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7(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뉴스 검색결과

  • 美 법원, 트럼프 상호관세 ‘위헌’ 판결…무역 질서 판도 흔든다
    [워싱턴=2025.5.28.] 미국 연방국제통상법원(CIT)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시행한 '상호관세 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28일(현지시간) “관세 부과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 권한”이라며, 트럼프의 상호관세 발효를 영구 금지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2일, 이른바 ‘해방의 날’ 행사에서 수입국에 비례한 관세 부과 정책을 공식 발표하며, 10%의 보편 관세와 최대 25%의 국가별 상호관세 부과를 예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뉴욕 소재 기업 5곳이 헌법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따른 관세 부과가 과도한 권한 행사라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향후 미·중·한 등 주요 통상 파트너국과의 협상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중국은 “관세 전면 철폐”를 요구했고, 일본은 “판결의 영향 신중히 검토”라는 입장을 냈다. 한국은 당초 7월 8일까지였던 관세 협상 마감 기한이 무의미해지면서 협상 시간을 벌게 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항소를 제기했으며, 무역법 232조나 301조 등 우회 경로를 검토 중이다. 전문가들은 “법원이 대통령의 관세를 협상 지렛대로 쓰는 행위를 부정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이 향후 행정권 남용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 뉴스
    • 지구촌
    2025-05-29

칼럼 검색결과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4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0
  • 바레인의 독립과 헌법 제정의 과정에서 민주화 시기까지
    바레인은 18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주해 온 알 칼리파 가문이 국가의 기초를 만든 후 1971년 영국군의 수에즈 동쪽 지역의 철군과 더불어 족장이었던 이사 이븐 술만 알 칼리파(Isa Ibn Sulman Al Khalifa)의 주도로 독립하면서 왕실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바레인 군주에 대한 칭호는 1783~1971년에는 바레인 하킴(Hakim of Bahrain), 독립 이후에는 에미르(Emir)였으며, 2002년 2월 수정 헌법에 따라 국왕(King of Bahrain)으로 바뀌었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바레인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단원제 의회와 선출된 의회의원이 장관으로 임용될 수 있다는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레인 헌법에서 30명의 의원은 성인 남자로 제한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은 당연직 의원이 된다. 이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12일 국민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5년에 1973년에 만든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1975년부터 2001년까지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으로 통치하였다. 현재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원제 국회를 포함하는 1973년 헌법으로 복귀를 요구한다. 1973년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바레인 최초로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30명의 국민의회(The National Assembly of Bahrain) 의원들이 20개의 선거 구역에서 비밀투표, 과반수 적용 안 되는 단순 다수의 득표율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참정권은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함께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이 국민의회의 당연직 구성원들이 됨으로 인해 전체 의원의 수는 44명이 되었다. 24,883명의 등록된 유권자 가운데 19,509명이 투표함으로 인해, 투표율은 78.4%였다. 당시 정당설립과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2개의 강력한 정치 블록인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이 출현하였다. 인민 블록(People's Bloc)을 보자면 도시 지역에서 8명이 선출되었다. 인민 블록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포괄하는 것으로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1965년에 제정된 보안 조치 폐지를 주장하면서, 좌파적이고 아라비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바레인 인민해방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Bahrain, PFLB, 1974~2001)과 바쓰 운동으로 알려진 바레인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Bahrain, NLFB)과 제휴하였다. 인민 블록은 알리 카심 라베아(Ali Qasim Rabea), 압둘 하디 칼라프(Abdulhadi Khalaf) 등을 포함하였다. 압둘 라흐만 알 누아이미를 비롯한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 간부들이 점령지인 아라비아 걸프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 1968-1974) 창설에 참가하였고, 1974년 PFLOAG 바레인 부문을 바레인 인민해방전선(PFLB)으로 분리 독립시켰다. 다른 하나는 6명의 시아파로 구성된 ‘종교 블록’으로 알려졌으며, 대부분 시골 선거구 출신으로 교사들과 종교법정 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종교 블록’은 셰이크 이사 카심(Sheikh Isa Qassim), 셰이크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Abdul Amir al-Jamri),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Sheikh Abdulla Al-Madani), 셰이크 압바스 알 라이스(Sheikh Abbas Al-Rayes), 술래이만 알 무바라크(Suleiman Al-Mubarak), 하산 알 무타우아즈(Hassan Al-Motawwaj)로 구성되었다. 