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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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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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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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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