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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특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특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특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특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인산산맥에 자리 잡음으로써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흉노선우 묵특을 언급한 것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관한 독도 문제에 글이 다시 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반일종족주의>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당시 동호가 구탈의 황무지를 요구해오니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흉노의 묵특선우의 말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독도가 바위 섬일지라도, 돌 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 해도 독도는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엄연한 우리 국토다. 독도가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엄연히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우리 영토가 맞고 일본이 독도를 노리니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원만한 해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토인데 무슨 원만한 해결을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에도 침묵하라는 것이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선진사회로 진보하는 길인가? 전 세계 어느 선진국이 영토 도발에 침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이런 것이 궤변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다른 보수주의 세력에게 자국 영토 분쟁에 침묵하라는 소리를 하면 그들은 뭐라할까? 보수의 기본은 엄연히 국가(Nation)에 있고 그 기본 이념은 국가주의(Statism) 혹은 Nationalism 에 있다. 이념에 치우쳐 기본을 망각하고 국가(Nation)와 국가주의(Statism)가 안된 보수는 매국 이념에 함몰된 사익 이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좌파가 싫고 친일을 주장해도 국가와 국가 간의 부분에 있어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면 더욱 엄한 잣대가 들어가야 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우리의 땅은 묵특선우가 말한 것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라 풀 한 포기도 줄 수 없다고 맞서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우파다. 그것이 아니면 단지 좌파와 맞서기 위해 대척점을 이루는 수준 밖에 안 되는 집단이 된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터키는 흉노의 묵특선우를 위대한 조상이자 위인으로 가르치는 국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박물관에는 흉노 귀족의 상이 있고 터키의 각 지역마다 묵특선우의 흉상이 있다. 제 아무리 쓸모없는 초원의 황무지라도 절대로 다른 나라에 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해 흉노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고 전 세계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훈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영웅 아틸라를 탄생하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뭐 느끼는 것이 없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5-10-27
  • 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12세기 초에 편찬된『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최초의 루시 가문이 중심이 된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건국 배경에 대하여 여러 설화와 같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노르만 인과 슬라브 인의 통합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남하하였고 남쪽의 키예프를 장악하기까지 많은 통합전쟁이 있었다.『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했고 대다수의 북방 슬라브 인들과 루시 가문, 슬레비엔 가문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그가 키예프 지역에서 왕국을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노르만 인들을 초빙해서 통합 왕국을 세웠다는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 가문의 나라(Country family of the Rus)’가 건국된 것은 사실이나 건국설화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로마노프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사료 재(再)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류리크 왕조와 노르만 인으로 알려진 바랑기아 인들의 설화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어 진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가 엮여 있는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공후는 6세기 말에 나타난 폴리야닌(Poliyanin) 부족의 한 공후로 알려진 키 쉬체크(Kyi Shchek)와 키 코리브(Kyi Khoryv) 형제들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들어와 성을 축조했고 이들 형제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키의 형제들(Kyi of brothers)” 이라는 뜻의 키예프(Kive)로 전해지고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아바르 족과 하자르 제국 등 유목민족들과 유목국가들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반면에 다뉴브 강 유역과 비잔틴 제국 가까이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역으로 비잔틴 제국과 발칸 지역을 공격하는 공방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키예프 주변의 동 슬라브인들은 점점 내부 결속력을 다져갔다. 이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라는 연맹체의 시작이고 이 연맹체는 9세기 초에 이르러 동슬라브 여러 부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 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 인의 당시 남부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 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훈족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 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잔틴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911년 이후, 올레그는 912년 다시 5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크림 반도의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고르로 하여금 하자르 제국을 습격하여 하자르의 남동부 영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의 압박에 세력이 약화된 하자르 인들은 칸과 더불어 몇몇 영주들의 지휘 하에 서부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의 버리고 간 하자르 제국의 영토에는 키예프 공국이 접수하여 관할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자르 제국의 영역은 대부분 대(大) 모라비아 왕국이나 남부 판노니아 공국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건국되며 슬라브 화되거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자르 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하자르 제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968년에 보이는데 이후 하자르 족은 판노니아로 밀려들어온 마자르족에게 동화되거나 페체네그, 킵차크 인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2년 크림반도를 공격에 나선 올레그는 북 카프카스 인근까지 육, 해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전에 항복했던 아바르 족과 불가리아 제국의 포로들을 해군을 앞세워 키예프 공국의 남하를 막았다. 이로 인하여 아바르 인들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북 카프카스에는 아바르 족이라 불려지는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아바르 인들과 불가리아 포로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3세기부터 몽골 인들의 침입 시기부터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게 된다. 올레그는 바다에서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고 아바르 인과 불가리아 인들의 파상 공세로 인하여 해군으로써 크림반도 상륙에 실패했다. 그러자 육군은 크림반도 입구에까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도륙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약탈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크림반도 입구 지역으로 이주시켜 비잔틴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유도했다. 한편 판노니아 지역의 마자르 족은 키예프 공국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키예프 공국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자 올레그는 913년 초 마자르 족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했고 출정 도중 사망했다. 이러한 올레그는 영웅상은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은 불명확해보이나 르네 그루쎄 등의 유라시아 유목사학자들은 이러한 올레그에 대해 카프카스의 비잔틴을 공격했던 영웅이라는 북 카프카스 지역의 설화를 일례로 들어 올레그의 영웅상이 실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Kokovtsov P. S. 는 올레그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을 참칭한 자라고 발표하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와 가까운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Gregoire, H.는 올레그를 슬라브 인이 아닌 다른 민족, 노르만 인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보이며 10세기경 자료들이 상당수가 북유럽과 폴란드의 노르만으로 정의하고 기존의 한자 동맹 출신의 노르만 인들과 분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이들의 언어는 어족부터가 중세 슬라브어와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노르만인이 지배층이고 슬라브인이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올레그가 913년에 사망하자 루리크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올레그의 손에서 키워진 이고르(Igor)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고르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헌과 라틴 문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인생의 절반 정도는 전설적인 올레그에 비하여 이고르는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으로 검증된 보다 실증적인 통치자라고 하겠다. 이고르란 이름은 영어 기준으로 철자가 Igor 로 우크라이나에서는 Igori 라고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노르만 형식의 이름으로 북유럽의 뛰어난 전사를 Igoru 라고 한다. 이는 아스가르드를 지키던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Tore)를 노르웨이에서 바다의 전사라 하여 Igoru 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알려진 노르웨이 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고르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리며 그를 노르웨이계로 추정했다. 그래서 류리크의 유일한 직계 혈통으로 노르만계가 최초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지위를 승계하게 된 것이다. 이고르는 주변의 투르크계, 슬라브계, 아바르 인을 통합하여 이들 족장의 딸과 연속으로 결혼했다. 이는 혈통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혈족 중심의 왕조를 운영하고자 하는 포석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이고르는 페체네그 등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을 키예프 공국에서 최고위 관료의 칭호 겸 동부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칭호인 지기트(Jigit)를 하사했는데 이 지기트는 ‘외로운 늑대’ 혹은 ‘카프카스의 전사’를 뜻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고르는 94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내치를 다지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처럼 우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대(對)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개감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를 위해 러시아 각 평원의 경우 유목경제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에 대해 소탕하면서 내부의 위협을 방지했는데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연도가 각 학계의 연구에 따라 갈리고 있다. 특히 헝가리 학계에서는 970년대로 잡는 반면 러시아 자료는 930년대 초반을 소멸 연대로 잡고 있다. 이고르는 일부 정착세력과 옛 로마인들로부터 농업을 장려했다. 특히 서프랑크 제국의 사절들은 농업적인 부분에 있어 생산력 증대에 관한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 인하여 키예프 공국의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동프랑크 제국의 사절에게는 라틴어를 보급 받음으로 인하여 공식 문서를 라틴어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라틴어 문서들은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로부터 키릴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개종을 신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락하여 로마에서 보내진 비토리오(Vitorio)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고르가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카톨릭 관할구가 생성되었고 이후 헝가리 왕국이 세워지면서 헝가리 카톨릭 관할구에 합병된다. 그리고 이고르는 판노니아를 장악한 마자르 족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르 족과 동맹에 이어 발칸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왕국과 연달아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발칸 지역과 마자르의 문화 받아들였고 반면 카프카스 지방과 비잔틴 제국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3
  • 몽골 민주화의 아버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와 민주주의 몽골 공화국의 탄생
    몽골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4년 후인 1921년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 된 나라가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외몽골의 부족장들이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여 독립했으며, 그 후 러시아 혁명시기에 몽골 인민당이 러시아 백군과 중국 정부의 개입을 배격하고 공산화에 성공했다. 몽골 인민당은 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몽골의 공산정권은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 되었다. 몽골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스탈린 시기,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시기에는 목축업이 집단화되었다. 처이발상 시기 소련에 반대하는 정치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라마불교 승려 등은 숙청되어 사라졌다. 공산정권은 몽골의 고유문자를 폐기하고,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도입시킴으로써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스탈린과 중국 장개석(蔣介石)이 외몽골은 독립시키고, 내몽골은 중국에 귀속하는 것으로 합의해 몽골족은 완전히 분할되었다. 이후 모택동의 중공(中共)은 외몽골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몽골의 공산 정권은 친(親) 소련주의를 고수하여 소련의 위성국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흐후 1984년 8월, 26년 동안 집권한 융자깅 체뎅발(Yumjaagiin Tsedenbal)이 인민 혁명당 총서기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잠빙 바트믕흐(Jambyn Batmönkh)가 1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바트믕흐는 전임자에 비해 비교적 온건적인 노선을 견지했고, 이는 소련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몽골의 개혁-개방은 20대 청년인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로부터 출발한다. 1963년 생인 엘벡도르지는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키예프에서 언론학을 공부했으며, 그 때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 정책을 알게 되었다. 엘벡도르지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글라스노스뜨와 시장개방을 강조하는 뻬레스뜨로이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88년에 귀국한 엘벡도르지는 울란오드(Ulaan Od)라는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인민혁명당의 노선에 거스르는 논조를 펴면 간첩 혐의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엘벡도르지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모으게 된다. 1989년 11월 28일, 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전국청년예술가 대회가 열렸다. 26살인 엘벡도르지는 청중들 앞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 몽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때입니다. 청년들이 할 일은 말로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이고, 글라스노스뜨의 개방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Одоо Монгол Улс Перестройка-г зоригтойгоор хөөцөлдөх цаг болжээ. Залуучуудын хийх ёстой зүйл бол үгээр дэмжихээс гадна үйлдлээр дэмжих явдал юм. Бид хүчээ нэгтгэж чадвал зорилгодоо хүрч чадна. Бидний зорилго бол ардчилал, Гласностын нээлттэй сүнс юм. Энэ зорилгоо хэрэгжүүлэхийн тулд ард түмний сайн дурын байгууллага бий болгох хэрэгтэй.)” 오랜 공산 치하에 젖어온 몽골 사회에서 엘벡도르지는 금기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후환이 두려워진 대회 의장은 엘벡도르지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대회가 끝나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두 명의 동지가 찾아왔으며, 이어 10명이 합세했다. 이들이 몽골민주혁명의 13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가 다니던 신문사에서는 더 이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경우,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벡도르지는 몽골국립대학 강의실에서 비밀리에 동지들을 만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에 대한 학습 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고 반(反) 정부 전단을 제작해 거리에 붙였다. 