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달러에 몰린 개인, 안전자산이 안전하지 않다
골드바 4배·실버바 38배, 벼락거지 공포가 만든 ‘안전자산 버블’
올해 개인투자자들이 ‘금·은·달러’를 쓸어 담은 현상은 단순한 투자 트렌드를 넘어, 고물가·고금리·통상 갈등이 한데 얽힌 한국 사회의 불안 심리를 그대로 투영한 장면이다. 안전자산으로 불리는 자산에 자금이 몰렸지만, 가격이 역사적 고점에 다가설수록 변동성도 커지며 ‘안전자산 역설’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경고가 커지고 있다.
국내 금융권 통계를 보면, 올해 5대 시중은행에서 판매된 골드바 금액은 6천779억7천400만원으로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20년 이후 최대치다. 지난해 연간 판매액 1천654억4천200만원과 비교하면 불과 1년 만에 4배 이상 늘어난 수치로, 은행 창구를 찾는 개인들의 ‘금 사재기’ 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농협은행을 제외한 4대 은행의 골드바 판매 중량도 3천745㎏에 달해 작년 대비 2.7배 늘었는데, 이는 과거 위기 국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규모다.
가격 흐름을 보면 과열의 그림자는 더 뚜렷해진다. 한국거래소(KRX) 금현물 가격은 지난해 말 1g당 12만7천850원에서 올해 10월 15일 23만920원까지 치솟았다. 1년 사이 80% 가까이 오른 셈으로, 인플레이션 우려와 지정학적 리스크, 통상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금만은 올라간다’는 기대가 개인투자자 심리에 깊게 각인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 과정에서 국내 금값이 국제 시세보다 크게 웃도는 이른바 ‘김치 프리미엄’까지 붙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국제 금값보다 10~20%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왜곡도 나타났다.
은 시장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연출됐다. 실버바를 판매하는 4개 은행의 올해 실버바 판매액은 306억8천만원으로, 지난해 7억9천900만원의 무려 38배에 달했다. 실버바는 그동안 투자 상품으로서 대중성이 높지 않았음에도, 금 가격 급등과 함께 ‘다음은 은’이라는 기대가 붙으면서 품귀에 가까운 품절 사태가 이어졌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정교하게 통계를 쪼개기 어렵지만, 올해 골드바·실버바를 사들인 주체는 대부분 일반 개인투자자로 봐야 한다”며 “이 정도 규모의 개인 수요는 과거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통장 속 금’으로 불리는 골드뱅킹도 예외가 아니다. 한 시중은행의 골드뱅킹 상품 ‘골드리슈’의 경우 12월 24일 기준 계좌 수는 18만7천859개, 잔액은 1조2천979억원(금 가치 연동)으로, 2003년 상품 출시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불과 1년 전인 작년 말(5천493억원·16만5천276계좌)과 비교하면 잔액은 2.4배, 계좌 수는 14% 늘어난 셈이다. 은행이 사실상 ‘금 투자 플랫폼’으로 기능하면서, 적립식 투자부터 단기 매매까지 개인의 투자 방식도 다변화되고 있다.
달러예금으로 대표되는 외화 투자도 같은 축 위에 놓여 있다. 원·달러 환율이 연중 1,400원대를 웃도는 흐름을 보이자, 개인투자자 입장에서는 달러예금이 ‘환율 상승의 과실을 기대할 수 있는 대체 투자’로 자리 잡았다. 5대 은행의 개인 달러예금 잔액은 12월 24일 현재 127억3천만달러로, 2021년 말(146억5천300만달러) 이후 4년 만에 최대 규모를 회복했다. 환율이 하루 새 30원 넘게 급락한 날에는 “달러가 싸졌을 때 사두자”는 심리에 힘입어 한 은행에서만 6천768건의 환전 거래가 발생했고, 이들이 사들인 달러는 1천531만달러로 전날의 3배에 달했다.
이처럼 금·은·달러로 대표되는 안전자산에 자금이 몰린 배경에는, 주가와 부동산, 암호화폐 등 사실상 모든 자산 가격이 오른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이 짙게 배어 있다. ‘돈을 놀리면 벼락 거지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자산조차도 공격적으로 사들이는 역설적 행태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안전자산 열풍의 이면에는 묻지마 추격 매수가 빚어낸 부작용이 적지 않다. 국내 금값에 붙었던 김치 프리미엄이 꺼지고 국제 가격과의 괴리가 좁혀지는 과정에서, 일부 금 관련 상장지수펀드(ETF)는 국제 금값이 1% 빠질 때 국내 가격이 10~15%가량 떨어지는 극단적 변동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 여파로 국내 금 ETF 투자자의 40~70%가 손실을 보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면서, ‘안전자산이라 믿고 들어갔다가 가장 먼저 상처를 입은 것은 개인’이라는 쓴소리가 이어진다. 금리와 환율, 지정학적 리스크가 동시에 요동치는 국면에서, 자산 특성과 가격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고점에서 뒤늦게 뛰어든 대가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과열이 특정 정당이나 이해집단의 논리와는 별개로, 데이터와 시장 구조를 중심에 놓고 냉정하게 점검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올해 금·은·달러 강세는 인플레이션 우려, 안전자산 선호 확대, 금·은의 산업적 수요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면서도 “가격이 최고 수준일수록 변동성이 커지는 만큼, 포트폴리오의 일부를 헤지용으로 배분하는 수준을 넘어 과도하게 비중을 키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향후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개인 스스로의 위험 관리와 더불어 제도·시장 차원의 안전장치도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우선 투자자 교육 영역에서는 금·은·달러가 갖는 역사적 의미나 ‘안전자산’이라는 단순 이미지가 아니라, 각 자산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과 환율·금리·지정학 변수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국내와 해외 가격의 괴리, ETF 구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추적 오차, 유동성 부족에 따른 매매 불편 등 그간 소홀히 다뤄진 위험 요인을 쉽게 풀어주는 교육과정이 제공돼야 한다는 뜻이다.
금융회사와 감독당국의 역할도 가볍지 않다. 은행과 증권사는 골드바·실버바·골드뱅킹·금 ETF 등 상품을 판매할 때, 수익 가능성뿐 아니라 가격 변동성, 매매 스프레드, 세제와 수수료, 국제 가격과의 괴리율 등 핵심 정보를 눈에 띄게 안내해야 한다. 특히 광고·마케팅에서 ‘손실 가능성’에 관한 문구를 최소 글씨로 처리하는 관행을 개선하고, 일정 수준 이상 가격 괴리가 발생할 경우 투자자 경보를 의무적으로 발령하도록 하는 규제 정비도 검토할 만하다.
감독당국은 안전자산으로 포장된 투기 국면을 조기에 포착할 수 있는 모니터링 체계를 갖추는 것이 과제다. 금·은·달러 관련 시장의 거래량·개인 비중·프리미엄 수준 등을 상시 점검해 이상 신호가 감지될 때 언론과 함께 경고 메시지를 내보내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이는 특정 정당이나 이념적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시장 안정과 투자자 보호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한 최소한의 역할에 가깝다.
결국 올해의 ‘금·은·달러’ 열풍은 개인투자자가 직면한 불안과 기대, 그리고 정보 비대칭이 교차한 결과물이다. 자산 가격이 한 방향으로 치달을 때일수록 ‘안전’이라는 단어에 기대 묻지마로 따라붙기보다, 각 자산의 본질과 위험 구조를 차분히 들여다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정치적 색깔이나 특정 진영의 논리 대신, 객관적 통계와 시장 구조에 기반한 투자 판단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안전자산은 이름값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