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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에서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그리고 거북의 신비로운 역할
    옛사람들이 주역을 이해하고자 할 때 중요하게 여기던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주역 계사전에 등장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그림입니다. 위 그림의 배경은 하늘에서 해와 달이 돌면서 생겨나는 천체의 변화[왼쪽]와 그로 인한 땅의 복사열[오른쪽]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도와 낙서를 두고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의 압축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 글자 뜻도 그렇습니다. 하도(河圖)는 하늘에서 절기에 맞춰 움직이는 해와 달 중심의 별자리 배치도를 뜻하는 말이고요.. 낙서(洛書)는 그로 인한 지구상의 복사열을 수로써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던 게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전설로 신비화되면서 많은 말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즉 하도는 복희씨 때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55개의 점이 찍힌 모습으로 나타난 그림이었다고 하고, 낙서는 하우씨 때 낙수(洛水)에서 나타난 거북이 등 그림으로, 45개의 점이 있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55와 45의 수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십진법에 의존한 천체의 변화를 상징하는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역의 계사전에서 언급하면서 하출도(河出圖) 낙출서(洛出書)로 줄여서 말하는 데 계속 이어지는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신령스러운 물건을 내었는데, 성인이 이를 본받아 법을 삼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구절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말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모든 학자가 이를 믿은 것은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구양순이라는 학자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허구라고 생각했고, 주역의 계사전 내용도 공자의 설이 아니라는 식으로 비판적으로 보았어요. 그럼 지금의 우리는 어떤 시각이라야 옳을까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돌아보는 일이에요. 거북을 통한 세상 변화의 의미, 즉 용마(龍馬)를 내세워 천체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던 옛사람의 지혜 바로 그것을 살펴보는 일이겠지요. 그러자면 주목해야 하는 게 과거 문헌에 등장하는 거북의 역할입니다. 옛날 기록에는 거북과 관련된 신비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위나라 때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 강물에서 하도 모양과 비슷한 보석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어떤 기록에는 우물을 파다가 발견된 거북 등에 8괘 무늬가 있었다고도 해요. 심지어 금나라 때는 천둥과 비가 내린 후, 얼음으로 된 거북 모양의 덩어리가 수십 리에 걸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 얼음 거북들의 머리와 발에는 주역의 8괘 무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옛사람들은 거북을 하늘의 신비로운 징조로 생각했어요. 자연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들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해하는 삶의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사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뜻입니다. 한편 거북은 오랫동안 점을 치는 도구로 사용되었어요. 세상에 대해 알 수 없는 변화를 예측할 때 거북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한나라 때는 천자가 큰 거북을 사용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점쳤다고 해요. 이 거북의 이름은 채(蔡)였는데, 거북이 주로 발견되던 지역이 채나라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어요. 공자와 그의 제자들도 점치는 거북을 언급했어요. 공자의 제자 칠조빙은 거북을 사용해 점을 친 예를 이야기하며, 공자의 시대에도 거북이 중요한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옛날 노나라의 한 대부가 남의 거북을 훔쳐 점을 치곤 했는데, 점괘가 나쁘면 버리고, 좋으면 따랐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처럼 거북은 단순히 동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신비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중요한 상징물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문헌상으로 전해오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묻게 되는 삶의 근본에 관한 문제일 거에요. 단순한 동물로서의 거북이 아니라, 하늘의 신비로운 이치를 담은 상징으로 그것을 대했다는 사실이겠지요. 실제로 물속의 거북은 묘하게도 세상의 현상을 복점(卜占)으로 알려주는 기능이 매우 뛰어난 매개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같은 옛사람의 뜻에 주목하여 거북을 떠올리면 되는 것이지요. 곧 눈앞의 이해관계가 아닌 내가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하늘의 뜻에 관한 관심 바로 거기에 우리 마음의 눈이 맞춰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하늘과 땅의 거북 이야기 하도(河圖)로 새겨진 별들의 노래,강물 위로 출현했던 용마(龍馬)의 무늬로 55개 점을 통해 옛사람은 봤다 하고 낙수(洛水)에 출현했던 거북 등의 문양 45개 무늬로서 복사열을 노래하니.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로서 전승해온 그 이치 하늘과 땅을 읽는 지혜의 산물일 터 그럼에 거북은 성스러운 영물이요 하늘의 신비로움 강물에도 드러나길 비 내린 뒤 낙서 그림 얼음의 형상 빌려 수십 리를 뒤덮는 조화를 보이면서 천자는 채라는 이름의 거북을 활용해 나라의 다가올 운명을 묻게 되고, 공자의 제자는 그에 관한 여러 기록 문헌으로 남겼다네 이 같은 옛사람의 거북 관련 여러 일화 우주와 우리 삶의 근본 향한 관심임에 이제는 우리도 그 자취를 본받아 보고 듣는 일상의 눈앞의 이익 너머 하늘과 땅의 묘한 조화 그 변화하는 이치를 거북이 아니라도 묻는 일상 살아보자 그것이 우리 삶의 올바른 마음의 눈.하늘의 뜻을 읽고, 땅의 소리 듣는 일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로운 삶이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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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
    2025-01-22
  • 양경공 무덤을 다시 손본 이야기 및 검정과 흰개미의 싸움
    정자는 역(易)에서 말하는 하늘의 작용을 두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색(無色) 무취(無臭)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즉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그래서 이처럼 본래 실체가 없는 하늘 기운의 힘, 곧 그것이 우리 마음의 신비로운 작용으로 나타났던 사례에 관해 일화입니다. 옛날 사람들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목은 이색 선생님의 막내아들, 양경공 이종선입니다. 양경공의 무덤은 한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좋지 못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연산군이 나라의 권좌를 차지하면서 자기 어머니와 관련된 사건과 관련이었다. 양경공의 손자였던 이파가 연산군에게 직언을 문제 삼아 가문이 참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경공의 무덤도 파헤쳐지면서 비극을 맞아야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중종이 반정으로 임금에 오르면서 연산군이 왕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양경공의 무덤은 여전히 복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야 당연히 경제적인 문제였지요. 몰락한 집안의 형편으로 인해 거기까지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경공의 방계 가족 가운데 이유청은 이런 경험을 합니다. 제법 벼슬이 높았던 그의 꿈에 양경공이 나타나서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내 무덤이 허물어진 지 오래되어 바람과 비를 막을 수가 없구나. 이제 너만이 내 무덤을 고칠 수 있으니, 제발 잊지 말고 기억해다오.” 이유청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어요. 너무 놀라고 무서웠던 거죠. 그래서 그는 양경공의 직계 후손 이질을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말을 들은 이질은 이유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연산군 때 우리 할아버지가 큰 벌을 받으면서 양경공의 무덤까지 허물어졌습니다. 하지만 자손들이 힘이 약해서 아직도 고치지 못했지요.” 이유청은 그 한마디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을 정해 양경공의 무덤을 새로 쌓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 드렸답니다. 결코 믿어지지 않는 역사 속 일화에요. 송화잡설과 죽창야화에 실린 내용입니다. 한편 이같이 믿지 못한 기이한 일화는 그 밖에도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체를 겪어보지 못한 기적적인 실화에 대해서 한가지를 더 소개하기로 합니다. 촉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미축입니다. 그는 자가 자충으로 동해군 구현 사람이었습니다. 위오촉 삼국 시대의 유비를 섬겨 벼슬길에 나섰으며 뒷날 안한 장군에 임명되었지요.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수신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그가 한번은 낙양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집을 수십 리 앞두고 길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다가오더니 수레에 태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 부탁을 주저하지 않고 선뜻 들어 줍니다. 몇 리를 함께 오다가 여자가 예를 갖추어 사례한 뒤 떠나려고 하면서 그에게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실은 천제의 사자로서 동해군에 있는 미축의 집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고 지금 태우러 가는 길입니다. 