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칼럼 검색결과
-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
- 칼럼
- Nova Topos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
- 칼럼
- Nova Topos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
-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로 인해 대항해 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대항해 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 무역 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 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었음 좋은데 그와 같은 평야도 부족했다. 게다가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 중심지에서 떨어진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전통 귀족 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배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Abis)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럽게 해양 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리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보다는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내부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식민화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기독교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 인들은 흥미를 느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인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 16~17세기 유럽인들이 밀려왔을 때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역사의 근간을 이룩한 왕국들이 건재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베트남 인에 의해 응오(吳)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어 딘(丁), 레(黎), 리(李), 쩐(陳), 호(胡) 왕조로 이어졌고, 15세기 이후 후기 레(黎) 왕조가 막(莫)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정권을 교체할 때마다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며 침공해왔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베트남에 서양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상 제국이었다. 7세기에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 인도네시아 열도와 말레이 반도를 통치하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해 14세기까지 이어 나갔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들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로 건너와 마타람(Mataram), 반템(Bantem), 아체(Aceh) 술탄국을 건설해 할거했다. 태국에는 중국 운남(雲南)에서 거주하던 타이족(泰族)이 남하해 건국한 아유타야(Ayutthaya, 1351~1767)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 제국이 600년을 지배한 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베트남 남쪽인 참파를 지배하에 두고 자치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동남아시아 인들을 볼 때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이 야만적인 민족들로 보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향료 열도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향료 나무를 심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해안에 포격을 가해 항구를 만들려 했지만, 토착 왕국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일본에 전해진 서양인의 조총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을 주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원동력이 된 것과 같이 동남아시아의 왕국들도 서양의 선진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선만이 서양 총포 기술을 받아들 것이 인색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거점은 말라카(Malacca)였다. 말레이 반도 서부 해안의 이곳은 말라카 술탄국이 지배했는데, 1511년 포르투갈이 1,200명의 병력과 7~8척의 전함을 동원해 말라카를 점령했고, 이어 1606년에 네덜란드에 탈취 당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1824년 영국에 이양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동남아시아 해안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현지 왕국들이 동원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양의 총포 기술이 아시아에 이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화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베트남은 레 왕조(1428~1526) 때부터 서양식 총포와 화기를 생산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기술을 배웠고, 바다에 침몰한 유럽의 배에서 총포를 건지고 유럽인 기술자를 고용해 총포의 제작을 연구해 냈다. 17세기에 후기 레(黎) 왕조가 분열하여 북부에 찐(鄭) 왕조의 세력과 남부의 응우옌(阮) 왕조의 세력으로 분단되었을 때, 응우옌 왕조에게는 청동제 대표 1,200문을 보유했고, 찐 왕조의 세력도 50~60문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700년 대 말기, 떠이선(西山) 농민 반란군에게 추격을 받은 응우옌 왕조의 어린 왕인 푹 아인(阮福映)은 무수한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도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쪽 메콩 강 삼각주로 도주했다. 이와 같은 패배와 상실로 인해 응우옌 푹 아인은 마침 베트남 남부, 메콩 강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 군대와 만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아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고, 태국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1777년 푹 아인이 타이만에 있는 푸꾸억(Phú Quốc) 섬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브엔느(Pigneau de Behaine) 주교를 만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인 신부의 성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푹 아인은 브엔느 주교를 통해 많은 프랑스 인맥들을 만났다. 폭 아인은 장남 푹 까인을 브엔느 주교와 함께 프랑스에 보내고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브엔느 주교는 파리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는 지원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쟈 딘을 장악했고, 금으로 만든 꽃을 태국에 조공으로 지원을 얻어냈다. 왕복 6년 여(1783~1789) 동안 긴 여행 끝에 브엔느 주교는 카톨릭 세례를 받은 어린 왕태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푹 아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브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게 된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는 그 돈으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을 끌어 모아 푹 아인을 돕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가 데리고 온 인물들이었다. 요새 건축술과 보병 훈련을 감독한 올리비에 드 퓨이마넬(Olivier de Puymanel), 서양식 범선 운영기술자 장 밥티스트 쉐뇨(Baptiste Cheño)와 필리프 바니에르(Philippe Vanier), 지도측량 전문가 장-마리 디요(Jean-Marie Dillo)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푹 아인의 군대와 전술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용병 중에는 무기 제조, 성곽 건축, 선박 제조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쟈 딘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푹 아인의 세력은 말라카, 페낭, 바타비야 등 당시 영국 또는 네덜란드 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로 가 선진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쟈 딘의 푹 아인 정권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떠이 선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메콩 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도 큰 몫을 했다. 