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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발언…현실은 무력 충돌 격화
- [신문기사] 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올 것" 주장…현실은 보복과 확전 [서울=2025.06.1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군사 충돌이 격화되는 가운데, 두 국가 간 "곧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이스라엘과 이란은 협상해야 하며, 내가 인도와 파키스탄을 설득했던 것처럼 협상을 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트럼프는 "많은 통화와 회의가 진행 중이며,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국민은 이해해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세르비아-코소보, 이집트-에티오피아 분쟁 등 과거 국제 중재에 성공한 전례를 언급했다. 이어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스라엘-이란 사태에 대한 통화를 공개하며 "푸틴도 중재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러한 낙관적 전망과 달리, 현지 상황은 악화일로다. 이스라엘은 지난 13일부터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시설을 시작으로, 14일에는 세계 최대 가스전인 '사우스파르스' 등 에너지 인프라까지 공습하며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이에 이란은 텔아비브, 하이파 등 이스라엘 주요 도시에 미사일 보복을 단행했으며, 보복은 계속될 것이라 경고했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이란은 민간인을 사전에 계획해 살해했다"고 비난했으며, 이란 혁명수비대는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군사적 보복을 공식화했다. 이번 충돌로 현재까지 이스라엘 측 최소 13명, 이란 측 최소 78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이란 핵합의(JCPOA) 파기와 이후의 강경 정책이 현재의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란은 현재 일주일 내 핵무기 생산이 가능할 정도의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미국은 이미 중동에 항모 전단을 급파하고 핵 협상을 중단한 상태다. 미 국방부는 이스라엘 공습 이전부터 주중동 외교 공관 직원들을 철수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중재 시도는 현실과의 괴리 속에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이 이 갈등에 본격 개입할 가능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중동에서의 무력 충돌이 장기화할 경우, 세계 에너지 시장에도 심각한 파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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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발언…현실은 무력 충돌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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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 <공동번역 성서-창세기> 16:8-11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창세기>와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꾸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자손이라 여기며 아라비아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브람과 사래라 이름 불리던 시절에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아브람은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일을 가지게 된다. 당시 야곱의 아내, 즉 아브라함의 손자며느리인 레아와 라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몸종을 대리모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가지는 경우가 흔히 존재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몸종이 집안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하는 게 가능했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을 임신하자 주인을 업신여겨 사래를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사래가 아브람에게 항의하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했고 이에 사래가 하갈을 구박하자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주하게 된다.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는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구약성경-창세기>15:5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 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 <구약성경-창세기>16:11-12 하나님을 목격한 하갈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여 그 우물을 라하이 로이(Rahai Roi)라 하였는데, 그곳은 카데스(Kades)와 베렛(Beret) 사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하갈은 우물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였다. 이 때 아브람은 이미 86세였다고 한다. 후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아브라함이라 불리고 사래는 사라라 불리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너에게서 임금도 나올 것이고 영원한 계약을 세워 가나안 땅을 후손들의 소유로 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90세가 된 사라가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계약의 자손은 이삭의 후손이 되리라 말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던 당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는 당시 이스마일이 이삭을 놀리는 걸 보고서 그를 추방하라고 성을 낸다.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일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이삭에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구약성경-창세기> 21:9-13 아브라함은 이 말에 당황하여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일과 함께 자신의 집안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하갈 모자는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고,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의 앞에서 나타나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하갈의 눈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해 우물을 보게 된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일에게 주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광야에서 자란 이스마일은 성인이 되자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어 파란 광야에서 살았는데,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 이는 이스마일의 자손인 아라비아인의 혈통이 이집트인과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일은 같이 아브라함을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받아준 인물도 큰 아버지 이스마일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16장과 21장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중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헌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 자체의 문학적 관점을 존중해서 21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22장의 이삭 번제물 이야기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스마일을 추방하는 이야기와 이삭과 관련된 시험 이야기가 첫 번째 단락이라면 아들을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단락, 아브라함의 이행이 세 번째 단락이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공유하며, 따라서 본문 상으로는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 없이 죽을 예정이던 아브라함이 많은 나이에 아들을 2명이나 얻은 상태에서, 소중한 장남과 기적으로 얻은 차남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느바욧(Nvayot), 케탈(Ketal), 아드브엘(Adboel), 밉삼(Mibsam), 미스마(Misma), 두마(Duma), 마싸(Massa), 하닷(Hadat), 데마(Dema), 여툴(Yeotul), 나비스(Navis), 케드마(Kedma)가 이스마일의 아들들로 마을과 고을에 따라 그들의 이름이자 12개 부족의 족장들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137세를 살아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스마일의 자손들은 하윌라(Hawila)에서 수르(Sur)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는데 수르는 이집트 맞은편과 아시리아로 가는 곳에 있으며 자신의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떨어져 살았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사라 사후에 결혼한 크투라(Ktura)에게 얻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주어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동생인 이삭의 아들 에서(에사오)는 이삭이 가나안으로 야곱이 바탄아람(Batanaram)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서는 40세 무렵 가나안 토착 여자인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Beri)의 딸 여후딧(Yeohudit)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Elon)의 딸 바스맛(Basmat)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에사오는 그 광경을 본 뒤 이스마일을 찾아가 이스마일의 딸이자 맏아들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Mahalat)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이스마일은 자신의 조카 에서를 사위로 맞아들인 셈이다. 에사오의 입장에서는 친사촌 형제와 혼인했으며, 동생 야곱은 외사촌 형제와 혼인했다. 이후 에사오는 큰 세력을 이끄는 족장으로 성장해 에돔(Edom)을 세우게 된다. 야살(Yasal)의 책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라가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보내는데,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의 첫째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영접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이 여행으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자식들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자에게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좋지 않으니 뽑아버리고 다른 못을 박으라고 전해 달라 했다. 이에 이스마일은 집에 오고 나서 그 말을 듣고 여자가 아버지를 천대하였다고 파악하고 첫째부인을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둘째부인과 재혼했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스마일이 보고 싶다며 찾아간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부인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훌륭하니 단단히 박으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보았다. 실제로 <성경>의 묘사를 보면 요르단 강 동쪽 아라비아 반도 땅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이스마일의 후손들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끼리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주로 이스마일의 후예들이라 나오는데, 이 재료들이 주로 아라비아 남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옛날 히브리 세계관에서도 동방의 아라비아인이 이스마일 인이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서는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메카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B.C 시대부터 여러 역사가와 저술가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과 연관 지었으며, A.D 1세기에도 이스마일은 아라비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나바테아(Navatea)에 거주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에도 이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의 팽창을 직접 목격한 정교회의 수도자이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아라비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자손이기에 하갈인 또는 이스마일 인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이들은 사라센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라에게 박탈당한(Σάρρας κενούς)’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갈이 천사에게 ‘사라가 저를 빈손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슬람 비평> <꾸란>에서 나오는 이스마일은 이브라힘의 아내 하자르(هَاجَر / Hājar)가 낳은 첫째 아들로 나온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는 이스하크(Iskhak)가 아니라 장남인 이스마일이라 주장하고, 알라가 이브라힘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하크가 아니라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일을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갈과 이스마일을 현재의 메카에 해당하는 사막에 버리고 떠났는데 물을 구하던 그들에게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를 잠잠 샘물이라고 하며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콜라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돌아온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이 위치에 세운 제단이 현재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우디 메카의 카바 신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카아바)의 주춧돌을 쌓아올리며 오,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이 노력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실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 <꾸란> 2:127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이 이브라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하나님)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큰 희생(양)으로 그(이스마일)를 대신하였느니라. - <꾸란> 37:102-107 이에 본래 유목민들은 가족인 형제 및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장남에게는 일부를 넘겨주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독립하였으며 차남에게 아버지의 토착 지역을 물려주는 경향이 있다. 