당시 가장 탁월한 시아파 성직자였던 셰이크 만수르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Mansour Abdul Amir al-Jamri, 1938~2006)가 바레인의 종교 블록을 이끌면서, 817표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이 블록은 노동 조합을 지지하고, 음주를 금지하였으며 학교 내에서 남녀 분리, 남성 의사들의 여성 진료 금지 등 전통적인 관습과 관련된 다른 사항들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셰이크 이사 카심이 이 선거에서 1,079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15개 선거구 중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이사 카심은 현재 알 와파크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또 1967년까지 좌파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가 이 ‘종교 블록’에 들어와 771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당시 이념적인 경계가 완고하게 확고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구성원들은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무소속으로 알려졌다. 무소속 의원은 정부와 두 블록들,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 사이에서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당시 바레인 노동 운동 지도자들은 수많은 파업을 조직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74년 알 칼리파 정부는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을 표적으로 하여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을 제안하였다. 당시 국민 의회는 이 법안을 압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4년 아미르 령(The Amiri decree No. 4 / 1974)으로 1975년 8월 26일 국민의회를 해산시켰으며, 1999년에 사망할 때까지 국민 의회를 다시 소집하거나 선거를 허락하지 않았고, 국가 보안법으로 강력하게 통치하였다. 이 법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바레인에서 시행되었으며, 정부에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재판 없이 최대 3년까지 투옥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 국가보안 법정(State Security Courts)을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임의적인 체포나 고문을 허용하였다. 인권단체들(Human Rights Watch and 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25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위반을 용이하게 하였다. 2001년 하마드 국왕은 이 법을 폐기하고, 헌법을 회복시켰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dam bin Isa al Khalifah) 국왕은 1950년 1월 바레인 남부 지역의 리파(Riffa)에서 선왕인 이사 이븐 살만 알 칼리파(Isa ibn Salman Al Khalifah)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99년 3월 38년 동안 통치하였던 이븐 알 칼리파 왕이 타계한 이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첫 번째 부인인 왕비 샤이카 사비카 빈트 이브라힘 알 칼리파(Shaikha Sabika bint Ibrahim Al Khalifa)와의 사이에 왕세자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Salman Bin Hamad Al Khalifa) 등 6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인 파이잘 이븐 하마드 알 칼리파(Faisal ibn Hamad Al Khalifah) 왕자가 2006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알 칼리파 가문은 바레인의 현 왕실로 1766년 창설되었고 1783년부터 바레인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시아파 신도가 대부분인 자국민들과 다르게 수니파 이슬람을 신봉하며 이러한 종파로 인해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바니 우툽(Bani Utub) 연맹의 일원으로, 네지드 사막에 거주하다 17세기 사바흐 가문과 함께 쿠웨이트로 이주하게 된다. 다만 얼마 후, 사바흐 가문이 쿠웨이트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카타르의 북부 주바이라로 이주했다가, 18세기 친척인 사바 왕조의 도움으로 잔드 왕조 치하에 있던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그 후로 알 칼리파 가문은 현재까지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다. 19세기 오만 제국 및 사우드 왕조가 바레인을 장악하여 축출되는 등의 위기를 맞았지만, 영국과 보호 협정을 맺으며 안정을 확보하게 된다. 독립 후,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친선을 맺으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의 부친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영국의 보호국을 탈피하여 독립국이 된 1971년에 기존의 호칭인 하킴을 버리고 아미르로 호칭을 변경했다. 하마드 국왕은 2002년 왕이라는 뜻의 말리크로 호칭을 높였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mad bin Isa Al Khalifa)는 1950년 1월 28일에 출생했으며 현재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그는 바레인 리파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1년에 독립한 바레인의 첫 아미르였다. 그의 장남이었던 하마드는 1999년 3월에 부왕이 사망하면서 아미르 제위를 계승했고, 2002년에 아미르라는 지위를 왕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관식을 올리게 된다. 하마드 국왕은 2020년 말 오랫동안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삼촌이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인 살만 왕세자를 차기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바레인의 절대 군주일 뿐 아니라 억압적인 독재를 펼치는 전제 군주이다. 1990년에는 바레인에서 개혁을 원하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1994년에 대규모 시위 및 항쟁으로 변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이와 같은 시위는 1999년까지 일어났다. 그 이후 하마드가 즉위하면서 대사면 령을 내리고, 2000년대에는 의회를 재소집하려고 국민 투표를 하면서 차츰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명분이었고, 군 장성과 관료, 의원을 임명하는데 권한은 모두 오직 국왕에게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2002년에는 칭호를 종래의 아미르에서 말리크(왕)으로 높였고 권위주의 체제가 더 강화되면서 독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1년 중동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하면서 바레인에도 혁명의 조짐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했으나 경찰과 군인, 시민들의 투쟁으로 4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면서 대규모 항쟁이 발생한다. 