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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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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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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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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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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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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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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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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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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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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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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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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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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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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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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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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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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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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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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 중세의 아랍인들은 물을 끌어오는 관개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미 바그다드 칼리프 시절 때 그러한 기술을 익혀 해왔으며 그 전통은 이전 수메르 시절, 바빌로니아가 만들었던 지구라트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막 지대에서 물을 끌어오고 땅속에 지하수에서 물을 뿜어내게 만드는 기술은 동시에 아랍의 토목 공업도 함께 발전하는 케이스가 된다. 이를 두고 팔라즈(Falaj)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인공 관개 수로를 카나트(Qanat)라고 한다. 사막의 경우 인공적으로 녹화를 한 지역이라도 담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고지대(상류)에서 저지대(하류)로 담수가 흐르는 도중에 건조한 환경 때문에 말라버리는 것이다. 설사 발견해도 모래에 포함된 염분이 녹아 있어 식수로 적합한 경우가 적다. 그래서 고지대의 수원의 지하부터 수십 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그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통로 겸 우물을 만들고 터널을 관리하며 그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 관리가 생명인 중동에 막대한 냉각수가 필요하고 척박하고 혹독한 기후로 인해 관리만 해도 막대한 돈과 세심함 및 꼼꼼함이 필요한 핵을 중동이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핵 발전소를 지을 조건이 좋지 않다. 그 조건에 대해서 어제 내가 포스팅 해서 알 것이고, 담수가 아닌 해수를 사용해야 할 경우, 바닷가에 밀집해야 한다. 중동 국가 중 시리아, 레바논은 바다가 지중해 한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민간인들이 사는 곳이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시리아는 라타키아, 타르투스, 자블라가 도시로 있고 이곳은 대표적인 지중해 휴양지다. 사막화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농지들이 해안가를 따라 펼쳐져 있다. 이곳을 핵재처리 시설 및 발전소 등으로 개발하면 시리아의 식량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 이는 레바논도 사정은 같다. 트리폴리, 시돈, 티레는 대표적인 휴양지인 동시에 고대 페니키아 유적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게다가 적국인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시리아와 레바논 모두 이스라엘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요르단은 바다가 사해에 홍해 북동부 아카바 연안이 전부다. 핵 발전소를 지을 수 있겠지만 홍해와 사해에 밀집된다면 적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짓는게 불가능하다.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UAE 등은 중동과 세계 금융 경제, 자원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고, 막대한 양의 석유를 무기를 삼아 세계 경제를 흔들면 되니 핵이 굳이 필요없다. 가장 무서운 예멘의 경우, 유지할 돈이 없다. 발전소를 지어 전기는 그 어떤 에너지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는 있어도 발전소를 유지하는 비용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폐기된 핵처리물 또한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문제다. 핵폐기물을 소홀히 했다가 세계적인 문제가 생긴 일례가 러시아의 카라차이 호수다. 핵재처리 공장을 만들게 되면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어딘가에는 갖다 버려야 되는데, 전문적인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에 당시의 관점에서 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호수에 매립해 사고가 터졌다. 가뭄이 들어서 카라차이 호가 말라버리는 바람에 호수 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주변 지역을 덮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퍼진 오염 물질의 양은 약 18.5경 베크렐로,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대형 사고 터진 것이다. 예멘의 경우,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호수에 매립할 리는 없겠지만 사막에 매립한다 할지라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다. 그런데 예멘은 관리 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재처리 핵 시설과 기타 우라늄과 플라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 등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이 없다. 이란이나 북한이 도우면 모를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핵개발을 돕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게다가 예멘을 지배하고 있는 후티는 여전히 사우디와 대립 상태인데다가 이미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어서 더 어렵다. 이라크의 경우, 터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아직 숨어 있는 원리주의 단체들이 많아 이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날로 말라 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그리고 그 수운은 터키가 통제하고 있으며 바스라 쪽은 걸프만을 영토로 삼고 있는 해안 지대의 폭이 좁기에 핵 시설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우디와 터키, 이집트의 경우, 핵을 만들 필요가 없는 국가들이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는 그 위치의 지정학적으로만 봐도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다.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 양쪽을 통제할 수 있고,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제할 수 있다. 이란이 핵을 만든다고 중동이 모두 핵무장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전반적인 이유다. 흔히 우라늄은 저농축과 고농축으로 나뉜다. 현재 우라늄의 대부분은 원자력 발전용으로 저농축이다. 핵분열을 하는 우라늄은 U235로 저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핵물질이며 핵분열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동위체다. 자연계에 있는 U235의 양은 우라늄 전체의 0.7%에 불과하다. 그러나 U235가 연쇄 반응을 하면 고농축을 할 수 있다. 미국괴 이스라엘은 이란이 고농축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핵무기를 만든다고 의심한다. 문제는 원자력발전소 어디든 저농축과 고농축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도 과거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로 핵분열 성능이 뛰어나고 핵연료 부피를 줄일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주로 사용했다. 한국은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수차례 우라늄 변환, 농축, 플루토늄 분리 실험을 수행했으며, 2004년에는 레이저 분리 장치를 이용해 총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우라늄은 77~80%의 농축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핵무기 개발과는 관련 없는 학술적 호기심에 의한 일회성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우리도 언제든 고농축 우라늄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한국은 미국, 프랑스, 벨기에와 협력하여 연구용 원자로의 핵연료를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한국의 '고농축 우라늄 최소화' 공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여전히 고농축 우라늄은 사용된다. 그런데 이란은 핵무기가 없다. 