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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민주화의 아버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와 민주주의 몽골 공화국의 탄생
- 몽골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4년 후인 1921년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 된 나라가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외몽골의 부족장들이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여 독립했으며, 그 후 러시아 혁명시기에 몽골 인민당이 러시아 백군과 중국 정부의 개입을 배격하고 공산화에 성공했다. 몽골 인민당은 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몽골의 공산정권은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 되었다. 몽골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스탈린 시기,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시기에는 목축업이 집단화되었다. 처이발상 시기 소련에 반대하는 정치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라마불교 승려 등은 숙청되어 사라졌다. 공산정권은 몽골의 고유문자를 폐기하고,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도입시킴으로써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스탈린과 중국 장개석(蔣介石)이 외몽골은 독립시키고, 내몽골은 중국에 귀속하는 것으로 합의해 몽골족은 완전히 분할되었다. 이후 모택동의 중공(中共)은 외몽골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몽골의 공산 정권은 친(親) 소련주의를 고수하여 소련의 위성국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흐후 1984년 8월, 26년 동안 집권한 융자깅 체뎅발(Yumjaagiin Tsedenbal)이 인민 혁명당 총서기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잠빙 바트믕흐(Jambyn Batmönkh)가 1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바트믕흐는 전임자에 비해 비교적 온건적인 노선을 견지했고, 이는 소련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몽골의 개혁-개방은 20대 청년인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로부터 출발한다. 1963년 생인 엘벡도르지는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키예프에서 언론학을 공부했으며, 그 때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 정책을 알게 되었다. 엘벡도르지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글라스노스뜨와 시장개방을 강조하는 뻬레스뜨로이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88년에 귀국한 엘벡도르지는 울란오드(Ulaan Od)라는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인민혁명당의 노선에 거스르는 논조를 펴면 간첩 혐의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엘벡도르지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모으게 된다. 1989년 11월 28일, 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전국청년예술가 대회가 열렸다. 26살인 엘벡도르지는 청중들 앞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 몽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때입니다. 청년들이 할 일은 말로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이고, 글라스노스뜨의 개방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Одоо Монгол Улс Перестройка-г зоригтойгоор хөөцөлдөх цаг болжээ. Залуучуудын хийх ёстой зүйл бол үгээр дэмжихээс гадна үйлдлээр дэмжих явдал юм. Бид хүчээ нэгтгэж чадвал зорилгодоо хүрч чадна. Бидний зорилго бол ардчилал, Гласностын нээлттэй сүнс юм. Энэ зорилгоо хэрэгжүүлэхийн тулд ард түмний сайн дурын байгууллага бий болгох хэрэгтэй.)” 오랜 공산 치하에 젖어온 몽골 사회에서 엘벡도르지는 금기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후환이 두려워진 대회 의장은 엘벡도르지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대회가 끝나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두 명의 동지가 찾아왔으며, 이어 10명이 합세했다. 이들이 몽골민주혁명의 13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가 다니던 신문사에서는 더 이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경우,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벡도르지는 몽골국립대학 강의실에서 비밀리에 동지들을 만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에 대한 학습 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고 반(反) 정부 전단을 제작해 거리에 붙였다. 마침내 1989년 12월 10일 아침, 그들은 수도 울란바토르 청년문화센터 앞에서 최초의 민주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엘벡도르지는 그 자리에서 몽골민주동맹의 창당을 선언했다. 이는 몽골 공산 정권 68년만에 생긴 최초의 야당이다. 그들은 공산정부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채택하고, 자유선거와 경제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러시아 키릴 문자를 폐지하고 고유 몽골문자를 사용할 것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때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의 세계적인 체스 선수 가리 까스빠로브(Гарри Каспаров)가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을 중국에 팔아야 한다(Советскому Союзу следовало продать Монголию Китаю, чтобы преодолеть свои экономические трудности).”고 말했다. 이 체스 선수의 발언은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견해는 물론 아니었지만, 몽골의 민족주의의 발단이 된다. 새해가 되어 1990년 1월 2일, 민주동맹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민주 혁명을 요구했다. 바트믕흐 정부가 이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민주동맹은 보다 공격적으로 바트믕흐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1월 14일, 시위대 1,000명이 울란바토르 레닌박물관 앞에 집결했다. 1월 21일에는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표어로 한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칭기즈칸은 몽골에서는 영웅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침략자로써 아주 치를 떠는 대상이었기에 소비에트 치하에서 칭기즈칸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련 치하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칭기즈칸 탄생 600주년인 1962년에 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 칭기즈칸을 언급했다가 소련에 의해 숙청당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의 시위대는 몽골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반(反) 정부 인사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Хүний нүүртэй социализм)" 내에서 자유로운 선거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대인 몽골인 거의 대부분은 당시에는 읽을 수 없었지만 민족주의적인 몽골 전통문자인 비치크 문자를 사용하면서 몽골식 키릴 문자가 가진 정치 체제를 상징적으로 부정했다. 처음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레닌 박물관 앞 광장으로 집결했으며, 레닌 박물관 앞 광장은 이때부터 울란바토르 자유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음 날인 22일에도 영하 21도의 날씨 속에서도 수흐바타르 광장에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푯말을 들며 소련이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몽골 민족 영웅들을 재발굴하였다. 시위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 죄로 1962년 몽골 인민혁명당에서 축출되었던 정치인 다라민 토모르오치르(Daramin Tomorocir)도 재평가하였다. 여기에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별을 지워버린 국기를 흔들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시위대는 행진, 데모, 단식투쟁, 교사 파업 및 노동자 파업을 일으켰다. 이 시위대는 몽골 도심, 농촌 전반에서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불러나갔다. 이후 1월과 2월 매주마다 주말 시위가 열렸으며, 수도 울란바토르 뿐 아니라 주도 에르데네트와 다르항, 후브스굴 주 무룽에도 열리기 시작한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매일 시위를 열자 1990년 3월 4일 몽골 민주 연합(MDU) 및 기타 3개 개혁 조직은 회동을 열어 정부의 회담 참석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자 시위대는 10만 명까지 불어났다. 1990년 3월 7일 민주연합은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공산당의 사임을 촉구하며 10명이 단식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이들의 뒤를 이어 불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은 시민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3월 11일 정부-시민단체 회담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 의장이었던 잠빙 바트뭉흐는 1990년 3월 9일 정치국을 해산하고 의장에 사임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 내에서는 시위대 진압작전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여 잠빙 바트뭉흐에게 작전 명령을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엄중하게 다루라고 말했다. 이처럼 몽골 민주화 운동은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반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민주동맹 이외에도 다양한 민주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민주동맹과 3개의 단체는 공동집회를 열었다. 