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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내란 재판 불출석 후 구속적부심 출석…이상민 자택 압수수색
- [서울=2025.07.18.] 윤석열 전 대통령, 건강 문제로 내란 재판 불출석… 구속적부심엔 직접 출석하며 국민적 관심 증폭 윤석열 전 대통령의 건강 악화와 재판 불출석, 그리고 구속적부심 출석의 배경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하여 내란 및 외환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윤석열 전 대통령이 18일 오전 10시 15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적부심 심문에 직접 출석하여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구속된 이후 특별검사팀의 조사와 내란 재판에는 연이어 불출석해왔으나, 이번 심문에는 건강 악화를 직접 호소하며 참석하여 그 배경에 대한 다양한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실체적 혐의와는 별개로, 기력 저하와 혈당 상승 등으로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구속 상태가 지속될 경우 회복이 어렵다”며, “이번 출석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건강 보호를 위한 절박한 결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구속된 피의자의 건강 문제가 재판 진행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중요한 사례로 기록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구속된 피의자의 건강 문제로 인한 재판 연기 또는 심문 불출석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건강상의 이유로 인한 재판 연기 또는 불출석 신청은 연평균 150여 건에 달하며, 이 중 약 70%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고령이거나 지병을 앓고 있는 피의자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윤 전 대통령의 경우 고령은 아니지만 구속 수감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심리적 압박이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압수수색으로 드러난 '언론 통제' 의혹의 심화 한편, 윤 전 대통령의 내란 및 외환 혐의 수사는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17일에는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진행되어 국민적 충격을 안겼습니다. 내란특검팀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이 전 장관의 자택과 정부청사 내 집무실, 소방청장실 등 총 9곳을 압수수색하여 언론사 단전·단수 관련 도면과 작전지도 등 핵심 증거들을 확보했습니다. 이 전 장관은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 소방청장에게 한겨레·경향신문·JTBC 등 특정 언론사에 단전·단수를 실행하라고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특검은 윤 전 대통령이 이 전 장관에게 해당 지시를 내렸고, 이후 지시가 소방청 지휘체계를 통해 실제 전달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과거 군부 독재 시절 언론 통제 사례를 연상케 하는 심각한 사안으로,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언론 통제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중 물리적 탄압과 언론사 길들이기는 가장 흔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번 단전·단수 지시 의혹은 이러한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특검은 이 같은 지시가 단순한 ‘국민 안전 우려’가 아닌 실질적 통제 조치로 이어질 수 있었던 중대한 내란 행위로 판단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상민 전 장관은 관련 지시를 부인하고 있으나, 소방청 고위 관계자들의 진술과 CCTV 자료 등에서 상반된 정황이 다수 확인된 것으로 알려져 진실 공방이 가열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최근 법조계에서는 이번 압수수색에서 확보된 '작전지도'가 단순한 우발적 지시가 아닌 사전에 계획된 언론 통제 시도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향후 재판 전망과 국민적 관심 현재 윤 전 대통령은 내란 재판에는 2주 연속 불출석 중이며, 이후 건강 상태에 따라 출석 여부를 재논의할 예정입니다. 이번 구속적부심 출석이 건강상의 이유임을 주장하는 만큼, 향후 특검팀과의 대치 국면에서 건강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이상민 전 장관에 대한 수사가 더욱 심화됨에 따라 윤 전 대통령의 내란 혐의에 대한 증거가 추가적으로 확보될지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이번 사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직 대통령의 내란 혐의와 언론 통제 의혹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사법부의 엄정한 판단과 진실 규명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향후 재판의 진행 과정과 결과는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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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내란 재판 불출석 후 구속적부심 출석…이상민 자택 압수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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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찐윤’ 논란 속 혁신 드라이브…국민의힘 당 구조 대수술
- 국민의힘, '최고위원 폐지' 단일지도체제 전환으로 리더십 강화 시동…혁신 성공할까? [서울=2025.07.11.] 국민의힘이 당 혁신을 위한 중대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7월 11일, 윤희숙 신임 혁신위원장 체제 아래 최고위원회를 폐지하고 당대표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전환하는 혁신안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당내 고질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책임 있는 리더십을 구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낮은 지지율과 당내외의 비판적인 시선 속에서 이번 혁신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최고위원 폐지, 단일지도체제 전환의 배경과 목표 국민의힘 혁신위원회는 이날 제2차 회의를 통해 현행 혼합형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당대표의 단일 지도체제를 강화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기존 최고위원제는 당대표와 최고위원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당내 혼란을 야기하고, 중요한 결정을 신속하게 내리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실제로, 지난 2022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시 최고위원들의 잦은 이견 표출과 공개적인 비판은 당내 혼란을 가중시켰고, 이로 인해 당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하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혁신위는 최고위원회를 폐지함으로써 당내 갈등과 '이전투구'를 줄이고, 당대표에게 책임과 권한을 집중시켜 신속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새롭게 도입될 중앙당무회의는 당대표,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청년·여성위원장 등 총 9명으로 구성되어 매주 두 차례 회의를 통해 당무를 결정하게 된다. 이는 기존 최고위원회의 의사결정 방식보다 효율성을 높이고, 당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을 간소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전국 시도당 대표들이 참여하는 ‘전국민심회의’를 함께 구성하여 당의 민심 수렴 구조를 강화하고, 지역별 민심을 중앙 당무에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당이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윤희숙 혁신위원장의 리더십과 '인적 쇄신' 논란 이번 혁신안은 7월 9일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이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된 이후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윤 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재창당 수준의 혁신을 이루겠다"고 밝히며 강력한 혁신 의지를 피력했다. 그러나 동시에 "인적 쇄신의 칼을 휘두를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강조하여, 기존 안철수 의원 등이 제기했던 지도부 책임론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당내 인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구조적인 혁신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일각에서는 '알맹이 없는 혁신'이라는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당내외의 비판과 혁신 성공의 과제 이번 혁신안 발표는 국민의힘의 정당 지지율이 19%로 추락한 가운데 나온 것으로, 당 안팎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김상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의힘 주류는 지지율 하락에도 무감각하다”고 비판하며, ‘언더 찐윤’이라 불리는 숨은 친윤 세력이 수면 아래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며 혁신 시도 자체에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는 국민의힘이 진정으로 변화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외부의 강한 의구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내에서도 모든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의원들은 “혁신위 동력은 이미 상실됐다”며 전당대회를 통해 빠르게 새로운 당 지도체제를 출범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이는 혁신위가 제시하는 개혁안이 충분하지 않거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당내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다. 실제로 최근 한국갤럽 여론조사(2025년 7월 첫째 주)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19%로 직전 조사 대비 3%p 하락했으며, 이는 2020년 4월 총선 이후 최저치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신위가 당내외의 비판을 잠재우고, 당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혁신안은 비상대책위원회에 보고된 후 당원 투표에 부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당원 투표는 혁신안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당원들의 지지를 얻는 중요한 절차이지만, 동시에 당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될 수 있는 장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당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혁신안 추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국민의힘의 이번 '최고위원 폐지' 단일지도체제 전환은 당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하려는 과감한 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낮은 지지율, 당내외의 비판, 그리고 '인적 쇄신'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과연 윤희숙 혁신위원장 체제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국민의힘을 진정한 의미의 '재창당' 수준으로 혁신시킬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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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찐윤’ 논란 속 혁신 드라이브…국민의힘 당 구조 대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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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첫 재구속…윤석열, 내란·허위공문서 등 혐의로 서울구치소 수감
- 윤석열 전 대통령, 124일 만에 재구속…특검 “비상계엄·외환 혐의 정조준” [서울=2025.07.10.]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4일 만에 다시 구속됐다. 조은석 특별검사팀이 12·3 비상계엄 선포 의혹을 수사하기 시작한 지 22일 만에 신병을 확보한 것으로, 헌정사상 전직 대통령이 두 차례 구속되는 초유의 사례가 기록됐다. 서울중앙지법 남세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0일 새벽 2시7분께 윤 전 대통령에 대해 직권남용, 특수공무집행방해, 허위공문서 작성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구속 사유에 대해 법원은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명시했다.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구속은 지난 3월 8일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으로 석방된 이후 124일 만이며, 이번 구속으로 인해 조 특검은 외환 혐의 등 추가 혐의 수사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유리한 국면을 맞았다. “증거인멸 우려”에 구속…영장심사 6시간 넘게 공방 윤 전 대통령은 전날 오후 2시22분부터 9시까지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했다. 총 6시간40분에 걸친 공방은 검찰과 변호인단이 치열하게 맞선 결과였다. 조은석 특검팀은 박억수 특검보, 김정국·조재철 부장검사 등 10명의 검사들이 178쪽 분량의 PPT와 300쪽에 달하는 의견서를 통해 윤 전 대통령의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 핵심은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를 주도했으며, 재범 위험이 크고, 수사에 비협조적이며 증거인멸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특검은 특히 윤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 심의 과정에서 일부 국무위원을 배제하고, 허위 계엄 선포문을 사후에 작성하게 했으며, 외신 대응용 허위 공보문 작성도 지시한 점을 강조했다. 또한 지난 1월 대통령경호처에 총기를 소지하도록 한 의혹과 비화폰 통신기록 삭제 지시 혐의도 구속 사유에 포함됐다. 이에 맞선 윤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해당 혐의들은 이미 내란 사건과 함께 기소된 내용으로, 별도의 재구속 사유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다. 윤 전 대통령도 직접 최후 진술에 나서 “계엄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야당의 입법 폭거를 견제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환 혐의 본격 수사 예고…“무인기 북파 의혹” 정조준 이번 구속영장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특검은 윤 전 대통령의 외환 혐의 수사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의혹은 윤 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 북측의 군사 도발을 유도했다는 혐의다. 특검은 이 계획이 비상계엄 선포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군 관계자와 청와대 인사들에 대한 참고인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특검은 앞으로 20일간의 구속 기간 동안 윤 전 대통령을 추가 조사할 예정이며, 외환 혐의를 포함한 추가 기소도 검토 중이다. 3평 독방, 무더위 속 구치소 생활…대통령 경호도 중단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서울구치소에 도착한 뒤 일반 구속 피의자와 동일한 절차로 수감됐다. 