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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의 단일화 거부…국민의힘 전략 급변, 김문수 자강론 부상
- [서울=2025.05.27.] 이준석 “단일화 없다” 선언…국민의힘, 3자 구도로 선회 2025년 5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 앞에서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비상계엄에 책임 있는 세력과의 후보 단일화는 이번 선거에 없다”고 단언했다. 이로써 제21대 대통령 선거의 막판 최대 변수였던 ‘이준석-김문수 단일화’는 사실상 무산됐다. 이준석 후보는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에 대해 “단일화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후보”라고 직격하며, 김 후보와의 회동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김문수 후보가 보여준 리더십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며 “추락만 남은 김문수 후보와 달리 나는 이재명을 뒤집을 역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국민의힘은 기존의 ‘반명(反明) 빅텐트’ 전략을 접고, ‘3자 구도 필승론’으로 선거 전략을 변경했다.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은 같은 날 열린 ‘2025 한국포럼’에서 “개혁신당이 단일화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다면, 우리도 그 뜻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국민의힘은 이준석 후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표를 잠식하고, 보수 진영의 결집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여전히 “이준석을 찍으면 이재명이 된다”는 이른바 ‘사표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김문수 후보 측은 “우리가 본류이며, 이준석 후보 지지는 결국 사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이준석 후보는 “김문수 후보가 과거 한덕수 전 총리와 단일화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이제 와서 단일화만 외치며 대국민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개혁신당은 국민의힘의 2중대가 아닌 정치 대체 세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전투표가 29일부터 시작되는 가운데, 이번 선거에서 보수 진영은 단일화 없이 각자 완주를 선택했다. 대선 구도는 이재명-김문수-이준석의 3자 대결로 확정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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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의 단일화 거부…국민의힘 전략 급변, 김문수 자강론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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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악필 공보물' 발송…단일화 없이 대선 완주 의지
- [서울=2025.05.25.] 이준석, 대선 공보물 발송 강행…민주당 “단일화는 내란 세력 결탁” 공세 2025년 대선을 앞두고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선거 공보물을 전격 발송하며 완주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와의 단일화 가능성을 '내란 세력 결탁'이라 규정하며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이준석 후보는 24일 수원역 로데오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기호 4번 개혁신당 이준석이 투표용지에 선명히 남을 것”이라며 완주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의 선거 공보물은 기존 형식에서 벗어나 손글씨 형태로 제작되어 "악필 공보물"이라는 평가 속에 눈길을 끌었다. 발송 비용만 최소 30억~40억 원이 소요되는 공보물 발송은 재정난 속에서도 단일화 없이 독자 행보를 고수하겠다는 상징적 행동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강경 대응에 나섰다. 이재명 후보는 이날 여의도 당사 기자간담회에서 “이준석도 결국 내란 단일화를 할 것”이라며, 김문수-이준석 후보의 단일화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했다. 민주당은 두 후보를 ‘내란 옹호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준석 지지층의 이탈을 유도하는 공세를 펼쳤다. 민주당의 전략 변화는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이준석 후보의 지지율이 10%를 넘어서고, 이재명·김문수 후보 간 격차가 9%포인트로 좁혀진 결과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준석 후보가 2030 중도 부동층에서 지지를 얻으며 이재명 후보의 잠재적 지지 기반을 잠식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득표율 15%를 넘기지 못하면 선거비용 보전이 어려워 자연스럽게 단일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준석 후보는 “단일화는 망상”이라며 이를 일축하고 있다. 한편, 민주당은 “이준석 후보가 지금도 내란 세력과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슈 선점을 위한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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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악필 공보물' 발송…단일화 없이 대선 완주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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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난영 “노조는 못생기고 과격”… 노동절 발언에 논란 확산
- [서울=2025.05.25.] 설난영 “노조는 못생기고 과격”…외모·노동운동 비하 논란 설난영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후보 배우자가 노동절 간담회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발언이 잇단 논란을 낳고 있다. 설 씨는 지난 5월 1일 경북 포항 북구 국민의힘 당원협의회 사무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노조는 아주 과격하고, 세고, 못생겼다”며 “저는 예쁘고, 문학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극우 성향 계정 ‘카운터 엑스(X)’가 공개한 영상으로 알려지면서 한국노총과 야당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5월 23일 논평을 통해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노동 운동을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간다”고 비판했다. 설 씨는 과거 세진전자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낸 바 있으며, “그 시절 노조는 단순한 권익 보호였지만, 지금은 정치색이 짙다”며 현재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이와 함께 5월 24일 공개된 쿠팡플레이 예능 ‘SNL 코리아 시즌7’에 출연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배우자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을 풍자하며 “앞으로 법카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설 씨는 “국민 세금으로 개인 물품을 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동일한 방송에서 설 씨는 각 대선 후보를 음식에 비유하며 김문수 후보를 “생명수”, 이재명 후보를 “탁한 커피”,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라 표현했다. 이준석 후보에 대해선 “단일화를 해야 할 식구”라고 말했다. 설 씨의 발언은 개인적 의견이라기엔 선거 국면에서 상대 후보를 겨냥한 공격과 성차별적 발언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며, 향후 유권자 반응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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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난영 “노조는 못생기고 과격”… 노동절 발언에 논란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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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완주” vs 민주당 “내란 단일화”…대선 막판 공방 격화
