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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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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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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정상회담 이후 중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중일 정상회담 이후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이 중국의 ‘레드라인’을 건드리면서 양국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중국은 한일령, 일본산 수산물 수입 중단, 상임이사국 저지 등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일본은 강경 기조를 유지하지만 내각 내 친중 인사 부재와 보수층 결집 전략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관계 회복은 당분간 어려우며 한국은 중립적·실용적 균형 외교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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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정상회담 이후 중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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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중국 간의 외교 신경전을 두고, 필요한 것은 한국의 중립성
-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외교적 중립성이라는 것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 같다.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대만 유사시 자위대를 활용할 수 있다고 발언하자, 중국 오사카 총영사 쉬첸이 "다카이치의 목을 베겠다"고 했다. 이는 일본이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는 역린을 범한 것이고, 최악의 외교적 결례를 일본이 먼저했다. 이는 내가 러시아를 편들고 있기 때문에 중국 편을 드는게 아니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쪽을 판단한 것이다. 일본이 무엇이건데 대만의 유사시에 자위대를 활용할 것이라는지, 국제적인 인식 및 대만에 관한 국제법으로도 대만은 엄연히 중국과 한 몸이다. 대만과 중화민국으로 수교한 국가도 몇 없으니 대만을 국가로 인정한 나라도 몇 없다. 공식석상에서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는 올라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고, 대만 국가인 중화민국국가(中華民國國歌) 또한 공식적으로 부를 수 없다. 또한 대만은 해외에 대사관, 영사관을 둘 수 없고, 대신 대표부를 두는 것 정도만 허용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게 한 내정간섭이고 권리침해다. 미국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고 있는데, 일본이 무엇이건데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거스르고,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발언을 하는 것인가? 외교관이 타국 총리를 참수하겠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은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은 맞지만 이는 일본이 넘어서 안 되는 레드라인을 넘어 먼저 도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카이치를 편들어 애써 중국의 발언을 같이 비판할 필요는 없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미국도 넘지 않는 선을 일본이 넘었다. 다카이치는 중국의 대만 해상봉쇄 시, 일본이 존립사태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명확히 밝혔는데 이는 대만을 잃으면 오키나와가 사정권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대만을 지키기 위해 중국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일본은 이중적인 입장을 버려야 한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존립사태위기에 직면했다며 대만 유사시 자위대를 동원한다는 것이다. 정말 중국과 겨루고 싶다면 다카이치는 "하나의 중국"은 위법이니 이를 깨고, 대만을 지키겠다고 정식으로 나서며 해상 자위대를 펑후 일대까지 파견하여 포를 진먼으로 돌려야 한다. 그런데 다카이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액션도 하지 않았다. 이는 일종의 블러핑 수준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청나라를 깨부순 청일전쟁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과거의 청나라가 아니다. 청나라 수준의 무력을 지닌 국가였다면 서구 세력이 이미 20세기 초처럼 중국을 잠식했어야 맞다. 그런데 지금 서구 세력이 중국 어딘가를 잠식하고 있는가? 중국에 남아 있는 서구의 식민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 한국 보수 진영들의 수준은 1894년, 즉 130년 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총영사의 참수 발언은 그가 히스테리를 부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국" 원칙을 침해한 역린을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 타이폰 미사일 시스템이 일본에 배치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극동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며 "가혹한 보복"을 천명했다. 미국 타이폰 미사일 시스템은 9월 11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미국-일본 합동 군사 훈련의 틀 내에서 미국 이와쿠니 군사 기지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아직 철수하지 않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을 포함한 중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지상 이동식 발사 시스템이다. 토마호크는 러시아와 미국 모두 2019년에 철수한 역사적인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에 따라 금지되었던 무기다. 이를 발사할 수 있는 발사대인 타이푼 시스템이 이와쿠니에 설치되었다면 사할린 지역에 러시아의 핵무기를 배치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전쟁의 긴장을 불어넣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이다. 그리고 중국은 희토류를 쥐고 있다는 것을 다들 엄청나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미국과의 관세전쟁에서 중국이 쥐고 있는 희토류 목줄을 풀어준 것은 미국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대두 한 번 사주고, 희토류 수출은 유예했을 뿐이고, 미국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펜타닐 관세만 낮춰줬을 뿐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중국이 기술패권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 여전히 중국제가 수출되고 있고, 공장이 풀 가동되어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무슨 기술 패권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하는가? AI 기술 또한 중국이 미국을 앞서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미 AI 기술은 중국이 미국을 넘어선지 꽤 됐다. 그런데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도 최악인 시기를 겪었던 90년대에는 미국처럼 셧다운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의 셧다운에 대해 보수 진영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이는 자신들이 우상처럼 여겨왔던 미국의 위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고, 그것을 언급하면 자신들이 불리하기에 감추는 것이다. 셧다운이 종료되면 그때서야 언급할 것이다. 미국은 셧다운을 극복한 역시 초강대국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진정한 초강대국은 셧다운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셧다운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극복하는 것 자체가 자랑이 아니다. 정부 시스템이 올 스톱 된 것을 극복한게 무슨 자랑으로 여기는 것인가? 이는 그만큼 미국 내정이 혼란스럽다는 증거다. 그리고 일본이 강경노선으로 돌아서니 중국이 공포에 질렀다고 주장들 하던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관을 시켜 협박 발언을 내뱉게했다고 하는데 한국의 보수 진영은 남의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쓰는 자들이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중국은 홍콩의 주권을 빼앗았다>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홍콩은 단 한 번도 주권 국가인적이 없는데 무슨 주권을 뺏나? 1997년 반환 이전에는 영국령 홍콩이었고,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다소 기형적 조건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조건부 공존하는 체제다. 즉, 중공령인데 그 안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국양제(一國兩制)는 홍콩과 마카오, 현재 두 곳을 갖고 있다. 이어 중국은 대만을 속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만 정부를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속국으로 인식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중국"으로 여기고 있는데 무슨 "속국"으로 인식하는지, 대만이 주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럼 전 세계에 대만을 인정하는 국가가 왜 없는지, 그리고 왜 중화민국 대사관이라는 이름이 없고 타이베이 대표부라 이름이 붙여져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UN에 정식국가로 왜 등록이 안 되어 있는지 설명해 볼 것이며 왜 미국이 "하나의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아마 한 명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 유사시에 한국은 중립이 최선이다. 