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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와 러시아에 정교회가 자리잡은 배경과 러시아의 현군(賢軍) 블라디미르 1세
-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8년 동안 대공의 자리를 둘러싸고 내란이 발생한다. 원래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Yaropolk I)가 즉위하기는 했지만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가 반발하여 키예프를 침략한다. 여기에 막내인 노브고로드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합류함으로써 키예프를 두고 세 형제가 공방전을 벌인다. 실제 키예프 공국의 목적은 지난 1세기 동안의 전쟁 후에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란의 발생과 더불어 비잔틴 제국이 이를 이용하여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를 지원함으로 인해 키예프 공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콘스탄티노플 정교회를 통해 키예프 공국을 서서히 흡수했고 위성 국가로 전락시키고자 하였다. 이어 새로운 키예프 교회의 수장을 파견했고 그들은 그리스어로 설교하는 비잔틴 사제들이었다. 이에 대해 야로포르크 1세는 이와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975년 콘스탄티노플에 사신을 보내 키예프 공국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한편 키예프 교회에 자주성을 부여하는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키예프를 전복시킬 목적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1세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야로포르크 1세는 기독교를 단절해버렸다. 비잔틴 제국은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조종하여 야로포르크 1세를 비난했고 이어 드네프르 강 인근까지 군을 진주시키자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 1세는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의 군대를 교전 끝에 패주시켰다. 형을 추격한 블라디미르 1세는 결국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살해했고 형의 남은 군대를 모두 흡수했다. 이어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를 포위하여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를 고립시켰다. 이어 로마 교황에게 사절단과 함께 115개의 질문을 보내어 서방 교회의 예식으로 기독교를 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블라디미르 1세의 목적은 비잔틴 제국과 로마 카톨릭의 간섭을 막기 위해 키예프 교회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립 속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질문에 대한 교황의 자세한 질문이 두 주교에 의해 전해졌고 그 주교들은 슬라브 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심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은 역시 독립적인 키예프 교회를 거부하였고 이는 양측의 관계를 냉각시켰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1세의 로마를 향한 움직임은 비잔틴 제국을 좀 더 유화적으로 만들어 978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결정 하에 독립적인 동방 정교회로 인정받았다. 이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분열된 후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교회였다. 이러한 가운데 979년 마침내 키예프가 함락되었고 야로포르크 1세는 폐위되었다. 이후 야로포르크 1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귀의하였고 이러한 야로포르크 1세의 이야기는 후일 기독교 문학에 사용되었다. 980년 키예프에 입성하여 대공의 직위를 승계한 블라디미르 1세는 부친인 스비아토슬라프의 업적을 계승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키예프에서 블라디미르 1세는 8년 동안 정쟁으로 인하여 생긴 슬라브 부족들과 제휴하고 각 부족들의 통치권을 총독에게 이양시켰다. 블라디미르 1세는 스비아토슬라프와는 달리 내치의 안정을 먼저 시도했고 이를 통해 동부 슬라브 인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대공에 승계하자마자 외부와의 전쟁을 시작했던 군주라면 블라디미르 1세는 내부의 안정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군주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시대를 거치며 키예프 공국은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도 비견할 만한 위세를 갖추면서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는 러시아 민요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현재 화폐 1 그리브나의 모델로 발탁되었을 정도로 동슬라브 권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 1세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혀 아내를 7명, 첩을 800명이나 두었으며 기독교와 유태교, 이슬람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 통합하는 일에는 광적일 정도의 군인이며 행정가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먼저 8년간의 내란 동안 심각하게 추락한 키예프 대공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986년 군사 원정에 나서 서쪽으로 폴란드를 공격했다. 8년간의 혼란으로 인하여 폴란드에게 함락되었던 갈리치(Galichi)를 탈환했고 987년에는 북방으로 진출하여 리투아니아 왕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는 스웨덴 왕국의 구원군 함께 키예프 군을 방어했으나 키예프의 강력한 기마 전사들로 인하여 두 동맹군은 거의 전멸되었고 블라디미르 1세는 발트 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보했다. 이로써 키예프는 발트 해와 북해로 진출할 수 있는 항구를 개척하게 된다. 그리고 대초원 깊이 들어와 있던 페체네그 인을 공격하여 벨라루스 초원 일대를 장악했다. 이로 인하여 페체네그는 발칸으로 남하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988년에는 폴란드 기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며 리보프(Liviw) 외곽으로 몰아낸 다음 그 경계에 방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했다. 