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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 일본의 남만무역(南蛮貿易)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기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행해졌던, 일본(日本) 상인과 남만인 혹은 난반진(南蛮人),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 이외에 명나라(明朝) 중국인, 유럽과 아시아의 혼혈인 간의 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남만무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예수회가 독점하여 관리하였다. 주 무역 품목들은 노예와 소총 화약 등이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대가 인도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의 선박은 인도양을 횡단하여 아시아 무역으로 진출하였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물품을 유럽으로 운반하는 일 이 외에도 동남아시아나 동아시아 권역 내 중계 무역을 시행하였다. 남만무역은 명(明)나라의 마카오(澳門, Macao)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 인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중요한 물품에는 일본 은(銀)과 중국의 생사(生絲)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에 한반도에서 회취법(灰吹法)이 전래되면서 은의 산출량이 증가하였고, 왜은(倭銀)이라 불리며 명나라나 포르투갈에서 이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세제 개혁으로 인해 은의 수요가 늘자 해금(海禁) 정책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 이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은으로 명나라의 생사를 구입하여 중일 중계무역을 하였다. 마카오 이외에 거점이 된 곳은 나가사키(長崎), 포르투갈 령의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말라카(Malacca), 스페인 령 필리핀(the Philippines) 마닐라(Manila)였다. 이 마닐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막부와 교역을 했다. 그러나 막부는 나가사키부교와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하여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는 제5차 쇄국령(鎖国令)을 발포하였고 포르투갈 인들을 추방하게 된다. 마카오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채를 변제하면 무역이 재개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채를 변제하는 은을 지닌 무역 재개의 탄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단교 이유는 부채가 아닌 금교였기 때문에, 사절단은 하급선원을 제외한 61명이 처형되어 돌려보내졌고, 무역은 재개되지 못하게 된다. 마카오 시에서는 무역 단절의 구제를 포르투갈령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마카오는 포르투갈령 인도 관할 외에서 자치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구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만무역은 종료되었다. 남만무역의 여명기에 사무 역에 종사하는 해상은 다수였다. 왜구에 참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로한오니(黒蕃鬼)로 불리는 흑인 용병이나 노예도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인에게는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insula)를 떠난 세파라딤 유대인도 다수였으며, 개종하여 예수회 수사가 된 유대인도 있었다. 고아에서 이단 심문소(Inquisitio)가 개설되자, 인도에서 마카오나 마닐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급증하여, 마카오 인구가 800명에서 5,000명 이상이 되었다. 예수회 수사는 남만무역 전반에 크게 관여하였으며, 일본에서의 발전에는 사비에르의 활동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남만무역 개시에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파견되는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의 장관이 되었다. 마카오 정주자가 늘어나자 현지 중국인이나 나가사키 일본인, 풍살합전(豊薩合戦)이나 규슈평정(九州平定)으로 노예가 된 일본인,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노예가 된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주민도 늘어났다. 혼혈 주민은 포르투갈 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마카오에 정주한 포르투갈 인은 카자두(casado, 포르투갈어로 “결혼한”)라고 칭해졌으며, 카자두 상인에 의한 자치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만다린(Mandarin)이라고 불린 중국 관리, 두 번째는 포르투갈 인 항해를 지원한 해상 안내인이나 수부인 해민(海民), 그리고 세 번째, 해적 선원이다. 만다린에는 아이타오(Aytao, 海道副使), 샤엔(Chaen, 察院), 투탕(Tutão, 都堂), 숨빈(Chumbin, 巡撫使), 로우티아(Lotia, 下級役人)가 있었다. 남만선이 내항하는 나가사키에 각지에서 상인이 모여 들었는데, 가장 많은 곳은 하카타(博多) 상인들이었다. 하카타 출신 상인 중에는 다이칸(代官)도 역임하면서 주인선무역(朱印船貿易)도 수행한 스에츠구 헤이조(末次平蔵)가 가장 번영한 사람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해운으로 일하는 자 외에도 후나야도(船宿)를 경영하는 초닌(町人)이 다수 있었다. 당초에는 포르투갈 인이나 토진(唐人)에게는 거류지가 없었고 나이초(内町)라는 지구의 후네야도에 숙박하여 후나야도의 주인의 보호를 받았다. 더구나 후나야도의 주인은 중개업자이기도 하여, 사시야도제(差宿制)에 따라 내항한 상인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장사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초닌에는 기리시탄이 많았으나, 에도막부 시대가 되면서 포르투갈 인에 대한 숙박업이나 중개업이 제한되었다. 더불어 포르투갈은 무역품을 크게 다섯 종류로 분류하여 운반하였다. ① 중국에서 일본 ② 일본에서 중국 ③ 중국에서 인도 ④ 인도에서 중국 ⑤ 동남아 각지 상품 ① 중국에서 일본 : 생사, 견직물, 금, 도자기, 초석, 생약, 설탕. 