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09(수)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칼럼 검색결과

  • 말레이시아 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그리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말레이시아 화교)
    말레이시아 내의 인도인 공동체는 고대 촐라 왕조 시절부터로 추정될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말레이인들과 혼혈하면서 문자와 힌두교, 불교가 전파되고 말레이어에도 상당수의 산스크리트어 어휘가 유입되었다. 다만 당대에 종이를 대신해 쓰였던 패엽이 장기보존하기에는 좋지 않다보니 역사적인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이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와중에 고아(인도)에서 많은 인도계 카톨릭 신도들이 유입되고 인도계 용병들이 정착하면서 말라카 반도의 소수민족 크리스탕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인도계 대량 이주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말레이시아에 주둔하던 영국군 중에는 시크교도 펀자브인 등 인도인들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한 대신 인도인 노동자들(타밀족)을 고무 농장에서 저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레이시아에 데려오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인 이민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가 독립하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계 이민자들 역시 말레이시아의 국민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 말레이인들은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부미푸트라 정책을 통해 이들의 권리를 다소 제한하였다. 말레이시아 독립 초창기 시절에는 말레이인 상당수는 농민이고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이 도회지의 상권을 장악한 상황이라 교육 격차와 소득 격차가 심했다고 한다. 한편 영국이 중국인들을 이민으로 받아 채우기로 하자 현재의 말레이시아인 말레이 반도와 부속도서인 싱가포르, 페낭, 사바 일대로 중국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특히 19세기부터 이민이 활발하였는데 이는 중국 내부의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1790년대 3억 명이던 청나라 인구가 1850년 무렵 4억 2천만 여 명으로 급증하면서 쌀 가격이 폭등하였고 인플레이션 효과로 실질소득이 줄어들었다.납세 수단인 은과 관련하여 청나라 조정은 동전을 평가절하하면서 농민들의 생활 조건은 더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소작농 상당수가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영국령 말레이 반도 식민지가 태평양 전쟁 연간에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이 때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화교들을 탄압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화교들에 대한 학살도 벌어졌으며 위안부로 끌려간 화교 여성들도 많았다. 현재에는 일본과의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고 일본 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겉으로 반감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소개하여 일본의 역사적 만행을 잊지 말자고 가르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발전 과정으로 볼 때, 동남아시아 특유의 복합 사회의 특성을 나타냈다. 우선 말레이인 국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오랫동안 중국계 말레이인, 즉 말레이 차이니즈들이 인구 60% 정도의 다수를 차지했다. 애당초 도시로서의 콸라룸푸르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처음 개척했던 곳이다. 다만 최근에는 말레이계 비중이 높아져서 지금은 중국인 혈통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45% 정도로 43% 정도의 말레이인보다 약간 우위에 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비슷한데 대부분이 복건성과 광동성, 해남성 출신들이며 주로 민남어, 광동어, 조주어, 객가어 등을 가정에서 사용하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상호 간에는 표준 중국어를 써서 소통하며 밖에선 영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표기는 간체자로 표기한다. 인도인 혈통인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은 10%으로 상당수이며 이들은 대부분 타밀어를 사용한다. 그밖에 유럽 혈통인 영국인 잔류 백인들, 한국인, 일본인, 아랍인들도 소수지만 있다. 이들은 저마다 역사적으로 거주구역을 달리하고 종교 및 언어, 직업, 생활 수준 등에서도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공업 종사자는 중국계가 압도적으로 많고 있으나 하급 관리 및 경찰, 군인 등은 말레이계, 택시 등 교통운수 종사자는 인도계가 많다. 그리고 종교에서도 불교나 기독교를 믿거나 무종교인 중국계,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 100% 무슬림인 말레이계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이들 중국계 말레이시아 화교들을 이용해 현 중국 정부는 말레이시아 내에서 일대일로 사업을 재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말레이 반도 동부 해안 철도 연결(ECRL)" 프로젝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건설이 확정되었지만 비용 문제 등으로 미루어오다가 2020년부터 첫 삽을 떴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2023년부터 현 철도 건설 사업이 재개되었다. 