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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의 쿠데타와 태국 왕실,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 하락하는 태국 사회
- 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은 쁠랙 피분 송크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새로운 태국의 독재자가 된 인물이다. 다만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독재를 했었기 때문에 태국 현대사에서 잠시 거쳐 갔던 독재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릿 타나랏은 태국 방콕에서 <캄보디아 왕실 편년사(Cambodia Royal Chronicle)>의 번역 작가로도 유명한 라완 루안디트아난(Rawan Ruanditanan) 소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부터 7세까지 모친의 집안이 있던 무크다한(Mukhdahan)에서 자랐고 7세에는 소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출라촙크라오(Chulachobkrao)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국군의 주요 직책들을 역임하다, 쁠랙 피분 송크람에게 발탁되었고 1949년 일어난 이른바 “왕궁 반란 사건(The Palace Rebellion)” 당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송크람 정권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쿠데타를 방어한 것을 기반으로 타나랏은 송크람의 신임을 받았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그리고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이유 아래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키워갔다. 그러나 1957년 치러진 태국 총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발생하자 타나랏은 송크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58년 9월 18일 수많은 쿠데타들이 이미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내 성공하게 된다. 1958년 타나랏의 쿠데타를 가져온 일련의 정치적 대립은 국제 사회에서 노란 두건(Yellow Bandana와 붉은 두건(Red Bandana)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치적 대립은 길게는 1957~1958년 사이에 발생한 동남아시아 대규모의 경제위기, 보다 짧게는 1947년에 있었던 태국의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시초였다. 보다 더 근본적인 모순을 본다면 1932년 입헌군주제 쿠데타로 등장한 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권력을 둘러싼 근본적인 모순까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군사 쿠데타들에서 보여주었던 태국 쿠데타의 특징들, 이념, 정책, 사회적 근본 모순에 관해 쿠데타가 아닌 매우 실용적인 차원의 쿠데타라는 특징과 더불어 타나랏의 쿠데타는 좀 이전 4차례의 쿠데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전 쿠데타인 1947년 피분 송크람의 군사 쿠데타는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편을 들었다가 미국의 폭격을 받아 자진 사임한 이후, 3년 만에 발생한 쿠데타였다. 송크람은 1932~1944년 대공황으로 인한 태국의 경제위기를 틈타 등장했고 이후 태국 정치사에서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기반을 형성했었다. 한 군부 집단이 과반 의석을 독점한 것은 송크람의 쿠데타로 인한 의회의 탄생, 국왕의 절대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이양, 군부가 태국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수코타이 왕조 이후부터 시작된 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송크람의 통치는 늘 권위주의, 독단적 국가 운영, 인권 문제, 그리고 지나친 복지 위주의 민중에 대한 선심성 논란 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비난들과 송크람의 왕권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은 왕과 이를 둘러싼 전통 권력 상류층들, 고위 관료, 군, 그리고 송크람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국가 운영에 반대한 지식인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을 압축한 것이 송크람을 축출한 1944년에 발생한 쿠데타이다. 이에 대해 송크람의 집권 시기 많은 혜택을 받은 친(親) 송크람 세력, 농민, 도시 빈민 등 송크람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왕과 친(親) 국왕 세력을 상징하는 노란색에 대한 반대로 붉은 색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붉은 두건과 노란 두건의 대립이 시작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붉은 두건은 친 송크람파, 노란 셔츠는 친 국왕파를 상징하고 있다. 일부 분석들은 친 송크람과 반 송크람을 단순히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 모순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친송크람파의 일부는 태국 내 공화주의 세력이다. 다시 말해 현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력이 친 송크람파에 가담한 데는 송크람의 집권 시기 그가 보여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태도가 있다. 태국에서 국왕은 절대적 존재다. 당시 라마 7세, 라마 8세 국왕은 한 때 국민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았었다. 국민을 위해 국왕이 많은 자선사업과 시혜를 베푼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젊은 시절 라마 7세와 라마 8세는 1년의 1/3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 개선 문제를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챙겼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도 매우 강력했다. 과거 군사 쿠데타를 성공한 군부라도 최종적으로 국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그대로 권력을 내려놓고 망명한 일례도 있다. 중요한 정치적 위기 시 사태를 정리한 것은 언제나 국왕이었다. 현재 일반 국민 사이에 국왕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에는 많은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58년 라마 9세는 31세의 젊은 나이였고 1946년에 즉위한 이래로 12년째 통치 중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건강이 거의 좋지 못해 와병 중이었다. 그리고 피분 송크람과 사릿 타나랏으로 인해 정치적 권위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군사 쿠데타 문제는 시민들이 보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릿 타나랏은 몇 명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현재 그의 자손들은 거의 사망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 그의 수상 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었던 솜차이 타나랏(Somchai Thanarat)은 지금까지 시민들에게 보여준 행적으로 인해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의 태국 시민들은 이와 같은 차기 수상의 행적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추문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나타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타나랏의 후계자로 떠오른 국방장관 타놈 끼띠카쫀(Thanom Kittikachorn)은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타나랏의 행정력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국민을 위해 고민하고 현장에 관심을 가진 타나랏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이 신뢰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군 장성이라는 점이 이미 군사 쿠데타로 인해 어느 정도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갖고 있는 상태였기에 수상 계승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 권력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과 군부 역시 솜차이 파와 타놈 파로 갈려져 있는 상태다. 정국의 혼란, 국왕의 잦은 와병에 수상의 승계 구도 문제까지 맞물려 수상의 권위와 수상에 대한 신뢰가 기로에 서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입헌 군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도 있다. 태국 내 공화주의자들은 1932년 입헌 군주제가 사실상 국왕과 그를 둘러싼 전통 지배 계급의 통치를 연장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지 않고 여전히 국왕과 그를 둘러싼 소수의 전통 지배 계급과 군이 국가의 부와 권력을 좌우하고 있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왕가가 태국에서 가장 부자라는 것에 이의를 재기하는 사람은 없다. 왕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자로 알려졌다. 특히 <포브스>에서는 태국 왕실이 세계 왕실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혀 태국 내에서 논란을 촉발시킨 바 있다.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태국 왕실의 재산은 당시 미화로 100조 달러에서 350조 달러까지 다양한 예상들이 존재한다. 시암 시멘트, 시암은행 등 태국의 상당한 재벌급 기업들과 방콕의 주요 쇼핑몰, 최고급 호텔 가운데 왕가의 소유가 다수 있을 정도다.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왕실 재산국(Crown Property Bureau)은 부동산 임대 사업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제 활동에서 발생하는 왕실의 모든 수입에 대해 소득세가 면제된다. 국왕의 국민에 대한 시혜는 이와 같은 부의 아주 작은 부분을 내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 절대 왕정 시기 통치 세력, 왕을 보위하던 고위급 신하들과 군대가 입헌 군주제 쿠데타 이후 그대로 고위 관료로 탈바꿈 했고, 군부 역시 국왕을 보위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1932년 입헌 군주제를 위한 쿠데타는 이 관료들과 국왕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국왕은 존재하면서 상징적인 인물이고 실제 권력은 국민에게 있으며 그리고 이 국민의 권력을 위임 받은 총리에 의해 권력이 행사 되는 입헌 군주제와 태국의 입헌 군주제는 거리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한 민간 정부는 국왕의 권력 하에서 일상적인 행정 처리만 하는 조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지난 70여 년 간 절대 신성으로 여겨졌던 국왕에 대해 이와 같은 질문들이 이어지면서 푸미폰 라마 9세의 즉위 이후, 70년이 넘는 통치 기간 동안 태국 정부와 군은 국왕모독에 관한 국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붉은 두건 세력은 타나랏 총리와 송크람에 대한 개인적인 추종 세력들, 타나랏의 재임 시절 경제적으로 혜택을 본 빈민, 농민 계층의 경제적인 바람에 공화주의적인 운동까지 복합적으로 포괄된 세력이라 볼 수 있겠다. 반면 노란 두건 세력은 국왕과 그 주변의 전통 상류층 집단, 군대, 교육 받은 보수적 중산층,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현 민주당으로 이어 오는 민주화 요구 세력들이 이 집단을 대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1958년 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갈등에는 1932년 이후 태국 정치의 근본 모순에서부터 개인의 경제적이고 정치적 이익까지 다양한 정치적인 정당성들이 모두 녹아 있는 셈이다. 