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0(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뉴스 검색결과

  • 박성재 구속영장 기각…특검 내란 수사 제동
    2025년 10월 15일, 서울중앙지법은 내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는 한덕수 전 총리에 이어 특검 수사에서 두 번째 기각 사례다. 특검은 향후 불구속 기소 또는 재청구를 검토 중이다.
    • 뉴스
    • 사회
    2025-10-15

칼럼 검색결과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12세기 초에 편찬된『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최초의 루시 가문이 중심이 된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건국 배경에 대하여 여러 설화와 같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노르만 인과 슬라브 인의 통합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남하하였고 남쪽의 키예프를 장악하기까지 많은 통합전쟁이 있었다.『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했고 대다수의 북방 슬라브 인들과 루시 가문, 슬레비엔 가문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그가 키예프 지역에서 왕국을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노르만 인들을 초빙해서 통합 왕국을 세웠다는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 가문의 나라(Country family of the Rus)’가 건국된 것은 사실이나 건국설화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로마노프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사료 재(再)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류리크 왕조와 노르만 인으로 알려진 바랑기아 인들의 설화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어 진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가 엮여 있는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공후는 6세기 말에 나타난 폴리야닌(Poliyanin) 부족의 한 공후로 알려진 키 쉬체크(Kyi Shchek)와 키 코리브(Kyi Khoryv) 형제들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들어와 성을 축조했고 이들 형제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키의 형제들(Kyi of brothers)” 이라는 뜻의 키예프(Kive)로 전해지고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아바르 족과 하자르 제국 등 유목민족들과 유목국가들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반면에 다뉴브 강 유역과 비잔틴 제국 가까이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역으로 비잔틴 제국과 발칸 지역을 공격하는 공방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키예프 주변의 동 슬라브인들은 점점 내부 결속력을 다져갔다. 이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라는 연맹체의 시작이고 이 연맹체는 9세기 초에 이르러 동슬라브 여러 부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 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 인의 당시 남부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 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훈족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 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잔틴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911년 이후, 올레그는 912년 다시 5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크림 반도의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고르로 하여금 하자르 제국을 습격하여 하자르의 남동부 영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의 압박에 세력이 약화된 하자르 인들은 칸과 더불어 몇몇 영주들의 지휘 하에 서부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의 버리고 간 하자르 제국의 영토에는 키예프 공국이 접수하여 관할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자르 제국의 영역은 대부분 대(大) 모라비아 왕국이나 남부 판노니아 공국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건국되며 슬라브 화되거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자르 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하자르 제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968년에 보이는데 이후 하자르 족은 판노니아로 밀려들어온 마자르족에게 동화되거나 페체네그, 킵차크 인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2년 크림반도를 공격에 나선 올레그는 북 카프카스 인근까지 육, 해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전에 항복했던 아바르 족과 불가리아 제국의 포로들을 해군을 앞세워 키예프 공국의 남하를 막았다. 이로 인하여 아바르 인들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북 카프카스에는 아바르 족이라 불려지는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아바르 인들과 불가리아 포로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3세기부터 몽골 인들의 침입 시기부터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게 된다. 올레그는 바다에서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고 아바르 인과 불가리아 인들의 파상 공세로 인하여 해군으로써 크림반도 상륙에 실패했다. 그러자 육군은 크림반도 입구에까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도륙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약탈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크림반도 입구 지역으로 이주시켜 비잔틴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유도했다. 한편 판노니아 지역의 마자르 족은 키예프 공국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키예프 공국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자 올레그는 913년 초 마자르 족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했고 출정 도중 사망했다. 이러한 올레그는 영웅상은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은 불명확해보이나 르네 그루쎄 등의 유라시아 유목사학자들은 이러한 올레그에 대해 카프카스의 비잔틴을 공격했던 영웅이라는 북 카프카스 지역의 설화를 일례로 들어 올레그의 영웅상이 실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Kokovtsov P. S. 