당신이 수레를 태워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답례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여자에게 집을 불태우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이 일은 천제의 명령이기 때문에 불태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당신은 급히 말을 달려가십시오. 저는 천천히 걸어서 가겠습니다. 불은 정오에 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가재도구를 옮겨 놓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정오가 되자 불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일화는 어떨까요? 조선 시대의 선조 신묘년(1591년) 때의 일입니다. 정승 윤승훈이 강릉 부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관내에는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흰개미와 검정 개미의 싸움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그들 개미는 바다로부터 몰려와 그곳 강릉 고을에서 서로 엉켜 싸우다가 죽어가는 무리가 높은 언덕을 이루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때 바야흐로 이웃 왜의 침략을 염려하였으므로 그곳의 부사에 윤공을 대신한 무신을 임용해 보낸 것입니다. 과연 임진왜란은 그 다음 해에 일어납니다. 대신 임진왜란을 맞아 전국의 모든 고을이 다 도륙을 당했지만 강릉 일대만은 병화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으니,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허황스러운 이야기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느낌은 비단 이런 류의 옛사람 기록만으로 그치지가 않습니다. 해와 달의 움직임을 좌표로 구성한 주역의 체계에 이르면 그게 정말 가능하겠느냐는 의구심이 절로 생겨나게 됩니다. 송(頌) 생사를 넘나들며 꿈이 전한 소식 바람과 비 막는 기적을 부르면서 허물어진 무덤에 새 생명을 주었다네. 권력에 밀려나 쇠락한 가세에도 기묘한 뜻 하나가 꿈으로 이어져서 정성 어린 손길로 무덤을 쌓게 하며 적선(積善)에 뜻을 둔 옛사람의 행동이 천제의 뜻 전하는 길 위의 사자에게 수레를 이용한 자비심에 힘입어서 불타는 집의 재앙 벗어날 수 있게 하니 정오의 불길에도 천상 흐름 뒤바꾼 선한 마음 의존한 묘한 삶의 기적일 터 그뿐인가 바닷가 개미의 묘한 싸움, 백사장에 몰려와 언덕을 이루면서 왜군의 그림자가 세상을 휩쓸 때도 그 참혹한 병화를 강릉 땅은 비켜 가니 이같이 믿지 못할 옛 기록 속 일화들 하늘의 움직임이 음양(陰陽)의 부호로 주역에 새겨지는 기묘한 그림 같아 그 같은 마음으로 세상사를 돌아보면 현실 속 우리의 알 수 없는 묘한 생애 바람과 비, 불길과 개미로도 감지됨에 천지의 이치 속 기미에 밝아야만 일상의 우리 삶이 아름답게 빛나면서 옛사람을 본받는 후회 없는 생이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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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
    2025-01-20
  • 절하는 풍속과 주역의 중지곤(重地坤) 괘
    우리나라의 풍속은 대체로 주역에 토대하고 있음은 이미 밝힌 대로다. 동지에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속, 해와 달이 운행하는 28수를 본떠 흥을 돋구는 오락으로 대신한 윷놀이,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영혼을 기억하면서 명복을 빌어주는 49재 및 삼우제(三虞祭) 등 물론 한글의 만들어진 배경도 예외가 아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사람을 손님으로 맞거나 어른으로 대접을 할 때 보여주는 예절 가운데 절하는 풍속에 대해서 살피고자 한다. 의례(儀禮)의 편명인 공식대부례(公食大夫禮)에 의하면 주인과 손님, 아래 사람과 윗사람, 신하와 임금 등의 관계에서 절하는 횟수를 두 번이라고 말한다. 졸식(卒食)의 본문 내용 가운데 나타나 있다. “손님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 공이 사례한다. 그러면 손은 올라가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다.”라고 하였다. 또 신하가 임금에게 절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서로가 주고 받는 절의 횟수를 따지면 네 번에 걸친 행위가 되는데 임금을 직접 보지 않으면 두 번의 절로 대신하였다. 이를 맹자에서는 “임금의 명으로 하사물을 보내오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는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옛 풍속에서 사람을 보고 두 번 절하는 이유는 배경이 결국 주역이다. 삼천양지(參天兩地)의 수를 음양(陰陽) 부호로 대신했을 때 중지곤(重地坤) 땅 괘는 두 마디가 되고 중천건(重天乾) 하늘 괘는 하나로서 길게 이어진 세 마디를 절을 하는 동작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주역 곤괘의 문언전에 보면 “음은 비록 아름다움이 있으나 머금어서 왕의 일을 좇아서 이루지 못하니, 땅의 도이며, 아내의 도며, 신하의 도이니, 땅의 도는 이룸은 없되 이어서 마침을 둔다.”고 하였다. 또 계사전에 보면 건(乾) 하늘은 쉽게 주장하고 땅 곤(坤)은 간단하게 능하니, 주장함이 쉽고 따름이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거기에서 얻는다고 했으니 두 번 절하는 풍속은 사람이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이치를 쫓아 마땅한 도리를 본받으려는 것이다. 이를 수리적으로 보더라도 양은 셋이고 음은 둘이 근본이므로 세상살이에 있어서 두 번 절하는 이치가 그로 인한 결과다. 이외에도 음악의 음계를 정하는 율려의 기준도 그렇고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도 모두가 주역에서 생겨났다. 학문(學問), 도서관(圖書館),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하학(形而下學) 등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정신의 뿌리에 눈뜨고자 하면 결코 몰라선 안 되는 게 바로 주역의 기본 이치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민족의 미풍양속 떠올리는 순간이면 부지중에 그려지는 동짓날의 풍경 팥죽을 써서 정을 나누던 그 아름다움이며 윷놀이에 의탁한 흥겨운 유희까지 어디 그뿐인가 죽은 자를 기리는 49재 및 삼우제(三虞祭)의 전통 거기에 우리 글로 창안된 한글의 구조와 예를 갖춰 사람을 상대하던 절하는 동작 등도 수로써 표기한 주역의 이치 아닌 게 없으니 하늘과 땅의 삼천양지(參天兩地) 음양의 조합을 따른 조상들의 아름다운 지혜여라 건(乾)이 이끌고 곤(坤)이 뒤따르는 천하의 도리를 그 안에 숨기고서 우리의 노래, 말, 글, 일체의 생활 속에 주역으로 정리한 세상살이의 아름다움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덕 우리 정신의 맥박 되게 하니 그 이치에 눈을 뜨는 우리의 일상이라야 밝고 아름다운 내일의 우리들 되리
    • 칼럼
    • 주역
    2025-01-16
  • 동양 사상의 대표적인 두 문헌 주역과 화엄경에서 배우는 우리 삶의 성찰
    주역의 구성 내력에서 살폈듯 세상은 음(陰)과 양(陽), 빛과 어둠, 선(善)과 악(惡) 긍정과 부정 및 하늘과 땅이 어우러져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사는 원리는 주역에 숨어 있는 음양(陰陽)의 변화에 주목함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의 경전이 또 한 권 있습니다. 불교의 화엄경입니다. 그곳에서도 주역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중생과 부처라는 두 종류의 대립적인 삶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말하며 그 대처법을 가르칩니다. 그 점에서 이 두 책은 서로 내용과 형식이 다르면서도 실제로는 비슷합니다. 그래서 화엄경의 본문 내용을 공부할 때 간혹 주역의 시각에서 해석한 이통현 장자의 화엄신론을 절 집안에서 텍스트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눈을 위해 그 안에서 들려주는 옛사람의 시각을 간략하게나마 둘을 서로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역입니다. 음양의 조화와 세상의 시작 주역에서는 세상이 시작될 때의 모습을 두 괘(괘는 주역에서 사용하는 그림 같은 상징)로 표현합니다. 수뢰둔(水雷屯)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의 첫 시작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산수몽(山水蒙)은 아기가 세상을 배우고 자라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두 괘는 우리가 처음 무언가를 시작할 때 겪는 삶의 어려움과 학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설명할 때 맞춰지는 가르침의 포인트가 세상이 펼쳐지게 하는 하늘과 땅의 덕입니다. 하늘과 땅의 덕 주역에서 강조하는 하늘(乾)과 땅(坤)의 덕 그것은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는 행위의 반영입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돕는다는 것은, 우리가 허용적이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행동할 때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이 밝고 올바르다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늘이 우리를 품어주고 길을 열어주게 된다는 데 포인트가 맞춰집니다. 반면 화엄경은 주역과 같으면서도 다른 설명을 합니다. 그 책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십신(十信)은 우리가 본래 품고서 살아가는 성스러운 마음의 특징을 믿는 단계입니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점점 더 마음을 키우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노력과 마음이 세상과의 관계성 속에서 좋은 결실로 나타남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엄경에서 말하는 십지(十地)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주역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택리(天澤履) 괘는 하늘과 연못이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올바른 마음으로 하늘처럼 높고 세상을 사랑하는 밝은 뜻을 품고 살면 그로 인한 기쁨이 연못처럼 세상에 퍼져나갈 수 있게 된다는 뜻의 괘상입니다. 물론 이는 군자와 소인이라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해주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시각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늘의 덕을 추종하는 양적(陽的)인 삶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까닭에 주어지는 삶의 평온함이 있습니다. 반면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소인의 삶이 되면 매사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길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두 갈래의 길을 두고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자기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늘처럼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삶은 하늘이 축복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우리의 세상살이가 어려움 속에서도 이웃과 근심을 함께 나누는 삶을 권장합니다. 