다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들을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한국처럼 이란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방이 적국인 이란이 공격용 핵무기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를 남을 침략한 적도 없고, 오히려 사방에 위협만 받았다. 이란이 테러단체 지원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ISIS와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반군 테러단체들에게 자금, 무기, 의료지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국도 고농축 우라늄을 아직 쓰고 있고 일본도 원자력 발전소를 돌리면서 아직도 고농축 우라늄을 쓰고 있다. 이것에 대해 중국과 일본, 북한, 러시아, 미국이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 러시아, 북한, 미국은 핵을 가졌기 때문인데 미국을 제외한 북한, 중국의 위협을 받는다고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도 이 수준에 머문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설사 핵을 가진다 해도 이스라엘이 위협을 느낄 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을 보자. 트럼프가 한국에 주한미군 방위비 올린다고 난리쳤을 때, 그리고 한국에 관세 때렸을 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을 때, 핵 개발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핵 개발 후 생기는 뒷감당을 어찌할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고 우리도 핵 무기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이제 한국의 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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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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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중동의 핵 확산이 가능한가?
- 대다수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그 확산이 가속화되고, 미국과 서구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가진다고 다른 중동 국가들이 핵무기를 가질거라 어떻게 장담하는지 알 수 없다. 핵무기가 일반 군수산업처럼 막 찍어내고 그런 무기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가이드 알바를 할 때, 그거 가이드 하기 위해 핵 관련 공부를 정말 많이 했다. 그래야 관련 설명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 고객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그들이 열심히 귀담아 듣는 그 모습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우라늄 농축 과정 및 핵을 제조하는 원리에 대해 지난 번에 칼럼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타 중동 국가들이 이란처럼 왜 핵을 가질 수 없는지 알려드릴까 한다. 핵을 만들던, 원자력 에너지를 만들던, 모든 것은 원자로에서 시작된다. 한 개의 원자핵이 중성자 또는 감마선을 쏠 때, 많은 에너지들이 방출되는데 거의 크기가 같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더 작은 핵으로 분열하는 것을 핵반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보통 우라늄, 플루토늄 같이 질량수가 큰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하여 더 가벼운 원자핵 2개와 2~3개의 중성자 등으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핵분열이라고 한다. 핵분열에서의 연쇄 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켜 원자핵이 분열하면서 방출되는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을 분열시키고, 그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것을 원자력이라 한다. 핵분열의 연쇄작용과 이를 통제하려면 원자로(Nuclear Reactor)가 필수다. 임계점을 넘은 핵연료의 연쇄작용을 가만히 놓아 둔다면 그 반응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료봉을 여러 개 묶은 연료 집합체로 원자로에 다발로 삽입한다. 대개 경수로 형식으로 이용되는 원자로에는 감속재로 경수를 쓰고 고속 중성자를 사용하는 원자로에는 감속을 할 필요가 없기에 감속재가 없다. 전 세계의 원전의 80%는 경수를 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게 냉각수인데 보통 담수나 해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비상 노심 냉각 장치 (ECCS,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를 위해서도 물은 필수적이다. 원자로에서 우라늄이 핵분열로 발생한 열로 증기를 만들고, 증기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터빈을 돌리는데 쓰인 증기는 공기 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수기로 보내져 바닷물인 냉각수에 의해 식혀져 온배수로 방류된다. 1,000㎽급 원전 1기에 초당 60~70톤의 냉각수가 사용된다.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손쉽게 얻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바닷가에 짓는다. 원자력발전소의 열을 식히는 모든 장치는 물이 필요하며 발전 과정에서 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중동은 대표적으로 물 부족 국가들도 많고 바닷가에 면해 있는 국가들은 오로지 해안가에 해수만 써야 하는데 바다가 주변국을 마주하는 국가들이 많다. 특히 원자로에는 끝없이 냉각수를 공급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하다. 만약 원자로에 냉각수가 끊기면 노심 연료봉의 온도가 높아지고 그러다보면 폭발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체르노빌이든, 후쿠시마든, 참사는 대부분 원자로의 노심에 냉각수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연료봉이 열을 받는 바람에 생긴 참사다. 게다가 이런 현상에서 핵을 주조하려면 일상에서 쓰는 저농축 우라늄과 고농축 우라늄(U235), 플루토늄을 생성시키기 위해사 핵연료 재처리를 해야 하는 시설이 필요한데 중동에는 없다. 그리고 이거 유지하는 것도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간다. 게다가 이를 다루고 제어하는 핵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대개 사암으로 이루어진 사막이 많아 노출되기 십상이며 위험성은 더 커진다. 특히 햇볕이 뜨겁고 건조한 사막기후는 냉각수의 가장 큰 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중동이 핵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이 핵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님을 알려둔다. 그리고 미국의 위협을 받고 이스라엘의 생존이 위협이 된다는데 이미 이스라엘은 핵을 가졌기 때문에 별 문제 없다. 애초부터 미국이 위험스러웠다면 미국의 알래스카와 가까운 러시아가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중동의 소형화된 핵무기가 미국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터질 위험보다 러시아가 쏜 핵무기가 뉴욕이나 워싱턴에 터질 위험이 더 높다. 그 이유는 거리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중동이 쏘면 유럽이나 영국 등 다른 나토 국가들이 요격할 수 있지만 러시아가 쏘면 캐나다 한 국가 밖에 거쳐 가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타격할 수 있다. 마침 러시아 캄차트카에 그와 같은 핵 미사일 기지가 있긴 했다. 그런데 더 가까운 러시아가 쏜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란의 핵무기를 막는 것은 미국의 생존과 안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란은 미국과 서방의 장기 제재, 적국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고, 이스라엘은 매우 위협적이다. 자신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이란은 핵을 선택했다. 먼저 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본국 수호를 위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이란은 여태까지 수많은 참을성과 자제력을 보여왔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란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는 않는다. 다만 친미, 친서방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위협적이라는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은 여태까지 이란-이라크 전쟁 외에는 전쟁을 한적이 없고, 해당 전쟁 또한 미국의 사주로 인해 사담 후세인이 먼저 침공해서 벌어진 전쟁이다. 따라서 이슬람 공화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 이란은 단 한 번도 남을 침공한적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위협적이란 말인가? 한국은 이스라엘-이란 전쟁에 관여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전쟁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다.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 북한을 부추겨 우리를 공격하기를 했으며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을 했길래 한국이 이란에게 악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지원한 미국은 뭐가 되는거고 태평양전쟁 종식을 앞당기기 위해 소련 보고 대일 참전을 부추겨 만주, 한반도 북부까지 장악하게 만들어 북한 정권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은 뭐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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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중동의 핵 확산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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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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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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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 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성사된 이후, 남은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이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끝낸 방법을 다시 사용하기에는 위험부담도 크고 이란-이스라엘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중동 전쟁에서 우선 우방인 이스라엘이 있고 확전을 원치 않는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 국가들도 있으니 미국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이란에 대해서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지만 핵 시설이 파괴됐는지는 미지수고 목적이었던 우라늄 고농축물이 파괴되었다는 확인 또한 하지 못했다. 