평범하게 생각해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이스마일은 아버지에게 독립해 아버지에게서 먼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의 세력을 세웠고 번성했으며 차남인 이삭은 아버지의 지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인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동방의 땅으로 보냈고 이스마일이 가장 먼 곳에서 살아간 것처럼 나오는 것도 본래 장자가 충돌을 피해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후에 야곱이 에사오에게 장자권을 찬탈하고 사기까지 쳤기 때문에 에사오는 아버지에게 떨어져 에돔을 세우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땅을 물려받았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목민의 관습으로 보면 형이 독립하고 동생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첫째는 르우벤(Luven)이고 나머지 자녀들도 야곱에게서 멀리 떠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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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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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 중세의 아랍인들은 물을 끌어오는 관개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미 바그다드 칼리프 시절 때 그러한 기술을 익혀 해왔으며 그 전통은 이전 수메르 시절, 바빌로니아가 만들었던 지구라트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막 지대에서 물을 끌어오고 땅속에 지하수에서 물을 뿜어내게 만드는 기술은 동시에 아랍의 토목 공업도 함께 발전하는 케이스가 된다. 이를 두고 팔라즈(Falaj)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인공 관개 수로를 카나트(Qanat)라고 한다. 사막의 경우 인공적으로 녹화를 한 지역이라도 담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고지대(상류)에서 저지대(하류)로 담수가 흐르는 도중에 건조한 환경 때문에 말라버리는 것이다. 설사 발견해도 모래에 포함된 염분이 녹아 있어 식수로 적합한 경우가 적다. 그래서 고지대의 수원의 지하부터 수십 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그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통로 겸 우물을 만들고 터널을 관리하며 그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 관리가 생명인 중동에 막대한 냉각수가 필요하고 척박하고 혹독한 기후로 인해 관리만 해도 막대한 돈과 세심함 및 꼼꼼함이 필요한 핵을 중동이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핵 발전소를 지을 조건이 좋지 않다. 그 조건에 대해서 어제 내가 포스팅 해서 알 것이고, 담수가 아닌 해수를 사용해야 할 경우, 바닷가에 밀집해야 한다. 중동 국가 중 시리아, 레바논은 바다가 지중해 한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민간인들이 사는 곳이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시리아는 라타키아, 타르투스, 자블라가 도시로 있고 이곳은 대표적인 지중해 휴양지다. 사막화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농지들이 해안가를 따라 펼쳐져 있다. 이곳을 핵재처리 시설 및 발전소 등으로 개발하면 시리아의 식량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 이는 레바논도 사정은 같다. 트리폴리, 시돈, 티레는 대표적인 휴양지인 동시에 고대 페니키아 유적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게다가 적국인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시리아와 레바논 모두 이스라엘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요르단은 바다가 사해에 홍해 북동부 아카바 연안이 전부다. 핵 발전소를 지을 수 있겠지만 홍해와 사해에 밀집된다면 적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짓는게 불가능하다.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UAE 등은 중동과 세계 금융 경제, 자원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고, 막대한 양의 석유를 무기를 삼아 세계 경제를 흔들면 되니 핵이 굳이 필요없다. 가장 무서운 예멘의 경우, 유지할 돈이 없다. 발전소를 지어 전기는 그 어떤 에너지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는 있어도 발전소를 유지하는 비용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폐기된 핵처리물 또한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문제다. 핵폐기물을 소홀히 했다가 세계적인 문제가 생긴 일례가 러시아의 카라차이 호수다. 핵재처리 공장을 만들게 되면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어딘가에는 갖다 버려야 되는데, 전문적인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에 당시의 관점에서 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호수에 매립해 사고가 터졌다. 가뭄이 들어서 카라차이 호가 말라버리는 바람에 호수 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주변 지역을 덮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퍼진 오염 물질의 양은 약 18.5경 베크렐로,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대형 사고 터진 것이다. 예멘의 경우,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호수에 매립할 리는 없겠지만 사막에 매립한다 할지라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다. 그런데 예멘은 관리 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재처리 핵 시설과 기타 우라늄과 플라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 등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이 없다. 이란이나 북한이 도우면 모를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핵개발을 돕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게다가 예멘을 지배하고 있는 후티는 여전히 사우디와 대립 상태인데다가 이미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어서 더 어렵다. 이라크의 경우, 터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아직 숨어 있는 원리주의 단체들이 많아 이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날로 말라 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그리고 그 수운은 터키가 통제하고 있으며 바스라 쪽은 걸프만을 영토로 삼고 있는 해안 지대의 폭이 좁기에 핵 시설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우디와 터키, 이집트의 경우, 핵을 만들 필요가 없는 국가들이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는 그 위치의 지정학적으로만 봐도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다.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 양쪽을 통제할 수 있고,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제할 수 있다. 이란이 핵을 만든다고 중동이 모두 핵무장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전반적인 이유다. 흔히 우라늄은 저농축과 고농축으로 나뉜다. 현재 우라늄의 대부분은 원자력 발전용으로 저농축이다. 핵분열을 하는 우라늄은 U235로 저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핵물질이며 핵분열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동위체다. 자연계에 있는 U235의 양은 우라늄 전체의 0.7%에 불과하다. 그러나 U235가 연쇄 반응을 하면 고농축을 할 수 있다. 미국괴 이스라엘은 이란이 고농축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핵무기를 만든다고 의심한다. 문제는 원자력발전소 어디든 저농축과 고농축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도 과거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로 핵분열 성능이 뛰어나고 핵연료 부피를 줄일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주로 사용했다. 한국은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수차례 우라늄 변환, 농축, 플루토늄 분리 실험을 수행했으며, 2004년에는 레이저 분리 장치를 이용해 총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우라늄은 77~80%의 농축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핵무기 개발과는 관련 없는 학술적 호기심에 의한 일회성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우리도 언제든 고농축 우라늄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한국은 미국, 프랑스, 벨기에와 협력하여 연구용 원자로의 핵연료를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한국의 '고농축 우라늄 최소화' 공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여전히 고농축 우라늄은 사용된다. 그런데 이란은 핵무기가 없다. 다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들을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한국처럼 이란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방이 적국인 이란이 공격용 핵무기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를 남을 침략한 적도 없고, 오히려 사방에 위협만 받았다. 이란이 테러단체 지원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ISIS와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반군 테러단체들에게 자금, 무기, 의료지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국도 고농축 우라늄을 아직 쓰고 있고 일본도 원자력 발전소를 돌리면서 아직도 고농축 우라늄을 쓰고 있다. 이것에 대해 중국과 일본, 북한, 러시아, 미국이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 러시아, 북한, 미국은 핵을 가졌기 때문인데 미국을 제외한 북한, 중국의 위협을 받는다고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도 이 수준에 머문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설사 핵을 가진다 해도 이스라엘이 위협을 느낄 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을 보자. 트럼프가 한국에 주한미군 방위비 올린다고 난리쳤을 때, 그리고 한국에 관세 때렸을 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을 때, 핵 개발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핵 개발 후 생기는 뒷감당을 어찌할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고 우리도 핵 무기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이제 한국의 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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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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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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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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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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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 1979년 이란에서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란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당시 근본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 시아파 무슬림 정파 세력들에게 축출된 팔레비 왕가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을 필두로 하고 있었으며 장남인 레자 팔레비(Reza Pahlavi)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1980년 모하메드 국왕이 도피한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의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축출되고 그나마 망명 정부처럼 남아 있는 왕실의 제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망명 정부이기에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다. 더불어 1906년에 제정된 이란 팔레비 헌법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 받기 때문인 것도 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왕후로 알려진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이다. 그녀는 1967년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과 결혼했을 당시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왕후에 등극한 호화 대관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획득한 외화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었다. 국영기업 민영화,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인수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계 이란인 인사들이었고, 민영화하여 만든 제품과 수입들이 죄다 유럽과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실질적으로 이란 국내의 기업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을 진흥하고자 했다. 팔레비 왕조가 건립될 당시의 문맹률은 꽤 높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가 대대적으로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육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학교 시설이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무엇보다 선생들의 질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질 좋은 선생이 양으로도 많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이란에서 페르시아어가 완벽한 질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결국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선생을 돈 주고 영입할 수밖에 없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가난한 시골에는 외국 선생은 꿈도 못 꿨다. 부유층 자녀의 외국 유학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또한 상류층의 10분의 1정도만 유학을 갔고 대부분 파리에 머물렀다. 팔레비 왕조는 히잡, 차도르의 착용 금지했지만 테헤란과 이스파한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 투성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대다수의 하층민은 여전히 부르카 쓰고 이슬람 율법에 저촉 받고 살았다. 당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문맹율은 60%에 달했다.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테헤란과 이스파한과 같은 대도시에 국한된 얘기였다. 큰 도시가 아닌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란 여성들은 참정권이 뭔지도, 있는지도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의 여성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으며 문맹에다 전통적인 악습을 달고 살았다. 즉,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고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계층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으며 테헤란이나 이스파한에 살 경제력이 되는 여성들만이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히잡을 벗고 대학까지 다녔다. 이것이 몇몇 대도시와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란 영토 내에서 불균형 현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농지 개혁과 농촌 개발 문제였다. 이란에서 황무지는 국토의 60%를 차지했다. 이는 땅을 다지는 기술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근대화가 도시에 집중되었던 것도 있다. 팔레비 2세는 외국에서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초청하여 녹화하는 사업을 맡긴다. 그리고 이란 영토 내에서 토후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지방 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압수하고 이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는 팔레비가 계획했던 근대자본주의와 대단한 모순이 있었다. 