 홍치제를 양아버지로 두고, 효종을 황고(皇考)로, 생부인 흥헌왕은 황숙고(皇叔考)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주자가례>의 원칙 때문에 숙부로 해야한다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당연히 세종은 이를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성리학 계통의 유학자들의 세가 막강했고 세종의 편을 들어주는 중신들은 몇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은 효종을는 황고(皇考)로 친아버지인 흥헌왕은 황숙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가정제를 도와주는 슈퍼히어로와 같은 자가 등장하니 그가 바로 엄숭(嚴嵩)이다. 엄숭은 세종에게 주청하여 궁을 걸어 잠그고 친위군인 금군을 동원하여 아버지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하라고 하자 세종은 이를 따라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한다. 신료들은 궐문 밖에서 대대적인 농성전을 펼쳤다. 아버지를 황제로 추촌하려던 세종과 엄숭은 친부를 황고, 홍치제는 황백부라 칭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리하여 황제파와 정부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대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위대 금군과 엄숭이 이 사이 총병관(總兵官) 직위에 있던 구란(仇鸞)을 설득해 하북성 쪽의 방위군 15만을 북경에 집중시키자 이에 힘을 받은 가정제는 자신의 뜻을 밀어붙여 아버지 홍헌왕을 황제로 추존을 확정함과 동시에 양정화 등을 파직시키거나 주살했다. 이후 세종은 중신 190명을 형부에 수감한 뒤 양정화를 비롯한 주모자를 변방으로 유배보냈으며, 4품이상 관리는 강등시키거나 봉급을 박탈하고 5품이하 관리는 장형으로 다스려 16명의 하급 관료들은 형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살당했다. 이 대례의 의는 3년의 논쟁끝에 가정제의 뜻대로 되어 효종 홍치제는 황백고로 불렸고 장태후를 황백모라 하기로 하고 종결되었다. 이 사건의 공로로 인하여 엄숭은 예부상서로 승진해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하게 된다. 세종은 즉위 초기에는 정치 개혁을 어느 정도는 강구했으나 나중에는 도교에 빠지게 되었고 궁 안에 단을 만들고 신선을 부르기까지 하여 명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히게 된다. 세종의 이러한 행위는 결국 조정 대사에는 당연히 관심이 적어지게 마련이었다. 특히 엄숭(嚴嵩)은 제문을 남들보다 잘 썼기 때문에 경건한 도교 신자인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러한 공으로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 올랐다. 이후에도 승진을 거듭해 내각의 수보(首輔), 즉 재상의 직위에까지 올라갔다. 이후 세종은 더욱 도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져 불로불사(不老不死)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그는 단약을 제조하는데만 많은 시간과 민중들의 세금들을 허비하게 된다. 그리고 허황된 불로장생의 약초를 찾아 각지로 사람을 파견하기도 했다. 심지어 엄숭은 이러한 세종에 진언하기를 불로불사의 단약을 제조하기 위해 12~14세의 궁녀들의 첫 생리 혈액을 응고하여 경단을 만들어야 효험이 있다고 어이없는 진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어린 궁녀들은 붙들려 강제로 월경액을 채취당하는.. 소위 말하는 짐승 같은 짓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궁녀들 중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등 16명이 세종을 죽이기로 모의하게 된다. 이들 궁녀들 나이가 12~14세로 세종의 엽기적인 행위의 피해자들이었던 것이다. 1542년 겨울 마침 세종이 단비(端妃) 조씨(曹氏)의 궁에서 자고 있을 때 이들 궁녀들은 세종이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려고 했다. 목을 졸리는 상황에서 세종을 구한 것은 황후 방씨(方氏)였다. 이 사건으로 양금영등 16명의 궁녀는 거열형(사지를 찢기는 형)에 능지처참까지 당하고 단비 조씨는 그들 궁녀 16명이 잠입하는데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죄목과 더불어 이들 16명의 궁녀를 관리 감독하던 영비(寧妃) 왕씨(王氏)도 이들 궁녀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황후 방씨의 명에 의해 주살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임인궁변(壬寅宮變)이라 불려진다. 이러한 세종은 다분히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 황후였던 진씨(陳氏)는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세종의 발에 걷어차여 복중에 있던 아들과 함께 절명하였고 두 번째 황후였던 장씨(張氏)는 가정제 자신이 만든 단약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출되어 냉궁에서 병사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황후였던 방씨에 대해서는 임인궁변 당시 자신이 총애하고 있던 영비(寧妃) 왕씨(王氏)를 주살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몇 년뒤 황후가 거처하던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세종은 그저 그를 방관만 하면서 황후를 구출하지 않았다. 결국 임인궁변 당시 세종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방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해주었던 세종에 의해 불에 타죽고 만다. 