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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0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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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07
  • 2020년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발생한 반 정부 시위와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투옥 사건
    2020년 7월 11일, 극동 연해주에서 가장 큰 도시 하바로프스크에는 9주 동안 시위와 피케팅이 진행되었다. 정치적 개혁과 개선도 목표로 두고 시위를 했으며 이들의 시위는 결국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퇴진"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많은 시민들이 러시아 현 정권이 불만을 가져 시위를 벌이게 된 이유는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였던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이 갑자기 투옥되었기에 그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9주 연속으로 시위가 발생했고 러시아 정부에서는 3주가 지나자 시위에 대한 보도와 석방 시위를 전면 차단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시위가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벨라루스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관계로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존재한다. 이는 직선거리 9,000km나 떨어진 벨라루스 민스크의 시위를 하바로프스크에서 거주하는 벨라루스 국민들을 통해 자세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 시위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국기 및 하바로프스크 지방 깃발을 흔들며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를 지지함과 동시에 옛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국기도 함께 들며 시위하여 서쪽으로 9,000km나 떨어져 있는 벨라루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다. 2021년에는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모스크바에 열렸을 때, 푸르갈의 석방을 함께 요구하며 수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미래의 러시아(Россия Будущего) 당과 공산당, 공정 러시아당까지 여기에 합류하여 푸틴 퇴진을 외쳤고 하바로프스크의 텃밭 자유민주당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에서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된 하바로프스크에서 왜 이와 같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것일까? 본래 하바로프스크 주와 콤소몰스크 나 아무레를 비롯한 아무르 강 지역은 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이 아니라 원내 제4 야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Либераль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и)의 대표적인 텃밭이었다. 자유민주당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우정당으로 당의 목적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 복원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갖고 있다.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적이고 동성애자, 여성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측 모두를 반대하면서 자본주의 개념의 사유재산은 인정하지만, 국가가 시장을 강력히 통제하는 협동조합주의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 즉, 명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반반 섞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 노선은 미국 정부나 유럽 등 서방 국가들, 고르바초프, 러시아 연방 공산당, 언론 매체,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러시아 내 리버럴 세력, 독신주의자, 이민자들을 강력히 배척하고 있다. 나도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를 다니면서 주민과 대화로 느낀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데다가 인종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사람들도 많았다. 술 취해 동양인을 보면 시비걸어 폭행을 일삼는 인간도 꽤 있다. 그래서 하바로프스크에는 밤늦게 현지인 주취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신상에 별로 이롭지 못하다.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의 지방 의원들 중 상당수가 자유민주당의 두마 의원으로 들어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 본토인보다는 소련 시절, 외지인과 혼혈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다당제를 허용한 이후, 최초의 야당으로 분리된 바 있다. 그들이 야당이 된 것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출신이 아닌 타 지역 소비에트 연방 인민공화국 룰신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유태인 혼혈들이 많았는데 당 대표였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Владимир Жириновский)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알마아타 출신에 유태인 혼혈이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탄생했을 때 친(親) 정부 정권으로 돌아서 옐친과 푸틴을 적극 지지했다. 그리고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받쳐주는 야당으로 활동했는데 2018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기까지 통합 러시아당의 2중대라는 굴욕적인 별칭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2018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과의 공조가 완전히 깨지는 사건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발생한다. 당시 선거에서 기존의 통합 러시아당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하는 이변이 발생했는데 그 자리를 차지한 곳의 대다수가 당시 제2 야당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자유민주당이 차지한게 문제였다. 이같은 상황이 발생된데에는 제1야당으로 올라선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통합 러시아당을 떨어뜨리고 다음 선거에서 충분히 해볼만한 자유민주당에 몰표해 버린 것이었다. 공산당의 영수였던 겐나디 주가노프는 기존의 여당과 여당 2중대인 자유민주당의 사이를 갈라놓고 통합 러시아당을 낙선시켜야 지방에서 거대 여당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차기 지자체 선거에서 공산당의 후보로써 해볼만한 후보들을 내세워 대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통합 러시아당의 공약 실천 능력이 약하고 영향력 또한 부족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 대해 자유민주당에 집중적인 투표를 유도했던 것이다. 