그리고 불교 화엄경에서는 그 길에서의 첫걸음을 발광지(發光地)로 표시를 합니다. 발광지는 자신이 품고 살아가는 빛의 작용을 믿고 세상을 밝히는 단계를 뜻합니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지뢰복(地雷復) 혹은 화지진(火地晉)이라는 괘로서 표현합니다. 불처럼 빛나는 마음을 회복하여 그 어려움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결론: 음양의 춤, 세상의 조화 결국, 주역과 화엄경은 모두 우리가 세상과 어울려 살면서 서로를 사랑하며 조화를 이루는 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음(陰)과 양(陽), 빛과 어둠, 중생(衆生)과 부처 및 하늘과 땅이 둘 아닌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듯이, 우리의 마음과 행동도 세상과 어울릴 때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처럼 밝고 땅처럼 자기를 비운 사심 없는 시각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빛을 내며 나를 밝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만 후회 없는 자기의 인생이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음양의 춤, 세상의 조화 하늘과 땅이 만나며 세상이 열림에 음(陰)과 양(陽)이 어우러져 빛과 어둠이 춤을 춘다 주역 수뢰둔의 첫걸음처럼 삶은 고통 속에서도 배움을 통해 자라나는 법. 거기서 기억할 우리의 행동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은 신비로운 작용이 하나며 만물을 포용하는 땅의 건강한 마음이 또 하나다. 이 같은 둘의 조화 우리에게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감에 매사를 긍정하며 허용하라. 우리 마음에 이미 깃든 성스러운 생명의 빛 십신의 믿음으로 그 싹을 틔우고 십지의 결실로 세상을 밝혀보라 화엄경이 전하는 우리 삶의 진실 그것은 주역의 군자처럼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데 있다 천택리(天澤履)의 괘상으로 알려주는 연못처럼 마음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출렁여야 하고 화지진의 불꽃처럼 어둠을 밝히며 앞으로 나아가자 자기 안에 품고서 펼쳐지는 마음의 밝은 빛 세상을 비추는 조화로운 걸음 될 때 음양(陰陽)은 둘 아닌 하나의 경계로서 세상과도 둘 아닌 우리 삶이 될 터이니 하늘처럼 밝고, 땅처럼 사심 없이 자기 안의 빛을 품고 의연한 삶을 살자 그것이 후회 없는 자기의 삶이리니 위 내용과 어울리는 삽화를 가로로 그려줘
    • 칼럼
    • 주역
    2025-01-14
  • 세상을 이해하는 본질 역(易)이란 무엇인가
    주역은 흔히 점치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랜 우리의 역사에서 볼 때 민족정신의 토대를 이루는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때의 주역은 철학적 세계의 결정체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의 사유 체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으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반된 인식 속에서, 우리는 주역을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야 할까요? 역(易)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 전통문화 속에서 역의 이치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국보 1호로 지정된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한양 수도 남쪽 관문이었던 숭례문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북쪽의 숙정문(肅靜門)과 함께 서울의 사대문 중 하나로서 각각 독특한 이름과 의미를 지닌 주역 이치의 반영입니다. 그 가운데 흥인문(興仁門)은 주역에서 봄의 덕(元德)을, 돈의문은 가을의 덕(利德)을, 숭례문은 여름의 덕(亨德)을, 숙정문은 겨울의 덕(貞德)을 상징합니다. 이는 모두 주역에서 말하는 주역 하늘괘의 괘사 원형이정(元亨―利貞)에 해당하는 개념이니 주역이 우리 조상들의 정치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친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또 다른 예는 한글입니다. 한글 모음은 음(陰)과 양(陽)의 이치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자음은 오행(五行)과 연결되어 ㄱ, ㅋ은 목기운(木氣運), ㄴ, ㄷ, ㄹ, ㅌ은 여름의 화기운(火氣運), ㅁ, ㅂ, ㅍ은 땅의 중화 작용을 대신한 토기운(土氣運), ㅅ, ㅈ, ㅊ은 가을의 금기운(金氣運), ㅇ 등은 겨울 수기운(水氣運)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한글 구성의 원리는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처럼 자연의 조화로운 이치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멀리는 사물의 이치에서 본뜨고 가깝게는 우리 신체의 구조에서 취한다는 게 주역 계사전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자음의 전체적인 형식은 우리 신체의 기능과 특성을 반영한 게 바로 자음의 원리입니다. 이처럼 주역은 우리 민족의 모든 정신의 토대로 작용합니다. 실제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일상으로 기억하고 살아가는 태극기는 어떻나요. 거기에는 전체적인 구도가 바로 주역의 이치입니다. 세상의 본질인 흰색 바탕, 해그림자의 무늬를 취해 온 태극 문양, 그리고 건곤감리의 네 괘는 이미 밝힌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거기에 반영된 음양과 사상의 구조 등이 주역의 전체적인 기본 원리입니다. 이처럼 역의 이치는 우리 삶과 문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이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첫째는 세상 모든 만물은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는 변역(變易)의 이치입니다. 그것도 물과 불의 상징적인 변화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겨울에 물이었던 게 여름이면 기체 즉 불로 변합니다. 그 과정의 변화는 겨울이 봄으로 봄이 여름으로, 여름이 가을로,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자연의 순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주역에 관심을 둘 때 먼저 주목해야 하는 첫 번째 개념입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변하는 가운데에도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이를 불역(不易)이라고 합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여야 한다는 이치가 그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간이(簡易)입니다. 세상의 진리는 쉽고 간단합니다. 봄의 따뜻한 기운이 들판의 꽃을 피우는 데 특별한 계산이 필요하지 않듯이, 자연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조화를 이룹니다. 이처럼 변역, 불역, 간이는 세상의 근본 이치이며, 역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철학적 원리입니다. 이런 뜻을 배경에 두고서 주역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죽어서라도 실체가 분명하다는 실재론적인 사고를 품고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반문 끝에 돌아오는 답이 변하고 바뀐다는 주역의 개념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삶은 올바른 게 됩니다. 그럼 그게 어떻게 역의 본질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易의 노래: 세상의 이치 봄이면 꽃 피고 여름이면 겨울의 물, 불로 변하면서 우리 눈은 무엇을 보며 세상을 살아 갈까 변하는 가운데 변치 않는 이치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간단한 이치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 흥인문(興仁門)의 봄 기운 ,숭례문(崇禮門)의 여름 기운 돈의문(敦義門)의 가을 기운, 숙정문(肅靜門)의 겨울 기운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든 역의 이치 .원형이정(元亨利貞) 중천건(重天乾) 괘사 등에 의탁한 태극(太極)의 문양, 한글의 음양(陰陽) 주역의 깊은 철학 빌려서 활용하니그것은 음(陰)과 양(陽) 그리고 다섯 가지 범주의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불리우는 오행 해와 달의 움직임을 활용한 지혜임에 변역(變易) 불역(不易) 간이(簡易)의 길 위에서 분명하게 속삭이는 주역의 가르침 우리가 보아야 하는 마음의 눈 변화 속에서 영원을,다양함 속에서 단순함을,언제나 따라야 할 옛사람의 지혜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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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2
  • 태극(太極) 문양으로 상징되는 한민족의 꿈
    태극(太極) 문양으로 상징되는 한민족의 꿈 작금의 조국 현실을 돌아보면 누구나 심정이 착잡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크게 염려할 게 없다.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민도(民度)가 크게 올라와 있고 우리에게는 직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놀라운 저력이 감춰져 있다. 보수라고 다를 게 없으며 진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믿고 하늘을 믿으면서 스스로가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만을 묵묵히 해나가면 된다. 그래서 이를 역(易)의 이치에 바탕을 둔 문장으로 엮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맞춰지게 된다. 태극 문양으로 상징되는 한민족의 꿈 보라 억만년 세월을 견디며 오래도록 전승해온 우리 한민족의 얼 하늘의 해와 달은 어둠과 빛을 오가며 그 위를 언제나 비추었고 흐르는 세월의 신비로움으로 떠올라 빛을 뿜던 이 땅 우리 한민족의 지혜 손에 쥔 우주의 법칙은 문양이 태극이요 그 속에 새겨진 삶의 질서는 해와 달의 광명이니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도 자연의 이치와 어울린 우리의 창조 정신 분명했었기에 해와 달의 밝은 빛은 어둠 속에서도 찬란했고 그림자로 드리워진 길 위에서도 형형한 그 정신 언제나 뚜렷했나니 견디며 써 내려온 우리의 역사 우리의 길 위로는 하늘의 해가 비춰주는 신성한 앞길이요 어둔 밤일 때도 우리의 잠자리 포근하게 감싸던 하늘의 밝은 달빛 그것이었지 그렇기에 우리가 부르는 창조의 노래는 이민족의 시달림에도 항상 의연했고 우리가 남긴 자취의 뚜렷함 태극 문양의 긍지로 꽃 피울 수 있었던 터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휴식하는 시간에도 그 정신 앞산과 들녘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로 찬란한 민족의 발자취로 남았으니 가가호호(家家戶戶) 나부끼는 태극의 문양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 한데 모인 거룩함 민족의 얼 대신한 민족혼의 상징임에 이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직 하나 홍익인간 정신만을 머리에 떠올리며 내일로 향하는 힘찬 걸음 되게 하되 세월을 넘어선 한민족의 수 천 년 전통 빼어난 창조 정신과 지혜로 되살려서 신비로운 해와 달의 운행에 맞춘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정신 저 태극 무늬의 긍지로 꽃피우는 우리의 내일 밝아오는 신성한 아침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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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실시간 주역 기사

