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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 출간한 연명지 시인
-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이야기, 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 출간한 연명지 시인 연명지 시인 -본인 소개 저는 시의 정전기가 많은 괴산에서 태어나 책만 보면 두 눈을 번쩍이며 자랐습니다. 자연과 큐비츠하며 걷기를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제 시에는 비애의 정서가 많아, 한때 ‘하나님이 슬픔을 재능으로 주셨나’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두 번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타인을 향해 귀를 낮추는 방법과 마음의 속도를 줄이는 사랑법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끝 모를 깊이를 가진, 다정한 위로와 명랑함을 잃지 않는 시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2013년 미네르바 시선으로 『가시비』를 출간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사과처럼 앉아있어』 전자 시집 『열일곱 마르코 폴로 양』이 있습니다. 호미문학상과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025년에는 시 작품이 코소보 오르페우스 신문, 파키스탄, 인도 등에 현지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이탈리아 토리노 시에서 주최하는 “딜런 토마스데이” 국제시 축제에 시 ‘로뎀나무 등불’로 참가했습니다. -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를 소개해주세요. 2019년 봄 프랑스 길, 2021년 산티아고 은의 길을 걷고 나서 Camino Blue에 빠졌습니다. 2022년 산티아고 여정을 생각하며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고, 저와 남편이 찍은 사진들을 성심껏 골라 본문에 실었습니다. 한 편의 산문이 끝날 때마다 길이 나를 지나가며 슬픔에서 건져주는 경험을 했습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비워보니 나를 넘어 우리가 보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우고 싶어서 떠난 사람이었고, 순례길은 하나님이 나의, 나는 순례객들의 슬픔을 미행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는 그런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에세이집을 내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두 번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만나고 치유 받은 경험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고 어떤 상황에 응답하면서 저는 전보다 성숙해졌다고 느낍니다. 산티아고 길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상처 속에 웅크린 누군가를 향한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통해 저희가 잠시나마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획 중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네이버 카페 중에 <까미노 친구 연합>이라는 카페에 가입하면 산티아고 관련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 위기에 처할 때면 단톡방에 도움을 구해도 됩니다. 준비물로 자기 발보다 큰 사이즈의 운동화, 바세린, 발가락 양말은 필수입니다. 짐은 최대한 가볍게! -가장 마음이 가는 에세이 한 편 소개해주세요. 엄마의 보따리(카세레스) 성벽으로 둘러싸인 카세레스 구도심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로마, 이슬람, 북부 고딕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남아서 중세 시대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존된 곳이다.이곳에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했다. 카세레스에 도착한 날, 일찍 짐을 풀고 시간이 남길래 근처 현대미술관에 방문했다. 내부를 둘러보던 중 그곳에서 김수자 작가의 <보따리>를 만났다. 처음 보는 작품인데도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만들어준 혼수 이불이 문득 떠올랐다. 부잣집 막내딸이자 막내 며느리였던 엄마. 나이 마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맏이인 내게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우리는 서로 다정하지 못하고 오래 불화했다. 내가 결혼할 때 엄마는 목화솜으로 혼수 이불을 만들어주셨다. 붉고 푸른 홑청은 아름다웠지만 이불을 무겁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결국 몇 년 쓰다가 목화솜만 새로 틀고 홑청은 버렸는데, 내가 버린 홑청과 같은 색의 홑청이<보따리>라는 작품이 되어 시선을 끈 것이다. <보따리> 앞에 멈춰 서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엄마를 생각한다.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딸임에도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내 손을 꼭 쥐던 엄마. 그때 엄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엄마와 나는 아직도 비스듬히 기대어 보이지 않은 곳에 창을 내고 있다. 미안함도 그리움도 모두 사랑이라는 걸까. (…) -앞으로의 계획 여전히 자연과 소통하기 위해 걷고 자연의 언어를 가져와 시를 쓸 것입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팔이 긴 시를 쓰기 위해 고요하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고, 12월쯤에 3번째 시집을 출간하려 합니다. -독자들께 한 말씀 누군가에게 “네 뒤에 내가 있어”라는 말을 듣는 날은 참 행복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적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 명랑하고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는 독자들과 함께 사랑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길 소망합니다.독자님들의 삶이 유쾌한 소란으로 가득하기를 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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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 출간한 연명지 시인
칼럼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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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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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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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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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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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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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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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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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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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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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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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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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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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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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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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 <공동번역 성서-창세기> 16:8-11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창세기>와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꾸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자손이라 여기며 아라비아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브람과 사래라 이름 불리던 시절에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아브람은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일을 가지게 된다. 당시 야곱의 아내, 즉 아브라함의 손자며느리인 레아와 라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몸종을 대리모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가지는 경우가 흔히 존재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몸종이 집안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하는 게 가능했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을 임신하자 주인을 업신여겨 사래를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사래가 아브람에게 항의하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했고 이에 사래가 하갈을 구박하자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주하게 된다.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는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구약성경-창세기>15:5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 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 <구약성경-창세기>16:11-12 하나님을 목격한 하갈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여 그 우물을 라하이 로이(Rahai Roi)라 하였는데, 그곳은 카데스(Kades)와 베렛(Beret) 사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하갈은 우물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였다. 이 때 아브람은 이미 86세였다고 한다. 