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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 레오 14세 즉위…“평화와 사랑의 세상을 위하여”
    [바티칸=2025.05.18.] 교황 레오 14세 즉위…"평화와 사랑의 세상 만들자" 2025년 5월 18일(현지시각),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시선이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집중됐다. 가톨릭 역사상 첫 미국 출신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69세)가 이곳에서 공식 즉위 미사를 집전하며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여정을 시작했다. 이날 미사에는 전 세계 180여 개국의 대표단과 20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운집해 새 교황의 탄생을 축하했다. 레오 14세는 미사에 앞서 **교황 전용차량 '포프모빌'**을 타고 광장에 등장했다. 방탄 장비 없이 열린 차량 위에서 그는 군중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을 안아 축복하는 모습으로 따뜻한 첫인상을 남겼다. 이후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안장된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참배하고 기도를 올린 뒤 야외 제단으로 나아가 역사적인 미사를 시작했다. 즉위 미사의 핵심 의식,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 착용 즉위식의 하이라이트는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 착용 의식이었다. 팔리움은 흰 양털로 만든 띠로,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선한 목자'를 상징한다. 레오 14세는 도미니크 맘베르티 추기경으로부터 팔리움을 서서 전달받았는데, 이는 앉아서 받았던 전임 교황들과 차별화된 겸손한 자세였다. 이어서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이 레오 14세의 **오른손 약지에 '어부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 순금 반지는 교황이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인장으로, 'LEO XIV'라는 라틴어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교황은 반지를 응시하며 두 손을 모아 깊은 기도를 올렸고, 이 경건한 순간은 신자들의 뜨거운 박수갈채 속에 감동을 자아냈다. 사랑과 일치,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 첫 강론에서 레오 14세는 강한 울림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증오와 폭력, 편견, 차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경제 논리가 만든 상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며, **"우리는 이러한 분열을 사랑과 일치로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일치(unity)'라는 단어를 일곱 차례, '화합(harmony)'을 네 차례 언급하며 분열된 세계와 교회를 향한 화해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미얀마,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분쟁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그는 "모든 협상자들이 나서서 평화를 전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바티칸을 전쟁 종식 협상의 장소로 제안했다. "교황청의 도덕적 권위가 평화 구축에 기여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국제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세계 지도자들과의 외교 무대 개막 즉위 미사에는 전 세계 지도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미국의 J.D. 밴스 부통령,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헤르초그 대통령 등 20여 개국의 국가원수들이 직접 참석해 새 교황의 즉위를 축하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장면은 미사 직후 로마 주재 미국 대사관저에서 이루어진 젤렌스키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의 비공식 회동이었다. 두 인물은 악수를 나누고 30여 분간 회담을 가졌는데, 이는 지난 2월 백악관에서 벌어진 공개 설전 이후 첫 공식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바티칸 외교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해결의 중재자로 부상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새로운 교황의 상징과 철학 레오 14세는 전임 교황 프란치스코의 소박한 행보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전통적인 붉은 신발 대신 검은 신발을 신었고, 미사 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전통 망토인 '모체타'를 착용해 교황으로서의 권위와 겸손함을 동시에 드러냈다. 또한 그는 순금이 아닌 금도금 반지를 선택함으로써 절제와 소박함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도 이날 행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사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정부 경축 사절단과 유흥식·염수정 추기경,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등 한국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해 깊은 연대감을 표현했다. 레오 14세의 즉위는 단순한 교황직 승계를 넘어 **분열된 교회와 혼란한 세계에 전하는 '화해와 사랑의 선언'**이었다. 세계가 분열과 갈등 속에서 방향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새 교황의 등장은 인류가 다시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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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9
  •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겸손과 나눔으로 남긴 위대한 유산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교황은 청빈과 나눔의 삶을 살며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다. 장례미사는 25만 명이 모인 가운데 엄숙하게 치러졌고, 교황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영면에 들었다. 교황은 종교지도자와 청소년에게 평화와 경청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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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8

칼럼 검색결과

  • 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1
  • 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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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 카프카스인들과 조지아의 기원
    고도로 발전된 철제 기술력들을 기반으로 카프카스인들은 B.C 12~8세기경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흑해 연안과 아르메니아 인근에 자신들의 최초 국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인류 시원과 연결되어 있고, 강력한 기술력을 보유했던 카프카스 인들은 막강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문명에 의해 끊임없이 침탈을 당했기 때문이다. B.C 8세기에는 킴메르가 공격해왔고, 이후 흑해 해안 지대에는 그리스계 민족들이 상륙하여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한 민족들의 공격에 카프카스 인들은 이들의 세력과 혼혈하여 토착민으로 거듭났다. 이들 토착민들을 카르트벨리아 인들이라 불리게 된다. 이들은 콜키스와 이베리아로 나뉘어 카프카스 일대를 지배했다. B,C 7세기에는 스키타이가 공격해왔으며 B.C 6~2세기에는 사르마트와 마케도니아, A.D 1세기에는 로마, 3세기에는 동고트족, 5세기 후반부터 10세기까지는 비잔틴 제국의 침략과 강점을 거쳤다. 고대 시대부터 유라시아 유목 부족들과 고대 슬라브 인들이 모두 카프카스 일대를 공격했고, 강제로 점령하기도 했다. 결국 고대부터 근현대시기까지 조지아와 조지아 인들의 역사는 외부의 강점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지아는 러시아어로는 ‘그루지야(Грузия)’라고 지칭되고 있으며, 조지아어로는 ‘사카르트벨로(Сакартвело)’라고 명명된다. 사카르트벨로는 조지아 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카르트벨리(Kартвелы)와 장소를 뜻하는 접사 ‘사(Cа-)’와 ‘오(-O)’가 결합한 말이다. 