  • 주역에서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그리고 거북의 신비로운 역할
    옛사람들이 주역을 이해하고자 할 때 중요하게 여기던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주역 계사전에 등장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그림입니다. 위 그림의 배경은 하늘에서 해와 달이 돌면서 생겨나는 천체의 변화[왼쪽]와 그로 인한 땅의 복사열[오른쪽]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도와 낙서를 두고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의 압축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 글자 뜻도 그렇습니다. 하도(河圖)는 하늘에서 절기에 맞춰 움직이는 해와 달 중심의 별자리 배치도를 뜻하는 말이고요.. 낙서(洛書)는 그로 인한 지구상의 복사열을 수로써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던 게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전설로 신비화되면서 많은 말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즉 하도는 복희씨 때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55개의 점이 찍힌 모습으로 나타난 그림이었다고 하고, 낙서는 하우씨 때 낙수(洛水)에서 나타난 거북이 등 그림으로, 45개의 점이 있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55와 45의 수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십진법에 의존한 천체의 변화를 상징하는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역의 계사전에서 언급하면서 하출도(河出圖) 낙출서(洛出書)로 줄여서 말하는 데 계속 이어지는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신령스러운 물건을 내었는데, 성인이 이를 본받아 법을 삼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구절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말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모든 학자가 이를 믿은 것은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구양순이라는 학자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허구라고 생각했고, 주역의 계사전 내용도 공자의 설이 아니라는 식으로 비판적으로 보았어요. 그럼 지금의 우리는 어떤 시각이라야 옳을까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돌아보는 일이에요. 거북을 통한 세상 변화의 의미, 즉 용마(龍馬)를 내세워 천체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던 옛사람의 지혜 바로 그것을 살펴보는 일이겠지요. 그러자면 주목해야 하는 게 과거 문헌에 등장하는 거북의 역할입니다. 옛날 기록에는 거북과 관련된 신비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위나라 때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 강물에서 하도 모양과 비슷한 보석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어떤 기록에는 우물을 파다가 발견된 거북 등에 8괘 무늬가 있었다고도 해요. 심지어 금나라 때는 천둥과 비가 내린 후, 얼음으로 된 거북 모양의 덩어리가 수십 리에 걸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 얼음 거북들의 머리와 발에는 주역의 8괘 무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옛사람들은 거북을 하늘의 신비로운 징조로 생각했어요. 자연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들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해하는 삶의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사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뜻입니다. 한편 거북은 오랫동안 점을 치는 도구로 사용되었어요. 세상에 대해 알 수 없는 변화를 예측할 때 거북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한나라 때는 천자가 큰 거북을 사용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점쳤다고 해요. 이 거북의 이름은 채(蔡)였는데, 거북이 주로 발견되던 지역이 채나라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어요. 공자와 그의 제자들도 점치는 거북을 언급했어요. 공자의 제자 칠조빙은 거북을 사용해 점을 친 예를 이야기하며, 공자의 시대에도 거북이 중요한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옛날 노나라의 한 대부가 남의 거북을 훔쳐 점을 치곤 했는데, 점괘가 나쁘면 버리고, 좋으면 따랐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처럼 거북은 단순히 동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신비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중요한 상징물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문헌상으로 전해오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묻게 되는 삶의 근본에 관한 문제일 거에요. 단순한 동물로서의 거북이 아니라, 하늘의 신비로운 이치를 담은 상징으로 그것을 대했다는 사실이겠지요. 실제로 물속의 거북은 묘하게도 세상의 현상을 복점(卜占)으로 알려주는 기능이 매우 뛰어난 매개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같은 옛사람의 뜻에 주목하여 거북을 떠올리면 되는 것이지요. 곧 눈앞의 이해관계가 아닌 내가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하늘의 뜻에 관한 관심 바로 거기에 우리 마음의 눈이 맞춰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하늘과 땅의 거북 이야기 하도(河圖)로 새겨진 별들의 노래,강물 위로 출현했던 용마(龍馬)의 무늬로 55개 점을 통해 옛사람은 봤다 하고 낙수(洛水)에 출현했던 거북 등의 문양 45개 무늬로서 복사열을 노래하니.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로서 전승해온 그 이치 하늘과 땅을 읽는 지혜의 산물일 터 그럼에 거북은 성스러운 영물이요 하늘의 신비로움 강물에도 드러나길 비 내린 뒤 낙서 그림 얼음의 형상 빌려 수십 리를 뒤덮는 조화를 보이면서 천자는 채라는 이름의 거북을 활용해 나라의 다가올 운명을 묻게 되고, 공자의 제자는 그에 관한 여러 기록 문헌으로 남겼다네 이 같은 옛사람의 거북 관련 여러 일화 우주와 우리 삶의 근본 향한 관심임에 이제는 우리도 그 자취를 본받아 보고 듣는 일상의 눈앞의 이익 너머 하늘과 땅의 묘한 조화 그 변화하는 이치를 거북이 아니라도 묻는 일상 살아보자 그것이 우리 삶의 올바른 마음의 눈.하늘의 뜻을 읽고, 땅의 소리 듣는 일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로운 삶이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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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
    2025-01-22
  • 양경공 무덤을 다시 손본 이야기 및 검정과 흰개미의 싸움
    정자는 역(易)에서 말하는 하늘의 작용을 두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색(無色) 무취(無臭)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즉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그래서 이처럼 본래 실체가 없는 하늘 기운의 힘, 곧 그것이 우리 마음의 신비로운 작용으로 나타났던 사례에 관해 일화입니다. 옛날 사람들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목은 이색 선생님의 막내아들, 양경공 이종선입니다. 양경공의 무덤은 한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좋지 못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연산군이 나라의 권좌를 차지하면서 자기 어머니와 관련된 사건과 관련이었다. 양경공의 손자였던 이파가 연산군에게 직언을 문제 삼아 가문이 참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경공의 무덤도 파헤쳐지면서 비극을 맞아야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중종이 반정으로 임금에 오르면서 연산군이 왕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양경공의 무덤은 여전히 복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야 당연히 경제적인 문제였지요. 몰락한 집안의 형편으로 인해 거기까지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경공의 방계 가족 가운데 이유청은 이런 경험을 합니다. 제법 벼슬이 높았던 그의 꿈에 양경공이 나타나서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내 무덤이 허물어진 지 오래되어 바람과 비를 막을 수가 없구나. 이제 너만이 내 무덤을 고칠 수 있으니, 제발 잊지 말고 기억해다오.” 이유청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어요. 너무 놀라고 무서웠던 거죠. 그래서 그는 양경공의 직계 후손 이질을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말을 들은 이질은 이유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연산군 때 우리 할아버지가 큰 벌을 받으면서 양경공의 무덤까지 허물어졌습니다. 하지만 자손들이 힘이 약해서 아직도 고치지 못했지요.” 이유청은 그 한마디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을 정해 양경공의 무덤을 새로 쌓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 드렸답니다. 결코 믿어지지 않는 역사 속 일화에요. 송화잡설과 죽창야화에 실린 내용입니다. 한편 이같이 믿지 못한 기이한 일화는 그 밖에도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체를 겪어보지 못한 기적적인 실화에 대해서 한가지를 더 소개하기로 합니다. 촉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미축입니다. 그는 자가 자충으로 동해군 구현 사람이었습니다. 위오촉 삼국 시대의 유비를 섬겨 벼슬길에 나섰으며 뒷날 안한 장군에 임명되었지요.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수신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그가 한번은 낙양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집을 수십 리 앞두고 길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다가오더니 수레에 태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 부탁을 주저하지 않고 선뜻 들어 줍니다. 