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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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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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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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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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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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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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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미국의 농산물, 혹은 농지(농장)의 현황과 콩(대두), 중국 수출 문제
    미국은 세계 주요 콩 생산국 중 하나로, 2020년대, 1년 평균 기준으로 약 43억 부셸의 콩을 생산했다. 콩은 식품, 연료 및 급여로 사용되며 미국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콩은 항상 주요 미국 농작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소수의 농민들이 실험적으로 콩을 재배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콩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콩 수출국이다. 미국의 농업 유형을 분석해보면 기본적으로 상업농이라 볼 수 있다. 상업농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모든 수준에서 고도화된 기계화로 나타난다. 엄청난 크기의 트랙터와 같은 장비는 단순해 보이나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작업에 따라 트랙터에는 GPS 통합, 드론 제어 터미널, 실시간 위성 이미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도 미국에 방문했을 때, 캘리포니아에서 엄청난 넓이의 옥수수밭을 본적 있다. 그 때 옥수수밭이 너무 넓어 엄청난 크기의 트렉터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트렉터 크기가 왠만한 2층 버스 높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미국의 농업은 현재 상업농의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나지만 미국 초기 역사에서는 자급자족의 농업이 흔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만이 이를 자급화를 실천했다. 자급농 위주였던 아메리카 대륙에 영국인들이 진출했고 영국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농업 방식을 도입했다. 이 때부터 산업혁명 등의 영향으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농업 수익성은 높아졌고, 모든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농장에서 일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현재도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기타 그룹들은 오래된 농업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유럽의 기독교 운동에서 유래한 미국의 종교 및 문화 집단인 아미쉬(Amish) 중 일부 그룹들은 현대 농업 장비를 거부하고 농장에서 동물과 수작업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아미쉬 같은 자급농과 소규모 농장이 존재하고 있으나 평균 농장 규모는 441에이커로 178.5ha이며, 평으로 환산하면 약 539,861평이다. 농장 규모가 대형으로 커짐에 따라 갈수록 농업기계와 장비는 농업 운영의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농업 기계화에 의해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과 비례하여 농기계의 활용과 투자 비율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기계화에 의해 생산성이 높아진다 할지라도 소규모 농장에서 볼 때 생산성으로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이는 비용이 증가되기 때문에 농업 혁신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미국 농무부가 발표한 2024년을 기준으로 약 200만 개가 넘는 농장이 있는데, 가족 농장이 전체의 97.3%, 면적으로는 92.7%, 판매액으로는 89.6%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수치로만 환산하면 미국에서는 가족 농장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농업은 가족 농장이 중심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6%이며, 판매 금액에서 소규모 가족 농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19%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국의 농업은 대규모 가족 농장과 중소 규모의 가족 농장들이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규모 가족 농장은 3.4%, 농지면적은 24.8%에 불과하지만 판매 금액에서 차지하는 비율로는 51.8%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500만 달러 이상의 판매액을 가진 8,134개 농장이 전 판매 금액의 22.8%를 차지하고 있다. 비가족 농장은 나머지 2.7%로 판매 금액은 10.4%에 불과하다. 특히 해외 수출되는 작물 중에 옥수수와 콩은 가족 농장에서 소출된 것으로 내보내 지는데 콩(대두)의 경우, 2018년에 나타난 미, 중간의 무역 분쟁으로 볼 때 미국의 중국을 대한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콩(대두) 수출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중국은 주로 브라질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콩의 국내 수요를 늘리고 다양한 용도로 콩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콩 기름은 바이오 연료 및 재생 디젤 연료 산업에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콩(대두) 재배 지역과 전통적인 무역 경로가 변할 수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이와 같은 미래의 도전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대두를 사들이지 않고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부터 수입을 늘려 가기 시작하자 트럼프가 중국에 미국산 ‘대두(Soybean)’ 수입 재개를 요구하겠다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와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콩은 그리 간단한 농산물이 아니다. 이는 대두 농가가 공화당의 지지 기반에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의 수입 중단 문제는 자칫 내년 11월 3일에 있을 미국 중간선거의 결과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대두는 14억 중국인들에게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지난 해까지만 해도 매년 미국산 대두의 25% 이상을 구매하는 최대 수입국이었다.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수입한 규모는 지난 해에만 126억 달러(약 17조 8,000억 원)에 달했다. 중국은 그 이전까지 매년 10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북반구의 미국산 가을 대두를 수입한 이후, 3월부터 남반구의 남미 국가에서도 대두를 사들였다. 대개 미국산 대두 구매 예약은 10월이 되기 몇 개월 전에 이미 마무리되어 미국은 각 가족 농장에서 최대한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미국 대두가 대풍작인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무역에서 희토류 수출 제한 이상으로 대두 수입은 미국을 충분히 압박할 수 있는 카드로 쓸 수 있다. 중국은 이미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의 미국 사업권을 이양시켰고,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는 등, 미국에 여러 양보 안을 제시했다. 따라서 시진핑은 대두 수입을 가지고 미국에 다른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셈이다. 중국은 트럼프의 이른바 ‘관세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올해부터 BRICS 국가들 소속의 브라질 등 남미에서 생산한 대두 수입량을 대폭 늘렸다. 지난 8월 브라질산 대두 수입은 지난해 같은 8월 때보다 2.4% 늘어난 1,049만 톤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대두 수입 물량의 85.4%에 달하는 수치였다. 중국의 8월 미국산 대두 수입은 2024년의 같은 시기보다 12.3%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브라질이 대두를 수확하는 시기가 지연되는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 정도다. 중국은 새로 수확되는 미국산 대두에 대해서는 구매 예약을 하지 않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산을 계속 수입하고 있다. 미국 농가가 대두 수확기에 들어간 지 2주 이상 지난 9월 11일까지도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단 1건도 예약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당국이 미국산 대두 주문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난 상반기 때 미국의 중국 대두 수출 누적량도 작년인 2024년 같은 기간보다 51% 감소했다. 중국으로의 수출이 사실상 막히면서 미국의 2025년 대두 수출은 23% 이상 급감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두 가격은 폭락했고, 재고가 증가함으로써 옥수수 등 다른 작물들을 저장할 공간마저 부족해진 상태다. 블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미국 농무부 자료를 인용해 중국이 이 시기까지 미국의 대두 구매를 예약하지 않은 것은 1999년 이후로 처음이라고 했다. 중국은 아르헨티나에서도 35건 이상의 대두 화물 선적을 예약했다. 11월에 선적될 예정인 계약분만 227만 톤 이상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이전까지 중국의 남미산 대두 수입량 최대치가 2015년 7월 223만 톤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번에 사상 최대의 계약을 맺은 셈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생각지도 못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분노한 트럼프는 브라질에 대한 관세를 올리고 아르헨티나에 관세를 100% 이상 올린다고 협박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중국에 대두 팔지말라고 협박하는 카드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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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7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초창기 유년 시절 : 이반 4세의 차르 권력 강화 과정
    이반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Василия III)의 장남으로 탄생했다. 그의 모친은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였는데, 그녀는 바실리 3세의 후비로 들어온 왕녀였고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반 4세의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남슬라브 세르비아인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루스의 귀족 가문인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집안의 장녀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반 4세는 아버지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1530년 8월 태어났는데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가 종래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키예프 대공 집안인 사부로브스키(Сабуровский)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옛 키예프 세력들과 정치적 연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물론 바실리 3세에게는 서자가 몇 명 있었지만 이반은 바실리 3세의 첫 적장자였기 때문에 후일 공후 승계 문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공후들의 반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직책들을 가지고 있던 각 보야르(Боярин)들 사이에 반발이 대단했는데, 이들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대공국의 기능을 상실한 키예프와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키예프의 솔로모니야(Соломония)와 연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던 데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정교회의 비잔틴 십자가와 성모상이 키예프에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경우,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가문이 정교회를 숭상하는 집안이 아닌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러시아정교회의 반대를 억지로 무마하고 재혼한 이유는 아직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옛 대공국을 구성하는 공후들과 보야르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이들에게서 벗어나 강력한 전제정권을 구사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실리 3세의 움직임과 달리 어린 이반 4세는 출생 전부터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불길한 아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고 각 보야르들의 음해성 공격 및 암살 위협도 받았다. 그러한 배경들이 이반 4세의 정신적인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과 옛 키예프 공후들, 각 지방 및 모스크바 대공국 내부의 보야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끊임없이 어린 이반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어 1533년 이반 4세가 3살 되던 해에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발전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이반을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은 모친인 엘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엘레나도 정통 러시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허약했다. 