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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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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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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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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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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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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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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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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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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 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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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 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성, 가장 가까운 친미국가
    코소보와 대한민국의 유사점을 본다면 정말 미국을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항상 코소보를 가서 보면 자국 국가 옆에 미국 성조기를 꼭 내건다. 코소보 현지인들에게 미국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친미주의 한국인들 대답과 똑같다.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 때문에 독립해서 이렇게 살게 되어서 항상 고마운 나라라고 한다. 코소보의 젊은이들은 제2 외국어가 아니라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하는데 억양을 들어보면 어김없이 미국식 억양이다. 그래서 코소보의 젊은이들과 대화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내 또래에서부터 그 윗 나이대 분들은 영어를 잘 못하기에 의사 소통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미국은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가장 먼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다. 부시는 또 2007년 6월에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코소보를 방문하여 정치, 외교적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부시는 당시 유럽 각국에서 가는 곳마다 극심한 반미 시위를 겪어야 했지만, 코소보에서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수도 프리슈티나에서 3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수바 레카(Suva Reka)까지 찾아와 길거리에서 촌부들을 껴안고 악수하는 자상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오바마 취임식에 앞서 부시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 방송되자 수바 레카(Suva Reka) 마을의 모든 주민이 TV를 보며 부시를 회고하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2009년에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코소보를 방문하였으며 바이든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코소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2016년에는 다시 코소보를 방문하기도 하여 코소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프리슈티나에는 '빌 클린턴 거리'가 있다. 공항에서 프리슈티나로 들어서는 입구 왕복 8차선 도로의 이름이 그것이다. 지난 200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 미국이 나토 군대를 이끌고 와 세르비아계 군대를 몰아내준 것에 대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빌 클린턴 거리 입구의 한 대형 건물 벽에는 클린턴이 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붙어있다. 프리슈티나의 시민 중 한 명은 "클린턴은 코소보에서는 영웅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거리 맨 끝부분에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가게가 있다. 힐러리 여사가 남편이 프리슈티나에서 바람을 필까 감시하기 위해 만든 가게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점이다. 코소보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르는 나라다. 작년 미국 독립기념일 때는 프리슈티나 시내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렸다. 코소보 현지의 인기 가수 등이 출연해 "나의 사랑, 미국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노래를 불렀다. 프리슈티나 주둔 미군 부대 밴드가 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인기 팝송을 불러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리슈티나 중심가에는 3.5m, 무게 900kg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동상 모습은 클린턴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클린턴은 코소보의 독립을 갈망하는 알바니아계와 전쟁을 벌인 세르비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난 1999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폭격작전을 주도해, 알바니아계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판과 잡음도 많았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프리슈티나에는 로버트 조셉 돌(Robert Joseph Dole, 1923~2021), 일명 밥 돌(Bob Dole)의 동상도 존재한다. 클린턴과 1996년인가? 미 대선에서 겨루었던 인물이다. 그의 동상이 왜 코소보에 있을까? 그가 2009년 9월, 교착상태에 빠진 코소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프리슈티나에 왔다. 그가 온 이유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클린턴이 밥 돌에게 미국 외교의 최대 난제(難題) 중 하나인 코소보 사태 해결을 맡기자 워싱턴 정가는 “국익을 위해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한 결정을 내렸다”며 환영했다 한다. 미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적 라이벌에게 외교특사를 맡기는 경우가 흔하다. 밥 돌은 코소보 내전 당시 두 차례 프리슈티나를 방문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시민들이 제막했던 것이다. 한편 빌 클린턴이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은 자신이 르윈스키 성추행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의회가 탄핵을 준비 중이던 때 벌어졌기에 이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시민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건 것이다. 클린턴이나 밥 돌은 그저 네오콘의 소시오패스들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네오콘의 99%를 소시오패스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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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3편
