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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자들 해외로 떠난다… 백만장자 2400명 탈한국, 3년 새 6배 증가
- 한국 백만장자들의 '엑소더스' 가속화: 웩시트(Wexit) 현상 심화와 그 파급력 [서울=2025.07.05.] 2025년 현재, 한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는 백만장자의 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경제적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이민 컨설팅 회사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발표한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한국을 떠나는 백만장자는 총 2,400명으로 집계되어 2022년의 400명 대비 불과 3년 만에 6배나 급증했다. 이는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순유출 규모로, 영국, 중국, 인도만이 한국보다 더 많은 부유층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적 웩시트(Wexit) 현상과 한국의 특수성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을 넘어 사회·경제적 환경 변화에 따른 구조적 이탈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선일보는 이를 '웩시트(Wexit, Wealthy + Exit)'로 명명하며, 전 세계적으로 부자들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도했다. 실제로 올해 전 세계적으로 14만 2,000명의 백만장자가 다른 나라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현상을 넘어 각국의 세금 정책, 정치적 안정성, 교육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높은 상속세율과 불확실한 국내 경제 상황이 부자들의 이탈을 가속화하는 주요인으로 지목된다. 해외 주요국들의 상속세율을 비교해보면, 프랑스(최대 45%), 독일(최대 50%), 일본(최대 55%) 등 선진국들도 높은 상속세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최대 60%**에 이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를 부과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성, 즉 고물가, 고금리 지속과 성장률 둔화 우려 등이 맞물리면서 자산가들은 더욱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일례로, 최근 한국의 한 IT 기업 창업주는 수천억 원에 달하는 상속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로 이주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업의 영속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토로하며, 국내의 과세 환경이 기업 승계를 어렵게 한다고 밝혔다. 부자들의 주요 이주 목적지와 그 이유 부자들의 주요 이주 목적지는 세금이 낮거나 거의 없는 국가들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미국,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아랍에미리트(UAE)는 소득세·양도세·상속세가 없어 세계 부자들이 몰리는 1순위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두바이는 이미 전 세계 부호들의 '세금 피난처'이자 '투자 허브'로 자리매김했으며, 최근에는 한국의 유명 연예인 및 자산가들도 두바이로의 이주를 검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미국 역시 여전히 매력적인 이주 대상국이다. 특히 자녀 교육, 투자 기회, 세금 부담 등의 이유로 자산가들이 미국 등지로의 투자이민을 선택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미국변호사 송지현 씨는 "올해 들어 투자이민 상담이 3배 가까이 늘었다"고 밝히며, "특히 미국 EB-5 투자이민 프로그램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과거에는 은퇴 후 이민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자녀의 유학을 겸해 온 가족이 이민을 고려하는 젊은 자산가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최근 강남의 한 성형외과 원장은 자녀의 미국 명문대 진학과 본인의 투자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 자산을 모았지만, 세금 부담과 자녀 교육 문제로 인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해외 이주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웩시트(Wexit)의 파급 효과와 대한 이러한 고소득자 이탈은 장기적으로 국가 세수 감소 및 내수경제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부유층의 이탈은 단순히 세금 수입 감소를 넘어, 소비 위축, 고급 인력 유출, 투자 감소 등 복합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은 부유층 1%가 해외로 이주할 경우 연간 약 1조 원의 세수가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세금 체계 개편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상속세 대신 자본이득세를 도입하는 방식, 또는 상속세와 자본이득세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과세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는 상속세가 없는 대신 자본이득세율이 낮아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스웨덴은 2005년 상속세를 폐지한 이후 기업 승계가 원활해지고 투자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령화와 기업 승계 문제 현재 한국 중소기업 대표자 중 **60세 이상 비율은 36.8%**로, 고령화에 따른 기업 승계 문제가 이민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으로 분석된다. 가업 승계 시 막대한 상속세 부담으로 인해 기업을 매각하거나 폐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의 활력을 저해할 수 있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싶지만, 상속세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차라리 해외에 자산을 이전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지만, 향후 기업 승계 문제로 인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로의 사업 확장을 넘어 영주권 취득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웩시트(Wexit)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 문제를 넘어선 국가 경제의 중대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과세 체계 개편, 안정적 투자 환경 조성, 그리고 기업 승계 문제 해결을 위한 전향적인 정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국이 이러한 '부자들의 엑소더스'를 멈추고 다시금 투자를 유치하는 매력적인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정부의 향후 정책 방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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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자들 해외로 떠난다… 백만장자 2400명 탈한국, 3년 새 6배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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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시계 프레임” 반발한 김민석…청문회, 결국 파행 종료
- 김민석 총리 후보자 청문회 파행 종료..."깜깜이 청문회" 논란 [서울=2025.06.26]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25일 자정을 넘기며 파행으로 종료됐다. 이틀간 진행된 청문회는 핵심 자료 제출 거부와 여야 대립으로 실질적 검증 기능을 상실한 채 마무리됐다. 이번 청문회는 이재명 대통령이 지명한 새 정부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검증 자리였으나, 후보자의 재산 관련 자료 제출을 둘러싼 논란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 특히 국민의힘 의원들이 자료 미제출을 이유로 청문회장을 떠나면서 증인 없는 이른바 '깜깜이 청문회'로 진행됐다. "털릴 만큼 털렸다"...김 후보자 강력 반발 김 후보자는 청문회 종료 직후 기자들과 만나 "털릴 만큼 털렸다"며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정면 반박했다. 그는 "제2의 논두렁 시계 공세가 반복되고 있다"며 "모든 의혹은 표적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5년간 약 8억 원에 이르는 수입과 지출의 차액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납부할 세금은 모두 냈고, 필요한 소명도 다 했다"고 해명했다. 출판기념회 후원금 내역 제출 요구에 대해서는 "다른 정치인들이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만 공개하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야당 "총리 자격 없다"...자진사퇴 촉구 국민의힘은 김 후보자의 해명이 불충분하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자료도 증인도 없는 사상 초유의 깜깜이 청문회"라며 "총리직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최수진 원내대변인은 "배추 농사, 장모 자금 2억 원, 나랏빚에 대한 무지 등만 남긴 청문회였다"고 평가하며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야당은 "정치 신인이면 더 투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후보자의 자료 제출 거부를 비판했다. 민주당 "단독 처리" 방침...인준 강행 수순 더불어민주당은 청문회 종료 직후 "후보자의 해명이 충분했고, 야당의 정쟁성 문제 제기만 반복됐다"며 총리 인준안을 30일 또는 7월 4일 추가경정예산안 처리 전까지 단독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회 재적 의원 과반 출석과 출석 의원 과반의 찬성만 있으면 인준이 가능하며, 현재 의석 과반을 확보한 민주당은 단독 인준이 가능한 상황이다. "청문회 제도 개선 필요"...전문가 지적 이번 청문회는 제도 도입 이후 처음으로 증인이나 참고인 없이 진행되면서 청문회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일보는 사설을 통해 "여야 모두 수준 낮은 정치 공방만 벌였고, 후보자도 해명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청문회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자료 제출 의무 강제화, 증인 채택 절차의 정치적 간섭 방지, 검증의 객관성 확보" 등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민석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는 국무총리 후보자의 자격 검증이라는 본래 취지보다는 정쟁과 갈등이 부각되며 마무리됐다. 새 정부 출발을 앞두고 여야 간 협치 가능성에도 부정적 신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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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시계 프레임” 반발한 김민석…청문회, 결국 파행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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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대, 2025학년도 2학기 신·편입생 모집…해외 거주자도 지원 가능
-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총장 고성환, 이하 방송대)가 2025학년도 2학기 신·편입생 모집을 오는 7월 8일(화)까지 진행한다. 이번 모집은 국내 거주자뿐 아니라 재외동포 및 해외 거주 외국인도 지원 가능해져 교육의 문턱을 대폭 낮춘 것이 특징이다. 특히 온라인 학습 인프라와 전국 지역 네트워크를 갖춘 방송대는 고등교육 기회를 넓히려는 성인 학습자 및 직장인에게 실질적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학기 모집 대상은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교육과학대학 등 총 4개 단과대학 24개 학과로, 신입생은 41,510명, 편입생은 총 81,002명(2학년 39,220명, 3학년 41,782명)이다. 신입생 지원 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예정)자 또는 이와 동등한 학력 인정자이며 편입학은 대학 또는 전문대학 졸업(예정)자, 또는 4년제 대학에서 1학년 이상 수료한 자에게 자격이 주어진다. 단, 간호학과와 유아교육과 전공의 3학년 편입학은 별도의 자격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입학 지원은 방송대 입학 홈페이지(admission.knou.ac.kr)를 통해 온라인으로 가능하며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 등도 온라인 제출이 원칙이다. 다만 온라인 제출이 어려운 경우에는 우편 또는 직접 방문을 통해 서류를 제출할 수 있다. 방송대는 PC, 태블릿, 스마트폰 등 다양한 디바이스를 활용한 온라인 학습이 가능한 U-KNOU(Ubiquitous-Korea National Open University)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온라인 기반 학습 외에도 전국 13개 지역대학과 3개 학습센터, 시·군 학습관 및 중앙도서관 등의 오프라인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학습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강할 수 있다. 수업료는 한 학기당 약 34만~37만 원대로 경제적 부담이 낮고 각종 장학금 제도와 학생회 활동, 과목별 스터디그룹 등을 통한 다양한 학습지원 혜택도 마련돼 있다. 경기 지역 학습 인프라 경기지역대학 소속으로는 수원에 본부가 위치한 경기지역대학을 중심으로 성남시학습관(분당), 안양시학습관(관양동), 안산시학습관(고잔동) 등이 운영 중이다. 이 외에도 여주, 이천, 안성, 평택 등에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지역 학습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각 지역에서는 학과별 스터디, 과목별 튜터링, 선후배 간 멘토링 등이 활발히 운영되며 학습의 질을 높이고 있다. 합격자는 2025년 7월 28일(월)에 발표되며 등록 기간은 7월 28일부터 31일까지다. 자세한 사항은 방송대 입학 홈페이지 또는 전국 대표전화 1577-2853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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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대, 2025학년도 2학기 신·편입생 모집…해외 거주자도 지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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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G7 출국…첫 정상외교 무대에서 관세 협상 주목
- [서울=2025.06.16.] 이재명 대통령, G7 정상회의 참석차 오늘 출국…6개월 공백 끝 정상외교 재개 이재명 대통령이 6월 16일 오전,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1박 3일의 일정으로 출국했다. 이는 지난해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6개월간 중단됐던 정상외교의 복원을 알리는 첫 공식 외교무대이며, 대통령 취임 12일 만에 이루어지는 초고속 해외 순방이다. 이번 G7 정상회의는 캐나다가 의장국을 맡아 개최하며, 한국은 회원국은 아니지만 초청국 자격으로 이 대통령을 포함해 호주, 인도, 브라질,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우크라이나 등이 참석한다. 이 대통령은 16일 오후(현지시간) 캐나다 캘거리에 도착해 초청국 정상들과 양자 회담을 시작으로 공식 일정을 시작할 예정이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G7 확대 세션에서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 및 인공지능(AI)-에너지 연계를 주제로 두 차례 발언한다는 계획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은 민주주의 회복 이후 멈춰 섰던 외교를 재가동하는 계기”라며 “국제사회에 ‘민주 한국이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시작하는 무대”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순방을 통해 글로벌 현안 대응뿐 아니라 외교 신뢰 회복, 통상·무역 문제 해결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정상회의에서 가장 주목되는 일정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이다. 이 대통령은 6월 6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통화를 가진 이후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게 된다. 회담은 ‘풀어사이드(pull-aside)’ 형식의 약식 회담으로, 약 10분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이며, 최대 현안은 7월 8일 유예가 종료되는 관세 협상이다. 미국은 한국에 부과한 25% 상호 관세의 유예 연장을 놓고 재협상 중이며,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와 관련해 연장 필요성에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 바 있어 양측 간 신경전이 예상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정상 간 회동은 현재 진행 중인 실무 협상에 정치적 동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한국 정부는 관세뿐 아니라 방위비 분담 문제 등 여러 현안에 대해 실용적 접근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한 통상 기조를 고려할 때 이 대통령이 어떤 협상력을 발휘할지 주목된다. 이 대통령은 또한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도 약식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다.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자 광복 80주년으로, 양국은 경제·안보 분야에서의 협력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 해결, 셔틀 외교 복원 등 다양한 현안이 논의될 수 있을 전망이다. 한미일 3자 정상회담도 현재 조율 중이며, 대통령실은 “열려 있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정상외교 재개의 의미가 부각되는 이번 순방에서 이 대통령의 외교 기조는 '국익 중심 실용외교'다. 한국은 미국을 포함한 G7 회원국들과의 협력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등 다른 초청국들과의 양자 회담도 통해 외교적 입지를 넓히려 한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회담 가능성도 있으며, 무기 지원 확대 요청과 관련한 메시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한편 대통령실은 이번 순방에 맞춰 AI 정책 강화도 함께 내세웠다. 이 대통령은 네이버클라우드 AI혁신센터장 하정우를 초대 AI미래기획수석으로 임명하며, 디지털 외교와 기술 외교의 병행 추진을 선언했다. 이는 G7 회의에서 AI-에너지 연계를 주요 주제로 삼은 배경과도 맞물린다. 이번 정상회의 참석은 단순한 국제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국내적으로는 계엄 이후 민주주의 회복을 세계에 선언하는 장이며, 대외적으로는 정상외교의 복원과 국익 수호를 위한 실질적 외교 무대다. 이 대통령의 첫 외교 시험대에서 어떤 외교력을 보여줄지, 그리고 정상들과의 회담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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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G7 출국…첫 정상외교 무대에서 관세 협상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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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발언…현실은 무력 충돌 격화