몇 리를 함께 오다가 여자가 예를 갖추어 사례한 뒤 떠나려고 하면서 그에게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실은 천제의 사자로서 동해군에 있는 미축의 집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고 지금 태우러 가는 길입니다. 당신이 수레를 태워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답례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여자에게 집을 불태우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이 일은 천제의 명령이기 때문에 불태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당신은 급히 말을 달려가십시오. 저는 천천히 걸어서 가겠습니다. 불은 정오에 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가재도구를 옮겨 놓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정오가 되자 불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일화는 어떨까요? 조선 시대의 선조 신묘년(1591년) 때의 일입니다. 정승 윤승훈이 강릉 부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관내에는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흰개미와 검정 개미의 싸움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그들 개미는 바다로부터 몰려와 그곳 강릉 고을에서 서로 엉켜 싸우다가 죽어가는 무리가 높은 언덕을 이루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때 바야흐로 이웃 왜의 침략을 염려하였으므로 그곳의 부사에 윤공을 대신한 무신을 임용해 보낸 것입니다. 과연 임진왜란은 그 다음 해에 일어납니다. 대신 임진왜란을 맞아 전국의 모든 고을이 다 도륙을 당했지만 강릉 일대만은 병화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으니,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허황스러운 이야기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느낌은 비단 이런 류의 옛사람 기록만으로 그치지가 않습니다. 해와 달의 움직임을 좌표로 구성한 주역의 체계에 이르면 그게 정말 가능하겠느냐는 의구심이 절로 생겨나게 됩니다. 송(頌) 생사를 넘나들며 꿈이 전한 소식 바람과 비 막는 기적을 부르면서 허물어진 무덤에 새 생명을 주었다네. 권력에 밀려나 쇠락한 가세에도 기묘한 뜻 하나가 꿈으로 이어져서 정성 어린 손길로 무덤을 쌓게 하며 적선(積善)에 뜻을 둔 옛사람의 행동이 천제의 뜻 전하는 길 위의 사자에게 수레를 이용한 자비심에 힘입어서 불타는 집의 재앙 벗어날 수 있게 하니 정오의 불길에도 천상 흐름 뒤바꾼 선한 마음 의존한 묘한 삶의 기적일 터 그뿐인가 바닷가 개미의 묘한 싸움, 백사장에 몰려와 언덕을 이루면서 왜군의 그림자가 세상을 휩쓸 때도 그 참혹한 병화를 강릉 땅은 비켜 가니 이같이 믿지 못할 옛 기록 속 일화들 하늘의 움직임이 음양(陰陽)의 부호로 주역에 새겨지는 기묘한 그림 같아 그 같은 마음으로 세상사를 돌아보면 현실 속 우리의 알 수 없는 묘한 생애 바람과 비, 불길과 개미로도 감지됨에 천지의 이치 속 기미에 밝아야만 일상의 우리 삶이 아름답게 빛나면서 옛사람을 본받는 후회 없는 생이 될 터
    • 칼럼
    • 주역
    2025-01-20
  • 절하는 풍속과 주역의 중지곤(重地坤) 괘
    우리나라의 풍속은 대체로 주역에 토대하고 있음은 이미 밝힌 대로다. 동지에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속, 해와 달이 운행하는 28수를 본떠 흥을 돋구는 오락으로 대신한 윷놀이,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영혼을 기억하면서 명복을 빌어주는 49재 및 삼우제(三虞祭) 등 물론 한글의 만들어진 배경도 예외가 아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사람을 손님으로 맞거나 어른으로 대접을 할 때 보여주는 예절 가운데 절하는 풍속에 대해서 살피고자 한다. 의례(儀禮)의 편명인 공식대부례(公食大夫禮)에 의하면 주인과 손님, 아래 사람과 윗사람, 신하와 임금 등의 관계에서 절하는 횟수를 두 번이라고 말한다. 졸식(卒食)의 본문 내용 가운데 나타나 있다. “손님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 공이 사례한다. 그러면 손은 올라가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다.”라고 하였다. 또 신하가 임금에게 절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서로가 주고 받는 절의 횟수를 따지면 네 번에 걸친 행위가 되는데 임금을 직접 보지 않으면 두 번의 절로 대신하였다. 이를 맹자에서는 “임금의 명으로 하사물을 보내오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는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옛 풍속에서 사람을 보고 두 번 절하는 이유는 배경이 결국 주역이다. 삼천양지(參天兩地)의 수를 음양(陰陽) 부호로 대신했을 때 중지곤(重地坤) 땅 괘는 두 마디가 되고 중천건(重天乾) 하늘 괘는 하나로서 길게 이어진 세 마디를 절을 하는 동작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주역 곤괘의 문언전에 보면 “음은 비록 아름다움이 있으나 머금어서 왕의 일을 좇아서 이루지 못하니, 땅의 도이며, 아내의 도며, 신하의 도이니, 땅의 도는 이룸은 없되 이어서 마침을 둔다.”고 하였다. 또 계사전에 보면 건(乾) 하늘은 쉽게 주장하고 땅 곤(坤)은 간단하게 능하니, 주장함이 쉽고 따름이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거기에서 얻는다고 했으니 두 번 절하는 풍속은 사람이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이치를 쫓아 마땅한 도리를 본받으려는 것이다. 이를 수리적으로 보더라도 양은 셋이고 음은 둘이 근본이므로 세상살이에 있어서 두 번 절하는 이치가 그로 인한 결과다. 이외에도 음악의 음계를 정하는 율려의 기준도 그렇고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도 모두가 주역에서 생겨났다. 학문(學問), 도서관(圖書館),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하학(形而下學) 등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정신의 뿌리에 눈뜨고자 하면 결코 몰라선 안 되는 게 바로 주역의 기본 이치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민족의 미풍양속 떠올리는 순간이면 부지중에 그려지는 동짓날의 풍경 팥죽을 써서 정을 나누던 그 아름다움이며 윷놀이에 의탁한 흥겨운 유희까지 어디 그뿐인가 죽은 자를 기리는 49재 및 삼우제(三虞祭)의 전통 거기에 우리 글로 창안된 한글의 구조와 예를 갖춰 사람을 상대하던 절하는 동작 등도 수로써 표기한 주역의 이치 아닌 게 없으니 하늘과 땅의 삼천양지(參天兩地) 음양의 조합을 따른 조상들의 아름다운 지혜여라 건(乾)이 이끌고 곤(坤)이 뒤따르는 천하의 도리를 그 안에 숨기고서 우리의 노래, 말, 글, 일체의 생활 속에 주역으로 정리한 세상살이의 아름다움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덕 우리 정신의 맥박 되게 하니 그 이치에 눈을 뜨는 우리의 일상이라야 밝고 아름다운 내일의 우리들 되리
    • 칼럼
    • 주역
    2025-01-16
  • 동양 사상의 대표적인 두 문헌 주역과 화엄경에서 배우는 우리 삶의 성찰
    주역의 구성 내력에서 살폈듯 세상은 음(陰)과 양(陽), 빛과 어둠, 선(善)과 악(惡) 긍정과 부정 및 하늘과 땅이 어우러져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사는 원리는 주역에 숨어 있는 음양(陰陽)의 변화에 주목함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의 경전이 또 한 권 있습니다. 불교의 화엄경입니다. 그곳에서도 주역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중생과 부처라는 두 종류의 대립적인 삶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말하며 그 대처법을 가르칩니다. 그 점에서 이 두 책은 서로 내용과 형식이 다르면서도 실제로는 비슷합니다. 그래서 화엄경의 본문 내용을 공부할 때 간혹 주역의 시각에서 해석한 이통현 장자의 화엄신론을 절 집안에서 텍스트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눈을 위해 그 안에서 들려주는 옛사람의 시각을 간략하게나마 둘을 서로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역입니다. 음양의 조화와 세상의 시작 주역에서는 세상이 시작될 때의 모습을 두 괘(괘는 주역에서 사용하는 그림 같은 상징)로 표현합니다. 수뢰둔(水雷屯)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의 첫 시작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산수몽(山水蒙)은 아기가 세상을 배우고 자라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두 괘는 우리가 처음 무언가를 시작할 때 겪는 삶의 어려움과 학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설명할 때 맞춰지는 가르침의 포인트가 세상이 펼쳐지게 하는 하늘과 땅의 덕입니다. 하늘과 땅의 덕 주역에서 강조하는 하늘(乾)과 땅(坤)의 덕 그것은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는 행위의 반영입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돕는다는 것은, 우리가 허용적이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행동할 때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이 밝고 올바르다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늘이 우리를 품어주고 길을 열어주게 된다는 데 포인트가 맞춰집니다. 반면 화엄경은 주역과 같으면서도 다른 설명을 합니다. 그 책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십신(十信)은 우리가 본래 품고서 살아가는 성스러운 마음의 특징을 믿는 단계입니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점점 더 마음을 키우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노력과 마음이 세상과의 관계성 속에서 좋은 결실로 나타남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엄경에서 말하는 십지(十地)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주역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택리(天澤履) 괘는 하늘과 연못이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올바른 마음으로 하늘처럼 높고 세상을 사랑하는 밝은 뜻을 품고 살면 그로 인한 기쁨이 연못처럼 세상에 퍼져나갈 수 있게 된다는 뜻의 괘상입니다. 물론 이는 군자와 소인이라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해주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시각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늘의 덕을 추종하는 양적(陽的)인 삶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까닭에 주어지는 삶의 평온함이 있습니다. 