수용번호가 부여되고, 머그샷 촬영 및 신체검사를 거친 후 미결 수용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용된 방은 약 3평(10㎡) 규모로, 침대 없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야 하며,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아침 식사는 미니치즈빵, 찐감자, 종합견과류였다. 윤 전 대통령에게 제공되던 대통령경호처의 경호는 구속과 동시에 중단됐다. 이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구속 상태에서는 경호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검의 전략적 구속, 정국에 미칠 파장 주목 이번 구속은 조은석 특검의 전략적 속도전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특검은 출범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핵심 인물의 신병을 확보함으로써 수사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동시에 아직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외환 혐의 수사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게 되면서, 향후 윤 전 대통령뿐 아니라 관련 인물로 지목된 군 고위 인사들과 정치권까지 수사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구속을 두고 “사법 정의 구현”과 “정치 보복”이라는 상반된 해석이 엇갈린다. 여당은 특검 수사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협조를 예고한 반면, 야당은 “검찰권의 정치적 남용”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조은석 특검팀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윤 전 대통령을 기소할지, 그 과정에서 외환 혐의의 실체가 드러날지는 향후 정국의 핵심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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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첫 재구속…윤석열, 내란·허위공문서 등 혐의로 서울구치소 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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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 123일 만에 재구속 심사…운명의 날 9일 도래
- 윤석열 전 대통령이 9일 오후 2시 15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직접 출석한다. 이는 내란 특별검사팀이 지난 6일 청구한 구속영장에 따른 절차로, 지난 3월 8일 구속 취소 이후 123일 만에 재구속 여부가 다시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된다. 서울중앙지법 남세진 영장전담 부장판사 주재로 열리는 이번 심사는 내란,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등 중대한 혐의들이 포함돼 있어 향후 정치적, 법적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윤 전 대통령은 심사에 출석하되 직접 발언은 하지 않고, 변호인단을 통해 변론할 것으로 알려졌다. 혐의의 핵심: ‘12·3 불법 계엄’과 비화폰 지시 특검이 윤 전 대통령에게 적용한 혐의는 총 다섯 가지로, 내란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비화폰 통화기록과 증인 진술을 토대로 한다. 우선 가장 핵심이 되는 혐의는 2023년 12월 3일 선포된 비상계엄과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지시들이다. 윤 전 대통령은 당시 일부 국무위원만 소집해 국무회의를 열었으며, 이를 통해 계엄의 외관만 갖춘 채 심의·의결 없이 계엄을 선포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검은 이 점을 들어 ‘국무회의 심의권 방해’라는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했다. 또 계엄 선포 이후 강의구 전 대통령실 부속실장이 사후에 허위 계엄 선포문을 작성하고, 윤 전 대통령이 이를 결재 후 폐기하도록 지시한 혐의(허위공문서 작성,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공용서류 손상)도 중대하게 보고 있다. 특히 이번 구속영장 청구의 ‘스모킹 건’으로 거론되는 것은 윤 전 대통령의 비화폰 통화 내역이다. 특검은 윤 전 대통령이 체포영장 집행을 앞두고 경호처 간부들과 최소 6회 이상 통화하며, 수사기관의 진입을 막으라고 지시한 정황을 확보했다. 이에 대해 윤 전 대통령 측은 “보안 지침에 따른 행동일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특검의 주장: “도망·재범·증거 인멸 우려 있어” 특검 측은 구속 필요성을 강조하며 △도망 우려 △재범 위험성 △증거 인멸 가능성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이 여전히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지지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부추길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실제로 ‘서부지법 난동 사건’처럼 윤 전 대통령의 법원 출석일에 맞춰 지지자들이 집단 행동을 벌인 사례도 제시되었다. 특검은 또 윤 전 대통령이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핵심 증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수사의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윤 전 대통령 측이 구속영장 청구서 일부 내용을 언론에 유출한 점도 ‘구속 필요성’의 근거로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의 반박: “정치 보복이자 무리한 기소” 윤 전 대통령 측은 특검의 혐의 적용이 “정치적 의도를 띤 과잉 수사”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미 내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출석하고 있고, 출국도 금지된 상황에서 도주 우려는 지나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계엄 선포 당시의 공보 지시 역시 “당시 상황에서 합법적 절차에 따라 외신 대응을 한 것”이라며 직권남용 혐의를 부인했다. 또한 비화폰 통화기록 및 문서 삭제 지시에 대해서도 “사후적 보안 조치였을 뿐, 범죄 성립은 어렵다”고 맞섰다. 특히 윤 전 대통령 측은 계엄 선포문 폐기와 관련해 “행정적 착오였을 뿐 고의적인 위법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법원의 판단에 쏠리는 눈…이르면 9일 밤 결론 윤 전 대통령의 구속 여부는 빠르면 9일 밤, 늦어도 10일 새벽까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할 경우, 윤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석방된 이후 다시 구속되며, 12·3 계엄 관련 사법적 책임 논의가 더욱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번 심사 결과는 단순히 한 전직 대통령의 신병을 넘어서, 한국 민주주의의 법적 기준과 권력 남용의 경계선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과연 법원은 특검의 구속 필요성 주장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윤 전 대통령 측의 ‘정치 탄압’ 프레임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 전국의 이목이 법원의 판단에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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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 123일 만에 재구속 심사…운명의 날 9일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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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광주 군공항 이전 갈등 직접 해결 나서… 대통령실 TF 구성 지시
- [광주=2025.06.25.] 이재명 대통령, ‘광주 군공항 이전’ 갈등 해결 위해 대통령실 주도 TF 구성 지시... 첫 호남 방문서 갈등 조정 본격화 이재명 대통령이 25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광주시민·전남도민 타운홀미팅’에서 지역 간 첨예한 갈등으로 이어져 온 ‘광주 군공항 이전 문제’ 해결에 정부가 직접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현장에서 즉석으로 광주시, 전남도, 무안군과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국방부가 참여하는 6자 협의 태스크포스(TF)를 대통령실 주도로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갈등 당사자인 지역과 정부 부처, 외부 전문가, 주민까지 포함된 구조로, 국가 차원의 중재와 책임을 통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광주 군공항 이전 논의는 2013년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며 본격화됐지만, 17년간 광주와 전남 무안군 간 갈등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광주시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군·민간공항을 전남 무안으로 통합 이전하려는 계획을 추진해왔고, 이는 서남권 관문공항 건설이라는 지역 발전 전략과도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무안군은 소음, 환경오염, 주민 지원금 문제 등을 이유로 이전에 강하게 반발해왔다. 이날 타운홀미팅은 이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진행한 대국민 간담회이자, 첫 호남 방문 일정이기도 하다. 참석자 규모는 당초 100명으로 제한됐으나, 대통령의 지시로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되며 약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2시간 20분 넘게 진행됐다. 대통령이 직접 사회를 맡고 참석자들과 일일이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그 자체로도 파격적인 ‘소통 행정’으로 평가받았다. 이 대통령은 광주와 무안 간 대립이 팽팽한 상황에서 중재자로서 나섰다. 강기정 광주시장이 “1조원 규모의 이전 지원을 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김산 무안군수는 “믿을 수 없다”며 단호히 반대 입장을 밝혔고, 김영록 전남지사는 “군·민간공항 통합이 지역 발전의 계기”라고 강조했지만 무안군 측은 이를 광주 편으로 간주하며 수용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SPC(특수목적법인) 구성 시 무안군이 우선 이익 취득권을 갖도록 하면 된다”며 “제가 SPC 전문이지 않냐. 대장동… 뭐 해 먹는 전문은 아니다”라고 재치 있게 발언해 긴장을 완화하기도 했다. 무안 지역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도 제시됐다. 이 대통령은 “소음 피해 반경은 활주로 10km 이내인데, 실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측정하자”며 직접 현장 조사를 지시했고, 주민과 대학 총장에게 소음 인식을 일일이 확인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이런 것도 불신의 원인이니 객관적 데이터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타운홀미팅은 단순히 지역 현안을 넘어서서 국가 균형 발전 의지를 천명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수도권 집중이 모든 문제의 뿌리”라며 “지역균형 발전 없이는 국가의 미래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수도권과 지역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일정이 내년 6월 3일로 예정된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전략적 행보라는 해석도 나온다. 대통령실 인선에서 영남권 중심의 배치가 이어지고,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등 영남 지역 공략이 계속되자 호남 정가에서는 ‘홀대론’이 제기돼 왔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대통령이 직접 호남을 찾아 민심을 청취하고, 지역 핵심 현안을 직접 조율하며 지역 민심 다잡기에 나섰다는 평가다. 이날 이 대통령은 부인 김혜경 여사와 함께 전남 고흥 국립소록도병원을 찾아 한센병 환우를 위로했다. 이는 대선 기간 김 여사가 “선거 후 남편과 꼭 다시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실천한 것으로, 현직 대통령의 소록도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여사는 이어 광주 오월어머니집을 찾아 5·18 유공자 유족들과 면담하며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번 행보는 단순한 민원 청취를 넘어, 지역 갈등을 해결하고 정부가 책임지는 정치를 실현하려는 상징적 선언으로 평가된다. 타운홀 형식의 소통 방식은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확대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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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광주 군공항 이전 갈등 직접 해결 나서… 대통령실 TF 구성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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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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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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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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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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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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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위의 자유, 그의 몰락
