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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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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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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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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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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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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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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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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그레이트 게임은 현재 역사 용어가 아닌 정치 외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는 183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하기도 하면서 1905년 러일전쟁까지를 일컫기도 한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시아 남부 지역을 노리자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가운데 비롯되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1842년 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진격했다가 역습을 당해 패배하여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 등 1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와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고 이 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리전 상대로 일본이 나서게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맺어진 동맹인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인도와 호주, 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했던 셈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러시아하고도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 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서방 나토 세력까지도 가세해 거대한 서구 연합이 생성되었다. 이 동맹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그 상대는 러시아였다. 그리고 여기에 새롭게 중국이 가세했으며 중립을 지키던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아프리카까지 러시아와 중국과 가까워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사우디아라비아 및 이란, 터키로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밀착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쿼드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지만 최근 인도는 친러로 돌아섰다. 또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원래 중국이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쿼드 동맹과 성명에서부터 제3차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2021년 9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4명의 정상들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1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4개국 정상들은 회담 이후 성명에서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4국이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는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2020년 카슈미르 산악 지대에서 영토 분쟁에 있던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의 힘을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당시 성명에서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 전문가 누구든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성명에서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성명에 의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고 하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하며 북한을 압박하기도 했다. 성명에서 나온 미얀마 관련된 것에서 미얀마 군부로 하여금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 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에 대한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했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 북한 정책 기조가 될 것임을 알렸다. 한국은 당시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19세기 말 그레이트 게임 때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러시아까지 이 분쟁에 끼어들어 우리 한국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 그 때는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지만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되면서 1885년 4월 영국은 조선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거문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와 같이 중립화 및 완충지대로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남쪽 바다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兪吉濬)이었다. 당시 유길준은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길이라 주장했다. 당시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 · 프랑스 · 일본 · 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절이었기에 조선의 중립화론은 청나라가 조선을 종속국 상태로 놓아두려 했었던데다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남겨두려 했었기 때문에 지식인의 주장 중 하나로 단순하게 인식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 세력이 청나라를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했고, 해양 세력이 영국을 대신해 일본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외교, 군사적인 역량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두 세력이 1895년부터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으며 이는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시 고종은 1897년에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으며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대로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바뀐 현재, 우리는 러시아, 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한반도는 이들 국가들의 지리적, 지정학적 요충지로 설정이 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해당 국가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아래에 온통 날카로운 못이 박힌 대지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거나 다름없는 형세인 것이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러시아가 끼어들면서 달라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 중, 러 구도가 되고 한, 미, 일 구도로 굳어지고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동 사태들이 해결된 이후에는 그 또한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을 주도로 한 시아파, 사우디 주도의 수니파, 그리고 이스라엘이 버티는 중동 사태를 이후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나 국제정세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크게 변할 수 있는 변수가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국제관계의 예측은 50:50의 확률이다. 그 50% 확률의 국익을 하나라도 더 취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행동이 바로 외교(Diplomacy)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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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이란의 핵 물질, 미국의 벙커버스터 투하는 "약속 대련"일 가능성 배제 못해