그러한 잦은 정치적인 암투로 인하여 오히려 어린 이반이 유년기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을 학습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실리 3세는 사망하기 전에 어린 두 아들 이반과 유리(Юрий)의 장래를 걱정하며,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그녀의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 공후에게 그들을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 대한 위협 등을 염려하여 왕족 및 보야르 등을 모두 불러 어린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반에게는 형제인 남동생 유리(Юрий)와 여동생 한 명이 있었고 그 밖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서출 형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는 왕권에 전혀 관심 없는 자였다. 그리고 남동생 유리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어 모든 권력적 상황이 이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친의 유언에 의해 이반 4세는 바실리 3세 사망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3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와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모친인 엘레나는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 공후에게 처음에는 많이 의존했다가 이반 옵치나 오볼렌스키(Иван Овчина Оболенский) 공후와의 치정 관계로 인하여 미하일 글린스키와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Андрей Старицкий) 등 일부 보야르들은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를 포섭하여 그를 대공 직위에 올리려 했다가 이 역시 사전에 엘레나와 옵치나 공후에게 발각되었고 미하일 글린스키는 역모 죄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글렌스키야 가문 외에도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 벨스키(Бельский) 가문 등 유력 보야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나는 자신의 친정 측에 원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삼촌 미하일 글렌스키야를 제거하면서 친정과의 연대는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고변을 사건을 일으킨 엘레나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했으며 많은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는 등의 폭정을 펼쳤다. 특히 이반의 삼촌인 유리 이바노비치(Юрий Иванович)는 충성 맹약을 번복했기 때문에 엘레나의 노여움을 사고 투옥되었으며 1536년 처형되었다. 또 다른 삼촌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역시 이반의 대공 지위를 노렸다. 그러자 이는 엘레나에게 발각되어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투옥시키려 했다. 그러자 삼촌 안드레이는 도망치려다가 국경에서 잡혀 1537년 투옥되고, 그 해 11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바실리 3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리투아니아 공국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략해왔다. 루스의 공후들이 리투아니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어린 이반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는 엘레나는 같은 카톨릭 측이라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와 1538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보야르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그녀의 계속되는 실정(失政) 및 폭정과 카톨릭 및 폴란드 이주민들에게 대한 우대, 그리고 리투아니아와의 독단적인 평화 조약 체결 및 옵치나 공후에 대해 과도한 이권을 몰아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그녀의 차에 독을 타 독살했다. 모친인 엘레나가 보야르들과 키예프의 13공후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이반 4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지만, 어리지만 영민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던 그는 이러한 보야르들의 음모로 인해 모친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옵치니 공후가 섭정을 하였으나, 슈이스키 가문의 영수 바실리 슈이스키(Василий Шуйские)는 옵치나 오볼렌스키를 투옥시켰다가 석방시켰고 자객들을 보내어 자는 도중 그의 집에서 살해했다.이 때 경쟁자 가문인 벨스키 가문의 이반 벨스키(Иван Бельский)를 옵치나와의 공모 혐의를 적용하여 숙청했으며 그를 투옥시킨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몇 년 후 이반 벨스키를 석방시켰으나, 세력의 재규합을 우려해 그를 다시 투옥시킨 뒤 살해했다. 이와 같이 옵치니 공후를 축출하고 권력을 확보한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은 각기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블 지역을 영지로 하고 있었던 대 공후들이었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다른 공후들의 협조도 가능했던 막강한 대외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이오아사프(Иоacaв)가 추방된 관계로 인하여 비어있던 총대주교 지위는 막심 그렉(Максим Грек)에게 돌아갔고 막심 그렉은 1538년부터 1547년까지 섭정을 하여 바실리 슈이스키와 공동 통치를 했다. 한편은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이반이 10세 때 그의 유일한 여동생인 엘리자베타가 갑자기 사망했다. 엘리자베타의 경우에는 슈이스키가 독살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유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반은 대공 지위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대적인 보야르들의 늘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대공으로써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며 근처 보야르들의 심한 감시도 함께 받았다. 이 때부터 이반 4세는 두 살 어린 동생 유리와 함께 귀족의 권력 암투 속에서 그들의 양면성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이반 4세의 앞에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한 편지에 의하면 자신이 8세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 당했고 그들이 대공 지위의 이반에게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불운한 소년이 머지않아 폐위되거나 암살될 거라고 여겼지만 러시아 내부의 묘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하여 이반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물론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 공후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의 어린 공후 형제들을 심문한 뒤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왕실 행사가 있는 날로, 이 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한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아직 대공이 건재하고 있다는 대외적인 홍보와 더불어 대공에게 최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 내에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 등을 여과 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매우 포악하게 변모했다.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으며 정무는 각 두마와 보야르들이 관장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권한은 전무했다. 한편 슈이스키 가문 등의 유력 보야르들이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파벌 경쟁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적으로 차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권위를 무시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 두고 강제로 신게 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 이반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높은 성 옥상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키예프 13공후에 속하지 않은 지방 귀족인 드보랸(Дворян)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었지만 이반은 자신의 세력으로 몰래 드보랸(Дворян)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보야르 및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과 친해지면서 자신의 세력을 몰래 강화했으며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이러한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해 두마 회의 당시 크레믈린 궁 주변에 매복시켰다. 크리스마스에 이반은 회의 자리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그를 무시하며 조롱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들 순간적인 명령이라 당황했었지만 이반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죽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대다수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명으로 매복한 보야르와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로 하여금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해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넘겼고 맹견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했다. 이어 두마 회의가 끝나자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 귀족들을 잡아들여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후로 이반에 대해 보야르, 제후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방자하게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령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이 강력하게 성장했음을 파악하고 그에게 친정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친정에 대한 기본적인 통치 관념이 없어서 이를 두려워한 이반은 일단 보론초프(Волончёв)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지만 1546년 이반은 보론초프 가문도 숙청하고 말았다. 지방 귀족인 드보랸들과 지식인, 상인 계층에서는 이반의 아버지 바실리 3세 시기부터 내심 보야르 및 두마 의원, 중앙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오랫동안 원했고, 상인들은 각 지역마다 다른 상법들을 정비하여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의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오랫동안 호의를 보여 왔고 이반 4세 그리고 그가 친정하자마자 그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1545년 이반 4세는 블라디미르에 군사를 내어 실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의 세력들을 제거하도록 명을 내렸고 이들 드보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항쟁했으나 이반의 군사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했다. 블라디미르의 세력들을 제거한 이후, 이반은 1546년 12월 내년에 혼인할 것이고 차르로서,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를 선택,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서적을 통해 대관 의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는 1547년, 교회를 통해 대관식을 치르고 ‘전 러시아의 차르’로 등극했다. 이러한 부분이 실현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린 왕의 통치기에 보야르들의 숫자와 권력이 크게 늘어났기에, 그들끼리 파벌과 다툼이 생겼으므로 보야르가 단결해서 왕권을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귀족 내지 지방 귀족을 의미하는 드보랸들은 보야르의 횡포를 억제해줄 강력한 왕권을 기대했고, 상인들은 러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동일한 상법의 적용을 받는 상권이 탄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반 4세의 차르 즉위를 지지했다. 그리고 17세이던 1547년 6월 말에 벨스키 가문을 정벌하기 위하여 야로슬라블로 군사를 보내 벨스키 가문을 공격해 멸족시켰고 야로슬라블의 대부분 구역을 파괴했다. 1548년 1월부터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서 이반 4세의 내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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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7
