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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의 쿠데타와 태국 왕실,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 하락하는 태국 사회
- 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은 쁠랙 피분 송크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새로운 태국의 독재자가 된 인물이다. 다만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독재를 했었기 때문에 태국 현대사에서 잠시 거쳐 갔던 독재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릿 타나랏은 태국 방콕에서 <캄보디아 왕실 편년사(Cambodia Royal Chronicle)>의 번역 작가로도 유명한 라완 루안디트아난(Rawan Ruanditanan) 소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부터 7세까지 모친의 집안이 있던 무크다한(Mukhdahan)에서 자랐고 7세에는 소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출라촙크라오(Chulachobkrao)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국군의 주요 직책들을 역임하다, 쁠랙 피분 송크람에게 발탁되었고 1949년 일어난 이른바 “왕궁 반란 사건(The Palace Rebellion)” 당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송크람 정권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쿠데타를 방어한 것을 기반으로 타나랏은 송크람의 신임을 받았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그리고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이유 아래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키워갔다. 그러나 1957년 치러진 태국 총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발생하자 타나랏은 송크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58년 9월 18일 수많은 쿠데타들이 이미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내 성공하게 된다. 1958년 타나랏의 쿠데타를 가져온 일련의 정치적 대립은 국제 사회에서 노란 두건(Yellow Bandana와 붉은 두건(Red Bandana)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치적 대립은 길게는 1957~1958년 사이에 발생한 동남아시아 대규모의 경제위기, 보다 짧게는 1947년에 있었던 태국의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시초였다. 보다 더 근본적인 모순을 본다면 1932년 입헌군주제 쿠데타로 등장한 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권력을 둘러싼 근본적인 모순까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군사 쿠데타들에서 보여주었던 태국 쿠데타의 특징들, 이념, 정책, 사회적 근본 모순에 관해 쿠데타가 아닌 매우 실용적인 차원의 쿠데타라는 특징과 더불어 타나랏의 쿠데타는 좀 이전 4차례의 쿠데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전 쿠데타인 1947년 피분 송크람의 군사 쿠데타는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편을 들었다가 미국의 폭격을 받아 자진 사임한 이후, 3년 만에 발생한 쿠데타였다. 송크람은 1932~1944년 대공황으로 인한 태국의 경제위기를 틈타 등장했고 이후 태국 정치사에서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기반을 형성했었다. 한 군부 집단이 과반 의석을 독점한 것은 송크람의 쿠데타로 인한 의회의 탄생, 국왕의 절대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이양, 군부가 태국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수코타이 왕조 이후부터 시작된 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송크람의 통치는 늘 권위주의, 독단적 국가 운영, 인권 문제, 그리고 지나친 복지 위주의 민중에 대한 선심성 논란 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비난들과 송크람의 왕권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은 왕과 이를 둘러싼 전통 권력 상류층들, 고위 관료, 군, 그리고 송크람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국가 운영에 반대한 지식인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을 압축한 것이 송크람을 축출한 1944년에 발생한 쿠데타이다. 이에 대해 송크람의 집권 시기 많은 혜택을 받은 친(親) 송크람 세력, 농민, 도시 빈민 등 송크람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왕과 친(親) 국왕 세력을 상징하는 노란색에 대한 반대로 붉은 색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붉은 두건과 노란 두건의 대립이 시작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붉은 두건은 친 송크람파, 노란 셔츠는 친 국왕파를 상징하고 있다. 일부 분석들은 친 송크람과 반 송크람을 단순히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 모순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친송크람파의 일부는 태국 내 공화주의 세력이다. 다시 말해 현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력이 친 송크람파에 가담한 데는 송크람의 집권 시기 그가 보여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태도가 있다. 태국에서 국왕은 절대적 존재다. 당시 라마 7세, 라마 8세 국왕은 한 때 국민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았었다. 국민을 위해 국왕이 많은 자선사업과 시혜를 베푼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젊은 시절 라마 7세와 라마 8세는 1년의 1/3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 개선 문제를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챙겼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도 매우 강력했다. 과거 군사 쿠데타를 성공한 군부라도 최종적으로 국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그대로 권력을 내려놓고 망명한 일례도 있다. 중요한 정치적 위기 시 사태를 정리한 것은 언제나 국왕이었다. 현재 일반 국민 사이에 국왕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에는 많은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58년 라마 9세는 31세의 젊은 나이였고 1946년에 즉위한 이래로 12년째 통치 중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건강이 거의 좋지 못해 와병 중이었다. 그리고 피분 송크람과 사릿 타나랏으로 인해 정치적 권위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군사 쿠데타 문제는 시민들이 보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릿 타나랏은 몇 명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현재 그의 자손들은 거의 사망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 그의 수상 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었던 솜차이 타나랏(Somchai Thanarat)은 지금까지 시민들에게 보여준 행적으로 인해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의 태국 시민들은 이와 같은 차기 수상의 행적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추문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나타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타나랏의 후계자로 떠오른 국방장관 타놈 끼띠카쫀(Thanom Kittikachorn)은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타나랏의 행정력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국민을 위해 고민하고 현장에 관심을 가진 타나랏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이 신뢰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군 장성이라는 점이 이미 군사 쿠데타로 인해 어느 정도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갖고 있는 상태였기에 수상 계승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 권력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과 군부 역시 솜차이 파와 타놈 파로 갈려져 있는 상태다. 정국의 혼란, 국왕의 잦은 와병에 수상의 승계 구도 문제까지 맞물려 수상의 권위와 수상에 대한 신뢰가 기로에 서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입헌 군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도 있다. 태국 내 공화주의자들은 1932년 입헌 군주제가 사실상 국왕과 그를 둘러싼 전통 지배 계급의 통치를 연장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지 않고 여전히 국왕과 그를 둘러싼 소수의 전통 지배 계급과 군이 국가의 부와 권력을 좌우하고 있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왕가가 태국에서 가장 부자라는 것에 이의를 재기하는 사람은 없다. 왕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자로 알려졌다. 특히 <포브스>에서는 태국 왕실이 세계 왕실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혀 태국 내에서 논란을 촉발시킨 바 있다.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태국 왕실의 재산은 당시 미화로 100조 달러에서 350조 달러까지 다양한 예상들이 존재한다. 시암 시멘트, 시암은행 등 태국의 상당한 재벌급 기업들과 방콕의 주요 쇼핑몰, 최고급 호텔 가운데 왕가의 소유가 다수 있을 정도다.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왕실 재산국(Crown Property Bureau)은 부동산 임대 사업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제 활동에서 발생하는 왕실의 모든 수입에 대해 소득세가 면제된다. 국왕의 국민에 대한 시혜는 이와 같은 부의 아주 작은 부분을 내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 절대 왕정 시기 통치 세력, 왕을 보위하던 고위급 신하들과 군대가 입헌 군주제 쿠데타 이후 그대로 고위 관료로 탈바꿈 했고, 군부 역시 국왕을 보위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1932년 입헌 군주제를 위한 쿠데타는 이 관료들과 국왕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국왕은 존재하면서 상징적인 인물이고 실제 권력은 국민에게 있으며 그리고 이 국민의 권력을 위임 받은 총리에 의해 권력이 행사 되는 입헌 군주제와 태국의 입헌 군주제는 거리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한 민간 정부는 국왕의 권력 하에서 일상적인 행정 처리만 하는 조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지난 70여 년 간 절대 신성으로 여겨졌던 국왕에 대해 이와 같은 질문들이 이어지면서 푸미폰 라마 9세의 즉위 이후, 70년이 넘는 통치 기간 동안 태국 정부와 군은 국왕모독에 관한 국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붉은 두건 세력은 타나랏 총리와 송크람에 대한 개인적인 추종 세력들, 타나랏의 재임 시절 경제적으로 혜택을 본 빈민, 농민 계층의 경제적인 바람에 공화주의적인 운동까지 복합적으로 포괄된 세력이라 볼 수 있겠다. 반면 노란 두건 세력은 국왕과 그 주변의 전통 상류층 집단, 군대, 교육 받은 보수적 중산층,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현 민주당으로 이어 오는 민주화 요구 세력들이 이 집단을 대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1958년 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갈등에는 1932년 이후 태국 정치의 근본 모순에서부터 개인의 경제적이고 정치적 이익까지 다양한 정치적인 정당성들이 모두 녹아 있는 셈이다. 수적으로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친 타나랏 세력은 당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해 총리 직을 박탈당한 쁠렉 피분 송크람 총리까지 1958년 9월 18일 쿠데타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서 집권했다. 붉은 두건을 지지하는 세력의 수적 우위로 인해 선거에서의 승리는 거의 보장되어 왔다. 반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추, 관료제, 법원 그리고 군을 장악한 노란 두건은 선거로 구성된 친 타나랏 정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주로 자신들이 장악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총리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새로운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통제하려 시도해왔다. 1973년 10월 학생 민주화 운동 이전까지 총리가 해임되고 정부가 바뀐 것만 보면 타나랏 총리까지 합쳐서 세 번째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1958년 9월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는 친 송크람 파벌들을 이전에 발생한 부정선거 혐의로 대법원에서 자격 정지시킨 이후, 친 타나랏파를 대두시키고 송크람 계열을 더욱 무력화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경험을 놓고 볼 때 법원에서 친 송크람파 정당과 그 행정 세력들을 무력화 시키게 되지만 그래도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고 선거를 치르면 친 타나랏파 세력들이 집권하는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노란 두건과 친 국왕 세력들은 이전의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보다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방편으로 피분 송크람을 실각시키고 오히려 타나랏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과 달리 1958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와 친 국왕파는 선거를 회피할 수는 없어 그대로 치루었다. 이는 시민들이 주목하고 있고 국제 사회의 이목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선거를 치러 타나랏이 총리가 되었다. 이번 쿠데타 세력이 1946년 쿠데타 세력과 그 이후 법원을 통해 친 송크람파 정부를 제거했던 세력과 다른 점은 부정선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헌법과 의회의 기본 구조를 대폭 수정하여, 친 송크람 세력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것을 가급적 차단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쿠데타 이전부터 타나랏파는 임시 헌법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선거를 통해 하원을 구성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의 근간은 바뀌지 않겠지만, 많은 새로운 장치들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의석수를 늘리려 했다. 근본적인 모순과 대립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쿠데타의 세력인 타나랏 세력이 가진 숫자의 힘과 친 국왕 세력이 가진 실질적 권력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수많은 쿠데타를 야기했다. 어쩌면 당시 태국은 많은 신생독립국이 독립 직후 겪었던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정체성과 기본 권력 구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국가들이 독립 혹은 국민 국가 수립과 함께 권력을 누려왔던 국왕이나 구(舊) 세력과 새로 등장한 민족주의 세력 혹은 시민 세력 간에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투쟁과 갈등이 마무리 된 자리에 새로운 국가의 권력 구조와 정체성이 자리 잡았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을 위해 일어났던 군사 쿠데타 이후 1956년에는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전격 단행되었다. 이 날 사릿 타나랏 태국군 사령관은 신문을 통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발표 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군사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발생한 군사 쿠데타가 맞다. 이러힌 일들이 발생한 지 이틀 만인 9월 20일에 군은 공식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선포하고 정부 기관들을 군의 통제 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이틀 간 쿠데타 상황에서 발생한 정권을 교체하는 일들을 놓고 볼 때 후일 군사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게 되는 태국에서 쿠데타마저도 법적 절차와 의미, 그리고 제도화된 단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대개 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고 비밀리에 정권을 탈취하고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는 법적 효력이나 절차 등을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8년 9월 쿠데타에서 태국군은 사실상 국가를 장악한 기간 동안 발생된 조치에 대해 정치적인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계엄령만을 선포한 것이지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 간 대립하고 있는 정파 간 형식적 대화를 추진했지만, 20일 이 대화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쿠데타를 선포하여 사릿 타나랏이 정권을 장악하는 수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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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의 쿠데타와 태국 왕실,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 하락하는 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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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슬라브족이자 러시아판 알렉산더 대왕, 슬라브족의 대영웅 스비야토슬라프 1세