수적으로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친 타나랏 세력은 당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해 총리 직을 박탈당한 쁠렉 피분 송크람 총리까지 1958년 9월 18일 쿠데타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서 집권했다. 붉은 두건을 지지하는 세력의 수적 우위로 인해 선거에서의 승리는 거의 보장되어 왔다. 반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추, 관료제, 법원 그리고 군을 장악한 노란 두건은 선거로 구성된 친 타나랏 정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주로 자신들이 장악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총리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새로운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통제하려 시도해왔다. 1973년 10월 학생 민주화 운동 이전까지 총리가 해임되고 정부가 바뀐 것만 보면 타나랏 총리까지 합쳐서 세 번째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1958년 9월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는 친 송크람 파벌들을 이전에 발생한 부정선거 혐의로 대법원에서 자격 정지시킨 이후, 친 타나랏파를 대두시키고 송크람 계열을 더욱 무력화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경험을 놓고 볼 때 법원에서 친 송크람파 정당과 그 행정 세력들을 무력화 시키게 되지만 그래도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고 선거를 치르면 친 타나랏파 세력들이 집권하는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노란 두건과 친 국왕 세력들은 이전의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보다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방편으로 피분 송크람을 실각시키고 오히려 타나랏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과 달리 1958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와 친 국왕파는 선거를 회피할 수는 없어 그대로 치루었다. 이는 시민들이 주목하고 있고 국제 사회의 이목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선거를 치러 타나랏이 총리가 되었다. 이번 쿠데타 세력이 1946년 쿠데타 세력과 그 이후 법원을 통해 친 송크람파 정부를 제거했던 세력과 다른 점은 부정선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헌법과 의회의 기본 구조를 대폭 수정하여, 친 송크람 세력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것을 가급적 차단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쿠데타 이전부터 타나랏파는 임시 헌법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선거를 통해 하원을 구성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의 근간은 바뀌지 않겠지만, 많은 새로운 장치들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의석수를 늘리려 했다. 근본적인 모순과 대립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쿠데타의 세력인 타나랏 세력이 가진 숫자의 힘과 친 국왕 세력이 가진 실질적 권력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수많은 쿠데타를 야기했다. 어쩌면 당시 태국은 많은 신생독립국이 독립 직후 겪었던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정체성과 기본 권력 구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국가들이 독립 혹은 국민 국가 수립과 함께 권력을 누려왔던 국왕이나 구(舊) 세력과 새로 등장한 민족주의 세력 혹은 시민 세력 간에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투쟁과 갈등이 마무리 된 자리에 새로운 국가의 권력 구조와 정체성이 자리 잡았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을 위해 일어났던 군사 쿠데타 이후 1956년에는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전격 단행되었다. 이 날 사릿 타나랏 태국군 사령관은 신문을 통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발표 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군사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발생한 군사 쿠데타가 맞다. 이러힌 일들이 발생한 지 이틀 만인 9월 20일에 군은 공식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선포하고 정부 기관들을 군의 통제 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이틀 간 쿠데타 상황에서 발생한 정권을 교체하는 일들을 놓고 볼 때 후일 군사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게 되는 태국에서 쿠데타마저도 법적 절차와 의미, 그리고 제도화된 단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대개 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고 비밀리에 정권을 탈취하고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는 법적 효력이나 절차 등을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8년 9월 쿠데타에서 태국군은 사실상 국가를 장악한 기간 동안 발생된 조치에 대해 정치적인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계엄령만을 선포한 것이지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 간 대립하고 있는 정파 간 형식적 대화를 추진했지만, 20일 이 대화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쿠데타를 선포하여 사릿 타나랏이 정권을 장악하는 수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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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의 쿠데타와 태국 왕실,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 하락하는 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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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 필리핀에서 5만 명의 코피노들을 낳고 잠적한 한국 남자들도 문제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다. 베트남에도 이른바 "라이따이한" 문제가 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베트남으로 파견된 대한민국 국군 혹은 한국인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혼인 관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말하는데 한국군과 한국 노무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 태어난 후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973년 모두 철수하게 되는데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이들을 두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처사라고 하지만 "라이따이한" 또한 세대별로 나뉘고 있다. 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세대는 "라이따이한 1세대"들이다. 문제는 "라이따이한 2세대"들부터다. 베트남이 도이머이로 인한 개방과 더불어 한국과 수교한 90년대부터 베트남에 들어간 한국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부터 문제인데, 라이따이한 2세대들과 그 어머니들은 편모 슬하에서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도 힘든데 자국에서도 심한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콘돔 미착용에서 성관계를 갖거나, 순진한 현지 여성들을 작업해 성관계를 가져 임신시키고, 연락하니 차단하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한국 남자들이 많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3세대"들과 201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4세대"들의 남편들은 더 심하다. 이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있었던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보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더 어렵던 시대였다. 이걸 간파한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에 들어와 성관계를 하고 씨를 뿌리고 도망가면 찾기 힘들었다. 베트남에 한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미혼모인 여성들이 많은데 베트남의 문화상, 피임이나 낙태는 매우 죄악시 되고 있고, 북베트남의 경우, 유교 문화권이 남아 있는 상태로 집안과 친척들의 눈총을 받기에 그냥 낳아 기른다고 한다. 요즘 2020년대 들어서도 그런 인식은 마찬가지긴 한데 2000년이나 2010년대 보다 많이 줄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와 틱톡과 같은 숏츠 영상, 그리고 스마트폰의 발전은 "라이따이한 세대"가 생기기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베트남 여성과의 만남에서 성관계가 활발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남성들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끼리 커뮤니티가 있어 책임 없이 임신시키고 도망가는 한국 남자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 커뮤니티에는 해당 한국 남성들의 정보가 박제되기 때문에 한국에 있더라도 스스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전처럼 요즘 베트남 여성들도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2020년대의 베트남의 MZ 세대들은 굉장히 영악한 아이들이 많다. 특히 동남아시아 각국을 다녀본 필자가 볼 때,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IT 최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없는 행동으로 여성을 작업해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면 바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박제된다. 요즘 아이들일수록 IT와 관련하여 다루는 솜씨들이 한국 아이들 못지 않아 보통이 아니다. 옛날의 베트남 생각하고 베트남 여성을 정액받이 생각하여 접근했다가는 한 순간에 골로 가는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1회성 만남을 즐기고 싶다면 가라오케나 마사지 샵 같은 유흥지들을 가면 된다. 거기선 1회성 만남을 즐기고 그 댓가를 지불하면 깔끔하다. 게다가 베트남 여성들은 자기 남성이 아니면 굉장히 쿨하고 관계에 있어 깨끗이 끝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명 인터넷에서 말하는 베트남에서 "싸튀충(정액을 사정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넷 은어)"의 시대는 끝났다. 잘못 건드려 국가적 개망신을 당하지 않고, 교제하고 싶으면 정당히 진심으로 만남을 갖고 교제하거나 1회성으로 끝내고 싶으면 유흥지들에 가는 것이 좋다. 미디어나 인터넷, SNS, 각종 IT 소셜들의 발달로 인해 베트남 뿐만 아니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IT도 서서히 베트남 수준으로 올라오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더 이상 정액받이 천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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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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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에서 실패와 중국과의 펜타닐 관세, 베네수엘라 위기