결국 사카르트벨로란 ‘카르트벨리가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어에서는 조지아의 국가 명칭을 ‘그루지야(Грузия)’, 조지아 민족을 ‘그루진(Грузин)’이라고 불렀으며,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러시아어 명칭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1389년 사제 이그나티 스몰냐닌(Игнатий Смольнянин)의 팔레스타인 여행기에서 구르지(Гурзи)에 대한 언급되고 있으며 아파나시 니키틴(Afanasi Nikitin)의『삼대양으로의 여행(Хожение за три моря Афанасия Никитина, 1466~1472)』에서 구르지야 땅(Гурзыньская земля)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이후 구르지(Гурзи)라는 용어는 러시아어에서 자모 교체 현상이 발생해서 그루지니(Грузины)로 변경되었다가 전통적으로 국가의 명칭을 뜻하는 러시아어 접미사 ‘이야(-ия)’가 붙어서 ‘그루지야(Грузия)’가 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그루지야는 조지아(Georgia)라고 부르며 일부 국가에서는 ‘게오르기야’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 명칭은 터키어로 그루지야 인을 뜻하는 구르지(Gurdzi) / 규르지(Гюрджи, Gurdzi)에서 차용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참고로 13세기 마르코 폴로는 ‘그루지야’를 조다니(Jorganie)라고 했고, 현대 터키어로는 구레이스탄(Gureista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조지아, 혹은 그루지야 / 게오르기야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여러 학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곡물 경작지’를 뜻하는 ‘게오르기야’에서 파생되었다는 학설도 있고, 그리스어로 ‘농부’를 지시하는 ‘게오르고스’에서 유래했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 시대 수많은 사원의 이름으로 사용됐던 ‘성 게오르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고, 조지아를 통치하는 통치자 중 무려 12명이 ‘게오르기’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결과로 ‘게오르기야’가 국명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오늘날 조지아 영토인 이베리아 지역의 영토에 대한 최초 거주는 여러 근거로 볼 때 현 조지아 남동부에 존재하는 드마니시(Dmanisi) 지역의 발굴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약 18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 대한 구석기 유적의 발굴로 나타난다. 이는 후기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된 아슐(Ashul) 문화로 알려진 무스테리안(Musterian) 시기의 것인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은 조지아에서 무수히 많은 동굴과 옥외 유적지들로부터 발굴되었다. 최초의 농경 신석기 시대 거주는 B.C 6000~5000년 사이의 시기로 추정되며 이에 대해 여러 도구기 나타나고 있는데 해당 지역의 흑요석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가축들을 키웠으며 포도를 포함한 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슐라베리-쇼무(Shulaberi-Shomu) 문화로도 알려진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이 문화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소와 양, 돼지와 같은 가축들을 방목하여 목축을 주로 행했으며 포도를 포함한 과수와 밀과 같은 곡류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슐라베리-쇼무(Shulaberi-Shomu) 문화로 알려진 곳에는 카프카스 인들의 대규모 정착을 근거하는 수많은 동굴들은 1960년대부터 발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에 발굴된 동굴들은 동부 조지아의 이미리스-고라(Imiris-Gora) 지역에 주로 분포해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B.C 5000년 시기로 알려졌고 이 동굴들에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집들을 포함한 많은 고대 정착지들이 나타났다. 그 주거지들은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기둥과 굴뚝이 있는 특이한 유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한 형태들과 함께 향후에는 조지아의 주거지들과 다르바지(Darbazi) 형식으로 형성된 건축지들이 발달하였다. B.C 4000~3000년 시기의 동석기(銅石器) 시대 기간 동안으로 놓고 볼 때 조지아와 소아시아는 쿠라-아락세스(Kura-Arakses) 문화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쿠라-아락세스(Kura-Arakses) 문화는 B.C 2000년 시기의 트리알레티(Trialety) 문화로까지 이어진다. 동석기 문화에 속해 있는 동굴들은 베슈타셰니(Beshutasehni)와 오즈니(Ozni) 정착 유적으로도 나타났고 탄소 연대로 밝혀진 연대로는 B.C 4000~3000년 시기의 정착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후에도 아르트빈 지역에 위치한 트살카(Tsarka)의 트리알레티(Trialety) 주(州)에 있는 매장식 무덤이 존재하는데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B.C 2000년의 시기들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 유적들 모두 진보되고 잘 발달된 무덤과 매장 양식이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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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3
  • 러시아의 5.9 전승절에는 어떤 행사가 벌어질까?
    보통 5.9 전승절에는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불멸의 연대를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각계, 각 인사들에게 악수하며 인사하고 붉은 광장을 걸어 크레믈린 성곽 주변을 통과해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으로 가게 된다.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은 러시아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각료들은 그곳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忠)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잡는다. 일각에서는 저것 또한 정치적인 쇼로 보지만 러시아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말하고 싶다. 러시아에서 군인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각별하다. 각 가정마다 군인이 있다하면 매우 자랑스러워 했으며 로마노프 제국 시절 때는 군인 집안이면 모든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군에 대한 국가의 대우와 예우도 아주 높은 편이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군의 체계를 비웃으면서 형편없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만약에 그 대우가 정말로 썩 좋지 않다면 러시아 내에서는 벌써 폭동이 일어나 푸틴 정권이 교체되었어야 했다. 러시아 시민들이 군대, 군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에 군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다면 러시아 시민들의 성격상 절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군에서도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여 군 쿠데타가 발생해 현 정권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하느니 한다는 것은 러시아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군은 시민들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세계 최강 몽골군을 몰아냈고,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프랑스 나폴레옹도 격파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으며 나치 독일도 격파했다. 세계에서 이름 높은 역사적인 최강국들을 세 차례나 꺾었으니 시민들이 생각하는 러시아의 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여군들을 보자면 제1차 세계 대전, 대조국 전쟁 때마다 급하게 투입했지만 이 때 큰 활약을 펼쳤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는 여군을 양성하는 것에 아주 적극적이다. 소련도 일반 소총수로는 여군을 배치하지 않았지만 소련의 여군은 통신병이나 간호병과 같은 전통적인 여군의 영역은 물론, 전차병, 저격수나 전투기 조종사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영웅이 된 한 여성 저격수가 말하길 저격수는 인내심과 꼼꼼함이 요구되기 때문에 여성에 맞는 병과라면서 군의 커리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소련의 여군은 대조국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고 많은 여군들이 소련 영웅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군들도 대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퇴역 조치가 내려졌다.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에도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가 된 대조국 전쟁 참전용사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를 비롯한 주변 CIS 국가에서 모두 존경을 받고 있는 편이다. 다만 당대 소련 여군들은 승전의 영광을 남성 군인들에게 빼앗긴 채 침묵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PTSD 장애를 앓았던 군인들이 많았으며 군대에서 상대 남성 군인들을 성폭행 했던 문란한 여자라는 지역 사회의 편견 때문에 고통 받은 여군들이 많았다. 특히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벨라루스의 여류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의 대표작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У войны не женское лицо)>는 대조국 전쟁에서 활약한 여군 용사 200여 명 이상을 인터뷰한 논픽션으로 작품으로, 당시 여군들이 겪은 고통과 투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여군들의 활약은 후세의 여군들에게도 계승되고 있으며 이에 일정한 영향력과 전통으로 남아,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사관학교에서 따로 여성을 받아 들이고 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중학생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하는 여군 학교까지 존재하고 있다. 