지금 중국은 청나라 말기와 다르며 제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물량공세는 이기지 못한다. 원자재로 재가공하여 물건 팔아먹는 국가들이 무슨 수로 무한정 원자재를 캐내는나라를 이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란이 이스라엘 텔아비브 폭격할 때,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에로우시스템, 페트리어트 모두 방어에 실패했다. 예를 들어 10개 중에서 7개가 명중했지만 3개는 놓쳤다. 그런데 그 3개가 텔아비브에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텔아비브 공습 영상과 도시의 초토화 된 사진을 보면 그 피해의 참상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어떻게 그 물량을 다 막을 수 있느냐, 70% 요격률도 대단하다 하면서 정신승리를 하는데 이스라엘에 설치해 놓은 시스템이면 다 막아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이언돔도 안심하지 못해 에로우시스템과 페트리어트까지 구비해놨다는 것은 100%의 요격을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30%가 뚫렸다는 것은 나중에 1,000개 이상의 드론 포함 미사일 보내면 적어도 300개는 낙하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폭발성이 준핵폭탄 급으로 고농축 우라늄이 탑재된 포탄을 탑재할 수 있다면 다 막지 못해서 요격에 실패한 1~2개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양산해낼 수 있다. 왜 이것을 생각하지 못할까? 시기적으로 현재 구한말과 비슷한 형태라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때의 청나라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중국, 북한과 최전선에 있다. 대만과의 분쟁에 참여할 경우, 북한군이 휴전선에 공격 대형을 펼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의 군대가 대만으로 간 틈에 북한군이 공격해 내려오면 감당할 수 있나? 그러니 외교적으로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게 좋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은 대만 유사시 중립이 최선이다. 사진 : 중국-대만-일본의 외교전이 치열해지고 있다. 출처 : Yahoo! JAPAN 중국, 대만, 타이완, 일본, 중국-일본 외교전, 다카이치 사나에, 하나의 중국, 대만 유사시, 일본 자위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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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중국 간의 외교 신경전을 두고, 필요한 것은 한국의 중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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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 일본의 대만 지배에 있어 대만 초대 총독은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그는 가고시마 출신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갑오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현역 해군대장으로서 대만 총독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타이베이 부임한해 만인 1896년 본국 마쓰가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귀임하게 된다.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마구치 하기죠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죠슈벌(長州伐)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독 제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육군 차관으로 본국에 귀환한 그는 1898년에는 다시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 뒤로도 출세가도를 타고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총리대신 재임 중의 일이다. 다음으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갑오전쟁 당시 여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그는 육군 중장이라는 현역의 신분으로 1년 6개월 동안 대만 총독을 지내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총독에서 물러난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운명하자 부인과 함께 천황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도 야마구치 태생의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육군 참모본부 국장과 육군대학 교장을 지내면서 가쓰라 타로에 이어 일본군에 독일식 전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타이베이에 부임하자마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 규칙을 마련해 본격적인 토지 징탈을 시작하게 된다. 동양토지회사도 이 때 설립 되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재배되었던 쌀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지룽(基隆), 가오슝(高雄) 등 항구의 축항공사도 시작되었다. 북쪽의 타이베이와 남쪽 항구도시인 타이난을 잇는 종단철도가 완공된 것도 그의 재임 때였다. 이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직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고다마 총독은 특히 민정장관에 고토 신페이를 임명함으로써 철저한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그 뒤 만철 총재, 내무대신, 외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를 픙미했던 주인공이 고토였다. 제5대 총독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도 야마구치 태생의 죠슈번 계보에 속한다. 일본 정계와 군벌에서 “죠슈와 사쓰마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만큼 죠슈벌과 사쓰마벌이 요직을 두루 나눠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역대 군벌출신 중에서도 도쿄 위수총독이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지녔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을 때 그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대시위가 일어나자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의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서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재임 기간이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리산의 울울창창한 열대 삼림에 대한 본격 채벌이 시작된 것이 사쿠마 총독 때의 일이다. 현재 타이베이에 남아 있는 총독부 청사도 이 때에 비로소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총독을 거쳐 제7대 총독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조선총독부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일전쟁 직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이상이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가 문관통치로 바뀌기 전의 총독들이다. 일본 식민지 정책의 큰 흐름은 조선이나 대만에나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했다. 그리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실력 양성 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일본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85%,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10%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중화권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대만인들에게 있어 일본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로 조사되었다. 이전인 2017년 조사에서조차도 호감 83%, 비호감 12%에서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외성인들 차원에서 볼 때, 일본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낮은 편인데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 사건 등 사람이 대량 학살당하고 매번 패전하여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 대만은 중일전쟁을 치룬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본성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만이 일본에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피해국이라는 행태에 동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선을 긋고 있다. 다만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국민당 리덩후이 정권 시절과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정권은 좀 더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긴 했다. 