후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아브라함이라 불리고 사래는 사라라 불리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너에게서 임금도 나올 것이고 영원한 계약을 세워 가나안 땅을 후손들의 소유로 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90세가 된 사라가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계약의 자손은 이삭의 후손이 되리라 말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던 당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는 당시 이스마일이 이삭을 놀리는 걸 보고서 그를 추방하라고 성을 낸다.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일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이삭에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구약성경-창세기> 21:9-13 아브라함은 이 말에 당황하여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일과 함께 자신의 집안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하갈 모자는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고,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의 앞에서 나타나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하갈의 눈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해 우물을 보게 된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일에게 주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광야에서 자란 이스마일은 성인이 되자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어 파란 광야에서 살았는데,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 이는 이스마일의 자손인 아라비아인의 혈통이 이집트인과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일은 같이 아브라함을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받아준 인물도 큰 아버지 이스마일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16장과 21장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중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헌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 자체의 문학적 관점을 존중해서 21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22장의 이삭 번제물 이야기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스마일을 추방하는 이야기와 이삭과 관련된 시험 이야기가 첫 번째 단락이라면 아들을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단락, 아브라함의 이행이 세 번째 단락이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공유하며, 따라서 본문 상으로는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 없이 죽을 예정이던 아브라함이 많은 나이에 아들을 2명이나 얻은 상태에서, 소중한 장남과 기적으로 얻은 차남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느바욧(Nvayot), 케탈(Ketal), 아드브엘(Adboel), 밉삼(Mibsam), 미스마(Misma), 두마(Duma), 마싸(Massa), 하닷(Hadat), 데마(Dema), 여툴(Yeotul), 나비스(Navis), 케드마(Kedma)가 이스마일의 아들들로 마을과 고을에 따라 그들의 이름이자 12개 부족의 족장들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137세를 살아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스마일의 자손들은 하윌라(Hawila)에서 수르(Sur)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는데 수르는 이집트 맞은편과 아시리아로 가는 곳에 있으며 자신의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떨어져 살았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사라 사후에 결혼한 크투라(Ktura)에게 얻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주어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동생인 이삭의 아들 에서(에사오)는 이삭이 가나안으로 야곱이 바탄아람(Batanaram)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서는 40세 무렵 가나안 토착 여자인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Beri)의 딸 여후딧(Yeohudit)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Elon)의 딸 바스맛(Basmat)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에사오는 그 광경을 본 뒤 이스마일을 찾아가 이스마일의 딸이자 맏아들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Mahalat)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이스마일은 자신의 조카 에서를 사위로 맞아들인 셈이다. 에사오의 입장에서는 친사촌 형제와 혼인했으며, 동생 야곱은 외사촌 형제와 혼인했다. 이후 에사오는 큰 세력을 이끄는 족장으로 성장해 에돔(Edom)을 세우게 된다. 야살(Yasal)의 책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라가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보내는데,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의 첫째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영접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이 여행으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자식들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자에게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좋지 않으니 뽑아버리고 다른 못을 박으라고 전해 달라 했다. 이에 이스마일은 집에 오고 나서 그 말을 듣고 여자가 아버지를 천대하였다고 파악하고 첫째부인을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둘째부인과 재혼했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스마일이 보고 싶다며 찾아간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부인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훌륭하니 단단히 박으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보았다. 실제로 <성경>의 묘사를 보면 요르단 강 동쪽 아라비아 반도 땅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이스마일의 후손들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끼리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주로 이스마일의 후예들이라 나오는데, 이 재료들이 주로 아라비아 남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옛날 히브리 세계관에서도 동방의 아라비아인이 이스마일 인이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서는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메카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B.C 시대부터 여러 역사가와 저술가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과 연관 지었으며, A.D 1세기에도 이스마일은 아라비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나바테아(Navatea)에 거주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에도 이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의 팽창을 직접 목격한 정교회의 수도자이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아라비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자손이기에 하갈인 또는 이스마일 인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이들은 사라센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라에게 박탈당한(Σάρρας κενούς)’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갈이 천사에게 ‘사라가 저를 빈손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슬람 비평> <꾸란>에서 나오는 이스마일은 이브라힘의 아내 하자르(هَاجَر / Hājar)가 낳은 첫째 아들로 나온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는 이스하크(Iskhak)가 아니라 장남인 이스마일이라 주장하고, 알라가 이브라힘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하크가 아니라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일을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갈과 이스마일을 현재의 메카에 해당하는 사막에 버리고 떠났는데 물을 구하던 그들에게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를 잠잠 샘물이라고 하며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콜라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돌아온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이 위치에 세운 제단이 현재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우디 메카의 카바 신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카아바)의 주춧돌을 쌓아올리며 오,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이 노력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실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 <꾸란> 2:127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이 이브라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하나님)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큰 희생(양)으로 그(이스마일)를 대신하였느니라. - <꾸란> 37:102-107 이에 본래 유목민들은 가족인 형제 및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장남에게는 일부를 넘겨주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독립하였으며 차남에게 아버지의 토착 지역을 물려주는 경향이 있다. 평범하게 생각해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이스마일은 아버지에게 독립해 아버지에게서 먼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의 세력을 세웠고 번성했으며 차남인 이삭은 아버지의 지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인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동방의 땅으로 보냈고 이스마일이 가장 먼 곳에서 살아간 것처럼 나오는 것도 본래 장자가 충돌을 피해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후에 야곱이 에사오에게 장자권을 찬탈하고 사기까지 쳤기 때문에 에사오는 아버지에게 떨어져 에돔을 세우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땅을 물려받았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목민의 관습으로 보면 형이 독립하고 동생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첫째는 르우벤(Luven)이고 나머지 자녀들도 야곱에게서 멀리 떠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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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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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중동의 핵 확산이 가능한가?