마침내 1989년 12월 10일 아침, 그들은 수도 울란바토르 청년문화센터 앞에서 최초의 민주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엘벡도르지는 그 자리에서 몽골민주동맹의 창당을 선언했다. 이는 몽골 공산 정권 68년만에 생긴 최초의 야당이다. 그들은 공산정부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채택하고, 자유선거와 경제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러시아 키릴 문자를 폐지하고 고유 몽골문자를 사용할 것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때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의 세계적인 체스 선수 가리 까스빠로브(Гарри Каспаров)가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을 중국에 팔아야 한다(Советскому Союзу следовало продать Монголию Китаю, чтобы преодолеть свои экономические трудности).”고 말했다. 이 체스 선수의 발언은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견해는 물론 아니었지만, 몽골의 민족주의의 발단이 된다. 새해가 되어 1990년 1월 2일, 민주동맹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민주 혁명을 요구했다. 바트믕흐 정부가 이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민주동맹은 보다 공격적으로 바트믕흐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1월 14일, 시위대 1,000명이 울란바토르 레닌박물관 앞에 집결했다. 1월 21일에는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표어로 한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칭기즈칸은 몽골에서는 영웅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침략자로써 아주 치를 떠는 대상이었기에 소비에트 치하에서 칭기즈칸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련 치하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칭기즈칸 탄생 600주년인 1962년에 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 칭기즈칸을 언급했다가 소련에 의해 숙청당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의 시위대는 몽골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반(反) 정부 인사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Хүний нүүртэй социализм)" 내에서 자유로운 선거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대인 몽골인 거의 대부분은 당시에는 읽을 수 없었지만 민족주의적인 몽골 전통문자인 비치크 문자를 사용하면서 몽골식 키릴 문자가 가진 정치 체제를 상징적으로 부정했다. 처음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레닌 박물관 앞 광장으로 집결했으며, 레닌 박물관 앞 광장은 이때부터 울란바토르 자유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음 날인 22일에도 영하 21도의 날씨 속에서도 수흐바타르 광장에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푯말을 들며 소련이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몽골 민족 영웅들을 재발굴하였다. 시위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 죄로 1962년 몽골 인민혁명당에서 축출되었던 정치인 다라민 토모르오치르(Daramin Tomorocir)도 재평가하였다. 여기에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별을 지워버린 국기를 흔들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시위대는 행진, 데모, 단식투쟁, 교사 파업 및 노동자 파업을 일으켰다. 이 시위대는 몽골 도심, 농촌 전반에서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불러나갔다. 이후 1월과 2월 매주마다 주말 시위가 열렸으며, 수도 울란바토르 뿐 아니라 주도 에르데네트와 다르항, 후브스굴 주 무룽에도 열리기 시작한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매일 시위를 열자 1990년 3월 4일 몽골 민주 연합(MDU) 및 기타 3개 개혁 조직은 회동을 열어 정부의 회담 참석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자 시위대는 10만 명까지 불어났다. 1990년 3월 7일 민주연합은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공산당의 사임을 촉구하며 10명이 단식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이들의 뒤를 이어 불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은 시민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3월 11일 정부-시민단체 회담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 의장이었던 잠빙 바트뭉흐는 1990년 3월 9일 정치국을 해산하고 의장에 사임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 내에서는 시위대 진압작전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여 잠빙 바트뭉흐에게 작전 명령을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엄중하게 다루라고 말했다. 이처럼 몽골 민주화 운동은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반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민주동맹 이외에도 다양한 민주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민주동맹과 3개의 단체는 공동집회를 열었다. 이 날 집회에는 약 10만 명이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 민주동맹 소속 10명은 공산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태가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자, 인민혁명당내 강경파는 시위를 진압할 것을 요구하며, 계엄령 선포를 바트뭉흐 총서기에게 요구했다.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이 집에서 제8차 전당대회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남편은 ‘우리 몇 안되는 몽골인들끼리 상대방의 코피를 터트릴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통을 던져 버렸어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요. 평상시에 조용하던 분이 목청을 돋우며 ‘일부 지도부가 나에게 서명을 요구하는데, 내가 다녀오리다’고 말했어요. 그는 오른손에 넥타이를 쥐고 있으면서도 넥타이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곤 식사도,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바트뭉흐는 3월 9일 저녁에 정치국 회의를 열어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계엄령을 막았다. 그는 인민혁명당 정치국을 해체하고, 자신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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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1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친정과 숙청
    차르 즉위년에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발생하면서 차르 체제에 대한 견제 및 이반에 대한 반발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시종관인 아다셰프(Алексей Адашев), 사제 실베스트르(Сильвестр), 대주교 마카리(Макарий) 등의 도브랸들을 측근으로 발탁했으며,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라는 기구를 신설하여 보야르들의 ‘귀족의회’인 두마에 대해 대척점을 마련했고 이들과 대대적으로 대립했다. 1547년에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카이사르의 별칭인 차르를 칭하고, 이후 차르 직위는 모든 루스 대공국 왕에게 공통적으로 불리는 명칭이 되었다. 이후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 제국(Царство Российское)이라고 지칭된다. 이반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써 가진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참조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및 드보랸, 일부 청년 지식인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는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차르로 등극한 첫 해에 발생한 모스크바 대화재는 그 피해가 막심했다. 크레믈린에 소재하던 그의 조부인 이반 3세의 종탑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 흥분한 시민들의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를 화재의 진화 및, 차후 3년간 세금 면제 등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개혁 성향의 측근들과 함께 키예프 13공국들의 공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에 노력했다. 당시 이반의 왕권 강화를 도왔던 13공국 공후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인 메르데예프(Мердеев), 페레야슬라블 공후인 벨로도르프(Беллодорв), 체르니코프 공후인 밀레세예프(Милисеев)였다. 이들은 왕후인 아나스타시야,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마카리 등과 더불어 이반 4세의 최측근으로서 초기 개혁 정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해, 이반은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를 도입하여 귀족들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선출회의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귀족 정권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자신을 배경으로 세력을 갖게 된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키워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어 1547년과 1549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 시성식이 있었다. 그 중 농민 출신들도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러한 농민 출신을 시성한 사실은 러시아의 기독교화 작업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에 의해 체계화되고 통일된 기독교 의식이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정교회로 하여금 귀족들을 견제하는 장치로 활용했고 여기에 대다수 시민인 농민들을 그 세력 하에 두어 수백 년간 뿌리 박혀 있던 귀족의 세력들을 전체적으로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의도였다. 차르로 등극한 1548년 이반 4세는 명망 있는 가문 로마노프 집안의 아나스타샤를 신부로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외국과 외교 동맹을 맺을 생각도 했지만, 이반 4세는 국내 안정과 더불어 그 동안 근간을 이루었던 러시아 귀족들을 배려하여 그와 같은 결정을 했다. 이는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을 달래 반란 발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판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이반 4세는 1549년에 서구식 신분제 의회와 유사하며 프랑스의 삼부화와 유사한 ‘전국 회의’,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 법 제정, 지방 행정 개혁 등 주요 사안을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이들에게 승인을 요청하도록 했다.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한 이반 4세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상인과 도시자유민 등의 ‘제3 신분’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보야르들이 자행한 모욕과 부정부패 등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와 비리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결과, 보야르들은 차르에게 굴복했으며 이반 4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시작한다. 이반은 1550년의 개혁 입법으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중앙으로 대거 귀속시키고, 보야르들이 전권을 행사하던 지방 법정에 지방 드보랸과 자유민들을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토지제도를 개편해 귀족의 토지 세습 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각자의 봉토는 차르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승인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와중에 토지 문제만큼은 보야르와 두마의 저항으로 쉽게 현실화되지 못하였으나, 이반 4세는 빠르게 절대 군주로서의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 이전에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을 중심으로 토지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반 4세의 조부인 이반 3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두려워 이를 방관했을 뿐이다. 그가 귀족들의 세력에 굴복한 것은 몽골-타타르 세력과의 전쟁 중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웨덴이나 폴란드의 외세를 공식적으로 끌어들일까 우려한 행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반 3세와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는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차르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귀족들에게 굴복했으며 그들의 사유 재산을 늘리는 부분에 대해 법적으로는 위배되지만 그들의 반발에 두려워 비공식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550년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 법전의 이름을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라 하였는데 이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는 이미 이반 3세 때 공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의 두마의 세력의 월등히 강해 법전을 만들고도 행하지 못했지만 이반 4세는 수제브니크를 다시 회복시켜 몇 가지 법령을 추가해 공표했다. 그러면서 군대 제도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하면서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은 앞으로 바다의 길이 열릴 것을 전망하고 해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정책이었으며 중앙 권력 강화로 인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집권화가 지속되자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다시 연이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했으며 로스토프에서는 대공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윌리스(Gustav Wilis) 공작의 딸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반은 방화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한편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당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인사들을 체포하여 부패, 뇌물, 탐학,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를 방화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Андрей Курбский), 시종관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 등의 측근들을 이용하여 노브고로드에 군사를 보내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 생각하여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체포하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로스토프 대공을 모스크바의 두마 회의 빙자해 불러들였고 이내 체포하여 처형하고 로스토프로 군사를 보내 대공의 가족들을 모두 참살했다. 1551년에는 이른바 ‘100개 조항 회의’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하고, 중앙 집중식 통일된 정교화 작업을 시행했다. 1552년 10월 이반 4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낳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장남 드미트리는 생후 1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후에 그는 7번째 왕비 마리아 나가야(Мария Нагая)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과 관련이 있다. 1553년 이반 4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눕게 되는데 증상에 대해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이반 4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매우 어리다고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Владимир Старлицкий)를 이반의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 집권 초기의 혹독한 중앙 집권에 반발하고 있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 세력인 드보랸과 중소 상인, 지식인들의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반이 사망하고 난 이후를 도모하게 된다. 그 동안 이반을 충실히 보좌해왔던 아다셰프, 실베스트르였지만 이반의 생각과 이와 같이 달랐던 이유는 이반의 전제 정치에 희생만 강요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반의 편에 서서 그 동안 실권을 누렸던 보야르들의 권위에 반발했지만 이는 그들이 기존의 보야르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이 그 기득권을 장악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이반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쿠데타 모의까지 했지만 아직도 이반의 지지 세력이 강력했고 자신들과 적이었던 보야르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기적적으로 쾌차하여 병세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반은 자신이 믿던 측근들이 자신을 배신함을 알고는 분개했고 이들을 모두 숙청하려 하였지만 대주교 마카리(Macarius)가 이들을 용서할 것을 상소하여 이들이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분기를 누르며 이들을 다시 중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숙청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상황에서 이들은 다시 이반의 생각과 달리하여 끝내 이반과 갈등 관계를 형성했다. 우선 이반의 생각은 자신의 장남인 드미트리를 태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완전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 드미트리는 생후 5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아였기 때문에 그를 태자, 혹은 후계자로 낙점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이 혹시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한 생각이었지만 선출회의의 대표들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드미트리에게 반 강제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한 다음 서약을 하지 않는 자를 불충의 죄로 물어 모두 처형해버렸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이에 대한 충격으로 이반은 다시 한 번 후계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왕궁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서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모스크바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을 명령했다. 또한 이반은 문맹의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들을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 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어서 정복의 주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차르와 선출회의의 입장은 다시 충돌했다. 선출회의는 동방으로 더욱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이반은 서방 공략을 염원하여 서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귀족들이 동방 진출을 원했던 이유는 아직 킵차크 칸국의 잔여 세력들이 건재하고 있고 이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토인 13공후 국들의 안전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외교,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쌓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할 힘을 확보하려 했는데 동방 지역 경략을 늦추고 서방 지역 경략을 강화한 이유 역시,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보야르들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의 킵차크 잔적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서방 원정에도 문제 생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해온 카잔 칸국 정벌에 나서 같은 해 12월에 카잔 칸국을 병합했으며,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했다. 이에 러시아 영내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이반 4세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도는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병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자주 노여워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등 심한 광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이반의 평정심과 자제가 완전히 흔들리게 된 것은 1560년 그가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왕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후의 자리를 지키다 3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 주장하며 더욱 포악해지면서 귀족들을 탄압했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귀족들에게 독살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는 이반이 1558년부터 이어진 귀족들의 정복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주장에 반발한 것에 대해 왕비가 마침 사망하자 귀족들에 혐의를 지우고 자신에게 반대한 것에 대한 복수, 혹은 그 세력마저 완전히 제압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발로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반의 중앙집권화와 전제 정치 확립의 일환으로 그와 같은 정적들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반의 광폭한 인격으로 이어졌으며 이반이 동양에서는 “뇌제(雷帝)”로 번역되는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 광폭 통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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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19