    동, 서파키스탄의 상황이 매우 극단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1971년 3월 7일 동파키스탄의 무지부르 라흐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인 다카에서 200만 명이 넘는 군중들 앞에 나와 연설을 하면서 벵골인들에게 대대적인 서파키스탄 정부에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게 된다. 무지부르 라흐만, 그는 다카 외곽의 파리드푸르(ফরিদপুর জেলা) 지역의 가난한 뱅골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31년 공립학교에 3등급으로 입학했으나 1934년 눈 수술로 인해 그만두었고 이후 수술로 인한 느린 시력 회복으로 일찍 결혼했다.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쓴 돋보기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후, 그는 1940년 전인도 무슬림 학생 연맹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진출했고 캘커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1943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에 참가하면서 중단된다. 1946년 이슬라미아 대학생 연합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학위를 취득하면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영국의 지배 하에 벵골인들의 처지는 녹록치 않았다. 인도인과 서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으나 벵골인들은 영국으로부터도 뿌리 깊은 차별을 받도 있었다. 그러한 벵골인들의 상황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켈커타 대학을 떠나 동부 벵골로 돌아온 뒤 다카 대학에서 다시 법률을 공부해 동파키스탄 무슬림 학생 연맹을 설립하고 지방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다카 외곽의 가난한 집안의 벵골인이 이제는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벵골인들의 빈곤과 실업, 가난한 생활 등을 대변하여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받아들였다. 무지부르 라흐만은 벵골민족주의를 사회주의와 융합하여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구축한 셈인데 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는 벵골인들에게 정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벵골인들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연설에 호응해 벵골안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지면서 동파키스탄 전체가 마비되었고 이 시점부터 동파키스탄은 사실상 서파키스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벵골인의 불복종 운동과 파키스탄 군의 유혈 진압으로 인하여 사태는 점차 내전으로 흘러갈 조짐이 보이게 된다. 이에 대응해 줄피카르 알리 부토와 야히야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 정부는 라흐만과 계속해서 협상을 이어감과 동시에 유사 시 대비해 군대를 동파키스탄으로 계속해서 증원하였다. 마침내 3월 24일에는 라흐만, 부토, 칸 사이에 3자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 역시 결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라흐만이 비타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야히야 칸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단 주장도 있다. 야히야 칸은 라흐만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선빵을 때렸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라흐만은 그냥 하루빨리 독립을 선언하자는 측근들의 주장을 제어하면서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1971년 3월 25일에는 야히야 칸이 다카를 비밀리에 떠나게되었으며 다카를 떠나면서 동파키스탄 총독 야쿠브 칸 장군을 티카 칸 중장으로 교체하는 한편 사태를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야히야 칸 자신은 벵골의 영토를 원하지 벵골인을 원하지 않는다며 다소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티카 칸 중장은 다시 파르만 소장에게 군사 진압을 지시했다. 파르만 소장은 방글라데시를 완전히 토벌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3월 25일 밤, '서치라이트 작전'이 개시되어 파키스탄 군이 방송국, 군부대, 다카 대학교, 라자바흐에 있는 방글라데시 경찰청 등 주요 시설을 총공격했고 수많은 벵골인들이 파키스탄 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파키스탄 군의 벵골인 학살은 마지막 대화의 여지마저 끊어버린 셈이 되었고 결국 서치라이트 작전 개시 다음날인 3월 26일, 오전 0시 30분, 라흐만은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 정식적으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함으로 인해 동, 서파키스탄의 대립은 결국 내전이 되고 말았다.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한 이후 불과 1시간 후인 오전 1시 30분, 파키스탄 군은 마침내 라흐만을 체포하여 3일 후,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했다. 야히야 칸 대통령은 동파키스탄 정당인 아와미 연맹의 해산을 선포하면서 라흐만을 파키스탄의 반역자로 규정했다. 이 서치라이트 작전은 원래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블리츠 작전'을 확대한 것이었는데, 블리츠 작전은 무력 사용을 최소화하는 온건한 면이 있었던 반면, 서치라이트 작전은 무조건 보이는데로 죽이고 강간하며 파괴하는 엄청난 살육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공격은 대단히 갑작스러운 것으로 당시 동서 파키스탄을 주목하고 있던 미국도 당황하였으며, 특히 야히야 칸이 직접 날아와 라흐만과 협상한다는 말에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방글라데시 시민들에게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라흐만 당수의 동파키스탄의 독립 선언과 방글라데시의 건국, 그리고 이어진 그의 체포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서파키스탄의 지배와 차별에 스트레스를 받던 동파키스탄인들의 감정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가져왔고, 4월 10일, 방글라데시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라흐만을 궐석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되는데 우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사이예드 나즈룰 이슬람(Saiyed Najrul Islam)을 세웠다. 이어 이슬람의 뒤를 타주딘 아흐메드(Tajudin Ahmad)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며 M.A.G. 오스만니(M.A.G Osmani) 대령은 방글라데시 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어 방글라데시의 군을 총지휘했다. 이에 동파키스탄의 파키스탄 군 부대인 EBR(East Bengal Rifles)와 동파키스탄의 경찰들은 서파키스탄 통제에서 집단으로 이탈하여 묵티 파우즈(Mukti Fauz)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라는 독립군으로 개편되었다. 묵티바히니를 중심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서파키스탄 관리들과 군인, 경찰 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자 중앙 파키스탄 정부는 이에 놀라 즉시 군대를 동파키스탄에 파견해 진압에 나섰으나, 이미 사태는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 군 간의 전쟁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파키스탄 측은 라흐만 체포에는 성공했지만 동파키스탄 독립 세력 지도부 체포는 대부분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벵골 독립세력 지도부 분쇄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크게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서파키스탄 군에 크게 열세였던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이들은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인들에게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며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당시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 