- 대다수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그 확산이 가속화되고, 미국과 서구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가진다고 다른 중동 국가들이 핵무기를 가질거라 어떻게 장담하는지 알 수 없다. 핵무기가 일반 군수산업처럼 막 찍어내고 그런 무기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가이드 알바를 할 때, 그거 가이드 하기 위해 핵 관련 공부를 정말 많이 했다. 그래야 관련 설명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 고객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그들이 열심히 귀담아 듣는 그 모습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우라늄 농축 과정 및 핵을 제조하는 원리에 대해 지난 번에 칼럼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타 중동 국가들이 이란처럼 왜 핵을 가질 수 없는지 알려드릴까 한다. 핵을 만들던, 원자력 에너지를 만들던, 모든 것은 원자로에서 시작된다. 한 개의 원자핵이 중성자 또는 감마선을 쏠 때, 많은 에너지들이 방출되는데 거의 크기가 같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더 작은 핵으로 분열하는 것을 핵반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보통 우라늄, 플루토늄 같이 질량수가 큰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하여 더 가벼운 원자핵 2개와 2~3개의 중성자 등으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핵분열이라고 한다. 핵분열에서의 연쇄 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켜 원자핵이 분열하면서 방출되는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을 분열시키고, 그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것을 원자력이라 한다. 핵분열의 연쇄작용과 이를 통제하려면 원자로(Nuclear Reactor)가 필수다. 임계점을 넘은 핵연료의 연쇄작용을 가만히 놓아 둔다면 그 반응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료봉을 여러 개 묶은 연료 집합체로 원자로에 다발로 삽입한다. 대개 경수로 형식으로 이용되는 원자로에는 감속재로 경수를 쓰고 고속 중성자를 사용하는 원자로에는 감속을 할 필요가 없기에 감속재가 없다. 전 세계의 원전의 80%는 경수를 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게 냉각수인데 보통 담수나 해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비상 노심 냉각 장치 (ECCS,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를 위해서도 물은 필수적이다. 원자로에서 우라늄이 핵분열로 발생한 열로 증기를 만들고, 증기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터빈을 돌리는데 쓰인 증기는 공기 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수기로 보내져 바닷물인 냉각수에 의해 식혀져 온배수로 방류된다. 1,000㎽급 원전 1기에 초당 60~70톤의 냉각수가 사용된다.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손쉽게 얻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바닷가에 짓는다. 원자력발전소의 열을 식히는 모든 장치는 물이 필요하며 발전 과정에서 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중동은 대표적으로 물 부족 국가들도 많고 바닷가에 면해 있는 국가들은 오로지 해안가에 해수만 써야 하는데 바다가 주변국을 마주하는 국가들이 많다. 특히 원자로에는 끝없이 냉각수를 공급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하다. 만약 원자로에 냉각수가 끊기면 노심 연료봉의 온도가 높아지고 그러다보면 폭발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체르노빌이든, 후쿠시마든, 참사는 대부분 원자로의 노심에 냉각수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연료봉이 열을 받는 바람에 생긴 참사다. 게다가 이런 현상에서 핵을 주조하려면 일상에서 쓰는 저농축 우라늄과 고농축 우라늄(U235), 플루토늄을 생성시키기 위해사 핵연료 재처리를 해야 하는 시설이 필요한데 중동에는 없다. 그리고 이거 유지하는 것도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간다. 게다가 이를 다루고 제어하는 핵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대개 사암으로 이루어진 사막이 많아 노출되기 십상이며 위험성은 더 커진다. 특히 햇볕이 뜨겁고 건조한 사막기후는 냉각수의 가장 큰 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중동이 핵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이 핵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님을 알려둔다. 그리고 미국의 위협을 받고 이스라엘의 생존이 위협이 된다는데 이미 이스라엘은 핵을 가졌기 때문에 별 문제 없다. 애초부터 미국이 위험스러웠다면 미국의 알래스카와 가까운 러시아가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중동의 소형화된 핵무기가 미국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터질 위험보다 러시아가 쏜 핵무기가 뉴욕이나 워싱턴에 터질 위험이 더 높다. 그 이유는 거리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중동이 쏘면 유럽이나 영국 등 다른 나토 국가들이 요격할 수 있지만 러시아가 쏘면 캐나다 한 국가 밖에 거쳐 가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타격할 수 있다. 마침 러시아 캄차트카에 그와 같은 핵 미사일 기지가 있긴 했다. 그런데 더 가까운 러시아가 쏜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란의 핵무기를 막는 것은 미국의 생존과 안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란은 미국과 서방의 장기 제재, 적국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고, 이스라엘은 매우 위협적이다. 자신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이란은 핵을 선택했다. 먼저 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본국 수호를 위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이란은 여태까지 수많은 참을성과 자제력을 보여왔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란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는 않는다. 다만 친미, 친서방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위협적이라는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은 여태까지 이란-이라크 전쟁 외에는 전쟁을 한적이 없고, 해당 전쟁 또한 미국의 사주로 인해 사담 후세인이 먼저 침공해서 벌어진 전쟁이다. 따라서 이슬람 공화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 이란은 단 한 번도 남을 침공한적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위협적이란 말인가? 한국은 이스라엘-이란 전쟁에 관여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전쟁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다.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 북한을 부추겨 우리를 공격하기를 했으며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을 했길래 한국이 이란에게 악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지원한 미국은 뭐가 되는거고 태평양전쟁 종식을 앞당기기 위해 소련 보고 대일 참전을 부추겨 만주, 한반도 북부까지 장악하게 만들어 북한 정권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은 뭐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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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중동의 핵 확산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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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완전하고 전면적인 휴전을 하는 것으로 완전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중동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그 이유는 트럼프와 미국의 중재 및 그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란은 미군 폭격기가 핵 시설을 공습한 지 하루만에 보복으로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قاعدة العديد الجوية) 미 공군기지에 미사일을 날렸다. 이 기지는 카타르 도하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군사 기지 중 하나이며 아부 나클라 공항 ( مصار ابو نهلة ) 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 에미리 공군, 미국 공군 (USAF), 영국 왕립 공군 (RAF) 및 기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중부사령부 전방 본부, 미 공군 중부사령부 본부, 제83원정항공단(RAF), 그리고 미 공군 제379원정 항공단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지는 중동 미 공군 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서아시아 미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이 보복할 카드, 이란의 보복 선택은 미군 기지 공습이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강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이는 하는 척 행세만 하고 만 상황이 되었다. 이란은 카타르에 날린 미사일 수가 미군이 이란 핵 시설에 투하한 폭탄의 수와 같았다. 언론 악시오스(Axios)는 카타르에 약 10발의 미사일이 발사됐고 최소 1발이 이라크를 향해 발사됐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미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으로도 미사일을 날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자 바레인은 자국 영공 내 항공편 운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왔다. 미국의 비어있는 세 곳의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지만 양측의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 그리고 보복이 끝나자 카타르의 총리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Sheikh Mohammed Bin Abdulrahman Al Thani)가 하메네이를 설득했고 이란은 종전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멈추고 휴전을 하면 이란 또한 휴전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명확시했다. 