- 윤석열 전임 대통령은 지난 3월 8일 법원과 검찰의 기묘한 법 해석으로 구속 취소된 후 124일 만에 다시 구속되었다. 우리의 언론은 그 사건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가 싶어 몇몇 신문의 헤드라인 기사만 훝어 봤다. 조선일보는 ‘머그샷 찍고 에어컨 없는 3평 독방 수감’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도 대동소이하였다. 아침은 미니치즈빵, 찐감자라고 한다. 중앙일보는 ‘외환죄, 국힘 내란공모 의혹 정조준’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한겨레 신문은 ‘외환 혐의 정조준’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법 위에 군림하려고 했던 한 인간의 몰락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론마다 차이가 났다. 하지만 어느 신문에서도 법 위에 군림하면서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던 전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비판의 글을 실은 기사는 보지 못했다. 그는 재임 중에 무엇보다도 ‘자유’를 많이 외쳤다. 비상계엄 선포 이유 중에도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그는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한다’라는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가 말하는 자유에는 반공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외부의 어떤 강제가 없는 상태를 포함하기도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유방임이다. 그것이 바로 소수 기득권이 강조하는 강자의 자유이다. 그것이 자유의 모든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자유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버틀런드 러셀은 자유주의 철학을 처음 포괄적으로 종합한 사람으로 로크를 꼽았다. 그의 <통치론>이란 책이 18세기 미국 정치가들의 필독서로 소개되었다고 하니 러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로크의 <통치론>은 그 당시 왕권신수설을 믿고 따랐던 필머를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다. 로크가 비판한 필머의 자유 개념은 ‘권력자의 자의적 자유’였다는 점에서 윤석열은 필머와 닮았다. 어쩌면 윤석열은 21세기에 왕권신수설을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오랜 검찰 생활을 통하여 자신이 타인을 죄인이라고 명하면 그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에 자신이 신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검찰 생활에 익숙했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로크는 <통치론> 4장에 이렇게 말한다. “자유란 로버트 필머 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사람마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살며, 어떠한 법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가 아니다. 정부 아래에서 인간의 자유란 일정한 규칙, 곧 그 사회에서 설립된 입법권에 따라 제정되고 그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통된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자유는 일정한 법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그러한 법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보장해주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법 위에 군림했던 윤석열과 김건희에게 법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고, 또한 나아가서 정당화시키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 도구로서의 법을 이용하여 얼마나 많은 정적들을 괴롭혔나? 조국 가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권력에 빌붙는 속성을 버리지 못한 언론과 일부 지식인들은 또 얼마나 권력에 충성을 했는가? 자유는 결코 나만의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자유를 강조할 때, 그리고 그런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가 휘두르는 자유는 타인에게는 흉기로 다가올 뿐이다. 늑대의 자유는 양떼의 죽음이다. 로크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로크는 이성의 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즉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의 이익이 충돌을 일으키지만, 이성의 법을 통해 그 충돌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로크는 몽테스키외에 앞서 법과 재판관, 법을 행하는 권력이란 불완전한 형태였지만 권력 분립을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로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물론 로크는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면서 자본주의의 경쟁을 옹호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로크의 생각이 영국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놓게 되었다는 점과 고전적 자유주의자의 한 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시 음미해 볼 만하다고 본다. 윤석열의 몰락은 한 시대의 불행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우리는 이를 계기로 자유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나친 개인주의로 말미암은 지나친 경쟁은 많은 인간을 불행에 빠트린다. 자유는 자유로운 경쟁이 아니라 협동 속에서 꽃이 핀다. 자유는 자기 실현이다. 어떻게 자기 실현을 하는가? 데카르트 식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이제는 버려야 한다. 네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관계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제 자유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더 이상 윤석열과 같은 불행한 인간이 사회 지도층에 등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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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위의 자유, 그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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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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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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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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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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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는 프랑스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미국 J. D. 밴스 부통령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루마니아 우파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 당시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약 25,000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이 있기 15일 전부터 조르제스쿠 후보와 관련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했으며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EU 자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뭐든 러시아 탓으로 돌릴 예정인듯 싶다. 칼린 조르제스쿠 후보를 낙마시키고 다시 치러진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루마니아 우파 세력 후보인 조르제 시미온(George Simion)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전 EU는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 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Nicușor Dan)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이었다. 그는 그 날 텔레그램 채널에서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두로프는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로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 수호는 있을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타 국가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으며 루마니아 국민들은 둘 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X에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의혹을 재기한 사람이 넷상에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 또한 두로프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주장을 부인했다. 물론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Fake"라고 적었다. 그러나 두로프는 지난 5월 20일 SNS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요 목적은 항상 지정학적인 문제를 두고 언급했었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주 내용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는 2025년 봄, 니콜라 레르네르(Nicolas Lerner)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엄연히 국제 개입에 위한 선거 공작이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지키겠다 했ㄷ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5월 20일 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24년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두로프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I'm ready to go and testify if it helps Romanian democracy)."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5월 22일에 열린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인 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에 두로프는 다시 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일찌기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인 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이에 대처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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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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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그레이트 게임은 현재 역사 용어가 아닌 정치 외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는 183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하기도 하면서 1905년 러일전쟁까지를 일컫기도 한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시아 남부 지역을 노리자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가운데 비롯되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1842년 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진격했다가 역습을 당해 패배하여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 등 1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와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고 이 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리전 상대로 일본이 나서게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맺어진 동맹인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인도와 호주, 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했던 셈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러시아하고도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 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서방 나토 세력까지도 가세해 거대한 서구 연합이 생성되었다. 이 동맹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그 상대는 러시아였다. 그리고 여기에 새롭게 중국이 가세했으며 중립을 지키던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아프리카까지 러시아와 중국과 가까워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사우디아라비아 및 이란, 터키로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밀착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쿼드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지만 최근 인도는 친러로 돌아섰다. 또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원래 중국이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쿼드 동맹과 성명에서부터 제3차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2021년 9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4명의 정상들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1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4개국 정상들은 회담 이후 성명에서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4국이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는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2020년 카슈미르 산악 지대에서 영토 분쟁에 있던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의 힘을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당시 성명에서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 전문가 누구든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성명에서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성명에 의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고 하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하며 북한을 압박하기도 했다. 성명에서 나온 미얀마 관련된 것에서 미얀마 군부로 하여금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 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에 대한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했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 북한 정책 기조가 될 것임을 알렸다. 한국은 당시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19세기 말 그레이트 게임 때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러시아까지 이 분쟁에 끼어들어 우리 한국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 그 때는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지만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되면서 1885년 4월 영국은 조선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거문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와 같이 중립화 및 완충지대로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남쪽 바다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兪吉濬)이었다. 당시 유길준은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길이라 주장했다. 당시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 · 프랑스 · 일본 · 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절이었기에 조선의 중립화론은 청나라가 조선을 종속국 상태로 놓아두려 했었던데다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남겨두려 했었기 때문에 지식인의 주장 중 하나로 단순하게 인식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 세력이 청나라를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했고, 해양 세력이 영국을 대신해 일본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외교, 군사적인 역량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두 세력이 1895년부터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으며 이는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시 고종은 1897년에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으며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대로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바뀐 현재, 우리는 러시아, 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한반도는 이들 국가들의 지리적, 지정학적 요충지로 설정이 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해당 국가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아래에 온통 날카로운 못이 박힌 대지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거나 다름없는 형세인 것이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러시아가 끼어들면서 달라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 중, 러 구도가 되고 한, 미, 일 구도로 굳어지고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동 사태들이 해결된 이후에는 그 또한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을 주도로 한 시아파, 사우디 주도의 수니파, 그리고 이스라엘이 버티는 중동 사태를 이후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나 국제정세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크게 변할 수 있는 변수가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국제관계의 예측은 50:50의 확률이다. 그 50% 확률의 국익을 하나라도 더 취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행동이 바로 외교(Diplomacy)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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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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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속의 자유
