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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SMC ‘깜짝 실적’ 이후, 한국 반도체는 어디로 가야 하나
    TSMC가 AI 수요를 앞세워 2nm·7nm 이하 공정 비중을 급격히 늘리고, 미국이 CHIPS법을 통해 대만·한국 생산기지의 미국 이전을 압박하면서 한국 반도체는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공장과 국내 클러스터를 활용해 ‘TSMC 대체 파운드리’로 부상할 여지가 있지만, 기술 격차·비용 부담·역할 축소 리스크도 크다. 정부의 700조 원 K-반도체 투자 계획, 팹리스 생태계 강화, 국가 핵심공정 국내 유지 원칙 등이 구조 개편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 뉴스
    • 경제
    2026-01-17
  • 붉은 말의 해, 코스피 역대 최고 간다…상단 5,500 돌파 가능성
    2026년 ‘붉은 말의 해’를 맞은 한국 증시는 반도체 호황과 AI 수요 급증을 바탕으로 4,000선을 돌파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올해 코스피 상단을 5,500선까지 예상하며, 반도체·2차전지·AI 인프라 관련주의 상승 지속성을 주목한다. 다만 하반기엔 글로벌 변수로 변동성이 커질 수 있어 ‘압축 투자+수익 보호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 뉴스
    • 경제
    2026-01-02
  • 수주 랠리 탄 한국 조선업, 친환경·LNG선으로 2라운드 연다
    2024년 한국 조선업계는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등 주요 조선소가 연간 수주 목표를 조기 초과 달성하며 ‘수주 랠리’를 이어갔다. 중국이 전체 선박 수주의 71%를 가져가며 물량에서 압도했지만, 한국은 LNG·암모니아 등 고부가 친환경 선박에서 여전히 높은 경쟁력을 보였다. 수주 잔량이 3년치 이상 확보되면서 영업이익도 개선세를 보이고 있으며, 업계는 2025년 이후에도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선별 수주 전략과 한·미 해양·에너지 협력을 바탕으로 안정적 성장을 노리고 있다.
    • 뉴스
    • 경제
    2026-01-02
  • 삼성 10나노 D램 기술 중국 유출, 5조원 피해·국가 경제안보 직격탄
    삼성전자가 5년간 1조6천억 원을 투자해 개발한 10나노급 D램 국가핵심기술이 전직 임직원들에 의해 중국 창신메모리로 유출됐다. 600단계에 달하는 공정 레시피를 손으로 필사하는 등 치밀한 방식으로 핵심 기술이 이전됐고, 중국 업체는 이를 바탕으로 2023년 10나노 D램 양산에 성공했다. 검찰은 삼성의 2024년 매출 피해를 5조 원, 장기 피해를 수십조 원으로 추산했다. 이번 사건은 단순 기업 피해를 넘어 연간 수십조 원 규모의 국부 유출이자 K-반도체 초격차 전략의 근간을 흔드는 국가 경제안보 위기로, 핵심기술 보호 체계 전면 개편이 시급한 상황이다.
    • 뉴스
    • 경제
    2025-12-24
  • “인증번호는 XXXXX” 쿠팡 계정, 타오바오서 판매…AI 보안 전쟁 시동
    2025년 12월 15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에서 경찰이 실시한 6차 압수수색 결과,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단순 해킹이 아닌 실제 계정 거래로 이어진 정황이 드러났다. 중국 타오바오에서 쿠팡 계정이 인증번호까지 포함해 판매되며, 2차 인증도 무력화된 것으로 확인됐다. 네이버·카카오 계정도 무더기 거래되며 플랫폼 보안에 비상이 걸렸다. 김범석 의장은 국회 청문회에 불출석해 책임 회피 논란이 일었고, 보안 경쟁력이 ‘속도’보다 중요한 이커머스의 새 국면이 열리고 있다.
    • 뉴스
    • 경제
    2025-12-16
  • 통장에 모르는 돈 입금? '핑돈 사기' 통장묶기 주의보
    통장에 출처 모를 소액이 입금된 후 모든 계좌가 동결되는 '핑돈 사기'가 기승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 보호법(통사피법)을 악용해 무작위 계좌를 2~3개월 묶는 범죄로, 텔레그램 핑돈업자가 건당 30만원에 의뢰받는다. 2024년 2,500건 신고, 15억원 피해 추정. 자영업자는 사업 중단, 직장인은 생활 마비를 겪는다. 대처법은 즉시 은행 중재센터·경찰 신고, 협박 무시, 계좌번호 SNS 노출 금지다. 케이뱅크 즉시 해제 서비스 활용 권장. 통사피법 개정으로 검증 절차 강화 논의 중이다.
    • 뉴스
    • 사회
    2025-12-03
  • “한국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美 필리 조선소서 시작된다
    2025년 10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날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요청한 데 대한 즉각적 화답이다. 건조는 한화그룹이 인수한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미국 조선업 부활과 한미 군사협력 강화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양국은 6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3500억 달러 관세 인하 대가, 대규모 에너지 구매 등 경제적 합의도 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합의는 양국 군사·경제 동맹의 새로운 전기를 예고한다.
    • 뉴스
    • 지구촌
    2025-10-30
  • 캄보디아 ‘웬치’의 함정…한국인 납치·감금 실태 드러나
    2025년 들어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납치·감금 사례가 급증해 최소 34건 이상의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SNS 고수익 알바에 속아 출국한 청년들이 범죄조직에 감금되어 고문, 몸값 요구 등 피해를 입고 있다. 정부는 수사 TF를 구성하고 송환 조치를 추진 중이다.