미국과 네타냐후는 이란이 공격을 멈추면 이스라엘도 휴전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휴전 합의안은 이루어졌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종전이 아니다. 이란의 12시간 휴전(공격행위 중단)과 이스라엘의 12시간 휴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종전안'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이는 일시적이다. 그리고 미국과 트럼프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앞서 비슷한 맥락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을 했지만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대한 지상군 작전을 전개했다. 명백하게 휴전 원칙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대해 이 또한 미국과 사전 협의가 있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란이 이를 온전히 믿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휴전을 한 것은 양측의 폭격으로 인해 서로 간의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휴전이 성사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좋은 면일까? 우선 이스라엘은 파괴된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이스라엘 각 도시들을 재건할 수 있게 되고, 아이언 돔, 다비즈실링, 에로우 시스템, 사드, 페트리어트 등의 방공체계에 미사일들을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 동안 이란과의 폭격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부분 미사일이 소진되었다. 이대로 일주일만 더 가면 이스라엘은 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재정비가 필요하고, 미국의 지원품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내부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면서 이스라엘 정치권 내부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네타냐후는 정치권 내부도 정리하면서 다시 있을 전쟁을 대비하려는 측면이 크다.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휴전이 절실하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휴전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모양새도 빠질 뿐더러,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있는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이란에게 패배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선택한 것이 미국을 움직여 휴전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파괴된 지역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잇단 군 총책임자들이 제거되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정식으로 인선하고 군의 사기를 독려해야 한다. 즉, 이란도 재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는 그동안 40년 넘게 축적해온 미사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방어시스템을 총 점검하여 풀 가동시키고, 휴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물이야 어차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으니 이는 우려할 바가 못 된다. 한국이나 서방 언론에서는 이란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해 이스라엘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미군 기지를 공격해 어느 정도 체면을 차렸다. 이스라엘이 하메네이 정권 붕괴를 노리고 접근한 전략 또한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이란 국민들만 단결시켰다. 하메네이에 저항적인 야당 의원들도 이란의 승리 기원에 동참했다. 이스라엘,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이란은 스스로 단결 및 단합에 성공했다. 이번 휴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단결과 단합을 루즈하게 만드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는 아직 전쟁 중이므로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세계 최강의 방공망들이 무력해졌음을 드러냈다. 2~300개를 날리면 풀 충전한 상태의 이스라엘 방공망들은 대부분은 요격에 성공할지 몰라도 요격시키지 못한 것에 우라늄을 농축해 만든 소형 탄두를 탑재시킨다면 2~300개 중에 적어도 10개는 떨어질테니 그로 인한 엄청난 폭발력으로 초토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격율 100%라면 모를까 8~90%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풀 충전됐을 때의 한계를 보여준 셈이 되었고, 이란은 여기에 힌트를 얻은 셈이 되었다. 게다가 우라늄 농축물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시간이 지나 방공미사일이 소진됐을 때, 최강의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이란의 끊임없는 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취약점을 노출했다. 이스라엘이 언론을 통제하고 막아도 일반 시민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촬영한 이스라엘 피해의 영상들을 각 네트워크에 올렸고, 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대량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이 올려 놓른 개인 영상들 덕택이다. 어떤 영상에서 이스라엘 도시를 불벼락이 떨어지듯 수없이 낙하하는 이란 미사일에 속수무책인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보기도 했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자기 진영에 떨어지는 이스라엘의 방공미사일을 보기도 했다. 요즘 같이 온라인 플렛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도를 통제하고 언론을 통제한다고 진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란은 이로써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지의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무지막지한 미사일과 드론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과제로 남았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소진시키기 위해 최대한 드론 제작의 수를 늘릴 것이고, 이번에 출정시킨 드론이 300대에 이른다면 다음 계획은 3,000대를 한꺼번에 출격시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방공망을 소진시킨 다음 미사일 수백발을 쏘아 올리면 이스라엘은 다음 방어가 어렵게 된다. 즉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거의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 발사대를 타겟으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발사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 파키스탄에서 수입하면 된다. 한편 협상을 중재한 미국 또한, 전면전으로 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부분 또한 하나의 약점으로 지목된다. 현재 들리는 미국 내의 소식통들에 의하면 미국은 현재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한다. 예전 같으면 이런 협상보다는 이란 내에 상륙해 전격전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폭격을 이란에 가해야 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것과 유사한 작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지상군이 상륙하게 되는데 이란의 지형은 아프가니스탄보다 험준하다. 마주하게 될 것은 이란의 혁명수비대 게릴라들일 것이고,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게 자명하다. 그리고 그만한 준비조차도 되어있지 않다. 게다가 미군은 자국의 제조업 상황도 그리 좋지 않으며 희토류를 중국에 의지하고 있어 첨단 무기 생산하는 것도 상당 부분이 제동이 걸려 있는 판이다. 예전의 미국이었으면 이런 협상 따위는 없었다. 그냥 치고 들어가 융단 폭격과 더불어 지상군이 진입해 적을 제거했다. 그렇게 희생된 인물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란의 가셈 솔레이마니, 오사마 빈 라덴 등이다. 그러나 미국은 공격 이후, 협상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유화책이라 볼 수 있고, 트럼프의 공약 중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반하는 경우일 수도 있기에 이런 저런 딜레마에 걸려 있다. 그리고 미국의 위상 약화도 문제다. 여태까지 트럼프가 걸친 국제 문제에 단 한 건도 속시원하게 해결한 적이 없다. 마치 큰 불은 잡았다 할지라도 잔불 처리를 하지 않아 다시 큰 불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은 셈이 된 것이고, 그의 말은 동의해주고, 따라주는척 하면서 하던 것을 계속하면 된다는 식의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이라 볼 수 있겠다. 중동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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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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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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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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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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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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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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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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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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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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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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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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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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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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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 <공동번역 성서-창세기> 16:8-11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창세기>와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꾸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자손이라 여기며 아라비아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브람과 사래라 이름 불리던 시절에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아브람은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일을 가지게 된다. 