결국 2011년 2월 14일에 일어난 시위는 3월에도 이어졌다. 그러자 하마드 국왕은 경찰과 군인들을 총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때 바레인 군경들은 실탄을 발포하여 수도 마나마에 있던 진주 광장의 시민들은 학살을 당했고, 진주 광장은 폐허로 변하면서 민주화 항쟁은 실패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마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걸프 만에 있는 수니파 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가 가장 먼저 파병하자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도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였고 이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더욱 강압적인 유혈 진압을 펼쳤다. 그리고 민주 항쟁의 흔적을 없애거나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싶었는지 광장과 중앙의 진주 탑을 철폐하고, 그 곳에서 레이스 경주대회를 하는 경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광장이 없어져도 계속 같은 장소에서 시민들은 2012년 3월까지 항쟁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지만 강경하게 진압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2014년 시위가 완전히 진압된 이후 진주 광장은 완전히 말살되어 2017년 알 파루크 교차로로 개조되었고 지금은 광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에게 감금한 후 잔인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4년부터 국왕 모독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최대 징역 7년과 벌금 1만 디나르(한화로 3,000만원)로 대폭 올렸다. 게다가 이 국왕을 포함한 바레인의 왕실 가문들은 친미 독재에 적응된 인물들이 많았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에게 외면을 당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이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독재자를 방조했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라비아 국가들의 수장들이 그러하듯이 하마드는 억압적인 독재를 자행하면서도 세속적인 종교 정책을 펼치면서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처럼 은근히 개방적인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하마드 국왕은 철저하게 정교분리를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 시위자들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순수한 민주화가 아니라 친 서방 수니파 세속주의 왕실을 타도하고 이란 식 반 서방 시아파 신정 독재를 요구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이 외면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리비아를 참조하여 파악하면 알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2
  • "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르포 : 미트로비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작년 내가 코소보에 있을 때 분쟁의 현장인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지구와 세르비아계 지구를 다녀온 바 있다. 프리슈티나에서 탄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알바니아계 지구이다. 어차피 세르비아-코소보는 국경이 폐쇄되어 세르비아계 지구로 가지도 못한다. 미트로비차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자치주들 간에 균열이 발생했다. 내전은 나토와 서방의 개입으로 1999년에 중단됐으나 세르비아는 코소보 자치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끝내 2006년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저 완전히 붕괴하고,몬테네그로가 독립했다. 그리고 2008년 이곳에서 코소보는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를 자국의 자치주로 보며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들도 독립을 인정하는 국가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로 분열되어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그 비극의 모든 것은 이곳 미트로비차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로비차에 도착하자마자 무슬림 무덤들이 나오고 유고슬라비아 때부터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이 도시가 세르비아 정교와 알바니아 무슬림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임을 말해주고 있다.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던 이곳은 당시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聖地)라는 이유로 알바니아계의 권리를 박탈하자 알바니아계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당국은 언론, 교육을 통제하여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수많은 자치주 내 알바니아계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이후 1992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연방이 붕괴하고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어 세르비아 공화국 관할 자치주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신 유고 연방의 일원이었다가, 신 유고 연방의 차별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계들과 세르비아계가 미트로비차에서 정면 충돌하여 1998년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을 주도했던 코소보인은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1955~1998)를 필두로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가 주축이 되어 세르비아에 항쟁했다. 