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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의 쿠데타와 태국 왕실,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 하락하는 태국 사회
    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은 쁠랙 피분 송크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새로운 태국의 독재자가 된 인물이다. 다만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독재를 했었기 때문에 태국 현대사에서 잠시 거쳐 갔던 독재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릿 타나랏은 태국 방콕에서 <캄보디아 왕실 편년사(Cambodia Royal Chronicle)>의 번역 작가로도 유명한 라완 루안디트아난(Rawan Ruanditanan) 소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부터 7세까지 모친의 집안이 있던 무크다한(Mukhdahan)에서 자랐고 7세에는 소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출라촙크라오(Chulachobkrao)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국군의 주요 직책들을 역임하다, 쁠랙 피분 송크람에게 발탁되었고 1949년 일어난 이른바 “왕궁 반란 사건(The Palace Rebellion)” 당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송크람 정권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쿠데타를 방어한 것을 기반으로 타나랏은 송크람의 신임을 받았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그리고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이유 아래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키워갔다. 그러나 1957년 치러진 태국 총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발생하자 타나랏은 송크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58년 9월 18일 수많은 쿠데타들이 이미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내 성공하게 된다. 1958년 타나랏의 쿠데타를 가져온 일련의 정치적 대립은 국제 사회에서 노란 두건(Yellow Bandana와 붉은 두건(Red Bandana)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치적 대립은 길게는 1957~1958년 사이에 발생한 동남아시아 대규모의 경제위기, 보다 짧게는 1947년에 있었던 태국의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시초였다. 보다 더 근본적인 모순을 본다면 1932년 입헌군주제 쿠데타로 등장한 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권력을 둘러싼 근본적인 모순까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군사 쿠데타들에서 보여주었던 태국 쿠데타의 특징들, 이념, 정책, 사회적 근본 모순에 관해 쿠데타가 아닌 매우 실용적인 차원의 쿠데타라는 특징과 더불어 타나랏의 쿠데타는 좀 이전 4차례의 쿠데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전 쿠데타인 1947년 피분 송크람의 군사 쿠데타는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편을 들었다가 미국의 폭격을 받아 자진 사임한 이후, 3년 만에 발생한 쿠데타였다. 송크람은 1932~1944년 대공황으로 인한 태국의 경제위기를 틈타 등장했고 이후 태국 정치사에서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기반을 형성했었다. 한 군부 집단이 과반 의석을 독점한 것은 송크람의 쿠데타로 인한 의회의 탄생, 국왕의 절대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이양, 군부가 태국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수코타이 왕조 이후부터 시작된 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송크람의 통치는 늘 권위주의, 독단적 국가 운영, 인권 문제, 그리고 지나친 복지 위주의 민중에 대한 선심성 논란 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비난들과 송크람의 왕권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은 왕과 이를 둘러싼 전통 권력 상류층들, 고위 관료, 군, 그리고 송크람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국가 운영에 반대한 지식인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을 압축한 것이 송크람을 축출한 1944년에 발생한 쿠데타이다. 이에 대해 송크람의 집권 시기 많은 혜택을 받은 친(親) 송크람 세력, 농민, 도시 빈민 등 송크람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왕과 친(親) 국왕 세력을 상징하는 노란색에 대한 반대로 붉은 색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붉은 두건과 노란 두건의 대립이 시작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붉은 두건은 친 송크람파, 노란 셔츠는 친 국왕파를 상징하고 있다. 일부 분석들은 친 송크람과 반 송크람을 단순히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 모순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친송크람파의 일부는 태국 내 공화주의 세력이다. 다시 말해 현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력이 친 송크람파에 가담한 데는 송크람의 집권 시기 그가 보여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태도가 있다. 태국에서 국왕은 절대적 존재다. 당시 라마 7세, 라마 8세 국왕은 한 때 국민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았었다. 국민을 위해 국왕이 많은 자선사업과 시혜를 베푼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젊은 시절 라마 7세와 라마 8세는 1년의 1/3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 개선 문제를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챙겼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도 매우 강력했다. 과거 군사 쿠데타를 성공한 군부라도 최종적으로 국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그대로 권력을 내려놓고 망명한 일례도 있다. 중요한 정치적 위기 시 사태를 정리한 것은 언제나 국왕이었다. 현재 일반 국민 사이에 국왕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에는 많은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58년 라마 9세는 31세의 젊은 나이였고 1946년에 즉위한 이래로 12년째 통치 중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건강이 거의 좋지 못해 와병 중이었다. 그리고 피분 송크람과 사릿 타나랏으로 인해 정치적 권위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군사 쿠데타 문제는 시민들이 보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릿 타나랏은 몇 명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현재 그의 자손들은 거의 사망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 그의 수상 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었던 솜차이 타나랏(Somchai Thanarat)은 지금까지 시민들에게 보여준 행적으로 인해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의 태국 시민들은 이와 같은 차기 수상의 행적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추문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나타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타나랏의 후계자로 떠오른 국방장관 타놈 끼띠카쫀(Thanom Kittikachorn)은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타나랏의 행정력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국민을 위해 고민하고 현장에 관심을 가진 타나랏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이 신뢰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군 장성이라는 점이 이미 군사 쿠데타로 인해 어느 정도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갖고 있는 상태였기에 수상 계승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 권력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과 군부 역시 솜차이 파와 타놈 파로 갈려져 있는 상태다. 