    • 뉴스
    • 사회
    2025-10-14
  • ‘화성-20형’ 등장한 北 열병식…극초음속·다탄두 무기체계 공개로 핵전력 진화
    북한의 화성-20형 공개는 새로운 도발이라기보다 예고된 수순의 공식화다. 김정은 정권은 국제사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미국의 전략적 인내를 계산에 넣고 움직이고 있다. 이제 공은 다시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한국의 전략적 결단으로 넘어왔다. 군사적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외교적 해결은 현실적으로 더 어렵다. 이 모순 속에서 한반도는 다시 한 번 불안정한 평화의 경계 위에 서 있다.
    • 뉴스
    • 정치
    2025-10-11
  • 코스피, 사상 첫 3,500 돌파…9만전자·40만닉스 반도체 랠리
    2025년 10월 2일, 코스피가 사상 처음으로 3,500선을 돌파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9만전자’, ‘40만닉스’를 달성하며 증시를 견인했다. AI 열풍과 오픈AI와의 협력 소식이 반도체 투자 기대감을 높인 가운데, 코스피는 3,525.48에 개장하며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 뉴스
    • 경제
    2025-10-02

스포츠 검색결과

문화 검색결과

  • 전덕현 교수를 만나다
    아주 특별한 미용인, 전덕현 교수를 만나다 전덕현 교수는 우리 미용계의 소중한 보배다. 미용인 2세로서 미용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협회 지도자, 유명강사, 대학교수의 길을 걸을 때에도 미용인의 미래 청사진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일찍이 중국에 진출하여 한국 미용의 기술력을 드높이기도 했다. 이제 한국에 돌아와 제2의 미용인생을 설계하는 전덕현 교수를 찾아 한국미용에 대한 애정어린 생각을 들었다. <편집자주> 전덕현, 특별한 미용인 Trend & Classic 끊임없이 미용연구와 사색, 정진하는 미용철학, 미용에 대한 태도, 저를 표현하는 단어는 트랜드와 클래식입니다. 현장미용인으로서, 미용교수로, 미용협회 임원으로, 해외 진출 미용경영인으로 46년간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미용을 처음 접한 당시, 남성최초의 학사미용인으로(경희대 사학과 졸업)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 당시 금남의 직업인 것처럼 여겨져서 일반남성들은 생각지도 못한 미용인의 길을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쉽게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명동에 "장현경미용실"과 패션의 메카처럼 여겨졌던 이대입구에 "이화의집"이라는 미용실을 운영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두 곳의 미용실은 젊은 층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성공적인 미용실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잠재적인 "끼"와 고교시절 교복 나팔바지, 대학시절 청바지 등 남다른 패션 감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에서처럼 -두 갈래길이 숲속에서 나 있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덜 밟는 길을 택했고 그것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미용의 길은 처음에는 기술적인 숙련이 필요했기에 고생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바둑 당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잠자리에 누워서도 복기와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매일매일 머리속으로 두상 각도 층 커트 드라이 펌 등등 브레인스토밍의 연속이었습니다. 추억 속의 모멘트 몇 장면 추억의 몇 가지 중요장면을 살펴보면, 1980년 초 명동 장현경미용실에서 근무할 때, 연예인들의 집합소인 유지승미용실을 안부인사 겸 견학을 했는데, 이것은 첫 입문한 미용인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당시에는 타 미용실 방문이 그리 쉬운 편이 아니었던 시절입니다.) 1988년 대한미용사회중앙회 기술강사 2기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시 오정순 중앙회장님께서 세계적인 추세를 이야기하시면서 “미용이란 직업도 세계적으로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미용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로 한국에서도 남성미용가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회에서 많은 이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성미용인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미용계의 존경받는 어르신이 오정순 회장님이셨습니다. 커트 철학을 접하다-HEAD WAY 동희산 선생님{재미교포로 1990년 LA비달사순 아트디렉터}으로부터 커트의 과학적인 분석은 물론 디테일을 사사 받았습니다. 철학적인 개념이 HEAD WAY입니다. 그 당시 BOB단발스타일을 커트하는데 무려 1시간이 걸린다해서 무척이나 많은 문화적 쇼크를 받았습니다.(그 당시 컷은 10분 내외로 하는 것으로 알았던 시절입니다.) 또한, 한국의 소나무 청자곡선을 제시하면서 한국적인 곡선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셨으나, 그 당시에는 그리 가슴에 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스승의 그 제자로 지금은 Head WAY를 강조하고, 한국의 정서를 이야기하며 강의와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 Pivot Point 교육 Program을 새한화장품에서 도입했을 때 압구정동 전덕현미용학원도 같은 Program을 강의하였습니다. 그 당시 2가지 큰 쇼크를 받았는데, 미용의 교육 교재 제목이 Scientipic Approach to the Hair Sculpture(헤어 조형의 과학적인 접근)이었습니다. 2번째 놀란 것은 대인관계 기술이었습니다. 미용기술만 강조되었던 그 시절에 접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대단하였고, 그 당시에 미용실은 기술중심이라 접객의 중요성은 그리 강조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접객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많은 미용인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이 개념을 빨리 적용한 미용인은 성공적인 미용실을 경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미용최고지도자과정 주임교수로 10년간 봉사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성공한 미용실 원장님들이 한 기수에 사오십 명이 모여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시너지효과 집단지성의 면에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미용에 대한 철학 트랜드 & 클래식 태도 자세를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용협회 임원봉사는 강남미용협회 회장, 중앙회 기술분과 위원장, 부회장, 수석부회장으로 아시아 OMC부회장으로 선출되어 국제무대에서 많은 지도자와 교류를 갖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중국 진출과 활약 중국진출은 1988년 서울올림픽 시즌에 중국직항이 없었기에 홍콩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들어가서 만리장성에서 헤어쇼, 연길 TV초청 미용세미나 헤어쇼를 개최하였는데 그게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한중국교전은 첫 중국세미나 쇼였기 때문에 많은 매스컴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9년 중국미용협회 주최 ’21세기 중국미용발전 방안 세미나‘에서 주 강사로 초빙되었고, 많은 중국 미용인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때 인연으로 20여 년간 중국미용협회 자문위원 위촉을 받았습니다. 