2024년에는 양국이 운영 및 유지 보수를 위한 합작 회사를 설립하면서 비용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말레이시아 레일 링크(Malaysia Rail Link, MRL)가 ECRL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중국 교통건설 ECRL(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ECRL, CCCE)과 운영·유지보수를 위한 합작회사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MRL은 말레이시아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ECRL 프로젝트 시행을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MRL과 CCCE는 이번 합작 회사에서 각각 지분 50%를 보유하며, 운영 적자에 대한 책임을 공동 부담할 예정에 있다. 이 방식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재정적 위험을 줄이고, 프로젝트 운영을 위한 공동 책임을 강화하고 있으며 MRL은 ECRL의 모든 자산을 완전 소유해 국가 이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제 파트너의 전문성을 활용할 계획에 있다. 참고로 ECRL 프로젝트는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포트클랑과 콸라룸푸르를 동해안 쿠안탄, 트렝가누, 코타바루 등으로 연결하는 총 연장 665㎞ 노선 건설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 공정률은 77%로 나타난다. 이 중 코타바루에서 콸라룸푸르 곰박 통합 교통 터미널를 연결하는 구간은 2026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27년 1월부터 운행 개시할 예정이다. 나머지 구간은 2027년 12월 완공 될 전망으로 앞으로 말레이시아 전 구간이 철도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기회를 말레이시아 내 중국 정부의 투자와 사업에 계속 잭팟이 터질 예정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9
  • 인도 힌두민족주의의 신정체제와 다양성 및 포용을 중요시 하는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1992년 12월 인도 아요디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갑자기 공격을 감행해 그 역사가 500년 된, 무굴제국 시기에 건설돤 모스크를 때려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종교적 침해 사건은 또 다른 종교 분쟁을 불러와 전국에서 무슬림들 2,000여 명이 학살 수준으로 무참히 당한 참사로 이어졌다. 이 당시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인도 인민당(BJP) 주요 인사들은 이와 같은 과도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에 유감의 뜻을 밝혔었다. 그와 같은 참혹한 사건 이후, 30여년이 지난 올 초 1월 22일에 파괴된 모스크 터에 거대한 힌두교 사원 개원식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 행사에 직접 참석한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는 당시에 희생된 무슬림들에 대해 어떠한 유감의 뜻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 힌두 민족주의만의 정의가 이루어졌고 인도 민족의 자부심이 회복되었으며 기다리던 영광스러운 “새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했다. 4,000억원을 들여 지은 이 힌두교 사원은 라마신을 모시는 사원으로, 290,000㎡의 넓은 터에 49m 높이의 돔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Ram)왕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파괴된 모스크는 무굴제국 시대 때 지어진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설법을 시작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종교적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역인데 여당인 인도 인민당과 모디 총리는 '세속 국가'인 인도를 힌두교 국가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갖고 타 문화, 타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상징인 의미를 갖고 있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이슬람 제국인 무굴제국의 침략자들이 16세기 이곳에 있던 라마 신 사원을 무너뜨리고 폐허 위에 모스크를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지어진 힌두교 사원의 개원은 무슬림 정권에게 침탈당한 힌두 문화와 전통, 자부심의 복원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측 전문가들은 이러한 힌두 사원 완공 행사가 오랜 인도 정치의 핵심 가치였던 종교와 정치의 분리, 다양성과 포용을 거부하고 오로지 힌두 민족주의로 일관하여 과도한 우익성향으로 인한 인도 전 지역을 통합해 "하나된 인도"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재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인도 인민당은 무굴제국 시절 이슬람에 의해 훼손된 힌두 사원의 복원 운동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모디 총리도 당시 인도 인민당의 실무자로 힌두 사원 복원 운동 캠페인에 참여했다. 1992년 아요디아 참사는 그 와중에 발생한 종교 분쟁의 비극이었다. 인도 인민당은 보수정당을 표방하고 있으며 실제로 힌두교 근본주의 성향이 있다 보니 반외국인, 반이슬람 성향이 강하다. 특히 1996년부터 2004년까지의 집권기에 이같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인도식 파시즘 정당"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다. 특히 1998년 5월에는 파키스탄에 대비한다면서 핵실험을 강행했고 파키스탄 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기로 유명했다. 이러한 인도 인민당은 당의 이념을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 1875~1950)의 힌두 중심 보수주의가 기반이 되었고 실제로 인민당의 초대 당수로 파텔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이다. 