  • 세계 10위의 자원부국이자 잠재력이 높은 몽골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 부국이다. 구리와 석탄 매장량이 각각 세계 2위와 4위 규모일 정도로 지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몰리브덴의 매장량도 세계 11위이며 희토류는 전세계의 16%가 몽골에 묻혀있다. 타반 톨고(Taban Tolgoi)에는 석탄, 오유 톨고이(Oyu Tolgoi)에는 구리와 금 등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진 광산들이 사실상 몽골 경제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몽골 GDP에서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4.8%에 달하고 있다. 광업은 2위 농업의 16.5% 보다 훨씬 높다. 특히 수출에서는 광물 자원 비중이 90%가량으로 절대적이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몽골 정부는 2006년 기존의 광물법을 개정하면서 광산을 전략 광산, 일반 광산, 기타 광산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생산 규모가 GDP의 5%를 넘고, 국가 안보 및 경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15개 광산을 전략 광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전략 광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채굴권의 승인, 투자 보장 계약 심의, 정부 지분율 결정 등에는 국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광산 개발 방식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 광산에 반드시 지분을 보유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몽골의 전략 광산에는 구리, 금, 석탄을 비롯하여 철, 우라늄, 몰리브덴, 인, 아연 등 주요 광물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오유 톨고이 지역은 우문 고비 아이막 항복드 솜(Hangbokd Som)에 위치한 80,000ha 면적의 세계 3대 구리 광산 중 하나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구리, 금 등이 주로 생산되고 있으며, 캐나다계 이반호에 미네스(IVANHOE MINES)사에 의해 탐사 되어, 광업 메이저 회사인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울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가 66%, 몽골 정부 34%의 지분을 소유하는 형태로 2009년에 투자 계약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우르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회사는 다국적 광업기업인 리오 틴토(RIO TINTO)가 50.8% 소유함으로 리오 틴토(RIO TINTO)가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확정, 추정 및 예상 매장량을 모두 합산하여 31.1억 톤의 매장량이 보고되고 있으며, 품위는 Cu 0.98%, Au 0.299g/t으로 나타난다. 노천 광산과 지하 광구로 구분되고 있으며, 현재 노천 광산 채굴만 이루어지고 있다. 지하 광구 리프트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25년부터 지하 광구 본격 생산에 들어가면 연간 순 구리 55만 톤, 금 45만 톤으로 세계 3위 구리 광산이다. 따라서 2020년을 기준으로 한 해 동광석 100만 톤을 채굴하여, 69만 톤 동정광을 수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8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초창기 유년 시절 : 이반 4세의 차르 권력 강화 과정
    이반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Василия III)의 장남으로 탄생했다. 그의 모친은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였는데, 그녀는 바실리 3세의 후비로 들어온 왕녀였고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반 4세의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남슬라브 세르비아인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루스의 귀족 가문인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집안의 장녀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반 4세는 아버지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1530년 8월 태어났는데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가 종래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키예프 대공 집안인 사부로브스키(Сабуровский)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옛 키예프 세력들과 정치적 연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물론 바실리 3세에게는 서자가 몇 명 있었지만 이반은 바실리 3세의 첫 적장자였기 때문에 후일 공후 승계 문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공후들의 반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직책들을 가지고 있던 각 보야르(Боярин)들 사이에 반발이 대단했는데, 이들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대공국의 기능을 상실한 키예프와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키예프의 솔로모니야(Соломония)와 연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던 데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정교회의 비잔틴 십자가와 성모상이 키예프에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경우,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가문이 정교회를 숭상하는 집안이 아닌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러시아정교회의 반대를 억지로 무마하고 재혼한 이유는 아직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옛 대공국을 구성하는 공후들과 보야르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이들에게서 벗어나 강력한 전제정권을 구사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실리 3세의 움직임과 달리 어린 이반 4세는 출생 전부터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불길한 아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고 각 보야르들의 음해성 공격 및 암살 위협도 받았다. 그러한 배경들이 이반 4세의 정신적인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과 옛 키예프 공후들, 각 지방 및 모스크바 대공국 내부의 보야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끊임없이 어린 이반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어 1533년 이반 4세가 3살 되던 해에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발전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이반을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은 모친인 엘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엘레나도 정통 러시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허약했다. 그러한 잦은 정치적인 암투로 인하여 오히려 어린 이반이 유년기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을 학습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실리 3세는 사망하기 전에 어린 두 아들 이반과 유리(Юрий)의 장래를 걱정하며,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그녀의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 공후에게 그들을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 대한 위협 등을 염려하여 왕족 및 보야르 등을 모두 불러 어린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반에게는 형제인 남동생 유리(Юрий)와 여동생 한 명이 있었고 그 밖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서출 형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는 왕권에 전혀 관심 없는 자였다. 그리고 남동생 유리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어 모든 권력적 상황이 이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친의 유언에 의해 이반 4세는 바실리 3세 사망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3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와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모친인 엘레나는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 공후에게 처음에는 많이 의존했다가 이반 옵치나 오볼렌스키(Иван Овчина Оболенский) 공후와의 치정 관계로 인하여 미하일 글린스키와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Андрей Старицкий) 등 일부 보야르들은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를 포섭하여 그를 대공 직위에 올리려 했다가 이 역시 사전에 엘레나와 옵치나 공후에게 발각되었고 미하일 글린스키는 역모 죄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글렌스키야 가문 외에도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 벨스키(Бельский) 가문 등 유력 보야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나는 자신의 친정 측에 원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삼촌 미하일 글렌스키야를 제거하면서 친정과의 연대는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고변을 사건을 일으킨 엘레나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했으며 많은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는 등의 폭정을 펼쳤다. 특히 이반의 삼촌인 유리 이바노비치(Юрий Иванович)는 충성 맹약을 번복했기 때문에 엘레나의 노여움을 사고 투옥되었으며 1536년 처형되었다. 또 다른 삼촌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역시 이반의 대공 지위를 노렸다. 그러자 이는 엘레나에게 발각되어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투옥시키려 했다. 그러자 삼촌 안드레이는 도망치려다가 국경에서 잡혀 1537년 투옥되고, 그 해 11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바실리 3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리투아니아 공국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략해왔다. 루스의 공후들이 리투아니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어린 이반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는 엘레나는 같은 카톨릭 측이라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와 1538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보야르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그녀의 계속되는 실정(失政) 및 폭정과 카톨릭 및 폴란드 이주민들에게 대한 우대, 그리고 리투아니아와의 독단적인 평화 조약 체결 및 옵치나 공후에 대해 과도한 이권을 몰아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그녀의 차에 독을 타 독살했다. 모친인 엘레나가 보야르들과 키예프의 13공후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이반 4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지만, 어리지만 영민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던 그는 이러한 보야르들의 음모로 인해 모친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옵치니 공후가 섭정을 하였으나, 슈이스키 가문의 영수 바실리 슈이스키(Василий Шуйские)는 옵치나 오볼렌스키를 투옥시켰다가 석방시켰고 자객들을 보내어 자는 도중 그의 집에서 살해했다.이 때 경쟁자 가문인 벨스키 가문의 이반 벨스키(Иван Бельский)를 옵치나와의 공모 혐의를 적용하여 숙청했으며 그를 투옥시킨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몇 년 후 이반 벨스키를 석방시켰으나, 세력의 재규합을 우려해 그를 다시 투옥시킨 뒤 살해했다. 이와 같이 옵치니 공후를 축출하고 권력을 확보한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은 각기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블 지역을 영지로 하고 있었던 대 공후들이었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다른 공후들의 협조도 가능했던 막강한 대외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이오아사프(Иоacaв)가 추방된 관계로 인하여 비어있던 총대주교 지위는 막심 그렉(Максим Грек)에게 돌아갔고 막심 그렉은 1538년부터 1547년까지 섭정을 하여 바실리 슈이스키와 공동 통치를 했다. 한편은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이반이 10세 때 그의 유일한 여동생인 엘리자베타가 갑자기 사망했다. 엘리자베타의 경우에는 슈이스키가 독살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유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반은 대공 지위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대적인 보야르들의 늘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대공으로써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며 근처 보야르들의 심한 감시도 함께 받았다. 이 때부터 이반 4세는 두 살 어린 동생 유리와 함께 귀족의 권력 암투 속에서 그들의 양면성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이반 4세의 앞에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한 편지에 의하면 자신이 8세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 당했고 그들이 대공 지위의 이반에게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불운한 소년이 머지않아 폐위되거나 암살될 거라고 여겼지만 러시아 내부의 묘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하여 이반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물론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 공후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의 어린 공후 형제들을 심문한 뒤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왕실 행사가 있는 날로, 이 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한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아직 대공이 건재하고 있다는 대외적인 홍보와 더불어 대공에게 최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 내에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 등을 여과 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매우 포악하게 변모했다.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으며 정무는 각 두마와 보야르들이 관장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권한은 전무했다. 한편 슈이스키 가문 등의 유력 보야르들이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파벌 경쟁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적으로 차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권위를 무시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 두고 강제로 신게 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 이반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높은 성 옥상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키예프 13공후에 속하지 않은 지방 귀족인 드보랸(Дворян)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었지만 이반은 자신의 세력으로 몰래 드보랸(Дворян)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보야르 및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과 친해지면서 자신의 세력을 몰래 강화했으며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이러한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해 두마 회의 당시 크레믈린 궁 주변에 매복시켰다. 크리스마스에 이반은 회의 자리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그를 무시하며 조롱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들 순간적인 명령이라 당황했었지만 이반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죽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대다수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명으로 매복한 보야르와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로 하여금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해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넘겼고 맹견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했다. 이어 두마 회의가 끝나자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 귀족들을 잡아들여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후로 이반에 대해 보야르, 제후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방자하게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령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이 강력하게 성장했음을 파악하고 그에게 친정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친정에 대한 기본적인 통치 관념이 없어서 이를 두려워한 이반은 일단 보론초프(Волончёв)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지만 1546년 이반은 보론초프 가문도 숙청하고 말았다. 지방 귀족인 드보랸들과 지식인, 상인 계층에서는 이반의 아버지 바실리 3세 시기부터 내심 보야르 및 두마 의원, 중앙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오랫동안 원했고, 상인들은 각 지역마다 다른 상법들을 정비하여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의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오랫동안 호의를 보여 왔고 이반 4세 그리고 그가 친정하자마자 그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1545년 이반 4세는 블라디미르에 군사를 내어 실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의 세력들을 제거하도록 명을 내렸고 이들 드보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항쟁했으나 이반의 군사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했다. 블라디미르의 세력들을 제거한 이후, 이반은 1546년 12월 내년에 혼인할 것이고 차르로서,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를 선택,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서적을 통해 대관 의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는 1547년, 교회를 통해 대관식을 치르고 ‘전 러시아의 차르’로 등극했다. 이러한 부분이 실현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린 왕의 통치기에 보야르들의 숫자와 권력이 크게 늘어났기에, 그들끼리 파벌과 다툼이 생겼으므로 보야르가 단결해서 왕권을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귀족 내지 지방 귀족을 의미하는 드보랸들은 보야르의 횡포를 억제해줄 강력한 왕권을 기대했고, 상인들은 러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동일한 상법의 적용을 받는 상권이 탄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반 4세의 차르 즉위를 지지했다. 그리고 17세이던 1547년 6월 말에 벨스키 가문을 정벌하기 위하여 야로슬라블로 군사를 보내 벨스키 가문을 공격해 멸족시켰고 야로슬라블의 대부분 구역을 파괴했다. 1548년 1월부터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서 이반 4세의 내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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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7