정국의 혼란, 국왕의 잦은 와병에 수상의 승계 구도 문제까지 맞물려 수상의 권위와 수상에 대한 신뢰가 기로에 서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입헌 군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도 있다. 태국 내 공화주의자들은 1932년 입헌 군주제가 사실상 국왕과 그를 둘러싼 전통 지배 계급의 통치를 연장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지 않고 여전히 국왕과 그를 둘러싼 소수의 전통 지배 계급과 군이 국가의 부와 권력을 좌우하고 있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왕가가 태국에서 가장 부자라는 것에 이의를 재기하는 사람은 없다. 왕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자로 알려졌다. 특히 <포브스>에서는 태국 왕실이 세계 왕실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혀 태국 내에서 논란을 촉발시킨 바 있다.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태국 왕실의 재산은 당시 미화로 100조 달러에서 350조 달러까지 다양한 예상들이 존재한다. 시암 시멘트, 시암은행 등 태국의 상당한 재벌급 기업들과 방콕의 주요 쇼핑몰, 최고급 호텔 가운데 왕가의 소유가 다수 있을 정도다.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왕실 재산국(Crown Property Bureau)은 부동산 임대 사업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제 활동에서 발생하는 왕실의 모든 수입에 대해 소득세가 면제된다. 국왕의 국민에 대한 시혜는 이와 같은 부의 아주 작은 부분을 내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 절대 왕정 시기 통치 세력, 왕을 보위하던 고위급 신하들과 군대가 입헌 군주제 쿠데타 이후 그대로 고위 관료로 탈바꿈 했고, 군부 역시 국왕을 보위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1932년 입헌 군주제를 위한 쿠데타는 이 관료들과 국왕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국왕은 존재하면서 상징적인 인물이고 실제 권력은 국민에게 있으며 그리고 이 국민의 권력을 위임 받은 총리에 의해 권력이 행사 되는 입헌 군주제와 태국의 입헌 군주제는 거리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한 민간 정부는 국왕의 권력 하에서 일상적인 행정 처리만 하는 조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지난 70여 년 간 절대 신성으로 여겨졌던 국왕에 대해 이와 같은 질문들이 이어지면서 푸미폰 라마 9세의 즉위 이후, 70년이 넘는 통치 기간 동안 태국 정부와 군은 국왕모독에 관한 국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붉은 두건 세력은 타나랏 총리와 송크람에 대한 개인적인 추종 세력들, 타나랏의 재임 시절 경제적으로 혜택을 본 빈민, 농민 계층의 경제적인 바람에 공화주의적인 운동까지 복합적으로 포괄된 세력이라 볼 수 있겠다. 반면 노란 두건 세력은 국왕과 그 주변의 전통 상류층 집단, 군대, 교육 받은 보수적 중산층,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현 민주당으로 이어 오는 민주화 요구 세력들이 이 집단을 대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1958년 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갈등에는 1932년 이후 태국 정치의 근본 모순에서부터 개인의 경제적이고 정치적 이익까지 다양한 정치적인 정당성들이 모두 녹아 있는 셈이다. 수적으로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친 타나랏 세력은 당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해 총리 직을 박탈당한 쁠렉 피분 송크람 총리까지 1958년 9월 18일 쿠데타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서 집권했다. 붉은 두건을 지지하는 세력의 수적 우위로 인해 선거에서의 승리는 거의 보장되어 왔다. 반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추, 관료제, 법원 그리고 군을 장악한 노란 두건은 선거로 구성된 친 타나랏 정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주로 자신들이 장악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총리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새로운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통제하려 시도해왔다. 1973년 10월 학생 민주화 운동 이전까지 총리가 해임되고 정부가 바뀐 것만 보면 타나랏 총리까지 합쳐서 세 번째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1958년 9월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는 친 송크람 파벌들을 이전에 발생한 부정선거 혐의로 대법원에서 자격 정지시킨 이후, 친 타나랏파를 대두시키고 송크람 계열을 더욱 무력화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경험을 놓고 볼 때 법원에서 친 송크람파 정당과 그 행정 세력들을 무력화 시키게 되지만 그래도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고 선거를 치르면 친 타나랏파 세력들이 집권하는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노란 두건과 친 국왕 세력들은 이전의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보다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방편으로 피분 송크람을 실각시키고 오히려 타나랏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과 달리 1958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와 친 국왕파는 선거를 회피할 수는 없어 그대로 치루었다. 이는 시민들이 주목하고 있고 국제 사회의 이목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선거를 치러 타나랏이 총리가 되었다. 이번 쿠데타 세력이 1946년 쿠데타 세력과 그 이후 법원을 통해 친 송크람파 정부를 제거했던 세력과 다른 점은 부정선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헌법과 의회의 기본 구조를 대폭 수정하여, 친 송크람 세력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것을 가급적 차단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쿠데타 이전부터 타나랏파는 임시 헌법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선거를 통해 하원을 구성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의 근간은 바뀌지 않겠지만, 많은 새로운 장치들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의석수를 늘리려 했다. 근본적인 모순과 대립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쿠데타의 세력인 타나랏 세력이 가진 숫자의 힘과 친 국왕 세력이 가진 실질적 권력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수많은 쿠데타를 야기했다. 어쩌면 당시 태국은 많은 신생독립국이 독립 직후 겪었던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정체성과 기본 권력 구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국가들이 독립 혹은 국민 국가 수립과 함께 권력을 누려왔던 국왕이나 구(舊) 세력과 새로 등장한 민족주의 세력 혹은 시민 세력 간에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투쟁과 갈등이 마무리 된 자리에 새로운 국가의 권력 구조와 정체성이 자리 잡았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을 위해 일어났던 군사 쿠데타 이후 1956년에는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전격 단행되었다. 