사실 트럼프식 "보여주기 위한 쇼"로 마무리 된 미국의 작전은 생각보다 그 성과가 미미했다. 만약 핵 시설의 복구가 완료 된다면 트럼프의 이 작전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키예프에 압력을 가해 전면 휴전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까지 무조건적인 휴전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란처럼 폭격 전략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미국이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그것은 바로 '핵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핵탄두 수는 러시아가 미국을 압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트럼프에게 대(對)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 바이든 정권 때 대러 강경책은 실패로 돌아간 바 있어 이는 쉽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모스크바가 정한 휴전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도 없다. 이럴 경우, 동맹국들의 신뢰를 모두 잃고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만 하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트럼프가 중동 위기를 최단 시간 안에 종결지었다는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란 핵 협상에서 러시아가 어느 정도 역할에 참여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모스크바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이끌어 내려는 트럼프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보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유력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제 자신들에게 지원을 올인하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중동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이 행운으로 여길만 하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12일 동안의 중동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내상을 안긴 셈이다. 미국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중동 내 군사기지들의 방공망 강화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란의 드론과 미사일 반격으로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최강의 방공시스템들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를 복구하고 새로운 방공시스템들을 강화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돈을 주고 미제 무기를 산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에 방공시스템 등 군사 장비를 제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애 우크라이나의 향후 선택은 중동의 포화가 조기에 그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나토 정상회의가 24, 25일 양일간 열리고 있다. 가장 큰 안건은 방위비 분담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릴 회의의 내용을 이미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방위비 분담" 이야기는 확정된 사항이다.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증액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이는 트럼프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이번 회의를 통해 이를 확정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타협안과 임시 방편적인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정상회의는 무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에서 심화하는 분쟁 문제를 둘러싼 여러 안건들로 인해 많은 나토 동맹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나토 회원국 중, 대러 강경책을 좋아하지 않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터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의 입장에 변수다. 여태까지 국제 문제에서 속 시원하게 해결된 일이 없는 상황이 트럼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란-이스라엘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휴전 약속을 깨고 가자지구를 선제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먼저 깨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부패 혐의 등으로 핀치에 몰려 있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어쩌면 전쟁을 통한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환기시키는 것 때문에 어떤 행위를 벌일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나토의 집단방위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첫 임기 중 처음으로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군에 대해 충분한 지출을 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 매우 일관된 입장을 고수해왔다.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트럼프와 절친인 인사다. 그는 나토에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뤼터는 나토 정상회의는 3시간 동안만 진행되며, 트럼프의 요구로 인해 정상회의 공동성명은 5개 문단으로 축소시키는 등 왠만하면 짧고 간결한 측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번 정상회의 시간이 짧아진 이유는 장시간의 긴 회의를 싫어하는 트럼프의 성향에 맞추고 그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뤼터가 일부러 스캐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의 주제가 적은데다가 짧은 정상회의가 오히려 나토 회원국들 간의 의견 분열을 숨기는 것에 도움이 된다. 나토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커트 폴커는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라고 요구하는 트럼프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왜냐면 서유럽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동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그와 같은 비용들은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경우, 더더욱 쉽지 않다. 참고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토 회원국 중 가장 1인당 GDP가 낮은 국가로 EU에서도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힌다. 현재 유럽은 여전히 나토 전체 군사비 지출의 30%만을 부담하고 있다. 커트 폴커는 유럽 회원국들 중, 가난한 회원국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강요를 받은 것은 유감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리고 있다. 대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나토 회원국들이 새로운 국방비를 목표치까지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10년 전에 설정한 목표치의 2%도 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설정한 뤼터의 타협 안은 동맹국들이 핵심 나토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늘리고, 국방 관련 지출에 1.5%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방 관련 지출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런 타협 안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뤼터는 여기에 교량과 도로, 철도 건설과 같은 인프라 산업 비용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정도 금액 가지고 인프라 구축까지 담당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새로운 지출 목표가 승인되더라도 일부 국가들, 아까 언급했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경우, 2032년 또는 2035년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가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목표 달성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대개 그동안 나토 회의에서 정해졌듯이 10년 단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는 이미 새로운 목표치가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비췄다.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영국이 언제까지 GDP의 3%를 국방비로 지출할지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말로는 언젠가 의회에서 이를 논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토를 영국 국방 정책의 중심에 두겠다는 영국 정부 방침으로 볼 때, 스타머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을 지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은 러시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나토 자체 방위 계획의 일환이다. 뤼터는 러시아가 나토 회원국을 5년 이내에 공격할 수 있다고 발언한 적 있다. 그런데 나토의 방위 계획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일 26일이면 그 또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뤼터 는 이미 나토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힌 바 있는데 나토가 현재 방공 및 미사일 방어 체계를 400% 이상 증강하기 위해 수천 대의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수백만 발의 포탄을 더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퍼줬기 때문이다.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원국은 아직 나토에서 약속한 역량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군대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독일은 병력을 6만 명 이상 증원할 계획이다. 