물론 여군학교 생도들의 평균 연령은 14세 정도이고 러시아에서 여성은 징병 대상이 아니다. 현재 러시아 국방부의 여자 기숙 학교는 군인의 딸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20년 이상 근속한 군인 및 병역 의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군인의 딸들에게 우선 입학권이 주어진다고 한다. 매년 11세 소녀 120명 이 입학하지만 희망자는 훨씬 더 많다. 경쟁률은 6대 1이지만 40대 1까지 되기도 하는데, 이는 러시아 최고 대학들의 경쟁률과 비슷하다. 물론 기숙학교를 다니려면 부모의 공적이라는 배경만 가지고 뽑히지 않는다. 건강과 쉬꼴라(러시아의 중등학교) 기간 동안의 학업 성취도 면에서도 뛰어나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여자 군 기숙학교 후보자들을 테스트하며, 교육자들이 러시아어, 수학 및 각종 외국어 지식들도 테스트를 거친다. 모스크바에 있는 군 기숙 사관학교 학생 840명은 완전 국비 지원을 받으며 방학 때만 집에 갈 수 있다. 교육부가 아니라 국방부가 승인한 계획에 따라 공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도들은 군사과목도 배우지만 수영, 승마, 피겨 스케이팅, 레슬링, 심지어 펜싱까지 각종 운동도 익히고 화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악기 연주도 가르치며 기숙학교에는 여러 대회에 참가하는 드러머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구원의 탑(Спасская башня)’ 음악 축제에 참가한다. 이처럼 여군 사관학교는 군대에 관해 최고의 엘리트들을 키워낸다. 현대 러시아는 약 5만 명의 여군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대조국 전쟁 이후에는 직접 전투에는 참여시키지 않고 있다. 물론 여성을 전투와 비전투로 구분하는 규범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불문율은 모든 부대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진다고 한다. 그리고 분쟁지역에서 파병은 이루어지지만 전투참여는 하지 않는다. 사실 대조국 전쟁 이후 인구를 늘릴 필요가 있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할 중요한 여성들을 전투에 내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9년 이후로는 러시아 병역법이 바뀌어 여군도 보병, 저격, 전차병, 포병 등 전투 병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 특공 및 특임대와 특수부대는 지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러시아 여군 장병들 자체는 남성 군대에 뒤지지 않는 애국심과 전우애가 투철하고 강인한 병력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실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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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0
  • 미하일 마로코비치 보르딘(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1884~1951), 벨라루스 출생으로 유년 시절을 라트비아에서 보냈던 러시아계 유대인 인사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사를 볼 때 이 두 나라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간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청나라 때는 러시아와 청나라는 적국이면서도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아 간 나라였고 청나라가 무너진 후, 중화민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13년에 최초로 수교를 맺었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로마노프 제국이 붕괴되고 러시아 임시정부에 이어 소비에트 볼셰비키 연방이 세워지자 수장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3 세계의 민족주의를 지원함으로써 고립을 벗어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제3 세계 민족주의 대한 지원은 쑨원이 내세운 국공합작 노선과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쑨원은 공산당에 대해서도 매우 유화적인 인물로 유명했으며 공산당을 포용하려 했다. 이는 쑨원이 공산당 자체에 대해 잘 몰랐던 부분도 있지만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내세워 국공 통합을 실현하려 했고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를 함께 발현시킬 수 있는 파트너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공 전국 쑨원기념관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소련은 이러한 쑨원의 정책에 대대적인 환영의사를 밝히고 군사고문 등을 내전 상황에 놓여 있던 중국에 파견했으며, 이 관계는 장개석 통치 때까지 지속된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을 통한 당대당의 지원을 하는 한편 국민당에게는 군사고문 등을 파견했다. 이와 같은 양다리 외교 작업을 한 이유는 당시 분열 중인 중국보다는 일본의 세력이 더욱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적백 내전의 혼란기 당시 일본이 바이칼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넘보려 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을 점령하고 연해주를 휩쓸었던 전력이 있었다. 겨우 러시아 전토를 적화하는데 성공한 소련은 이와 같이 동아시아에서 위세를 부 리는 일본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당의 장개석이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을 깨고 국민당 내 공산당원들을 숙청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냉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과의 관계는 파쇄하지 않았다. 이러한 양각 관계에 있어 중심이 되어 축을 유지한 인물이 바로 미하일 마로코비치 보르딘(Михаил Маркович Бородин, 1884~1951)이었다. 미하일 보르딘은 1884년 7월 9일 오늘날의 벨라루스에 해당되는 러시아 서부 비텝스크 주의 야노비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유대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태인으로 3세에 아버지를 따라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내다 러시아의 중등 학교에 입학했고 16세의 어린 나이에 공산당 사상에 감명을 받아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면서 혁명가 활동을 시작했게 된다. 물론 보르딘은 벨라루스 출신의 라트비아 유대인 출신이라는 같은 볼셰비키 내에서도 차별을 받긴 했지만 각종 지하공작에 참여했고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 레닌을 만나 발트 지역에서 공산 활동에 대해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이후, 러시아 제국 내의 경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되었지만 이내 석방된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여 10년 이상 시카고와 보스턴에서 생활하여 미국 내 좌익활동을 이끌게 된다. 이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미국 사회당에 가입했고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 혁명의 완수 이후 1918년 7월 모스크바에 귀국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체류 경험으로 인해 영어에 능통한 보르딘은 레닌의 저작물을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전파했고 중국으로 파견 후에는 국민당에 협력하면서 쑨원 등과 영어로 소통하기도 했다. 보르딘은 코민테른이 창설되자 그는 1차 대표 회의에 참여했으며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미주 지역에 파견되어 정치와 재무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도 브란트바인이란 가명을 쓰고 멕시코 공산당을 창설하고 이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인도 공산당원인 마헨드라나트 로이와 알게 되면서 인도 공산당의 창설에도 기여했다. 보르딘은 로이에게 소련에 가서 2차 코민테른 대표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추천했고, 1921년에는 오스만투르크로 가서 터키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빨치산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1922년에는 조지 브라운이란 가명을 쓰며 영국에서 영국 공산당을 조직하는 혁명활동을 전개하다가 1922년 8월에 체포되어 글래스고에서 복역했으면 6개월 후 석방되어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보르딘은 미국, 멕시코, 스페인, 독일, 영국, 터키 등에서 혁명 활동을 후원하여 코민테른의 해외 요원으로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최정예 해외 요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마침 이 때 중화민국의 쑨원은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 등, 제1, 2차 호법 운동 등의 쿠데타 이후 해외 화교의 후원 이 외에도 각종 재정 수입과 자체 군사력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유일하게 자신들을 지원할 만한 국가와 세력을 찾게 되었고 열강 중에 하나인 소련은 그와 맞는 파트너라 판단하여 소련과의 제휴에 집중하게 되었다. 1922년 12월 20일 쑨원은 중국 주재 소련 전권 대표인 아돌프 요페(Адольф Иоффе, 1883~1927)에게 무기, 화기, 기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소련 정부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하게 된다. 