지방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로 뺏어간 것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자율성과 사유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주들로부터 토지 강탈과 일반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의 분배 행위는 소련이나 중공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주로 행했던 사회주의성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즉각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빈민들이 중세 봉건적 시스템인 소작제를 철폐하면서 자영농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영농들의 상당수는 농촌 적자에 허덕이면서 다시 지주에게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분배된 농토들은 자영농들의 식구에 비해 그 소출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관개 시설을 이용해 농지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이란 전국에 분포한 관개 시설은 채 10개도 되지 않았다. 자금 또한 부족했다. 해당 자금들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횡령으로 인해 해외로 빼돌려졌다. 그래서 관개 시설조차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했고, 소작농 시절에 물리지 않던 세금, 종자세, 물세, 시설 비용등이 추가로 발생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영농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영농들을 인공적으로 무수히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주 밑에서 소작농들에게 제공하던 건강과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교육 같은 서비스도 없어졌다. 또한 미국과의 협정으로 인해 미국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최악의 상황이 된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당시, 혁명에 참가한 상당수가 이 때 고생하던 농민들이었다. 결국 일부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협동 농장에 매각하고 도시로 흘러왔으며 이들이 슬럼가를 형성하면서 엄청난 빈부격차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해지는 결과가 되었고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당시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자들이 이맘 성직자들이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던 모스크의 토지까지 팔레비 정부가 몰수하여 분배했기 때문에 엄청난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업에 써야 할 돈들은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 왕후의 개인 돈으로 유용되었다. 그녀는 해외에 재산을 상당수 빼돌렸으며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될 정도로 축적한 재산은 재벌급이었다. 파라 팔라비 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명화들을 수집했다. 파라 팔라비의 컬렉션은 현재 30억 달러(약 4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86년 9월, 이란 PARSI 1 TV에 갑자기 위성 방송이 11분 동안 전파를 탔다. 이 방송에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레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왕후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은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이 위성 방송은 미국 CIA가 기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은 40년 전에도 이와 같은 내부 혼란을 유도하는 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 같은 시기의 CIA는 이란 팔레비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미 의회에서의 폭로도 나오면서 한동안 팔레비 왕실과의 커넥션에 대한 청문회로 몸살을 앓았다.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들을 두고 근거 없다며 일축했다. 팔레비 왕가가 미국 땅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호메이니 혁명 이후, 팔레비 왕가와 함께 이란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의 애국적 행위 덕분이라고 했다. 팔레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40년 동안 미국은 이란에 끊임없는 제재를 가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란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내부 혼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움직여 외부적으로 전쟁, 무역적 대립 등으로 끊없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파라 팔레비 왕비나 레자 팔레비 왕세자의 근황을 끊임없이 TV로 송출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균열을 유도했다. 물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 방송했었다.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PARS TV, BBC 페르시안, PARSI 1 등 수십여 개나 되기에 이란 정부를 막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채널들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이 위성 수신기에 대한 단속이 심했지만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인터넷 매체들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라 이란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움직여 또 다시 외부적 혼란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고 있다. 팔레비 정권이 했었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 미니스커트가 어떻고, 히잡이 어떻고 등등, 매우 자유로운 사회였다고만 말한다. 그러니 팔레비 치하의 이란 사회는 매우 모순성이 가득한 사회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인 측면들이 혼재된 사회였으며 왕정 독재에, 기득권들만 배부르고, 부정부패와 비리, 횡령이 일상화 된 사회였다. 빈부 격차도 엄청났고, 그렇기에 근대화 개혁을 하려했지만 안하니만도 못한 사회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약에 팔레비 왕조 치하의 이란 사회가 매우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적인 사회였다면 1979년의 호메이니 혁명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메이니 혁명은 팔레비가 가진 수많은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중동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메네이 정권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팔레비 2세와 바꾸어 팔레비 왕조를 부활시키면 완전히 근대 국가로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하메네이 정권이 무너질리도 없을 뿐더러, 팔레비 2세가 돌아오는 것은 이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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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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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살아있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티누스 2세 국왕은 아테네 근교 프시키코에서 1940년 6월 2일에 탄생했다. 그는 출생 4개월째 되는 해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그 다음 해,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략하며 유년기를 피난지인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1946년에 귀국하였으며, 1947년 아버지 파블로스 1세(Παύλος I, 1901~1964, 재위 : 1947~1964)가 즉위하면서 태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스포츠맨이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역대 올림픽에서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가 금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이 폐지돤 이후에도 IOC 명예 위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4년부터 노르웨이 국왕이자 먼 친척인 하랄 5세와 함께 국제요트연맹 공동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물론 하랄 5세 역시 요트 선수로 활동했지만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8촌, 그 왕비인 아네마리와는 6촌관계에 있다. 그는 1964년 3월 부왕이 암으로 승하하자 즉위하였으며, 9월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콘스탄티노스가 국왕이 된 시기에는 그리스 정치에 있어 좌우 대립이 매우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즉위 한 달 전 열린 총선에서 11년 동안 그리스를 이끌어 오던 우파 내각이 패배하고 중도연합당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가 총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국왕과 나이 많은 수상이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65년 7월 그리스 군부 내 우익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움직임이 있어 국방 장관의 퇴임을 결정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오히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 총리를 해임하고 같은 당 소속의 요르요스 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하자, 그리스는 그리스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양파 간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을 공공연히 부정하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졌으며 국왕이 총리를 지명하면 중도연합당이 장악한 의회가 거부하는 일이 빈번하여 왕정과 내각의 골이 깊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군부의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은 좌파들을 혁파해야 한다며 1967년 4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3일 근왕파 장교들과 동맹을 맺고 역으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쿠데타가 실패하게 되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일단 북부 그리스의 카발라로 파천하였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파파도풀로스는 왕을 추방했지만 측근인 요르요스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왕정을 없애지는 않았다. 이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후 왕당파는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여 반(反) 군사 정권 투쟁을 벌여 정권과 맞서게 된다. 결국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7월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며, 이로써 콘스탄티노스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이 퇴진된 이후 새로 들어선 카라만리스 총리의 과도 정부는 군사 정권의 왕정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을 무효화했지만 그렇다고 1952년 제정된 민주 헌법으로 복귀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왕정 복고 국민 투표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TV 연설로만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결국 7:3으로 왕정 복고가 부결되면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위에 복위하지 못했고, 1975년에 헌법이 제정되어 현 제3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1946년에 벌어진 국민 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유지된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입국 금지를 당한 채, 돌아오지 못하고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으며 당시 서방 정치인들로부터도 '멍청이', '암덩어리' 등의 비난을 들으면서 생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81년 2월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인해 당일치기 방문을 했었고, 1993년 여름에 미초타키스 총리의 배려로 일가족과 휴양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결국 굴복하며 공화정을 인정했지만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에 대한 여론은 매우 냉담했기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2세 총리 시절인 1994년에는 아예 국적까지 박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유럽 왕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리스 정부에서 그에게 적법한 성씨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국적을 부정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 왕의 성씨가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써야 할 때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가문 이름이나 영지의 이름이 성으로 사용되는게 유럽 왕실의 관례였다. 또한 왕실 재산과 관련해서도 그리스 정부와 소송을 벌였는데 그리스 정부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사람이 소송하는 것을 부당하다면서 소송을 받아주지 않으며 그의 갖은 수모를 주었다. 결국 그는 소송을 위해 Κωνσταντίνος της Ελλάδας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리스의 법원에서는 그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 인권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소송 끝에 2000년에 그리스 내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인정받게 된다. 자산은 그리스 정부의 소유로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 정부가 보상금을 옛 왕가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 정계는 이와 같은 보상 과정에 대해 비웃었는데, 이는 그가 탈세한 금액이 많다고 주장한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Constantino de Grecia (그리스의 콘스탄디노스)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에서 외교관의 여권을 발급받아 IOC 위원의 자격으로 입국하게 된다. 덴마크는 덴마크 왕가 후손에게 자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때 여권을 발급해줄 당시 성이 데그레시아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 그리스 방식으로 콘스탄디노스 데그레치아스(Κωνσταντίνος Ντεγκρέτσιας)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아테네 올림픽 당시의 방문을 계기로 그는 그리스 정계와의 사이가 개선되었고 이후 런던과 그리스를 왕래하다가 2013년에 영구 귀국을 허락받아 그 뒤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포르토 헬리(Πορτοχέλι/Porto Heli)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그리스의 경제 위기 등 현재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지자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옛 왕실에 대한 호감이 좀 높아졌다.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그리스의 경제적인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견실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로 왕정이 복고되기까지 갈 정도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있다보니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력도 있고, 2021년 말-2022년 초에는 폐렴 및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 최후의 국왕이지만 군사 쿠데타 이후 추방을 당해 해외 여러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갖은 수모를 당했고 조국인 그리스에서 조차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수모와 비아냥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스에 돌아와 현재 조용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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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살아있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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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로 들어간 드라비다 족과 고도의 남인도 문화에 관하여