운동 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된 다카 대학에서는 파키스탄 군이 여학생 기숙사에 방화를 저지른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 탄압에 대해서는 큰 비판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독립에는 전세계 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이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이 많은 고심 끝에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 및 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벵골의 현지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학살에 경악했으며 이들은 본국인 미국 행정부와 상원에게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보고 미군의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러한 국제적 지지를 스스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집단 망명을 선포하면서 인도가 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국력도 쇠퇴할 것을 우려하여 크게 기대했지만, 인도 접경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주목은 인도-파키스탄의 전쟁으로 인해 상호 간의 적이 되었디. 게다가 엄청난 인적 자원이 존재하는 인도 입장에서 또한, 수백만 명의 난민은 큰 부담이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종전시키는 비용이 더 저렴하게 먹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이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기 때문에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되었다가는 학살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추방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물론 무슬림들의 많은 수가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했고,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 땅으로 피난을 갔다. 한편 이와 같은 동파키스탄의 게릴라 부대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수피즘에 분노한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앙숙이었던 파키스탄을 멸망시키기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묵티바히니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에 그쳤었지만 국경지대가 폭격 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된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전혀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0
  • 현재도 추앙받는 쿠르드족의 영웅, 살라딘
    살라딘의 이름을 전부 서술하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로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Al Malik An Nasir), 승리의 아버지(Abu Al Muzafar), 신앙을 품은 정의(Slakh Ad Din),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Marwan)의 아들인 샤디(Shadi)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يوسف)가 본명으로 나타난다. 당시 <꾸란>의 등장인물인 유수프(Yusuf, 요셉)와 아이유브(Ayyub, 욥)가 이름에 들어있다. 살라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는데 앗(Ad)은 원래 정관사 알(Al)이고, 알을 구성하는 알레프(ا)와 람(ل) 중에서 람(Ram)은 뒤에 태양 문자라 불리는 특정 문자가 올 경우에 그 문자와 동일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딘의 ㄷ과 동일한 발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알레프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들어갈 경우, 보통 묵음이 된다. 따라서 알이 ㅅ 받침과 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살라흣 딘이라 읽히게 된다. 이를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영화인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Gasan Masud)는 살라흣 딘에 가깝게 발음하고 있다. 살라딘은 1138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Tikrit)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 출신인 나짐 앗 딘 아이유브(Nazim Ad Din Ayyub)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짐 앗 딘 아이유브는 그 당시, 셀주크투르크의 대신인 비흐루즈(Byhruz)와 인연이 이어져 그의 천거를 받아 티그리트 성의 영주로 재임 중이었다. 아이유브는 1132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 Din Zangi)에게 나룻배를 제공하여 그가 무사히 티그리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로써 아이유브와 그 가문은 장기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아이유브의 후원자였던 비흐루즈는 평소에 장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탈출을 도와준 아이유브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러한 와중에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한 여인의 복수를 위해 건달을 살해하는 사고를 저질렀고, 비흐루즈는 이에 분노하여 아이유브의 일족을 티그리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침통한 심정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날 밤에 출생했다. 갈 곳을 잃은 아이유브와 시르쿠 형제는 모술로 이사하여 장기에게 의탁했다. 장기는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1139년에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를 공격하여 바알벡(Balbek)을 함락시킨 이후 아이유브를 그곳의 영주로 임명했다. 살라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살라딘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146년, 장기가 암살당한 이후 그 세력이 분열되자 부리(Buri) 왕조의 아타베그(Atabeg)인 무장 앗 딘 우누르(Ad Din Unur)가 과거에 자신의 영토였던 바알벡을 수복하려 했다. 당시에 아이유브는 장기의 아들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다마스쿠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살라딘은 아버지인 아이유브와 함께 포로가 되어 다마스쿠스로 끌려갔지만, 숙부인 시르쿠는 여전히 장기 왕조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문은 얼마 동안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유브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적지 않은 봉토를 얻을 수 있었고, 이후 다마스쿠스 내부에서도 신임을 얻어 몇 년 만에 고위직을 지내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옛 주인인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Nur Ad Din)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 때에 다마스쿠스는 강력한 지도자였던 우누르(Unur)가 사망한 이후, 왕권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아이유브는 그 틈을 이용하여 누르 앗 딘의 휘하에 있던 동생 시르쿠에게 연락하여 그에게 항복할 뜻을 밝혔다. 