  • 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는 국가적 안전을 보증하였다. 이반 뇌제는 코사크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보내 시베리아를 경략하도록 했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코사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치이들은 용병처럼 활약하였으며, 캄차트카, 베링해, 태평양까지 러시아의 국경을 확대하였다. 러시아가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은 코사크 인들 덕택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식민지가 창출되면서, 러시아의 중앙부 농민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국가와 지주의 권위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과감히 이주하거나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베리아의 군대 총독들은 이주하거나 탈출한 농민들을 수비대로 재편성하거나 농업 활동에 종사시켰다. 소련 학자들은 이들이 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고 현재도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왜 아시아로 팽창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농노화가 진행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변방 지대 진출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도 농민들에게 토양을 제공하고, 농촌 경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새로운 땅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뇌제가 시베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베리아산 풍부한 모피는 내외적으로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손상을 오랜 시기동안 받았다고 간주한 러시아는 동방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몽골의 후계 칸국 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16세기에도 변방 유목민족들의 공격으로 러시아는 국경지대에서 방어적인 공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방어적 작전에서 이민족을 향한 공격적 자세로 전면적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시베리아를 경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민족은 총 18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중 105개의 종족이 시베리아에 산다. 워낙 많은 민족들이 있는 관계로 러시아 내 민족학 연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지만 가장 전수조사가 어렵기도 한다. 오히려 민족학 연구자들은 연구할게 워낙 많다는 학문적 산실이 시베리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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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중국 수, 당, 송나라 시대의 강남 개발과 강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 제도들의 도입 및 개편
    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나라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 북중국에서의 상쟁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세력 경쟁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북주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로 인해 다시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변동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북주 내부에서 정권의 교체가 발생하게 된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한족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했다. 이어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 정비에 따라 수나라의 국력은 급속히 강해졌으며, 이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588년에 수 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진(陳)나라를 정복하였다. 수나라에 의한 진(陳)나라의 병합은 당시의 국제질서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세력이 통일되어 그 강력한 힘이 외부로 향할 경우,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88년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수나라 건국 초기에 한 때 수나라와 충돌하던 토욕혼(吐谷渾)은 진(陳)나라의 멸망 소식을 접하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송나라 시기까지 변혁론(変革論)이라는 인식론이 나타난다. 이 변혁론은 중국사에서 755년 안사의 난으로부터 11세기 말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에 이르는 시기까지 단순한 왕조의 교체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역사 인식론이다. 이는 고대에서 중세, 이어 근대까지 이행하는 세계사적 보편 발전 과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변혁론은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혹은 당나라 말기 5대 10국까지를 고대 혹은 중세로 볼 것인가, 혹은 송나라 시대 이후를 중세 혹은 근세로 볼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다. 그 쟁점은 송나라 시대 토지 소유 형태, 전호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와 법적 신분 등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해서는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가 발달하면서 지주 및 전호 관계가 지배적이었음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대토지 소유가 서구 중세의 장원제에 비견되는 일원적 경영이었는지, 혹은 명칭만 장원(莊園)이었을 뿐 실제로는 소규모 영세 토지를 집적한 소농 경영에 불과했는가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송나라 이후 봉건론(封建論), 혹은 중세론(中世論)은 일본의 카토 시게루(加藤繁), 슈토 요시유키(周藤吉之),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등이 주장하였고, 주로 도쿄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도쿄학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당나라 이후 균전제(均田制)가 붕괴되고 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기반으로 장원제가 발달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송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시기의 중국 사회를 봉건 후기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슈토 요시유키는 송나라 시대에 대토지 소유가 발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생산자로서 전호는 토지에 매여 있으면서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강하게 예속된 존재로 간주하였다. 곧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경제적 관계이면서도 경제외적 강제가 포함된 봉건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론(近世論)은 1918년경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주창한 이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에 의해 확고하게 나타났다. 교토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교토학파’들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이후 서양의 중국 사가들이 여기에 가세하였고 한국학계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편이다. 이 사론(史論)은 송나라 시대 군주 독재권이 확립되고 관료의 지위가 고양되었으며 인민들의 사유 재산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크게 진작되는 등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의 전환기에 사회 및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역사적 변화를 근세(近世, The Early Modern Period)로 설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근세론은 전호제(佃戶制)를 근간으로 한 대토지 소유제를 인정하며 이 때 지주와 전호는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는 명목상 장원이지만 실제로는 근세적 자본주의적 경영이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에 더하여 지주와 전호는 봉건적 주종 및 예속 관계가 아닌 순수한 경제적 관계이자, 자유농민과 지주 사이의 자유 계약 관계, 일종의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라고 적극 평가하고 있다. 전호의 거주 이전 제한은 그의 도주나 계약 위반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근세론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까지 토지 소유는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고 자손을 위한 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송나라 이후 토지는 일종의 투자 대상이었으며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거의 순수한 경제적 관계였다. 이는 전제 군주의 독재체제 아래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소유와 촌락 사회 위에서 송나라 시대 근세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만을 근세로 간주하는 논자도 있는 것과 같이, 송나라 이후 중국사 전체를 단일한 근세 사회로 확언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지주와 전호가 순수 경제적 계약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호가 법률상 양민으로서 독립된 경영 주체였지만 지주로부터 이탈이 금지되는 등 신분적으로 지주에 예속되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일한 대토지 소유, 혹은 지주와 전호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강남과 변경 지역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의 자본주의 관점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개념과 같지 않다. 근세 자본주의는 전기(前期)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에 기반을 두었던 유통 경제를 상정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근세 성립기 중국 사회의 선진 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정체성과 표리 관계에 있다. 그는 스승 나이토가 중국 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긍정하는 한계를 보인 것과 맥락을 같이 했다. 고대에서 중세로든, 혹은 중세에서 근세로든 간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교체 시대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송나라 시대 이후의 사회는 삼국 시대에서 당나라 시대까지와 크게 다르며 명나라 및 청나라 시대와 동질성이 더 많이 관찰된다. 결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변혁 문제는 황제 및 관료 지배의 전통과 자작농의 끊임없는 재생산, 거듭된 왕조 말기의 반란 등 중국사에서의 장기 지속적 요소들을 구체적 역사 맥락 위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황제 지배의 성격, 개별 인신적 황제 지배 및 귀족제 하의 황제권, 그리고 전제권이 성립된 사대부 사회의 황제나 관료의 성격, 향거리선(鄕擧里選)으로 충원된 관료,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하 문벌 귀족 사회의 관료, 과거제 하의 사대부 관료, 지배층의 성격인 호족, 문벌 귀족, 사대부 및 신사 등을 둘러싸고 일련의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일례로 후주(後周 : 951~960)의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은 960년 거란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출병하였다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의 동북쪽으로 40리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 정변을 통해 송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 강화된 번진(藩鎭) 체제와 5대 10국의 군벌 체제를 증식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송나라 태조는 당나라 말기 번진의 할거 이래 황제의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병권 및 재정권, 혹은 민정권의 회수에 주력하였다. 그는 특히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금군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특히 인종(仁宗) 시기의 80여 만 명, 병권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권화하고 그 통수권은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그 공정성과 개방성을 넓히는 한편, 황제가 과거의 최종 합격자를 직접 선발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채택하여 과거 합격자들과 군주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였다. 과거제를 발판으로 송나라는 군대와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실권자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는 문신 관료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황제는 권신의 집단화를 억제하기 위해 관료들이 재상의 사저(私邸)를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알금제(謁禁制)와 관리의 출신지 부임을 금하는 회피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강력한 첩보망을 동원하여 황제 권력에 반하는 관료나 군사 지휘권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관료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송나라 시대 근세론을 정치적인 배경을 갖춘 군주 독재 체제설의 토대가 되었다. 재상권과 신권을 축소하는 한편 제도적으로 황제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의 최종 결정권을 황제에 집중시키는 송나라 시대의 독재 군주권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독재 권력을 행사한 진(秦)나라의 시황제, 한(漢) 무제(武帝), 수 양제, 당(唐) 태종(太宗) 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송나라 시대 황제 권력은 당나라의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당나라 말기에서 5대 10국에 새로 등장한 형세호(形勢戶)를 기반으로 나타난 사대부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사대부는 과거를 통하여 황제의 인적 기반인 관료로 진출하여 사대부 문신 관료 체제를 구축하였다. 호족과 문벌 귀족은 가문과 출신에 의해 그 신분이 규정되었던 반면, 사대부는 원칙적으로 출신과 무관하며 자신의 능력, 곧 유교 경전 지식과 문필 능력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사대부의 계층 유동성은 송나라 시대 과거 급제자들 가운데 본인의 앞 3대 이내에 관료를 배출하지 못한 비(非) 관료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 시험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대부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사대부가 사실상 중소 지주 이상의 경제력 보유자 혹은 상인 출신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곧 사대부는 국가 권력에 의한 승인과 경제적 부를 존립 기반으로 지식과 교양을 사회적 특권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세력이었다. 지주로서 사대부는 농업 생산을 매개로 지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부(陳尃)의 <농서(農書)>의 사례와 같이 농서의 간행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남에서는 수리 개발에 적극 개입하였다. 수리 개발은 기본적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에 책임을 지었으나 실제 사업 수행에서 부담은 사대부 등 지역 사회 구성원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 아래 북송 당시 여대균(呂大鈞, 1031~1082)이 섬서 지역에서 향약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교화와 상호 부조를 통하여 지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향약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정비되어 이후 명나라 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주희에 의해 정착된 사창(社倉)은 사대부가 주도하는 지역 사회의 자치적 구휼 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사대부의 활동은 그들의 정치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며,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여 사대부가 황제를 대신하여 천하 통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치자(治者) 의식을 강조하였다. 반면, 천하를 향한 근심은 오직 하늘(天)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황제만의 소관이고, 관료는 천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머무는 피동적 존재라는 인식도 공존하였다. 