- 미국에서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이 발발한 시기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마약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나타난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닉슨 이후에 등장한 모든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공화당의 로날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는 마약과의 전쟁을 더욱 심화시켰고, 가수인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967~1994)의 죽음으로 인해 민주당인 빌 클린턴마저 가담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결과적으로 마약 이용자를 전혀 줄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폭력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흑인민권운동으로 그 위상이 신장된 미국 흑인들의 삶을 사회적, 경제적, 비공식적 차별로 새롭게 생성하여 결국 미국을 마약 천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미국 흑인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은 민권 운동 이전보다 오히려 하락했고, 이들의 권리를 찾는 운동은 폭동과 폭력 시위로 점철되어 갔다. 그저 금지된 약물인 마약을 투약했을 뿐, 폭력적이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을 전과자로 만들었고, 이들이 약물로 인한 전과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서 빈민층이 늘어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이들을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데 엄청난 세금을 써야 했다. 이처럼 폭증하는 재소자들로 인해 미국의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는 교도소와 교도관들을 늘려야만 했고, 이는 미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인구 10만 명당 수감자가 531명 정도의 비율을 갖고 있으며 이는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중국, 이란, 쿠바 같은 국가들보다 수감자들의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미국은 수십 년째 수감자 인구와 인구 대비 수감자 비율에서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감소세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 비율은 5위로 줄어들지만 다시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계속 시설을 증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재소자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형기를 못 채운 잡범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수용 한계를 넘어선 재소자들로 인해 관리 부실로 갱단간의 전쟁, 마약 유통, 살인 등 미국의 교도소는 범죄의 집합소가 된지 오래이고, 경범죄로 들어간 잡범들이 폭력적인 갱단 흉악범으로 변해 출소하는 범죄의 학교가 되어 버렸다. 단순한 마약 투약자가 교도소에 들어가서 갱단 조직원이 되어 출소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교도소가 오히려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미국에 존재하던 인종 간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닉들은 꿈도 희망도 없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치안 위협이 극도로 높아지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 사회에 큰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내부에서 이 정책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비폭력 단순 마약사범을 무조건 감옥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사용자 처벌, 대량 투옥 위주의 미국 사법 체계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현 2025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개선된 바 없다. 미국 정치권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금지한 약물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은 헤로인(Heroin), 코카인(Cocaine), LSD, 엑스터시(Ecstasy),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 마리화나(Marijuana), 환각버섯(Psilocybin mushroom), 펜타닐(Fentanyl) 등이다. 여기에서 큰 문제는 펜타닐(Fentanyl)이다. 만약 중국의 펜타닐 원료 수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미국의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결론적으로는 아니다(No!)이다. 인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이 중국 대신 펜타닐의 원료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미국 정치인들이 미국 마약의 문제를 볼 때, 마약의 무차별적인 공급에 있다고 주장하며 마약의 원료 생산지를 제거하거나 멕시코, 중국 등 공급 측을 제재하는 생산 차단에 주력해왔다. 최근에는 중국이 펜타닐 차단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 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경주 APEC의 미국-중국 회담에서 트럼프는 중국이 합성마약 펜타닐과 그 원료의 밀수출을 단속하면 펜타닐과 관련해 중국에 부과한 관세에 한해 완전히 폐지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중국은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난 정말로 중국이 그럴 인센티브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중국 정부의 펜타닐 단속을 보는 대로 미국 정부는 나머지 10%를 없앨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와 같은 단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과는 전부 처참하게 실패했다. 소비만 있으면 공급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마약을 구입해주는 미국이라는 세계 최대의 마약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조직들은 아무리 처벌을 강화하고 마약 공급업자들을 체포한다고 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마약을 조달해 와 미국에 유통시켰다. 오히려 규제와 처벌의 강화로 인해 마약의 가격이 올라 수익성이 증가하고 마약의 공급이 더더욱 증가하는 악순환만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마약 수요 원인인 미국 사회의 내부에서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급자와 판매 수단만 체포하고 단속한들 또 다른 공급자 및 수단이 등장해 대체할 뿐이다. 사실상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수요가 감소되지 않아서 마약 판매가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게 해 준다면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시장에 어떤 수단으로든지 끊임없이 제품 공급이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마약과의 전쟁은 처음부터 마약 중독자들의 숫자를 갖은 형벌과 체포를 통해 감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사실 이는 마약의 특성, 특히 미국에서 중독성과 해악으로 인해 처벌 및 관리 대상인 코카인, 헤로인, 펜타닐을 비롯한 마약성 진통제(Opioids), 메스암페타민 등의 약물들이 어떤 약물들인지 이해가 부족했었다. 일단 한 번 흡입하거나 사용하게 되면 단순히 그 주변이 공포와 폭력으로 인해 사용을 억제하거나, 혹은 자기 절제를 통해 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약이라 부르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심각한 경각심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마약 투약자들을 투옥시키면 해결이 된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효과는 매우 미미했다.당연히, 한 번 맛을 본 마약 중독자들은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소하여도 대부분 쉽게 마약을 끊지 못하고 상용하는 수준이 되었다. 약을 끊은 사람들조차도 단순히 처벌을 통해 마약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단순히 투약했전 투약자들조차도 투옥시키는 현실이 지속되자, 교도소의 숫자는 그만큼 늘어났지만, 당연히 단위면적당 수감자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났고, 이를 관리할 인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마약중독자들과 함께 격리되어야 할 마약이 교도소로 유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관리가 되지 않을수록 교도소 내 범죄조직들은 간수들을 매수하기 쉬워졌고, 아주 극악의 환경에 마약까지 유통되니 죄수들 간의 폭력이나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강제라도 마약을 끊어야 할 중독자들의 중독 상태는 지속되어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이에 마약 범죄가 아닌 상태로 들어온 죄수들조차도 교도소에서 마약을 접하고 마약중독자가 되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 된 것이다. 거기에 수감 생활 동안 겪었던 심리적,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마약에 대한 유혹에 더더욱 취약해졌다. 특히 교도소 내 범죄 문제는, 도저히 교도소 자체의 인력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감옥의 겉모습은 간수들이 관리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감옥에 생성된 범죄조직들이 교도소를 반 정도 지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불어 관리 인력의 문제로 인해 부패 문제, 관리 소홀 문제 또한 심각했다. 이는 교도소에 들어갈 예산이 날이 거듭될수록 부족하다보니 교도관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이나 복지 예산 또한 좋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이는 교도관이 열심히 일했을 때 주는 인센티브는 없는데, 일은 매우 고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교도관들도 관리에 대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약 중독 문제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온 죄수들은 직업을 잃고 노숙자가 되거나, 아니면 교도소 내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 더 심각하고 위험한 범죄자가 되어 사회로 돌아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에 투입된 예산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마약 투약자 및 판매자에 대한 체포 및 처벌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마약 투약자를 치료하고 재활하여 본질적으로 마약을 끊게 만드는 것이 교도관이나 경찰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 이는 고스란히 시민 사회의 몫이 되었고, 날로 늘어가는 치료 및 재활에 들어가는 비용과 중독자 수에 비해, 관련 예산과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약과의 전쟁을 하면서 주 정부나 연방 정부는 이들을 지원할 역량이 되지 않고 여력도 되지 않으니 중독자 수가 줄지 않고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이어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마약성 진통제 문제로 여겨진다. 마약성 진통제로 인한 사망자 수와 상용자 수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의 시발점이 되었던 미국의 열악한 의료 보험 제도, 각종 사회 복지 제도와 제약 회사들이 엮여 발생한 재앙 중 하나가 마약 문제보다 더 심각한 마약성 진통제 문제다. 