2002년 북경 대종호텔 회장님의 중국진출 요청으로 전덕현미용실을 개설하였고, 그 후 중국 전국 세미나 강사로 중국미용협회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미용 연재도 하였습니다. 또한 외국인 최초로 중국미용잡지 표지모델( COVER STORY)로 선정되었으며, 공로상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천진시 대학의 종합미용학과 등에서 초빙받아 특별세미나를 하였습니다. ‘땔감은 떨어져도 불씨는 살려라'라는 속담이 있듯 아직도 중국미용시장은 한국미용인에게는 큰 시장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중국미용협회 창립 25주년 특별공로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외국인 미용인 3명 중 1인(하종순 회장님, 일중우호협회 회장님, 전덕현)에 해당하는 영광입니다. 북경 10대 건축물인 SOHO WANGJING(동대문DDP 설계자-자하 하디드, 미래주의 건축물 설계자)에 미용실을 개설하였는데, 한국적인 인테리어, 한국적인 서비스로 한국미용 기술의 우수성을 알려 젊은이들의 Hot place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헤어케어시스템 머리영양에 대한 개념이 약한 중국미용실과 대조되는, 효과가 오래 지속되는 영양을 하여 인기가 좋았습니다. 국내 귀국 고향은 언제나 좋은 곳입니다. 다만 코로나 펜데믹을 거치면서 많은 미용실들이 경제적으로 위축되고 세미나도 축소되고 공부하는 그룹들의 분위기가 다운된 것은 너무나 아쉽습니다. 미용실의 불황 해결방법은 미용기술의 향상밖에 없습니다. Trend와 Clasic의 철학적 배경의 이해 K-Wave 한류가 세계의 Trend의 중심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손흥민 현상-손흥민의 발리슛에서 그동안의 훈련의 결과인 기본 classic을 읽을 수 있고요, GD드래곤의 콘서트에서 K-POP의 위력과 Fashion을 느끼며 Trend를 읽습니다. 이 두 개념의 결합-얼마나 많은 창작과 창의성을 위한 노력의 결과인가라고 생각합니다. 미용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더 훈련하고 연마한 기초 Classic Basic 위에 Fashion-Trend 연구가 꼭 필요합니다. 미용실이 발전 성장하기 위해서는 Trend와 Classic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새롭게 업그레이드 해야 합니다. 고객이 우리 숍에 오지 않으면 받지 못하는 특별한 Service 메뉴를 만들어야 합니다. 차별화된 고품격 Service만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객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세련된 미‘를 찾아 방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부터 세련미로 무장 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고객을 안심시킬 수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배우며 행복한 미용인이 되자 박진영은 K-POP의 선구자로 대중문화 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장관급)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 취임 일성은 정말 대단합니다. 존경할만합니다. 그의 목표 비젼은, “첫째 K-팝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것, 둘째 후배 아티스트들이 더 좋은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입니다. 너무나 멋진 위원장으로서의 포부입니다. 우리 미용계도 박진영 위원장 같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아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제도적 장치로 K-Beauty 확산을 위해 K-뷰티진흥법, K-뷰티진흥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서 법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한식진흥법-한식진흥원은 이미 10여 년 전 설립된 바 있습니다. 한식의 세계화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미용인의 정치 참여도를 적극적으로 높여 국회의원과 정부를 설득하여 정치적인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이 자신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겠습니까. 네팔 청년의 다음과 같은 외침,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절망의 어둠 속에 가라앉을 것인가, 아니면 희망의 태양처럼 떠오를 것인가.“ 이 말을 가슴속에 새기고 역사의 길 위에 변화의 기념비를 세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미용인이 "진, 선, 미"와 더불어 미덕, 품위, 품격을 고객과 함께 누리면서 행복한 미용과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 전국의 많은 미용인들은 물론 특히 ’뷰티라이프사랑모임‘ 가족들과 그동안 못다 한 교류를 더욱 강화하여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문화
    • 인터뷰
    2025-09-23

칼럼 검색결과

  • AI 로봇, 제조업을 삼키다: 사람 대신 로봇이 일하는 시대
    한국 제조업 현장에 AI 기반 휴머노이드 로봇이 본격 투입되며 ‘피지컬 AI’ 산업이 급성장 중이다. 현대차 계열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를 비롯해 삼성SDS의 AI 에이전트 등 다양한 형태의 로봇이 업무 자동화와 생산성 향상을 이끌고 있다. 실제 조선소와 제철소에서는 AI 로봇이 위험한 작업을 대신 수행하며 작업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고, 공공부문에서도 일상 업무의 67%가 절감되는 효과가 입증되었다. 향후 5년 내 로봇 도입비가 인건비보다 낮아질 것으로 전망되며, 중국의 저가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협력이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 칼럼
    • GG포럼
    2026-01-09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2-31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 칼럼
    • Nova Topos
    2025-12-10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2-08
  • 분노 미끼, 클릭의 유혹인가 사회적 중독인가?"
    최근 ‘rage bait(분노 미끼)’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유행어로 부상하고 있다. ‘분노 미끼(Rage bait)’는 의도적으로 분노를 유발하는 콘텐츠로, 클릭과 조회수, 댓글 유도를 목표로 하는 디지털 상의 상업 전략이다. SNS, 정치 유튜브, 커뮤니티 등에서 분노 콘텐츠는 긍정 콘텐츠보다 더 널리 퍼지고 더 오래 소비된다. 특히 정치적 이슈에선 ‘분노 미끼’가 갈등과 혐오를 증폭시켜 사회적 극단화를 조장하고 있다. 언론들은 이러한 현상이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해치며, 이용자들은 알고리즘에 휘둘리는 정보 소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한다.
