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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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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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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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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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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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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06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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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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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
    호르무즈(Hormuz) 해협은 북서쪽의 페르시아 만과 남동쪽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만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북쪽에는 이란이 있고 남쪽에는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있다. 그러나 가장 좁은 곳의 폭은 54km이며 해협의 이름은 이란 측에 존재한 황무지 섬인 호르무즈 섬에서 유래했다. 본래 호르무즈, 혹은 오르무스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조로아스터교의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페르시아어로 '대추의 땅'이라는 뜻, 혹은 그리스어로 '만'이란 뜻이라는 설이 있다. 이 해협의 역사는 11세기 말, 호르무즈 섬은 케르만 셀주크(Kerman Seljuk) 및 살구르(Salgur) 왕조의 속령이었으며 무함마드 디람쿠(Muhammad Dyramqu)라는 인물이 호르무즈 왕국을 건국했다. 이어 13~14세기에는 몽골 일한국에 복속한 상태에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이어주는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하기 시작한다. 15세기에는 호르무즈 왕국이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고, 명나라의 정화가 대항해를 할 당시 명나라 함대가 방문했다. 명나라 측 기록인 『성사승람(星槎勝覽)』에 의하면 호르무즈의 주민들은 매우 부유하고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507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크(Afonso de Albuquerque, 1453~1515)가 이끄는 포르투갈의 함대가 호르무즈 섬을 일시에 점령했고, 1515년에는 이 섬에 성채를 건설한 이후, 호르무즈 왕국을 완전히 포르투갈에 복속시켰다.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 제국이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다만 1622년에 이란 사파비 왕조의 샤한 샤 압바스 1세(Abbas I)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3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호르무즈를 함락시키고 포르투갈 군을 몰아냈다. 당시 1세기 정도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던 호르무즈 왕국 역시 이 시기에 멸망했다. 한편 호르무즈 해협 남쪽에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 세력을 격파하고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오만 제국이 새로운 해상 강대국으로 대두했고, 해군에 큰 관심이 없던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오만 제국은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현대 시대에 이르러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이 지역에서는 일명 "유조선 전쟁"이라고 불리는 무차별 유조선 공격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이란이 봉쇄 위협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었기에 잘 부각 되지 않았지만, 이 당시 유조선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이라크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유조선과 정박지를 공격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면,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이 여기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생각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 이란은 고속정 전력을 기반으로 이라크에서 출항하는 유조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같은 후세인의 전략에 대응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은 1987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유조선을 보호하는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을 시작했다.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이 시작되자 미 해군 군함들이 유조선의 보호를 위해 해협에 투입되었으며, 1988년부터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미국 해군과 이란 해군 간의 해상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미 해군 순양함 CG-49 빈센스가 테헤란에서 이륙한 이란 항공 655편을 함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켜 승무원 포함 290명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유조선 전쟁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2010년대 후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란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해협 인근을 통과하던 유조선들이 이란 군에 의해 피격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향해와 관련해서 미국 주도의 동맹군이 결성되었고 대한민국 역시 청해부대를 보내 참여했다. 이어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스라엘, 영국이 참여했다. 2019년 7월 10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하던 영국 유조선들을 향해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고속정 다수가 접근하자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 해군 소속 23형 호위함 HMS 몬트로스(Montros) 함이 적극적으로 고속정의 진로를 차단하는 나포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2021년 1월 4일, 한국 국적의 선박 MT 한국 케미호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나포 당하여 이란의 반다르아바스 항에 억류된 MT 한국 케미호 나포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계속 되는 이란의 위협 속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지 않고 아덴 만으로 통하는 페르시아만-아덴만 연결 운하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존재하고 있다. 호르무즈 곶을 관통하는 호르무즈 운하 구상도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구상에 그치고 있다. 현재 페르시아만의 여러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이 대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리학적 요충지로 여겨지고 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21척의 유조선이 해협을 통행하면서 약 1,7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35%,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에 육박하는 규모로 알려진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다면 전 세계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OPEC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이 40%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라크 18%, 쿠웨이트, UAE, 이란 각각 12%, 카타르 6% 순서로 뒤를 잇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 생산한 원유의 85%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시아 국가들로 수출되고 있다. 특히 전체 원유 생산량의 50% 가까이는 동아시아의 중국, 대한민국, 일본 3국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동북아시아 3국은 원유 등의 원자재를 수입한 이후, 정유, 화학 등의 각종 파생 산업으로 상당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업 강국이다. 따라서 자국 내 수요 대비 원유 공급이 매우 부족한 편이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원유를 수입하는 중동 국가들의 가장 큰 고객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은 원유 수입의 80% 가까이를 페르시아만의 유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란 의회가 봉쇄를 의결했다. 봉쇄의 최종 결정권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에 있지만 이는 절차 과정에 불과할 뿐, 실제 봉쇄는 시간 문제다. 봉쇄의 주체는 이란 해군, 이란 공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주축이 된다. 