  • 트럼프 대통령, 가자 전쟁 종식 선언, 과연 중동의 평화가 오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벌인 가자 전쟁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집트의 홍해 휴양지인 샤름엘셰이크에서 트럼프는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세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함께 가자 전쟁 휴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이 구상했던 평화안에 자축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휴전중재국 전상들 외에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캐나다, 헝가리 등의 정상들과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과 요르단, 바레인, 파키스탄 등의 정상들을 포함해서 34명이 참여함으로써 ‘가자 평화 선언’을 지지했고, 트럼프에게 거대한 병풍을 쳐주었다. 그런데 이번 ‘가자 평화 정상 회의’에 정작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불참했으며, 이란도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단조차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중동의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중동의 평화가 왔다고 하면서 모든 성과를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면서 승리를 자축했으며, 유럽과 아랍의 정상들은 트럼프의 들러리를 서면서 아양을 떨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 정상 회의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당연히 존재감을 돋보이는 국가는 튀르키예다. 에르도안은 네타냐후 총리가 참석한다면, 이번 정상 회의에 불참을 예고하면서 트럼프가 자신과 사전에 조율하지 않은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트럼프는 엘시시와 별도로 회담하면서 네타냐후가 이번 정상 회의에 참석하기를 희망했다. 에르도안은 네타냐후를 히틀러라고 거칠게 불렀고, 이스라엘과 무역 중단도 단행했기 때문에, 네타냐후와 만남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에르도안은 전용기에 머물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결국 네타냐후는 불과 1시간 만에 회의 참석을 철회했다. 사실 이번 평화안을 하마스가 수용한 것도 에르도안의 설득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하마스는 처음부터 이전 정상 회의에 불참을 선언했고, 튀르키예와 카타르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이번 평화안은 문서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총 20개의 항목을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것인데, 1단계는 대체로 군사작전 중지, 이스라엘 군의 부분 철수, 인질-수감자 석방, 가자 지구에 인도적 물품 반입 등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수감자 1,900여 명을, 하마스는 생존 이스라엘 인질 20명을 서로 석방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마스는 생존 인질들을 전부 석방했지만, 사망한 인질들의 유해 28구 중 9구만 송환되어 난항을 겪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은 인도적 물품 반입을 부분적으로 통제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총론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합의했지만, 각론에서는 아직 1단계에서 벌써 삐꺽거림이 나타나는 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양측 서로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하마스가 그렇게 한 까닭은 나머지 유해들이 자신들이 살해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인질들임을 드러내고, 유해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신들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들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리저리 지하로 피해 다니고 있는데, 나머지 유해들이 어디에 있는지, 더 나아가 이미 공습으로 나머지 유해들이 사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뒤섞여 있는데 어떻게 그 유해들이 이스라엘 인질들의 유해들인지 알 수 없다는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이 인도적 물품 반입을 부분적으로 통제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하마스가 인도적으로 반입되는 물품들이 가자 주민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마스가 이를 빼돌리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를 하마스가 합의사항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하마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 위협했으며, 더 나아가 물품 반입도 지연하거나 줄일 것이라고 유엔에 통보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미국은 한 발을 빼면서 시신 인도 문제는 합의사항이 아니라고 했는데, 미국은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콧물을 떨어뜨리기가 싫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나친 억지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모한 포격으로 희생된 팔레스타인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데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에게 히든 카드를 들고서 다음 2단계에서 서로 주도권을 행사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이번 평화협정은 1단계가 완전히 끝나면 2단계로 들어가고 마지막 3단계로 이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2단계는 하마스의 무장 해제, 이스라엘의 단계적 철수, 가지 지구 전후 통치 방식 등이고, 3단계는 영구 휴전, 가자 지구 재건, 국제 평화 위원회 구성 등이다. 그런데 이 단계별 평화안을 보면 1단계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서로의 신뢰를 보여주지 못한데, 어떻게 2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지에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1단계에서 이행되지 못한 사항들이 2단계에서 추가로 논의하게 되면 이것이 2단계의 다른 사항들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평화안은 2단계가 핵심이라고 보이는데, 벌써 세부 사항별로 1단계보다 더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하마스는 이미 약 7,000명 정도를 가자 지구로 소집해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전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다. 하마스가 이렇게 한 까닭은 일부 보도에 따르면 가자 전쟁 중 친이스라엘 민병대 조직원들을 색출함으로써, 설령 가자 지구 통치권을 이양하더라도 팔레스타인 과도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훗날을 대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랍 중재국들도 훈련된 팔레스타인 출신들을 경찰로 만들어서 1,000명 정도를 가자 지구에 투입하고 이후 최대 10,000명 정도까지 확대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어쩌면 가자 지구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그 나름의 노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2단계 협상의 큰 걸림돌은 하마스의 무장 해제라고 하겠는데, 미국에서는 하마스가 무장 해제를 하지 않을 시에 폭력적으로라도 해제시킬 것이라고 엄포놓으면서 하마스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하마스는 내부적으로 합의가 서로 안 되니 시간을 끌면서 재기를 노릴 것이다. 더 나아가 하마스는 최소한의 아무런 무장도 없이 자위권을 보장하지 못하면 언제든 중동의 평화가 깨질 수 있다고 경고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이 문제에 관해 하마스가 만들어 놓은 지하 터널의 완전한 파괴 및 외부로부터 무기들의 반입 금지 등을 주장할 것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군의 철수도 이를 지렛대로 삼아 협상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냉정히 말하면 협상 중재국들이 나설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직접 협상할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양측의 직접 협상하기에 상호 신뢰가 없다는 점이다. 설령 협상이 되더라도 준수 여부도 불투명하고 돌발 사태에 대해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의회 연설 중 두 명의 의원이 항의하기도 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아랍계로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라는 글씨로, 다른 한 명은 좌파로 집단 학살이라는 글씨로 항의했다. 트럼프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분명히 거부했으며,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가자 전쟁에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이 두 의원의 항의는 매우 당연하다. 트럼프의 관심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면서 노벨 평화상을 노리고, 가자 전쟁 이후 재건 사업에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갖고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아랍국가들도 한몫 챙기겠다는 생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해 왔던 책임을 다소나마 무마하려고만 할 뿐이다. 전쟁 당사국이 빠진 채로 ‘트럼프의 쇼’가 진정한 평화로 이어질지는 안갯속이다. 전쟁 당사국이 빠진 채로 2단계 협상에 돌입한 것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자 전쟁 종식에만 집중하는 듯하다. 가자에 이후에도 전쟁 대신 평화가 오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 수준에서 하나의 해법이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를 반대하겠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증오와 분노만으로 피로 얼룩진 분쟁의 씨앗은 단연코 사라질 리가 없다. 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히 지속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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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는 국가적 안전을 보증하였다. 이반 뇌제는 코사크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보내 시베리아를 경략하도록 했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코사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치이들은 용병처럼 활약하였으며, 캄차트카, 베링해, 태평양까지 러시아의 국경을 확대하였다. 러시아가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은 코사크 인들 덕택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식민지가 창출되면서, 러시아의 중앙부 농민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국가와 지주의 권위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과감히 이주하거나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베리아의 군대 총독들은 이주하거나 탈출한 농민들을 수비대로 재편성하거나 농업 활동에 종사시켰다. 소련 학자들은 이들이 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고 현재도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왜 아시아로 팽창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농노화가 진행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변방 지대 진출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도 농민들에게 토양을 제공하고, 농촌 경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새로운 땅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뇌제가 시베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베리아산 풍부한 모피는 내외적으로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손상을 오랜 시기동안 받았다고 간주한 러시아는 동방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몽골의 후계 칸국 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16세기에도 변방 유목민족들의 공격으로 러시아는 국경지대에서 방어적인 공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방어적 작전에서 이민족을 향한 공격적 자세로 전면적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시베리아를 경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민족은 총 18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중 105개의 종족이 시베리아에 산다. 워낙 많은 민족들이 있는 관계로 러시아 내 민족학 연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지만 가장 전수조사가 어렵기도 한다. 오히려 민족학 연구자들은 연구할게 워낙 많다는 학문적 산실이 시베리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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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중국 수, 당, 송나라 시대의 강남 개발과 강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 제도들의 도입 및 개편
    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나라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 북중국에서의 상쟁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세력 경쟁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북주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로 인해 다시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변동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북주 내부에서 정권의 교체가 발생하게 된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한족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했다. 이어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 정비에 따라 수나라의 국력은 급속히 강해졌으며, 이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588년에 수 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진(陳)나라를 정복하였다. 수나라에 의한 진(陳)나라의 병합은 당시의 국제질서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세력이 통일되어 그 강력한 힘이 외부로 향할 경우,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88년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수나라 건국 초기에 한 때 수나라와 충돌하던 토욕혼(吐谷渾)은 진(陳)나라의 멸망 소식을 접하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송나라 시기까지 변혁론(変革論)이라는 인식론이 나타난다. 이 변혁론은 중국사에서 755년 안사의 난으로부터 11세기 말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에 이르는 시기까지 단순한 왕조의 교체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역사 인식론이다. 이는 고대에서 중세, 이어 근대까지 이행하는 세계사적 보편 발전 과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변혁론은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혹은 당나라 말기 5대 10국까지를 고대 혹은 중세로 볼 것인가, 혹은 송나라 시대 이후를 중세 혹은 근세로 볼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다. 