세종의 광폭 행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556년 역대 자연재해피해 순위의 2위권에 드는 산서성에서 대지진이 일어난다. 당시 산서 지방에는 탄광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지진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한데다가 관료들의 대처도 미흡했고 세종은 아예 이 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다. 특히 엄숭은 아들 엄세번(嚴世蕃)과 함께 구호물품들을 빼돌려 자신들의 재산 목록에 채웠다. 그러한 부분으로 인하여 이후 여진이 발생하였어도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엄청난 이재민이 발생했음에도 지방 정권에서는 이들 이재민들을 거지 취급하여 추방했다. 이러한 불만들이 결국 한데 모여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때에 감숙성 영하 지역에서 타타르 출신 용병 보바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보바이의 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명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비선실세 엄숭(嚴嵩)과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
-
-
투르크의 어원과 민족주의의 형성
- 투르크(Türk)라는 말은 오스만투르크 제국 당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투르크어를 모어로 하는 집단이 아니라, 척박한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가난한 농민들이나 유목민 부류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 투르키쉬였다. 가난한 민중들이나 시골 사람들과 같이 좋지 않은 지역 차별성 발언이었기 때문에 남을 욕할 때나 사용되었고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투르크를 자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 지역의 기독교도 신민들도 투르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경우에는 민족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그냥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 혈통이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이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면 그리스인들은 그 사람을 투르키(τούρκοι)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발칸 지역의 일부 국가들에는 무슬림을 모두 투르크, 혹은 터키 놈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남아 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왕가인 오스만 가문에서 따 온 것이며, 오스만 가문은 제국의 초대 군주인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 혹은 오스만 베이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영미권에서는 오토만(Ottoman)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오스만 제국, 오스만투르크,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으로 부르며, 과거에는 오스만 터키라고 하기도 했다. 터키어 발음으로는 투르크가 아니라 튀르크이기 때문에 오스만튀르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나 오스만 제국, 나는 그 표현들 모두가 맞다고 본다. 이처럼 투르크가 민족 정체성을 뜻하게 된 것은 오스만투르크 제국 말기의 민족주의 물결에 따른 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정부가 수많은 종족들을 지배했는데, 이 때의 제국은 신민들을 종교에 따라 나누어 다스렸을 뿐 민족 정체성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제국 말기가 되자 유럽에서 강하게 나타나던 민족주의 열풍의 영향을 받은 신민들이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단일 민족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이와 같은 독립운동들이 성공하면서 제국의 다민족국가적 특성은 점점 약해졌고, 거기에 더해 제국의 국력 자체가 쇠퇴하여 많은 영토를 유럽 열강에 잠식당하면서 제국 내에서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 오스만어를 사용하는 아나톨리아 출신 사람들의 인구 비중이 전례 없이 커지게 되었다. 이 지역 패권 국가로서의 원조 격인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작아면서 매우 높은 밀도의 제국 내 정교도 그리스어 사용자의 상대적 비중이 더욱 올라갔기 때문에 제국 말기에는 사실상 그리스의 민족 국가나 마찬가지가 된 것과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투르크 민족주의를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재발견된 어원이 바로 투르크이다. 이후 투르크 민족주의가 제국 내에서 큰 지지를 받게 되고, 그 거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멸망시키고 투르크 민족국가를 표방한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투르크 민족이라는 개념이 이 때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
- 칼럼
- Nova Topos
-
투르크의 어원과 민족주의의 형성
-
-
