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7(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칼럼 검색결과

  • 중부 아프리카 차드 분쟁과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1952~2021), 보코하람과의 항쟁
    차드 분쟁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남부 기독교 세력과 북부와 동부의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으나, 1980년대 정권을 취득한 북부 지역의 파벌 간의 내분으로 전이된 내분 형태의 분쟁으로 나타난다. 해당 분쟁의 주요 행위자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나, 이러한 정치 행정권자들은 항상 국가 통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하나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장기화되고 있는 차드 분쟁은 행위자의 변화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 번째, 초기 남북갈등 시기는 1966~1979년이고 두 번째, 북부 구쿠니파로 알려진 국방장관을 지지하고 있는 종파와 대통령을 지지하는 하브레파 간의 분쟁은 1980~1987년,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드리스 데비의 집권 이후 저항세력반군연합(UFR) 간 분쟁은 1990년~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에게서 탈식민화된 이후 대략 5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통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선거가 계속 치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에 따른 불만이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최근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 연장이 가능해지면서 야권의 반발 또한 집중되어 민주주의 당위성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반군이 발생한 것에 대한 이유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이제까지 조직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으로 인해 국내적 불안정정이 고조되어 반군 활동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지자 반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보코하람과 연합도 불사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북부 세력 출신이었던 이드리스 데비가 1990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차드 분쟁은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독재 정권이 이어오고 있는 상기의 요인들이 남아 있는 한, 차드 분쟁은 전쟁 수준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항상 상존하고 있다. 차드 내전의 분쟁 전개에 관해서는 이드리스 데비의 장기집권과 반정부운동으로 이어진 199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차드 내전은 종결되는 듯하였으나, 차드의 통일을 달성한 하브레 정권이 독재 탄압 정치를 자행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 하브레의 최측근이자 군사고문인 이드리스 데비가 1989년 수단으로 망명한 이후 1990년 11월 구제인민운동(MPS)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드리스 데비는 리비아의 남부 반군 세력의 지원을 얻어 하브레 정권에 대한 무력투쟁을 개시함에 따라 차드 내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드리스 데비는 1990년 12월 수도인 은자메나를 공략하여 하브레를 축출하고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1993년 1월 신(新) 헌법 제정을 위해 최고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정 이관을 결정하였고, 1996년 3월 국민투표에서 신(新) 헌법안이 승인되는 등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차드 내전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었다. 1996년 6월에 최초의 복수정당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드리스 데비가 재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이드리스 데비의 구제인민운동(MPS) 당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기타 소수 야당과 대연립 내각을 성립하였다. 1998년 5월 이드리스 데비는 남부 지역의 반군(FARF)과 평화협정을 조인하였고, 반군 세력을 합법, 정당화시키는 등 기존의 반군 세력을 정치권,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3년 리비아에 거점을 둔 저항군 반란연합(UFR)이 반란을 재개하고 투쟁을 선포하였으며 동시에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니제르와 리비아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등 여러 반군 세력들이 내전의 잠재 요인으로 남아 있었다. 차드 정부 또한 주변국에 거점을 두고 세력을 유지하는 반군들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일례로 2006년 12월 리비아의 변화와 합의를 위한 차드전선(Chadian Front for Change and Accord, FACT)이 리비아 정부의 공습을 받아 전멸 위기에 처하자 차드 정부는 리비아 국경을 폐쇄하고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이들의 유입을 방지하려 하였다. 이드라스 데비의 장기집권이 지속됨에 따라 차드 내에서도 반정부에 대한 시위들이 점차 증대되었다. 2016년 2월에는 같은 해, 4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심화되었다. 이에 이드라스 데비 정부는 반정부 시위에서 촉발될 수 있는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대규모 시위를 전면 금지하기도 하였다. 2016년 5월, 두 차례의 선거를 거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8년 데비 정권과 집권 여당의 주도로 대통령 임기 연장을 주축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로, 정치적인 긴장감이 고조되어 왔다. 해당 헌법 개정안은 첫째,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6년 으로 연장하고 둘째, 국무총리제 폐지하여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켰으며 셋째, 국회의원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 등을 명제로 하는 제도적인 개혁으로서,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고 대통령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최대 규모의 반군인 공화국 구원을 위한 군사위원회(Military Command Council for the Salvation of the Republic, CCMSR)는 2018년 8월에 차드 영토 내부 진입에 성공했다. CCMSR은 북부 지역의 군 주둔지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정부군과의 충돌이 저 강도 수준에서 지속되고 있다. 