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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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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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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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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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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의 재구성 - 체르노빌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4분 이날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Анатолий Дятлов, 1931~1995)의 지휘 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다. 실험의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였다. 이와 같은 실험이 실시된 이유는 원전의 안전장치구조가 완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설계와 시운전 당시에 완료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특유의 "승리적인 조기달성"이라는 빠르게 성과를 달성하는 집단 공업 정책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실적을 위해 이를 누락하고 이미 발전소 완공을 선언하여 관련자들은 이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관련자들은 체르노빌 발전소가 이미 상업적인 운전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안전성 테스트를 서둘러 완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나톨리 댜틀로프 소장을 주재로 한 이 실험은 25일 낮 시간대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 장치를 정지시키고 저출력 상태로 변경했다. 이 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낮 시간 대 전력 공급 유지를 요구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지연되어 26일 1시부터 14시까지로 변경되었는데, 그 때까지 계속 저출력 상태로 장시간 안전 장치가 꺼진 상태에서 운전했다. 이것이 유력한 원자력 발전소 대형 사고의 원인이었다. 이 대형 사고를 접한 많은 사람들, 특히 현재에도 이 사고가 안전 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발전소의 시스템이 그 원인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로에는 안전 장치인 최신식 ECCS가 장치되어 있었고 시설이 구식인 것이 문제가 아닌 실험 내에 안전 장치들을 꺼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험 중에 이와 같은 절차가 들어가 있었고, 실험을 지도하던 댜틀로프는 이 절차에 따라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하는 엄청난 실수를 했던 것이다. 이 때 실험자들은 평소라면 사용하지 않을 급수 펌프까지 가동시켜 노심 압력을 올렸으며 수동 제어봉을 6개만 남기고 전부 뽑은 상태였다. 규정상 최소 수동 제어봉은 15개였고 15개 내지는 16개에서 RBMK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댜틀로프는 실험 매뉴얼을 따라가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위험성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한다. 1시 23분 04초에 실험이 실시되었는데, 실험 도중 4호기의 전기 공급이 줄어 들면서 자연스럽게 냉각 펌프에 공급되는 전기의 양도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냉각수의 유입이 감소하자 원자로 내부가 과열되고 내부 증기압은 상승하면서 RBMK의 설계 결함으로 인해 원자로의 출력이 상승했다. 이를 제어하는 것이 제어봉인데 이를 뽑아 버렸는게 문제였고 결국 발전소는 폭발했다. 실험 시작 시간에서 폭발시간인 1시 23분 45초까지 거의 1분도 걸리지 않았으며 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였다. 폭발로 생긴 방사성 물질로 가득한 불꽃과 불씨들이 1km 상공까지 치솟았으며 이에 생존한 원전 직원의 목격담에 의하면, 폭발이 마치 화산 폭발과 같았으며 폭발 직후 거대한 푸른 빛줄기가 마치 레이저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고 한다. 심지어 아름다운 광경이라 이를 구경하려고 원자로 근처로 온 주민들도 있었다.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 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다. 이 때 수많은 땅에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는데, 향후 바람을 타고 번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트랙터를 사용하여 땅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흙을 퍼올려 덮어버리면서 방사능 유출을 최대한 봉쇄했다. 주변의 숲들도 같은 이유로 갈아 엎으려고 했으나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인해 그냥 출입 금지 구역으로만 지정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로 남아 있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투어도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비어 있는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폭발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국가는 벨라루스이다. 당시에 바람이 북서쪽으로 불고 있었던 영향이 컸다. 만약 바람이 남쪽으로 불고 있었다면 수도 키예프에 낙진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로 방사능에 뒤덮이게 되니 전 세계가 겪을 수밖에 없는 더 큰 참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벨라루스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 떨어져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남동부 지역 33%, 한국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 금지 구역으로 통제되고 있다. 그러나 주 낙진이 있었던 벨라루스 제2의 도시 고멜의 경우, 대부분이 러시아와 벨라루스 정부의 노력으로 다행히 사람이 살 수 있고 경제성도 왕성해진 곳이 되었지만 지금도 고멜 도심지를 제외한 일부 지역은 방대한 양의 방사능 낙진으로 인하여 아직까지도 폐쇄 구역으로 남아 있고 해당 지역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지난 2021년을 기준으로 벨라루스의 국토의 22%는 오염지역으로 남아있으며 이는 국토개발 계획에 심각한 장애로 남아있다. 벨라루스에서는 농작물의 원산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벨라루스에서 원산지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농작물을 사면 안 된다. 가령 고멜(Гомел) 지역의 경우 타 지역의 것보다 20% 이상 저렴한 가격의 채소나 과일 등을 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행경보사이트에 의하면 벨라루스 동남부 지역은 고멜, 모길료프(Могилёв)만 여행유의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벨라루스 남동부를 여행할 사람일 경우 개인에 의한 판매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식품을 구입하거나 음식을 먹는 것을 피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특히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30km 구역 안에 있는 카미린 지역의 경우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고 이곳에서는 아직도 농작물들을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30주기을 맞이하여 벨라루스의 토양을 검사해 본 결과 고멜 주에서 아직도 기준치의 10배가 넘는 방사성 스트론튬이 들어있는 우유가 생산되고 있는 목장이 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45㎞ 떨어진 목장인데 2014년부터 50마리의 젖소를 키우며 하루 2톤의 우유를 생산하고 있다 한다. 국립 민스크 위생-전염병 센터가 이곳 우유를 조사해 봤더니, 암 등을 일으키는 방사성 동위원소 스트론튬-90이 벨라루스 농업부 기준치 보다 무려 10배나 더 검출됐다고 조사되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벨라루스는 낙진 피해를 당한 2,200㎢를 출입금지 구역으로 정하고 470개 마을을 소개했다. 하지만 농업국가인 벨라루스가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커 오랫동안 비워 놓았던 땅을 최근 들어 다시 농장으로 만들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더불어 이 농장의 우유는 벨라루스 밀카비타(Милкавита) 공장에서 전량 치즈로 가공되어 러시아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 공장에서 나온 치즈의 96~97%가량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보로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출되었다고 하며 회사 관계자에 의하면 소비자들이 체르노빌 사고지역 근처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보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소비자 보호 권리 감독청은 밀카비타 공장의 회사 관계자가 밝힌 내용에 절대 해당 지역에서 농작물과 유제품을 수입하는 일이 없다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그로드노(Гродно) 주 아스트라베츠(Астравец)에는 2019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벨라루스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50km 떨어진 곳이라서 리투아니아와의 외교 갈등까지 생기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벨라루스의 원자력 발전소를 '국가 안보 위협'으로 선포했다. 사울리우스 스크베르넬리스 총리는 벨라루스 원전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입장은 명백하고 원칙적인 것으로 아스트라비예츠 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원전 가동은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했다. 리투아니아가 벨라루스 원전 건설에 극렬히 반대하는 이유는 안전 문제 때문이다. 스크베르넬리스 총리는 벨라루스의 원전 건설 과정에서 핵 안전 및 환경 안전 수칙이 아직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가동 중단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원전을 지을 당시 건설 사고가 발생했었던 것을 들었다. 2018년 7월에는 크레인에 의해 이동되던 무게 330t 짜리 원자로 1기가 2~4m 높이에서 떨어졌다는 현지 증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벨라루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선정과 건설 과정이 안전하다는 증거를 전달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벨라루스의 원전 가동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앞으로 새 원전이 생산하는 전력을 구매하지 말 것을 EU에 촉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벨라루스는 원전 가동이 철저한 안전 기준에 따라 가동되고 있다는 입장에 있다. 