이는 단순히 사용자나 판매자를 처벌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 또한 규제 대상이며, 이를 팔거나 쓰는 것 또한 처벌 대상이다. 그리고 그 강도 또한 낮지 않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많은 마약들을 불법으로 간주함으로 인해, 당연히 마약의 생산과 유통은 범죄조직들이 도맡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과 비교적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쉽게 닿지 않는 중남미 지역에 상당수의 마약 공장을 건조했다. 이들 범죄조직은 마약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된 현지 중남미 지역 범죄조직들은 엄청난 자금력을 지닌 초대형 마약 카르텔들로 진화했다. 이들은 국가의 정치, 경제, 사법,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멕시코, 브라질 등은 국가의 치안이 완전히 붕괴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대 미국 마약 밀수 카르텔들을 방조하거나 지원하고 있다 주장하며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에게 "세계 최대의 마약 밀수범"이라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두로에 걸린 현상금을 2,500만 달러에서 5,000만 달러로 인상했다. 물론 이 같은 트럼프의 지적은 틀린 말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군부는 1990년대부터 베네수엘라의 태양 카르텔(Cártel de los Soles)이라는 범죄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었다. 태양 카르텔의 경우 미국에서 테러조직이자 범죄조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두로는 태양 카르텔과 연루된 군 장성 상당수를 정부요직에 임명하였고 태양 카르텔의 수익을 공유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여기에 트럼프는 태양 카르텔이 미국의 마약 밀수에 큰 지분을 차지하는 멕시코의 시날로아 카르텔(Cártel de Sinaloa)과 연관이 있다 주장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Claudia Sheinbaum) 대통령은 이러한 트럼프의 의혹에 발끈하여 이는 사실이 아니라 반박 공표했다. 한편 베네수엘라의 외무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를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아 비난했다. 또한 트럼프가 자신과 연루된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이 저지른 아동 성범죄 사건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외무부의 주장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2025년 6월 5일, 정부효율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SNS에서 트럼프 대통령와 설전을 벌이던 일론 머스크가 엡스타인 파일에 트럼프의 이름이 들어있다면서 그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추잡한 사건에 대해 트럼프는 침묵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외무부 측이 주장한 표면적인 이유로는 그것이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는 진짜 이유일 수 있다. 내부 정치적인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큰 사건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앞 바다인 카리브해에 다수의 군함들과 미사일 90기를 급파하며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또한 상륙 준비단 4,500명 가량을 베네수엘라 앞 바다에 배치하는 등 침공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에 마두로 대통령은 같은 날 450만 명의 민병대에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현재까지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베네수엘라의 마약 카르텔을 청소하고 소위 갱단 두목이라 불리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처단한다는 것이지만 진짜 이유는 제프리 엡스타인과 성범죄 연루를 덮고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털어가는 등,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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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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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에서 실패와 중국과의 펜타닐 관세, 베네수엘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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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 활동하였다. 159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교역을 시도하려는 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20일 이들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귀금속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바타비아를 수도로 삼았다.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암본을 탈취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후 동아시아의 향신료인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 이 중 특히 육두구 열매에서 얻는 육두구와 메이스의 경우, 18세기 중반까지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반다 제도의 룬섬(Run island)을 점령한 이후, 세계 시장에서 육두구는 근 150년 동안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총독의 재임 시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경영의 구체적인 지침이 마련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원조해주는 대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기반으로 식민지 경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경쟁국들 외에도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존재했다. 쿤 총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들을 공격하였다. 1619년 쿤 총독과 네덜란드의 군대는 영국 동인도 회사 및 이들과 연합해 일시적으로 네덜란드와 반목했던 지역의 반튼 술탄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반튼의 유력한 무역항인 자야카르타(Jayakarta)를 획득, 바타비아(Batavia)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암보이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토착 세력도 네덜란드에는 큰 위협 요인이었다. 17세기 초에 술탄 아궁(Agung)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부 자바의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바야를 점령하는 등 동부 자바를 평정하고, 자바 섬을 통일할 목적으로 서진하고 있었다. 술탄 아궁에게 수라바야를 지원했던 네덜란드 세력은 위협적이었고, 이어 마타람의 군대가 1628년과 1629년 두 차례에 걸쳐 바타비아를 포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 군은 쿤 총독의 지휘 하에 완강하게 수성에 성공했다. 1641년 네덜란드는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을 대만 섬 북부에서 축출하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 곳들을 연결하는 교류 망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외에도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에 1658년 암스테르담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1636년에는 솔로르 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점령하고 17세기 동안 티모르 섬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이하에서 회사령 인도라 불리는 네덜란드령 인도는 동인도 지역과 겹쳐지지 않지만, 인도에서 동인도에 걸쳐 있던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 세력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인도에 국한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차원에서 함께 서술하려 한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 세력은 기존의 스페인, 포르투갈 세력을 말레이 반도, 술라웨시 섬,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했고 자바 섬에도 바타비아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얻었지만, 네덜란드 세력은 이베리아 계 세력을 결국 완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초부터 여러 차례 필리핀의 스페인 세력을 공격하였지만 육상 전, 해상 전 모두 패배하였다. 특히 1646년의 마닐라 해전에서는 스페인 함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가지고도 네덜란드 함대는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포르투갈 세력도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플로레스 섬 등 소 순다 열도의 동부 도서 지역들을 보유하였고, 티모르 섬에서도 네덜란드와 섬의 분할을 두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었다. 토착 세력을 상대로 한 원정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가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3~1644년 간 진행된 캄보디아와의 소규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캄보디아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바 섬에서는 신중하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연이어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7세기 중반, 자바에서 가장 강성한 마타람 술탄국이 군주 아망쿠랏 1세(Amangkurat I)의 실정으로 내분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를 주시하던 자바 서부의 반튼 술탄국이 마타람의 세력권을 잠식하던 와중 마타람에 치명적인 트루나자야 봉기(Trunajaya Uprising, 1674~1681)가 발생했다. 트루나자야 반란군에게 패퇴하고 수도가 함락당한 아망쿠랏 1세는 그나마 자바에 이해관계가 적은 외부 세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구원 요청을 보냈으며, 동인도 회사는 이에 응하여 반란군에 승리를 거두고 마타람의 내정에 개입하며 1670년대 말 마타람으로부터 자바 서부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비슷한 사건들이 1680년대에 이번에는 반튼 술탄국에 일어났는데, 술탄과 왕자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왕자의 편으로 개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승리하였으며 1687년까지 반튼 술탄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강성한 마타람은 즉시 동인도 회사의 보호국이 되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세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며 서서히 자바의 외곽 영토를 전쟁에 개입한 동인도 회사에 점령되어갔다. 18세기 중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Java War of Succession, 1749~1757)의 결과로 인해 결국 남은 영토마저 네덜란드 산하 번왕국들로 분리되었고, 각각의 번왕국은 보호국이 되었다. 