는 올레그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을 참칭한 자라고 발표하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와 가까운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Gregoire, H.는 올레그를 슬라브 인이 아닌 다른 민족, 노르만 인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보이며 10세기경 자료들이 상당수가 북유럽과 폴란드의 노르만으로 정의하고 기존의 한자 동맹 출신의 노르만 인들과 분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이들의 언어는 어족부터가 중세 슬라브어와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노르만인이 지배층이고 슬라브인이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올레그가 913년에 사망하자 루리크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올레그의 손에서 키워진 이고르(Igor)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고르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헌과 라틴 문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인생의 절반 정도는 전설적인 올레그에 비하여 이고르는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으로 검증된 보다 실증적인 통치자라고 하겠다. 이고르란 이름은 영어 기준으로 철자가 Igor 로 우크라이나에서는 Igori 라고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노르만 형식의 이름으로 북유럽의 뛰어난 전사를 Igoru 라고 한다. 이는 아스가르드를 지키던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Tore)를 노르웨이에서 바다의 전사라 하여 Igoru 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알려진 노르웨이 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고르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리며 그를 노르웨이계로 추정했다. 그래서 류리크의 유일한 직계 혈통으로 노르만계가 최초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지위를 승계하게 된 것이다. 이고르는 주변의 투르크계, 슬라브계, 아바르 인을 통합하여 이들 족장의 딸과 연속으로 결혼했다. 이는 혈통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혈족 중심의 왕조를 운영하고자 하는 포석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이고르는 페체네그 등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을 키예프 공국에서 최고위 관료의 칭호 겸 동부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칭호인 지기트(Jigit)를 하사했는데 이 지기트는 ‘외로운 늑대’ 혹은 ‘카프카스의 전사’를 뜻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고르는 94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내치를 다지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처럼 우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대(對)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개감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를 위해 러시아 각 평원의 경우 유목경제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에 대해 소탕하면서 내부의 위협을 방지했는데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연도가 각 학계의 연구에 따라 갈리고 있다. 특히 헝가리 학계에서는 970년대로 잡는 반면 러시아 자료는 930년대 초반을 소멸 연대로 잡고 있다. 이고르는 일부 정착세력과 옛 로마인들로부터 농업을 장려했다. 특히 서프랑크 제국의 사절들은 농업적인 부분에 있어 생산력 증대에 관한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 인하여 키예프 공국의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동프랑크 제국의 사절에게는 라틴어를 보급 받음으로 인하여 공식 문서를 라틴어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라틴어 문서들은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로부터 키릴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개종을 신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락하여 로마에서 보내진 비토리오(Vitorio)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고르가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카톨릭 관할구가 생성되었고 이후 헝가리 왕국이 세워지면서 헝가리 카톨릭 관할구에 합병된다. 그리고 이고르는 판노니아를 장악한 마자르 족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르 족과 동맹에 이어 발칸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왕국과 연달아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발칸 지역과 마자르의 문화 받아들였고 반면 카프카스 지방과 비잔틴 제국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3
  • 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 칼럼
    • Nova Topos
    2025-10-22
  •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조선 방문기에 대해
    러시아의 울랴노프스크(Ульяновск)에는 러시아 제국 시절 유명 문학가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이름을 차용한 거리가 있다. 곤차로프는 소설가로 볼가 강 연안의 울랴노프스크에서 상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과 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846년 비사리온 벨린스키(Виссарион Белинский, 1811~1848)과 절친이 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47년에 첫 작품인 <평범한 이야기(Обыкновенная история)>를 발표해서 문단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도예프(Адоев)라는 시적인 한 청년이 수많은 공상과 정열을 품고 있지만, 숙부의 냉담한 설득에 의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결국은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경로를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문단에 러시아 문학 내 이상주의를 환기했다. 그는 예프게니 뿌쨔친(Е. В. Путятин) 제독의 비서로서 세계일주에 올랐고, 1858년에 여행기인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를 발표했다. 