그리고 12월 말에 10만 명의 군대로 사천과 감숙에서 외몽골로 진입해 베이징을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게 되면서 무기, 장비, 고문단의 파견을 요청하게 된다. 1923년 2월에도 쑨원은 소련 정부의 원조에 대해 요청했다. 소련 역시 동방 전략의 일환으로 쑨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양자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게다가 중화민국을 어느정도 지원하면 막강한 일본을 상대로 소련 인민이 피를 흘릴 이유도 없게 된다. 여러 문제들을 숙고한 끝에 1923년 3월 소련 정부는 쑨원에게 가능한 모든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하였고, 200만 루블의 현금과 일본제 소총 8천정, 기관총 15정, 대포 4문, 장갑차 2대, 훈련원 1명을 중국의 통일과 민족 독립의 쟁취를 명목으로 파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쑨원은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8월 16일 장개석 등을 소련에 파견하여 3개월 간 소련을 방문하게 했고 1923년 여름부터는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파견되었다. 이에 중화민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최정예 요원이 필요한 스탈린에게 1923년 7월 31일 레프 카라한(Лев Карахан, 1889~1937)에게서 보로딘을 소개 받게 된다. 이에 정치 국원들과의 회의를 통해 8월 2일에 이를 비준하여 보로딘을 쑨원의 정치고문으로 임명하여 파견하게 된다. 이 외에도 보로딘은 베이징 주재 소련 전권대표 카라한과 협조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모스크바와 서신 왕래를 하며 매월 1회 정기적으로 업무 보고를 한다는 것 등을 결정 받고 중국에 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와 코민테른의 대외 정책을 숙지하면서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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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4
  •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해야하는 이유
    나는 반중론자이며 혐중론자다. 중국을 극도로 싫어한다. 비교적 최근까지 나는 러시아, 미국과 함께 중국을 압박하고 각종 규제로 말려 죽이고 싶어했고 그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중국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남아시아에 있으면서, 베트남과 라오스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접하고, 경험해보니 중국의 자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그들의 현실을 보았으며 베트남은 중국과 친중국 국가에 둘러 싸여 있는데도 중국과 대립하면서도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군사적으로는 미국과 협력하면서 한국, 일본, 러시아 등 외교 다변화를 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베트남은 지금 엄청난 위기에 있다. 친중국 성향의 라오스, 크메르 루주를 축출해줬지만 이를 주권 침탈로 생각하는 베트남에 다소 적대적인 캄보디아, 이 캄보디아 또한 친중 국가다. 이들 중국과 중화권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베트남은 마냥 미국에게 의지하지 않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국에 어느 정도 도움을 받고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으로 적절히 견제하면서 그렇다고 마냥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한국, 러시아, 일본, 호주를 친구로 만들고, 멀리 EU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 현상들로 볼 때 우리는 베트남보다 오히려 상황이 훨씬 나은 편이다. 북한과 중국이 위협적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러시아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고 일본과 가까이 있으며 일본을 통해 미국과 혈맹국이다. 사방이 막혀 있는 베트남보다 그래도 일본 쪽에 숨통이 트여 있는 우리가 훨씬 사정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를 경험해보니 이제는 중국을 멀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든 싫든 우리 이웃 국가고, 미국보다 더 빠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의 말 한 마디면 최소 하루는 효력이 유예될 수 있지만 중국의 말 한 마디면 효력 유지는 불과 2시간 안팎인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중국은 멀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균형외교인 것이고 베트남처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등, 적당히 거리 유지해야 하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래서 해외를 나가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 그냥 인터넷으로 방구석에서 검색만 해갖고 깨달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과거 중국의 경우, 사드 하나 가지고 경제 봉쇄론 및 헌한령으로 인해 문화 교류 제한까지 했다. 우리는 중국의 여러 봉쇄조치 및 제재 등에 대해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만약 한반도에 전쟁 난다고 치면 미 함대가 일본이나 오키나와에 올라오는 것보다 중국 함대가 산동 웨이하이에서 올라오는게 거리상으로 더 빠르다. 그러니 중국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미, 중 사이에 균형 외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위기에 있는 국가일수록 더욱 균형을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최근에 반도체 핵심 원자재의 중국 수입 의존도가 전년보다 높아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미세한 회로가 새겨진 실리콘 웨이퍼를 만드는 실리콘의 중국 수입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뿐만 아니다. 각종 전자 기기에 들어가 있는 원자재 부품은 죄다 중국제다. 스마트폰, 노트북, 각종 컴퓨터, TV, 에어컨, 냉장고, 심지어 자동차 부품까지 중국제 아닌게 없다. 원자재의 가격이 저렴하고 거리도 가까워 물류 운송비 또한 타국에 비해 저렴하다. 게다가 중동에서 끌고 오는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도 중국의 영해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있다. 우리 수출품 또한 거대한 함선의 컨테이너를 실어 인천항에서 출발, 중국 영해를 통과한다. 만약 중국이 우리의 원자재 수입을 막고 서해 영해 통과를 불허하면 우리는 삽시간에 석기 시대로 내려 앉을 수 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대책이 있나? 예를 들어 조선 시대 때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균형을 잡지 못해 명나라 편을 들었다가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명, 청 간의 균형외교를 하지 않고 명나라에 편향한 결과가 그것이다. 청나라도 최소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배후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필요이상으로 명나라에 편향하니 청나라 입장에서는 후방 안정을 위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은 화를 당했고, 청나라의 종속국이 되었다. 이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편향외교로 인한 대참사다. 그런데 균형 잡힌 중립외교를 펼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패권국은 없다. 과거 로마도 그러했고, 가까이는 중국 청나라도 대외 정책에 있어 균형외교룰 하는 책봉국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필리핀의 두테르테가 양다리 놓으며 중립외교 한다고 미국이 필리핀에 공격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었다. 필자가 학부 시절 교양과목으로 외교학에 대해 들은바 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oo한 것에 한 해 최소한" 이라는 외교 용어다. 더불어 우리는 미, 중, 러 격돌에 아주 민감한 지역에 존재한 최전선 국가다. 그래서 한국은 가장 현명하게 균형 외교를 해야 하는 나라다. 이렇게 10살짜리 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으면 구제불능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니 배고픈 시절을 까먹게 되고 그러니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하려니 생각도 안 날 것이다. 그저 옛 추억으로만 남을 뿐, 실제로는 그 고생에 대해 완전히 둔감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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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2