- 스비아토슬라프는 942년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 이고르 대공과 올가 대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올가 대공은 52세에 스비아토슬라브를 낳았다. 스비아토슬라프가 3세 때인 945년에 아버지 이고르 대공은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스비아토슬라브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살해한 드레블리예 부족들과 전투를 벌일 준비를 했다고 한다. 주변 신하들이 스비아토슬라프를 말 위에 앉히면 그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살고 있는 영토 방향으로 창을 던지곤 했다. 창은 당연히 말 아래로 떨어졌지만 부친을 살해했던 원수를 향한 복수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고작 4세였다. 소년 시절부터 군사 교육을 받은 스비아토슬라프는 슬라브에서 가장 출중한 장수로 성장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강력한 전제 군주가 된 사실은 연대기 작가가 묘사한 그의 행적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막을 치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 야전에서 말안장을 머리에 베고 얇은 천 조각 하나 걸치고 잘 뿐이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거의 대부분 날고기만 먹었고, 물은 냇가에서 마셨다. 그는 진정한 장수였다. 상대방과 전투를 치를 때도 절대 기습 공격을 하지 않았다. 공격할 때는 사신을 보내 ‘한판 붙자’는 전갈을 보내고 전투를 시작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마치 표범처럼 빠르게 달렸다. 덥거나 춥거나 날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친인 올가 대공이 세례를 받으러 콘스탄티노플로 갔을 때 스비아토슬라프가 이를 동행했는데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만났을 때 그의 외모를 설명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그를 표현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키는 그리 크지 않은 중간이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의 인상은 강했다. 가슴은 딱 벌어져 넓었고 목은 굵었으며, 눈은 하늘색이었다. 눈썹은 진했고, 코는 평편하고 낮았다. 콧수염은 무척 길었으나 구레나룻은 거의 없었다. 머리 스타일은 변발을 하고 있었다. 변발은 그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진주와 루비가 달린 금 귀걸이도 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을 다녀온 직후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서부 우크라이나 슬라브 계통의 민족들과 일부 마자르 족은 스비아토슬라프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직접 서부 슬라브 인들과 마자르 족에게 가서는 거짓 평화조약을 제시하고 그들을 자신의 진중에 초대했다. 그리고 연회를 베풀어 슬라브와 마자르의 귀족들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한 뒤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이어 서부 우크라이나 백성들과 마자르족에 대해서도 화해의 표시를 보내 안심시켜 놓고 공격하여 약 7,000명을 살해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전형적인 무사형 군주의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그는 흔히 코사크의 대장이나 바이킹 선장에 비유되고 있는데 확실히 그의 풍모와 복장 · 습관에는 초원지대의 코사크족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러시아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원정을 다닐 때 그는 마차도 솥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어떤 고기도 삶아먹지 않았다. 오로지 말이나 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길쭉하게 베어내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는 또한 천막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다만 안장깔개를 펼쳐 깔고 안장을 머리 밑에 괴면 그만이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962년 즉위하자마자 키예프 공국을 위협하던 주변 민족들을 끊임없이 정복하며 키예프의 국가안보를 지켜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군사 원정은 964년에 본격화 되었다. 대규모 동방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키예프의 동쪽으로 진격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동슬라브 계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핀족과 투르크 계통 민족들을 자신의 왕국으로 복속시켰다. 당시 이슬람교를 숭배하고 있던 볼가 강 유역의 볼고 불가르를 정복하고 키예프 공국보다 먼저 지난 세기에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교를 숭상하는 국가인 하자르 제국을 공격했다. ‘하자르인의 국가’라는 뜻의 하자르의 수도 이틸을 공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스비아토슬라프는 3년 만에 키예프로 돌아와 연로한 모친인 올가와 그의 세 아들을 만나면서 잠시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965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다. 그는 먼저 하자르 제국에게 조공을 바쳐온 동슬라브의 비아티치(Biatichy) 부족을 정복했다. 그리고 오카(Oka) 강변의 마자르 계 부족들을 정복한 후, 볼가 강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 페체네그를 공략하고 우랄 강 인근까지 약탈했다. 페체네그를 제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다시 하자르 제국을 향하여 남쪽으로 진군했다. 도중에 스비아토슬라브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들을 정복했다. 이어 벌어진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의 군사는 하자르의 군대를 격퇴했다. 하자르 제국의 수도 이틸을 다시 한 번 유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카스피 해 서쪽으로 내려가 사만다르(Samandar) 요새를 파괴하고 그곳에서 다시 서진하여 알란 인과 카프카스의 몇몇 부족을 정복한 다음 다시 돈 강 어귀에 있던 하자르 제국의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하자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얼마 안 있어 소멸하고 만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공격으로 하자르 제국이 쇠퇴했다는 것은 키예프 공국이 지역 패권 국가로 부상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시아계 유목민의 침략을 막아주던 하자르 제국의 완충 역할이 종결됨으로써 키예프 공국이 직접 그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는 부정적 의미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의 동방원정으로 인하여 동슬라브 족의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고 중요한 수상 교통로였던 돈 강과 볼가 강 유역 전체가 키예프 공국의 세력권 내에 들어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동방 원정을 끝낸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방 원정에 착수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서방 원정을 시작한 이유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포카스(Pokas)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968년 제1 불가리아 제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이웃 나라인 키예프 공국의 스비아토슬라프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면 제국의 금을 보상금으로 주겠음을 제안했다. 황제의 제안을 수락한 스비아토슬라프는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해 군사적 성과를 올렸다. 제1 불가리아 제국의 득세를 우려한 비잔틴 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다뉴브 강 유역에 진출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발칸 반도의 다뉴브 평원을 정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지역을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당시 불가리아는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였다. 그곳은 그리스로부터는 황금과 비단, 포도주와 각종 과일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로부터는 은과 말이, 러시아로부터는 모피와 밀랍과 꿀과 노예들이 들어오는 집결지였다. 그러한 경제적인 부분에서 풍요를 직감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다뉴브 강 지역으로 수도를 천도하려고 하였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평소에도 “키예프에 남아 있기보다는 다뉴브 강에 있는 페레야슬라베츠(Pereyaslabech)에 살고 싶다.”고 부하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가 자신의 왕국인 키예프 공국의 중심이라는 말도 함께했다. 하지만 스뱌토슬라프는 키예프를 장기간 비워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가 키예프를 비운 사이에 아시아계 유목 민족인 페체네그 인들이 키예프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키예프로 퇴각했다. 그곳에는 연로한 어머니 올가와 어린 세 아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기습적인 페체네그의 침공은 비잔틴 제국에서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는 불가리아보다 더 위협적인 스비아토슬라프가 발칸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은 비잔틴 제국의 전략적인 외교의 힘이기도 했다. 이러한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전략은 2,000여 년 동안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비결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페체네그를 격퇴한 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주변에 또 다른 강대국이 부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의 키예프 공국이 다뉴브 강 유역으로 대규모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황제는 키예프 군대를 기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산맥을 넘어 침공한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격퇴했고 이를 추격하여 발칸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비잔틴 제국을 몰아붙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군대를 우회시켜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병참선이 끊길 뿐 아니라 후방 역습의 위험에 처한 스비아토슬라프는 급히 다뉴브 강으로 후퇴했고 이어 플로이에슈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협상을 제의했고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과 크림 반도를 포기하고 앞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비잔틴 제국에 굴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신에 비잔틴 제국과의 교역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음으로써 키예프로 퇴각해야 했다. 6만 대군 중 비잔틴 군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2만여 군사만을 데리고 키예프로 돌아오던 스비아토슬라프는 페체네그 인의 기습을 받았다. 이 때 전투에서 키예프 군대는 거의 전멸되고 스비아토슬라프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승리의 환호감에 젖은 페체네그 인들이 스비아토슬라프의 머리를 베어 가죽을 벗기고 두개골에 금을 씌워 술잔을 만든 후에 그 잔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비아토슬라프의 용맹함과 지혜가 자신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그의 세 아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사망한 972년부터 980년까지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공석에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가 키예프 대공 지위에 올랐고 이 때부터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000년, 새 천년들어 폴란드에서 슬라브족 전체에 있어 가장 위대한 위인 100인을 선정하였는데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극도로 증오한 폴란드였지만 슬라브족 전체로 봤을 때,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남긴 슬라브족 통합과 단합의 위대함은 인정했던 것이다. 스비아토슬라프 1세는 모든 슬라브족의 영웅이자 정복군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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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슬라브족이자 러시아판 알렉산더 대왕, 슬라브족의 대영웅 스비야토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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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기된 베링 해협, 러시아-미국 사이의 시베리아-알래스카 해저터널에 대한 이야기
- 베링해협은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베링해협은 아시아 측에는 러시아령, 북아메리카 측은 미국령이다. 이 해협의 해저 대륙붕은 깊이가 35~50m 정도로 매우 얕은 편이고, 최단거리 해협은 85km에 달한다. 바다를 기준으로 보면 베링 해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북극해, 남쪽으로는 태평양 사이의 해협이다. 대륙과 대륙 사이로 놓여있지만 지질학적으로 볼 때 매우 안정된 지역이다. 판과 판의 기준으로 볼 때, 베르호얀스크 산맥 동쪽의 러시아 극동은 북아메리카와 같은 판에 속하기에 남쪽 캄차트카와 알류샨 일대와 다르다. 참고로 해당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기에 화산과 지진이 잦다. 그러나 베링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벗어나 있어 매우 안정적인 지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해협의 수면 깊이가 얕으며 해수면이 가장 낮았을 시기에는 육지가 드러나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연결되었던 적이 있었다. 베링 해협의 이름은 러시아 해군에 고용되어 이 바다를 탐사하여 첫 발견한 덴마크의 항해사 비투스 베링의 이름을 차용했다. 베링 해협은 미국과 러시아의 경계이며 베링 해협 한 가운데에 있는 다이오메드 제도의 서쪽에 있는 그레이트 다이오메드 섬은 러시아 영토이고, 동쪽에 있는 스몰 다이오메드 섬은 미국 영토다. 참고로 그레이트 다이오메드 섬은 러시아어로 라트마노바(Ратманова)라고 불린다. 비록 두 섬 사이의 거리는 3.7km 밖에 되지 않지만, 두 섬 사이로 날짜변경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시차는 무려 21시간 차이가 나는 특이한 지역이다. 두 섬의 영토가 갈라진 것은 1867년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할 때 이 섬의 중간을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자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라트마노바 섬은 무인도이지만 미국령 스몰 다이오메드 섬은 사람이 살고 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스몰 다이오메드 섬에는 83명이 거주하는데, 주로 이누이트족이 거주하고 있고 경제는 어업과 상아 가공이다. 냉전 시기에 두 섬 사이를 두고 ‘얼음 장막’(Ice Curtain)이 쳐졌다. 소련과 미국은 두 섬을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물론 촬영하는 것조차 금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베링 해협은 태평양과 북극해를 분류하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협이다. 게다가 세계 군사력 1, 2위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마주하는 해협이기 때문에 정치,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에 속한다. 만약 러시아 제국 시절에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지 않아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다 해도 이 해협의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북극항로가 개통되고 있는 현재, 그 중요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최근 키릴 드미트리예프(Кирилл Дмитриев) 러시아 대통령 국제 경제 협력 특별 대표이자 러시아 직접 투자 펀드 대표가 러시아와 미국을 연결하는 베링 해협 해저에 110km 길이의 '푸틴-트럼프 터널' 건설을 제안하고 나섰다. 드미트리예프의 주장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는 80억 달러의 비용으로 8년도 채 안 되어 완료될 수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예산의 1/8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만약에 완공된다면 이 터널은 철도와 화물 운송 노선을 갖추어 공동 자원 개발과 러시아-미국 경제 연결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 드미트리예프에 의하면 베링 터널은 아시아 횡단 철도 노선을 북아메리카와 직접 연결할 수 있게 하여 전례 없는 아시아-유럽-미국 운송 회랑을 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맞는 말이다. 베링 해협 해저터널은 또한 특히 북극 지역의 에너지 및 광물 분야에서 공동 자원 개발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지난 8월 15일 러시아-미국의 알래스카 회담에서 나타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공동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양국이 연결된 인프라에 공동 투자할 때 일자리를 창출하고 양국 경제의 성장을 촉진할 것이며 침체기에 빠져 있는 미국 경제도 되살릴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해저터널의 이야기는 이번에 언급한 드미트리예프가 처음으로 주장하는 얘기가 아니다. 베링 해협 해저터널 프로젝트는 인류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 기술 발전의 궤를 같이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보다 베링 해협을 통해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연결시키자는 구상은 1869년대 미국의 에이브러함 링컨 전 대통령 행정부 당시에 미국이 먼저했고, 러시아는 1905년 니콜라이 2세 차르 때 구상했다. 그 사이 1890년 콜로라도 준주의 주지사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은 그의 논문에서 베링 해협을 거쳐 전 세계를 연결하는 코스모폴리탄 철도(Cosmopolitan Railway)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2년 후, 미국의 건축공학자인 조지프 스트라우스(Joseph Strauss)가 베링 해협에 철교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제국에 제의했지만 러시아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904년 미국 철도 신디케이트(Syndicate)가 같은 제안을 러시아에 타진했고, 러시아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고심끝에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제국 내 혁명 기운이 고조되면서 이같은 사업은 무산되었다. 냉전 시대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논의되지 않다가 냉전 시대가 끝난 이후, 21세기 들어 중국에서 고속철도를 미국까지 연결하자는 제안이 2014년에 제기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이는 중국이 러시아, 미국, 캐나다를 한 번에 연결하자는 것이다. 또한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도 비슷한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터널 공법이 발전했고, 영국-프랑스가 도버 해협을 뜷었듯이 베링 해협 또한 터널을 뚫어 연결하자는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등장하게 된다. 베링 해협의 최고 깊이는 55m로 영국-프랑스의 도버 해협 174m보다 깊지 않다. 영국과 프랑 스사이에 건설된 유로 터널은 해저 구간만 38km다. 물론 베링해에 터널을 뚫는다면 그보다 두 배는 더 길다. 하지만 툰트라 지역의 교통 여건과 수요 등이 비용을 상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러시아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이 구상은 아직까지 주장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국제 인프라 건설은 공사 자금이 막대하고, 공사의 구상에 착공에서 완공까지 공사 기간이 길다. 더불어 거대한 공사에 따르는 공해 문제, 도시 문제, 문화 오염, 환경 파괴, 기상 문제 같은 것은 당연히 거론된다. 더불어 기술 문제와 건설 후의 경제성 등 정치, 외교, 안보, 군사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그만큼 이 공사는 세계 다극화의 각각 한 축을 맡고 있는 초강대국끼리의 국제적 공사다. 더구나 베링 해협의 터널 사업은 북극해 개발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혹독한 기후 여건과 자연 환경, 기후 변화, 기술, 자금 조달, 각 국의 전략 간의 조화와 충돌 및 정치, 외교적인 갈등 등 온갖 현안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베링 해협 해저 터널 건설에 대한 국제적인 공론화는 이미 활발히 논의 중이다. 이와 같은 모든 제한은 인류 사회와 역사적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역사는 21세기 신(新) 글로벌 시대로 진행되고 있다. 베링 해협 해저 터널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 파급 효과는 직, 간접적으로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아메리카, 유럽, 동아시아 3대 거대 경제권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이기에 직접적인 물류의 증가 뿐 아니라 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 개발과 연해주 개발, 알래스카 개발, 북부 캐나다 북극해 지역에 대한 개발 또한 이루어져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될 것이다. 러시아는 2011년 8월, 650억 달러짜리 TKM-세계연결터널(TKM-World Link tunnel) 건설 구상을 발표하였고, 이러한 구상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연결을 위해 베링 해 중간의 양쪽 다이오메드 섬 간의 인프라 건설을 포함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시베리아, 캐나다 북극, 알래스카 지역의 광범위한 개발도 포함하고 있다. 베링 해협 해저 터널의 건설은 북극항로의 개발을 촉진할 것으로 보아며 유라시아를 넘어 아메리카까지 포함하는 유르아메리아시아(Eur-Ameri-Aasia)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개념까지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국 또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Eurasia Initiative)와 연계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은 트럼프가 추진하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보다 여기가 훨씬 노다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게다가 우리는 기술이 좋고, 유라시아 터키 이스탄불의 마르마라 해협 해저에 터널을 연결한 경험이 있다. 우리의 경험과 기술은 이곳 터널 건설의 수주를 따내기만 한다면 세계 물류의 주역으로써 한 다리 걸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간접적으로 북극항로에 대한 우리의 지분도 살짝 걸쳐 놓을 수 있으니 트럼프를 통해 이 사업권의 수주를 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3,500억 중, 2,000억 불을 생째로 뜯기는 것에 대한 댓가로 이 사업을 잡으면 반강제로 뜯기다시피한 2,000억 불은 충분히 상쇄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한 구상 자체가 우리 정부한테는 없다는 것에 있다. 국가가 번영하고, 국익을 챙기고 돈 벌 구석은 찾아 보면 얼마든지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모험을 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 이런 것들을 보면 탄식이 나올 정도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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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기된 베링 해협, 러시아-미국 사이의 시베리아-알래스카 해저터널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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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과 러시아의 대응 :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전말