반면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소인의 삶이 되면 매사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길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두 갈래의 길을 두고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자기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늘처럼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삶은 하늘이 축복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우리의 세상살이가 어려움 속에서도 이웃과 근심을 함께 나누는 삶을 권장합니다. 그리고 불교 화엄경에서는 그 길에서의 첫걸음을 발광지(發光地)로 표시를 합니다. 발광지는 자신이 품고 살아가는 빛의 작용을 믿고 세상을 밝히는 단계를 뜻합니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지뢰복(地雷復) 혹은 화지진(火地晉)이라는 괘로서 표현합니다. 불처럼 빛나는 마음을 회복하여 그 어려움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결론: 음양의 춤, 세상의 조화 결국, 주역과 화엄경은 모두 우리가 세상과 어울려 살면서 서로를 사랑하며 조화를 이루는 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음(陰)과 양(陽), 빛과 어둠, 중생(衆生)과 부처 및 하늘과 땅이 둘 아닌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듯이, 우리의 마음과 행동도 세상과 어울릴 때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처럼 밝고 땅처럼 자기를 비운 사심 없는 시각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빛을 내며 나를 밝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만 후회 없는 자기의 인생이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음양의 춤, 세상의 조화 하늘과 땅이 만나며 세상이 열림에 음(陰)과 양(陽)이 어우러져 빛과 어둠이 춤을 춘다 주역 수뢰둔의 첫걸음처럼 삶은 고통 속에서도 배움을 통해 자라나는 법. 거기서 기억할 우리의 행동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은 신비로운 작용이 하나며 만물을 포용하는 땅의 건강한 마음이 또 하나다. 이 같은 둘의 조화 우리에게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감에 매사를 긍정하며 허용하라. 우리 마음에 이미 깃든 성스러운 생명의 빛 십신의 믿음으로 그 싹을 틔우고 십지의 결실로 세상을 밝혀보라 화엄경이 전하는 우리 삶의 진실 그것은 주역의 군자처럼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데 있다 천택리(天澤履)의 괘상으로 알려주는 연못처럼 마음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출렁여야 하고 화지진의 불꽃처럼 어둠을 밝히며 앞으로 나아가자 자기 안에 품고서 펼쳐지는 마음의 밝은 빛 세상을 비추는 조화로운 걸음 될 때 음양(陰陽)은 둘 아닌 하나의 경계로서 세상과도 둘 아닌 우리 삶이 될 터이니 하늘처럼 밝고, 땅처럼 사심 없이 자기 안의 빛을 품고 의연한 삶을 살자 그것이 후회 없는 자기의 삶이리니 위 내용과 어울리는 삽화를 가로로 그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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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
    2025-01-14
  • 세상을 이해하는 본질 역(易)이란 무엇인가
    주역은 흔히 점치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랜 우리의 역사에서 볼 때 민족정신의 토대를 이루는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때의 주역은 철학적 세계의 결정체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의 사유 체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으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반된 인식 속에서, 우리는 주역을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야 할까요? 역(易)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 전통문화 속에서 역의 이치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국보 1호로 지정된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한양 수도 남쪽 관문이었던 숭례문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북쪽의 숙정문(肅靜門)과 함께 서울의 사대문 중 하나로서 각각 독특한 이름과 의미를 지닌 주역 이치의 반영입니다. 그 가운데 흥인문(興仁門)은 주역에서 봄의 덕(元德)을, 돈의문은 가을의 덕(利德)을, 숭례문은 여름의 덕(亨德)을, 숙정문은 겨울의 덕(貞德)을 상징합니다. 이는 모두 주역에서 말하는 주역 하늘괘의 괘사 원형이정(元亨―利貞)에 해당하는 개념이니 주역이 우리 조상들의 정치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친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또 다른 예는 한글입니다. 한글 모음은 음(陰)과 양(陽)의 이치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자음은 오행(五行)과 연결되어 ㄱ, ㅋ은 목기운(木氣運), ㄴ, ㄷ, ㄹ, ㅌ은 여름의 화기운(火氣運), ㅁ, ㅂ, ㅍ은 땅의 중화 작용을 대신한 토기운(土氣運), ㅅ, ㅈ, ㅊ은 가을의 금기운(金氣運), ㅇ 등은 겨울 수기운(水氣運)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한글 구성의 원리는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처럼 자연의 조화로운 이치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멀리는 사물의 이치에서 본뜨고 가깝게는 우리 신체의 구조에서 취한다는 게 주역 계사전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자음의 전체적인 형식은 우리 신체의 기능과 특성을 반영한 게 바로 자음의 원리입니다. 이처럼 주역은 우리 민족의 모든 정신의 토대로 작용합니다. 실제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일상으로 기억하고 살아가는 태극기는 어떻나요. 거기에는 전체적인 구도가 바로 주역의 이치입니다. 세상의 본질인 흰색 바탕, 해그림자의 무늬를 취해 온 태극 문양, 그리고 건곤감리의 네 괘는 이미 밝힌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거기에 반영된 음양과 사상의 구조 등이 주역의 전체적인 기본 원리입니다. 이처럼 역의 이치는 우리 삶과 문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이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첫째는 세상 모든 만물은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는 변역(變易)의 이치입니다. 그것도 물과 불의 상징적인 변화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겨울에 물이었던 게 여름이면 기체 즉 불로 변합니다. 그 과정의 변화는 겨울이 봄으로 봄이 여름으로, 여름이 가을로,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자연의 순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주역에 관심을 둘 때 먼저 주목해야 하는 첫 번째 개념입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변하는 가운데에도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이를 불역(不易)이라고 합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여야 한다는 이치가 그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간이(簡易)입니다. 세상의 진리는 쉽고 간단합니다. 봄의 따뜻한 기운이 들판의 꽃을 피우는 데 특별한 계산이 필요하지 않듯이, 자연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조화를 이룹니다. 이처럼 변역, 불역, 간이는 세상의 근본 이치이며, 역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철학적 원리입니다. 이런 뜻을 배경에 두고서 주역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죽어서라도 실체가 분명하다는 실재론적인 사고를 품고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반문 끝에 돌아오는 답이 변하고 바뀐다는 주역의 개념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삶은 올바른 게 됩니다. 그럼 그게 어떻게 역의 본질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易의 노래: 세상의 이치 봄이면 꽃 피고 여름이면 겨울의 물, 불로 변하면서 우리 눈은 무엇을 보며 세상을 살아 갈까 변하는 가운데 변치 않는 이치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간단한 이치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 흥인문(興仁門)의 봄 기운 ,숭례문(崇禮門)의 여름 기운 돈의문(敦義門)의 가을 기운, 숙정문(肅靜門)의 겨울 기운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든 역의 이치 .원형이정(元亨利貞) 중천건(重天乾) 괘사 등에 의탁한 태극(太極)의 문양, 한글의 음양(陰陽) 주역의 깊은 철학 빌려서 활용하니그것은 음(陰)과 양(陽) 그리고 다섯 가지 범주의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불리우는 오행 해와 달의 움직임을 활용한 지혜임에 변역(變易) 불역(不易) 간이(簡易)의 길 위에서 분명하게 속삭이는 주역의 가르침 우리가 보아야 하는 마음의 눈 변화 속에서 영원을,다양함 속에서 단순함을,언제나 따라야 할 옛사람의 지혜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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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2
  • 태극(太極) 문양으로 상징되는 한민족의 꿈
    태극(太極) 문양으로 상징되는 한민족의 꿈 작금의 조국 현실을 돌아보면 누구나 심정이 착잡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크게 염려할 게 없다.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민도(民度)가 크게 올라와 있고 우리에게는 직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놀라운 저력이 감춰져 있다. 보수라고 다를 게 없으며 진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믿고 하늘을 믿으면서 스스로가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만을 묵묵히 해나가면 된다. 그래서 이를 역(易)의 이치에 바탕을 둔 문장으로 엮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맞춰지게 된다. 태극 문양으로 상징되는 한민족의 꿈 보라 억만년 세월을 견디며 오래도록 전승해온 우리 한민족의 얼 하늘의 해와 달은 어둠과 빛을 오가며 그 위를 언제나 비추었고 흐르는 세월의 신비로움으로 떠올라 빛을 뿜던 이 땅 우리 한민족의 지혜 손에 쥔 우주의 법칙은 문양이 태극이요 그 속에 새겨진 삶의 질서는 해와 달의 광명이니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도 자연의 이치와 어울린 우리의 창조 정신 분명했었기에 해와 달의 밝은 빛은 어둠 속에서도 찬란했고 그림자로 드리워진 길 위에서도 형형한 그 정신 언제나 뚜렷했나니 견디며 써 내려온 우리의 역사 우리의 길 위로는 하늘의 해가 비춰주는 신성한 앞길이요 어둔 밤일 때도 우리의 잠자리 포근하게 감싸던 하늘의 밝은 달빛 그것이었지 그렇기에 우리가 부르는 창조의 노래는 이민족의 시달림에도 항상 의연했고 우리가 남긴 자취의 뚜렷함 태극 문양의 긍지로 꽃 피울 수 있었던 터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휴식하는 시간에도 그 정신 앞산과 들녘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로 찬란한 민족의 발자취로 남았으니 가가호호(家家戶戶) 나부끼는 태극의 문양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 한데 모인 거룩함 민족의 얼 대신한 민족혼의 상징임에 이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직 하나 홍익인간 정신만을 머리에 떠올리며 내일로 향하는 힘찬 걸음 되게 하되 세월을 넘어선 한민족의 수 천 년 전통 빼어난 창조 정신과 지혜로 되살려서 신비로운 해와 달의 운행에 맞춘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정신 저 태극 무늬의 긍지로 꽃피우는 우리의 내일 밝아오는 신성한 아침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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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역의 건곤문호(乾坤門戶)와 태극기의 빈모사괘(牝牡四卦)