    지난 21일, 미국은 벙커버스터를 투하해 이란의 핵 시설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특히, 산악지대에 위치한 포르도 지하 핵시설을 집중 타격했다. 포르도는 고농축 우라늄 생산기지로 이란 핵 프로그램의 핵심 중의 핵심인 곳이다. 핵 우라늄탄을 만들려면 천연 우라늄에 0.7% 정도 들어있는 U-235 (원자량 235인 우라늄)을 90% 이상으로 농축시키는, HEU 제조 기술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자연 상태에서 99% 이상을 차지하는 U-238(원자량 238인 우라늄)은 핵 분열을 일으키지 않아 무기나 발전용으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U-235를 분리해 농축시키는 장치가 이란이 가지고 있는 원심분리기로 하는 것이다. 1분당 수만 번을 돌아가는 초고속 원심분리기 내부에 우라늄 가스를 주입하고 원심력과 무게의 차이를 이용해 U-235를 분리해낸다. U-235를 2∼3% 정도로 농축한 LEU(저농축우라늄)는 경수로의 원료로도 사용될 수 있다. 문제는 LEU를 원심분리기에 넣어 농축 과정을 반복하면 추가적인 기술이나 장비 없이도 HEU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일단 원심분리기 설비를 갖추면 우라늄 농축의 목적이 경수로 가동인지, 아니면 핵무기 제조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라늄을 저농축할 수 있으면 이를 반복해 고농축 우라늄을 만드는데 문제가 없다. 국제적으로 핵 실험이 금지된 상황에서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무기 개발이 훨씬 더 위협적 이유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의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플루토늄은 반드시 원자로의 핵분열 과정을 거쳐야 구할 수 있다. 정제 우랴늄으로 핵연료봉을 만들어 원자로 안에서 핵 분열을 시키면, 그 과정에서 U-238이 중성자와 반응해 플루토늄으로 변하는데, 추가로 핵연료봉을 재처리해야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것이다. 통상 우라늄 탄두 1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HEU 20㎏ 정도는, 신형 원심분리기 2,000대를 완전 가동할 경우 6개월이면 뽑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원심분리기 설치에 필요한 공간이 대당 1㎡를 넘지 않는데다 지하 깊숙이 숨기면 찾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 핵실험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과 단순한 폭발 구조 및 엄청난 위력은 핵무기를 소유하고 싶은 국가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북한도 그러했고 이란도 그러했다. 실제로 고농축 우라늄탄은 주로 '포신형' 구조의 핵무기로 제작된다. 포신형 핵무기의 경우, 우라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핵 물질이 핵 분열을 일으키기 위한 최소 질량인 임계질량을 넘지 않게 배치한 다음, 폭발시킬 때 고성능 폭약을 터트려 포탄을 쏘는 것 같이 두 핵물질이 합쳐지게 만들어 임계질량을 넘게 하는 방식이다. 임계질량이 넘게 되면 U-235가 연쇄 반응을 해 중성자를 방출하고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내는 핵 폭발이 일어난다. U-235 1g이 완전 핵분열을 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석탄 3톤을 태울 때 나오는 에너지와 유사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적용하는 핵물질의 의미 있는 양은 플루토늄 8㎏, 우라늄 25㎏ 정도로 이 정도의 양이면 조잡한 정도의 핵무기를 제작하는게 가능하다. 그러나 IAEA에서는 고농축 우라늄 15㎏으로도 충분히 우라늄탄 1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라늄은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다. 그런데 천연 우라늄의 방사능은 낮은 축으로, 천연 우라늄 연료를 원자로에 장전하기 전까진 차폐를 안 하든가, 엄청 얇은 정도로만 한다. 반면 농축 우라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방사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물질을 건드리거나 손상이 가게 할 정도로 가공할 위력이 가해진다면 자연 방사선보다 엄청난 양의 방사선에 피폭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B-2 폭격기를 동원해 벙커버스터를 작렬시켰다. 이 작전이 트럼프가 말한 것처럼 성공했다면 투하된 곳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대폭발과 더불어 대기 중에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노출될 것이다. 문제는 아직 이란에 그와 같은 보고가 없다. 분명 우라늄 농축 핵 시설 타격에 성공했다면 벌써 방사능 천지로 덮여 있어야 하는데 이란에 그런 상황이 포착되지 않는다. 아마 트럼프가 폭격한다고 떠들고 있을 때, 다른 안전한 지역으로 우라늄 농축액과 시설 및 설비들을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에 "약속 대련"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튼 이란과 미국의 "약속 대련"이 맞다면 이란의 다음 대응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란은 미국에 대대적인 보복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 보복 수준이 경미한 부분에 그치거나, 이 과정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 "약속 대련"이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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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공동체 속의 자유
    200년 전 미국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1830년대 미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토크빌의 글에서 그 당시의 삶을 그려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운영에 관여하고 또 그것에 대해 토의하는 것은 미국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그들이 아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물론 토크빌의 글이 그 당시 프랑스의 귀족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미국을 과도하게 미화했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토크빌이 본 미국은 평등한 사회였고, 자유와 자치가 함께 어우러진 사회로 미국 사회를 그리고 있었다. 토크빌에게 자유란 개인을 위한 사적 자유를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마을 자치를 염두에 두는 공적 자유였다. 최소한 이웃과 함께하는 자기 실현을 꿈꾸는 자유였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으로서 트럼프가 보여 주는 행동은 200년 전의 미국보다 한참을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의 50년 전 모습도 어쩌면 200년 전의 미국의 모습과 유사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내가 살았던 김천이라는 지방 소도시는 개인보다는 마을공동체 중심의 사회였다. 그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다. 어머님은 이웃집의 밥그릇 숫자까지 모두 알고 계셨을 것이다. ‘가메실’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컸다. 집에 감나무가 12그루 있었으니 그 규모는 짐작이 될 것이다. 감을 수확하는 시절에는 이웃들과 함께 수확하고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물론 나도 이웃의 잔칫날에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그 집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동네 뒷동산에 올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면서 놀았던 기억, 동네 큰 나무에 새끼줄로 그네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힘차게 그네를 타는 모습들, 마을 공동 우물터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모여 빨래하던 장면들이 기억에 떠오른다. 마을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여, 요즘은 공동체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는 개인 중심의 자유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자연과학의 발달이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새로운 개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홉스와 로크, 에담 스미스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홉스가 자기 생존권을 강조했다면, 로크는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했고, 스미스는 시장에서의 자유를 강조했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고전적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점차 짙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소수의 자유 실현이 대다수의 부자유라는 자유주의 역설이 그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부는 점차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가난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두어야 했다. 그로부터 자유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자유주의가 그 무렵 등장했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20세기 초 영국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개혁정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이론이었다. 홉하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자유주의가 외적 억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했다면, 사회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주장하며 사회적 책임과 협력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로 보았다. 