이어 발칸으로 진출하여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자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는 블라디미르 1세에게 제국의 황녀와 결혼을 제의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이를 받아들여 비잔틴 제국의 황녀와 결혼했고 지속적인 교역 및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체코 · 폴란드 · 헝가리 · 불가리아 · 로마 교황 등과의 교류도 넓혀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이로 인하여 언어와 문자의 보급에도 힘쓰고 그리스 문헌도 도입하여 문화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동슬라브는 이념적 통일성을 갖게 되고 대공과 공후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봉건제가 촉진되며 비잔틴 제국 및 유럽 세계와 가까워져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988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 슬라브 인에게 세례를 받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전통 샤머니즘 신앙에 젖어 있던 키예프 공국은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고 키예프 공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그리스 정교 수용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인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르 1세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났다. 먼저 유태교를 숭상하고 있는 하자르 인이 블라디미르를 찾아와서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했다. 이에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유태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가?” 그러자 하자르인 사절들은 이렇게 답하였다. “야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노하시어 그 죗값으로 우리를 이방인들 사이에 분산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죄로 인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블라디미르는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찾을 수 없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 블라디미르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자 동쪽에서 볼가 불가르 인이 왔다. 불가르 인의 대표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내세에서 무함마드가 미녀 70명씩을 주신다.” 라고 말하며 평소 호색적인 블라디미르를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계율에 금주 조항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술은 슬라브 인의 기쁨이다.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로마 교황정과 비잔틴 제국의 교회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블라디미르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할머니인 올가가 957년에 이미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는 등, 기독교가 이미 러시아 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사신을 보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비교하고 분석하도록 했다. 독일에 찾아간 사절들은 로마 교회의 의식을 관찰하고 돌아왔다. 사신은 블라디미르에게 한 보고에서 “아무런 영광도 보지 못했노라.” 라고 말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소피아 대성당에 간 사신은 그 의식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거기가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었나이다.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은 분명 지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나이다.” 블라디미르는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가 관할하는 정교를 선택했다 한다. <러시아연대기>에 담긴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 전래에 대한 의미는 깊다. 당시 이미 동, 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존치했던 두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키예프 공국은 서양 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키예프 공국을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그 선택에는 인접국인 폴란드 · 덴마크 · 노르웨이 · 헝가리 등이 속속 기독교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동양 세계와 많은 부분에서 떨어져 있는 관계로 동양과의 여러 교류를 모색하기보다는 유럽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편이 더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 세계는 대립과 반목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면서 키예프 공국이 사실상 동방 정교의 종주국이 되었고 그 후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 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 사회에서 고립되는 요인을 형성하게 된다. 정교회로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기존의 호색 적이고 절대자로써 생활을 벗어나 신을 두려워하는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블라디미르는 가난한 자를 돕고 죄인에 대한 형벌을 가볍게 했으며 동방 샤머니즘의 토템들도 타파하고 각지에 교회들을 세웠다. 후일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슬라브 부족들의 세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비교적 큰 무리 없이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동방 샤머니즘의 전통이 전해 내려오긴 했으나 정교회가 민간신앙 요소들을 대거 흡수하면서 농민들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한편 슬라브 부족들의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거칠고 다소 투박한 동양 샤머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발견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는 또 슬라브 부족장들에게 정착민의 세계로 소속되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996년 키예프에 첫 정교회 성당인 동정녀 마리아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하여 키예프 공국이 지배하던 영토 곳곳에 많은 성당이 들어섰다. 키예프 공국의 교회는 종교로서의 역할 외에 글자를 가르치고 이른바 동방 샤머니즘 관습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 법률의 역할도 이루어졌다. 