-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 인들이 B.C 10세기경에 청동기 문화를 북방에서부터 파생하여 발전시켰다. 그리고 B.C 3세기경에는 북인도로부터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농업을 더욱 발달시켰고 남인도 아열대 기후의 기름진 토양에 벼농사를 짓고 곳곳에 도시도 건설하게 된다. 북인도 지역에서 쿠샨 왕조가 발현되기 전, 데칸 고원 지역에서는 아리아 계통의 안드라(Andra) 족이 사타바하나(Satabahana) 왕조를 세워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해상 무역을 발판으로 삼아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금이나 은으로 만든 화폐를 널리 유통시켰다. 그리고 대다수의 드라비다 족과 타밀족을 흡수하여 인도 남부와 북부의 문화를 서로 연결하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지역에는 안드라 족의 왕조가 오랫동안 통치했으며 점차 아리아 인들에게서 주도권은 드라비다 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데칸 고원 남쪽 인도 남부에는 촐라(Cholla), 체라(Chera), 판디아(Pandia) 왕조가 건국되어 서로 세력 정쟁을 통해 정치, 문화적으로 발전하였다. 촐라 왕조는 면직물을 동남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지역에 수출하여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으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스리랑카의 싱할라 족과 슈리비자야(Shurivijaya)의 해군을 격퇴하면서 벵골 만의 해상을 장악하고 전체적인 인도양 바닷가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다. 체라, 판디아 왕조도 촐라 왕조에 이어 후추와 상아, 진주와 보석, 면화 등을 각지에 수출하며 인도양 해상 로를 장악하였다. 더구나 B.C 1세기 무렵에는 로마 제국과 무역을 한 기록이 있으며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인도 지역의 왕조들은 북인도 왕조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어 드라비다 족 고유의 정치 체제를 마련해 갔으며, 전통적인 무속 신앙을 믿고 자신들만의 장례 풍습을 유지하였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아 전통 신앙이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뱀이나 코끼리 같은 부족의 토템들을 숭배하였고, 카스트 제도가 미약하여 북인도와는 사회 생활의 모습 자체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성행하였지만, 다른 신분과 통혼이 가능하여 새로운 신분이 탄생하기도 하였고 카스트 제도로 엄격했던 북인도와는 달리 남인도는 신분제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여성의 지위가 북인도보다 훨씬 높았으며 여성이 사회와 종교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고, 수티(Sutti)의 풍습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타바하나 왕조 때에는 여성들이 행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가정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조사된다. 따라서 남인도는 현재도 카스트 제도가 통하지 않은 지역이기도 한다. 이러한 남인도 앞에 놓여 진 바다는 오래 전부터 남인도를 지배한 드라비다 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아라비아 해를 거쳐 서아시아와 이집트로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역하기 위해 배를 건조했다고 하며, 인더스 문명 시절에서부터 나타나는 석조 인장이 서아시아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B.C 6세기에 남인도 상인들은 금, 은 같은 보석을 찾아 미얀마와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얻은 금속과 향나무, 상아 등을 가지고 페르시아나 중국 상인들과 거래하기도 하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 무역은 대부분 남인도를 거쳐 갔는데, 이는 인도가 자체의 물자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동서 무역 해상 항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외부 문화에 의해 옷감 짜는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염색 기술도 개발되어 인디고(Indigo)라는 물감이 멀리 유럽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인도의 면화는 세계적인 수출품이 되었으며 현재에도 남인도의 면화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남인도의 무역에 대해 북인도 불교 석가모니에 관한 기록들에는 남인도 드라비다 인들의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를 재패하고 있다는 설명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이 드라비다 인들의 해상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로 서술되고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후 2세기경 북인도의 쿠샨 왕조는 남인도 지역을 무역 기지로 삼아 후추, 진주 등을 로마에 수출하였는데, 로마가 이러한 수출품의 가격을 정하고 이를 교역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고충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해상 무역으로 인하여 남인도 문화는 북인도 만큼이나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남인도 국가들은 활발한 상업적인 교역과 농경의 발달로 인해 오직 농업 중심으로 일관한 북인도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꾸준히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드라비다 족 고유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인도양 무역의 중심으로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촐라 왕조는 몇 차례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였지만, 여러 차례 남인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드라비다 종족 체제로 전환했다. 특히 1세기 촐라 왕조의 카리칼란(Karikalan) 왕은 북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외래 학문을 장려하고 남인도의 학문을 융합하여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다에 면해 있는 국가들과의 문물 교류도 활발히 하여 재정을 확충했다. 후일 촐라 왕조를 여행하였던 중국 당나라의 현장 법사가 남인도를 극찬하여 “이곳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널려 있었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9세기에 다시 부활하여 성장한 촐라 왕조는 10세기경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맞아 이후 약 200년간 강성한 문화 대국의 모습을 보이며 유지했다. 특히 드라비다 족 고유의 언어인 타밀어로 서술된 타밀 문학이 이 시기에 발전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양 교역의 또 다른 중심지인 스리랑카에서는 B.C 6세기에 북인도의 싱할라족이 실론 섬으로 들어와 첫 왕조를 건국했다. 그러면서 B.C 3세기 무렵에 불교를 받아들여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apura)를 불교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면서 나름 드라비다와 대치되는 강한 나라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싱할라 왕국은 1세기경에는 그리스-헬레니즘 세계와 교역하면서 알려졌고, 중국 기록에도 사자국(獅子國), 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드라비다와의 장기간 남인도에서의 세력 정쟁은 싱할라 왕국의 입장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이게 되었고 결국 싱할라족의 거주지는 스리랑카로 알려진 실론 섬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실론 섬은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해, 지중해로 연결되는 동서 무역의 핵심 고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드라비다에 편입되지 않고 나름 독립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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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로 들어간 드라비다 족과 고도의 남인도 문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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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격을 한 차례씩 주고 받은 뒤, 소강 상태에 있고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따라서 중동 전역의 긴장은 한층 더 높아졌고,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은 전면전에, 핵전쟁까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의 전도사라 불렸던, 이스라엘의 5대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이다.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에서 탄생했다. 그가 탄생했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지기 시대였다. 이후 라빈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크파르타보르에 있는 카두리 농업학교에 다녔다. 이후 유태인 자치 지역의 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 경찰 하가나(Haganah)에 들어갔다.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중에서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는 유태인들의 자치 정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가나(Haganah)는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라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이갈 알론(Ygal Alon)의 설득으로 그가 창설한 팔마하 특공대에 입대했고 곧이어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당시의 전공으로 소대장에 승진한 라빈은 1945년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태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할 때, 부책임자로 구조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라빈은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السبت الأسود)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 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석방된 라빈은 같은 해 10월, 팔마하의 부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갈 알론 휘하에서 일했다. 1948년 봄, 라빈은 하렐(Harel)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통로를 여는 나손(Nason)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Katamon)과 세이크야라(Sheikyara)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갈 알론의 지휘 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Ramlle)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 전선 작전 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Operation Horev)을 지휘했다. 라빈은 1946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후 1953년 라빈은 영국으로 건너가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에는 영국군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6~1959년에는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59~1960년에는 이스라엘 군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61년에는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이 되면서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했다. 라빈은 1964년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노리는 진입작전을 고안했다. 그는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러 하여금 사막에서 1편대 당 4기씩 밀집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하면서 6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결국 나세르의 항복 받아내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968년 1월 1일에 그는 총참모장으로써 전역과 더불어 주미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이후 라빈은 1973년 봄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이스라엘 노동당(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73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הַכְּנֶסֶת)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여태 총참모장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에서 노동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최초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라빈은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다르게 지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맺는 것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와 1975년 시나이에서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Opération Entebbe)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라빈은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급격히 침체에 머물게 된다. 물론 자연히 이스라엘 정국은 불안정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사적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라빈은 7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 협정을 개시하면서 중동 평화의 전도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1994년 10월,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같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0~2016)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 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된다. 따라서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요르단과의 분쟁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 지역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팔레스타인은 마침내 독립 국가로써의 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누구보다도 염원했으며 오슬로 협정은 라빈의 이러한 노력이 적극 반영된 협약이었다.