    • 칼럼
    • GG포럼
    2025-12-05
  • 서안을 가다(3) 천하제일산의 장관을 마주하다
    서안 화산은 ‘기험천하제일산’이라는 명성처럼 압도적인 절경을 품고 있었다. 서봉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가며 본 아찔한 높이와 화강암 바위 능선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했다. 정상의 도교 사원과 붉은 띠, 산 능선을 가득 메운 인파가 화산의 독특한 분위기를 더했다. 하산 후 찾은 서안 도심은 전동차가 빼곡한 거리, 웅장한 종루, 북적이는 회족 거리로 이어졌다. 자연의 웅장함과 도시의 생동감이 공존한 하루였다.
    • 칼럼
    2025-12-03
  • 중-일 정상회담 이후 중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중일 정상회담 이후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이 중국의 ‘레드라인’을 건드리면서 양국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중국은 한일령, 일본산 수산물 수입 중단, 상임이사국 저지 등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일본은 강경 기조를 유지하지만 내각 내 친중 인사 부재와 보수층 결집 전략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관계 회복은 당분간 어려우며 한국은 중립적·실용적 균형 외교가 요구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26
  • 국제 정치의 속성과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한민국
    국제 정치의 속성과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한민국 한국인들 상당수를 보면 전쟁에 대해 많은 감성과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총에 맞아 머리 터져 죽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날 밤에 그 죽은 사람이 얼굴이 떠오르고 계속 그것이 파노라마처럼 되뇌어서 돌아다닌다. 그것을 벗어나면 평소와 같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밤마다 꿈속에서 나오고 결국 불면증 때문에 폐인이 된다. 이 사람들은 그 트라우마가 오랜 세월이 지나며 사라질 수는 있겠지만 천둥만 치면 총이나 포를 쏘는 소리인 줄 알고 깜짝 깜짝 놀란다. 천둥이 바로 트리거가 되어 아직 심리적으로 잔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죽을 때까지 갖고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한다. 전쟁이 터지면 많은 인명이 죽는 것은 당연한거고 인권유린, 전쟁범죄,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것, 끝도 없이 악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인거다. 거기에서 국제법 등을 다 지켜가며 인간적 다 따져가며 하는 전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가 했든, 그런거 하나 하나 다 지켜가며 하는 전쟁이 있던가? 전쟁 자체가 비도덕적이고 인권 유린인데 젊은 군인의 목숨과 약자 및 민간인들의 목숨,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의 목숨은 공평하게 1개 밖에 없고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목숨이 없다. 그 안에 고결한 도덕을 따지는 이상론들은 그저 상대방을 더 나쁘게 비난하는 선전도구이자 국제 정치적, 외교적으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장치일 뿐, 아무 의미없다. 전쟁이란, 터지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다하기 때문에 성역도 없고 도덕도 없고 서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만 있다. 그래서 전쟁은 늘 최후의 수단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인권 유린이니 전쟁 범죄니, 도덕성, 불쌍하다는 감성 따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어제 내가 러시아에서 일본에 제기한 사할린 학살, 중국이 오키나와에 원주민 언급한 것 등은 각 국가들끼리의 정치적 기싸움이다. 그러더가 선도 넘는 것이고, 관계도 악화되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전쟁에 돌입하지 않는다. 하는 척, 긴장감만 올려 놓고, 각자 자국의 국내, 외적인 정치적 수사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거나 상대를 견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내가 됐든, 국제가 됐든, 관계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발언들을 자주 하여 국제적으로 상대를 자극한다는 것은 국내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를 외부로 환기시키며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마찬가지다. 그의 정치적 권력 기반은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다. 게다가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핸디캡이 있다. 일본 사회는 다들 잘 알다시피, 여성에게 그리 좋은 사회는 아니다. 무엇보다 정치권은 매우 보수적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총리가 되었으며 총리로써 권력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단합된 질서가 필요하다. 일본 국내의 권력 구도와 질서 확립은 그녀가 뭔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튼튼한 기반이 된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약점은 그런 기반이 불안정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려면 그녀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는 "단합된 질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확고한 도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안보 문제"다. 물론 미국이 원한 것일수도 있을 것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을 계속 자극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에서 어제 강경발언을 했어도 이전 총리들에 비해 그 강도는 약했다. 그 이유는 사할린에 가스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게는 적당히 그 발언을 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러시아 또한 지금까지 하는 것으로 봐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 그러면 만만한 나라가 어디일까? 바로 중국이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의 역린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다카이치 총리가 모를리 없다. 그러나 그녀의 국내에서의 취약한 입지 등을 생각한다면 그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 가장 큰 한 방이라 볼 수 있다. 그 역린을 건드리면서 중국이 발끈하면 그녀는 일본 내 국민들과 정치권, 군권 등의 단결을 요구하게 되고, 이렇게 단결된 힘은 그녀의 정치권력 구축에 큰 원동력이 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중국에 대놓고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도전하는 미친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도 중국에 희토류에 약점이 잡혀 있다. 적당히 수위조절하면서 긴장감을 불어 넣어주고, 그로 인해 일본 내 그녀의 정치 권력의 입지가 단단해지면 그 때부터 관계 개선하는 측면으로 손을 내밀 가능성이 크다. 중국도 당장에 발끈하겠지만 이같은 다카이치 총리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상대의 발끈을 유도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입지를 안정적으로 만들면 그때부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손을 잡는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준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적당한 기만(Deceiver)과 위선(Hypocrisy)이 서로 윈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정치는 절대로 순수하게 보거나 접근하면 안 된다. 한국에게 부족한 것은 어줍잖은 순수함으로 접근한다는 것인데 국제 정치에서 그렇게 접근했다가는 조선처럼 되고 말 것이다. 세계 역사와 국제 정치, 외교를 평생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나쁜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는 것이다. 세계 각 국의 지도자들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사진 :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국제정치, 일본, 대한민국, 중국,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정치, 국제정치의 속성, 하나의 중국, 러시아,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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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 최근 일본-중국 간의 외교 신경전을 두고, 필요한 것은 한국의 중립성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외교적 중립성이라는 것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 같다.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대만 유사시 자위대를 활용할 수 있다고 발언하자, 중국 오사카 총영사 쉬첸이 "다카이치의 목을 베겠다"고 했다. 이는 일본이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는 역린을 범한 것이고, 최악의 외교적 결례를 일본이 먼저했다. 이는 내가 러시아를 편들고 있기 때문에 중국 편을 드는게 아니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쪽을 판단한 것이다. 일본이 무엇이건데 대만의 유사시에 자위대를 활용할 것이라는지, 국제적인 인식 및 대만에 관한 국제법으로도 대만은 엄연히 중국과 한 몸이다. 대만과 중화민국으로 수교한 국가도 몇 없으니 대만을 국가로 인정한 나라도 몇 없다. 공식석상에서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는 올라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고, 대만 국가인 중화민국국가(中華民國國歌) 또한 공식적으로 부를 수 없다. 또한 대만은 해외에 대사관, 영사관을 둘 수 없고, 대신 대표부를 두는 것 정도만 허용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게 한 내정간섭이고 권리침해다. 미국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고 있는데, 일본이 무엇이건데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거스르고,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발언을 하는 것인가? 외교관이 타국 총리를 참수하겠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은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은 맞지만 이는 일본이 넘어서 안 되는 레드라인을 넘어 먼저 도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카이치를 편들어 애써 중국의 발언을 같이 비판할 필요는 없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미국도 넘지 않는 선을 일본이 넘었다. 