생사는 백사(白絲)와 연사(撚絲)가 있었다. 생약에는 대황(大黃), 감초(甘草), 산귀래(山歸來)가 있었다. ② 일본에서 중국 : 은(銀)이 주력상품. 이외에 유황, 일본도(日本刀), 남만칠기(南蛮漆器), 나전세공(螺鈿細工), 참치 등 해산물, 풍살합전이나 규슈평정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인, 임진왜란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노예가 있었다. ③ 중국에서 인도 : 생사, 견직물, 도자기, 금, 진유(真鍮), 사향(麝香), 생사 중 백사. 인도에서 소비되는 것과 인도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운반되는 것 ④ 인도에서 중국 : 은, 포도주, 올리브유. 인도은은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가져온 은이 다시 인도로 가져간 것이다. ⑤ 동남아시아 각지 산물 : 침향(沈香), 소목(蘇木), 주석, 납, 후추, 용뇌(龍腦), 정자(丁子, 클로브), 울금(鬱金), 녹비, 교피(鮫皮) 등 향신료가 많다. 이 외에도 호박, 수박, 옥수수, 감자, 밀가루, 카스텔라, 담배, 지구의, 안경, 군계(軍鷄) 등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출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지만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소, 돼지, 닭, 밀가루 등이 내항자 식용으로 만들어지도록 하고자 출항 전 소금 절임 등으로 선적되었다.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은 명목상 전부 포르투갈 왕실 사업이었으나 단독으로 인원과 배를 계속하는 것은 인구와 왕실 재정 규모로는 불가능하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1505년 인도양에 보낸 22척 선단에는 왕실 연 수익의 75% 이상 비용이 들었기에 이탈리아계나 독일계 상인 집단이 반액 이상을 투자하였다. 또한 배를 보내는 권리는 귀족이나 상인에게 유료로 양도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제노바 공화국(Genova Republic)의 산 조르조 은행(Banco de San Giorgio)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다. 또한 고객과 상업용 물품 리스크 관리를 위하여 복수의 사람들이 공동출자하는 콤파니아(Companha)나 고리의 해상대부(海上貸付, Emprestimo a risco)인 레스폰덴시아(Respondencia)가 행해졌다. 포르투갈은 카톨릭 국가로서 교회법에서는 우수라(Usura)에 의하여 고리가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카톨릭교도 사이에서는 해상 대부는 해상 보험 명목으로 취급되었다. 마카오에 부임한 벨쇼르 카르네이로(Belchior Carneiro) 사교는 자선원(慈善院, misericordia)를 설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 자선원에는 부자의 자금을 투자하거나 빈자의 희사로 운영하는 은행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리오(Rio)와 고아를 두고 원격으로 신용 태환 거래도 행해졌다. 마카오 자선원에서는 남만무역 항해 자금도 대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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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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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 일본의 남만무역(南蛮貿易)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기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행해졌던, 일본(日本) 상인과 남만인 혹은 난반진(南蛮人),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 이외에 명나라(明朝) 중국인, 유럽과 아시아의 혼혈인 간의 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남만무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예수회가 독점하여 관리하였다. 주 무역 품목들은 노예와 소총 화약 등이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대가 인도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의 선박은 인도양을 횡단하여 아시아 무역으로 진출하였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물품을 유럽으로 운반하는 일 이 외에도 동남아시아나 동아시아 권역 내 중계 무역을 시행하였다. 남만무역은 명(明)나라의 마카오(澳門, Macao)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 인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중요한 물품에는 일본 은(銀)과 중국의 생사(生絲)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에 한반도에서 회취법(灰吹法)이 전래되면서 은의 산출량이 증가하였고, 왜은(倭銀)이라 불리며 명나라나 포르투갈에서 이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세제 개혁으로 인해 은의 수요가 늘자 해금(海禁) 정책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 이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은으로 명나라의 생사를 구입하여 중일 중계무역을 하였다. 마카오 이외에 거점이 된 곳은 나가사키(長崎), 포르투갈 령의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말라카(Malacca), 스페인 령 필리핀(the Philippines) 마닐라(Manila)였다. 이 마닐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막부와 교역을 했다. 그러나 막부는 나가사키부교와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하여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는 제5차 쇄국령(鎖国令)을 발포하였고 포르투갈 인들을 추방하게 된다. 마카오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채를 변제하면 무역이 재개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채를 변제하는 은을 지닌 무역 재개의 탄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단교 이유는 부채가 아닌 금교였기 때문에, 사절단은 하급선원을 제외한 61명이 처형되어 돌려보내졌고, 무역은 재개되지 못하게 된다. 