사실 통합 러시아당은 우랄 산맥 서쪽 유럽러시아 지역에 더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에 낙후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 강 일대의 선거구에 대해서는 표 밭 관리에 안일했을 뿐더러 거의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부분은 극동에서 통합 러시아당의 대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아무르 강 유역과 하바로프스크 지방에서 주지사 뿐만 아니라 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36석 중 28석을 자유민주당이 차지하고 통합 러시아당은 28석을 잃고 단 2석만 유지한 대참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패에 깜짝 놀란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은 당시 대단한 충격에 빠져 푸틴은 수개월간 자유민주당 당선자들을 비롯해 야당 당선자들을 크레믈린에 부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자유민주당 소속이자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인 세르게이 푸르갈이 2020년에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수감되었고 이에 당대표 지리노프스키는 이 사건이 사법살인이라고 규탄하며 사건이 발생한 2004년 당시와 2011년 마피아 집단들을 체포했을 당시에 벌어진 살인 사건 때는 러시아 실로비키 행정부들이 뭘 했냐며 정부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통합 러시아당과 자유민주당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면서 노련한 공산당의 영수 겐나디 주가노프의 전략이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이어 시베리아의 소도시 시장 선거에서는 선관위가 기존의 야권 후보들 출마를 무산시켰지만 여기에 대타로 출마한 주의 자유민주당 부당원들이 집권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하면서 통합 러시아당은 시베리아 소도시 선거에서도 대패하는 이변이 연이어 발생했다. 시베리아 동부와 아무르, 연해주의 전권을 장악한 자유민주당은 결국 2021년 총선에서 약 7.5%를 득표하여 기존 의석보다 18석 감소한 21석을 차지했고 27석을 얻은 공정 러시아에 밀려 제4당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원내 극소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다. 그리고 같은 해, 알렉세이 나발니와 세르게이 푸르갈 주지사에 대한 석방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본래 자유민주당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당수인 지리노프스키도 크림 반도와 돈바스를 영유해야 한다는 공격적인 주장을 했지만 우선 그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더라도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집권을 막는것이 먼저이자 목표로 삼고 반전 시위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결론은 만약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축출되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고 집권 여당이 됐든 크림 반도와 돈바스 문제는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될 것이다. 전쟁은 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이든 두 지역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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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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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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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0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7
  • 2020년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발생한 반 정부 시위와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투옥 사건
    2020년 7월 11일, 극동 연해주에서 가장 큰 도시 하바로프스크에는 9주 동안 시위와 피케팅이 진행되었다. 정치적 개혁과 개선도 목표로 두고 시위를 했으며 이들의 시위는 결국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퇴진"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많은 시민들이 러시아 현 정권이 불만을 가져 시위를 벌이게 된 이유는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였던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이 갑자기 투옥되었기에 그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9주 연속으로 시위가 발생했고 러시아 정부에서는 3주가 지나자 시위에 대한 보도와 석방 시위를 전면 차단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시위가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벨라루스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관계로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존재한다. 이는 직선거리 9,000km나 떨어진 벨라루스 민스크의 시위를 하바로프스크에서 거주하는 벨라루스 국민들을 통해 자세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 시위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국기 및 하바로프스크 지방 깃발을 흔들며 벨라루스 민주화 시위를 지지함과 동시에 옛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국기도 함께 들며 시위하여 서쪽으로 9,000km나 떨어져 있는 벨라루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다. 2021년에는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모스크바에 열렸을 때, 푸르갈의 석방을 함께 요구하며 수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미래의 러시아(Россия Будущего) 당과 공산당, 공정 러시아당까지 여기에 합류하여 푸틴 퇴진을 외쳤고 하바로프스크의 텃밭 자유민주당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에서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된 하바로프스크에서 왜 이와 같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것일까? 본래 하바로프스크 주와 콤소몰스크 나 아무레를 비롯한 아무르 강 지역은 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이 아니라 원내 제4 야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Либераль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и)의 대표적인 텃밭이었다. 자유민주당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극우정당으로 당의 목적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 복원이라는 황당한 명제를 갖고 있다.