그래서 관료는 황제 권력과 경쟁학기도 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문치주의는 관료 기구의 비대화를 낳았고 행정과 재정의 효율성을 저해하였다. 송나라 태조의 문치주의는 분권적 절도사 체제를 중앙집권적 문신 관료체제로 전환하여 황제 지배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강력한 유목 국가의 출현에 직면하여 송나라 이들에게 줄곧 고전하였다. 거란 요(遼)나라의 7년에 걸친 전쟁 끝에 1004년 송나라는 요나라에 현 북경과 천진, 산서 등의 16개 주(州)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양도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보내기로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 길지 않은 평화가 찾아온 뒤 1126년에는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어 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이후 고종(高宗)에 의해 남송(南宋)이 재건되었지만, 1279년에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 병합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남송의 문인 사대부들은 송나라를 향한 이상적 충절과 현실 타협의 사이에 갈등하면서 원나라의 질서에 편입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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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뇌부부터 말단 집단까지 포함한 다른 집단들의 연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하고 지휘할 수 있는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수뇌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콜차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 대도시들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보지 못했다. 병력도 적어 한계가 있는데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다보니 강력한 적군의 무력이 더욱 증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의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 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이 피지배계층이라고 무시하며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이자 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코사크와 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대의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를 유도해 투항시키거나 탈영을 유도했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했다. 백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파기되었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뀌어진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발트 해 국가들이 간섭 군과 더불어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중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 이 외에는 카프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리에 의해 7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이 긴 전쟁을 이미 치루었던 차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였던 데다 간섭 군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新韓村)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920년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부 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적군의 트랴피친(Тряпицын)의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볼셰비키 군에게 패배했고, 이 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 국가로 탄생되었다. 마지막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Анатолий Пепеляев)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볼셰비키의 포로가 된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까지 남아있는 외부 간섭 군대인 일본군도 1924년에는 완젆;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며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이에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들에 괴뢰 국가들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 행위에 영토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것에 급급하여 그러한 비어진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도 했으나 백군과 협동으로 인해 파르티잔들을 진압했고, 자국의 군대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反)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러자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측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1920년 반(反) 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인해 붕괴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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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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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특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특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특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특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인산산맥에 자리 잡음으로써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흉노선우 묵특을 언급한 것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관한 독도 문제에 글이 다시 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반일종족주의>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당시 동호가 구탈의 황무지를 요구해오니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흉노의 묵특선우의 말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독도가 바위 섬일지라도, 돌 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 해도 독도는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엄연한 우리 국토다. 독도가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엄연히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우리 영토가 맞고 일본이 독도를 노리니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원만한 해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토인데 무슨 원만한 해결을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에도 침묵하라는 것이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선진사회로 진보하는 길인가? 전 세계 어느 선진국이 영토 도발에 침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이런 것이 궤변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다른 보수주의 세력에게 자국 영토 분쟁에 침묵하라는 소리를 하면 그들은 뭐라할까? 보수의 기본은 엄연히 국가(Nation)에 있고 그 기본 이념은 국가주의(Statism) 혹은 Nationalism 에 있다. 이념에 치우쳐 기본을 망각하고 국가(Nation)와 국가주의(Statism)가 안된 보수는 매국 이념에 함몰된 사익 이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좌파가 싫고 친일을 주장해도 국가와 국가 간의 부분에 있어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면 더욱 엄한 잣대가 들어가야 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우리의 땅은 묵특선우가 말한 것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라 풀 한 포기도 줄 수 없다고 맞서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우파다. 그것이 아니면 단지 좌파와 맞서기 위해 대척점을 이루는 수준 밖에 안 되는 집단이 된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터키는 흉노의 묵특선우를 위대한 조상이자 위인으로 가르치는 국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박물관에는 흉노 귀족의 상이 있고 터키의 각 지역마다 묵특선우의 흉상이 있다. 제 아무리 쓸모없는 초원의 황무지라도 절대로 다른 나라에 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해 흉노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고 전 세계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훈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영웅 아틸라를 탄생하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뭐 느끼는 것이 없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5-10-27
  • 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12세기 초에 편찬된『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최초의 루시 가문이 중심이 된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건국 배경에 대하여 여러 설화와 같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노르만 인과 슬라브 인의 통합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남하하였고 남쪽의 키예프를 장악하기까지 많은 통합전쟁이 있었다.『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했고 대다수의 북방 슬라브 인들과 루시 가문, 슬레비엔 가문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그가 키예프 지역에서 왕국을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노르만 인들을 초빙해서 통합 왕국을 세웠다는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 가문의 나라(Country family of the Rus)’가 건국된 것은 사실이나 건국설화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로마노프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사료 재(再)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류리크 왕조와 노르만 인으로 알려진 바랑기아 인들의 설화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어 진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가 엮여 있는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공후는 6세기 말에 나타난 폴리야닌(Poliyanin) 부족의 한 공후로 알려진 키 쉬체크(Kyi Shchek)와 키 코리브(Kyi Khoryv) 형제들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들어와 성을 축조했고 이들 형제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키의 형제들(Kyi of brothers)” 이라는 뜻의 키예프(Kive)로 전해지고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아바르 족과 하자르 제국 등 유목민족들과 유목국가들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반면에 다뉴브 강 유역과 비잔틴 제국 가까이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역으로 비잔틴 제국과 발칸 지역을 공격하는 공방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키예프 주변의 동 슬라브인들은 점점 내부 결속력을 다져갔다. 이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라는 연맹체의 시작이고 이 연맹체는 9세기 초에 이르러 동슬라브 여러 부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 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 인의 당시 남부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 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훈족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 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잔틴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911년 이후, 올레그는 912년 다시 5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크림 반도의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고르로 하여금 하자르 제국을 습격하여 하자르의 남동부 영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의 압박에 세력이 약화된 하자르 인들은 칸과 더불어 몇몇 영주들의 지휘 하에 서부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의 버리고 간 하자르 제국의 영토에는 키예프 공국이 접수하여 관할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자르 제국의 영역은 대부분 대(大) 모라비아 왕국이나 남부 판노니아 공국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건국되며 슬라브 화되거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자르 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하자르 제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968년에 보이는데 이후 하자르 족은 판노니아로 밀려들어온 마자르족에게 동화되거나 페체네그, 킵차크 인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2년 크림반도를 공격에 나선 올레그는 북 카프카스 인근까지 육, 해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전에 항복했던 아바르 족과 불가리아 제국의 포로들을 해군을 앞세워 키예프 공국의 남하를 막았다. 이로 인하여 아바르 인들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북 카프카스에는 아바르 족이라 불려지는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아바르 인들과 불가리아 포로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3세기부터 몽골 인들의 침입 시기부터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게 된다. 올레그는 바다에서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고 아바르 인과 불가리아 인들의 파상 공세로 인하여 해군으로써 크림반도 상륙에 실패했다. 그러자 육군은 크림반도 입구에까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도륙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약탈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크림반도 입구 지역으로 이주시켜 비잔틴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유도했다. 한편 판노니아 지역의 마자르 족은 키예프 공국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키예프 공국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자 올레그는 913년 초 마자르 족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했고 출정 도중 사망했다. 이러한 올레그는 영웅상은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은 불명확해보이나 르네 그루쎄 등의 유라시아 유목사학자들은 이러한 올레그에 대해 카프카스의 비잔틴을 공격했던 영웅이라는 북 카프카스 지역의 설화를 일례로 들어 올레그의 영웅상이 실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Kokovtsov P. S. 는 올레그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을 참칭한 자라고 발표하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와 가까운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Gregoire, H.는 올레그를 슬라브 인이 아닌 다른 민족, 노르만 인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보이며 10세기경 자료들이 상당수가 북유럽과 폴란드의 노르만으로 정의하고 기존의 한자 동맹 출신의 노르만 인들과 분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이들의 언어는 어족부터가 중세 슬라브어와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노르만인이 지배층이고 슬라브인이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올레그가 913년에 사망하자 루리크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올레그의 손에서 키워진 이고르(Igor)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고르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헌과 라틴 문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인생의 절반 정도는 전설적인 올레그에 비하여 이고르는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으로 검증된 보다 실증적인 통치자라고 하겠다. 이고르란 이름은 영어 기준으로 철자가 Igor 로 우크라이나에서는 Igori 라고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노르만 형식의 이름으로 북유럽의 뛰어난 전사를 Igoru 라고 한다. 이는 아스가르드를 지키던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Tore)를 노르웨이에서 바다의 전사라 하여 Igoru 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알려진 노르웨이 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고르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리며 그를 노르웨이계로 추정했다. 그래서 류리크의 유일한 직계 혈통으로 노르만계가 최초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지위를 승계하게 된 것이다. 이고르는 주변의 투르크계, 슬라브계, 아바르 인을 통합하여 이들 족장의 딸과 연속으로 결혼했다. 이는 혈통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혈족 중심의 왕조를 운영하고자 하는 포석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이고르는 페체네그 등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을 키예프 공국에서 최고위 관료의 칭호 겸 동부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칭호인 지기트(Jigit)를 하사했는데 이 지기트는 ‘외로운 늑대’ 혹은 ‘카프카스의 전사’를 뜻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고르는 94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내치를 다지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처럼 우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대(對)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개감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를 위해 러시아 각 평원의 경우 유목경제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에 대해 소탕하면서 내부의 위협을 방지했는데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연도가 각 학계의 연구에 따라 갈리고 있다. 특히 헝가리 학계에서는 970년대로 잡는 반면 러시아 자료는 930년대 초반을 소멸 연대로 잡고 있다. 이고르는 일부 정착세력과 옛 로마인들로부터 농업을 장려했다. 특히 서프랑크 제국의 사절들은 농업적인 부분에 있어 생산력 증대에 관한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 인하여 키예프 공국의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동프랑크 제국의 사절에게는 라틴어를 보급 받음으로 인하여 공식 문서를 라틴어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라틴어 문서들은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로부터 키릴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개종을 신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락하여 로마에서 보내진 비토리오(Vitorio)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고르가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카톨릭 관할구가 생성되었고 이후 헝가리 왕국이 세워지면서 헝가리 카톨릭 관할구에 합병된다. 그리고 이고르는 판노니아를 장악한 마자르 족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르 족과 동맹에 이어 발칸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왕국과 연달아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발칸 지역과 마자르의 문화 받아들였고 반면 카프카스 지방과 비잔틴 제국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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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친정과 숙청
