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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 터키 차낙칼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 그곳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심취해있었던 탐험가인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많은 연구 끝에 발굴에 성공한 곳이다. 그곳은 바로 트로이 유적..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다. 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그리스의 신들이 이 전쟁의 승자에 대해 내기를 걸었을 정도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기록상 10년여 지속되었다고 한다. 정황은 트로이 파리스 왕자가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의 부인인 헬레네를 유괴하여 트로이로 돌아간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그리스는 동맹을 맺어 트로이를 공격했고 그리스 동맹군은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를 중심으로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트로이는 영웅인 핵토르 왕자를 중심으로 그리스 세계와 맞섰다. 그러나 그리스 측의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의 불화가 불거진 사이 트로이는 아시아 지역의 동맹군 파견을 요청하게 되고 이 전쟁은 결국 장기전으로 가면서 아시아 유목민족들도 참전하는 전쟁 양상으로 변해갔다. 결국 전쟁의 결과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군에게 기만술을 사용한 그리스가 승리하였지만 이 전쟁이 사실이라면 그 의미는 유럽을 대표하는 그리스 세계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트로이와의 국제전으로 두 세계의 진정한 패자를 가리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 폴리스 세계가 본격적인 역사의 무대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그리스와 맞대결을 펼친 트로이는 어떤 국가였을까? 인터넷 기록을 찾아보면 트로이의 건설은 B.C 4,000년기 말이라고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B.C 4,000년 말의 지층 및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전부다. 현재 나타난 기층은 B.C 3,000년 경으로 추정된다.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이 도시를 발굴했을 시기인 1870년에는 탄소연대측정이라는 연대 측정 자체가 없었을 때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참조하여 그 연대를 추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도시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보다 후대의 것인 B.C 700년대의 유적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대 측정은 1985년에 진행했고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추정했던 B.C 3~4,000년 연대의 성벽 및 유적, 유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했던 B.C 700년경부터 트로이의 진짜 역사라는 셈이다. 이 시기에 트로이 전쟁이 발생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흔히 트로이 발견 과정을 두고 <일리아스>는 신화적인 서사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근세에 하인리히 슐레이만이라는 상인이 이 책을 읽고는 이것의 실존성을 밝히기 위해서 평생을 걸고 증명에 도전한 결과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이 발견되었다.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리아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된 작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신화는 신화적인 관점으로 봐야하고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과정을 보면, 고고학자 캘버트가 이미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Hisarlık Tepesi)을 답사한 이후 학술 저널에 그곳이 트로이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후원자를 찾고 있었으며, 이 때 슐레이만이 캘버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게 되면서 함께 트로이 유적을 찾아 다닌 것이 맞다. 물론 슐레이만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슐레이만이 주목한 곳은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부나르바시 지역이었다. 그러나 슐레이만이 히사를리크 지역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캘버트의 학설을 들은 이후였다. 그 동안 널리 알려져 있던 슐레이만이 여러 지역을 답사한 끝에 히사를리크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슐레이만 본인이 언급하면서 일리아드의 시가 진실인양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슐레이만은 유적 발굴 과정에서도 트로이 함락의 극적인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조작하려다가 캘버트가 발굴 노트에 발견 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실패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트로이 발굴 이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유물을 사들인 후 자기가 발굴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다 드러난 사건도 비일비재 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면서도 히사를리크 일대를 발굴한 것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굴의 이면에는 그동안 감춰져 있던 사기 행위도 분명 존재했다. 고고학적으로 트로이라는 도시의 존재와 트로이 전쟁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트로이 전쟁은 고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 여겨졌지만 후세에 와서는 신빙성 없는 신화로 치부됐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터키 서북부 지역에서 트로이 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역사적인 사실일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1930년대에는 미국인 블레겐이 보다 정밀한 작업을 통해 트로이 전쟁과 같은 시대로 여겨지는 지층과 유적을 발굴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학자가 트로이 유적 발굴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한 상태다. 트로이에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나 핵토르 같은 영웅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등은 더욱 알기 어렵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썼을 때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이미 500년이나 지난 뒤였다. 따라서 호메로스 이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신화적인 상상력이 덧씌워져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호메로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얘기가 나돈다. 