블라디미르 마케이 벨라루스 외무장관은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안전 기준을 지키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리투아니아의 주장은 자국만 이익을 보려는 경제적인 속셈이 작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 후 원래 거주하던 지역에서 강제로 소개된 이들은 벨라루스 내에서 '쨔르노빌찌(Чарнобыльцы, 체르노빌 민족)'라는 명칭으로 기피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피해자들, 쨔르노빌찌에 관련한 이야기는 벨라루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가 1997년에 저술한 <체르노빌의 목소리(Чернобыльская молитва)>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실은 책으로 알렉시예비치는 이 책을 위해 10여 년에 걸쳐 100여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2006년 미국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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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의 재구성 - 체르노빌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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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는 폴란드계 러시아 귀족 계급의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프스키(Ksawery Wojciech Rokossowski)와 러시아인 어머니 안토니나 옵샨니코바(Антонина Овсянникова)의 사이에 1896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인 크사베리는 러일전쟁 때 장교로 복무하면서 발틱함대를 탑승했다가 현해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침몰하였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가문은 몰락하여 철도 노동자로 취업해 프스코프 주(州)의 벨리키예루키(Великие Луки)로 이주했다. 부친인 크사베리는 철도 노동자로써 삶이 순탄치 않았고 190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인 옵샨니코바 역시 1911년에 세상을 떠나 로코소브스키는 15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함께 폴란드 방산 공장에서 노동을 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후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을 전전하여 힘들게 일하던 로코소브스키는 16세에 이르어 폴란드 반(反) 정부 노동자 시위에 휘말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투옥 생활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부사관으로 훈련받은 후 제5기병연대에 입대하여 뛰어난 용맹성을 발휘했다. 이와 같은 용맹성을 인정받아 그는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 여기까지는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이기도 한 게오르기 주코프(Георгий Жуков)의 경력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소련 공산당과 신생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소련군에 입대시켰으며,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백군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제압하는데 대활약을 한 로코소브스키는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로 인해서 승진이 어려운데다 몰락한 로마노프 제국 시절 귀족집안, 부르주아로 찍혀 장교들 사이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1919년에 소련-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 연대장인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동족인 폴란드 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로코소브스키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그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37년에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을 감행했고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숙청의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폴란드계 소련인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공무와 처사에 매번 간섭하는 정치 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에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장교들이 부족하여 소련군의 패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시베리아에 유형되어 있던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이 왜 숙청되었는지를 포함해 일체의 해명없이 곧바로 석방되었다. 로코소브스끼는 크림 반도에서 잠시 요양한 후 스탈린과의 면담한 뒤, 제9기계화 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후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떨쳤고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궤멸시켜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다음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되었는데,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 신생 폴란드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폴란드군 원수에 취임했고 뒤이어 내각 수반인 각료 의회 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로코소브스키는 사실상 소련의 대리인이며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는 폴란드의 감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폴란드군을 제대로 정예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로코소브스키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돌아와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면서 현재 폴란드군의 기반을 만들었다. 로코소브스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폴란드어가 무척 어눌했으며 기본적인 단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이에 폴란드 국민들은 소련-폴란드 전쟁과 바르샤바 봉기에서 로코소브스키가 한 기행과 악행으로 인해 로코소브스키를 소련의 하수인이자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생각하여 매우 싫어하고 불신했다. 이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에서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 한다며 나름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로코소브스키는 이를 잔인하게 탄압하는 것에 앞장섰고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는 로코소브스키 자신이 소련에서 대숙청 당시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더불어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약 1만 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동족인 폴란드 군중들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그로 인해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로코소브스키의 이와 같은 잔혹한 방법은 큰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내에서의 로코소브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같은 년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자 로코소브스키는 해임되어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로코소브스키는 흐루시초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로코소브스키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대신 폴란드의 지도자였던 고무우카와 협상을 개시했다. 흐루시초프는 고무우카와의 협상에서 로코소브스키를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의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래기도 했다. 학자들은 로코소브스키가 대조국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명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로코소브스키는 소련군 내에서도 대조국 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 사령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소브스키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의 수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소브스키의 제2 벨라루스 전선 군대는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까지 그의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소브스키 거리가 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부역한 인물로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폴란드의 역사에서는 로코소브스키의 개입 기간을 폴란드 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는 스스로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던 로코소브스키를 폴란드계라는 이유로 폴란드에 주둔시킨 스탈린의 잘못된 인사행정으로 빚어진 일이다. 민주화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50년대 후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미 이 기간은 최악의 역사로 여겨졌다. 소련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공산주의 통치자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로 로코소브스키는 폴란드에서 행동과 정책은 최악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훌륭했었던 인물이지만 행정은 최악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계 폴란드인들에게는 입지전적의 인물로 좋은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도 토착 폴란드인들이 워낙 좋지 않게 보기 때문에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찬양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벨라루스의 경우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으로 대표되는 친러 진영에서는 소련 계승의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를 구국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벨라루스 민족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반러 진영에서는 그냥 외국인 러시아의 위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반러 진영은 로코소브스키가 나치 독일을 격퇴한 명장이라는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한 그의 업적을 그저 소련 군인으로서의 업적으로만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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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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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에 악화된 분위기, 양국의 스파이 전쟁