13세기 후반의 동남아시아를 둔 남송, 원나라, 베트남 쩐 왕조, 태국 수코타이, 미얀마 파간 왕조를 둘러싼 치열한 국제관계
- 1270년대 들어 관료주의, 치욕에 대한 망각, 그리고 강남 이민족과 한족 사이의 알력 등등으로 남송의 발전은 둔화된 반면, 본래부터 체제를 개혁하며 권력을 쟁취한 쩐 왕조의 황실과 무신 세력들은 적극적인 군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처음부터 베트남 인들은 한족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던 데다, 이 왕조 시절부터 남방 태국 수코타이 및 크메르 제국, 참파 등과의 전쟁에서 기존에 자신들이 갖고 있던 전술과 무기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실감하고, 중국 남송과 금나라에 대한 시찰을 통해 중원의 체제가 부국강병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 왕조에서 쩐 왕조로의 교체는 베트남 방식의 군국주의로도 빠르게 연결되었다. 과거부터 문제가 되었던 호족을 폐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함으로써 구체제를 혁신했다. 특히 쩐 태종은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큰 반발과 적대감에 대처하기 위해서나, 승화시키기 위해서나, 정부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해외 침략을 벌이는 일이 최선이라 여겨진 것이다. 이는 1272년의 징병제 실시, 1274년의 라오스로 출병하여 메콩 강까지 영역을 확보하고 1285년의 몽골의 2차 침공을 격퇴하는 사건 등으로 현실화되었다. 1274년 라오스 정벌은 남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벌인 하나의 군사적 실험이었는데, 1271년에 라오스 지역, 즉 수코타이의 지배를 받은 란쌍 지역의 사냥꾼들이 북베트남 지역에 표착했다가 현지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대해 란쌍의 세력들은 오랜 기간 동안 퐁나케방 산악 지대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왔기에 란쌍 세력들은 쩐 왕조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배상을 요구했다. 이를 쩐 왕조가 거부하자 결국 1274년에 3,600명의 란쌍 군이 퐁냐케방을 침공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이에 폰사반(Phonsavan)을 침공해 란쌍 군을 제압했다. 이에 마지못해 회담에 나선 란쌍과 수코타이 지방 관리들은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분쟁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러나 쩐 왕조는 2년 뒤, 군대를 다시 라오스에 파견하여 란쌍의 수비대를 공격하고는 그것을 빌미로 좀 더 강한 군대를 이끌고 팍산(Paksan)까지 내려가 메콩 강의 수로를 장악하고 수코타이의 관리를 만나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도록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코타이와 쩐 왕조의 시각 차이가 드러났다. 라오스의 입장에서는 퐁냐케방에서의 문제로 배상금을 지불했고 란쌍과 쩐 왕조가 배상과 영토를 확정한 조약을 맺은 것이라 생각해 그리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태국 본토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메콩 강 중류 지역은 스스로 지방 관리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비교적 소액으로 쩐 왕조와의 괜한 불화를 무마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여겼고, 란쌍 역시 명목적인 종주권만 유지해 왔기 때문에 쩐 왕조와 종래의 ‘교린’을 재개하는 일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중화 적이며 비교적 선진적인 법체계를 기준으로 삼고 있던 쩐 왕조는 여기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퐁나케방 침공과 더불어 수코타이나 란쌍이 배상을 한 것이나, 메콩 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란쌍 지역의 남부는 쩐 왕조 정부가 관리하겠다고 명시한 것은 이들이 모두 수코타이의 종주권에서 탈피했음을 인식했다. 특히 메콩 강 중류 지역의 경우에는 베트남의 영토권이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1279년, 쩐 왕조는 팍산 지역을 박산(博算) 현으로 선언했다. 이와 같은 시각 차이는 점차 표면화되며 양국의 불화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1280년대로 넘어가면서 남송이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게 멸망하면서 광서, 광동 지역이 공백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광서, 광동 지역에는 남송의 잔존 세력들이 들어와 항몽 전선을 수립했다. 이와 같은 세력 재편의 초기 과정에서 동방의 3국은 제각기 극심한 내부적 갈등을 해결해야 했다. 베트남의 경우는 몽골과의 화의파와 항쟁파, 원나라는 한족과 몽골족의 대립이 있었다면 태국의 경우에는 모든 정치 변동의 중심에 수코타이와 아유타야 종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있었다. 