마카오 시에서는 무역 단절의 구제를 포르투갈령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마카오는 포르투갈령 인도 관할 외에서 자치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구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만무역은 종료되었다. 남만무역의 여명기에 사무 역에 종사하는 해상은 다수였다. 왜구에 참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로한오니(黒蕃鬼)로 불리는 흑인 용병이나 노예도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인에게는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insula)를 떠난 세파라딤 유대인도 다수였으며, 개종하여 예수회 수사가 된 유대인도 있었다. 고아에서 이단 심문소(Inquisitio)가 개설되자, 인도에서 마카오나 마닐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급증하여, 마카오 인구가 800명에서 5,000명 이상이 되었다. 예수회 수사는 남만무역 전반에 크게 관여하였으며, 일본에서의 발전에는 사비에르의 활동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남만무역 개시에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파견되는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의 장관이 되었다. 마카오 정주자가 늘어나자 현지 중국인이나 나가사키 일본인, 풍살합전(豊薩合戦)이나 규슈평정(九州平定)으로 노예가 된 일본인,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노예가 된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주민도 늘어났다. 혼혈 주민은 포르투갈 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마카오에 정주한 포르투갈 인은 카자두(casado, 포르투갈어로 “결혼한”)라고 칭해졌으며, 카자두 상인에 의한 자치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만다린(Mandarin)이라고 불린 중국 관리, 두 번째는 포르투갈 인 항해를 지원한 해상 안내인이나 수부인 해민(海民), 그리고 세 번째, 해적 선원이다. 만다린에는 아이타오(Aytao, 海道副使), 샤엔(Chaen, 察院), 투탕(Tutão, 都堂), 숨빈(Chumbin, 巡撫使), 로우티아(Lotia, 下級役人)가 있었다. 남만선이 내항하는 나가사키에 각지에서 상인이 모여 들었는데, 가장 많은 곳은 하카타(博多) 상인들이었다. 하카타 출신 상인 중에는 다이칸(代官)도 역임하면서 주인선무역(朱印船貿易)도 수행한 스에츠구 헤이조(末次平蔵)가 가장 번영한 사람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해운으로 일하는 자 외에도 후나야도(船宿)를 경영하는 초닌(町人)이 다수 있었다. 당초에는 포르투갈 인이나 토진(唐人)에게는 거류지가 없었고 나이초(内町)라는 지구의 후네야도에 숙박하여 후나야도의 주인의 보호를 받았다. 더구나 후나야도의 주인은 중개업자이기도 하여, 사시야도제(差宿制)에 따라 내항한 상인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장사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초닌에는 기리시탄이 많았으나, 에도막부 시대가 되면서 포르투갈 인에 대한 숙박업이나 중개업이 제한되었다. 더불어 포르투갈은 무역품을 크게 다섯 종류로 분류하여 운반하였다. ① 중국에서 일본 ② 일본에서 중국 ③ 중국에서 인도 ④ 인도에서 중국 ⑤ 동남아 각지 상품 ① 중국에서 일본 : 생사, 견직물, 금, 도자기, 초석, 생약, 설탕. 생사는 백사(白絲)와 연사(撚絲)가 있었다. 생약에는 대황(大黃), 감초(甘草), 산귀래(山歸來)가 있었다. ② 일본에서 중국 : 은(銀)이 주력상품. 이외에 유황, 일본도(日本刀), 남만칠기(南蛮漆器), 나전세공(螺鈿細工), 참치 등 해산물, 풍살합전이나 규슈평정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인, 임진왜란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노예가 있었다. ③ 중국에서 인도 : 생사, 견직물, 도자기, 금, 진유(真鍮), 사향(麝香), 생사 중 백사. 인도에서 소비되는 것과 인도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운반되는 것 ④ 인도에서 중국 : 은, 포도주, 올리브유. 인도은은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가져온 은이 다시 인도로 가져간 것이다. ⑤ 동남아시아 각지 산물 : 침향(沈香), 소목(蘇木), 주석, 납, 후추, 용뇌(龍腦), 정자(丁子, 클로브), 울금(鬱金), 녹비, 교피(鮫皮) 등 향신료가 많다. 이 외에도 호박, 수박, 옥수수, 감자, 밀가루, 카스텔라, 담배, 지구의, 안경, 군계(軍鷄) 등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출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지만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소, 돼지, 닭, 밀가루 등이 내항자 식용으로 만들어지도록 하고자 출항 전 소금 절임 등으로 선적되었다.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은 명목상 전부 포르투갈 왕실 사업이었으나 단독으로 인원과 배를 계속하는 것은 인구와 왕실 재정 규모로는 불가능하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1505년 인도양에 보낸 22척 선단에는 왕실 연 수익의 75% 이상 비용이 들었기에 이탈리아계나 독일계 상인 집단이 반액 이상을 투자하였다. 또한 배를 보내는 권리는 귀족이나 상인에게 유료로 양도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제노바 공화국(Genova Republic)의 산 조르조 은행(Banco de San Giorgio)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다. 또한 고객과 상업용 물품 리스크 관리를 위하여 복수의 사람들이 공동출자하는 콤파니아(Companha)나 고리의 해상대부(海上貸付, Emprestimo a risco)인 레스폰덴시아(Respondencia)가 행해졌다. 포르투갈은 카톨릭 국가로서 교회법에서는 우수라(Usura)에 의하여 고리가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카톨릭교도 사이에서는 해상 대부는 해상 보험 명목으로 취급되었다. 마카오에 부임한 벨쇼르 카르네이로(Belchior Carneiro) 사교는 자선원(慈善院, misericordia)를 설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 자선원에는 부자의 자금을 투자하거나 빈자의 희사로 운영하는 은행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리오(Rio)와 고아를 두고 원격으로 신용 태환 거래도 행해졌다. 마카오 자선원에서는 남만무역 항해 자금도 대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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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