반튼 술탄국은 보호국 위치로 존속하다 1813년에 해산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마트라 섬과 보르네오 섬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비록 이 시기에 대체로 내륙으로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해안 도시를 거점으로 한 지역의 여러 부유한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시키고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자바의 반튼 술탄국을 굴복시킴으로써 반튼 산하에 있던 수마트라 남부 람풍(Lampung) 후추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으며, 보르네오 남부의 후추 무역을 통제하던 반자르 술탄국도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간섭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도 아체 술탄국과 경쟁하며 아체 술탄국 산하에 있던 들리 술탄국 등을 네덜란드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며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아시아 대륙에도 상관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인도에 진출하여 인도 남동해안인 코로만델 해안에 네덜란드령 코로만델을 확보한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가던 시기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스리랑카에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1658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던 포르투갈령 실론의 수도 콜롬보를 점령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관리하는 네덜란드령 실론이 현대 스리랑카의 서부 절반 지역에 성립되었다. 스리랑카 식민지를 확보한 여세를 몰아 네덜란드 세력은 인도 남서 해안인 말라바르 해안(Malabar Coast)에도 진출하여 1661년 포르투갈령이었던 콜람(Colam) 항구, 1662년 코친(Cochin) 항구를 함락해 네덜란드령 말라바르를 창설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네덜란드의 군사적인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는데, 1638년 포르투갈령 고아에 대한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은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인도 식민지는 앞에서 열거한 네덜란드령 실론, 네덜란드령 말라바르, 네덜란드령 코로만델 외에도 소규모로 유지된 북동부의 네덜란드령 벵골과 북서부의 네덜란드령 구자라트도 존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를 제외한 인도 본토의 회사령은 이주와 장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의 상관과 공장 지대였다. 항구 도시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유지 되어 인도양에서 회사령 케이프 식민지와 회사령 동인도를 이어주는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령 말라바르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코친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토착 왕국과 세력 경쟁을 벌이며 내륙으로 확장하려 시도했던 적은 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말라바르 해안의 토착 세력 트라방코르(Travancore) 왕국에 대해 후추 무역 독점권에 대한 알력으로 트라방코르–네덜란드 전쟁(1739~1741)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네덜란드 군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1741년 8월, 식민지 전쟁으로서는 매우 큰 동원 규모인 네덜란드 군 6,000명(유럽인 2,400명)의 병력이 트라방코르군 12,000명~15,000명가량과 벌인 콜라첼(Colachel)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쟁은 동인도 회사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 패전으로 인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동인도 회사는 트라방코르 군에게 크빌론(Cbilon, 콜람)을 함락당하는 상황마저 우려하게 되었다. 이듬해 네덜란드가 말라바르 해안에서 아팅갈(Attingal) 인근의 작은 항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 본토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트라방코르와 네덜란드 세력 간의 긴장은 콜라첼 전투 후 일시적으로 휴전이 합의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이 때 네덜란드 영향 하에 있던 콜람의 군주가 독자적으로 트라방코르와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일시 이탈하기도 했다. 1740년대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은 한 때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고, 실제로 트라방코르 군이 1742년 6월, 네덜란드 영향 하의 콜람을 공격했다. 이에 네덜란드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은 지역의 영주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막아냈다. 트라방코르 군주는 나아가 네덜란드 지배하의 코친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입안하였으나 착수에 이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와 트라방코르 간에는 콜라첼 전투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저강도 분쟁이 계속 이어졌고, 꾸준히 평화 협정을 위한 협상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궁극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말라바르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이에 착종된 네덜란드의 이권이 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은 1740년대 내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의 후추 무역을 방해해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결국 1753년 8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트라방코르 왕국의 군주 마르탄다와르마 간 마웰리카라(Mavelikkara) 조약이 체결되어 양 세력의 대립이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말라바르 해안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졌고, 이후 네덜란드 식민 제국은 인도에서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대만에 진출했는데 일반적으로 포르모사라고도 알려진 대만은 1624년부터 1662년까지 그리고 1664년부터 1668년까지 부분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에도 막부와 무역을 하였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과 동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대만에 존재를 확립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보편적으로 대만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원주민들과 최근 한족들의 봉기는 네덜란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의 부상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대신 청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1662년 정성공의 군대에 의해 젤란디아 요새가 포위된 후 네덜란드 식민지를 해체하고, 네덜란드 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충신이자 반(反) 청나라 제국인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웠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를 맞이해 인도에 새로운 항로 개척이 진행되어,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가 크게 단축되었다. 대만도 이 국제 정세에 포함되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반에 일부의 일본인과 한족이 대만에 진출하였으며, 다른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도 대만의 정치 지형에 주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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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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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 정권 말기, 대만으로 이주한 정성공 및 정씨(鄭氏) 일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화교 2세대들
- 남명의 한족 국가는 위기에 놓였을 때 새로운 영웅인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탄생되었다. 정성공은 부친 덕택에 매우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비범한 소년이었다. 21세에 남명 정권의 귀족이 되고, 22세에 반청운동 지도자가 되었으며, 30세에 왕으로 책봉되기 이른다. 그는 바다의 제왕이 되어 중국 심장부인 남경(南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정성공은 당시에는 국제화된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경호병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인디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탈리아 인을 특사로 활용했다. 그의 부대에는 독일인과 프랑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대적한 세력은 네덜란드로, 당대 세계 최강의 해양 국가였다. 한편 그가 장성한 뒤인 1644년 명나라는 북경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고, 아버지 정지룡은 3년 뒤인 1647년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정성공은 부친의 세력을 물려받아 오히려 청나라에 대항해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남명의 융무제는 정성공을 좋게 보았다. 얼마 안가 정성공에게 충효백(忠孝伯)으로 작위를 올리고 초토대장군이란 관직을 내렸다. 하지만 부친인 정지룡의 마음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1646년 섭정왕 도르곤은 조카 볼로를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남명 정권 잔당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볼로에게는 성에 남아있는 정씨 세력만 제거하면 숙원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고, 정지룡에게 전투를 벌이지 말자고 제의했다. 정지룡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허울만 남은 남명 정권의 융무제에 충성을 하느냐, 투항해 가문을 지키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북쪽에서는 명나라 유신들이 대거 투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할 경우, 변발만 하면 끝이다. 볼로는 항복을 하면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고 중국 남동해안의 실력자 지위를 유지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 때 정성공은 소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중원에서 복건성으로 내려오는 길목인 선하령(仙霞嶺)을 지키다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정지룡은 “나는 황제폐하가 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볼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고 사용했다. 