그런데 나토는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동맹이 동쪽 측면 지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인 크리스 도나휴(Chris Donahue)는 최근 연설에서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인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나휴는 동맹의 기존 역량을 살펴본 결과 동맹들의 역량이 러시아를 상대로 지역 방어로 맡기는 것은 허상이었음을 빨리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 전략대로 해야 하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 능력이 해당 지역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을 투입할 수는 없다. 미군 투입은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시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서도 자제될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가 참여했지만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유럽 측의 소득만 있을 뿐, 미국의 지원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특히 트럼프가 이미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나토의 직접적인 지원보다 EU 차원의 개별적인 지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쟁점이다. 커트 폴커는 트럼프 정권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유럽 안보에 필수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럽 동맹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한편 뤼터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슈는 제외됐다고 하였다. 이는 트럼프와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토 정상들은 새로운 대러시아 전략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정상들의 만찬에 초대됐지만, 북대서양 이사회(North Atlantic Council) 주요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예정에 있다. G7에 이어 이번에도 젤렌스키는 뭐 하나 성과를 얻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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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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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과 휴전으로 얻는 트럼프의 정치적 이득
- 트럼프도 이번 휴전으로 얻는게 있었다. LA 폭동 같은 미국 국내의 뉴스가 중동 사태 때문에 죄다 묻혔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다. 전 세계인들과 관심과 눈은 중동으로 향했다. 어쩌고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트럼프가 네타냐후를 부추겨 이란을 선제 타격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럼 한동안 혼란스러워져 있던 미국의 민심은 저절로 이스라엘에 촉각이 모인다. 이렇게 네타냐후와 거래를 통해 미국 내 불량한 분위기를 외부로 표출시키는 것이다. 전쟁의 두려움을 확산시켜 아무도 폭동에 관심을 갖게 하고 물가 인상, 인플레, 유가 상승, 주가 하락까지 모든 것에 대해 간접 블러핑으로 그 불안 요소를 한 곳에 집중시키게 만드는 것은 매우 고도의 정치 전략이다. 모두의 이목이 중동에 집중되는 동안, 미국 각지에서 폭동들에 대해 관심이 줄었다. 어떠한 시위나 폭동이든, 관심이 줄어들면 자연히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들 만의 외침으로 전락해 아무 의미 없게 만들고,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전략은 폭동 진압에 있어 엄청 큰 유효타를 때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천재적인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터키의 에르도안이다. 본인에게 오는 모든 불만을 시기에 따라 적절히 외부로 타겟을 돌려 위기를 넘겼다. 경제 위기로 터키 국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HTS를 움직이고 지원해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시리아 내정을 장악했다. 시리아의 북부의 땅은 현재 터키의 영토나 다름없다. 이에 대한 터키 국민들은 다시금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이스탄불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울루를 투옥시켜 전 국민의 분노를 샀을 때, 여태까지 사형 판결을 받고도 갇혀 있던 쿠르드족의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과 거래해, 극단 쿠르드족인 PKK의 무장을 해산시켜 터키에 대한 테러리즘이 사라졌다고 공표해 이 또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이마모울루의 투옥에 항거하여 저항하던 시위는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타더니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에르도안의 정치력만큼은 세계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에서도 재현된 바 있다. 한창 열기를 뿜던 홍콩 민주화 시위는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집회가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홍콩 민주화 시위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게다가 전 세계가 펜데믹에 주목하는 바람에 홍콩 시위는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결국 미국 폭동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이를 통해 폭동이 자연스럽게 해산되게 만들고 본인의 정치력을 극대화하는 이득을 챙겼다. 그냥 장사치 경제인으로 생각했는데 그의 정치 능력 또한 많이 성장했다. 이제 트럼프는 매우 노련한 정치력까지 갖춘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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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과 휴전으로 얻는 트럼프의 정치적 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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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완전하고 전면적인 휴전을 하는 것으로 완전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중동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그 이유는 트럼프와 미국의 중재 및 그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란은 미군 폭격기가 핵 시설을 공습한 지 하루만에 보복으로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قاعدة العديد الجوية) 미 공군기지에 미사일을 날렸다. 이 기지는 카타르 도하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군사 기지 중 하나이며 아부 나클라 공항 ( مصار ابو نهلة ) 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 에미리 공군, 미국 공군 (USAF), 영국 왕립 공군 (RAF) 및 기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중부사령부 전방 본부, 미 공군 중부사령부 본부, 제83원정항공단(RAF), 그리고 미 공군 제379원정 항공단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지는 중동 미 공군 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서아시아 미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이 보복할 카드, 이란의 보복 선택은 미군 기지 공습이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강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이는 하는 척 행세만 하고 만 상황이 되었다. 이란은 카타르에 날린 미사일 수가 미군이 이란 핵 시설에 투하한 폭탄의 수와 같았다. 언론 악시오스(Axios)는 카타르에 약 10발의 미사일이 발사됐고 최소 1발이 이라크를 향해 발사됐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미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으로도 미사일을 날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자 바레인은 자국 영공 내 항공편 운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왔다. 미국의 비어있는 세 곳의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지만 양측의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 그리고 보복이 끝나자 카타르의 총리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Sheikh Mohammed Bin Abdulrahman Al Thani)가 하메네이를 설득했고 이란은 종전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멈추고 휴전을 하면 이란 또한 휴전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명확시했다. 미국과 네타냐후는 이란이 공격을 멈추면 이스라엘도 휴전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휴전 합의안은 이루어졌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종전이 아니다. 이란의 12시간 휴전(공격행위 중단)과 이스라엘의 12시간 휴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종전안'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이는 일시적이다. 그리고 미국과 트럼프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앞서 비슷한 맥락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을 했지만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대한 지상군 작전을 전개했다. 명백하게 휴전 원칙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대해 이 또한 미국과 사전 협의가 있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란이 이를 온전히 믿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휴전을 한 것은 양측의 폭격으로 인해 서로 간의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휴전이 성사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좋은 면일까? 우선 이스라엘은 파괴된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이스라엘 각 도시들을 재건할 수 있게 되고, 아이언 돔, 다비즈실링, 에로우 시스템, 사드, 페트리어트 등의 방공체계에 미사일들을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 동안 이란과의 폭격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부분 미사일이 소진되었다. 