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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명나라의 유신(遺臣)인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廸)이 1679년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낭 항에 이주했다. 베트남의 광남 응우옌 왕조(廣南阮朝)에 망명한 명나라 유신의 일파는 호이안에 머물면서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설립하고, 진상천과 양언적 일파는 메콩델타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이들의 정주는 베트남 중남부의 교통 요소에 ‘중국계 이민’의 집주지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국계 이민은 베트남 남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7세기 말 베트남의 판도에 포함된 현재의 호치민과 비엔호아에서 명향사와 청하사(淸河社)를 설립했다. 『대남실록전편(大南實錄前編)』의 기사에 따르면 1679년,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迪)이 공동으로 이끄는 중국 선단에 속한 선박 50척과 사람 3,000명이 도착했다고 한다. 대남식록전편에 의하면 이들 광동인 집단은 망명하길 원했으나, 언어와 풍습이 너무 달라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현주(賢主) 완복빈(阮福瀕)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이 가정(嘉定)-동나이(同奈) 지역으로 남하한다면, 캄보디아의 번왕 앙 논에게 말을 넣어 실향민이 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였고,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두 집단으로 흩어졌다. 양언적이 이끈 집단은 미 토(Mỹ Tho)를 설립하였고, 다른 집단은 훗날 사이공이 될 장소 근처인 비엔 호아(Biên Hóa, 邊和)로 간 것이다. 명향사와 청하사는 하나의 중국인 마을을 형성했으며, 출신지별로 5개의 방회(幇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명향사에 적을 둔 중국인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조직 내 자치가 용인되었고, 과거 응시의 자격이 부여되었고, 토지취득의 권리가 부여되는 우대조치를 향유했다. 프랑스의 통치 시기(1887~1945)의 식민지 정부는 응우옌 왕조의 정책을 답습하여 프랑스와 중국 간에 ‘중국계 이민’의 국적 문제가 발생하자, 명향의 신분은 ‘베트남인’과 ‘아시아 외국인(중국계 이민)’ 사이에서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명향(明鄕)은 명향사에서 나온 단어로 이들 중국계 이민의 자손을 말하거나, 중국계 이민 남성과 현지에서 베트남 인 혹은 크메르 인 여성 사이에 탄생한 혼혈의 자식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 명향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54개 민족 가운데 화족(華族)이 아닌 베트남 낀족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민망 년간(1820-1841) 중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明香’은 ‘明鄕’으로 표기법이 바뀌었다. 중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나라의 향화’라는 단어 대신 ‘명나라의 후손 또는 유민의 고향’ 즉, 베트남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뀐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베트남어로 발음 및 성조까지 같다. 이는 두 지역에 ‘한풍(漢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1698년 남방 지배를 위한 기구로 가정부(嘉定府)가 들어선 이후에 동나이 지역 중국인은 청하사(淸河社), 사이공에 살고 있던 중국인은 명향사(明香社)로 조직됨으로서 명나라 유민들의 베트남 정착이 완료된 것처럼 보인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시 명향사의 조직은 해체되었고, 회사(社)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등의 재산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최근 호이안의 명향과 화교 관련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명향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인도네시아의 콘밍(Khonming)과 베트남의 명향 사이에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콘밍은 인도네시아의 정책에 따라 보호받기는 했지만, 명향처럼 베트남 남부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에 적극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향은 출신지 별로 방회(幇會)를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동향단체를 만들었지만 콘밍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명향은 프랑스 통치 시대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콘밍은 일제 시대에 그러한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되어 버렸다. 명향은 그들만의 모임을 형성 및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향회관, 관제묘와 같은 시설이 존재한 반면, 콘밍에게는 이와 같은 공동체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청(淸)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이주할 경우 반역자로 취급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만주족에 굴복하기 싫은 한족과 삶의 한계 상황에 이른 극빈층들이 정크선을 타고 남쪽 섬나라로 도주해 갔다.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상부상조로 현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시켰다. 이 때 청나라 남부 한족들이 베트남으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베트남인들을 지배하는 쪽에 섰으며 일반 베트남인들에 비해 부유하고 권력이 강한 편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한 이후, 공산주의 성향 화교들은 북베트남을, 반공주의 성향의 화교들은 남베트남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시킨 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는 화교들의 상당수를 중국 본토나 대만, 홍콩 등 중화권 및 이웃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로 추방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 소위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자들의 상당수가 화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호주의 베트남계 호주인, 미국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화교 혈통인 경우가 매우 많은 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많은 수가 귀국했으나 현 베트남 공산정권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들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화교들과 다르게 베트남 경제를 장악하고 있지 않지만 2020년대 들어서 화교들이 중국-베트남 전쟁 이전처럼 남부 호치민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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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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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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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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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 오이라트 계통 준가르 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강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回族) 농민들, 남쪽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 족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준가르 제국의 거점 중 토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이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과 같이 중범죄자들을 우루무치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가리아로 지방으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 족(錫伯族)이나 살라르 족(撒拉族)이 중요한 예시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강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강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 족들은 쿨자 인근에서 직접적으로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원래는 시버 족 이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의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강 북부 지역과 과거 준가르 제국의 중심인 지역에 집중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부터 돌아온 칼믹 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 인들이 주축이 된 칼믹 족들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강 북부 지역으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 칸국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칼믹 족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 유목민들은 칼믹 족의 친척인 준가르 인들이 많은 카자흐 족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믹 족들이 카자흐 초원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리 또한 만무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부터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 족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나라의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이는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위구르 족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 족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 제국의 압제로부터 위구르 족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러한 민족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 인들은 거의 멸족된 상태이며 만주족들은 신강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청나라 정부에 저항할 강력한 세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영토인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속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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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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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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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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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 오이라트 계통 준가르 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강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回族) 농민들, 남쪽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 족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준가르 제국의 거점 중 토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이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과 같이 중범죄자들을 우루무치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가리아로 지방으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 족(錫伯族)이나 살라르 족(撒拉族)이 중요한 예시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강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강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 족들은 쿨자 인근에서 직접적으로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원래는 시버 족 이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의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강 북부 지역과 과거 준가르 제국의 중심인 지역에 집중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부터 돌아온 칼믹 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 인들이 주축이 된 칼믹 족들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강 북부 지역으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 칸국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칼믹 족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 유목민들은 칼믹 족의 친척인 준가르 인들이 많은 카자흐 족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믹 족들이 카자흐 초원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리 또한 만무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부터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 족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나라의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이는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위구르 족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 족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 제국의 압제로부터 위구르 족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러한 민족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 인들은 거의 멸족된 상태이며 만주족들은 신강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청나라 정부에 저항할 강력한 세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영토인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속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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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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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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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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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지배하기 전의 필리핀 : 중근세 필리핀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