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4(금)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칼럼 검색결과

  • 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서아프리카의 대국 코트디부아르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다. 한 때 1970~80년대는 경제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카카오 생산국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먼저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 147.3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72년 309.3달러였다가 1979년 1,225.4달러로 7년 만에 4배나 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1,025.9달러로 처음으로 1,000달러를 넘겼을 정도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치고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국가였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장을 짓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하는 등, 프랑스의 제조업이 코트디부아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석유, 천연가스, 금, 망간, 다이아몬드, 구리, 철광석이 풍부하고 해상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하다. 물론 해저유전이나 가스전은 거의 프랑스가 위탁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러시아가 프랑스에 가스 수출을 중지했어도 프랑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로도 친프랑스 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왔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에 여러 부분에서 개입하고 간섭함으로 인해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립했어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00년대 들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국가다. 장기적인 정치 위기의 늪에 빠져 있었던데다 2002년의 민중 봉기에 이어 국토가 분할된 상태로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5년과 20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모두 정상적인 조건에서 치러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1999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권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특히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안정적인 독재에서 다원주의 정치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이 깨지게 된 것은 198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서부터다.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의 핵심부문을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경기 향방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978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화를 빌리면서까지 투자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왔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도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차용하여 카카오의 가격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 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나가자 외국 기업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단체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 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으며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보건소에 다녀오려면 돈을 내야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리니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의료 복지를 도입하다 실패하게 되었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 되어 대규모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고 결국 외국 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한 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독보적으로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내려 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자 거의 헐값으로 일하다시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폭동으로 번졌다. 이 때 많은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웃 국가인 말리나, 차드, 니제르 등 여러 이웃 국가들에서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부모를 당시에 잃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코트디부아르의 추락은 건국 이후, 무려 33년 동안 독재를 행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도 해결하지 못했다. 구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2023)가 대통령이 된다. 당시 재무장관이 현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였지만 베디에 대통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디에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친프랑스계파였다. 게다가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코트디부아르 경제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이끌었다. 그러나 베디에의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의존형 정책이었다. 프랑스의 복지를 코트디부아르에 정착시키려 했으며 상당수의 기업들과 공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를 파탄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와타라가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와타라는 프랑스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다변화 하는 경제 체제 및 미국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경제 침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와타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친미파로 분류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에 IMF 근무라면, 네오콘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와타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 와타라는 총리 겸 재무장관이었지만 1995년 12월 9일 알라산 와타라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만큼 장기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통치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에 북부 지역 무슬림과 이주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외국인을 배격했던 당시의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의 뜻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유지했지만 경제 정책은 여전히 프랑스 의존형을 유지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1999년 12월 24일 투오 포지에(Tuo Fozié)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고 로베르 게이(Robert Guéï, 1941~2002)가 대통령이 되었다. 권좌에서 추방된 베디에는 2000년 토고를 통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면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코트디부아르 헌법재판소에 의해 출마가 금지되었고 결국 대선을 보이콧하게 된다. 그런데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선거 현황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거대한 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이에 3일 동안 민중 봉기가 발생하여 로베르 게이 장군이 추방되고 그바그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추방된 로베르 게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사하라 지대로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그바그보의 정부군과 게릴라 전을 벌였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장기간 계속되고 결국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영광은 바닥에 쳐박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코트디부아르를 바로 잡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이가 전임 총리였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다. 그러나 그바그보에 의해 개정된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와타라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에 당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었던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는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007년에 대통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다. 본래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은 내전으로 인해 201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고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제3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놓였지만 더 이상의 내전을 바라지 않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와타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행히 와타라가 대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이 때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예전 6~70년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을 앞세워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번 해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코트디부아르 집권당(RHDP)에서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고,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 찰스 블레 구데, 기욤 소로 전 총리 등 다른 야당 후보 3명이 출마를 포기했고 야당 지도자 티잔 티엄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대표가 이중 국적 문제로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와타라의 4선 당선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여 진다. 결국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부흥을 성공시켰지만 2020년 3선 당시, 헌법의 자의적 억지해석으로 출마해 독재의 기반을 쌓았더니, 이번에도 4선을 통해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여겨 진다. 현재 그의 나이는 83세로 고령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88세까지 권좌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5