특히 리덩후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여 해서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하여 대만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71년 UN 상임이사국을 중공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축출하는 안에 대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자유 진영 국가들도 대만을 배신하고 중공 편에 서주는 와중에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만의 UN 탈퇴 후에는 일본은 중공과 수교를 맺었으며 이 중일수교 직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대만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대만과 일본 양국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베 총리가 직접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였다.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일본에 물자 지원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성금 약 200억 엔을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 정부의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 2010년대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만은 사실 여부를 떠나 태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타이베이 쑹산 초등학교 앞에 가면 '도호쿠 구호 감사 겸 쯔위궁 350주년 축하 시계탑'이 존재하고 있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정치, 외교적으로 이용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국 포위망에 한 축을 구축했었다. 2018년 2월,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중국의 시진핑이 화해의 제스처로 구조대를 보내려 했는데 대만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구조대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은 대만에 위로를 보내는 친필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24년 12월에는 일본과 대만이 대만 유사시를 염두에 두고 대만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 정보 공유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17일, 일본 정부가 호적에 대만을 표기하는 것을 5월부터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라고 오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발표했다. 다카이치는 대만 유사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놓고 정면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는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권리가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자위대가 출동하여 무력행사 가능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역대 근현대사에서 중국은 일본을 이긴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청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청나라가 붕괴되고 군벌 분열시대와 이념 분열시대에 휩쓸린 중국이 통일되고 부유하며 안정적인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중국은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나라이고, 전쟁 무기들을 물량으로 계속 찍어내고 있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도 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은 굳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 압박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중국의 원자재, 특히 희토류의 주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중국 희토류 수출 통제에 큰 타격을 받은 후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도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일본의 중국 선원 나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바 있는데 일본은 불과 3일만에 항복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원료가 문제가 아니라 가공과 정제가 문제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예민한 문제를, 대만을 건드리면 집단 자위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이고,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위험한 문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중국 원자재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일본의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고 있다. 제2 도련선이 무너져도 관망만 했던 일본의 자위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하겠다고의 발표는 일본의 군, 경제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과 대적하겠다는 것인데 이제와서 그와 같은 발언은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 단독으로 중국과 소위 "맞짱" 뜨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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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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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 터키 차낙칼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 그곳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심취해있었던 탐험가인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많은 연구 끝에 발굴에 성공한 곳이다. 그곳은 바로 트로이 유적..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다. 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그리스의 신들이 이 전쟁의 승자에 대해 내기를 걸었을 정도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기록상 10년여 지속되었다고 한다. 정황은 트로이 파리스 왕자가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의 부인인 헬레네를 유괴하여 트로이로 돌아간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그리스는 동맹을 맺어 트로이를 공격했고 그리스 동맹군은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를 중심으로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트로이는 영웅인 핵토르 왕자를 중심으로 그리스 세계와 맞섰다. 그러나 그리스 측의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의 불화가 불거진 사이 트로이는 아시아 지역의 동맹군 파견을 요청하게 되고 이 전쟁은 결국 장기전으로 가면서 아시아 유목민족들도 참전하는 전쟁 양상으로 변해갔다. 결국 전쟁의 결과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군에게 기만술을 사용한 그리스가 승리하였지만 이 전쟁이 사실이라면 그 의미는 유럽을 대표하는 그리스 세계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트로이와의 국제전으로 두 세계의 진정한 패자를 가리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 폴리스 세계가 본격적인 역사의 무대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그리스와 맞대결을 펼친 트로이는 어떤 국가였을까? 인터넷 기록을 찾아보면 트로이의 건설은 B.C 4,000년기 말이라고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B.C 4,000년 말의 지층 및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전부다. 현재 나타난 기층은 B.C 3,000년 경으로 추정된다.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이 도시를 발굴했을 시기인 1870년에는 탄소연대측정이라는 연대 측정 자체가 없었을 때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참조하여 그 연대를 추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도시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보다 후대의 것인 B.C 700년대의 유적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대 측정은 1985년에 진행했고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추정했던 B.C 3~4,000년 연대의 성벽 및 유적, 유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했던 B.C 700년경부터 트로이의 진짜 역사라는 셈이다. 이 시기에 트로이 전쟁이 발생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흔히 트로이 발견 과정을 두고 <일리아스>는 신화적인 서사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근세에 하인리히 슐레이만이라는 상인이 이 책을 읽고는 이것의 실존성을 밝히기 위해서 평생을 걸고 증명에 도전한 결과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이 발견되었다.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리아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된 작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신화는 신화적인 관점으로 봐야하고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과정을 보면, 고고학자 캘버트가 이미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Hisarlık Tepesi)을 답사한 이후 학술 저널에 그곳이 트로이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후원자를 찾고 있었으며, 이 때 슐레이만이 캘버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게 되면서 함께 트로이 유적을 찾아 다닌 것이 맞다. 물론 슐레이만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슐레이만이 주목한 곳은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부나르바시 지역이었다. 