혁명수비대와 공군은 순항 미사일과 여러 가지 드론 전력을 이용해 유조선을 공격할 것이고, 이란 해군은 다수의 고속정들과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3척의 킬로급 잠수함을 주축으로 봉쇄를 시도할 것이다. 비무장 상선인 유조선의 특성상 유조선 나포 및 공격은 고속정들이 할 것이고, 군함에 대한 공격은 잠수함들이 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봉쇄의 형태에 대해서도 자국 영해기 때문에 전면적인 봉쇄가 아니라 형식상으로는 일상적인 주권 행사만으로도 봉쇄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군사훈련을 빌미로 민간 선박의 운행을 일시 금지한다거나, 적대국 선박이나 의심스러운 선박에 대한 해상 검문 같은 형태로도 단번에 원유 수송을 대폭 감소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게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되었다. 이란은 미국의 공격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IRIB는 이 방송에서 중동 지역의 미군 기지 10곳을 표시한 지도를 내보냈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성명을 통해 미군 기지 직접 공격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공습 대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직접 타격의 보복보다 미국과 동맹국들을 고생시키는 측으로 보복을 대신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 타격의 보복 가능성은 남아 있다. 보복 공습을 한다면 빠르면 내일, 늦으면 2~3일 뒤에 자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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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3
  •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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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3
  • 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2
  • 2010년대 그리스 정부와 정당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경제 위기
    그리스는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IMF와 EU에게 빌린 돈의 규모가 수백조 원 수준에 이르고 있다. IMF와 EU는 그리스의 국채를 가지고 있는 민간은행의 국채를 상환 의무가 있는 그리스 정부 대신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 정부에 대한 구제 금융을 지원했다. 즉 2015년에 와서는 대부분 그리스의 국채를 민간이 아니라 IMF와 EU, 그 중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 정부는 이들 IMF와 EU, 독일 및 프랑스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IMF와 EU에게 있어서 이 구제 금융 채권 상환은 일종의 구상권 청구인 것과 같다. 그냥 그리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가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도 같은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돈줄을 쥐고 있는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이 엄청나게 손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협상은 순탄치 않게 진행되었다. 벌써부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은 견제에 나서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렉시트라 불리는,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 자체도 용인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돈 갚을 것을 압박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급진좌파인 시리자 정권의 집권 이후 기존의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 내각에서 추진하던 긴축 정책를 철회하는 일환으로 공기업이나 국유 자산의 민영화 및 매각 작업을 속속 철회했다. 사실 이를 덮어씌우게 된 나라가 바로 중국인데 중국은 많은 그리스 자산을 인수하려고 계약까지 한 상황이었다. 계약 직후, 중국의 계약 자체가 무효화되어 번복당하게 된 것이다. 이미 그리스의 경제 위기로 인해 그리스의 주식 시장은 붕괴 상태였지만 그나마도 시리자 당의 집권 이후 연일 폭락의 향연이 벌어졌다. 당시 매일 6~7%, 심하면 9% 이상씩 떨어졌다. 특히 2015년 1월 26일~1월 28일 3일간만 해도 무려 20% 넘게 폭락했다. 주식의 어마어마한 대폭락은 그리스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의 자산 이탈이 심해졌고 2011년 이후 그 빈도수는 높아졌다. 시리자의 급격한 반(反)긴축 성향이 IMF, EU등 채권자와의 갈등을 일으켜 자칫하면 그리스가 디폴트를 맞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수상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평소에 뉴욕타임즈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챙겨보았던 것이 주효한 것인지, 아니면 채무탕감의 명분을 쌓을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리스에 대한 최대 채권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기존 제재의 연장 자체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같이 반대하지 않았다 해도 EU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대응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으로 상징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에 대해서 추가제재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출한 것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러시아에서 그리스에서 요청만 해준다면 재정지원을 해줄수 있다고 밝히게 된다. 이에 대해 그리스의 증시는 다시 반등세를 탔고 러시아도 유가하락과 경제제재로 인해 자국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돈이 남아 돌았던 탓인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때와는 다르게 3700억 달러 수준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러시아가 몇 년 정도를 어렵게 나마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되기는 했다. 외환보유고가 떨어져 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러시아가 이미 경제 제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아는 EU 입장에서는 그저 그리스의 경제를 공략할 명분만 추가될 뿐. 시리자도 이와 같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재 연장에는 찬성했다. 그리스 금융위기 이후 IMF, EU, ECB (European Central Bank)가 구제금융을 하면서 언론에서 이 세 기관을 한 집단으로 묶은 것을 트로이카라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트로이카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보니까 국가부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프랑스에서 부채 관련하여 재협상을 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히게 되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도 그리스의 구제 금융 재협상을 지지했다. 그리스 정부로서도 일단 조금 온건하게 의견을 발표하여 일단 자금 융통에 대해 조금 트여 있는 상황에 있다. 물론 프랑스도 재협상에 응할수 있다고 했지만 그리스 정부에서 요구하는 채무 탕감은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금 융통이 조금 트였다는 얘기일 뿐이다. 프랑스도 그리스 지역에 투자한게 많긴 하지만 2012년 이후 부채 정리가 있었기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로이카와 독일이 요지 부동인 상황이기 때문에 파국은 시간 문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결국 채무탕감 요구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ECB와 독일이 그리스 시리자 정부에서 내놓은 국채 담보 안을 승인하지 않게 되면서 그리스 정부는 2015년 3월 디폴트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월 이전까지 시리자 정부가 ECB, 독일 정부한테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서 그리스 정부는 미국, 러시아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거론하면서 중국에서 돈을 빌려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프라스 총리가 리커창 중국 총리에게 초청 받았다는 것도 공개했다. 그리고 리커창 중국 총리는 차프라스와의 통화에서 시리자에 집권하자 마자 민영화를 취소한다는 식으로 발표하며 뒤엎으려 했고 피레우스 항 프로젝트를 복구하라 요구했다. 그래서 차프라스는 이를 보장하는 답변을 했다. 2015년 2월 12일~13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45.4%를 얻어 2위인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을 크게 앞서게 되었다. 아마도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듯 싶다. 재협상을 앞두고 그리스 곳곳에서 친(親) 정부 시위 또한 발생했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리스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다. 2015년 6월 5일로 예정된 만기까지 3억 700만 유로, 한화 약 3700억 원을 상환해야하는데, 이조차도 없다고 그리스 정부에서 나오고 있다. EU와 IMF가 제시한 긴축 재정은 여전히 실시하지 않으면서, 빚 갚을 생각을 전혀 안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현재 EU와 IMF는 그리스의 디폴트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시리자가 몰락한 다음 이후 선거를 기대하는 실정에 있다. 