- 헝가리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이 지난 달 11일에 헝가리 정보기관의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전직 군인 2명을 체포하자, 헝가리가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외교관 2명을 간첩 혐의로 추방했고, 우크라이나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악화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안드레이 사비가(Андрій Савіга)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키예프 당국이 헝가리 대사를 외무부로 초치해 헝가리 외교관 2명을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Київська влада викликала посла Угорщини до Міністерства закордонних справ і зажадала, щоб два угорські дипломати покинули Україну протягом 48 годин)."고 게시했다. 시비가 장관은 "헝가리가 우크라이나 외교관을 추방한 조치에 맞서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하고 우리의 국익을 고려한 대응(Застосування принципу взаємності та врахування наших національних інтересів у відповідь на висилку Угорщиною українських дипломатів)."이라고 적시했다. 이와 같이 SBU가 헝가리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인믈을 체포하고 이를 발표함과 동시에 헝가리는 우크라이나 외교관들을 추방하고 우크라이나가 이에 맞대응하는 시간은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나토-EU 가입 등을 두고 지속적으로 충돌해 왔던 양국 관계로 볼 때 결국 사태 악화는 필연적이었다는 분석이다. 사실 헝가리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매우 불편한 이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 SBU가 헝가리 간첩을 적발하여 체포했다는 지역운 자카르파티야 지역으로 이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헝가리의 영토였다. 따라서 자카르파티야에는 헝가리계 주민 약 15만 명이 소수민족으로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총동원령을 피해 헝가리로 탈출하는 주요 루트 중 하나로 갈라시아-볼리나 지역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우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는 헝가리로 탈출한 자국민에 대해 추방을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헝가리는 이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어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에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가 결정적으로 헝가리를 자극한 시기는 2017년에 도입된 우크라이나어 사용 정책이었다. 헝가리는 이를 자카르파티야에 거주하는 헝가리계 주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라 주장하며 크게 반발했다. EU도 헝가리 편을 들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조건으로 이 정책을 폐기 혹은 수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국 간에 극도로 민감한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SBU가 헝가리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40대 2명을 체포한 것이 사태 악화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SBU는 두 사람이 헝가리 정보기관의 지시를 받고 우크라이나 방공시스템 위치 등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카르파티야 주민들의 정치적 노선을 조사하였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해 헝가리 군이 이 지역에 진입할 경우, 주민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헝가리인의 간첩 혐의를 적용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자카르파티야 지역에서 암약하는 헝가리 군 정보국 스파이 네트워크를 적발했다고 강조했다. 이 때 체포된 헝가리인 두 명 중 한 명은 병이 깊은 아버지의 치료를 핑계로 헝가리를 왕래하며 수집한 정보를 헝가리 정보 기관 측에 보고하고, 자금과 새로운 임무를 받아왔다는 것이 SBU의 결론이다. 그러자 헝가리는 즉각 맞대응에 나섰다.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chiart) 헝가리 외무장관은 SBU의 발표를 두고 헝가리에 대한 비방과 프로파간다라고 반발했으며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던 우크라이나인 2명을 간첩 혐의를 적용하여 맞대응으로 추방했다고 밝혔다. 시야르토 장관은 이는 헝가리가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반대하기 때문에 일어난 의도적인 사건이며 우크라이나 측이 헝가리를 친러시아 세력으로 여기고 있는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헝가리 보안군이 수도 부다페스트 중심가에서 전직 우크라이나 외교관이 탄 승용차를 세우고, 탑승자를 강제로 체포하여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헝가리 보안군 측은 그를 외교 공관에서 근무하는 간첩 요원이 아니라 신분을 숨기고 암약하는 블랙 요원이라 주장했다. 본래 EU와 나토 회원국인 헝가리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줄곧 러시아 편을 들어 서방의 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반대해 왔던 국가이다. 따라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젤렌스키 사이에도 간혹 심각한 의견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르반 총리가 전쟁 종식을 위해 중재자의 입장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자, 젤렌스키는 이에 대한 엄청난 비판을 쏟아냈다. 최근에도 젤렌스키는 부다페스트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방해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헝가리-우크라이나 간의 이와 같은 갈등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스파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와 같은 사태 악화의 중심에는 전쟁을 이유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는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SBU가 존재하고 있다. SBU는 이미 현지에서 구성원들의 심각한 권력 남용과 부패 및 도덕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고 헝가리와 스파이 전쟁으로 부딪치기 얼마 전에 대규모 부패 사건이 발생해 분위기가 매우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같은 날, SBU의 한 고위 관리가 부패와 도덕성 문제로 해임되었다. 대통령실 산하의 국가 안보 국방위원회(Комісія національної безпеки та оборони)에서 제재 부과 분과를 총괄하는 SBU 경제안보 담당 부서장인 아나톨리 로이프(Анатолій Лойів)가 우크라이나 국가 내 제재를 받은 한 기업인의 호화 생일 파티에 참석하여 상당한 금액의 향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곧바로 해임되었다. 그는 안보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있는 파리마치(Pari Match) 그룹의 사장 생일 파티에 전현직 SBU 고위 간부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따라서 함께 참석한 인사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마피아 출신의 '법률 도둑 움까'(вор в законе)로 알려진 세르게이 올레이닉(Сергій Олійник)도 섞여 있었다. 그는 그날 전격적으로 SBU에 의해 체포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또 로이프의 부패 의혹은 그의 어머니가 고급 부동산을 취득함으로 인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자카르파티야에 거주하는 그의 어머니는 수도 키예프와 교외에 총 1,600만 흐리브랴 이상의 고급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어학 교수인 그녀의 수입으로 도저히 취득이 불가능한 부동산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폭로는 우크라이나 기업인들이 '안보 위원회'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담당자에게 뇌물을 제공한다는 소문과 함께 맞물리면서 로이프의 부패 의혹으로 증폭되어 우크라이나 내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SBU는 또한 키예프에서 제재를 받은 한 기업의 건물을 두고 우크라이나 군 정보총국(GUR)의 특수부대와 총격전 직전까지 간 것으로도 알려져 키예프 시민들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GUR은 지난 4월 조직의 필요에 따라 키예프에 있는 친러시아 기업의 건물을 압수 수색했다. 그러자 이 회사는 억울하다며 SBU 측에 호소했으며 이 같은 호소를 받아들인 SBU가 GUR를 상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SBU가 진상 파악을 위해 키릴 부다노프 GUR 국장을 조사하려고 나서자, 그의 부하들이 장갑차로 길을 막으면서 저항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들의 주변에 몰려들고, SBU가 마침내 물러서면서 양 정보기관 간의 최악 충돌은 피했다고 전해진다. GUR과 SBU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벨라루스 민스크에 열린 러시아-우크라이나의 1차 평화 협상에 참여한 금융인인 데니스 키례요프(Денис Кіреєв)는 협상에 참여한 이후, 2022년 3월에 간첩 혐의로 SBU에 연행됐는데, 이후 사망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그의 죽음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평화협상을 방해하려는 강경 세력의 소행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23년 GUR의 부다노프 국장은 SBU 장교들이 키례요프를 살해했다고 폭로했다. 