    옛사람들은 세상의 변화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사귀어 생겨나는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하늘과 땅의 상징으로 건괘(乾☰)와 곤괘(坤☷)로 보았으며, 이 두 괘는 세상의 모든 변화를 시작하는 출입문 즉 문호(門戶)에 비유를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물과 불의 상징이 되는 감괘(坎☵)와 리괘(離☲)는 주역의 64괘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서 마치 세상이 전개됨에 있어서 기본 틀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마치 수레바퀴를 돌리는 축과 같아서 세상의 이치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순환하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건(乾☰), 곤(坤☷), 감(坎), 리(離☲)네 개의 괘는 만물을 낳는 빈모사괘(牝牡四卦)라고 불리며 그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만물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숫컷(牡), 곤괘(坤卦)는 암컷(牝)이 되고, 감(坎☵) 괘는 겨울철의 물(水), 리(離☲) 괘는 물이 변한 여름철의 불(火)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서로가 변해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세상의 모든 사물이 생겨나는 근본 이치 및 현상이 되며 조화가 생겨나는 토대로서, 그들이 작용하는 원리를 바탕으로 주역은 자연의 이치를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으로 겪게 되는 세상의 모든 변화, 즉 계절과 시간의 흐름, 해와 달의 운행이 거기에는 거짓말처럼 반영이 되는데, 예를 들어 한 달은 30일로 이루어지고 1년은 12달로 구성되며, 봄과 여름은 내적인 성장을, 가을과 겨울은 외적인 결실을 나타내는 등 자연의 순환과 인간 생활의 조화를 보여주고, 이러한 주역의 원리는 태극기에도 반영되어 네 모서리에 위치한 건(乾☰), 곤(坤☷), 감(坎☵), 리(離☲)의 괘상이 하늘과 땅, 물과 불의 조화를 상징함으로써 만물의 근본 기틀을 나타내며, 더 나아가 율력(律曆), 즉 달력을 통해 천체의 움직임과 시간의 주기를 정리하는 내용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구체화 시킨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표준이 되는 별 가운데 하나로는 목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바라보면 약 12년 주기로 한 바퀴를 도는 것처럼 이러한 시간의 주기를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기반이 되어주기 때문이니 옛사람들이 목성을 두고 세성(歲星)으로 일컫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건곤문호乾坤門戶와 태극기의 빈모사괘牝牡四卦 건乾과 곤坤은 하늘과 땅, 세상의 문을 열어 변화를 시작하네. 감坎은 겨울의 물, 리離는 여름의 불, 이 네 개의 괘상 만물이 펼쳐지는 어머니와 아버지 및 그 기운의 덕스러움 안으로 품어 안은 빈모사괘牝牡四卦 그것이니 세상 조화 일어나는 하나의 기틀로서 끝없는 순환 속에 생명의 근원이니 바뀌는 계절과 시간의 흐름 속에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에 자라나고 가을에 열매 맺고 겨울에 쉼을 얻네. 한 달은 30일, 한 해는 열두 달 건곤(乾坤)감리(坎離) 기묘한 힘 숨겨진 태극은 그 안에서 숨을 쉬고 하늘과 땅, 물과 불의 조화로움 그것임에 열두 해마다 한 바퀴, 주기를 보여주는 목성의 움직임은 율력律曆의 기준이니 옛사람은 그 별을 세성歲星이라 불렀지요. 그럼에 끝없는 천체의 묘한 순환 변화 속에 질서 찾고, 생명의 신비로움 찬양하는 노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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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8
  • 역의 이치에 기초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토대
    우리의 사상과 풍속 언어 및 정치 철학 등을 살펴보면 주역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 게 극히 드물다. 한글의 구조는 익히 알려진 대로 모조리 주역 이치의 반영이다. 세금의 방식으로 채택했던 정전법(井田法), 동지에 팥죽을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속, 윷놀이와 바둑, 달력을 만드는 원리 및 일상적인 모든 개념들이 그렇다.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하학(形而下學), 도서관(圖書館) 문장(文章) 등이 주역과 관련된 문구들이다. 그뿐일까. 음악의 원리로 자리잡은 율려(律呂) 외에 도량형의 단위로부터 나라의 정치 체제까지 모두가 역(易)의 이치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오늘은 의상의 개념을 중심으로 역에 바탕을 둔 옛사람의 세계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자』「도척盜跖」『상군서商君書』「화책畵策」에서는 신농씨 시대에 이미 “밭을 갈아서 먹고, 옷을 짜서 입었다.”고 하였다. 입고 먹는 일, 그것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다. 그중 옷차림은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인간의 수치심을 가리기 위한 측면에서 그 뜻을 강조하는가 하면 추위와 더위를 막는 실용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주역에서는 인류 문화가 발전해온 과정을 역의 괘상과 결부시키면서 의상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황제와 요순이 의상을 늘어뜨리고 천하를 다스렸다.” 천자문 속 문장이다. 동시에 그 안에 포함된 의상 개념이 주역에서 유래한다. 하늘을 뜻하는 중천건(重天乾) 괘를 본떠서 싸는 것, 혹은 덮는 것이라는 예복으로서 위의 옷에 해당하는 의(衣)라고 하고, 아래옷은 땅 중지곤(重地坤)을 본떠서 하늘의 주장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는 점에서 상(裳)으로 구분을 했다. 이는 여러 문헌에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소개하는 문헌은 석명 석의복이다. “위의 것을 의(衣)라고 한다. 의(衣)는 의지한다는 뜻으로 사람은 추위와 더위를 막는데 이를 의지한다. 아래의 것은 상(裳)이라고 한다. 상(裳)은 가로막는다는 뜻으로 스스로 덮어서 가린다.” 이곳의 해석이 추위와 더위를 막는 실용적인 측면과 부끄러움을 가리고 덮는다는 윤리적 기능으로 상의와 하의를 구분하는 반면 주역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염두에 둔 좀 더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며 옷을 입고 또 남들의 옷차림을 주시할까? 사람의 품위, 사람의 수치심을 가리는 도구, 아니면 추위나 더위를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 그러나 옷이 날개라는 우리의 옛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래도 장식의 측면이 더욱 강조되어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일 것이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한 성찰을 위해 좋은 사색 거리가 될 수 있는 왕웨이띠의 “중국의 옷 문화”라는 책 안의 다음과 같은 한 토막을 옮겨 적어본다. 융이(戎夷)라는 선비가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갔다. 노나라에 이르니 성문이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매우 추웠지만 하는 수 없이 그는 제자와 함께 성문 밖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밤이 깊어져 날씨가 더욱 추워지자 두 사람이 모두 얼어 죽을 위험에 봉착했다. 융이가 제자에게 “네가 옷을 나에게 주면 내가 살고, 내가 옷을 너에게 주면 네가 산다. 나는 국사(國士)이니 천하를 위해 나의 생명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너는 별다른 덕과 재능이 없어 죽어도 애석하지 않으니 너의 옷을 내게 주거라.”하고 말했다. 그러자 제자가 “덕과 재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옷을 국사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융이가 길게 탄성을 지르며 “아아! 큰 도리도 소용이 없구나.”라고 말하면서 융이는 옷을 제자에게 주었다. 자신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 이 고사는 여씨춘추 시군람에 나오는 이야기다. 융이에게 있어서 옷은 실용적인 기능을 하는 도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의 품위를 돋보이게 하는 좋은 소재다. 매우 역설적인 사례다. 우리는 우리의 품위를 생각할 때 실용을 떠나 생각하기가 어렵다. 실용이 충족되어야만 품위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생활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옷을 입는 순간에도 하늘이 땅을 통해 생명을 펼쳐 보이는 이치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역 계사전에서는 주문한다. 고리타분하면서도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짧은 인생길에 아쉬움 없는 삶을 살자면 누구나 고민해야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하루의 시작을 옷 입는 일로부터 시작하므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입을까? 그 질문 끝에 내 몸을 품어주는 발밑의 대지와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을 떠올리면 될 테니까. 압축된 내용의 송(頌) 옷차림에서 새겨보는 하늘과 땅의 이치 하늘 닮은 윗옷 의(衣)라 하고 땅의 덕을 품은 아래 옷 상(裳)으로 부르되 의상(衣裳)에 의지한 우리의 일상 추위와 더위 막는 실용을 곁들이되 부끄러움 가리는 품위까지 둘렀나니 여씨춘추 속 융이의 얼어붙은 밤 생명을 담보하는 덕과 재능을 일깨우니 품위를 넘은 우리의 옷차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하늘이 땅을 통해 만물을 살찌우는 생명의 깊은 이치 눈뜨길 주문하네 그럼에 하루를 여는 옷차림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새겨야 할 이치 하늘이 주장하고 땅이 따르면서 만물이 생겨나는 무심한 천지의 덕 의상(衣裳)으로 걸치는 행위에서 돌아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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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