- [신문기사] 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올 것" 주장…현실은 보복과 확전 [서울=2025.06.1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군사 충돌이 격화되는 가운데, 두 국가 간 "곧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이스라엘과 이란은 협상해야 하며, 내가 인도와 파키스탄을 설득했던 것처럼 협상을 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트럼프는 "많은 통화와 회의가 진행 중이며,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국민은 이해해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세르비아-코소보, 이집트-에티오피아 분쟁 등 과거 국제 중재에 성공한 전례를 언급했다. 이어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스라엘-이란 사태에 대한 통화를 공개하며 "푸틴도 중재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러한 낙관적 전망과 달리, 현지 상황은 악화일로다. 이스라엘은 지난 13일부터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시설을 시작으로, 14일에는 세계 최대 가스전인 '사우스파르스' 등 에너지 인프라까지 공습하며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이에 이란은 텔아비브, 하이파 등 이스라엘 주요 도시에 미사일 보복을 단행했으며, 보복은 계속될 것이라 경고했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이란은 민간인을 사전에 계획해 살해했다"고 비난했으며, 이란 혁명수비대는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군사적 보복을 공식화했다. 이번 충돌로 현재까지 이스라엘 측 최소 13명, 이란 측 최소 78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이란 핵합의(JCPOA) 파기와 이후의 강경 정책이 현재의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란은 현재 일주일 내 핵무기 생산이 가능할 정도의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미국은 이미 중동에 항모 전단을 급파하고 핵 협상을 중단한 상태다. 미 국방부는 이스라엘 공습 이전부터 주중동 외교 공관 직원들을 철수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중재 시도는 현실과의 괴리 속에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이 이 갈등에 본격 개입할 가능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중동에서의 무력 충돌이 장기화할 경우, 세계 에너지 시장에도 심각한 파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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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스라엘-이란 곧 평화” 발언…현실은 무력 충돌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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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87 첫 추락, 241명 사망…‘형을 잃은 남자’ 유일한 생존자의 고백
- [서울=2025.06.13.] 에어인디아 여객기 추락…‘242명 중 단 1명 생존’, 기적 속 생환 현지 시각 2025년 6월 12일 오후 1시 39분,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 아마다바드의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국제공항을 이륙한 에어인디아 소속 AI171편 여객기가 이륙 직후 인근 주거지역에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탑승객과 승무원 242명 중 단 한 명만이 생존한 가운데, 현지는 물론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사고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은 영국 국적의 40세 남성 라메쉬 비스와시 쿠마르 씨였다. 그는 사고 여객기의 이코노미석 맨 앞줄인 11A 좌석, 즉 비상구 인근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로이터통신과 힌두스탄 타임스 등에 따르면, 그는 비행기가 추락한 직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고, 주변에 시신과 불길이 가득한 상황에서 스스로 일어나 탈출했다. 비스와시 쿠마르 씨는 "눈을 뜨자 온통 피와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너무 무서웠다. 본능적으로 뛰어나왔다"고 증언했다. 그는 피투성이 상태로 구조대에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현재 가슴과 다리, 눈 부위에 부상을 입은 채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당시 형과 함께 인도 가족을 방문한 뒤,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그는 반복적으로 “내 형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비행기 탑승 당시 그는 손에 탑승권을 쥐고 있었으며, 의료진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사고는 12일 오후 1시 39분경, 이륙 직후 약 30초 만에 발생했다. 영국 런던 개트윅 공항으로 향하던 에어인디아 AI171편은 공항 반경을 벗어나기 전 인근 주택가와 의과대학 식당 위로 추락했다. 사고기종은 미국 보잉사가 제조한 보잉 787-8 드림라이너로, 이 기체는 2011년부터 운항을 시작해 이번이 첫 추락 사례로 기록됐다. 인도 항공당국은 "이륙 직후 항공기가 구조 신호를 전송했으나, 곧 레이더에서 사라졌다"고 발표했으며, 항공 추적 웹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에 따르면, 항공기의 신호는 약 185m 상공에서 끊겼다. 사고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보잉사에 대한 불신은 다시 커지고 있다. 보잉 787은 기존까지 단 한 건의 추락 사고도 없었던 기체였지만, 최근 수년간 보잉 기종에서 각종 결함 및 대형 사고가 이어지며 ‘보잉 리스크’는 산업 전반의 신뢰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앞서 2024년 12월, 전남 무안공항에서 제주항공 보잉 737-800 항공기가 추락해 179명이 사망했으며, 미국에서는 737 맥스9 기종의 기체 일부가 고도 5,000m 상공에서 이탈되는 사고도 발생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보잉의 안전관리와 품질 통제에 대한 국제적인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에어인디아 측과 경찰 발표에 따르면, 사고 당시 기내에는 성인 217명, 어린이와 유아 13명, 승무원 12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국적은 인도 169명, 영국 53명, 포르투갈 7명, 캐나다 1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한국인은 탑승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 현장에서는 현재까지 204구의 시신이 수습됐으며, 신원 확인을 위해 DNA 감식이 병행되고 있다. 구조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나, 생존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다. 특히 항공기가 의과대학 건물로 추락하면서 지상에서도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의대생 최소 5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됐다. 보잉사는 사고 직후 성명을 내고 “인도 항공사고조사국과의 조사에 전면 협조하겠다”고 밝혔으며, 오트버그 CEO는 에어인디아 회장과 직접 통화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뉴욕 증시에서 보잉 주가는 약 5% 하락하며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극"이라며 희생자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했고,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또한 “영국 시민이 대거 탑승한 사고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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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87 첫 추락, 241명 사망…‘형을 잃은 남자’ 유일한 생존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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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밥이 되다-이태연 시인
-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44) 죽어서 밥이 되다 이태연(1964~ ) 비 갠 뒤 더 뜨거운 햇볕 상가 옆 한적한 인도 가장자리 한 뼘도 넘을 것 같은 지렁이 한 마리 죽어 있다 익사하지 않으려는 시도 혹은, 붉은 맨몸의 오체투지였나 동네 개미란 개미, 하루살이, 똥파리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각기 제 밥벌이의 환락 중이다 아직 꿈틀대는 듯 보여 목숨아, 누가 그 몸의 문자를 읽어줄까 이태연 시인 경남 진주 남강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삼천포항 바닷가에서 보냈다. 2004년 시집 <아름다운 여행>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리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메마른 꿈에 더 뜨지 않는 별> <그래, 사람이다> 등이 있다. 물과 인연이 많아서 지금은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이번 달 시는 이태연 시인의 “죽어서 밥이 되다”입니다. “죽어서 밥이 되”는 것은 많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이 나뭇입니다. 대부분의 나무는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봄에 새싹을 틔우며 성하(盛夏)를 거쳐 가을에 열매를 맺습니다. 성하의 계절에는 가을을 준비하기 위해서 무성한 잎을 만듭니다. 가을, 결실의 계절이 지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년을 기약합니다. 무성한 잎은 내년을 위한 밥에 다름 아닙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식들의 밥이 되는 경우가 또 있으니 부모님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자식들은 험한 세상을 이겨내고 또 다른 존재로서의 자아를 완성해나갑니다. 여기 또 하나 죽어서 밥이 되는 존재가 있었군요. “상가 옆 한적한 인도 가장자리/ 한 뼘도 넘을 것 같은 지렁이”가 그것입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 “죽어 있”는 “지렁이”는 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살 찌푸리고 지나가기에 충분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범상하지 않게 보입니다. 지렁이의 모습에서 “익사하지 않으려는 시도”와 “오체투지”를 읽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개미, 하루살이, 똥파리”의 “밥벌이의 환락”까지를 지켜봅니다. 그러면서 지렁이 “그 몸의 문자를 읽”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순간순간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쌓여진 찰나는 인생을 이루고 맙니다. 순간순간이 의미 있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존재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 가능하겠지요. “죽어서도 밥이 되”는 존재, 그 존재의 존재를 읽어가면서 사는 세상이라면 우리의 삶은 더 풍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 시를 읽으며 해봅니다. 【이완근(시인, 뷰티라이프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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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밥이 되다-이태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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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 출간한 연명지 시인
-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이야기, 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 출간한 연명지 시인 연명지 시인 -본인 소개 저는 시의 정전기가 많은 괴산에서 태어나 책만 보면 두 눈을 번쩍이며 자랐습니다. 자연과 큐비츠하며 걷기를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제 시에는 비애의 정서가 많아, 한때 ‘하나님이 슬픔을 재능으로 주셨나’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두 번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타인을 향해 귀를 낮추는 방법과 마음의 속도를 줄이는 사랑법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끝 모를 깊이를 가진, 다정한 위로와 명랑함을 잃지 않는 시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2013년 미네르바 시선으로 『가시비』를 출간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사과처럼 앉아있어』 전자 시집 『열일곱 마르코 폴로 양』이 있습니다. 호미문학상과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025년에는 시 작품이 코소보 오르페우스 신문, 파키스탄, 인도 등에 현지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이탈리아 토리노 시에서 주최하는 “딜런 토마스데이” 국제시 축제에 시 ‘로뎀나무 등불’로 참가했습니다. -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를 소개해주세요. 2019년 봄 프랑스 길, 2021년 산티아고 은의 길을 걷고 나서 Camino Blue에 빠졌습니다. 2022년 산티아고 여정을 생각하며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고, 저와 남편이 찍은 사진들을 성심껏 골라 본문에 실었습니다. 한 편의 산문이 끝날 때마다 길이 나를 지나가며 슬픔에서 건져주는 경험을 했습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비워보니 나를 넘어 우리가 보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우고 싶어서 떠난 사람이었고, 순례길은 하나님이 나의, 나는 순례객들의 슬픔을 미행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는 그런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에세이집을 내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두 번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만나고 치유 받은 경험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고 어떤 상황에 응답하면서 저는 전보다 성숙해졌다고 느낍니다. 산티아고 길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상처 속에 웅크린 누군가를 향한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통해 저희가 잠시나마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획 중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네이버 카페 중에 <까미노 친구 연합>이라는 카페에 가입하면 산티아고 관련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 위기에 처할 때면 단톡방에 도움을 구해도 됩니다. 준비물로 자기 발보다 큰 사이즈의 운동화, 바세린, 발가락 양말은 필수입니다. 짐은 최대한 가볍게! -가장 마음이 가는 에세이 한 편 소개해주세요. 엄마의 보따리(카세레스) 성벽으로 둘러싸인 카세레스 구도심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로마, 이슬람, 북부 고딕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남아서 중세 시대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존된 곳이다.이곳에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했다. 카세레스에 도착한 날, 일찍 짐을 풀고 시간이 남길래 근처 현대미술관에 방문했다. 내부를 둘러보던 중 그곳에서 김수자 작가의 <보따리>를 만났다. 처음 보는 작품인데도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만들어준 혼수 이불이 문득 떠올랐다. 부잣집 막내딸이자 막내 며느리였던 엄마. 나이 마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맏이인 내게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우리는 서로 다정하지 못하고 오래 불화했다. 내가 결혼할 때 엄마는 목화솜으로 혼수 이불을 만들어주셨다. 붉고 푸른 홑청은 아름다웠지만 이불을 무겁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결국 몇 년 쓰다가 목화솜만 새로 틀고 홑청은 버렸는데, 내가 버린 홑청과 같은 색의 홑청이<보따리>라는 작품이 되어 시선을 끈 것이다. <보따리> 앞에 멈춰 서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엄마를 생각한다.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딸임에도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내 손을 꼭 쥐던 엄마. 그때 엄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엄마와 나는 아직도 비스듬히 기대어 보이지 않은 곳에 창을 내고 있다. 미안함도 그리움도 모두 사랑이라는 걸까. (…) -앞으로의 계획 여전히 자연과 소통하기 위해 걷고 자연의 언어를 가져와 시를 쓸 것입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팔이 긴 시를 쓰기 위해 고요하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고, 12월쯤에 3번째 시집을 출간하려 합니다. -독자들께 한 말씀 누군가에게 “네 뒤에 내가 있어”라는 말을 듣는 날은 참 행복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적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 명랑하고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는 독자들과 함께 사랑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길 소망합니다.독자님들의 삶이 유쾌한 소란으로 가득하기를 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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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 출간한 연명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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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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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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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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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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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 일본의 남만무역(南蛮貿易)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기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행해졌던, 일본(日本) 상인과 남만인 혹은 난반진(南蛮人),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 이외에 명나라(明朝) 중국인, 유럽과 아시아의 혼혈인 간의 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남만무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예수회가 독점하여 관리하였다. 