한편 리비아에 주둔하던 UFR 또한 2019년 초 차드 북서부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정부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차드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이 UFR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였고, 250여 명의 반군이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드 국토행정 공공안보부 장관은 같은 해, 3월에 리비아 접경지역인 북부 지역의 국경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차드의 북부, 동부지역에서는 금광업자 간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고,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충돌 등이 역시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공동체 간의 충돌로 인해 사회 불안정이 점증하고 있다. 북부 지역에서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광부업자들 간의 충돌은 정부의 지하자원 발굴 및 국가 이익의 배분 등으로 인해 발생해 왔다. 최근에는 CCMSR 반군 또한 연루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동부 지역에서의 충돌은 2019년에 현저히 빈번해지게 나타났다. 정착민과 아랍 유목민들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민간인이 소지한 무기를 압류하는 조치를 취한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사태가 심화되어 5월 16일에는 사망자 12명, 5월 19일에는 사망자 22명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태이다. 차드 내전에 대한 분석과 저 강도 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지속되던 차드 내전은 1990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저 강도 분쟁의 형태로 완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비록 8~90년대처럼 대규모 전쟁은 발발하지 않고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반군 세력들이 간헐적으로 공격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드 분쟁이 저 강도 수준으로 장기화되는 것은 대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추정된다. 대내적으로는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차드에서는 내전에서의 승리, 혹은 쿠데타를 통해 정부가 구성되어 왔다. 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하브레 정권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권력을 획득하였다. 물론 이드라스 데비는 쿠데타 이후 민주화 정책을 취했으며 남부 지방의 반군들을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권력 획득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는 점, 그리고 수십 년간의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반군이 여전히 유의미한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또는 이웃 국가 내부 상황의 변동에도 영향을 받아 왔다. 차드 분쟁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대외적 요소로는 리비아가 있다. 리비아는 반군에 군사적 지원을 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차드의 반군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리비아의 지원 하에 차드 반군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새로운 안보적 위기가 닥쳐오고 테러리즘, 공동체 간 분쟁이 격화됨이 심화되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정권 안정을 위해 폭정도 불사하게 되었다. 차드는 보코하람에 의한 테러 위협과 공동체 간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와 같은 새로운 안보적인 위협을 겪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안보 이슈들이 차드 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지만 차드 분쟁의 악화 요인이자 전쟁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7년 초, 국제 위기 감시 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보코하람 반군 보고서를 통해 보코하람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실향민이 10만 명 이상임을 밝하기도 하였다. 또한 차드에는 보코하람 위협으로 발생한 난민 7천여 명이 차드로 유입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2017년 이후 급증한 보코하람에 대해 차드 정부는 다국적군의 연합작전에 적극 참여하는 등의 대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코하람은 주요 위협 요인이다.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은 국내적 불안 정정을 높임으로 인해 반군 활동에 더욱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분쟁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공동체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는 차드 북부 지방의 티베스티(Tibesti) 지역과 동부 와다이(Ouaddai) 및 실라(Sila) 지역을 중심으로 발발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실라 및 와다이 지방에서 목축업자와 유목민 간에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범국가적인 우려라고 규정하였으며 2019년 8월에는 해당 지방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공동체 간의 폭력 사태는 차드 정부가 국내의 만성적 가난을 극복하지 못해 시민들의 사회 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 현상은 차드로 유입된 반군들의 세력 확장에 더욱 기여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9
  •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이스탄불 협상의 후기
    오늘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협상이 열렸다. 미국 대표단도 있었지만 회담에 참여하지 않은 채, 궁전 내에서 타결을 기다리고 있었고, 터키가 중재자가 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우선 이 협상의 장소가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는 것에서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 독립과 평화의 상징인 곳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가 폐지되고 터키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공화국을 건설하고는 이곳에 입주하면서 터키 영토 내의 모든 전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했다. 