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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 민주화의 아버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와 민주주의 몽골 공화국의 탄생
    몽골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4년 후인 1921년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 된 나라가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외몽골의 부족장들이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여 독립했으며, 그 후 러시아 혁명시기에 몽골 인민당이 러시아 백군과 중국 정부의 개입을 배격하고 공산화에 성공했다. 몽골 인민당은 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몽골의 공산정권은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 되었다. 몽골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스탈린 시기,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시기에는 목축업이 집단화되었다. 처이발상 시기 소련에 반대하는 정치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라마불교 승려 등은 숙청되어 사라졌다. 공산정권은 몽골의 고유문자를 폐기하고,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도입시킴으로써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스탈린과 중국 장개석(蔣介石)이 외몽골은 독립시키고, 내몽골은 중국에 귀속하는 것으로 합의해 몽골족은 완전히 분할되었다. 이후 모택동의 중공(中共)은 외몽골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몽골의 공산 정권은 친(親) 소련주의를 고수하여 소련의 위성국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흐후 1984년 8월, 26년 동안 집권한 융자깅 체뎅발(Yumjaagiin Tsedenbal)이 인민 혁명당 총서기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잠빙 바트믕흐(Jambyn Batmönkh)가 1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바트믕흐는 전임자에 비해 비교적 온건적인 노선을 견지했고, 이는 소련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몽골의 개혁-개방은 20대 청년인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로부터 출발한다. 1963년 생인 엘벡도르지는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키예프에서 언론학을 공부했으며, 그 때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 정책을 알게 되었다. 엘벡도르지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글라스노스뜨와 시장개방을 강조하는 뻬레스뜨로이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88년에 귀국한 엘벡도르지는 울란오드(Ulaan Od)라는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인민혁명당의 노선에 거스르는 논조를 펴면 간첩 혐의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엘벡도르지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모으게 된다. 1989년 11월 28일, 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전국청년예술가 대회가 열렸다. 26살인 엘벡도르지는 청중들 앞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 몽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때입니다. 청년들이 할 일은 말로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이고, 글라스노스뜨의 개방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Одоо Монгол Улс Перестройка-г зоригтойгоор хөөцөлдөх цаг болжээ. Залуучуудын хийх ёстой зүйл бол үгээр дэмжихээс гадна үйлдлээр дэмжих явдал юм. Бид хүчээ нэгтгэж чадвал зорилгодоо хүрч чадна. Бидний зорилго бол ардчилал, Гласностын нээлттэй сүнс юм. Энэ зорилгоо хэрэгжүүлэхийн тулд ард түмний сайн дурын байгууллага бий болгох хэрэгтэй.)” 오랜 공산 치하에 젖어온 몽골 사회에서 엘벡도르지는 금기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후환이 두려워진 대회 의장은 엘벡도르지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대회가 끝나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두 명의 동지가 찾아왔으며, 이어 10명이 합세했다. 이들이 몽골민주혁명의 13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가 다니던 신문사에서는 더 이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경우,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벡도르지는 몽골국립대학 강의실에서 비밀리에 동지들을 만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에 대한 학습 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고 반(反) 정부 전단을 제작해 거리에 붙였다. 마침내 1989년 12월 10일 아침, 그들은 수도 울란바토르 청년문화센터 앞에서 최초의 민주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엘벡도르지는 그 자리에서 몽골민주동맹의 창당을 선언했다. 이는 몽골 공산 정권 68년만에 생긴 최초의 야당이다. 그들은 공산정부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채택하고, 자유선거와 경제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러시아 키릴 문자를 폐지하고 고유 몽골문자를 사용할 것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때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의 세계적인 체스 선수 가리 까스빠로브(Гарри Каспаров)가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을 중국에 팔아야 한다(Советскому Союзу следовало продать Монголию Китаю, чтобы преодолеть свои экономические трудности).”고 말했다. 이 체스 선수의 발언은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견해는 물론 아니었지만, 몽골의 민족주의의 발단이 된다. 새해가 되어 1990년 1월 2일, 민주동맹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민주 혁명을 요구했다. 바트믕흐 정부가 이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민주동맹은 보다 공격적으로 바트믕흐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1월 14일, 시위대 1,000명이 울란바토르 레닌박물관 앞에 집결했다. 1월 21일에는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표어로 한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칭기즈칸은 몽골에서는 영웅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침략자로써 아주 치를 떠는 대상이었기에 소비에트 치하에서 칭기즈칸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련 치하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칭기즈칸 탄생 600주년인 1962년에 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 칭기즈칸을 언급했다가 소련에 의해 숙청당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의 시위대는 몽골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반(反) 정부 인사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Хүний нүүртэй социализм)" 내에서 자유로운 선거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대인 몽골인 거의 대부분은 당시에는 읽을 수 없었지만 민족주의적인 몽골 전통문자인 비치크 문자를 사용하면서 몽골식 키릴 문자가 가진 정치 체제를 상징적으로 부정했다. 처음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레닌 박물관 앞 광장으로 집결했으며, 레닌 박물관 앞 광장은 이때부터 울란바토르 자유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음 날인 22일에도 영하 21도의 날씨 속에서도 수흐바타르 광장에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푯말을 들며 소련이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몽골 민족 영웅들을 재발굴하였다. 시위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 죄로 1962년 몽골 인민혁명당에서 축출되었던 정치인 다라민 토모르오치르(Daramin Tomorocir)도 재평가하였다. 여기에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별을 지워버린 국기를 흔들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시위대는 행진, 데모, 단식투쟁, 교사 파업 및 노동자 파업을 일으켰다. 이 시위대는 몽골 도심, 농촌 전반에서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불러나갔다. 이후 1월과 2월 매주마다 주말 시위가 열렸으며, 수도 울란바토르 뿐 아니라 주도 에르데네트와 다르항, 후브스굴 주 무룽에도 열리기 시작한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매일 시위를 열자 1990년 3월 4일 몽골 민주 연합(MDU) 및 기타 3개 개혁 조직은 회동을 열어 정부의 회담 참석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자 시위대는 10만 명까지 불어났다. 1990년 3월 7일 민주연합은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공산당의 사임을 촉구하며 10명이 단식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이들의 뒤를 이어 불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은 시민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3월 11일 정부-시민단체 회담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 의장이었던 잠빙 바트뭉흐는 1990년 3월 9일 정치국을 해산하고 의장에 사임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 내에서는 시위대 진압작전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여 잠빙 바트뭉흐에게 작전 명령을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엄중하게 다루라고 말했다. 이처럼 몽골 민주화 운동은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반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민주동맹 이외에도 다양한 민주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민주동맹과 3개의 단체는 공동집회를 열었다. 이 날 집회에는 약 10만 명이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 민주동맹 소속 10명은 공산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태가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자, 인민혁명당내 강경파는 시위를 진압할 것을 요구하며, 계엄령 선포를 바트뭉흐 총서기에게 요구했다.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이 집에서 제8차 전당대회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남편은 ‘우리 몇 안되는 몽골인들끼리 상대방의 코피를 터트릴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통을 던져 버렸어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요. 평상시에 조용하던 분이 목청을 돋우며 ‘일부 지도부가 나에게 서명을 요구하는데, 내가 다녀오리다’고 말했어요. 그는 오른손에 넥타이를 쥐고 있으면서도 넥타이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곤 식사도,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바트뭉흐는 3월 9일 저녁에 정치국 회의를 열어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계엄령을 막았다. 그는 인민혁명당 정치국을 해체하고, 자신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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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21
  •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이 많다. 대개 이런 집들은 처분을 해야 하는데 이런 집들의 처분은 굉장히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대한 땅을 갖고 있는 국가다. 따라서 수도인 모스크바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다방면으로의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지방정부들을 두었다. 지방정부는 지방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만 해당 주민들의 소득 수준을 간과할 수 없다. 소득 수준에 맞게 세금을 걷다보면 예산 집행은 연방 의회인 두마의 승인을 얻은 연방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주는 예산으로도 한계가 있다. 러시아 토지법과 부동산법을 전공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버려진 집들 처분은 가장 먼저 걸리는게 예산과 인건비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걸리는 것은 러시아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 때문이다. 이 집들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데 보상금을 줄 돈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받아들인게 2018년에 개정된 주택법에 의거한 보험에 관한 부분이다. 이 "주택보험"은 우리 대한민국의 보험제도를 차용했다. 이건 한국의 제도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한국의 보험제도는 러시아에서도 엄지척을 들어올릴만큼 러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사유재산도 보호하고 적절하게 보상도 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 2018년 법이 바뀌기 전의 문제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항상 계약서를 휴대하고 있고 바뀌기 전의 법령에 연방 정부의 도장까지 찍혀 있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이 집들, 참 처분이 곤란한게 지방정부의 큰 딜레마다. 한국의 경우,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미관에 문제가 있다며 판자촌을 화끈하게 밀어버렸지만 러시아는 사유재산 및 토지법상 2018년 이전 개헌하기 전의 문제가 걸려 있어 골치 아프다. 사람도 살지 않고, 청소년들 탈선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저런 "폐가"들은 가로등도 잘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불빛이 약해 밤에 길 지나다니기 무섭다. 이처럼 치안의 문제도 있고 심각한 부분이다. 러시아 집의 담장 또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래 전부터 외부의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만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기능도 수행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담장은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담장에 항상 구멍이 나 있는 것. 담장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지켜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주택의 창문 장식에는 전통적으로 두세 겹의 커튼과 레이스가 사용되고 창문은 심지어 3층까지 창살로 덮이곤 한다. 완벽한 담장의 개념은 폐쇄 사회를 만들어 내며 안전 유지에 드는 거래 비용을 높이고 있다. 경비원과 감시원들은 의례 준수를 위해 생산 노동에서 열외가 된 사람들이다. 러시아에 담장 현상이 생겨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러시아는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자원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나라였다. 담장은 그들이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담장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불신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불신은 소련 시절부터 쌓여 왔다. 키프로스나 스페인 어딘가에 가서 높은 담장을 보면 그 너머에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셋째, 담장은 재산 문제와 관련돼 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체제를 도입한 이후 사유재산 보장을 약속했지만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유재산 보장은 매우 미약했었다. 사업가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사업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가 언제라도 이 사업을 '가로채 갈지' 모른다고 두려워 했다. 러시아에서 2010년 이전까지 유일한 재산 소유자는 국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를 대리한 임시 경영자일뿐이다. 소련 시절의 심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 소유는 언제나 잠정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담장의 과대망상을 낳았다. 끝으로 담장은 끝없는 러시아 공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형태를 부여하려는 모종의 시도이기도 했다. 담장은 모든 종류의 유출입과 원거리 이동을 제한하는 데 필요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이러한 담장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사유재산을 가지는 체제에 익숙해지면서 그 이전에 쌓여온 불신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대인 현재, 담장 현상으로 인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자본주의와 민주체제에 익숙해진 것이다. 게다가 세대도 소련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서서히 주축으로 올라오면서 이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지워지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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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0
  • 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는 국가적 안전을 보증하였다. 이반 뇌제는 코사크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보내 시베리아를 경략하도록 했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코사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치이들은 용병처럼 활약하였으며, 캄차트카, 베링해, 태평양까지 러시아의 국경을 확대하였다. 러시아가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은 코사크 인들 덕택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식민지가 창출되면서, 러시아의 중앙부 농민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국가와 지주의 권위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과감히 이주하거나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베리아의 군대 총독들은 이주하거나 탈출한 농민들을 수비대로 재편성하거나 농업 활동에 종사시켰다. 소련 학자들은 이들이 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고 현재도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왜 아시아로 팽창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농노화가 진행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변방 지대 진출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도 농민들에게 토양을 제공하고, 농촌 경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새로운 땅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뇌제가 시베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베리아산 풍부한 모피는 내외적으로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손상을 오랜 시기동안 받았다고 간주한 러시아는 동방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몽골의 후계 칸국 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16세기에도 변방 유목민족들의 공격으로 러시아는 국경지대에서 방어적인 공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방어적 작전에서 이민족을 향한 공격적 자세로 전면적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시베리아를 경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민족은 총 18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중 105개의 종족이 시베리아에 산다. 워낙 많은 민족들이 있는 관계로 러시아 내 민족학 연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지만 가장 전수조사가 어렵기도 한다. 오히려 민족학 연구자들은 연구할게 워낙 많다는 학문적 산실이 시베리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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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조지아의 여당 "조지아의 꿈"의 승리로 끝난 지방선거, 이어 발생한 불복 시위는 미국 NED가 기획한 색깔혁명의 시도인가?