특히 아뎀 야샤리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코소보를 분리하기 위해 싸웠던 코소보 알바니아 분리주의 민병대인 코소보 해방군(KLA)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그는 당시 미국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91년부터 야샤리는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알바니아로 가기 전, 세르비아 경찰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면서 대놓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1993년에 체포된 야샤리는 알바니아 군대의 구출 작전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나중에 코소보로 돌아와서 유고슬라비아 정권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는데 대부분이 자살폭탄테러로 인한 유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후 1997년 7월, 야샤리는 유고슬라비아 법원에서 궐석 테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은 이후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는 세르비아의 압제에 저항한 합법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세르비아가 이를 탄압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권 침해이자 탄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는 야샤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 그를 체포하거나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경찰은 1998년 3월 프레카즈에 있는 야샤리의 집에 그가 있음을 파악하고 제거 작전에 나섰다. 결국 총격전이 이어졌고 야샤리와 그의 아내, 형제, 아들을 포함하여 야샤리의 가족 57명이 전사했다. KLA의 아버지이자 國父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야샤리(Jashari)는 공동 지도자이자 동료인 하심 타치에 의해 추앙되었고 그는 후일 알바니아 민족에 의해 코소보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는 온건파인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와 전혀 극과 극의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야샤리는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 이후에 "코소보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프리슈티나 국립극장, 프리슈티나 국제공항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및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올림픽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후로 코소보 북부도시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로 모든 것이 갈라지게 된다. 이바르 강의 강북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했고 강남에는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쪽은 세르비아 정부가, 남쪽은 UN이 관할하기에 관할 기관도 다르다. 남북간에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바르 강의 다리는 두 곳이 존재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바르 강은 정확히 민족, 인종 간의 경계선이 됐다. 종전 이후, 세르비아군이 철수하자 그간 세르비아에 박해를 받아 온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보복 공격을 자행했다. 미트로비차의 참극은 코소보 전쟁의 시작점인 곳이었지만 종전 이후에도 두고 두고 유혈사태가 이어졌다. 참고로 미트로비차는 현재도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지정한 "철수 권고" 지역이다.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선으로 코소보 인종 분리의 상징이 됐다. 미트로비차 문제의 본질은 양측의 공존공생 모색에 있고 이 공존공생에 대한 해결 대안은 ‘자치 도시’를 만드는 것에 있다. 두 개의 자치도시를 만들면서 코소보 내에서 국제 관할 아래 두자는 것이 알바니아인들의 생각인 데 비해 세르비아인은 완전히 두 개의 자치도시로 분리해 북쪽은 세르비아에 귀속시키자는 입장에 있다. 세르비아인들의 요구 사항은 자치 도시 설립의 주요 목적으로 난민들의 고향 복귀와 안전 및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있다. 세르비아군의 철수 이후 25년 가까이 알바니아인들의 핍박과 박해 속에서 살아온 세르비아인들의 정상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알바니아 측은 자족적이며 지속 가능한 자치 도시 방안을 고수하고 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은 이바르 강을 북미트로비차의 코소보 편입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다. 이에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지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도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할지언정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민간인들의 자체 군사력 보유와 북미트로비차 합병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에 있다고 한다. 이에 집단서방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접촉 그룹은 세르비아에 대한 압박과 회유로 해법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만 양측 모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에 있다. 필자가 방문하기 얼마 전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세르비아 거주 지역을 침공해 세르비아 국기를 걸레로 만들고 몇몇 상점들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를 했다. 이 때 총 4명이 부상을 입고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일 동안 화염병 투척 당한 건물은 복구조차도 안 되고 있다. 이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정부가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려 있는 도로의 세르비아 국기마다 걸레처럼 변했다. 전쟁 전 코소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나토의 폭격 이후, 이바르 강 다리를 건너 피난해야 했다. 25만 명의 코소보 세르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큰 도시들로 피난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미트로비차 강북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미토로비차의 강북과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용하는 돈도 달라졌고 전화번호의 지역 번호조차 달라졌다. 지금은 물론 똑같은 유로를 내지만 미트로비차 북쪽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는 세르비아 디나르 화폐도 통용된다. 세르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인 미트로비차 강북에는 중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장갑차나 지프들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무장군인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하는 순찰 외에는 정상적인 납세나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어 무법상태와 마찬가지다. 강남의 알바니아 쪽에서는 강북의 세르비아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벌이며 침공해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두 계통 시민들 충돌의 현장, 필자는 이 비극의 현대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는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끊임없이 기록해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4