따라서 터키 독립전쟁과 그로 인한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화를 선언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을 중재국인 터키 측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을 선정했던 것은 양국의 전쟁 종식과 아타튀르크의 평화주의를 강조하여 양국의 평화를 찾아오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된 이후, 그러한 중재국인 터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측의 입장차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 먼저 가 있던 젤렌스키는 "우크라아나의 최우선 과제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며 진정성 있고 투명한 휴전(Головним пріоритетом України є повне, безумовне, справжнє та прозор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이는 휴전에 대한 명확한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의 휴전은 그에 상응하는 조건과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10여년 전, 민스크 협정 이전부터 여러차례 우크라이나와 집단서방에 속아온 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속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여 휴전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명확하지 않은 조건과, 휴전을 위해 무엇을 합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행동했다. 오직 그들 우크라이나에게는 그저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 하자는 내용만 반복될 뿐이었다. 휴전에 대한 구체적으로 명확한 플랜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러시아의 휴전에 대한 조건과 요구는 명확했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취지는 동의했지만 휴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러시아가 내세우는 조건은 ① 우크라이나 내 최악의 살상무기에 대한 비무장화, ②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 ③ 우크라이나 내 비나치화, ④ 돈바스 4개 주와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 인정 등이다. 이는 개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아주 획일적이고 명확한 요구 조건이다. 이 조건들만 받아들여지면 러시아는 "특수군사작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즉시 종료할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은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러시아가 바라는 것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영구적인 평화다. 고작 3일이나 30일 휴전 따위가 아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멸망시키겠다고 한적이 없고, 젤렌스키를 직접적으로 제거해서 반러 세력을 일소화하겠다고 직접 언급한 적도 없다. 만약에 젤렌스키를 직접 제거하려 했다면 키예프 대통령궁에 오레슈닉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까지 인내심을 갖고 젤렌스키의 개심을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심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러시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푸틴 대통령 또한 젤렌스키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인내심을 계속 시험하면서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정교회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부활절 휴전에 관한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승절 문제다. 러시아는 이 때도 잠시 휴전을 제안했었다. 부활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잠시나마 평화와 안식을 갖고자 하는 의미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 같은 의미를 저버리고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전승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 소련으로 한 국가였고 나치 독일과 전쟁 당시 서로의 등을 맡기던 든든한 전우였다.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함께 했던 우정을 생각하며 평화의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이 때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평화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여태까지 평화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임을 보여왔다. 그러던 우크라이나가 이제와서 휴전을 언급하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진정성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 대통령이 이스탄불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다. 필자가 볼 때,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상 및 휴전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우크라이나가 앞서 제안했던 그 30일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것인지도 어느 정도 답이 나오고 있다. 우선 전열을 재정비하고 EU나 영국,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받아 러시아와 싸울 준비를 보충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바흐무트나 마리우폴 아조프스틸과 같은 요새지들을 몇 군데 더 구축할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항전하여 전쟁을 장기화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애초부터 평화에 관심이 없고, 무엇보다 휴전할 마음이 없다. 이는 보여주기식 정치적 꼼수에 지나지 않으며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러시아에게 지우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협상은 예상했던데로 큰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양국이 1,000명씩 포로를 교환하자는 내용에 합의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EU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젤렌스키가 만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푸틴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는 그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규탄했다. 진정성 없는 회담에 푸틴 대통령이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규탄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EU가 러시아에게 유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상호 간에 수립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EU 또한 이스탄불 회담에 그 지도부들 중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평화에 대한 진정성 또한 떨어진다는 입증했다. 전쟁을 계속 이어질 것이고, 장기적으로 갈수록 유럽은 더욱 고통받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17