그러나 슐레이만이 히사를리크 지역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캘버트의 학설을 들은 이후였다. 그 동안 널리 알려져 있던 슐레이만이 여러 지역을 답사한 끝에 히사를리크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슐레이만 본인이 언급하면서 일리아드의 시가 진실인양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슐레이만은 유적 발굴 과정에서도 트로이 함락의 극적인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조작하려다가 캘버트가 발굴 노트에 발견 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실패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트로이 발굴 이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유물을 사들인 후 자기가 발굴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다 드러난 사건도 비일비재 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면서도 히사를리크 일대를 발굴한 것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굴의 이면에는 그동안 감춰져 있던 사기 행위도 분명 존재했다. 고고학적으로 트로이라는 도시의 존재와 트로이 전쟁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트로이 전쟁은 고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 여겨졌지만 후세에 와서는 신빙성 없는 신화로 치부됐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터키 서북부 지역에서 트로이 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역사적인 사실일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1930년대에는 미국인 블레겐이 보다 정밀한 작업을 통해 트로이 전쟁과 같은 시대로 여겨지는 지층과 유적을 발굴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학자가 트로이 유적 발굴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한 상태다. 트로이에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나 핵토르 같은 영웅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등은 더욱 알기 어렵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썼을 때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이미 500년이나 지난 뒤였다. 따라서 호메로스 이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신화적인 상상력이 덧씌워져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호메로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얘기가 나돈다. 시각장애인에 문맹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일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리스가 목마에 병사들을 숨겨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전설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일리아드'에는 없고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전한 것이다. 일부에선 그리스와 10년간이나 치열한 전쟁을 치른 트로이인들이 그렇게 부주의했을리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도 터키 차낙칼레와 히사를릭 언덕에는 아직 트로이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유적을 두고, 신화적인 부분을 부풀려 역사로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터키는 트로이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고, 실제 역사가 증명된 유적들이 많다. 그럼에도 신화적인 요소인 트로이를 실제 역사처럼 만들고, 홍보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상품성"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보다는 오로지 "상품성"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로 흑자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있는 역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없애는데 골몰하는 자들이 많다.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사기성 넘치게 역사를 상품화 해도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러란 말이냐?" 라는 같잖은 정직함과 정의감, 그러면서 자신들은 옳고 정의로운 일을 했다는 같잖은 소신으로 뭉친 부류들이 많다. 그런 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지난 역사가 부끄러우니 이걸 지적하고 비난하며 그 때부터 이어온 노예사관을 가진 한국인들이라 그런 역사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대로 인해 생긴 노예사관, 노예근성은 당연히 벗어던져야 하고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당시 중국에 머리 숙이며 사대했던 국가가 대한민국 뿐이었나? 주변 베트남, 태국, 미얀마, 대만, 오키나와 (류큐국), 일본, 여진족까지 중국에 사대했고, 사사건건 중국을 침략하고 노략질했던 몽골의 각 민족들도 중국에 머리를 조아릴 때가 있었다. 당시 중국의 연호를 쓰고 책봉을 받았으며, 중국식 달력을 이용하고 사상을 배웠다. 그게 그 때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다. 일본 또한 그 질서에 속한 국가였다.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가 뭐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있는가? 그들은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받으러 가는 일본 사신들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과 교류하기 전에는 역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한국 만의 잘못인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듯이 당시 동아시아에 속한 모든 국가들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갔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과거에 동아시아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노예근성이고,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칭 보수 우파들도 똑같은 노예근성에 있다. 과거 조선 시대 역사라 할지라도 없애는 것에 골몰하지 말고 이런 것은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일본 또한 신사에서 제를 올리고 있고, 전통을 중요시하여 새해마다 마쯔리 축제를 하며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새해 다짐을 한다. 그런데 야스쿠니 제외하고 그걸 욕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건 일본을 부러워 하고 배우라면서 이런 전통 수호는 왜 배우라고 권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신들은 선택적 보수이자 미국과 일본을 떠받들며 당신들의 생명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어줍잖은 선택적 보수인 당신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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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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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광저우, 그리고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임칙서(林則徐, 1785~1850)
- 내가 2017년에 중국 광저우에서 잠깐 있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의 첫 번째 전제 국가인 남월(南越)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편전쟁에 대한 연구도 함께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 특히 청나라의 대외무역제도는 매우 독특했다. 1757년부터 아편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동남아 및 서양 세력과의 무역은 광동성(廣東省)의 수도 광저우(廣州)에 국한하여 시행하였다. 1683년 대만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반청복명 세력인 정씨(鄭氏)가 멸망하자 청나라는 이른바 해금(海禁)을 풀고 4개의 항구를 열어 해외 국가들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아모이(澳門, 마카오), 장주(漳州), 영파(寧波), 그리고 운태산(雲台山)이 주요 4개의 항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1757년에 이들 4개 항구를 다시 폐쇄하고 광저우 항구만을 열어 대외무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남아, 이슬람,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에 자유로이 왕래한 것이 아니라 무역 할 수 있는 달인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일정한 조계지 거주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일 이 지역을 재외상관(在外商館, Factory)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광저우의 사면도(沙面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면도(沙面島)의 재외상관은 청나라 정부에서 인공적으로 섬을 만들어 요새화된 외국인 거류지로 원래 해외 특허로 만들어진 회사의 군사력으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재외상관 제도가 청나라에 들어오면서 군사력의 보호라는 명목적인 측면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대외무역제도에는 일정한 기구와 관리들이 있었다. 