주 무역 품목들은 노예와 소총 화약 등이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대가 인도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의 선박은 인도양을 횡단하여 아시아 무역으로 진출하였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물품을 유럽으로 운반하는 일 이 외에도 동남아시아나 동아시아 권역 내 중계 무역을 시행하였다. 남만무역은 명(明)나라의 마카오(澳門, Macao)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 인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중요한 물품에는 일본 은(銀)과 중국의 생사(生絲)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에 한반도에서 회취법(灰吹法)이 전래되면서 은의 산출량이 증가하였고, 왜은(倭銀)이라 불리며 명나라나 포르투갈에서 이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세제 개혁으로 인해 은의 수요가 늘자 해금(海禁) 정책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 이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은으로 명나라의 생사를 구입하여 중일 중계무역을 하였다. 마카오 이외에 거점이 된 곳은 나가사키(長崎), 포르투갈 령의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말라카(Malacca), 스페인 령 필리핀(the Philippines) 마닐라(Manila)였다. 이 마닐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막부와 교역을 했다. 그러나 막부는 나가사키부교와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하여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는 제5차 쇄국령(鎖国令)을 발포하였고 포르투갈 인들을 추방하게 된다. 마카오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채를 변제하면 무역이 재개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채를 변제하는 은을 지닌 무역 재개의 탄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단교 이유는 부채가 아닌 금교였기 때문에, 사절단은 하급선원을 제외한 61명이 처형되어 돌려보내졌고, 무역은 재개되지 못하게 된다. 마카오 시에서는 무역 단절의 구제를 포르투갈령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마카오는 포르투갈령 인도 관할 외에서 자치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구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만무역은 종료되었다. 남만무역의 여명기에 사무 역에 종사하는 해상은 다수였다. 왜구에 참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로한오니(黒蕃鬼)로 불리는 흑인 용병이나 노예도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인에게는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insula)를 떠난 세파라딤 유대인도 다수였으며, 개종하여 예수회 수사가 된 유대인도 있었다. 고아에서 이단 심문소(Inquisitio)가 개설되자, 인도에서 마카오나 마닐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급증하여, 마카오 인구가 800명에서 5,000명 이상이 되었다. 예수회 수사는 남만무역 전반에 크게 관여하였으며, 일본에서의 발전에는 사비에르의 활동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남만무역 개시에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파견되는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의 장관이 되었다. 마카오 정주자가 늘어나자 현지 중국인이나 나가사키 일본인, 풍살합전(豊薩合戦)이나 규슈평정(九州平定)으로 노예가 된 일본인,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노예가 된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주민도 늘어났다. 혼혈 주민은 포르투갈 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마카오에 정주한 포르투갈 인은 카자두(casado, 포르투갈어로 “결혼한”)라고 칭해졌으며, 카자두 상인에 의한 자치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만다린(Mandarin)이라고 불린 중국 관리, 두 번째는 포르투갈 인 항해를 지원한 해상 안내인이나 수부인 해민(海民), 그리고 세 번째, 해적 선원이다. 만다린에는 아이타오(Aytao, 海道副使), 샤엔(Chaen, 察院), 투탕(Tutão, 都堂), 숨빈(Chumbin, 巡撫使), 로우티아(Lotia, 下級役人)가 있었다. 남만선이 내항하는 나가사키에 각지에서 상인이 모여 들었는데, 가장 많은 곳은 하카타(博多) 상인들이었다. 하카타 출신 상인 중에는 다이칸(代官)도 역임하면서 주인선무역(朱印船貿易)도 수행한 스에츠구 헤이조(末次平蔵)가 가장 번영한 사람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해운으로 일하는 자 외에도 후나야도(船宿)를 경영하는 초닌(町人)이 다수 있었다. 당초에는 포르투갈 인이나 토진(唐人)에게는 거류지가 없었고 나이초(内町)라는 지구의 후네야도에 숙박하여 후나야도의 주인의 보호를 받았다. 더구나 후나야도의 주인은 중개업자이기도 하여, 사시야도제(差宿制)에 따라 내항한 상인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장사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초닌에는 기리시탄이 많았으나, 에도막부 시대가 되면서 포르투갈 인에 대한 숙박업이나 중개업이 제한되었다. 더불어 포르투갈은 무역품을 크게 다섯 종류로 분류하여 운반하였다. ① 중국에서 일본 ② 일본에서 중국 ③ 중국에서 인도 ④ 인도에서 중국 ⑤ 동남아 각지 상품 ① 중국에서 일본 : 생사, 견직물, 금, 도자기, 초석, 생약, 설탕. 생사는 백사(白絲)와 연사(撚絲)가 있었다. 생약에는 대황(大黃), 감초(甘草), 산귀래(山歸來)가 있었다. ② 일본에서 중국 : 은(銀)이 주력상품. 이외에 유황, 일본도(日本刀), 남만칠기(南蛮漆器), 나전세공(螺鈿細工), 참치 등 해산물, 풍살합전이나 규슈평정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인, 임진왜란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노예가 있었다. ③ 중국에서 인도 : 생사, 견직물, 도자기, 금, 진유(真鍮), 사향(麝香), 생사 중 백사. 인도에서 소비되는 것과 인도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운반되는 것 ④ 인도에서 중국 : 은, 포도주, 올리브유. 인도은은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가져온 은이 다시 인도로 가져간 것이다. ⑤ 동남아시아 각지 산물 : 침향(沈香), 소목(蘇木), 주석, 납, 후추, 용뇌(龍腦), 정자(丁子, 클로브), 울금(鬱金), 녹비, 교피(鮫皮) 등 향신료가 많다. 이 외에도 호박, 수박, 옥수수, 감자, 밀가루, 카스텔라, 담배, 지구의, 안경, 군계(軍鷄) 등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출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지만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소, 돼지, 닭, 밀가루 등이 내항자 식용으로 만들어지도록 하고자 출항 전 소금 절임 등으로 선적되었다.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은 명목상 전부 포르투갈 왕실 사업이었으나 단독으로 인원과 배를 계속하는 것은 인구와 왕실 재정 규모로는 불가능하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1505년 인도양에 보낸 22척 선단에는 왕실 연 수익의 75% 이상 비용이 들었기에 이탈리아계나 독일계 상인 집단이 반액 이상을 투자하였다. 또한 배를 보내는 권리는 귀족이나 상인에게 유료로 양도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제노바 공화국(Genova Republic)의 산 조르조 은행(Banco de San Giorgio)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다. 또한 고객과 상업용 물품 리스크 관리를 위하여 복수의 사람들이 공동출자하는 콤파니아(Companha)나 고리의 해상대부(海上貸付, Emprestimo a risco)인 레스폰덴시아(Respondencia)가 행해졌다. 포르투갈은 카톨릭 국가로서 교회법에서는 우수라(Usura)에 의하여 고리가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카톨릭교도 사이에서는 해상 대부는 해상 보험 명목으로 취급되었다. 마카오에 부임한 벨쇼르 카르네이로(Belchior Carneiro) 사교는 자선원(慈善院, misericordia)를 설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 자선원에는 부자의 자금을 투자하거나 빈자의 희사로 운영하는 은행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리오(Rio)와 고아를 두고 원격으로 신용 태환 거래도 행해졌다. 마카오 자선원에서는 남만무역 항해 자금도 대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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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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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제2 도련선 돌파의 의미 :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흐르는 위기감
- 이미 배타적 경제수역 (EEZ, Exclusive Economic Zone) 같은건 무의미하게 됐다. 중공이 대만 포위 훈련 할때부터 일본의 베타적 경제수역은 허물어진거나 다름없다. 1951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가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제창한 전략 구상 도련선(島鏈, Island chain) 또한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중국 헤군사령관 류화칭(劉華淸)이 1980년대에 이를 ‘근해 적극방위전략’의 핵심 지역들을 자국의 해군 전략에 편입하여 미국이 설정한 제1도련선을 방어 경계선으로 공식화했다. 중국 근해인 제1 도련선과 좀 더 멀리있는 제2 도련선이 현재 미국이 설정한 대중국 방어선이다. 태평양의 섬들을 사슬처럼 이은 가상의 선이라 해서 도련선(島鏈線)인데 실질적으로는 중국 해군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뜻하기도 한다. 본래 중국은 제1 도련선 돌파에 이어 2020년까지 제2 도련선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2040년에는 미국의 태평양 독점 지배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미 제1 도련선은 의미가 없게 되었고 제2 도련선 또한 올해 6월,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중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 중국은 함대를 보내 이미 제2 도련선을 돌파해버렸다. 이 자체가 경악할만한 일인데 모두가 당시 중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그대로 묻혀져 버렸다. 중국이 미국에게 통보하고 미국과 함께 설정한 도련선은 미국이 발표한 2개지만 중국이 발표한 것은 3개다. 제1 도련선의 경우, 쿠릴 열도에서 시작해 일본, 류큐열도, 대만, 필리핀,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중국 본토 근해로 이루어져 있다. 제1 도련선은 대체로 주변 지역에 대한 완충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합병시킬 경우 제1 도련선이 완전히 완성에 이른다. 그러나 대만을 포위하는 훈련을 몇 차례 실시했었고 이에 대한 견제도 전무했기에 사실상 제1 도련선이 완성되고 해당 해안 일대가 중국에 넘어간거와 다름 없게 되었다. 제2 도련선의 경우, 외곽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시작으로 괌, 사이판, 파푸아뉴기니 근해에 이르며 이는 서태평양 연안 지대 전체를 이르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과 일본을 중국의 영향 아래 예속시킬 경우 제2 도련선이 완성된다는 입장인데 이번 달에 그 경계가 뚫렸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지정한 제3 도련선은 알류샨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뉴질랜드 일대를 활처럼 휘어 있는 선 형태를 말한다. 이는 서태평양 전역에 대한 장악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 선의 목적으로 본다면 최종적으로 미국과 태평양을 양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것은 제2 도련선까지로 여겨지는 데, 제3 도련선으로 넘어가면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놓고 발표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도련선 만으로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한 중국의 주도권은 확고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와 같은 도련선들은 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독립전쟁 이후, 태평양의 미국이 설정한 먼로 독트린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설정한 절대 방위선과 많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동아시아-서태평양에서의 중국의 영역과 중국식의 국제 질서 지역의 영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군사적인 입장으로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 동안 중국의 앞바다를 통제하여 압박하려던 것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이 말하는 도련선 전략은 동아시아 지역 내 국가들이 전부 중국과 협력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중국의 세력 확장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국가들이 많아 이와 같은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 항공모함 전단이 지난 6월 7~8일 처음으로 일본 동쪽 끝 서태평양 내부의 일명 '제2 도련선(The second island chain)' 지역을 넘어서 훈련을 벌였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중국 항공모함인 랴오닝함과 산둥함 전단이 일본 동쪽 끝 미나미토리시마 주변의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에 일본과 미국이 항의했지만 중국에서는 연례 계획에 따라 조직된 정기훈련으로 국제법 및 국제 관행을 준수하고 특정 국가나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도련선 확장 정책을 억제하기 위해 제1도련선 내 국가들에 전략 자산 배치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B-1B 전략폭격기를 지난 4월 일본에 전진 배치하는 등 각종 전략무기를 제1 도련선에 배치하려 한다고 검토했다. 미국은 유럽과 나토의 지원을 축소해서라도 중국의 해상능력을 봉쇄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도 돌파당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일대에 대한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특히 이같은 위기 상황에 대해 미국 측이 아닌 일본 해상자위대가 파악하고 알렸다는 것은 미국의 대 태평양 지역 감시 정보가 많이 약화되었음 시사한다. 보통의 태평양 전력이 강했을 시기의 미국이었다면 이 같은 사실은 즉각 보고 되어 함대를 출동시켜 견제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미국이 중동에 신경쓰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태평양 지역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 혹자는 미군이 이 지역에서 상시 주둔 대신, 필요시 신속히 전개할 수 있는 해군력(7함대)과 연합훈련,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모두 무력화 된 셈이다. 미군의 영향력은 상시 주둔 숫자가 아니라, 위기 시 신속 투입 능력,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첨단 정보 · 감시 · 정찰 자산, 해군력 운용 등 복합적 전략에 기반한다고 했다. 그런데 제2 도련선 돌파하며 중국의 항공모함들이 해상 훈련을 실시 할 때, 앞서 언급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한 내용들은 완전 무위로 돌아갔다.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따위도 없었고, 미국이 자랑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복합적 전략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이 관여하는 다른 지역들을 신경 쓰고 있을 때, 다른 관여 지역은 쉽게 뚫릴 수도 있다는 약점을 노출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전략적 실험(Strategic Experiment)"일 수도 있다. 미국이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으로 출몰했을 경우, 미국의 대응 능력을 살펴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해상 훈련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2 도련선까지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구축한 제2 도련선까지의 인도-태평양 연합 QUAD와 AUKUS의 연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의 실험이다. 일단 제2 도련선까지 가보고 이를 해상 훈련이라며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된다. 해상 훈련을 하면서 이들의 반응을 떠보고 해당 지역들의 정보도 취득하면서 여러 가지 모의 실험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돌아가서 여태까지 실험한 내용과 취득한 정보들을 모아 또 다른 전략을 세우거나 이미 세워져 있는 전략들을 대폭 수정할 것이다. 이를 구체화 한다면 이제 친중 국가들을 이용해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목을 환기 시킨 다음,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나라는 대만이고 그 다음이 한국과 일본, 혹은 필리핀 및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제2 도련선을 기준으로 해상 훈련을 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룬 셈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가장 유리해지고, 이득을 볼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1차적으로 아, 태 지역의 긴장이 풀어져 이번처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을 것이고, 2차적으로 이란에게 물자를 지원하며 벌이도 쏠쏠해질 것이며, 3차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예속화 과정의 심화와 더불어 일대일로의 확장은 더욱 가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해서 우리는 베트남과 일본, 러시아와 공조를 강화하고 많은 정보를 확보해 미국과 호주, 인도에까지 넘겨줘야 한다. 특히 다극화 시대로 가면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불편한 공생(Uncomfortable Coexistence)"을 하고 있는 격이지만 그 때 되면 서로를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러한 양상이 조금씩 보여지고 있다.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정치-외교적 관계 등을 보면 단순히 경제적 관계 만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서로 협조적이지만 이 둘은 결코 모든 면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국가들이다. 둘이 상호 견제 할 것을 대비해 러시아와 친해지면 여러 모로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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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제2 도련선 돌파의 의미 :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흐르는 위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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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12일 전쟁, 미국의 개입으로 불안정한 중동 정세