    조지아의 선거에 이은 선거 불복 시위는 끝이 없는듯 싶다. 이번 10월 4일에 있었던 조지아의 지방선거에서는 여당이자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이 압승을 거뒀다. 이는 작년인 2024년 10월 26일 개최된 총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친 EU 정당인 야당이 맥을 못 추고 있었는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패배하자 조지아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 당과 조지아 4개 야당이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당시 조지아의 꿈 당은 총선에서 전체 투표수의 약 54%를 얻으며 4차례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 150개의 의석 중 조지아의 꿈 당은 직전 총선 결과인 90석보다는 적지만 과반을 넘는 89석을 차지했다. 4개 야권 정당이 뭉친 야권 연합은 총 61석을 획득했다. 야권은 광범위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총선 결과에 강력히 반발했고, 선거 다음 날인 10월 27일 선거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불복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총선 결과가 알려지자 10월 28일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조지아와 EU 깃발을 흔들면서 시위를 벌였다. 친서방 성향의 무소속 살로메 주라비슈빌리(Salome Zourabichvili) 전 대통령은 10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은 국민의 표를 훔친 사건이라 비판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현재, 작년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조지아의 서부인 아자리야 지역은 본래부터 친러 지역이었기에 대다수를 석권하는데 성공했고, 관건이었던 동부 지역 또한 몇 지역에서 접전이 있었지만 결국 64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승리를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조지아 선관위에서 55%의 투표용지를 집계한 결과, 조지아의 꿈은 전체 투표의 80% 이상을 획득했으며, 특히 접전이 예상됐던 수도 트빌리시 시장 선거에서 현 시장인 카하 칼라제(Kakha Kaladze) 후보가 73% 이상 개표 기준으로 7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무난히 압승했다. 물론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압승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압도적인 패배에, 야당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거져 나오는게 있다. 바로 "부정선거 논란"이다. 이전 여론조사에서는 친유럽 성향의 야권이 주장하던 EU 가입에 대한 찬성이 80% 이상을 차지했었다. 특히 13년 전인 2012년 총선에서 조지아의 꿈에게 패배해 정권을 빼앗긴 통합국민운동(UNM) 측이 지방 선거 결과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했다. 조지아 제1 야당인 통합국민운동(UNM)은 전 대통령인 미하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정당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미국 국립민주주의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이 있다. NED, 이 간악한 집단은 명목상으로는 ‘NGO’에 속해 있는 집단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집단은 미국 CIA에 막대한 지원를 받고있다. 그 동안 NED 집단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크게 공헌한 집단이고,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다. NED가 내세운 인물이 바로 미하일 사카슈빌리이다. 사카슈빌리는 어릴 때부터 미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컬럼비아 대학교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2003년 11월 23일, NED의 선동과 더불어 사카슈빌리는 친미, 친서방주의자들과 함께 손에 장미를 들고 시위에 나서 셰바르드나제의 정부를 불법적으로 뒤엎었다. 이것이 이른비 "조지아 장미혁명"이라는 CIA의 지원, NED의 기획, 행동대장 사카슈빌리와 UNM의 액션으로 "색깔혁명"을 일으켜 뒤엎어 버린 것이다. 특히 NED는 유럽에서 러시아와 맞서는 매파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한 온갖 악마화를 주도적으로 한 가짜 NGO 단체인 셈이다. 10월 4일 개표 이후, UNM은 기자회견을 통해 “선거관리위원회와 여당이 조지아 국민의 승리를 훔쳤다(საარჩევნო კომისიამ და მმართველმა პარტიამ გამარჯვება წაართვეს ქართველ ხალხს).”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어 또 다른 야당인 변화를 위한 연합(Coalition for Change)의 니카 그바라미아(Nika Gvaramia) 당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가 ‘헌법적 쿠데타(კონსტიტუციური გადატრიალება)’라고 강조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조지아의 독립 선거 모니터링 단체인 공정 선거 및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사회(ISFED : International Society for Fair Elections and Democracy)는 지방 곳곳에서 유권자들을 협박했고 표를 매수한 행위 등, 부정행위가 여러 건 적발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지아 선관위는 지방선거가 각 지역에서 평화롭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고 재차 강조했으며 비록 투표율이 41%로 적긴 했지만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참고로 ISFED 또한 EU와 NED의 끈이 연결된 단체다. 그리고 이들은 작년 총선부터 올해 지방선거까지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익숙한 상황이다. 얼마 전에 끝난 몰도바 총선에서 "러시아가 개입했다"고 선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에도 어김없이 "러시아풍"을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체코 총선도 마찬가지고, 동유럽에서 선거는 "러시아풍"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동유럽의 각 집권당들은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강조하며 이를 적절히 이용해 집권을 이어 나가려 한다. 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모두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가지고 EU를 멀리하자는 "급진적 변화(Radical Change)"보다 EU가 있는 상태에서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비하자는 "안정(Stability)"에 포커스를 두었다.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잇다른 경제 위기에 지친 시민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이를 억지로라도 눌러 오로지 "안정(Stability)"만이 국가와 국민을 구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소위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러시아가 예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 시켰던 것처럼, 러시아 또한 동유럽을 침공할 것이라 선전하여 국민들을 선동한다. 이번 조지아 지방 선거도 마찬가지다. 결국 UNM은 러시아가 개입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야당을 지지하는 전 국민들이 시위에 참여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불법적인 의회에 불참할 것이며, 국제 선거관리단의 진행 하에 총선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조지아의 전 총리이자 '조지아의 꿈'을 창당하고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여당의 비선실세인 비지나 이바니슈빌리(Bidzina Ivanishvili)가 나섰다. 그는 명예총재로써 존재하고 있는 인물로 조지아 GDP의 30%나 되는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바니슈빌리는 원래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친러 논란을 지우기 위해 2011년에 와서야 러시아 국적을 포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지아에서는 사실상 현 총리인 이라클리 코바히제(Irakli Kobakhidze)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이바니슈빌리가 실질적인 실권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거둔 지방 선거의 승리는 세계적인 사건이며 국민의 뛰어난 역량을 제시하는 지표"라고 평가하며 여당을 두둔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바니슈빌리의 이러한 발언은 조지아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야당은 이바니슈빌리가 러시아어로 이 발언을 한 것에 분노하여 여당인 "조지아의 꿈"을 러시아가 적극 지원하고 있다며 트집을 잡았다. 결국 야권 세력과 NED 등의 NGO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평화적 혁명'을 구호로 내세워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외치는 것은 평화적 혁명이 아니라 심각한 폭력이 동반된 폭동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부패와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대통령 관저 인근으로 행진했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위는 루스타벨리 대로와 자유광장 일대에 모여 정권 교체와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시위는 현지시간 오후 4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도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조지아 의회 건물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또 다른 그룹은 자유광장 에 모여 성 게오르기 동상 앞에 무대를 설치하고 집회를 이어니갔다. 한편, 트빌리시 국립 제1 대학에서 출발한 학생 행진대는 멜리키슈빌리 대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When injustice becomes law, resistance becomes a duty).”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조지아 국기를 들고 “그루지야! 그루지야!”를 연호하며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극단주의 시위대가 대통령궁 울타리를 넘어 울타리 일부를 파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처럼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시위로 인해 전면 충돌로 비화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처음에는 '평화적 혁명'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대통령 궁의 울타리를 넘으며 경찰과 충돌을 야기했다. 평화시위라도 어떠한 선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와 같은 선을 이미 넘어버렸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대통령 궁 울타리를 시위대가 뛰어 넘어 진입하는 "평화 시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러시아 매체 RT에서 기가 막힌 장면을 포착했다. 이 울타리를 뛰어 넘어 폭동을 조장하는 자들이 "가면을 쓴 정체 모를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입수한 마지막 5번째 사진이 이들인데 이들은 가장 앞장 서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 이렇게 되면 경찰도 흥분하게 되어 있고,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경찰은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려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 차량 여러 대를 투입하면서 폭도들과 전투 아닌 전투를 벌여 이들을 대통령궁에서 쫓아냈다. 이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은 근처 카페와 트빌리시 거리 곳곳을 공격하여 창문을 부수고, 가구를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러시아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조지아 내무부는 이번 사태로 경찰관 21명과 시위 참가자 6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라클리 코바히제 총리는 "부상자 중 경찰관 1명이 위중한 상태"라고 전했다. 부상자 다수가 최루탄, 고무탄 등으로 인해 타박상을 입어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내무부는 "시위가 평화적 범위를 벗어나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폭력 행위로 변질됐다"며 주최 측 인사들이 체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결국 UNM 소속 이라클리 나디라제(Irakli Nadiradze) 전 트빌리시 시의원, 야권 정치위원회 소속 무르타즈 조델라바(Murtaz Jodelabar) 전 검찰총장 등 야권 핵심 인사 5명이 정권 전복 선동 및 집단으로 폭력단을 조직한 혐의, 그리고 폭동을 획책한 죄목으로 전격 구속했다. 이들은 조지아 형법으로 유죄 판결 시 최대 9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이 NED의 맴버들이라 추측하고 있다. 아마 뒤에는 미국 CIA가 최종 보스일 것으로 보여 진다. 6일 현재 시위는 잦아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끊임없이 조지아의 내부분열을 획책하여 제2의 우크라이나로 만들려는 미 행정부의 속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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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0
  • 20세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현재까지 러시아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러시아 버스커들
    러시아 거리 곳곳에서 버스커들의 연주에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국가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며 평온하기도 하다. 러시아 버스커들은 20세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현재까지 러시아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여겨지게 된 ‘바르드 음악(Бардовская музыка)’의 후예들이다. 바르드 음악은 다른 말로, 영어의 ‘작가(Author)’와 그 뿌리를 같이하는 단어를 포함한 ‘작가의 / 작가주의적 음악(Авторская музыка)’이라고도 불린다. 이 표현에서 느껴지듯, 바르드들은 연행자의 이미지보다는 글을 쓰는 문학가의 정체성으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서점에 가면 시집의 형태로 출판된 바르드들의 작품집이 음악이 아닌 시 코너에 꽃혀 있으며, 작곡가를 뜻하는 캄포지타르(Композитор) 대신 시인을 의미하는 단어(포엣·Поэт)로 분류된다. 바르드들은 그러니까 ‘시 같은’ 가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들인 셈이다. 러시아 친구들을 만나보면 푸시킨으로 대표되는 유구한 러시아어 문학의 전통에 큰 자부심을 표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바르드 음악은 이러한 러시아 시문학 역사의 한 자랑스러운 부분인 셈이다. 어떤 경우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이오시프 브로드스키(Иосиф Бродский)와 같은 시인들의 글이 바르드들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했다. 내 영혼은 지치지 않고 어둠으로 서둘러 가며 다리 위를 스쳐 지날 것이네 페트로그라드의 안개 속에서 4월의 부슬비 속에서 눈은 머리 아래 있고, 목소리 하나가 들릴 것이네. - 바르드들의 노래로 불려온 브로드스키의 시 《스텐시(Стэнси)》 중 ‘벗이여, 안녕히’ 바르드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바르드 음악이 독자적인 장르로 대두된 건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민족음악학자 제임스 도트리(James M. Daughtry)에 따르면, 혹자들은 러시아 땅에 존재해 오던 ‘노래시’의 형태와 바르드 음악의 기원을 연결 짓는다. 또 다른 이들은 ‘로만스(Romans)’와 같은 고유 장르들이 20세기 중엽 서구에서 유행한 기타 중심의 작가주의적 음악과 만나 태동한 일종의 국제적 현상으로 여긴다. 어떤 이들은 바르드 음악이 스탈린 시대 집단수용소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부른 노래들에서 기원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 인텔리 젊은이들의 하위 문화에서 바르드 신(Сцена)이 태어났다고 여긴다. 바르드가 자유 · 비판 · 젊음의 하위 문화와 연관된다는 시각은, 블라디미르 비소츠키(Владимир Высоцкий)나 고려인인 율리 김(Юли Ким) 같은 대표적 바르드들의 노래 속에 있는 날카로운 풍자, 그리고 그들의 저항운동가로서의 행보들을 보면 수긍이 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바르드 음악들이 1980년대 개혁·개방 이전까지는 비공식적으로만 유통되었으며 여러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별과 땅에 대한 애착, 민족애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지기에, 바르드 음악을 저항과 휴머니즘이라는 특정 소재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러시아 시의 문학적 관습이 깊숙이 반영된 가사 쓰기와, 7현 기타 전통에서 나오는 특유한 화성과 멜로디에서 바르드 음악의 특징을 찾는 것이 보다 합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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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마크롱의 팔레스타인 국가인정 선언, 향후 국제질서에 미칠 영향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이를 공식화했다. 그와 같은 프랑스의 선언은 9월 22일이었고 그 하루 전인 9월 21일에는 영국과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와 호주가 프랑스에 앞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했다. 2024년 아일랜드, 노르웨이, 스페인 등 서유럽 일부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선언했지만, G7 국가로서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을 이처럼 연쇄적으로 공식화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특히 그렇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한 UN 회원국은 193개 회원국 중 151개국으로 늘어났다. 1988년 12월 말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한 국가가 78개국이었던 것에 비하면 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을 인정하고 있지 않거나 유보하는 중요 국가는 미국, 이스라엘, 독일, 이탈리아, 일본, 한국 정도다. G7 중 미국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아직 승인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으므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먼저 인정하지 않은 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로 인한 역사적 빚 때문에 선뜻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하기 어렵지만, 두 개 국가의 해법을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이 중동 정세의 호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류하고 있지만, 속내는 미국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꿈을 지지하면서도 국가인정에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한국은 팔레스타인을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로 인정하긴 어렵지만, 두 개의 국가 해법에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네타냐후는 잇달아 나온 팔레스타인의 국가를 승인한 국가들을 행해 수치스러운 결정이라든가 광기라고 비난했지만, 그에게 되돌아온 것은 텅 빈 유엔 총회장에서 고립된 이스라엘의 현실뿐이었다. 미국은 마크롱의 이번 선언을 하마스에 대한 보상이라고 반발하면서 이스라엘을 두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오히려 마크롱의 이번 선언은 다른 서방 국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하마스보다 압바스 정권을 지지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마크롱의 이번 선언은 7월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회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내용상 프랑스가 G7 국가로서 사실상 첫 번째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서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마크롱은 자국의 지지율을 고작 15% 정도였지만, 이번 선언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마크롱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함으로써,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중동 판세를 흔들어서 미국의 일방적 정책을 다자 외교로 변경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향후 중동 정세에 과연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스라엘의 극우파가 아마도 이른바 시나이반도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이스라엘의 영역을 확장하는 대이스라엘주의를 현실화하는 ‘다윗 회랑’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보도도 일부 아랍권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길목이 시리아의 동남부 지역인데, 이스라엘이 최근 시리아 영공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시리아 정부에 가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여튼 이스라엘이 가자 전쟁을 통해 하마스를 궤멸시키고 요르단강 서안까지 장악하려는 의도로 보면 서방 입장에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서방이 팔레스타인에 뿌려 놓은 불씨가 결국 중동 정세를 불안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영토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을 프랑스가 주도적으로 한 것은 이제라도 뭔가 중동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로 보이기는 한다. 마크롱의 외교적 노림수는 팔레스타인의 국가인정이라는 선언을 통해 이스라엘의 중동 재편에 제동을 어느 정도 걸면서 아랍 국가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있다. 비록 프랑스가 이스라엘의 반발을 감수하고서라도 중동에서 아랍국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프랑스에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 있다. 아랍국들의 속내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함에 있어서 서방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거기에 부응한 서방 국가가 바로 프랑스인 셈이었다. 