키례요프는 전쟁 초기에 키예프의 방어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특급 정보를 제공했는데, SBU가 키례요프를 러시아와 내통한 간첩 혐의를 씌워 살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키례요프는 젤렌스키로부터 사후 훈장을 받고 키예프의 '바이코보 영웅들의 묘지(Могила Героїв Байкова)'에 안장되었기 때문에 간첩 누명은 일단 벗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전쟁 초기 SBU와 GUR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바실리 말류크(Василь Малюк) SBU 수장이 급히 부다노프 국장을 만나 두 기관 간의 상호 이해 및 협력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부다노프 국장에 대한 SBU의 도발은 최근 우크라이나 내 여론조사 결과와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는 전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장이자 현 주 영국 대사인 잘루즈니 및 젤렌스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국민 신뢰도가 가장 높은 상위 정치인 3인에 속하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젤렌스키보다 높게 나오기도 했기 때문에 차후 우크라이나 대선이 시작된다면 대선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타난 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의 스파이 전쟁은 부패로 얼룩진 SBU의 비리를 덮기 위해 헝가리와의 영토 분쟁을 이용해 일부러 헝가리를 자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뭔가 정보부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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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에 악화된 분위기, 양국의 스파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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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는 프랑스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미국 J. D. 밴스 부통령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루마니아 우파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 당시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약 25,000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이 있기 15일 전부터 조르제스쿠 후보와 관련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했으며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EU 자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뭐든 러시아 탓으로 돌릴 예정인듯 싶다. 칼린 조르제스쿠 후보를 낙마시키고 다시 치러진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루마니아 우파 세력 후보인 조르제 시미온(George Simion)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전 EU는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 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Nicușor Dan)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이었다. 그는 그 날 텔레그램 채널에서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두로프는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로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 수호는 있을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타 국가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으며 루마니아 국민들은 둘 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X에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의혹을 재기한 사람이 넷상에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 또한 두로프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주장을 부인했다. 물론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Fake"라고 적었다. 그러나 두로프는 지난 5월 20일 SNS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요 목적은 항상 지정학적인 문제를 두고 언급했었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주 내용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는 2025년 봄, 니콜라 레르네르(Nicolas Lerner)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엄연히 국제 개입에 위한 선거 공작이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지키겠다 했ㄷ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5월 20일 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24년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두로프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I'm ready to go and testify if it helps Romanian democracy)."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5월 22일에 열린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인 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에 두로프는 다시 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일찌기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인 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이에 대처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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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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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 내일 30일부터 러시아에 입국하려면 사전에 입국 신청서와 함께 얼굴 사진 등 생체 정보를 모바일 앱에 등록해야 한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자국에 무비자로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의 등록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디지털 기술부는 러시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자료를 모바일로 제출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인 루아이디(ru ID)를 개발했다. 그러나 내년 6월 30일까지 1년 동안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기간으로, 입국 전에 반드시 제출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 제약이 따른다. 러시아 정부는 무비자 입국 외국인을 대상으로 입국 전에 생체정보를 입국 신청서와 더불어 '루아이디'를 통해 제출하도록 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작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 '러시아 연방 정부령 제1510호' 에 따른 것으로, 30일부터 1년 동안(2025년 6월 30일~2026년 6월 30일) 2단계 시범 사업으로 들어왔다. 시범 실시 단계에서는 입국 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 전송은 당연히 의무 사항이 아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여 입국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러시아 입국에 불허 사유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루아이디(ru ID)를 등록하지 않고 러시아에 입국하게 되면 휴대폰 심(SIM) 카드 발급과 외국인에게 개방된 러시아의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를 발급받는데 있어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외국에서 발급된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안 되기 때문에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 발급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제한이 생긴다면 카드에서 돈 인출이 막막해짐은 물론 로셀호즈은행(Россельхозбанк)과 가스프롬뱅크(Газпромбанк)에서 유니온페이 체크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또한 필자가 생활했던 작년까지는 가능했는데 올해는 이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루아이디(ru ID)를 통해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를 전송한 경우, 입국한다면 러시아 내에서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 휴대폰 심(SIM) 카드 구매를 위한 SNILS(사회보장번호와 유사) 발급이 가능해지고 러시아 정부의 공공서비스 이용 신청 등도 가능하다. 다만 여행객들에게는 심카드 외에는 공공서비스 이용은 필요가 없을 뿐이다. 입국 신고 및 생체 정보 등록은, 한국인 등 러시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국가의 국민이 루아이디 앱에 가입한 이후, 입국하기 72시간 전까지 출입국 날짜와 방문 목적, 개인 및 생체 정보 등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응급 치료 혹은 가족의 사망 등 긴급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입국 4시간 전 등록이 허용되고 있다. 등록해야 하는 생체 정보는 얼굴 사진, 여권 사진, 목소리 등으로 나타나며 등록을 마치면 입국 때 필요한 QR코드가 발급되게 되어 있다. 이는 미국 방문을 위해 사전에 전자여행허가(ESTA: Electronic System of Travel Authorization)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 보면 된다. 참고로 한국인이 미국을 방문하려면 2008년 11월 중순부터 인터넷에서 입국에 관한 간단한 등록 절차를 거쳐 ESTA (입국 허가)를 발급받으면 된다. 이와 같은 생체 정보 수집 대상에서 제외되는 외국인은 6세 미만의 아동과 러시아 주재 외교관, 영사관, 국제기구 직원, 벨라루스 국민 등이다. 그리고 입국할 때, 머물 도시, 호텔명, 호텔주소, 연락처 등이 명확해야 하고, 체류 목적, 날짜 등이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것이 불명확 할 때는 러시아 입국이 거부된다.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 입국 시 지문 날인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지문 날인은 입출국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제 러시아에서 사진 찍을 때 매우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관공서나 러시아의 인프라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나라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조치가 없었는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인프라에 자주 드론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지 않으면 임의동행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보통 일반 관광객인 경우, 대부분 경고를 받고 풀려난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기차역이나 선로, 그리고 화물열차를 찍으면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국은 러시아에서 비우호국가로 찍혔기 때문에 입국 심사 때 물어보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취해지는 똑같은 조치이니 한국인만이 표적 대상이 되었다고 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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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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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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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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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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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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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의 재구성 - 체르노빌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4분 이날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Анатолий Дятлов, 1931~1995)의 지휘 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다. 