이대로 일주일만 더 가면 이스라엘은 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재정비가 필요하고, 미국의 지원품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내부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면서 이스라엘 정치권 내부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네타냐후는 정치권 내부도 정리하면서 다시 있을 전쟁을 대비하려는 측면이 크다.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휴전이 절실하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휴전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모양새도 빠질 뿐더러,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있는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이란에게 패배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선택한 것이 미국을 움직여 휴전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파괴된 지역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잇단 군 총책임자들이 제거되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정식으로 인선하고 군의 사기를 독려해야 한다. 즉, 이란도 재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는 그동안 40년 넘게 축적해온 미사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방어시스템을 총 점검하여 풀 가동시키고, 휴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물이야 어차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으니 이는 우려할 바가 못 된다. 한국이나 서방 언론에서는 이란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해 이스라엘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미군 기지를 공격해 어느 정도 체면을 차렸다. 이스라엘이 하메네이 정권 붕괴를 노리고 접근한 전략 또한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이란 국민들만 단결시켰다. 하메네이에 저항적인 야당 의원들도 이란의 승리 기원에 동참했다. 이스라엘,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이란은 스스로 단결 및 단합에 성공했다. 이번 휴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단결과 단합을 루즈하게 만드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는 아직 전쟁 중이므로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세계 최강의 방공망들이 무력해졌음을 드러냈다. 2~300개를 날리면 풀 충전한 상태의 이스라엘 방공망들은 대부분은 요격에 성공할지 몰라도 요격시키지 못한 것에 우라늄을 농축해 만든 소형 탄두를 탑재시킨다면 2~300개 중에 적어도 10개는 떨어질테니 그로 인한 엄청난 폭발력으로 초토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격율 100%라면 모를까 8~90%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풀 충전됐을 때의 한계를 보여준 셈이 되었고, 이란은 여기에 힌트를 얻은 셈이 되었다. 게다가 우라늄 농축물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시간이 지나 방공미사일이 소진됐을 때, 최강의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이란의 끊임없는 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취약점을 노출했다. 이스라엘이 언론을 통제하고 막아도 일반 시민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촬영한 이스라엘 피해의 영상들을 각 네트워크에 올렸고, 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대량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이 올려 놓른 개인 영상들 덕택이다. 어떤 영상에서 이스라엘 도시를 불벼락이 떨어지듯 수없이 낙하하는 이란 미사일에 속수무책인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보기도 했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자기 진영에 떨어지는 이스라엘의 방공미사일을 보기도 했다. 요즘 같이 온라인 플렛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도를 통제하고 언론을 통제한다고 진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란은 이로써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지의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무지막지한 미사일과 드론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과제로 남았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소진시키기 위해 최대한 드론 제작의 수를 늘릴 것이고, 이번에 출정시킨 드론이 300대에 이른다면 다음 계획은 3,000대를 한꺼번에 출격시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방공망을 소진시킨 다음 미사일 수백발을 쏘아 올리면 이스라엘은 다음 방어가 어렵게 된다. 즉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거의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 발사대를 타겟으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발사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 파키스탄에서 수입하면 된다. 한편 협상을 중재한 미국 또한, 전면전으로 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부분 또한 하나의 약점으로 지목된다. 현재 들리는 미국 내의 소식통들에 의하면 미국은 현재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한다. 예전 같으면 이런 협상보다는 이란 내에 상륙해 전격전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폭격을 이란에 가해야 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것과 유사한 작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지상군이 상륙하게 되는데 이란의 지형은 아프가니스탄보다 험준하다. 마주하게 될 것은 이란의 혁명수비대 게릴라들일 것이고,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게 자명하다. 그리고 그만한 준비조차도 되어있지 않다. 게다가 미군은 자국의 제조업 상황도 그리 좋지 않으며 희토류를 중국에 의지하고 있어 첨단 무기 생산하는 것도 상당 부분이 제동이 걸려 있는 판이다. 예전의 미국이었으면 이런 협상 따위는 없었다. 그냥 치고 들어가 융단 폭격과 더불어 지상군이 진입해 적을 제거했다. 그렇게 희생된 인물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란의 가셈 솔레이마니, 오사마 빈 라덴 등이다. 그러나 미국은 공격 이후, 협상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유화책이라 볼 수 있고, 트럼프의 공약 중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반하는 경우일 수도 있기에 이런 저런 딜레마에 걸려 있다. 그리고 미국의 위상 약화도 문제다. 여태까지 트럼프가 걸친 국제 문제에 단 한 건도 속시원하게 해결한 적이 없다. 마치 큰 불은 잡았다 할지라도 잔불 처리를 하지 않아 다시 큰 불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은 셈이 된 것이고, 그의 말은 동의해주고, 따라주는척 하면서 하던 것을 계속하면 된다는 식의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이라 볼 수 있겠다. 중동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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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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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명칭 기원과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하여
-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 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 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비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B.C 900년에 사카 계통의 종족들이 점차 서진하면서 카스피 해 북쪽을 돌아 얌나야 문화를 영위하고 있던 민족들을 밀어내면서 또 다른 대이동의 시작이 이루어진 이후, 카프카스 지역에도 새로운 종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동의 불길은 점점 커져서 B.C 9세기 내내 유라시아 전 지역을 들불처럼 불태웠다. 그 불길은 전혀 정신적이지만은 않았으며, 폭력과 유혈이 낭자했다. 극동에서 카프카스에 이르는 유라시아 땅에서 정주민에 대한, 또는 정주국가에 대한 공격과 학살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B.C 822년 사카의 영향을 받은 서부 중앙아시아, 키질쿰 지역의 유목 부족들이 남하하여 힌두쿠시 지역을 공격했던 전쟁, B.C 824년에서 B.C 823년까지 역시 사카 종족의 대이동에 따른 영향으로 인더스 지역에서 농민들과 각 도시의 영주들이 전쟁을 벌인, 이른바 인더스 내전, B.C 821년 이란 북부에서 메디아 왕국과 또 다른 사카계 민족인 사르마트 족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메르브 전투, B.C 816년에서 B.C 815년까지 카스피 해 남부 타바리스탄의 도시들이 아시리아 샬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재위:B.C 858~B.C 824)의 이민족 탄압 정책에 항거해 아브작(Abzak)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와 싸운 ‘아브작 전쟁’, B.C 826년부터 B.C 823년까지 8차례나 벌어진 아시리아와 우라르투와의 전쟁 등 각종 약탈 전쟁도 이어 발생했다. 약탈만큼 사람들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각종 학대와 학살로 단순화하여 서로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끔 부추기는 계기도 없는데다, 당시 이미 정주 국가들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탈취하려는, 또는 각 약탈을 빌미로 상대 도시와 국가를 정복하려는 세속 권력의 속셈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많은 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주 전장지인 서부 이란 지역의 경우, B.C 815년 9월에 메디아와 하나의 잠정적인 협정이 맺어짐으로써 사태가 극단을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흐샤트리타(Khshathrita)를 이어 메디아의 왕으로 즉위한 데이오케스(Deiokes)는 젤리라바트(Cəlilabad)에서 메디아와 사카의 일족인 파르시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파르시 족이 메디아 왕국의 영토 내에 거주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데이오케스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에 정착한 파르시 족들이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메디아 국왕에게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협에는 불만의 목소리도 많았다. 