미국이 그동안 중동 문제를 다룸에 있어 일방적 친이스라엘 정책은 네타냐후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영토적 야욕을 부채질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마크롱이 UN 연설에서 강자의 법칙이 위험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트럼프를 우회 저격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의지의 연합’을 주도했고, 팔레스타인 국가인정에 앞장서면서 국제적 리더로서 위상을 포장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둘 다 상징적이지만, 마크롱의 행보는 오랫동안 미국의 보호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 미국의 지원이 불확실해지면서, 워싱턴의 발자국을 따르지 않으려는 국가들은 프랑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프랑스의 국제적 영향력은 많이 감소했지만, 불확실한 세계에 미국과 다른 길로 나아갈 때 중심적 인물들은 프랑스 대통령들이었다. 임기 말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그들은 외교로서 돌파해 나갔으며 성과도 나름대로 거두었다. 마크롱의 지금 행보도 마찬가지다. 사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처럼 불거진 것은 영국이 아랍인과 맺은 ‘후세인-맥마흔 선언’, 프랑스와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비밀 협정), 유대인과 맺은 ‘벨푸어 선언’을 하면서 영국을 제외한 당사국들이 서로 협정 내용을 모르다 보니 각기 저마다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영토 문제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후세인-맥마흔 선언과 벨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의 지위 문제에서 서로 모순된 내용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영국은 이 선언을 그 당시에 자화자찬하면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겠만, 현시점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영토 할당 협정을 비밀리에 맺으면서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에 해안 지역 일부와 현재 이라크와 요르단을 획득했다. 반면 프랑스는 이라크 북부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차지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 협정을 하면서 아랍권을 배제함으로써 사실상 어쩌면 벨푸어 선언보다 더 근본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1917년 구소련의 볼셰비키가 이 비밀 협정을 폭로하면서 영국은 자신의 이중 플레이가 드러나 당황했고, 아랍권은 자신들이 영국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경악했다. 그러면 프랑스는 어떠한가? 프랑스는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그동안 표정 관리만 해왔을 뿐이다. 마크롱도 팔레스타인보다 레바논에 더 신경을 쓰는 행보를 보여 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프랑스도 책임이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프랑스는 당시에 말하자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후에 팔레스타인 문제가 불거질 것을 간과하고, 그냥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국에 맡겨버리고 그대로 수수방관했을 뿐이다. 영국은 워낙 책임이 큰 당사국이라 일종의 도덕적 책임감으로 선뜻 팔레스타인의 염원인 팔레스타인의 국가인정을 주저했을 것이다. 유럽 국가들 중 어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그때 비로소 영국이 동참한다면 약간의 책임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가 움직이니까 영국도 영연방 국가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하면 다수의 구가들이 이에 동참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마크롱의 이번 선언은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다. 프랑스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 마크롱의 이름이 프랑스 국내에서 사라지겠지만,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은 성과로 남을 것이라고 말이다. 마크롱의 앞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외교적으로 프랑스의 목소리를 내면서 국제질서를 다각화하는 전략은 긍정적이다. 필자는 마크롱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왜 진작 그렇게 하지 못하고 미국의 눈치만 보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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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3
  • 유럽 근현대 시기 프로이센 정부와 유태인, 아쉬케나지
    프로이센 정부는 유태인들에게 수공업을 권장했으나 유태인들은 이전부터 종사하던 무역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금융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행상을 하던 유태인들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대거 은행업이나 주식 시장으로 진출하였는데 1882년 기준 프로이센의 금융업, 주식매매 등에 종사자 중 1/5 가량이 유태인이었다. 1880년대 기준으로 프로이센 대학생의 1/10이 유태인이기도 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유태인임을 나타내는 특수한 복장의 착용 및 특수한 세금을 부과 받는 것 등의 차별 대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계몽주의의 확대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 중 상당수는 주류 사회에 동화되었다. 이전까지는 아라비아 인들처럼 부계명을 사용하던 유태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으로 그 권익이 발전된 사례다.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 영토의 유태인들은 상당수가 도시 부르주아들로 성장해 나갔으나 러시아 제국 영토 내 우크라이나 일대 유태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산업 발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로 성장하는 속도가 다소 늦어졌다. 물론 폴리트(Polit)의 유태인 소작농들은 새로운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한다는 조건 하에서 현지 폴란드 인, 우크라이나 인 농노들보다 훨씬 지대 부담이 적은 편이었으나 대규모의 유태인 포그롬이 활발해진 이후 사정이 변하였다. 근대 동유럽 농촌 지역에 거주하던 지주들은 도시에 있는 유태인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의심했으며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유태인들이 독일인, 폴란드 인의 앞잡이라 여기며 증오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민족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반유태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에는 동유럽 유태인의 상당수가 보드카 양조 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지역 사회 알코올 중독과 관련한 폐단의 원인으로 몰리곤 했다. 19세기 말 키시네프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상당수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떠나 해외로 이민했지만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어도 현지 토착 유태인들의 차별로 고초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키시네프 포그롬 이후 영국으로 이민한 유태인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이민자들은 기존에 이미 영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빈민들로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태인들을 처리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기고 영국령 우간다 계획 등을 세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비(非)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의 주장들이 다소 반영되었다. 프로이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현대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회에서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및 소련 출신, 이른바 동부 유태인들과 서유럽의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이의 갈등은 적지는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유태인 이민 허용이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모두 부유할 것이라는 편견과 다르게 상당수가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출신 유태인들은 비교적 동유럽 출신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많지 않았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 유태인들의 직계 기원에 해당된다. 한편 이렇게 이주한 유태인들 중 빈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에 빠르게 유혹되어 유테인 마피아나 폴란드 마피아 중에 아슈케나지 유태인 출신들이 많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태인들은 해당 지역의 벨라루스 인과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의 반목이 심했던 편이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유럽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다. 서유럽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던 편이었지만 유럽 내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프랑스에서마저 20세기 초반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1930년 초반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수효는 대략 1,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이 중 900만여 명 가량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폴란드 제2 공화국에는 330만여 명, 소련에는 300만여 명, 헝가리와 루마니아에는 120만여 명, 독일에 52만여 명, 오스트리아에는 18만여 명의 유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이 900만 명의 유태인들 가운데 약 600만 명의 학살당했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의 피해가 매우 심각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태인들 중 90~91%가 학살되어 거의 멸절되다시피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되었으며 현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숫자는 약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대략 500만 정도이며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계통 혈통들이 300만 정도에 이른다. 나머지 국가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도합한 것이 200만 정도로 계산된다.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문화는 거의 멸절되었는데 특히 약 500만 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던 이디시어는 사실상 사어가 되었다. 다행히 문헌이나 음성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어서 보존은 가능하다고 한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판가름하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서유럽에 거주한다는 배경 하에 유태교 신앙을 하고 있는지의 유무여부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민족주의가 전파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는데 폴란드 등의 동유럽은 근대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소했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같은 민족이라는 소위 언어 민족주의가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 사이에서도 이디시어 구사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세기 후반 혈연적 민족주의가 정착한 이후에는 종교를 공유하는 문화적 민족 개념이었던 아쉬케나지 유태인 역시 혈연적 민족으로 변모하였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토속 유태인과의 혈연적 민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오랜 통혼으로 인하여 외양으로 아쉬케나지 유태인을 다른 현지 유럽인들과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 법을 통하여 4대 조상 기준으로 50% 이상 유태인의 혈통으로 나타나면 유태인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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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3
  • 카스피해의 자원과 지정학적 역사
    카스피해는 면적이 약 37만 1,000 ㎢로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령의 4배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며 서해와 일본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면적 뿐 아니라 수량도 약 68,000 km3으로 세계 최대 규모이며 최대 수심 약 1025 m, 평균 수심 약 210 m 정도로 수심도 깊다. 다만 이 일대는 증발량이 많아서 조금씩 면적이 줄어들고 있으며, 카스피 해의 주변은 해수면 아래 30m 정도의 저지대이다. 또한 카스피 해의 밑바닥은 두 개의 분지 지형이 연결된 형태이며,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에 깊이 들어간 지점이 있고 가운데 부분의 수심은 비교적 얕다. 이것과 비슷한 대표적인 사례는 옆에 있는 아랄 해다. 카스피해는 예전 아랄 해와는 달리 면적도 9배나 되고 평균 수심도 10배 이상 되고 완전히 고립된 아랄 해와는 달리 흑해와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랄 해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지만 계속되는 남용은 카스피 해의 유지에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며 최악의 경우 아랄 해처럼 대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최근 카스피 해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청어의 수가 10년 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였으며, 청어를 먹이로 삼는 철갑상어도 먹이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처지라 한다 카스피 해와 그 주변은 각종 자원이 많은데,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로 유명하며 캐비어로도 유명하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의 바쿠 유전 개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였으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자원에 눈길을 돌린 미국이 소련 붕괴 뒤 독립한 주변국들에 접근을 가속화하여 분쟁이 시작되었다. 카스피 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한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 사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 컨소시엄'을 꾸려 카스피 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2018년 8월 12일에 러시아, 이란,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악타우에서 카스피 해 연안 5개국 정상회담을 가지고, 카스피 해를 특수한 지위의 바다라고 정의하면서 22년에 걸친 영유권 분쟁을 끝내고, 카스피 해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에 합의했다. 2022년 4월 1일. 카자흐스탄, 터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4개국이 상호 협력을 강화하고 카스피 해 횡단 회랑의 물류 잠재력을 높이는 동시에 국제 운송 시스템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카스피해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에 대해 5개국의 역사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첫째, 적용할 국제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도, 호수도 아니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도출될 경우 협정 이행 위원회가 합의에 의해 판단하거나 새로운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 합의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분쟁의 소지는 남게 된다. 둘째, 군사적 불균형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협정은 5개 연안국 이외의 군대를 카스피 해에 주둔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상대방 국가를 해상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조항은 역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나토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어서 러시아의 일방적 군사 행동을 묵인하는 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카스피 해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러시아가 반대했다. 셋째, 수면 아래의 광물자원과 어족자원에 대한 공동의 규정을 마련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러시아는 쌍무 또는 3자 협정을 체결해 자원 배분에 관해 합의했지만, 이란은 주변 연안국과 자원 배분에 대립하고 있다. 자원 배분 문제에 대해 협약은 애매하게 넘어갔다. 넷째, 카스피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 또는 케이블선 연결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 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건설해 투르크메니스탄에 원유를 공급할 계획인데, 이는 연안 5개국의 합의 사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질 태세다. 연안국들 사이에 분쟁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카스피해는 석유 자원 뿐 아니라 전 세계 캐비어의 80~90%를 공급한다. 또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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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 최근 몰도바에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진주한 이유
    최근에 나토와 프랑스군이 각각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통해 몰도바에 진입했다. 몰도바 정부는 몰도바 내 친러 분리주의 및 자치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 지역을 통해 러시아의 내정 간섭 가능성을 경계해 왔다고 밝혔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이를 더 현실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을 앞둔 2023년 2월 13일에는 마이아 산두(Maia Sandu) 몰도바 대통령이 러시아가 자국의 EU 가입을 무산시키기 위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통한 군사적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EU는 군사 목적으로 창건된 단체가 아니다. 러시아는 몰도바가 나토 가입이 아닌 이상, EU 가입에 대해서 몰도바 내정에 간섭한 바 없다. 그럼에도 마이아 산두가 몰도바의 EU 가입을 러시아가 방해하고 있다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11월 5일에 몰도바의 지방 선거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자국 내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내세워 여당인 '행동과 연대당(PAS, Party of Action and Solidarity)'의 집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선거 전략이다. 한국에는 북한의 핵심 안보 위협을 이용한 "북풍"이 있는 것처럼 몰도바 또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위협하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몰도바 내에는 선거철만 되면 국내 안보를 볼모로 "러시아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 이는 모순된 기우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러시아군은 1,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명목으로 들어와 있기에 당장 전쟁을 벌이거나 교전을 목적으로 한 군대가 아니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병력은 약 6,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에 예비군까지 합치면 약 30,000명 정도다. 반면 몰도바의 총 병력은 15,000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10배다. 게다가 예비군이 70,000명이나 되며 거의 10만에 가까운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물론 그 중에 병력 8,000여 명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국경에 배치되어 러시아 평화유지군과 마주하고 있다. 교전 목적이 아닌 군대에 대단위 전투기를 비롯한 공군 전력이 아닌 오로지 육군으로만 되어 있고, 전차도 몇 대 없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장에 비해 매우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이런 사정을 몰도바 정부가 모를리 없다. 몰도바군에 비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별볼일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두고 러시아의 위협을 내세워 자꾸 선동하는 이유는 마이아 산두의 '행동과 연대당(PAS, Party of Action and Solidarity)'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다. 이같은 몰도바 안보를 볼모로 한 "러시아풍"이 없으면 이 정당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럼에도 2023년 11월 지방 선거는 시골 도시 일대를 여당인 "행동과 연대당(PAS)"이 장악하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핵심 지역의 과반을 얻는데 실패하여 사실상 걸림돌로 남게 되었다. 