실험의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였다. 이와 같은 실험이 실시된 이유는 원전의 안전장치구조가 완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설계와 시운전 당시에 완료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특유의 "승리적인 조기달성"이라는 빠르게 성과를 달성하는 집단 공업 정책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실적을 위해 이를 누락하고 이미 발전소 완공을 선언하여 관련자들은 이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관련자들은 체르노빌 발전소가 이미 상업적인 운전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안전성 테스트를 서둘러 완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나톨리 댜틀로프 소장을 주재로 한 이 실험은 25일 낮 시간대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 장치를 정지시키고 저출력 상태로 변경했다. 이 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낮 시간 대 전력 공급 유지를 요구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지연되어 26일 1시부터 14시까지로 변경되었는데, 그 때까지 계속 저출력 상태로 장시간 안전 장치가 꺼진 상태에서 운전했다. 이것이 유력한 원자력 발전소 대형 사고의 원인이었다. 이 대형 사고를 접한 많은 사람들, 특히 현재에도 이 사고가 안전 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발전소의 시스템이 그 원인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로에는 안전 장치인 최신식 ECCS가 장치되어 있었고 시설이 구식인 것이 문제가 아닌 실험 내에 안전 장치들을 꺼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험 중에 이와 같은 절차가 들어가 있었고, 실험을 지도하던 댜틀로프는 이 절차에 따라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하는 엄청난 실수를 했던 것이다. 이 때 실험자들은 평소라면 사용하지 않을 급수 펌프까지 가동시켜 노심 압력을 올렸으며 수동 제어봉을 6개만 남기고 전부 뽑은 상태였다. 규정상 최소 수동 제어봉은 15개였고 15개 내지는 16개에서 RBMK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댜틀로프는 실험 매뉴얼을 따라가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위험성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한다. 1시 23분 04초에 실험이 실시되었는데, 실험 도중 4호기의 전기 공급이 줄어 들면서 자연스럽게 냉각 펌프에 공급되는 전기의 양도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냉각수의 유입이 감소하자 원자로 내부가 과열되고 내부 증기압은 상승하면서 RBMK의 설계 결함으로 인해 원자로의 출력이 상승했다. 이를 제어하는 것이 제어봉인데 이를 뽑아 버렸는게 문제였고 결국 발전소는 폭발했다. 실험 시작 시간에서 폭발시간인 1시 23분 45초까지 거의 1분도 걸리지 않았으며 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였다. 폭발로 생긴 방사성 물질로 가득한 불꽃과 불씨들이 1km 상공까지 치솟았으며 이에 생존한 원전 직원의 목격담에 의하면, 폭발이 마치 화산 폭발과 같았으며 폭발 직후 거대한 푸른 빛줄기가 마치 레이저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고 한다. 심지어 아름다운 광경이라 이를 구경하려고 원자로 근처로 온 주민들도 있었다.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 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다. 이 때 수많은 땅에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는데, 향후 바람을 타고 번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트랙터를 사용하여 땅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흙을 퍼올려 덮어버리면서 방사능 유출을 최대한 봉쇄했다. 주변의 숲들도 같은 이유로 갈아 엎으려고 했으나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인해 그냥 출입 금지 구역으로만 지정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로 남아 있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투어도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비어 있는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폭발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국가는 벨라루스이다. 당시에 바람이 북서쪽으로 불고 있었던 영향이 컸다. 만약 바람이 남쪽으로 불고 있었다면 수도 키예프에 낙진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로 방사능에 뒤덮이게 되니 전 세계가 겪을 수밖에 없는 더 큰 참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벨라루스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 떨어져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남동부 지역 33%, 한국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 금지 구역으로 통제되고 있다. 그러나 주 낙진이 있었던 벨라루스 제2의 도시 고멜의 경우, 대부분이 러시아와 벨라루스 정부의 노력으로 다행히 사람이 살 수 있고 경제성도 왕성해진 곳이 되었지만 지금도 고멜 도심지를 제외한 일부 지역은 방대한 양의 방사능 낙진으로 인하여 아직까지도 폐쇄 구역으로 남아 있고 해당 지역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지난 2021년을 기준으로 벨라루스의 국토의 22%는 오염지역으로 남아있으며 이는 국토개발 계획에 심각한 장애로 남아있다. 벨라루스에서는 농작물의 원산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벨라루스에서 원산지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농작물을 사면 안 된다. 가령 고멜(Гомел) 지역의 경우 타 지역의 것보다 20% 이상 저렴한 가격의 채소나 과일 등을 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행경보사이트에 의하면 벨라루스 동남부 지역은 고멜, 모길료프(Могилёв)만 여행유의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벨라루스 남동부를 여행할 사람일 경우 개인에 의한 판매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식품을 구입하거나 음식을 먹는 것을 피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특히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30km 구역 안에 있는 카미린 지역의 경우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고 이곳에서는 아직도 농작물들을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30주기을 맞이하여 벨라루스의 토양을 검사해 본 결과 고멜 주에서 아직도 기준치의 10배가 넘는 방사성 스트론튬이 들어있는 우유가 생산되고 있는 목장이 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에서 45㎞ 떨어진 목장인데 2014년부터 50마리의 젖소를 키우며 하루 2톤의 우유를 생산하고 있다 한다. 국립 민스크 위생-전염병 센터가 이곳 우유를 조사해 봤더니, 암 등을 일으키는 방사성 동위원소 스트론튬-90이 벨라루스 농업부 기준치 보다 무려 10배나 더 검출됐다고 조사되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벨라루스는 낙진 피해를 당한 2,200㎢를 출입금지 구역으로 정하고 470개 마을을 소개했다. 하지만 농업국가인 벨라루스가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커 오랫동안 비워 놓았던 땅을 최근 들어 다시 농장으로 만들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더불어 이 농장의 우유는 벨라루스 밀카비타(Милкавита) 공장에서 전량 치즈로 가공되어 러시아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 공장에서 나온 치즈의 96~97%가량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보로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출되었다고 하며 회사 관계자에 의하면 소비자들이 체르노빌 사고지역 근처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보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소비자 보호 권리 감독청은 밀카비타 공장의 회사 관계자가 밝힌 내용에 절대 해당 지역에서 농작물과 유제품을 수입하는 일이 없다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그로드노(Гродно) 주 아스트라베츠(Астравец)에는 2019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벨라루스 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50km 떨어진 곳이라서 리투아니아와의 외교 갈등까지 생기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벨라루스의 원자력 발전소를 '국가 안보 위협'으로 선포했다. 사울리우스 스크베르넬리스 총리는 벨라루스 원전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입장은 명백하고 원칙적인 것으로 아스트라비예츠 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원전 가동은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했다. 리투아니아가 벨라루스 원전 건설에 극렬히 반대하는 이유는 안전 문제 때문이다. 스크베르넬리스 총리는 벨라루스의 원전 건설 과정에서 핵 안전 및 환경 안전 수칙이 아직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가동 중단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원전을 지을 당시 건설 사고가 발생했었던 것을 들었다. 2018년 7월에는 크레인에 의해 이동되던 무게 330t 짜리 원자로 1기가 2~4m 높이에서 떨어졌다는 현지 증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벨라루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선정과 건설 과정이 안전하다는 증거를 전달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벨라루스의 원전 가동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앞으로 새 원전이 생산하는 전력을 구매하지 말 것을 EU에 촉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벨라루스는 원전 가동이 철저한 안전 기준에 따라 가동되고 있다는 입장에 있다. 