당시 곤차로프가 여행한 팔라다 호는 1852년 10월 7일 청나라 5개 항구의 통상권 교섭, 러시아와 일본의 수교라는 임무를 갖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홍콩, 중국, 일본을 차례로 항해하던 팔라다 호는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1853년 8월 9일과 10일 사이 나가사키(長崎)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1차로 방문했다. 이후로 팔라다 호는 일본 정부와의 수교 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5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정하고 11월 11일 출발하였다. 그 후 팔라다호는 상하이 근처 새들 군도(Saddle Islands)를 출발하여 1853년 12월 24일 나카사키에 정박하여 일본을 2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2월 27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5월 22일 시베리아 해안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사이 1854년 4월 2일 안전 문제로 인해 조선의 작은 섬인 거문도에 임시 정박하여 4월 7일까지 머물렀다. 곤차로프는 당시 조선 땅과 조선인들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초가 지붕 뿐이고, 드물게 군데 군데 주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가장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류큐(현 오키나와)인에 비해 체격이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검고 투명해 햇볕을 전혀 차단하지 못하는 이상한 모자(갓)를 쓰고 있다는 점, 담장 쌓는 솜씨가 형편 없는 걸로 보아 게으른 민족일 것이란 추측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그는 조선의 지도 보완 등을 이유로 거문도와 동해안을 방문하고 조사하였는데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조선의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였다. 곤차로프는 조선 주민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헐벗은 산지 등에 실망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외세에 별 거부감이 없는 모습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곤차로프는 이어 자신이 쓴 수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든 것이 벌거벗었고, 궁핍하고 서글프게 보였다. 주민들이 우리에게 식료품을 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겨우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유럽인에 대한 불신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고, 조선 정부가 외국인과의 통상을 금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때인 지금 관계를 맺는 것이 더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유리병과 동으로 만든 단추, 도자기를 보고 달려들었다.” 아마 이는 곤차로프가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고, 안동김씨 세도정권 하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민중을 본듯 싶다. 그가 조선을 관찰한 시기가, 1854년(철종 5년)이니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할 시기였다. 때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 곤차로프가 본 조선인들은 안동김씨 정권에 수탈된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외에도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조선 등의 과거와 현재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특히 곤차로프는 계층 사회로 이루어진 일본의 관료주의, 쇼군과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에 대한 서민들의 공포심 등을 보고 크게 비판하였다. 곤차로프는 개인주의로 팽배한 중국 청나라 또한 뇌물로 부패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중국인이 더 이상 발전을 꿈꾸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또한 비판했다. 곤차로프는 중국이 단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여 개인주의와 불합리성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 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Любопытство вещей)’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갈망(Желание и тоска по переменам)’으로 파악했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유구(琉球), 조선 등의 민족을 하나의 가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곤차로프는 4개 민족 모두가 외모, 성격, 사고방식 등 공통되는 정신적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이 민족들이 갖고 있는 장점보다 ‘황폐하고 비참한 문명사회(Опустошенное и несчастное цивилизованное общество)’라는 시각을 갖고 4개 민족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차로프는 기본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이 인접성의 장점 때문에 유럽과 연결된 동북아시아의 상업적 미래는 매우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일본과 조선이 가깝고, 두 나라는 상하이와 가깝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곤차로프는 삼국이 유럽의 무역과 항해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고 있다. 곤차로프와 뿌챠찐 제독은 1854년 4월 6일 동해안을 탐사 도중에 러시아 함대 팔라다 호 소속 올리부차(Олибуча) 호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을 발견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아침에 발견한 두 개의 높은 바위는 반나절 동안 시야에 있었으며, 이제 명확해졌다. 두 개의 제법 높고 예각의 벌거벗은 바위는 약 300 사젠(642m) 떨어져 있었다. 이들 중 더 높은 서쪽 섬을 ‘올리부차(Олибуча)’라 명명했다. 동쪽 섬을…‘메넬라이(Менелай)’라고 불렀다.” 참고로 올리부차(Олибуча)로 명명된 서쪽 섬은 독도의 서도, 메넬라이(Менелай)로 이름 지어진 동쪽 섬은 동도로 나타나며 아는 서양이 최초로 명명한 독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러시아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팔라다호가 항해를 마친 2년 뒤인 1857년 러시아 해군부가 조선 동해안도를 그릴 때 독도를 포함시켰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 중에 하나인 것이다. 1858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생생히 기록한 여행기라는 점에서 문학가 안똔 쩨홉을 비롯해 여행을 동경했던 당대 러시아인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말미의 조선 불시착기는, 전체 여행 일정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6