이 날 사릿 타나랏 태국군 사령관은 신문을 통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발표 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군사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발생한 군사 쿠데타가 맞다. 이러힌 일들이 발생한 지 이틀 만인 9월 20일에 군은 공식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선포하고 정부 기관들을 군의 통제 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이틀 간 쿠데타 상황에서 발생한 정권을 교체하는 일들을 놓고 볼 때 후일 군사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게 되는 태국에서 쿠데타마저도 법적 절차와 의미, 그리고 제도화된 단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대개 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고 비밀리에 정권을 탈취하고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는 법적 효력이나 절차 등을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8년 9월 쿠데타에서 태국군은 사실상 국가를 장악한 기간 동안 발생된 조치에 대해 정치적인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계엄령만을 선포한 것이지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 간 대립하고 있는 정파 간 형식적 대화를 추진했지만, 20일 이 대화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쿠데타를 선포하여 사릿 타나랏이 정권을 장악하는 수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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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13
  • 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필리핀에서 5만 명의 코피노들을 낳고 잠적한 한국 남자들도 문제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다. 베트남에도 이른바 "라이따이한" 문제가 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베트남으로 파견된 대한민국 국군 혹은 한국인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혼인 관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말하는데 한국군과 한국 노무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 태어난 후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973년 모두 철수하게 되는데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이들을 두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처사라고 하지만 "라이따이한" 또한 세대별로 나뉘고 있다. 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세대는 "라이따이한 1세대"들이다. 문제는 "라이따이한 2세대"들부터다. 베트남이 도이머이로 인한 개방과 더불어 한국과 수교한 90년대부터 베트남에 들어간 한국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부터 문제인데, 라이따이한 2세대들과 그 어머니들은 편모 슬하에서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도 힘든데 자국에서도 심한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콘돔 미착용에서 성관계를 갖거나, 순진한 현지 여성들을 작업해 성관계를 가져 임신시키고, 연락하니 차단하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한국 남자들이 많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3세대"들과 201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4세대"들의 남편들은 더 심하다. 이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있었던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보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더 어렵던 시대였다. 이걸 간파한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에 들어와 성관계를 하고 씨를 뿌리고 도망가면 찾기 힘들었다. 베트남에 한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미혼모인 여성들이 많은데 베트남의 문화상, 피임이나 낙태는 매우 죄악시 되고 있고, 북베트남의 경우, 유교 문화권이 남아 있는 상태로 집안과 친척들의 눈총을 받기에 그냥 낳아 기른다고 한다. 요즘 2020년대 들어서도 그런 인식은 마찬가지긴 한데 2000년이나 2010년대 보다 많이 줄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와 틱톡과 같은 숏츠 영상, 그리고 스마트폰의 발전은 "라이따이한 세대"가 생기기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베트남 여성과의 만남에서 성관계가 활발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남성들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끼리 커뮤니티가 있어 책임 없이 임신시키고 도망가는 한국 남자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 커뮤니티에는 해당 한국 남성들의 정보가 박제되기 때문에 한국에 있더라도 스스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전처럼 요즘 베트남 여성들도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2020년대의 베트남의 MZ 세대들은 굉장히 영악한 아이들이 많다. 특히 동남아시아 각국을 다녀본 필자가 볼 때,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IT 최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없는 행동으로 여성을 작업해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면 바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박제된다. 요즘 아이들일수록 IT와 관련하여 다루는 솜씨들이 한국 아이들 못지 않아 보통이 아니다. 옛날의 베트남 생각하고 베트남 여성을 정액받이 생각하여 접근했다가는 한 순간에 골로 가는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1회성 만남을 즐기고 싶다면 가라오케나 마사지 샵 같은 유흥지들을 가면 된다. 거기선 1회성 만남을 즐기고 그 댓가를 지불하면 깔끔하다. 게다가 베트남 여성들은 자기 남성이 아니면 굉장히 쿨하고 관계에 있어 깨끗이 끝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명 인터넷에서 말하는 베트남에서 "싸튀충(정액을 사정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넷 은어)"의 시대는 끝났다. 잘못 건드려 국가적 개망신을 당하지 않고, 교제하고 싶으면 정당히 진심으로 만남을 갖고 교제하거나 1회성으로 끝내고 싶으면 유흥지들에 가는 것이 좋다. 미디어나 인터넷, SNS, 각종 IT 소셜들의 발달로 인해 베트남 뿐만 아니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IT도 서서히 베트남 수준으로 올라오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더 이상 정액받이 천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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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10