- [서울=2025.05.25.] 이준석 단일화 공방 가열…민주당 “결국 내란세력 연합” 견제 본격화 25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재명 대선후보는 “이준석 후보는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내란 단일화’를 할 것”이라며, 김문수 후보와의 연대를 기정사실화하고 선제 대응에 나섰다. 이재명 후보는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와 단일화할 가능성을 ‘망상’이라 일축한 것에 반해, 민주당은 이를 ‘내란세력 연합’으로 규정하며 여론전에 돌입한 상태다. 선대위 핵심 관계자는 “이준석 후보 지지층의 약 60%는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했던 유권자”라며, 단일화가 오히려 이탈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준석 후보는 지난 22일 기자회견과 23일 TV토론을 통해 독자 완주 의지를 밝혔지만, 민주당 측은 22~24일 여론조사에서 이준석 지지율이 10%를 돌파하고 이재명-김문수 간 격차가 9%포인트로 좁혀지자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편, 개혁신당은 공보물조차 자필로 작성해 ‘돈 없는 선거’를 강조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공보물 제작 및 발송에만 최소 30~40억원이 소요되는 점을 근거로 “결국 이준석도 자금 한계로 단일화를 택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준석 후보는 “기호 4번 개혁신당의 이름은 투표용지에 선명히 남을 것”이라며 완주 의지를 거듭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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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완주” vs 민주당 “내란 단일화”…대선 막판 공방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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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김문수 지지”… 유세현장선 ‘이재명 지지’ 말실수 해프닝
- [서울=2025.05.23.] 손학규 “김문수 지지”… 유세 현장선 ‘이재명 지지’ 말실수 소동 2025년 5월 22일, 경기 광명시 철산동 철산로데오거리에서 열린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유세 현장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김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하는 자리에서 “이재명을 도와야겠다”는 말실수를 한 것이다. 손 전 대표는 이날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사람은 김문수뿐”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연설 중 “그래서 이재명 지지를 선언했다”고 외쳐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 청중들 사이에서 환호와 동시에 의아한 반응이 섞인 5초 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아, 김문수 지지 선언을 했습니다”라고 정정했다. 이 같은 해프닝은 그의 정치 인생에 드리운 ‘철새 정치인’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는 평가다. 손 전 대표는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의당, 바른미래당, 민생당 등 다수 정당을 거치며 당적을 여러 번 변경해왔다. 특히 2020년 총선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후 다시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같은 날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손 전 대표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주의가 무너질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김 후보의 개헌 및 정치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단일화 과정에서 김문수가 승리했다. 이제 대선이 열흘 남았다. 나라를 살리려면 김 후보밖에 없다”며 지지를 재차 강조했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선거운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번 해프닝은 단순한 말실수를 넘어, 선거 막판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손 전 대표의 잦은 정치 노선 변경과 발언의 신중함 부족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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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김문수 지지”… 유세현장선 ‘이재명 지지’ 말실수 해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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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는 해법일까? 보수의 딜레마와 이준석의 계산
- [칼럼] 흔들리는 대선판, ‘단일화’는 해법인가? - 보수의 결집, 중도의 유동, 그리고 이준석 변수 대선 D-11, 변수는 끝나지 않았다 2025년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막판 판세가 요동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일정 기간 5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우세를 유지했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김문수·이준석 두 후보의 지지율 합이 오차범위 내에서 이 후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이재명 리스크와 보수진영의 결집, 그리고 이준석이라는 ‘제3 변수’가 선거판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분열된 보수, 단일화 요구 급증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문수(34%)와 이준석(11%)의 합산 지지율은 이재명 후보(46%)와 불과 1%포인트 차이로 좁혀졌다. 이에 따라 보수 유권자들 사이에선 '이재명 저지'를 위한 단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이준석 후보는 22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어떤 인사와도 단일화 논의를 하지 않겠다”며 완주 의지를 재확인했다. 보수 결집과 중도 이탈 최근 보수층, 특히 PK지역과 60대 이상 유권자 사이에서 김문수 후보 지지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한 조사에선 PK에서 김 후보가 43%, 이 후보가 36%로 역전되었고, 70대 이상에선 김 후보가 20%포인트 이상 앞서기도 했다. 