- 200년 전 미국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1830년대 미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토크빌의 글에서 그 당시의 삶을 그려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운영에 관여하고 또 그것에 대해 토의하는 것은 미국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그들이 아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물론 토크빌의 글이 그 당시 프랑스의 귀족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미국을 과도하게 미화했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토크빌이 본 미국은 평등한 사회였고, 자유와 자치가 함께 어우러진 사회로 미국 사회를 그리고 있었다. 토크빌에게 자유란 개인을 위한 사적 자유를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마을 자치를 염두에 두는 공적 자유였다. 최소한 이웃과 함께하는 자기 실현을 꿈꾸는 자유였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으로서 트럼프가 보여 주는 행동은 200년 전의 미국보다 한참을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의 50년 전 모습도 어쩌면 200년 전의 미국의 모습과 유사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내가 살았던 김천이라는 지방 소도시는 개인보다는 마을공동체 중심의 사회였다. 그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다. 어머님은 이웃집의 밥그릇 숫자까지 모두 알고 계셨을 것이다. ‘가메실’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컸다. 집에 감나무가 12그루 있었으니 그 규모는 짐작이 될 것이다. 감을 수확하는 시절에는 이웃들과 함께 수확하고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물론 나도 이웃의 잔칫날에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그 집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동네 뒷동산에 올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면서 놀았던 기억, 동네 큰 나무에 새끼줄로 그네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힘차게 그네를 타는 모습들, 마을 공동 우물터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모여 빨래하던 장면들이 기억에 떠오른다. 마을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여, 요즘은 공동체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는 개인 중심의 자유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자연과학의 발달이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새로운 개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홉스와 로크, 에담 스미스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홉스가 자기 생존권을 강조했다면, 로크는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했고, 스미스는 시장에서의 자유를 강조했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고전적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점차 짙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소수의 자유 실현이 대다수의 부자유라는 자유주의 역설이 그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부는 점차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가난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두어야 했다. 그로부터 자유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자유주의가 그 무렵 등장했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20세기 초 영국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개혁정책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이론이었다. 홉하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자유주의가 외적 억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했다면, 사회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주장하며 사회적 책임과 협력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로 보았다. 그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자유주의가 지나친 이기주의로 변모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사회주의 역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홉하우스는 사회를 유기체로 보았다. 개인과 사회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사회 정의는 개인의 노력에 따른 성과는 개인의 몫이지만, 사회가 만들어 낸 부는 사회구성원 공동의 것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개인의 성과에는 개인의 노력 외에 사회적 몫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디.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은 당연히 인정하지만, 그 속에는 사회 공동체의 기여도 있으니 그 기여분은 세금으로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의 이론은 사회복지의 확대를 통한 소득 불평등을 확대하자는 이론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이론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사회적 자유주의는 고전적 사회적 자유주의로 일컫는다. 이런 자유주의의 변천사 중 아주 작은 한 부분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는 사회 속에서의 자기 실현이다.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우선은 이사야 벌린이 말한 소극적 자유, 즉 외부의 방해가 없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개인은 사회 속에 고립된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다.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인이다. “개인을 파편화된 개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관계 속의 개인으로 보는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180도 달라진다. 나는 불교의 연기설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러한 관계 맺음의 조건은 수시로 변화하기에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교는 미물의 생명도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시대는 세계관에 대한 페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서구 중심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관계중심적 세계관으로의 변화이다. 그 속에서 고전적이지 않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자유주의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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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속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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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그리스 정부와 정당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경제 위기
- 그리스는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IMF와 EU에게 빌린 돈의 규모가 수백조 원 수준에 이르고 있다. IMF와 EU는 그리스의 국채를 가지고 있는 민간은행의 국채를 상환 의무가 있는 그리스 정부 대신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 정부에 대한 구제 금융을 지원했다. 즉 2015년에 와서는 대부분 그리스의 국채를 민간이 아니라 IMF와 EU, 그 중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 정부는 이들 IMF와 EU, 독일 및 프랑스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IMF와 EU에게 있어서 이 구제 금융 채권 상환은 일종의 구상권 청구인 것과 같다. 그냥 그리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가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도 같은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돈줄을 쥐고 있는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이 엄청나게 손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협상은 순탄치 않게 진행되었다. 벌써부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은 견제에 나서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렉시트라 불리는,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 자체도 용인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돈 갚을 것을 압박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급진좌파인 시리자 정권의 집권 이후 기존의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 내각에서 추진하던 긴축 정책를 철회하는 일환으로 공기업이나 국유 자산의 민영화 및 매각 작업을 속속 철회했다. 사실 이를 덮어씌우게 된 나라가 바로 중국인데 중국은 많은 그리스 자산을 인수하려고 계약까지 한 상황이었다. 계약 직후, 중국의 계약 자체가 무효화되어 번복당하게 된 것이다. 이미 그리스의 경제 위기로 인해 그리스의 주식 시장은 붕괴 상태였지만 그나마도 시리자 당의 집권 이후 연일 폭락의 향연이 벌어졌다. 당시 매일 6~7%, 심하면 9% 이상씩 떨어졌다. 특히 2015년 1월 26일~1월 28일 3일간만 해도 무려 20% 넘게 폭락했다. 주식의 어마어마한 대폭락은 그리스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의 자산 이탈이 심해졌고 2011년 이후 그 빈도수는 높아졌다. 시리자의 급격한 반(反)긴축 성향이 IMF, EU등 채권자와의 갈등을 일으켜 자칫하면 그리스가 디폴트를 맞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수상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평소에 뉴욕타임즈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챙겨보았던 것이 주효한 것인지, 아니면 채무탕감의 명분을 쌓을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리스에 대한 최대 채권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기존 제재의 연장 자체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같이 반대하지 않았다 해도 EU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대응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으로 상징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에 대해서 추가제재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출한 것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러시아에서 그리스에서 요청만 해준다면 재정지원을 해줄수 있다고 밝히게 된다. 이에 대해 그리스의 증시는 다시 반등세를 탔고 러시아도 유가하락과 경제제재로 인해 자국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돈이 남아 돌았던 탓인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때와는 다르게 3700억 달러 수준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러시아가 몇 년 정도를 어렵게 나마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되기는 했다. 외환보유고가 떨어져 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러시아가 이미 경제 제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아는 EU 입장에서는 그저 그리스의 경제를 공략할 명분만 추가될 뿐. 시리자도 이와 같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재 연장에는 찬성했다. 그리스 금융위기 이후 IMF, EU, ECB (European Central Bank)가 구제금융을 하면서 언론에서 이 세 기관을 한 집단으로 묶은 것을 트로이카라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트로이카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보니까 국가부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프랑스에서 부채 관련하여 재협상을 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히게 되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도 그리스의 구제 금융 재협상을 지지했다. 그리스 정부로서도 일단 조금 온건하게 의견을 발표하여 일단 자금 융통에 대해 조금 트여 있는 상황에 있다. 물론 프랑스도 재협상에 응할수 있다고 했지만 그리스 정부에서 요구하는 채무 탕감은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금 융통이 조금 트였다는 얘기일 뿐이다. 