  • 캄보디아의 ODA 지원 &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퍼주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캄보디아가 2025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적개발원조(ODA)를 받는 수혜 국가 1위로 올라섰다 한다. 한국은 2025년 총 92개의 협력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할 계획이며, 이 가운데 캄보디아가 지원 규모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고 KOICA에서 밝혔다. 우리가 6.25 전쟁 이후, UN 및 각 국가들로부터 원조 받아 연명했고,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여 오늘날의 경제 부국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가 원조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ODA를 통해 우리보다 못한 나라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국제 사회에 헌신하는 것으로 갚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ODA도 윤석열이 당시 이러한 일환으로 한 것이라 믿는다. KOICA는 <프놈펜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는 2025년 캄보디아에 총 3억 1,500만 달러(약 4,000억 원) 규모의 원조를 제공할 예정이며 주로 교육과 수자원 관리, 보건위생, 교통 및 농촌 개발 등 캄보디아의 주요 개발 분야에 집중 지원될 계획이라 밝혔다. 당시 개발 원조는 27개의 유상 차관 프로젝트와 62개의 무상 원조 프로젝트로 구성되고 있다. 특히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차관을 받아 이루어지는 대형 프로젝트 중 가장 핵심 사업은 양국간 우호의 상징으로 추진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Korea-Cambodia Friendship Bridge)’ 건설에 있다. 이 우정의 다리는 2023년에 훈 센과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캄보디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프놈펜 내 다운펜 지역 야시장 인근부터 쯔로이짱와 반도 끝을 거쳐 껀달 주 아레이 끄삿 지역까지 총 길이 2,375m, 폭 27.5m의 사장교로 건설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 공사는 이미 2024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는 한국수출입은행으로부터 2억 3,500만 달러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받게 되며, 공사 소요 기간은 5년으로 공사 완료 예상 시점은 2030년이다. 우정의 다리의 설계 및 감리는 유신컨소시엄이 1,885만 달러에 수주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그 외 무상 원조 사업으로는 캄보디아 국립 어린이 병원 의료진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 2023년을 시작으로 2027년까지 총 1,600만 불(약 208억원)을 투입하여 프놈펜 소재 국립 어린이병원 내과계에 대한 역량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 안으로는 국립 어린이 병원 내 내과계 병동을 새로 짓고, 최신 의료기 자재들을 지원하며, 병원 운영 및 의료 인력의 역량을 강화에 나선다. 병원 동은 2026년 3분기까지 지상 5층, 전체 면적 8,715㎡, 총 196병상 규모로 준공될 예정이며, 병원 준공에 맞춰 150여 종 1,900여 점의 의료 기자재가 지원되고, 세부 분과별 전문 인력 초청 연수 및 현지 연수도 이루어졌다. 2024년 5월 훈 마넷 총리의 한국 방문 이후 양국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무상원조(ODA) 지원 규모가 두 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윤석열 정부 때 이루어진 것이다. 캄보디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를 맺었다는 것은 캄보디아와 준동맹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북한-러시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와 유사한 관계다. 이처럼 준동맹국 캄보디아와 ODA는 2022년 1,789억원, 2023년 1,805억원, 2024년 2,178억원, 2025년 4,353억원 등으로 매년 큰 폭으로 늘었다. 한국에서 ODA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들은 베트남을 비롯해 캄보디아, 스리랑카, 네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는 훈 센 가문이 대를 이어 장기 독재를 하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해 있다. 독재에 심화되고 부패가 만연한 국가들에게 ODA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으며 이는 해당 국가의 의존성만 커지게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의 국가가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 또한 젤렌스키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한 상태로 EU 국가들이 자국을 희생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미국도 우크라이나를 마찬가지로 지원했었고 이는 젤렌스키와 각종 정부요원들의 비리로 인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있다. 이제 막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고 북한과의 대치로 방위비를 많이 써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게다가 국가부채까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초저출산과 3D 업종 기피현상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외국인들의 본국 송금으로 인한 외화 유출 또한 상당하다. 게다가 이제 미국에 2,000억 불을 투자해야 한다. 이래저래 돈 나갈 곳만 많고, 이러한 상황에 ODA는 우리 형편에도 맞지 않다. 윤석열은 캄보디아에 가서 감당 못할 계약을 하고 왔고, 김건희는 빈곤포르노나 찍고 왔다. ODA는 우리 국민의 혈세로 지원된다. 2030 부산세계엑스포 유치를 위해 ODA 약속을 남발한 것도 윤석열 정부고,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전임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도 캄보디아 전문가도 아닌 산업통상자원부 부산엑스포 유치지원단장 출신이었다. 환장할 일이다. 우크라이나에 또 과도하게 퍼준 것도 윤석열 정부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총 23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발표했으며, 2024년 3억 달러는 무상 지원, 2025년 이후 20억 달러는 장기 저리 차관 형식으로 제공된다 했다. 또한, 1억 달러 규모의 차관이 사회 부문 지원을 위해 이미 지원한 상태다. 이것들도 다 국민들의 혈세다. 과도하게 우크라이나에 퍼준 것도 이해 못할 뿐더러, 캄보디아에 퍼준 ODA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퍼준 ODA에 대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ODA 명목상으로 뒷돈 챙겨도 이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도 마찬가지이며 폴란드와의 방산 무역 또한 의심할 부분들이 많다. 대우크라이나 지원, 김건희, 삼부토건 및 각 재건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에 대한 조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벌써 PD 수첩 등 많은 매체들이 폭로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지지부진하다. 나는 폴란드-우크라이나에 젤렌스키와 함께 비자금 조성하고 캄보디아에까지 파이프 라인을 설치하여 검은 돈을 세탁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일찍부터 이중과세 방지와 탈세 및 조세회피 예방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고 했지만 부패한 훈 센 집안의 행태로 본다면 이와 같은 협정은 무의미하다. 부정부패가 일상화 되어 있는 캄보디아 같은 국가는 조세포탈지로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돈을 물쓰듯 쓰기만 한 윤석열 정부가 흑자를 본 부분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리고 캄보디아 ODA와 대우크라이나 지원, 대폴란드 방산 협정 사이에 숨겨진 부패와 비리는 어느 정도일까?