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직후,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다음,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이스라엘 민족주의 세력인 하레디 집단에 속한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가능성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4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그의 평화를 향한 노력과 이스라엘 및 아랍 & 중동 국가들과의 공존을 위한 라빈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네타냐후와 같은 전쟁광이 아니라, 이츠하크 라빈과 같은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필자는 중동에서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짐에 따라 라빈을 그리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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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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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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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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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 <공동번역 성서-창세기> 16:8-11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창세기>와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꾸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자손이라 여기며 아라비아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브람과 사래라 이름 불리던 시절에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아브람은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일을 가지게 된다. 당시 야곱의 아내, 즉 아브라함의 손자며느리인 레아와 라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몸종을 대리모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가지는 경우가 흔히 존재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몸종이 집안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하는 게 가능했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을 임신하자 주인을 업신여겨 사래를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사래가 아브람에게 항의하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했고 이에 사래가 하갈을 구박하자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주하게 된다.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는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구약성경-창세기>15:5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 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 <구약성경-창세기>16:11-12 하나님을 목격한 하갈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여 그 우물을 라하이 로이(Rahai Roi)라 하였는데, 그곳은 카데스(Kades)와 베렛(Beret) 사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하갈은 우물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였다. 이 때 아브람은 이미 86세였다고 한다. 후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아브라함이라 불리고 사래는 사라라 불리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너에게서 임금도 나올 것이고 영원한 계약을 세워 가나안 땅을 후손들의 소유로 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90세가 된 사라가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계약의 자손은 이삭의 후손이 되리라 말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던 당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는 당시 이스마일이 이삭을 놀리는 걸 보고서 그를 추방하라고 성을 낸다.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일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이삭에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구약성경-창세기> 21:9-13 아브라함은 이 말에 당황하여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일과 함께 자신의 집안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하갈 모자는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고,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의 앞에서 나타나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하갈의 눈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해 우물을 보게 된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일에게 주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광야에서 자란 이스마일은 성인이 되자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어 파란 광야에서 살았는데,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 이는 이스마일의 자손인 아라비아인의 혈통이 이집트인과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일은 같이 아브라함을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받아준 인물도 큰 아버지 이스마일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16장과 21장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중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헌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 자체의 문학적 관점을 존중해서 21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22장의 이삭 번제물 이야기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스마일을 추방하는 이야기와 이삭과 관련된 시험 이야기가 첫 번째 단락이라면 아들을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단락, 아브라함의 이행이 세 번째 단락이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공유하며, 따라서 본문 상으로는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 없이 죽을 예정이던 아브라함이 많은 나이에 아들을 2명이나 얻은 상태에서, 소중한 장남과 기적으로 얻은 차남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느바욧(Nvayot), 케탈(Ketal), 아드브엘(Adboel), 밉삼(Mibsam), 미스마(Misma), 두마(Duma), 마싸(Massa), 하닷(Hadat), 데마(Dema), 여툴(Yeotul), 나비스(Navis), 케드마(Kedma)가 이스마일의 아들들로 마을과 고을에 따라 그들의 이름이자 12개 부족의 족장들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137세를 살아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스마일의 자손들은 하윌라(Hawila)에서 수르(Sur)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는데 수르는 이집트 맞은편과 아시리아로 가는 곳에 있으며 자신의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떨어져 살았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사라 사후에 결혼한 크투라(Ktura)에게 얻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주어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동생인 이삭의 아들 에서(에사오)는 이삭이 가나안으로 야곱이 바탄아람(Batanaram)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서는 40세 무렵 가나안 토착 여자인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Beri)의 딸 여후딧(Yeohudit)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Elon)의 딸 바스맛(Basmat)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에사오는 그 광경을 본 뒤 이스마일을 찾아가 이스마일의 딸이자 맏아들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Mahalat)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이스마일은 자신의 조카 에서를 사위로 맞아들인 셈이다. 에사오의 입장에서는 친사촌 형제와 혼인했으며, 동생 야곱은 외사촌 형제와 혼인했다. 이후 에사오는 큰 세력을 이끄는 족장으로 성장해 에돔(Edom)을 세우게 된다. 야살(Yasal)의 책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라가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보내는데,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의 첫째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영접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이 여행으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자식들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자에게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좋지 않으니 뽑아버리고 다른 못을 박으라고 전해 달라 했다. 이에 이스마일은 집에 오고 나서 그 말을 듣고 여자가 아버지를 천대하였다고 파악하고 첫째부인을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둘째부인과 재혼했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스마일이 보고 싶다며 찾아간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부인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훌륭하니 단단히 박으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보았다. 실제로 <성경>의 묘사를 보면 요르단 강 동쪽 아라비아 반도 땅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이스마일의 후손들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끼리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주로 이스마일의 후예들이라 나오는데, 이 재료들이 주로 아라비아 남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옛날 히브리 세계관에서도 동방의 아라비아인이 이스마일 인이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서는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메카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B.C 시대부터 여러 역사가와 저술가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과 연관 지었으며, A.D 1세기에도 이스마일은 아라비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나바테아(Navatea)에 거주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에도 이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의 팽창을 직접 목격한 정교회의 수도자이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아라비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자손이기에 하갈인 또는 이스마일 인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이들은 사라센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라에게 박탈당한(Σάρρας κενούς)’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갈이 천사에게 ‘사라가 저를 빈손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슬람 비평> <꾸란>에서 나오는 이스마일은 이브라힘의 아내 하자르(هَاجَر / Hājar)가 낳은 첫째 아들로 나온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는 이스하크(Iskhak)가 아니라 장남인 이스마일이라 주장하고, 알라가 이브라힘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하크가 아니라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일을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갈과 이스마일을 현재의 메카에 해당하는 사막에 버리고 떠났는데 물을 구하던 그들에게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를 잠잠 샘물이라고 하며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콜라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돌아온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이 위치에 세운 제단이 현재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우디 메카의 카바 신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카아바)의 주춧돌을 쌓아올리며 오,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이 노력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실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 <꾸란> 2:127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이 이브라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하나님)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큰 희생(양)으로 그(이스마일)를 대신하였느니라. - <꾸란> 37:102-107 이에 본래 유목민들은 가족인 형제 및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장남에게는 일부를 넘겨주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독립하였으며 차남에게 아버지의 토착 지역을 물려주는 경향이 있다. 평범하게 생각해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이스마일은 아버지에게 독립해 아버지에게서 먼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의 세력을 세웠고 번성했으며 차남인 이삭은 아버지의 지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인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동방의 땅으로 보냈고 이스마일이 가장 먼 곳에서 살아간 것처럼 나오는 것도 본래 장자가 충돌을 피해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후에 야곱이 에사오에게 장자권을 찬탈하고 사기까지 쳤기 때문에 에사오는 아버지에게 떨어져 에돔을 세우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땅을 물려받았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목민의 관습으로 보면 형이 독립하고 동생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첫째는 르우벤(Luven)이고 나머지 자녀들도 야곱에게서 멀리 떠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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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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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 중세의 아랍인들은 물을 끌어오는 관개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미 바그다드 칼리프 시절 때 그러한 기술을 익혀 해왔으며 그 전통은 이전 수메르 시절, 바빌로니아가 만들었던 지구라트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막 지대에서 물을 끌어오고 땅속에 지하수에서 물을 뿜어내게 만드는 기술은 동시에 아랍의 토목 공업도 함께 발전하는 케이스가 된다. 이를 두고 팔라즈(Falaj)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인공 관개 수로를 카나트(Qanat)라고 한다. 사막의 경우 인공적으로 녹화를 한 지역이라도 담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고지대(상류)에서 저지대(하류)로 담수가 흐르는 도중에 건조한 환경 때문에 말라버리는 것이다. 설사 발견해도 모래에 포함된 염분이 녹아 있어 식수로 적합한 경우가 적다. 그래서 고지대의 수원의 지하부터 수십 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그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통로 겸 우물을 만들고 터널을 관리하며 그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 관리가 생명인 중동에 막대한 냉각수가 필요하고 척박하고 혹독한 기후로 인해 관리만 해도 막대한 돈과 세심함 및 꼼꼼함이 필요한 핵을 중동이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핵 발전소를 지을 조건이 좋지 않다. 그 조건에 대해서 어제 내가 포스팅 해서 알 것이고, 담수가 아닌 해수를 사용해야 할 경우, 바닷가에 밀집해야 한다. 중동 국가 중 시리아, 레바논은 바다가 지중해 한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민간인들이 사는 곳이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시리아는 라타키아, 타르투스, 자블라가 도시로 있고 이곳은 대표적인 지중해 휴양지다. 사막화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농지들이 해안가를 따라 펼쳐져 있다. 