다카이치는 중국의 대만 해상봉쇄 시, 일본이 존립사태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명확히 밝혔는데 이는 대만을 잃으면 오키나와가 사정권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대만을 지키기 위해 중국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일본은 이중적인 입장을 버려야 한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존립사태위기에 직면했다며 대만 유사시 자위대를 동원한다는 것이다. 정말 중국과 겨루고 싶다면 다카이치는 "하나의 중국"은 위법이니 이를 깨고, 대만을 지키겠다고 정식으로 나서며 해상 자위대를 펑후 일대까지 파견하여 포를 진먼으로 돌려야 한다. 그런데 다카이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액션도 하지 않았다. 이는 일종의 블러핑 수준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청나라를 깨부순 청일전쟁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과거의 청나라가 아니다. 청나라 수준의 무력을 지닌 국가였다면 서구 세력이 이미 20세기 초처럼 중국을 잠식했어야 맞다. 그런데 지금 서구 세력이 중국 어딘가를 잠식하고 있는가? 중국에 남아 있는 서구의 식민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 한국 보수 진영들의 수준은 1894년, 즉 130년 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총영사의 참수 발언은 그가 히스테리를 부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국" 원칙을 침해한 역린을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 타이폰 미사일 시스템이 일본에 배치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극동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며 "가혹한 보복"을 천명했다. 미국 타이폰 미사일 시스템은 9월 11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미국-일본 합동 군사 훈련의 틀 내에서 미국 이와쿠니 군사 기지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아직 철수하지 않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을 포함한 중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지상 이동식 발사 시스템이다. 토마호크는 러시아와 미국 모두 2019년에 철수한 역사적인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에 따라 금지되었던 무기다. 이를 발사할 수 있는 발사대인 타이푼 시스템이 이와쿠니에 설치되었다면 사할린 지역에 러시아의 핵무기를 배치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전쟁의 긴장을 불어넣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이다. 그리고 중국은 희토류를 쥐고 있다는 것을 다들 엄청나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미국과의 관세전쟁에서 중국이 쥐고 있는 희토류 목줄을 풀어준 것은 미국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대두 한 번 사주고, 희토류 수출은 유예했을 뿐이고, 미국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펜타닐 관세만 낮춰줬을 뿐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중국이 기술패권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 여전히 중국제가 수출되고 있고, 공장이 풀 가동되어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무슨 기술 패권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하는가? AI 기술 또한 중국이 미국을 앞서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미 AI 기술은 중국이 미국을 넘어선지 꽤 됐다. 그런데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도 최악인 시기를 겪었던 90년대에는 미국처럼 셧다운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의 셧다운에 대해 보수 진영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이는 자신들이 우상처럼 여겨왔던 미국의 위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고, 그것을 언급하면 자신들이 불리하기에 감추는 것이다. 셧다운이 종료되면 그때서야 언급할 것이다. 미국은 셧다운을 극복한 역시 초강대국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진정한 초강대국은 셧다운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셧다운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극복하는 것 자체가 자랑이 아니다. 정부 시스템이 올 스톱 된 것을 극복한게 무슨 자랑으로 여기는 것인가? 이는 그만큼 미국 내정이 혼란스럽다는 증거다. 그리고 일본이 강경노선으로 돌아서니 중국이 공포에 질렀다고 주장들 하던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관을 시켜 협박 발언을 내뱉게했다고 하는데 한국의 보수 진영은 남의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쓰는 자들이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중국은 홍콩의 주권을 빼앗았다>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홍콩은 단 한 번도 주권 국가인적이 없는데 무슨 주권을 뺏나? 1997년 반환 이전에는 영국령 홍콩이었고,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다소 기형적 조건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조건부 공존하는 체제다. 즉, 중공령인데 그 안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국양제(一國兩制)는 홍콩과 마카오, 현재 두 곳을 갖고 있다. 이어 중국은 대만을 속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만 정부를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속국으로 인식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중국"으로 여기고 있는데 무슨 "속국"으로 인식하는지, 대만이 주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럼 전 세계에 대만을 인정하는 국가가 왜 없는지, 그리고 왜 중화민국 대사관이라는 이름이 없고 타이베이 대표부라 이름이 붙여져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UN에 정식국가로 왜 등록이 안 되어 있는지 설명해 볼 것이며 왜 미국이 "하나의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아마 한 명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 유사시에 한국은 중립이 최선이다. 지금 중국은 청나라 말기와 다르며 제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물량공세는 이기지 못한다. 원자재로 재가공하여 물건 팔아먹는 국가들이 무슨 수로 무한정 원자재를 캐내는나라를 이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란이 이스라엘 텔아비브 폭격할 때,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에로우시스템, 페트리어트 모두 방어에 실패했다. 예를 들어 10개 중에서 7개가 명중했지만 3개는 놓쳤다. 그런데 그 3개가 텔아비브에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텔아비브 공습 영상과 도시의 초토화 된 사진을 보면 그 피해의 참상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어떻게 그 물량을 다 막을 수 있느냐, 70% 요격률도 대단하다 하면서 정신승리를 하는데 이스라엘에 설치해 놓은 시스템이면 다 막아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이언돔도 안심하지 못해 에로우시스템과 페트리어트까지 구비해놨다는 것은 100%의 요격을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30%가 뚫렸다는 것은 나중에 1,000개 이상의 드론 포함 미사일 보내면 적어도 300개는 낙하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폭발성이 준핵폭탄 급으로 고농축 우라늄이 탑재된 포탄을 탑재할 수 있다면 다 막지 못해서 요격에 실패한 1~2개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양산해낼 수 있다. 왜 이것을 생각하지 못할까? 시기적으로 현재 구한말과 비슷한 형태라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때의 청나라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중국, 북한과 최전선에 있다. 대만과의 분쟁에 참여할 경우, 북한군이 휴전선에 공격 대형을 펼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의 군대가 대만으로 간 틈에 북한군이 공격해 내려오면 감당할 수 있나? 그러니 외교적으로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게 좋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은 대만 유사시 중립이 최선이다. 사진 : 중국-대만-일본의 외교전이 치열해지고 있다. 출처 : Yahoo! JAPAN 중국, 대만, 타이완, 일본, 중국-일본 외교전, 다카이치 사나에, 하나의 중국, 대만 유사시, 일본 자위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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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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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 이스탄불의 전쟁 난민과 전쟁에 대해 무식한 대한민국 극우 노인들의 호전성
    몇 년전 터키 이스탄불 뒷골목의 이라크 난민 여성을 본적 있다. 젖먹이를 안고 바람 안 들어오며 그나마 따뜻한 뒷골목의 한 켠에서 먹고 잔다. 당시 또한 겨울 때인데 비록 이스탄불의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진 않지만 그래도 꽤 쌀쌀한 편이다. 이는 에게 해와 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차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집단 서방과 미국이 석유를 훔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IS를 발생시켜 나라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이 난민들은 이라크나 시리아 측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다. 이스탄불 뒷골목에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터키 내 난민들 안 받아들이면 집단 서방과 미국이 제재하겠다고 협박하자 경제력이 바닥 상태인데다 미국의 경제 제재까지 받고 있는 터키는 울며겨자 먹기로 난민들을 받아들인 꼬라지가 이것이다. 난민은 서구 놈들이 발생시켜 놓고 터키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니 터키 입장에서는 억울할만도 하다. 이 난민 여성에게 터키어로 물어보니 터키어는 전혀 모르고 영어도 못한다. 할 줄 아는 영어는 Give me Money, Thank you, I from Iraq 가 전부다. 일단 아랍어로 대화를 시도해봤다. 나도 아랍어는 대학시절 때 공부했고 지금에야 쓸 일이 많이 없어 Speaking은 많이 잊어 먹었지만 Listening 은 가능하다. 이 여성의 남편은 모술에서 미군이 설치한 부비트렙에 걸려 폭사했고 부모님도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떠내려온 지뢰를 밟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여성은 젖먹이 된 딸, 그리고 이제 4살 된 쌍둥이 딸과 함께 터키 가지안테프에 왔다. 