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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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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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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와 러시아에 정교회가 자리잡은 배경과 러시아의 현군(賢軍) 블라디미르 1세
-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8년 동안 대공의 자리를 둘러싸고 내란이 발생한다. 원래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Yaropolk I)가 즉위하기는 했지만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가 반발하여 키예프를 침략한다. 여기에 막내인 노브고로드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합류함으로써 키예프를 두고 세 형제가 공방전을 벌인다. 실제 키예프 공국의 목적은 지난 1세기 동안의 전쟁 후에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란의 발생과 더불어 비잔틴 제국이 이를 이용하여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를 지원함으로 인해 키예프 공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콘스탄티노플 정교회를 통해 키예프 공국을 서서히 흡수했고 위성 국가로 전락시키고자 하였다. 이어 새로운 키예프 교회의 수장을 파견했고 그들은 그리스어로 설교하는 비잔틴 사제들이었다. 이에 대해 야로포르크 1세는 이와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975년 콘스탄티노플에 사신을 보내 키예프 공국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한편 키예프 교회에 자주성을 부여하는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키예프를 전복시킬 목적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1세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야로포르크 1세는 기독교를 단절해버렸다. 비잔틴 제국은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조종하여 야로포르크 1세를 비난했고 이어 드네프르 강 인근까지 군을 진주시키자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 1세는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의 군대를 교전 끝에 패주시켰다. 형을 추격한 블라디미르 1세는 결국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살해했고 형의 남은 군대를 모두 흡수했다. 이어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를 포위하여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를 고립시켰다. 이어 로마 교황에게 사절단과 함께 115개의 질문을 보내어 서방 교회의 예식으로 기독교를 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블라디미르 1세의 목적은 비잔틴 제국과 로마 카톨릭의 간섭을 막기 위해 키예프 교회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립 속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질문에 대한 교황의 자세한 질문이 두 주교에 의해 전해졌고 그 주교들은 슬라브 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심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은 역시 독립적인 키예프 교회를 거부하였고 이는 양측의 관계를 냉각시켰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1세의 로마를 향한 움직임은 비잔틴 제국을 좀 더 유화적으로 만들어 978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결정 하에 독립적인 동방 정교회로 인정받았다. 이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분열된 후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교회였다. 이러한 가운데 979년 마침내 키예프가 함락되었고 야로포르크 1세는 폐위되었다. 이후 야로포르크 1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귀의하였고 이러한 야로포르크 1세의 이야기는 후일 기독교 문학에 사용되었다. 980년 키예프에 입성하여 대공의 직위를 승계한 블라디미르 1세는 부친인 스비아토슬라프의 업적을 계승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키예프에서 블라디미르 1세는 8년 동안 정쟁으로 인하여 생긴 슬라브 부족들과 제휴하고 각 부족들의 통치권을 총독에게 이양시켰다. 블라디미르 1세는 스비아토슬라프와는 달리 내치의 안정을 먼저 시도했고 이를 통해 동부 슬라브 인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대공에 승계하자마자 외부와의 전쟁을 시작했던 군주라면 블라디미르 1세는 내부의 안정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군주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시대를 거치며 키예프 공국은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도 비견할 만한 위세를 갖추면서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는 러시아 민요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현재 화폐 1 그리브나의 모델로 발탁되었을 정도로 동슬라브 권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 1세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혀 아내를 7명, 첩을 800명이나 두었으며 기독교와 유태교, 이슬람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 통합하는 일에는 광적일 정도의 군인이며 행정가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먼저 8년간의 내란 동안 심각하게 추락한 키예프 대공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986년 군사 원정에 나서 서쪽으로 폴란드를 공격했다. 8년간의 혼란으로 인하여 폴란드에게 함락되었던 갈리치(Galichi)를 탈환했고 987년에는 북방으로 진출하여 리투아니아 왕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는 스웨덴 왕국의 구원군 함께 키예프 군을 방어했으나 키예프의 강력한 기마 전사들로 인하여 두 동맹군은 거의 전멸되었고 블라디미르 1세는 발트 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보했다. 이로써 키예프는 발트 해와 북해로 진출할 수 있는 항구를 개척하게 된다. 그리고 대초원 깊이 들어와 있던 페체네그 인을 공격하여 벨라루스 초원 일대를 장악했다. 이로 인하여 페체네그는 발칸으로 남하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988년에는 폴란드 기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며 리보프(Liviw) 외곽으로 몰아낸 다음 그 경계에 방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했다. 이어 발칸으로 진출하여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자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는 블라디미르 1세에게 제국의 황녀와 결혼을 제의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이를 받아들여 비잔틴 제국의 황녀와 결혼했고 지속적인 교역 및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체코 · 폴란드 · 헝가리 · 불가리아 · 로마 교황 등과의 교류도 넓혀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이로 인하여 언어와 문자의 보급에도 힘쓰고 그리스 문헌도 도입하여 문화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동슬라브는 이념적 통일성을 갖게 되고 대공과 공후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봉건제가 촉진되며 비잔틴 제국 및 유럽 세계와 가까워져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988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 슬라브 인에게 세례를 받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전통 샤머니즘 신앙에 젖어 있던 키예프 공국은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고 키예프 공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그리스 정교 수용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인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르 1세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났다. 