당시 야곱의 아내, 즉 아브라함의 손자며느리인 레아와 라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몸종을 대리모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가지는 경우가 흔히 존재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몸종이 집안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하는 게 가능했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을 임신하자 주인을 업신여겨 사래를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사래가 아브람에게 항의하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했고 이에 사래가 하갈을 구박하자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주하게 된다.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는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구약성경-창세기>15:5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 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 <구약성경-창세기>16:11-12 하나님을 목격한 하갈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여 그 우물을 라하이 로이(Rahai Roi)라 하였는데, 그곳은 카데스(Kades)와 베렛(Beret) 사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하갈은 우물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였다. 이 때 아브람은 이미 86세였다고 한다. 후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아브라함이라 불리고 사래는 사라라 불리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너에게서 임금도 나올 것이고 영원한 계약을 세워 가나안 땅을 후손들의 소유로 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90세가 된 사라가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계약의 자손은 이삭의 후손이 되리라 말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던 당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는 당시 이스마일이 이삭을 놀리는 걸 보고서 그를 추방하라고 성을 낸다.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일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이삭에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구약성경-창세기> 21:9-13 아브라함은 이 말에 당황하여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일과 함께 자신의 집안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하갈 모자는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고,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의 앞에서 나타나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하갈의 눈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해 우물을 보게 된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일에게 주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광야에서 자란 이스마일은 성인이 되자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어 파란 광야에서 살았는데,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 이는 이스마일의 자손인 아라비아인의 혈통이 이집트인과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일은 같이 아브라함을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받아준 인물도 큰 아버지 이스마일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16장과 21장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중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헌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 자체의 문학적 관점을 존중해서 21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22장의 이삭 번제물 이야기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스마일을 추방하는 이야기와 이삭과 관련된 시험 이야기가 첫 번째 단락이라면 아들을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단락, 아브라함의 이행이 세 번째 단락이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공유하며, 따라서 본문 상으로는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 없이 죽을 예정이던 아브라함이 많은 나이에 아들을 2명이나 얻은 상태에서, 소중한 장남과 기적으로 얻은 차남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느바욧(Nvayot), 케탈(Ketal), 아드브엘(Adboel), 밉삼(Mibsam), 미스마(Misma), 두마(Duma), 마싸(Massa), 하닷(Hadat), 데마(Dema), 여툴(Yeotul), 나비스(Navis), 케드마(Kedma)가 이스마일의 아들들로 마을과 고을에 따라 그들의 이름이자 12개 부족의 족장들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137세를 살아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스마일의 자손들은 하윌라(Hawila)에서 수르(Sur)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는데 수르는 이집트 맞은편과 아시리아로 가는 곳에 있으며 자신의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떨어져 살았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사라 사후에 결혼한 크투라(Ktura)에게 얻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주어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동생인 이삭의 아들 에서(에사오)는 이삭이 가나안으로 야곱이 바탄아람(Batanaram)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서는 40세 무렵 가나안 토착 여자인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Beri)의 딸 여후딧(Yeohudit)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Elon)의 딸 바스맛(Basmat)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에사오는 그 광경을 본 뒤 이스마일을 찾아가 이스마일의 딸이자 맏아들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Mahalat)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이스마일은 자신의 조카 에서를 사위로 맞아들인 셈이다. 에사오의 입장에서는 친사촌 형제와 혼인했으며, 동생 야곱은 외사촌 형제와 혼인했다. 이후 에사오는 큰 세력을 이끄는 족장으로 성장해 에돔(Edom)을 세우게 된다. 야살(Yasal)의 책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라가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보내는데,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의 첫째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영접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이 여행으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자식들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자에게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좋지 않으니 뽑아버리고 다른 못을 박으라고 전해 달라 했다. 이에 이스마일은 집에 오고 나서 그 말을 듣고 여자가 아버지를 천대하였다고 파악하고 첫째부인을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둘째부인과 재혼했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스마일이 보고 싶다며 찾아간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부인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훌륭하니 단단히 박으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보았다. 실제로 <성경>의 묘사를 보면 요르단 강 동쪽 아라비아 반도 땅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이스마일의 후손들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끼리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주로 이스마일의 후예들이라 나오는데, 이 재료들이 주로 아라비아 남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옛날 히브리 세계관에서도 동방의 아라비아인이 이스마일 인이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서는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메카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B.C 시대부터 여러 역사가와 저술가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과 연관 지었으며, A.D 1세기에도 이스마일은 아라비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나바테아(Navatea)에 거주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에도 이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의 팽창을 직접 목격한 정교회의 수도자이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아라비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자손이기에 하갈인 또는 이스마일 인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이들은 사라센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라에게 박탈당한(Σάρρας κενούς)’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갈이 천사에게 ‘사라가 저를 빈손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슬람 비평> <꾸란>에서 나오는 이스마일은 이브라힘의 아내 하자르(هَاجَر / Hājar)가 낳은 첫째 아들로 나온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는 이스하크(Iskhak)가 아니라 장남인 이스마일이라 주장하고, 알라가 이브라힘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하크가 