포토뉴스 검색결과

  • 중부 아프리카 차드 분쟁과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1952~2021), 보코하람과의 항쟁
    차드 분쟁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남부 기독교 세력과 북부와 동부의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으나, 1980년대 정권을 취득한 북부 지역의 파벌 간의 내분으로 전이된 내분 형태의 분쟁으로 나타난다. 해당 분쟁의 주요 행위자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나, 이러한 정치 행정권자들은 항상 국가 통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하나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장기화되고 있는 차드 분쟁은 행위자의 변화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 번째, 초기 남북갈등 시기는 1966~1979년이고 두 번째, 북부 구쿠니파로 알려진 국방장관을 지지하고 있는 종파와 대통령을 지지하는 하브레파 간의 분쟁은 1980~1987년,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드리스 데비의 집권 이후 저항세력반군연합(UFR) 간 분쟁은 1990년~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에게서 탈식민화된 이후 대략 5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통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선거가 계속 치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에 따른 불만이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최근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 연장이 가능해지면서 야권의 반발 또한 집중되어 민주주의 당위성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반군이 발생한 것에 대한 이유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이제까지 조직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으로 인해 국내적 불안정정이 고조되어 반군 활동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지자 반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보코하람과 연합도 불사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북부 세력 출신이었던 이드리스 데비가 1990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차드 분쟁은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독재 정권이 이어오고 있는 상기의 요인들이 남아 있는 한, 차드 분쟁은 전쟁 수준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항상 상존하고 있다. 차드 내전의 분쟁 전개에 관해서는 이드리스 데비의 장기집권과 반정부운동으로 이어진 199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차드 내전은 종결되는 듯하였으나, 차드의 통일을 달성한 하브레 정권이 독재 탄압 정치를 자행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 하브레의 최측근이자 군사고문인 이드리스 데비가 1989년 수단으로 망명한 이후 1990년 11월 구제인민운동(MPS)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드리스 데비는 리비아의 남부 반군 세력의 지원을 얻어 하브레 정권에 대한 무력투쟁을 개시함에 따라 차드 내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드리스 데비는 1990년 12월 수도인 은자메나를 공략하여 하브레를 축출하고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1993년 1월 신(新) 헌법 제정을 위해 최고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정 이관을 결정하였고, 1996년 3월 국민투표에서 신(新) 헌법안이 승인되는 등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차드 내전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었다. 1996년 6월에 최초의 복수정당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드리스 데비가 재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이드리스 데비의 구제인민운동(MPS) 당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기타 소수 야당과 대연립 내각을 성립하였다. 1998년 5월 이드리스 데비는 남부 지역의 반군(FARF)과 평화협정을 조인하였고, 반군 세력을 합법, 정당화시키는 등 기존의 반군 세력을 정치권,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3년 리비아에 거점을 둔 저항군 반란연합(UFR)이 반란을 재개하고 투쟁을 선포하였으며 동시에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니제르와 리비아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등 여러 반군 세력들이 내전의 잠재 요인으로 남아 있었다. 차드 정부 또한 주변국에 거점을 두고 세력을 유지하는 반군들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일례로 2006년 12월 리비아의 변화와 합의를 위한 차드전선(Chadian Front for Change and Accord, FACT)이 리비아 정부의 공습을 받아 전멸 위기에 처하자 차드 정부는 리비아 국경을 폐쇄하고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이들의 유입을 방지하려 하였다. 이드라스 데비의 장기집권이 지속됨에 따라 차드 내에서도 반정부에 대한 시위들이 점차 증대되었다. 2016년 2월에는 같은 해, 4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심화되었다. 이에 이드라스 데비 정부는 반정부 시위에서 촉발될 수 있는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대규모 시위를 전면 금지하기도 하였다. 2016년 5월, 두 차례의 선거를 거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8년 데비 정권과 집권 여당의 주도로 대통령 임기 연장을 주축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로, 정치적인 긴장감이 고조되어 왔다. 해당 헌법 개정안은 첫째,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6년 으로 연장하고 둘째, 국무총리제 폐지하여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켰으며 셋째, 국회의원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 등을 명제로 하는 제도적인 개혁으로서,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고 대통령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최대 규모의 반군인 공화국 구원을 위한 군사위원회(Military Command Council for the Salvation of the Republic, CCMSR)는 2018년 8월에 차드 영토 내부 진입에 성공했다. CCMSR은 북부 지역의 군 주둔지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정부군과의 충돌이 저 강도 수준에서 지속되고 있다. 