  • 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 칼럼
    • Nova Topos
    2025-05-22

포토뉴스 검색결과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0
  • 바레인의 독립과 헌법 제정의 과정에서 민주화 시기까지
    바레인은 18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주해 온 알 칼리파 가문이 국가의 기초를 만든 후 1971년 영국군의 수에즈 동쪽 지역의 철군과 더불어 족장이었던 이사 이븐 술만 알 칼리파(Isa Ibn Sulman Al Khalifa)의 주도로 독립하면서 왕실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바레인 군주에 대한 칭호는 1783~1971년에는 바레인 하킴(Hakim of Bahrain), 독립 이후에는 에미르(Emir)였으며, 2002년 2월 수정 헌법에 따라 국왕(King of Bahrain)으로 바뀌었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바레인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단원제 의회와 선출된 의회의원이 장관으로 임용될 수 있다는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레인 헌법에서 30명의 의원은 성인 남자로 제한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은 당연직 의원이 된다. 이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12일 국민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5년에 1973년에 만든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1975년부터 2001년까지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으로 통치하였다. 현재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원제 국회를 포함하는 1973년 헌법으로 복귀를 요구한다. 1973년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바레인 최초로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30명의 국민의회(The National Assembly of Bahrain) 의원들이 20개의 선거 구역에서 비밀투표, 과반수 적용 안 되는 단순 다수의 득표율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참정권은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함께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이 국민의회의 당연직 구성원들이 됨으로 인해 전체 의원의 수는 44명이 되었다. 24,883명의 등록된 유권자 가운데 19,509명이 투표함으로 인해, 투표율은 78.4%였다. 당시 정당설립과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2개의 강력한 정치 블록인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이 출현하였다. 인민 블록(People's Bloc)을 보자면 도시 지역에서 8명이 선출되었다. 인민 블록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포괄하는 것으로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1965년에 제정된 보안 조치 폐지를 주장하면서, 좌파적이고 아라비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바레인 인민해방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Bahrain, PFLB, 1974~2001)과 바쓰 운동으로 알려진 바레인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Bahrain, NLFB)과 제휴하였다. 인민 블록은 알리 카심 라베아(Ali Qasim Rabea), 압둘 하디 칼라프(Abdulhadi Khalaf) 등을 포함하였다. 압둘 라흐만 알 누아이미를 비롯한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 간부들이 점령지인 아라비아 걸프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 1968-1974) 창설에 참가하였고, 1974년 PFLOAG 바레인 부문을 바레인 인민해방전선(PFLB)으로 분리 독립시켰다. 다른 하나는 6명의 시아파로 구성된 ‘종교 블록’으로 알려졌으며, 대부분 시골 선거구 출신으로 교사들과 종교법정 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종교 블록’은 셰이크 이사 카심(Sheikh Isa Qassim), 셰이크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Abdul Amir al-Jamri),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Sheikh Abdulla Al-Madani), 셰이크 압바스 알 라이스(Sheikh Abbas Al-Rayes), 술래이만 알 무바라크(Suleiman Al-Mubarak), 하산 알 무타우아즈(Hassan Al-Motawwaj)로 구성되었다. 당시 가장 탁월한 시아파 성직자였던 셰이크 만수르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Mansour Abdul Amir al-Jamri, 1938~2006)가 바레인의 종교 블록을 이끌면서, 817표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이 블록은 노동 조합을 지지하고, 음주를 금지하였으며 학교 내에서 남녀 분리, 남성 의사들의 여성 진료 금지 등 전통적인 관습과 관련된 다른 사항들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셰이크 이사 카심이 이 선거에서 1,079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15개 선거구 중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이사 카심은 현재 알 와파크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또 1967년까지 좌파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가 이 ‘종교 블록’에 들어와 771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당시 이념적인 경계가 완고하게 확고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구성원들은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무소속으로 알려졌다. 