아니라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일을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갈과 이스마일을 현재의 메카에 해당하는 사막에 버리고 떠났는데 물을 구하던 그들에게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를 잠잠 샘물이라고 하며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콜라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돌아온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이 위치에 세운 제단이 현재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우디 메카의 카바 신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카아바)의 주춧돌을 쌓아올리며 오,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이 노력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실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 <꾸란> 2:127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이 이브라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하나님)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큰 희생(양)으로 그(이스마일)를 대신하였느니라. - <꾸란> 37:102-107 이에 본래 유목민들은 가족인 형제 및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장남에게는 일부를 넘겨주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독립하였으며 차남에게 아버지의 토착 지역을 물려주는 경향이 있다. 평범하게 생각해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이스마일은 아버지에게 독립해 아버지에게서 먼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의 세력을 세웠고 번성했으며 차남인 이삭은 아버지의 지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인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동방의 땅으로 보냈고 이스마일이 가장 먼 곳에서 살아간 것처럼 나오는 것도 본래 장자가 충돌을 피해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후에 야곱이 에사오에게 장자권을 찬탈하고 사기까지 쳤기 때문에 에사오는 아버지에게 떨어져 에돔을 세우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땅을 물려받았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목민의 관습으로 보면 형이 독립하고 동생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첫째는 르우벤(Luven)이고 나머지 자녀들도 야곱에게서 멀리 떠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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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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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중동의 핵 확산이 가능한가?
- 대다수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그 확산이 가속화되고, 미국과 서구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가진다고 다른 중동 국가들이 핵무기를 가질거라 어떻게 장담하는지 알 수 없다. 핵무기가 일반 군수산업처럼 막 찍어내고 그런 무기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가이드 알바를 할 때, 그거 가이드 하기 위해 핵 관련 공부를 정말 많이 했다. 그래야 관련 설명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 고객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그들이 열심히 귀담아 듣는 그 모습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우라늄 농축 과정 및 핵을 제조하는 원리에 대해 지난 번에 칼럼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타 중동 국가들이 이란처럼 왜 핵을 가질 수 없는지 알려드릴까 한다. 핵을 만들던, 원자력 에너지를 만들던, 모든 것은 원자로에서 시작된다. 한 개의 원자핵이 중성자 또는 감마선을 쏠 때, 많은 에너지들이 방출되는데 거의 크기가 같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더 작은 핵으로 분열하는 것을 핵반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보통 우라늄, 플루토늄 같이 질량수가 큰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하여 더 가벼운 원자핵 2개와 2~3개의 중성자 등으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핵분열이라고 한다. 핵분열에서의 연쇄 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켜 원자핵이 분열하면서 방출되는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을 분열시키고, 그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것을 원자력이라 한다. 핵분열의 연쇄작용과 이를 통제하려면 원자로(Nuclear Reactor)가 필수다. 임계점을 넘은 핵연료의 연쇄작용을 가만히 놓아 둔다면 그 반응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료봉을 여러 개 묶은 연료 집합체로 원자로에 다발로 삽입한다. 대개 경수로 형식으로 이용되는 원자로에는 감속재로 경수를 쓰고 고속 중성자를 사용하는 원자로에는 감속을 할 필요가 없기에 감속재가 없다. 전 세계의 원전의 80%는 경수를 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게 냉각수인데 보통 담수나 해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비상 노심 냉각 장치 (ECCS,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를 위해서도 물은 필수적이다. 원자로에서 우라늄이 핵분열로 발생한 열로 증기를 만들고, 증기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터빈을 돌리는데 쓰인 증기는 공기 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수기로 보내져 바닷물인 냉각수에 의해 식혀져 온배수로 방류된다. 1,000㎽급 원전 1기에 초당 60~70톤의 냉각수가 사용된다.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손쉽게 얻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바닷가에 짓는다. 원자력발전소의 열을 식히는 모든 장치는 물이 필요하며 발전 과정에서 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중동은 대표적으로 물 부족 국가들도 많고 바닷가에 면해 있는 국가들은 오로지 해안가에 해수만 써야 하는데 바다가 주변국을 마주하는 국가들이 많다. 특히 원자로에는 끝없이 냉각수를 공급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하다. 만약 원자로에 냉각수가 끊기면 노심 연료봉의 온도가 높아지고 그러다보면 폭발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체르노빌이든, 후쿠시마든, 참사는 대부분 원자로의 노심에 냉각수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연료봉이 열을 받는 바람에 생긴 참사다. 게다가 이런 현상에서 핵을 주조하려면 일상에서 쓰는 저농축 우라늄과 고농축 우라늄(U235), 플루토늄을 생성시키기 위해사 핵연료 재처리를 해야 하는 시설이 필요한데 중동에는 없다. 그리고 이거 유지하는 것도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간다. 게다가 이를 다루고 제어하는 핵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대개 사암으로 이루어진 사막이 많아 노출되기 십상이며 위험성은 더 커진다. 특히 햇볕이 뜨겁고 건조한 사막기후는 냉각수의 가장 큰 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중동이 핵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이 핵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님을 알려둔다. 그리고 미국의 위협을 받고 이스라엘의 생존이 위협이 된다는데 이미 이스라엘은 핵을 가졌기 때문에 별 문제 없다. 애초부터 미국이 위험스러웠다면 미국의 알래스카와 가까운 러시아가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중동의 소형화된 핵무기가 미국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터질 위험보다 러시아가 쏜 핵무기가 뉴욕이나 워싱턴에 터질 위험이 더 높다. 그 이유는 거리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중동이 쏘면 유럽이나 영국 등 다른 나토 국가들이 요격할 수 있지만 러시아가 쏘면 캐나다 한 국가 밖에 거쳐 가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타격할 수 있다. 마침 러시아 캄차트카에 그와 같은 핵 미사일 기지가 있긴 했다. 그런데 더 가까운 러시아가 쏜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란의 핵무기를 막는 것은 미국의 생존과 안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란은 미국과 서방의 장기 제재, 적국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고, 이스라엘은 매우 위협적이다. 자신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이란은 핵을 선택했다. 먼저 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본국 수호를 위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이란은 여태까지 수많은 참을성과 자제력을 보여왔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란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는 않는다. 다만 친미, 친서방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위협적이라는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은 여태까지 이란-이라크 전쟁 외에는 전쟁을 한적이 없고, 해당 전쟁 또한 미국의 사주로 인해 사담 후세인이 먼저 침공해서 벌어진 전쟁이다. 따라서 이슬람 공화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 이란은 단 한 번도 남을 침공한적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위협적이란 말인가? 한국은 이스라엘-이란 전쟁에 관여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전쟁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다.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 북한을 부추겨 우리를 공격하기를 했으며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을 했길래 한국이 이란에게 악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지원한 미국은 뭐가 되는거고 태평양전쟁 종식을 앞당기기 위해 소련 보고 대일 참전을 부추겨 만주, 한반도 북부까지 장악하게 만들어 북한 정권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은 뭐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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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중동의 핵 확산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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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완전하고 전면적인 휴전을 하는 것으로 완전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중동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그 이유는 트럼프와 미국의 중재 및 그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란은 미군 폭격기가 핵 시설을 공습한 지 하루만에 보복으로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قاعدة العديد الجوية) 미 공군기지에 미사일을 날렸다. 