    2025-01-05
  • 만물을 위한 하늘의 쉴 새 없는 움직임 자강불식(自强不息)
    자강불식(自强不息) 만물을 위한 중천건(重天乾) 하늘의 쉴 새 없는 움직임 스스로 자(自), 굳셀 강(强), 아니 불(不), 쉴 식(息). 주역 하늘 괘 상전(象傳) 문구다. 하늘 괘는 명칭이 중천건(重天乾)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세 가닥의 순수한 양효(陽爻)인 건(乾☰)괘가 위아래로 두 개 겹쳐 있다는 뜻이다. 세 개의 순수한 양효(陽爻)가 두 번 위아래로 겹쳐져 있다면 움직임이 매우 굳셀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역(易)에서 양(陽)은 움직임을 나타내고, 음(陰)은 고요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닥의 양효(陽爻)들이 둘 겹쳐진 중천건(重天乾)은 잠시도 움직임이 멈추는 법이 없다. 이는 해와 달 지구의 공전 및 자전으로 나타나는 천체의 움직임으로도 분명하다. 밤과 낮이 바뀌어도 세상의 온갖 만물이 움츠러드는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어도 휴식을 모른다. 그리고 그 같은 하늘의 움직임이 있기에 땅 위의 만물은 비로소 온전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른바 중천건(重天乾)에 등장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의미다. 또 그로 인해 세상 만물이 힘을 얻게 되므로 다른 측면의 표현으로는 만물자시(萬物資始)! 내통천(乃統天)이 된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늘 기운에 힘입는다는 뜻이다. 그 증거는 사물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서 매우 분명하다. 첫째 극도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생각의 기능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둘째 몸에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는 호흡기관 작용도 마찬가지다. 피곤하다고 쉬거나 멈추는 일이 없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일은 자기의 인위적인 노력이나 의지하고도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늘의 작용을 우리 스스로가 자기 안에서 볼 수 있다면 이로 인한 교훈이 분명해진다. 다만 이런 이치를 잊고 살아갈 뿐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 점에서 보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은 단순하다. 그 같은 하늘의 덕스러운 기운을 본받는 삶이다. 하늘이 돕는지로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문구는 그 같은 행동의 필연적인 결과임을 역경에서는 강조하기도 한다. 참고해 볼 만한 옛사람의 세계관이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하늘의 덕 본 받는 내 마음의 자강불식(自强不息) 언제나 쉼 없는 하늘의 움직임 이어진 세 줄의 양효(陽爻)로서 표시하니 그것의 묘한 기운 눈에 붙여 새겨보면 밤이나 낮 혹은 여름과 겨울에도, 세상의 기운 되어 힘차게 작용한다. 이 같은 히늘의 은혜로운 힘의 작용 언제 어느 때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되는 하늘의 그 같은 덕스러움 계속해서 들고 나는 숨결로서 헤아려서 언제나 본을 받는 내 일상의 삶이라야 하늘이 돕는 삶, 이로움이 끝없으리 그럼에 옛사람도 이윽고 하는 말씀 사람은 땅의 덕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자연의 그 같은 무위의 덕 본받는 삶을 살라 도덕경에 말하시니 .후회 없는 내 생애 한마디의 지침일 터
    • 칼럼
    • 주역
    2025-01-04
  • 주역에서 배우는 세상살이 교훈 통합의 미학
    오랜 역사를 통해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하여 서로를 배척하는 풍조입니다. 이는 국가 체제 유지와 민족 정통성을 위한 필요성도 있지만,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악용이 문제였어요. 따라서 우리 민족의 긍정적인 비전을 떠올릴 때면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자기 관점의 반대편 생각과 방법론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데 두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주역의 괘상으로 설명하면 자기의 반대편에 서 있는 배합괘에 주목하는 방법입니다. 주역의 배합괘(配合卦)란 양극단의 짝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의미가 온전해지는 역(易)의 원리입니다. 예컨대 낮은 밤에 의존하고, 남자는 여자, 또 큰 것은 작은 것에 의존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이 온전해진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주역의 본문의 전체적인 구성도 상경(上經)은 양기(陽氣) 중심이고 하경(下經)은 음기(陰氣) 중심의 구성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역의 구조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통해 온전함을 이루는 자연의 법칙을 상기시킵니다. 실제로 우리 민족의 구성원도 다양한 생각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이잖아요. 하지만 서로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배척하기만 한다면, 어떻게 행복한 집단을 이룰 수가 있겠어요?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 되겠지요. 그래서 주역에서는 이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역지사지'란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된다면 어떻게 느낄까?"를 생각해 보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주역을 이해하는 의미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춘추전에 실려 있는 남괴의 사례입니다 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왕이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주역의 괘상으로 점을 쳐보았어요. 그가 점을 쳐서 나온 괘상으로는 자신이 왕이 될 징조라고 해석할 수 있는 중지곤(重地坤 - 위도 땅, 아래도 땅이다.) 땅 괘의 다섯 번째효(六五爻)가 변해 움직이는 수지비(水地比-위가 물, 아래가 땅이다.)였습니다. 남괴의 판단으로는 주역의 괘에서 다섯 번째 자리가 나라의 통치자를 상징하므로 황상원길(黃裳元吉)이라는 그 효사의 말처럼 자신이 임금의 황색 곤룡포(黃裳)를 입게 된다고 해석했지요. 그러나 남괴가 찾아간 자복혜백(子服惠伯)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남괴의 시도는 실패한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뭐였겠어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든, 주역으로 그 질문을 하려면 자신의 동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하늘 괘와 짝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남괴는 어땠나요. 자신만을 위한 욕심이 전부였기에 하늘이 아닌 땅 그것만을 전부로 알았어요. 통합적인 시각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의 계획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자복혜백의 말대로 남괴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어요. 남괴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했기에 하늘의 뜻을 애초부터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땅이 짝으로 삼는 하늘의 배제. 우리가 맞이하는 우리 민족의 페단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동과 서, 진보와 보수, 낮과 밤,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 다른 것이 서로 보완되어야 하는 온전한 세상 이치. 맞아요. 낮은 밤이 있어야 쉴 수 있고, 남자는 여자와 함께해야 가정을 이룰 수 있어요. 서로 다른 것들이 힘을 합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자복혜백의 결론은 분명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비전과 현실 정치를 생각해 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 되겠지요. 서로가 패거리를 이루면서 다툴 때, "만약 내가 상대방이라면 어떻게 느낄까?" 하는 배려심이 중요해진다는 뜻이에요. 왜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게 안 될까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그 점에서 『주역』은 진정한 의미의 길흉에 대해 알려주는 항목을 포함한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키우고 보살피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합해졌을 때의 덕 그것을 주역의 텍스트에는 근본 바탕에 깔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앞날이 진실로 복되고 축복받는 삶이 될 수 있으려면 한 번쯤 주역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게 분명해요. 이렇게 말하면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의 정치 상황에 흔히 등장하는 법사 도사 등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이미 춘추전의 남괴에서도 결론이 분명했잖아요. 통합된 시각과 상식에 바탕을 둔 우리 마음의 올바른 눈 그것만이 전부임을 알면 될 테니까요. 압축된 내용의 송(頌) 서로 다른 생각의 조화 동과 서 남과 북, 보수와 진보 짝을 이룬 견해들이 만나서 부딪칠 때, 상대를 배려하는 하나의 미덕이 우리의 온전함을 만들어내나니 낮은 밤에 기대어 쉬고 남과 여가 손 맞잡으며 우리의 온전함이 비로소 빛을 보리 흡사 역에서 땅이 하늘을 품고 큰 것은 작은 것에 기대서는 이치처럼 서로 다른 마음들이 조화로 꽃 피울 때 아름답게 열리는 우리 민족의 앞길 파벌의 적개심에 가려지지 않아야만 진리에 의존하는 비전이 생겨나며 자기의 욕심 떠난 하늘 뜻에 맞게 될 터 주역 점을 의지한 남괴의 어리석음 자기의 욕심에 눈이 먼 채로 임금의 곤룡포를 입는다 착각하여 하늘을 잊고서 내딛은 발걸음 결국 자기를 망치고 세상 혼란 불러오니 주역에서 하는 말 상식에 맞는 자신의 안목으로 세상을 배려하는 뜻으로 확고해야 역에 묻는 자기의 궁금증도 비로소 허물 없는 질문이지 않겠는가 그럼에 우리가 꿈꾸는 미래 다름 속에서 피어남을 알고 배척이 아닌 배려로, 분열이 아닌 통합으로, 하늘과 땅의 덕을 닮아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있게 되길.
    • 칼럼
    • 주역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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