사카계에서 분리되어 남하한 파르시와 달리 메디아 남부 지역에 정착한 엘람 인들은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인 조로아스터교를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비록 파르시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메디아 시민들이 파르시와 통혼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메디아의 왕은 파르시 인을 후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메디아 왕국은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보호자로서 수메르 국가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아시리아와 소수의 북방 메소포타미아 원주민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당시의 중동은 정주민과 유목민들이 전쟁을 부추기는 한편, 약탈을 빌미로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 정치를 놓고 말해도 비슷했다. B.C 9세기 초까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져온 상업적인 부흥으로 고대 중동의 경제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중엽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대규모의 귀금속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면서 다량의 인플레이션이 생겨났고, B.C 8세기로 넘어가던 때를 전후하여 중동이 소빙하기에 들며 농업 생산력은 크게 떨어졌는데 인구는 마침 급증해 있어서 식량 사정이 심각해졌다. 여기에 각종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당시 중동의 도시 인구의 4분의 3이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였으며, 바빌론의 경우 B.C 7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45,000명이던 주민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25,000명까지 줄어드는 참상을 보였다. 한편 불어난 귀금속을 믿고 사치와 세력 증대를 위해 사치와 낭비를 일삼던 수메르의 왕후 귀족들은 어느새 자신이 빚에 올라 있으며, 농민들의 세입은 크게 줄어든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그들은 매우 어려운 농민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는데, 더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빚을 빌미로 자유농민들의 신분을 농노로 추락시키고, 그리고 전쟁을 벌여 이웃의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군사기술의 발달이 개재되었다. 역청을 발라 석성을 쌓는 축성술이 개발되자 공성전에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해졌고, 따라서 공격과 방어 비용이 모두 크게 늘었다. 전격적으로 적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여름철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전을 전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비는 늘어난 병력 수요를 고대적인 군역 체제가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상비군이 출현했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도시 국가 왕들은 전쟁 때마다 병사들을 모집해 용병대를 운용했다. 이 역시 결국에는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의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후와 귀족들은 하나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전리품으로 각 귀족들의 부채와 용병의 급료를 지불하고 나면 다시 가난해져서 또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훨씬 힘든 측은 농민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강제 징집을, 그리고 화제로 전소된 가옥과 황폐해진 밭, 강간되고 살해된 가족을 남겼다. 이렇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이었다. 병력의 수요는 늘 있었으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용병이 되어 먹고 살았고, 이를 통해 잘 하면 부유해지고 신분 상승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은 점점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필수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여기에 정치적인 긴장이 이란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와의 또 다른 전쟁의 계기를 마련했다.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들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직할 도시에서만 세금과 병력 징발을 할 수 있는 상태에 불과했지만, 그 이름에 맞게 아시리아 제국처럼 단일 통치 국가로서 제국을 호령할 수 있기를 내내 바래왔었다. 그래서 국왕들 일부가 아시리아와의 동맹국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들을 압박하고 각 영지를 몰수하고 싶어 했으며, B.C 810년 이후 생긴 파르시의 존재는 각 도시 국가의 야심들에 부응해 파르시 부족들을 압박하는 선봉 역할을 했다. 반면 아시리아에 속한 북부 수메르의 국왕들은 반대로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완전한 독립을 염원했고, 그와 같은 목표 의식들은 다른 수메르 도시 국가의 국왕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내에서 중앙과 지방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국제정치적으로도 역시 긴장이 커졌다. 이미 데이오케스 왕 때 메디아와 하나였던 파르시는 이제는 분리되었지만 그래도 같은 사카, 스키타이 민족이라는 인연으로 이란 지역에서 연대하려 했다. 그것은 메디아에게서 벗어나려 분투하던 파르시와 두 종족과 국가를 양쪽으로 상대하던 아시리아를 긴장시켰다. 특히 메디아 왕국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하는 더 통일된 국가로 발전할 움직임은 아시리아나 시리아와 같은 인근의 강대국들로서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미 B.C 790년대 초에는 유프라테스 강, 자그로브 산맥, 지중해와 카스피 해가 모두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B.C 788년, 무려 3개의 혜성이 나타나면서 오리엔트 지역의 정치권에는 일종의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많은 점성가들이 이를 분석하여 종교적인 설명을 내놓았으나, 종교는 종교일 뿐, 큰 사건, 한 시대가 바뀔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B.C 7세기 말, 파르시 족은 중부 이란과 남부 이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영토의 넓이는 대략 180만㎢, 인구는 20만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 인구가 1억 정도였음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였다. 그 국가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인 아케메네스는 사트라프(Satraf)라 불리는 지방 총독들과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첩자, 비밀경찰로 통하는 밀정들을 부리며 군림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는 그 출신이 불분명했지만 “왕 중의 왕”, “아후라마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려 마땅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왕 중의 왕이 수자원도 풍부하고 기름진 영토의 오리엔트에서 북적대며 거주하던, 200만의 인구인 수메르,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아케메네스는 적극적으로 강병을 양성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의 엘람과 북쪽의 메디아 왕국을 병합해야 했다. 이는 남쪽의 엘람을 정벌하여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 북쪽인 메디아 왕국과 협상을 통해 통합하여 이란 자체를 통합해야 했다. 그리고 동쪽의 아리아 인의 위협에 대항해야 했다. 이는 한 국가의 체면과 위신을 지킨다는 것과 지배자는 하나여야만 하며, 반대의 목소리는 용납하지 못한다는 정치적인 논리에 있었다. 더불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그래서 내버려 두어도 별 문제가 없고, 정복해도 별 이익이 없는 머나먼 땅으로도 대군을 파견하여 페르시아의 위세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인 문제만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왕국은 수립된 지 아직 반세기 정도 만에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체제는 중단 없는 정복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국의 판도가 매우 넓어지고, 수많은 민족을 아우르다 보니 반란의 소지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참 체제와 “왕의 눈, 귀”로도 닿지 않는 먼 변방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파악했다. “왕의 길”을 통해 제국의 변방에도 진압군이 신속히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고, 세금 등도 되도록 가볍게 해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줄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잠복해 있던 불만세력들, 구체제의 복원을 꿈꾸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이에 맞서는 특단의 방법이 주기적인 정복 사업이었던 것이다. 왕이나 왕이 친애하는 장군이 수도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변방에 도착하면, 변방에서는 병력을 추려 정복 군에 보태야 한다. 따라서 평화가 이어졌으면 반란의 자원이 되었을 변방의 병력이,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변방을 새로 늘리는 일에 투입된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복속시킨 지 얼마 안 되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바빌로니아의 군대를 몰아 정벌군을 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발상인 것이다.