그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자유주의가 지나친 이기주의로 변모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사회주의 역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홉하우스는 사회를 유기체로 보았다. 개인과 사회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사회 정의는 개인의 노력에 따른 성과는 개인의 몫이지만, 사회가 만들어 낸 부는 사회구성원 공동의 것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개인의 성과에는 개인의 노력 외에 사회적 몫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디.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은 당연히 인정하지만, 그 속에는 사회 공동체의 기여도 있으니 그 기여분은 세금으로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의 이론은 사회복지의 확대를 통한 소득 불평등을 확대하자는 이론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이론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사회적 자유주의는 고전적 사회적 자유주의로 일컫는다. 이런 자유주의의 변천사 중 아주 작은 한 부분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는 사회 속에서의 자기 실현이다.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우선은 이사야 벌린이 말한 소극적 자유, 즉 외부의 방해가 없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개인은 사회 속에 고립된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다.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인이다. “개인을 파편화된 개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관계 속의 개인으로 보는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180도 달라진다. 나는 불교의 연기설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러한 관계 맺음의 조건은 수시로 변화하기에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교는 미물의 생명도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시대는 세계관에 대한 페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서구 중심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관계중심적 세계관으로의 변화이다. 그 속에서 고전적이지 않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자유주의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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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
    호르무즈(Hormuz) 해협은 북서쪽의 페르시아 만과 남동쪽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만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북쪽에는 이란이 있고 남쪽에는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있다. 그러나 가장 좁은 곳의 폭은 54km이며 해협의 이름은 이란 측에 존재한 황무지 섬인 호르무즈 섬에서 유래했다. 본래 호르무즈, 혹은 오르무스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조로아스터교의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페르시아어로 '대추의 땅'이라는 뜻, 혹은 그리스어로 '만'이란 뜻이라는 설이 있다. 이 해협의 역사는 11세기 말, 호르무즈 섬은 케르만 셀주크(Kerman Seljuk) 및 살구르(Salgur) 왕조의 속령이었으며 무함마드 디람쿠(Muhammad Dyramqu)라는 인물이 호르무즈 왕국을 건국했다. 이어 13~14세기에는 몽골 일한국에 복속한 상태에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이어주는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하기 시작한다. 15세기에는 호르무즈 왕국이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고, 명나라의 정화가 대항해를 할 당시 명나라 함대가 방문했다. 명나라 측 기록인 『성사승람(星槎勝覽)』에 의하면 호르무즈의 주민들은 매우 부유하고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507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크(Afonso de Albuquerque, 1453~1515)가 이끄는 포르투갈의 함대가 호르무즈 섬을 일시에 점령했고, 1515년에는 이 섬에 성채를 건설한 이후, 호르무즈 왕국을 완전히 포르투갈에 복속시켰다.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 제국이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다만 1622년에 이란 사파비 왕조의 샤한 샤 압바스 1세(Abbas I)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3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호르무즈를 함락시키고 포르투갈 군을 몰아냈다. 당시 1세기 정도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던 호르무즈 왕국 역시 이 시기에 멸망했다. 한편 호르무즈 해협 남쪽에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 세력을 격파하고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오만 제국이 새로운 해상 강대국으로 대두했고, 해군에 큰 관심이 없던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오만 제국은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현대 시대에 이르러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이 지역에서는 일명 "유조선 전쟁"이라고 불리는 무차별 유조선 공격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이란이 봉쇄 위협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었기에 잘 부각 되지 않았지만, 이 당시 유조선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이라크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유조선과 정박지를 공격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면,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이 여기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생각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 이란은 고속정 전력을 기반으로 이라크에서 출항하는 유조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같은 후세인의 전략에 대응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은 1987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유조선을 보호하는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을 시작했다.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이 시작되자 미 해군 군함들이 유조선의 보호를 위해 해협에 투입되었으며, 1988년부터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미국 해군과 이란 해군 간의 해상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미 해군 순양함 CG-49 빈센스가 테헤란에서 이륙한 이란 항공 655편을 함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켜 승무원 포함 290명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유조선 전쟁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2010년대 후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란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해협 인근을 통과하던 유조선들이 이란 군에 의해 피격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향해와 관련해서 미국 주도의 동맹군이 결성되었고 대한민국 역시 청해부대를 보내 참여했다. 이어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스라엘, 영국이 참여했다. 2019년 7월 10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하던 영국 유조선들을 향해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고속정 다수가 접근하자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 해군 소속 23형 호위함 HMS 몬트로스(Montros) 함이 적극적으로 고속정의 진로를 차단하는 나포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2021년 1월 4일, 한국 국적의 선박 MT 한국 케미호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나포 당하여 이란의 반다르아바스 항에 억류된 MT 한국 케미호 나포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계속 되는 이란의 위협 속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지 않고 아덴 만으로 통하는 페르시아만-아덴만 연결 운하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존재하고 있다. 호르무즈 곶을 관통하는 호르무즈 운하 구상도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구상에 그치고 있다. 