  • 복잡한 그리스-마케도니아와의 민족주의, 영토분쟁 이야기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국명문제와 영토문제로 분쟁을 겪다가 2019년에 관계를 개선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는 마케도니아 고대사의 종주권 문제, 역사적 문제까지 함께 동반되고 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이래 그리스와 20년 넘게 이를 두고 갈등을 빚어왔다. 그리고 2019년 국명을 마케도니아에서 북마케도니아로 변경하여 국명 갈등의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현재에도 북마케도니아에서 발행하는 여러 서적들과 일반 북마케도니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들의 명칭을 제우스, 헤라, 아테나, 아르테미스 등의 그리스식 명칭이 아닌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디아나 등 로마식 명칭으로 표기하거나 부르고 있다. 그 정도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에 국호 문제로 충돌하고 있는 그리스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남아있어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 보수우파인 마케도니아 국민통합민주당에서 보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다시 선거의 쟁점으로 띄웠다. 사실 고대 시대부터 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족들이 북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거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 게다가 현 북마케도니아 지역은 그리스인들과 혈통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트라키아인들이 지배했었다. 더불어 도리아인을 융합한 마케도니아가 세력이 점차 강력해짐에 따라 트라키아 주민은 이에 굴복하였고, 알렉산더 대왕 군대 내에서 대다수 기마병을 담당하면서 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1980년 이전까지 그리스나 불가리아 학계에서는 트라키아의 계보에 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트라키아 인이 완전히 정착한 시기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었다. 전체적으로 고고학에 치중되었던 트라키아 연구는 1980년 이후부터 그리스나 로마의 문헌을 통해 본격적인 서지학적 연구가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언어적인 부분을 유추한 결과 인도유럽어 종류를 사용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사카 종족과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것까지 근접할 수 있었다. 그러한 언어적 연구를 통해 인도유럽어족의 주민이라는 것까지 나타났고 과학적인 유전자 분석을 통해 트라키아 인들이 스키타이와 동일 선상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의『역사』에서 언급된 스키타이에 관한 기록, 후일 로마의 타키투스, 요르다네스 등의 기록에서 나타난 스키타이, 사르마트, 훈족에 관한 그들의 유목 생활 기록 등을 볼 때 트라키아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초원 유목 세력과 친연 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부분들 때문에 마케도니아인들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 시기 때도 그리스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스의 신화 중 캔타우루스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전설은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트라키아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고 발칸 지역의 켈트족 중 기마 부족들은 스키타이와 매우 유사하였기에 그들을 캔타우루스의 후예로 여겼을 정도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북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위인으로 받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인이냐, 현재 슬라브인과 혈통이 섞인 북마케도니아 측 위인이냐의 역사 논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후 불가르족이 현 불가리아에 정착하여 슬라브인들을 통치했고 그 슬라브인들이 현 북마케도니아에 밀려 들어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인의 국가가 된다. 게다가 그리스와 혼혈한 비잔틴 제국의 시민들이 북마케도니아에 들어와 슬라브인과 혼혈해 버리니 이들은 불가리아 제국, 비잔틴 제국에 교대로 지배를 받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고 19세기에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서 독립하자 북마케도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늦게 벗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세르비아 및 불가리아와 관계 갖게 된다. 1944년 8월 2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비밀리에 민주연방 마케도니아(Демократска Федерална Македонија)를 선포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1990년 정치 체제가 의원내각제로 이행된 뒤, 1991년 나라 이름이 공식적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Македонија)으로 바뀌면서 나라가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타 다른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에 비해 가장 낙후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와 같이 온전한 남슬라브도 아니었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이탈리아계 슬라브인도 아닌 사실상 그리스계 슬라브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이 전쟁을 겪은 반면 마케도니아는 평화적으로 독립했으며 집단서방 또한 마케도니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마케도니아는 매우 안전했고 내전과 더불어 나토의 공습을 받아 피폐해진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에 비해 마케도니아는 내전의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인이 불가리아인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면서 독립 이후 수차례 마케도니아 병합을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한 것은 터키와 그리스였다. 그리스는 누구보다도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지만 불가리아에 병합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와 대립하고 있던 터키 또한 이 부분에서 그리스와 입장이 같았다. 그 이유는 불가리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가 잘 나가면 전통의 원수지간인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이 위협 받을 위기에 놓일 수 있고 그리스 또한 불가리아가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동트라키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동북부, 동트라키아 지역은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와 삼각으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영토 분쟁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특히 마케도니아인과 불가리아인이 주도한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уционерна организација)는 테살로니키와 동트라키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해당 영토에 대한 귀속을 요구하여 재판을 걸었던 이력도 있다. 더불어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남슬라브 계열의 마케도니아인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서부의 알바니아계들을 홀대하고 배척했다. 그러면서 민족 및 지역 간 갈등이 증폭되었고 이로 인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의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내전은 그리스가 비록 종교도 다르고 이민족이나 다름없지만 아알바니아계 무장세력들을 부추기고 지원해 일으킨 내전이라 불가리아의 총리였던 시메온 2세가 마케도니아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나토군이 들어오면서 알바니아계의 반란은 짧은 기간에 막을 내렸다. 현재도 상당수의 알바니아인들 북마케도니아 서쪽 변경에 거주하고 코소보 남쪽까지 걸쳐 거주하는 측으로 합의를 보면서 오늘날까지 함께 살고 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 선언을 할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이 오랜 시간 동안 그리스 북동부의 지방명이자 과거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차용한 명칭이라 주장하며 정식 국가로서의 승인을 거부했다. 실제로 그리스 북동부의 해안 지방은 마케도니아 주(州)로서 오랫동안 그리스가 차지해왔다. 알렉산더 역시 그리스계라 믿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라는 단어의 국제 지명도마저 그리스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독립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공화국 측에서 국명 사용을 포기하지 않자 내륙국인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사용하고 있던 테살로니카 항을 봉쇄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여기에 나토와 EU가 개입하니 그리스는 테살로니키 항구 봉쇄 조치를 해제했다.결국 2018년 6월 12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조란 자에프 마케도니아 공화국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국명을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입장에서는 국민투표도 아닌 여당 총리가 단독으로 결정하여 벌인 일이었기에 야당은 여기에 집중 반발했다. 결국 프레스파 협정(Prespa Agreement)에 서명하면서 이 문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북마케도니아 총선에서도 이 문제는 재언급되었고 이번 대선에서도 사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제1 야당인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우선 대통령부터 바꾸고 5월 8일에 있을 총선에서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특히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세르비아와도 관계를 개선하고 그리스를 비판하여 북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무효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테살로니키가 속해 있는 동트라키아에 대한 영유권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혁신당이 대세를 잡게 된다면 그리스-터키-불가리아를 둘러싼 4개국 간의 영토 분쟁, 그리스와는 역사 논쟁과 국호 문제가 다시 불거져 평지풍파를 일으킨 대단히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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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30