사르다르 파텔은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더불어 인도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힌두교 중심주의 성향이었던 파텔은 이슬람교가 다수인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찬성했고 파키스탄이 독립한 후에도 파키스탄을 적대시했다. 실제 간디, 네루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이끌긴 했지만 셋의 성향은 각자 달랐다. 간디는 힌두교, 이슬람교 등 종교간의 통합을 중시한 반면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던 네루는 통합을 중시하되 철저한 세속주의를 지향했다. 반면 파텔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를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파텔은 힌두 극단주의, 힌두 민족주의의 시조로 평가되기도 하며 모디 총리가 매우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래 이 힌두 극단주의 정당은 파텔의 제자이자 그의 정신을 계승한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가 중심이 되어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Rashtriya Swayamsevak Sangh)이라는 과격단체가 결성되었고 리더인 고드세는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해버렸다. 물론 간디의 암살 배후 파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명확한 물증이 없어 그저 의혹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간디의 암살 이후, 힌두 민족주의는 전 인도인의 공분을 샀다. 그래서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은 한동안 인도 정치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다만 20세기 인도 정국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정당인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인도인들의 신뢰가 떨어졌고 결국 그 대안으로 들어온 것이 현 인도 인민당이라 볼 수 있겠다. 인도 인민당은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의 임원들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고 이들은 15억이 넘는 인구와 30여 개의 공용어 등, 구심점이 명확하지 않은 인도에서 언어와 문화가 각기 다른 다수 인도인을 하나로 쉽게 통제할 만한 사상은 오직 힌두교 뿐이기에 이 같은 힌두 극단주의 및 힌두 민족주의를 선동한 것이 주효해 21세기 들어 하층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이 보수 성향으로 발현되기 쉽기 때문에 이들은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도 인민당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을 지지하는 힌두교 근본주의자들과 인도 소수 종교 중 최대라 할 수 있는 무슬림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들과 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 갈등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러다보니 아요디아의 학살이나, 구자라트 지역에서 힌두교도들의 폭동으로 수천명의 무슬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계속 발생해도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보니 극우적인 형태의 힌두 민족주의에 인도인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로 구자라트 학살에는 당시 구자라트 주지사였던 현 모디 총리가 학살에 방관하거나 그의 측근들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어도 솜방망이 처벌 정도 수준으로 끝냈기 때문에 구자라트 지역 무슬림들은 모디 총리를 학살의 공동정범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현 모디 총리는 아요디아에 다시 찾아와 올 총선을 앞두고 힌두 사원 개원식에 직접 참여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는 고개숙이지 말아야 한다. 더는 앉아 보고만 있지 말아야 한다”며 “라마 신의 정신은 우리 인도 헌법의 첫 장에 나온다. 우리가 라마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서로 다투어야 하는 것은 불행”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모디 총리의 아요디아 힌두 사원 개원 행사 참여는 이번 4월 19일부터 예정된 총선을 겨냥한 모디 총리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당시 행사는 인도 발리우드 스타 등 많은 유명 인사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전국에 생중계 되었을 정도다. 그리고 수도인 뉴델리 등 전국 곳곳에서는 라마 신과 모디 총리가 그려진 대형 입간판이 휘날리기도 했다. 또한 많은 주에서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주식 시장도 문을 닫았다. 이에 대해 인도 내 극우주의자들은 인도에서 그 동안 소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만끽했지만 다수 힌두는 세속주의 원칙에 억눌려 왔다면서 아요디아 힌두 사원은 전 인도 내 힌두화를 위한 시작점이라 언급했다. 이에 무슬림과 시크교가 다수인 야당과 인도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단체들에서는 국가가 종교 행사를 장려하는 것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등 타 종교에 대한 배제를 더욱 조장할 것이라 경고했으며 이를 비판하는 인사들은 현재 모디 총리가 힌두교의 최고 대제사장인 시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인도는 힌두교가 국가 공인 종교가 되는 사실상 신정 국가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인도가 힌두교 하나만을 용인하는 신정체제로 가느냐,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앞세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세속 체제를 유지하느냐, 이는 힌두민족주의와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9