물론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 뒤, 할 수 있는 선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2015년 7월 5일, 치프라스는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로 진퇴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리스의 여론조사 결과, 지난달 말 카파 리서치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47.2%, 반대 33.0%로 나타났지만 자본 통제 이후에는 반대의 세력들이 시리자에 결집하면서 반대 54% 찬성 33%로 대역전을 일구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수상은 더욱 더 가열차게 반대표 결집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여론조사기관 GPO가 이날 발표한 결과에서는 다시 찬성 47.1%, 반대 43.2%로 뒤집하게 된다. 이는 여러모로 팽팽한 접전이었고 반대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그리스 의회는 여러모로 고민하게 된다. 결국 7월 5일 국민투표가 시리자 내각의 진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어이 2015년 7월 5일 2015년 그리스 구제 금융 국민투표에서 구제 금융 반대 61% 찬성 39%라는 엄청난 득표율 및 일방적인 득표차로 구제 금융을 부결시킴은 물론 시리자 정권의 연장에도 가볍게 성공하게 된다. 출구조사 때까지만 해도 52:48의 근소 우세로 점쳐졌던 것이 순식간에 뒤집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자 정권이 크게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EU 입장에서는 그리스를 자기들에게서 축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긴축에도 견디지 못했다. 이는 그리스 정부의 공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소위 기득권층의 복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상류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은 유럽과 IMF 간에 이해 관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EU측은 부자들이 탈세를 하면 뒤엎어 버리라는 식이지만 IMF는 부자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가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는 재산업화를 추진한 것도 아니다. 부패와 기형적 형태의 정치문화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시리자 정권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시리자가 그 일부에 기여했으며 시리자가 정권을 잡고 집권을 거듭하고도 개혁을 그 동안의 공약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중국은 주식이 폭락했었기에 한국 입장에서는 더욱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자국 시장에 돈을 엄청나게 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여력이 없고, 러시아는 저유가 및 낮은 천연가스 가격으로 인해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크림 및 돈바스 지역에 개입했다가 서방 제재로 인해 GDP가 절반으로 폭락할 정도로 허약한 상황에 있었다. 다들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인데 그리스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기본적으로 신용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만 그리스를 지원하겠다 말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 집권 정당인 시리자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첫 번째, 국민들의 반대 요구를 무시하고 긴축을 계속하는 것은 EU가 그리스 정부에게 재국민투표를 요구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보았다. 아일랜드도 처음에는 EU 리스본 협약에 사인할 때 국민투표로 부결되었지만, 2009년에 다시 투표를 하여 민주적인 정당성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정권이 퇴진한 뒤 악역을 중도파에게 넘겨 혼란을 주는 것, 세 번째, 그냥 나라가 망하는 길로 종합하여 세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결국 7월 중순, 시리자는 정당의 보존을 위해 고강도 긴축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렉시트를 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으나 그랬다가는 서드 임팩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알아서 붕괴 될 것이니 별 수 없는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2015년 8월 20일 시리자가 구제 금융 찬반으로 인해 분당되자 그리스 국회의 의회를 해산하고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2015년 9월 20일 조기 총선을 시행할 것을 정했으며 당시 여론조사에 의하면 시리자의 지지율은 급락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의 과반보다 못한 1당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나마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이 부진하여 1당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야당이 올곧게 건재했다면 이와 같은 경제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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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2
  • 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1979년 이란에서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란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당시 근본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 시아파 무슬림 정파 세력들에게 축출된 팔레비 왕가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을 필두로 하고 있었으며 장남인 레자 팔레비(Reza Pahlavi)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1980년 모하메드 국왕이 도피한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의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축출되고 그나마 망명 정부처럼 남아 있는 왕실의 제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망명 정부이기에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다. 더불어 1906년에 제정된 이란 팔레비 헌법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 받기 때문인 것도 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왕후로 알려진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이다. 그녀는 1967년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과 결혼했을 당시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왕후에 등극한 호화 대관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획득한 외화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었다. 국영기업 민영화,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인수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계 이란인 인사들이었고, 민영화하여 만든 제품과 수입들이 죄다 유럽과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실질적으로 이란 국내의 기업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을 진흥하고자 했다. 팔레비 왕조가 건립될 당시의 문맹률은 꽤 높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가 대대적으로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육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학교 시설이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무엇보다 선생들의 질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질 좋은 선생이 양으로도 많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이란에서 페르시아어가 완벽한 질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결국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선생을 돈 주고 영입할 수밖에 없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가난한 시골에는 외국 선생은 꿈도 못 꿨다. 부유층 자녀의 외국 유학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또한 상류층의 10분의 1정도만 유학을 갔고 대부분 파리에 머물렀다. 팔레비 왕조는 히잡, 차도르의 착용 금지했지만 테헤란과 이스파한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 투성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대다수의 하층민은 여전히 부르카 쓰고 이슬람 율법에 저촉 받고 살았다. 당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문맹율은 60%에 달했다.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테헤란과 이스파한과 같은 대도시에 국한된 얘기였다. 큰 도시가 아닌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란 여성들은 참정권이 뭔지도, 있는지도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의 여성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으며 문맹에다 전통적인 악습을 달고 살았다. 즉,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고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계층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으며 테헤란이나 이스파한에 살 경제력이 되는 여성들만이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히잡을 벗고 대학까지 다녔다. 