블라디미르 마케이 벨라루스 외무장관은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안전 기준을 지키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리투아니아의 주장은 자국만 이익을 보려는 경제적인 속셈이 작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 후 원래 거주하던 지역에서 강제로 소개된 이들은 벨라루스 내에서 '쨔르노빌찌(Чарнобыльцы, 체르노빌 민족)'라는 명칭으로 기피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피해자들, 쨔르노빌찌에 관련한 이야기는 벨라루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가 1997년에 저술한 <체르노빌의 목소리(Чернобыльская молитва)>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실은 책으로 알렉시예비치는 이 책을 위해 10여 년에 걸쳐 100여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2006년 미국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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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의 재구성 - 체르노빌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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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는 폴란드계 러시아 귀족 계급의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프스키(Ksawery Wojciech Rokossowski)와 러시아인 어머니 안토니나 옵샨니코바(Антонина Овсянникова)의 사이에 1896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인 크사베리는 러일전쟁 때 장교로 복무하면서 발틱함대를 탑승했다가 현해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침몰하였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가문은 몰락하여 철도 노동자로 취업해 프스코프 주(州)의 벨리키예루키(Великие Луки)로 이주했다. 부친인 크사베리는 철도 노동자로써 삶이 순탄치 않았고 190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인 옵샨니코바 역시 1911년에 세상을 떠나 로코소브스키는 15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함께 폴란드 방산 공장에서 노동을 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후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을 전전하여 힘들게 일하던 로코소브스키는 16세에 이르어 폴란드 반(反) 정부 노동자 시위에 휘말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투옥 생활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부사관으로 훈련받은 후 제5기병연대에 입대하여 뛰어난 용맹성을 발휘했다. 이와 같은 용맹성을 인정받아 그는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 여기까지는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이기도 한 게오르기 주코프(Георгий Жуков)의 경력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소련 공산당과 신생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소련군에 입대시켰으며,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백군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제압하는데 대활약을 한 로코소브스키는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로 인해서 승진이 어려운데다 몰락한 로마노프 제국 시절 귀족집안, 부르주아로 찍혀 장교들 사이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1919년에 소련-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 연대장인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동족인 폴란드 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로코소브스키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그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37년에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을 감행했고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숙청의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폴란드계 소련인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공무와 처사에 매번 간섭하는 정치 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에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장교들이 부족하여 소련군의 패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시베리아에 유형되어 있던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이 왜 숙청되었는지를 포함해 일체의 해명없이 곧바로 석방되었다. 로코소브스끼는 크림 반도에서 잠시 요양한 후 스탈린과의 면담한 뒤, 제9기계화 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후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떨쳤고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궤멸시켜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다음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되었는데,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 신생 폴란드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폴란드군 원수에 취임했고 뒤이어 내각 수반인 각료 의회 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로코소브스키는 사실상 소련의 대리인이며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는 폴란드의 감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폴란드군을 제대로 정예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로코소브스키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돌아와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면서 현재 폴란드군의 기반을 만들었다. 로코소브스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폴란드어가 무척 어눌했으며 기본적인 단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이에 폴란드 국민들은 소련-폴란드 전쟁과 바르샤바 봉기에서 로코소브스키가 한 기행과 악행으로 인해 로코소브스키를 소련의 하수인이자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생각하여 매우 싫어하고 불신했다. 이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에서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 한다며 나름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로코소브스키는 이를 잔인하게 탄압하는 것에 앞장섰고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는 로코소브스키 자신이 소련에서 대숙청 당시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더불어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약 1만 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동족인 폴란드 군중들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그로 인해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로코소브스키의 이와 같은 잔혹한 방법은 큰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내에서의 로코소브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같은 년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자 로코소브스키는 해임되어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로코소브스키는 흐루시초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로코소브스키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대신 폴란드의 지도자였던 고무우카와 협상을 개시했다. 흐루시초프는 고무우카와의 협상에서 로코소브스키를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의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래기도 했다. 학자들은 로코소브스키가 대조국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명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로코소브스키는 소련군 내에서도 대조국 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 사령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소브스키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의 수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소브스키의 제2 벨라루스 전선 군대는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까지 그의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소브스키 거리가 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부역한 인물로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폴란드의 역사에서는 로코소브스키의 개입 기간을 폴란드 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는 스스로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던 로코소브스키를 폴란드계라는 이유로 폴란드에 주둔시킨 스탈린의 잘못된 인사행정으로 빚어진 일이다. 민주화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50년대 후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미 이 기간은 최악의 역사로 여겨졌다. 소련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공산주의 통치자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로 로코소브스키는 폴란드에서 행동과 정책은 최악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훌륭했었던 인물이지만 행정은 최악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계 폴란드인들에게는 입지전적의 인물로 좋은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도 토착 폴란드인들이 워낙 좋지 않게 보기 때문에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찬양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벨라루스의 경우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으로 대표되는 친러 진영에서는 소련 계승의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를 구국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벨라루스 민족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반러 진영에서는 그냥 외국인 러시아의 위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반러 진영은 로코소브스키가 나치 독일을 격퇴한 명장이라는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한 그의 업적을 그저 소련 군인으로서의 업적으로만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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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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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에 악화된 분위기, 양국의 스파이 전쟁