그동안 충분히 조장해 온 "러시아풍"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마이아 산두와 "PAS"는 지방 선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왠지 껄끄러운 승리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김없이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과 사회주의당(Partidul Socialiştilor)을 통해 러시아가 대선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국의 선거에 중공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사례다. 2024년 3월 5일 알렉산드루 무스테아처(Alexandru Musteață) 몰도바 정보안보국(SIS) 국장은 러시아 측이 2024년 가을 몰도바의 EU 가입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 및 2025년 의회 선거에 개입하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면서 몰도바 내 친러 세력을 통해 몰도바의 선거와 내정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1년이 지나도록 전혀 공개된 적이 없다. 무스테아처 국장은 러시아가 이를 위해 트란스니스트리아 및 가가우지아 측과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확실히 러시아가 개입해 트란스니스트리아 및 가가우지아 측과 연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PAS"의 마이아 산두는 41%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지만, 알렉산드르 스토야노글로(Alexander Stoianoglo) 후보가 친러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26%의 득표기록해 과반에 실패하여 2차 결선까지 가게됐다. 2차 결선에서 마이아 산두는 간신히 연임에 성공했다. 다만 여기서도 부정선거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몰도바는 독립 직후부터 친러 성향 주민들이 정부에 반감을 드러내며 국민 통합에 어려움을 겪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갈등을 봉합하는 것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역할이다. 그러나 마이아 산두 대통령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국민 갈등 해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어떻게든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 지역의 자치권을 압류하고 두 지역을 몰도바에 합병시켜 루마니아와 완전한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 마이아 산두와 "PAS"의 목표다. 그리고 2024년 12월 28일 가스프롬(Gazprom)은 2025년 1월 1일부터 몰도바에 대한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몰도바의 에너지 경제는 러시아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가스프롬은 몰도바의 7억 900만 달러(약 9,200억 원) 규모의 가스 대금 미납을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2024년 12월 31일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가스 경유 협정이 만료되면서 우크라이나가 갱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몰도바 정부는 긴급 리스크 관리와 필수 서비스의 지속성 확보를 위해 12월 16일부터 에너지 부문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어 국내 전력 수출 제한, 전력 소비량 30% 이상 감축, 에너지원 다변화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몰도바는 급한대로 루마니아로부터 가스를 수입하고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의 저장 시설을 활용하여 에너지 수요를 보충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에너지 안보 강화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장려했지만 한국의 경상도 크기와 비슷한 몰도바의 작은 국토로는 신재생에너지 활용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그리고 어김없이 2025년 9월 28일 오늘, 몰도바의 총선이 실시된다. 선거철이 되자 어김없이 마이아 산두와 여당인 "PAS" 당이 자국 국내 안보를 볼모로 한 "러시아풍"이 몰아닥쳤다. 마이아 산두는 중대 의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통해 러시아가 자국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9월 23일 연설에서 러시아가 구소련 국가인 몰도바에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러시아가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소요 사태 음모를 적발해 74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마이아 산두의 기습 체포작전은 야당 선거위원단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100명 이상을 대상으로 250건의 수색을 벌여 74명의 체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자 했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러시아에서 범죄 세력을 통해 조율됐다고 했다. ‘마트료시카’로 불리는 친러주의자들이 몰도바에서 활동을 강화하면서 합법적인 언론 매체를 이용하여 "산두 대통령이 2,400만 달러(약 330억 원)를 횡령했으며 향정신성 약물에 중독되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들을 상대로 비민주적 체포 작전을 감행한 몰도바 검찰청은 체포 인원 대부분이 세르비아로 체계적으로 이동해 훈련을 받았고 연령대는 19세에서 45세 사이라는 짤막한 정보만 제공했다. 이어 체포된 74명은 최대 72시간 구금될 예정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범죄는 72시간 구금이 아니라 대법원에도 상고해야 할 큰 선거범죄다. 그럼에도 72시간 구금이라는 것 자체가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 2일 전 26일에는 "몰도바의 심장", "몰도바의 미래", "몰도바 사회주의자", "몰도바 공산당" 등 친러 정당인 최대 야당 4개 정당을 유권자 매수, 불법 정당 자금 조달, 자금 세탁 혐의 등을 뒤집어 씌워 출마를 금지했다. 이는 핵심 야당의 출마를 금지시킨 사상 초유의 비민주적인 행위다. 그러면서 마이아 산두는 4개의 핵심 야당의 출마를 금지시킨 뒤, 러시아가 수억 유로를 투입해 수십만 표를 매수하고 있으며 지금 표를 사고 있는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비난했다. 산두는 러시아가 수백 명을 매수해 혼란과 폭력을 선동하고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때맞춰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몰도바에 들어왔다. 이는 친러 세력을 억제시키고, 몰도바의 총선에 개입하기 위한 조치다. 특히 작년 3월 마이아 산두는 프랑스를 방문해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이후 양국 간 국방 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한 배경으로 프랑스군이 몰도바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총선에서 러시아와 친러파의 개입을 막고, 부정선거를 방지한다는 것과 혹시도 모를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러시아군은 1,500명 정도고, 트란스니스트리아 군대 또한 얼마 없는데다 장비도 빈약하니 프랑스나 기타 나토 국가들 입장에서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비민주적인 야당탄압과 더불어, "러시아풍"으로 안보 불안을 상기시키고, 이를 통해 친러로 돌아서는 것보다 안정을 선택하게 하려는 여당인 "PAS" 당과 마이아 산두,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서 프랑스군과 나토군까지 끌어들여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몰도바 총선은 마이아 산두와 여당인 "PAS" 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하며 승리할 것이다. 이 선거 자체가 이미 공명정대한 민주적 선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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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8
  • 투르크멘족과 소비에트 투르크메니스탄, 독립 이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간추린 현대사
    투르크멘인들이 1917년 소비에트 통치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통치권이 넘어가는 그 시간에는 혁명적 활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해는 러시아의 통치에 반발한 투르크멘 인들이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날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1916년의 전국에서 일어난 반(反) 차르 운동은 투르크메니스탄 전체에 불이 붙았다. 소련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무장 투쟁은 바스마치 반란에 대한 일부분으로써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중앙아시아를 퍼졌으며, 후일 소련으로부터의 종속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나왔다. 비록 소련 측의 자료는 공화국 역사에서 작은 역사로써 치부되었으나, 수많은 투르크멘 인들이 사망하고 맹렬한 저항이었음에는 명확했다. 1924년 10월에 중앙아시아는 2개의 정치 구역인 트란스 카스피 지역과 투르크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투르크멘 주가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되었고,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입헌 공화국이 되었다. 초기 소련 통치 시간의 강요된 집산주의와 경제 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는 목축 유목이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적인 경제 체제로써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에는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도 유목에서 벗어나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투르크멘 인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약화 시키고 소련식 생활로 전환 시키기 위한 소비에트 정부는 투르크멘 인들의 가족관계와 정치 관계, 종교와 문화 의식, 지식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인과 다른 슬라브인들, 그리고 코카서스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투르크메니스탄의 도시 지역에 정착하여 현대적인 산업적 역량을 갖추어 놓았으나 투르크메니스탄에 매장된 천연자원을 고갈시키는 사태를 벌이게 되었다. 소련의 통치 하에서 종교적인 믿음은 공산 정권 당국에 의해서 “구시대의 흔적”과 미신으로 간주되어 큰 탄압을 당했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 학교와 종교의식들은 금지되었고, 대부분의 모스크는 폐쇄되었다. 타슈켄트에 본부를 둔 공식적인 무슬림 형제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설립되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신앙을 촉진시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무슬림 형제단은 무슬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선전을 하는데 주요한 목적을 가졌지만, 무신론적인 주입은 종교적인 번성을 탄압하여 투르크멘 인들을 국제적인 무슬림 형제단으로부터 고립을 자초시키는 결과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무슬림식 장례식이나 남성 할례와 같은 일부 종교적인 관습들은 소련 통치 기간 내내 시행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적인 믿음, 지식, 관습들은, 주로 ‘민습‘으로 간주 된 비공식적인 이슬람 활동들은 주립 영적 부서에 의해 금지 받지 않아 시골 지역에서 간혹 발견될 수 있었다. 소련이 붕괴할 무렵인 1991년 하반기 6개월 동안에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경우 5개의 독립국이 새로 건설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등장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는데 2006년 12월 말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독재국가로 인정되었던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은 더 이상 그와 같은 국제적 비난을 받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투르크메니스탄이 세계인에게 있어서 매우 생소하고 접근하기도 힘들 것만 같은 국가임에는 분명하다. 이는 투르크멘 비자 취득의 난해함과 국가정보 취득의 불편함 및 각국에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이 부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와 같은 추정을 더욱 더 사실에 가깝게 해주고 있다. 소련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한 투르크멘 공화국(TSSR)은 1924년에 설립되었다. 당시 투르크멘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은 중앙아시아 타 국가와 달리 가장 먼저 구성 공화국 수준의 지위를 가졌던 초창기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공화국은 호라즘 지역을 두고 우즈배크 인들 다수 지역과 투르크멘 인들 다수 지역으로 양분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당초 소비에트 볼셰비키 정권은 강력한 중앙아시아 통합정부를 경계하고 전형적인 ‘분할과 지배(divide and rule)’ 원리를 적용 시켰다. 그와 같은 분할과 지배 정책은 오늘날과 같은 중앙아시아 5개국을 성립시키는 결과를 주게 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는 이란 국경과 가까운 아슈하바트였지만 1930년경에는 오늘날의 투르크메나바트(Türkmenabat)로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에는 무산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카자흐 자치 공화국의 중심이 키질오르다에서 알마티로, 우즈베크 공화국의 중심이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이동되었지만 투르크멘 공화국에서는 성사되지 못했다. 공화국의 중심이 이전되는 것은 당시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지방 토착화 정책의 결과로 현지 지역 상류층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어 발언권이 상승 된 것과도 큰 상관 관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카자흐인들의 비중이 큰 대주즈 지역권인 알마티가 부상되고, 타지크 인 문화보다 우즈베크 인들의 문화권이 더 강한 타슈켄트 지역의 상류층들이 강력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투르크멘 공화국의 경우 현재의 대표적 5대 부족 중 하나인 테케 족의 영향권 밖으로 국가 중심이 이전되는 것이 현실화 되지 못하였다. 민족의 개념이 매우 부족하였던 투르크멘 인들의 경우 민족을 단위로 한 국가 건설이 민족 스스로가 아니라 1924년에 소비에트 당국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주장과 반대되는 견해도 있는데 투르크멘 인들이 주도적으로 공화국 수립을 성공시켰다는 것에 있다. 1920년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볼 때 부족주의적 전통이 매우 강했던 투르크멘 인 거주 지역에서 후자의 견해는 다소 설득력이 약하지만 양자 균형적 시각을 가지는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1924년 당시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 1922년 12월 30일에 결성된 이래 2년이 지나가고 러시아 혁명 7주년이 되던 신생 국가의 지극히 불안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서방 국가의 침입에 대한 안보적 불안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내적으로는 적위군과 백위군과의 내전이 종식되고 레닌이 주창한 신 경제정책이 수립되어 시행되던 실험기 경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레닌이 1924년 1월에 서거함으로써 권력 승계 문제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르크멘 공화국은 거대한 소련의 변방 지역으로서 하나의 구성 공화국 지위를 획득한 것이었다. 특히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한 것은 투르크멘 인들이 현대 역사적인 무대에 등장한 지 최초의 일이었다. 소련 시기 투르크멘 공화국의 경제적 역할은 면화 공급지였고 1960~70년대에는 천연가스 생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소련 전국을 공급하던 기지로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면화생산은 우즈베크 공화국이 대표적이었지만 아무다리야 강의 물줄기를 활용한 면화재배에 열중한 투르크멘 공화국 또한 면화 산업이 주력산업이었다. 광대한 카라쿰 사막 지역을 개발하기 위하여 대수로 건설이 아무다리야 강 중류 지대에서 투르크멘 공화국을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지역을 따라 과감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으로 인해 아무다리야 강에서 아랄 해로 유입되는 수량이 극히 부족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이미 심각한 상태로 되어 말라가는 아랄 해 문제의 배경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투르크멘 지역에 대학이나 전문학교 등 고등 교육 기관이 부재하였으나 1954년에는 대학교 6개와 전문학교 30개가 있을 정도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투르크멘 과학아카데미에는 40여 개의 전문 과학 연구원들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러시아 제국 시기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와 같은 부분은 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가 러시아 제국 체제보다 훨씬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체제라고 선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국가 전체 수준에서 저널이 9개 종, 신문이 67개 종이고 부수가 30만 부에 달하였다. 수도 아슈하바트에는 1948년 대지진 이후 도시 복구 공사가 상당 부분 완성되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활발한 주거용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일부 주거지에는 수도와 가스가 공급되어 시민들이 일찍부터 공공재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집단 농장인 콜호즈와 소브호즈 체제로 유지되던 농촌 지역에서는 면화와 기타 농작물, 그리고 축산업이 가계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다. 투르크멘 공화국에도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1937년에 강제 이주 되어진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벼농사 기술 덕분에 투르크멘 공화국 북부 지방에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집단 농장 콜호즈 체제 또한 초중등학교, 의료시설, 창고, 제분소, 간이 제작소, 문화회관 등 소속 구성원들이 필요한 대학을 제외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투르크멘 공화국과 이들 주민들이 분명히 이전 시기보다 물질적인 진보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더불어 스푸트니크 발사 등으로 소련 국민의 구성원으로서의 긍지도 높았다. 그러나 면화와 원유 가스 중심의 산업과 이에 대한 중앙통제 등으로 경제 구조의 취약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선 제조업 공장들은 주로 모스크바 등 유럽 러시아 중심부에 많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에서는 일종의 원료 공급지에 준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막대한 천연가스는 유럽을 향해 공급되었고 그 경제적 실익은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면화 납부는 모스크바 인근의 이바노보 면직 공장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제품화되었기 때문에 투르크멘 공화국으로서는 늘 불만족 상태에 있을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취약성은 현대 투르크메니스탄의 독립과 함께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천연가스 공급에 대한 완전한 장악과 국제 원료 가격의 상승으로 인하여 그 이익이 그대로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에 귀속됨으로 인해 국가적 발전이 독자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그 외의 산업은 뚜렷이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고 면화 또한 경제성 면에서 경쟁력이 상실되어 나갔다. 1991년 하반기에 소련 전역에 걸쳐 파급되었던 구성 공화국의 탈 소련 현상은 투르크멘 공화국에도 이어졌지만 경제적인 독립성 면에서 발트 3국이나 우크라이나 등과 확연히 비교되는 투르크멘 공화국으로서는 반드시 환영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동은 국가의 독립으로 이어졌고 1924년 당시와 비슷하게도 투르크메니스탄은 자국민의 역동적인 독립운동의 결과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독립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1924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모든 사항을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해결해야 하고 결정하면서 이익을 취하고 손해를 보아야 하는 현실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전형적인 당 관료 출신으로서 행정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948년 대지진의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나야조프 대통령은 그 사건의 결과 고아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공산당에 집중하는 것만이 세상에 가장 잘 적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통령이 된 니야조프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구사하게 되는데 이는 인민회의를 통한 권력 구조가 그것이다. 물론 지금은 폐지된 것이지만 정원 2,508명의 대규모 회의체인 ‘인민회의’의 구성원 중 회의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정부 관료, 원로 대표, 주요 단체 회장 등 소위 국가 상류층 대표들로 구성된 헌법 기관이었다. 어떻게 보면 소련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최고 소비에트’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성 이미지 소유자였던 니야조프도 2006년 12월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함으로써 20년 동안의 통치를 마감해야 하였다. 그의 후임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Gurbanguly Berdimuhamedow) 대통령은 철저한 개혁주의자로 인식되었고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한 국가 이미지 개선 및 교육 개혁 및 문화 정책의 개선 등을 통해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서방 국가와의 적극적인 접촉과 투자 유인,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증진을 통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결망 구축에 집중함으로써 동, 서양을 연결하는 문명의 중심지 국가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한 기본 토대는 막대한 천연가스 수출을 통한 달러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국제 사회에서 그동안 폐쇄되어 있었던 투르크메니스탄이 개방한 지 4년이 넘어간 1996년에는 욜라탄(Yolatan) 지역에 많은 주변 국가 근로자 수백 명이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다. 아직 많은 국가들의 최고 지도자들이 투르크메니스탄 국빈 방문을 실행한 적은 많지 않지만 가까운 시기에 수많은 국가 원수들의 국빈 방문이 이루어져 국제 사회와 투르크메니스탄의 관계가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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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9-27