    • 칼럼
    • Nova Topos
    2025-11-10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 활동하였다. 159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교역을 시도하려는 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20일 이들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귀금속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바타비아를 수도로 삼았다.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암본을 탈취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후 동아시아의 향신료인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 이 중 특히 육두구 열매에서 얻는 육두구와 메이스의 경우, 18세기 중반까지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반다 제도의 룬섬(Run island)을 점령한 이후, 세계 시장에서 육두구는 근 150년 동안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총독의 재임 시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경영의 구체적인 지침이 마련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원조해주는 대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기반으로 식민지 경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경쟁국들 외에도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존재했다. 쿤 총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들을 공격하였다. 1619년 쿤 총독과 네덜란드의 군대는 영국 동인도 회사 및 이들과 연합해 일시적으로 네덜란드와 반목했던 지역의 반튼 술탄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반튼의 유력한 무역항인 자야카르타(Jayakarta)를 획득, 바타비아(Batavia)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암보이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토착 세력도 네덜란드에는 큰 위협 요인이었다. 17세기 초에 술탄 아궁(Agung)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부 자바의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바야를 점령하는 등 동부 자바를 평정하고, 자바 섬을 통일할 목적으로 서진하고 있었다. 술탄 아궁에게 수라바야를 지원했던 네덜란드 세력은 위협적이었고, 이어 마타람의 군대가 1628년과 1629년 두 차례에 걸쳐 바타비아를 포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 군은 쿤 총독의 지휘 하에 완강하게 수성에 성공했다. 1641년 네덜란드는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을 대만 섬 북부에서 축출하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 곳들을 연결하는 교류 망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외에도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에 1658년 암스테르담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1636년에는 솔로르 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점령하고 17세기 동안 티모르 섬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이하에서 회사령 인도라 불리는 네덜란드령 인도는 동인도 지역과 겹쳐지지 않지만, 인도에서 동인도에 걸쳐 있던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 세력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인도에 국한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차원에서 함께 서술하려 한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 세력은 기존의 스페인, 포르투갈 세력을 말레이 반도, 술라웨시 섬,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했고 자바 섬에도 바타비아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얻었지만, 네덜란드 세력은 이베리아 계 세력을 결국 완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초부터 여러 차례 필리핀의 스페인 세력을 공격하였지만 육상 전, 해상 전 모두 패배하였다. 특히 1646년의 마닐라 해전에서는 스페인 함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가지고도 네덜란드 함대는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포르투갈 세력도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플로레스 섬 등 소 순다 열도의 동부 도서 지역들을 보유하였고, 티모르 섬에서도 네덜란드와 섬의 분할을 두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었다. 토착 세력을 상대로 한 원정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가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3~1644년 간 진행된 캄보디아와의 소규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캄보디아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바 섬에서는 신중하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연이어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7세기 중반, 자바에서 가장 강성한 마타람 술탄국이 군주 아망쿠랏 1세(Amangkurat I)의 실정으로 내분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를 주시하던 자바 서부의 반튼 술탄국이 마타람의 세력권을 잠식하던 와중 마타람에 치명적인 트루나자야 봉기(Trunajaya Uprising, 1674~1681)가 발생했다. 트루나자야 반란군에게 패퇴하고 수도가 함락당한 아망쿠랏 1세는 그나마 자바에 이해관계가 적은 외부 세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구원 요청을 보냈으며, 동인도 회사는 이에 응하여 반란군에 승리를 거두고 마타람의 내정에 개입하며 1670년대 말 마타람으로부터 자바 서부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비슷한 사건들이 1680년대에 이번에는 반튼 술탄국에 일어났는데, 술탄과 왕자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왕자의 편으로 개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승리하였으며 1687년까지 반튼 술탄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강성한 마타람은 즉시 동인도 회사의 보호국이 되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세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며 서서히 자바의 외곽 영토를 전쟁에 개입한 동인도 회사에 점령되어갔다. 18세기 중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Java War of Succession, 1749~1757)의 결과로 인해 결국 남은 영토마저 네덜란드 산하 번왕국들로 분리되었고, 각각의 번왕국은 보호국이 되었다. 반튼 술탄국은 보호국 위치로 존속하다 1813년에 해산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마트라 섬과 보르네오 섬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비록 이 시기에 대체로 내륙으로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해안 도시를 거점으로 한 지역의 여러 부유한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시키고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자바의 반튼 술탄국을 굴복시킴으로써 반튼 산하에 있던 수마트라 남부 람풍(Lampung) 후추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으며, 보르네오 남부의 후추 무역을 통제하던 반자르 술탄국도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간섭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도 아체 술탄국과 경쟁하며 아체 술탄국 산하에 있던 들리 술탄국 등을 네덜란드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며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아시아 대륙에도 상관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인도에 진출하여 인도 남동해안인 코로만델 해안에 네덜란드령 코로만델을 확보한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가던 시기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스리랑카에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1658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던 포르투갈령 실론의 수도 콜롬보를 점령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관리하는 네덜란드령 실론이 현대 스리랑카의 서부 절반 지역에 성립되었다. 스리랑카 식민지를 확보한 여세를 몰아 네덜란드 세력은 인도 남서 해안인 말라바르 해안(Malabar Coast)에도 진출하여 1661년 포르투갈령이었던 콜람(Colam) 항구, 1662년 코친(Cochin) 항구를 함락해 네덜란드령 말라바르를 창설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네덜란드의 군사적인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는데, 1638년 포르투갈령 고아에 대한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은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인도 식민지는 앞에서 열거한 네덜란드령 실론, 네덜란드령 말라바르, 네덜란드령 코로만델 외에도 소규모로 유지된 북동부의 네덜란드령 벵골과 북서부의 네덜란드령 구자라트도 존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를 제외한 인도 본토의 회사령은 이주와 장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의 상관과 공장 지대였다. 항구 도시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유지 되어 인도양에서 회사령 케이프 식민지와 회사령 동인도를 이어주는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령 말라바르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코친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토착 왕국과 세력 경쟁을 벌이며 내륙으로 확장하려 시도했던 적은 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말라바르 해안의 토착 세력 트라방코르(Travancore) 왕국에 대해 후추 무역 독점권에 대한 알력으로 트라방코르–네덜란드 전쟁(1739~1741)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네덜란드 군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1741년 8월, 식민지 전쟁으로서는 매우 큰 동원 규모인 네덜란드 군 6,000명(유럽인 2,400명)의 병력이 트라방코르군 12,000명~15,000명가량과 벌인 콜라첼(Colachel)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쟁은 동인도 회사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 패전으로 인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동인도 회사는 트라방코르 군에게 크빌론(Cbilon, 콜람)을 함락당하는 상황마저 우려하게 되었다. 