- 지난 11월 7일,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의 그간 있었던 외교적 현안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 기자는 일본의 다카이치 새 정부가 1945년 8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사할린의 미즈호 마을에서 한국인, 즉 정확히 말해 고려인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 등의 전쟁 범죄 사실을 규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당국의 범죄에 대해서는 잊은 채 러시아와 북한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했다. 그러자 자하로바 대변인은 여러 차례 일본 정부에게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한 역사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행한 악행들을 그대로 인정할 것을 촉구해 왔다고 답했다. 우선 러시아는 전쟁에서 몰렸을 때 일본의 이와 같은 보복주의적인 정책이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야만적인 팽창주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접 국가 국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는 점을 주기적으로 강조해왔다고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일본 측이 사할린과 쿠릴 열도 남부 지역의 상륙 작전을 진행하던 중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증거로 보이지 못하고 추측만 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 국민들에 대해 소련 정부의 행동이 가혹했다며 비난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악행을 반성하지 않은 이러한 비난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고 했더. 일본 정부는 항복 이후에도 공소시효가 없는 전쟁 범죄들을 계속 저질러왔다며 이와 관련해 러시아 당국은 이와 같은 일본의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2021년부터 러시아는 사할린 미즈호 마을(현재의 포자르스코예 Пожарское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벌인 조선인 학살 사건에 관한 문서들을 단계적으로 공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일본 제국에 속했던 사할린 남부 지역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 그 절정이 1945년 8월의 학살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제국군 전역자들을 포함한 가해자들이 “소련군에 동조했다”는 구실로 27명의 조선인 주민들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희생자 중에는 6명의 어린이가 있었으며, 그 중 1명은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다. 이 사건에 대해 사할린에서 자행된 당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소련이 수집한 비공개 문서들을 공유하며 일본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라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그동안 벌였던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를 고의로 훼손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1945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베했다. 사할린 미즈호는 일본이 러시아 남부 사할린 지역에서 실시한 식민 정책으로 형성된 전형적 농촌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약 250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10여 명의 조선인도 일본인의 차별과 감시 속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일본인들은 1945년 8월에 소련이 참전하여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게 되자, 조선인들은 소련군에 협조한다는 소문을 공유하게 된다. 드디어 남사할린 마오카(眞岡) 지역에 소련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궁지에 몰렸다. 마오카는 일본인 주민들이 본토로 피난하기 위해 배를 탈 항구였다. 미즈호 마을은 마오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다. 미즈호는 8월 21일부터 일본인 주민들이 피난하면서 마을은 거의 비어 있게 된다. 다만 일본 재향군인회 관계자들의 지시를 받은 재향군인회 회원들과 청년단 남성들만이 마을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소련군에 협조한 조선인들이 스파이 활동을 했기 때문에 패전했다는 소문을 믿고, 함께 생활했던 마을의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임시로 노동 등을 목적으로 마을 주변에 머물렀던 조선인 모두를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8월 20일 아침부터 25일까지 조선인 약 35명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 나누어 몰래 매장하였는데, 이 때 여성 3명과 젖먹이를 포함한 6명의 어린이도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마오카 항구가 점령되면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주민들이 마을로 되돌아왔고, 살해 가담자들 또한 마을을 탈출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였다. 하지만 1946년 여름 이후, 소련 군 당국이 사할린 지역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사건의 전모와 살해 가담자들을 모두 밝혀내게 된다. 이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18명 중에 7명은 사형 선고를 받아 처형되었고, 11명에게는 10년 형과 더불어 시베리아 강제 노동형이 집행되었다. 일본이 이처럼 학살을 진행한 이유는 전쟁에서 패배한 분풀이도 있었을 것이고, 그동안 벌인 갖은 전쟁 범죄에 대해 증인들을 없애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조선인들이 곧 진주할 소련군을 도와 일본인들에게 해를 입힐 것을 우려했다. 이와 같은 판단으로 인해 일본군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마을에 살던 젊은이와 노인은 물론 여성과 갓난아기까지 도륙했던 것인데 당시 소련의 방첩 기관은 61세의 농민인 윤양원씨의 증언을 확보했다. 윤양원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친구 채정환이 사는 미즈호 마을로 소를 사러 갔다. 그의 일본인 아내가 ‘지난 8월 친구가 살해당했다’고 고백했다. 8월 러시아인들이 상륙했을 때 일본 헌병의 명령에 따라 미즈호 마을의 모든 조선인들이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소련 국가안보부 유즈노 사할린스크 담당 수사관의 심문 기록도 존재한다. 한 조선인 여성은 이 때 당시 조사에서 8월 21일인가? 22일에 자신의 남편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경찰관이었던 이시다라는 인물이 조선인들을 한 곳에 모아 모두 30명 가까이 죽였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사할린에서 역사 교사로 일했던 콘스탄틴 가포넨코(Константин Гапоненко)는 1990년대에 공개된 러시아 문서에 근거하여 이 학살 사건을 책으로 저술했다. 가포넨코는 당시 수사와 재판 기록에 그 기반을 두고, 이 사건이 일본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일본인들과 일본군들이 평화로운 조선인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자행한 극도로 잔인한 만행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2008년 ‘사할린 미즈호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낸 바 있어 그 정황들을 참조할 수 있다. 문제는 사할린에서 미즈호에만 이러한 만행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2012년 8월 14일,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사할린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러시아 정부의 1946년 보고서 초안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사할린 서북부 에스토루(현 우골레고르스Углегорск) 지역에 조선인이 10,229명 정도가 살았지만, 전쟁 후에는 5,332명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 인구가 50%가량 감소한 것이다. 당시 소련 측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의 이유로 소련군의 진주로 인한 피난 및 고국 귀환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군인들의 학살을 지목했다. 이에 대해 2012년 11월에는 매우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당시 우골레고르스크 지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일본군이 누군가를 죽였다카더라' 라는 막연한 카더라식의 증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2012년 11월 증언 때처럼 목격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장소와 날짜, 정황을 직접 들은 증언이 확보된 것은 처음이었다고 국가기록원이 밝혔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사할린에 거주하는 황순영(당시 78세, 여성)씨는 11살이던 1945년 여름 에스토루에 살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황순영씨는 이모부 내외가 에스토루로 들어가 농사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 8월 20일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을 끌어내 뾰족한 나뭇가지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황순영씨는 그 때 임신 중이었던 이모가 3살 아들과 함께 숨어서 그 상황을 목격했고, 이후에는 땅굴을 파고 안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이어 전쟁이 끝난 뒤에 이모는 땅에 묻힌 남편과 시동생을 파내 초상을 치렀는데, 그 때 어머니가 다녀오셨다고 회상했다. 1945년 8월 당시 5살이었던 이태엽(2012년 당시 나이 72세)씨는 나중에 이웃으로부터 들은 또 다른 이웃집 부자의 사연을 증언했다.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이태엽씨는 이웃에 살았던 최씨가 말해줬는데, 에스토루에서 강씨와 부인, 아들 둘로 구성된 일가족 중 강씨와 큰 아들이 일본군에 살해당했다고 설명했다. 이태엽씨는 당시 일본군이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죽창을 만들라고 하여 최씨는 죽창을 만들러 갔지만, 강씨는 다리가 불편한 큰 아들을 돌봐야 하여 못 간다고 버티다가 일본군이 착검한 칼에 찔려 죽었고, 큰 아들은 거기에 항의하다 함께 죽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밝혀지고 있는 정황으로 볼 때 그동안 알려진 2개의 학살사건 이 외에도 사할린 전역에 전쟁으로 인한 학살 사건 등이 난무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일본의 패전 사이에 피난과 해방, 그리고 고국으로의 귀향을 바라고 있던 사할린 조선인들에게 있어 매우 끔찍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포로나이스크 시(Поронайск, 舊 카마시스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은 수도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약 288Km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도 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공터에는 김경순 여사가 세운 “통한의 비”라는 것이 존재한다. 1945년 8월 17일, 부친 김경백(당시 54세)와 오빠 김정대(당시 19세)가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8일 경찰서에서 다른 조선인 16명과 함께 살해당하고 경찰서까지 불태워진 사건을 고발하기 위해 해당 비석을 세운 것이다. 카미시스카 지역은 북위 50 근처 소련과의 국경에 인접해 있고, 일본군 부대가 진주하고 있었던 군사지역이었던 중요한 곳이다. 또한 오지(王子) 제지의 제지공장과 6개의 주요 탄광도 위치하고 있던 산업과 군사적인 면에서 사할린에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필히 수호해야 할 도시였다. 특히 1940년대 이후 철도의 연장 공사와 더불어 도로, 비행장 건설로 인해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날로 증가하는 추세였고 동원 이전부터 농업과 건설업 등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군의 감시가 강화되고 있었다. 물론 소련에서 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일본의 감시를 수행했던 조선인 앞잡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나타났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더불어 전투기와 탱크들을 앞세우고 남부 사할린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최북단 군사도시였던 카미시스카 지역은 아주 급박한 상황이 전개된다. 8월 17일 일본인에 대한 소개(疏開)를 결정되면서 주민들에 대한 대피와 모든 주요 시설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에 대한 소개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으며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도울 것이고 소련의 스파이다. 그래서 침공해 온 소련군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올 오해였다. 당시 소련군 중에 몽골계 혹은 부리야트계 병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인과 외모가 흡사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오해로 인해 일본인들의 의심과 의혹이 증폭되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문만으로 경찰과 헌병들이 나서서 그와 같은 학살을 저질렀을지는 현재에도 의문이다. 긴급하게 피난할 상황에서 유독 조선인들, 그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유랑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하고 감시했던 조선인들까지 스파이 혐의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불안 심리에 기인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카미시스카 지역이 사할린 주둔 일본 군사 지역이라는 점과 군사 시설 건설 및 이와 관련된 조선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볼 때 군사적인 보안 측면에서 이 또한 소개령으로 보고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병과 경찰이 개입된 점으로 볼 때 조직적인 상부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미시스카 지역에서의 학살은 여러 증언들이 존재한다. 출산한지 얼마 안 된 산모가 물을 길러간 남편이 오지 않아 찾으러 나가 보니 남편의 목이 잘려 떨어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고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탑승하게 한 후 그대로 수장시켰다는 증언도 있었다.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만세를 외쳤던 비행장 건설 조선인 노동자들을 처형한 증언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방화도 저질렀는데, 22개의 공장, 22개의 호텔, 병원, 극장, 이발소, 세탁소, 사진관, 신사, 일반 주택 등이 화재들로 인해 소실되었다. 2025년 8월, 비극적인 학살 사건들의 80주년을 맞이하여 사할린 현지에서는 추모식이 열렸다. 또한 1946년 7월 19일자 시신 발굴 관련된 문서들과 1946년 7월 21일자 현장 조사 보고서를 포함한 여러 비밀 문서들이 공개되었다. 이 자료들은 매우 잔인하고 끔찍한 학살의 장면들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 범죄를 밝혀내고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 천명했다. 다카이치는 중국에 이어 러시아도 자극했다. 그러나 다카이치 정부의 이런 식의 자극은 결국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사할린에서 일본에 보내지고 있는 가스와 원유를 끊게 되면 일본은 비싼 돈을 들여 미국으로부터 액화 가스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일본의 경기는 더 나빠질 것이고, 결국 다카이치 또한 이시바 시게루 이전의 총리들처럼 총리 자리를 내놓아야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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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과 러시아의 대응 :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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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우크라이나의 강제 동원