포토뉴스 검색결과

  • 말레이시아 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그리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말레이시아 화교)
    말레이시아 내의 인도인 공동체는 고대 촐라 왕조 시절부터로 추정될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말레이인들과 혼혈하면서 문자와 힌두교, 불교가 전파되고 말레이어에도 상당수의 산스크리트어 어휘가 유입되었다. 다만 당대에 종이를 대신해 쓰였던 패엽이 장기보존하기에는 좋지 않다보니 역사적인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이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와중에 고아(인도)에서 많은 인도계 카톨릭 신도들이 유입되고 인도계 용병들이 정착하면서 말라카 반도의 소수민족 크리스탕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인도계 대량 이주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말레이시아에 주둔하던 영국군 중에는 시크교도 펀자브인 등 인도인들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한 대신 인도인 노동자들(타밀족)을 고무 농장에서 저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레이시아에 데려오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인 이민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가 독립하면서 말레이시아 내 인도계 이민자들 역시 말레이시아의 국민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 말레이인들은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부미푸트라 정책을 통해 이들의 권리를 다소 제한하였다. 말레이시아 독립 초창기 시절에는 말레이인 상당수는 농민이고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이 도회지의 상권을 장악한 상황이라 교육 격차와 소득 격차가 심했다고 한다. 한편 영국이 중국인들을 이민으로 받아 채우기로 하자 현재의 말레이시아인 말레이 반도와 부속도서인 싱가포르, 페낭, 사바 일대로 중국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특히 19세기부터 이민이 활발하였는데 이는 중국 내부의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1790년대 3억 명이던 청나라 인구가 1850년 무렵 4억 2천만 여 명으로 급증하면서 쌀 가격이 폭등하였고 인플레이션 효과로 실질소득이 줄어들었다.납세 수단인 은과 관련하여 청나라 조정은 동전을 평가절하하면서 농민들의 생활 조건은 더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소작농 상당수가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영국령 말레이 반도 식민지가 태평양 전쟁 연간에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이 때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화교들을 탄압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화교들에 대한 학살도 벌어졌으며 위안부로 끌려간 화교 여성들도 많았다. 현재에는 일본과의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고 일본 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겉으로 반감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소개하여 일본의 역사적 만행을 잊지 말자고 가르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발전 과정으로 볼 때, 동남아시아 특유의 복합 사회의 특성을 나타냈다. 우선 말레이인 국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오랫동안 중국계 말레이인, 즉 말레이 차이니즈들이 인구 60% 정도의 다수를 차지했다. 애당초 도시로서의 콸라룸푸르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처음 개척했던 곳이다. 다만 최근에는 말레이계 비중이 높아져서 지금은 중국인 혈통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45% 정도로 43% 정도의 말레이인보다 약간 우위에 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비슷한데 대부분이 복건성과 광동성, 해남성 출신들이며 주로 민남어, 광동어, 조주어, 객가어 등을 가정에서 사용하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상호 간에는 표준 중국어를 써서 소통하며 밖에선 영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표기는 간체자로 표기한다. 인도인 혈통인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은 10%으로 상당수이며 이들은 대부분 타밀어를 사용한다. 그밖에 유럽 혈통인 영국인 잔류 백인들, 한국인, 일본인, 아랍인들도 소수지만 있다. 이들은 저마다 역사적으로 거주구역을 달리하고 종교 및 언어, 직업, 생활 수준 등에서도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공업 종사자는 중국계가 압도적으로 많고 있으나 하급 관리 및 경찰, 군인 등은 말레이계, 택시 등 교통운수 종사자는 인도계가 많다. 그리고 종교에서도 불교나 기독교를 믿거나 무종교인 중국계,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 100% 무슬림인 말레이계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이들 중국계 말레이시아 화교들을 이용해 현 중국 정부는 말레이시아 내에서 일대일로 사업을 재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말레이 반도 동부 해안 철도 연결(ECRL)" 프로젝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건설이 확정되었지만 비용 문제 등으로 미루어오다가 2020년부터 첫 삽을 떴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2023년부터 현 철도 건설 사업이 재개되었다. 