- 이란과 이스라엘의 12일 전쟁은 미국이 이란을 직접 폭격했지만,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대응으로 가기 직전에 – 이란 의회를 의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최종 승인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 트럼프 대통령의 휴전 선언으로 끝났다. 미국은 B2 스텔스 폭격기로 이란의 핵 시설과 농축 우라늄 시설이 있는 나탄즈, 포르도 및 이스파한을 정밀 타격했고, 이란은 이에 맞서 중동의 미군 기지 두 곳(카타르와 이라크)을 미사일로 공격했다. 이때 이란은 미사일로 공격하면서 미국에 이를 통보했고 미군은 미리 대피했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이란의 이 두 가지는 사실상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사용하면서 미국의 공격에 대해 결사 항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란의 핵 시설 및 농축 우라늄 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자랑했지만, 이란은 지상의 시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을 뿐이다. 특히 미국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 시설 및 핵 시설이 있는 포르도와 나탄즈에 스텔스 폭격기를 동원해서 벙커버스터인 GBU-57를 12발을 투하했다. 이스파한은 미군 잠수함에서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24발 이상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의 공습 이전에 이란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농축 우라늄을 빼돌렸거나 다른 기존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 시설로 옮겼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실제로 이란의 핵 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면, 방사능은 분명히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문은 과연 트럼프의 말대로 이번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이란의 핵 시설 및 농축 우라늄 시설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는가에 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란이 핵 개발을 한층 촉진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되었고, 테러 지원국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서방으로부터 각종 경제적 제재를 받고 있어서 이 기회에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라는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최근 이란은 이번 미국의 공격을 방관한 국제 원자력 기구를 압박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 미국의 이란에 대한 공습에서 트럼프는 미군이 더 이상 국제적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스스로 어겼으며, 미국 의회의 승인조차 거치지 않았다. 트럼프 지지자들 내부에서도 이란의 공습에 대해 찬반으로 갈리면서 내부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철저한 기만전술과 비밀작전으로 이스라엘의 요청을 받아들면서도 동시에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휴전으로 만들어야 트럼프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보여주려고 했다. 심지어 트럼프는 자신의 휴전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또다시 이란을 폭격하려고 하자, 곧바로 이스라엘 총리와 설전을 벌인 직후 이스라엘의 조종사들이 되돌아가는 상황도 있었다. 이것은 트럼프 자신의 결정에 반기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각인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불과 12일간의 전쟁이었지만, 이란과 이스라엘도 각각 피해가 컸지만, 다행스럽게도 본격적인 지상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피해에 차이가 있다면 이란의 드론과 탄도 미사일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민간인 피해보다는 각종 인프라와 건물 및 군 기지 등에서 피해가 컸다. 민간인들은 방공호로 대피해서 인명피해가 비교적 적었지만, 이란에 의한 대량의 드론과 탄도 미사일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뚫으면서 좁은 지역에 밀집한 건물들을 파괴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주로 핵 시설과 군 지휘부를 겨냥해서 이루어졌고, 방공호가 별로 없는 이란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다. 초기에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미국이 개입하면서 미국 대 이란의 전쟁으로 진화하기는 했지만, 결국 각국이 서로 승리를 자화자찬하면서 공식적으로 휴전이 성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는 정치적 승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지율 상승으로 가자 전쟁에 집중하는 조건을 만들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부의 문제를 무마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휴전을 이끌어 내는 해결사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는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반미를 통해 이란 내부의 지지를 공고히 하면서 자신의 후계 구도를 만드는데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승리들은 전쟁의 부수적 결과로 얻어진 것일 뿐, 중동의 평화를 실제로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서서히 드러나는 사실은 미국의 이번 이란 공격이 사실 트럼프의 말과 반대로 이란의 핵 사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이란의 핵 과학자들과 군 수뇌부들을 제거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제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폭격으로 이란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는 명분만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이란은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에 따라 취약한 방공망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방공망을 구축할 것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드론과 탄도 미사일을 대량으로 섞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란의 취약한 공군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충돌과정에서 상당히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중국의 전투기에 이란은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란이 이번 기회에 러시아보다는 중국에 밀착하면서 중국의 신실크로드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면, 이른바 반미동맹으로 대표되는 듯이 보였던 CRINK에서 중국-이란이 가까워지고 러시아-북한이 밀착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물론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미국의 이란 공격이 향후 중동 문제를 실타래처럼 얽혀 들어갈 수 있다. 만일 이스라엘의 요청으로 인한 미국의 이란에 대한 공격이 이란의 핵 무기화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이 드러난다면 그 후폭풍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트럼프는 시리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면서 이란도 미국의 요구대로 협상 테이블로 나오지 않으면 또다시 폭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지만, 이란이 현재로서 미국과의 협상에 나올 가능성은 없다. 쉽게 말해 이란이 굳이 그래야 할 명분도 이익도 현재로서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위권을 어느 정도 갖추기 전에는 이란이 미국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란의 대리전 역할을 그동안 수행했던 시아파 벨트가 이스라엘의 공격에 상당히 주춤하고 시리아가 내전으로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탓에, 이란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축소될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후티가 버티고 있어서 이란으로서는 그래도 중동에서 영향력은 유지될 것이다.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당분간 자력갱생으로 버틸 것인데, 문제는 시리아가 과연 안정된 평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다. 현재로서는 장담하기 매우 어렵고 서서히 악명 높은 IS도 출현하고 있어서 매우 불투명하다. 이번 미국과 이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중동 전체에 복잡한 현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란의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으로 – 비록 약속 대련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 중동 국가들은 방공망 구축을 위해 미국과 서방에 손을 내밀 것이다. 중동에서 이란이 고립되고,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이 서로 이익에 의해 가까워진다고 해서 중동의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쩌면 민심과 한참 거리가 먼 정치적 야합으로 이스라엘에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이것이 중동의 화약고를 스스로 건드리는 꼴이 될 수 있음을 중동의 지도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중동의 불안정한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치열한 샅바 싸움과 아직 끝나지 않은 가자전쟁 그리고 시리아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이것은 중동의 근본적인 문제가 여전히 제대로 된 첫 단추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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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12일 전쟁, 미국의 개입으로 불안정한 중동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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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 내일 30일부터 러시아에 입국하려면 사전에 입국 신청서와 함께 얼굴 사진 등 생체 정보를 모바일 앱에 등록해야 한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자국에 무비자로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의 등록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디지털 기술부는 러시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자료를 모바일로 제출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인 루아이디(ru ID)를 개발했다. 그러나 내년 6월 30일까지 1년 동안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기간으로, 입국 전에 반드시 제출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 제약이 따른다. 러시아 정부는 무비자 입국 외국인을 대상으로 입국 전에 생체정보를 입국 신청서와 더불어 '루아이디'를 통해 제출하도록 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작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 '러시아 연방 정부령 제1510호' 에 따른 것으로, 30일부터 1년 동안(2025년 6월 30일~2026년 6월 30일) 2단계 시범 사업으로 들어왔다. 시범 실시 단계에서는 입국 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 전송은 당연히 의무 사항이 아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여 입국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러시아 입국에 불허 사유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루아이디(ru ID)를 등록하지 않고 러시아에 입국하게 되면 휴대폰 심(SIM) 카드 발급과 외국인에게 개방된 러시아의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를 발급받는데 있어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외국에서 발급된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안 되기 때문에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 발급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제한이 생긴다면 카드에서 돈 인출이 막막해짐은 물론 로셀호즈은행(Россельхозбанк)과 가스프롬뱅크(Газпромбанк)에서 유니온페이 체크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또한 필자가 생활했던 작년까지는 가능했는데 올해는 이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루아이디(ru ID)를 통해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를 전송한 경우, 입국한다면 러시아 내에서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 휴대폰 심(SIM) 카드 구매를 위한 SNILS(사회보장번호와 유사) 발급이 가능해지고 러시아 정부의 공공서비스 이용 신청 등도 가능하다. 다만 여행객들에게는 심카드 외에는 공공서비스 이용은 필요가 없을 뿐이다. 입국 신고 및 생체 정보 등록은, 한국인 등 러시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국가의 국민이 루아이디 앱에 가입한 이후, 입국하기 72시간 전까지 출입국 날짜와 방문 목적, 개인 및 생체 정보 등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응급 치료 혹은 가족의 사망 등 긴급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입국 4시간 전 등록이 허용되고 있다. 등록해야 하는 생체 정보는 얼굴 사진, 여권 사진, 목소리 등으로 나타나며 등록을 마치면 입국 때 필요한 QR코드가 발급되게 되어 있다. 이는 미국 방문을 위해 사전에 전자여행허가(ESTA: Electronic System of Travel Authorization)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 보면 된다. 참고로 한국인이 미국을 방문하려면 2008년 11월 중순부터 인터넷에서 입국에 관한 간단한 등록 절차를 거쳐 ESTA (입국 허가)를 발급받으면 된다. 이와 같은 생체 정보 수집 대상에서 제외되는 외국인은 6세 미만의 아동과 러시아 주재 외교관, 영사관, 국제기구 직원, 벨라루스 국민 등이다. 그리고 입국할 때, 머물 도시, 호텔명, 호텔주소, 연락처 등이 명확해야 하고, 체류 목적, 날짜 등이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것이 불명확 할 때는 러시아 입국이 거부된다.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 입국 시 지문 날인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지문 날인은 입출국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제 러시아에서 사진 찍을 때 매우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관공서나 러시아의 인프라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나라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조치가 없었는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인프라에 자주 드론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지 않으면 임의동행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보통 일반 관광객인 경우, 대부분 경고를 받고 풀려난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기차역이나 선로, 그리고 화물열차를 찍으면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국은 러시아에서 비우호국가로 찍혔기 때문에 입국 심사 때 물어보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취해지는 똑같은 조치이니 한국인만이 표적 대상이 되었다고 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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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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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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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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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그레이트 게임은 현재 역사 용어가 아닌 정치 외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는 183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하기도 하면서 1905년 러일전쟁까지를 일컫기도 한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시아 남부 지역을 노리자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가운데 비롯되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1842년 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진격했다가 역습을 당해 패배하여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 등 1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와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고 이 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리전 상대로 일본이 나서게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맺어진 동맹인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인도와 호주, 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했던 셈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러시아하고도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 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서방 나토 세력까지도 가세해 거대한 서구 연합이 생성되었다. 이 동맹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그 상대는 러시아였다. 