포토뉴스 검색결과

  • 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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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4
  • 세계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 가고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 100세까지 임기가 보장된 92세의 현직 대통령의 8선째 당선
    지난 10월 12일 서아프리카의 또 다른 국가 카메룬에서 대선이 있었다. 이 대선에서 지난 11대 대통령이었던 폴 비야(Paul Biya)가 다시 한 번 당선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무려 8선이나 대통령을 해먹었고, 현 나이 92세로 세계 최고령 현직 대통령으로 세계 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카메룬의 대통령 임기는 7년이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 등록 제한 규정이 없어 무제한으로 후보 등록이 가능한 셈이다. 총리 재임 중이던 1982년 폴 비야는 대통령의 사임으로 직을 물려받은 이후, 43년째 집권 중이다. 이미 7년 전, 직전 선거에서도 71%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는 야권 후보가 11명이나 난립했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야권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등록을 거부하고 헌법위원회가 이를 인정하는 바람에 출마가 무산됐다. 사실상 폴 비야에게 대항할 의미 있는 경쟁자가 없어진 셈이다. 폴 비야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선거 유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또 다시 당선되고 난 후, 1933년 2월 생인 그가 사실상 100세까지 현직 대통령 직위를 보장 받게 된 셈이다. 이 같은 사태는 어느 누구라도 사실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은 지리적으로 사막과 밀림, 고원, 대서양 연안의 해안 지대끼지 다양한 기후 지역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한 국가 안에 열대지방, 온대지방, 해양성기후에 아열대 기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국가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250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프리카 대륙의 축소판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룬에서 100세까지 임기를 거칠 대통령이 출현하는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현 선거 결과 폴 비야 대통령은 승리했고, 내년 2026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임기가 시작된다. 폴 비야는 1982년 11월 4일에 첫 대통령인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Ahmadou Babatoura Ahidjo, 1924~1989)가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사의를 발표했기 때문에 총리였던 폴 비야가 1982년 11월 6일에 대통령에 등극했다. 이후 아히조는 1983년 4월에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다. 카메룬은 아프리카 내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는 아히조와 비야가 현재까지 카메룬의 국권을 지키며 내실을 든든히 다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된다. 1984년 1월 14일에 비야는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서 99.98%라는 경이적인 득표수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이는 북한에서 있을 법한 엄청난 득표율이다. 당연히 부정선거는 물론이고, 정상적으로 민주적인 선거기 치뤄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 때부터 폴 비야가 대놓고 권력투쟁에서 아히조를 압살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고, 카메룬을 통일시킨 공로를 가진 아히조에 비해 폴 비야는 파리정치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카메룬의 독립에 기여헸단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 폴 비야의 세력이 강해지자 아히조는 위기에 몰려 결국 병을 핑계로 사임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1983년에 군부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아히조가 관여했을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비야는 아히조의 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했고, 결국 아히조는 1989년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객사한 이후 현재까지도 고국인 카메룬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묻혀 있다. 이후, 1984년 아히조 대통령의 복귀를 노린 쿠데타가 있었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1988년 4월 24일에 카메룬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1982년에 집권한 이래, 1990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폴 비야는 다당제와 서구식 선거제도 등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이를 이용해 부정선거를 저질러 계속 대통령에 재선해 독재자로 변모했고, 2008년에는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며 영구 집권을 하게되었다. 이후 나이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통치 능력에서 문제가 있다는 논란과 경제난 속에 각계에서 사임 요구들이 지속되었지만, 비야는 이를 일축하면 독재를 계속했다. 지난 12일에 치뤄진 카메룬 대선은 왕정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자들이 집중되어 몰려 있는 말 그대로 고인 물의 아프리카 정치 상황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 세계에서 30년 이상 집권 중인 현직 대통령의 7명 중 5명이 아프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적도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대통령은 현재 나이로 83세로 계속 집권 중이고, 1979년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이던 숙부를 몰아내고 집권한 뒤 46년 동안 권좌를 수성하고 있으며, 아들을 부통령으로 앉히기도 했다. 그리고 콩고 공화국의 드니 사수응게소(Denis Sassou Nguesso) 대통령은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지만, 반군을 이끌고 내전을 일으켜 1997년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현 나이 81세다. 1986년 집권한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은 두 차례 헌법을 수정하여 3선 제한과 75세 출마 금지 조항을 모두 삭제해 40년 집권 시대를 열었고 현재 나이 81세이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내년 1월의 열일 우간다의 대통령 선거에도 재출마를 선언했다.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aias Afwerki) 대통령은 올해 나이 79세로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는 초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일 언급할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 또한 앞서 언급한 대통령에 미치지 못하지만 15년을 독재했고, 곧 있을 25일 대선에도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돼, 장기집권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와타라 대통령 또한 나이가 83세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 유독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독특한 지정학적인 배경과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장기 집권자들은 비판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면서도, 유력 인사들에게는 그만한 자리와 국가 이권 및 금전적 보상을 두둑히 쥐어주며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 토대를 구축했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부족적 혈연, 그리고 가족 중심의 씨족들과 향토 지역끼리 똘똘 뭉치는 연고주의 등을 이용해 가장 강력한 충성 엘리트 집단을 설계한다. 그러면서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군사쿠데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규군과 별개로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친위 부대들을 운영해 이들로 하여금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당수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근대 국가 역사는 매우 짧아 완연한 안정세가 필요하다는 점도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이처럼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들은 자신을 서구 열강에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끈 영웅이자 해방자 등으로 포장시켜 국민들에게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북한과도 매우 비슷하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을 독립투사 중 하나로 포장하여 영웅이자 해방자가 되었고, 그가 아니면 북한이라는 국가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삼았었다. 이런 것으로 보면 후진국과 후진국의 수장들이 독재를 일삼는 정치적 정당성은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불어 2011년 장기 집권 권력자들을 연이어 축출되었던 ‘아랍의 봄’은 사하라 이남으로 번지지 않은 이유가 인종과 종교, 사회 구조들이 이슬람 중심의 북아프리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정치적 민주화가 어렵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다. 아랍의 봄이 본격화 되던 2011년 UN의 도움으로 수단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남수단의 초대 지도자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대통령 또한 예정된 선거를 미루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의 길을 따라가려 한다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다. 참고로 그 또한 올해 나이 74세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지켜본 결과, 장기 집권하고 있던 아프리카 권력자들이 간간히 축출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가봉에서는 56년 동안 이어졌던 봉고 부자 대통령 시대가 2023년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완전히 종결되었다. 짐바브웨를 37년 동안 철권 통치한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1924~2019)도 2017년 서방이 조작한 색깔혁명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된 반정부 시위로 축출되었고 수단을 30년 동안 장기 통치한 오마르 알 바시르(Omar al-Bashir)도 2019년 쿠데타로 추방되어야 했다. 게다가 다른 대륙에 비해 전체 인구 중 젊은 세대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확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정치가 인터넷과 IT의 발달로 인해 선진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한다. 아프리카 각 국 국민들이 시위를 벌여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하거나 장기 집권이 저지되는 사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나 틱톡 같은 영상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예전처럼 철권 통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인도양의 섬나라인 세이셸은 지난 주에 벌어진 대선에서 야당 후보 패트릭 에르미니(Patrick Ermini)가 현직 와벨 람칼라완(Wavel Ramkalawan) 대통령을 누르고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2024년 마키 살(Macky Sall) 당시 대통령이 예정되어진 대선을 연기하고 장기 집권을 노리는 꼼수를 벌이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아프리카의 갈 길은 멀다. 카메룬의 폴 비야 대통령의 8선째 재선을 보며 카메룬의 미래가 암담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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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이 많다. 대개 이런 집들은 처분을 해야 하는데 이런 집들의 처분은 굉장히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대한 땅을 갖고 있는 국가다. 따라서 수도인 모스크바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다방면으로의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지방정부들을 두었다. 지방정부는 지방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만 해당 주민들의 소득 수준을 간과할 수 없다. 소득 수준에 맞게 세금을 걷다보면 예산 집행은 연방 의회인 두마의 승인을 얻은 연방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주는 예산으로도 한계가 있다. 러시아 토지법과 부동산법을 전공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버려진 집들 처분은 가장 먼저 걸리는게 예산과 인건비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걸리는 것은 러시아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 때문이다. 이 집들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데 보상금을 줄 돈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받아들인게 2018년에 개정된 주택법에 의거한 보험에 관한 부분이다. 이 "주택보험"은 우리 대한민국의 보험제도를 차용했다. 이건 한국의 제도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한국의 보험제도는 러시아에서도 엄지척을 들어올릴만큼 러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사유재산도 보호하고 적절하게 보상도 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 2018년 법이 바뀌기 전의 문제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항상 계약서를 휴대하고 있고 바뀌기 전의 법령에 연방 정부의 도장까지 찍혀 있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이 집들, 참 처분이 곤란한게 지방정부의 큰 딜레마다. 한국의 경우,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미관에 문제가 있다며 판자촌을 화끈하게 밀어버렸지만 러시아는 사유재산 및 토지법상 2018년 이전 개헌하기 전의 문제가 걸려 있어 골치 아프다. 사람도 살지 않고, 청소년들 탈선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저런 "폐가"들은 가로등도 잘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불빛이 약해 밤에 길 지나다니기 무섭다. 이처럼 치안의 문제도 있고 심각한 부분이다. 러시아 집의 담장 또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래 전부터 외부의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만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기능도 수행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담장은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담장에 항상 구멍이 나 있는 것. 담장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지켜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주택의 창문 장식에는 전통적으로 두세 겹의 커튼과 레이스가 사용되고 창문은 심지어 3층까지 창살로 덮이곤 한다. 완벽한 담장의 개념은 폐쇄 사회를 만들어 내며 안전 유지에 드는 거래 비용을 높이고 있다. 경비원과 감시원들은 의례 준수를 위해 생산 노동에서 열외가 된 사람들이다. 러시아에 담장 현상이 생겨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러시아는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자원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나라였다. 담장은 그들이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담장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불신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불신은 소련 시절부터 쌓여 왔다. 키프로스나 스페인 어딘가에 가서 높은 담장을 보면 그 너머에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셋째, 담장은 재산 문제와 관련돼 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체제를 도입한 이후 사유재산 보장을 약속했지만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유재산 보장은 매우 미약했었다. 사업가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사업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가 언제라도 이 사업을 '가로채 갈지' 모른다고 두려워 했다. 러시아에서 2010년 이전까지 유일한 재산 소유자는 국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를 대리한 임시 경영자일뿐이다. 소련 시절의 심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 소유는 언제나 잠정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담장의 과대망상을 낳았다. 끝으로 담장은 끝없는 러시아 공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형태를 부여하려는 모종의 시도이기도 했다. 담장은 모든 종류의 유출입과 원거리 이동을 제한하는 데 필요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이러한 담장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사유재산을 가지는 체제에 익숙해지면서 그 이전에 쌓여온 불신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대인 현재, 담장 현상으로 인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자본주의와 민주체제에 익숙해진 것이다. 게다가 세대도 소련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서서히 주축으로 올라오면서 이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지워지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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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0
  • 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는 국가적 안전을 보증하였다. 이반 뇌제는 코사크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보내 시베리아를 경략하도록 했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코사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치이들은 용병처럼 활약하였으며, 캄차트카, 베링해, 태평양까지 러시아의 국경을 확대하였다. 러시아가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은 코사크 인들 덕택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식민지가 창출되면서, 러시아의 중앙부 농민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국가와 지주의 권위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과감히 이주하거나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베리아의 군대 총독들은 이주하거나 탈출한 농민들을 수비대로 재편성하거나 농업 활동에 종사시켰다. 소련 학자들은 이들이 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고 현재도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왜 아시아로 팽창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농노화가 진행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변방 지대 진출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도 농민들에게 토양을 제공하고, 농촌 경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새로운 땅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뇌제가 시베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베리아산 풍부한 모피는 내외적으로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손상을 오랜 시기동안 받았다고 간주한 러시아는 동방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몽골의 후계 칸국 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16세기에도 변방 유목민족들의 공격으로 러시아는 국경지대에서 방어적인 공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방어적 작전에서 이민족을 향한 공격적 자세로 전면적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시베리아를 경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민족은 총 18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중 105개의 종족이 시베리아에 산다. 워낙 많은 민족들이 있는 관계로 러시아 내 민족학 연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지만 가장 전수조사가 어렵기도 한다. 오히려 민족학 연구자들은 연구할게 워낙 많다는 학문적 산실이 시베리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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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조지아의 여당 "조지아의 꿈"의 승리로 끝난 지방선거, 이어 발생한 불복 시위는 미국 NED가 기획한 색깔혁명의 시도인가?