프랑스도 그리스 지역에 투자한게 많긴 하지만 2012년 이후 부채 정리가 있었기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로이카와 독일이 요지 부동인 상황이기 때문에 파국은 시간 문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결국 채무탕감 요구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ECB와 독일이 그리스 시리자 정부에서 내놓은 국채 담보 안을 승인하지 않게 되면서 그리스 정부는 2015년 3월 디폴트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월 이전까지 시리자 정부가 ECB, 독일 정부한테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서 그리스 정부는 미국, 러시아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거론하면서 중국에서 돈을 빌려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프라스 총리가 리커창 중국 총리에게 초청 받았다는 것도 공개했다. 그리고 리커창 중국 총리는 차프라스와의 통화에서 시리자에 집권하자 마자 민영화를 취소한다는 식으로 발표하며 뒤엎으려 했고 피레우스 항 프로젝트를 복구하라 요구했다. 그래서 차프라스는 이를 보장하는 답변을 했다. 2015년 2월 12일~13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45.4%를 얻어 2위인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을 크게 앞서게 되었다. 아마도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듯 싶다. 재협상을 앞두고 그리스 곳곳에서 친(親) 정부 시위 또한 발생했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리스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다. 2015년 6월 5일로 예정된 만기까지 3억 700만 유로, 한화 약 3700억 원을 상환해야하는데, 이조차도 없다고 그리스 정부에서 나오고 있다. EU와 IMF가 제시한 긴축 재정은 여전히 실시하지 않으면서, 빚 갚을 생각을 전혀 안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현재 EU와 IMF는 그리스의 디폴트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시리자가 몰락한 다음 이후 선거를 기대하는 실정에 있다. 물론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 뒤, 할 수 있는 선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2015년 7월 5일, 치프라스는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로 진퇴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리스의 여론조사 결과, 지난달 말 카파 리서치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47.2%, 반대 33.0%로 나타났지만 자본 통제 이후에는 반대의 세력들이 시리자에 결집하면서 반대 54% 찬성 33%로 대역전을 일구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수상은 더욱 더 가열차게 반대표 결집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여론조사기관 GPO가 이날 발표한 결과에서는 다시 찬성 47.1%, 반대 43.2%로 뒤집하게 된다. 이는 여러모로 팽팽한 접전이었고 반대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그리스 의회는 여러모로 고민하게 된다. 결국 7월 5일 국민투표가 시리자 내각의 진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어이 2015년 7월 5일 2015년 그리스 구제 금융 국민투표에서 구제 금융 반대 61% 찬성 39%라는 엄청난 득표율 및 일방적인 득표차로 구제 금융을 부결시킴은 물론 시리자 정권의 연장에도 가볍게 성공하게 된다. 출구조사 때까지만 해도 52:48의 근소 우세로 점쳐졌던 것이 순식간에 뒤집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자 정권이 크게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EU 입장에서는 그리스를 자기들에게서 축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긴축에도 견디지 못했다. 이는 그리스 정부의 공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소위 기득권층의 복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상류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은 유럽과 IMF 간에 이해 관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EU측은 부자들이 탈세를 하면 뒤엎어 버리라는 식이지만 IMF는 부자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가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는 재산업화를 추진한 것도 아니다. 부패와 기형적 형태의 정치문화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시리자 정권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시리자가 그 일부에 기여했으며 시리자가 정권을 잡고 집권을 거듭하고도 개혁을 그 동안의 공약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중국은 주식이 폭락했었기에 한국 입장에서는 더욱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자국 시장에 돈을 엄청나게 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여력이 없고, 러시아는 저유가 및 낮은 천연가스 가격으로 인해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크림 및 돈바스 지역에 개입했다가 서방 제재로 인해 GDP가 절반으로 폭락할 정도로 허약한 상황에 있었다. 다들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인데 그리스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기본적으로 신용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만 그리스를 지원하겠다 말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 집권 정당인 시리자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첫 번째, 국민들의 반대 요구를 무시하고 긴축을 계속하는 것은 EU가 그리스 정부에게 재국민투표를 요구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보았다. 아일랜드도 처음에는 EU 리스본 협약에 사인할 때 국민투표로 부결되었지만, 2009년에 다시 투표를 하여 민주적인 정당성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정권이 퇴진한 뒤 악역을 중도파에게 넘겨 혼란을 주는 것, 세 번째, 그냥 나라가 망하는 길로 종합하여 세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결국 7월 중순, 시리자는 정당의 보존을 위해 고강도 긴축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렉시트를 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으나 그랬다가는 서드 임팩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알아서 붕괴 될 것이니 별 수 없는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2015년 8월 20일 시리자가 구제 금융 찬반으로 인해 분당되자 그리스 국회의 의회를 해산하고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2015년 9월 20일 조기 총선을 시행할 것을 정했으며 당시 여론조사에 의하면 시리자의 지지율은 급락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의 과반보다 못한 1당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나마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이 부진하여 1당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야당이 올곧게 건재했다면 이와 같은 경제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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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그리스 정부와 정당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경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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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특검 기소 공방: 언론이 비춘 다섯 개의 시선
- 내란특검 기소 공방: 언론이 비춘 다섯 개의 시선 2025년 6월 21일,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의 의견서 제출을 둘러싼 언론 보도 분석 핵심 쟁점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추가 기소에 대한 이의신청을 각하·기각해달라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법적 절차를 넘어 윤석열 전 대통령 관련 내란 혐의 수사라는 정치적 맥락 속에서 벌어지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각 언론사가 동일한 사실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하고 전달하는가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언론 환경과 정보 소비 패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다. 사실관계: 공통 분모 모든 언론이 합의하는 기본 사실은 명확하다: 6월 18일: 조은석 특검, 김용현 전 장관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및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추가 기소 6월 19일: 특검, 기존 내란 사건과의 병합 요청 6월 20일: 김 전 장관 측, 이의신청 및 집행정지 신청 제출 6월 21일: 특검, 서울고등법원에 각하·기각 의견서 제출 핵심 쟁점은 절차적 정당성이다. 특검은 김 전 장관 측이 특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법원에 이의신청을 제출한 것이 특검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배경에는 6월 26일 구속 만료를 앞둔 상황에서 석방을 막으려는 특검의 전략이 깔려 있다. 언론별 시각 차이: 같은 사실, 다른 해석 한겨레: 특검 논리의 충실한 대변 특검의 주장을 가장 상세히 설명하며, 절차적 위법성 논리를 체계적으로 전달했다. '공소권 남용' 주장에 대한 반박을 조목조목 제시하는 등 특검 측 입장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보도 성격을 보였다. 한국일보: 특검 수사의 속도전 부각 조 특검의 임명 6일 만의 '1호 기소'라는 표현으로 수사 속도에 주목했다. 사실 전달과 함께 특검 수사의 본격화라는 큰 그림을 제시하며, 여론 환기 역할을 수행했다. 경향신문: 절제된 팩트 중심 보도 속보 형태의 간결한 보도로 감정적 표현이나 특정 입장 강조 없이 사건 전개에 집중했다. 가장 중립적 톤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앙일보: 정치적 맥락까지 포괄한 분석 단순 사실 전달을 넘어 '석방 저지 목적'이라는 해석을 제시하고, '말 맞추기' 우려까지 언급했다. 양측 주장을 균형있게 다루면서도 사건의 정치적 배경을 드러내는 분석적 접근을 보였다. 동아일보: 특검 입장 중심의 서술 제목부터 특검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며 특검 측 시각을 강조했다. 김 전 장관 측 입장은 최소한으로 언급하여 보도 균형성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언론 보도가 던지는 질문들 이번 사례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특검제도의 실효성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조 특검의 빠른 행보는 제도의 효율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정치적 압박 속에서의 성급함 논란도 불러일으킨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은 정보의 다원성을 보여주지만, 독자들의 편향된 정보 소비로 이어질 위험도 내포한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정치적 사건일수록 법원의 판단이 더욱 중요해지는데, 언론 보도가 이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 결국 이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다. 특검제도가 정치적 도구가 아닌 사법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언론이 권력 감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면서도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국민들이 다양한 정보를 종합하여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어느 한 언론의 시각에만 의존하지 말고, 다양한 출처를 통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려 노력하자.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민주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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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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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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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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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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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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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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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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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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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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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는 프랑스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미국 J. D. 밴스 부통령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루마니아 우파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 당시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약 25,000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이 있기 15일 전부터 조르제스쿠 후보와 관련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했으며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EU 자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뭐든 러시아 탓으로 돌릴 예정인듯 싶다. 칼린 조르제스쿠 후보를 낙마시키고 다시 치러진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루마니아 우파 세력 후보인 조르제 시미온(George Simion)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전 EU는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 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Nicușor Dan)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이었다. 그는 그 날 텔레그램 채널에서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두로프는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로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 수호는 있을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타 국가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으며 루마니아 국민들은 둘 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X에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의혹을 재기한 사람이 넷상에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 또한 두로프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주장을 부인했다. 