이로 인해 누르 앗 딘은 정복자로 명성을 누렸던 아버지 장기도 장악하지 못했던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보답으로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까지 살라딘은 아버지와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록에서는 당시 그의 행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살라딘이 자신의 청년기를 회고하면서 전쟁을 피해 은둔을 즐기고 현자들과의 토론에 심취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악한 수완가였던 아버지 아이유브와 과격한 용사였던 숙부 시르쿠와는 상당히 다른 점으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후일 중동 최대의 무슬림 군주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살라딘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계기는 세 차례에 걸친 이집트 원정 시기였다. 1163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Wajir, 재상)였던 샤와르(Shawar)가 경쟁자인 디르감(Dirgam)에게 축출당한 이후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자신의 와지르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면 막대한 세액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Amori I) 또한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고, 용맹하고 과감한 성품의 심복이었던 시르쿠 또한 일전을 주장하자 누르 앗 딘은 이집트 원정을 결심했다. 1164년 4월,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시르쿠는 자신의 조카인 살라딘을 부관으로 삼아 자신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부터 살라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이 팔레스타인 북부로 진군하여 아모리 1세의 관심을 돌리는 사이, 시르쿠와 살라딘은 같은 해 5월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하여 디르감을 제거하고 샤와르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샤와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 해 7월에 아모리 1세와 연합하여 빌베이스(Bilbeis)에서 시르쿠를 3개월 동안 포위했다. 그러자 누르 앗 딘이 스스로 십자군의 후방인 하림(Harim)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모리 1세가 같은 해, 10월에 시르쿠와 휴전을 맺고 철군하면서 시르쿠와 살라딘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1167년 초, 시르쿠와 살라딘은 샤와르와 아모리 1세의 밀착을 차단시키기 위해 두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그 해 3월 18일, 알 바베인(Al-baboim) 전투에서 시르쿠와 아모리 1세의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의 명령에 의해 직접 중앙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지에 빠진 척 달아나며 십자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행히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시르쿠는 우익의 정예 기병들을 거느리고 아모리 1세와 샤와르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르쿠의 피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직행으로 카이로에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시르쿠는 살라딘에게 군대의 절반을 나누어주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자신은 직접 남쪽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떠났다. 그 사이에 살라딘은 아모리와 샤와르의 연합군에게 75일 간이나 포위 공격을 당했으나 이를 수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살라딘이 단독 지휘관으로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그 와중에 시르쿠가 조카를 구원하기 위해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자 아모리 1세는 그해 8월 4일에 휴전을 맺었다. 그에 따라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땅을 포기했고, 살라딘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샤와르에게 돌려주었으며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협상 당시에 살라딘은 얼마 전만 해도 전투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던 아모리 1세의 진영에 인질로 들어가 며칠 간 환대를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1168년 12월, 시르쿠와 살라딘은 아모리 1세가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당했을 당시에 겪은 고초를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함께 이집트로 가자는 시르쿠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시르쿠는 누르 앗 딘에게 조카도 함께 종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누르 앗 딘의 명령으로 인해 살라딘은 숙부를 범칭국으로 삼았고 다시 이집트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카이로를 포위하고 샤와르로부터 금을 약탈하기 위해 기다리던 아모리 1세는 시르쿠에게 밀려나 팔레스타인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써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시르쿠는 파티마 칼르프의 허가를 받아 그 동안 자신을 수차례 농락했던 샤와르를 살해하고 그 자신이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시르쿠는 이집트의 정복자가 되어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지 싶었으나 그 해 3월에 폭식을 하던 중 식중독으로 급사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집트의 대신들에 의해 살라딘이 이집트의 새로운 와지르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대신들이 살라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권력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딘은 겉으로 누르 앗 딘에게 복종하면서도 군대를 보내 수단과 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후 살라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이용히여 오히려 살라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하여 비잔틴 제국과 연합해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계속 실패한 끝에 폭풍우로 인해 모두 침몰당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이를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도주했다.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그들이 마을들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들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돌아갈 때면 그들과 대적할 정도로 더욱 큰 힘을 얻은 상황에 놓일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3일 동안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살라딘은 1182년 11월 10일에 더욱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수도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살라딘은 킨다(Khinda) 문, 동생 타즈 알 물크 (Taz Al Mulk, 왕들의 왕관) 이마디야(Imadya) 문을 맡았다. 봉신인 히신 카이파(Hisin Kayfa)의 누르 앗 딘의 “다리들의 문”을 맡게 된다. 하지만 한 달 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Shinzar)를 포위하였다. 