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에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 나온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 대목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이 귀에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큰 울림이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색과 공이 둘이 아니며, 그런고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란 의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또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지, 무슨 헛소리냐?“ 그렇다. 문자나 말은 생각의 표현이고, 소통의 수단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호 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떤 지인이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남미에서 사는 한국 갑부의 아들과 결혼할 뻔 했었어요! 하지만 남미에서 살게 되면, 일 년에 한 번 정도도 친정에 올 수 없다는 생각에 그 결혼을 포기했어요!“ 그 말에 나는 침묵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만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다. ”와! 그때는 엄청 예뻤나 봅니다. 그 갑부의 아들이 첫눈에 반해 프로포즈를 했으니 말입니다.” 나는 아직도 내 말에 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말을 듣고 그 여성은 곧바로 나를 공격했다. “선생님! 그때는 예뻤고 지금은 예쁘지 않다는 말씀이세요?” 나는 지금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과거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녀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내 말을 수정했다.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예뻤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예쁘십니다.” 옆에 있던 지인이 말했다. “선생님! 이미 물은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서로 웃으면서 그 상황은 정리되었다.
집사람이 사위와 나눈 대화도 유사했다. 내가 집에 없었을 때 사위가 과일을 가지고 집을 방문했었다. 아내가 사위에게 말을 했다. “어머! 과일을 많이 가져왔구나!” 그러자 사위가 말했다. “아니 뭐가 잘못되었나요?” 집사람은 사위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많이 가져와서 좋았다고 한 말인데 사위의 반응은 너무 많이 가져와서 자신이 무언가 잘못을 했는 듯이 말을 했다고 했다. 물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면서 오해는 사라졌지만, 말이란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이 살아온 언어의 습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소통의 장애가 되기도 한다. 호주의 원주민은 동서남북의 공간을 지칭하는 언어만 있고, 전후좌우의 방향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의 오른쪽에 무엇이 있다고 하지 않고, 당신의 동쪽에 무엇이 있다고 한다. 상하좌우의 개념이 없이 오직 동서남북에 대한 개념만 있는 사람에게 상하좌우의 개념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하는 ‘크다’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말이 갖는 의미는 다양하고, 항상 어떤 방향으로 미끄러져 간다.
말은 상호 소통이라는 긍정적 기능을 담당하지만, 때로는 부정적 영향도 미친다. 말을 떠나서는 생각을 할 수 없기에, 흑백논리나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있어서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는 말을 자주 사용할 때는 정신적인 병리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의 성취를 성공 아니면 실패로 판단하는 완벽주의자들은 단 5%의 부족도 실패로 간주하면서 불만족에 빠진다. 또한 경계성 성격장애도 이분법적 사고와 관련이 있다. 경계선 성격장애자들의 인지적 특성은 타인을 천사 아니면 악마로 판단한다. 이와 같은 성격장애는 분리라는 방어기제에 근거한다. 더 나아가서 이분법적 사고는 인간의 다양한 행위를 흑과 백으로 단순화 시키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회색분자로 매도하여 비난하기도 한다.
언어를 상호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 사이의 합의와 동의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회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텅 비어있는 기표에 이데올로기가 침투되어 이념을 만들면 상호소통에 크다란 벽을 만들기도 한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붉은 악마라는 용어나 빨갱이라는 용어는 모두 빨간 색을 연상시키는데, 후자의 빨갱이는 붉은 악마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연상케 한다. 반면에 언어는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해방의 기능을 갖기도 한다. 철학적이거나 문학적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언어가 그렇다. 언어란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때는 일종의 속박으로 작용하고, 새로운 창조의 기능으로 작용할 때에는 해방의 기능으로 작용한다. 언어가 갖는 양면성이다. 아무튼 언어가 사물과 일대 일 대응관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고전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틀을 깰 때 우리의 사고의 유연성도 향상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현대 서구의 언어 철학에서는 다루고 있는 문제라면, 인도의 철학이나 동양의 불교, 노자는 그와 같은 생각을 이미 2000여 년 전에 이미 생각을 했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언어가 곧 브라흐만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생각은 후에 미망사학파에 이르러 베다가 가지는 절대적 무오류성과 불변성을 증명하기 위해, 말은 인간이나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시공을 초월한 영속적인 존재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초기 불교에서는 언어를 해탈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았다. 그래서 붓다는 언어에 갇히지 않기를 강조했다. 또한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서는 궁극적 진리인 공의 경지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고 하였고, 선불교에서도 불립문자를 표방하며 언어나 문자의 형식에 얽매이거나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노자의 도덕경 여러 장에서도 언어에 대한 언급이 있다. 도덕경 2장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行不言之敎)”에서부터 5장의 말이 많으면 금방 막히니 중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 23장 ‘말은 적은 것이 자연스럽다(希言自然)’, 56장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생각도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경귀들이다. 동양적인 사고의 깊이는 서구의 것을 뛰어넘는다.
언어는 실재와 일대일의 대응 관계는 아니다. 언어는 상호소통의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벽으로도 작용한다. 그러하기에 지나치게 언어에 집착을 하게 되면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나 개념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개념의 창조를 위한 상상력을 높여야 한다. 현대가 만약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필요로 한다면, 문학적 상상력이나 철학적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도덕경의 이야기처럼 언어에 대한 신중한 접근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개념의 미라에 갇히기보다, 개념의 유희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야 할 사명을 띄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과 세계를 새로운 개념으로 새롭게 재해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