그 쟁점은 송나라 시대 토지 소유 형태, 전호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와 법적 신분 등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해서는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가 발달하면서 지주 및 전호 관계가 지배적이었음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대토지 소유가 서구 중세의 장원제에 비견되는 일원적 경영이었는지, 혹은 명칭만 장원(莊園)이었을 뿐 실제로는 소규모 영세 토지를 집적한 소농 경영에 불과했는가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송나라 이후 봉건론(封建論), 혹은 중세론(中世論)은 일본의 카토 시게루(加藤繁), 슈토 요시유키(周藤吉之),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등이 주장하였고, 주로 도쿄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도쿄학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당나라 이후 균전제(均田制)가 붕괴되고 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기반으로 장원제가 발달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송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시기의 중국 사회를 봉건 후기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슈토 요시유키는 송나라 시대에 대토지 소유가 발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생산자로서 전호는 토지에 매여 있으면서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강하게 예속된 존재로 간주하였다. 곧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경제적 관계이면서도 경제외적 강제가 포함된 봉건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론(近世論)은 1918년경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주창한 이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에 의해 확고하게 나타났다. 교토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교토학파’들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이후 서양의 중국 사가들이 여기에 가세하였고 한국학계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편이다. 이 사론(史論)은 송나라 시대 군주 독재권이 확립되고 관료의 지위가 고양되었으며 인민들의 사유 재산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크게 진작되는 등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의 전환기에 사회 및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역사적 변화를 근세(近世, The Early Modern Period)로 설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근세론은 전호제(佃戶制)를 근간으로 한 대토지 소유제를 인정하며 이 때 지주와 전호는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는 명목상 장원이지만 실제로는 근세적 자본주의적 경영이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에 더하여 지주와 전호는 봉건적 주종 및 예속 관계가 아닌 순수한 경제적 관계이자, 자유농민과 지주 사이의 자유 계약 관계, 일종의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라고 적극 평가하고 있다. 전호의 거주 이전 제한은 그의 도주나 계약 위반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근세론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까지 토지 소유는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고 자손을 위한 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송나라 이후 토지는 일종의 투자 대상이었으며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거의 순수한 경제적 관계였다. 이는 전제 군주의 독재체제 아래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소유와 촌락 사회 위에서 송나라 시대 근세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만을 근세로 간주하는 논자도 있는 것과 같이, 송나라 이후 중국사 전체를 단일한 근세 사회로 확언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지주와 전호가 순수 경제적 계약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호가 법률상 양민으로서 독립된 경영 주체였지만 지주로부터 이탈이 금지되는 등 신분적으로 지주에 예속되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일한 대토지 소유, 혹은 지주와 전호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강남과 변경 지역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의 자본주의 관점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개념과 같지 않다. 근세 자본주의는 전기(前期)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에 기반을 두었던 유통 경제를 상정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근세 성립기 중국 사회의 선진 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정체성과 표리 관계에 있다. 그는 스승 나이토가 중국 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긍정하는 한계를 보인 것과 맥락을 같이 했다. 고대에서 중세로든, 혹은 중세에서 근세로든 간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교체 시대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송나라 시대 이후의 사회는 삼국 시대에서 당나라 시대까지와 크게 다르며 명나라 및 청나라 시대와 동질성이 더 많이 관찰된다. 결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변혁 문제는 황제 및 관료 지배의 전통과 자작농의 끊임없는 재생산, 거듭된 왕조 말기의 반란 등 중국사에서의 장기 지속적 요소들을 구체적 역사 맥락 위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황제 지배의 성격, 개별 인신적 황제 지배 및 귀족제 하의 황제권, 그리고 전제권이 성립된 사대부 사회의 황제나 관료의 성격, 향거리선(鄕擧里選)으로 충원된 관료,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하 문벌 귀족 사회의 관료, 과거제 하의 사대부 관료, 지배층의 성격인 호족, 문벌 귀족, 사대부 및 신사 등을 둘러싸고 일련의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일례로 후주(後周 : 951~960)의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은 960년 거란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출병하였다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의 동북쪽으로 40리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 정변을 통해 송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 강화된 번진(藩鎭) 체제와 5대 10국의 군벌 체제를 증식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송나라 태조는 당나라 말기 번진의 할거 이래 황제의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병권 및 재정권, 혹은 민정권의 회수에 주력하였다. 그는 특히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금군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특히 인종(仁宗) 시기의 80여 만 명, 병권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권화하고 그 통수권은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그 공정성과 개방성을 넓히는 한편, 황제가 과거의 최종 합격자를 직접 선발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채택하여 과거 합격자들과 군주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였다. 과거제를 발판으로 송나라는 군대와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실권자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는 문신 관료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황제는 권신의 집단화를 억제하기 위해 관료들이 재상의 사저(私邸)를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알금제(謁禁制)와 관리의 출신지 부임을 금하는 회피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강력한 첩보망을 동원하여 황제 권력에 반하는 관료나 군사 지휘권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관료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송나라 시대 근세론을 정치적인 배경을 갖춘 군주 독재 체제설의 토대가 되었다. 재상권과 신권을 축소하는 한편 제도적으로 황제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의 최종 결정권을 황제에 집중시키는 송나라 시대의 독재 군주권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독재 권력을 행사한 진(秦)나라의 시황제, 한(漢) 무제(武帝), 수 양제, 당(唐) 태종(太宗) 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송나라 시대 황제 권력은 당나라의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당나라 말기에서 5대 10국에 새로 등장한 형세호(形勢戶)를 기반으로 나타난 사대부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사대부는 과거를 통하여 황제의 인적 기반인 관료로 진출하여 사대부 문신 관료 체제를 구축하였다. 호족과 문벌 귀족은 가문과 출신에 의해 그 신분이 규정되었던 반면, 사대부는 원칙적으로 출신과 무관하며 자신의 능력, 곧 유교 경전 지식과 문필 능력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사대부의 계층 유동성은 송나라 시대 과거 급제자들 가운데 본인의 앞 3대 이내에 관료를 배출하지 못한 비(非) 관료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 시험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대부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사대부가 사실상 중소 지주 이상의 경제력 보유자 혹은 상인 출신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곧 사대부는 국가 권력에 의한 승인과 경제적 부를 존립 기반으로 지식과 교양을 사회적 특권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세력이었다. 지주로서 사대부는 농업 생산을 매개로 지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부(陳尃)의 <농서(農書)>의 사례와 같이 농서의 간행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남에서는 수리 개발에 적극 개입하였다. 수리 개발은 기본적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에 책임을 지었으나 실제 사업 수행에서 부담은 사대부 등 지역 사회 구성원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 아래 북송 당시 여대균(呂大鈞, 1031~1082)이 섬서 지역에서 향약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교화와 상호 부조를 통하여 지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향약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정비되어 이후 명나라 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주희에 의해 정착된 사창(社倉)은 사대부가 주도하는 지역 사회의 자치적 구휼 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사대부의 활동은 그들의 정치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며,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여 사대부가 황제를 대신하여 천하 통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치자(治者) 의식을 강조하였다. 반면, 천하를 향한 근심은 오직 하늘(天)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황제만의 소관이고, 관료는 천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머무는 피동적 존재라는 인식도 공존하였다. 그래서 관료는 황제 권력과 경쟁학기도 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문치주의는 관료 기구의 비대화를 낳았고 행정과 재정의 효율성을 저해하였다. 송나라 태조의 문치주의는 분권적 절도사 체제를 중앙집권적 문신 관료체제로 전환하여 황제 지배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강력한 유목 국가의 출현에 직면하여 송나라 이들에게 줄곧 고전하였다. 거란 요(遼)나라의 7년에 걸친 전쟁 끝에 1004년 송나라는 요나라에 현 북경과 천진, 산서 등의 16개 주(州)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양도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보내기로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 길지 않은 평화가 찾아온 뒤 1126년에는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어 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이후 고종(高宗)에 의해 남송(南宋)이 재건되었지만, 1279년에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 병합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남송의 문인 사대부들은 송나라를 향한 이상적 충절과 현실 타협의 사이에 갈등하면서 원나라의 질서에 편입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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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조선 방문기에 대해