이 날 집회에는 약 10만 명이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 민주동맹 소속 10명은 공산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태가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자, 인민혁명당내 강경파는 시위를 진압할 것을 요구하며, 계엄령 선포를 바트뭉흐 총서기에게 요구했다.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이 집에서 제8차 전당대회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남편은 ‘우리 몇 안되는 몽골인들끼리 상대방의 코피를 터트릴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통을 던져 버렸어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요. 평상시에 조용하던 분이 목청을 돋우며 ‘일부 지도부가 나에게 서명을 요구하는데, 내가 다녀오리다’고 말했어요. 그는 오른손에 넥타이를 쥐고 있으면서도 넥타이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곤 식사도,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바트뭉흐는 3월 9일 저녁에 정치국 회의를 열어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계엄령을 막았다. 그는 인민혁명당 정치국을 해체하고, 자신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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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민주화의 아버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와 민주주의 몽골 공화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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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뇌부부터 말단 집단까지 포함한 다른 집단들의 연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하고 지휘할 수 있는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수뇌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콜차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 대도시들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보지 못했다. 병력도 적어 한계가 있는데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다보니 강력한 적군의 무력이 더욱 증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의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 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이 피지배계층이라고 무시하며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이자 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코사크와 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대의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를 유도해 투항시키거나 탈영을 유도했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했다. 백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파기되었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뀌어진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발트 해 국가들이 간섭 군과 더불어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중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 이 외에는 카프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리에 의해 7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이 긴 전쟁을 이미 치루었던 차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였던 데다 간섭 군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新韓村)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920년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부 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적군의 트랴피친(Тряпицын)의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볼셰비키 군에게 패배했고, 이 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 국가로 탄생되었다. 마지막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Анатолий Пепеляев)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볼셰비키의 포로가 된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까지 남아있는 외부 간섭 군대인 일본군도 1924년에는 완젆;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며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이에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들에 괴뢰 국가들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 행위에 영토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것에 급급하여 그러한 비어진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도 했으나 백군과 협동으로 인해 파르티잔들을 진압했고, 자국의 군대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反)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러자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측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1920년 반(反) 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인해 붕괴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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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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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뇌부부터 말단 집단까지 포함한 다른 집단들의 연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하고 지휘할 수 있는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수뇌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콜차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 대도시들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보지 못했다. 병력도 적어 한계가 있는데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다보니 강력한 적군의 무력이 더욱 증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의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 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이 피지배계층이라고 무시하며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이자 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코사크와 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대의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를 유도해 투항시키거나 탈영을 유도했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했다. 백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파기되었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뀌어진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발트 해 국가들이 간섭 군과 더불어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중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 이 외에는 카프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리에 의해 7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이 긴 전쟁을 이미 치루었던 차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였던 데다 간섭 군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新韓村)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920년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부 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적군의 트랴피친(Тряпицын)의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볼셰비키 군에게 패배했고, 이 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 국가로 탄생되었다. 마지막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Анатолий Пепеляев)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볼셰비키의 포로가 된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까지 남아있는 외부 간섭 군대인 일본군도 1924년에는 완젆;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며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이에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들에 괴뢰 국가들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 행위에 영토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것에 급급하여 그러한 비어진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도 했으나 백군과 협동으로 인해 파르티잔들을 진압했고, 자국의 군대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反)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러자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측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1920년 반(反) 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인해 붕괴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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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