그리고 여기에 새롭게 중국이 가세했으며 중립을 지키던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아프리카까지 러시아와 중국과 가까워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사우디아라비아 및 이란, 터키로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밀착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쿼드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지만 최근 인도는 친러로 돌아섰다. 또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원래 중국이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쿼드 동맹과 성명에서부터 제3차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2021년 9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4명의 정상들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1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4개국 정상들은 회담 이후 성명에서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4국이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는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2020년 카슈미르 산악 지대에서 영토 분쟁에 있던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의 힘을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당시 성명에서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 전문가 누구든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성명에서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성명에 의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고 하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하며 북한을 압박하기도 했다. 성명에서 나온 미얀마 관련된 것에서 미얀마 군부로 하여금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 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에 대한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했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 북한 정책 기조가 될 것임을 알렸다. 한국은 당시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19세기 말 그레이트 게임 때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러시아까지 이 분쟁에 끼어들어 우리 한국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 그 때는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지만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되면서 1885년 4월 영국은 조선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거문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와 같이 중립화 및 완충지대로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남쪽 바다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兪吉濬)이었다. 당시 유길준은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길이라 주장했다. 당시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 · 프랑스 · 일본 · 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절이었기에 조선의 중립화론은 청나라가 조선을 종속국 상태로 놓아두려 했었던데다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남겨두려 했었기 때문에 지식인의 주장 중 하나로 단순하게 인식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 세력이 청나라를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했고, 해양 세력이 영국을 대신해 일본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외교, 군사적인 역량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두 세력이 1895년부터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으며 이는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시 고종은 1897년에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으며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대로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바뀐 현재, 우리는 러시아, 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한반도는 이들 국가들의 지리적, 지정학적 요충지로 설정이 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해당 국가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아래에 온통 날카로운 못이 박힌 대지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거나 다름없는 형세인 것이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러시아가 끼어들면서 달라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 중, 러 구도가 되고 한, 미, 일 구도로 굳어지고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동 사태들이 해결된 이후에는 그 또한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을 주도로 한 시아파, 사우디 주도의 수니파, 그리고 이스라엘이 버티는 중동 사태를 이후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나 국제정세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크게 변할 수 있는 변수가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국제관계의 예측은 50:50의 확률이다. 그 50% 확률의 국익을 하나라도 더 취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행동이 바로 외교(Diplomacy)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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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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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
- 호르무즈(Hormuz) 해협은 북서쪽의 페르시아 만과 남동쪽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만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북쪽에는 이란이 있고 남쪽에는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있다. 그러나 가장 좁은 곳의 폭은 54km이며 해협의 이름은 이란 측에 존재한 황무지 섬인 호르무즈 섬에서 유래했다. 본래 호르무즈, 혹은 오르무스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조로아스터교의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페르시아어로 '대추의 땅'이라는 뜻, 혹은 그리스어로 '만'이란 뜻이라는 설이 있다. 이 해협의 역사는 11세기 말, 호르무즈 섬은 케르만 셀주크(Kerman Seljuk) 및 살구르(Salgur) 왕조의 속령이었으며 무함마드 디람쿠(Muhammad Dyramqu)라는 인물이 호르무즈 왕국을 건국했다. 이어 13~14세기에는 몽골 일한국에 복속한 상태에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이어주는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하기 시작한다. 15세기에는 호르무즈 왕국이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고, 명나라의 정화가 대항해를 할 당시 명나라 함대가 방문했다. 명나라 측 기록인 『성사승람(星槎勝覽)』에 의하면 호르무즈의 주민들은 매우 부유하고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507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크(Afonso de Albuquerque, 1453~1515)가 이끄는 포르투갈의 함대가 호르무즈 섬을 일시에 점령했고, 1515년에는 이 섬에 성채를 건설한 이후, 호르무즈 왕국을 완전히 포르투갈에 복속시켰다.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 제국이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다만 1622년에 이란 사파비 왕조의 샤한 샤 압바스 1세(Abbas I)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3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호르무즈를 함락시키고 포르투갈 군을 몰아냈다. 당시 1세기 정도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던 호르무즈 왕국 역시 이 시기에 멸망했다. 한편 호르무즈 해협 남쪽에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 세력을 격파하고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오만 제국이 새로운 해상 강대국으로 대두했고, 해군에 큰 관심이 없던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오만 제국은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현대 시대에 이르러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이 지역에서는 일명 "유조선 전쟁"이라고 불리는 무차별 유조선 공격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이란이 봉쇄 위협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었기에 잘 부각 되지 않았지만, 이 당시 유조선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이라크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유조선과 정박지를 공격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면,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이 여기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생각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 이란은 고속정 전력을 기반으로 이라크에서 출항하는 유조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같은 후세인의 전략에 대응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은 1987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유조선을 보호하는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을 시작했다.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이 시작되자 미 해군 군함들이 유조선의 보호를 위해 해협에 투입되었으며, 1988년부터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미국 해군과 이란 해군 간의 해상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미 해군 순양함 CG-49 빈센스가 테헤란에서 이륙한 이란 항공 655편을 함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켜 승무원 포함 290명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유조선 전쟁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2010년대 후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란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해협 인근을 통과하던 유조선들이 이란 군에 의해 피격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향해와 관련해서 미국 주도의 동맹군이 결성되었고 대한민국 역시 청해부대를 보내 참여했다. 이어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스라엘, 영국이 참여했다. 2019년 7월 10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하던 영국 유조선들을 향해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고속정 다수가 접근하자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 해군 소속 23형 호위함 HMS 몬트로스(Montros) 함이 적극적으로 고속정의 진로를 차단하는 나포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2021년 1월 4일, 한국 국적의 선박 MT 한국 케미호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나포 당하여 이란의 반다르아바스 항에 억류된 MT 한국 케미호 나포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계속 되는 이란의 위협 속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지 않고 아덴 만으로 통하는 페르시아만-아덴만 연결 운하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존재하고 있다. 호르무즈 곶을 관통하는 호르무즈 운하 구상도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구상에 그치고 있다. 현재 페르시아만의 여러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이 대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리학적 요충지로 여겨지고 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21척의 유조선이 해협을 통행하면서 약 1,7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35%,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에 육박하는 규모로 알려진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다면 전 세계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OPEC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이 40%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라크 18%, 쿠웨이트, UAE, 이란 각각 12%, 카타르 6% 순서로 뒤를 잇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 생산한 원유의 85%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시아 국가들로 수출되고 있다. 특히 전체 원유 생산량의 50% 가까이는 동아시아의 중국, 대한민국, 일본 3국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동북아시아 3국은 원유 등의 원자재를 수입한 이후, 정유, 화학 등의 각종 파생 산업으로 상당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업 강국이다. 따라서 자국 내 수요 대비 원유 공급이 매우 부족한 편이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원유를 수입하는 중동 국가들의 가장 큰 고객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은 원유 수입의 80% 가까이를 페르시아만의 유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란 의회가 봉쇄를 의결했다. 봉쇄의 최종 결정권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에 있지만 이는 절차 과정에 불과할 뿐, 실제 봉쇄는 시간 문제다. 봉쇄의 주체는 이란 해군, 이란 공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주축이 된다. 혁명수비대와 공군은 순항 미사일과 여러 가지 드론 전력을 이용해 유조선을 공격할 것이고, 이란 해군은 다수의 고속정들과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3척의 킬로급 잠수함을 주축으로 봉쇄를 시도할 것이다. 비무장 상선인 유조선의 특성상 유조선 나포 및 공격은 고속정들이 할 것이고, 군함에 대한 공격은 잠수함들이 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봉쇄의 형태에 대해서도 자국 영해기 때문에 전면적인 봉쇄가 아니라 형식상으로는 일상적인 주권 행사만으로도 봉쇄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군사훈련을 빌미로 민간 선박의 운행을 일시 금지한다거나, 적대국 선박이나 의심스러운 선박에 대한 해상 검문 같은 형태로도 단번에 원유 수송을 대폭 감소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게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되었다. 이란은 미국의 공격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IRIB는 이 방송에서 중동 지역의 미군 기지 10곳을 표시한 지도를 내보냈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성명을 통해 미군 기지 직접 공격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공습 대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직접 타격의 보복보다 미국과 동맹국들을 고생시키는 측으로 보복을 대신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 타격의 보복 가능성은 남아 있다. 보복 공습을 한다면 빠르면 내일, 늦으면 2~3일 뒤에 자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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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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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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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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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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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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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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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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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 일본의 남만무역(南蛮貿易)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기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행해졌던, 일본(日本) 상인과 남만인 혹은 난반진(南蛮人),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 이외에 명나라(明朝) 중국인, 유럽과 아시아의 혼혈인 간의 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남만무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예수회가 독점하여 관리하였다. 주 무역 품목들은 노예와 소총 화약 등이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대가 인도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의 선박은 인도양을 횡단하여 아시아 무역으로 진출하였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물품을 유럽으로 운반하는 일 이 외에도 동남아시아나 동아시아 권역 내 중계 무역을 시행하였다. 