이 기지는 카타르 도하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군사 기지 중 하나이며 아부 나클라 공항 ( مصار ابو نهلة ) 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 에미리 공군, 미국 공군 (USAF), 영국 왕립 공군 (RAF) 및 기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중부사령부 전방 본부, 미 공군 중부사령부 본부, 제83원정항공단(RAF), 그리고 미 공군 제379원정 항공단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지는 중동 미 공군 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서아시아 미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이 보복할 카드, 이란의 보복 선택은 미군 기지 공습이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강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이는 하는 척 행세만 하고 만 상황이 되었다. 이란은 카타르에 날린 미사일 수가 미군이 이란 핵 시설에 투하한 폭탄의 수와 같았다. 언론 악시오스(Axios)는 카타르에 약 10발의 미사일이 발사됐고 최소 1발이 이라크를 향해 발사됐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미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으로도 미사일을 날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자 바레인은 자국 영공 내 항공편 운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왔다. 미국의 비어있는 세 곳의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지만 양측의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 그리고 보복이 끝나자 카타르의 총리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Sheikh Mohammed Bin Abdulrahman Al Thani)가 하메네이를 설득했고 이란은 종전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멈추고 휴전을 하면 이란 또한 휴전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명확시했다. 미국과 네타냐후는 이란이 공격을 멈추면 이스라엘도 휴전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휴전 합의안은 이루어졌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종전이 아니다. 이란의 12시간 휴전(공격행위 중단)과 이스라엘의 12시간 휴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종전안'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이는 일시적이다. 그리고 미국과 트럼프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앞서 비슷한 맥락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을 했지만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대한 지상군 작전을 전개했다. 명백하게 휴전 원칙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대해 이 또한 미국과 사전 협의가 있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란이 이를 온전히 믿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휴전을 한 것은 양측의 폭격으로 인해 서로 간의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휴전이 성사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좋은 면일까? 우선 이스라엘은 파괴된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이스라엘 각 도시들을 재건할 수 있게 되고, 아이언 돔, 다비즈실링, 에로우 시스템, 사드, 페트리어트 등의 방공체계에 미사일들을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 동안 이란과의 폭격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부분 미사일이 소진되었다. 이대로 일주일만 더 가면 이스라엘은 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재정비가 필요하고, 미국의 지원품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내부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면서 이스라엘 정치권 내부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네타냐후는 정치권 내부도 정리하면서 다시 있을 전쟁을 대비하려는 측면이 크다.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휴전이 절실하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휴전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모양새도 빠질 뿐더러,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있는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이란에게 패배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선택한 것이 미국을 움직여 휴전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파괴된 지역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잇단 군 총책임자들이 제거되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정식으로 인선하고 군의 사기를 독려해야 한다. 즉, 이란도 재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는 그동안 40년 넘게 축적해온 미사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방어시스템을 총 점검하여 풀 가동시키고, 휴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물이야 어차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으니 이는 우려할 바가 못 된다. 한국이나 서방 언론에서는 이란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해 이스라엘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미군 기지를 공격해 어느 정도 체면을 차렸다. 이스라엘이 하메네이 정권 붕괴를 노리고 접근한 전략 또한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이란 국민들만 단결시켰다. 하메네이에 저항적인 야당 의원들도 이란의 승리 기원에 동참했다. 이스라엘,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이란은 스스로 단결 및 단합에 성공했다. 이번 휴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단결과 단합을 루즈하게 만드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는 아직 전쟁 중이므로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세계 최강의 방공망들이 무력해졌음을 드러냈다. 2~300개를 날리면 풀 충전한 상태의 이스라엘 방공망들은 대부분은 요격에 성공할지 몰라도 요격시키지 못한 것에 우라늄을 농축해 만든 소형 탄두를 탑재시킨다면 2~300개 중에 적어도 10개는 떨어질테니 그로 인한 엄청난 폭발력으로 초토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격율 100%라면 모를까 8~90%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풀 충전됐을 때의 한계를 보여준 셈이 되었고, 이란은 여기에 힌트를 얻은 셈이 되었다. 게다가 우라늄 농축물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시간이 지나 방공미사일이 소진됐을 때, 최강의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이란의 끊임없는 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취약점을 노출했다. 이스라엘이 언론을 통제하고 막아도 일반 시민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촬영한 이스라엘 피해의 영상들을 각 네트워크에 올렸고, 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대량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이 올려 놓른 개인 영상들 덕택이다. 어떤 영상에서 이스라엘 도시를 불벼락이 떨어지듯 수없이 낙하하는 이란 미사일에 속수무책인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보기도 했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자기 진영에 떨어지는 이스라엘의 방공미사일을 보기도 했다. 요즘 같이 온라인 플렛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도를 통제하고 언론을 통제한다고 진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란은 이로써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지의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무지막지한 미사일과 드론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과제로 남았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소진시키기 위해 최대한 드론 제작의 수를 늘릴 것이고, 이번에 출정시킨 드론이 300대에 이른다면 다음 계획은 3,000대를 한꺼번에 출격시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방공망을 소진시킨 다음 미사일 수백발을 쏘아 올리면 이스라엘은 다음 방어가 어렵게 된다. 즉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거의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 발사대를 타겟으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발사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 파키스탄에서 수입하면 된다. 한편 협상을 중재한 미국 또한, 전면전으로 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부분 또한 하나의 약점으로 지목된다. 현재 들리는 미국 내의 소식통들에 의하면 미국은 현재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한다. 예전 같으면 이런 협상보다는 이란 내에 상륙해 전격전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폭격을 이란에 가해야 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것과 유사한 작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지상군이 상륙하게 되는데 이란의 지형은 아프가니스탄보다 험준하다. 마주하게 될 것은 이란의 혁명수비대 게릴라들일 것이고,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게 자명하다. 그리고 그만한 준비조차도 되어있지 않다. 게다가 미군은 자국의 제조업 상황도 그리 좋지 않으며 희토류를 중국에 의지하고 있어 첨단 무기 생산하는 것도 상당 부분이 제동이 걸려 있는 판이다. 예전의 미국이었으면 이런 협상 따위는 없었다. 그냥 치고 들어가 융단 폭격과 더불어 지상군이 진입해 적을 제거했다. 그렇게 희생된 인물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란의 가셈 솔레이마니, 오사마 빈 라덴 등이다. 그러나 미국은 공격 이후, 협상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유화책이라 볼 수 있고, 트럼프의 공약 중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반하는 경우일 수도 있기에 이런 저런 딜레마에 걸려 있다. 그리고 미국의 위상 약화도 문제다. 여태까지 트럼프가 걸친 국제 문제에 단 한 건도 속시원하게 해결한 적이 없다. 마치 큰 불은 잡았다 할지라도 잔불 처리를 하지 않아 다시 큰 불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은 셈이 된 것이고, 그의 말은 동의해주고, 따라주는척 하면서 하던 것을 계속하면 된다는 식의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이라 볼 수 있겠다. 중동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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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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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