이후 살라딘은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고 이를 주장했지마,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atillon, 1125~1187)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취소되었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제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단결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인해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제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1223)가 리처드의 동생 존과 결합하여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공격해 리처드 1세 또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것이니 그 때 결판을 내자고 약속하였으며 살라딘도 이에 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살라딘은 약속 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이 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 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사용하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 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딘은 대신 타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Al Kamil)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카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전쟁을 벌이지 말고 잘 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이에 어떻게 결사반대한 참모들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처음부터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로 인해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에게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매우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 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장악하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적은 없었으며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함락당할 것이라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이 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카톨릭 측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측에서는 살라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큰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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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 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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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 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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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
    동, 서파키스탄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 3월 22일에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이 동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가 당시 총독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의 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셨을 뿐, 내정에 있어서 자치권 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진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 진나는 동파키스탄의 중심지 다카에서 모든 점에서 우월한 아리아 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만 사용하자고 연설해 벵골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인종적으로는 아리아인이 맞다. 이와 같은 진나의 발언은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고 검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 의식에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진나의 이와 같은 차별성 발언은 단순히 벵골인들에게만 굴복하라고 주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서조차 우르두어 화자는 독립 시점일 때 7%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토박이가 아니라 인도 땅에서 넘어온 실향민들로 알려진 무하지르들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에서 2위의 언어로는 28.4%가 사용하던 펀자브어였으며 7.1%는 파슈토어, 5.8%는 신드어를 사용했다. 이는 문화적인 이질감으로 인한 분열을 우려한 진나로서는 무굴 제국 시절부터 공용어로 사용되던 우르두어로 대동 단결하여 이질감을 줄여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어 진나 본인 또한 우르두어를 외국어로 배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라치 태생인 진나는 이주민인 부모님으로부터 구자라트어를 모어로 익혔다. 그런데 진나는 동파키스탄 연설의 전체 문맥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니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자며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기존 언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를 새로운 서파키스탄의 공용어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졌던 것은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측과 실패한 측으로 분류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립하던 시점에 이르러 파키스탄 국민의 55%가 모국어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도 제국 시절부터 벵골어를 사용해왔던 벵골인들에게 완전 외국어나 다름없던 우르두어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948년 2월 25일, 벵골인들의 지도자인 디렌드라 나트 두타(Dhirendra Nath Dutta)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줄 것을 서파키스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파키스탄 총리 리아카트 알리(Liaquat Ali, 1895~1951)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무슬림의 언어는 오로지 우르두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어 1948년 3월 22일, 동파키스탄에서 진나의 연설이 양 파키스탄의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연설이 진나가 영국령 파키스탄의 총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파키스탄을 방문하여 했던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연설을 한 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48년 9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벵골인들의 분노만 키운 상태에서 동, 서파키스탄을 통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에 진나 총독의 우르두어 단일화 연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이 주도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우르두어를 강요하게되고 동시에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던 벵골어를 우르두어와 유사하게 아랍 문자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강력한 벵골어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시민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ভাষা আন্দোলন)을 벌이게 되었고, 1952년 2월 21일 다카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파키스탄 정부의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 군 사이에 대량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독립한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2월 21일을 국경일인 언어 운동 기념일(ভাষা আন্দোলন