정성공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을 따를 것인지와 나라를 지킬 것인지, 그리고 충(忠)과 효(孝)가 배치되는 순간에 정성공은 충(忠)을 따르기로 했다. 삼촌들도 육지에서 승전하기 힘들면 바다로 나가 항전을 계속하자는 입장이었다. 정지룡은 마침내 남명 황제를 배신하고, 적이었던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정성공은 해외 무역 및 해적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반청운동에 쏟아 부었다. 1659년에는 장강 일대를 따라 난징 일대까지 함락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내 청나라 군의 토벌군과 맞서 연패하면서 주요 점령지들이 함락당하고 고립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정성공은 1661년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당시 네덜란드 상관이 점거한 상태였던 대만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 인들은 정성공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학살되거나 노예가 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서양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정성공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 총독부와도 알력을 벌이다가 1662년 대대적인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망명정부였던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가 미얀마에서 청나라 군에 사로잡혀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병사하고 말았다. 정성공의 활약 속에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 역사는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청나라는 대만을 고립시키기 위해 바다로 나무 조각 하나 띄울 수 없다는 강경한 해금(海禁)정책을 펴게 됐으며, 이것은 명나라 시대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중국의 해상무역을 크게 후퇴시키고 대운하를 중심으로 한 내륙운송 무역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성공의 해적 활동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교역로를 접게 되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 인들이 일본 무역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성공의 사망 이후부터 그의 해상 세력은 방향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잠시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였던 오삼계가 일으킨 삼번의 난 당시 오삼계 세력에 합류하며 복건성 공격에 나서기도 했으나 청나라 군에게 참패했다. 결국 1683년 청나라 군에 의해 대만이 함락되면서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현대 중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끝내 충절을 지킨 충성스런 장수로 남아 영웅으로 추도되고 있으며, 대만에서도 네덜란드 인을 추방하고 대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추대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1895년 대만을 식민지를 삼은 이후부터 나가사키의 중요한 인물로 다루기도 했다. 정성공이 나가사키 태생이고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자랐다는 부분을 강조해 대만을 처음 정복한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선전시키기도 했다. 중국, 일본, 대만 삼국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영웅으로 추대하긴 했지만, 그의 일대기는 17세기 동아시아 해상 무역사의 면면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한 이후, 대만으로 간 정성공 및 정씨 일족 이외에 한족들은 다시 만주족의 청나라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와 각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주한 지역에 자리잡고 화교, 혹은 화인 2세대가 된다. 화교들은 주요 이주 지역인 동남아시아 및 미주 대륙의 국적법이 속지주의(屬地主義)인 반면에, 중국에서는 원칙적으로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이중 국적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화교들의 경제력이 막강하여 심지어 한 국가의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위협이 되었다. 화교 배척 운동과 더불어 화교들에게 현지 국적의 취득을 강요하며 거부할 때는 강제 출국이나 재산 몰수와 같은 강경책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교들은 현지 국적을 취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중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 국적의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5년 인도네시아와 중국과 인도네시아 이중 국적 문제조약을 체결하여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쪽 국적만을 인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동남아시아 각국이 중국과의 국교 수립에서 이중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준이 되었다. 각종 통계에 의하면 화교들이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33개국에 약 2,200만 명, 미주 32개국에 230만 명, 유럽 24개국에 67만 명, 대양주 15개국에 34만 명, 아프리카 32개국에 10만 명이 각기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상당수의 화교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현지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외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 연안 지방에 거주하던 농민과 어민이었다. 그들은 국내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수입이 적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생존의 목적으로 해외 여러 나라로 이주했으며, 이는 현대적 의미의 이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현재 전 세계 화교인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하여 자본의 규모는 일본 국민총생산(GDP)의 5분의 1 정도에 달하며, 그들의 대부분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지역 화교의 총 자산은 전 세계 화교 자산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며, 현지 민족 자본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제학계의 추산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산업의 50%~80%와 대외무역의 40%정도를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경우, 화교경제는 이미 소규모의 음식점, 세탁소 등의 영세 업종에서 탈피한 지 오래이며, 기존의 금융과 부동산, 유통 등에 기초하여 첨단 기술 분야인 전자와 정보통신, 화학공업, 정밀기기, 강철 등의 산업에서 이미 국제적인 수준의 기업가를 배출하고 있다. 특히 화교 기업은 정보통신산업을 21세기를 향한 전략산업으로 간주하여 빠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화교의 정보통신 산업의 기원은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실리콘벨리에서는 하이테크분야에서 벤처기업을 일으켜 사업에 성공한 화교기업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소프트웨어 회사인 컴퓨터 아소시에이즈(CA)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가 자루즈 왕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비스 Yahoo를 경영하고 있는 창업자 지에리 양이 화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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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 정권 말기, 대만으로 이주한 정성공 및 정씨(鄭氏) 일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화교 2세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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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최악의 자연 재해 "홍수", 최근 들어 중부와 북부 지역이 홍수와 폭우에 의한 침수 등이 빈번한 이유
- 최근 베트남 중부와 중북부 지역에 폭우와 태풍, 홍수가 빈번해지고 있다. 바로 어제, 오늘 후에(Hue)와 다낭 일대가 폭우와 홍수로 인해 많은 수재민들이 생기고 있다. 최근 중부 지방에 내린 비는 평소보다 최대 6 배나 많은 양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하띤성은 150~400mm, 꽝빈성에서는 400~500mm, 꽝찌성은 800~1500mm, 투어티엔후에성은 1,300~2,000mm, 후에와 다낭시는 1,100mm, 꽝남성은 900~1,200mm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국제 평균적으로 하루 강수량을 180mm를 폭우로 분류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물폭탄이 중부 지역과 북부 지역을 덮친 셈이다. 베트남의 전문가들은 북반구의 한기가 베트남 중부 지역 상공의 열대성 수렴대에 진입하면서 비정상적인 폭우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재 벵골만에서 베트남 중부를 가로 질러 필리핀까지 열대성 수렴대가 분포되어 있고 이 지역들에게서 구름과 뇌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한다. 그러면서 동풍을 만나면 수증기가 급격히 증가하여 더 많은 비가 발생한다고 했다. 아울러 중부와 북부 지역의 따뜻한 해수 위로 강한 바람이 지나가면서 베트남 동해상에서 열대성 저기압에 이어 태풍이 발생하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실제 지난 10월 6일 이후에는 이 지역들에 2개의 태풍과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된 바 있다. 당시 태풍과 열대성 저기압은 많은 비를 동반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풍 린파가 지나갔을 때 500~700mm 이상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이와 같은 모든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난 7월에 등장한 라니냐(La Niña) 때문이다. 라니냐는 적도 부근 바다에서 무역풍으로 인해 북반구에서는 북서쪽으로, 남반구에선 남서쪽으로 해류가 흐르면서 태평양의 무역풍이 다른 해보다 강해지면 서태평양 적도 부근에는 두꺼운 온수층이 형성되고 동태평양의 온수층은 얕아지게 된다. 이로 인해 동태평양에서의 용승이 강해져 심층수가 더욱 많이 올라오게 되고, 그리하여 동태평양의 차가운 해수가 더욱 냉각되어 1년 중 5개월 이상 동안 해수면 온도가 평소보다 0.5℃ 이상 낮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처럼 라니냐는 엘니뇨의 반대현상이다. 문제는 내년 초까지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더 많은 태풍이 베트남 동해에서 생성되고 더 많은 비가 더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당국에서는 아직 비가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라 경고하고 있다. 11월 첫 주에도 또 다른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되어 중부지역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사태는 최근 들어 중부와 북부, 남부 등을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 달 9월 하노이에는 태풍 '부알로이'로 인해 폭풍과 강우를 동반, 주택 135,000 채 이상이 침수 또는 파손되었고, 26명이 사망했으며 30명 이상의 실종자들이 발생했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의 항공편들도 연이어 지연 및 취소되었고, 시내의 오토바이와 택시, 버스 등의 각종 대중교통과 일반 승합차들이 홍수로 인해 갇혀 엄청난 교통 정체를 보였었다. 