청나라 측에서 보면 먼저 양광 총독(兩廣總督)과 광동 순무(廣東巡撫) 등의 지방장관들이 있었고 광저우 부근의 해관(海關)은 외해관감독(粤海關監督, 외국인은 Hoppo라고 칭하였다)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하부 조직에서 실제로 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진 청나라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광동 십삼행(廣東十三行)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조합 형태인 길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특허상인을 공행상인(公行商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대외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광저우 지역에 있는 외국인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관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의 징수도 이들 공행상인(公行商人)이 담당하였다. 서양 측에서도 이를 조합한 일정 기구가 있었는데 당시 대청무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국의 경우를 보면 특허 회사인 동인도 회사가 대청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인도회사의 중국 현지 기구로서 관화인 위원회(管貨人委員會, Select Committee of Supercargoes)가 존재하고 있었다. 관화인(管貨人, Supercargo) 중에서 3, 4명으로 구성된 이러한 위원회에는 수석(首席, President)이 있었는데 청나라 정부는 이러한 서양인의 총책임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인도 회사의 대청무역 독점은 1834년에 종료되었다. 랭커셔(Lancashire) 지방의 면업 자본이 자유무역을 계속 주장하여 관철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는 영국 정부가 대청무역을 감독하기 위해 무역 감독관(貿易監督官, Superintendent of Trade)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 무역 감독관은 기존의 관화인위원회 수석이 동인도 회사의 직원인 것과는 달리 영국을 대표하는 국가 관리라는 점에서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하였다. 일찍이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청나라에 통상무역을 요청하러 찾아온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중국은 물자가 풍부하여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했다. 이는 결코 호언이 아니었고, 그것은 약 50년이 지난 아편 전쟁 전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차 아편전쟁 직후인 1842년의 통계를 보면 청나라가 영국에서 면제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 960만 달러를 수입했는데, 영국에 수출하는 상품은 차 1,500만 달러, 비단 920만 달러를 비롯해서 총 2,570만 달러에 달했다. 차와 비단이 당시 영국인들의 식생활과 의생활에 거의 필수적이었던 것에 비해 영국의 상품은 중국인들에게 그리 절실하지 않았으니, 청나라 조정이 “외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화이(華夷)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영국과의 무역에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에는 청나라가 결코 여유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1842년 당시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상품인 아편의 중국 내륙 수입액이 약 2,40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공식 무역수지는 청나라가 영국에 대해 1,610만 달러 흑자였으나, 아편을 계산하면 오히려 800만 달러에 가까운 적자인 셈이었다. 그것은 청나라의 국가와 관민 모두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조정의 권위와 기강이 오랜 기간 동안 평화로운 틈에 매우 헤이해졌으며 부정축재와 더불어 매관매직에 이르기까지 국가 내부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부정축재의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가 큰 고통을 겪었고 이를 배경으로 백련교의 난, 천지회, 삼합회 등의 암약, 소수민족들의 봉기 등이 계속하여 발생하면서 시정이 불안하고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처지였다. 또한 외국에 지불하는 상품 대금들은 은으로 결제되었는데, 은은 정부에 납세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매년 아편으로 인하여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새어나가는 상황은 은의 가격 상승, 나아가 정해진 세금 액의 실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로 인하여 세금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농민이 늘어났고, 그들은 대개 백련교나 천지회 등에 가입해서 반(反) 정부 활동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편이 많은 중원 백성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점을 접어두고라도, 청나라 정부는 아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아편과 같은 마약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한 폐해가 막심하자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아편이 수입되면서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시기로 알려진 이른바 3대의 청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고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청나라 백성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000 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0,000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방황하는 유민 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1773년에 영국제 아편이 들어올 무렵에는 판매량이 1천 상자였던 것이 1839년에는 40,000 상자까지 늘어나 있던 아편을 두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이 격돌하여 조정은 격심한 혼란에 놓이게 된다. 이금론은 아편에 중독된 사람을 완치시키는 일도, 아편 유통과 흡입을 완벽하게 막는 일도 불가능하고 금지할수록 가격만 높아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므로 차라리 관리와 군인을 제외한 일반 백성에게는 아편 흡입을 허용하자는 것과 아편 결제에 은을 쓰지 말도록 하고 국내에서 아편을 재배해 수입품을 대체토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 현실성이 있었으나, 오랜 유교 론으로 볼 때 백성들을 지극한 덕으로 다스려야 할 황제가 취할 정책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볼 때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은 약 4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대해 황작자(黃爵滋), 임칙서(林則徐, 1785~1850) 등이 이금론을 반박 주장한 엄금론은 아편 흡입 자에게 1년의 기한을 주어 아편을 끊도록 하고, 그래도 끊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며,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엄중히 단속하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임칙서는 호광성(湖廣省) 총독을 지내며 독자적으로 아편을 근절시킨 업적이 있었고, 도광제(道光帝)에게 올린 상소에서 아편을 방치할 경우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 이라고 토로한 인물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엄금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고, 1839년 3월에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서양의 수송선이 들어오던 광동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5월에는『아편흡입엄금장정(嚴禁阿片烟章程)』39조를 반포하고 전국적으로 강도 높은 아편 단속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아편무역에 대한 청나라의 강경한 대응에 반하여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입장에서 중국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비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사이에 중국을 방문하거나 오랫동안 체류한 사람이 많아지며 이에 많아진 정보 덕택에 영국의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부분은 중국인과 그 문화에 대한 혐오스러움이었다. 자신들과 워낙 다른 피부색과 언어, 몸차림 등은 혐오대상은 아니었지만 중국 상인과 관료들을 접한 경험은 불친절, 교만, 부정부패, 무사안일, 허례허식 등의 나쁜 인상을 길이 남겼다. 