이것이 몇몇 대도시와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란 영토 내에서 불균형 현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농지 개혁과 농촌 개발 문제였다. 이란에서 황무지는 국토의 60%를 차지했다. 이는 땅을 다지는 기술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근대화가 도시에 집중되었던 것도 있다. 팔레비 2세는 외국에서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초청하여 녹화하는 사업을 맡긴다. 그리고 이란 영토 내에서 토후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지방 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압수하고 이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는 팔레비가 계획했던 근대자본주의와 대단한 모순이 있었다. 지방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로 뺏어간 것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자율성과 사유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주들로부터 토지 강탈과 일반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의 분배 행위는 소련이나 중공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주로 행했던 사회주의성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즉각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빈민들이 중세 봉건적 시스템인 소작제를 철폐하면서 자영농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영농들의 상당수는 농촌 적자에 허덕이면서 다시 지주에게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분배된 농토들은 자영농들의 식구에 비해 그 소출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관개 시설을 이용해 농지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이란 전국에 분포한 관개 시설은 채 10개도 되지 않았다. 자금 또한 부족했다. 해당 자금들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횡령으로 인해 해외로 빼돌려졌다. 그래서 관개 시설조차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했고, 소작농 시절에 물리지 않던 세금, 종자세, 물세, 시설 비용등이 추가로 발생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영농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영농들을 인공적으로 무수히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주 밑에서 소작농들에게 제공하던 건강과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교육 같은 서비스도 없어졌다. 또한 미국과의 협정으로 인해 미국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최악의 상황이 된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당시, 혁명에 참가한 상당수가 이 때 고생하던 농민들이었다. 결국 일부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협동 농장에 매각하고 도시로 흘러왔으며 이들이 슬럼가를 형성하면서 엄청난 빈부격차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해지는 결과가 되었고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당시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자들이 이맘 성직자들이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던 모스크의 토지까지 팔레비 정부가 몰수하여 분배했기 때문에 엄청난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업에 써야 할 돈들은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 왕후의 개인 돈으로 유용되었다. 그녀는 해외에 재산을 상당수 빼돌렸으며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될 정도로 축적한 재산은 재벌급이었다. 파라 팔라비 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명화들을 수집했다. 파라 팔라비의 컬렉션은 현재 30억 달러(약 4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86년 9월, 이란 PARSI 1 TV에 갑자기 위성 방송이 11분 동안 전파를 탔다. 이 방송에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레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왕후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은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이 위성 방송은 미국 CIA가 기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은 40년 전에도 이와 같은 내부 혼란을 유도하는 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 같은 시기의 CIA는 이란 팔레비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미 의회에서의 폭로도 나오면서 한동안 팔레비 왕실과의 커넥션에 대한 청문회로 몸살을 앓았다.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들을 두고 근거 없다며 일축했다. 팔레비 왕가가 미국 땅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호메이니 혁명 이후, 팔레비 왕가와 함께 이란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의 애국적 행위 덕분이라고 했다. 팔레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40년 동안 미국은 이란에 끊임없는 제재를 가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란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내부 혼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움직여 외부적으로 전쟁, 무역적 대립 등으로 끊없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파라 팔레비 왕비나 레자 팔레비 왕세자의 근황을 끊임없이 TV로 송출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균열을 유도했다. 물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 방송했었다.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PARS TV, BBC 페르시안, PARSI 1 등 수십여 개나 되기에 이란 정부를 막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채널들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이 위성 수신기에 대한 단속이 심했지만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인터넷 매체들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라 이란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움직여 또 다시 외부적 혼란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고 있다. 팔레비 정권이 했었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 미니스커트가 어떻고, 히잡이 어떻고 등등, 매우 자유로운 사회였다고만 말한다. 그러니 팔레비 치하의 이란 사회는 매우 모순성이 가득한 사회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인 측면들이 혼재된 사회였으며 왕정 독재에, 기득권들만 배부르고, 부정부패와 비리, 횡령이 일상화 된 사회였다. 빈부 격차도 엄청났고, 그렇기에 근대화 개혁을 하려했지만 안하니만도 못한 사회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약에 팔레비 왕조 치하의 이란 사회가 매우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적인 사회였다면 1979년의 호메이니 혁명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메이니 혁명은 팔레비가 가진 수많은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중동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메네이 정권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팔레비 2세와 바꾸어 팔레비 왕조를 부활시키면 완전히 근대 국가로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하메네이 정권이 무너질리도 없을 뿐더러, 팔레비 2세가 돌아오는 것은 이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1
  • 이란의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공습
    이란은 3일 전, 16일 새벽 이스라엘의 하이파 발전소와 정유공장 등 에너지 인프라를 타격했다. 일부 전력망이 파손됐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CNN 방송은 이 날 "텔아비브가 밤새 이란의 집중적인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날이 밝자, 텔아비브의 거리는 공포와 혼란, 불안으로 가득 찼다(Tel Aviv was hit by a barrage of Iranian missiles overnight. As day dawned, the streets of Tel Aviv were filled with fear, chaos and anxiety)."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이란의 탄도 미사일에 피격된 공습 현장에서는 이스라엘 구조대원들과 군인들이 거리에 널려 있는 잔해를 치우고 있다고도 했다. 이와 같은 장면들은 불과 6일 전인 13일 밤,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이란의 피해 상황이 대대적으로 전해질 때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 전개로 나타난다. 서방의 외신들은 당시 파괴된 이란 핵 관련 시설과 군사 기지, 미사일 발사대 등에 관한 영상을 내보내며 이란 핵 전문가와 군 고위 지휘관 수십명을 제거했다고 이스라엘 측 발표를 집중 보도했다. 이스라엘이 드론을 미리 투입하는 '트로이 목마' 작전을 실시했고 이란의 방공망을 사전에 무력화했다 주장하는 전략에도 흥분했다. 