이는 국민의힘 내부 혼선에도 불구하고 전통 보수 지지층의 전략적 결집 결과로 해석된다. 민주당의 ‘독주’ 흔들림 이재명 후보는 한때 50%를 넘나드는 지지율로 선두를 달렸지만, 최근엔 40% 중반으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부자 몸조심’ 전략이 이슈 주도력을 잃게 만든 데 따른 반사적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이준석 후보는 두 자릿수 지지율로 선거비용 보전 기준선을 넘기며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강경한 이준석, 애매한 김문수 단일화는 수학적으론 의미가 있으나, 정서적·정치적으론 복잡하다. 이준석 지지층의 상당수는 김문수에 대해 비호감이며, 반대로 김문수 지지층 역시 이준석을 배척하고 있어 단일화 시 일부 이탈은 불가피하다. 이재명 후보 역시 보수의 단일화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유세 메시지로 맞서고 있다. 단일화 시나리오'의 유효성 국민의힘은 사전투표 시작일인 5월 28일까지 단일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이준석을 설득하기 위한 다양한 메시지를 내부적으로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준석이 직접적으로 과거 당내 인사들의 인신공격과 문자 협박 등을 거론하며 거부 입장을 밝힌 이상, 단일화 성사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대선은 단일화가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수치상의 계산이 정서적 지지를 담보하지 못할 때,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킬 수 있다. 유권자들은 단순한 후보 합산이 아닌 ‘정치적 명분’과 ‘비전의 설득력’을 기준으로 최종 선택을 할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바꾸는 선거는 ‘누가 이길까’가 아니라 ‘왜 이겨야 하는가’에 답을 찾을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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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는 해법일까? 보수의 딜레마와 이준석의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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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단일화 제안 거절…“당권 아닌 대선 승리가 목표”
- [서울=2025.05.21.] 이준석, ‘단일화’ 제안에 연일 선 긋기…국민의힘 러브콜 속 “입장 변함없다” 2025년 5월 21일, 서울과 경기 성남 일대에서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를 향한 국민의힘의 '단일화' 제안이 본격화됐다. 김용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안철수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등이 연달아 이 후보를 찾아 단일화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이 후보는 "입장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단호히 밝혔다. 이날 오전 이 후보는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참석 이후 기자들과 만나 "안철수 의원과의 교류는 언제나 열려 있으나, 단일화에 대한 논의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경기 성남시 가천대학교 캠퍼스에서는 안철수가 이준석을 직접 찾아 유세 현장을 방문하며 단일화 물꼬를 트려 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김용태 비대위원장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이준석 후보는 보수 진영을 위해 싸워온 리더였고, 정의가 승리하는 길을 함께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쳐 쓸 수 없는 보수 본가라면, 더 튼튼한 집을 새로 짓겠다”며 개혁신당과의 재창당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하지만 이준석 측은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 '정치공학적 시나리오'라며 강하게 경계하는 분위기다. 특히 개혁신당 이동훈 수석대변인은 “국민의힘 친윤계가 ‘대통령 후보는 김문수로, 당권은 이준석에게’라는 조건으로 단일화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는 대선 패배 시 책임을 이준석에게 돌리기 위한 프레임 설정이자, 한동훈의 당권 장악을 막기 위한 정치 셈법”이라고 비판했다. 이준석은 “국민의힘은 대선을 이길 생각이 없다”며 “우리는 당권이 아니라 대선 승리를 위한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범보수 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국민의힘과, 이를 거부하며 독자노선을 고수하는 개혁신당 간의 줄다리기가 대선을 앞둔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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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단일화 제안 거절…“당권 아닌 대선 승리가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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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지지율 51%, 대세론 굳히나…윤석열 탈당 후 흔들리는 보수
- [서울=2025.05.17.] 대선 D-17, 이재명 과반 지지율 돌파…윤석열 탈당에 흔들리는 보수, 변수는 한동훈과 이준석 6·3 대선을 불과 17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지지율 51%를 돌파하며 대세론을 굳히고 있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탈당과 선대위 혼선으로 지지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여기에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의 '현장 복귀' 선언과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의 단일화 가능성이 미묘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5월 13~15일 전국 유권자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는 지지율 51%를 기록하며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29%)와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8%)를 크게 앞섰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선거 직전 지지율로는 역대 최고치다. 보수진영은 내부 분열과 리더십 부재로 위기를 맞고 있다. 가장 큰 변수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탈당 선언이다. 윤 전 대통령은 내란 혐의로 재판을 받는 가운데 자진 탈당했지만, 김문수 후보는 이에 대해 "대통령 스스로의 결정"이라며 유보적 태도를 보여 지지층 내 혼란을 야기했다. 특히 강성 보수층은 김 후보가 윤 전 대통령과의 선 긋기를 명확히 하지 않는 것에 실망을 표하고 있으며, 중도 보수층 역시 확장성 부족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한국갤럽 조사에서 보수 성향 유권자의 58%만이 김 후보를 지지한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보수층 내부 결집이 미흡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윤 전 대통령 부부와의 절연, 계엄 반대, 극단세력과의 선 긋기”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김문수 후보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는 “이 조건들이 수용되지 않더라도 당을 위해 현장에 나설 것”이라고 밝혀, 유세 참여 가능성을 시사했다. 