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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악관, 한국 대선 논평서 '중국 개입' 우려…외교적 파장
    [서울=2025.06.05.] 미국 백악관이 지난 3일(현지시간) 한국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논평하면서 “중국의 민주주의 개입에 대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언급해 외교적 파장을 낳고 있다. 2025년 6월 3일(현지시각), 미국 백악관은 한국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논평을 내며,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는 동시에, “중국의 민주주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에 대한 우려”를 이례적으로 언급했다. 이는 외교적 수사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 발언으로, 한국 국내는 물론 중국과의 외교적 긴장도 유발하고 있다. 기존의 축하 성명과는 달리 백악관은 한국 대선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중국을 직접 거론함으로써, 외교적 중립성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국무부의 마코 루비오 장관은 보다 원론적인 입장을 내면서 ‘한미일 협력 심화’를 강조했으나, 백악관의 ‘중국 견제’ 언급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번 논평의 배경에는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전방위적인 대중 견제 전략이 깔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초기부터 '중국 봉쇄'를 외교·경제의 핵심 기조로 삼았고, 최근에는 동맹국들에게도 '편 가르기'를 요구하는 압박을 강화해 왔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달 31일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중국과의 경제 협력과 미국과의 국방 협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행태는 허용하지 않겠다”며 '안미경중' 노선을 직접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백악관의 발언은 단순한 논평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미국과의 협력 기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과의 거리를 분명히 하라는 전략적 압박으로 해석된다. 백악관 발언은 동맹국 선거에 대한 이례적 간섭으로 비칠 수 있어 외교적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한국 외교부는 “대선과 별개 사안”이라는 입장을 내며 공식 대응을 자제했으나, 외교채널을 통해 백악관과 비공식 소통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제3자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이간질을 중단하라”고 미국을 정면 비판했다. 중국의 이 같은 반응은, 한·중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고, 나아가 한국 정부의 외교적 자율성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백악관 내부에 극우 성향의 비선 인사들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진영의 핵심 인물인 로라 루머는 대선 직후 SNS에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장악했다”며 노골적인 혐한 발언을 쏟아냈고, 이를 반영하듯 백악관 대변인 브리핑에서도 혼선이 발생했다. 루머는 공식 직책도 없이 백악관 고위층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NN, MSNBC, 로이터 등 주요 외신들은 루머의 백악관 출입 및 트럼프 부통령과의 독대 사실을 보도하며 ‘극우 비선 정치’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다뤘다. NSC(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직 숙청 이후, 루머와 같은 인사들의 입김은 더 강해지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 외교를 기조로 ‘균형 외교’를 추구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유지하되, 대만 문제나 미중 갈등의 직접적 개입은 피하겠다는 방향이다. 그러나 미국의 명시적 압박과 중국의 반발 사이에서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한미동맹과 대중 협력 사이에서 보다 정교한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하며, 내정에 대한 외국의 정치적 해석을 차단할 수 있는 대응 메커니즘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백악관의 발언은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라, 한국을 둘러싼 미중 전략 경쟁의 일환임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 외교의 중립성과 자율성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외교정책은 명확한 원칙과 국민적 공감대 위에 설 때만이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새 정부는 이념적 진영논리나 대외 종속이 아닌, 국익 중심의 실용적 외교와 균형감각 있는 대응을 통해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외교의 본질은 ‘줄타기’가 아니라 ‘지렛대’다. 강대국의 압력 속에서도 당당히 우리 길을 갈 수 있는 외교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 뉴스
    • 정치
    2025-06-05
  • 美, 주한미군 4500명 철수 검토…괌 중심 인도태평양 재배치 전략
    [서울=2025.05.23.]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임 복귀 이후,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2만8500명 중 4500명을 괌을 비롯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다른 기지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 내 미군 병력의 약 16%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지시간 22일 복수의 국방 당국자 발언을 인용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구상은 아직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지는 않았으며, 북한에 대한 정책 옵션의 하나로 비공식 검토가 진행 중인 단계다. 국방부는 관련 질의에 “발표할 내용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피트 응우옌 대변인도 병력 이전에 대한 언급 없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이번 주한미군 재배치 검토는 단순한 병력 이동 이상의 전략적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국 내에서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으며, 실제로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전략 축은 중국군의 대만 침공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군사전문가들은 주한미군 철수 시 한반도 안보 공백이 우려되며,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 미국의 지역 동맹국들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지난달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과 새뮤얼 퍼파로 인태사령관은 병력 감축에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WSJ는 “만일 주한미군 병력을 괌 등 인태 내 타지역에 계속 주둔시키는 방식이라면 이 같은 우려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괌은 중국군의 접근이 어렵고 전략적 위치상 핵심 병력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방안은 국방전략(NDS) 수립 과정에서 본격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 2일 NDS 수립 지시를 내리며, 중국 억제와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 확대를 주요 지침으로 제시했다. 주한미군의 재배치 여부는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 미국의 군사지원 정책 변화 등과 맞물려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 뉴스
    • 사회
    2025-05-23