먼저 유태교를 숭상하고 있는 하자르 인이 블라디미르를 찾아와서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했다. 이에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유태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가?” 그러자 하자르인 사절들은 이렇게 답하였다. “야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노하시어 그 죗값으로 우리를 이방인들 사이에 분산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죄로 인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블라디미르는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찾을 수 없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 블라디미르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자 동쪽에서 볼가 불가르 인이 왔다. 불가르 인의 대표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내세에서 무함마드가 미녀 70명씩을 주신다.” 라고 말하며 평소 호색적인 블라디미르를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계율에 금주 조항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술은 슬라브 인의 기쁨이다.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로마 교황정과 비잔틴 제국의 교회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블라디미르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할머니인 올가가 957년에 이미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는 등, 기독교가 이미 러시아 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사신을 보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비교하고 분석하도록 했다. 독일에 찾아간 사절들은 로마 교회의 의식을 관찰하고 돌아왔다. 사신은 블라디미르에게 한 보고에서 “아무런 영광도 보지 못했노라.” 라고 말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소피아 대성당에 간 사신은 그 의식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거기가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었나이다.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은 분명 지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나이다.” 블라디미르는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가 관할하는 정교를 선택했다 한다. <러시아연대기>에 담긴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 전래에 대한 의미는 깊다. 당시 이미 동, 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존치했던 두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키예프 공국은 서양 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키예프 공국을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그 선택에는 인접국인 폴란드 · 덴마크 · 노르웨이 · 헝가리 등이 속속 기독교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동양 세계와 많은 부분에서 떨어져 있는 관계로 동양과의 여러 교류를 모색하기보다는 유럽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편이 더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 세계는 대립과 반목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면서 키예프 공국이 사실상 동방 정교의 종주국이 되었고 그 후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 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 사회에서 고립되는 요인을 형성하게 된다. 정교회로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기존의 호색 적이고 절대자로써 생활을 벗어나 신을 두려워하는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블라디미르는 가난한 자를 돕고 죄인에 대한 형벌을 가볍게 했으며 동방 샤머니즘의 토템들도 타파하고 각지에 교회들을 세웠다. 후일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슬라브 부족들의 세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비교적 큰 무리 없이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동방 샤머니즘의 전통이 전해 내려오긴 했으나 정교회가 민간신앙 요소들을 대거 흡수하면서 농민들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한편 슬라브 부족들의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거칠고 다소 투박한 동양 샤머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발견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는 또 슬라브 부족장들에게 정착민의 세계로 소속되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996년 키예프에 첫 정교회 성당인 동정녀 마리아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하여 키예프 공국이 지배하던 영토 곳곳에 많은 성당이 들어섰다. 키예프 공국의 교회는 종교로서의 역할 외에 글자를 가르치고 이른바 동방 샤머니즘 관습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 법률의 역할도 이루어졌다. 또한 키릴 문자의 보급과 더불어 근대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동방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키예프의 군주와 국가에게 나라의 통합을 촉구하고 동시에 비잔틴 제국, 그리고 기독교 세계 전체와의 유대를 강조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러시아 교회는 차츰 중심적인 사회 기구로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정교의 도입과 함께 키예프 공국에는 비잔틴 제국의 문화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 입각하여 성상 숭배에 관한 여러 성물들이 들어왔다. 발칸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로마 문학 · 예술 · 법률 · 풍속 · 관습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키예프 공국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과 회화 분야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기술자와 예술가들이 유입되어 급속도로 발전했다. 11세기 중반에 키예프와 노보고로드, 두 곳에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양식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고 있으며 그 밖에 키예프 근교의 페체르스키(Pecherski) 수도원, 블라디미르의 우스펜스키(Uspenski) 성당과 드미트리(Dmitri) 성당, 블라디미르 근교 넬리(Neli) 강변의 포크로프(Pokrov) 성당도 이 때 만들어졌다. 또한 비잔틴 제국 양식의 프레스코 화와 모자이크 화 부조로 만들어진 성화 상이 유행하여 성당 등 건축물의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했고 비잔틴 제국이 쇠퇴한 뒤 동방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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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와 러시아에 정교회가 자리잡은 배경과 러시아의 현군(賢軍) 블라디미르 1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