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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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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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