현재 페르시아만의 여러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이 대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리학적 요충지로 여겨지고 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21척의 유조선이 해협을 통행하면서 약 1,7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35%,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에 육박하는 규모로 알려진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다면 전 세계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OPEC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이 40%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라크 18%, 쿠웨이트, UAE, 이란 각각 12%, 카타르 6% 순서로 뒤를 잇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 생산한 원유의 85%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시아 국가들로 수출되고 있다. 특히 전체 원유 생산량의 50% 가까이는 동아시아의 중국, 대한민국, 일본 3국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동북아시아 3국은 원유 등의 원자재를 수입한 이후, 정유, 화학 등의 각종 파생 산업으로 상당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업 강국이다. 따라서 자국 내 수요 대비 원유 공급이 매우 부족한 편이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원유를 수입하는 중동 국가들의 가장 큰 고객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은 원유 수입의 80% 가까이를 페르시아만의 유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란 의회가 봉쇄를 의결했다. 봉쇄의 최종 결정권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에 있지만 이는 절차 과정에 불과할 뿐, 실제 봉쇄는 시간 문제다. 봉쇄의 주체는 이란 해군, 이란 공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주축이 된다. 혁명수비대와 공군은 순항 미사일과 여러 가지 드론 전력을 이용해 유조선을 공격할 것이고, 이란 해군은 다수의 고속정들과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3척의 킬로급 잠수함을 주축으로 봉쇄를 시도할 것이다. 비무장 상선인 유조선의 특성상 유조선 나포 및 공격은 고속정들이 할 것이고, 군함에 대한 공격은 잠수함들이 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봉쇄의 형태에 대해서도 자국 영해기 때문에 전면적인 봉쇄가 아니라 형식상으로는 일상적인 주권 행사만으로도 봉쇄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군사훈련을 빌미로 민간 선박의 운행을 일시 금지한다거나, 적대국 선박이나 의심스러운 선박에 대한 해상 검문 같은 형태로도 단번에 원유 수송을 대폭 감소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게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되었다. 이란은 미국의 공격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IRIB는 이 방송에서 중동 지역의 미군 기지 10곳을 표시한 지도를 내보냈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성명을 통해 미군 기지 직접 공격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공습 대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직접 타격의 보복보다 미국과 동맹국들을 고생시키는 측으로 보복을 대신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 타격의 보복 가능성은 남아 있다. 보복 공습을 한다면 빠르면 내일, 늦으면 2~3일 뒤에 자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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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23
  •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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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23
  • 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2
  • 2010년대 그리스 정부와 정당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경제 위기
    그리스는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IMF와 EU에게 빌린 돈의 규모가 수백조 원 수준에 이르고 있다. IMF와 EU는 그리스의 국채를 가지고 있는 민간은행의 국채를 상환 의무가 있는 그리스 정부 대신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 정부에 대한 구제 금융을 지원했다. 즉 2015년에 와서는 대부분 그리스의 국채를 민간이 아니라 IMF와 EU, 그 중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 정부는 이들 IMF와 EU, 독일 및 프랑스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IMF와 EU에게 있어서 이 구제 금융 채권 상환은 일종의 구상권 청구인 것과 같다. 그냥 그리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가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도 같은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돈줄을 쥐고 있는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이 엄청나게 손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협상은 순탄치 않게 진행되었다. 벌써부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은 견제에 나서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렉시트라 불리는,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 자체도 용인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돈 갚을 것을 압박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급진좌파인 시리자 정권의 집권 이후 기존의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 내각에서 추진하던 긴축 정책를 철회하는 일환으로 공기업이나 국유 자산의 민영화 및 매각 작업을 속속 철회했다. 사실 이를 덮어씌우게 된 나라가 바로 중국인데 중국은 많은 그리스 자산을 인수하려고 계약까지 한 상황이었다. 계약 직후, 중국의 계약 자체가 무효화되어 번복당하게 된 것이다. 이미 그리스의 경제 위기로 인해 그리스의 주식 시장은 붕괴 상태였지만 그나마도 시리자 당의 집권 이후 연일 폭락의 향연이 벌어졌다. 당시 매일 6~7%, 심하면 9% 이상씩 떨어졌다. 특히 2015년 1월 26일~1월 28일 3일간만 해도 무려 20% 넘게 폭락했다. 주식의 어마어마한 대폭락은 그리스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의 자산 이탈이 심해졌고 2011년 이후 그 빈도수는 높아졌다. 시리자의 급격한 반(反)긴축 성향이 IMF, EU등 채권자와의 갈등을 일으켜 자칫하면 그리스가 디폴트를 맞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수상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평소에 뉴욕타임즈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챙겨보았던 것이 주효한 것인지, 아니면 채무탕감의 명분을 쌓을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리스에 대한 최대 채권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기존 제재의 연장 자체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같이 반대하지 않았다 해도 EU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대응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으로 상징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에 대해서 추가제재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출한 것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러시아에서 그리스에서 요청만 해준다면 재정지원을 해줄수 있다고 밝히게 된다. 이에 대해 그리스의 증시는 다시 반등세를 탔고 러시아도 유가하락과 경제제재로 인해 자국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돈이 남아 돌았던 탓인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때와는 다르게 3700억 달러 수준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러시아가 몇 년 정도를 어렵게 나마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되기는 했다. 외환보유고가 떨어져 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러시아가 이미 경제 제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아는 EU 입장에서는 그저 그리스의 경제를 공략할 명분만 추가될 뿐. 시리자도 이와 같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재 연장에는 찬성했다. 그리스 금융위기 이후 IMF, EU, ECB (European Central Bank)가 구제금융을 하면서 언론에서 이 세 기관을 한 집단으로 묶은 것을 트로이카라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트로이카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보니까 국가부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프랑스에서 부채 관련하여 재협상을 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히게 되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도 그리스의 구제 금융 재협상을 지지했다. 그리스 정부로서도 일단 조금 온건하게 의견을 발표하여 일단 자금 융통에 대해 조금 트여 있는 상황에 있다. 물론 프랑스도 재협상에 응할수 있다고 했지만 그리스 정부에서 요구하는 채무 탕감은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금 융통이 조금 트였다는 얘기일 뿐이다. 