দিবস)로 기리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벵골인들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을 기념해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다. 1951년 10월 16일, 진나의 후계자 리아카드 알리 칸 총리가 암살된 이후 벵골인 총리인 카와자 나지무딘(Khwaja Nazimuddin)이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1953년 4월, 서파키스탄인 총독인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에게 일방적으로 해임당하면서 하야했고 벵골인들은 또 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국어 운동은 1954년에 발생한 헌법 개정으로 인해 벵골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국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55년, 동부 벵골의 행정 명칭이 동파키스탄으로 변경되면서 벵골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1961년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벵골인들의 큰 자랑으로 여겨졌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탄생 100주년 행사를 두고 서파키스탄에서 타고르를 반파키스탄적인 인물이라 매도하면서 벵골은 또 다시 크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의 프로파간다를 차단한다는 구실로 타고르의 작품을 금지 처분하는 한편, 벵골어로 된 모든 도서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는 이후에 철회되었으나 196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타고르 작품을 다시 금지하였고, 이에 분격한 19명의 동파키스탄 지식인들이 집단 항의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벵골 문화 탄압이 발생한 것은, 벵골 문화에 대한 서파키스탄 측의 원칙 및 신념을 가진 증오나 적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좀 강제로 제압하겠냐는 편의적인 망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측이 벵골 문화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무감각하다고 평가했으며 오히려 관심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유브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의 군사 독재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 군부의 주축인 펀자브인들은 벵골인들을 열등한 존재이며, 벵골의 가치는 오로지 해외 투자 유치 및 무역에만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심각한 경제적인 착취를 당했는데, 1950~1955년 사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출한 개발비의 20%만 동파키스탄에 사용되었으며, 1965년에는 조금 늘었으나 그래도 35%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은 생산품의 40~50%를 동파키스탄에 강매하면서 사실상 식민지 시장처럼 사용되었고, 동파키스탄의 무역 흑자는 모두 중앙정부가 압수하여 서파키스탄의 무역 적자를 충당하는 것에 사용했다. 1950년대까지 동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은 서파키스탄의 2배에 달했으나, 1969년에 이르러서 서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이 동파키스탄보다 61% 높을 정도로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착취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 파슈툰인들의 벵골인 차별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বাংলাদেশ আওয়ামী লীগ)이라는 정당을 결성하면서 저항을 기획했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 정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방글라데시의 국부(國父)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1958년 들어 아이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서파키스탄의 헌정을 파괴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하자 동파키스탄에 대한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경제적 격차도 더욱 커지게 되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 아유브 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 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동파키스탄의 시민들은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각계에서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정작 서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동파키스탄의 구호에 매우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뱅골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어 사이클론이 상륙된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서야 경계를 내리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 정도만 동원했을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전혀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에 대한 이유로 적대국인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도 정부는 서파키스탄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게 된다. 이는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 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독립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한편 동파키스탄 시민들의 시위 때문에 퇴진한 아이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이듬해인 1970년에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역구 300석을 인구 비례에 따라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을 배정해 놓았는데 2곳을 제외한 동파키스탄의 160개 선거구에서 아와미 연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여성 국회의원을 위해 추가로 두었던 13석 또한 동파키스탄으로 배정한 7석을 전부 아와미 연맹이 차지했다. 그 결과로 인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7석,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으며 이대로라면 단독 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에 있었다. 이에 제2당으로 88석을 차지한 파키스탄 인민당 당수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1928~1979)는 아와미 연맹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치적 인 핵심 지역인 펀자브와 신드에서 승리했으며 다수당인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함으로 인해 아와미 연맹을 공격하기도 했다. 1971년 1월 5일에 부토는 자신이 아와미 연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막상 그는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대해 반대했다. 부토는 서파키스탄의 다수당인 파키스탄 인민당과 동파키스탄의 다수당인 아와미 연맹에게 정권을 분리할 것을 제안했으나, 무지부르 라흐만은 제1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부토와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총수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총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3월 25일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동파키스탄 전체에서 항의와 총파업이 이어지는 등 정국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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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7