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적이고 동성애자, 여성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측 모두를 반대하면서 자본주의 개념의 사유재산은 인정하지만, 국가가 시장을 강력히 통제하는 협동조합주의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 즉, 명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반반 섞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 노선은 미국 정부나 유럽 등 서방 국가들, 고르바초프, 러시아 연방 공산당, 언론 매체,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러시아 내 리버럴 세력, 독신주의자, 이민자들을 강력히 배척하고 있다. 나도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를 다니면서 주민과 대화로 느낀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데다가 인종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사람들도 많았다. 술 취해 동양인을 보면 시비걸어 폭행을 일삼는 인간도 꽤 있다. 그래서 하바로프스크에는 밤늦게 현지인 주취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신상에 별로 이롭지 못하다.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강 일대의 지방 의원들 중 상당수가 자유민주당의 두마 의원으로 들어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 본토인보다는 소련 시절, 외지인과 혼혈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다당제를 허용한 이후, 최초의 야당으로 분리된 바 있다. 그들이 야당이 된 것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출신이 아닌 타 지역 소비에트 연방 인민공화국 룰신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유태인 혼혈들이 많았는데 당 대표였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Владимир Жириновский)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알마아타 출신에 유태인 혼혈이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탄생했을 때 친(親) 정부 정권으로 돌아서 옐친과 푸틴을 적극 지지했다. 그리고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받쳐주는 야당으로 활동했는데 2018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기까지 통합 러시아당의 2중대라는 굴욕적인 별칭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2018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과의 공조가 완전히 깨지는 사건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발생한다. 당시 선거에서 기존의 통합 러시아당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하는 이변이 발생했는데 그 자리를 차지한 곳의 대다수가 당시 제2 야당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자유민주당이 차지한게 문제였다. 이같은 상황이 발생된데에는 제1야당으로 올라선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통합 러시아당을 떨어뜨리고 다음 선거에서 충분히 해볼만한 자유민주당에 몰표해 버린 것이었다. 공산당의 영수였던 겐나디 주가노프는 기존의 여당과 여당 2중대인 자유민주당의 사이를 갈라놓고 통합 러시아당을 낙선시켜야 지방에서 거대 여당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차기 지자체 선거에서 공산당의 후보로써 해볼만한 후보들을 내세워 대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통합 러시아당의 공약 실천 능력이 약하고 영향력 또한 부족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 대해 자유민주당에 집중적인 투표를 유도했던 것이다. 사실 통합 러시아당은 우랄 산맥 서쪽 유럽러시아 지역에 더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에 낙후한 시베리아 동부 지역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 강 일대의 선거구에 대해서는 표 밭 관리에 안일했을 뿐더러 거의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부분은 극동에서 통합 러시아당의 대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아무르 강 유역과 하바로프스크 지방에서 주지사 뿐만 아니라 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36석 중 28석을 자유민주당이 차지하고 통합 러시아당은 28석을 잃고 단 2석만 유지한 대참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패에 깜짝 놀란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은 당시 대단한 충격에 빠져 푸틴은 수개월간 자유민주당 당선자들을 비롯해 야당 당선자들을 크레믈린에 부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자유민주당 소속이자 하바로프스크 주지사인 세르게이 푸르갈이 2020년에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수감되었고 이에 당대표 지리노프스키는 이 사건이 사법살인이라고 규탄하며 사건이 발생한 2004년 당시와 2011년 마피아 집단들을 체포했을 당시에 벌어진 살인 사건 때는 러시아 실로비키 행정부들이 뭘 했냐며 정부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통합 러시아당과 자유민주당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면서 노련한 공산당의 영수 겐나디 주가노프의 전략이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이어 시베리아의 소도시 시장 선거에서는 선관위가 기존의 야권 후보들 출마를 무산시켰지만 여기에 대타로 출마한 주의 자유민주당 부당원들이 집권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하면서 통합 러시아당은 시베리아 소도시 선거에서도 대패하는 이변이 연이어 발생했다. 시베리아 동부와 아무르, 연해주의 전권을 장악한 자유민주당은 결국 2021년 총선에서 약 7.5%를 득표하여 기존 의석보다 18석 감소한 21석을 차지했고 27석을 얻은 공정 러시아에 밀려 제4당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원내 극소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다. 그리고 같은 해, 알렉세이 나발니와 세르게이 푸르갈 주지사에 대한 석방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 시위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본래 자유민주당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당수인 지리노프스키도 크림 반도와 돈바스를 영유해야 한다는 공격적인 주장을 했지만 우선 그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더라도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의 집권을 막는것이 먼저이자 목표로 삼고 반전 시위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결론은 만약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축출되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되고 집권 여당이 됐든 크림 반도와 돈바스 문제는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될 것이다. 전쟁은 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이든 두 지역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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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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