무소속 의원은 정부와 두 블록들,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 사이에서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당시 바레인 노동 운동 지도자들은 수많은 파업을 조직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74년 알 칼리파 정부는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을 표적으로 하여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을 제안하였다. 당시 국민 의회는 이 법안을 압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4년 아미르 령(The Amiri decree No. 4 / 1974)으로 1975년 8월 26일 국민의회를 해산시켰으며, 1999년에 사망할 때까지 국민 의회를 다시 소집하거나 선거를 허락하지 않았고, 국가 보안법으로 강력하게 통치하였다. 이 법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바레인에서 시행되었으며, 정부에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재판 없이 최대 3년까지 투옥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 국가보안 법정(State Security Courts)을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임의적인 체포나 고문을 허용하였다. 인권단체들(Human Rights Watch and 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25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위반을 용이하게 하였다. 2001년 하마드 국왕은 이 법을 폐기하고, 헌법을 회복시켰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dam bin Isa al Khalifah) 국왕은 1950년 1월 바레인 남부 지역의 리파(Riffa)에서 선왕인 이사 이븐 살만 알 칼리파(Isa ibn Salman Al Khalifah)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99년 3월 38년 동안 통치하였던 이븐 알 칼리파 왕이 타계한 이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첫 번째 부인인 왕비 샤이카 사비카 빈트 이브라힘 알 칼리파(Shaikha Sabika bint Ibrahim Al Khalifa)와의 사이에 왕세자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Salman Bin Hamad Al Khalifa) 등 6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인 파이잘 이븐 하마드 알 칼리파(Faisal ibn Hamad Al Khalifah) 왕자가 2006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알 칼리파 가문은 바레인의 현 왕실로 1766년 창설되었고 1783년부터 바레인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시아파 신도가 대부분인 자국민들과 다르게 수니파 이슬람을 신봉하며 이러한 종파로 인해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바니 우툽(Bani Utub) 연맹의 일원으로, 네지드 사막에 거주하다 17세기 사바흐 가문과 함께 쿠웨이트로 이주하게 된다. 다만 얼마 후, 사바흐 가문이 쿠웨이트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카타르의 북부 주바이라로 이주했다가, 18세기 친척인 사바 왕조의 도움으로 잔드 왕조 치하에 있던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그 후로 알 칼리파 가문은 현재까지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다. 19세기 오만 제국 및 사우드 왕조가 바레인을 장악하여 축출되는 등의 위기를 맞았지만, 영국과 보호 협정을 맺으며 안정을 확보하게 된다. 독립 후,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친선을 맺으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의 부친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영국의 보호국을 탈피하여 독립국이 된 1971년에 기존의 호칭인 하킴을 버리고 아미르로 호칭을 변경했다. 하마드 국왕은 2002년 왕이라는 뜻의 말리크로 호칭을 높였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mad bin Isa Al Khalifa)는 1950년 1월 28일에 출생했으며 현재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그는 바레인 리파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1년에 독립한 바레인의 첫 아미르였다. 그의 장남이었던 하마드는 1999년 3월에 부왕이 사망하면서 아미르 제위를 계승했고, 2002년에 아미르라는 지위를 왕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관식을 올리게 된다. 하마드 국왕은 2020년 말 오랫동안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삼촌이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인 살만 왕세자를 차기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바레인의 절대 군주일 뿐 아니라 억압적인 독재를 펼치는 전제 군주이다. 1990년에는 바레인에서 개혁을 원하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1994년에 대규모 시위 및 항쟁으로 변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이와 같은 시위는 1999년까지 일어났다. 그 이후 하마드가 즉위하면서 대사면 령을 내리고, 2000년대에는 의회를 재소집하려고 국민 투표를 하면서 차츰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명분이었고, 군 장성과 관료, 의원을 임명하는데 권한은 모두 오직 국왕에게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2002년에는 칭호를 종래의 아미르에서 말리크(왕)으로 높였고 권위주의 체제가 더 강화되면서 독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1년 중동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하면서 바레인에도 혁명의 조짐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했으나 경찰과 군인, 시민들의 투쟁으로 4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면서 대규모 항쟁이 발생한다. 결국 2011년 2월 14일에 일어난 시위는 3월에도 이어졌다. 그러자 하마드 국왕은 경찰과 군인들을 총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때 바레인 군경들은 실탄을 발포하여 수도 마나마에 있던 진주 광장의 시민들은 학살을 당했고, 진주 광장은 폐허로 변하면서 민주화 항쟁은 실패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마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걸프 만에 있는 수니파 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가 가장 먼저 파병하자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도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였고 이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더욱 강압적인 유혈 진압을 펼쳤다. 