이 같은 수해가 잇달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베트남의 대부분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대체적으로 인간 활동의 온실가스 배출보다는 자연순환론, 기후변동주기론, 태양활동주기론 등의 요인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2010년, 남극 세종 과학기지의 윤호일 박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는 1950년대~1970년대 사이부터 태양 활동 감소로 이미 소빙하기에 진입했으며, 2000년대의 이상기후는 그런 소빙기와 지구온난화의 충돌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와 같은 태양활동주기론에 더 신빙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국가는 베트남으로 해수면 상승의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국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최근 베트남의 천연자원환경부의 연구에 의하면 향후 해수면이 100cm 상승했을 때, 메콩 강 삼각주 절반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작년에 발표된 ‘기후 변화 시나리오(Kịch bản biến đổi khí hậu)’에 의하면 해수면 100cm 상승시 메콩 강 삼각주의 47.29%가 영구적으로 침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노이와 북부 항구 도시 하이퐁이 있는 홍 강 삼각주의 경우 13.2%, 호치민 시는 17.15%, 중부해안지역은 1.53%가 침수될 것으로 보았다. 보고서에 의하면 2050년까지 국제적으로 베트남 동해의 해수면이 2050년 24~28cm, 2100년까지 56~77cm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다. 베트남의 해안 평균 해수면 상승은 세계 평균보다 높을 것으로 보이며, 남부 해안 지역의 상승은 북부보다 높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40,577㎢에 걸쳐 펼쳐진 메콩 강 삼각주의 경우, 지난 수십 년 동안 베트남의 농업 및 양식업의 중심이었고 국가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농작물 수출에도 지대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최근 몇 년간의 나타난 많은 환경 연구보고서는 베트남에서도 가장 많은 2,0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메콩 강 삼각주가 가라앉고 있으며 100년 안에 사라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연구가 반복될수록 침수 시기는 당초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다. 2019년, 기후 과학을 분석하고 보도하는 미국 기반의 비영리 언론 기관인 Climate Central에 의하면 메콩 강 삼각주와 국가 경제 중심지인 호치민 시를 포함한 베트남 남부 대부분이 2050년까지 지속적으로 침수 피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더 나아가 2100년까지 해수면이 1m 증가해 호치민 시의 약 18%, 메콩 강 삼각주의 약 39%가 침수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호치민시 중심가인 1군의 경우 2030년까지 침수 피해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면서 폭우에 매우 취약해질 위험성이 있다고 했다. 특히 호치민은 1990년대부터 도시 전역의 지반 침하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호치민 시의 연간 지반 침하 속도는 연 2∼5㎝로 주변 지역 해수면 상승 속도의 약 2배에 이르고 있다. 또 일부 상업 지구는 매년 7∼8cm씩 가라앉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메콩 강 델타 지역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81.8cm, 48.8cm나 각각 침하했다. 호치민 시가 가라앉는 주요 원인은 본래 취약한 지반 위에 세워진 도시였고, 과도하게 지하수를 추출했기에 침하 속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 오고 있다. 그로 인해 대표적으로 발생하는 사고가 바로 씽크홀이다. 게다가 호치민이 인구 1,000만이 넘는 대도시이기에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른 지하철 건설 공사, 지속적인 마천루 건립 등이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베트남 최대 식량 생산지역인 메콩 강 삼각주 지방에서 기후 변화 등으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이로 인해 해수면 상승과 메콩강 수량 감소로 바닷물 유입이 늘어나면서 염분이 땅에 스며들어 쌀 재배가 어려워지고 있다. 베트남은 날로 인구가 늘어나 올해 상반기에 이미 1억을 돌파했기에 메콩 강이 경지 면적이 줄어들게 되면 엄청난 식량난에 시달릴 것이다. 이번에 홍수가 난 후에나 다낭도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다. 게다가 홍수나 침수가 발생하면 배수 시설 자체가 매우 열악한 상태로 강우가 쏟아질 경우, 오히려 역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 베트남에는 과거부터 늪지대였던 곳이 많고, 자연적으로 늪지대의 물이 모여 호수나 저수지 등이 자연 형성된 곳도 꽤 많다. 이런 곳들은 대개 물이 역류하는 현상이 많이 벌어지며 그로 인한 침수와 홍수는 거의 손 쓸 수 없을 지경이다. 따라서 베트남이 해야 되는 상황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저지대 지역에 면해 있는 강가나 못, 호수, 저수지 등에 제방을 쌓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홍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각 곳에 보와 제방을 축조하는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대한민국에게 배수 시설 공사를 완전 일임하는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많은 나라다. 한국의 이와 같은 기본 모델을 장착시키기 위해 베트남은 자국 홍수와 침수를 대비하기 위해 자국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아끼면 안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경주 APEC에서 베트남의 주석인 르엉 끄엉을 만나 이 같은 문제를 협상하고 우리 기술자들을 보내 베트남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첫 번째는 베트남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로 인한 한국의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우리 기술을 투자한 인프라로 인해 우리의 역량을 동남아시아 다시 어필 할 수 있다. 중국의 자본에 신음하던 동남아시아 각국이 한국의 수준 높은 기술을 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에게 막대한 자본과 물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지만 우리가 중국가 맞설 수 있고, 숭부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세밀하고 정교한 기술(Technology)이다. 세 번째는 미국, 중국, 일본에 치중되어 있는 무역의 다변화를 위한 첫 번째 거점으로 동남아시아가 될 수 있다. 그런 문제로 인해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중국, 일본, 베트남 순서로 정상회담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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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최악의 자연 재해 "홍수", 최근 들어 중부와 북부 지역이 홍수와 폭우에 의한 침수 등이 빈번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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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원주민인 에버리진 이야기 : 호주 원주민들과 멜라네시아인들 이주의 역사
- 호주 대륙에 유럽인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었던 민족들을 총칭하는 단어가 에보리진이다. 또는 Indigenous Australian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라고 불리며 간혹 퍼스트 오스트레일리안 (First Australian)이라 부르기도 한다. Indigenous Australian이라는 개념은 다시 에보리진 호주인(Aboriginal Australians)과 토레스 해협 제도에 거주하는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Torres Strait Islanders)으로 분류된다. 최근 호주 원주민들이 '애버리지니'라는 명칭을 선호하지 않음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라는 표현이 권장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는 원주민에 대한 배려로 호주 국기를 게양할 때 대부분 원주민기도 함께 게양하고 있다. 호주 원주민(Indigenous Australians)은 유럽인의 이주 이전부터 호주와 주변 섬에 살았던 원주민이다. 호주 본토의 애버리지니(Aborigine)을 비롯하여 행정구역상 퀸즐랜드의 일부인 토레스 해협 제도의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 및 태즈메이니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등이 있으나, 태즈메이니아인은 백인 이주자에 의하여 거의 절멸당하였다. 현재 총인구는 80만 명가량으로 호주 전체 인구의 약 3.3%에 해당하고 있다. 2021년을 기준으로 에보리진 호주인과 토레스 해협 원주민들을 합한 호주 원주민 인구는 812,728명이며 이는 호주 인구의 3.2%를 구성했다. 특히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에서는 인구의 30%가 호주 원주민이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비중이 적다. 원래는 250여 개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상당수 언어가 사용되지 않으며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그래도 칼라라가우야 어나 피찬차차라 어와 같이 널리 사용되는 언어도 존재한다. 이들 언어의 사용자 수를 모두 합치면 5만 명 정도로 호주 내 한국어 사용자 수와 비슷하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 3/4, 무종교인이 1/4이며 1%만이 전통 종교를 믿고 있다. 퀸즐랜드 북부에서는 파마(Pama)라고 하며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늉아(Nyunga)라고 스스로를 지칭하였는데, 물론 지역차는 있지만 이를 차용하여 파마늉아 어족이란 언어구조학적 단어가 생겼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파마늉아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북부나 태즈메이니아 섬 원주민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1885년에 출간된 독일의 백과사전 Meyers Lexikon에서는 이들을 흑인으로 분류했고 한동안 이러한 분류가 널리 통용되었으나,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 계열 흑인과는 유전적 특징이 전혀 다르다. 하플로 그룹의 조사 등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독자적인 그룹인 호주 인종인 것으로 여겨진다. 호주 원주민의 조상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공통된 조상들과 유전적인 차이가 적어도 6~7만 년쯤은 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추측하여 보면, 대략 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반도인 예멘의 경류를 따라 남아시아로 진출한 이후 다시 오세아니아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주 길목은 뉴기니 지역을 통과해 호주 대륙으로 정착한 것으로 본다. Y염색체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하플로 그룹 S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4만~7만 년 전에 처음 호주 대륙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호주 원주민 사이에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는 하지만, 호주의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와 사회 간에는 큰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 각기 고유한 문화, 관습, 언어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호주에서 이러한 전통적 집단들은 보다 작은 지역 공동체로 분류되어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 정착했을 당시 원주민은 대략 250개의 언어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많은 원주민이 영어를 사용하여 120~145개의 원주민 언어만 남아 있으며 그 중에서 13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멸의 위기에 몰려 있다. 