프랑스도 그리스 지역에 투자한게 많긴 하지만 2012년 이후 부채 정리가 있었기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로이카와 독일이 요지 부동인 상황이기 때문에 파국은 시간 문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결국 채무탕감 요구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ECB와 독일이 그리스 시리자 정부에서 내놓은 국채 담보 안을 승인하지 않게 되면서 그리스 정부는 2015년 3월 디폴트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월 이전까지 시리자 정부가 ECB, 독일 정부한테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서 그리스 정부는 미국, 러시아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거론하면서 중국에서 돈을 빌려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프라스 총리가 리커창 중국 총리에게 초청 받았다는 것도 공개했다. 그리고 리커창 중국 총리는 차프라스와의 통화에서 시리자에 집권하자 마자 민영화를 취소한다는 식으로 발표하며 뒤엎으려 했고 피레우스 항 프로젝트를 복구하라 요구했다. 그래서 차프라스는 이를 보장하는 답변을 했다. 2015년 2월 12일~13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45.4%를 얻어 2위인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을 크게 앞서게 되었다. 아마도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듯 싶다. 재협상을 앞두고 그리스 곳곳에서 친(親) 정부 시위 또한 발생했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리스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다. 2015년 6월 5일로 예정된 만기까지 3억 700만 유로, 한화 약 3700억 원을 상환해야하는데, 이조차도 없다고 그리스 정부에서 나오고 있다. EU와 IMF가 제시한 긴축 재정은 여전히 실시하지 않으면서, 빚 갚을 생각을 전혀 안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현재 EU와 IMF는 그리스의 디폴트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시리자가 몰락한 다음 이후 선거를 기대하는 실정에 있다. 물론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 뒤, 할 수 있는 선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2015년 7월 5일, 치프라스는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로 진퇴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리스의 여론조사 결과, 지난달 말 카파 리서치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47.2%, 반대 33.0%로 나타났지만 자본 통제 이후에는 반대의 세력들이 시리자에 결집하면서 반대 54% 찬성 33%로 대역전을 일구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수상은 더욱 더 가열차게 반대표 결집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여론조사기관 GPO가 이날 발표한 결과에서는 다시 찬성 47.1%, 반대 43.2%로 뒤집하게 된다. 이는 여러모로 팽팽한 접전이었고 반대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그리스 의회는 여러모로 고민하게 된다. 결국 7월 5일 국민투표가 시리자 내각의 진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어이 2015년 7월 5일 2015년 그리스 구제 금융 국민투표에서 구제 금융 반대 61% 찬성 39%라는 엄청난 득표율 및 일방적인 득표차로 구제 금융을 부결시킴은 물론 시리자 정권의 연장에도 가볍게 성공하게 된다. 출구조사 때까지만 해도 52:48의 근소 우세로 점쳐졌던 것이 순식간에 뒤집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자 정권이 크게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EU 입장에서는 그리스를 자기들에게서 축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긴축에도 견디지 못했다. 이는 그리스 정부의 공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소위 기득권층의 복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상류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은 유럽과 IMF 간에 이해 관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EU측은 부자들이 탈세를 하면 뒤엎어 버리라는 식이지만 IMF는 부자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가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는 재산업화를 추진한 것도 아니다. 부패와 기형적 형태의 정치문화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시리자 정권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시리자가 그 일부에 기여했으며 시리자가 정권을 잡고 집권을 거듭하고도 개혁을 그 동안의 공약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중국은 주식이 폭락했었기에 한국 입장에서는 더욱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자국 시장에 돈을 엄청나게 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여력이 없고, 러시아는 저유가 및 낮은 천연가스 가격으로 인해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크림 및 돈바스 지역에 개입했다가 서방 제재로 인해 GDP가 절반으로 폭락할 정도로 허약한 상황에 있었다. 다들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인데 그리스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기본적으로 신용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만 그리스를 지원하겠다 말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 집권 정당인 시리자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첫 번째, 국민들의 반대 요구를 무시하고 긴축을 계속하는 것은 EU가 그리스 정부에게 재국민투표를 요구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보았다. 아일랜드도 처음에는 EU 리스본 협약에 사인할 때 국민투표로 부결되었지만, 2009년에 다시 투표를 하여 민주적인 정당성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정권이 퇴진한 뒤 악역을 중도파에게 넘겨 혼란을 주는 것, 세 번째, 그냥 나라가 망하는 길로 종합하여 세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결국 7월 중순, 시리자는 정당의 보존을 위해 고강도 긴축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렉시트를 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으나 그랬다가는 서드 임팩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알아서 붕괴 될 것이니 별 수 없는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2015년 8월 20일 시리자가 구제 금융 찬반으로 인해 분당되자 그리스 국회의 의회를 해산하고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2015년 9월 20일 조기 총선을 시행할 것을 정했으며 당시 여론조사에 의하면 시리자의 지지율은 급락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의 과반보다 못한 1당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나마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이 부진하여 1당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야당이 올곧게 건재했다면 이와 같은 경제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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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2
  • 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1979년 이란에서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란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당시 근본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 시아파 무슬림 정파 세력들에게 축출된 팔레비 왕가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을 필두로 하고 있었으며 장남인 레자 팔레비(Reza Pahlavi)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1980년 모하메드 국왕이 도피한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의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축출되고 그나마 망명 정부처럼 남아 있는 왕실의 제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망명 정부이기에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다. 더불어 1906년에 제정된 이란 팔레비 헌법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 받기 때문인 것도 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왕후로 알려진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이다. 그녀는 1967년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과 결혼했을 당시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왕후에 등극한 호화 대관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획득한 외화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었다. 국영기업 민영화,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인수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계 이란인 인사들이었고, 민영화하여 만든 제품과 수입들이 죄다 유럽과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실질적으로 이란 국내의 기업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을 진흥하고자 했다. 