남만무역은 명(明)나라의 마카오(澳門, Macao)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 인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중요한 물품에는 일본 은(銀)과 중국의 생사(生絲)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에 한반도에서 회취법(灰吹法)이 전래되면서 은의 산출량이 증가하였고, 왜은(倭銀)이라 불리며 명나라나 포르투갈에서 이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세제 개혁으로 인해 은의 수요가 늘자 해금(海禁) 정책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 이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은으로 명나라의 생사를 구입하여 중일 중계무역을 하였다. 마카오 이외에 거점이 된 곳은 나가사키(長崎), 포르투갈 령의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말라카(Malacca), 스페인 령 필리핀(the Philippines) 마닐라(Manila)였다. 이 마닐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막부와 교역을 했다. 그러나 막부는 나가사키부교와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하여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는 제5차 쇄국령(鎖国令)을 발포하였고 포르투갈 인들을 추방하게 된다. 마카오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채를 변제하면 무역이 재개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채를 변제하는 은을 지닌 무역 재개의 탄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단교 이유는 부채가 아닌 금교였기 때문에, 사절단은 하급선원을 제외한 61명이 처형되어 돌려보내졌고, 무역은 재개되지 못하게 된다. 마카오 시에서는 무역 단절의 구제를 포르투갈령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마카오는 포르투갈령 인도 관할 외에서 자치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구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만무역은 종료되었다. 남만무역의 여명기에 사무 역에 종사하는 해상은 다수였다. 왜구에 참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로한오니(黒蕃鬼)로 불리는 흑인 용병이나 노예도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인에게는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insula)를 떠난 세파라딤 유대인도 다수였으며, 개종하여 예수회 수사가 된 유대인도 있었다. 고아에서 이단 심문소(Inquisitio)가 개설되자, 인도에서 마카오나 마닐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급증하여, 마카오 인구가 800명에서 5,000명 이상이 되었다. 예수회 수사는 남만무역 전반에 크게 관여하였으며, 일본에서의 발전에는 사비에르의 활동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남만무역 개시에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파견되는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의 장관이 되었다. 마카오 정주자가 늘어나자 현지 중국인이나 나가사키 일본인, 풍살합전(豊薩合戦)이나 규슈평정(九州平定)으로 노예가 된 일본인,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노예가 된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주민도 늘어났다. 혼혈 주민은 포르투갈 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마카오에 정주한 포르투갈 인은 카자두(casado, 포르투갈어로 “결혼한”)라고 칭해졌으며, 카자두 상인에 의한 자치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만다린(Mandarin)이라고 불린 중국 관리, 두 번째는 포르투갈 인 항해를 지원한 해상 안내인이나 수부인 해민(海民), 그리고 세 번째, 해적 선원이다. 만다린에는 아이타오(Aytao, 海道副使), 샤엔(Chaen, 察院), 투탕(Tutão, 都堂), 숨빈(Chumbin, 巡撫使), 로우티아(Lotia, 下級役人)가 있었다. 남만선이 내항하는 나가사키에 각지에서 상인이 모여 들었는데, 가장 많은 곳은 하카타(博多) 상인들이었다. 하카타 출신 상인 중에는 다이칸(代官)도 역임하면서 주인선무역(朱印船貿易)도 수행한 스에츠구 헤이조(末次平蔵)가 가장 번영한 사람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해운으로 일하는 자 외에도 후나야도(船宿)를 경영하는 초닌(町人)이 다수 있었다. 당초에는 포르투갈 인이나 토진(唐人)에게는 거류지가 없었고 나이초(内町)라는 지구의 후네야도에 숙박하여 후나야도의 주인의 보호를 받았다. 더구나 후나야도의 주인은 중개업자이기도 하여, 사시야도제(差宿制)에 따라 내항한 상인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장사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초닌에는 기리시탄이 많았으나, 에도막부 시대가 되면서 포르투갈 인에 대한 숙박업이나 중개업이 제한되었다. 더불어 포르투갈은 무역품을 크게 다섯 종류로 분류하여 운반하였다. ① 중국에서 일본 ② 일본에서 중국 ③ 중국에서 인도 ④ 인도에서 중국 ⑤ 동남아 각지 상품 ① 중국에서 일본 : 생사, 견직물, 금, 도자기, 초석, 생약, 설탕. 생사는 백사(白絲)와 연사(撚絲)가 있었다. 생약에는 대황(大黃), 감초(甘草), 산귀래(山歸來)가 있었다. ② 일본에서 중국 : 은(銀)이 주력상품. 이외에 유황, 일본도(日本刀), 남만칠기(南蛮漆器), 나전세공(螺鈿細工), 참치 등 해산물, 풍살합전이나 규슈평정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인, 임진왜란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노예가 있었다. ③ 중국에서 인도 : 생사, 견직물, 도자기, 금, 진유(真鍮), 사향(麝香), 생사 중 백사. 인도에서 소비되는 것과 인도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운반되는 것 ④ 인도에서 중국 : 은, 포도주, 올리브유. 인도은은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가져온 은이 다시 인도로 가져간 것이다. ⑤ 동남아시아 각지 산물 : 침향(沈香), 소목(蘇木), 주석, 납, 후추, 용뇌(龍腦), 정자(丁子, 클로브), 울금(鬱金), 녹비, 교피(鮫皮) 등 향신료가 많다. 이 외에도 호박, 수박, 옥수수, 감자, 밀가루, 카스텔라, 담배, 지구의, 안경, 군계(軍鷄) 등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출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지만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소, 돼지, 닭, 밀가루 등이 내항자 식용으로 만들어지도록 하고자 출항 전 소금 절임 등으로 선적되었다.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은 명목상 전부 포르투갈 왕실 사업이었으나 단독으로 인원과 배를 계속하는 것은 인구와 왕실 재정 규모로는 불가능하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1505년 인도양에 보낸 22척 선단에는 왕실 연 수익의 75% 이상 비용이 들었기에 이탈리아계나 독일계 상인 집단이 반액 이상을 투자하였다. 또한 배를 보내는 권리는 귀족이나 상인에게 유료로 양도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제노바 공화국(Genova Republic)의 산 조르조 은행(Banco de San Giorgio)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다. 또한 고객과 상업용 물품 리스크 관리를 위하여 복수의 사람들이 공동출자하는 콤파니아(Companha)나 고리의 해상대부(海上貸付, Emprestimo a risco)인 레스폰덴시아(Respondencia)가 행해졌다. 포르투갈은 카톨릭 국가로서 교회법에서는 우수라(Usura)에 의하여 고리가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카톨릭교도 사이에서는 해상 대부는 해상 보험 명목으로 취급되었다. 마카오에 부임한 벨쇼르 카르네이로(Belchior Carneiro) 사교는 자선원(慈善院, misericordia)를 설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 자선원에는 부자의 자금을 투자하거나 빈자의 희사로 운영하는 은행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리오(Rio)와 고아를 두고 원격으로 신용 태환 거래도 행해졌다. 마카오 자선원에서는 남만무역 항해 자금도 대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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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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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제2 도련선 돌파의 의미 :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흐르는 위기감
- 이미 배타적 경제수역 (EEZ, Exclusive Economic Zone) 같은건 무의미하게 됐다. 중공이 대만 포위 훈련 할때부터 일본의 베타적 경제수역은 허물어진거나 다름없다. 1951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가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제창한 전략 구상 도련선(島鏈, Island chain) 또한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중국 헤군사령관 류화칭(劉華淸)이 1980년대에 이를 ‘근해 적극방위전략’의 핵심 지역들을 자국의 해군 전략에 편입하여 미국이 설정한 제1도련선을 방어 경계선으로 공식화했다. 중국 근해인 제1 도련선과 좀 더 멀리있는 제2 도련선이 현재 미국이 설정한 대중국 방어선이다. 태평양의 섬들을 사슬처럼 이은 가상의 선이라 해서 도련선(島鏈線)인데 실질적으로는 중국 해군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뜻하기도 한다. 본래 중국은 제1 도련선 돌파에 이어 2020년까지 제2 도련선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2040년에는 미국의 태평양 독점 지배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미 제1 도련선은 의미가 없게 되었고 제2 도련선 또한 올해 6월,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중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 중국은 함대를 보내 이미 제2 도련선을 돌파해버렸다. 이 자체가 경악할만한 일인데 모두가 당시 중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그대로 묻혀져 버렸다. 중국이 미국에게 통보하고 미국과 함께 설정한 도련선은 미국이 발표한 2개지만 중국이 발표한 것은 3개다. 제1 도련선의 경우, 쿠릴 열도에서 시작해 일본, 류큐열도, 대만, 필리핀,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중국 본토 근해로 이루어져 있다. 제1 도련선은 대체로 주변 지역에 대한 완충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합병시킬 경우 제1 도련선이 완전히 완성에 이른다. 그러나 대만을 포위하는 훈련을 몇 차례 실시했었고 이에 대한 견제도 전무했기에 사실상 제1 도련선이 완성되고 해당 해안 일대가 중국에 넘어간거와 다름 없게 되었다. 제2 도련선의 경우, 외곽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시작으로 괌, 사이판, 파푸아뉴기니 근해에 이르며 이는 서태평양 연안 지대 전체를 이르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과 일본을 중국의 영향 아래 예속시킬 경우 제2 도련선이 완성된다는 입장인데 이번 달에 그 경계가 뚫렸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지정한 제3 도련선은 알류샨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뉴질랜드 일대를 활처럼 휘어 있는 선 형태를 말한다. 이는 서태평양 전역에 대한 장악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 선의 목적으로 본다면 최종적으로 미국과 태평양을 양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것은 제2 도련선까지로 여겨지는 데, 제3 도련선으로 넘어가면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놓고 발표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도련선 만으로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한 중국의 주도권은 확고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와 같은 도련선들은 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독립전쟁 이후, 태평양의 미국이 설정한 먼로 독트린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설정한 절대 방위선과 많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동아시아-서태평양에서의 중국의 영역과 중국식의 국제 질서 지역의 영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군사적인 입장으로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 동안 중국의 앞바다를 통제하여 압박하려던 것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이 말하는 도련선 전략은 동아시아 지역 내 국가들이 전부 중국과 협력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중국의 세력 확장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국가들이 많아 이와 같은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 항공모함 전단이 지난 6월 7~8일 처음으로 일본 동쪽 끝 서태평양 내부의 일명 '제2 도련선(The second island chain)' 지역을 넘어서 훈련을 벌였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중국 항공모함인 랴오닝함과 산둥함 전단이 일본 동쪽 끝 미나미토리시마 주변의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에 일본과 미국이 항의했지만 중국에서는 연례 계획에 따라 조직된 정기훈련으로 국제법 및 국제 관행을 준수하고 특정 국가나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도련선 확장 정책을 억제하기 위해 제1도련선 내 국가들에 전략 자산 배치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B-1B 전략폭격기를 지난 4월 일본에 전진 배치하는 등 각종 전략무기를 제1 도련선에 배치하려 한다고 검토했다. 미국은 유럽과 나토의 지원을 축소해서라도 중국의 해상능력을 봉쇄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도 돌파당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일대에 대한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특히 이같은 위기 상황에 대해 미국 측이 아닌 일본 해상자위대가 파악하고 알렸다는 것은 미국의 대 태평양 지역 감시 정보가 많이 약화되었음 시사한다. 보통의 태평양 전력이 강했을 시기의 미국이었다면 이 같은 사실은 즉각 보고 되어 함대를 출동시켜 견제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미국이 중동에 신경쓰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태평양 지역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 혹자는 미군이 이 지역에서 상시 주둔 대신, 필요시 신속히 전개할 수 있는 해군력(7함대)과 연합훈련,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모두 무력화 된 셈이다. 미군의 영향력은 상시 주둔 숫자가 아니라, 위기 시 신속 투입 능력,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첨단 정보 · 감시 · 정찰 자산, 해군력 운용 등 복합적 전략에 기반한다고 했다. 그런데 제2 도련선 돌파하며 중국의 항공모함들이 해상 훈련을 실시 할 때, 앞서 언급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한 내용들은 완전 무위로 돌아갔다.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따위도 없었고, 미국이 자랑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복합적 전략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이 관여하는 다른 지역들을 신경 쓰고 있을 때, 다른 관여 지역은 쉽게 뚫릴 수도 있다는 약점을 노출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전략적 실험(Strategic Experiment)"일 수도 있다. 미국이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으로 출몰했을 경우, 미국의 대응 능력을 살펴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해상 훈련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2 도련선까지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구축한 제2 도련선까지의 인도-태평양 연합 QUAD와 AUKUS의 연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의 실험이다. 일단 제2 도련선까지 가보고 이를 해상 훈련이라며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된다. 해상 훈련을 하면서 이들의 반응을 떠보고 해당 지역들의 정보도 취득하면서 여러 가지 모의 실험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돌아가서 여태까지 실험한 내용과 취득한 정보들을 모아 또 다른 전략을 세우거나 이미 세워져 있는 전략들을 대폭 수정할 것이다. 이를 구체화 한다면 이제 친중 국가들을 이용해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목을 환기 시킨 다음,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나라는 대만이고 그 다음이 한국과 일본, 혹은 필리핀 및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제2 도련선을 기준으로 해상 훈련을 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룬 셈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가장 유리해지고, 이득을 볼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1차적으로 아, 태 지역의 긴장이 풀어져 이번처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을 것이고, 2차적으로 이란에게 물자를 지원하며 벌이도 쏠쏠해질 것이며, 3차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예속화 과정의 심화와 더불어 일대일로의 확장은 더욱 가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해서 우리는 베트남과 일본, 러시아와 공조를 강화하고 많은 정보를 확보해 미국과 호주, 인도에까지 넘겨줘야 한다. 특히 다극화 시대로 가면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불편한 공생(Uncomfortable Coexistence)"을 하고 있는 격이지만 그 때 되면 서로를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러한 양상이 조금씩 보여지고 있다.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정치-외교적 관계 등을 보면 단순히 경제적 관계 만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서로 협조적이지만 이 둘은 결코 모든 면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국가들이다. 둘이 상호 견제 할 것을 대비해 러시아와 친해지면 여러 모로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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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제2 도련선 돌파의 의미 :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흐르는 위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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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 내일 30일부터 러시아에 입국하려면 사전에 입국 신청서와 함께 얼굴 사진 등 생체 정보를 모바일 앱에 등록해야 한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자국에 무비자로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의 등록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디지털 기술부는 러시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자료를 모바일로 제출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인 루아이디(ru ID)를 개발했다. 