    러시아의 울랴노프스크(Ульяновск)에는 러시아 제국 시절 유명 문학가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이름을 차용한 거리가 있다. 곤차로프는 소설가로 볼가 강 연안의 울랴노프스크에서 상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과 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846년 비사리온 벨린스키(Виссарион Белинский, 1811~1848)과 절친이 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47년에 첫 작품인 <평범한 이야기(Обыкновенная история)>를 발표해서 문단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도예프(Адоев)라는 시적인 한 청년이 수많은 공상과 정열을 품고 있지만, 숙부의 냉담한 설득에 의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결국은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경로를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문단에 러시아 문학 내 이상주의를 환기했다. 그는 예프게니 뿌쨔친(Е. В. Путятин) 제독의 비서로서 세계일주에 올랐고, 1858년에 여행기인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를 발표했다. 당시 곤차로프가 여행한 팔라다 호는 1852년 10월 7일 청나라 5개 항구의 통상권 교섭, 러시아와 일본의 수교라는 임무를 갖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홍콩, 중국, 일본을 차례로 항해하던 팔라다 호는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1853년 8월 9일과 10일 사이 나가사키(長崎)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1차로 방문했다. 이후로 팔라다 호는 일본 정부와의 수교 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5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정하고 11월 11일 출발하였다. 그 후 팔라다호는 상하이 근처 새들 군도(Saddle Islands)를 출발하여 1853년 12월 24일 나카사키에 정박하여 일본을 2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2월 27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5월 22일 시베리아 해안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사이 1854년 4월 2일 안전 문제로 인해 조선의 작은 섬인 거문도에 임시 정박하여 4월 7일까지 머물렀다. 곤차로프는 당시 조선 땅과 조선인들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초가 지붕 뿐이고, 드물게 군데 군데 주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가장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류큐(현 오키나와)인에 비해 체격이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검고 투명해 햇볕을 전혀 차단하지 못하는 이상한 모자(갓)를 쓰고 있다는 점, 담장 쌓는 솜씨가 형편 없는 걸로 보아 게으른 민족일 것이란 추측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그는 조선의 지도 보완 등을 이유로 거문도와 동해안을 방문하고 조사하였는데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조선의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였다. 곤차로프는 조선 주민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헐벗은 산지 등에 실망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외세에 별 거부감이 없는 모습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곤차로프는 이어 자신이 쓴 수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든 것이 벌거벗었고, 궁핍하고 서글프게 보였다. 주민들이 우리에게 식료품을 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겨우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유럽인에 대한 불신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고, 조선 정부가 외국인과의 통상을 금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때인 지금 관계를 맺는 것이 더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유리병과 동으로 만든 단추, 도자기를 보고 달려들었다.” 아마 이는 곤차로프가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고, 안동김씨 세도정권 하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민중을 본듯 싶다. 그가 조선을 관찰한 시기가, 1854년(철종 5년)이니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할 시기였다. 때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 곤차로프가 본 조선인들은 안동김씨 정권에 수탈된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외에도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조선 등의 과거와 현재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특히 곤차로프는 계층 사회로 이루어진 일본의 관료주의, 쇼군과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에 대한 서민들의 공포심 등을 보고 크게 비판하였다. 곤차로프는 개인주의로 팽배한 중국 청나라 또한 뇌물로 부패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중국인이 더 이상 발전을 꿈꾸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또한 비판했다. 곤차로프는 중국이 단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여 개인주의와 불합리성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 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Любопытство вещей)’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갈망(Желание и тоска по переменам)’으로 파악했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유구(琉球), 조선 등의 민족을 하나의 가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곤차로프는 4개 민족 모두가 외모, 성격, 사고방식 등 공통되는 정신적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이 민족들이 갖고 있는 장점보다 ‘황폐하고 비참한 문명사회(Опустошенное и несчастное цивилизованное общество)’라는 시각을 갖고 4개 민족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차로프는 기본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이 인접성의 장점 때문에 유럽과 연결된 동북아시아의 상업적 미래는 매우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일본과 조선이 가깝고, 두 나라는 상하이와 가깝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곤차로프는 삼국이 유럽의 무역과 항해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고 있다. 곤차로프와 뿌챠찐 제독은 1854년 4월 6일 동해안을 탐사 도중에 러시아 함대 팔라다 호 소속 올리부차(Олибуча) 호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을 발견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아침에 발견한 두 개의 높은 바위는 반나절 동안 시야에 있었으며, 이제 명확해졌다. 두 개의 제법 높고 예각의 벌거벗은 바위는 약 300 사젠(642m) 떨어져 있었다. 이들 중 더 높은 서쪽 섬을 ‘올리부차(Олибуча)’라 명명했다. 동쪽 섬을…‘메넬라이(Менелай)’라고 불렀다.” 참고로 올리부차(Олибуча)로 명명된 서쪽 섬은 독도의 서도, 메넬라이(Менелай)로 이름 지어진 동쪽 섬은 동도로 나타나며 아는 서양이 최초로 명명한 독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러시아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팔라다호가 항해를 마친 2년 뒤인 1857년 러시아 해군부가 조선 동해안도를 그릴 때 독도를 포함시켰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 중에 하나인 것이다. 1858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생생히 기록한 여행기라는 점에서 문학가 안똔 쩨홉을 비롯해 여행을 동경했던 당대 러시아인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말미의 조선 불시착기는, 전체 여행 일정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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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캄보디아의 노르돔 시아누크 왕의 일생
    1922년 캄보디아 왕족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아누크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인으로써 당시 왕이 될 적임자는 아니었던 인물이다. 그러한 점이 식민통치를 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최고 적격자로 보였다. 하지만 왕로 즉위하자마자 주변의 예상을 깨고 정략적 외교술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동남아시아 근대사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현대사를 정면으로 돌파한 현실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에 발생한 식민과 독립, 열전과 냉전,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와 내전, 전쟁과 협상, 학살과 화해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정치적 격변에서 때로는 주역으로, 때로는 패배자로, 종국적으로 중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아누크는 이 과정에서 주변 강대국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세력을 상대로 동맹과 투쟁, 연대와 배신을 번갈아가며 결국 협상으로써 약소국인 조국 캄보디아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 노력했다. 1953년 프랑스 보호국이던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는 군사 동맹 불 체결 조약을 선언했다. 1957년 영세중립법을 공포하고 1961년 라오스 국제회의를 제창하는 등 국가의 중립화에 공헌했다. 시아누크는 가난한 나라의 군주였지만, 향락적이고 사치스런 생활도 많이 했다. 뜬금없는 정치 행보와 교묘한 말 바꾸기로 인해 종종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는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렸고, 공식 발표된 아들의 수만도 14명에 이를 정도로 문란한 생활을 했다. 장남인 라나리드 왕자는 첫 부인의 소생이지만, 현 시하모니 왕의 어머니인 모니크(Monik) 왕대비는 공식적으로는 6번째 부인이다. 결혼 당시 이미 여러 명의 부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나서고 있는 미인 대회 입상자를 지금의 왕비로 삼았다. 모니크 상왕비는 프랑스계 이탈리아 사업가와 캄보디아 왕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시아누크는 서방 문화와 동양 왕실 문화에 물든 국제 외교가의 대표적 호사가이기도 했다. 프랑스 와인과 음식 애호가로 시아누크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1967년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Jacqueline Kennedy Onassis)은 시아누크의 주관 하에 연일 이어지는 서양식 연회에 질려 했을 정도다. 독립 이후, 1955년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시아누크는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하여 8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 전 의석을 석권하는 등 첫 총선을 대승으로 장식했고, 국가 주석, 총리, 외교 장관을 겸임하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그의 인생에서 있어서 최대 전성기였다. 시아누크는 1960년대 냉전 상황에서 제3 세계 비동맹 운동의 한 주역으로 활약하며, 캄보디아를 한 강대국의 일방적 세력권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가열되는 베트남 전쟁은 시아누크와 캄보디아를 쇠퇴일로로 안내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시아누크의 묵인 하에 캄보디아 영내를 호치민 루트로 잘 알려진 병참 수송로로 활용했고, 1970년 미국은 친미 정치인 론 놀 장군을 부추겨 베트남 전쟁에 비협조적이던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베이징으로 망명한 시아누크는 그 이후 영욕이 교차하는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나마 망명객을 친구로서 맞아주던 중공의 총리 주은래(周恩來)가 1976년 지병으로 죽자, 그는 의형제를 맺고 지내던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도움으로 북한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시아누크를 위해 주석궁을 차용하여 지은 별장식 궁전도 평양 인근에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말년에는 평양을 자주 방문해 요양을 했다. 시아누크는 생전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비동맹 회의에서 처음 만나 북한을 적극 지지해준 것이 인인이 되어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북한은 시아누크의 망명 생활 중 장수원(長壽院)이라는 궁전을 지어주어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프놈펜 도심에는 현재에도 김일성 대원수 거리가 있으며, 시아누크는 2012년 1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 태양절을 즈음하여 국제 김일성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망명객의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에게도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 이후 친미 정권인 론 놀 정부가 붕괴되고 1975년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낙원을 주창한 크메르 루주에 의해 장악되자, 폴 포트가 이끄는 정권의 상징적인 국가수반이 되어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 세력인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의 이름뿐인 군주에 지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인 폴 포트는 시아누크를 다시 왕으로 추대해 절대 왕정 국가로 회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폴 포트는 다만 시아누크의 명성과 인기를 적절히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시아누크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채 결국 1년 만에 크메르 루주에 의해 직위를 찬탈당하고 정치적인 은퇴를 강요당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에 처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중공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 루주 정권을 타도했으나, 캄보디아의 베트남 속국 화를 우려한 시아누크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 사회를 상대로 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2년 동안의 시아누크의 외교 활동으로 인해 캄보디아는 1991년 결국 유엔 중재로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4개 정파가 모인 가운데 종전 협상을 타결 지었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캄보디아 과도 정부 수반에 선출됐으며, 2년 뒤 유엔(UN) 감시 감독 하에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첫 총선에서 큰아들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정당이 예상을 깨고 압승하자, 실력자 훈 센은 내전 재발을 협박했다. 이에 시아누크는 아들에게 공동 총리 제도를 설득해 제1총리 직은 라나리드 왕자가, 제2총리 직은 훈 센이 나누어 가지는 등 양두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9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해 시아누크는 왕위에 복귀했다. 그 이후 1997년 훈 센 측과 라나리드 진영의 권력 다툼 속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 왕당파인 라나리드 진영이 훈 센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그는 더 이상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그의 장기인 캄보디아 정파들의 중재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노인이 된 시아누크 왕은 전립선암을 겪었으며, 전해진 바에 의하면 1996년에는 가벼운 뇌졸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10월 15일 시아누크는 건강 악화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6
  • 캄보디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납치 및 피싱 범죄, 그 배후는 누구일까?