팔레비 왕조가 건립될 당시의 문맹률은 꽤 높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가 대대적으로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육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학교 시설이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무엇보다 선생들의 질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질 좋은 선생이 양으로도 많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이란에서 페르시아어가 완벽한 질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결국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선생을 돈 주고 영입할 수밖에 없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가난한 시골에는 외국 선생은 꿈도 못 꿨다. 부유층 자녀의 외국 유학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또한 상류층의 10분의 1정도만 유학을 갔고 대부분 파리에 머물렀다. 팔레비 왕조는 히잡, 차도르의 착용 금지했지만 테헤란과 이스파한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 투성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대다수의 하층민은 여전히 부르카 쓰고 이슬람 율법에 저촉 받고 살았다. 당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문맹율은 60%에 달했다.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테헤란과 이스파한과 같은 대도시에 국한된 얘기였다. 큰 도시가 아닌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란 여성들은 참정권이 뭔지도, 있는지도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의 여성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으며 문맹에다 전통적인 악습을 달고 살았다. 즉,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고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계층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으며 테헤란이나 이스파한에 살 경제력이 되는 여성들만이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히잡을 벗고 대학까지 다녔다. 이것이 몇몇 대도시와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란 영토 내에서 불균형 현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농지 개혁과 농촌 개발 문제였다. 이란에서 황무지는 국토의 60%를 차지했다. 이는 땅을 다지는 기술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근대화가 도시에 집중되었던 것도 있다. 팔레비 2세는 외국에서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초청하여 녹화하는 사업을 맡긴다. 그리고 이란 영토 내에서 토후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지방 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압수하고 이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는 팔레비가 계획했던 근대자본주의와 대단한 모순이 있었다. 지방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로 뺏어간 것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자율성과 사유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주들로부터 토지 강탈과 일반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의 분배 행위는 소련이나 중공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주로 행했던 사회주의성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즉각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빈민들이 중세 봉건적 시스템인 소작제를 철폐하면서 자영농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영농들의 상당수는 농촌 적자에 허덕이면서 다시 지주에게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분배된 농토들은 자영농들의 식구에 비해 그 소출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관개 시설을 이용해 농지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이란 전국에 분포한 관개 시설은 채 10개도 되지 않았다. 자금 또한 부족했다. 해당 자금들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횡령으로 인해 해외로 빼돌려졌다. 그래서 관개 시설조차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했고, 소작농 시절에 물리지 않던 세금, 종자세, 물세, 시설 비용등이 추가로 발생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영농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영농들을 인공적으로 무수히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주 밑에서 소작농들에게 제공하던 건강과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교육 같은 서비스도 없어졌다. 또한 미국과의 협정으로 인해 미국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최악의 상황이 된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당시, 혁명에 참가한 상당수가 이 때 고생하던 농민들이었다. 결국 일부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협동 농장에 매각하고 도시로 흘러왔으며 이들이 슬럼가를 형성하면서 엄청난 빈부격차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해지는 결과가 되었고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당시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자들이 이맘 성직자들이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던 모스크의 토지까지 팔레비 정부가 몰수하여 분배했기 때문에 엄청난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업에 써야 할 돈들은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 왕후의 개인 돈으로 유용되었다. 그녀는 해외에 재산을 상당수 빼돌렸으며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될 정도로 축적한 재산은 재벌급이었다. 파라 팔라비 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명화들을 수집했다. 파라 팔라비의 컬렉션은 현재 30억 달러(약 4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86년 9월, 이란 PARSI 1 TV에 갑자기 위성 방송이 11분 동안 전파를 탔다. 이 방송에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레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왕후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은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이 위성 방송은 미국 CIA가 기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은 40년 전에도 이와 같은 내부 혼란을 유도하는 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 같은 시기의 CIA는 이란 팔레비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미 의회에서의 폭로도 나오면서 한동안 팔레비 왕실과의 커넥션에 대한 청문회로 몸살을 앓았다.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들을 두고 근거 없다며 일축했다. 팔레비 왕가가 미국 땅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호메이니 혁명 이후, 팔레비 왕가와 함께 이란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의 애국적 행위 덕분이라고 했다. 팔레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40년 동안 미국은 이란에 끊임없는 제재를 가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란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내부 혼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움직여 외부적으로 전쟁, 무역적 대립 등으로 끊없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파라 팔레비 왕비나 레자 팔레비 왕세자의 근황을 끊임없이 TV로 송출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균열을 유도했다. 물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 방송했었다.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PARS TV, BBC 페르시안, PARSI 1 등 수십여 개나 되기에 이란 정부를 막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채널들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이 위성 수신기에 대한 단속이 심했지만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인터넷 매체들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라 이란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움직여 또 다시 외부적 혼란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고 있다. 팔레비 정권이 했었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 미니스커트가 어떻고, 히잡이 어떻고 등등, 매우 자유로운 사회였다고만 말한다. 그러니 팔레비 치하의 이란 사회는 매우 모순성이 가득한 사회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인 측면들이 혼재된 사회였으며 왕정 독재에, 기득권들만 배부르고, 부정부패와 비리, 횡령이 일상화 된 사회였다. 빈부 격차도 엄청났고, 그렇기에 근대화 개혁을 하려했지만 안하니만도 못한 사회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약에 팔레비 왕조 치하의 이란 사회가 매우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적인 사회였다면 1979년의 호메이니 혁명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메이니 혁명은 팔레비가 가진 수많은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중동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메네이 정권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팔레비 2세와 바꾸어 팔레비 왕조를 부활시키면 완전히 근대 국가로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하메네이 정권이 무너질리도 없을 뿐더러, 팔레비 2세가 돌아오는 것은 이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1