이곳을 핵재처리 시설 및 발전소 등으로 개발하면 시리아의 식량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 이는 레바논도 사정은 같다. 트리폴리, 시돈, 티레는 대표적인 휴양지인 동시에 고대 페니키아 유적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게다가 적국인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시리아와 레바논 모두 이스라엘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요르단은 바다가 사해에 홍해 북동부 아카바 연안이 전부다. 핵 발전소를 지을 수 있겠지만 홍해와 사해에 밀집된다면 적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짓는게 불가능하다.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UAE 등은 중동과 세계 금융 경제, 자원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고, 막대한 양의 석유를 무기를 삼아 세계 경제를 흔들면 되니 핵이 굳이 필요없다. 가장 무서운 예멘의 경우, 유지할 돈이 없다. 발전소를 지어 전기는 그 어떤 에너지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는 있어도 발전소를 유지하는 비용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폐기된 핵처리물 또한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문제다. 핵폐기물을 소홀히 했다가 세계적인 문제가 생긴 일례가 러시아의 카라차이 호수다. 핵재처리 공장을 만들게 되면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어딘가에는 갖다 버려야 되는데, 전문적인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에 당시의 관점에서 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호수에 매립해 사고가 터졌다. 가뭄이 들어서 카라차이 호가 말라버리는 바람에 호수 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주변 지역을 덮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퍼진 오염 물질의 양은 약 18.5경 베크렐로,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대형 사고 터진 것이다. 예멘의 경우,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호수에 매립할 리는 없겠지만 사막에 매립한다 할지라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다. 그런데 예멘은 관리 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재처리 핵 시설과 기타 우라늄과 플라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 등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이 없다. 이란이나 북한이 도우면 모를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핵개발을 돕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게다가 예멘을 지배하고 있는 후티는 여전히 사우디와 대립 상태인데다가 이미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어서 더 어렵다. 이라크의 경우, 터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아직 숨어 있는 원리주의 단체들이 많아 이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날로 말라 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그리고 그 수운은 터키가 통제하고 있으며 바스라 쪽은 걸프만을 영토로 삼고 있는 해안 지대의 폭이 좁기에 핵 시설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우디와 터키, 이집트의 경우, 핵을 만들 필요가 없는 국가들이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는 그 위치의 지정학적으로만 봐도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다.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 양쪽을 통제할 수 있고,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제할 수 있다. 이란이 핵을 만든다고 중동이 모두 핵무장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전반적인 이유다. 흔히 우라늄은 저농축과 고농축으로 나뉜다. 현재 우라늄의 대부분은 원자력 발전용으로 저농축이다. 핵분열을 하는 우라늄은 U235로 저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핵물질이며 핵분열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동위체다. 자연계에 있는 U235의 양은 우라늄 전체의 0.7%에 불과하다. 그러나 U235가 연쇄 반응을 하면 고농축을 할 수 있다. 미국괴 이스라엘은 이란이 고농축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핵무기를 만든다고 의심한다. 문제는 원자력발전소 어디든 저농축과 고농축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도 과거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로 핵분열 성능이 뛰어나고 핵연료 부피를 줄일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주로 사용했다. 한국은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수차례 우라늄 변환, 농축, 플루토늄 분리 실험을 수행했으며, 2004년에는 레이저 분리 장치를 이용해 총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우라늄은 77~80%의 농축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핵무기 개발과는 관련 없는 학술적 호기심에 의한 일회성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우리도 언제든 고농축 우라늄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한국은 미국, 프랑스, 벨기에와 협력하여 연구용 원자로의 핵연료를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한국의 '고농축 우라늄 최소화' 공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여전히 고농축 우라늄은 사용된다. 그런데 이란은 핵무기가 없다. 다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들을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한국처럼 이란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방이 적국인 이란이 공격용 핵무기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를 남을 침략한 적도 없고, 오히려 사방에 위협만 받았다. 이란이 테러단체 지원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ISIS와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반군 테러단체들에게 자금, 무기, 의료지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국도 고농축 우라늄을 아직 쓰고 있고 일본도 원자력 발전소를 돌리면서 아직도 고농축 우라늄을 쓰고 있다. 이것에 대해 중국과 일본, 북한, 러시아, 미국이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 러시아, 북한, 미국은 핵을 가졌기 때문인데 미국을 제외한 북한, 중국의 위협을 받는다고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도 이 수준에 머문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설사 핵을 가진다 해도 이스라엘이 위협을 느낄 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을 보자. 트럼프가 한국에 주한미군 방위비 올린다고 난리쳤을 때, 그리고 한국에 관세 때렸을 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을 때, 핵 개발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핵 개발 후 생기는 뒷감당을 어찌할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고 우리도 핵 무기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이제 한국의 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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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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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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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 1979년 이란에서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란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당시 근본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 시아파 무슬림 정파 세력들에게 축출된 팔레비 왕가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을 필두로 하고 있었으며 장남인 레자 팔레비(Reza Pahlavi)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1980년 모하메드 국왕이 도피한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의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축출되고 그나마 망명 정부처럼 남아 있는 왕실의 제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망명 정부이기에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다. 더불어 1906년에 제정된 이란 팔레비 헌법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 받기 때문인 것도 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왕후로 알려진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이다. 그녀는 1967년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과 결혼했을 당시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왕후에 등극한 호화 대관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를 수출하여 획득한 외화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었다. 국영기업 민영화,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인수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계 이란인 인사들이었고, 민영화하여 만든 제품과 수입들이 죄다 유럽과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실질적으로 이란 국내의 기업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을 진흥하고자 했다. 팔레비 왕조가 건립될 당시의 문맹률은 꽤 높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가 대대적으로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육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학교 시설이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무엇보다 선생들의 질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질 좋은 선생이 양으로도 많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이란에서 페르시아어가 완벽한 질 좋은 선생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결국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선생을 돈 주고 영입할 수밖에 없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가난한 시골에는 외국 선생은 꿈도 못 꿨다. 부유층 자녀의 외국 유학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또한 상류층의 10분의 1정도만 유학을 갔고 대부분 파리에 머물렀다. 팔레비 왕조는 히잡, 차도르의 착용 금지했지만 테헤란과 이스파한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 투성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적인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대다수의 하층민은 여전히 부르카 쓰고 이슬람 율법에 저촉 받고 살았다. 당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문맹율은 60%에 달했다. 여성에게 선거권, 피선거권을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테헤란과 이스파한과 같은 대도시에 국한된 얘기였다. 큰 도시가 아닌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란 여성들은 참정권이 뭔지도, 있는지도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집안의 여성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으며 문맹에다 전통적인 악습을 달고 살았다. 즉,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고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계층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으며 테헤란이나 이스파한에 살 경제력이 되는 여성들만이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히잡을 벗고 대학까지 다녔다. 이것이 몇몇 대도시와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란 영토 내에서 불균형 현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농지 개혁과 농촌 개발 문제였다. 이란에서 황무지는 국토의 60%를 차지했다. 이는 땅을 다지는 기술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근대화가 도시에 집중되었던 것도 있다. 팔레비 2세는 외국에서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초청하여 녹화하는 사업을 맡긴다. 그리고 이란 영토 내에서 토후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지방 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압수하고 이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는 팔레비가 계획했던 근대자본주의와 대단한 모순이 있었다. 지방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로 뺏어간 것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자율성과 사유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주들로부터 토지 강탈과 일반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부의 분배 행위는 소련이나 중공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주로 행했던 사회주의성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즉각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많은 빈민들이 중세 봉건적 시스템인 소작제를 철폐하면서 자영농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영농들의 상당수는 농촌 적자에 허덕이면서 다시 지주에게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분배된 농토들은 자영농들의 식구에 비해 그 소출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관개 시설을 이용해 농지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이란 전국에 분포한 관개 시설은 채 10개도 되지 않았다. 자금 또한 부족했다. 해당 자금들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횡령으로 인해 해외로 빼돌려졌다. 그래서 관개 시설조차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했고, 소작농 시절에 물리지 않던 세금, 종자세, 물세, 시설 비용등이 추가로 발생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영농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영농들을 인공적으로 무수히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주 밑에서 소작농들에게 제공하던 건강과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교육 같은 서비스도 없어졌다. 또한 미국과의 협정으로 인해 미국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최악의 상황이 된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당시, 혁명에 참가한 상당수가 이 때 고생하던 농민들이었다. 결국 일부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협동 농장에 매각하고 도시로 흘러왔으며 이들이 슬럼가를 형성하면서 엄청난 빈부격차를 보여주게 된다.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해지는 결과가 되었고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더불어 당시 지방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자들이 이맘 성직자들이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던 모스크의 토지까지 팔레비 정부가 몰수하여 분배했기 때문에 엄청난 반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업에 써야 할 돈들은 파라 디바 팔라비(Farah Diva Pahlavi) 왕후의 개인 돈으로 유용되었다. 