그러나 내년 6월 30일까지 1년 동안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기간으로, 입국 전에 반드시 제출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 제약이 따른다. 러시아 정부는 무비자 입국 외국인을 대상으로 입국 전에 생체정보를 입국 신청서와 더불어 '루아이디'를 통해 제출하도록 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작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 '러시아 연방 정부령 제1510호' 에 따른 것으로, 30일부터 1년 동안(2025년 6월 30일~2026년 6월 30일) 2단계 시범 사업으로 들어왔다. 시범 실시 단계에서는 입국 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 전송은 당연히 의무 사항이 아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여 입국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러시아 입국에 불허 사유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루아이디(ru ID)를 등록하지 않고 러시아에 입국하게 되면 휴대폰 심(SIM) 카드 발급과 외국인에게 개방된 러시아의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를 발급받는데 있어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외국에서 발급된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안 되기 때문에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 발급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제한이 생긴다면 카드에서 돈 인출이 막막해짐은 물론 로셀호즈은행(Россельхозбанк)과 가스프롬뱅크(Газпромбанк)에서 유니온페이 체크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또한 필자가 생활했던 작년까지는 가능했는데 올해는 이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루아이디(ru ID)를 통해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를 전송한 경우, 입국한다면 러시아 내에서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 휴대폰 심(SIM) 카드 구매를 위한 SNILS(사회보장번호와 유사) 발급이 가능해지고 러시아 정부의 공공서비스 이용 신청 등도 가능하다. 다만 여행객들에게는 심카드 외에는 공공서비스 이용은 필요가 없을 뿐이다. 입국 신고 및 생체 정보 등록은, 한국인 등 러시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국가의 국민이 루아이디 앱에 가입한 이후, 입국하기 72시간 전까지 출입국 날짜와 방문 목적, 개인 및 생체 정보 등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응급 치료 혹은 가족의 사망 등 긴급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입국 4시간 전 등록이 허용되고 있다. 등록해야 하는 생체 정보는 얼굴 사진, 여권 사진, 목소리 등으로 나타나며 등록을 마치면 입국 때 필요한 QR코드가 발급되게 되어 있다. 이는 미국 방문을 위해 사전에 전자여행허가(ESTA: Electronic System of Travel Authorization)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 보면 된다. 참고로 한국인이 미국을 방문하려면 2008년 11월 중순부터 인터넷에서 입국에 관한 간단한 등록 절차를 거쳐 ESTA (입국 허가)를 발급받으면 된다. 이와 같은 생체 정보 수집 대상에서 제외되는 외국인은 6세 미만의 아동과 러시아 주재 외교관, 영사관, 국제기구 직원, 벨라루스 국민 등이다. 그리고 입국할 때, 머물 도시, 호텔명, 호텔주소, 연락처 등이 명확해야 하고, 체류 목적, 날짜 등이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것이 불명확 할 때는 러시아 입국이 거부된다.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 입국 시 지문 날인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지문 날인은 입출국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제 러시아에서 사진 찍을 때 매우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관공서나 러시아의 인프라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나라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조치가 없었는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인프라에 자주 드론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지 않으면 임의동행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보통 일반 관광객인 경우, 대부분 경고를 받고 풀려난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기차역이나 선로, 그리고 화물열차를 찍으면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국은 러시아에서 비우호국가로 찍혔기 때문에 입국 심사 때 물어보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취해지는 똑같은 조치이니 한국인만이 표적 대상이 되었다고 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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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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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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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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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였다. 그레이트 게임은 현재 역사 용어가 아닌 정치 외교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는 183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말하기도 하면서 1905년 러일전쟁까지를 일컫기도 한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시아 남부 지역을 노리자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가운데 비롯되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1842년 1월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진격했다가 역습을 당해 패배하여 철수하는 도중에 군인과 가족 등 16,000명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와 같이 피를 흘리며 싸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말에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극동아시아가 너무 멀었고 이 때 극동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리전 상대로 일본이 나서게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맺어진 동맹인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호주를 식민지로 개척했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인도와 호주, 일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러시아 포위망을 형성했던 셈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러시아하고도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의 이상이 지난 지금,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인도, 영연방 국가인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쿼드(Quad)라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서방 나토 세력까지도 가세해 거대한 서구 연합이 생성되었다. 이 동맹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그 상대는 러시아였다. 그리고 여기에 새롭게 중국이 가세했으며 중립을 지키던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아프리카까지 러시아와 중국과 가까워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사우디아라비아 및 이란, 터키로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밀착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쿼드 동맹의 일원은 일본, 호주, 인도지만 최근 인도는 친러로 돌아섰다. 또다른 점은 포위의 대상이 원래 중국이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쿼드 동맹과 성명에서부터 제3차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2021년 9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 스콧 모리슨 총리가 첫 쿼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4명의 정상들은 연내에 대면 정상회담을 열고, 외교장관이 자주 소통하며 1년에 최소 1회 회담을 하기로 했다. 이 기구를 상설화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4개국 정상들은 회담 이후 성명에서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4국이 겉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공동 대응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인도에 코로나 백신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는 인구로 중국에 버금가는 13억의 인도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2020년 카슈미르 산악 지대에서 영토 분쟁에 있던 인도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인도는 미국의 힘을 업고 중국을 포위하는 한 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당시 성명에서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 전문가 누구든 이 4국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비공식 연합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성명에서 북한과 미얀마, 남중국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기 때문이다. 성명에 의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안에 부합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재확인한다고 하면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직접적 해결을 촉구하며 북한을 압박하기도 했다. 성명에서 나온 미얀마 관련된 것에서 미얀마 군부로 하여금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국제 해양법 준수를 촉구했다. 북한, 미얀마, 남중국해에 대한 문제의 거론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임을 시사했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 북한 정책 기조가 될 것임을 알렸다. 한국은 당시 중국과 쿼드 동맹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19세기 말 그레이트 게임 때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러시아까지 이 분쟁에 끼어들어 우리 한국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 그 때는 조선이란 나라 하나였지만 지금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확전되면서 1885년 4월 영국은 조선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고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일인 파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거문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외교고문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중립국론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묄렌도르프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와 같이 중립화 및 완충지대로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남쪽 바다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1885년 조선인으로 중립화론을 펼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兪吉濬)이었다. 당시 유길준은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길이라 주장했다. 당시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 · 프랑스 · 일본 · 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당시 청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절이었기에 조선의 중립화론은 청나라가 조선을 종속국 상태로 놓아두려 했었던데다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남겨두려 했었기 때문에 지식인의 주장 중 하나로 단순하게 인식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후,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 세력이 청나라를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했고, 해양 세력이 영국을 대신해 일본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외교, 군사적인 역량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두 세력이 1895년부터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으며 이는 적의 적에 붙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시 고종은 1897년에 환궁한 후에도 중립화론을 펼쳤으며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대로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가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바뀐 현재, 우리는 러시아, 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한반도는 이들 국가들의 지리적, 지정학적 요충지로 설정이 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해당 국가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살얼음판 위를 걷거나 아래에 온통 날카로운 못이 박힌 대지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거나 다름없는 형세인 것이다. 미국 주도의 쿼드 동맹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억제 전략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에 대한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러시아가 끼어들면서 달라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 중, 러 구도가 되고 한, 미, 일 구도로 굳어지고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동 사태들이 해결된 이후에는 그 또한 어찌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을 주도로 한 시아파, 사우디 주도의 수니파, 그리고 이스라엘이 버티는 중동 사태를 이후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나 국제정세란,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크게 변할 수 있는 변수가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국제관계의 예측은 50:50의 확률이다. 그 50% 확률의 국익을 하나라도 더 취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행동이 바로 외교(Diplomacy)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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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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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
- 호르무즈(Hormuz) 해협은 북서쪽의 페르시아 만과 남동쪽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만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북쪽에는 이란이 있고 남쪽에는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있다. 그러나 가장 좁은 곳의 폭은 54km이며 해협의 이름은 이란 측에 존재한 황무지 섬인 호르무즈 섬에서 유래했다. 본래 호르무즈, 혹은 오르무스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조로아스터교의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페르시아어로 '대추의 땅'이라는 뜻, 혹은 그리스어로 '만'이란 뜻이라는 설이 있다. 이 해협의 역사는 11세기 말, 호르무즈 섬은 케르만 셀주크(Kerman Seljuk) 및 살구르(Salgur) 왕조의 속령이었으며 무함마드 디람쿠(Muhammad Dyramqu)라는 인물이 호르무즈 왕국을 건국했다. 이어 13~14세기에는 몽골 일한국에 복속한 상태에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이어주는 교역의 거점으로 번영하기 시작한다. 15세기에는 호르무즈 왕국이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고, 명나라의 정화가 대항해를 할 당시 명나라 함대가 방문했다. 명나라 측 기록인 『성사승람(星槎勝覽)』에 의하면 호르무즈의 주민들은 매우 부유하고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507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크(Afonso de Albuquerque, 1453~1515)가 이끄는 포르투갈의 함대가 호르무즈 섬을 일시에 점령했고, 1515년에는 이 섬에 성채를 건설한 이후, 호르무즈 왕국을 완전히 포르투갈에 복속시켰다.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 제국이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다만 1622년에 이란 사파비 왕조의 샤한 샤 압바스 1세(Abbas I)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받아 3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호르무즈를 함락시키고 포르투갈 군을 몰아냈다. 당시 1세기 정도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던 호르무즈 왕국 역시 이 시기에 멸망했다. 한편 호르무즈 해협 남쪽에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 세력을 격파하고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오만 제국이 새로운 해상 강대국으로 대두했고, 해군에 큰 관심이 없던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오만 제국은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현대 시대에 이르러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이 지역에서는 일명 "유조선 전쟁"이라고 불리는 무차별 유조선 공격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이란이 봉쇄 위협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었기에 잘 부각 되지 않았지만, 이 당시 유조선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이라크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유조선과 정박지를 공격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면,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이 여기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생각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 이란은 고속정 전력을 기반으로 이라크에서 출항하는 유조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같은 후세인의 전략에 대응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은 1987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유조선을 보호하는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을 시작했다. 