포토뉴스 검색결과

  • 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서아프리카의 대국 코트디부아르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다. 한 때 1970~80년대는 경제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카카오 생산국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먼저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 147.3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72년 309.3달러였다가 1979년 1,225.4달러로 7년 만에 4배나 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1,025.9달러로 처음으로 1,000달러를 넘겼을 정도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치고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국가였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장을 짓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하는 등, 프랑스의 제조업이 코트디부아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석유, 천연가스, 금, 망간, 다이아몬드, 구리, 철광석이 풍부하고 해상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하다. 물론 해저유전이나 가스전은 거의 프랑스가 위탁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러시아가 프랑스에 가스 수출을 중지했어도 프랑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로도 친프랑스 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왔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에 여러 부분에서 개입하고 간섭함으로 인해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립했어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00년대 들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국가다. 장기적인 정치 위기의 늪에 빠져 있었던데다 2002년의 민중 봉기에 이어 국토가 분할된 상태로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5년과 20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모두 정상적인 조건에서 치러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1999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권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특히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안정적인 독재에서 다원주의 정치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이 깨지게 된 것은 198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서부터다.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의 핵심부문을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경기 향방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978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화를 빌리면서까지 투자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왔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도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차용하여 카카오의 가격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 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나가자 외국 기업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단체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 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으며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보건소에 다녀오려면 돈을 내야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리니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의료 복지를 도입하다 실패하게 되었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 되어 대규모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고 결국 외국 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한 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독보적으로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내려 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자 거의 헐값으로 일하다시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폭동으로 번졌다. 이 때 많은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웃 국가인 말리나, 차드, 니제르 등 여러 이웃 국가들에서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부모를 당시에 잃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코트디부아르의 추락은 건국 이후, 무려 33년 동안 독재를 행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도 해결하지 못했다. 구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2023)가 대통령이 된다. 당시 재무장관이 현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였지만 베디에 대통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디에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친프랑스계파였다. 게다가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코트디부아르 경제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이끌었다. 그러나 베디에의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의존형 정책이었다. 프랑스의 복지를 코트디부아르에 정착시키려 했으며 상당수의 기업들과 공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를 파탄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와타라가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와타라는 프랑스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다변화 하는 경제 체제 및 미국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경제 침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와타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친미파로 분류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에 IMF 근무라면, 네오콘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와타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 와타라는 총리 겸 재무장관이었지만 1995년 12월 9일 알라산 와타라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만큼 장기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통치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에 북부 지역 무슬림과 이주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외국인을 배격했던 당시의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의 뜻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유지했지만 경제 정책은 여전히 프랑스 의존형을 유지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1999년 12월 24일 투오 포지에(Tuo Fozié)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고 로베르 게이(Robert Guéï, 1941~2002)가 대통령이 되었다. 권좌에서 추방된 베디에는 2000년 토고를 통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면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코트디부아르 헌법재판소에 의해 출마가 금지되었고 결국 대선을 보이콧하게 된다. 그런데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선거 현황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거대한 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이에 3일 동안 민중 봉기가 발생하여 로베르 게이 장군이 추방되고 그바그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추방된 로베르 게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사하라 지대로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그바그보의 정부군과 게릴라 전을 벌였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장기간 계속되고 결국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영광은 바닥에 쳐박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코트디부아르를 바로 잡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이가 전임 총리였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다. 그러나 그바그보에 의해 개정된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와타라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에 당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었던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는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007년에 대통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다. 본래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은 내전으로 인해 201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고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제3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놓였지만 더 이상의 내전을 바라지 않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와타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행히 와타라가 대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이 때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예전 6~70년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을 앞세워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번 해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코트디부아르 집권당(RHDP)에서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고,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 찰스 블레 구데, 기욤 소로 전 총리 등 다른 야당 후보 3명이 출마를 포기했고 야당 지도자 티잔 티엄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대표가 이중 국적 문제로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와타라의 4선 당선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여 진다. 결국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부흥을 성공시켰지만 2020년 3선 당시, 헌법의 자의적 억지해석으로 출마해 독재의 기반을 쌓았더니, 이번에도 4선을 통해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여겨 진다. 현재 그의 나이는 83세로 고령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88세까지 권좌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2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