하지만 이틀 후인 15일에는 이란의 대 이스라엘 방공망 교란으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방공 미사일이 부메랑처럼 지상으로 떨어지는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방공시스템 아이언돔이 돌파되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네타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테헤란 시민들에게 대피할 것을 촉구하자, 이란은 15일 밤 보복 공격을 예고하면서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안전을 위해 핵 및 에너지 시설과 방사선 연구 센터, 방사성 물질이 있는 위험 지역으로 가지 말라는 요청을 하면서 맞섰다. 이어 이란 최정예부대로 꼽히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IRGC)는 언론 성명을 통해 "주요한 목표물을 겨냥한 집중적인 공격은 이스라엘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스라엘 영토가 곧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니, 일찍 이스라엘을 떠나라(The intensive attacks on key targets will continue until the Israeli regime collapses. Leave Israel early, as Israeli territory will soon become uninhabitable)"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은 이제 겨우 6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서방 언론과 국내 언론은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와 똑같은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뉴스 보도에 의하면 이란은 곧바로 항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격으로 인해 이란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거센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CNN 등 미국 언론에서는 이스라엘이 초기 판세를 잘못 짚었다며 오류들을 정정하는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언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를 하기 때문에 수정을 대체로 잘 하지 않는다. CNN 방송은 16일 퀸시 국가대응전략 연구소 부소장인 트리타 파르시(Trita Parsi)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은 이란의 군부 지도부들이 제거한 이후, 이란의 보복 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분석했다. 파르시 부소장은 CNN에 이스라엘은 이란 군 최고 지휘부 제거에 성공한 이후, 이란의 군 지휘 체제를 흔들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란의 미사일, 당시 러시아 언론에서는 극초음속 미사일로 분류학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3중, 4중 방공 시스템인 아이언 돔을 돌파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같은 결과로 인해 텔아비브 거리는 공포와 혼란, 불안 등으로 소요 사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블룸버그 도 15일에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란 미사일의 파괴력에 충격을 받았으며, 적이 보유한 미사일 규모를 생각하면 그같은 공격이 몇 주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이 전쟁의 끝을 알 수 없다(Many Israelis are shocked by the destructive power of Iranian missiles, and given the size of the enemy’s missile arsenal, they fear that such attacks will continue for weeks, so there is no end in sight to this war.)."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발언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극우주의자로 알려진 요아브 리모르(Yoav Limor)는 자신들의 매체인 이스라엘 하욤(יִשְׂרָאֵל הַיּוֹם) 기관지의 기고에서 이스라엘은 초기의 성공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장기전에 휘말려서도 안 된다라고 언급하며 빨리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크네세트의 집권여당이자 원내 제1당인 리쿠드당의 기관지인 "하욤" 또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 이란은 서로 더욱 강력한 '보복 공격'을 예고했다. 이스라엘은 16일 생방송 중인 이란 국영 방송국을 폭격했다. 이에 여성 앵커가 스튜디오에서 급히 대피하는 생생한 영상이 올라왔다. 이스라엘의 프로파간다용 홍보 효과로는 최상의 영상인 셈이다. 앞으로는 발전소와 정유 시설 등 에너지, 사회 인프라를 파괴하는 공습과 피해 상황들은 영상으로 한꺼번에 공개되지 않고 자신들이 유리한 국면일 때 조금씩 공개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힘들다. 어느 쪽에 유리한 지에 대한 관건은 경제적, 군사적 잠재력에 따라 달려 있다. 누가 더 많은 미사일 보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보충할 능력이 있는지에 군사적 우위 능력이 좌우될 것이다. 그 다음의 관건은 동맹국의 지원이다. 미국은 이미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공중 급유기 수십 대를 유럽 측으로 보냈다고 밀리터리 워치 매거진(Military Watch Magazine )이 지난 16일에 보도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란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정'을 추진 중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할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이미 앞서 필자의 수많이 포스팅과 칼럼에서 밝힌 바 있어 생략한다. 하지만 중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이란에 미사일과 방공 시스템을 보내 지원하고 있다. 실제로 몇 대의 대형트럭들이 중국에서 출발해 파키스탄 국경을 통과해 이란으로 들어오고 있는 장면들이 포착되었다. 따라서 중국은 현대 공중전에서 자국 무기를 시험해 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중국이 이스라엘에서 운용 중인 F-35 전투기와의 교전을 통한 자국 전투기의 성능 확인을 위해 이란에 전투기를 제공할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다. 네타냐후는 이란인들에게 현 정권을 전복할 것을 대놓고 선동했다. 이란의 보수적인 제정일치(祭政一致)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에 호응해 반 정부 시위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란 현 정권에 불만을 가진 세력보다 현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반 정부 세력들에게 하메네이 정권의 전복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는 최고 지도자의 대국민 장악력이 더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고 피해를 입은 이란인들이 하메네이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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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1
  • 현재까지 살아있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국왕은 아테네 근교 프시키코에서 1940년 6월 2일에 탄생했다. 그는 출생 4개월째 되는 해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그 다음 해,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략하며 유년기를 피난지인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1946년에 귀국하였으며, 1947년 아버지 파블로스 1세(Παύλος I, 1901~1964, 재위 : 1947~1964)가 즉위하면서 태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스포츠맨이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역대 올림픽에서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가 금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이 폐지돤 이후에도 IOC 명예 위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4년부터 노르웨이 국왕이자 먼 친척인 하랄 5세와 함께 국제요트연맹 공동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물론 하랄 5세 역시 요트 선수로 활동했지만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8촌, 그 왕비인 아네마리와는 6촌관계에 있다. 그는 1964년 3월 부왕이 암으로 승하하자 즉위하였으며, 9월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콘스탄티노스가 국왕이 된 시기에는 그리스 정치에 있어 좌우 대립이 매우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즉위 한 달 전 열린 총선에서 11년 동안 그리스를 이끌어 오던 우파 내각이 패배하고 중도연합당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가 총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국왕과 나이 많은 수상이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65년 7월 그리스 군부 내 우익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움직임이 있어 국방 장관의 퇴임을 결정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오히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 총리를 해임하고 같은 당 소속의 요르요스 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하자, 그리스는 그리스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양파 간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을 공공연히 부정하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졌으며 국왕이 총리를 지명하면 중도연합당이 장악한 의회가 거부하는 일이 빈번하여 왕정과 내각의 골이 깊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군부의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은 좌파들을 혁파해야 한다며 1967년 4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3일 근왕파 장교들과 동맹을 맺고 역으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쿠데타가 실패하게 되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일단 북부 그리스의 카발라로 파천하였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파파도풀로스는 왕을 추방했지만 측근인 요르요스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왕정을 없애지는 않았다. 