칼럼 검색결과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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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명나라의 유신(遺臣)인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廸)이 1679년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낭 항에 이주했다. 베트남의 광남 응우옌 왕조(廣南阮朝)에 망명한 명나라 유신의 일파는 호이안에 머물면서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설립하고, 진상천과 양언적 일파는 메콩델타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이들의 정주는 베트남 중남부의 교통 요소에 ‘중국계 이민’의 집주지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국계 이민은 베트남 남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7세기 말 베트남의 판도에 포함된 현재의 호치민과 비엔호아에서 명향사와 청하사(淸河社)를 설립했다. 『대남실록전편(大南實錄前編)』의 기사에 따르면 1679년,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迪)이 공동으로 이끄는 중국 선단에 속한 선박 50척과 사람 3,000명이 도착했다고 한다. 대남식록전편에 의하면 이들 광동인 집단은 망명하길 원했으나, 언어와 풍습이 너무 달라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현주(賢主) 완복빈(阮福瀕)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이 가정(嘉定)-동나이(同奈) 지역으로 남하한다면, 캄보디아의 번왕 앙 논에게 말을 넣어 실향민이 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였고,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두 집단으로 흩어졌다. 양언적이 이끈 집단은 미 토(Mỹ Tho)를 설립하였고, 다른 집단은 훗날 사이공이 될 장소 근처인 비엔 호아(Biên Hóa, 邊和)로 간 것이다. 명향사와 청하사는 하나의 중국인 마을을 형성했으며, 출신지별로 5개의 방회(幇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명향사에 적을 둔 중국인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조직 내 자치가 용인되었고, 과거 응시의 자격이 부여되었고, 토지취득의 권리가 부여되는 우대조치를 향유했다. 프랑스의 통치 시기(1887~1945)의 식민지 정부는 응우옌 왕조의 정책을 답습하여 프랑스와 중국 간에 ‘중국계 이민’의 국적 문제가 발생하자, 명향의 신분은 ‘베트남인’과 ‘아시아 외국인(중국계 이민)’ 사이에서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명향(明鄕)은 명향사에서 나온 단어로 이들 중국계 이민의 자손을 말하거나, 중국계 이민 남성과 현지에서 베트남 인 혹은 크메르 인 여성 사이에 탄생한 혼혈의 자식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 명향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54개 민족 가운데 화족(華族)이 아닌 베트남 낀족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민망 년간(1820-1841) 중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明香’은 ‘明鄕’으로 표기법이 바뀌었다. 중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나라의 향화’라는 단어 대신 ‘명나라의 후손 또는 유민의 고향’ 즉, 베트남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뀐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베트남어로 발음 및 성조까지 같다. 이는 두 지역에 ‘한풍(漢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1698년 남방 지배를 위한 기구로 가정부(嘉定府)가 들어선 이후에 동나이 지역 중국인은 청하사(淸河社), 사이공에 살고 있던 중국인은 명향사(明香社)로 조직됨으로서 명나라 유민들의 베트남 정착이 완료된 것처럼 보인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시 명향사의 조직은 해체되었고, 회사(社)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등의 재산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최근 호이안의 명향과 화교 관련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명향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인도네시아의 콘밍(Khonming)과 베트남의 명향 사이에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콘밍은 인도네시아의 정책에 따라 보호받기는 했지만, 명향처럼 베트남 남부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에 적극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향은 출신지 별로 방회(幇會)를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동향단체를 만들었지만 콘밍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명향은 프랑스 통치 시대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콘밍은 일제 시대에 그러한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되어 버렸다. 명향은 그들만의 모임을 형성 및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향회관, 관제묘와 같은 시설이 존재한 반면, 콘밍에게는 이와 같은 공동체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청(淸)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이주할 경우 반역자로 취급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만주족에 굴복하기 싫은 한족과 삶의 한계 상황에 이른 극빈층들이 정크선을 타고 남쪽 섬나라로 도주해 갔다.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상부상조로 현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시켰다. 이 때 청나라 남부 한족들이 베트남으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베트남인들을 지배하는 쪽에 섰으며 일반 베트남인들에 비해 부유하고 권력이 강한 편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한 이후, 공산주의 성향 화교들은 북베트남을, 반공주의 성향의 화교들은 남베트남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시킨 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는 화교들의 상당수를 중국 본토나 대만, 홍콩 등 중화권 및 이웃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로 추방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 소위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자들의 상당수가 화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호주의 베트남계 호주인, 미국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화교 혈통인 경우가 매우 많은 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많은 수가 귀국했으나 현 베트남 공산정권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들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화교들과 다르게 베트남 경제를 장악하고 있지 않지만 2020년대 들어서 화교들이 중국-베트남 전쟁 이전처럼 남부 호치민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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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8
  •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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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6
  • 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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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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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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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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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6
  • 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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