2024년에는 양국이 운영 및 유지 보수를 위한 합작 회사를 설립하면서 비용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말레이시아 레일 링크(Malaysia Rail Link, MRL)가 ECRL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중국 교통건설 ECRL(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ECRL, CCCE)과 운영·유지보수를 위한 합작회사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MRL은 말레이시아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ECRL 프로젝트 시행을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MRL과 CCCE는 이번 합작 회사에서 각각 지분 50%를 보유하며, 운영 적자에 대한 책임을 공동 부담할 예정에 있다. 이 방식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재정적 위험을 줄이고, 프로젝트 운영을 위한 공동 책임을 강화하고 있으며 MRL은 ECRL의 모든 자산을 완전 소유해 국가 이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제 파트너의 전문성을 활용할 계획에 있다. 참고로 ECRL 프로젝트는 말레이 반도 서해안의 포트클랑과 콸라룸푸르를 동해안 쿠안탄, 트렝가누, 코타바루 등으로 연결하는 총 연장 665㎞ 노선 건설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 공정률은 77%로 나타난다. 이 중 코타바루에서 콸라룸푸르 곰박 통합 교통 터미널를 연결하는 구간은 2026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27년 1월부터 운행 개시할 예정이다. 나머지 구간은 2027년 12월 완공 될 전망으로 앞으로 말레이시아 전 구간이 철도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기회를 말레이시아 내 중국 정부의 투자와 사업에 계속 잭팟이 터질 예정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9
  • 인도 힌두민족주의의 신정체제와 다양성 및 포용을 중요시 하는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1992년 12월 인도 아요디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갑자기 공격을 감행해 그 역사가 500년 된, 무굴제국 시기에 건설돤 모스크를 때려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종교적 침해 사건은 또 다른 종교 분쟁을 불러와 전국에서 무슬림들 2,000여 명이 학살 수준으로 무참히 당한 참사로 이어졌다. 이 당시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인도 인민당(BJP) 주요 인사들은 이와 같은 과도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에 유감의 뜻을 밝혔었다. 그와 같은 참혹한 사건 이후, 30여년이 지난 올 초 1월 22일에 파괴된 모스크 터에 거대한 힌두교 사원 개원식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 행사에 직접 참석한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는 당시에 희생된 무슬림들에 대해 어떠한 유감의 뜻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 힌두 민족주의만의 정의가 이루어졌고 인도 민족의 자부심이 회복되었으며 기다리던 영광스러운 “새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했다. 4,000억원을 들여 지은 이 힌두교 사원은 라마신을 모시는 사원으로, 290,000㎡의 넓은 터에 49m 높이의 돔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Ram)왕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파괴된 모스크는 무굴제국 시대 때 지어진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설법을 시작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종교적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역인데 여당인 인도 인민당과 모디 총리는 '세속 국가'인 인도를 힌두교 국가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갖고 타 문화, 타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상징인 의미를 갖고 있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이슬람 제국인 무굴제국의 침략자들이 16세기 이곳에 있던 라마 신 사원을 무너뜨리고 폐허 위에 모스크를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지어진 힌두교 사원의 개원은 무슬림 정권에게 침탈당한 힌두 문화와 전통, 자부심의 복원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측 전문가들은 이러한 힌두 사원 완공 행사가 오랜 인도 정치의 핵심 가치였던 종교와 정치의 분리, 다양성과 포용을 거부하고 오로지 힌두 민족주의로 일관하여 과도한 우익성향으로 인한 인도 전 지역을 통합해 "하나된 인도"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재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인도 인민당은 무굴제국 시절 이슬람에 의해 훼손된 힌두 사원의 복원 운동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모디 총리도 당시 인도 인민당의 실무자로 힌두 사원 복원 운동 캠페인에 참여했다. 1992년 아요디아 참사는 그 와중에 발생한 종교 분쟁의 비극이었다. 인도 인민당은 보수정당을 표방하고 있으며 실제로 힌두교 근본주의 성향이 있다 보니 반외국인, 반이슬람 성향이 강하다. 특히 1996년부터 2004년까지의 집권기에 이같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인도식 파시즘 정당"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다. 특히 1998년 5월에는 파키스탄에 대비한다면서 핵실험을 강행했고 파키스탄 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기로 유명했다. 이러한 인도 인민당은 당의 이념을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 1875~1950)의 힌두 중심 보수주의가 기반이 되었고 실제로 인민당의 초대 당수로 파텔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이다. 