  • 이란의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공습
    이란은 3일 전, 16일 새벽 이스라엘의 하이파 발전소와 정유공장 등 에너지 인프라를 타격했다. 일부 전력망이 파손됐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CNN 방송은 이 날 "텔아비브가 밤새 이란의 집중적인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날이 밝자, 텔아비브의 거리는 공포와 혼란, 불안으로 가득 찼다(Tel Aviv was hit by a barrage of Iranian missiles overnight. As day dawned, the streets of Tel Aviv were filled with fear, chaos and anxiety)."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이란의 탄도 미사일에 피격된 공습 현장에서는 이스라엘 구조대원들과 군인들이 거리에 널려 있는 잔해를 치우고 있다고도 했다. 이와 같은 장면들은 불과 6일 전인 13일 밤,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이란의 피해 상황이 대대적으로 전해질 때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 전개로 나타난다. 서방의 외신들은 당시 파괴된 이란 핵 관련 시설과 군사 기지, 미사일 발사대 등에 관한 영상을 내보내며 이란 핵 전문가와 군 고위 지휘관 수십명을 제거했다고 이스라엘 측 발표를 집중 보도했다. 이스라엘이 드론을 미리 투입하는 '트로이 목마' 작전을 실시했고 이란의 방공망을 사전에 무력화했다 주장하는 전략에도 흥분했다. 하지만 이틀 후인 15일에는 이란의 대 이스라엘 방공망 교란으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방공 미사일이 부메랑처럼 지상으로 떨어지는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방공시스템 아이언돔이 돌파되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네타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테헤란 시민들에게 대피할 것을 촉구하자, 이란은 15일 밤 보복 공격을 예고하면서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안전을 위해 핵 및 에너지 시설과 방사선 연구 센터, 방사성 물질이 있는 위험 지역으로 가지 말라는 요청을 하면서 맞섰다. 이어 이란 최정예부대로 꼽히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IRGC)는 언론 성명을 통해 "주요한 목표물을 겨냥한 집중적인 공격은 이스라엘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스라엘 영토가 곧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니, 일찍 이스라엘을 떠나라(The intensive attacks on key targets will continue until the Israeli regime collapses. Leave Israel early, as Israeli territory will soon become uninhabitable)"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은 이제 겨우 6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서방 언론과 국내 언론은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와 똑같은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뉴스 보도에 의하면 이란은 곧바로 항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격으로 인해 이란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거센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CNN 등 미국 언론에서는 이스라엘이 초기 판세를 잘못 짚었다며 오류들을 정정하는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언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를 하기 때문에 수정을 대체로 잘 하지 않는다. CNN 방송은 16일 퀸시 국가대응전략 연구소 부소장인 트리타 파르시(Trita Parsi)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은 이란의 군부 지도부들이 제거한 이후, 이란의 보복 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분석했다. 파르시 부소장은 CNN에 이스라엘은 이란 군 최고 지휘부 제거에 성공한 이후, 이란의 군 지휘 체제를 흔들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란의 미사일, 당시 러시아 언론에서는 극초음속 미사일로 분류학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3중, 4중 방공 시스템인 아이언 돔을 돌파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같은 결과로 인해 텔아비브 거리는 공포와 혼란, 불안 등으로 소요 사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블룸버그 도 15일에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란 미사일의 파괴력에 충격을 받았으며, 적이 보유한 미사일 규모를 생각하면 그같은 공격이 몇 주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이 전쟁의 끝을 알 수 없다(Many Israelis are shocked by the destructive power of Iranian missiles, and given the size of the enemy’s missile arsenal, they fear that such attacks will continue for weeks, so there is no end in sight to this war.)."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발언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극우주의자로 알려진 요아브 리모르(Yoav Limor)는 자신들의 매체인 이스라엘 하욤(יִשְׂרָאֵל הַיּוֹם) 기관지의 기고에서 이스라엘은 초기의 성공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장기전에 휘말려서도 안 된다라고 언급하며 빨리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크네세트의 집권여당이자 원내 제1당인 리쿠드당의 기관지인 "하욤" 또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 이란은 서로 더욱 강력한 '보복 공격'을 예고했다. 이스라엘은 16일 생방송 중인 이란 국영 방송국을 폭격했다. 이에 여성 앵커가 스튜디오에서 급히 대피하는 생생한 영상이 올라왔다. 이스라엘의 프로파간다용 홍보 효과로는 최상의 영상인 셈이다. 앞으로는 발전소와 정유 시설 등 에너지, 사회 인프라를 파괴하는 공습과 피해 상황들은 영상으로 한꺼번에 공개되지 않고 자신들이 유리한 국면일 때 조금씩 공개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힘들다. 어느 쪽에 유리한 지에 대한 관건은 경제적, 군사적 잠재력에 따라 달려 있다. 누가 더 많은 미사일 보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보충할 능력이 있는지에 군사적 우위 능력이 좌우될 것이다. 그 다음의 관건은 동맹국의 지원이다. 미국은 이미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공중 급유기 수십 대를 유럽 측으로 보냈다고 밀리터리 워치 매거진(Military Watch Magazine )이 지난 16일에 보도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란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정'을 추진 중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할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이미 앞서 필자의 수많이 포스팅과 칼럼에서 밝힌 바 있어 생략한다. 하지만 중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이란에 미사일과 방공 시스템을 보내 지원하고 있다. 실제로 몇 대의 대형트럭들이 중국에서 출발해 파키스탄 국경을 통과해 이란으로 들어오고 있는 장면들이 포착되었다. 따라서 중국은 현대 공중전에서 자국 무기를 시험해 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중국이 이스라엘에서 운용 중인 F-35 전투기와의 교전을 통한 자국 전투기의 성능 확인을 위해 이란에 전투기를 제공할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다. 네타냐후는 이란인들에게 현 정권을 전복할 것을 대놓고 선동했다. 이란의 보수적인 제정일치(祭政一致)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에 호응해 반 정부 시위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란 현 정권에 불만을 가진 세력보다 현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반 정부 세력들에게 하메네이 정권의 전복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는 최고 지도자의 대국민 장악력이 더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고 피해를 입은 이란인들이 하메네이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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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1