    차르 즉위년에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발생하면서 차르 체제에 대한 견제 및 이반에 대한 반발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시종관인 아다셰프(Алексей Адашев), 사제 실베스트르(Сильвестр), 대주교 마카리(Макарий) 등의 도브랸들을 측근으로 발탁했으며,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라는 기구를 신설하여 보야르들의 ‘귀족의회’인 두마에 대해 대척점을 마련했고 이들과 대대적으로 대립했다. 1547년에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카이사르의 별칭인 차르를 칭하고, 이후 차르 직위는 모든 루스 대공국 왕에게 공통적으로 불리는 명칭이 되었다. 이후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 제국(Царство Российское)이라고 지칭된다. 이반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써 가진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참조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및 드보랸, 일부 청년 지식인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는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차르로 등극한 첫 해에 발생한 모스크바 대화재는 그 피해가 막심했다. 크레믈린에 소재하던 그의 조부인 이반 3세의 종탑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 흥분한 시민들의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를 화재의 진화 및, 차후 3년간 세금 면제 등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개혁 성향의 측근들과 함께 키예프 13공국들의 공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에 노력했다. 당시 이반의 왕권 강화를 도왔던 13공국 공후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인 메르데예프(Мердеев), 페레야슬라블 공후인 벨로도르프(Беллодорв), 체르니코프 공후인 밀레세예프(Милисеев)였다. 이들은 왕후인 아나스타시야,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마카리 등과 더불어 이반 4세의 최측근으로서 초기 개혁 정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해, 이반은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를 도입하여 귀족들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선출회의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귀족 정권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자신을 배경으로 세력을 갖게 된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키워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어 1547년과 1549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 시성식이 있었다. 그 중 농민 출신들도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러한 농민 출신을 시성한 사실은 러시아의 기독교화 작업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에 의해 체계화되고 통일된 기독교 의식이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정교회로 하여금 귀족들을 견제하는 장치로 활용했고 여기에 대다수 시민인 농민들을 그 세력 하에 두어 수백 년간 뿌리 박혀 있던 귀족의 세력들을 전체적으로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의도였다. 차르로 등극한 1548년 이반 4세는 명망 있는 가문 로마노프 집안의 아나스타샤를 신부로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외국과 외교 동맹을 맺을 생각도 했지만, 이반 4세는 국내 안정과 더불어 그 동안 근간을 이루었던 러시아 귀족들을 배려하여 그와 같은 결정을 했다. 이는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을 달래 반란 발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판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이반 4세는 1549년에 서구식 신분제 의회와 유사하며 프랑스의 삼부화와 유사한 ‘전국 회의’,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 법 제정, 지방 행정 개혁 등 주요 사안을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이들에게 승인을 요청하도록 했다.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한 이반 4세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상인과 도시자유민 등의 ‘제3 신분’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보야르들이 자행한 모욕과 부정부패 등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와 비리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결과, 보야르들은 차르에게 굴복했으며 이반 4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시작한다. 이반은 1550년의 개혁 입법으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중앙으로 대거 귀속시키고, 보야르들이 전권을 행사하던 지방 법정에 지방 드보랸과 자유민들을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토지제도를 개편해 귀족의 토지 세습 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각자의 봉토는 차르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승인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와중에 토지 문제만큼은 보야르와 두마의 저항으로 쉽게 현실화되지 못하였으나, 이반 4세는 빠르게 절대 군주로서의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 이전에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을 중심으로 토지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반 4세의 조부인 이반 3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두려워 이를 방관했을 뿐이다. 그가 귀족들의 세력에 굴복한 것은 몽골-타타르 세력과의 전쟁 중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웨덴이나 폴란드의 외세를 공식적으로 끌어들일까 우려한 행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반 3세와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는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차르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귀족들에게 굴복했으며 그들의 사유 재산을 늘리는 부분에 대해 법적으로는 위배되지만 그들의 반발에 두려워 비공식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550년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 법전의 이름을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라 하였는데 이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는 이미 이반 3세 때 공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의 두마의 세력의 월등히 강해 법전을 만들고도 행하지 못했지만 이반 4세는 수제브니크를 다시 회복시켜 몇 가지 법령을 추가해 공표했다. 그러면서 군대 제도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하면서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은 앞으로 바다의 길이 열릴 것을 전망하고 해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정책이었으며 중앙 권력 강화로 인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집권화가 지속되자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다시 연이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했으며 로스토프에서는 대공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윌리스(Gustav Wilis) 공작의 딸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반은 방화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한편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당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인사들을 체포하여 부패, 뇌물, 탐학,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를 방화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Андрей Курбский), 시종관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 등의 측근들을 이용하여 노브고로드에 군사를 보내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 생각하여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체포하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로스토프 대공을 모스크바의 두마 회의 빙자해 불러들였고 이내 체포하여 처형하고 로스토프로 군사를 보내 대공의 가족들을 모두 참살했다. 1551년에는 이른바 ‘100개 조항 회의’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하고, 중앙 집중식 통일된 정교화 작업을 시행했다. 1552년 10월 이반 4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낳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장남 드미트리는 생후 1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후에 그는 7번째 왕비 마리아 나가야(Мария Нагая)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과 관련이 있다. 1553년 이반 4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눕게 되는데 증상에 대해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이반 4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매우 어리다고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Владимир Старлицкий)를 이반의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 집권 초기의 혹독한 중앙 집권에 반발하고 있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 세력인 드보랸과 중소 상인, 지식인들의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반이 사망하고 난 이후를 도모하게 된다. 그 동안 이반을 충실히 보좌해왔던 아다셰프, 실베스트르였지만 이반의 생각과 이와 같이 달랐던 이유는 이반의 전제 정치에 희생만 강요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반의 편에 서서 그 동안 실권을 누렸던 보야르들의 권위에 반발했지만 이는 그들이 기존의 보야르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이 그 기득권을 장악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이반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쿠데타 모의까지 했지만 아직도 이반의 지지 세력이 강력했고 자신들과 적이었던 보야르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기적적으로 쾌차하여 병세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반은 자신이 믿던 측근들이 자신을 배신함을 알고는 분개했고 이들을 모두 숙청하려 하였지만 대주교 마카리(Macarius)가 이들을 용서할 것을 상소하여 이들이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분기를 누르며 이들을 다시 중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숙청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상황에서 이들은 다시 이반의 생각과 달리하여 끝내 이반과 갈등 관계를 형성했다. 우선 이반의 생각은 자신의 장남인 드미트리를 태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완전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 드미트리는 생후 5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아였기 때문에 그를 태자, 혹은 후계자로 낙점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이 혹시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한 생각이었지만 선출회의의 대표들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드미트리에게 반 강제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한 다음 서약을 하지 않는 자를 불충의 죄로 물어 모두 처형해버렸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이에 대한 충격으로 이반은 다시 한 번 후계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왕궁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서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모스크바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을 명령했다. 또한 이반은 문맹의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들을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 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어서 정복의 주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차르와 선출회의의 입장은 다시 충돌했다. 선출회의는 동방으로 더욱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이반은 서방 공략을 염원하여 서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귀족들이 동방 진출을 원했던 이유는 아직 킵차크 칸국의 잔여 세력들이 건재하고 있고 이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토인 13공후 국들의 안전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외교,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쌓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할 힘을 확보하려 했는데 동방 지역 경략을 늦추고 서방 지역 경략을 강화한 이유 역시,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보야르들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의 킵차크 잔적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서방 원정에도 문제 생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해온 카잔 칸국 정벌에 나서 같은 해 12월에 카잔 칸국을 병합했으며,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했다. 이에 러시아 영내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이반 4세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도는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병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자주 노여워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등 심한 광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이반의 평정심과 자제가 완전히 흔들리게 된 것은 1560년 그가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왕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후의 자리를 지키다 3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 주장하며 더욱 포악해지면서 귀족들을 탄압했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귀족들에게 독살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는 이반이 1558년부터 이어진 귀족들의 정복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주장에 반발한 것에 대해 왕비가 마침 사망하자 귀족들에 혐의를 지우고 자신에게 반대한 것에 대한 복수, 혹은 그 세력마저 완전히 제압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발로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반의 중앙집권화와 전제 정치 확립의 일환으로 그와 같은 정적들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반의 광폭한 인격으로 이어졌으며 이반이 동양에서는 “뇌제(雷帝)”로 번역되는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 광폭 통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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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9
  • 세계 10위의 자원부국이자 잠재력이 높은 몽골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 부국이다. 구리와 석탄 매장량이 각각 세계 2위와 4위 규모일 정도로 지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몰리브덴의 매장량도 세계 11위이며 희토류는 전세계의 16%가 몽골에 묻혀있다. 타반 톨고(Taban Tolgoi)에는 석탄, 오유 톨고이(Oyu Tolgoi)에는 구리와 금 등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진 광산들이 사실상 몽골 경제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몽골 GDP에서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4.8%에 달하고 있다. 광업은 2위 농업의 16.5% 보다 훨씬 높다. 특히 수출에서는 광물 자원 비중이 90%가량으로 절대적이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몽골 정부는 2006년 기존의 광물법을 개정하면서 광산을 전략 광산, 일반 광산, 기타 광산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생산 규모가 GDP의 5%를 넘고, 국가 안보 및 경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15개 광산을 전략 광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전략 광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채굴권의 승인, 투자 보장 계약 심의, 정부 지분율 결정 등에는 국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광산 개발 방식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 광산에 반드시 지분을 보유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몽골의 전략 광산에는 구리, 금, 석탄을 비롯하여 철, 우라늄, 몰리브덴, 인, 아연 등 주요 광물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오유 톨고이 지역은 우문 고비 아이막 항복드 솜(Hangbokd Som)에 위치한 80,000ha 면적의 세계 3대 구리 광산 중 하나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구리, 금 등이 주로 생산되고 있으며, 캐나다계 이반호에 미네스(IVANHOE MINES)사에 의해 탐사 되어, 광업 메이저 회사인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울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가 66%, 몽골 정부 34%의 지분을 소유하는 형태로 2009년에 투자 계약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우르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회사는 다국적 광업기업인 리오 틴토(RIO TINTO)가 50.8% 소유함으로 리오 틴토(RIO TINTO)가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확정, 추정 및 예상 매장량을 모두 합산하여 31.1억 톤의 매장량이 보고되고 있으며, 품위는 Cu 0.98%, Au 0.299g/t으로 나타난다. 노천 광산과 지하 광구로 구분되고 있으며, 현재 노천 광산 채굴만 이루어지고 있다. 지하 광구 리프트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25년부터 지하 광구 본격 생산에 들어가면 연간 순 구리 55만 톤, 금 45만 톤으로 세계 3위 구리 광산이다. 따라서 2020년을 기준으로 한 해 동광석 100만 톤을 채굴하여, 69만 톤 동정광을 수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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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8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초창기 유년 시절 : 이반 4세의 차르 권력 강화 과정