일각에서는 한 전 대표의 등판이 김 후보 캠프의 반전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반면, 이준석 후보는 젊은층과 중도 유권자 일부의 지지를 받으며 8%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으나, 본격적인 확산세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내 일부에서는 ‘김문수-이준석 단일화’ 가능성을 마지막 승부수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후보의 과반 지지율이 유지될 경우, 단일화가 가지는 정치적 파괴력도 제한적일 수 있다. 지역별로는 이재명 후보가 대구·경북(TK) 지역에서도 34%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전통적 보수 강세 지역인 TK에서 김문수 후보는 48%를 얻는 데 그쳐,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기록한 73.9%와는 큰 격차를 보였다. 부산·울산·경남(PK)에서는 이 후보가 41%로 김 후보(39%)를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 이재명 후보 측은 “지지율이 높다고 방심할 수 없다”며 겸손한 행보를 강조하고 있다. 이 후보는 “선거는 고개를 쳐들면 진다”며 각 캠프에 ‘절박함’을 주문했다. 민주당은 영남권 공략과 중도층 확장을 계속 이어가며 득표율 극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국민의힘은 김문수 후보 단독으로는 반전이 어려운 만큼, 이준석과의 연대와 한동훈의 본격적인 가세를 통한 지지층 재결집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진영의 내홍이 깊어진 상황에서 이 같은 전략이 실현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남은 변수는 단일화 성사 여부와 첫 TV토론(5월 18일)이다. 특히 이준석 후보는 경제 공약을 중심으로 이재명 후보를 정면으로 겨냥하며 존재감을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정치권에선 “이재명이 과반 지지율을 고수하는 한, 단일화 추진동력도 약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이번 대선은 단순한 인물 대결을 넘어, 정당 내부의 조직력, 위기 대응 능력, 그리고 정치적 상징성의 대결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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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지지율 51%, 대세론 굳히나…윤석열 탈당 후 흔들리는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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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
- 동, 서파키스탄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 3월 22일에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이 동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가 당시 총독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의 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셨을 뿐, 내정에 있어서 자치권 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진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 진나는 동파키스탄의 중심지 다카에서 모든 점에서 우월한 아리아 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만 사용하자고 연설해 벵골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인종적으로는 아리아인이 맞다. 이와 같은 진나의 발언은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고 검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 의식에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진나의 이와 같은 차별성 발언은 단순히 벵골인들에게만 굴복하라고 주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서조차 우르두어 화자는 독립 시점일 때 7%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토박이가 아니라 인도 땅에서 넘어온 실향민들로 알려진 무하지르들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에서 2위의 언어로는 28.4%가 사용하던 펀자브어였으며 7.1%는 파슈토어, 5.8%는 신드어를 사용했다. 이는 문화적인 이질감으로 인한 분열을 우려한 진나로서는 무굴 제국 시절부터 공용어로 사용되던 우르두어로 대동 단결하여 이질감을 줄여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어 진나 본인 또한 우르두어를 외국어로 배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라치 태생인 진나는 이주민인 부모님으로부터 구자라트어를 모어로 익혔다. 그런데 진나는 동파키스탄 연설의 전체 문맥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니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자며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기존 언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를 새로운 서파키스탄의 공용어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졌던 것은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측과 실패한 측으로 분류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립하던 시점에 이르러 파키스탄 국민의 55%가 모국어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도 제국 시절부터 벵골어를 사용해왔던 벵골인들에게 완전 외국어나 다름없던 우르두어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948년 2월 25일, 벵골인들의 지도자인 디렌드라 나트 두타(Dhirendra Nath Dutta)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줄 것을 서파키스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파키스탄 총리 리아카트 알리(Liaquat Ali, 1895~1951)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무슬림의 언어는 오로지 우르두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어 1948년 3월 22일, 동파키스탄에서 진나의 연설이 양 파키스탄의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연설이 진나가 영국령 파키스탄의 총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파키스탄을 방문하여 했던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연설을 한 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48년 9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벵골인들의 분노만 키운 상태에서 동, 서파키스탄을 통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에 진나 총독의 우르두어 단일화 연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이 주도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우르두어를 강요하게되고 동시에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던 벵골어를 우르두어와 유사하게 아랍 문자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강력한 벵골어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시민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ভাষা আন্দোলন)을 벌이게 되었고, 1952년 2월 21일 