사르다르 파텔은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더불어 인도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힌두교 중심주의 성향이었던 파텔은 이슬람교가 다수인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찬성했고 파키스탄이 독립한 후에도 파키스탄을 적대시했다. 실제 간디, 네루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이끌긴 했지만 셋의 성향은 각자 달랐다. 간디는 힌두교, 이슬람교 등 종교간의 통합을 중시한 반면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던 네루는 통합을 중시하되 철저한 세속주의를 지향했다. 반면 파텔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를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파텔은 힌두 극단주의, 힌두 민족주의의 시조로 평가되기도 하며 모디 총리가 매우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래 이 힌두 극단주의 정당은 파텔의 제자이자 그의 정신을 계승한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가 중심이 되어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Rashtriya Swayamsevak Sangh)이라는 과격단체가 결성되었고 리더인 고드세는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해버렸다. 물론 간디의 암살 배후 파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명확한 물증이 없어 그저 의혹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간디의 암살 이후, 힌두 민족주의는 전 인도인의 공분을 샀다. 그래서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은 한동안 인도 정치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다만 20세기 인도 정국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정당인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인도인들의 신뢰가 떨어졌고 결국 그 대안으로 들어온 것이 현 인도 인민당이라 볼 수 있겠다. 인도 인민당은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의 임원들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고 이들은 15억이 넘는 인구와 30여 개의 공용어 등, 구심점이 명확하지 않은 인도에서 언어와 문화가 각기 다른 다수 인도인을 하나로 쉽게 통제할 만한 사상은 오직 힌두교 뿐이기에 이 같은 힌두 극단주의 및 힌두 민족주의를 선동한 것이 주효해 21세기 들어 하층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이 보수 성향으로 발현되기 쉽기 때문에 이들은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도 인민당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을 지지하는 힌두교 근본주의자들과 인도 소수 종교 중 최대라 할 수 있는 무슬림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들과 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 갈등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러다보니 아요디아의 학살이나, 구자라트 지역에서 힌두교도들의 폭동으로 수천명의 무슬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계속 발생해도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보니 극우적인 형태의 힌두 민족주의에 인도인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로 구자라트 학살에는 당시 구자라트 주지사였던 현 모디 총리가 학살에 방관하거나 그의 측근들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어도 솜방망이 처벌 정도 수준으로 끝냈기 때문에 구자라트 지역 무슬림들은 모디 총리를 학살의 공동정범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현 모디 총리는 아요디아에 다시 찾아와 올 총선을 앞두고 힌두 사원 개원식에 직접 참여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는 고개숙이지 말아야 한다. 더는 앉아 보고만 있지 말아야 한다”며 “라마 신의 정신은 우리 인도 헌법의 첫 장에 나온다. 우리가 라마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서로 다투어야 하는 것은 불행”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모디 총리의 아요디아 힌두 사원 개원 행사 참여는 이번 4월 19일부터 예정된 총선을 겨냥한 모디 총리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당시 행사는 인도 발리우드 스타 등 많은 유명 인사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전국에 생중계 되었을 정도다. 그리고 수도인 뉴델리 등 전국 곳곳에서는 라마 신과 모디 총리가 그려진 대형 입간판이 휘날리기도 했다. 또한 많은 주에서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주식 시장도 문을 닫았다. 이에 대해 인도 내 극우주의자들은 인도에서 그 동안 소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만끽했지만 다수 힌두는 세속주의 원칙에 억눌려 왔다면서 아요디아 힌두 사원은 전 인도 내 힌두화를 위한 시작점이라 언급했다. 이에 무슬림과 시크교가 다수인 야당과 인도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단체들에서는 국가가 종교 행사를 장려하는 것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등 타 종교에 대한 배제를 더욱 조장할 것이라 경고했으며 이를 비판하는 인사들은 현재 모디 총리가 힌두교의 최고 대제사장인 시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인도는 힌두교가 국가 공인 종교가 되는 사실상 신정 국가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인도가 힌두교 하나만을 용인하는 신정체제로 가느냐,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앞세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세속 체제를 유지하느냐, 이는 힌두민족주의와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