- 우크라이나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은 대체로 지난 6월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동원 병력들이 대기소로 사용되는 극동 철도 공장 물류 센터에서 동원 대상자들이 사실상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영상에는 일부 강제 동원 대기자들이 군사위원회 징병관들에게 고함치며 화를 내고 대들다가 문을 바리케이드로 막은 다음, 몽동이로 무장하고 탈출하자며 선동했다. 하지만 나중에 문을 부수고 들어온 우크라이나의 군 특수부대와 경찰의 강력한 곤봉 진압으로 인해 이들의 탈출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강제로 최전선인 포크롭스크로 이동되었고, 최전선에 배치되어 러시아군의 총알받이 되게 했다. 요즘 강제 동원에 반기를 든 군인은 무조건 러시아군과 마주하는 최전선에 배치된다고 한다. 이는 징병 거부로 인한 불만을 잠재우고, 우크라이나 군 내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보기로 보여 진다. 더불어 지난 8월에는 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서부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는 동원 대상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로코모티브 경기장을 길거리 강제 동원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문을 부수고 난입한 사건이 그것이다. 필자도 이 사건을 포스팅한 바 있다. 이는 시민들이 분노해 동원 대상자들을 탈출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당황한 징집 사무소 측은 급히 경찰을 불러 주민들의 난입을 봉쇄하고, 동원 대상자들을 서둘러 뒷문으로 빼돌려 바로 전선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류들의 사건은 숫자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진희 기자의 <바이러시아>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인권위원회에 접수된 동원 관련 민원 건수는 1월~10월 사이에 약 5,000건에 달했다고 한다. 전년 대비 50%가 증가한 셈이고 이는 1~5월에 1,600건 정도였지만, 이후 3,400건이 늘어났다. 6월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고 <바이러시아>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 군 당국은 최악의 병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남성을 동원했다. 그러다보니 우크라이나군 병사의 평균 연령은 43세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군의 평균연령 약 38세보다 5세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전쟁 초반 자진 입대했던 젊은 예비군들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서 우크라이나 전투 병력들은 고령화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예비군들의 연령은 앞으로 더 올라갈 예정으로 이미 심각한 수준에 접어들었다. 즉, 필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우크라이나 중년 남성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한 동원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라면 더 이상 현역과 비슷한 예비군이 아닌 민방위도 끝나는 나이대다. 이에 젤렌스키는 물러서면 국가 자체가 사라진다고 주장하여 군에 대한 자진 입대와 결사항전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무려 3년 8개월을 달려온 전쟁에 우크라이나인들은 거의 지쳐가고 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동원 인식에 대해 하루가 다르게 전쟁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어떻게든 해외로 도피하는 것, 혹은 잠적하여 아예 동원을 피하겠다는 분위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더불어 동원을 거부하며 길거리에서 징집관을 폭행하거나 총을 쏘며 도주하는 사태가 잇달으고 있으며 주변에 있던 주민들이 합세해 동원 대상자를 도피시키는 사건까지 온갖 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동원을 거부하는 사태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우크라이나 중부 폴타바 주 크레멘추크에서는 한 남성이 징집 사무소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던 도중에 권총을 꺼내 직원들에 발사하여 2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남성은 길거리에서 강제로 끌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같은 날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서는 징집관들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불심검문을 하던 중 시민들과 시비가 붙으며 충돌해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징집용 차량까지 전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 스타인 안젤리나 졸리가 우크라이나에 방문했는데 그녀의 경호원이 우크라이나 동원 징병관에 의해 군사위원회에 강제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졸리는 이날 니콜라예프에서 헤르손으로 가는 길에 검문검색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동원 사무소로 끌려갔다. 졸리의 일행을 태운 SUV 차량 2대가 전날 밤 니콜라예프 주(州) 피브덴누크라인스크(Південноукраїнськ)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병역 서류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중요 인물'인 졸리를 호송 중이라 설명했지만 검문소 군인들은 막무가내로 그를 징병사무소로 보냈다. 이에 황당한 졸리는 징병 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석방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러시아(https://www.buyrussia21.com)에 의하면 결과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징병 사무소 측은 졸리가 화장실이 급해 찾아왔다는 거짓말로 해명했고, 그녀의 경호원도 석방됐다고 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크라이나 네티즌들로 인해 그녀의 전 남편이자 같은 할리우드 스타인 브레드 피트가 길거리에서 징병관들에게 끌려가는 밈까지 만들어져 등장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 강제동원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졸리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강제동원이 더 이상 가짜뉴스가 아니다라는 것을 오히려 입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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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우크라이나의 강제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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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중국인을 차별했던 중국인법(Chinese Act) 제정과 중국인 유입을 막기 위해 도입한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 중국인이 처음 호주로 유입된 시기는 호주에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던 1851년으로 이후 20여 년 동안 약 50,000명의 중국인들이 호주로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점차 숫자가 늘어나면서 큰 문제가 되었다. 빅토리아 지역 금광으로 들어온 중국인 숫자는 1854년 약 4,000명 수준에서 1857년 23,623명 수준으로 불어났고 1859년에는 42,000명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이들 중국인들은 백인들과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고 이 와중에 중국인은 비도덕적이고 이교도이며 아편을 피울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금을 중국으로 가져간다는 편견이 확산 되었다. 그러자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들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에 호주 식민지 정부들은 18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의 이주를 제한하려는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실례로 빅토리아 입법부(Victorian Legislative Council)는 1855년 중국인 이주를 제한하기 위해 중국인을 싣고 오는 선주들에게 한 사람당 10파운드의 인두세를 부과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후 1881년에는 이에 더해 중국에서 입항하는 배에 대해 100톤 당 1명씩 중국인 이민을 허용하는 내용의 <중국인법(Chinese Act)>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차별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1851년 호주에서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어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 당시 청나라의 노무자들이 대규모로 호주에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집단으로 거주했다. 그러나 중국계 이주민들은 영국계 중심의 기존 호주 사회와 충돌했고 이에 따라 이들이 저임금 노동을 맡음으로 인해 임금 저하의 원인이 된다며 아시아 인들의 이민을 제한하자는 경제적 주장이 나왔다. 이에 백인 외 인종의 이민을 받지 말자는 인종 차별적인 주장까지 섞여 탄생한 것이 백호주의의 시발점이었다. 따라서 호주가 연방을 구성한 이후로 백호주의는 공식화되었다. 1901년에 제정된 호주 연방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1901)>은 유색 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었으나 구술 시험이나 제조업 취업 금지 조항 등을 통해 특정 인종의 이민을 실질적으로 제한하였다. 특히 이 법안은 호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입항 시 유럽에서 통용되는 언어 가운데 하나로 50자 받아쓰기 시험을 실시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입국하고자 하던 중국인과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호주 정부는 1901년 12월 17일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 법(Pacific Island Labourers Act)>을 제정하여 1904년 3월 31일 이후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들의 호주 입국을 금지하였으며, 이미 호주에 입국한 자들도 1906년 12월 31일 이후에는 호주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당시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인식되었던 외국인은 중국인이었다. 그와 같은 배경으로 아 쉐웅 사건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 쉐웅은 1881년부터 1901년까지 두 번의 짧은 중국 방문 기간을 제외하고 빅토리아에 계속 거주한 중국계 이민자로 빅토리아에서 귀화(Naturalization)한 이후 1901년 중국에 가서 약 5년 동안 지냈다. 이후 1906년 빅토리아로 돌아올 당시 1901년 제정된 연방정부의 <이민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에서 이민자에게 요구하는 받아쓰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입국을 거절당하고 감금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아 쉐웅은 자신은 이민자가 아니라 호주 국적(Australian Nationality)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민 제한법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빅토리아 최고 법원(The Supreme Court of Victoria)에 인신 보호(Habeas Corpus)를 신청하였고 커센(Cussen) 판사는 이를 받아들여 아 쉐웅에 대한 석방을 명령하게 된다. 이후 이 사건은 호주 연방 고등법원에 상고되었고, 호주 연방 고등법원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 국적과 별개로 존재하는 호주 국적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쉐웅에게 <이민제한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로 판결, 당국에 사건 취하(Abandon)를 요구하였으며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 이후, 12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호주의 백호주의와 유사한 형식의 혐중 시위와 혐중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지금 호주에서는 이같은 차별 행위가 법적으로 엄금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아직까지는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법적인 조치가 매우 약한 편이다. 모든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으로 봐야 한다. 현 세계인구는 82억이고, 중국인은 그 중에서 14억을 차지한다. 회교와 해외 중국계까지 합치면 거의 20억 정도 된다. 전 세계 인구의 약 24%가 중국인과 중국계라는 것이고 중국인들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보는게 무방하다. 이는 세계 어딘가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 한국과 중국, 양국이 무비자로 개방되어 있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여행을 하고 있다. 최근 보수우파들도 혐중한답시고 중국 여행하고 온 사람들이 많더라. 그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중국인들은 어떨까? 2021년 3월 기준으로 일본 거주 외국인 중 중국인 인구는 77만 명, 미국 거주 외국인 중 중국인 인구는 2,400만 명, 영국에 사는 중국인은 2021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50만 명 이상이다. 한국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수효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으며 일본, 미국, 영국에서도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숫적으로 훨씬 열세다. 이들에게 공격을 받아도 현지 경찰이나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해도 중국인들은 막대한 자금으로 더 좋은 변호사를 고용할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나가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중국인들에 의해 충분히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대놓고 혐중 시위와 중국인 여행객들에 대한 신변 위협은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해외에 나가서 일하고 돌아오는 것도 언제든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불안한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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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중국인을 차별했던 중국인법(Chinese Act) 제정과 중국인 유입을 막기 위해 도입한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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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 필리핀에서 5만 명의 코피노들을 낳고 잠적한 한국 남자들도 문제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다. 베트남에도 이른바 "라이따이한" 문제가 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베트남으로 파견된 대한민국 국군 혹은 한국인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혼인 관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말하는데 한국군과 한국 노무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 태어난 후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973년 모두 철수하게 되는데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이들을 두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처사라고 하지만 "라이따이한" 또한 세대별로 나뉘고 있다. 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세대는 "라이따이한 1세대"들이다. 문제는 "라이따이한 2세대"들부터다. 베트남이 도이머이로 인한 개방과 더불어 한국과 수교한 90년대부터 베트남에 들어간 한국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부터 문제인데, 라이따이한 2세대들과 그 어머니들은 편모 슬하에서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도 힘든데 자국에서도 심한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콘돔 미착용에서 성관계를 갖거나, 순진한 현지 여성들을 작업해 성관계를 가져 임신시키고, 연락하니 차단하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한국 남자들이 많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3세대"들과 201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4세대"들의 남편들은 더 심하다. 이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있었던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보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더 어렵던 시대였다. 이걸 간파한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에 들어와 성관계를 하고 씨를 뿌리고 도망가면 찾기 힘들었다. 베트남에 한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미혼모인 여성들이 많은데 베트남의 문화상, 피임이나 낙태는 매우 죄악시 되고 있고, 북베트남의 경우, 유교 문화권이 남아 있는 상태로 집안과 친척들의 눈총을 받기에 그냥 낳아 기른다고 한다. 요즘 2020년대 들어서도 그런 인식은 마찬가지긴 한데 2000년이나 2010년대 보다 많이 줄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와 틱톡과 같은 숏츠 영상, 그리고 스마트폰의 발전은 "라이따이한 세대"가 생기기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베트남 여성과의 만남에서 성관계가 활발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남성들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끼리 커뮤니티가 있어 책임 없이 임신시키고 도망가는 한국 남자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 커뮤니티에는 해당 한국 남성들의 정보가 박제되기 때문에 한국에 있더라도 스스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전처럼 요즘 베트남 여성들도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2020년대의 베트남의 MZ 세대들은 굉장히 영악한 아이들이 많다. 특히 동남아시아 각국을 다녀본 필자가 볼 때,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IT 최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없는 행동으로 여성을 작업해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면 바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박제된다. 요즘 아이들일수록 IT와 관련하여 다루는 솜씨들이 한국 아이들 못지 않아 보통이 아니다. 옛날의 베트남 생각하고 베트남 여성을 정액받이 생각하여 접근했다가는 한 순간에 골로 가는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1회성 만남을 즐기고 싶다면 가라오케나 마사지 샵 같은 유흥지들을 가면 된다. 거기선 1회성 만남을 즐기고 그 댓가를 지불하면 깔끔하다. 게다가 베트남 여성들은 자기 남성이 아니면 굉장히 쿨하고 관계에 있어 깨끗이 끝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명 인터넷에서 말하는 베트남에서 "싸튀충(정액을 사정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넷 은어)"의 시대는 끝났다. 잘못 건드려 국가적 개망신을 당하지 않고, 교제하고 싶으면 정당히 진심으로 만남을 갖고 교제하거나 1회성으로 끝내고 싶으면 유흥지들에 가는 것이 좋다. 미디어나 인터넷, SNS, 각종 IT 소셜들의 발달로 인해 베트남 뿐만 아니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IT도 서서히 베트남 수준으로 올라오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더 이상 정액받이 천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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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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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ODA 지원 &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퍼주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 캄보디아가 2025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적개발원조(ODA)를 받는 수혜 국가 1위로 올라섰다 한다. 한국은 2025년 총 92개의 협력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할 계획이며, 이 가운데 캄보디아가 지원 규모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고 KOICA에서 밝혔다. 