시각장애인에 문맹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일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리스가 목마에 병사들을 숨겨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전설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일리아드'에는 없고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전한 것이다. 일부에선 그리스와 10년간이나 치열한 전쟁을 치른 트로이인들이 그렇게 부주의했을리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도 터키 차낙칼레와 히사를릭 언덕에는 아직 트로이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유적을 두고, 신화적인 부분을 부풀려 역사로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터키는 트로이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고, 실제 역사가 증명된 유적들이 많다. 그럼에도 신화적인 요소인 트로이를 실제 역사처럼 만들고, 홍보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상품성"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보다는 오로지 "상품성"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로 흑자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있는 역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없애는데 골몰하는 자들이 많다.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사기성 넘치게 역사를 상품화 해도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러란 말이냐?" 라는 같잖은 정직함과 정의감, 그러면서 자신들은 옳고 정의로운 일을 했다는 같잖은 소신으로 뭉친 부류들이 많다. 그런 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지난 역사가 부끄러우니 이걸 지적하고 비난하며 그 때부터 이어온 노예사관을 가진 한국인들이라 그런 역사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대로 인해 생긴 노예사관, 노예근성은 당연히 벗어던져야 하고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당시 중국에 머리 숙이며 사대했던 국가가 대한민국 뿐이었나? 주변 베트남, 태국, 미얀마, 대만, 오키나와 (류큐국), 일본, 여진족까지 중국에 사대했고, 사사건건 중국을 침략하고 노략질했던 몽골의 각 민족들도 중국에 머리를 조아릴 때가 있었다. 당시 중국의 연호를 쓰고 책봉을 받았으며, 중국식 달력을 이용하고 사상을 배웠다. 그게 그 때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다. 일본 또한 그 질서에 속한 국가였다.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가 뭐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있는가? 그들은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받으러 가는 일본 사신들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과 교류하기 전에는 역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한국 만의 잘못인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듯이 당시 동아시아에 속한 모든 국가들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갔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과거에 동아시아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노예근성이고,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칭 보수 우파들도 똑같은 노예근성에 있다. 과거 조선 시대 역사라 할지라도 없애는 것에 골몰하지 말고 이런 것은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일본 또한 신사에서 제를 올리고 있고, 전통을 중요시하여 새해마다 마쯔리 축제를 하며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새해 다짐을 한다. 그런데 야스쿠니 제외하고 그걸 욕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건 일본을 부러워 하고 배우라면서 이런 전통 수호는 왜 배우라고 권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신들은 선택적 보수이자 미국과 일본을 떠받들며 당신들의 생명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어줍잖은 선택적 보수인 당신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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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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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 정권 말기, 대만으로 이주한 정성공 및 정씨(鄭氏) 일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화교 2세대들
- 남명의 한족 국가는 위기에 놓였을 때 새로운 영웅인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탄생되었다. 정성공은 부친 덕택에 매우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비범한 소년이었다. 21세에 남명 정권의 귀족이 되고, 22세에 반청운동 지도자가 되었으며, 30세에 왕으로 책봉되기 이른다. 그는 바다의 제왕이 되어 중국 심장부인 남경(南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정성공은 당시에는 국제화된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경호병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인디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탈리아 인을 특사로 활용했다. 그의 부대에는 독일인과 프랑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대적한 세력은 네덜란드로, 당대 세계 최강의 해양 국가였다. 한편 그가 장성한 뒤인 1644년 명나라는 북경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고, 아버지 정지룡은 3년 뒤인 1647년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정성공은 부친의 세력을 물려받아 오히려 청나라에 대항해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남명의 융무제는 정성공을 좋게 보았다. 얼마 안가 정성공에게 충효백(忠孝伯)으로 작위를 올리고 초토대장군이란 관직을 내렸다. 하지만 부친인 정지룡의 마음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1646년 섭정왕 도르곤은 조카 볼로를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남명 정권 잔당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볼로에게는 성에 남아있는 정씨 세력만 제거하면 숙원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고, 정지룡에게 전투를 벌이지 말자고 제의했다. 정지룡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허울만 남은 남명 정권의 융무제에 충성을 하느냐, 투항해 가문을 지키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북쪽에서는 명나라 유신들이 대거 투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할 경우, 변발만 하면 끝이다. 볼로는 항복을 하면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고 중국 남동해안의 실력자 지위를 유지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 때 정성공은 소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중원에서 복건성으로 내려오는 길목인 선하령(仙霞嶺)을 지키다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정지룡은 “나는 황제폐하가 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볼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고 사용했다. 