  • 카이사르 갈리아 원정이 로마에 끼친 영향
    당시 갈리아는 갈리아 내부의 수많은 민족들이 서로 연합하여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특히 하이두이 족과 세콰니 족이 가장 강력하였는데 세콰니 족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게르만족과 연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이에 호응한 게르만 족의 일파인 수에비 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라인강을 건너와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그러한 결과로 인해 세콰니 족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는 세콰니 족의 공물에 만족하지 않고 세콰니 족의 영토에 그대로 정착했으며 이곳 수확물의 3분의 1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게르만 족들이 새로 갈리아에 이주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자 세콰니 족조차 게르만 족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끊임없이 게르만 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헬베티 족이 게르만 족에 저항하면서 로마 국경까지 침투하는 등 로마의 입장에서 매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토는 알프스 산맥과 론 강, 그리고 로마 속주와 레누스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때 헬베티 족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오르게토릭스(Orgetorix)는 갈리아 영내로 이주해 새로 정착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러한 제안은 대다수 헬베티족들의 호응을 받게 되었다. 오르게토릭스는 헬베티 족의 지휘를 위임받고 외교를 통해 주변 부족의 협조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당시 갈리아를 양분해서 서로 대립했던 하이두이 족과 세콰니 족 양쪽 모두에게 접근한 오르게토릭스는 하이두이 족에서 가장 인망이 높았던 둠노릭스(Dumnorix)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인척관계를 맺었고 세콰니 족의 유명한 실력자의 아들인 카스티쿠스(Casticus)에게 접근하여 그의 협조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들 갈리아 거대 부족들의 야합은 셋 모두 매우 유명한 정치가임과 동시에 기득권에 도전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수도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1차 삼두정치를 연상시키는 야합이었다. 그러나 오르게토릭스는 당시 헬베티 족의 가장 유력한 귀족이었으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고, 둠노릭스는 자신의 형이 가지고 있는 부족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었으며 카스티쿠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족장에서 퇴진한 뒤 부족장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서로 야합함으로써 각각 서로의 도움으로 부족장의 지위에 오른 뒤 갈리아 전역을 서로 삼분하여 통치하자는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야합은 곧바로 알려지게 되었고 헬베티 족의 오르게토릭스가 가장 먼저 실각하게 된다. 오르게토릭스는 그의 재력을 이용하여 재판의 배심원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죄를 면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헬베티 족의 족장이 무력을 사용해 오르게토릭스를 응징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자 오르게토릭스는 자결했다. 오르게토릭스가 자결했음에도 헬베티 족들은 그가 처음 제안한 갈리아 침략에 대해서는 호평하였으므로 갈리아로의 이주 계획을 계속 추진한다. 이들이 이주할 준비를 마쳤을 때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고 30만이 넘는 대규모의 전력을 갖춘 헬베티 족은 3개월치 식량을 휴대하여 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는 로마 국경을 통과해야 가능했기 때문에 로마의 입장에서 상당한 근심이 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로마 삼두정치의 집정관인 카이사르가 이들을 정벌하여 갈리아 전체를 속주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다른 두 정치인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전장에서 전공이 적었고 크라수스에 비해서 재력이 부족하여 이들에 비해 이렇다할 내세울 것이 없어 권력의 정점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그의 숙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후광으로 집정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었기에 이는 카이사르의 정치 생명에 큰 제약이 되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후광이 권력의 정점에 올려놓았지만 정점이 되었을 때 마리우스의 후광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갈리아 원정은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마리우스의 후광을 벗어나고 정치적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에게는 매우 절실한 원정이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갈리아 원정에 성공하여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고 그러한 갈리아 원정의 성공은 많은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결국 갈리아 원정의 성공과 속주화는 로마에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결국 카이사르의 높아진 인지도에 부담을 느낀 크라수스는 스스로 파르티아 원정을 자처했지만 실패하고 전사했고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머물면서 카이사르가 없는 로마의 모든 정치권 세력들을 장악했다. 폼페이우스와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와 높은 인지도, 강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되었고 이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으로 나타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그의 정치적 1인자가 되는 기본 바탕이 되었고 그 원정으로 인해 임페라토르(Imperator, 황제)의 개념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의 성공은 로마 역사에 있어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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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지혜로운 자와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차이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3차에 걸쳐 삼니움 전쟁을 치르게 된다. B.C 321년, 집정관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Titus Veturius Calvinus)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Spurius Postumius Albinus Caudinus)는 각각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삼니움 족의 영역으로 침공했다. 이에 삼니움 인들은 가이우스 폰티우스(Gaius Pontius)를 지휘관으로 삼고 로마군에 대적했다. 폰티우스는 정면 승부로 로마군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 유인책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그는 먼저 삼니움 병사 10명쯤을 양치기로 변장시킨 뒤 일부러 로마군의 진군로 주변에서 양을 방목하게 했다. 로마군이 평범한 양치기로 여기고 불러다가 삼니움 인들의 동향을 묻자, 그들은 삼니움 인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풀리아(Apolia)의 루케리아(Ruceria)를 포위하고 있다며 답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서둘러 루케리아로 가서 삼니움 족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도로 2개가 아펜니노 산맥에서 루케리아로 이어졌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첫 번째 도로는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에 루케리아까지 가는 것에 많은 시간이 들었다. 