유럽인이 정착했을 당시 원주민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적게는 31만 8,999면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인구 분포는 지금처럼 머리강을 중심으로 하여 호주 동남부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은 유럽인의 정착으로 가장 큰 인구 감소를 당했다. 멜라네시아 인은 자연적으로 금발인 사람이 많은데, 모발 단백질의 돌연변이에 의해 자연 발생 된 것이라고 한다. 멜라네시아인 비율이 94%인 솔로몬 제도에서는 인구의 26% 정도가 금발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백인과 비슷하게 어렸을 때는 밝은 금발을 가지고 있다가 성장하면서 점차 검은색으로 변해 성인이 된 뒤에는 어두운 갈색 머리로 변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멜라네시아 인들은 약 3~5만 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한다. 피부가 검지만 흔히 흑인이라 부르는 아프리카의 니그로이드와는 혈통이 전혀 다르다. 멜라네시아인은 태평양 섬 원주민(pacific island) 혹은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이라는 다른 분류로 묶이는, 이와 같은 오래된 인종 분류가 늘 그러하듯이 확실하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개념은 아니었으며 아직도 유전학적으로 잘 연구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호주 인종(Australoid Race)은 현생 인류의 인종 분류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을 포함한 태평양 지역의 원주민이다. 이들을 두고 오스트랄로이드(Australoids) 인종이라 불린다. 호주 원주민, 멜라네시아 인, 동남아시아의 네그리토, 중부 및 남부 인도인, 일부 동남아시아 인들까지도 포함된다. 다만 20세기 후반 연구가 진행되면서 '-oid' 유형의 포괄적인 인종 분류에 비판적인 학자가 많아졌으며, 오늘날 오스트랄로이드를 비롯한 몽골로이드, 코카소이드, 니그로이드 등 학술적인 용어로는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오스트랄로이드 계열 원주민을 네그리토(Negrito)라고 부른다. 현대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선주민인 오스트랄로이드와 나중에 대만과 인도 등지에서 유입된 민족이 섞여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인도 아시아 대륙의 선주민이기도 하며, 아리아 인들이 남하하기 이전에 인더스 문명을 세운 만들었던 인종들이 이들이라는 설이 있다. 흔히 드라비다 인이 인더스 문명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하플로 그룹을 통한 연구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의 주민들의 유골에서 드라비다 인의 영향이 미미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같은 오스트랄로이드 계통이라도 각기 다양한 환경에서 오랜 세월 문화적으로, 관습적으로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외모, DNA, 언어, 풍습 등이 많이 다르다는 것에 있다. 한 때 대만 섬, 오키나와 제도에서까지 이들이 거주했던 것이 밝혀졌다. 또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과 중동 지역의 교류로 인해 아라비아 반도나 아프리카의 뿔 지역 주민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밝혀졌다. 피부색이 짙고, 콧대가 낮으며, 코가 넓고, 곱슬머리 등 때문에 흑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잦지만 이들이 흑인과 닮은 것은 수렴 진화로 아프리카의 흑인과는 유전적으로 많이 먼 것으로 나타난다. 호주 인종은 코카소이드, 니그로이드, 동아시아인 등 중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인종이다. 이마가 넓고, 팔자 주름이 크며, 안와상융기가 인류 중에서 비교적 큰 편이다. 대부분 흑발 흑안을 가지고 있으나 멜라네시아인은 금발이 많다.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의 영토로 선포하고서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이름을 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에보리진은 인구밀도 높은 동남부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하였고, 또한 이주민과 같이 들어온 성병 감염으로 말미암아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5,000~750,000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 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이 가운데 천연두에 걸려 병사한 원주민 수만 전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전염병과 성병, 그리고 탄압으로 말미암아 1788년과 1900년 사이의 애보리진 인구 90%가 감소했다. 비교적 풍족했던 남부 호주의 에보리진의 경우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 섬은 특히 타격이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었던 에보리진의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인종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1803~1834년 사이 333명의 에보리진이 학살당한 것도 직접적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다수는 이러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에보리진은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 사이(1803~1833)에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 탄압, 학살 등으로 인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에보리진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내륙 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0,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850년대 식민지화가 안정되자 에보리진의 삶도 이주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렵 생활을 하던 원주민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고, 특히 광산 개발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음식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약 1,200여 명의 애보리진이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게 되자 그 이전까지 에보리진이 군복무를 제한하던 정책을 완화하게 된다. 1920년대에는 에보리진의 인구가 급감하여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으나 1930년대 전염병에 살아남고 면역력을 갖추게 된 원주민들이 다시 출생률이 높아지면서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호주의 에보리진들은 1900년부터 1972년까지 약 70여 년 동안 원주민들의 개화 정책 일환으로 호주 정부와 교회에 의해 정책적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 당했다. 이러한 강제 입양을 당한 당시 에보리진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 부르며, 이들은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 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 결정이 내려지는 성과를 얻게 된다. 2007년까지 재임한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의 원주민 개화 정책이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에보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기점으로 에보리진의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이루어져 태즈메이니아 에보리진 후예들만 약 40여 명이 향후 500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받기로 예정되었다. 2007년 총선 승리로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 2016년 기준 호주의 원주민들은 798,365명으로 호주 인구의 약 3.3%를 차지하고 있다. 2011년 인구 조사에서 495,757명은 호주 원주민인 에보리진, 31,407명은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 21,206명은 양쪽에 모두 속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오늘날에는 호주의 다른 인종들처럼 뉴 사우스 웨일스 주와 퀸즐랜드 주 등 동부 해안에 가장 많이 거주하며 두 주에서 인구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원주민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노던 테리토리로서, 이곳에서 인구의 약 30%가 원주민이다. 오늘날 원주민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나, 음운, 문법, 어휘 면에서 원주민 언어의 영향을 받은 호주 원주민 영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들 상당수는 호주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최하층에 속하여 원주민 집단 내에서는 빈곤과 연관된 여러 사회 문제가 보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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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원주민인 에버리진 이야기 : 호주 원주민들과 멜라네시아인들 이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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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 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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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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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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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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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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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 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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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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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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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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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