우리가 6.25 전쟁 이후, UN 및 각 국가들로부터 원조 받아 연명했고,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여 오늘날의 경제 부국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가 원조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ODA를 통해 우리보다 못한 나라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국제 사회에 헌신하는 것으로 갚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ODA도 윤석열이 당시 이러한 일환으로 한 것이라 믿는다. KOICA는 <프놈펜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는 2025년 캄보디아에 총 3억 1,500만 달러(약 4,000억 원) 규모의 원조를 제공할 예정이며 주로 교육과 수자원 관리, 보건위생, 교통 및 농촌 개발 등 캄보디아의 주요 개발 분야에 집중 지원될 계획이라 밝혔다. 당시 개발 원조는 27개의 유상 차관 프로젝트와 62개의 무상 원조 프로젝트로 구성되고 있다. 특히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차관을 받아 이루어지는 대형 프로젝트 중 가장 핵심 사업은 양국간 우호의 상징으로 추진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Korea-Cambodia Friendship Bridge)’ 건설에 있다. 이 우정의 다리는 2023년에 훈 센과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캄보디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프놈펜 내 다운펜 지역 야시장 인근부터 쯔로이짱와 반도 끝을 거쳐 껀달 주 아레이 끄삿 지역까지 총 길이 2,375m, 폭 27.5m의 사장교로 건설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 공사는 이미 2024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는 한국수출입은행으로부터 2억 3,500만 달러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받게 되며, 공사 소요 기간은 5년으로 공사 완료 예상 시점은 2030년이다. 우정의 다리의 설계 및 감리는 유신컨소시엄이 1,885만 달러에 수주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그 외 무상 원조 사업으로는 캄보디아 국립 어린이 병원 의료진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 2023년을 시작으로 2027년까지 총 1,600만 불(약 208억원)을 투입하여 프놈펜 소재 국립 어린이병원 내과계에 대한 역량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 안으로는 국립 어린이 병원 내 내과계 병동을 새로 짓고, 최신 의료기 자재들을 지원하며, 병원 운영 및 의료 인력의 역량을 강화에 나선다. 병원 동은 2026년 3분기까지 지상 5층, 전체 면적 8,715㎡, 총 196병상 규모로 준공될 예정이며, 병원 준공에 맞춰 150여 종 1,900여 점의 의료 기자재가 지원되고, 세부 분과별 전문 인력 초청 연수 및 현지 연수도 이루어졌다. 2024년 5월 훈 마넷 총리의 한국 방문 이후 양국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무상원조(ODA) 지원 규모가 두 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윤석열 정부 때 이루어진 것이다. 캄보디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를 맺었다는 것은 캄보디아와 준동맹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북한-러시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와 유사한 관계다. 이처럼 준동맹국 캄보디아와 ODA는 2022년 1,789억원, 2023년 1,805억원, 2024년 2,178억원, 2025년 4,353억원 등으로 매년 큰 폭으로 늘었다. 한국에서 ODA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들은 베트남을 비롯해 캄보디아, 스리랑카, 네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는 훈 센 가문이 대를 이어 장기 독재를 하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해 있다. 독재에 심화되고 부패가 만연한 국가들에게 ODA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으며 이는 해당 국가의 의존성만 커지게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의 국가가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 또한 젤렌스키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한 상태로 EU 국가들이 자국을 희생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미국도 우크라이나를 마찬가지로 지원했었고 이는 젤렌스키와 각종 정부요원들의 비리로 인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있다. 이제 막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고 북한과의 대치로 방위비를 많이 써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게다가 국가부채까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초저출산과 3D 업종 기피현상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외국인들의 본국 송금으로 인한 외화 유출 또한 상당하다. 게다가 이제 미국에 2,000억 불을 투자해야 한다. 이래저래 돈 나갈 곳만 많고, 이러한 상황에 ODA는 우리 형편에도 맞지 않다. 윤석열은 캄보디아에 가서 감당 못할 계약을 하고 왔고, 김건희는 빈곤포르노나 찍고 왔다. ODA는 우리 국민의 혈세로 지원된다. 2030 부산세계엑스포 유치를 위해 ODA 약속을 남발한 것도 윤석열 정부고,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전임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도 캄보디아 전문가도 아닌 산업통상자원부 부산엑스포 유치지원단장 출신이었다. 환장할 일이다. 우크라이나에 또 과도하게 퍼준 것도 윤석열 정부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총 23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발표했으며, 2024년 3억 달러는 무상 지원, 2025년 이후 20억 달러는 장기 저리 차관 형식으로 제공된다 했다. 또한, 1억 달러 규모의 차관이 사회 부문 지원을 위해 이미 지원한 상태다. 이것들도 다 국민들의 혈세다. 과도하게 우크라이나에 퍼준 것도 이해 못할 뿐더러, 캄보디아에 퍼준 ODA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퍼준 ODA에 대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ODA 명목상으로 뒷돈 챙겨도 이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도 마찬가지이며 폴란드와의 방산 무역 또한 의심할 부분들이 많다. 대우크라이나 지원, 김건희, 삼부토건 및 각 재건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에 대한 조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벌써 PD 수첩 등 많은 매체들이 폭로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지지부진하다. 나는 폴란드-우크라이나에 젤렌스키와 함께 비자금 조성하고 캄보디아에까지 파이프 라인을 설치하여 검은 돈을 세탁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일찍부터 이중과세 방지와 탈세 및 조세회피 예방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고 했지만 부패한 훈 센 집안의 행태로 본다면 이와 같은 협정은 무의미하다. 부정부패가 일상화 되어 있는 캄보디아 같은 국가는 조세포탈지로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돈을 물쓰듯 쓰기만 한 윤석열 정부가 흑자를 본 부분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리고 캄보디아 ODA와 대우크라이나 지원, 대폴란드 방산 협정 사이에 숨겨진 부패와 비리는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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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ODA 지원 &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퍼주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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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광저우, 그리고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임칙서(林則徐, 1785~1850)
- 내가 2017년에 중국 광저우에서 잠깐 있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의 첫 번째 전제 국가인 남월(南越)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편전쟁에 대한 연구도 함께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 특히 청나라의 대외무역제도는 매우 독특했다. 1757년부터 아편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동남아 및 서양 세력과의 무역은 광동성(廣東省)의 수도 광저우(廣州)에 국한하여 시행하였다. 1683년 대만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반청복명 세력인 정씨(鄭氏)가 멸망하자 청나라는 이른바 해금(海禁)을 풀고 4개의 항구를 열어 해외 국가들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아모이(澳門, 마카오), 장주(漳州), 영파(寧波), 그리고 운태산(雲台山)이 주요 4개의 항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1757년에 이들 4개 항구를 다시 폐쇄하고 광저우 항구만을 열어 대외무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남아, 이슬람,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에 자유로이 왕래한 것이 아니라 무역 할 수 있는 달인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일정한 조계지 거주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일 이 지역을 재외상관(在外商館, Factory)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광저우의 사면도(沙面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면도(沙面島)의 재외상관은 청나라 정부에서 인공적으로 섬을 만들어 요새화된 외국인 거류지로 원래 해외 특허로 만들어진 회사의 군사력으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재외상관 제도가 청나라에 들어오면서 군사력의 보호라는 명목적인 측면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대외무역제도에는 일정한 기구와 관리들이 있었다. 청나라 측에서 보면 먼저 양광 총독(兩廣總督)과 광동 순무(廣東巡撫) 등의 지방장관들이 있었고 광저우 부근의 해관(海關)은 외해관감독(粤海關監督, 외국인은 Hoppo라고 칭하였다)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하부 조직에서 실제로 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진 청나라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광동 십삼행(廣東十三行)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조합 형태인 길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특허상인을 공행상인(公行商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대외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광저우 지역에 있는 외국인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관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의 징수도 이들 공행상인(公行商人)이 담당하였다. 서양 측에서도 이를 조합한 일정 기구가 있었는데 당시 대청무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국의 경우를 보면 특허 회사인 동인도 회사가 대청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인도회사의 중국 현지 기구로서 관화인 위원회(管貨人委員會, Select Committee of Supercargoes)가 존재하고 있었다. 관화인(管貨人, Supercargo) 중에서 3, 4명으로 구성된 이러한 위원회에는 수석(首席, President)이 있었는데 청나라 정부는 이러한 서양인의 총책임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인도 회사의 대청무역 독점은 1834년에 종료되었다. 랭커셔(Lancashire) 지방의 면업 자본이 자유무역을 계속 주장하여 관철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는 영국 정부가 대청무역을 감독하기 위해 무역 감독관(貿易監督官, Superintendent of Trade)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 무역 감독관은 기존의 관화인위원회 수석이 동인도 회사의 직원인 것과는 달리 영국을 대표하는 국가 관리라는 점에서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하였다. 일찍이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청나라에 통상무역을 요청하러 찾아온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중국은 물자가 풍부하여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했다. 이는 결코 호언이 아니었고, 그것은 약 50년이 지난 아편 전쟁 전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차 아편전쟁 직후인 1842년의 통계를 보면 청나라가 영국에서 면제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 960만 달러를 수입했는데, 영국에 수출하는 상품은 차 1,500만 달러, 비단 920만 달러를 비롯해서 총 2,570만 달러에 달했다. 차와 비단이 당시 영국인들의 식생활과 의생활에 거의 필수적이었던 것에 비해 영국의 상품은 중국인들에게 그리 절실하지 않았으니, 청나라 조정이 “외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화이(華夷)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영국과의 무역에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에는 청나라가 결코 여유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1842년 당시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상품인 아편의 중국 내륙 수입액이 약 2,40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공식 무역수지는 청나라가 영국에 대해 1,610만 달러 흑자였으나, 아편을 계산하면 오히려 800만 달러에 가까운 적자인 셈이었다. 그것은 청나라의 국가와 관민 모두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조정의 권위와 기강이 오랜 기간 동안 평화로운 틈에 매우 헤이해졌으며 부정축재와 더불어 매관매직에 이르기까지 국가 내부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부정축재의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가 큰 고통을 겪었고 이를 배경으로 백련교의 난, 천지회, 삼합회 등의 암약, 소수민족들의 봉기 등이 계속하여 발생하면서 시정이 불안하고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처지였다. 또한 외국에 지불하는 상품 대금들은 은으로 결제되었는데, 은은 정부에 납세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매년 아편으로 인하여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새어나가는 상황은 은의 가격 상승, 나아가 정해진 세금 액의 실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로 인하여 세금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농민이 늘어났고, 그들은 대개 백련교나 천지회 등에 가입해서 반(反) 정부 활동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편이 많은 중원 백성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점을 접어두고라도, 청나라 정부는 아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아편과 같은 마약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한 폐해가 막심하자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아편이 수입되면서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시기로 알려진 이른바 3대의 청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고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청나라 백성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000 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0,000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방황하는 유민 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1773년에 영국제 아편이 들어올 무렵에는 판매량이 1천 상자였던 것이 1839년에는 40,000 상자까지 늘어나 있던 아편을 두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이 격돌하여 조정은 격심한 혼란에 놓이게 된다. 이금론은 아편에 중독된 사람을 완치시키는 일도, 아편 유통과 흡입을 완벽하게 막는 일도 불가능하고 금지할수록 가격만 높아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므로 차라리 관리와 군인을 제외한 일반 백성에게는 아편 흡입을 허용하자는 것과 아편 결제에 은을 쓰지 말도록 하고 국내에서 아편을 재배해 수입품을 대체토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 현실성이 있었으나, 오랜 유교 론으로 볼 때 백성들을 지극한 덕으로 다스려야 할 황제가 취할 정책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볼 때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은 약 4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대해 황작자(黃爵滋), 임칙서(林則徐, 1785~1850) 등이 이금론을 반박 주장한 엄금론은 아편 흡입 자에게 1년의 기한을 주어 아편을 끊도록 하고, 그래도 끊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며,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엄중히 단속하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임칙서는 호광성(湖廣省) 총독을 지내며 독자적으로 아편을 근절시킨 업적이 있었고, 도광제(道光帝)에게 올린 상소에서 아편을 방치할 경우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 이라고 토로한 인물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엄금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고, 1839년 3월에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서양의 수송선이 들어오던 광동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5월에는『아편흡입엄금장정(嚴禁阿片烟章程)』39조를 반포하고 전국적으로 강도 높은 아편 단속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아편무역에 대한 청나라의 강경한 대응에 반하여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입장에서 중국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비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사이에 중국을 방문하거나 오랫동안 체류한 사람이 많아지며 이에 많아진 정보 덕택에 영국의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부분은 중국인과 그 문화에 대한 혐오스러움이었다. 자신들과 워낙 다른 피부색과 언어, 몸차림 등은 혐오대상은 아니었지만 중국 상인과 관료들을 접한 경험은 불친절, 교만, 부정부패, 무사안일, 허례허식 등의 나쁜 인상을 길이 남겼다. 그것은 당시 영국의 시민문화가 근대적 사회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무절제함이나 무교양 등을 혐오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자리 잡은 한편, 사대부 가문들이 알려주는 중국의 교양과 예의범절은 ‘복잡하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광대놀음(Complicated and incomprehensible play clown)’ 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인의 눈에도 영국인의 행동거지가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전혀 서로를 모를 때보다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될 때 발생하는 혐오감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대다수 영국인의 인식과는 달리 소수의 지식인과 선교사들은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깊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고, 따라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말과 같이 “오직 황제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인(Only the emperor is free and all are slaves)” 이라는 중국의 정치와 사상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기독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당시 동양철학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일반인이나 지식인 모두 다소 거친 방법을 쓰더라도 중국인들을 ‘해방(Liberation)’시키고 ‘계몽(Enlightenment)’시킬 필요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편전쟁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막연한 생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국을 자국과 다를 바 없는 문명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면, 이러한 전쟁이라는 결정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여러 정황들에 있어 전쟁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인도와 영국 본토의 무역수지를 유지하려면 다소 부도덕한 면이 있어도 아편 무역에 의지해야 했고, 또한 잠재력이 풍부한 중국 시장을 아편 이외의 영국 상품으로도 본격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청나라의 관세가 정부의 방침대로 정해지는 일과 무역항이 광주(廣州) 하나로만 국한된 일, 그리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조합이 무역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폭리를 취하고 있는 일 등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오랜 숙원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열강과 식민지인들 앞에서 대영제국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는 정치적인 고려도 존재했고 막대한 부와 많은 인구에 비하여 많이 약화되어 보이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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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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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광저우, 그리고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임칙서(林則徐, 1785~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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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에서 실패와 중국과의 펜타닐 관세, 베네수엘라 위기