- 헝가리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이 지난 달 11일에 헝가리 정보기관의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전직 군인 2명을 체포하자, 헝가리가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외교관 2명을 간첩 혐의로 추방했고, 우크라이나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악화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안드레이 사비가(Андрій Савіга)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키예프 당국이 헝가리 대사를 외무부로 초치해 헝가리 외교관 2명을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Київська влада викликала посла Угорщини до Міністерства закордонних справ і зажадала, щоб два угорські дипломати покинули Україну протягом 48 годин)."고 게시했다. 시비가 장관은 "헝가리가 우크라이나 외교관을 추방한 조치에 맞서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하고 우리의 국익을 고려한 대응(Застосування принципу взаємності та врахування наших національних інтересів у відповідь на висилку Угорщиною українських дипломатів)."이라고 적시했다. 이와 같이 SBU가 헝가리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인믈을 체포하고 이를 발표함과 동시에 헝가리는 우크라이나 외교관들을 추방하고 우크라이나가 이에 맞대응하는 시간은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나토-EU 가입 등을 두고 지속적으로 충돌해 왔던 양국 관계로 볼 때 결국 사태 악화는 필연적이었다는 분석이다. 사실 헝가리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매우 불편한 이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 SBU가 헝가리 간첩을 적발하여 체포했다는 지역운 자카르파티야 지역으로 이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헝가리의 영토였다. 따라서 자카르파티야에는 헝가리계 주민 약 15만 명이 소수민족으로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총동원령을 피해 헝가리로 탈출하는 주요 루트 중 하나로 갈라시아-볼리나 지역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우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는 헝가리로 탈출한 자국민에 대해 추방을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헝가리는 이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어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에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가 결정적으로 헝가리를 자극한 시기는 2017년에 도입된 우크라이나어 사용 정책이었다. 헝가리는 이를 자카르파티야에 거주하는 헝가리계 주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라 주장하며 크게 반발했다. EU도 헝가리 편을 들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조건으로 이 정책을 폐기 혹은 수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국 간에 극도로 민감한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SBU가 헝가리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40대 2명을 체포한 것이 사태 악화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SBU는 두 사람이 헝가리 정보기관의 지시를 받고 우크라이나 방공시스템 위치 등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카르파티야 주민들의 정치적 노선을 조사하였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해 헝가리 군이 이 지역에 진입할 경우, 주민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헝가리인의 간첩 혐의를 적용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자카르파티야 지역에서 암약하는 헝가리 군 정보국 스파이 네트워크를 적발했다고 강조했다. 이 때 체포된 헝가리인 두 명 중 한 명은 병이 깊은 아버지의 치료를 핑계로 헝가리를 왕래하며 수집한 정보를 헝가리 정보 기관 측에 보고하고, 자금과 새로운 임무를 받아왔다는 것이 SBU의 결론이다. 그러자 헝가리는 즉각 맞대응에 나섰다.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chiart) 헝가리 외무장관은 SBU의 발표를 두고 헝가리에 대한 비방과 프로파간다라고 반발했으며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던 우크라이나인 2명을 간첩 혐의를 적용하여 맞대응으로 추방했다고 밝혔다. 시야르토 장관은 이는 헝가리가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반대하기 때문에 일어난 의도적인 사건이며 우크라이나 측이 헝가리를 친러시아 세력으로 여기고 있는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헝가리 보안군이 수도 부다페스트 중심가에서 전직 우크라이나 외교관이 탄 승용차를 세우고, 탑승자를 강제로 체포하여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헝가리 보안군 측은 그를 외교 공관에서 근무하는 간첩 요원이 아니라 신분을 숨기고 암약하는 블랙 요원이라 주장했다. 본래 EU와 나토 회원국인 헝가리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줄곧 러시아 편을 들어 서방의 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반대해 왔던 국가이다. 따라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젤렌스키 사이에도 간혹 심각한 의견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르반 총리가 전쟁 종식을 위해 중재자의 입장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자, 젤렌스키는 이에 대한 엄청난 비판을 쏟아냈다. 최근에도 젤렌스키는 부다페스트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방해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헝가리-우크라이나 간의 이와 같은 갈등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스파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와 같은 사태 악화의 중심에는 전쟁을 이유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는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SBU가 존재하고 있다. SBU는 이미 현지에서 구성원들의 심각한 권력 남용과 부패 및 도덕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고 헝가리와 스파이 전쟁으로 부딪치기 얼마 전에 대규모 부패 사건이 발생해 분위기가 매우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같은 날, SBU의 한 고위 관리가 부패와 도덕성 문제로 해임되었다. 대통령실 산하의 국가 안보 국방위원회(Комісія національної безпеки та оборони)에서 제재 부과 분과를 총괄하는 SBU 경제안보 담당 부서장인 아나톨리 로이프(Анатолій Лойів)가 우크라이나 국가 내 제재를 받은 한 기업인의 호화 생일 파티에 참석하여 상당한 금액의 향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곧바로 해임되었다. 그는 안보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있는 파리마치(Pari Match) 그룹의 사장 생일 파티에 전현직 SBU 고위 간부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따라서 함께 참석한 인사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마피아 출신의 '법률 도둑 움까'(вор в законе)로 알려진 세르게이 올레이닉(Сергій Олійник)도 섞여 있었다. 그는 그날 전격적으로 SBU에 의해 체포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또 로이프의 부패 의혹은 그의 어머니가 고급 부동산을 취득함으로 인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자카르파티야에 거주하는 그의 어머니는 수도 키예프와 교외에 총 1,600만 흐리브랴 이상의 고급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어학 교수인 그녀의 수입으로 도저히 취득이 불가능한 부동산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폭로는 우크라이나 기업인들이 '안보 위원회'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담당자에게 뇌물을 제공한다는 소문과 함께 맞물리면서 로이프의 부패 의혹으로 증폭되어 우크라이나 내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SBU는 또한 키예프에서 제재를 받은 한 기업의 건물을 두고 우크라이나 군 정보총국(GUR)의 특수부대와 총격전 직전까지 간 것으로도 알려져 키예프 시민들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GUR은 지난 4월 조직의 필요에 따라 키예프에 있는 친러시아 기업의 건물을 압수 수색했다. 그러자 이 회사는 억울하다며 SBU 측에 호소했으며 이 같은 호소를 받아들인 SBU가 GUR를 상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SBU가 진상 파악을 위해 키릴 부다노프 GUR 국장을 조사하려고 나서자, 그의 부하들이 장갑차로 길을 막으면서 저항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들의 주변에 몰려들고, SBU가 마침내 물러서면서 양 정보기관 간의 최악 충돌은 피했다고 전해진다. GUR과 SBU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벨라루스 민스크에 열린 러시아-우크라이나의 1차 평화 협상에 참여한 금융인인 데니스 키례요프(Денис Кіреєв)는 협상에 참여한 이후, 2022년 3월에 간첩 혐의로 SBU에 연행됐는데, 이후 사망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그의 죽음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평화협상을 방해하려는 강경 세력의 소행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23년 GUR의 부다노프 국장은 SBU 장교들이 키례요프를 살해했다고 폭로했다. 