    최근 들어 캄보디아 접경 지역과 캄보디아 등에서 중국계들의 납치 범죄들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민들에게 각종 피싱 범죄와 인신매매에 대한 경고가 연일 이어지고 많은 피싱으로 의심되는 문자를 받고 있으며 캄보디아에 대해 갖은 흉흉한 소문들이 들려온다. 2020년대 초반부터 캄보디아의 프놈펜, 시아누크빌 등지를 거점으로 한 국제 범죄조직들이 고수익 일자리를 미끼로 한국인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외국인들을 유인하여 납치하고 범죄 센터에 감금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범죄조직들은 SNS나 온라인 구인 사이트를 통해 고수익 보장, 숙식 제공, 항공권 지원 등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구직자들을 유인했으며 IT 개발, 온라인 마케팅, 카지노 고객 관리 등의 직종으로 유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한 피해자들은 여권을 빼앗기고 외부와 차단된 건물에 감금되었다. 이후 범죄조직의 감시 아래 하루 12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암호화폐 투자 사기 등 범죄 행위를 강요받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저항할 경우 폭행, 전기 충격, 고문 등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했으며, 다른 조직에 팔려가기도 했다. 이에 일부 피해자들은 가족에게 연락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풀려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한국의 각종 범죄자들, 해외의 범죄자들이 서식하기 아주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물가도 저렴하고 여러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흑의 통로도 많은데다 관료들이 부패하면 사기 범죄에 특화될 수 있는 토대라 마련되어진다. 특히 6억 이상의 인구에 대다수의 서민들이 가난하다. 그러다보니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이 범죄 카르텔들을 심고 양산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한국과 중국 관련하여 온갖 불법적인 범죄들이 많이 생성되는데 대개 마약과 사기, 인신매매 범죄가 주를 이룬다. 중국 정부는 자국 내 범죄조직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강화했다. 앞서 포스팅 한 것처럼 안면인식 기술이 발달하고, 지문 날인 등의 범죄 수사 기법이 발달함에 따라 범죄조직들은 그 동력을 상실했다. 이들은 법망이 상대적으로 허술하고 부패가 만연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과 같은 지역은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개발된 경제특구이기에 치안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범죄 조직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범죄조직들이 중국을 빠져나가니 중국 내에서는 범죄가 줄어든 반면, 동남아시아나 한국 등에서 중국인 범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들 조직은 캄보디아 현지 당국이 묵인하기도 하고, 막대한 뇌물을 받고 이들을 비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규모 합숙 시설을 갖추고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었다. 피해자들은 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20~30대 청년층들이 많고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이러한 조직들이 동남아시아, 특히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에 자리잡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최빈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자들의 부패가 이루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범죄 조직들이 만들어내는 수익은 연간 125억에서 190억 달러로, 이는 캄보디아 1인당 GDP의 절반 이상에 해당된다. 이 정도로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기에 가성비도 매우 좋은 곳이 동남아시아, 특히 캄보디아 지역이다. 그래서 각종 흉악한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동남아시아로 도망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성비와 범죄 대상 물색하기에도 좋은데다 뇌물을 적당히 주면 숨어 있기 좋고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진행하여 큰 돈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조직의 운영 주체들은 동남아시아 지역 대규모 마약 밀매에도 연관되어 있는 마약 카르텔들이다. 따라서 이들 범죄조직들을 통해,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운영진 측에서 일부러 납치한 이들을 종속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약을 내부에서 퍼트리고 있다. 이 외에도 인신매매, 대포통장 및 대포차 거래, 무기 밀거래, 야생동물 및 광물 밀수, 금이나 비취 등 귀금속과 보석 밀거래, 불법 벌채 및 개간, 돈세탁, 아동노동 등 기존 동남아시아 범죄조직들이 벌이던 다양한 범죄 행위들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으로 인해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친중 국가들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왔고, 고속도로 등 기본 인프라 사업과 더불어 온갖 카지노 사업체들이 중국 건설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 이유는 중국 본토에서 도박과 대규모 카지노 영업 행위가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집권할 때부터 일부 종목들 정도를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에는 반부패 등을 내세워 이를 명목으로 카지노의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2022년부터 중국 공산당 고위직의 은밀한 돈세탁 경로로 애용되었던 마카오에서는 당시 양회 때 카지노 규제가 강화되기로 결정되면서 중국의 비리로 빼돌려진 돈들이 새로이 세탁할 수 있는 경로를 찾고 있었으며, 가까운데다 국가 상태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는 캄보디아가 새로운 탈세와 횡령 등을 세탁할 수 있는 신종 세탁소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마침 캄보디아도 이로 인해 벌어들일 수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특히 2015년부터 중국에서 넘어오는 온라인 도박 사업자들에게 사업자 등록까지 허가하고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에 해외에 카지노를 건립하여 중국인들을 유치하려는 사업체들이 도박하기 쉬운 곳을 찾다보니 캄보디아가 나타난 것이다. 특히 일대일로로 인해 새로운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시아누크빌에 카지노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정부들이 중국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사업상 권리 및 각종 자격이 되는 라이센스들을 뿌렸기 때문에, 중화권 국가들의 조직폭력계 삼합회를 비롯한 흑사회 조직들까지 이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게 되면서 이러한 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한 단지가 건설된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마카오 스타일의 중국 카지노 건물들은 시아누크빌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퍼지게 된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런 자들에게 해외 투자 알선을 시켜주고 이들이 동의하면 해외로 내보내 사업을 하게 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을 가보면 국경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수의 카지노와 클럽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캄보디아 일대일로의 중심인 시아누크빌은 중국의 카지노와 클럽 등의 유흥 사업장들이 점령해버린지 오래다. 중국의 카지노와 같은 유흥 사업장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국의 범죄조직들은 라오스 남부와 캄보디아 북부 지대의 메콩 강 중류 지역 마약밭에서 나온 다량의 필로폰들과 해로인을 판매하는 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를 유통하고 팔던 범죄조직의 총책은 흑사회였고, 흑사회 조직들은,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언론에서 ‘악마’, 혹은 ‘마약왕’ 등으로 묘사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갑자기 캄보디아 언론에 의해 존경스러운 소수민족을 선도하는 지도자로 둔갑했다. 특히 해당 지역은 다수의 카투족(Katuak)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 카투족들에게 얼마 간의 돈을 주고 마약밭을 관리하는 총책을 맡겼다. 이들 조직들은 중국 지방 정부의 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 마약에 대한 집중 조사가 이루어지고 단속이 강화되면서, 마약을 버리고 뛰어든 사업은 카지노와 클럽, 호텔 등의 유흥사업이었다. 이들은 유흥업소를 넘어 각종 온라인 범죄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온갖 온라인 사기 범죄에 쏠쏠히 재미를 보기 시작했고, 장기 밀매 사업까지 손을 댔다. 그리고 온라인 취업 공고로 사람들을 납치해 범죄에 이용하는 등, 그 수법이 날로 잔혹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중국 국적을 가진 자들, 혹은 중국계인데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과 공권력이 이들 범죄자들의 소탕전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를 이를 해결해야 하는데 중국 정부는 매우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들이 해결한다는 것에 대해 국제법상 내정간섭에 몰릴 수 있다며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최종 보스이자 배후가 중국 정부가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심을 피하려면 중국은 이제라도 제대로 입장 표명을 하며 범죄 조직을 소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데 중국 정부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방법이 캄보디아를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일까? 법무부 2021년 12월말 기준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캄보디아 국적자는 41,525명에 달한다 했고 외교부 홈페이지에는 2024년 기준 63,681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과 캄보디아의 다문화 가족인 "한캄가족"의 수효도 만만치 않다. 첫 번째, 캄보디아가 여행금지국이 되면 '예외적 여권 사용'으로 왕래해야 한다. 여행금지국가 지정 이전에 이미 해당국 영주권이나 거주권(체류자격) 등을 취득한 사람이 이에 해당되고, 나올 때는 개인자격으로 알아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여행금지국가 국민은 한국에 입국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주권이나 국적 취득자, 정상적인 비자를 받아 한국에 체류할 자격이 되는 사람은 외교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입국할 수 있기에 매우 까다롭다. 두 번째, '예외적 여권 사용자"는 대한민국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예외적인 방문 시 주의 사항"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행금지국가에 방문 또는 체류하게 되는 경우, 그 기간 중 본인에 대한 안전상 위해 또는 재산상 불이익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고, 정부에 일체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 말은, 여행금지국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 교민으로써 여러 이해관계와 사업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본인이 책임을 지게 되면서 정부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캄보디아에 기반을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 현지 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현재 외교부에 나와 있는 자료 내 캄보디아 한국 교민은 약 8,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면 꽤 많은 숫자고 러시아 거주 한국 교민보다 많은 숫자다. 