터키 정부가 난민들에게 집을 나눠줬지만 당시 터키 동부 가지안테프 대지진 때 그 집마저 붕괴되고 쌍둥이 딸 하나는 무너진 집 벽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딸과 함께 이스탄불로 와서 젖먹이 딸은 얼마 나오지 않은 모유를 짜서 준다.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 420만 명이 살고 있는 터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다. 이들 중 약 10%만이 난민수용소에, 나머지 90%는 자신이 머물 집을 구해 살고 있다. 그런데 터키는 비유럽 국가 출신 난민에게 적용되는 1951년 제네바 난민 협약의 당사국이 아니다. 따라서 터키는 난민들에게 일시적 보호책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월부터 터키는 노동 시장을 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난민들의 노동시장 진입엔 엄격한 제한이 따른다. 특히 기업이 고용할 수 있는 난민의 수를 종업원 수의 10%로 제한했다. 한편 기업은 난민을 고용해도 고용 당국에 고용 사실을 신고할 유인이 없다. 당국에 이를 신고하면 난민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하고 당국에는 그에 따른 각종 사회 보장 부담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도 한국에서는 전쟁을 우습게 여기고 호전성을 가진 자들이 천지다. 전쟁은 이렇게 서러운 것이다. 전쟁을 서든어택 같은 온라인 게임으로만 접한 한국인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모른다. 전쟁은, 누군가 공격으로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 자연재해도 함께 동반되어 온다. 그것이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어쨌든 온다. 보수우파 노인들 중에서 우리가 중국과 가까운만큼 선제 타격이 가능하다는 꿈에서 나올 헛소리를 하는 자도 있다. 중국과 면해 있는 서해안, 대부분 수도권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중국에서 쏘아대는 엄청난 물량의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직접 받아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국민들이 저와 같은 꼴이 안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이 6~70대나 먹고 호기롭게 헛소리를 하는 자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선동하면 그만이지만 도망갈 형편이 안 되는 국민들은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이럴 것이다. "빨갱이들을 잡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빨갱이 OUT!" 그러면서 큰일을 위해 나와 상관없는 이웃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 선동은 나팔수처럼 하고 실제로 실행할 어떠한 액션도 몸만 사리며 입으로는 금방 죽이고 척결할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런 자들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는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들만큼 파시즘스럽고. 전체주의화 되어 있는 집단은 없다. 그런 자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히틀러보다 더한 독재를 하게 될 것이다. 정말 우리가 배척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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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7
  • 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일본의 대만 지배에 있어 대만 초대 총독은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그는 가고시마 출신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갑오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현역 해군대장으로서 대만 총독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타이베이 부임한해 만인 1896년 본국 마쓰가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귀임하게 된다.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마구치 하기죠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죠슈벌(長州伐)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독 제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육군 차관으로 본국에 귀환한 그는 1898년에는 다시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 뒤로도 출세가도를 타고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총리대신 재임 중의 일이다. 다음으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갑오전쟁 당시 여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그는 육군 중장이라는 현역의 신분으로 1년 6개월 동안 대만 총독을 지내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총독에서 물러난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운명하자 부인과 함께 천황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도 야마구치 태생의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육군 참모본부 국장과 육군대학 교장을 지내면서 가쓰라 타로에 이어 일본군에 독일식 전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타이베이에 부임하자마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 규칙을 마련해 본격적인 토지 징탈을 시작하게 된다. 동양토지회사도 이 때 설립 되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재배되었던 쌀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지룽(基隆), 가오슝(高雄) 등 항구의 축항공사도 시작되었다. 북쪽의 타이베이와 남쪽 항구도시인 타이난을 잇는 종단철도가 완공된 것도 그의 재임 때였다. 이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직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고다마 총독은 특히 민정장관에 고토 신페이를 임명함으로써 철저한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그 뒤 만철 총재, 내무대신, 외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를 픙미했던 주인공이 고토였다. 제5대 총독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도 야마구치 태생의 죠슈번 계보에 속한다. 일본 정계와 군벌에서 “죠슈와 사쓰마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만큼 죠슈벌과 사쓰마벌이 요직을 두루 나눠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역대 군벌출신 중에서도 도쿄 위수총독이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지녔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을 때 그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대시위가 일어나자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의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서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재임 기간이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리산의 울울창창한 열대 삼림에 대한 본격 채벌이 시작된 것이 사쿠마 총독 때의 일이다. 현재 타이베이에 남아 있는 총독부 청사도 이 때에 비로소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총독을 거쳐 제7대 총독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조선총독부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일전쟁 직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이상이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가 문관통치로 바뀌기 전의 총독들이다. 일본 식민지 정책의 큰 흐름은 조선이나 대만에나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했다. 그리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실력 양성 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일본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85%,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10%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중화권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대만인들에게 있어 일본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로 조사되었다. 이전인 2017년 조사에서조차도 호감 83%, 비호감 12%에서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외성인들 차원에서 볼 때, 일본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낮은 편인데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 사건 등 사람이 대량 학살당하고 매번 패전하여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 대만은 중일전쟁을 치룬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본성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만이 일본에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피해국이라는 행태에 동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선을 긋고 있다. 다만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국민당 리덩후이 정권 시절과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정권은 좀 더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긴 했다. 특히 리덩후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여 해서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하여 대만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71년 UN 상임이사국을 중공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축출하는 안에 대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자유 진영 국가들도 대만을 배신하고 중공 편에 서주는 와중에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만의 UN 탈퇴 후에는 일본은 중공과 수교를 맺었으며 이 중일수교 직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대만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대만과 일본 양국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베 총리가 직접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였다.