포토뉴스 검색결과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12세기 초에 편찬된『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최초의 루시 가문이 중심이 된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건국 배경에 대하여 여러 설화와 같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노르만 인과 슬라브 인의 통합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남하하였고 남쪽의 키예프를 장악하기까지 많은 통합전쟁이 있었다.『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했고 대다수의 북방 슬라브 인들과 루시 가문, 슬레비엔 가문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그가 키예프 지역에서 왕국을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노르만 인들을 초빙해서 통합 왕국을 세웠다는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 가문의 나라(Country family of the Rus)’가 건국된 것은 사실이나 건국설화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로마노프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사료 재(再)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류리크 왕조와 노르만 인으로 알려진 바랑기아 인들의 설화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어 진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가 엮여 있는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공후는 6세기 말에 나타난 폴리야닌(Poliyanin) 부족의 한 공후로 알려진 키 쉬체크(Kyi Shchek)와 키 코리브(Kyi Khoryv) 형제들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들어와 성을 축조했고 이들 형제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키의 형제들(Kyi of brothers)” 이라는 뜻의 키예프(Kive)로 전해지고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아바르 족과 하자르 제국 등 유목민족들과 유목국가들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반면에 다뉴브 강 유역과 비잔틴 제국 가까이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역으로 비잔틴 제국과 발칸 지역을 공격하는 공방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키예프 주변의 동 슬라브인들은 점점 내부 결속력을 다져갔다. 이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라는 연맹체의 시작이고 이 연맹체는 9세기 초에 이르러 동슬라브 여러 부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 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 인의 당시 남부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 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훈족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 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잔틴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911년 이후, 올레그는 912년 다시 5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크림 반도의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고르로 하여금 하자르 제국을 습격하여 하자르의 남동부 영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의 압박에 세력이 약화된 하자르 인들은 칸과 더불어 몇몇 영주들의 지휘 하에 서부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의 버리고 간 하자르 제국의 영토에는 키예프 공국이 접수하여 관할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자르 제국의 영역은 대부분 대(大) 모라비아 왕국이나 남부 판노니아 공국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건국되며 슬라브 화되거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자르 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하자르 제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968년에 보이는데 이후 하자르 족은 판노니아로 밀려들어온 마자르족에게 동화되거나 페체네그, 킵차크 인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2년 크림반도를 공격에 나선 올레그는 북 카프카스 인근까지 육, 해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전에 항복했던 아바르 족과 불가리아 제국의 포로들을 해군을 앞세워 키예프 공국의 남하를 막았다. 이로 인하여 아바르 인들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북 카프카스에는 아바르 족이라 불려지는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아바르 인들과 불가리아 포로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3세기부터 몽골 인들의 침입 시기부터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게 된다. 올레그는 바다에서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고 아바르 인과 불가리아 인들의 파상 공세로 인하여 해군으로써 크림반도 상륙에 실패했다. 그러자 육군은 크림반도 입구에까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도륙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약탈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크림반도 입구 지역으로 이주시켜 비잔틴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유도했다. 한편 판노니아 지역의 마자르 족은 키예프 공국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키예프 공국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자 올레그는 913년 초 마자르 족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했고 출정 도중 사망했다. 이러한 올레그는 영웅상은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은 불명확해보이나 르네 그루쎄 등의 유라시아 유목사학자들은 이러한 올레그에 대해 카프카스의 비잔틴을 공격했던 영웅이라는 북 카프카스 지역의 설화를 일례로 들어 올레그의 영웅상이 실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Kokovtsov P. S. 