푹 아인은 프랑스의 군사 기술을 배워 북진에 나서 베트남을 통일했으니, 이 왕조가 베트남의 마지막 응우옌(阮) 왕조이다. 더불어 서양의 군사기술은 아시아 토착 왕국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어 미얀마 페구(Peguk, 현재는 Bago)에는 인도인들이 화약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페구 성을 세 차례나 공략했지만, 페구를 지키는 현지군은 도리어 포르투갈 화기로 무장해 방어하며 버텨냈다. 17세기 초, 미얀마 군대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암(Syriam)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포르투갈 인들을 아바(Ava)로 이주시켰다. 미얀마는 포르투갈 인들의 무기를 근간으로 화기부대를 조직했다. 여기에다 코끼리 부대까지 편성해 화승총에 포병을 합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인도차이나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통구왕조(Toungoo dynasty)는 1564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는데, 서양제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미얀마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서양식으로 무장했다. 1538년 파랍시 국왕은 120명의 포르투갈 인으로 근위부대를 설립하고 태국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16세기말에는 성능이 우수한 화약과 총포를 자체 제작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줄곧 당하기만 했다. 태국이 버마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시기는 18세기 탁신 대왕(Taksin the Great, 재위 : 1767~1782년) 때였다. 1767년 4월 버마 왕국이 침공해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자 태국 각지에서 타이족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한 사람이 탁신이었다.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비록 그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지만 갑자기 세력 확대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에 나타난 분석이다. 탁신 대왕 때 포르투갈 조총에서 개조된 태국산 총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국과 교역하면서 태국식 총을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아체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는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오스만투르크가 아체에 대포와 탄약을 지원했다.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지원받은 대포로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포르투갈은 또 다른 현지 술탄국인 조호루 술탄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라카를 방어했다. 동남아시아 왕국 또는 술탄국들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접촉했기 때문에 서양화기 도입도 빨랐다.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호주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는 1570~1630년대를 걸쳐 동남아시아 교역 발전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를 두고 ‘상업의 시대“라고 불렀다. 리드는 동남아시아의 지배자들이 상품 유통의 요충지를 장악해서 국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큰 이익을 취했고, 군사기술을 도입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왕권 하에 절대주의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를 동아시아에 ’국가 형성의 시대‘라고도 했다.
-
- 칼럼
- Nova Topos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
포토뉴스 검색결과
-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
- 칼럼
- Nova Topos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
- 칼럼
- Nova Topos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
-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로 인해 대항해 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대항해 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 무역 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 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었음 좋은데 그와 같은 평야도 부족했다. 게다가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 중심지에서 떨어진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전통 귀족 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배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Abis)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럽게 해양 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리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보다는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내부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식민화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투르크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기독교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황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 인들은 흥미를 느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인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 16~17세기 유럽인들이 밀려왔을 때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역사의 근간을 이룩한 왕국들이 건재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베트남 인에 의해 응오(吳)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어 딘(丁), 레(黎), 리(李), 쩐(陳), 호(胡) 왕조로 이어졌고, 15세기 이후 후기 레(黎) 왕조가 막(莫)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정권을 교체할 때마다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며 침공해왔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베트남에 서양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상 제국이었다. 7세기에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이 인도네시아 열도와 말레이 반도를 통치하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해 14세기까지 이어 나갔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들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로 건너와 마타람(Mataram), 반템(Bantem), 아체(Aceh) 술탄국을 건설해 할거했다. 태국에는 중국 운남(雲南)에서 거주하던 타이족(泰族)이 남하해 건국한 아유타야(Ayutthaya, 1351~1767)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 제국이 600년을 지배한 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베트남 남쪽인 참파를 지배하에 두고 자치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동남아시아 인들을 볼 때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이 야만적인 민족들로 보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향료 열도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향료 나무를 심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해안에 포격을 가해 항구를 만들려 했지만, 토착 왕국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일본에 전해진 서양인의 조총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을 주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원동력이 된 것과 같이 동남아시아의 왕국들도 서양의 선진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선만이 서양 총포 기술을 받아들 것이 인색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거점은 말라카(Malacca)였다. 