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일본에 물자 지원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성금 약 200억 엔을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 정부의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 2010년대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만은 사실 여부를 떠나 태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타이베이 쑹산 초등학교 앞에 가면 '도호쿠 구호 감사 겸 쯔위궁 350주년 축하 시계탑'이 존재하고 있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정치, 외교적으로 이용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국 포위망에 한 축을 구축했었다. 2018년 2월,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중국의 시진핑이 화해의 제스처로 구조대를 보내려 했는데 대만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구조대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은 대만에 위로를 보내는 친필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24년 12월에는 일본과 대만이 대만 유사시를 염두에 두고 대만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 정보 공유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17일, 일본 정부가 호적에 대만을 표기하는 것을 5월부터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라고 오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발표했다. 다카이치는 대만 유사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놓고 정면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는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권리가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자위대가 출동하여 무력행사 가능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역대 근현대사에서 중국은 일본을 이긴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청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청나라가 붕괴되고 군벌 분열시대와 이념 분열시대에 휩쓸린 중국이 통일되고 부유하며 안정적인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중국은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나라이고, 전쟁 무기들을 물량으로 계속 찍어내고 있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도 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은 굳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 압박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중국의 원자재, 특히 희토류의 주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중국 희토류 수출 통제에 큰 타격을 받은 후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도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일본의 중국 선원 나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바 있는데 일본은 불과 3일만에 항복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원료가 문제가 아니라 가공과 정제가 문제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예민한 문제를, 대만을 건드리면 집단 자위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이고,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위험한 문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중국 원자재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일본의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고 있다. 제2 도련선이 무너져도 관망만 했던 일본의 자위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하겠다고의 발표는 일본의 군, 경제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과 대적하겠다는 것인데 이제와서 그와 같은 발언은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 단독으로 중국과 소위 "맞짱" 뜨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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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6
  • 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먼저 사망하고 막내 동생인 프라차티폭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통치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프라차티폭에게로 넘어갔다. 1925년 11월 프라차티폭(Prajadhipok)이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에 즉위했을 때 나라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에 있었다.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왕이 된 라마 7세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 기관으로 최고 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Damrong)과 파누랑시(Panurangsi) 등 라마 6세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Boripat)과 낏띠야곤(Kyttiyagon)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 군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마 4세와 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무엇을 해도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특히 서양학을 공부한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옛 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서는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 사회의 민주적인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유럽의 태국 유학생은 영국에 301명, 미국에 47명,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 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 세력의 자제였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1927년 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들이 만나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렉 피분 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프라윤 파몬몬트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시암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에 발생한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유사했다. 결론적으로 7인의 개혁파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 랏차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이를 직역하면 인민당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시암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하고 세수가 감소했다. 이에 국방 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직하고 퇴임했다. 그러자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자 기축 통화였던 파운드화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지출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경제 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던 우리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1932년은 라타나코신 왕조가 수립된 지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의 멸망 설까지 나돌 정도로 태국 내에는 불안한 사회 징조가 포착되었다. 왕조가 창건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일어나 왕조가 멸망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태국 사회에서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었다. 귀국한 인민당의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프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 송크람은 군부 내 급진 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 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 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 1931년 후반에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Praya Pahon)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Praya Songsuradet)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유학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년 6월 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라마 7세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 반도 후아힌(Huahin)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Borapat) 왕자가 맡고 있었다. 