다카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파키스탄 정부의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 군 사이에 대량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독립한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2월 21일을 국경일인 언어 운동 기념일(ভাষা আন্দোলন দিবস)로 기리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벵골인들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을 기념해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다. 1951년 10월 16일, 진나의 후계자 리아카드 알리 칸 총리가 암살된 이후 벵골인 총리인 카와자 나지무딘(Khwaja Nazimuddin)이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1953년 4월, 서파키스탄인 총독인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에게 일방적으로 해임당하면서 하야했고 벵골인들은 또 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국어 운동은 1954년에 발생한 헌법 개정으로 인해 벵골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국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55년, 동부 벵골의 행정 명칭이 동파키스탄으로 변경되면서 벵골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1961년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벵골인들의 큰 자랑으로 여겨졌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탄생 100주년 행사를 두고 서파키스탄에서 타고르를 반파키스탄적인 인물이라 매도하면서 벵골은 또 다시 크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의 프로파간다를 차단한다는 구실로 타고르의 작품을 금지 처분하는 한편, 벵골어로 된 모든 도서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는 이후에 철회되었으나 196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타고르 작품을 다시 금지하였고, 이에 분격한 19명의 동파키스탄 지식인들이 집단 항의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벵골 문화 탄압이 발생한 것은, 벵골 문화에 대한 서파키스탄 측의 원칙 및 신념을 가진 증오나 적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좀 강제로 제압하겠냐는 편의적인 망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측이 벵골 문화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무감각하다고 평가했으며 오히려 관심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유브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의 군사 독재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 군부의 주축인 펀자브인들은 벵골인들을 열등한 존재이며, 벵골의 가치는 오로지 해외 투자 유치 및 무역에만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심각한 경제적인 착취를 당했는데, 1950~1955년 사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출한 개발비의 20%만 동파키스탄에 사용되었으며, 1965년에는 조금 늘었으나 그래도 35%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은 생산품의 40~50%를 동파키스탄에 강매하면서 사실상 식민지 시장처럼 사용되었고, 동파키스탄의 무역 흑자는 모두 중앙정부가 압수하여 서파키스탄의 무역 적자를 충당하는 것에 사용했다. 1950년대까지 동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은 서파키스탄의 2배에 달했으나, 1969년에 이르러서 서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이 동파키스탄보다 61% 높을 정도로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착취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 파슈툰인들의 벵골인 차별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বাংলাদেশ আওয়ামী লীগ)이라는 정당을 결성하면서 저항을 기획했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 정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방글라데시의 국부(國父)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1958년 들어 아이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서파키스탄의 헌정을 파괴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하자 동파키스탄에 대한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경제적 격차도 더욱 커지게 되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 아유브 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 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동파키스탄의 시민들은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각계에서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정작 서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동파키스탄의 구호에 매우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뱅골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어 사이클론이 상륙된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서야 경계를 내리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 정도만 동원했을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전혀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에 대한 이유로 적대국인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도 정부는 서파키스탄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게 된다. 이는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 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독립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한편 동파키스탄 시민들의 시위 때문에 퇴진한 아이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이듬해인 1970년에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역구 300석을 인구 비례에 따라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을 배정해 놓았는데 2곳을 제외한 동파키스탄의 160개 선거구에서 아와미 연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여성 국회의원을 위해 추가로 두었던 13석 또한 동파키스탄으로 배정한 7석을 전부 아와미 연맹이 차지했다. 그 결과로 인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7석,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으며 이대로라면 단독 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에 있었다. 