한편 리비아에 주둔하던 UFR 또한 2019년 초 차드 북서부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정부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차드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이 UFR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였고, 250여 명의 반군이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드 국토행정 공공안보부 장관은 같은 해, 3월에 리비아 접경지역인 북부 지역의 국경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차드의 북부, 동부지역에서는 금광업자 간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고,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충돌 등이 역시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공동체 간의 충돌로 인해 사회 불안정이 점증하고 있다. 북부 지역에서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광부업자들 간의 충돌은 정부의 지하자원 발굴 및 국가 이익의 배분 등으로 인해 발생해 왔다. 최근에는 CCMSR 반군 또한 연루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동부 지역에서의 충돌은 2019년에 현저히 빈번해지게 나타났다. 정착민과 아랍 유목민들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민간인이 소지한 무기를 압류하는 조치를 취한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사태가 심화되어 5월 16일에는 사망자 12명, 5월 19일에는 사망자 22명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태이다. 차드 내전에 대한 분석과 저 강도 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지속되던 차드 내전은 1990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저 강도 분쟁의 형태로 완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비록 8~90년대처럼 대규모 전쟁은 발발하지 않고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반군 세력들이 간헐적으로 공격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드 분쟁이 저 강도 수준으로 장기화되는 것은 대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추정된다. 대내적으로는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차드에서는 내전에서의 승리, 혹은 쿠데타를 통해 정부가 구성되어 왔다. 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하브레 정권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권력을 획득하였다. 물론 이드라스 데비는 쿠데타 이후 민주화 정책을 취했으며 남부 지방의 반군들을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권력 획득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는 점, 그리고 수십 년간의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반군이 여전히 유의미한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또는 이웃 국가 내부 상황의 변동에도 영향을 받아 왔다. 차드 분쟁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대외적 요소로는 리비아가 있다. 리비아는 반군에 군사적 지원을 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차드의 반군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리비아의 지원 하에 차드 반군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새로운 안보적 위기가 닥쳐오고 테러리즘, 공동체 간 분쟁이 격화됨이 심화되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정권 안정을 위해 폭정도 불사하게 되었다. 차드는 보코하람에 의한 테러 위협과 공동체 간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와 같은 새로운 안보적인 위협을 겪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안보 이슈들이 차드 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지만 차드 분쟁의 악화 요인이자 전쟁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7년 초, 국제 위기 감시 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보코하람 반군 보고서를 통해 보코하람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실향민이 10만 명 이상임을 밝하기도 하였다. 또한 차드에는 보코하람 위협으로 발생한 난민 7천여 명이 차드로 유입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2017년 이후 급증한 보코하람에 대해 차드 정부는 다국적군의 연합작전에 적극 참여하는 등의 대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코하람은 주요 위협 요인이다.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은 국내적 불안 정정을 높임으로 인해 반군 활동에 더욱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분쟁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공동체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는 차드 북부 지방의 티베스티(Tibesti) 지역과 동부 와다이(Ouaddai) 및 실라(Sila) 지역을 중심으로 발발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실라 및 와다이 지방에서 목축업자와 유목민 간에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범국가적인 우려라고 규정하였으며 2019년 8월에는 해당 지방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공동체 간의 폭력 사태는 차드 정부가 국내의 만성적 가난을 극복하지 못해 시민들의 사회 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 현상은 차드로 유입된 반군들의 세력 확장에 더욱 기여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9
  •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이스탄불 협상의 후기
    오늘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협상이 열렸다. 미국 대표단도 있었지만 회담에 참여하지 않은 채, 궁전 내에서 타결을 기다리고 있었고, 터키가 중재자가 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우선 이 협상의 장소가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는 것에서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 독립과 평화의 상징인 곳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가 폐지되고 터키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공화국을 건설하고는 이곳에 입주하면서 터키 영토 내의 모든 전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했다. 