또한 키릴 문자의 보급과 더불어 근대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동방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키예프의 군주와 국가에게 나라의 통합을 촉구하고 동시에 비잔틴 제국, 그리고 기독교 세계 전체와의 유대를 강조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러시아 교회는 차츰 중심적인 사회 기구로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정교의 도입과 함께 키예프 공국에는 비잔틴 제국의 문화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 입각하여 성상 숭배에 관한 여러 성물들이 들어왔다. 발칸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로마 문학 · 예술 · 법률 · 풍속 · 관습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키예프 공국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과 회화 분야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기술자와 예술가들이 유입되어 급속도로 발전했다. 11세기 중반에 키예프와 노보고로드, 두 곳에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양식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고 있으며 그 밖에 키예프 근교의 페체르스키(Pecherski) 수도원, 블라디미르의 우스펜스키(Uspenski) 성당과 드미트리(Dmitri) 성당, 블라디미르 근교 넬리(Neli) 강변의 포크로프(Pokrov) 성당도 이 때 만들어졌다. 또한 비잔틴 제국 양식의 프레스코 화와 모자이크 화 부조로 만들어진 성화 상이 유행하여 성당 등 건축물의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했고 비잔틴 제국이 쇠퇴한 뒤 동방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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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와 러시아에 정교회가 자리잡은 배경과 러시아의 현군(賢軍) 블라디미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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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 터키 차낙칼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 그곳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심취해있었던 탐험가인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많은 연구 끝에 발굴에 성공한 곳이다. 그곳은 바로 트로이 유적..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다. 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그리스의 신들이 이 전쟁의 승자에 대해 내기를 걸었을 정도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기록상 10년여 지속되었다고 한다. 정황은 트로이 파리스 왕자가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의 부인인 헬레네를 유괴하여 트로이로 돌아간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그리스는 동맹을 맺어 트로이를 공격했고 그리스 동맹군은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를 중심으로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트로이는 영웅인 핵토르 왕자를 중심으로 그리스 세계와 맞섰다. 그러나 그리스 측의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의 불화가 불거진 사이 트로이는 아시아 지역의 동맹군 파견을 요청하게 되고 이 전쟁은 결국 장기전으로 가면서 아시아 유목민족들도 참전하는 전쟁 양상으로 변해갔다. 결국 전쟁의 결과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군에게 기만술을 사용한 그리스가 승리하였지만 이 전쟁이 사실이라면 그 의미는 유럽을 대표하는 그리스 세계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트로이와의 국제전으로 두 세계의 진정한 패자를 가리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 폴리스 세계가 본격적인 역사의 무대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그리스와 맞대결을 펼친 트로이는 어떤 국가였을까? 인터넷 기록을 찾아보면 트로이의 건설은 B.C 4,000년기 말이라고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B.C 4,000년 말의 지층 및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전부다. 현재 나타난 기층은 B.C 3,000년 경으로 추정된다.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이 도시를 발굴했을 시기인 1870년에는 탄소연대측정이라는 연대 측정 자체가 없었을 때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참조하여 그 연대를 추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도시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보다 후대의 것인 B.C 700년대의 유적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대 측정은 1985년에 진행했고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추정했던 B.C 3~4,000년 연대의 성벽 및 유적, 유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했던 B.C 700년경부터 트로이의 진짜 역사라는 셈이다. 이 시기에 트로이 전쟁이 발생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흔히 트로이 발견 과정을 두고 <일리아스>는 신화적인 서사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근세에 하인리히 슐레이만이라는 상인이 이 책을 읽고는 이것의 실존성을 밝히기 위해서 평생을 걸고 증명에 도전한 결과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이 발견되었다.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리아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된 작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신화는 신화적인 관점으로 봐야하고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과정을 보면, 고고학자 캘버트가 이미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Hisarlık Tepesi)을 답사한 이후 학술 저널에 그곳이 트로이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후원자를 찾고 있었으며, 이 때 슐레이만이 캘버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게 되면서 함께 트로이 유적을 찾아 다닌 것이 맞다. 물론 슐레이만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슐레이만이 주목한 곳은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부나르바시 지역이었다. 그러나 슐레이만이 히사를리크 지역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캘버트의 학설을 들은 이후였다. 