는 올레그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을 참칭한 자라고 발표하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와 가까운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Gregoire, H.는 올레그를 슬라브 인이 아닌 다른 민족, 노르만 인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보이며 10세기경 자료들이 상당수가 북유럽과 폴란드의 노르만으로 정의하고 기존의 한자 동맹 출신의 노르만 인들과 분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이들의 언어는 어족부터가 중세 슬라브어와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노르만인이 지배층이고 슬라브인이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올레그가 913년에 사망하자 루리크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올레그의 손에서 키워진 이고르(Igor)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고르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헌과 라틴 문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인생의 절반 정도는 전설적인 올레그에 비하여 이고르는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으로 검증된 보다 실증적인 통치자라고 하겠다. 이고르란 이름은 영어 기준으로 철자가 Igor 로 우크라이나에서는 Igori 라고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노르만 형식의 이름으로 북유럽의 뛰어난 전사를 Igoru 라고 한다. 이는 아스가르드를 지키던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Tore)를 노르웨이에서 바다의 전사라 하여 Igoru 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알려진 노르웨이 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고르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리며 그를 노르웨이계로 추정했다. 그래서 류리크의 유일한 직계 혈통으로 노르만계가 최초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지위를 승계하게 된 것이다. 이고르는 주변의 투르크계, 슬라브계, 아바르 인을 통합하여 이들 족장의 딸과 연속으로 결혼했다. 이는 혈통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혈족 중심의 왕조를 운영하고자 하는 포석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이고르는 페체네그 등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을 키예프 공국에서 최고위 관료의 칭호 겸 동부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칭호인 지기트(Jigit)를 하사했는데 이 지기트는 ‘외로운 늑대’ 혹은 ‘카프카스의 전사’를 뜻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고르는 94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내치를 다지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처럼 우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대(對)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개감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를 위해 러시아 각 평원의 경우 유목경제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에 대해 소탕하면서 내부의 위협을 방지했는데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연도가 각 학계의 연구에 따라 갈리고 있다. 특히 헝가리 학계에서는 970년대로 잡는 반면 러시아 자료는 930년대 초반을 소멸 연대로 잡고 있다. 이고르는 일부 정착세력과 옛 로마인들로부터 농업을 장려했다. 특히 서프랑크 제국의 사절들은 농업적인 부분에 있어 생산력 증대에 관한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 인하여 키예프 공국의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동프랑크 제국의 사절에게는 라틴어를 보급 받음으로 인하여 공식 문서를 라틴어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라틴어 문서들은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로부터 키릴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개종을 신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락하여 로마에서 보내진 비토리오(Vitorio)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고르가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카톨릭 관할구가 생성되었고 이후 헝가리 왕국이 세워지면서 헝가리 카톨릭 관할구에 합병된다. 그리고 이고르는 판노니아를 장악한 마자르 족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르 족과 동맹에 이어 발칸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왕국과 연달아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발칸 지역과 마자르의 문화 받아들였고 반면 카프카스 지방과 비잔틴 제국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3
  • 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 칼럼
    • Nova Topos
    2025-10-22
  •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조선 방문기에 대해
    러시아의 울랴노프스크(Ульяновск)에는 러시아 제국 시절 유명 문학가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이름을 차용한 거리가 있다. 곤차로프는 소설가로 볼가 강 연안의 울랴노프스크에서 상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과 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846년 비사리온 벨린스키(Виссарион Белинский, 1811~1848)과 절친이 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47년에 첫 작품인 <평범한 이야기(Обыкновенная история)>를 발표해서 문단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도예프(Адоев)라는 시적인 한 청년이 수많은 공상과 정열을 품고 있지만, 숙부의 냉담한 설득에 의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결국은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경로를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문단에 러시아 문학 내 이상주의를 환기했다. 그는 예프게니 뿌쨔친(Е. В. Путятин) 제독의 비서로서 세계일주에 올랐고, 1858년에 여행기인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를 발표했다. 당시 곤차로프가 여행한 팔라다 호는 1852년 10월 7일 청나라 5개 항구의 통상권 교섭, 러시아와 일본의 수교라는 임무를 갖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홍콩, 중국, 일본을 차례로 항해하던 팔라다 호는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1853년 8월 9일과 10일 사이 나가사키(長崎)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1차로 방문했다. 