정성공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을 따를 것인지와 나라를 지킬 것인지, 그리고 충(忠)과 효(孝)가 배치되는 순간에 정성공은 충(忠)을 따르기로 했다. 삼촌들도 육지에서 승전하기 힘들면 바다로 나가 항전을 계속하자는 입장이었다. 정지룡은 마침내 남명 황제를 배신하고, 적이었던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정성공은 해외 무역 및 해적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반청운동에 쏟아 부었다. 1659년에는 장강 일대를 따라 난징 일대까지 함락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내 청나라 군의 토벌군과 맞서 연패하면서 주요 점령지들이 함락당하고 고립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정성공은 1661년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당시 네덜란드 상관이 점거한 상태였던 대만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 인들은 정성공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학살되거나 노예가 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서양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정성공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 총독부와도 알력을 벌이다가 1662년 대대적인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망명정부였던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가 미얀마에서 청나라 군에 사로잡혀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병사하고 말았다. 정성공의 활약 속에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 역사는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청나라는 대만을 고립시키기 위해 바다로 나무 조각 하나 띄울 수 없다는 강경한 해금(海禁)정책을 펴게 됐으며, 이것은 명나라 시대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중국의 해상무역을 크게 후퇴시키고 대운하를 중심으로 한 내륙운송 무역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성공의 해적 활동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교역로를 접게 되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 인들이 일본 무역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성공의 사망 이후부터 그의 해상 세력은 방향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잠시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였던 오삼계가 일으킨 삼번의 난 당시 오삼계 세력에 합류하며 복건성 공격에 나서기도 했으나 청나라 군에게 참패했다. 결국 1683년 청나라 군에 의해 대만이 함락되면서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현대 중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끝내 충절을 지킨 충성스런 장수로 남아 영웅으로 추도되고 있으며, 대만에서도 네덜란드 인을 추방하고 대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추대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1895년 대만을 식민지를 삼은 이후부터 나가사키의 중요한 인물로 다루기도 했다. 정성공이 나가사키 태생이고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자랐다는 부분을 강조해 대만을 처음 정복한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선전시키기도 했다. 중국, 일본, 대만 삼국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영웅으로 추대하긴 했지만, 그의 일대기는 17세기 동아시아 해상 무역사의 면면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한 이후, 대만으로 간 정성공 및 정씨 일족 이외에 한족들은 다시 만주족의 청나라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와 각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주한 지역에 자리잡고 화교, 혹은 화인 2세대가 된다. 화교들은 주요 이주 지역인 동남아시아 및 미주 대륙의 국적법이 속지주의(屬地主義)인 반면에, 중국에서는 원칙적으로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이중 국적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화교들의 경제력이 막강하여 심지어 한 국가의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위협이 되었다. 화교 배척 운동과 더불어 화교들에게 현지 국적의 취득을 강요하며 거부할 때는 강제 출국이나 재산 몰수와 같은 강경책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교들은 현지 국적을 취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중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 국적의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5년 인도네시아와 중국과 인도네시아 이중 국적 문제조약을 체결하여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쪽 국적만을 인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동남아시아 각국이 중국과의 국교 수립에서 이중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준이 되었다. 각종 통계에 의하면 화교들이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33개국에 약 2,200만 명, 미주 32개국에 230만 명, 유럽 24개국에 67만 명, 대양주 15개국에 34만 명, 아프리카 32개국에 10만 명이 각기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상당수의 화교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현지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외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 연안 지방에 거주하던 농민과 어민이었다. 그들은 국내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수입이 적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생존의 목적으로 해외 여러 나라로 이주했으며, 이는 현대적 의미의 이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현재 전 세계 화교인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하여 자본의 규모는 일본 국민총생산(GDP)의 5분의 1 정도에 달하며, 그들의 대부분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지역 화교의 총 자산은 전 세계 화교 자산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며, 현지 민족 자본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제학계의 추산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산업의 50%~80%와 대외무역의 40%정도를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경우, 화교경제는 이미 소규모의 음식점, 세탁소 등의 영세 업종에서 탈피한 지 오래이며, 기존의 금융과 부동산, 유통 등에 기초하여 첨단 기술 분야인 전자와 정보통신, 화학공업, 정밀기기, 강철 등의 산업에서 이미 국제적인 수준의 기업가를 배출하고 있다. 특히 화교 기업은 정보통신산업을 21세기를 향한 전략산업으로 간주하여 빠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화교의 정보통신 산업의 기원은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실리콘벨리에서는 하이테크분야에서 벤처기업을 일으켜 사업에 성공한 화교기업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소프트웨어 회사인 컴퓨터 아소시에이즈(CA)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가 자루즈 왕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비스 Yahoo를 경영하고 있는 창업자 지에리 양이 화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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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 정권 말기, 대만으로 이주한 정성공 및 정씨(鄭氏) 일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화교 2세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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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필리핀의 공통점 : 공권력의 심각한 부패