이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후 왕당파는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여 반(反) 군사 정권 투쟁을 벌여 정권과 맞서게 된다. 결국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7월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며, 이로써 콘스탄티노스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이 퇴진된 이후 새로 들어선 카라만리스 총리의 과도 정부는 군사 정권의 왕정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을 무효화했지만 그렇다고 1952년 제정된 민주 헌법으로 복귀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왕정 복고 국민 투표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TV 연설로만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결국 7:3으로 왕정 복고가 부결되면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위에 복위하지 못했고, 1975년에 헌법이 제정되어 현 제3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1946년에 벌어진 국민 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유지된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입국 금지를 당한 채, 돌아오지 못하고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으며 당시 서방 정치인들로부터도 '멍청이', '암덩어리' 등의 비난을 들으면서 생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81년 2월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인해 당일치기 방문을 했었고, 1993년 여름에 미초타키스 총리의 배려로 일가족과 휴양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결국 굴복하며 공화정을 인정했지만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에 대한 여론은 매우 냉담했기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2세 총리 시절인 1994년에는 아예 국적까지 박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유럽 왕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리스 정부에서 그에게 적법한 성씨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국적을 부정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 왕의 성씨가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써야 할 때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가문 이름이나 영지의 이름이 성으로 사용되는게 유럽 왕실의 관례였다. 또한 왕실 재산과 관련해서도 그리스 정부와 소송을 벌였는데 그리스 정부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사람이 소송하는 것을 부당하다면서 소송을 받아주지 않으며 그의 갖은 수모를 주었다. 결국 그는 소송을 위해 Κωνσταντίνος της Ελλάδας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리스의 법원에서는 그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 인권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소송 끝에 2000년에 그리스 내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인정받게 된다. 자산은 그리스 정부의 소유로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 정부가 보상금을 옛 왕가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 정계는 이와 같은 보상 과정에 대해 비웃었는데, 이는 그가 탈세한 금액이 많다고 주장한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Constantino de Grecia (그리스의 콘스탄디노스)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에서 외교관의 여권을 발급받아 IOC 위원의 자격으로 입국하게 된다. 덴마크는 덴마크 왕가 후손에게 자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때 여권을 발급해줄 당시 성이 데그레시아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 그리스 방식으로 콘스탄디노스 데그레치아스(Κωνσταντίνος Ντεγκρέτσιας)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아테네 올림픽 당시의 방문을 계기로 그는 그리스 정계와의 사이가 개선되었고 이후 런던과 그리스를 왕래하다가 2013년에 영구 귀국을 허락받아 그 뒤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포르토 헬리(Πορτοχέλι/Porto Heli)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그리스의 경제 위기 등 현재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지자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옛 왕실에 대한 호감이 좀 높아졌다.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그리스의 경제적인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견실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로 왕정이 복고되기까지 갈 정도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있다보니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력도 있고, 2021년 말-2022년 초에는 폐렴 및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 최후의 국왕이지만 군사 쿠데타 이후 추방을 당해 해외 여러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갖은 수모를 당했고 조국인 그리스에서 조차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수모와 비아냥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스에 돌아와 현재 조용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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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0
  • 남인도로 들어간 드라비다 족과 고도의 남인도 문화에 관하여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 인들이 B.C 10세기경에 청동기 문화를 북방에서부터 파생하여 발전시켰다. 그리고 B.C 3세기경에는 북인도로부터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농업을 더욱 발달시켰고 남인도 아열대 기후의 기름진 토양에 벼농사를 짓고 곳곳에 도시도 건설하게 된다. 북인도 지역에서 쿠샨 왕조가 발현되기 전, 데칸 고원 지역에서는 아리아 계통의 안드라(Andra) 족이 사타바하나(Satabahana) 왕조를 세워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해상 무역을 발판으로 삼아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금이나 은으로 만든 화폐를 널리 유통시켰다. 그리고 대다수의 드라비다 족과 타밀족을 흡수하여 인도 남부와 북부의 문화를 서로 연결하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지역에는 안드라 족의 왕조가 오랫동안 통치했으며 점차 아리아 인들에게서 주도권은 드라비다 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데칸 고원 남쪽 인도 남부에는 촐라(Cholla), 체라(Chera), 판디아(Pandia) 왕조가 건국되어 서로 세력 정쟁을 통해 정치, 문화적으로 발전하였다. 촐라 왕조는 면직물을 동남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지역에 수출하여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으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스리랑카의 싱할라 족과 슈리비자야(Shurivijaya)의 해군을 격퇴하면서 벵골 만의 해상을 장악하고 전체적인 인도양 바닷가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다. 체라, 판디아 왕조도 촐라 왕조에 이어 후추와 상아, 진주와 보석, 면화 등을 각지에 수출하며 인도양 해상 로를 장악하였다. 더구나 B.C 1세기 무렵에는 로마 제국과 무역을 한 기록이 있으며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인도 지역의 왕조들은 북인도 왕조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어 드라비다 족 고유의 정치 체제를 마련해 갔으며, 전통적인 무속 신앙을 믿고 자신들만의 장례 풍습을 유지하였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아 전통 신앙이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뱀이나 코끼리 같은 부족의 토템들을 숭배하였고, 카스트 제도가 미약하여 북인도와는 사회 생활의 모습 자체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성행하였지만, 다른 신분과 통혼이 가능하여 새로운 신분이 탄생하기도 하였고 카스트 제도로 엄격했던 북인도와는 달리 남인도는 신분제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여성의 지위가 북인도보다 훨씬 높았으며 여성이 사회와 종교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고, 수티(Sutti)의 풍습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타바하나 왕조 때에는 여성들이 행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가정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조사된다. 따라서 남인도는 현재도 카스트 제도가 통하지 않은 지역이기도 한다. 