이 많은 인원이 자신들의 사업을 정리하고 이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 번째, 한캄가족이 캄보디아에 살고 있을 경우다. 캄보디아 부인이나 자식이 한국 국적을 취득 못했거나 결혼비자를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특수 비자를 내줄 수 있겠는가? 내주게 된다면 한국 국내에서 반발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과 일부러 이혼하고 가정 깨고 한국으로 돌아오랴? 비자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고, 이들 가족들이 한꺼번에 한국에 들어오는 것도 좋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한 국가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간혹 잘 알지도 못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행금지국가" 지정 및 "단교"를 스스럼 없이 마구 발언을 남발하는데 한국인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 포용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자기 일이 아니니 마구 뱉어내면 그만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캄보디아 간의 공조로 한국의 공권력이 캄보디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범죄조직 단지들을 무력화시키고 범죄자들과 교전 및 체포하여 국내 법으로 처벌받게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정부가 해결할 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소탕하겠다는 것이다. 범죄자들이 체포에 불응할 시, 사살도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 생각되며 캄보디아 정부 입장에서 볼 때 국제적인 신뢰 문제도 있기에 이러한 협정 조인을 주장하면 조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어느 국가도 범죄 소굴 국가로 낙인 찍히는 것은 원치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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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14
  • 중국 강남 개발의 역사 : 수 양제 시대에 건설된 대운하
    위진남북조 시대 약 400여 년 간의 중국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오랜 분단으로 인해 경제 문화적으로 남북 간의 차이가 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을 재통일한 수(隋) 문제(文帝)는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대운하를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인 재정 문제로 인해 계획에만 그쳤다. 하지만 아들인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완성시켰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이는 남북조 시대 등의 분열 시대로 인해 남북 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04년 수나라의 양제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605년에는 대공사를 일으켜 대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공사 계획의 핵심은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였다. 통제거(通濟渠)는 605년 개착되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지금의 낙양 서쪽에서 낙하(洛河)와 곡수(穀水)로 황하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형양(滎陽)의 사수(汜水)에서 출발하여 황허의 물줄기를 따라 변하(汴河)에 이어지며 회화(淮河)와 합류했다. 통제거(通濟渠)로 인해 황하와 회하(淮河)가 연결되자, 그 해 다시 운하를 개착하여 회하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3년 뒤에 다시 대공사를 일으켜 영제거(永濟渠)를 준설하였다. 영제거는 608년 준설되었으며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천진(天津)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영정하(永定河)를 따라 지금의 북경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2년 후, 강남 운하(江南運河)를 개통하여 여항(余杭, 지금의 항주)까지 연결하였다. 이 운하 개통은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2,700km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였다. 양주(揚州)와 진강(鎮江)에서부터 항주(杭州)에 이르는 구간은 모두 400km 정도로 여겨진다. 수도 낙양에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구간을 모두 합하면 1,700km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대사업을 추진한 것에는 수나라 도성인 장안의 식량 문제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나라 장안 주위가 척박한 땅이라 식량이 부족하여 이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수나라 식량의 주생산지였던 강남에서 말과 인부로 운반하기에는 도성까지 거리가 멀어 효율성이 떨어지며 수로로 운반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하 사업 자체는 국가에 필요한 일이긴 했다. 다만, 최소한 서민 경제 문제에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게 기간을 넓게 잡고 노역에 참여시킬 인원을 적당히 조정했어야 했는데, 결과만 좋으면 된다며 백성들을 강제로 투입시킨 게 문제였다. 거기에다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으로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운하에서 저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재림이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서 수 양제의 폭군적인 면모를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한(漢)나라 이후 개발되지 않은 매우 기후가 습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백성들을 매우 가혹하게 징집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는데 당시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발의 살이 썩어 구더기와 모기 유충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의 대운하는 말 그대로 장강과 황하, 회하를 연결한 것에 그칠 뿐이었다. 이는 강물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운하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팔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기술로 인해 2,700km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강물의 흐름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니 운송선이 운행할 때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게다가 운하가 장안까지 가야했지만 200km 동쪽에 있는 삼문협(三門峽)이라는 최악의 지형이 있어서 조운선은 안전을 위해 300km 동방의 낙양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낙양에서 장안까지 운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낙양 함가창(含嘉倉)부터 섬주(陝州)의 태원창(太原倉)까지 300리를 육상을 통해 물자를 이송해야 했는데, 물자 이송에 필요한 양도 매우 엄청나서 이동시 운송량의 반이 소모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수, 당나라 시기에는 대운하 개통 이후 현종(玄宗) 시기까지 비판을 받으면서 낙양을 장안 못지않게 중시했다. 당시에는 직접 황실과 조정이 낙양으로 행행을 했다. 양제나 측천무후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결국 현종 시기인 734년의 낙양 행행 이후 강회하남전운사(江淮河南轉運使)가 된 배요경(裴耀卿)이 삼문협 동쪽에는 집진창(集津倉), 서쪽에는 삼문창(三門倉)을 설치하여 이 두 조창 간에 뚫은 18리의 통로로만 육상 운송으로 이송시키게 했다. 이로 인해 육로 운반으로 소모된 경비를 무려 40만관이나 줄이는데 성공하여 이후 행행이 중단되었으며, 741년에는 섬주자사 이제물(李齊物)이 삼문협에 통로를 내고 강가에서 많은 끈을 이용해 배를 끌어 올리는 토목공사를 해 개원신하(開元新河)가 완공되며 문제를 많이 해소했다. 주전충(朱全忠. 852~912)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이후 세운 후량(後梁)부터 5대 왕조와 송(宋)나라, 금(金)나라까지 변량(汴梁)으로 수도를 옮겼고, 나중에는 갑문을 발명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후일 금나라가 북송을 정복하고 송나라 조정이 강남으로 피신할 때, 송나라 조정은 금나라의 군대가 대운하를 통해 자신들을 추적할 것을 염려해서 대운하의 각종 시설들을 모두 파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1194년, 수나라 양제의 대운하는 끊기고 말았으며, 대운하의 역할은 원(元)나라 시기에는 바닷길이, 명나라 때는 새로 개발된 대운하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다시 수리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수 양제의 대운하는 끊겨 있는 상태에 있다. 대운하는 장강 이남 지방의 개발과도 맞물려 있는데,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기와 대운하가 개통된 시기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강남의 물량을 화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화북 지방이 계속 지니고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14세기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원나라에 방문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대운하를 북경에서 발원하는 강이라 기록했다. 대운하가 개통되어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남쪽이 북쪽과 연결되어 중국 전체의 유통이 원활해졌다. 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대운하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학대했기 때문에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사실 당나라야말로 대운하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자체 생산력으로는 식량을 충당할 수 없었던 장안(長安)이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를 통한 물자 수송 덕택이었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개봉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경제적인 중요성이 높아지고, 이후 북송의 수도가 되었다. 개봉성의 성곽 중심을 운하가 관통하고 있었다. 대운하의 첫 번째 통로는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거 수리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먼저 통제거(通濟渠)를 파서, 북으로 탁군(涿郡)과 통하게 하였고, 이전에 팠던 광통거(廣通渠)와 연결하여 황하(黃河)와 회하(淮河)를 직접 연결하는 수로 교통이 뚫리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한구(邗溝)와 장강 남부의 운하를 개조하여, 장강, 회하의 여러 지류를 가로지르는 운하 체계를 완성했다. 대운하,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명성을 날리고 있는 중국고대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공사로 전 세계에 유명하다. 대운하는 북으로 탁군에서 남으로 항주까지, 북경, 천진의 두 직할시 및 하북, 산동, 강소, 절강의 4개의 성을 지나가며,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대 수계를 관통한다. 전체 길이는 1,784km에 이른다. 수 양제 양광이 건설한 대운하는 세계에서 하류 운수거리가 가장 길고 공사 량이 가장 많으며 역사가 가장 긴 운하중 하나이다. 