    조지아의 선거에 이은 선거 불복 시위는 끝이 없는듯 싶다. 이번 10월 4일에 있었던 조지아의 지방선거에서는 여당이자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이 압승을 거뒀다. 이는 작년인 2024년 10월 26일 개최된 총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친 EU 정당인 야당이 맥을 못 추고 있었는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패배하자 조지아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 당과 조지아 4개 야당이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당시 조지아의 꿈 당은 총선에서 전체 투표수의 약 54%를 얻으며 4차례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 150개의 의석 중 조지아의 꿈 당은 직전 총선 결과인 90석보다는 적지만 과반을 넘는 89석을 차지했다. 4개 야권 정당이 뭉친 야권 연합은 총 61석을 획득했다. 야권은 광범위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총선 결과에 강력히 반발했고, 선거 다음 날인 10월 27일 선거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불복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총선 결과가 알려지자 10월 28일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조지아와 EU 깃발을 흔들면서 시위를 벌였다. 친서방 성향의 무소속 살로메 주라비슈빌리(Salome Zourabichvili) 전 대통령은 10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은 국민의 표를 훔친 사건이라 비판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현재, 작년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조지아의 서부인 아자리야 지역은 본래부터 친러 지역이었기에 대다수를 석권하는데 성공했고, 관건이었던 동부 지역 또한 몇 지역에서 접전이 있었지만 결국 64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승리를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조지아 선관위에서 55%의 투표용지를 집계한 결과, 조지아의 꿈은 전체 투표의 80% 이상을 획득했으며, 특히 접전이 예상됐던 수도 트빌리시 시장 선거에서 현 시장인 카하 칼라제(Kakha Kaladze) 후보가 73% 이상 개표 기준으로 7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무난히 압승했다. 물론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압승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압도적인 패배에, 야당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거져 나오는게 있다. 바로 "부정선거 논란"이다. 이전 여론조사에서는 친유럽 성향의 야권이 주장하던 EU 가입에 대한 찬성이 80% 이상을 차지했었다. 특히 13년 전인 2012년 총선에서 조지아의 꿈에게 패배해 정권을 빼앗긴 통합국민운동(UNM) 측이 지방 선거 결과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했다. 조지아 제1 야당인 통합국민운동(UNM)은 전 대통령인 미하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정당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미국 국립민주주의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이 있다. NED, 이 간악한 집단은 명목상으로는 ‘NGO’에 속해 있는 집단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집단은 미국 CIA에 막대한 지원를 받고있다. 그 동안 NED 집단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크게 공헌한 집단이고,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다. NED가 내세운 인물이 바로 미하일 사카슈빌리이다. 사카슈빌리는 어릴 때부터 미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컬럼비아 대학교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2003년 11월 23일, NED의 선동과 더불어 사카슈빌리는 친미, 친서방주의자들과 함께 손에 장미를 들고 시위에 나서 셰바르드나제의 정부를 불법적으로 뒤엎었다. 이것이 이른비 "조지아 장미혁명"이라는 CIA의 지원, NED의 기획, 행동대장 사카슈빌리와 UNM의 액션으로 "색깔혁명"을 일으켜 뒤엎어 버린 것이다. 특히 NED는 유럽에서 러시아와 맞서는 매파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한 온갖 악마화를 주도적으로 한 가짜 NGO 단체인 셈이다. 10월 4일 개표 이후, UNM은 기자회견을 통해 “선거관리위원회와 여당이 조지아 국민의 승리를 훔쳤다(საარჩევნო კომისიამ და მმართველმა პარტიამ გამარჯვება წაართვეს ქართველ ხალხს).”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어 또 다른 야당인 변화를 위한 연합(Coalition for Change)의 니카 그바라미아(Nika Gvaramia) 당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가 ‘헌법적 쿠데타(კონსტიტუციური გადატრიალება)’라고 강조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조지아의 독립 선거 모니터링 단체인 공정 선거 및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사회(ISFED : International Society for Fair Elections and Democracy)는 지방 곳곳에서 유권자들을 협박했고 표를 매수한 행위 등, 부정행위가 여러 건 적발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지아 선관위는 지방선거가 각 지역에서 평화롭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고 재차 강조했으며 비록 투표율이 41%로 적긴 했지만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참고로 ISFED 또한 EU와 NED의 끈이 연결된 단체다. 그리고 이들은 작년 총선부터 올해 지방선거까지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익숙한 상황이다. 얼마 전에 끝난 몰도바 총선에서 "러시아가 개입했다"고 선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에도 어김없이 "러시아풍"을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체코 총선도 마찬가지고, 동유럽에서 선거는 "러시아풍"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동유럽의 각 집권당들은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강조하며 이를 적절히 이용해 집권을 이어 나가려 한다. 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모두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가지고 EU를 멀리하자는 "급진적 변화(Radical Change)"보다 EU가 있는 상태에서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비하자는 "안정(Stability)"에 포커스를 두었다.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잇다른 경제 위기에 지친 시민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이를 억지로라도 눌러 오로지 "안정(Stability)"만이 국가와 국민을 구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소위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러시아가 예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 시켰던 것처럼, 러시아 또한 동유럽을 침공할 것이라 선전하여 국민들을 선동한다. 이번 조지아 지방 선거도 마찬가지다. 결국 UNM은 러시아가 개입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야당을 지지하는 전 국민들이 시위에 참여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불법적인 의회에 불참할 것이며, 국제 선거관리단의 진행 하에 총선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조지아의 전 총리이자 '조지아의 꿈'을 창당하고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여당의 비선실세인 비지나 이바니슈빌리(Bidzina Ivanishvili)가 나섰다. 그는 명예총재로써 존재하고 있는 인물로 조지아 GDP의 30%나 되는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바니슈빌리는 원래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친러 논란을 지우기 위해 2011년에 와서야 러시아 국적을 포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지아에서는 사실상 현 총리인 이라클리 코바히제(Irakli Kobakhidze)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이바니슈빌리가 실질적인 실권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거둔 지방 선거의 승리는 세계적인 사건이며 국민의 뛰어난 역량을 제시하는 지표"라고 평가하며 여당을 두둔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바니슈빌리의 이러한 발언은 조지아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야당은 이바니슈빌리가 러시아어로 이 발언을 한 것에 분노하여 여당인 "조지아의 꿈"을 러시아가 적극 지원하고 있다며 트집을 잡았다. 결국 야권 세력과 NED 등의 NGO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평화적 혁명'을 구호로 내세워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외치는 것은 평화적 혁명이 아니라 심각한 폭력이 동반된 폭동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부패와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대통령 관저 인근으로 행진했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위는 루스타벨리 대로와 자유광장 일대에 모여 정권 교체와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시위는 현지시간 오후 4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도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조지아 의회 건물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또 다른 그룹은 자유광장 에 모여 성 게오르기 동상 앞에 무대를 설치하고 집회를 이어니갔다. 한편, 트빌리시 국립 제1 대학에서 출발한 학생 행진대는 멜리키슈빌리 대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When injustice becomes law, resistance becomes a duty).”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조지아 국기를 들고 “그루지야! 그루지야!”를 연호하며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극단주의 시위대가 대통령궁 울타리를 넘어 울타리 일부를 파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처럼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시위로 인해 전면 충돌로 비화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처음에는 '평화적 혁명'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대통령 궁의 울타리를 넘으며 경찰과 충돌을 야기했다. 평화시위라도 어떠한 선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와 같은 선을 이미 넘어버렸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대통령 궁 울타리를 시위대가 뛰어 넘어 진입하는 "평화 시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러시아 매체 RT에서 기가 막힌 장면을 포착했다. 이 울타리를 뛰어 넘어 폭동을 조장하는 자들이 "가면을 쓴 정체 모를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입수한 마지막 5번째 사진이 이들인데 이들은 가장 앞장 서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 이렇게 되면 경찰도 흥분하게 되어 있고,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경찰은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려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 차량 여러 대를 투입하면서 폭도들과 전투 아닌 전투를 벌여 이들을 대통령궁에서 쫓아냈다. 이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은 근처 카페와 트빌리시 거리 곳곳을 공격하여 창문을 부수고, 가구를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러시아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조지아 내무부는 이번 사태로 경찰관 21명과 시위 참가자 6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라클리 코바히제 총리는 "부상자 중 경찰관 1명이 위중한 상태"라고 전했다. 부상자 다수가 최루탄, 고무탄 등으로 인해 타박상을 입어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내무부는 "시위가 평화적 범위를 벗어나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폭력 행위로 변질됐다"며 주최 측 인사들이 체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결국 UNM 소속 이라클리 나디라제(Irakli Nadiradze) 전 트빌리시 시의원, 야권 정치위원회 소속 무르타즈 조델라바(Murtaz Jodelabar) 전 검찰총장 등 야권 핵심 인사 5명이 정권 전복 선동 및 집단으로 폭력단을 조직한 혐의, 그리고 폭동을 획책한 죄목으로 전격 구속했다. 이들은 조지아 형법으로 유죄 판결 시 최대 9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이 NED의 맴버들이라 추측하고 있다. 아마 뒤에는 미국 CIA가 최종 보스일 것으로 보여 진다. 6일 현재 시위는 잦아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끊임없이 조지아의 내부분열을 획책하여 제2의 우크라이나로 만들려는 미 행정부의 속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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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0
  • 20세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현재까지 러시아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러시아 버스커들
    러시아 거리 곳곳에서 버스커들의 연주에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국가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며 평온하기도 하다. 러시아 버스커들은 20세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현재까지 러시아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여겨지게 된 ‘바르드 음악(Бардовская музыка)’의 후예들이다. 바르드 음악은 다른 말로, 영어의 ‘작가(Author)’와 그 뿌리를 같이하는 단어를 포함한 ‘작가의 / 작가주의적 음악(Авторская музыка)’이라고도 불린다. 이 표현에서 느껴지듯, 바르드들은 연행자의 이미지보다는 글을 쓰는 문학가의 정체성으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서점에 가면 시집의 형태로 출판된 바르드들의 작품집이 음악이 아닌 시 코너에 꽃혀 있으며, 작곡가를 뜻하는 캄포지타르(Композитор) 대신 시인을 의미하는 단어(포엣·Поэт)로 분류된다. 바르드들은 그러니까 ‘시 같은’ 가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들인 셈이다. 러시아 친구들을 만나보면 푸시킨으로 대표되는 유구한 러시아어 문학의 전통에 큰 자부심을 표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바르드 음악은 이러한 러시아 시문학 역사의 한 자랑스러운 부분인 셈이다. 어떤 경우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이오시프 브로드스키(Иосиф Бродский)와 같은 시인들의 글이 바르드들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했다. 내 영혼은 지치지 않고 어둠으로 서둘러 가며 다리 위를 스쳐 지날 것이네 페트로그라드의 안개 속에서 4월의 부슬비 속에서 눈은 머리 아래 있고, 목소리 하나가 들릴 것이네. - 바르드들의 노래로 불려온 브로드스키의 시 《스텐시(Стэнси)》 중 ‘벗이여, 안녕히’ 바르드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바르드 음악이 독자적인 장르로 대두된 건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민족음악학자 제임스 도트리(James M. Daughtry)에 따르면, 혹자들은 러시아 땅에 존재해 오던 ‘노래시’의 형태와 바르드 음악의 기원을 연결 짓는다. 또 다른 이들은 ‘로만스(Romans)’와 같은 고유 장르들이 20세기 중엽 서구에서 유행한 기타 중심의 작가주의적 음악과 만나 태동한 일종의 국제적 현상으로 여긴다. 어떤 이들은 바르드 음악이 스탈린 시대 집단수용소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부른 노래들에서 기원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 인텔리 젊은이들의 하위 문화에서 바르드 신(Сцена)이 태어났다고 여긴다. 바르드가 자유 · 비판 · 젊음의 하위 문화와 연관된다는 시각은, 블라디미르 비소츠키(Владимир Высоцкий)나 고려인인 율리 김(Юли Ким) 같은 대표적 바르드들의 노래 속에 있는 날카로운 풍자, 그리고 그들의 저항운동가로서의 행보들을 보면 수긍이 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바르드 음악들이 1980년대 개혁·개방 이전까지는 비공식적으로만 유통되었으며 여러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별과 땅에 대한 애착, 민족애 등 다양한 소재들이 다루어지기에, 바르드 음악을 저항과 휴머니즘이라는 특정 소재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러시아 시의 문학적 관습이 깊숙이 반영된 가사 쓰기와, 7현 기타 전통에서 나오는 특유한 화성과 멜로디에서 바르드 음악의 특징을 찾는 것이 보다 합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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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유럽 근현대 시기 프로이센 정부와 유태인, 아쉬케나지