이듬해 네덜란드가 말라바르 해안에서 아팅갈(Attingal) 인근의 작은 항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 본토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트라방코르와 네덜란드 세력 간의 긴장은 콜라첼 전투 후 일시적으로 휴전이 합의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이 때 네덜란드 영향 하에 있던 콜람의 군주가 독자적으로 트라방코르와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일시 이탈하기도 했다. 1740년대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은 한 때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고, 실제로 트라방코르 군이 1742년 6월, 네덜란드 영향 하의 콜람을 공격했다. 이에 네덜란드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은 지역의 영주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막아냈다. 트라방코르 군주는 나아가 네덜란드 지배하의 코친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입안하였으나 착수에 이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와 트라방코르 간에는 콜라첼 전투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저강도 분쟁이 계속 이어졌고, 꾸준히 평화 협정을 위한 협상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궁극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말라바르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이에 착종된 네덜란드의 이권이 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은 1740년대 내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의 후추 무역을 방해해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결국 1753년 8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트라방코르 왕국의 군주 마르탄다와르마 간 마웰리카라(Mavelikkara) 조약이 체결되어 양 세력의 대립이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말라바르 해안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졌고, 이후 네덜란드 식민 제국은 인도에서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대만에 진출했는데 일반적으로 포르모사라고도 알려진 대만은 1624년부터 1662년까지 그리고 1664년부터 1668년까지 부분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에도 막부와 무역을 하였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과 동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대만에 존재를 확립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보편적으로 대만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원주민들과 최근 한족들의 봉기는 네덜란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의 부상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대신 청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1662년 정성공의 군대에 의해 젤란디아 요새가 포위된 후 네덜란드 식민지를 해체하고, 네덜란드 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충신이자 반(反) 청나라 제국인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웠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를 맞이해 인도에 새로운 항로 개척이 진행되어,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가 크게 단축되었다. 대만도 이 국제 정세에 포함되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반에 일부의 일본인과 한족이 대만에 진출하였으며, 다른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도 대만의 정치 지형에 주목하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8
  • 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먼저 사망하고 막내 동생인 프라차티폭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통치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프라차티폭에게로 넘어갔다. 1925년 11월 프라차티폭(Prajadhipok)이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에 즉위했을 때 나라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에 있었다.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왕이 된 라마 7세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 기관으로 최고 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Damrong)과 파누랑시(Panurangsi) 등 라마 6세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Boripat)과 낏띠야곤(Kyttiyagon)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 군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마 4세와 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무엇을 해도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특히 서양학을 공부한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옛 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서는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 사회의 민주적인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유럽의 태국 유학생은 영국에 301명, 미국에 47명,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 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 세력의 자제였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1927년 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들이 만나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렉 피분 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프라윤 파몬몬트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시암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에 발생한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유사했다. 결론적으로 7인의 개혁파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 랏차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이를 직역하면 인민당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시암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하고 세수가 감소했다. 이에 국방 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직하고 퇴임했다. 그러자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자 기축 통화였던 파운드화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지출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경제 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던 우리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1932년은 라타나코신 왕조가 수립된 지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의 멸망 설까지 나돌 정도로 태국 내에는 불안한 사회 징조가 포착되었다. 왕조가 창건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일어나 왕조가 멸망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태국 사회에서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었다. 귀국한 인민당의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프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 송크람은 군부 내 급진 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 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 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 1931년 후반에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Praya Pahon)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Praya Songsuradet)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유학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년 6월 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라마 7세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 반도 후아힌(Huahin)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Borapat) 왕자가 맡고 있었다. 