특히 원나라의 경우, 최대의 정적이면서도 혈연 지간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정쟁은 완벽한 종결을 맞이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정치 과정에서 우열을 가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노골적인 전면전으로 승패를 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은 기존의 칭기즈칸 혈족들과 색목인들을 대거 등용하며 아리크부카 세력을 견제했고, 아리크부카로써는 때로 몽골 쿠릴타이 귀족들, 때로는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이나 킵차크 칸국에 붙으며 집요하게 쿠빌라이의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 베트남 쩐 왕조의 개혁이 집권 세력인 이 왕조 호족들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듯이, 원나라의 정쟁도 쿠빌라이를 처단하라는 상다수의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의 원나라 조정을 배신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쿠빌라이가 몽골 황족들을 달래기 위해 1280년 관직 우선권을 설치하고 1281년에는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매우 유화적인 개혁 조치를 이어가자, 쌓이던 불만은 1282년의 아리크부카의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잠재워졌다. 별기군에 비교된 아리크부카의 군대는 상당히 뒤떨어진 기병 전술로 쿠빌라이를 상대했고 쿠빌라이는 한족의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화약과 화포를 전선에 배치하여 아리크부카의 기병대를 격파한 것이다. 이들은 아리크부카의 편에 섰던 몽골 귀족,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귀족들과 그에 동조했던 티베트 인들의 처벌했으며, 아리크부카의 본진인 몽골 카라코룸을 장악한 쿠빌라이는 다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그동안의 아리크부카를 칸으로 임명했던 조치들을 모조리 취소하고 몽골 울루스의 대칸 지위까지 석권했다. 한편 쩐 왕조는 광서 지역을 직접 습격했다. 이 때 상당수의 이재민들이 귀주 지역으로 피신했고 광서 지역의 남송 잔당들은 거의 전몰하다시피 했다. 이에 완충지대가 사라진 원나라가 가만히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먼저 원나라 군을 공격한 측은 쩐 왕조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주변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에 둔감했던 원나라는 쩐 왕조가 태국 수코타이를 노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쩐 왕조가 귀주와 광동, 일부 티베트 인들은 서쪽에서 파촉(巴蜀)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지켜본 쿠빌라이는 쩐 왕조로의 해안가 측으로의 침공을 지시했다. 특히 태국에 대해서는 1279년, 당시 수코타이 최고 실력자이 국왕인 람 캄행(Ram Khamhaeng)에게 북방 남 하(Nam Ha) 지역을 쩐 왕조에게 넘어가면 안보가 완전히 흔들린다며 베트남에 대해 명목적 종주권에 만족하던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쩐 왕조의 내정에 간섭하고 쩐 왕조를 확실히 종속시켜야 한다며 복속이 아니라 일종의 식민지로 대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람 캄행 국왕이 이를 거절하자 원나라는 빠르게 병력을 파견하여 십송판나(西双版纳)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약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곤명으로 잡아갔다. 이어 운남(雲南) 남부 지역과 현 미얀마의 켕퉁(Kengtung)까지 접수하고 수코타이를 복속시킨 다음 원나라의 상인들과 병력이 태국 북부 지역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때 먼저 고립 위기에 처한 쩐 왕조는 격앙되었다. 쩐 왕조의 성종(聖宗) 황제와 재상인 쩐 흥다오는 원나라와의 직접적인 전쟁을 벌여 동남아시아 북부 지역을 몽골에게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경한 주장을 쏟아냈다. 그리고 육군을 이끌고 있던 쩐 왕조의 군국주의화의 주축으로 알려진 쩐 냣히유(陳日皎)는 원나라를 가상의 적국으로 삼는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을 추진했다. 1283년 이후 국방비가 쩐 왕조에서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종전의 두 배에 가까운 25% 이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원나라는 대국이었고, 정면 대결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력을 쓰지 않고도 라오스 북부 남 하 일대에서 쩐 왕조의 전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었는데, 하나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 지역을 중립화하는 방안, 다른 하나는 수코타이 북쪽 영주들과 운남의 영주들이 자체적으로 독립 및 친베트남 노선을 걷도록 돕는 방안이었다. 이 중 두 번째가 현실로 옮겨진 것이 1284년에 발생한 남 하 지역의 민란이었다. 남 하와 십송판나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다리족과 묘족, 카렌 족 등은 수코타이와 원나라 정부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이는 다소 지나치게 모험적이었으나, 쩐 왕조는 레 푸쩐(黎輔陳) 등의 외교력이 뛰어난 사신들을 앞세워 몰래 민란을 도왔다. 마침 원나라는 메콩 강 상류의 지배권을 두고 미얀마 파간 왕조와의 전쟁에 들어가 있었기에, 남 하와 십송판나 일대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리라는 기대가 그와 같은 모험을 부추겼다. 하지만 원나라 차크차크두(徹徹都)의 빠른 개입으로 인해 이 같은 민란은 3일 만에 끝났으며, 다리족 등은 베트남에 망명했다. 베트남은 남 하 일대에서 원나라가 한 수 앞서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인 1285년 남 하 일대와 라오스 북부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켰다.