    프로이센 정부는 유태인들에게 수공업을 권장했으나 유태인들은 이전부터 종사하던 무역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금융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행상을 하던 유태인들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대거 은행업이나 주식 시장으로 진출하였는데 1882년 기준 프로이센의 금융업, 주식매매 등에 종사자 중 1/5 가량이 유태인이었다. 1880년대 기준으로 프로이센 대학생의 1/10이 유태인이기도 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유태인임을 나타내는 특수한 복장의 착용 및 특수한 세금을 부과 받는 것 등의 차별 대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계몽주의의 확대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 중 상당수는 주류 사회에 동화되었다. 이전까지는 아라비아 인들처럼 부계명을 사용하던 유태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으로 그 권익이 발전된 사례다.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 영토의 유태인들은 상당수가 도시 부르주아들로 성장해 나갔으나 러시아 제국 영토 내 우크라이나 일대 유태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산업 발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로 성장하는 속도가 다소 늦어졌다. 물론 폴리트(Polit)의 유태인 소작농들은 새로운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한다는 조건 하에서 현지 폴란드 인, 우크라이나 인 농노들보다 훨씬 지대 부담이 적은 편이었으나 대규모의 유태인 포그롬이 활발해진 이후 사정이 변하였다. 근대 동유럽 농촌 지역에 거주하던 지주들은 도시에 있는 유태인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의심했으며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유태인들이 독일인, 폴란드 인의 앞잡이라 여기며 증오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민족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반유태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에는 동유럽 유태인의 상당수가 보드카 양조 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지역 사회 알코올 중독과 관련한 폐단의 원인으로 몰리곤 했다. 19세기 말 키시네프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상당수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떠나 해외로 이민했지만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어도 현지 토착 유태인들의 차별로 고초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키시네프 포그롬 이후 영국으로 이민한 유태인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이민자들은 기존에 이미 영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빈민들로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태인들을 처리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기고 영국령 우간다 계획 등을 세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비(非)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의 주장들이 다소 반영되었다. 프로이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현대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회에서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및 소련 출신, 이른바 동부 유태인들과 서유럽의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이의 갈등은 적지는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유태인 이민 허용이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모두 부유할 것이라는 편견과 다르게 상당수가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출신 유태인들은 비교적 동유럽 출신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많지 않았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 유태인들의 직계 기원에 해당된다. 한편 이렇게 이주한 유태인들 중 빈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에 빠르게 유혹되어 유테인 마피아나 폴란드 마피아 중에 아슈케나지 유태인 출신들이 많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태인들은 해당 지역의 벨라루스 인과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의 반목이 심했던 편이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유럽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다. 서유럽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던 편이었지만 유럽 내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프랑스에서마저 20세기 초반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1930년 초반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수효는 대략 1,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이 중 900만여 명 가량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폴란드 제2 공화국에는 330만여 명, 소련에는 300만여 명, 헝가리와 루마니아에는 120만여 명, 독일에 52만여 명, 오스트리아에는 18만여 명의 유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이 900만 명의 유태인들 가운데 약 600만 명의 학살당했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의 피해가 매우 심각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태인들 중 90~91%가 학살되어 거의 멸절되다시피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되었으며 현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숫자는 약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대략 500만 정도이며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계통 혈통들이 300만 정도에 이른다. 나머지 국가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도합한 것이 200만 정도로 계산된다.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문화는 거의 멸절되었는데 특히 약 500만 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던 이디시어는 사실상 사어가 되었다. 다행히 문헌이나 음성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어서 보존은 가능하다고 한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판가름하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서유럽에 거주한다는 배경 하에 유태교 신앙을 하고 있는지의 유무여부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민족주의가 전파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는데 폴란드 등의 동유럽은 근대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소했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같은 민족이라는 소위 언어 민족주의가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 사이에서도 이디시어 구사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세기 후반 혈연적 민족주의가 정착한 이후에는 종교를 공유하는 문화적 민족 개념이었던 아쉬케나지 유태인 역시 혈연적 민족으로 변모하였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토속 유태인과의 혈연적 민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오랜 통혼으로 인하여 외양으로 아쉬케나지 유태인을 다른 현지 유럽인들과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 법을 통하여 4대 조상 기준으로 50% 이상 유태인의 혈통으로 나타나면 유태인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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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3
  • 카스피해의 자원과 지정학적 역사
    카스피해는 면적이 약 37만 1,000 ㎢로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령의 4배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며 서해와 일본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면적 뿐 아니라 수량도 약 68,000 km3으로 세계 최대 규모이며 최대 수심 약 1025 m, 평균 수심 약 210 m 정도로 수심도 깊다. 다만 이 일대는 증발량이 많아서 조금씩 면적이 줄어들고 있으며, 카스피 해의 주변은 해수면 아래 30m 정도의 저지대이다. 또한 카스피 해의 밑바닥은 두 개의 분지 지형이 연결된 형태이며,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에 깊이 들어간 지점이 있고 가운데 부분의 수심은 비교적 얕다. 이것과 비슷한 대표적인 사례는 옆에 있는 아랄 해다. 카스피해는 예전 아랄 해와는 달리 면적도 9배나 되고 평균 수심도 10배 이상 되고 완전히 고립된 아랄 해와는 달리 흑해와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랄 해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지만 계속되는 남용은 카스피 해의 유지에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며 최악의 경우 아랄 해처럼 대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최근 카스피 해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청어의 수가 10년 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였으며, 청어를 먹이로 삼는 철갑상어도 먹이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처지라 한다 카스피 해와 그 주변은 각종 자원이 많은데,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로 유명하며 캐비어로도 유명하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의 바쿠 유전 개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였으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자원에 눈길을 돌린 미국이 소련 붕괴 뒤 독립한 주변국들에 접근을 가속화하여 분쟁이 시작되었다. 카스피 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한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 사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 컨소시엄'을 꾸려 카스피 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2018년 8월 12일에 러시아, 이란,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악타우에서 카스피 해 연안 5개국 정상회담을 가지고, 카스피 해를 특수한 지위의 바다라고 정의하면서 22년에 걸친 영유권 분쟁을 끝내고, 카스피 해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에 합의했다. 2022년 4월 1일. 카자흐스탄, 터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4개국이 상호 협력을 강화하고 카스피 해 횡단 회랑의 물류 잠재력을 높이는 동시에 국제 운송 시스템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카스피해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에 대해 5개국의 역사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첫째, 적용할 국제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도, 호수도 아니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도출될 경우 협정 이행 위원회가 합의에 의해 판단하거나 새로운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 합의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분쟁의 소지는 남게 된다. 둘째, 군사적 불균형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협정은 5개 연안국 이외의 군대를 카스피 해에 주둔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상대방 국가를 해상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조항은 역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나토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어서 러시아의 일방적 군사 행동을 묵인하는 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카스피 해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러시아가 반대했다. 셋째, 수면 아래의 광물자원과 어족자원에 대한 공동의 규정을 마련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러시아는 쌍무 또는 3자 협정을 체결해 자원 배분에 관해 합의했지만, 이란은 주변 연안국과 자원 배분에 대립하고 있다. 자원 배분 문제에 대해 협약은 애매하게 넘어갔다. 넷째, 카스피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 또는 케이블선 연결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 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건설해 투르크메니스탄에 원유를 공급할 계획인데, 이는 연안 5개국의 합의 사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질 태세다. 연안국들 사이에 분쟁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카스피해는 석유 자원 뿐 아니라 전 세계 캐비어의 80~90%를 공급한다. 또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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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 투르크멘족과 소비에트 투르크메니스탄, 독립 이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간추린 현대사
    투르크멘인들이 1917년 소비에트 통치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통치권이 넘어가는 그 시간에는 혁명적 활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해는 러시아의 통치에 반발한 투르크멘 인들이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날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1916년의 전국에서 일어난 반(反) 차르 운동은 투르크메니스탄 전체에 불이 붙았다. 소련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무장 투쟁은 바스마치 반란에 대한 일부분으로써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중앙아시아를 퍼졌으며, 후일 소련으로부터의 종속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나왔다. 비록 소련 측의 자료는 공화국 역사에서 작은 역사로써 치부되었으나, 수많은 투르크멘 인들이 사망하고 맹렬한 저항이었음에는 명확했다. 1924년 10월에 중앙아시아는 2개의 정치 구역인 트란스 카스피 지역과 투르크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투르크멘 주가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되었고,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입헌 공화국이 되었다. 초기 소련 통치 시간의 강요된 집산주의와 경제 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는 목축 유목이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적인 경제 체제로써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에는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도 유목에서 벗어나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투르크멘 인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약화 시키고 소련식 생활로 전환 시키기 위한 소비에트 정부는 투르크멘 인들의 가족관계와 정치 관계, 종교와 문화 의식, 지식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인과 다른 슬라브인들, 그리고 코카서스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투르크메니스탄의 도시 지역에 정착하여 현대적인 산업적 역량을 갖추어 놓았으나 투르크메니스탄에 매장된 천연자원을 고갈시키는 사태를 벌이게 되었다. 소련의 통치 하에서 종교적인 믿음은 공산 정권 당국에 의해서 “구시대의 흔적”과 미신으로 간주되어 큰 탄압을 당했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 학교와 종교의식들은 금지되었고, 대부분의 모스크는 폐쇄되었다. 타슈켄트에 본부를 둔 공식적인 무슬림 형제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설립되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신앙을 촉진시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무슬림 형제단은 무슬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선전을 하는데 주요한 목적을 가졌지만, 무신론적인 주입은 종교적인 번성을 탄압하여 투르크멘 인들을 국제적인 무슬림 형제단으로부터 고립을 자초시키는 결과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무슬림식 장례식이나 남성 할례와 같은 일부 종교적인 관습들은 소련 통치 기간 내내 시행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적인 믿음, 지식, 관습들은, 주로 ‘민습‘으로 간주 된 비공식적인 이슬람 활동들은 주립 영적 부서에 의해 금지 받지 않아 시골 지역에서 간혹 발견될 수 있었다. 소련이 붕괴할 무렵인 1991년 하반기 6개월 동안에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경우 5개의 독립국이 새로 건설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등장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는데 2006년 12월 말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독재국가로 인정되었던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은 더 이상 그와 같은 국제적 비난을 받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투르크메니스탄이 세계인에게 있어서 매우 생소하고 접근하기도 힘들 것만 같은 국가임에는 분명하다. 이는 투르크멘 비자 취득의 난해함과 국가정보 취득의 불편함 및 각국에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이 부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와 같은 추정을 더욱 더 사실에 가깝게 해주고 있다. 