그 동안 널리 알려져 있던 슐레이만이 여러 지역을 답사한 끝에 히사를리크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슐레이만 본인이 언급하면서 일리아드의 시가 진실인양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슐레이만은 유적 발굴 과정에서도 트로이 함락의 극적인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조작하려다가 캘버트가 발굴 노트에 발견 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실패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트로이 발굴 이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유물을 사들인 후 자기가 발굴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다 드러난 사건도 비일비재 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면서도 히사를리크 일대를 발굴한 것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굴의 이면에는 그동안 감춰져 있던 사기 행위도 분명 존재했다. 고고학적으로 트로이라는 도시의 존재와 트로이 전쟁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트로이 전쟁은 고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 여겨졌지만 후세에 와서는 신빙성 없는 신화로 치부됐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터키 서북부 지역에서 트로이 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역사적인 사실일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1930년대에는 미국인 블레겐이 보다 정밀한 작업을 통해 트로이 전쟁과 같은 시대로 여겨지는 지층과 유적을 발굴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학자가 트로이 유적 발굴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한 상태다. 트로이에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나 핵토르 같은 영웅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등은 더욱 알기 어렵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썼을 때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이미 500년이나 지난 뒤였다. 따라서 호메로스 이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신화적인 상상력이 덧씌워져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호메로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얘기가 나돈다. 시각장애인에 문맹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일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리스가 목마에 병사들을 숨겨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전설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일리아드'에는 없고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전한 것이다. 일부에선 그리스와 10년간이나 치열한 전쟁을 치른 트로이인들이 그렇게 부주의했을리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도 터키 차낙칼레와 히사를릭 언덕에는 아직 트로이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유적을 두고, 신화적인 부분을 부풀려 역사로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터키는 트로이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고, 실제 역사가 증명된 유적들이 많다. 그럼에도 신화적인 요소인 트로이를 실제 역사처럼 만들고, 홍보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상품성"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보다는 오로지 "상품성"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로 흑자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있는 역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없애는데 골몰하는 자들이 많다.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사기성 넘치게 역사를 상품화 해도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러란 말이냐?" 라는 같잖은 정직함과 정의감, 그러면서 자신들은 옳고 정의로운 일을 했다는 같잖은 소신으로 뭉친 부류들이 많다. 그런 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지난 역사가 부끄러우니 이걸 지적하고 비난하며 그 때부터 이어온 노예사관을 가진 한국인들이라 그런 역사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대로 인해 생긴 노예사관, 노예근성은 당연히 벗어던져야 하고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당시 중국에 머리 숙이며 사대했던 국가가 대한민국 뿐이었나? 주변 베트남, 태국, 미얀마, 대만, 오키나와 (류큐국), 일본, 여진족까지 중국에 사대했고, 사사건건 중국을 침략하고 노략질했던 몽골의 각 민족들도 중국에 머리를 조아릴 때가 있었다. 당시 중국의 연호를 쓰고 책봉을 받았으며, 중국식 달력을 이용하고 사상을 배웠다. 그게 그 때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다. 일본 또한 그 질서에 속한 국가였다.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가 뭐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있는가? 그들은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받으러 가는 일본 사신들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과 교류하기 전에는 역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한국 만의 잘못인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듯이 당시 동아시아에 속한 모든 국가들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갔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과거에 동아시아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노예근성이고,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칭 보수 우파들도 똑같은 노예근성에 있다. 과거 조선 시대 역사라 할지라도 없애는 것에 골몰하지 말고 이런 것은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일본 또한 신사에서 제를 올리고 있고, 전통을 중요시하여 새해마다 마쯔리 축제를 하며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새해 다짐을 한다. 그런데 야스쿠니 제외하고 그걸 욕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건 일본을 부러워 하고 배우라면서 이런 전통 수호는 왜 배우라고 권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신들은 선택적 보수이자 미국과 일본을 떠받들며 당신들의 생명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어줍잖은 선택적 보수인 당신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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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