말레이 반도 서부 해안의 이곳은 말라카 술탄국이 지배했는데, 1511년 포르투갈이 1,200명의 병력과 7~8척의 전함을 동원해 말라카를 점령했고, 이어 1606년에 네덜란드에 탈취 당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1824년 영국에 이양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동남아시아 해안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현지 왕국들이 동원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양의 총포 기술이 아시아에 이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화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베트남은 레 왕조(1428~1526) 때부터 서양식 총포와 화기를 생산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기술을 배웠고, 바다에 침몰한 유럽의 배에서 총포를 건지고 유럽인 기술자를 고용해 총포의 제작을 연구해 냈다. 17세기에 후기 레(黎) 왕조가 분열하여 북부에 찐(鄭) 왕조의 세력과 남부의 응우옌(阮) 왕조의 세력으로 분단되었을 때, 응우옌 왕조에게는 청동제 대표 1,200문을 보유했고, 찐 왕조의 세력도 50~60문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700년 대 말기, 떠이선(西山) 농민 반란군에게 추격을 받은 응우옌 왕조의 어린 왕인 푹 아인(阮福映)은 무수한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도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쪽 메콩 강 삼각주로 도주했다. 이와 같은 패배와 상실로 인해 응우옌 푹 아인은 마침 베트남 남부, 메콩 강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 군대와 만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아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고, 태국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1777년 푹 아인이 타이만에 있는 푸꾸억(Phú Quốc) 섬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브엔느(Pigneau de Behaine) 주교를 만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인 신부의 성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푹 아인은 브엔느 주교를 통해 많은 프랑스 인맥들을 만났다. 폭 아인은 장남 푹 까인을 브엔느 주교와 함께 프랑스에 보내고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브엔느 주교는 파리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는 지원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쟈 딘을 장악했고, 금으로 만든 꽃을 태국에 조공으로 지원을 얻어냈다. 왕복 6년 여(1783~1789) 동안 긴 여행 끝에 브엔느 주교는 카톨릭 세례를 받은 어린 왕태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푹 아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브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게 된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는 그 돈으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을 끌어 모아 푹 아인을 돕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가 데리고 온 인물들이었다. 요새 건축술과 보병 훈련을 감독한 올리비에 드 퓨이마넬(Olivier de Puymanel), 서양식 범선 운영기술자 장 밥티스트 쉐뇨(Baptiste Cheño)와 필리프 바니에르(Philippe Vanier), 지도측량 전문가 장-마리 디요(Jean-Marie Dillo)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푹 아인의 군대와 전술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용병 중에는 무기 제조, 성곽 건축, 선박 제조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쟈 딘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푹 아인의 세력은 말라카, 페낭, 바타비야 등 당시 영국 또는 네덜란드 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로 가 선진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쟈 딘의 푹 아인 정권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떠이 선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메콩 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도 큰 몫을 했다. 푹 아인은 프랑스의 군사 기술을 배워 북진에 나서 베트남을 통일했으니, 이 왕조가 베트남의 마지막 응우옌(阮) 왕조이다. 더불어 서양의 군사기술은 아시아 토착 왕국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어 미얀마 페구(Peguk, 현재는 Bago)에는 인도인들이 화약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페구 성을 세 차례나 공략했지만, 페구를 지키는 현지군은 도리어 포르투갈 화기로 무장해 방어하며 버텨냈다. 17세기 초, 미얀마 군대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암(Syriam)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포르투갈 인들을 아바(Ava)로 이주시켰다. 미얀마는 포르투갈 인들의 무기를 근간으로 화기부대를 조직했다. 여기에다 코끼리 부대까지 편성해 화승총에 포병을 합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인도차이나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통구왕조(Toungoo dynasty)는 1564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는데, 서양제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미얀마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서양식으로 무장했다. 1538년 파랍시 국왕은 120명의 포르투갈 인으로 근위부대를 설립하고 태국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16세기말에는 성능이 우수한 화약과 총포를 자체 제작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줄곧 당하기만 했다. 태국이 버마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시기는 18세기 탁신 대왕(Taksin the Great, 재위 : 1767~1782년) 때였다. 1767년 4월 버마 왕국이 침공해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자 태국 각지에서 타이족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 한 사람이 탁신이었다.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비록 그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지만 갑자기 세력 확대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에 나타난 분석이다. 탁신 대왕 때 포르투갈 조총에서 개조된 태국산 총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국과 교역하면서 태국식 총을 거래했다고 한다. 한편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아체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는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오스만투르크가 아체에 대포와 탄약을 지원했다.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지원받은 대포로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포르투갈은 또 다른 현지 술탄국인 조호루 술탄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라카를 방어했다. 동남아시아 왕국 또는 술탄국들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접촉했기 때문에 서양화기 도입도 빨랐다.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호주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는 1570~1630년대를 걸쳐 동남아시아 교역 발전이 절정을 맞이했고, 이를 두고 ‘상업의 시대“라고 불렀다. 리드는 동남아시아의 지배자들이 상품 유통의 요충지를 장악해서 국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큰 이익을 취했고, 군사기술을 도입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왕권 하에 절대주의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를 동아시아에 ’국가 형성의 시대‘라고도 했다.
-
- 칼럼
- Nova Topos
-
중근세 시대 유럽이 동아시아에 출몰했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