에르네스트 윌(Earnest will) 작전이 시작되자 미 해군 군함들이 유조선의 보호를 위해 해협에 투입되었으며, 1988년부터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미국 해군과 이란 해군 간의 해상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미 해군 순양함 CG-49 빈센스가 테헤란에서 이륙한 이란 항공 655편을 함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켜 승무원 포함 290명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유조선 전쟁은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2010년대 후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란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해협 인근을 통과하던 유조선들이 이란 군에 의해 피격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향해와 관련해서 미국 주도의 동맹군이 결성되었고 대한민국 역시 청해부대를 보내 참여했다. 이어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스라엘, 영국이 참여했다. 2019년 7월 10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하던 영국 유조선들을 향해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고속정 다수가 접근하자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 해군 소속 23형 호위함 HMS 몬트로스(Montros) 함이 적극적으로 고속정의 진로를 차단하는 나포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2021년 1월 4일, 한국 국적의 선박 MT 한국 케미호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나포 당하여 이란의 반다르아바스 항에 억류된 MT 한국 케미호 나포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계속 되는 이란의 위협 속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지 않고 아덴 만으로 통하는 페르시아만-아덴만 연결 운하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존재하고 있다. 호르무즈 곶을 관통하는 호르무즈 운하 구상도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구상에 그치고 있다. 현재 페르시아만의 여러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이 대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해로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리학적 요충지로 여겨지고 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21척의 유조선이 해협을 통행하면서 약 1,7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35%,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에 육박하는 규모로 알려진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다면 전 세계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OPEC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이 40%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라크 18%, 쿠웨이트, UAE, 이란 각각 12%, 카타르 6% 순서로 뒤를 잇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 생산한 원유의 85%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시아 국가들로 수출되고 있다. 특히 전체 원유 생산량의 50% 가까이는 동아시아의 중국, 대한민국, 일본 3국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동북아시아 3국은 원유 등의 원자재를 수입한 이후, 정유, 화학 등의 각종 파생 산업으로 상당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업 강국이다. 따라서 자국 내 수요 대비 원유 공급이 매우 부족한 편이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원유를 수입하는 중동 국가들의 가장 큰 고객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은 원유 수입의 80% 가까이를 페르시아만의 유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란 의회가 봉쇄를 의결했다. 봉쇄의 최종 결정권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에 있지만 이는 절차 과정에 불과할 뿐, 실제 봉쇄는 시간 문제다. 봉쇄의 주체는 이란 해군, 이란 공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주축이 된다. 혁명수비대와 공군은 순항 미사일과 여러 가지 드론 전력을 이용해 유조선을 공격할 것이고, 이란 해군은 다수의 고속정들과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3척의 킬로급 잠수함을 주축으로 봉쇄를 시도할 것이다. 비무장 상선인 유조선의 특성상 유조선 나포 및 공격은 고속정들이 할 것이고, 군함에 대한 공격은 잠수함들이 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봉쇄의 형태에 대해서도 자국 영해기 때문에 전면적인 봉쇄가 아니라 형식상으로는 일상적인 주권 행사만으로도 봉쇄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군사훈련을 빌미로 민간 선박의 운행을 일시 금지한다거나, 적대국 선박이나 의심스러운 선박에 대한 해상 검문 같은 형태로도 단번에 원유 수송을 대폭 감소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게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되었다. 이란은 미국의 공격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IRIB는 이 방송에서 중동 지역의 미군 기지 10곳을 표시한 지도를 내보냈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성명을 통해 미군 기지 직접 공격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공습 대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직접 타격의 보복보다 미국과 동맹국들을 고생시키는 측으로 보복을 대신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 타격의 보복 가능성은 남아 있다. 보복 공습을 한다면 빠르면 내일, 늦으면 2~3일 뒤에 자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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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내놓은 카드, 호르무즈 해협 봉쇄 : 호르무즈 해협의 역사와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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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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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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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
- 중국 시안을 출발한 이란행 열차는 2025년 5월 25일 이란의 물류 허브인 아프린(Afrin)에 도착했다. 이 열차 노선은 이란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일환으로 약 4,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2021년부터 합의 및 건설되어 왔던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 철도의 개설과 완공, 그리고 개통은 엄청난 유라시아 대륙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주도한 신(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됨을 의미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사아-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나아가는 교통이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비단이 북방 흉노와 돌궐의 영향권을 우회하여 서방으로 들어갔다면 현재는 중국의 산업재가 이제 미국의 모든 영향권, 군사 기지, 제재 통제를 우회하여 육로를 통해 이란으로 직접 운송된다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물자를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다. 과거의 이란은 페르시아였고, 페르시아는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도 로마, 중동, 인도, 멀리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멀리는 베트남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주요 환승 허브 역할을 했었던 고대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과 서를 연결하는 물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란은 현재, 중국과의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남쪽으로는 러시아, 카스피해, 인도를 통과하는 남북 회랑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 터키, 지중해로 이어지는 육로, 동쪽으로는 중국 공급망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육로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전유물로 세계를 지배해왔던 해상 교통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해협이 미국 또는 친미 세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륙 실크로드의 회생은 이들에게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로써 이란은 서구와 미국이 적극 제재하고 있는 물류적 고립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대륙 신실크로드의 연결 고리로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은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경제적 위협에 따른 일이다. 따라서 이란이 아시아 횡단 물류 체계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과거 실크로드 물류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함과 동시에, 이란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대륙 국가들과 밀착으로 인해 제어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은 단순히 핵 프로그램과 개발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란이 새로운 유라시아 체제의 물류 허브가 되어 충분히 힘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있다. 이란의 성장은 미국과 서구,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육상 실크로드 때도 그러했다. 과거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민족과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의 반골 기질을 억제하기 위해 헬레니즘 제국의 수도를 바빌론으로 정했다. 이는 페르시아의 발전을 막고, 페르시아가 누린 부(富)를 착취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제국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해 이들의 성장을 적극 방해했으며 신흥 이슬람 제국 또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 두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성장을 철저히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셀주크, 몽골의 일한국, 티무르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이란의 발전보다는 이란 영토 내의 막대한 자원을 탈취하여 이란의 성장을 억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조마저 성장을 억제하고 호메이니 정권에 막대한 경제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이란의 성장을 철저히 억압했다. 이란의 경제력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좋은 자원을 두고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란은 이와 같은 오랜 성장의 정체라는 한계를 벗어 나고 싶어한다. 오랜 제재 기간 동안 이란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서구의 제재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중국, 시리아, 소련, 북한과 손을 잡았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의 한계를 딛고 성장하려는 측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중국과 트랜스옥시아나 및 인도와 비단 무역을 매개하였던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실크로드라고 명명한지, 10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이란과 중국의 철도 연결과 그로 인한 물적, 인적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에서 시진핑은 실크로드 경제벨트(絲綢之路經濟帶) 구축에 관한 구상을 처음 발표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0일 보아오 포럼에서 리커창 총리는 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전략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 추진을 강조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중국은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20~30개국과 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면서 육상 실크로드 구축을 추진했다.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해상 실크로드 연계를 위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하면서 육지와 바다를 통해 유라시아 내 광역 네트워크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유라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중국에서 독일까지 운행하는 노선을 개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속철도의 일부로 카자흐스탄까지 잇는 고속열차를 개통하면서 대 중앙아시아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예멘, 탄자니아, 그리스 등 해상 루트의 주요 거점 국가를 대상으로 항구 건설 협력을 추진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대 실크로드 전략은 중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프라를 개선해주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들의 상당수를 중국이 가져갔다. 더불어 해당 국가들의 인프라 개선은 이들 국가들의 이득에도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일부 신흥국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실크로드 굴기에 대해 거부감이 크다. 우리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과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은 모두 중앙아시아와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지역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은 양자간의 조율과 여러 협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실크로드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한 투자 및 진출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적절한 경쟁과 견제를 하면서 한국만의 루트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첫 실크로드 고속열차가 대륙의 철도를 타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하면서 철도 네트워크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고속열차는 컨테이너 32개를 싣고 중국을 출발해 9,500㎞를 달려 종착역인 테헤란에 안착한 것이다. 이 열차는 무려 14일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투르크메니스탄 등을 통과했다. 이란 국영철도회사(RAI)는 실크로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다며 화물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30일이 더 단축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어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행정 중심부인 장사(长沙)에서 이란으로 가는 신규 화물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이 열차의 운행구간은 특히 중국 철도 간선망을 통과하며 호르고스, 카자흐스탄 볼라샥,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테헤란까지 운행되었다. 중국 장사에서 이란 테헤란 구간의 총 길이는 10,297㎞ 정도다. 역시 수송 기간은 14일이 소요되어 바다로 이용했을 시 소요되는 기간인 25-30일 보다 훨씬 빠르다. 이 화물열차에는 다양한 소비재가 들어간 40kg 컨테이너가 50개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서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 핵 합의와 제재 등으로 인해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란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이 유라시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어차피 중국과 경쟁하고 적절히 견제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중국은 물량에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질적인 부분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으로도 중국은 많이 향상되었기에 우리는 중국보다 질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자제 공급망 확보와 끊임없이 기술 개발을 해야한다.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과 신(新) 실크로드의 완성은 분명 우리에게는 적신호지만 북미나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득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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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 전에 발생했지만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묻힌 이란-중국 간의 철도 완공 및 개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