    이반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Василия III)의 장남으로 탄생했다. 그의 모친은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였는데, 그녀는 바실리 3세의 후비로 들어온 왕녀였고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반 4세의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남슬라브 세르비아인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루스의 귀족 가문인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집안의 장녀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반 4세는 아버지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1530년 8월 태어났는데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가 종래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키예프 대공 집안인 사부로브스키(Сабуровский)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옛 키예프 세력들과 정치적 연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물론 바실리 3세에게는 서자가 몇 명 있었지만 이반은 바실리 3세의 첫 적장자였기 때문에 후일 공후 승계 문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공후들의 반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직책들을 가지고 있던 각 보야르(Боярин)들 사이에 반발이 대단했는데, 이들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대공국의 기능을 상실한 키예프와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키예프의 솔로모니야(Соломония)와 연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던 데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정교회의 비잔틴 십자가와 성모상이 키예프에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경우,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가문이 정교회를 숭상하는 집안이 아닌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러시아정교회의 반대를 억지로 무마하고 재혼한 이유는 아직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옛 대공국을 구성하는 공후들과 보야르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이들에게서 벗어나 강력한 전제정권을 구사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실리 3세의 움직임과 달리 어린 이반 4세는 출생 전부터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불길한 아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고 각 보야르들의 음해성 공격 및 암살 위협도 받았다. 그러한 배경들이 이반 4세의 정신적인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과 옛 키예프 공후들, 각 지방 및 모스크바 대공국 내부의 보야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끊임없이 어린 이반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어 1533년 이반 4세가 3살 되던 해에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발전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이반을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은 모친인 엘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엘레나도 정통 러시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허약했다. 그러한 잦은 정치적인 암투로 인하여 오히려 어린 이반이 유년기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을 학습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실리 3세는 사망하기 전에 어린 두 아들 이반과 유리(Юрий)의 장래를 걱정하며,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그녀의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 공후에게 그들을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 대한 위협 등을 염려하여 왕족 및 보야르 등을 모두 불러 어린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반에게는 형제인 남동생 유리(Юрий)와 여동생 한 명이 있었고 그 밖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서출 형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는 왕권에 전혀 관심 없는 자였다. 그리고 남동생 유리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어 모든 권력적 상황이 이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친의 유언에 의해 이반 4세는 바실리 3세 사망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3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와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모친인 엘레나는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 공후에게 처음에는 많이 의존했다가 이반 옵치나 오볼렌스키(Иван Овчина Оболенский) 공후와의 치정 관계로 인하여 미하일 글린스키와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Андрей Старицкий) 등 일부 보야르들은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를 포섭하여 그를 대공 직위에 올리려 했다가 이 역시 사전에 엘레나와 옵치나 공후에게 발각되었고 미하일 글린스키는 역모 죄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글렌스키야 가문 외에도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 벨스키(Бельский) 가문 등 유력 보야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나는 자신의 친정 측에 원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삼촌 미하일 글렌스키야를 제거하면서 친정과의 연대는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고변을 사건을 일으킨 엘레나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했으며 많은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는 등의 폭정을 펼쳤다. 특히 이반의 삼촌인 유리 이바노비치(Юрий Иванович)는 충성 맹약을 번복했기 때문에 엘레나의 노여움을 사고 투옥되었으며 1536년 처형되었다. 또 다른 삼촌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역시 이반의 대공 지위를 노렸다. 그러자 이는 엘레나에게 발각되어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투옥시키려 했다. 그러자 삼촌 안드레이는 도망치려다가 국경에서 잡혀 1537년 투옥되고, 그 해 11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바실리 3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리투아니아 공국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략해왔다. 루스의 공후들이 리투아니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어린 이반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는 엘레나는 같은 카톨릭 측이라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와 1538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보야르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그녀의 계속되는 실정(失政) 및 폭정과 카톨릭 및 폴란드 이주민들에게 대한 우대, 그리고 리투아니아와의 독단적인 평화 조약 체결 및 옵치나 공후에 대해 과도한 이권을 몰아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그녀의 차에 독을 타 독살했다. 모친인 엘레나가 보야르들과 키예프의 13공후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이반 4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지만, 어리지만 영민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던 그는 이러한 보야르들의 음모로 인해 모친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옵치니 공후가 섭정을 하였으나, 슈이스키 가문의 영수 바실리 슈이스키(Василий Шуйские)는 옵치나 오볼렌스키를 투옥시켰다가 석방시켰고 자객들을 보내어 자는 도중 그의 집에서 살해했다.이 때 경쟁자 가문인 벨스키 가문의 이반 벨스키(Иван Бельский)를 옵치나와의 공모 혐의를 적용하여 숙청했으며 그를 투옥시킨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몇 년 후 이반 벨스키를 석방시켰으나, 세력의 재규합을 우려해 그를 다시 투옥시킨 뒤 살해했다. 이와 같이 옵치니 공후를 축출하고 권력을 확보한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은 각기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블 지역을 영지로 하고 있었던 대 공후들이었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다른 공후들의 협조도 가능했던 막강한 대외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이오아사프(Иоacaв)가 추방된 관계로 인하여 비어있던 총대주교 지위는 막심 그렉(Максим Грек)에게 돌아갔고 막심 그렉은 1538년부터 1547년까지 섭정을 하여 바실리 슈이스키와 공동 통치를 했다. 한편은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이반이 10세 때 그의 유일한 여동생인 엘리자베타가 갑자기 사망했다. 엘리자베타의 경우에는 슈이스키가 독살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유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반은 대공 지위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대적인 보야르들의 늘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대공으로써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며 근처 보야르들의 심한 감시도 함께 받았다. 이 때부터 이반 4세는 두 살 어린 동생 유리와 함께 귀족의 권력 암투 속에서 그들의 양면성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이반 4세의 앞에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한 편지에 의하면 자신이 8세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 당했고 그들이 대공 지위의 이반에게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불운한 소년이 머지않아 폐위되거나 암살될 거라고 여겼지만 러시아 내부의 묘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하여 이반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물론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 공후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의 어린 공후 형제들을 심문한 뒤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왕실 행사가 있는 날로, 이 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한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아직 대공이 건재하고 있다는 대외적인 홍보와 더불어 대공에게 최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 내에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 등을 여과 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매우 포악하게 변모했다.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으며 정무는 각 두마와 보야르들이 관장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권한은 전무했다. 한편 슈이스키 가문 등의 유력 보야르들이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파벌 경쟁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적으로 차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권위를 무시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 두고 강제로 신게 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 이반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높은 성 옥상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키예프 13공후에 속하지 않은 지방 귀족인 드보랸(Дворян)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었지만 이반은 자신의 세력으로 몰래 드보랸(Дворян)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보야르 및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과 친해지면서 자신의 세력을 몰래 강화했으며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이러한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해 두마 회의 당시 크레믈린 궁 주변에 매복시켰다. 크리스마스에 이반은 회의 자리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그를 무시하며 조롱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들 순간적인 명령이라 당황했었지만 이반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죽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대다수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명으로 매복한 보야르와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로 하여금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해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넘겼고 맹견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했다. 이어 두마 회의가 끝나자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 귀족들을 잡아들여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후로 이반에 대해 보야르, 제후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방자하게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령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이 강력하게 성장했음을 파악하고 그에게 친정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친정에 대한 기본적인 통치 관념이 없어서 이를 두려워한 이반은 일단 보론초프(Волончёв)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지만 1546년 이반은 보론초프 가문도 숙청하고 말았다. 지방 귀족인 드보랸들과 지식인, 상인 계층에서는 이반의 아버지 바실리 3세 시기부터 내심 보야르 및 두마 의원, 중앙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오랫동안 원했고, 상인들은 각 지역마다 다른 상법들을 정비하여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의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오랫동안 호의를 보여 왔고 이반 4세 그리고 그가 친정하자마자 그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1545년 이반 4세는 블라디미르에 군사를 내어 실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의 세력들을 제거하도록 명을 내렸고 이들 드보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항쟁했으나 이반의 군사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했다. 블라디미르의 세력들을 제거한 이후, 이반은 1546년 12월 내년에 혼인할 것이고 차르로서,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를 선택,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서적을 통해 대관 의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는 1547년, 교회를 통해 대관식을 치르고 ‘전 러시아의 차르’로 등극했다. 이러한 부분이 실현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린 왕의 통치기에 보야르들의 숫자와 권력이 크게 늘어났기에, 그들끼리 파벌과 다툼이 생겼으므로 보야르가 단결해서 왕권을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귀족 내지 지방 귀족을 의미하는 드보랸들은 보야르의 횡포를 억제해줄 강력한 왕권을 기대했고, 상인들은 러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동일한 상법의 적용을 받는 상권이 탄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반 4세의 차르 즉위를 지지했다. 그리고 17세이던 1547년 6월 말에 벨스키 가문을 정벌하기 위하여 야로슬라블로 군사를 보내 벨스키 가문을 공격해 멸족시켰고 야로슬라블의 대부분 구역을 파괴했다. 1548년 1월부터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서 이반 4세의 내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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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7
  • 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는 국가적 안전을 보증하였다. 이반 뇌제는 코사크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보내 시베리아를 경략하도록 했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코사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치이들은 용병처럼 활약하였으며, 캄차트카, 베링해, 태평양까지 러시아의 국경을 확대하였다. 러시아가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은 코사크 인들 덕택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식민지가 창출되면서, 러시아의 중앙부 농민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국가와 지주의 권위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과감히 이주하거나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베리아의 군대 총독들은 이주하거나 탈출한 농민들을 수비대로 재편성하거나 농업 활동에 종사시켰다. 소련 학자들은 이들이 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고 현재도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왜 아시아로 팽창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농노화가 진행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변방 지대 진출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도 농민들에게 토양을 제공하고, 농촌 경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새로운 땅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뇌제가 시베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베리아산 풍부한 모피는 내외적으로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손상을 오랜 시기동안 받았다고 간주한 러시아는 동방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몽골의 후계 칸국 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16세기에도 변방 유목민족들의 공격으로 러시아는 국경지대에서 방어적인 공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방어적 작전에서 이민족을 향한 공격적 자세로 전면적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시베리아를 경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민족은 총 18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중 105개의 종족이 시베리아에 산다. 워낙 많은 민족들이 있는 관계로 러시아 내 민족학 연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지만 가장 전수조사가 어렵기도 한다. 오히려 민족학 연구자들은 연구할게 워낙 많다는 학문적 산실이 시베리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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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중국 수, 당, 송나라 시대의 강남 개발과 강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 제도들의 도입 및 개편