- 호르무즈(Hormuz) 해협은 북서쪽의 페르시아 만과 남동쪽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만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북쪽에는 이란이 있고 남쪽에는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있다. 그러나 가장 좁은 곳의 폭은 54km이며 해협의 이름은 이란 측에 존재한 황무지 섬인 호르무즈 섬에서 유래했다. 본래 호르무즈, 혹은 오르무스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조로아스터교의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페르시아어로 '대추의 땅'이라는 뜻, 혹은 그리스어로 '만'이란 뜻이라는 설이 있다. 이 해협의 역사는 11세기 말, 호르무즈 섬은 케르만 셀주크(Kerman Seljuk) 및 살구르(Salgur) 왕조의 속령이었으며 무함마드 디람쿠(Muhammad Dyramqu)라는 인물이 호르무즈 왕국을 건국했다. 이어 13~14세기에는 몽골 일한국에 복속한 상태에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이어주는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하기 시작한다. 15세기에는 호르무즈 왕국이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고, 명나라의 정화가 대항해를 할 당시 명나라 함대가 방문했다. 명나라 측 기록인 『성사승람(星槎勝覽)』에 의하면 호르무즈의 주민들은 매우 부유하고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507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크(Afonso de Albuquerque, 1453~1515)가 이끄는 포르투갈의 함대가 호르무즈 섬을 일시에 점령했고, 1515년에는 이 섬에 성채를 건설한 이후, 호르무즈 왕국을 완전히 포르투갈에 복속시켰다.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 제국이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다만 1622년에 이란 사파비 왕조의 샤한 샤 압바스 1세(Abbas I)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3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호르무즈를 함락시키고 포르투갈 군을 몰아냈다. 당시 1세기 정도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던 호르무즈 왕국 역시 이 시기에 멸망했다. 한편 호르무즈 해협 남쪽에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 세력을 격파하고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오만 제국이 새로운 해상 강대국으로 대두했고, 해군에 큰 관심이 없던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오만 제국은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현대 시대에 이르러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이 지역에서는 일명 "유조선 전쟁"이라고 불리는 무차별 유조선 공격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이란이 봉쇄 위협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었기에 잘 부각 되지 않았지만, 이 당시 유조선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이라크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유조선과 정박지를 공격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면,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이 여기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생각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 이란은 고속정 전력을 기반으로 이라크에서 출항하는 유조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같은 후세인의 전략에 대응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은 1987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유조선을 보호하는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을 시작했다.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이 시작되자 미 해군 군함들이 유조선의 보호를 위해 해협에 투입되었으며, 1988년부터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미국 해군과 이란 해군 간의 해상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미 해군 순양함 CG-49 빈센스가 테헤란에서 이륙한 이란 항공 655편을 함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켜 승무원 포함 290명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유조선 전쟁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2010년대 후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란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해협 인근을 통과하던 유조선들이 이란 군에 의해 피격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향해와 관련해서 미국 주도의 동맹군이 결성되었고 대한민국 역시 청해부대를 보내 참여했다. 이어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스라엘, 영국이 참여했다. 2019년 7월 10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하던 영국 유조선들을 향해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고속정 다수가 접근하자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 해군 소속 23형 호위함 HMS 몬트로스(Montros) 함이 적극적으로 고속정의 진로를 차단하는 나포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2021년 1월 4일, 한국 국적의 선박 MT 한국 케미호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나포 당하여 이란의 반다르아바스 항에 억류된 MT 한국 케미호 나포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계속 되는 이란의 위협 속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지 않고 아덴 만으로 통하는 페르시아만-아덴만 연결 운하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존재하고 있다. 호르무즈 곶을 관통하는 호르무즈 운하 구상도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구상에 그치고 있다. 현재 페르시아만의 여러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이 대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리학적 요충지로 여겨지고 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21척의 유조선이 해협을 통행하면서 약 1,7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35%,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에 육박하는 규모로 알려진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다면 전 세계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OPEC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이 40%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라크 18%, 쿠웨이트, UAE, 이란 각각 12%, 카타르 6% 순서로 뒤를 잇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 생산한 원유의 85%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시아 국가들로 수출되고 있다. 특히 전체 원유 생산량의 50% 가까이는 동아시아의 중국, 대한민국, 일본 3국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동북아시아 3국은 원유 등의 원자재를 수입한 이후, 정유, 화학 등의 각종 파생 산업으로 상당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업 강국이다. 따라서 자국 내 수요 대비 원유 공급이 매우 부족한 편이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원유를 수입하는 중동 국가들의 가장 큰 고객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은 원유 수입의 80% 가까이를 페르시아만의 유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란 의회가 봉쇄를 의결했다. 봉쇄의 최종 결정권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에 있지만 이는 절차 과정에 불과할 뿐, 실제 봉쇄는 시간 문제다. 봉쇄의 주체는 이란 해군, 이란 공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주축이 된다. 혁명수비대와 공군은 순항 미사일과 여러 가지 드론 전력을 이용해 유조선을 공격할 것이고, 이란 해군은 다수의 고속정들과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3척의 킬로급 잠수함을 주축으로 봉쇄를 시도할 것이다. 비무장 상선인 유조선의 특성상 유조선 나포 및 공격은 고속정들이 할 것이고, 군함에 대한 공격은 잠수함들이 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봉쇄의 형태에 대해서도 자국 영해기 때문에 전면적인 봉쇄가 아니라 형식상으로는 일상적인 주권 행사만으로도 봉쇄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군사훈련을 빌미로 민간 선박의 운행을 일시 금지한다거나, 적대국 선박이나 의심스러운 선박에 대한 해상 검문 같은 형태로도 단번에 원유 수송을 대폭 감소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게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되었다. 이란은 미국의 공격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IRIB는 이 방송에서 중동 지역의 미군 기지 10곳을 표시한 지도를 내보냈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성명을 통해 미군 기지 직접 공격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공습 대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직접 타격의 보복보다 미국과 동맹국들을 고생시키는 측으로 보복을 대신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 타격의 보복 가능성은 남아 있다. 보복 공습을 한다면 빠르면 내일, 늦으면 2~3일 뒤에 자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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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