- 최근 오성일 글로벌한인병원 원장님이 올리신 캄보디아 비상대책위원회 1차 회의 최종 정리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특히 6번째 항목인 <온라인 범죄 관련자 캄보디아 재입국 금지 강화> 부분에 있어 과연 캄보디아 정부가 이 부분까지 손을 대려 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캄보디아 입국 관련 부분은 전적으로 캄보디아의 주권에 따른 부분이라 한인회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해서 캄보디아 정부나 외교 관련 부서들이 들어줄리 만무하다. 그리고 관련 범죄자 블랙리스트 정보를 캄보디아 정부와 공유한다고 하는데 ‘코리안데스크’ 설치도 거부한 마당에 정말 캄보디아 정부가 블랙리스트 정보를 공유하려 할지도 의구심이 든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필리핀에도 있는데 필리핀에 ‘코리안데스크’가 있지만 숫자가 매우 부족하다. 2025년 8월, 마닐라, 앙헬레스, 울롱가포, 세부, 딸락 등 5개 지역에 총 8개의 코리안 데스크가 공식 출범했지만 데스크 인원은 고작 3명 정도, 데스크가 이전보다 늘어난 만큼 인원이 늘었겠지만 그래봤자 10명 이하일 것이고, 한 5명 정도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사정을 봤을 때 만약에 된다 해도 3~5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 여행 주의 설정 지역도 범죄 주요 장소인 지역들은 여행 금지로 설정해 놓았고, 나머지는 특별여행제한 지역, 그리고 시아누크빌은 철수권고로 해놓았다. 다행히 완전히 캄보디아 전국을 여행 금지로 설정한 것은 아니라서 이 정도는 그나마 잘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부패한 현지 공권력이다. 범죄 조직이 수시로 상납하고 그 대가로 현지 경찰은 단속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는 것은 다 알려진 얘기다. 이는 캄보디아 뿐 아니라 필리핀도 유사하다. 양국의 공통점은 경찰관의 월급이 적어 상납금을 받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다는 것에 있다. 즉, 이는 현지 정부의 개선의지와 관련이 있다. 현지 정부 또한 부패하여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경찰 행정과 업무,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 관심이 없다보니 경찰의 일상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이는 부패로 연결된다. 필리핀의 주요 범죄는 셋업 범죄이지만 캄보디아의 납치도 사실상 필리핀의 셋업 범죄에서 진화된 또 다른 이름의 셋업 범죄다. 현지 경찰이 대대적으로 범죄 단지를 단속했다며 가끔 보도자료를 배포하지만, 이는 보여주기 식이고 잡힌 범죄자들은 보석금만 내면 석방되어 나올 수 있다. 한국에서 데려온 64명 대부분 범죄자들인데 각 범죄단지들의 규모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적어도 3~4,000명이 능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을 다 놓치고 데려온 64명은 꼬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진짜 머리들은 다 놓치고 꼬리들만 잡아서 데려오니 이들이 꼬리 자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같은 범죄를 셋팅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각 경찰들이 이들 범죄조직의 상층부에게 정보를 흘리고 이들은 사업장을 은밀히 정리한다. 이들이 정리하고 떠난 다음 범죄단지 내부에 들어오면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수사될 자료와 단서들을 찾는 다는 것은 모래에 떨어뜨린 바늘 찾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일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최고위원 요청으로 현지 경찰이 한국인 3명을 구출할 때도 보면 최소 수백명이 머물던 범죄 단지에 고작 한국인 3명만 남아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다. 결국 정보도 별로 없는 자들, 꼬리 자르기에 용이한 자들만 남겨 놓고 도주한 셈이다. 이들을 조사하여 캐네봤자 얻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들 범죄단지를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캄보디아 금융서비스 대기업 후이원(Huione) 그룹의 여러 계열사에 이사로 등재된 훈 토(Hun to)의 경우, 훈 마넷 총리와 사촌 지간이라, 훈 센 가문을 토벌하지 않으면 이들과 연관관계를 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범죄단지도 단속할 때는 범죄자들이 다 빠졌다가 다시 와서 범행하는 식으로 성행할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라오스 국경 지대를 통해 골든 트라이앵글로 들어가 미얀마와 연계해서 같은 방식의 하우스들을 설치하여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캄보디아 뿐 아니라 필리핀도 유사한 부분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있었을 시절, 이와 같은 경찰 부패는 많이 줄어들었었지만 현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 다시 두테르테 대통령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필리핀 경찰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셋업범죄’의 주 원인이다. 경찰은 범죄조직과 적극적으로 결탁해 외국인들의 가방, 호텔방, 사무실 등에 마약, 총기 등을 몰래 넣은 뒤 발견한 척 하고 협박하며 돈을 요구하는 수법에서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고소득 취업 사기, 온라인 도박 등으로 수법이 진화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경찰 봉급을 두배로 올려 방지하고자 했지만 봉봉 마르코스는 이를 원 상태로 돌려놨다. 과거 김미영 팀장 사건도 그러했고, 마약왕 박왕열 사건도 그러했다. 훨씬 이전에는 최세용 일당의 필리핀 5인조 납치 사건도 있었다. 필리핀이든, 캄보디아든, 그들 스스로 내부에서 정화하며 개혁하지 않는 한, 이런 범죄는 근절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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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필리핀의 공통점 : 공권력의 심각한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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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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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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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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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