- 미국에서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이 발발한 시기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마약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나타난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닉슨 이후에 등장한 모든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공화당의 로날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는 마약과의 전쟁을 더욱 심화시켰고, 가수인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967~1994)의 죽음으로 인해 민주당인 빌 클린턴마저 가담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결과적으로 마약 이용자를 전혀 줄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폭력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흑인민권운동으로 그 위상이 신장된 미국 흑인들의 삶을 사회적, 경제적, 비공식적 차별로 새롭게 생성하여 결국 미국을 마약 천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미국 흑인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은 민권 운동 이전보다 오히려 하락했고, 이들의 권리를 찾는 운동은 폭동과 폭력 시위로 점철되어 갔다. 그저 금지된 약물인 마약을 투약했을 뿐, 폭력적이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을 전과자로 만들었고, 이들이 약물로 인한 전과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서 빈민층이 늘어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이들을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데 엄청난 세금을 써야 했다. 이처럼 폭증하는 재소자들로 인해 미국의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는 교도소와 교도관들을 늘려야만 했고, 이는 미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인구 10만 명당 수감자가 531명 정도의 비율을 갖고 있으며 이는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중국, 이란, 쿠바 같은 국가들보다 수감자들의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미국은 수십 년째 수감자 인구와 인구 대비 수감자 비율에서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감소세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 비율은 5위로 줄어들지만 다시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계속 시설을 증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재소자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형기를 못 채운 잡범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수용 한계를 넘어선 재소자들로 인해 관리 부실로 갱단간의 전쟁, 마약 유통, 살인 등 미국의 교도소는 범죄의 집합소가 된지 오래이고, 경범죄로 들어간 잡범들이 폭력적인 갱단 흉악범으로 변해 출소하는 범죄의 학교가 되어 버렸다. 단순한 마약 투약자가 교도소에 들어가서 갱단 조직원이 되어 출소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교도소가 오히려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미국에 존재하던 인종 간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닉들은 꿈도 희망도 없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치안 위협이 극도로 높아지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 사회에 큰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내부에서 이 정책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비폭력 단순 마약사범을 무조건 감옥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사용자 처벌, 대량 투옥 위주의 미국 사법 체계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현 2025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개선된 바 없다. 미국 정치권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금지한 약물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은 헤로인(Heroin), 코카인(Cocaine), LSD, 엑스터시(Ecstasy),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 마리화나(Marijuana), 환각버섯(Psilocybin mushroom), 펜타닐(Fentanyl) 등이다. 여기에서 큰 문제는 펜타닐(Fentanyl)이다. 만약 중국의 펜타닐 원료 수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미국의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결론적으로는 아니다(No!)이다. 인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이 중국 대신 펜타닐의 원료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미국 정치인들이 미국 마약의 문제를 볼 때, 마약의 무차별적인 공급에 있다고 주장하며 마약의 원료 생산지를 제거하거나 멕시코, 중국 등 공급 측을 제재하는 생산 차단에 주력해왔다. 최근에는 중국이 펜타닐 차단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 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경주 APEC의 미국-중국 회담에서 트럼프는 중국이 합성마약 펜타닐과 그 원료의 밀수출을 단속하면 펜타닐과 관련해 중국에 부과한 관세에 한해 완전히 폐지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중국은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난 정말로 중국이 그럴 인센티브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중국 정부의 펜타닐 단속을 보는 대로 미국 정부는 나머지 10%를 없앨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와 같은 단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과는 전부 처참하게 실패했다. 소비만 있으면 공급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마약을 구입해주는 미국이라는 세계 최대의 마약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조직들은 아무리 처벌을 강화하고 마약 공급업자들을 체포한다고 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마약을 조달해 와 미국에 유통시켰다. 오히려 규제와 처벌의 강화로 인해 마약의 가격이 올라 수익성이 증가하고 마약의 공급이 더더욱 증가하는 악순환만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마약 수요 원인인 미국 사회의 내부에서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급자와 판매 수단만 체포하고 단속한들 또 다른 공급자 및 수단이 등장해 대체할 뿐이다. 사실상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수요가 감소되지 않아서 마약 판매가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게 해 준다면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시장에 어떤 수단으로든지 끊임없이 제품 공급이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마약과의 전쟁은 처음부터 마약 중독자들의 숫자를 갖은 형벌과 체포를 통해 감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사실 이는 마약의 특성, 특히 미국에서 중독성과 해악으로 인해 처벌 및 관리 대상인 코카인, 헤로인, 펜타닐을 비롯한 마약성 진통제(Opioids), 메스암페타민 등의 약물들이 어떤 약물들인지 이해가 부족했었다. 일단 한 번 흡입하거나 사용하게 되면 단순히 그 주변이 공포와 폭력으로 인해 사용을 억제하거나, 혹은 자기 절제를 통해 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약이라 부르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심각한 경각심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마약 투약자들을 투옥시키면 해결이 된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효과는 매우 미미했다.당연히, 한 번 맛을 본 마약 중독자들은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소하여도 대부분 쉽게 마약을 끊지 못하고 상용하는 수준이 되었다. 약을 끊은 사람들조차도 단순히 처벌을 통해 마약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단순히 투약했전 투약자들조차도 투옥시키는 현실이 지속되자, 교도소의 숫자는 그만큼 늘어났지만, 당연히 단위면적당 수감자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났고, 이를 관리할 인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마약중독자들과 함께 격리되어야 할 마약이 교도소로 유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관리가 되지 않을수록 교도소 내 범죄조직들은 간수들을 매수하기 쉬워졌고, 아주 극악의 환경에 마약까지 유통되니 죄수들 간의 폭력이나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강제라도 마약을 끊어야 할 중독자들의 중독 상태는 지속되어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이에 마약 범죄가 아닌 상태로 들어온 죄수들조차도 교도소에서 마약을 접하고 마약중독자가 되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 된 것이다. 거기에 수감 생활 동안 겪었던 심리적,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마약에 대한 유혹에 더더욱 취약해졌다. 특히 교도소 내 범죄 문제는, 도저히 교도소 자체의 인력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감옥의 겉모습은 간수들이 관리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감옥에 생성된 범죄조직들이 교도소를 반 정도 지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불어 관리 인력의 문제로 인해 부패 문제, 관리 소홀 문제 또한 심각했다. 이는 교도소에 들어갈 예산이 날이 거듭될수록 부족하다보니 교도관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이나 복지 예산 또한 좋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이는 교도관이 열심히 일했을 때 주는 인센티브는 없는데, 일은 매우 고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교도관들도 관리에 대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약 중독 문제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온 죄수들은 직업을 잃고 노숙자가 되거나, 아니면 교도소 내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 더 심각하고 위험한 범죄자가 되어 사회로 돌아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에 투입된 예산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마약 투약자 및 판매자에 대한 체포 및 처벌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마약 투약자를 치료하고 재활하여 본질적으로 마약을 끊게 만드는 것이 교도관이나 경찰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 이는 고스란히 시민 사회의 몫이 되었고, 날로 늘어가는 치료 및 재활에 들어가는 비용과 중독자 수에 비해, 관련 예산과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약과의 전쟁을 하면서 주 정부나 연방 정부는 이들을 지원할 역량이 되지 않고 여력도 되지 않으니 중독자 수가 줄지 않고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이어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마약성 진통제 문제로 여겨진다. 마약성 진통제로 인한 사망자 수와 상용자 수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의 시발점이 되었던 미국의 열악한 의료 보험 제도, 각종 사회 복지 제도와 제약 회사들이 엮여 발생한 재앙 중 하나가 마약 문제보다 더 심각한 마약성 진통제 문제다. 이는 단순히 사용자나 판매자를 처벌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 또한 규제 대상이며, 이를 팔거나 쓰는 것 또한 처벌 대상이다. 그리고 그 강도 또한 낮지 않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많은 마약들을 불법으로 간주함으로 인해, 당연히 마약의 생산과 유통은 범죄조직들이 도맡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과 비교적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쉽게 닿지 않는 중남미 지역에 상당수의 마약 공장을 건조했다. 이들 범죄조직은 마약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된 현지 중남미 지역 범죄조직들은 엄청난 자금력을 지닌 초대형 마약 카르텔들로 진화했다. 이들은 국가의 정치, 경제, 사법,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멕시코, 브라질 등은 국가의 치안이 완전히 붕괴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대 미국 마약 밀수 카르텔들을 방조하거나 지원하고 있다 주장하며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에게 "세계 최대의 마약 밀수범"이라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두로에 걸린 현상금을 2,500만 달러에서 5,000만 달러로 인상했다. 물론 이 같은 트럼프의 지적은 틀린 말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군부는 1990년대부터 베네수엘라의 태양 카르텔(Cártel de los Soles)이라는 범죄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었다. 태양 카르텔의 경우 미국에서 테러조직이자 범죄조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두로는 태양 카르텔과 연루된 군 장성 상당수를 정부요직에 임명하였고 태양 카르텔의 수익을 공유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여기에 트럼프는 태양 카르텔이 미국의 마약 밀수에 큰 지분을 차지하는 멕시코의 시날로아 카르텔(Cártel de Sinaloa)과 연관이 있다 주장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Claudia Sheinbaum) 대통령은 이러한 트럼프의 의혹에 발끈하여 이는 사실이 아니라 반박 공표했다. 한편 베네수엘라의 외무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를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아 비난했다. 또한 트럼프가 자신과 연루된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이 저지른 아동 성범죄 사건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외무부의 주장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2025년 6월 5일, 정부효율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SNS에서 트럼프 대통령와 설전을 벌이던 일론 머스크가 엡스타인 파일에 트럼프의 이름이 들어있다면서 그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추잡한 사건에 대해 트럼프는 침묵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외무부 측이 주장한 표면적인 이유로는 그것이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는 진짜 이유일 수 있다. 내부 정치적인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큰 사건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앞 바다인 카리브해에 다수의 군함들과 미사일 90기를 급파하며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또한 상륙 준비단 4,500명 가량을 베네수엘라 앞 바다에 배치하는 등 침공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에 마두로 대통령은 같은 날 450만 명의 민병대에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현재까지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베네수엘라의 마약 카르텔을 청소하고 소위 갱단 두목이라 불리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처단한다는 것이지만 진짜 이유는 제프리 엡스타인과 성범죄 연루를 덮고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털어가는 등,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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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에서 실패와 중국과의 펜타닐 관세, 베네수엘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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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필자의 러시아 군 헤르손 철수에 대한 견해 - 의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에서 재현된 러시아 군의 기만술