  •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이스탄불 협상의 후기
    오늘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협상이 열렸다. 미국 대표단도 있었지만 회담에 참여하지 않은 채, 궁전 내에서 타결을 기다리고 있었고, 터키가 중재자가 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우선 이 협상의 장소가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는 것에서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 독립과 평화의 상징인 곳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가 폐지되고 터키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공화국을 건설하고는 이곳에 입주하면서 터키 영토 내의 모든 전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했다. 따라서 터키 독립전쟁과 그로 인한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화를 선언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을 중재국인 터키 측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을 선정했던 것은 양국의 전쟁 종식과 아타튀르크의 평화주의를 강조하여 양국의 평화를 찾아오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된 이후, 그러한 중재국인 터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측의 입장차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 먼저 가 있던 젤렌스키는 "우크라아나의 최우선 과제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며 진정성 있고 투명한 휴전(Головним пріоритетом України є повне, безумовне, справжнє та прозор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이는 휴전에 대한 명확한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의 휴전은 그에 상응하는 조건과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10여년 전, 민스크 협정 이전부터 여러차례 우크라이나와 집단서방에 속아온 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속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여 휴전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명확하지 않은 조건과, 휴전을 위해 무엇을 합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행동했다. 오직 그들 우크라이나에게는 그저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 하자는 내용만 반복될 뿐이었다. 휴전에 대한 구체적으로 명확한 플랜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러시아의 휴전에 대한 조건과 요구는 명확했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취지는 동의했지만 휴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러시아가 내세우는 조건은 ① 우크라이나 내 최악의 살상무기에 대한 비무장화, ②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 ③ 우크라이나 내 비나치화, ④ 돈바스 4개 주와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 인정 등이다. 이는 개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아주 획일적이고 명확한 요구 조건이다. 이 조건들만 받아들여지면 러시아는 "특수군사작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즉시 종료할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은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러시아가 바라는 것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영구적인 평화다. 고작 3일이나 30일 휴전 따위가 아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멸망시키겠다고 한적이 없고, 젤렌스키를 직접적으로 제거해서 반러 세력을 일소화하겠다고 직접 언급한 적도 없다. 만약에 젤렌스키를 직접 제거하려 했다면 키예프 대통령궁에 오레슈닉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까지 인내심을 갖고 젤렌스키의 개심을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심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러시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푸틴 대통령 또한 젤렌스키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인내심을 계속 시험하면서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정교회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부활절 휴전에 관한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승절 문제다. 러시아는 이 때도 잠시 휴전을 제안했었다. 부활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잠시나마 평화와 안식을 갖고자 하는 의미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 같은 의미를 저버리고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전승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 소련으로 한 국가였고 나치 독일과 전쟁 당시 서로의 등을 맡기던 든든한 전우였다.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함께 했던 우정을 생각하며 평화의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이 때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평화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여태까지 평화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임을 보여왔다. 그러던 우크라이나가 이제와서 휴전을 언급하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진정성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 대통령이 이스탄불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다. 필자가 볼 때,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상 및 휴전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우크라이나가 앞서 제안했던 그 30일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것인지도 어느 정도 답이 나오고 있다. 우선 전열을 재정비하고 EU나 영국,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받아 러시아와 싸울 준비를 보충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바흐무트나 마리우폴 아조프스틸과 같은 요새지들을 몇 군데 더 구축할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항전하여 전쟁을 장기화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애초부터 평화에 관심이 없고, 무엇보다 휴전할 마음이 없다. 이는 보여주기식 정치적 꼼수에 지나지 않으며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러시아에게 지우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협상은 예상했던데로 큰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양국이 1,000명씩 포로를 교환하자는 내용에 합의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EU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젤렌스키가 만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푸틴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는 그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규탄했다. 진정성 없는 회담에 푸틴 대통령이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규탄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EU가 러시아에게 유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상호 간에 수립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EU 또한 이스탄불 회담에 그 지도부들 중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평화에 대한 진정성 또한 떨어진다는 입증했다. 전쟁을 계속 이어질 것이고, 장기적으로 갈수록 유럽은 더욱 고통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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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7