카우디움(Caudium)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은 훨씬 짧아 빠른 시일 안에 루케리아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산악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좁은 산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풀이 무성하고 물이 잘 공급되는 평원을 만날 수 있었지만, 평원을 통과하면 루케리아에 이르기까지 좁고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삼니움 군이 도주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로 진격하기로 했다. 로마군은 몇 시간 동안 좁은 길을 강행군한 끝에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워서 휴식을 취한 뒤 행군을 재개했지만, 두 번째 산길을 지나가던 중에 바위 덩어리와 도끼에 베인 나무줄기로 진군로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 때 삼니움 인들이 협곡 위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그 때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파악하고 서둘러 퇴각하려 했지만, 첫 번째 산길마저 막혔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협곡에 갇힌 채 훨씬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삼니움 군에게 둘러싸여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삼니움 군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수많은 로마군을 협곡에 가두어 버리는 작전이 성공한 것에 무척 흥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공격을 시작한다면 로마군이 격렬하게 저항하게 되면서 큰 피해를 볼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굶겨 죽이자니 언제 끝날지 기약하기 어렵고 또 다른 로마군이 구원하러 달려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삼니움인 중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받던 아버지 헤렌니우스 폰티우스(Herennius Pontius)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헤렌니우스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그들 전원을 정중하게 대접한 후 로마로 살려 보내라.” 그러자 삼니움 인들이 “어떻게 잡은 적병들인데 그냥 돌려보냅니까?” 라고 반발하자, 폰티우스는 아버지에게 재차 서신을 보내 다른 방안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죽여라.” 폰티우스는 아버지가 먼저는 모두 살려 보내라고 해놓고 이제는 또 다 죽이라고 권고하니 이상하게 여겨, 아버지를 전장으로 모셔오게 하여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이에 헤렌니우스가 답했다. “우리가 저들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우리가 베푼 선행에 감동할 것이며, 우리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평화와 우호를 확립할 것이다. 반면에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로마는 두 집정관의 군대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힘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여러 세대 동안 전쟁을 미뤄야 할 것이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고심하다가 재차 물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중간의 길을 택하는 건 어떻습니까? 삼니움은 마땅히 받아야 할 승리를 받을 것이며, 로마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패배를 받을 겁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가 크게 화를 내며 답했다. “그것은 친구를 구하지도 않고 적을 제거하지도 않는 짓이다. 로마인들은 패배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전령을 로마군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로마군은 프레겔라스(Pregelas)를 비롯한 삼니움의 영역에 세워진 모든 식민도시에서 철수해야 하며, 병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튜니카(Tunica)만 입은 채 멍에 하단으로 기어가라는 것이었다. 두 집정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 장병들은 삼니움 전사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로마 병사들은 가차 없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치욕을 겪고 로마는 다시 칼을 갈았다. 결국 로마는 삼니움 족을 정복하고 전쟁을 승리를 마무리했으며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삼니움 족의 남성의 씨를 말렸다. 가이우스 폰티우스(Gaius Pontius)가 자신의 아버지인 헤렌니우스의 충고를 따랐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완전히 죽여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고 좋은 대우를 해줘 친구를 해주는 것도 아닌, 모욕을 주는 것은 상대에게 뿌리 깊은 원한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면 분명히 칼을 갈게 된다. 영화 <친구>에서도 유오성이 열연한 준석이가 상택이에게 한 말이 있다. "친구야. 앞으로 누구를 조질 일이 있으면 상대를 용서하여 친구로 만들던가, 아니면 보기만 해도 오줌 지릴 정도로 조져놔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해보자고 안 달려든다." 이게 인간 사회만 그런게 아니다. 미래를 보며 설계하는 지혜로운 자와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차이는 국가의 존망을 가르게 된다. 그리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세 관련 지혜이기도 하고 인류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보며 설계하는 지혜로운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는 눈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삼니움 족은 그런 현명한 자가 있기라도 했지만 한국은 삼니움 족보다도 못하다.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만 있을 뿐, 주변에는 어리석은 지휘관에게 박수 쳐주는 어리석은 원숭이들만 득실거린다. 우리의 미래는 그래서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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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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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소보의 國父이자 독립의 상징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 미트로비차의 영웅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와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 그리고 알바니아 이야기
    1944년 프리슈티나에서 출생한 루고바는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거친 뒤 코소보의 프리슈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서를 통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신장과 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알바니아계 코소보 인들의 國父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주창해 온 코소보 해방군 세력의 극단주의 노선을 가진 코소보 알바니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코소바 독립 노동 조합 연합(BSPK)의 회장인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와는 달리 루고바는 평화주의적 노선의 기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고바는 세르비아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협상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코소보 역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역할 덕에 "조국의 아버지", "발칸의 간디"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코소바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코소보의 대통령을 지냈다. 1989년 민주동맹(LDK)을 창당했으며,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90%의 지지를 얻어 평화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예비 내각을 구성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교육, 복지제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반면 메헤 우카는 알바니아 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였으며 코소보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지만 그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아김 하이리지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수호했던 인물로 유고슬라비아 산하에 있을 때부터 알바니아계 코소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해왔었다. 그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오그라드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과격했던만큼 아김 하이리지나 메헤 우카의 최후는 좋지 못했다. 