키례요프는 전쟁 초기에 키예프의 방어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특급 정보를 제공했는데, SBU가 키례요프를 러시아와 내통한 간첩 혐의를 씌워 살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키례요프는 젤렌스키로부터 사후 훈장을 받고 키예프의 '바이코보 영웅들의 묘지(Могила Героїв Байкова)'에 안장되었기 때문에 간첩 누명은 일단 벗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전쟁 초기 SBU와 GUR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바실리 말류크(Василь Малюк) SBU 수장이 급히 부다노프 국장을 만나 두 기관 간의 상호 이해 및 협력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부다노프 국장에 대한 SBU의 도발은 최근 우크라이나 내 여론조사 결과와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는 전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장이자 현 주 영국 대사인 잘루즈니 및 젤렌스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국민 신뢰도가 가장 높은 상위 정치인 3인에 속하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젤렌스키보다 높게 나오기도 했기 때문에 차후 우크라이나 대선이 시작된다면 대선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타난 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의 스파이 전쟁은 부패로 얼룩진 SBU의 비리를 덮기 위해 헝가리와의 영토 분쟁을 이용해 일부러 헝가리를 자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뭔가 정보부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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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에 악화된 분위기, 양국의 스파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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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는 프랑스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미국 J. D. 밴스 부통령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루마니아 우파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 당시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약 25,000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이 있기 15일 전부터 조르제스쿠 후보와 관련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했으며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EU 자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뭐든 러시아 탓으로 돌릴 예정인듯 싶다. 칼린 조르제스쿠 후보를 낙마시키고 다시 치러진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루마니아 우파 세력 후보인 조르제 시미온(George Simion)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전 EU는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 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Nicușor Dan)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이었다. 그는 그 날 텔레그램 채널에서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두로프는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로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 수호는 있을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타 국가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으며 루마니아 국민들은 둘 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X에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의혹을 재기한 사람이 넷상에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 또한 두로프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주장을 부인했다. 물론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Fake"라고 적었다. 그러나 두로프는 지난 5월 20일 SNS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요 목적은 항상 지정학적인 문제를 두고 언급했었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주 내용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는 2025년 봄, 니콜라 레르네르(Nicolas Lerner)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엄연히 국제 개입에 위한 선거 공작이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지키겠다 했ㄷ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5월 20일 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24년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두로프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I'm ready to go and testify if it helps Romanian democracy)."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5월 22일에 열린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인 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에 두로프는 다시 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일찌기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인 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이에 대처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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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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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 내일 30일부터 러시아에 입국하려면 사전에 입국 신청서와 함께 얼굴 사진 등 생체 정보를 모바일 앱에 등록해야 한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자국에 무비자로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의 등록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디지털 기술부는 러시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자료를 모바일로 제출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인 루아이디(ru ID)를 개발했다. 그러나 내년 6월 30일까지 1년 동안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기간으로, 입국 전에 반드시 제출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 제약이 따른다. 러시아 정부는 무비자 입국 외국인을 대상으로 입국 전에 생체정보를 입국 신청서와 더불어 '루아이디'를 통해 제출하도록 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작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 '러시아 연방 정부령 제1510호' 에 따른 것으로, 30일부터 1년 동안(2025년 6월 30일~2026년 6월 30일) 2단계 시범 사업으로 들어왔다. 시범 실시 단계에서는 입국 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 전송은 당연히 의무 사항이 아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여 입국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러시아 입국에 불허 사유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루아이디(ru ID)를 등록하지 않고 러시아에 입국하게 되면 휴대폰 심(SIM) 카드 발급과 외국인에게 개방된 러시아의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를 발급받는데 있어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외국에서 발급된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안 되기 때문에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 발급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제한이 생긴다면 카드에서 돈 인출이 막막해짐은 물론 로셀호즈은행(Россельхозбанк)과 가스프롬뱅크(Газпромбанк)에서 유니온페이 체크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또한 필자가 생활했던 작년까지는 가능했는데 올해는 이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루아이디(ru ID)를 통해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를 전송한 경우, 입국한다면 러시아 내에서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 휴대폰 심(SIM) 카드 구매를 위한 SNILS(사회보장번호와 유사) 발급이 가능해지고 러시아 정부의 공공서비스 이용 신청 등도 가능하다. 다만 여행객들에게는 심카드 외에는 공공서비스 이용은 필요가 없을 뿐이다. 입국 신고 및 생체 정보 등록은, 한국인 등 러시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국가의 국민이 루아이디 앱에 가입한 이후, 입국하기 72시간 전까지 출입국 날짜와 방문 목적, 개인 및 생체 정보 등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응급 치료 혹은 가족의 사망 등 긴급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입국 4시간 전 등록이 허용되고 있다. 등록해야 하는 생체 정보는 얼굴 사진, 여권 사진, 목소리 등으로 나타나며 등록을 마치면 입국 때 필요한 QR코드가 발급되게 되어 있다. 이는 미국 방문을 위해 사전에 전자여행허가(ESTA: Electronic System of Travel Authorization)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 보면 된다. 참고로 한국인이 미국을 방문하려면 2008년 11월 중순부터 인터넷에서 입국에 관한 간단한 등록 절차를 거쳐 ESTA (입국 허가)를 발급받으면 된다. 이와 같은 생체 정보 수집 대상에서 제외되는 외국인은 6세 미만의 아동과 러시아 주재 외교관, 영사관, 국제기구 직원, 벨라루스 국민 등이다. 그리고 입국할 때, 머물 도시, 호텔명, 호텔주소, 연락처 등이 명확해야 하고, 체류 목적, 날짜 등이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것이 불명확 할 때는 러시아 입국이 거부된다.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 입국 시 지문 날인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지문 날인은 입출국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제 러시아에서 사진 찍을 때 매우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관공서나 러시아의 인프라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나라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조치가 없었는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인프라에 자주 드론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지 않으면 임의동행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보통 일반 관광객인 경우, 대부분 경고를 받고 풀려난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기차역이나 선로, 그리고 화물열차를 찍으면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국은 러시아에서 비우호국가로 찍혔기 때문에 입국 심사 때 물어보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취해지는 똑같은 조치이니 한국인만이 표적 대상이 되었다고 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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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