그것은 당시 영국의 시민문화가 근대적 사회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무절제함이나 무교양 등을 혐오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자리 잡은 한편, 사대부 가문들이 알려주는 중국의 교양과 예의범절은 ‘복잡하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광대놀음(Complicated and incomprehensible play clown)’ 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인의 눈에도 영국인의 행동거지가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전혀 서로를 모를 때보다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될 때 발생하는 혐오감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대다수 영국인의 인식과는 달리 소수의 지식인과 선교사들은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깊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고, 따라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말과 같이 “오직 황제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인(Only the emperor is free and all are slaves)” 이라는 중국의 정치와 사상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기독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당시 동양철학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일반인이나 지식인 모두 다소 거친 방법을 쓰더라도 중국인들을 ‘해방(Liberation)’시키고 ‘계몽(Enlightenment)’시킬 필요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편전쟁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막연한 생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국을 자국과 다를 바 없는 문명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면, 이러한 전쟁이라는 결정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여러 정황들에 있어 전쟁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인도와 영국 본토의 무역수지를 유지하려면 다소 부도덕한 면이 있어도 아편 무역에 의지해야 했고, 또한 잠재력이 풍부한 중국 시장을 아편 이외의 영국 상품으로도 본격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청나라의 관세가 정부의 방침대로 정해지는 일과 무역항이 광주(廣州) 하나로만 국한된 일, 그리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조합이 무역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폭리를 취하고 있는 일 등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오랜 숙원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열강과 식민지인들 앞에서 대영제국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는 정치적인 고려도 존재했고 막대한 부와 많은 인구에 비하여 많이 약화되어 보이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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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광저우, 그리고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임칙서(林則徐, 1785~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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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 활동하였다. 159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교역을 시도하려는 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20일 이들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귀금속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바타비아를 수도로 삼았다.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암본을 탈취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후 동아시아의 향신료인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 이 중 특히 육두구 열매에서 얻는 육두구와 메이스의 경우, 18세기 중반까지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반다 제도의 룬섬(Run island)을 점령한 이후, 세계 시장에서 육두구는 근 150년 동안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총독의 재임 시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경영의 구체적인 지침이 마련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원조해주는 대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기반으로 식민지 경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경쟁국들 외에도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존재했다. 쿤 총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들을 공격하였다. 1619년 쿤 총독과 네덜란드의 군대는 영국 동인도 회사 및 이들과 연합해 일시적으로 네덜란드와 반목했던 지역의 반튼 술탄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반튼의 유력한 무역항인 자야카르타(Jayakarta)를 획득, 바타비아(Batavia)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암보이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토착 세력도 네덜란드에는 큰 위협 요인이었다. 17세기 초에 술탄 아궁(Agung)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부 자바의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바야를 점령하는 등 동부 자바를 평정하고, 자바 섬을 통일할 목적으로 서진하고 있었다. 술탄 아궁에게 수라바야를 지원했던 네덜란드 세력은 위협적이었고, 이어 마타람의 군대가 1628년과 1629년 두 차례에 걸쳐 바타비아를 포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 군은 쿤 총독의 지휘 하에 완강하게 수성에 성공했다. 1641년 네덜란드는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을 대만 섬 북부에서 축출하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 곳들을 연결하는 교류 망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외에도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에 1658년 암스테르담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1636년에는 솔로르 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점령하고 17세기 동안 티모르 섬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이하에서 회사령 인도라 불리는 네덜란드령 인도는 동인도 지역과 겹쳐지지 않지만, 인도에서 동인도에 걸쳐 있던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 세력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인도에 국한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차원에서 함께 서술하려 한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 세력은 기존의 스페인, 포르투갈 세력을 말레이 반도, 술라웨시 섬,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했고 자바 섬에도 바타비아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얻었지만, 네덜란드 세력은 이베리아 계 세력을 결국 완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초부터 여러 차례 필리핀의 스페인 세력을 공격하였지만 육상 전, 해상 전 모두 패배하였다. 특히 1646년의 마닐라 해전에서는 스페인 함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가지고도 네덜란드 함대는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포르투갈 세력도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플로레스 섬 등 소 순다 열도의 동부 도서 지역들을 보유하였고, 티모르 섬에서도 네덜란드와 섬의 분할을 두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었다. 토착 세력을 상대로 한 원정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가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3~1644년 간 진행된 캄보디아와의 소규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캄보디아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바 섬에서는 신중하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연이어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7세기 중반, 자바에서 가장 강성한 마타람 술탄국이 군주 아망쿠랏 1세(Amangkurat I)의 실정으로 내분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를 주시하던 자바 서부의 반튼 술탄국이 마타람의 세력권을 잠식하던 와중 마타람에 치명적인 트루나자야 봉기(Trunajaya Uprising, 1674~1681)가 발생했다. 트루나자야 반란군에게 패퇴하고 수도가 함락당한 아망쿠랏 1세는 그나마 자바에 이해관계가 적은 외부 세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구원 요청을 보냈으며, 동인도 회사는 이에 응하여 반란군에 승리를 거두고 마타람의 내정에 개입하며 1670년대 말 마타람으로부터 자바 서부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비슷한 사건들이 1680년대에 이번에는 반튼 술탄국에 일어났는데, 술탄과 왕자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왕자의 편으로 개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승리하였으며 1687년까지 반튼 술탄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강성한 마타람은 즉시 동인도 회사의 보호국이 되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세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며 서서히 자바의 외곽 영토를 전쟁에 개입한 동인도 회사에 점령되어갔다. 18세기 중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Java War of Succession, 1749~1757)의 결과로 인해 결국 남은 영토마저 네덜란드 산하 번왕국들로 분리되었고, 각각의 번왕국은 보호국이 되었다. 