    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나라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 북중국에서의 상쟁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세력 경쟁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북주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로 인해 다시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변동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북주 내부에서 정권의 교체가 발생하게 된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한족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했다. 이어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 정비에 따라 수나라의 국력은 급속히 강해졌으며, 이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588년에 수 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진(陳)나라를 정복하였다. 수나라에 의한 진(陳)나라의 병합은 당시의 국제질서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세력이 통일되어 그 강력한 힘이 외부로 향할 경우,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88년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수나라 건국 초기에 한 때 수나라와 충돌하던 토욕혼(吐谷渾)은 진(陳)나라의 멸망 소식을 접하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송나라 시기까지 변혁론(変革論)이라는 인식론이 나타난다. 이 변혁론은 중국사에서 755년 안사의 난으로부터 11세기 말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에 이르는 시기까지 단순한 왕조의 교체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역사 인식론이다. 이는 고대에서 중세, 이어 근대까지 이행하는 세계사적 보편 발전 과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변혁론은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혹은 당나라 말기 5대 10국까지를 고대 혹은 중세로 볼 것인가, 혹은 송나라 시대 이후를 중세 혹은 근세로 볼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다. 그 쟁점은 송나라 시대 토지 소유 형태, 전호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와 법적 신분 등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해서는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가 발달하면서 지주 및 전호 관계가 지배적이었음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대토지 소유가 서구 중세의 장원제에 비견되는 일원적 경영이었는지, 혹은 명칭만 장원(莊園)이었을 뿐 실제로는 소규모 영세 토지를 집적한 소농 경영에 불과했는가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송나라 이후 봉건론(封建論), 혹은 중세론(中世論)은 일본의 카토 시게루(加藤繁), 슈토 요시유키(周藤吉之),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등이 주장하였고, 주로 도쿄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도쿄학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당나라 이후 균전제(均田制)가 붕괴되고 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기반으로 장원제가 발달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송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시기의 중국 사회를 봉건 후기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슈토 요시유키는 송나라 시대에 대토지 소유가 발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생산자로서 전호는 토지에 매여 있으면서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강하게 예속된 존재로 간주하였다. 곧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경제적 관계이면서도 경제외적 강제가 포함된 봉건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론(近世論)은 1918년경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주창한 이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에 의해 확고하게 나타났다. 교토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교토학파’들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이후 서양의 중국 사가들이 여기에 가세하였고 한국학계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편이다. 이 사론(史論)은 송나라 시대 군주 독재권이 확립되고 관료의 지위가 고양되었으며 인민들의 사유 재산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크게 진작되는 등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의 전환기에 사회 및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역사적 변화를 근세(近世, The Early Modern Period)로 설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근세론은 전호제(佃戶制)를 근간으로 한 대토지 소유제를 인정하며 이 때 지주와 전호는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는 명목상 장원이지만 실제로는 근세적 자본주의적 경영이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에 더하여 지주와 전호는 봉건적 주종 및 예속 관계가 아닌 순수한 경제적 관계이자, 자유농민과 지주 사이의 자유 계약 관계, 일종의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라고 적극 평가하고 있다. 전호의 거주 이전 제한은 그의 도주나 계약 위반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근세론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까지 토지 소유는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고 자손을 위한 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송나라 이후 토지는 일종의 투자 대상이었으며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거의 순수한 경제적 관계였다. 이는 전제 군주의 독재체제 아래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소유와 촌락 사회 위에서 송나라 시대 근세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만을 근세로 간주하는 논자도 있는 것과 같이, 송나라 이후 중국사 전체를 단일한 근세 사회로 확언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지주와 전호가 순수 경제적 계약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호가 법률상 양민으로서 독립된 경영 주체였지만 지주로부터 이탈이 금지되는 등 신분적으로 지주에 예속되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일한 대토지 소유, 혹은 지주와 전호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강남과 변경 지역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의 자본주의 관점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개념과 같지 않다. 근세 자본주의는 전기(前期)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에 기반을 두었던 유통 경제를 상정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근세 성립기 중국 사회의 선진 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정체성과 표리 관계에 있다. 그는 스승 나이토가 중국 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긍정하는 한계를 보인 것과 맥락을 같이 했다. 고대에서 중세로든, 혹은 중세에서 근세로든 간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교체 시대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송나라 시대 이후의 사회는 삼국 시대에서 당나라 시대까지와 크게 다르며 명나라 및 청나라 시대와 동질성이 더 많이 관찰된다. 결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변혁 문제는 황제 및 관료 지배의 전통과 자작농의 끊임없는 재생산, 거듭된 왕조 말기의 반란 등 중국사에서의 장기 지속적 요소들을 구체적 역사 맥락 위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황제 지배의 성격, 개별 인신적 황제 지배 및 귀족제 하의 황제권, 그리고 전제권이 성립된 사대부 사회의 황제나 관료의 성격, 향거리선(鄕擧里選)으로 충원된 관료,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하 문벌 귀족 사회의 관료, 과거제 하의 사대부 관료, 지배층의 성격인 호족, 문벌 귀족, 사대부 및 신사 등을 둘러싸고 일련의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일례로 후주(後周 : 951~960)의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은 960년 거란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출병하였다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의 동북쪽으로 40리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 정변을 통해 송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 강화된 번진(藩鎭) 체제와 5대 10국의 군벌 체제를 증식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송나라 태조는 당나라 말기 번진의 할거 이래 황제의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병권 및 재정권, 혹은 민정권의 회수에 주력하였다. 그는 특히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금군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특히 인종(仁宗) 시기의 80여 만 명, 병권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권화하고 그 통수권은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그 공정성과 개방성을 넓히는 한편, 황제가 과거의 최종 합격자를 직접 선발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채택하여 과거 합격자들과 군주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였다. 과거제를 발판으로 송나라는 군대와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실권자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는 문신 관료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황제는 권신의 집단화를 억제하기 위해 관료들이 재상의 사저(私邸)를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알금제(謁禁制)와 관리의 출신지 부임을 금하는 회피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강력한 첩보망을 동원하여 황제 권력에 반하는 관료나 군사 지휘권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관료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송나라 시대 근세론을 정치적인 배경을 갖춘 군주 독재 체제설의 토대가 되었다. 재상권과 신권을 축소하는 한편 제도적으로 황제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의 최종 결정권을 황제에 집중시키는 송나라 시대의 독재 군주권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독재 권력을 행사한 진(秦)나라의 시황제, 한(漢) 무제(武帝), 수 양제, 당(唐) 태종(太宗) 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송나라 시대 황제 권력은 당나라의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당나라 말기에서 5대 10국에 새로 등장한 형세호(形勢戶)를 기반으로 나타난 사대부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사대부는 과거를 통하여 황제의 인적 기반인 관료로 진출하여 사대부 문신 관료 체제를 구축하였다. 호족과 문벌 귀족은 가문과 출신에 의해 그 신분이 규정되었던 반면, 사대부는 원칙적으로 출신과 무관하며 자신의 능력, 곧 유교 경전 지식과 문필 능력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사대부의 계층 유동성은 송나라 시대 과거 급제자들 가운데 본인의 앞 3대 이내에 관료를 배출하지 못한 비(非) 관료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 시험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대부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사대부가 사실상 중소 지주 이상의 경제력 보유자 혹은 상인 출신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곧 사대부는 국가 권력에 의한 승인과 경제적 부를 존립 기반으로 지식과 교양을 사회적 특권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세력이었다. 지주로서 사대부는 농업 생산을 매개로 지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부(陳尃)의 <농서(農書)>의 사례와 같이 농서의 간행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남에서는 수리 개발에 적극 개입하였다. 수리 개발은 기본적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에 책임을 지었으나 실제 사업 수행에서 부담은 사대부 등 지역 사회 구성원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 아래 북송 당시 여대균(呂大鈞, 1031~1082)이 섬서 지역에서 향약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교화와 상호 부조를 통하여 지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향약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정비되어 이후 명나라 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주희에 의해 정착된 사창(社倉)은 사대부가 주도하는 지역 사회의 자치적 구휼 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사대부의 활동은 그들의 정치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며,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여 사대부가 황제를 대신하여 천하 통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치자(治者) 의식을 강조하였다. 반면, 천하를 향한 근심은 오직 하늘(天)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황제만의 소관이고, 관료는 천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머무는 피동적 존재라는 인식도 공존하였다. 그래서 관료는 황제 권력과 경쟁학기도 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문치주의는 관료 기구의 비대화를 낳았고 행정과 재정의 효율성을 저해하였다. 송나라 태조의 문치주의는 분권적 절도사 체제를 중앙집권적 문신 관료체제로 전환하여 황제 지배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강력한 유목 국가의 출현에 직면하여 송나라 이들에게 줄곧 고전하였다. 거란 요(遼)나라의 7년에 걸친 전쟁 끝에 1004년 송나라는 요나라에 현 북경과 천진, 산서 등의 16개 주(州)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양도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보내기로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 길지 않은 평화가 찾아온 뒤 1126년에는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어 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이후 고종(高宗)에 의해 남송(南宋)이 재건되었지만, 1279년에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 병합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남송의 문인 사대부들은 송나라를 향한 이상적 충절과 현실 타협의 사이에 갈등하면서 원나라의 질서에 편입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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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뇌부부터 말단 집단까지 포함한 다른 집단들의 연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하고 지휘할 수 있는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수뇌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콜차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 대도시들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보지 못했다. 병력도 적어 한계가 있는데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다보니 강력한 적군의 무력이 더욱 증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의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 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이 피지배계층이라고 무시하며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이자 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코사크와 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대의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를 유도해 투항시키거나 탈영을 유도했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했다. 백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파기되었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뀌어진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발트 해 국가들이 간섭 군과 더불어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중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 이 외에는 카프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리에 의해 7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이 긴 전쟁을 이미 치루었던 차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였던 데다 간섭 군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新韓村)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920년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부 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적군의 트랴피친(Тряпицын)의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볼셰비키 군에게 패배했고, 이 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 국가로 탄생되었다. 마지막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Анатолий Пепеляев)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볼셰비키의 포로가 된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까지 남아있는 외부 간섭 군대인 일본군도 1924년에는 완젆;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며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이에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들에 괴뢰 국가들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 행위에 영토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것에 급급하여 그러한 비어진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도 했으나 백군과 협동으로 인해 파르티잔들을 진압했고, 자국의 군대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反)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러자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측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1920년 반(反) 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인해 붕괴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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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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