-
- 칼럼
- Nova Topos
-
13세기 후반의 동남아시아를 둔 남송, 원나라, 베트남 쩐 왕조, 태국 수코타이, 미얀마 파간 왕조를 둘러싼 치열한 국제관계
-
-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해야하는 이유
- 나는 반중론자이며 혐중론자다. 중국을 극도로 싫어한다. 비교적 최근까지 나는 러시아, 미국과 함께 중국을 압박하고 각종 규제로 말려 죽이고 싶어했고 그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중국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남아시아에 있으면서, 베트남과 라오스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접하고, 경험해보니 중국의 자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그들의 현실을 보았으며 베트남은 중국과 친중국 국가에 둘러 싸여 있는데도 중국과 대립하면서도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군사적으로는 미국과 협력하면서 한국, 일본, 러시아 등 외교 다변화를 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베트남은 지금 엄청난 위기에 있다. 친중국 성향의 라오스, 크메르 루주를 축출해줬지만 이를 주권 침탈로 생각하는 베트남에 다소 적대적인 캄보디아, 이 캄보디아 또한 친중 국가다. 이들 중국과 중화권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베트남은 마냥 미국에게 의지하지 않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국에 어느 정도 도움을 받고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으로 적절히 견제하면서 그렇다고 마냥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한국, 러시아, 일본, 호주를 친구로 만들고, 멀리 EU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 현상들로 볼 때 우리는 베트남보다 오히려 상황이 훨씬 나은 편이다. 북한과 중국이 위협적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러시아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고 일본과 가까이 있으며 일본을 통해 미국과 혈맹국이다. 사방이 막혀 있는 베트남보다 그래도 일본 쪽에 숨통이 트여 있는 우리가 훨씬 사정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를 경험해보니 이제는 중국을 멀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든 싫든 우리 이웃 국가고, 미국보다 더 빠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의 말 한 마디면 최소 하루는 효력이 유예될 수 있지만 중국의 말 한 마디면 효력 유지는 불과 2시간 안팎인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중국은 멀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균형외교인 것이고 베트남처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등, 적당히 거리 유지해야 하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래서 해외를 나가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 그냥 인터넷으로 방구석에서 검색만 해갖고 깨달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과거 중국의 경우, 사드 하나 가지고 경제 봉쇄론 및 헌한령으로 인해 문화 교류 제한까지 했다. 우리는 중국의 여러 봉쇄조치 및 제재 등에 대해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만약 한반도에 전쟁 난다고 치면 미 함대가 일본이나 오키나와에 올라오는 것보다 중국 함대가 산동 웨이하이에서 올라오는게 거리상으로 더 빠르다. 그러니 중국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미, 중 사이에 균형 외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위기에 있는 국가일수록 더욱 균형을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최근에 반도체 핵심 원자재의 중국 수입 의존도가 전년보다 높아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미세한 회로가 새겨진 실리콘 웨이퍼를 만드는 실리콘의 중국 수입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뿐만 아니다. 각종 전자 기기에 들어가 있는 원자재 부품은 죄다 중국제다. 스마트폰, 노트북, 각종 컴퓨터, TV, 에어컨, 냉장고, 심지어 자동차 부품까지 중국제 아닌게 없다. 원자재의 가격이 저렴하고 거리도 가까워 물류 운송비 또한 타국에 비해 저렴하다. 게다가 중동에서 끌고 오는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도 중국의 영해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있다. 우리 수출품 또한 거대한 함선의 컨테이너를 실어 인천항에서 출발, 중국 영해를 통과한다. 만약 중국이 우리의 원자재 수입을 막고 서해 영해 통과를 불허하면 우리는 삽시간에 석기 시대로 내려 앉을 수 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대책이 있나? 예를 들어 조선 시대 때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균형을 잡지 못해 명나라 편을 들었다가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명, 청 간의 균형외교를 하지 않고 명나라에 편향한 결과가 그것이다. 청나라도 최소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배후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필요이상으로 명나라에 편향하니 청나라 입장에서는 후방 안정을 위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은 화를 당했고, 청나라의 종속국이 되었다. 이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편향외교로 인한 대참사다. 그런데 균형 잡힌 중립외교를 펼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패권국은 없다. 과거 로마도 그러했고, 가까이는 중국 청나라도 대외 정책에 있어 균형외교룰 하는 책봉국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필리핀의 두테르테가 양다리 놓으며 중립외교 한다고 미국이 필리핀에 공격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었다. 필자가 학부 시절 교양과목으로 외교학에 대해 들은바 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oo한 것에 한 해 최소한" 이라는 외교 용어다. 더불어 우리는 미, 중, 러 격돌에 아주 민감한 지역에 존재한 최전선 국가다. 그래서 한국은 가장 현명하게 균형 외교를 해야 하는 나라다. 이렇게 10살짜리 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으면 구제불능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니 배고픈 시절을 까먹게 되고 그러니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하려니 생각도 안 날 것이다. 그저 옛 추억으로만 남을 뿐, 실제로는 그 고생에 대해 완전히 둔감해지는 것이다.
-
- 칼럼
- Nova Topos
-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해야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