반튼 술탄국은 보호국 위치로 존속하다 1813년에 해산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마트라 섬과 보르네오 섬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비록 이 시기에 대체로 내륙으로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해안 도시를 거점으로 한 지역의 여러 부유한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시키고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자바의 반튼 술탄국을 굴복시킴으로써 반튼 산하에 있던 수마트라 남부 람풍(Lampung) 후추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으며, 보르네오 남부의 후추 무역을 통제하던 반자르 술탄국도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간섭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도 아체 술탄국과 경쟁하며 아체 술탄국 산하에 있던 들리 술탄국 등을 네덜란드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며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아시아 대륙에도 상관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인도에 진출하여 인도 남동해안인 코로만델 해안에 네덜란드령 코로만델을 확보한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가던 시기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스리랑카에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1658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던 포르투갈령 실론의 수도 콜롬보를 점령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관리하는 네덜란드령 실론이 현대 스리랑카의 서부 절반 지역에 성립되었다. 스리랑카 식민지를 확보한 여세를 몰아 네덜란드 세력은 인도 남서 해안인 말라바르 해안(Malabar Coast)에도 진출하여 1661년 포르투갈령이었던 콜람(Colam) 항구, 1662년 코친(Cochin) 항구를 함락해 네덜란드령 말라바르를 창설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네덜란드의 군사적인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는데, 1638년 포르투갈령 고아에 대한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은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인도 식민지는 앞에서 열거한 네덜란드령 실론, 네덜란드령 말라바르, 네덜란드령 코로만델 외에도 소규모로 유지된 북동부의 네덜란드령 벵골과 북서부의 네덜란드령 구자라트도 존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를 제외한 인도 본토의 회사령은 이주와 장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의 상관과 공장 지대였다. 항구 도시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유지 되어 인도양에서 회사령 케이프 식민지와 회사령 동인도를 이어주는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령 말라바르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코친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토착 왕국과 세력 경쟁을 벌이며 내륙으로 확장하려 시도했던 적은 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말라바르 해안의 토착 세력 트라방코르(Travancore) 왕국에 대해 후추 무역 독점권에 대한 알력으로 트라방코르–네덜란드 전쟁(1739~1741)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네덜란드 군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1741년 8월, 식민지 전쟁으로서는 매우 큰 동원 규모인 네덜란드 군 6,000명(유럽인 2,400명)의 병력이 트라방코르군 12,000명~15,000명가량과 벌인 콜라첼(Colachel)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쟁은 동인도 회사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 패전으로 인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동인도 회사는 트라방코르 군에게 크빌론(Cbilon, 콜람)을 함락당하는 상황마저 우려하게 되었다. 이듬해 네덜란드가 말라바르 해안에서 아팅갈(Attingal) 인근의 작은 항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 본토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트라방코르와 네덜란드 세력 간의 긴장은 콜라첼 전투 후 일시적으로 휴전이 합의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이 때 네덜란드 영향 하에 있던 콜람의 군주가 독자적으로 트라방코르와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일시 이탈하기도 했다. 1740년대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은 한 때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고, 실제로 트라방코르 군이 1742년 6월, 네덜란드 영향 하의 콜람을 공격했다. 이에 네덜란드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은 지역의 영주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막아냈다. 트라방코르 군주는 나아가 네덜란드 지배하의 코친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입안하였으나 착수에 이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와 트라방코르 간에는 콜라첼 전투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저강도 분쟁이 계속 이어졌고, 꾸준히 평화 협정을 위한 협상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궁극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말라바르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이에 착종된 네덜란드의 이권이 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은 1740년대 내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의 후추 무역을 방해해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결국 1753년 8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트라방코르 왕국의 군주 마르탄다와르마 간 마웰리카라(Mavelikkara) 조약이 체결되어 양 세력의 대립이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말라바르 해안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졌고, 이후 네덜란드 식민 제국은 인도에서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대만에 진출했는데 일반적으로 포르모사라고도 알려진 대만은 1624년부터 1662년까지 그리고 1664년부터 1668년까지 부분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에도 막부와 무역을 하였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과 동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대만에 존재를 확립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보편적으로 대만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원주민들과 최근 한족들의 봉기는 네덜란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의 부상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대신 청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1662년 정성공의 군대에 의해 젤란디아 요새가 포위된 후 네덜란드 식민지를 해체하고, 네덜란드 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충신이자 반(反) 청나라 제국인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웠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를 맞이해 인도에 새로운 항로 개척이 진행되어,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가 크게 단축되었다. 대만도 이 국제 정세에 포함되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반에 일부의 일본인과 한족이 대만에 진출하였으며, 다른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도 대만의 정치 지형에 주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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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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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 일본의 대만 지배에 있어 대만 초대 총독은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그는 가고시마 출신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갑오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현역 해군대장으로서 대만 총독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타이베이 부임한해 만인 1896년 본국 마쓰가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귀임하게 된다.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마구치 하기죠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죠슈벌(長州伐)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독 제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육군 차관으로 본국에 귀환한 그는 1898년에는 다시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 뒤로도 출세가도를 타고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총리대신 재임 중의 일이다. 다음으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갑오전쟁 당시 여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그는 육군 중장이라는 현역의 신분으로 1년 6개월 동안 대만 총독을 지내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총독에서 물러난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운명하자 부인과 함께 천황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도 야마구치 태생의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육군 참모본부 국장과 육군대학 교장을 지내면서 가쓰라 타로에 이어 일본군에 독일식 전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타이베이에 부임하자마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 규칙을 마련해 본격적인 토지 징탈을 시작하게 된다. 동양토지회사도 이 때 설립 되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재배되었던 쌀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지룽(基隆), 가오슝(高雄) 등 항구의 축항공사도 시작되었다. 