그리고 민주 항쟁의 흔적을 없애거나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싶었는지 광장과 중앙의 진주 탑을 철폐하고, 그 곳에서 레이스 경주대회를 하는 경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광장이 없어져도 계속 같은 장소에서 시민들은 2012년 3월까지 항쟁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지만 강경하게 진압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2014년 시위가 완전히 진압된 이후 진주 광장은 완전히 말살되어 2017년 알 파루크 교차로로 개조되었고 지금은 광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에게 감금한 후 잔인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4년부터 국왕 모독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최대 징역 7년과 벌금 1만 디나르(한화로 3,000만원)로 대폭 올렸다. 게다가 이 국왕을 포함한 바레인의 왕실 가문들은 친미 독재에 적응된 인물들이 많았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에게 외면을 당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이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독재자를 방조했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라비아 국가들의 수장들이 그러하듯이 하마드는 억압적인 독재를 자행하면서도 세속적인 종교 정책을 펼치면서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처럼 은근히 개방적인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하마드 국왕은 철저하게 정교분리를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 시위자들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순수한 민주화가 아니라 친 서방 수니파 세속주의 왕실을 타도하고 이란 식 반 서방 시아파 신정 독재를 요구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이 외면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리비아를 참조하여 파악하면 알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2
  • "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르포 : 미트로비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작년 내가 코소보에 있을 때 분쟁의 현장인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지구와 세르비아계 지구를 다녀온 바 있다. 프리슈티나에서 탄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알바니아계 지구이다. 어차피 세르비아-코소보는 국경이 폐쇄되어 세르비아계 지구로 가지도 못한다. 미트로비차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자치주들 간에 균열이 발생했다. 내전은 나토와 서방의 개입으로 1999년에 중단됐으나 세르비아는 코소보 자치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끝내 2006년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저 완전히 붕괴하고,몬테네그로가 독립했다. 그리고 2008년 이곳에서 코소보는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를 자국의 자치주로 보며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들도 독립을 인정하는 국가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로 분열되어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그 비극의 모든 것은 이곳 미트로비차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로비차에 도착하자마자 무슬림 무덤들이 나오고 유고슬라비아 때부터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이 도시가 세르비아 정교와 알바니아 무슬림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임을 말해주고 있다.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던 이곳은 당시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聖地)라는 이유로 알바니아계의 권리를 박탈하자 알바니아계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당국은 언론, 교육을 통제하여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수많은 자치주 내 알바니아계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이후 1992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연방이 붕괴하고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어 세르비아 공화국 관할 자치주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신 유고 연방의 일원이었다가, 신 유고 연방의 차별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계들과 세르비아계가 미트로비차에서 정면 충돌하여 1998년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을 주도했던 코소보인은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1955~1998)를 필두로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가 주축이 되어 세르비아에 항쟁했다. 특히 아뎀 야샤리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코소보를 분리하기 위해 싸웠던 코소보 알바니아 분리주의 민병대인 코소보 해방군(KLA)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그는 당시 미국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91년부터 야샤리는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알바니아로 가기 전, 세르비아 경찰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면서 대놓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1993년에 체포된 야샤리는 알바니아 군대의 구출 작전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나중에 코소보로 돌아와서 유고슬라비아 정권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는데 대부분이 자살폭탄테러로 인한 유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후 1997년 7월, 야샤리는 유고슬라비아 법원에서 궐석 테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은 이후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는 세르비아의 압제에 저항한 합법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세르비아가 이를 탄압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권 침해이자 탄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는 야샤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 그를 체포하거나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경찰은 1998년 3월 프레카즈에 있는 야샤리의 집에 그가 있음을 파악하고 제거 작전에 나섰다. 