이에 제2당으로 88석을 차지한 파키스탄 인민당 당수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1928~1979)는 아와미 연맹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치적 인 핵심 지역인 펀자브와 신드에서 승리했으며 다수당인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함으로 인해 아와미 연맹을 공격하기도 했다. 1971년 1월 5일에 부토는 자신이 아와미 연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막상 그는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대해 반대했다. 부토는 서파키스탄의 다수당인 파키스탄 인민당과 동파키스탄의 다수당인 아와미 연맹에게 정권을 분리할 것을 제안했으나, 무지부르 라흐만은 제1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부토와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총수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총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3월 25일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동파키스탄 전체에서 항의와 총파업이 이어지는 등 정국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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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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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
- 동, 서파키스탄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 3월 22일에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이 동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가 당시 총독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의 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셨을 뿐, 내정에 있어서 자치권 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진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 진나는 동파키스탄의 중심지 다카에서 모든 점에서 우월한 아리아 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만 사용하자고 연설해 벵골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인종적으로는 아리아인이 맞다. 이와 같은 진나의 발언은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고 검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 의식에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진나의 이와 같은 차별성 발언은 단순히 벵골인들에게만 굴복하라고 주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서조차 우르두어 화자는 독립 시점일 때 7%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토박이가 아니라 인도 땅에서 넘어온 실향민들로 알려진 무하지르들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에서 2위의 언어로는 28.4%가 사용하던 펀자브어였으며 7.1%는 파슈토어, 5.8%는 신드어를 사용했다. 이는 문화적인 이질감으로 인한 분열을 우려한 진나로서는 무굴 제국 시절부터 공용어로 사용되던 우르두어로 대동 단결하여 이질감을 줄여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어 진나 본인 또한 우르두어를 외국어로 배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라치 태생인 진나는 이주민인 부모님으로부터 구자라트어를 모어로 익혔다. 그런데 진나는 동파키스탄 연설의 전체 문맥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니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자며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기존 언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를 새로운 서파키스탄의 공용어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졌던 것은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측과 실패한 측으로 분류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립하던 시점에 이르러 파키스탄 국민의 55%가 모국어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도 제국 시절부터 벵골어를 사용해왔던 벵골인들에게 완전 외국어나 다름없던 우르두어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948년 2월 25일, 벵골인들의 지도자인 디렌드라 나트 두타(Dhirendra Nath Dutta)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줄 것을 서파키스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파키스탄 총리 리아카트 알리(Liaquat Ali, 1895~1951)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무슬림의 언어는 오로지 우르두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어 1948년 3월 22일, 동파키스탄에서 진나의 연설이 양 파키스탄의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연설이 진나가 영국령 파키스탄의 총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파키스탄을 방문하여 했던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연설을 한 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48년 9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벵골인들의 분노만 키운 상태에서 동, 서파키스탄을 통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에 진나 총독의 우르두어 단일화 연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이 주도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우르두어를 강요하게되고 동시에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던 벵골어를 우르두어와 유사하게 아랍 문자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강력한 벵골어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시민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ভাষা আন্দোলন)을 벌이게 되었고, 1952년 2월 21일 다카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파키스탄 정부의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 군 사이에 대량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독립한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2월 21일을 국경일인 언어 운동 기념일(ভাষা আন্দোলন দিবস)로 기리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벵골인들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을 기념해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다. 1951년 10월 16일, 진나의 후계자 리아카드 알리 칸 총리가 암살된 이후 벵골인 총리인 카와자 나지무딘(Khwaja Nazimuddin)이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1953년 4월, 서파키스탄인 총독인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에게 일방적으로 해임당하면서 하야했고 벵골인들은 또 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국어 운동은 1954년에 발생한 헌법 개정으로 인해 