운하의 건설에 동원된 인력, 물력, 재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형 운하 공사의 건설을 명하였고, 많은 민간의 인력, 물력, 재력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간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은 수나라의 조기 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수 양제 양광 본인에게도 중국 고대 제왕사상 좋지 않은 명성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隋書-煬帝本紀>上, 卷3의 기록에 의하면, 대업 원년, “하남의 각 군의 남녀 백여만을 보내어 통제거를 파게하고, 서원에서 곡, 낙수를 황하에까지 끌어들였다. 대업 4년에는 “정월 을사. 조서를 내려 하북의 여러 군의 남여 100여 만에게 영제거를 파게 하여, 심수를 끌어들여, 남으로 황하에 이르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했다.”라고 하였다. 우선 수 양제는 대운하를 파기 위하여 수백만의 백성을 동원했다. 이 같은 인력동원은 현재라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수 양제가 이처럼 대규모로 대운하를 파게 된 것에 관하여, 중국 민간에서 전해지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는 수 양제 자신이 운하의 수로를 따라 양주로 가서 미인들과 즐기는 것 이 외에도 양제가 수양(睢陽)의 지기(地氣)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때 한옥(韓偓)의 <開河記>에 의하면, “수양에는 왕기가 나왔다. 하늘에 점을 친 경순신은 황제에게 아뢰기를 500년 후에 천자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양제의 처남이자 간의대부(諫議大夫)인 소회정(蕭懷靜)은 운하를 파서 첫째는 광릉까지 가는 길을 열고, 둘째는 왕기를 파버리자고 한다. 양제는 그의 말을 듣고는 아주 좋아하며 대운하를 파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때의 제동야인(齊東野人)도 그의 장회소설 <隋煬帝艷史>에서 장회의 편명을 “경순신이 천자의 기운을 고하고, 소회정은 운하를 파는 계책을 바치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아주 상세하고 그럴듯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은 대운하를 둘러싼 야사이자 전설이다. 이것으로 역사의 근거를 삼을 수는 없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이 풍수상의 원인인지 아닌지는 이미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이유에 대하여 그 자신이 양주(梁州)에 가서 황음한 일을 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민간 전설들로 판단해 보자면, 대운하의 성공적인 건설은 최소한 수 양제로 하여금 그의 황음무도한 생활을 즐기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隋煬帝艷史>에서는 대운하가 개통된 이후, 양광은 양주경화(揚州瓊花)를 구경한다는 빌미로 여러 번 대운하를 따라 강남으로 가서 엽색 행각을 벌였다. 매번 대운하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양안에는 5색 깃발을 휘두르고, 그 기세가 융중했다고 전한다. 대운하가 지나는 소북의 민간에는 지금까지도 양제가 당시 양주에서 미녀와 즐겼던 황음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수나라 때와 수 양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서와 서적들을 조사하다보면, 그중에는 괴이하고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 사서와 서적에서는 야사 전설의 선입관으로 수 양제를 항상 황음무도한 일만 생각하는 후안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양제를 유사 이래 가장 추악하고 가장 잔혹하며 가장 황음한 폭군이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수 양제가 세계에 유명한 대운하 공사를 벌이고 여러 가지 역사적 업적을 쌓은 것과는 아주 배치된다. 마치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도 그 목적이 미녀를 만나기 위함이라든지, 왕기를 없애기 위함이라 폄하하고 있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수 양제는 양주의 미녀들을 모조리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즐기면 되지 굳이 운하를 축조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왕기를 없애는데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운하까지 축조할 이유 또한 없다. 그렇다면 재력이 많이 들고 사람도 많이 동원되는 대운하를 건설한 이유는 남북 지역의 통합을 염두해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수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히 양주로 미인을 보러 가기 위함은 아니었고 수양의 왕기를 없애기 위함도 아닌 국가 통합의 차원이었다고 본다. 오히려 양제는 물자가 풍부한 강남 지역의 많은 물자들을 북으로 운송하여 경도와 황궁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이 순유하고 시찰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에 대한 일례로 대운하를 판 후에, 강남 지역에서 낙양으로 운송되는 쌀, 비단, 진귀한 보물 등이 계속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일부 역사서적에서는 수 양제를 매우 황음하고 지력이 떨어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수 양제가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고, 당시의 문인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후일 양제는 요사스러운 폭군처럼 묘사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양자강 유역을 기준으로 화북 경제권과 강남 경제권이 분리다. 중국 역사에 있어 군웅할거의 주요 무대가 화북 지방에 집중되다 보니 주목받지 못했을 뿐, 수나라로 통일되기 전까지 강남 지역에서도 왕조가 계속 이어지면서 양자강 유역 이남의 개발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는 금(金)나라에 밀린 송(宋)나라가 강남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강남의 경제력은 송나라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반증이 통일 왕조 중의 하나인 수(隋)나라이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해 짧게 유지되다 망한 중국의 왕조로 여겨진다. 수나라는 400여 년 동안 고착화 되어있던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세워졌지만 안정을 회복하기보다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과욕으로 동북아시아의 또 다른 강자였던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력을 과도하게 소모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북의 물자로만은 부족하게 되니 풍요로운 강남을 이용하려 한다. 육로로 강남의 물자를 가져오는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을 파악한 수나라는 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강남 운하다. 현대의 기술로도 어려운 일이기에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엄청난 인원이 동원인 약 1억 5,000만 명으로 추정되어 남북으로 약 2,700km의 길이의 물길을 약 8년 만에 만들어냈다. 그 외에도 토목 사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는데 동원된 백성들의 원망으로 돌아선 민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경제의 중심이었던 여항(黎杭, 항저우)에서 시작된 운하는 정치의 중심 중 하나였었던 낙양(落陽)을 거쳐 북방 군사의 중심이던 탁군(涿郡, 베이징)까지 이어진다. 운하로 강남의 풍요가 화북까지 이어져 전쟁 준비는 마쳤지만 자만으로 시작된 전쟁은 패배는 귀결되었다. 짧았지만 강하고 단순했던 수나라로 인해 이후에 성립된 왕조들은 운하를 이용해 긴 기간 대륙을 통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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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뇌부부터 말단 집단까지 포함한 다른 집단들의 연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하고 지휘할 수 있는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수뇌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콜차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 대도시들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보지 못했다. 병력도 적어 한계가 있는데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다보니 강력한 적군의 무력이 더욱 증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의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 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이 피지배계층이라고 무시하며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이자 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코사크와 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대의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를 유도해 투항시키거나 탈영을 유도했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했다. 백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파기되었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뀌어진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발트 해 국가들이 간섭 군과 더불어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중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 이 외에는 카프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리에 의해 7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이 긴 전쟁을 이미 치루었던 차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였던 데다 간섭 군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新韓村)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920년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부 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적군의 트랴피친(Тряпицын)의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볼셰비키 군에게 패배했고, 이 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 국가로 탄생되었다. 마지막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Анатолий Пепеляев)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볼셰비키의 포로가 된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까지 남아있는 외부 간섭 군대인 일본군도 1924년에는 완젆;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며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이에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들에 괴뢰 국가들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 행위에 영토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것에 급급하여 그러한 비어진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도 했으나 백군과 협동으로 인해 파르티잔들을 진압했고, 자국의 군대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反)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러자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측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1920년 반(反) 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인해 붕괴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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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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