메헤 우카는 1996년 12월 29일 미트로비차 지방의 루슈테 마을에서 세르비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아김 하이리지는 코소보 전쟁 중에 1999년 3월 24일 미트로비차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의해 어머니 나즈미에(Nazmie)와 12세 아들 일리르(Ilir)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살해된 다른 저명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과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 판명되어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 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 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이후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 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 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이후 KFOR이 코소보에 들어온다. 코소보 전쟁 이후 코소보의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국제사회가 결성한 국제군이다. 1999년 6월 10일 UN은 전쟁 난민 귀환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결의안 1244를 통해 나토의 지휘 하에 이 군대를 구성하도록 요구했다. 군대의 지휘 본부는 코소보의 수도에 위치해 있다. 1999년에 조직한 KFOR 군단은 40개 국의 부대와 50,000명의 군사력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 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 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 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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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 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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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8
  • 카프카스인들과 조지아의 기원
    고도로 발전된 철제 기술력들을 기반으로 카프카스인들은 B.C 12~8세기경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흑해 연안과 아르메니아 인근에 자신들의 최초 국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인류 시원과 연결되어 있고, 강력한 기술력을 보유했던 카프카스 인들은 막강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문명에 의해 끊임없이 침탈을 당했기 때문이다. B.C 8세기에는 킴메르가 공격해왔고, 이후 흑해 해안 지대에는 그리스계 민족들이 상륙하여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한 민족들의 공격에 카프카스 인들은 이들의 세력과 혼혈하여 토착민으로 거듭났다. 이들 토착민들을 카르트벨리아 인들이라 불리게 된다. 이들은 콜키스와 이베리아로 나뉘어 카프카스 일대를 지배했다. B,C 7세기에는 스키타이가 공격해왔으며 B.C 6~2세기에는 사르마트와 마케도니아, A.D 1세기에는 로마, 3세기에는 동고트족, 5세기 후반부터 10세기까지는 비잔틴 제국의 침략과 강점을 거쳤다. 고대 시대부터 유라시아 유목 부족들과 고대 슬라브 인들이 모두 카프카스 일대를 공격했고, 강제로 점령하기도 했다. 결국 고대부터 근현대시기까지 조지아와 조지아 인들의 역사는 외부의 강점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지아는 러시아어로는 ‘그루지야(Грузия)’라고 지칭되고 있으며, 조지아어로는 ‘사카르트벨로(Сакартвело)’라고 명명된다. 사카르트벨로는 조지아 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카르트벨리(Kартвелы)와 장소를 뜻하는 접사 ‘사(Cа-)’와 ‘오(-O)’가 결합한 말이다. 결국 사카르트벨로란 ‘카르트벨리가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어에서는 조지아의 국가 명칭을 ‘그루지야(Грузия)’, 조지아 민족을 ‘그루진(Грузин)’이라고 불렀으며,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러시아어 명칭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1389년 사제 이그나티 스몰냐닌(Игнатий Смольнянин)의 팔레스타인 여행기에서 구르지(Гурзи)에 대한 언급되고 있으며 아파나시 니키틴(Afanasi Nikitin)의『삼대양으로의 여행(Хожение за три моря Афанасия Никитина, 1466~1472)』에서 구르지야 땅(Гурзыньская земля)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이후 구르지(Гурзи)라는 용어는 러시아어에서 자모 교체 현상이 발생해서 그루지니(Грузины)로 변경되었다가 전통적으로 국가의 명칭을 뜻하는 러시아어 접미사 ‘이야(-ия)’가 붙어서 ‘그루지야(Грузия)’가 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그루지야는 조지아(Georgia)라고 부르며 일부 국가에서는 ‘게오르기야’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 명칭은 터키어로 그루지야 인을 뜻하는 구르지(Gurdzi) / 규르지(Гюрджи, Gurdzi)에서 차용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참고로 13세기 마르코 폴로는 ‘그루지야’를 조다니(Jorganie)라고 했고, 현대 터키어로는 구레이스탄(Gureista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조지아, 혹은 그루지야 / 게오르기야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여러 학설들이 존재하고 있다. ‘곡물 경작지’를 뜻하는 ‘게오르기야’에서 파생되었다는 학설도 있고, 그리스어로 ‘농부’를 지시하는 ‘게오르고스’에서 유래했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 시대 수많은 사원의 이름으로 사용됐던 ‘성 게오르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고, 조지아를 통치하는 통치자 중 무려 12명이 ‘게오르기’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결과로 ‘게오르기야’가 국명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오늘날 조지아 영토인 이베리아 지역의 영토에 대한 최초 거주는 여러 근거로 볼 때 현 조지아 남동부에 존재하는 드마니시(Dmanisi) 지역의 발굴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약 18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 대한 구석기 유적의 발굴로 나타난다. 이는 후기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된 아슐(Ashul) 문화로 알려진 무스테리안(Musterian) 시기의 것인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은 조지아에서 무수히 많은 동굴과 옥외 유적지들로부터 발굴되었다. 최초의 농경 신석기 시대 거주는 B.C 6000~5000년 사이의 시기로 추정되며 이에 대해 여러 도구기 나타나고 있는데 해당 지역의 흑요석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가축들을 키웠으며 포도를 포함한 작물들을 재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슐라베리-쇼무(Shulaberi-Shomu) 문화로도 알려진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이 문화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소와 양, 돼지와 같은 가축들을 방목하여 목축을 주로 행했으며 포도를 포함한 과수와 밀과 같은 곡류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슐라베리-쇼무(Shulaberi-Shomu) 문화로 알려진 곳에는 카프카스 인들의 대규모 정착을 근거하는 수많은 동굴들은 1960년대부터 발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에 발굴된 동굴들은 동부 조지아의 이미리스-고라(Imiris-Gora) 지역에 주로 분포해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B.C 5000년 시기로 알려졌고 이 동굴들에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집들을 포함한 많은 고대 정착지들이 나타났다. 그 주거지들은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기둥과 굴뚝이 있는 특이한 유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한 형태들과 함께 향후에는 조지아의 주거지들과 다르바지(Darbazi) 형식으로 형성된 건축지들이 발달하였다. B.C 4000~3000년 시기의 동석기(銅石器) 시대 기간 동안으로 놓고 볼 때 조지아와 소아시아는 쿠라-아락세스(Kura-Arakses) 문화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쿠라-아락세스(Kura-Arakses) 문화는 B.C 2000년 시기의 트리알레티(Trialety) 문화로까지 이어진다. 동석기 문화에 속해 있는 동굴들은 베슈타셰니(Beshutasehni)와 오즈니(Ozni) 정착 유적으로도 나타났고 탄소 연대로 밝혀진 연대로는 B.C 4000~3000년 시기의 정착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후에도 아르트빈 지역에 위치한 트살카(Tsarka)의 트리알레티(Trialety) 주(州)에 있는 매장식 무덤이 존재하는데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B.C 2000년의 시기들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 유적들 모두 진보되고 잘 발달된 무덤과 매장 양식이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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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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