거사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보라팟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루었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6월 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프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 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 세력은 라마 7세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당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월 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프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상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의 뒤에서 조종하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라마 7세는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이 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라마 7세는 결국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는 문맹률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 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 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콘(Prays Manopakon)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의 다음해인 1933년, 급진파였던 프리디 바놈용이 개혁 안을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프리디의 개혁 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 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콘 총리도 개혁 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 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콘 정부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해 개혁 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 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프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 송크람과 프리디의 연합 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라마 7세는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왕족을 찾았다.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나이는 9세였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제외하면 1946년 6월 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라마 7세를 추방한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프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 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 국민도 지원할 수 있는 탐마삿 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1938년 12월 또 다시 정치권에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그 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 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 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꾸었다. 시암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라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라는 명제를 주창했다. 피분 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 인종을 배척했는데, 그 목적은 화교에 있었다. 중국인 상인 계층에 대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쳤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을 철폐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 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피분 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서는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윗옷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 송크람은 독재 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동맹을 맺는 전체주의적 이념에 놓이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6
  • 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6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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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6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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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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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미국이 러시아에게 잡혀 있는 치명적인 약점, 농축우라늄(Enriched Uranium)
    트럼프가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한다. 그런데 그런 제재는 이미 바이든 때도 했던 제재라는 것이다. 그런 제재를 해봤자 미국은 제 발등만 찍을 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보다 더한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농축우라늄 수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지난해 5월에 제정했음에도 미국의 원자로 연료 최대 공급국은 러시아다. 2024년 러시아가 미국 상업용 원자로에 사용된 농축우라늄의 20%를 공급했다. 다만 미국의 에너지 정보국은 대체 공급원이 없거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2028년까지 예외를 허용했다. 현재까지 예외 승인을 받은 기업으로는 컨스털레이션 에너지와 센트러스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원자력 발전 확대를 예고한 이후에 러시아 에너지 부분 제재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미국은 원전 연료를 거의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우라늄 공급이 상당히 부족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 에너지정보국은 미국에서 10년 동안 부족할 우라늄 물량이 1억 8,400만 파운드(약 83,460톤)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미국의 3년치 우라늄 소비량에 해당된다. 미국은 지난해 4월 약 30여년만에 신규 가동된 보글(Vogtle) 원자로 1, 2, 3, 4기를 포함해 현재 총 9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통해 전체 전력의 약 18%를 충당하는 세계 최대 원전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캐나다산 우라늄이 전체의 2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카자흐스탄과 호주산 우라늄이 각각 21%씩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은 전체 구매량의 5%에 불과했다. 우라늄에 대한 탈러 현상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은 우라늄에 한 해 탈러를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농축우라늄을 러시아에 의존했던 이유는 과거 러시아의 무기 등급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발전소에 공급하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적으로 원자력 발전 원료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농축 우라늄 생산국 중 하나이며, 미국의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이 핵확산 금지 조약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아왔다. 1993년부터 미국과 러시아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핵무기 해체 과정에서 나온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했다. 러시아는 미국 전력의 약 10%를 꾸준히 공급해준 셈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우라늄 농축 기술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자체 생산 능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 농축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과거에 농축 우라늄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이를 생산하는 자국 업체가 없다. 러시아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의 농도를 낮춰 민수용으로 전환한 이후, 채산성이 떨어진 미국 업체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에서 우라늄을 채굴한다 해도, 러시아로 보내 농축시킨 다음 가져와야 한다. 미국은 우라늄을 농축시킬 수 있는 설비, 기술, 장소 등이 거의 없거나 시설이 노후화 되어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제재해도 그동안 여유있게 그러거나 말거나 했던 이유는 미국이 자국의 원자로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 러시아로부터 계속 우라늄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제재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우라늄을 수입한다해도 어차피 러시아로 보내져 농축시켜 올 것인데 광물 금속들을 쌓아 놓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러시아가 그나마 미국에게 우라늄 수출 중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다.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이 제대로 원자로에 공급되지 않으면 전력 생산은 물론이고, 냉각수의 온도가 급상승해 핵분열 및 폭발로 인한 방사능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에너지 부분에서 제재한다 하지만 농축우라늄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기에 바이든 이상으로 제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이 직격탄을 맞는다 하던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 약점을 잡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원유 수급의 활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란에서부터 원유 수입을 늘린지 오래다. 즉, 러시아로부터 수급에 의존하지 않고 수입의 다각화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모디는 트럼프와 등을 돌린지 오래고, 중국과 화의를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아프가니스탄 회랑을 통해 원유와 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는 미국 은행에 대한 의존을 벗어난지 오래다. 거래는 위안화로 하고 있고, 러시아로부터는 루블로 거래하고 있는데 미국의 제재를 받는다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에 흔들렸다면 트럼프가 인도에 관세 50% 부과했을 때, 진작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러시아 원유와 가스를 축적할 것이고, 트럼프의 경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무시할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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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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