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된 변방은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킬 힘이 없고, 원정에 투입된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페르시아의 영웅’이 되어 귀환함으로써 더 이상 제국의 근심거리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치 전 세계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듯, 잊을 만하면 새로운 정복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후 아케메네스가 이끄는 파르시 족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가 안잔(Anzan)을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차용한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분리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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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명칭 기원과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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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그레이트 게임은 현재 역사 용어가 아닌 정치 외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는 183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하기도 하면서 1905년 러일전쟁까지를 일컫기도 한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시아 남부 지역을 노리자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가운데 비롯되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1842년 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진격했다가 역습을 당해 패배하여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 등 1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와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고 이 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리전 상대로 일본이 나서게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맺어진 동맹인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인도와 호주, 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했던 셈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러시아하고도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 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서방 나토 세력까지도 가세해 거대한 서구 연합이 생성되었다. 이 동맹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그 상대는 러시아였다. 그리고 여기에 새롭게 중국이 가세했으며 중립을 지키던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아프리카까지 러시아와 중국과 가까워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사우디아라비아 및 이란, 터키로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밀착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쿼드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지만 최근 인도는 친러로 돌아섰다. 또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원래 중국이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쿼드 동맹과 성명에서부터 제3차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2021년 9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4명의 정상들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1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4개국 정상들은 회담 이후 성명에서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4국이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는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2020년 카슈미르 산악 지대에서 영토 분쟁에 있던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의 힘을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당시 성명에서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 전문가 누구든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성명에서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성명에 의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고 하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하며 북한을 압박하기도 했다. 성명에서 나온 미얀마 관련된 것에서 미얀마 군부로 하여금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 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에 대한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했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 북한 정책 기조가 될 것임을 알렸다. 한국은 당시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19세기 말 그레이트 게임 때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러시아까지 이 분쟁에 끼어들어 우리 한국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 그 때는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지만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되면서 1885년 4월 영국은 조선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거문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와 같이 중립화 및 완충지대로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남쪽 바다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兪吉濬)이었다. 당시 유길준은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길이라 주장했다. 당시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 · 프랑스 · 일본 · 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절이었기에 조선의 중립화론은 청나라가 조선을 종속국 상태로 놓아두려 했었던데다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남겨두려 했었기 때문에 지식인의 주장 중 하나로 단순하게 인식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 세력이 청나라를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했고, 해양 세력이 영국을 대신해 일본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외교, 군사적인 역량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두 세력이 1895년부터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으며 이는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시 고종은 1897년에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으며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대로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바뀐 현재, 우리는 러시아, 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한반도는 이들 국가들의 지리적, 지정학적 요충지로 설정이 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해당 국가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아래에 온통 날카로운 못이 박힌 대지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거나 다름없는 형세인 것이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러시아가 끼어들면서 달라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 중, 러 구도가 되고 한, 미, 일 구도로 굳어지고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동 사태들이 해결된 이후에는 그 또한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을 주도로 한 시아파, 사우디 주도의 수니파, 그리고 이스라엘이 버티는 중동 사태를 이후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나 국제정세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크게 변할 수 있는 변수가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국제관계의 예측은 50:50의 확률이다. 그 50% 확률의 국익을 하나라도 더 취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행동이 바로 외교(Diplomacy)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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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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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핵 물질, 미국의 벙커버스터 투하는 "약속 대련"일 가능성 배제 못해
- 지난 21일, 미국은 벙커버스터를 투하해 이란의 핵 시설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특히, 산악지대에 위치한 포르도 지하 핵시설을 집중 타격했다. 포르도는 고농축 우라늄 생산기지로 이란 핵 프로그램의 핵심 중의 핵심인 곳이다. 핵 우라늄탄을 만들려면 천연 우라늄에 0.7% 정도 들어있는 U-235 (원자량 235인 우라늄)을 90% 이상으로 농축시키는, HEU 제조 기술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자연 상태에서 99% 이상을 차지하는 U-238(원자량 238인 우라늄)은 핵 분열을 일으키지 않아 무기나 발전용으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U-235를 분리해 농축시키는 장치가 이란이 가지고 있는 원심분리기로 하는 것이다. 1분당 수만 번을 돌아가는 초고속 원심분리기 내부에 우라늄 가스를 주입하고 원심력과 무게의 차이를 이용해 U-235를 분리해낸다. U-235를 2∼3% 정도로 농축한 LEU(저농축우라늄)는 경수로의 원료로도 사용될 수 있다. 문제는 LEU를 원심분리기에 넣어 농축 과정을 반복하면 추가적인 기술이나 장비 없이도 HEU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일단 원심분리기 설비를 갖추면 우라늄 농축의 목적이 경수로 가동인지, 아니면 핵무기 제조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라늄을 저농축할 수 있으면 이를 반복해 고농축 우라늄을 만드는데 문제가 없다. 국제적으로 핵 실험이 금지된 상황에서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무기 개발이 훨씬 더 위협적 이유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의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플루토늄은 반드시 원자로의 핵분열 과정을 거쳐야 구할 수 있다. 정제 우랴늄으로 핵연료봉을 만들어 원자로 안에서 핵 분열을 시키면, 그 과정에서 U-238이 중성자와 반응해 플루토늄으로 변하는데, 추가로 핵연료봉을 재처리해야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것이다. 