그녀는 해외에 재산을 상당수 빼돌렸으며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될 정도로 축적한 재산은 재벌급이었다. 파라 팔라비 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 명화들을 수집했다. 파라 팔라비의 컬렉션은 현재 30억 달러(약 4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86년 9월, 이란 PARSI 1 TV에 갑자기 위성 방송이 11분 동안 전파를 탔다. 이 방송에서는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레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왕후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은 이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이 위성 방송은 미국 CIA가 기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은 40년 전에도 이와 같은 내부 혼란을 유도하는 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 같은 시기의 CIA는 이란 팔레비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미 의회에서의 폭로도 나오면서 한동안 팔레비 왕실과의 커넥션에 대한 청문회로 몸살을 앓았다.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들을 두고 근거 없다며 일축했다. 팔레비 왕가가 미국 땅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호메이니 혁명 이후, 팔레비 왕가와 함께 이란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의 애국적 행위 덕분이라고 했다. 팔레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40년 동안 미국은 이란에 끊임없는 제재를 가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란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내부 혼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움직여 외부적으로 전쟁, 무역적 대립 등으로 끊없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파라 팔레비 왕비나 레자 팔레비 왕세자의 근황을 끊임없이 TV로 송출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균열을 유도했다. 물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 방송했었다.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PARS TV, BBC 페르시안, PARSI 1 등 수십여 개나 되기에 이란 정부를 막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채널들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이 위성 수신기에 대한 단속이 심했지만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인터넷 매체들의 홍수가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라 이란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움직여 또 다시 외부적 혼란을 일으켜 충격을 가하고 있다. 팔레비 정권이 했었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 미니스커트가 어떻고, 히잡이 어떻고 등등, 매우 자유로운 사회였다고만 말한다. 그러니 팔레비 치하의 이란 사회는 매우 모순성이 가득한 사회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인 측면들이 혼재된 사회였으며 왕정 독재에, 기득권들만 배부르고, 부정부패와 비리, 횡령이 일상화 된 사회였다. 빈부 격차도 엄청났고, 그렇기에 근대화 개혁을 하려했지만 안하니만도 못한 사회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약에 팔레비 왕조 치하의 이란 사회가 매우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안정적인 사회였다면 1979년의 호메이니 혁명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메이니 혁명은 팔레비가 가진 수많은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중동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메네이 정권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팔레비 2세와 바꾸어 팔레비 왕조를 부활시키면 완전히 근대 국가로 퇴보하게 된다. 그리고 하메네이 정권이 무너질리도 없을 뿐더러, 팔레비 2세가 돌아오는 것은 이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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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팔레비 왕가의 사치와 부패, 팔레비 왕조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밝히고 싶지 않았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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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살아있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티누스 2세 국왕은 아테네 근교 프시키코에서 1940년 6월 2일에 탄생했다. 그는 출생 4개월째 되는 해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그 다음 해,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략하며 유년기를 피난지인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1946년에 귀국하였으며, 1947년 아버지 파블로스 1세(Παύλος I, 1901~1964, 재위 : 1947~1964)가 즉위하면서 태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스포츠맨이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역대 올림픽에서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가 금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이 폐지돤 이후에도 IOC 명예 위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4년부터 노르웨이 국왕이자 먼 친척인 하랄 5세와 함께 국제요트연맹 공동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물론 하랄 5세 역시 요트 선수로 활동했지만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8촌, 그 왕비인 아네마리와는 6촌관계에 있다. 그는 1964년 3월 부왕이 암으로 승하하자 즉위하였으며, 9월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콘스탄티노스가 국왕이 된 시기에는 그리스 정치에 있어 좌우 대립이 매우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즉위 한 달 전 열린 총선에서 11년 동안 그리스를 이끌어 오던 우파 내각이 패배하고 중도연합당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가 총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국왕과 나이 많은 수상이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65년 7월 그리스 군부 내 우익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움직임이 있어 국방 장관의 퇴임을 결정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오히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 총리를 해임하고 같은 당 소속의 요르요스 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하자, 그리스는 그리스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양파 간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을 공공연히 부정하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졌으며 국왕이 총리를 지명하면 중도연합당이 장악한 의회가 거부하는 일이 빈번하여 왕정과 내각의 골이 깊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군부의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은 좌파들을 혁파해야 한다며 1967년 4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3일 근왕파 장교들과 동맹을 맺고 역으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쿠데타가 실패하게 되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일단 북부 그리스의 카발라로 파천하였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파파도풀로스는 왕을 추방했지만 측근인 요르요스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왕정을 없애지는 않았다. 이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후 왕당파는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여 반(反) 군사 정권 투쟁을 벌여 정권과 맞서게 된다. 결국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7월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며, 이로써 콘스탄티노스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이 퇴진된 이후 새로 들어선 카라만리스 총리의 과도 정부는 군사 정권의 왕정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을 무효화했지만 그렇다고 1952년 제정된 민주 헌법으로 복귀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왕정 복고 국민 투표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TV 연설로만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결국 7:3으로 왕정 복고가 부결되면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위에 복위하지 못했고, 1975년에 헌법이 제정되어 현 제3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1946년에 벌어진 국민 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유지된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입국 금지를 당한 채, 돌아오지 못하고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으며 당시 서방 정치인들로부터도 '멍청이', '암덩어리' 등의 비난을 들으면서 생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81년 2월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인해 당일치기 방문을 했었고, 1993년 여름에 미초타키스 총리의 배려로 일가족과 휴양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결국 굴복하며 공화정을 인정했지만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에 대한 여론은 매우 냉담했기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2세 총리 시절인 1994년에는 아예 국적까지 박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유럽 왕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리스 정부에서 그에게 적법한 성씨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국적을 부정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 왕의 성씨가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써야 할 때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가문 이름이나 영지의 이름이 성으로 사용되는게 유럽 왕실의 관례였다. 또한 왕실 재산과 관련해서도 그리스 정부와 소송을 벌였는데 그리스 정부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사람이 소송하는 것을 부당하다면서 소송을 받아주지 않으며 그의 갖은 수모를 주었다. 결국 그는 소송을 위해 Κωνσταντίνος της Ελλάδας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리스의 법원에서는 그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 인권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소송 끝에 2000년에 그리스 내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인정받게 된다. 자산은 그리스 정부의 소유로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 정부가 보상금을 옛 왕가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 정계는 이와 같은 보상 과정에 대해 비웃었는데, 이는 그가 탈세한 금액이 많다고 주장한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Constantino de Grecia (그리스의 콘스탄디노스)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에서 외교관의 여권을 발급받아 IOC 위원의 자격으로 입국하게 된다. 덴마크는 덴마크 왕가 후손에게 자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때 여권을 발급해줄 당시 성이 데그레시아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 그리스 방식으로 콘스탄디노스 데그레치아스(Κωνσταντίνος Ντεγκρέτσιας)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아테네 올림픽 당시의 방문을 계기로 그는 그리스 정계와의 사이가 개선되었고 이후 런던과 그리스를 왕래하다가 2013년에 영구 귀국을 허락받아 그 뒤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포르토 헬리(Πορτοχέλι/Porto Heli)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그리스의 경제 위기 등 현재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지자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옛 왕실에 대한 호감이 좀 높아졌다.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그리스의 경제적인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견실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로 왕정이 복고되기까지 갈 정도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있다보니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력도 있고, 2021년 말-2022년 초에는 폐렴 및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 최후의 국왕이지만 군사 쿠데타 이후 추방을 당해 해외 여러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갖은 수모를 당했고 조국인 그리스에서 조차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수모와 비아냥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스에 돌아와 현재 조용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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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살아있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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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로 들어간 드라비다 족과 고도의 남인도 문화에 관하여