따라서 터키 독립전쟁과 그로 인한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화를 선언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을 중재국인 터키 측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을 선정했던 것은 양국의 전쟁 종식과 아타튀르크의 평화주의를 강조하여 양국의 평화를 찾아오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된 이후, 그러한 중재국인 터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측의 입장차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 먼저 가 있던 젤렌스키는 "우크라아나의 최우선 과제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며 진정성 있고 투명한 휴전(Головним пріоритетом України є повне, безумовне, справжнє та прозор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이는 휴전에 대한 명확한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의 휴전은 그에 상응하는 조건과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10여년 전, 민스크 협정 이전부터 여러차례 우크라이나와 집단서방에 속아온 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속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여 휴전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명확하지 않은 조건과, 휴전을 위해 무엇을 합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행동했다. 오직 그들 우크라이나에게는 그저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 하자는 내용만 반복될 뿐이었다. 휴전에 대한 구체적으로 명확한 플랜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러시아의 휴전에 대한 조건과 요구는 명확했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취지는 동의했지만 휴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러시아가 내세우는 조건은 ① 우크라이나 내 최악의 살상무기에 대한 비무장화, ②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 ③ 우크라이나 내 비나치화, ④ 돈바스 4개 주와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 인정 등이다. 이는 개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아주 획일적이고 명확한 요구 조건이다. 이 조건들만 받아들여지면 러시아는 "특수군사작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즉시 종료할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은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러시아가 바라는 것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영구적인 평화다. 고작 3일이나 30일 휴전 따위가 아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멸망시키겠다고 한적이 없고, 젤렌스키를 직접적으로 제거해서 반러 세력을 일소화하겠다고 직접 언급한 적도 없다. 만약에 젤렌스키를 직접 제거하려 했다면 키예프 대통령궁에 오레슈닉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까지 인내심을 갖고 젤렌스키의 개심을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심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러시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푸틴 대통령 또한 젤렌스키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인내심을 계속 시험하면서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정교회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부활절 휴전에 관한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승절 문제다. 러시아는 이 때도 잠시 휴전을 제안했었다. 부활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잠시나마 평화와 안식을 갖고자 하는 의미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 같은 의미를 저버리고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전승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 소련으로 한 국가였고 나치 독일과 전쟁 당시 서로의 등을 맡기던 든든한 전우였다.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함께 했던 우정을 생각하며 평화의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이 때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평화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여태까지 평화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임을 보여왔다. 그러던 우크라이나가 이제와서 휴전을 언급하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진정성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 대통령이 이스탄불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다. 필자가 볼 때,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상 및 휴전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우크라이나가 앞서 제안했던 그 30일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것인지도 어느 정도 답이 나오고 있다. 우선 전열을 재정비하고 EU나 영국,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받아 러시아와 싸울 준비를 보충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바흐무트나 마리우폴 아조프스틸과 같은 요새지들을 몇 군데 더 구축할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항전하여 전쟁을 장기화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애초부터 평화에 관심이 없고, 무엇보다 휴전할 마음이 없다. 이는 보여주기식 정치적 꼼수에 지나지 않으며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러시아에게 지우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협상은 예상했던데로 큰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양국이 1,000명씩 포로를 교환하자는 내용에 합의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EU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젤렌스키가 만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푸틴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는 그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규탄했다. 진정성 없는 회담에 푸틴 대통령이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규탄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EU가 러시아에게 유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상호 간에 수립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EU 또한 이스탄불 회담에 그 지도부들 중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평화에 대한 진정성 또한 떨어진다는 입증했다. 전쟁을 계속 이어질 것이고, 장기적으로 갈수록 유럽은 더욱 고통받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1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