거사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보라팟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루었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6월 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프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 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 세력은 라마 7세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당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월 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프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상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의 뒤에서 조종하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라마 7세는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이 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라마 7세는 결국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는 문맹률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 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 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콘(Prays Manopakon)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의 다음해인 1933년, 급진파였던 프리디 바놈용이 개혁 안을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프리디의 개혁 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 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콘 총리도 개혁 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 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콘 정부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해 개혁 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 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프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 송크람과 프리디의 연합 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라마 7세는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왕족을 찾았다.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나이는 9세였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제외하면 1946년 6월 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라마 7세를 추방한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프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 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 국민도 지원할 수 있는 탐마삿 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1938년 12월 또 다시 정치권에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그 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 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 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꾸었다. 시암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라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라는 명제를 주창했다. 피분 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 인종을 배척했는데, 그 목적은 화교에 있었다. 중국인 상인 계층에 대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쳤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을 철폐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 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피분 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서는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윗옷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 송크람은 독재 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동맹을 맺는 전체주의적 이념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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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6
  • 캄보디아와 필리핀의 공통점 : 공권력의 심각한 부패
    최근 오성일 글로벌한인병원 원장님이 올리신 캄보디아 비상대책위원회 1차 회의 최종 정리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특히 6번째 항목인 <온라인 범죄 관련자 캄보디아 재입국 금지 강화> 부분에 있어 과연 캄보디아 정부가 이 부분까지 손을 대려 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캄보디아 입국 관련 부분은 전적으로 캄보디아의 주권에 따른 부분이라 한인회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해서 캄보디아 정부나 외교 관련 부서들이 들어줄리 만무하다. 그리고 관련 범죄자 블랙리스트 정보를 캄보디아 정부와 공유한다고 하는데 ‘코리안데스크’ 설치도 거부한 마당에 정말 캄보디아 정부가 블랙리스트 정보를 공유하려 할지도 의구심이 든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필리핀에도 있는데 필리핀에 ‘코리안데스크’가 있지만 숫자가 매우 부족하다. 2025년 8월, 마닐라, 앙헬레스, 울롱가포, 세부, 딸락 등 5개 지역에 총 8개의 코리안 데스크가 공식 출범했지만 데스크 인원은 고작 3명 정도, 데스크가 이전보다 늘어난 만큼 인원이 늘었겠지만 그래봤자 10명 이하일 것이고, 한 5명 정도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사정을 봤을 때 만약에 된다 해도 3~5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 여행 주의 설정 지역도 범죄 주요 장소인 지역들은 여행 금지로 설정해 놓았고, 나머지는 특별여행제한 지역, 그리고 시아누크빌은 철수권고로 해놓았다. 다행히 완전히 캄보디아 전국을 여행 금지로 설정한 것은 아니라서 이 정도는 그나마 잘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부패한 현지 공권력이다. 범죄 조직이 수시로 상납하고 그 대가로 현지 경찰은 단속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는 것은 다 알려진 얘기다. 이는 캄보디아 뿐 아니라 필리핀도 유사하다. 양국의 공통점은 경찰관의 월급이 적어 상납금을 받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다는 것에 있다. 즉, 이는 현지 정부의 개선의지와 관련이 있다. 현지 정부 또한 부패하여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경찰 행정과 업무,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 관심이 없다보니 경찰의 일상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이는 부패로 연결된다. 필리핀의 주요 범죄는 셋업 범죄이지만 캄보디아의 납치도 사실상 필리핀의 셋업 범죄에서 진화된 또 다른 이름의 셋업 범죄다. 현지 경찰이 대대적으로 범죄 단지를 단속했다며 가끔 보도자료를 배포하지만, 이는 보여주기 식이고 잡힌 범죄자들은 보석금만 내면 석방되어 나올 수 있다. 한국에서 데려온 64명 대부분 범죄자들인데 각 범죄단지들의 규모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적어도 3~4,000명이 능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을 다 놓치고 데려온 64명은 꼬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진짜 머리들은 다 놓치고 꼬리들만 잡아서 데려오니 이들이 꼬리 자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같은 범죄를 셋팅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각 경찰들이 이들 범죄조직의 상층부에게 정보를 흘리고 이들은 사업장을 은밀히 정리한다. 이들이 정리하고 떠난 다음 범죄단지 내부에 들어오면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수사될 자료와 단서들을 찾는 다는 것은 모래에 떨어뜨린 바늘 찾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일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최고위원 요청으로 현지 경찰이 한국인 3명을 구출할 때도 보면 최소 수백명이 머물던 범죄 단지에 고작 한국인 3명만 남아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다. 결국 정보도 별로 없는 자들, 꼬리 자르기에 용이한 자들만 남겨 놓고 도주한 셈이다. 이들을 조사하여 캐네봤자 얻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들 범죄단지를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캄보디아 금융서비스 대기업 후이원(Huione) 그룹의 여러 계열사에 이사로 등재된 훈 토(Hun to)의 경우, 훈 마넷 총리와 사촌 지간이라, 훈 센 가문을 토벌하지 않으면 이들과 연관관계를 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범죄단지도 단속할 때는 범죄자들이 다 빠졌다가 다시 와서 범행하는 식으로 성행할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라오스 국경 지대를 통해 골든 트라이앵글로 들어가 미얀마와 연계해서 같은 방식의 하우스들을 설치하여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캄보디아 뿐 아니라 필리핀도 유사한 부분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있었을 시절, 이와 같은 경찰 부패는 많이 줄어들었었지만 현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 다시 두테르테 대통령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필리핀 경찰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셋업범죄’의 주 원인이다. 경찰은 범죄조직과 적극적으로 결탁해 외국인들의 가방, 호텔방, 사무실 등에 마약, 총기 등을 몰래 넣은 뒤 발견한 척 하고 협박하며 돈을 요구하는 수법에서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고소득 취업 사기, 온라인 도박 등으로 수법이 진화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경찰 봉급을 두배로 올려 방지하고자 했지만 봉봉 마르코스는 이를 원 상태로 돌려놨다. 과거 김미영 팀장 사건도 그러했고, 마약왕 박왕열 사건도 그러했다. 훨씬 이전에는 최세용 일당의 필리핀 5인조 납치 사건도 있었다. 필리핀이든, 캄보디아든, 그들 스스로 내부에서 정화하며 개혁하지 않는 한, 이런 범죄는 근절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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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6