- 3년 전, 러시아 군의 헤르손 철수, 어쩌고 보면 잘한 것이다. 어차피 우크라이나 군은 헤르손에 입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우크라이나 측이 행동한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헤르손에 있어봐서 아는데 헤르손은 드네프르 강 하류 지역에 위치해 있고 흑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지만 본래 그곳은 하류에 형성된 모래톱과 흑해 물살에 의해 형성된 뻘로 형성되어 있는 자연적인 늪지와 갈대숲으로 덮여진 저지대에 속한 지역이었다. 전체적인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가장 저지대에 있는 곳이라 카호프카 댐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헤르손은 매번 홍수를 겪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6일,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카호프카 댐의 갑문이 우크라이나군의 하이마스(HIMARS) 로켓 공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군이 발사한 하이마스 로켓 6발 중 5발은 러시아군의 방공망에 의해 격추됐으나 나머지 1발이 댐 갑문에 명중했고 갑문이 크게 손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댐의 갑문의 붕괴되면 헤르손은 순식간에 수몰될 것이다. 게다가 안토노프스키 대교까지 공격을 받으니 우크라이나 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보다 가장 큰 것은 카호프카 댐의 갑문이 수리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이 댐에 집중되고 있고 주 타겟 또한 헤르손의 고립화이기 때문에 러시아 군 입장에서는 오히려 철수하는 측이 이득일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미 거의 대피했고 시 자체를 청야할 것은 뻔하다. 게다가 이미 헤르손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을 계속 내보내고 있다. 헤르손 부지사 키릴 스트레모우소프가 언급하길 러시아 군대는 드네프로 강 동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고, 헤르손 주청사에 게양됐던 러시아 국기도 어느 순간 거두어 갔다. 헤르손 지역에서는 지난 한달 동안 심각한 전투도 없었고, 전선도 크게 바뀐 게 없다. 그런데도 카호프카 댐 갑문의 손상이 심하고 안토노프스키 대교가 완전 폭파되기 전에 떠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미 철수했지만 철수할 것이면 조용히 하는게 아니라 떠들썩하게 정보를 흘리며 기만술을 펼친 부분이 오히려 안전한 철수를 완료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나도 <삼국지연의>에서 본적이 있는데 정확히 어떤 전투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위나라 군과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제갈량이 위나라의 사마의에게 철수한다는 정보를 퍼뜨렸다. 사마의는 이 정보를 듣고도 제갈량이 자신들을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계책이라 생각해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제갈량이 피해 한 번 입지 않고 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군 지휘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러시아측이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생각한 우크라이나군 국방정보국 부다노프 국장과 젤렌스키는 러시아 군 철수설을 믿지 않았다. 그 덕택에 헤르손에 남아 있는 4만의 러시아군이 안전하게 철수를 완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젤렌스키는 러시아군이 매복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해 러시아 군이 안전하게 철수했음에도 헤르손 시내 진군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인들이 공격하고 있었던 카호프카 댐의 수문을 러시아 군이 오히려 공격해 파괴한다면 헤르손은 수몰되고 우크라이나 군의 사상자가 극심할 것이기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이다. 헤르손의 러시아 군을 수몰시키기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던 우크라이나 군 수뇌부의 작전이 오히려 헤르손을 탈환하고도 입성하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족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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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필자의 러시아 군 헤르손 철수에 대한 견해 - 의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에서 재현된 러시아 군의 기만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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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전쟁 난민과 전쟁에 대해 무식한 대한민국 극우 노인들의 호전성
- 몇 년전 터키 이스탄불 뒷골목의 이라크 난민 여성을 본적 있다. 젖먹이를 안고 바람 안 들어오며 그나마 따뜻한 뒷골목의 한 켠에서 먹고 잔다. 당시 또한 겨울 때인데 비록 이스탄불의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진 않지만 그래도 꽤 쌀쌀한 편이다. 이는 에게 해와 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차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집단 서방과 미국이 석유를 훔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IS를 발생시켜 나라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이 난민들은 이라크나 시리아 측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다. 이스탄불 뒷골목에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터키 내 난민들 안 받아들이면 집단 서방과 미국이 제재하겠다고 협박하자 경제력이 바닥 상태인데다 미국의 경제 제재까지 받고 있는 터키는 울며겨자 먹기로 난민들을 받아들인 꼬라지가 이것이다. 난민은 서구 놈들이 발생시켜 놓고 터키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니 터키 입장에서는 억울할만도 하다. 이 난민 여성에게 터키어로 물어보니 터키어는 전혀 모르고 영어도 못한다. 할 줄 아는 영어는 Give me Money, Thank you, I from Iraq 가 전부다. 일단 아랍어로 대화를 시도해봤다. 나도 아랍어는 대학시절 때 공부했고 지금에야 쓸 일이 많이 없어 Speaking은 많이 잊어 먹었지만 Listening 은 가능하다. 이 여성의 남편은 모술에서 미군이 설치한 부비트렙에 걸려 폭사했고 부모님도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떠내려온 지뢰를 밟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여성은 젖먹이 된 딸, 그리고 이제 4살 된 쌍둥이 딸과 함께 터키 가지안테프에 왔다. 터키 정부가 난민들에게 집을 나눠줬지만 당시 터키 동부 가지안테프 대지진 때 그 집마저 붕괴되고 쌍둥이 딸 하나는 무너진 집 벽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딸과 함께 이스탄불로 와서 젖먹이 딸은 얼마 나오지 않은 모유를 짜서 준다.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 420만 명이 살고 있는 터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다. 이들 중 약 10%만이 난민수용소에, 나머지 90%는 자신이 머물 집을 구해 살고 있다. 그런데 터키는 비유럽 국가 출신 난민에게 적용되는 1951년 제네바 난민 협약의 당사국이 아니다. 따라서 터키는 난민들에게 일시적 보호책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월부터 터키는 노동 시장을 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난민들의 노동시장 진입엔 엄격한 제한이 따른다. 특히 기업이 고용할 수 있는 난민의 수를 종업원 수의 10%로 제한했다. 한편 기업은 난민을 고용해도 고용 당국에 고용 사실을 신고할 유인이 없다. 당국에 이를 신고하면 난민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하고 당국에는 그에 따른 각종 사회 보장 부담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도 한국에서는 전쟁을 우습게 여기고 호전성을 가진 자들이 천지다. 전쟁은 이렇게 서러운 것이다. 전쟁을 서든어택 같은 온라인 게임으로만 접한 한국인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모른다. 전쟁은, 누군가 공격으로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 자연재해도 함께 동반되어 온다. 그것이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어쨌든 온다. 보수우파 노인들 중에서 우리가 중국과 가까운만큼 선제 타격이 가능하다는 꿈에서 나올 헛소리를 하는 자도 있다. 중국과 면해 있는 서해안, 대부분 수도권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중국에서 쏘아대는 엄청난 물량의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직접 받아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국민들이 저와 같은 꼴이 안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이 6~70대나 먹고 호기롭게 헛소리를 하는 자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선동하면 그만이지만 도망갈 형편이 안 되는 국민들은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이럴 것이다. "빨갱이들을 잡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빨갱이 OUT!" 그러면서 큰일을 위해 나와 상관없는 이웃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 선동은 나팔수처럼 하고 실제로 실행할 어떠한 액션도 몸만 사리며 입으로는 금방 죽이고 척결할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런 자들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는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들만큼 파시즘스럽고. 전체주의화 되어 있는 집단은 없다. 그런 자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히틀러보다 더한 독재를 하게 될 것이다. 정말 우리가 배척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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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전쟁 난민과 전쟁에 대해 무식한 대한민국 극우 노인들의 호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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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 연기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양날의 검으로 자리 잡을 수 가능성이 높다. 젤렌스키에게는 선거가 불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사법리스크 또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황이 장기화될수록 젤렌스키에게 매우 유리하다. 하루라도 권좌에 머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2~3년전부터 젤렌스키의 대통령 지지도는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예프 사회학 국제 연구소(Кие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институт социологи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비교적 지지한다'는 응답이 러시아와 개전 직후 2월 90%에 달했으나, 2023년 9월에는 82%로 줄었다. 2024년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거의 30%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쟁에 대한 피로도 강제동원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들이 작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젤렌스키에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는 잘루즈니 영국 대사나 기타 유력 후보들에게 대선 불출마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이들에게 러시아 군에 대한 반격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그들의 대국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차상의 시나리오이다. 둘 중의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라다 의회의 법 개정도 필요없이 계속 계엄령 연장으로 대통령을 선거 없이 해먹을 수 있다. 젤렌스키는 일찌기 전쟁이 끝난 뒤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상과 차상, 두 가지 방책 모두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잘루즈니 영국 대사는 지금까지 대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표시한 적이 없고, 미국이 밀어주는 키릴 부다노프 또한 대선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없다. 다만 전임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만이 대선 출마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게 우크라이나 정계의 현실이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대선 후보급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잘루즈니가 총참모장 시절 자신의 부관인 겐나디 챠스챠코프(Геннадий Частяков) 소령이 생일 선물로 받은 선물 가방이나 선물 중 하나를 열려고 할 때 알 수 없는 폭발 장치가 터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부관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테러 공격의 희생자였고 그것이 젤렌스키일 것이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젤렌스키의 무언의 경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속한 야당 '유로연대'는 대놓고 당시 부관의 죽음을 젤렌스키-잘루즈니 갈등과 연계시키는 주장을 폈다.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은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총참모장의 최측근 부관이 매우 이상하게 폭사한 것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죽음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미 젤렌스키 대통령과 잘루즈니 총참모장 사이의 갈등을 크게 확산시켰다.현재 우크라이나 정계 분위기는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행정부와 군이 조금씩 균열되어 가는 분위기가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있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스트라나.ua 기자도 비슷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군 장성들이 젤렌스키에 대한 반발로 2년 전, 러시아의 프리고진처럼 언제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키예프로 군을 이끌고 진격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군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키예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젤렌스키와 라다를 호위하는 수도 경비 병력이 최소 정도 밖에 없다. 듣기로는 많아야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다. 대부분의 주력군들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젤렌스키가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키예프는 최소 병력 정도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 키예프 분위기는 지금 당장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네이버 메인에 올라오지도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이 급박한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군 수뇌부들과 대선 후보로 여겨자는 인사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군 수뇌부들이 언제 마음이 돌변해 키예프로 전차를 돌릴지, 알 수 없지만 쿠데타의 가능성은 제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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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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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 일본의 대만 지배에 있어 대만 초대 총독은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그는 가고시마 출신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갑오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현역 해군대장으로서 대만 총독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타이베이 부임한해 만인 1896년 본국 마쓰가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귀임하게 된다.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마구치 하기죠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죠슈벌(長州伐)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독 제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육군 차관으로 본국에 귀환한 그는 1898년에는 다시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 뒤로도 출세가도를 타고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총리대신 재임 중의 일이다. 다음으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갑오전쟁 당시 여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그는 육군 중장이라는 현역의 신분으로 1년 6개월 동안 대만 총독을 지내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총독에서 물러난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운명하자 부인과 함께 천황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도 야마구치 태생의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육군 참모본부 국장과 육군대학 교장을 지내면서 가쓰라 타로에 이어 일본군에 독일식 전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타이베이에 부임하자마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 규칙을 마련해 본격적인 토지 징탈을 시작하게 된다. 동양토지회사도 이 때 설립 되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재배되었던 쌀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지룽(基隆), 가오슝(高雄) 등 항구의 축항공사도 시작되었다. 북쪽의 타이베이와 남쪽 항구도시인 타이난을 잇는 종단철도가 완공된 것도 그의 재임 때였다. 이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직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고다마 총독은 특히 민정장관에 고토 신페이를 임명함으로써 철저한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그 뒤 만철 총재, 내무대신, 외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를 픙미했던 주인공이 고토였다. 제5대 총독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도 야마구치 태생의 죠슈번 계보에 속한다. 일본 정계와 군벌에서 “죠슈와 사쓰마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만큼 죠슈벌과 사쓰마벌이 요직을 두루 나눠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역대 군벌출신 중에서도 도쿄 위수총독이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지녔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을 때 그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대시위가 일어나자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의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서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재임 기간이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리산의 울울창창한 열대 삼림에 대한 본격 채벌이 시작된 것이 사쿠마 총독 때의 일이다. 현재 타이베이에 남아 있는 총독부 청사도 이 때에 비로소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총독을 거쳐 제7대 총독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조선총독부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일전쟁 직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이상이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가 문관통치로 바뀌기 전의 총독들이다. 