물론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Fake"라고 적었다. 그러나 두로프는 지난 5월 20일 SNS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요 목적은 항상 지정학적인 문제를 두고 언급했었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주 내용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는 2025년 봄, 니콜라 레르네르(Nicolas Lerner)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엄연히 국제 개입에 위한 선거 공작이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지키겠다 했ㄷ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5월 20일 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24년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두로프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I'm ready to go and testify if it helps Romanian democracy)."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5월 22일에 열린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인 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에 두로프는 다시 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일찌기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인 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이에 대처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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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그레이트 게임은 현재 역사 용어가 아닌 정치 외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는 183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하기도 하면서 1905년 러일전쟁까지를 일컫기도 한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시아 남부 지역을 노리자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가운데 비롯되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1842년 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진격했다가 역습을 당해 패배하여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 등 1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와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고 이 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리전 상대로 일본이 나서게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맺어진 동맹인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인도와 호주, 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했던 셈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러시아하고도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 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서방 나토 세력까지도 가세해 거대한 서구 연합이 생성되었다. 이 동맹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그 상대는 러시아였다. 그리고 여기에 새롭게 중국이 가세했으며 중립을 지키던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아프리카까지 러시아와 중국과 가까워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사우디아라비아 및 이란, 터키로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밀착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쿼드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지만 최근 인도는 친러로 돌아섰다. 또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원래 중국이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쿼드 동맹과 성명에서부터 제3차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2021년 9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4명의 정상들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1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4개국 정상들은 회담 이후 성명에서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4국이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는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2020년 카슈미르 산악 지대에서 영토 분쟁에 있던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의 힘을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당시 성명에서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 전문가 누구든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성명에서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성명에 의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고 하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하며 북한을 압박하기도 했다. 성명에서 나온 미얀마 관련된 것에서 미얀마 군부로 하여금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 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에 대한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했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 북한 정책 기조가 될 것임을 알렸다. 한국은 당시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19세기 말 그레이트 게임 때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러시아까지 이 분쟁에 끼어들어 우리 한국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 그 때는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지만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되면서 1885년 4월 영국은 조선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거문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와 같이 중립화 및 완충지대로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남쪽 바다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兪吉濬)이었다. 당시 유길준은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길이라 주장했다. 당시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 · 프랑스 · 일본 · 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절이었기에 조선의 중립화론은 청나라가 조선을 종속국 상태로 놓아두려 했었던데다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남겨두려 했었기 때문에 지식인의 주장 중 하나로 단순하게 인식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 세력이 청나라를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했고, 해양 세력이 영국을 대신해 일본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외교, 군사적인 역량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두 세력이 1895년부터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으며 이는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시 고종은 1897년에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으며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대로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바뀐 현재, 우리는 러시아, 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한반도는 이들 국가들의 지리적, 지정학적 요충지로 설정이 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해당 국가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아래에 온통 날카로운 못이 박힌 대지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거나 다름없는 형세인 것이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러시아가 끼어들면서 달라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 중, 러 구도가 되고 한, 미, 일 구도로 굳어지고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동 사태들이 해결된 이후에는 그 또한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을 주도로 한 시아파, 사우디 주도의 수니파, 그리고 이스라엘이 버티는 중동 사태를 이후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나 국제정세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크게 변할 수 있는 변수가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국제관계의 예측은 50:50의 확률이다. 그 50% 확률의 국익을 하나라도 더 취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행동이 바로 외교(Diplomacy)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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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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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그리스 정부와 정당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경제 위기
- 그리스는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IMF와 EU에게 빌린 돈의 규모가 수백조 원 수준에 이르고 있다. IMF와 EU는 그리스의 국채를 가지고 있는 민간은행의 국채를 상환 의무가 있는 그리스 정부 대신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 정부에 대한 구제 금융을 지원했다. 즉 2015년에 와서는 대부분 그리스의 국채를 민간이 아니라 IMF와 EU, 그 중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 정부는 이들 IMF와 EU, 독일 및 프랑스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IMF와 EU에게 있어서 이 구제 금융 채권 상환은 일종의 구상권 청구인 것과 같다. 그냥 그리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가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도 같은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돈줄을 쥐고 있는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이 엄청나게 손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협상은 순탄치 않게 진행되었다. 벌써부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은 견제에 나서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렉시트라 불리는,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 자체도 용인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돈 갚을 것을 압박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급진좌파인 시리자 정권의 집권 이후 기존의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 내각에서 추진하던 긴축 정책를 철회하는 일환으로 공기업이나 국유 자산의 민영화 및 매각 작업을 속속 철회했다. 사실 이를 덮어씌우게 된 나라가 바로 중국인데 중국은 많은 그리스 자산을 인수하려고 계약까지 한 상황이었다. 계약 직후, 중국의 계약 자체가 무효화되어 번복당하게 된 것이다. 이미 그리스의 경제 위기로 인해 그리스의 주식 시장은 붕괴 상태였지만 그나마도 시리자 당의 집권 이후 연일 폭락의 향연이 벌어졌다. 당시 매일 6~7%, 심하면 9% 이상씩 떨어졌다. 특히 2015년 1월 26일~1월 28일 3일간만 해도 무려 20% 넘게 폭락했다. 주식의 어마어마한 대폭락은 그리스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의 자산 이탈이 심해졌고 2011년 이후 그 빈도수는 높아졌다. 시리자의 급격한 반(反)긴축 성향이 IMF, EU등 채권자와의 갈등을 일으켜 자칫하면 그리스가 디폴트를 맞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수상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평소에 뉴욕타임즈와 파이낸셜 타임즈를 챙겨보았던 것이 주효한 것인지, 아니면 채무탕감의 명분을 쌓을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리스에 대한 최대 채권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기존 제재의 연장 자체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같이 반대하지 않았다 해도 EU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대응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으로 상징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에 대해서 추가제재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출한 것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러시아에서 그리스에서 요청만 해준다면 재정지원을 해줄수 있다고 밝히게 된다. 이에 대해 그리스의 증시는 다시 반등세를 탔고 러시아도 유가하락과 경제제재로 인해 자국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돈이 남아 돌았던 탓인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때와는 다르게 3700억 달러 수준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러시아가 몇 년 정도를 어렵게 나마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되기는 했다. 외환보유고가 떨어져 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러시아가 이미 경제 제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아는 EU 입장에서는 그저 그리스의 경제를 공략할 명분만 추가될 뿐. 시리자도 이와 같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재 연장에는 찬성했다. 그리스 금융위기 이후 IMF, EU, ECB (European Central Bank)가 구제금융을 하면서 언론에서 이 세 기관을 한 집단으로 묶은 것을 트로이카라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트로이카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보니까 국가부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프랑스에서 부채 관련하여 재협상을 할 수 있다는 용의를 밝히게 되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도 그리스의 구제 금융 재협상을 지지했다. 그리스 정부로서도 일단 조금 온건하게 의견을 발표하여 일단 자금 융통에 대해 조금 트여 있는 상황에 있다. 