이후로 팔라다 호는 일본 정부와의 수교 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5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정하고 11월 11일 출발하였다. 그 후 팔라다호는 상하이 근처 새들 군도(Saddle Islands)를 출발하여 1853년 12월 24일 나카사키에 정박하여 일본을 2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2월 27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5월 22일 시베리아 해안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사이 1854년 4월 2일 안전 문제로 인해 조선의 작은 섬인 거문도에 임시 정박하여 4월 7일까지 머물렀다. 곤차로프는 당시 조선 땅과 조선인들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초가 지붕 뿐이고, 드물게 군데 군데 주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가장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류큐(현 오키나와)인에 비해 체격이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검고 투명해 햇볕을 전혀 차단하지 못하는 이상한 모자(갓)를 쓰고 있다는 점, 담장 쌓는 솜씨가 형편 없는 걸로 보아 게으른 민족일 것이란 추측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그는 조선의 지도 보완 등을 이유로 거문도와 동해안을 방문하고 조사하였는데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조선의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였다. 곤차로프는 조선 주민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헐벗은 산지 등에 실망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외세에 별 거부감이 없는 모습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곤차로프는 이어 자신이 쓴 수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든 것이 벌거벗었고, 궁핍하고 서글프게 보였다. 주민들이 우리에게 식료품을 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겨우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유럽인에 대한 불신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고, 조선 정부가 외국인과의 통상을 금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때인 지금 관계를 맺는 것이 더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유리병과 동으로 만든 단추, 도자기를 보고 달려들었다.” 아마 이는 곤차로프가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고, 안동김씨 세도정권 하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민중을 본듯 싶다. 그가 조선을 관찰한 시기가, 1854년(철종 5년)이니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할 시기였다. 때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 곤차로프가 본 조선인들은 안동김씨 정권에 수탈된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외에도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조선 등의 과거와 현재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특히 곤차로프는 계층 사회로 이루어진 일본의 관료주의, 쇼군과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에 대한 서민들의 공포심 등을 보고 크게 비판하였다. 곤차로프는 개인주의로 팽배한 중국 청나라 또한 뇌물로 부패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중국인이 더 이상 발전을 꿈꾸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또한 비판했다. 곤차로프는 중국이 단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여 개인주의와 불합리성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 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Любопытство вещей)’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갈망(Желание и тоска по переменам)’으로 파악했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유구(琉球), 조선 등의 민족을 하나의 가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곤차로프는 4개 민족 모두가 외모, 성격, 사고방식 등 공통되는 정신적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이 민족들이 갖고 있는 장점보다 ‘황폐하고 비참한 문명사회(Опустошенное и несчастное цивилизованное общество)’라는 시각을 갖고 4개 민족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차로프는 기본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이 인접성의 장점 때문에 유럽과 연결된 동북아시아의 상업적 미래는 매우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일본과 조선이 가깝고, 두 나라는 상하이와 가깝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곤차로프는 삼국이 유럽의 무역과 항해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고 있다. 곤차로프와 뿌챠찐 제독은 1854년 4월 6일 동해안을 탐사 도중에 러시아 함대 팔라다 호 소속 올리부차(Олибуча) 호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을 발견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아침에 발견한 두 개의 높은 바위는 반나절 동안 시야에 있었으며, 이제 명확해졌다. 두 개의 제법 높고 예각의 벌거벗은 바위는 약 300 사젠(642m) 떨어져 있었다. 이들 중 더 높은 서쪽 섬을 ‘올리부차(Олибуча)’라 명명했다. 동쪽 섬을…‘메넬라이(Менелай)’라고 불렀다.” 참고로 올리부차(Олибуча)로 명명된 서쪽 섬은 독도의 서도, 메넬라이(Менелай)로 이름 지어진 동쪽 섬은 동도로 나타나며 아는 서양이 최초로 명명한 독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러시아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팔라다호가 항해를 마친 2년 뒤인 1857년 러시아 해군부가 조선 동해안도를 그릴 때 독도를 포함시켰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 중에 하나인 것이다. 1858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생생히 기록한 여행기라는 점에서 문학가 안똔 쩨홉을 비롯해 여행을 동경했던 당대 러시아인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말미의 조선 불시착기는, 전체 여행 일정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