일본 식민지 정책의 큰 흐름은 조선이나 대만에나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했다. 그리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실력 양성 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일본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85%,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10%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중화권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대만인들에게 있어 일본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로 조사되었다. 이전인 2017년 조사에서조차도 호감 83%, 비호감 12%에서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외성인들 차원에서 볼 때, 일본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낮은 편인데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 사건 등 사람이 대량 학살당하고 매번 패전하여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 대만은 중일전쟁을 치룬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본성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만이 일본에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피해국이라는 행태에 동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선을 긋고 있다. 다만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국민당 리덩후이 정권 시절과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정권은 좀 더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긴 했다. 특히 리덩후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여 해서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하여 대만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71년 UN 상임이사국을 중공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축출하는 안에 대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자유 진영 국가들도 대만을 배신하고 중공 편에 서주는 와중에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만의 UN 탈퇴 후에는 일본은 중공과 수교를 맺었으며 이 중일수교 직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대만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대만과 일본 양국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베 총리가 직접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였다.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일본에 물자 지원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성금 약 200억 엔을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 정부의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 2010년대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만은 사실 여부를 떠나 태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타이베이 쑹산 초등학교 앞에 가면 '도호쿠 구호 감사 겸 쯔위궁 350주년 축하 시계탑'이 존재하고 있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정치, 외교적으로 이용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국 포위망에 한 축을 구축했었다. 2018년 2월,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중국의 시진핑이 화해의 제스처로 구조대를 보내려 했는데 대만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구조대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은 대만에 위로를 보내는 친필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24년 12월에는 일본과 대만이 대만 유사시를 염두에 두고 대만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 정보 공유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17일, 일본 정부가 호적에 대만을 표기하는 것을 5월부터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라고 오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발표했다. 다카이치는 대만 유사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놓고 정면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는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권리가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자위대가 출동하여 무력행사 가능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역대 근현대사에서 중국은 일본을 이긴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청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청나라가 붕괴되고 군벌 분열시대와 이념 분열시대에 휩쓸린 중국이 통일되고 부유하며 안정적인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중국은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나라이고, 전쟁 무기들을 물량으로 계속 찍어내고 있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도 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은 굳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 압박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중국의 원자재, 특히 희토류의 주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중국 희토류 수출 통제에 큰 타격을 받은 후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도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일본의 중국 선원 나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바 있는데 일본은 불과 3일만에 항복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원료가 문제가 아니라 가공과 정제가 문제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예민한 문제를, 대만을 건드리면 집단 자위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이고,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위험한 문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중국 원자재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일본의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고 있다. 제2 도련선이 무너져도 관망만 했던 일본의 자위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하겠다고의 발표는 일본의 군, 경제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과 대적하겠다는 것인데 이제와서 그와 같은 발언은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 단독으로 중국과 소위 "맞짱" 뜨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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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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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먼저 사망하고 막내 동생인 프라차티폭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통치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프라차티폭에게로 넘어갔다. 1925년 11월 프라차티폭(Prajadhipok)이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에 즉위했을 때 나라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에 있었다.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왕이 된 라마 7세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 기관으로 최고 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Damrong)과 파누랑시(Panurangsi) 등 라마 6세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Boripat)과 낏띠야곤(Kyttiyagon)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 군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마 4세와 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무엇을 해도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특히 서양학을 공부한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옛 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서는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 사회의 민주적인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유럽의 태국 유학생은 영국에 301명, 미국에 47명,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 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 세력의 자제였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1927년 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들이 만나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렉 피분 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프라윤 파몬몬트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시암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에 발생한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유사했다. 결론적으로 7인의 개혁파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 랏차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이를 직역하면 인민당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시암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하고 세수가 감소했다. 이에 국방 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직하고 퇴임했다. 그러자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자 기축 통화였던 파운드화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지출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경제 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던 우리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1932년은 라타나코신 왕조가 수립된 지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의 멸망 설까지 나돌 정도로 태국 내에는 불안한 사회 징조가 포착되었다. 왕조가 창건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일어나 왕조가 멸망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태국 사회에서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었다. 귀국한 인민당의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프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 송크람은 군부 내 급진 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 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 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 1931년 후반에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Praya Pahon)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Praya Songsuradet)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유학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년 6월 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라마 7세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 반도 후아힌(Huahin)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Borapat) 왕자가 맡고 있었다. 거사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보라팟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루었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6월 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프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 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 세력은 라마 7세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당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월 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프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상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의 뒤에서 조종하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라마 7세는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이 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라마 7세는 결국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는 문맹률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 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 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콘(Prays Manopakon)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의 다음해인 1933년, 급진파였던 프리디 바놈용이 개혁 안을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프리디의 개혁 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 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콘 총리도 개혁 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 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콘 정부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해 개혁 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 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프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 송크람과 프리디의 연합 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라마 7세는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왕족을 찾았다.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나이는 9세였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제외하면 1946년 6월 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라마 7세를 추방한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프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 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 국민도 지원할 수 있는 탐마삿 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1938년 12월 또 다시 정치권에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그 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 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 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꾸었다. 시암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라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라는 명제를 주창했다. 피분 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 인종을 배척했는데, 그 목적은 화교에 있었다. 중국인 상인 계층에 대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쳤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을 철폐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 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피분 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서는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윗옷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 송크람은 독재 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동맹을 맺는 전체주의적 이념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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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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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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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 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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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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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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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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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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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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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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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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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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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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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