소련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한 투르크멘 공화국(TSSR)은 1924년에 설립되었다. 당시 투르크멘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은 중앙아시아 타 국가와 달리 가장 먼저 구성 공화국 수준의 지위를 가졌던 초창기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공화국은 호라즘 지역을 두고 우즈배크 인들 다수 지역과 투르크멘 인들 다수 지역으로 양분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당초 소비에트 볼셰비키 정권은 강력한 중앙아시아 통합정부를 경계하고 전형적인 ‘분할과 지배(divide and rule)’ 원리를 적용 시켰다. 그와 같은 분할과 지배 정책은 오늘날과 같은 중앙아시아 5개국을 성립시키는 결과를 주게 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는 이란 국경과 가까운 아슈하바트였지만 1930년경에는 오늘날의 투르크메나바트(Türkmenabat)로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에는 무산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카자흐 자치 공화국의 중심이 키질오르다에서 알마티로, 우즈베크 공화국의 중심이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이동되었지만 투르크멘 공화국에서는 성사되지 못했다. 공화국의 중심이 이전되는 것은 당시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지방 토착화 정책의 결과로 현지 지역 상류층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어 발언권이 상승 된 것과도 큰 상관 관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카자흐인들의 비중이 큰 대주즈 지역권인 알마티가 부상되고, 타지크 인 문화보다 우즈베크 인들의 문화권이 더 강한 타슈켄트 지역의 상류층들이 강력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투르크멘 공화국의 경우 현재의 대표적 5대 부족 중 하나인 테케 족의 영향권 밖으로 국가 중심이 이전되는 것이 현실화 되지 못하였다. 민족의 개념이 매우 부족하였던 투르크멘 인들의 경우 민족을 단위로 한 국가 건설이 민족 스스로가 아니라 1924년에 소비에트 당국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주장과 반대되는 견해도 있는데 투르크멘 인들이 주도적으로 공화국 수립을 성공시켰다는 것에 있다. 1920년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볼 때 부족주의적 전통이 매우 강했던 투르크멘 인 거주 지역에서 후자의 견해는 다소 설득력이 약하지만 양자 균형적 시각을 가지는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1924년 당시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 1922년 12월 30일에 결성된 이래 2년이 지나가고 러시아 혁명 7주년이 되던 신생 국가의 지극히 불안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서방 국가의 침입에 대한 안보적 불안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내적으로는 적위군과 백위군과의 내전이 종식되고 레닌이 주창한 신 경제정책이 수립되어 시행되던 실험기 경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레닌이 1924년 1월에 서거함으로써 권력 승계 문제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르크멘 공화국은 거대한 소련의 변방 지역으로서 하나의 구성 공화국 지위를 획득한 것이었다. 특히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한 것은 투르크멘 인들이 현대 역사적인 무대에 등장한 지 최초의 일이었다. 소련 시기 투르크멘 공화국의 경제적 역할은 면화 공급지였고 1960~70년대에는 천연가스 생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소련 전국을 공급하던 기지로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면화생산은 우즈베크 공화국이 대표적이었지만 아무다리야 강의 물줄기를 활용한 면화재배에 열중한 투르크멘 공화국 또한 면화 산업이 주력산업이었다. 광대한 카라쿰 사막 지역을 개발하기 위하여 대수로 건설이 아무다리야 강 중류 지대에서 투르크멘 공화국을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지역을 따라 과감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으로 인해 아무다리야 강에서 아랄 해로 유입되는 수량이 극히 부족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이미 심각한 상태로 되어 말라가는 아랄 해 문제의 배경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투르크멘 지역에 대학이나 전문학교 등 고등 교육 기관이 부재하였으나 1954년에는 대학교 6개와 전문학교 30개가 있을 정도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투르크멘 과학아카데미에는 40여 개의 전문 과학 연구원들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러시아 제국 시기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와 같은 부분은 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가 러시아 제국 체제보다 훨씬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체제라고 선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국가 전체 수준에서 저널이 9개 종, 신문이 67개 종이고 부수가 30만 부에 달하였다. 수도 아슈하바트에는 1948년 대지진 이후 도시 복구 공사가 상당 부분 완성되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활발한 주거용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일부 주거지에는 수도와 가스가 공급되어 시민들이 일찍부터 공공재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집단 농장인 콜호즈와 소브호즈 체제로 유지되던 농촌 지역에서는 면화와 기타 농작물, 그리고 축산업이 가계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다. 투르크멘 공화국에도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1937년에 강제 이주 되어진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벼농사 기술 덕분에 투르크멘 공화국 북부 지방에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집단 농장 콜호즈 체제 또한 초중등학교, 의료시설, 창고, 제분소, 간이 제작소, 문화회관 등 소속 구성원들이 필요한 대학을 제외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투르크멘 공화국과 이들 주민들이 분명히 이전 시기보다 물질적인 진보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더불어 스푸트니크 발사 등으로 소련 국민의 구성원으로서의 긍지도 높았다. 그러나 면화와 원유 가스 중심의 산업과 이에 대한 중앙통제 등으로 경제 구조의 취약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선 제조업 공장들은 주로 모스크바 등 유럽 러시아 중심부에 많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에서는 일종의 원료 공급지에 준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막대한 천연가스는 유럽을 향해 공급되었고 그 경제적 실익은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면화 납부는 모스크바 인근의 이바노보 면직 공장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제품화되었기 때문에 투르크멘 공화국으로서는 늘 불만족 상태에 있을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취약성은 현대 투르크메니스탄의 독립과 함께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천연가스 공급에 대한 완전한 장악과 국제 원료 가격의 상승으로 인하여 그 이익이 그대로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에 귀속됨으로 인해 국가적 발전이 독자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그 외의 산업은 뚜렷이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고 면화 또한 경제성 면에서 경쟁력이 상실되어 나갔다. 1991년 하반기에 소련 전역에 걸쳐 파급되었던 구성 공화국의 탈 소련 현상은 투르크멘 공화국에도 이어졌지만 경제적인 독립성 면에서 발트 3국이나 우크라이나 등과 확연히 비교되는 투르크멘 공화국으로서는 반드시 환영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동은 국가의 독립으로 이어졌고 1924년 당시와 비슷하게도 투르크메니스탄은 자국민의 역동적인 독립운동의 결과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독립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1924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모든 사항을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해결해야 하고 결정하면서 이익을 취하고 손해를 보아야 하는 현실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전형적인 당 관료 출신으로서 행정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948년 대지진의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나야조프 대통령은 그 사건의 결과 고아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공산당에 집중하는 것만이 세상에 가장 잘 적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통령이 된 니야조프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구사하게 되는데 이는 인민회의를 통한 권력 구조가 그것이다. 물론 지금은 폐지된 것이지만 정원 2,508명의 대규모 회의체인 ‘인민회의’의 구성원 중 회의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정부 관료, 원로 대표, 주요 단체 회장 등 소위 국가 상류층 대표들로 구성된 헌법 기관이었다. 어떻게 보면 소련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최고 소비에트’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성 이미지 소유자였던 니야조프도 2006년 12월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함으로써 20년 동안의 통치를 마감해야 하였다. 그의 후임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Gurbanguly Berdimuhamedow) 대통령은 철저한 개혁주의자로 인식되었고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한 국가 이미지 개선 및 교육 개혁 및 문화 정책의 개선 등을 통해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서방 국가와의 적극적인 접촉과 투자 유인,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증진을 통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결망 구축에 집중함으로써 동, 서양을 연결하는 문명의 중심지 국가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한 기본 토대는 막대한 천연가스 수출을 통한 달러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국제 사회에서 그동안 폐쇄되어 있었던 투르크메니스탄이 개방한 지 4년이 넘어간 1996년에는 욜라탄(Yolatan) 지역에 많은 주변 국가 근로자 수백 명이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다. 아직 많은 국가들의 최고 지도자들이 투르크메니스탄 국빈 방문을 실행한 적은 많지 않지만 가까운 시기에 수많은 국가 원수들의 국빈 방문이 이루어져 국제 사회와 투르크메니스탄의 관계가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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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7
  • 동토의 대지, 시베리아 :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과 개발
    필자는 12번째 시베리아 횡단에 도전하고 싶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처럼 한가롭게 도전은 어려울 듯 싶다. 앞으로 바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인구가 매우 적었기에 러시아가 자국의 영토로 쉽게 편입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짓기 힘들다보니 북시베리아 계통 종족, 투르크계 종족, 몽골계 종족, 퉁구스계 종족 등 주로 수렵과 채집 또는 유목을 하는 종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인구를 다 합쳐도 20~30만 정도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중국대륙이나 중앙아시아 등지로 남하하여 정작 동토에는 10만이 채 남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보니 세력을 강대히 할 만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들이 출현하지 못했고, 몽골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 러시아는 1천만이 넘는 인구수를 바탕으로 하여 시베리아로 동진해 원주민들을 모두 복속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시베리아 지역의 개발을 하려면 일단 인구들이 있어야 하지만 러시아 인들이 추운 시베리아로 잘 이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발이 잘 안 되어 넓은 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모피 교역을 위해 개척한 초기 정주민들을 보내 개발을 해보려고 했지만 춥고 척박해서 도저히 사람 살 곳이 아니다고 주장해 개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그 시베리아의 넓은 영역들을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모두 중앙집권 통제했던것은 아니었고, 기존에 주거하던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이전의 삶을 유지한 채 그대로 거주하거나 군인, 나무꾼, 사냥꾼, 상인, 정부의 강제 이주 집행으로 본토를 떠나온 코사크 인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던 마을도 많았다. 그래서 시베리아 지역은 로마노프 왕조의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던 국토였던 셈이고 제국주의 유럽 열강들도 전혀 눈독을 들이지 않았던 한 때는 일명 저주 받은 땅이었던 것이다. 시베리아는 유배인들을 감독하는 감시원들도 그 추위 때문에 가기 싫어했고 간수들도 얼마 없어 의외로 탈출이 쉬웠다고 한다. 아무 준비 없이 탈출하면 얼어 죽고 굶어 죽었겠지만 러시아 로마노프 짜르 시대의 유명한 혁명가들 중 시베리아 안 가 본 사람이 드물고, 탈출에 실패한 사람도 드물다. 탈출 방법도 가장 가까운 역에 가서 가짜 신분증으로 기차에 타는 방법, 마차 썰매를 준비해서 올라타고 광활한 시베리아를 질주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이 선호하는 것이 가짜 신분증으로 기차에 탑승하는 것이다. 이러한 탈출이 쉬웠다는 건 단순히 탈출하기 쉬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감시를 피해 탈출 과정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지 않고 장거리를 이동할 준비를 갖추기 쉬웠다는 것을 말한다. 탈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한 감시를 받은 네짜예프 같은 인물이 있긴 하다. 이 경우는 간수를 폭행하여 독방에 갇힌 경우라 처음부터 탈출을 도모할만한 개발, 혹은 철도 개설 사업 노동 현장 등에도 전혀 투입이다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시베리아의 많은 인프라들은 대개 죄수들의 작품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노동자보다는 죄수들이 주도가 되어 깔았다. 철도 공사는 1891~1892의 2년간 이루어진 것을 시작으로 1897년 일부 개통되었고 1905년 전부 개통되었다. 시베리아의 근대사에서 고려인들과 유태인 등 소수민족 상당수가 강제 이주된 피의 역사를 함께 가지고 있다. 홍범도 장군도 이런 신세가 되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1937년 소련의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약 172,000명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인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적으로 이주된 사건이 발생했다. 강제 이주의 행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해당 지역의 역을 출발하여 노보시비르스크까지 갔으며 거기에서 남하하여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소요 기간은 대략 30~40일 소요되었다. 열차 환경은 매우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편의 열차는 객차 50량, 위생객차 1량, 식당차 1량 등으로 구성되었고 대체적으로 화물 열차가 이용되었다. 객차는 이층칸으로 되어 있었고 1개의 난로가 있었는데 하나의 객차에 5~6가구(30명 정도)가 배치되었다. 열차 이동 중 노약자의 사망도 나타났고 그 인원은 554명에 이르렀다. 강제이주 과정의 실상에 관해서는 원로 고려인들의 회상을 통하여 많이 알려졌다. 한 마디로 부실한 식사와 불결한 위생상태, 식수 부족, 의료 지원의 부족 등 한 달여의 여정은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이 예상되던 1940년에 소련 당국은 서북부 국경지대인 무르만스크지역에 거주하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서시베리아의 알타이 지방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전격적인 결정을 단행하였다(1940년 7월 23일자 소련 내무인민위원 베리야가 서명한 ‘무르만스크 시와 무르만스크 주로부터의 이주 명령’ 제00761호). 여기에는 무르만스크 거주 고려인들이 포함되었다. 문서에 의하면 독일계 소련인, 중국인, 폴란드인, 그리스인, 고려인 등 총 675가구 1,743명이 이주되었는데 그 중 정확한 고려인 수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1926년 인구조사에서는 무르만스크 거주 고려인은 13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가을에는 모스크바 거주 고려인들에 대한 강제이주 조치가 취해졌다. 여기에는 전쟁 기간에 모스크바 주의 툴라 탄전에 노무 대원으로 징집되었던 고려인들이 주 대상이었지만 여러 형태로 모스크바 지역에 거주해 왔던 사람들이 모스크바 이외의 지역으로 퇴거 조치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차출되었던 고려인들은 다시 카자흐 및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복귀 조치되었다. 문서에 의하면 1945년 2사분기 툴라 주의 탄전 관련 고려인 노무자는 1,027명이었고 같은 해 8월 기준으로는 770명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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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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