물론 프랑스도 재협상에 응할수 있다고 했지만 그리스 정부에서 요구하는 채무 탕감은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금 융통이 조금 트였다는 얘기일 뿐이다. 프랑스도 그리스 지역에 투자한게 많긴 하지만 2012년 이후 부채 정리가 있었기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로이카와 독일이 요지 부동인 상황이기 때문에 파국은 시간 문제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결국 채무탕감 요구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ECB와 독일이 그리스 시리자 정부에서 내놓은 국채 담보 안을 승인하지 않게 되면서 그리스 정부는 2015년 3월 디폴트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월 이전까지 시리자 정부가 ECB, 독일 정부한테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서 그리스 정부는 미국, 러시아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거론하면서 중국에서 돈을 빌려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프라스 총리가 리커창 중국 총리에게 초청 받았다는 것도 공개했다. 그리고 리커창 중국 총리는 차프라스와의 통화에서 시리자에 집권하자 마자 민영화를 취소한다는 식으로 발표하며 뒤엎으려 했고 피레우스 항 프로젝트를 복구하라 요구했다. 그래서 차프라스는 이를 보장하는 답변을 했다. 2015년 2월 12일~13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45.4%를 얻어 2위인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을 크게 앞서게 되었다. 아마도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듯 싶다. 재협상을 앞두고 그리스 곳곳에서 친(親) 정부 시위 또한 발생했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리스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다. 2015년 6월 5일로 예정된 만기까지 3억 700만 유로, 한화 약 3700억 원을 상환해야하는데, 이조차도 없다고 그리스 정부에서 나오고 있다. EU와 IMF가 제시한 긴축 재정은 여전히 실시하지 않으면서, 빚 갚을 생각을 전혀 안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현재 EU와 IMF는 그리스의 디폴트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시리자가 몰락한 다음 이후 선거를 기대하는 실정에 있다. 물론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 뒤, 할 수 있는 선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2015년 7월 5일, 치프라스는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로 진퇴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리스의 여론조사 결과, 지난달 말 카파 리서치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47.2%, 반대 33.0%로 나타났지만 자본 통제 이후에는 반대의 세력들이 시리자에 결집하면서 반대 54% 찬성 33%로 대역전을 일구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수상은 더욱 더 가열차게 반대표 결집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여론조사기관 GPO가 이날 발표한 결과에서는 다시 찬성 47.1%, 반대 43.2%로 뒤집하게 된다. 이는 여러모로 팽팽한 접전이었고 반대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그리스 의회는 여러모로 고민하게 된다. 결국 7월 5일 국민투표가 시리자 내각의 진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어이 2015년 7월 5일 2015년 그리스 구제 금융 국민투표에서 구제 금융 반대 61% 찬성 39%라는 엄청난 득표율 및 일방적인 득표차로 구제 금융을 부결시킴은 물론 시리자 정권의 연장에도 가볍게 성공하게 된다. 출구조사 때까지만 해도 52:48의 근소 우세로 점쳐졌던 것이 순식간에 뒤집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자 정권이 크게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EU 입장에서는 그리스를 자기들에게서 축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긴축에도 견디지 못했다. 이는 그리스 정부의 공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소위 기득권층의 복지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상류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은 유럽과 IMF 간에 이해 관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EU측은 부자들이 탈세를 하면 뒤엎어 버리라는 식이지만 IMF는 부자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가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는 재산업화를 추진한 것도 아니다. 부패와 기형적 형태의 정치문화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시리자 정권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시리자가 그 일부에 기여했으며 시리자가 정권을 잡고 집권을 거듭하고도 개혁을 그 동안의 공약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중국은 주식이 폭락했었기에 한국 입장에서는 더욱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자국 시장에 돈을 엄청나게 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여력이 없고, 러시아는 저유가 및 낮은 천연가스 가격으로 인해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크림 및 돈바스 지역에 개입했다가 서방 제재로 인해 GDP가 절반으로 폭락할 정도로 허약한 상황에 있었다. 다들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인데 그리스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기본적으로 신용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만 그리스를 지원하겠다 말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 집권 정당인 시리자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첫 번째, 국민들의 반대 요구를 무시하고 긴축을 계속하는 것은 EU가 그리스 정부에게 재국민투표를 요구할 공산이 클 것으로 보았다. 아일랜드도 처음에는 EU 리스본 협약에 사인할 때 국민투표로 부결되었지만, 2009년에 다시 투표를 하여 민주적인 정당성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정권이 퇴진한 뒤 악역을 중도파에게 넘겨 혼란을 주는 것, 세 번째, 그냥 나라가 망하는 길로 종합하여 세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결국 7월 중순, 시리자는 정당의 보존을 위해 고강도 긴축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렉시트를 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으나 그랬다가는 서드 임팩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알아서 붕괴 될 것이니 별 수 없는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2015년 8월 20일 시리자가 구제 금융 찬반으로 인해 분당되자 그리스 국회의 의회를 해산하고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2015년 9월 20일 조기 총선을 시행할 것을 정했으며 당시 여론조사에 의하면 시리자의 지지율은 급락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의 과반보다 못한 1당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나마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이 부진하여 1당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야당이 올곧게 건재했다면 이와 같은 경제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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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그리스 정부와 정당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경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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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 1979년 이란에서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란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당시 근본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 시아파 무슬림 정파 세력들에게 축출된 팔레비 왕가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을 필두로 하고 있었으며 장남인 레자 팔레비(Reza Pahlavi)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1980년 모하메드 국왕이 도피한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의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축출되고 그나마 망명 정부처럼 남아 있는 왕실의 제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망명 정부이기에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다. 더불어 1906년에 제정된 이란 팔레비 헌법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 받기 때문인 것도 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왕후로 알려진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이다. 그녀는 1967년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과 결혼했을 당시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왕후에 등극한 호화 대관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획득한 외화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었다. 국영기업 민영화,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인수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계 이란인 인사들이었고, 민영화하여 만든 제품과 수입들이 죄다 유럽과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실질적으로 이란 국내의 기업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을 진흥하고자 했다. 팔레비 왕조가 건립될 당시의 문맹률은 꽤 높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가 대대적으로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육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학교 시설이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무엇보다 선생들의 질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질 좋은 선생이 양으로도 많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이란에서 페르시아어가 완벽한 질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결국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선생을 돈 주고 영입할 수밖에 없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가난한 시골에는 외국 선생은 꿈도 못 꿨다. 부유층 자녀의 외국 유학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또한 상류층의 10분의 1정도만 유학을 갔고 대부분 파리에 머물렀다. 팔레비 왕조는 히잡, 차도르의 착용 금지했지만 테헤란과 이스파한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 투성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대다수의 하층민은 여전히 부르카 쓰고 이슬람 율법에 저촉 받고 살았다. 당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문맹율은 60%에 달했다.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테헤란과 이스파한과 같은 대도시에 국한된 얘기였다. 큰 도시가 아닌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란 여성들은 참정권이 뭔지도, 있는지도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의 여성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으며 문맹에다 전통적인 악습을 달고 살았다. 즉,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고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계층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으며 테헤란이나 이스파한에 살 경제력이 되는 여성들만이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히잡을 벗고 대학까지 다녔다. 이것이 몇몇 대도시와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란 영토 내에서 불균형 현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농지 개혁과 농촌 개발 문제였다. 이란에서 황무지는 국토의 60%를 차지했다. 이는 땅을 다지는 기술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근대화가 도시에 집중되었던 것도 있다. 팔레비 2세는 외국에서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초청하여 녹화하는 사업을 맡긴다. 그리고 이란 영토 내에서 토후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지방 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압수하고 이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는 팔레비가 계획했던 근대자본주의와 대단한 모순이 있었다. 지방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로 뺏어간 것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자율성과 사유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주들로부터 토지 강탈과 일반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의 분배 행위는 소련이나 중공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주로 행했던 사회주의성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즉각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빈민들이 중세 봉건적 시스템인 소작제를 철폐하면서 자영농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영농들의 상당수는 농촌 적자에 허덕이면서 다시 지주에게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분배된 농토들은 자영농들의 식구에 비해 그 소출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관개 시설을 이용해 농지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이란 전국에 분포한 관개 시설은 채 10개도 되지 않았다. 자금 또한 부족했다. 해당 자금들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횡령으로 인해 해외로 빼돌려졌다. 그래서 관개 시설조차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했고, 소작농 시절에 물리지 않던 세금, 종자세, 물세, 시설 비용등이 추가로 발생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영농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영농들을 인공적으로 무수히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주 밑에서 소작농들에게 제공하던 건강과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교육 같은 서비스도 없어졌다. 또한 미국과의 협정으로 인해 미국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최악의 상황이 된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당시, 혁명에 참가한 상당수가 이 때 고생하던 농민들이었다. 