북쪽의 타이베이와 남쪽 항구도시인 타이난을 잇는 종단철도가 완공된 것도 그의 재임 때였다. 이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직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고다마 총독은 특히 민정장관에 고토 신페이를 임명함으로써 철저한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그 뒤 만철 총재, 내무대신, 외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를 픙미했던 주인공이 고토였다. 제5대 총독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도 야마구치 태생의 죠슈번 계보에 속한다. 일본 정계와 군벌에서 “죠슈와 사쓰마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만큼 죠슈벌과 사쓰마벌이 요직을 두루 나눠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역대 군벌출신 중에서도 도쿄 위수총독이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지녔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을 때 그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대시위가 일어나자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의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서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재임 기간이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리산의 울울창창한 열대 삼림에 대한 본격 채벌이 시작된 것이 사쿠마 총독 때의 일이다. 현재 타이베이에 남아 있는 총독부 청사도 이 때에 비로소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총독을 거쳐 제7대 총독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조선총독부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일전쟁 직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이상이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가 문관통치로 바뀌기 전의 총독들이다. 일본 식민지 정책의 큰 흐름은 조선이나 대만에나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했다. 그리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실력 양성 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일본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85%,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10%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중화권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대만인들에게 있어 일본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로 조사되었다. 이전인 2017년 조사에서조차도 호감 83%, 비호감 12%에서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외성인들 차원에서 볼 때, 일본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낮은 편인데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 사건 등 사람이 대량 학살당하고 매번 패전하여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 대만은 중일전쟁을 치룬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본성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만이 일본에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피해국이라는 행태에 동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선을 긋고 있다. 다만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국민당 리덩후이 정권 시절과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정권은 좀 더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긴 했다. 특히 리덩후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여 해서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하여 대만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71년 UN 상임이사국을 중공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축출하는 안에 대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자유 진영 국가들도 대만을 배신하고 중공 편에 서주는 와중에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만의 UN 탈퇴 후에는 일본은 중공과 수교를 맺었으며 이 중일수교 직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대만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대만과 일본 양국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베 총리가 직접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였다.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일본에 물자 지원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성금 약 200억 엔을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 정부의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 2010년대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만은 사실 여부를 떠나 태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타이베이 쑹산 초등학교 앞에 가면 '도호쿠 구호 감사 겸 쯔위궁 350주년 축하 시계탑'이 존재하고 있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정치, 외교적으로 이용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국 포위망에 한 축을 구축했었다. 2018년 2월,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중국의 시진핑이 화해의 제스처로 구조대를 보내려 했는데 대만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구조대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은 대만에 위로를 보내는 친필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24년 12월에는 일본과 대만이 대만 유사시를 염두에 두고 대만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 정보 공유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17일, 일본 정부가 호적에 대만을 표기하는 것을 5월부터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라고 오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발표했다. 다카이치는 대만 유사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놓고 정면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는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권리가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자위대가 출동하여 무력행사 가능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역대 근현대사에서 중국은 일본을 이긴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청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청나라가 붕괴되고 군벌 분열시대와 이념 분열시대에 휩쓸린 중국이 통일되고 부유하며 안정적인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중국은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나라이고, 전쟁 무기들을 물량으로 계속 찍어내고 있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도 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은 굳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 압박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중국의 원자재, 특히 희토류의 주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중국 희토류 수출 통제에 큰 타격을 받은 후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도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일본의 중국 선원 나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바 있는데 일본은 불과 3일만에 항복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원료가 문제가 아니라 가공과 정제가 문제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예민한 문제를, 대만을 건드리면 집단 자위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이고,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위험한 문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중국 원자재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일본의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고 있다. 제2 도련선이 무너져도 관망만 했던 일본의 자위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하겠다고의 발표는 일본의 군, 경제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과 대적하겠다는 것인데 이제와서 그와 같은 발언은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 단독으로 중국과 소위 "맞짱" 뜨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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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