  • 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6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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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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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먼저 사망하고 막내 동생인 프라차티폭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통치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프라차티폭에게로 넘어갔다. 1925년 11월 프라차티폭(Prajadhipok)이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에 즉위했을 때 나라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에 있었다.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왕이 된 라마 7세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 기관으로 최고 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Damrong)과 파누랑시(Panurangsi) 등 라마 6세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Boripat)과 낏띠야곤(Kyttiyagon)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 군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마 4세와 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무엇을 해도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특히 서양학을 공부한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옛 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서는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 사회의 민주적인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유럽의 태국 유학생은 영국에 301명, 미국에 47명,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 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 세력의 자제였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1927년 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들이 만나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렉 피분 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프라윤 파몬몬트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시암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에 발생한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유사했다. 결론적으로 7인의 개혁파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 랏차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이를 직역하면 인민당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시암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하고 세수가 감소했다. 이에 국방 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직하고 퇴임했다. 그러자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자 기축 통화였던 파운드화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지출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경제 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던 우리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1932년은 라타나코신 왕조가 수립된 지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의 멸망 설까지 나돌 정도로 태국 내에는 불안한 사회 징조가 포착되었다. 왕조가 창건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일어나 왕조가 멸망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태국 사회에서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었다. 귀국한 인민당의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프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 송크람은 군부 내 급진 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 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 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 1931년 후반에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Praya Pahon)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Praya Songsuradet)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유학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년 6월 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라마 7세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 반도 후아힌(Huahin)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Borapat) 왕자가 맡고 있었다. 거사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보라팟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루었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6월 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프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 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 세력은 라마 7세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당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월 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프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상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의 뒤에서 조종하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라마 7세는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이 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라마 7세는 결국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는 문맹률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 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 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콘(Prays Manopakon)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의 다음해인 1933년, 급진파였던 프리디 바놈용이 개혁 안을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프리디의 개혁 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 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콘 총리도 개혁 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 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콘 정부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해 개혁 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 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프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 송크람과 프리디의 연합 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라마 7세는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왕족을 찾았다.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나이는 9세였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제외하면 1946년 6월 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라마 7세를 추방한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프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 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 국민도 지원할 수 있는 탐마삿 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1938년 12월 또 다시 정치권에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그 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 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 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꾸었다. 시암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라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라는 명제를 주창했다. 피분 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 인종을 배척했는데, 그 목적은 화교에 있었다. 중국인 상인 계층에 대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쳤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을 철폐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 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피분 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서는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윗옷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 송크람은 독재 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동맹을 맺는 전체주의적 이념에 놓이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6
  • 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6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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