벵골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국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55년, 동부 벵골의 행정 명칭이 동파키스탄으로 변경되면서 벵골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1961년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벵골인들의 큰 자랑으로 여겨졌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탄생 100주년 행사를 두고 서파키스탄에서 타고르를 반파키스탄적인 인물이라 매도하면서 벵골은 또 다시 크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의 프로파간다를 차단한다는 구실로 타고르의 작품을 금지 처분하는 한편, 벵골어로 된 모든 도서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는 이후에 철회되었으나 196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타고르 작품을 다시 금지하였고, 이에 분격한 19명의 동파키스탄 지식인들이 집단 항의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벵골 문화 탄압이 발생한 것은, 벵골 문화에 대한 서파키스탄 측의 원칙 및 신념을 가진 증오나 적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좀 강제로 제압하겠냐는 편의적인 망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측이 벵골 문화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무감각하다고 평가했으며 오히려 관심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유브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의 군사 독재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 군부의 주축인 펀자브인들은 벵골인들을 열등한 존재이며, 벵골의 가치는 오로지 해외 투자 유치 및 무역에만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심각한 경제적인 착취를 당했는데, 1950~1955년 사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출한 개발비의 20%만 동파키스탄에 사용되었으며, 1965년에는 조금 늘었으나 그래도 35%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은 생산품의 40~50%를 동파키스탄에 강매하면서 사실상 식민지 시장처럼 사용되었고, 동파키스탄의 무역 흑자는 모두 중앙정부가 압수하여 서파키스탄의 무역 적자를 충당하는 것에 사용했다. 1950년대까지 동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은 서파키스탄의 2배에 달했으나, 1969년에 이르러서 서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이 동파키스탄보다 61% 높을 정도로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착취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 파슈툰인들의 벵골인 차별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বাংলাদেশ আওয়ামী লীগ)이라는 정당을 결성하면서 저항을 기획했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 정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방글라데시의 국부(國父)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1958년 들어 아이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서파키스탄의 헌정을 파괴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하자 동파키스탄에 대한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경제적 격차도 더욱 커지게 되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 아유브 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 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동파키스탄의 시민들은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각계에서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정작 서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동파키스탄의 구호에 매우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뱅골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어 사이클론이 상륙된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서야 경계를 내리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 정도만 동원했을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전혀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에 대한 이유로 적대국인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도 정부는 서파키스탄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게 된다. 이는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 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독립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한편 동파키스탄 시민들의 시위 때문에 퇴진한 아이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이듬해인 1970년에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역구 300석을 인구 비례에 따라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을 배정해 놓았는데 2곳을 제외한 동파키스탄의 160개 선거구에서 아와미 연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여성 국회의원을 위해 추가로 두었던 13석 또한 동파키스탄으로 배정한 7석을 전부 아와미 연맹이 차지했다. 그 결과로 인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7석,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으며 이대로라면 단독 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에 있었다. 이에 제2당으로 88석을 차지한 파키스탄 인민당 당수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1928~1979)는 아와미 연맹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치적 인 핵심 지역인 펀자브와 신드에서 승리했으며 다수당인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함으로 인해 아와미 연맹을 공격하기도 했다. 1971년 1월 5일에 부토는 자신이 아와미 연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막상 그는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대해 반대했다. 부토는 서파키스탄의 다수당인 파키스탄 인민당과 동파키스탄의 다수당인 아와미 연맹에게 정권을 분리할 것을 제안했으나, 무지부르 라흐만은 제1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부토와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총수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총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3월 25일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동파키스탄 전체에서 항의와 총파업이 이어지는 등 정국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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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