  • 고대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와 조지아의 근원 민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조지아의 원(原) 민족인 카르트벨리아 인의 기원을 보자면 우선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를 파악해야 한다.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은 B.C 3600년에서 B.C 2600년경 유럽의 도나우 강과 우랄산맥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걸쳐서 존재한 인도유럽어족 최초의 청동기 문화를 총칭하는 문명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얌나야 문화의 특징은 주거의 흔적들로 볼 수 있는데 돈 강과 볼가 강 남쪽에서 유라시아 지역을 이동하던 유목민들의 야영지가 발견되었으며 돌로 축조한 성채가 매우 많이 발견되었다. 볼가 강 남쪽의 촘폿(Чомпот)에는 2m 높이의 돌로 쌓은 성벽이 삼각형 모양의 마을을 지키는 형태의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승마용의 목축을 많이 했던 흔적이 있다. 가축은 지방에 따라서 소를 주로 키우거나 양이나 염소를 키우기도 하였다. 말을 키우고 있지만 유목이 아닌 정착되어 있는 것이 얌나야 문화의 큰 특징으로서 말의 뼈는 주거지와 묘지에도 발견되었다. 이는 묘지에서 발견된 말뼈로 볼 때 장례식 당시 희생당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순장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북부 지역의 삼림지대와 계곡에서는 목축보다는 농업이 많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묘지에는 말에 끌게 하여 밭을 가는 쟁기도 발견되었다. 말이나 사람들의 가족들이 탈 수 있는 소 등이 끄는 우마차(牛馬車), 넓은 초원에 사육하기에 적합한 종류의 가축들, 낙타와 사이가 산양(Saiga antelope)을 시작으로 스텝 지역 심층부에 생식하였던 동물의 뼈들, 스텝 지역 심층부에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가족묘지 등등의 발견 등으로 인하여 얌나야 문화는 반(半) 유목식 목축이 행해진 최초 시기 문화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 문화 전에는 반(半) 유목 식 목축이 행해진 흔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얌나야 문화가 이러한 반(半) 유목 식 목축 경제의 최초의 시작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얌나야 문화의 묘소들은 쿠르간이 건축되어 있는 묘에 최초로 나타난 피장자가 있고 그곳에는 다른 피장자들도 이장되어 있지만 그 쿠르간을 더욱 크게 증축하여 새로운 피장자를 이장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얌나야 문화의 기원은 볼가 강 중상류의 크바린스크 문화(Хвалынская культура)와 드네프르 강 중상류 지역의 스레드니 스토그 문화(Среднестоговская культура)에 있다고 보고 있다. 승마용의 말과 가족 이동용 소의 우차(牛車)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이동은 매우 용이하게 가능했다고 추측되며 광대한 지역에 얌나야 문화가 팽창한 것은 이러한 이동이 가능했던 이유로 생각된다. 얌나야 문화 양식의 묘제에 의하면 동쪽에서는 우랄산맥 동쪽 기슭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알타이 산맥과 예니세이 강 지역에 존재했던 아화나시에보 문화(Afanasevo culture)와 분명 관계가 있고 얌나야 문화와 그 주변의 유럽 스텝 지대들에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고 있다.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는 얌나야 문화보다 안드로노보 문화가 오래되었고 아화나시에보 문화는 안드로노보 문화 다음으로 나타난 청동기 문화로 얌나야 문화는 아화나시에보 문화의 성립 시기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J. P 말로리(J. P. Mallory)와 르네 헤레라(Herrera, Rene J)도 마리야 김부타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로 현재까지 얌나야 문화의 성립을 두고 학계에서는 아직 대치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얌나야 문화의 서쪽에서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헝가리에 걸친 도나우 강 하구 지대 일대에도 넓게 펼쳐져 있다. 이렇게 광대한 범위에 걸쳐서 펼쳐져 있는 것과 그 주변 지역이 항상 크게 변동되어 있는 것, 말과 우차(牛車) 같은 생활문화양식으로부터 얌나야 문화는 인도-유럽어족 초기의 매우 중요한 문화 중에 하나라는 추정이 학계에 인정되어 있다.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 정치적인 세력을 확보한 인도-이란어족과 관련 집단들이 점점 유럽 쪽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관련 문화를 생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인 동유럽 스텝 지대에서 넓게 발전한 스텝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볼 때 쿠르간 가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것들이 해소되면서 구상 암포라 문화(Funnelbeaker culture)와 함께 얌나야 문화가 인도-유럽어족 시대에 유럽에 존재했던 매우 중요한 문화라는 것으로 크게 인식되었다. 이들 얌나야 인종으로 본다면 아프리카 일부 지역, 인도네시아와 베이징 등을 비롯한 극소수 지역에서만 인류 최초로 직립 보행을 한 원시 인류가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지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확인된 ‘호모 에렉투스 게오르기쿠스(Homo erectus georgicus)’의 존재는 카프카스 인종의 기원을 인류의 시작까지 끌어올리게 되면서 이 인종이 얌나야 문화를 영위했던 인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에 의거하면 180만~160만 년 전, 카프카스 일대에는 당시 지구에서 보기 어려웠던 존재이며 인류학적으로도 고귀한 존재인 ‘직립보행(Upright walking)’을 하던 인류가 살고 있었다. 이는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인 15,000~12,000년부터 카프카스 지역의 인류는 각자의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 석기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어떠한 문명적 계기를 만나 금속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카프카스 원인(原人)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명을 건설했는데 이 문명이 얌나야 문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얌나야 종족이나 민족들, 대표적으로 돈 강 남쪽 카프카스 지역의 원시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 초기로 정립되던 시기에 철기를 전쟁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C. J 톰센(C. J Thomsen)이 지적하듯이 당시 시대적 분류 기준의 불평등 구조를 만든 주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석기에서 청동기와 철기로 넘어가는 계기를 접했느냐의 여부가 국가 문명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침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그러한 면에서 얌나야 문명에 속해 있던 카프카스 인들의 주요 거주지로서 조지아는 당대 유라시아 지역의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기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B.C 7세기경 조지아는 이미 철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게 되면서 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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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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