결국 총격전이 이어졌고 야샤리와 그의 아내, 형제, 아들을 포함하여 야샤리의 가족 57명이 전사했다. KLA의 아버지이자 國父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야샤리(Jashari)는 공동 지도자이자 동료인 하심 타치에 의해 추앙되었고 그는 후일 알바니아 민족에 의해 코소보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는 온건파인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와 전혀 극과 극의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야샤리는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 이후에 "코소보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프리슈티나 국립극장, 프리슈티나 국제공항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및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올림픽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후로 코소보 북부도시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로 모든 것이 갈라지게 된다. 이바르 강의 강북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했고 강남에는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쪽은 세르비아 정부가, 남쪽은 UN이 관할하기에 관할 기관도 다르다. 남북간에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바르 강의 다리는 두 곳이 존재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바르 강은 정확히 민족, 인종 간의 경계선이 됐다. 종전 이후, 세르비아군이 철수하자 그간 세르비아에 박해를 받아 온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보복 공격을 자행했다. 미트로비차의 참극은 코소보 전쟁의 시작점인 곳이었지만 종전 이후에도 두고 두고 유혈사태가 이어졌다. 참고로 미트로비차는 현재도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지정한 "철수 권고" 지역이다.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선으로 코소보 인종 분리의 상징이 됐다. 미트로비차 문제의 본질은 양측의 공존공생 모색에 있고 이 공존공생에 대한 해결 대안은 ‘자치 도시’를 만드는 것에 있다. 두 개의 자치도시를 만들면서 코소보 내에서 국제 관할 아래 두자는 것이 알바니아인들의 생각인 데 비해 세르비아인은 완전히 두 개의 자치도시로 분리해 북쪽은 세르비아에 귀속시키자는 입장에 있다. 세르비아인들의 요구 사항은 자치 도시 설립의 주요 목적으로 난민들의 고향 복귀와 안전 및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있다. 세르비아군의 철수 이후 25년 가까이 알바니아인들의 핍박과 박해 속에서 살아온 세르비아인들의 정상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알바니아 측은 자족적이며 지속 가능한 자치 도시 방안을 고수하고 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은 이바르 강을 북미트로비차의 코소보 편입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다. 이에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지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도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할지언정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민간인들의 자체 군사력 보유와 북미트로비차 합병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에 있다고 한다. 이에 집단서방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접촉 그룹은 세르비아에 대한 압박과 회유로 해법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만 양측 모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에 있다. 필자가 방문하기 얼마 전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세르비아 거주 지역을 침공해 세르비아 국기를 걸레로 만들고 몇몇 상점들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를 했다. 이 때 총 4명이 부상을 입고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일 동안 화염병 투척 당한 건물은 복구조차도 안 되고 있다. 이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정부가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려 있는 도로의 세르비아 국기마다 걸레처럼 변했다. 전쟁 전 코소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나토의 폭격 이후, 이바르 강 다리를 건너 피난해야 했다. 25만 명의 코소보 세르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큰 도시들로 피난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미트로비차 강북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미토로비차의 강북과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용하는 돈도 달라졌고 전화번호의 지역 번호조차 달라졌다. 지금은 물론 똑같은 유로를 내지만 미트로비차 북쪽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는 세르비아 디나르 화폐도 통용된다. 세르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인 미트로비차 강북에는 중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장갑차나 지프들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무장군인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하는 순찰 외에는 정상적인 납세나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어 무법상태와 마찬가지다. 강남의 알바니아 쪽에서는 강북의 세르비아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벌이며 침공해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두 계통 시민들 충돌의 현장, 필자는 이 비극의 현대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는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끊임없이 기록해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4
  • 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 칼럼
    • Nova Topos
    2025-05-2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