통상 우라늄 탄두 1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HEU 20㎏ 정도는, 신형 원심분리기 2,000대를 완전 가동할 경우 6개월이면 뽑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원심분리기 설치에 필요한 공간이 대당 1㎡를 넘지 않는데다 지하 깊숙이 숨기면 찾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 핵실험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과 단순한 폭발 구조 및 엄청난 위력은 핵무기를 소유하고 싶은 국가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북한도 그러했고 이란도 그러했다. 실제로 고농축 우라늄탄은 주로 '포신형' 구조의 핵무기로 제작된다. 포신형 핵무기의 경우, 우라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핵 물질이 핵 분열을 일으키기 위한 최소 질량인 임계질량을 넘지 않게 배치한 다음, 폭발시킬 때 고성능 폭약을 터트려 포탄을 쏘는 것 같이 두 핵물질이 합쳐지게 만들어 임계질량을 넘게 하는 방식이다. 임계질량이 넘게 되면 U-235가 연쇄 반응을 해 중성자를 방출하고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내는 핵 폭발이 일어난다. U-235 1g이 완전 핵분열을 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석탄 3톤을 태울 때 나오는 에너지와 유사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적용하는 핵물질의 의미 있는 양은 플루토늄 8㎏, 우라늄 25㎏ 정도로 이 정도의 양이면 조잡한 정도의 핵무기를 제작하는게 가능하다. 그러나 IAEA에서는 고농축 우라늄 15㎏으로도 충분히 우라늄탄 1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라늄은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다. 그런데 천연 우라늄의 방사능은 낮은 축으로, 천연 우라늄 연료를 원자로에 장전하기 전까진 차폐를 안 하든가, 엄청 얇은 정도로만 한다. 반면 농축 우라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방사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물질을 건드리거나 손상이 가게 할 정도로 가공할 위력이 가해진다면 자연 방사선보다 엄청난 양의 방사선에 피폭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B-2 폭격기를 동원해 벙커버스터를 작렬시켰다. 이 작전이 트럼프가 말한 것처럼 성공했다면 투하된 곳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대폭발과 더불어 대기 중에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노출될 것이다. 문제는 아직 이란에 그와 같은 보고가 없다. 분명 우라늄 농축 핵 시설 타격에 성공했다면 벌써 방사능 천지로 덮여 있어야 하는데 이란에 그런 상황이 포착되지 않는다. 아마 트럼프가 폭격한다고 떠들고 있을 때, 다른 안전한 지역으로 우라늄 농축액과 시설 및 설비들을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에 "약속 대련"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튼 이란과 미국의 "약속 대련"이 맞다면 이란의 다음 대응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란은 미국에 대대적인 보복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 보복 수준이 경미한 부분에 그치거나, 이 과정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 "약속 대련"이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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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핵 물질, 미국의 벙커버스터 투하는 "약속 대련"일 가능성 배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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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속의 자유
- 200년 전 미국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1830년대 미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토크빌의 글에서 그 당시의 삶을 그려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운영에 관여하고 또 그것에 대해 토의하는 것은 미국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그들이 아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물론 토크빌의 글이 그 당시 프랑스의 귀족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미국을 과도하게 미화했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토크빌이 본 미국은 평등한 사회였고, 자유와 자치가 함께 어우러진 사회로 미국 사회를 그리고 있었다. 토크빌에게 자유란 개인을 위한 사적 자유를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마을 자치를 염두에 두는 공적 자유였다. 최소한 이웃과 함께하는 자기 실현을 꿈꾸는 자유였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으로서 트럼프가 보여 주는 행동은 200년 전의 미국보다 한참을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의 50년 전 모습도 어쩌면 200년 전의 미국의 모습과 유사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내가 살았던 김천이라는 지방 소도시는 개인보다는 마을공동체 중심의 사회였다. 그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다. 어머님은 이웃집의 밥그릇 숫자까지 모두 알고 계셨을 것이다. ‘가메실’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컸다. 집에 감나무가 12그루 있었으니 그 규모는 짐작이 될 것이다. 감을 수확하는 시절에는 이웃들과 함께 수확하고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물론 나도 이웃의 잔칫날에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그 집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동네 뒷동산에 올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면서 놀았던 기억, 동네 큰 나무에 새끼줄로 그네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힘차게 그네를 타는 모습들, 마을 공동 우물터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모여 빨래하던 장면들이 기억에 떠오른다. 마을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여, 요즘은 공동체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는 개인 중심의 자유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자연과학의 발달이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새로운 개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홉스와 로크, 에담 스미스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홉스가 자기 생존권을 강조했다면, 로크는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했고, 스미스는 시장에서의 자유를 강조했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고전적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점차 짙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소수의 자유 실현이 대다수의 부자유라는 자유주의 역설이 그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부는 점차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가난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두어야 했다. 그로부터 자유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자유주의가 그 무렵 등장했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20세기 초 영국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개혁정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이론이었다. 홉하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자유주의가 외적 억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했다면, 사회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주장하며 사회적 책임과 협력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로 보았다. 그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자유주의가 지나친 이기주의로 변모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사회주의 역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홉하우스는 사회를 유기체로 보았다. 개인과 사회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사회 정의는 개인의 노력에 따른 성과는 개인의 몫이지만, 사회가 만들어 낸 부는 사회구성원 공동의 것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개인의 성과에는 개인의 노력 외에 사회적 몫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디.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은 당연히 인정하지만, 그 속에는 사회 공동체의 기여도 있으니 그 기여분은 세금으로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의 이론은 사회복지의 확대를 통한 소득 불평등을 확대하자는 이론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이론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사회적 자유주의는 고전적 사회적 자유주의로 일컫는다. 이런 자유주의의 변천사 중 아주 작은 한 부분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는 사회 속에서의 자기 실현이다.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우선은 이사야 벌린이 말한 소극적 자유, 즉 외부의 방해가 없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개인은 사회 속에 고립된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다.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인이다. “개인을 파편화된 개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관계 속의 개인으로 보는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180도 달라진다. 나는 불교의 연기설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러한 관계 맺음의 조건은 수시로 변화하기에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교는 미물의 생명도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시대는 세계관에 대한 페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서구 중심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관계중심적 세계관으로의 변화이다. 그 속에서 고전적이지 않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자유주의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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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속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