  • 현재까지 살아있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국왕은 아테네 근교 프시키코에서 1940년 6월 2일에 탄생했다. 그는 출생 4개월째 되는 해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그 다음 해,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략하며 유년기를 피난지인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1946년에 귀국하였으며, 1947년 아버지 파블로스 1세(Παύλος I, 1901~1964, 재위 : 1947~1964)가 즉위하면서 태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스포츠맨이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역대 올림픽에서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가 금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이 폐지돤 이후에도 IOC 명예 위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4년부터 노르웨이 국왕이자 먼 친척인 하랄 5세와 함께 국제요트연맹 공동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물론 하랄 5세 역시 요트 선수로 활동했지만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8촌, 그 왕비인 아네마리와는 6촌관계에 있다. 그는 1964년 3월 부왕이 암으로 승하하자 즉위하였으며, 9월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콘스탄티노스가 국왕이 된 시기에는 그리스 정치에 있어 좌우 대립이 매우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즉위 한 달 전 열린 총선에서 11년 동안 그리스를 이끌어 오던 우파 내각이 패배하고 중도연합당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가 총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국왕과 나이 많은 수상이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65년 7월 그리스 군부 내 우익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움직임이 있어 국방 장관의 퇴임을 결정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오히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 총리를 해임하고 같은 당 소속의 요르요스 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하자, 그리스는 그리스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양파 간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을 공공연히 부정하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졌으며 국왕이 총리를 지명하면 중도연합당이 장악한 의회가 거부하는 일이 빈번하여 왕정과 내각의 골이 깊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군부의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은 좌파들을 혁파해야 한다며 1967년 4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3일 근왕파 장교들과 동맹을 맺고 역으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쿠데타가 실패하게 되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일단 북부 그리스의 카발라로 파천하였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파파도풀로스는 왕을 추방했지만 측근인 요르요스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왕정을 없애지는 않았다. 이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후 왕당파는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여 반(反) 군사 정권 투쟁을 벌여 정권과 맞서게 된다. 결국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7월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며, 이로써 콘스탄티노스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이 퇴진된 이후 새로 들어선 카라만리스 총리의 과도 정부는 군사 정권의 왕정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을 무효화했지만 그렇다고 1952년 제정된 민주 헌법으로 복귀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왕정 복고 국민 투표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TV 연설로만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결국 7:3으로 왕정 복고가 부결되면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위에 복위하지 못했고, 1975년에 헌법이 제정되어 현 제3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1946년에 벌어진 국민 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유지된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입국 금지를 당한 채, 돌아오지 못하고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으며 당시 서방 정치인들로부터도 '멍청이', '암덩어리' 등의 비난을 들으면서 생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81년 2월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인해 당일치기 방문을 했었고, 1993년 여름에 미초타키스 총리의 배려로 일가족과 휴양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결국 굴복하며 공화정을 인정했지만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에 대한 여론은 매우 냉담했기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2세 총리 시절인 1994년에는 아예 국적까지 박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유럽 왕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리스 정부에서 그에게 적법한 성씨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국적을 부정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 왕의 성씨가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써야 할 때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가문 이름이나 영지의 이름이 성으로 사용되는게 유럽 왕실의 관례였다. 또한 왕실 재산과 관련해서도 그리스 정부와 소송을 벌였는데 그리스 정부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사람이 소송하는 것을 부당하다면서 소송을 받아주지 않으며 그의 갖은 수모를 주었다. 결국 그는 소송을 위해 Κωνσταντίνος της Ελλάδας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리스의 법원에서는 그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 인권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소송 끝에 2000년에 그리스 내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인정받게 된다. 자산은 그리스 정부의 소유로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 정부가 보상금을 옛 왕가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 정계는 이와 같은 보상 과정에 대해 비웃었는데, 이는 그가 탈세한 금액이 많다고 주장한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Constantino de Grecia (그리스의 콘스탄디노스)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에서 외교관의 여권을 발급받아 IOC 위원의 자격으로 입국하게 된다. 덴마크는 덴마크 왕가 후손에게 자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때 여권을 발급해줄 당시 성이 데그레시아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 그리스 방식으로 콘스탄디노스 데그레치아스(Κωνσταντίνος Ντεγκρέτσιας)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아테네 올림픽 당시의 방문을 계기로 그는 그리스 정계와의 사이가 개선되었고 이후 런던과 그리스를 왕래하다가 2013년에 영구 귀국을 허락받아 그 뒤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포르토 헬리(Πορτοχέλι/Porto Heli)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그리스의 경제 위기 등 현재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지자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옛 왕실에 대한 호감이 좀 높아졌다.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그리스의 경제적인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견실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로 왕정이 복고되기까지 갈 정도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있다보니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력도 있고, 2021년 말-2022년 초에는 폐렴 및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 최후의 국왕이지만 군사 쿠데타 이후 추방을 당해 해외 여러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갖은 수모를 당했고 조국인 그리스에서 조차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수모와 비아냥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스에 돌아와 현재 조용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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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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