이러한 남인도 앞에 놓여 진 바다는 오래 전부터 남인도를 지배한 드라비다 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아라비아 해를 거쳐 서아시아와 이집트로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역하기 위해 배를 건조했다고 하며, 인더스 문명 시절에서부터 나타나는 석조 인장이 서아시아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B.C 6세기에 남인도 상인들은 금, 은 같은 보석을 찾아 미얀마와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얻은 금속과 향나무, 상아 등을 가지고 페르시아나 중국 상인들과 거래하기도 하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 무역은 대부분 남인도를 거쳐 갔는데, 이는 인도가 자체의 물자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동서 무역 해상 항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외부 문화에 의해 옷감 짜는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염색 기술도 개발되어 인디고(Indigo)라는 물감이 멀리 유럽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인도의 면화는 세계적인 수출품이 되었으며 현재에도 남인도의 면화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남인도의 무역에 대해 북인도 불교 석가모니에 관한 기록들에는 남인도 드라비다 인들의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를 재패하고 있다는 설명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이 드라비다 인들의 해상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로 서술되고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후 2세기경 북인도의 쿠샨 왕조는 남인도 지역을 무역 기지로 삼아 후추, 진주 등을 로마에 수출하였는데, 로마가 이러한 수출품의 가격을 정하고 이를 교역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고충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해상 무역으로 인하여 남인도 문화는 북인도 만큼이나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남인도 국가들은 활발한 상업적인 교역과 농경의 발달로 인해 오직 농업 중심으로 일관한 북인도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꾸준히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드라비다 족 고유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인도양 무역의 중심으로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촐라 왕조는 몇 차례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였지만, 여러 차례 남인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드라비다 종족 체제로 전환했다. 특히 1세기 촐라 왕조의 카리칼란(Karikalan) 왕은 북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외래 학문을 장려하고 남인도의 학문을 융합하여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다에 면해 있는 국가들과의 문물 교류도 활발히 하여 재정을 확충했다. 후일 촐라 왕조를 여행하였던 중국 당나라의 현장 법사가 남인도를 극찬하여 “이곳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널려 있었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9세기에 다시 부활하여 성장한 촐라 왕조는 10세기경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맞아 이후 약 200년간 강성한 문화 대국의 모습을 보이며 유지했다. 특히 드라비다 족 고유의 언어인 타밀어로 서술된 타밀 문학이 이 시기에 발전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양 교역의 또 다른 중심지인 스리랑카에서는 B.C 6세기에 북인도의 싱할라족이 실론 섬으로 들어와 첫 왕조를 건국했다. 그러면서 B.C 3세기 무렵에 불교를 받아들여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apura)를 불교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면서 나름 드라비다와 대치되는 강한 나라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싱할라 왕국은 1세기경에는 그리스-헬레니즘 세계와 교역하면서 알려졌고, 중국 기록에도 사자국(獅子國), 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드라비다와의 장기간 남인도에서의 세력 정쟁은 싱할라 왕국의 입장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이게 되었고 결국 싱할라족의 거주지는 스리랑카로 알려진 실론 섬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실론 섬은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해, 지중해로 연결되는 동서 무역의 핵심 고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드라비다에 편입되지 않고 나름 독립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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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0
  • 말레이시아 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그리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말레이시아 화교)
    말레이시아 내의 인도인 공동체는 고대 촐라 왕조 시절부터로 추정될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말레이인들과 혼혈하면서 문자와 힌두교, 불교가 전파되고 말레이어에도 상당수의 산스크리트어 어휘가 유입되었다. 다만 당대에 종이를 대신해 쓰였던 패엽이 장기보존하기에는 좋지 않다보니 역사적인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이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와중에 고아(인도)에서 많은 인도계 카톨릭 신도들이 유입되고 인도계 용병들이 정착하면서 말라카 반도의 소수민족 크리스탕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인도계 대량 이주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말레이시아에 주둔하던 영국군 중에는 시크교도 펀자브인 등 인도인들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한 대신 인도인 노동자들(타밀족)을 고무 농장에서 저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레이시아에 데려오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인 이민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가 독립하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계 이민자들 역시 말레이시아의 국민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 말레이인들은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부미푸트라 정책을 통해 이들의 권리를 다소 제한하였다. 말레이시아 독립 초창기 시절에는 말레이인 상당수는 농민이고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이 도회지의 상권을 장악한 상황이라 교육 격차와 소득 격차가 심했다고 한다. 한편 영국이 중국인들을 이민으로 받아 채우기로 하자 현재의 말레이시아인 말레이 반도와 부속도서인 싱가포르, 페낭, 사바 일대로 중국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특히 19세기부터 이민이 활발하였는데 이는 중국 내부의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1790년대 3억 명이던 청나라 인구가 1850년 무렵 4억 2천만 여 명으로 급증하면서 쌀 가격이 폭등하였고 인플레이션 효과로 실질소득이 줄어들었다.납세 수단인 은과 관련하여 청나라 조정은 동전을 평가절하하면서 농민들의 생활 조건은 더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소작농 상당수가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영국령 말레이 반도 식민지가 태평양 전쟁 연간에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이 때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화교들을 탄압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화교들에 대한 학살도 벌어졌으며 위안부로 끌려간 화교 여성들도 많았다. 현재에는 일본과의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고 일본 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겉으로 반감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소개하여 일본의 역사적 만행을 잊지 말자고 가르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발전 과정으로 볼 때, 동남아시아 특유의 복합 사회의 특성을 나타냈다. 우선 말레이인 국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오랫동안 중국계 말레이인, 즉 말레이 차이니즈들이 인구 60% 정도의 다수를 차지했다. 애당초 도시로서의 콸라룸푸르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처음 개척했던 곳이다. 다만 최근에는 말레이계 비중이 높아져서 지금은 중국인 혈통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45% 정도로 43% 정도의 말레이인보다 약간 우위에 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비슷한데 대부분이 복건성과 광동성, 해남성 출신들이며 주로 민남어, 광동어, 조주어, 객가어 등을 가정에서 사용하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상호 간에는 표준 중국어를 써서 소통하며 밖에선 영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표기는 간체자로 표기한다. 인도인 혈통인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은 10%으로 상당수이며 이들은 대부분 타밀어를 사용한다. 그밖에 유럽 혈통인 영국인 잔류 백인들, 한국인, 일본인, 아랍인들도 소수지만 있다. 이들은 저마다 역사적으로 거주구역을 달리하고 종교 및 언어, 직업, 생활 수준 등에서도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공업 종사자는 중국계가 압도적으로 많고 있으나 하급 관리 및 경찰, 군인 등은 말레이계, 택시 등 교통운수 종사자는 인도계가 많다. 