-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 인들이 B.C 10세기경에 청동기 문화를 북방에서부터 파생하여 발전시켰다. 그리고 B.C 3세기경에는 북인도로부터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농업을 더욱 발달시켰고 남인도 아열대 기후의 기름진 토양에 벼농사를 짓고 곳곳에 도시도 건설하게 된다. 북인도 지역에서 쿠샨 왕조가 발현되기 전, 데칸 고원 지역에서는 아리아 계통의 안드라(Andra) 족이 사타바하나(Satabahana) 왕조를 세워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해상 무역을 발판으로 삼아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금이나 은으로 만든 화폐를 널리 유통시켰다. 그리고 대다수의 드라비다 족과 타밀족을 흡수하여 인도 남부와 북부의 문화를 서로 연결하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지역에는 안드라 족의 왕조가 오랫동안 통치했으며 점차 아리아 인들에게서 주도권은 드라비다 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데칸 고원 남쪽 인도 남부에는 촐라(Cholla), 체라(Chera), 판디아(Pandia) 왕조가 건국되어 서로 세력 정쟁을 통해 정치, 문화적으로 발전하였다. 촐라 왕조는 면직물을 동남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지역에 수출하여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으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스리랑카의 싱할라 족과 슈리비자야(Shurivijaya)의 해군을 격퇴하면서 벵골 만의 해상을 장악하고 전체적인 인도양 바닷가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다. 체라, 판디아 왕조도 촐라 왕조에 이어 후추와 상아, 진주와 보석, 면화 등을 각지에 수출하며 인도양 해상 로를 장악하였다. 더구나 B.C 1세기 무렵에는 로마 제국과 무역을 한 기록이 있으며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인도 지역의 왕조들은 북인도 왕조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어 드라비다 족 고유의 정치 체제를 마련해 갔으며, 전통적인 무속 신앙을 믿고 자신들만의 장례 풍습을 유지하였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아 전통 신앙이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뱀이나 코끼리 같은 부족의 토템들을 숭배하였고, 카스트 제도가 미약하여 북인도와는 사회 생활의 모습 자체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성행하였지만, 다른 신분과 통혼이 가능하여 새로운 신분이 탄생하기도 하였고 카스트 제도로 엄격했던 북인도와는 달리 남인도는 신분제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여성의 지위가 북인도보다 훨씬 높았으며 여성이 사회와 종교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고, 수티(Sutti)의 풍습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타바하나 왕조 때에는 여성들이 행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가정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조사된다. 따라서 남인도는 현재도 카스트 제도가 통하지 않은 지역이기도 한다. 이러한 남인도 앞에 놓여 진 바다는 오래 전부터 남인도를 지배한 드라비다 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아라비아 해를 거쳐 서아시아와 이집트로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역하기 위해 배를 건조했다고 하며, 인더스 문명 시절에서부터 나타나는 석조 인장이 서아시아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B.C 6세기에 남인도 상인들은 금, 은 같은 보석을 찾아 미얀마와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얻은 금속과 향나무, 상아 등을 가지고 페르시아나 중국 상인들과 거래하기도 하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 무역은 대부분 남인도를 거쳐 갔는데, 이는 인도가 자체의 물자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동서 무역 해상 항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외부 문화에 의해 옷감 짜는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염색 기술도 개발되어 인디고(Indigo)라는 물감이 멀리 유럽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인도의 면화는 세계적인 수출품이 되었으며 현재에도 남인도의 면화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남인도의 무역에 대해 북인도 불교 석가모니에 관한 기록들에는 남인도 드라비다 인들의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를 재패하고 있다는 설명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이 드라비다 인들의 해상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로 서술되고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후 2세기경 북인도의 쿠샨 왕조는 남인도 지역을 무역 기지로 삼아 후추, 진주 등을 로마에 수출하였는데, 로마가 이러한 수출품의 가격을 정하고 이를 교역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고충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해상 무역으로 인하여 남인도 문화는 북인도 만큼이나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남인도 국가들은 활발한 상업적인 교역과 농경의 발달로 인해 오직 농업 중심으로 일관한 북인도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꾸준히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드라비다 족 고유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인도양 무역의 중심으로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촐라 왕조는 몇 차례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였지만, 여러 차례 남인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드라비다 종족 체제로 전환했다. 특히 1세기 촐라 왕조의 카리칼란(Karikalan) 왕은 북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외래 학문을 장려하고 남인도의 학문을 융합하여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다에 면해 있는 국가들과의 문물 교류도 활발히 하여 재정을 확충했다. 후일 촐라 왕조를 여행하였던 중국 당나라의 현장 법사가 남인도를 극찬하여 “이곳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널려 있었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9세기에 다시 부활하여 성장한 촐라 왕조는 10세기경 남인도 문화의 전성기를 맞아 이후 약 200년간 강성한 문화 대국의 모습을 보이며 유지했다. 특히 드라비다 족 고유의 언어인 타밀어로 서술된 타밀 문학이 이 시기에 발전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양 교역의 또 다른 중심지인 스리랑카에서는 B.C 6세기에 북인도의 싱할라족이 실론 섬으로 들어와 첫 왕조를 건국했다. 그러면서 B.C 3세기 무렵에 불교를 받아들여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apura)를 불교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면서 나름 드라비다와 대치되는 강한 나라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싱할라 왕국은 1세기경에는 그리스-헬레니즘 세계와 교역하면서 알려졌고, 중국 기록에도 사자국(獅子國), 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드라비다와의 장기간 남인도에서의 세력 정쟁은 싱할라 왕국의 입장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이게 되었고 결국 싱할라족의 거주지는 스리랑카로 알려진 실론 섬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실론 섬은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해, 지중해로 연결되는 동서 무역의 핵심 고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드라비다에 편입되지 않고 나름 독립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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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로 들어간 드라비다 족과 고도의 남인도 문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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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 현재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격을 한 차례씩 주고 받은 뒤, 소강 상태에 있고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까지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따라서 중동 전역의 긴장은 한층 더 높아졌고,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은 전면전에, 핵전쟁까지 우려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의 전도사라 불렸던, 이스라엘의 5대 총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이다.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3월 1일, 예루살렘에서 탄생했다. 그가 탄생했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지기 시대였다. 이후 라빈은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크파르타보르에 있는 카두리 농업학교에 다녔다. 이후 유태인 자치 지역의 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 경찰 하가나(Haganah)에 들어갔다.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중에서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는 유태인들의 자치 정부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하가나(Haganah)는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라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이갈 알론(Ygal Alon)의 설득으로 그가 창설한 팔마하 특공대에 입대했고 곧이어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 당시의 전공으로 소대장에 승진한 라빈은 1945년 아틀리트(Atlit) 수용소에서 200명의 유태인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할 때, 부책임자로 구조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라빈은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السبت الأسود)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 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석방된 라빈은 같은 해 10월, 팔마하의 부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갈 알론 휘하에서 일했다. 1948년 봄, 라빈은 하렐(Harel)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통로를 여는 나손(Nason)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Katamon)과 세이크야라(Sheikyara)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갈 알론의 지휘 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Ramlle)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 전선 작전 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Operation Horev)을 지휘했다. 라빈은 1946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후 1953년 라빈은 영국으로 건너가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에는 영국군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6~1959년에는 북부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59~1960년에는 이스라엘 군 작전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61년에는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 1일 제7대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이 되면서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라빈은 총참모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지휘했다. 라빈은 1964년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노리는 진입작전을 고안했다. 그는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러 하여금 사막에서 1편대 당 4기씩 밀집 초저공 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 기지들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이던 이집트 공군의 주요 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 폭격을 가하면서 6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결국 나세르의 항복 받아내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968년 1월 1일에 그는 총참모장으로써 전역과 더불어 주미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이후 라빈은 1973년 봄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이스라엘 노동당(מפלגת העבודה הישראלית)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73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הַכְּנֶסֶת)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여태 총참모장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에서 노동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골다 메이어 총리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실책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 최초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라빈은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라빈은 전임 총리들과 다르게 지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피해를 입힌 이집트에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왔고 역시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맺는 것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와 1975년 시나이에서 잠정 협정을 맺었다. 협정 결과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약 30km 동쪽으로 철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했다. 1976년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한 대테러 작전인 엔테베 작전(Opération Entebbe)을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라빈은 내각 불신임 결의 문제로 하레디 정당과 갈등을 빚었으며 오일쇼크의 여파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물가와 실업률은 크게 오르는 등 이스라엘의 경제는 급격히 침체에 머물게 된다. 물론 자연히 이스라엘 정국은 불안정했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77년 조기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총선에서 참패했고 여기에 미국 대사 시절 미국 은행에 자신과 부인의 계좌를 사적으로 개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자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라빈은 7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 협정을 개시하면서 중동 평화의 전도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는 1994년 10월,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었으며 이와 같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아라파트 의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0~2016)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요르단 강을 경계로 요르단과 마주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된다. 따라서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요르단과의 분쟁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로 나누어 점진적 자치 지역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팔레스타인은 마침내 독립 국가로써의 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누구보다도 염원했으며 오슬로 협정은 라빈의 이러한 노력이 적극 반영된 협약이었다.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직후, 1995년 11월 4일,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다음,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이스라엘 민족주의 세력인 하레디 집단에 속한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정부는 동월 5~6일을 국민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걸고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으며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과 시몬 페레스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 폴 키팅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가능성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4일은 현재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יום הזיכרון ליצחק רבין)로 지정되어 그의 평화를 향한 노력과 이스라엘 및 아랍 & 중동 국가들과의 공존을 위한 라빈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네타냐후와 같은 전쟁광이 아니라, 이츠하크 라빈과 같은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필자는 중동에서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짐에 따라 라빈을 그리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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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아랍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