결국 일부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협동 농장에 매각하고 도시로 흘러왔으며 이들이 슬럼가를 형성하면서 엄청난 빈부격차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해지는 결과가 되었고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당시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자들이 이맘 성직자들이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던 모스크의 토지까지 팔레비 정부가 몰수하여 분배했기 때문에 엄청난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업에 써야 할 돈들은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 왕후의 개인 돈으로 유용되었다. 그녀는 해외에 재산을 상당수 빼돌렸으며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될 정도로 축적한 재산은 재벌급이었다. 파라 팔라비 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명화들을 수집했다. 파라 팔라비의 컬렉션은 현재 30억 달러(약 4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86년 9월, 이란 PARSI 1 TV에 갑자기 위성 방송이 11분 동안 전파를 탔다. 이 방송에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레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왕후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은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이 위성 방송은 미국 CIA가 기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은 40년 전에도 이와 같은 내부 혼란을 유도하는 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 같은 시기의 CIA는 이란 팔레비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미 의회에서의 폭로도 나오면서 한동안 팔레비 왕실과의 커넥션에 대한 청문회로 몸살을 앓았다.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들을 두고 근거 없다며 일축했다. 팔레비 왕가가 미국 땅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호메이니 혁명 이후, 팔레비 왕가와 함께 이란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의 애국적 행위 덕분이라고 했다. 팔레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40년 동안 미국은 이란에 끊임없는 제재를 가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란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내부 혼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움직여 외부적으로 전쟁, 무역적 대립 등으로 끊없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파라 팔레비 왕비나 레자 팔레비 왕세자의 근황을 끊임없이 TV로 송출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균열을 유도했다. 물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 방송했었다.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PARS TV, BBC 페르시안, PARSI 1 등 수십여 개나 되기에 이란 정부를 막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채널들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이 위성 수신기에 대한 단속이 심했지만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인터넷 매체들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라 이란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움직여 또 다시 외부적 혼란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고 있다. 팔레비 정권이 했었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 미니스커트가 어떻고, 히잡이 어떻고 등등, 매우 자유로운 사회였다고만 말한다. 그러니 팔레비 치하의 이란 사회는 매우 모순성이 가득한 사회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인 측면들이 혼재된 사회였으며 왕정 독재에, 기득권들만 배부르고, 부정부패와 비리, 횡령이 일상화 된 사회였다. 빈부 격차도 엄청났고, 그렇기에 근대화 개혁을 하려했지만 안하니만도 못한 사회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약에 팔레비 왕조 치하의 이란 사회가 매우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적인 사회였다면 1979년의 호메이니 혁명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메이니 혁명은 팔레비가 가진 수많은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중동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메네이 정권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팔레비 2세와 바꾸어 팔레비 왕조를 부활시키면 완전히 근대 국가로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하메네이 정권이 무너질리도 없을 뿐더러, 팔레비 2세가 돌아오는 것은 이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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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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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난민 통제 정책으로 인한 여러 논란들과 떨고 있는 미국 내 우크라이나 난민들
-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인도주의적인 사유로 허용되었던 난민들에 대한 임시 보호 조치들을 트럼프 정부에서 전격적으로 폐기하면서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바이든이 대통령 재임 시기 때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우크라이나인 약 24만 명에게 부여했던 임시적인 합법 체류 자격을 2025년 4월부터 전면 취소하면서 이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우크라이나로 대거 강제 귀환당할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과 몇 년 전, 전쟁을 피해 미국에 안착했던 수십만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다시 추방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고 이는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포용 정책을 뒤집는 결과로 나타났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뿐만 아니라 쿠바, 아이티,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출신 53만여 명에 대한 패롤(Parole)에 대해서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트럼프는 패롤(Parole)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남미와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이민 신청을 전면적으로 중단했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입국한 이민자들은 주로 2년 동안의 임시 취업 허가와 추방 유예를 받았으며, 이 기간 내에 영주권이나 망명 등 추가적인 이민 혜택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이민 신청 절차가 중단되면서 미국에서 법적 신분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편 탈레반 정권을 피해 난민 신청을 해썬 아프가니스탄인 7만여 명에 대한 임시 체류도 재고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총 180만 명 이상의 중동 지역과 남아시아 지역의 이민자들의 법적 지위 박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모두 트럼프가 바이든의 이민 정책은 법치를 넘어선 것이라 주장하며 선거 기간부터 공약을 펼친 바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2025년 1월 20일에 서명된 행정 명령을 통해 모든 카테고리별 패롤 프로그램 종료가 공식화 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추방 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는데 이것이 현재 나타난 LA 폭동이라 보면 된다. 이에 우선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이나 탄압을 피해 온 난민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전통적인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와 정의를 수호한다는 역할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경우, 현지로 송환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책임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미군에게 도움을 주었던 전 아프가니스탄 정보 요원 중 한 명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체류 자격이 취소되어 구금되자 미국과 동맹을 맺고 싸웠던 자신이 트럼프에게 배신당했다고 탄식했다. 그는 자신과 아프가니스탄 민주정부는 목숨 걸고 미국을 도운 대가가 결국 미국에서의 추방이라면 충격적이라며 실망을 표했는데, 이러한 사연이 마침내 언론에 보도되어 많은 미국인들에게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 역시 미국의 이와 같은 송환 움직임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젤렌스키와 트럼프 대통령 간의 불화가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우크라이나인 난민까지 돌려보내려 하자 키예프 당국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실망과 유감을 표명했다. 따라서 유럽의 인권 단체들 또한 세계 난민들의 위기 속에 미국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민자들을 위험한 상황에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필자는 가족 초청으로 인해 합법적인 형태로 들어온 한국국적 영주권자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자신의 경력을 늘리고 자본금을 축적하기 위해 6개월 정도 미국에 방문하며 왕래했던 나오는 사람들도 거주 의사가 없어보인다며 세컨더리 룸에 체포되어 끌려갔다는 소문들이 돌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들었다. 이 외에 영주권을 지닌 대학 교수의 부인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하는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연좌제로 추방 조치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난민 정책에 대해 미국 국내 정치 차원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공화당 내 강경파와 트럼프 지지층들은 불법 이민을 억제하는 것과 법 집행을 강조하며 대규모 추방을 지지하고 있지만 민주당과 인권 옹호 단체들은 비인도적인 조치라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 주지사들과 시장들은 가혹한 대대적인 추방 작전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들은 주 경찰과 교정 당국으로 하여금 연방의 대규모 이민 단속에 동참하지 않도록 지시하고, 일부 이민자 보호 도시 정책을 강화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민주당 내에서도 지난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난민 정책에 대해 일부 노선을 변화하려는 조짐이 있어, 무제한적인 이민 옹호에서 벗어나 하마스를 비롯한 테러범 동조 및 중범죄 이민자 추방에는 협조하겠다는 스탠스를 선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몇몇 민주당 인사들은 범죄를 저지른 불법이민자 추방은 모두가 지지할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무차별 단속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죄 없는 사람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추방 정책이 일괄적인 접근으로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들을 반영하며 이민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패롤 철회 조치에 대해 소송까지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연방 법원이 제동을 걸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으며, 18세기 제정된 '적성국 국민법(AEA)'을 난민들에게 적용한 것은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 남용이라는 미국 연방 법원의 첫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몇몇 미국 내 학자들은 무차별적인 대규모 추방은 미국 내 노동력 부족을 심화시키고 일부 산업, 농축산이나 건설 등 노무자들의 부족으로 인한 인력난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지하에 숨어 지내던 불법체류자들이 더욱 음지화되어 지역 사회와의 단절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이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해 온 이민자를 포용하는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국제 도덕적 리더십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향후 수개월 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이민 단속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인권 침해 사례들이 추가적인 정치적 쟁점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의견을 표명한 외국계 학생들이 미국의 이민 세관단 속국(ICE)에 의해 연이어 체포되고 있는데, 일례로 한 터키계 유학생은 길을 걷다 사복 차림의 이민국 요원에게 체포되어 손이 묶인 채, 표시가 없는 차에 태워진 후 구금되었다. 체포에 대한 근거로 하마스를 지지한 것을 들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반이스라엘 시위로 비자가 취소된 대학생이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입국장은 SNS를 검열했다고 하며 이 중에 반유대주의나 트럼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가에 적대적이라며 입국을 거부한 사례도 나타났다. 반대로 독재와 인권 탄압 국가로 미국이나 서방 국가들이 비난하는 러시아는 SNS 검열을 하지 않으며 푸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는 치졸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을 비판한 전력이 있는 하버드 대학 소속 러시아인 과학자가 미국에 재입국하는 과정에서 미국 이민 당국에 구금된 사례가 나오면서 문제가 되었다. 사실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은 그 명분도 좋고 불법 이민은 강력하게 단속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강도가 매우 강하고 심지어 각 주에 위치한 국경 심사대에게 성과 할당제를 부여했다는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로 매우 강압적인 형태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던 사람이 갑자기 세컨더리 룸에 끌려 가서 겁박을 당했다는 사례들이 끝도 없이 올라 오고 있다. 정작 중국인이나 베트남 불법 이민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은 대한민국도 저렇게 해야한다며 트럼프의 불법 이민 단속에 상당히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민 단속은 적법한 절차와 합법적으로 국적을 취득한 외국계 모두에게도 위협을 주고 있어 그 논란은 매우 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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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난민 통제 정책으로 인한 여러 논란들과 떨고 있는 미국 내 우크라이나 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