그리고 종교에서도 불교나 기독교를 믿거나 무종교인 중국계,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 100% 무슬림인 말레이계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이들 중국계 말레이시아 화교들을 이용해 현 중국 정부는 말레이시아 내에서 일대일로 사업을 재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말레이 반도 동부 해안 철도 연결(ECRL)" 프로젝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건설이 확정되었지만 비용 문제 등으로 미루어오다가 2020년부터 첫 삽을 떴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2023년부터 현 철도 건설 사업이 재개되었다. 2024년에는 양국이 운영 및 유지 보수를 위한 합작 회사를 설립하면서 비용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말레이시아 레일 링크(Malaysia Rail Link, MRL)가 ECRL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중국 교통건설 ECRL(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ECRL, CCCE)과 운영·유지보수를 위한 합작회사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MRL은 말레이시아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ECRL 프로젝트 시행을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MRL과 CCCE는 이번 합작 회사에서 각각 지분 50%를 보유하며, 운영 적자에 대한 책임을 공동 부담할 예정에 있다. 이 방식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재정적 위험을 줄이고, 프로젝트 운영을 위한 공동 책임을 강화하고 있으며 MRL은 ECRL의 모든 자산을 완전 소유해 국가 이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제 파트너의 전문성을 활용할 계획에 있다. 참고로 ECRL 프로젝트는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포트클랑과 콸라룸푸르를 동해안 쿠안탄, 트렝가누, 코타바루 등으로 연결하는 총 연장 665㎞ 노선 건설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 공정률은 77%로 나타난다. 이 중 코타바루에서 콸라룸푸르 곰박 통합 교통 터미널를 연결하는 구간은 2026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27년 1월부터 운행 개시할 예정이다. 나머지 구간은 2027년 12월 완공 될 전망으로 앞으로 말레이시아 전 구간이 철도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기회를 말레이시아 내 중국 정부의 투자와 사업에 계속 잭팟이 터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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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 이란-이스라엘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유사성 : 가짜 프로파간다 정보로 인한 심리전의 강화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니 마치 2022년 2월 24일부터 발생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판박이로 돌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프로파간다로 인한 심리전이다. 푸틴 대통령이 말한적도 없는 3일만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겠다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똑같이 돌아간다.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내용들에 의하면 현재 테헤란 시내 ATM은 사이버 공격으로 전부 마비, 러시아 대사관은 철수 명령 내려와서 철수 중이라 한다. 근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우크라이나의 사이버 공격으로 ATM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이미 Swift 제재도 들어간 상황에 사이버 공격이 계속되어 러시아의 국방부도 해커인 "어나니머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키예프에는 러시아군의 공습과 진입이 시작된다며 각 국 대사들과 체류 국민들을 대피시켰다. 당시 러시아군은 수도 키예프에서 불과 34km 떨어진 이르핀과 부차에 와 있었다. 그러니 키예프 소재 각국 대사관과 체류 국민들을 부랴부랴 대피시킨 것이고, 당시 부차에서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가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프로파간다를 오지게 뿌려대서 부차는 러시아 학살 피해의 성지(聖地)로 둔갑했다. 그리고 판박이로 이번에는 미군의 공중급유기와 일부 항공기 40대가 서쪽으로 이동했고 20대가 이스라엘로 향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 B2 폭격기 수대가 이란 핵시설 타격을 위해 초대형 벙커 버스터 연속 폭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과 키예프 인근 부차와 이르핀까지 진군한 러시아군의 위협과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미국이 직접 B2로 폭격하려는 상황도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미군 폭격기로 러시아 돈바스와 모스크바를 직접 타격하려고 하는 모습을 전쟁 초창기 때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미군 폭격기로 아무것도 못했다. 인도-태평양 미군 기지들에게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되어 경계 태세가 강화된 것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대량으로 중동에 빠져나간 상태에서 중국군이 어찌 움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태평양의 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타이완 (대만)을 상대로 중국이 어떤 작전을 벌일지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도련선을 통과하기도 했던 중국 함대가 어찌 나올지 미국조차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의식한다면 FPCON 레벨이 알파에서 브라보로 상향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테헤란 영상들 보면 현재 소개 명령으로 고속도로가 장난이 아닌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공격이 심화될 때, 전쟁 초, 이웃 국경으로 고속도로와 기차가 넘어갔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난민이 되었다. 러시아 또한 부분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군대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탈출하는 러시아인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고속도로의 정체가 장난 아니었다. 결국 이것도 유야무야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란의 내부 시위도 이스라엘 폭격과 함께 격화되는 중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는 반전 시위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알렉세이 나발니를 중심으로 반전 시위를 했고 이 또한 격화되어 푸틴의 목숨이 오늘 내일한다고 프로파간다 방송을 한 것도 미국을 위시한 서구와 우크라이나였다. 과거의 왕정시대의 자유로원던 이란의 모습 비디오들이 엄청 방류 중이라는데 러시아군이 패배하는 방송만 열심히 띄운 것도 미국이나 서구, 우크라이나의 합작품이다. 다들 그거보고 세계 2위의 군사력이 별거 아니라며 한국인들은 떠들어 러시아를 우습게 보았고 러시아의 무력이 쓰레기이자 그 무기들이 거품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냐고 떠들기도 했다. 탱크와 전차가 다 작살나서 없다고 보고한 것도 그들이고 냉장고의 부품을 뜯어 탱크와 전차에 사용했다고 했던 자들도 그들이며, 멀쩡히 있던 러시아의 마트가 사재기로 물건이 없어 난리라고 거짓 보도했던 자들도 그들이었다. 그들의 프로파간다로 인해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망할 줄 알았을 것이다. 푸틴이 참수되고 러시아는 내일이면 당장 해체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이란-이스라엘 전쟁의 프로파간다에 또 다시 데자뷰로 나타나고 있다. 그 때도 내일이면 러시아가 망할수도 있다고 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결국 러시아의 절대적인 우세로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고,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네타냐후는 서구 유럽과 미국에게 도와 달라고 손 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역전이 되었는지 내일이면 이란이 망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란이 같을 수 없겠지만 이란은 자원부국에 8,5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동안 무기를 축적해왔고, 최근 이란이 벌인 전쟁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 러시아-중국-북한-시리아와 가까워지면서 그들과 연계를 통해 전략, 전술, 무기 등을 착실히 축적해왔고, 미국의 공격을 받을 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40년 넘게 훈련을 거듭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왔던 이란이다. 그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란은 러시아처럼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나라다. 아마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의 데자뷰처럼 남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초기, 필자의 분석을 두고, 러뽕이니, 러시아 간첩이니 하면서 믿지 않고 오히려 조롱과 조소를 했던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몰리면서 러시가 이기고 있는 것이 보이니 일제히 입을 함구하고 있다. 필자는 필자의 분석이 옳았다는 것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증명했고, 이번에도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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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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