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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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그래픽이다.(그래픽=저널인뉴스)

 

을사년 새해가 밝았다. 나라는 어수선하지만 뱀의 지혜처럼 우리 민족은 이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것으로 믿는다.


우리의 문화에는 밥상을 앞에 두고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친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대화의 주제로 삼지는 않는다. 그것이 미덕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치와 종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족들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대화에서조차 그런 주제를 입밖에 올리는 것을 극도로 자제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대화에 임하는 자세는 유아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대화에 있어서 나만의 주장만을 계속 반복한다는 것이다. 경청도 없다. 올바른 경청이 없으니 올바른 반론도 없다. 결국 독백만 난무한다. 그러니 대화가 어린아이들의 싸움처럼 난장판으로 번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종교 간의 평화없이 세계의 평화도 없다.“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한 한스 큉의 이야기이다. 한스 큉은 현대 사회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데 종교만이 닫혀있다고 보고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몇 차례 종교 간의 대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멀고도 멀다. 그 벽을 깨기가 쉽지만도 않다. 그만큼 우리의 종교가 기복적인 신앙이 강하기에 그렇다. 기복신앙이란 어린아이들이 놀이할 때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요즘도 스포츠 선수들이 경기 후 하늘을 보고 가슴에 성호를 긋는 것을 가끔 본다. 승리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하늘에 올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상대편 선수가 같은 기독교인이라면 그 광경을 보고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 같은 하느님을 믿는데 그 하느님이 누구에게는 승리를 안겨주고 누구에게는 패배를 안겨줬다. 그렇다면 패배를 한 자는 죄를 지어서 패배를 했다고 하느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하나?


회개는 메타노미아이다. 우리말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종교학자 오강남은 메타노미아를 이렇게 정의한다. 메타노미아는 “인간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에서 하느님과 이웃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변화된 의식, 변화된 사고방식, 변화된 가치 체계”를 의미한다. 이렇듯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개인의 이익에만 머물지 않고 이웃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할 것이다. 이는 불교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행어보시’와 다를 바 없다. 자비를 베풀더라도 아무런 상에 머물지 않고 자비를 베풀란 말이니 이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과 다르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종교는 개인의 기복신앙에 머물러 있기에 종교 간의 대화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그만큼 닫혀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문화도 유사하지 않을까? 종교가 기복신앙에 치우쳐 있다면, 정치 역시 자기주장만 난무한다. 그래서 “여야 간의 평화없이 이 나라의 평화가 없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대화는 필수적이다. 대화 없는 민주주의란 결국 독재로 이어진다. 대화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이해를 목표로 하는 절차적 수단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흑백의 이분법에 고착되어 있다. 우리가 대화에 임하는 자세는 마치 전투에 참여하는 전사의 모습이다. 승리 아니면 패배이다. 정반합이 없다. 타협과 조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생각의 다름은 곧 배제로 이어진다. 그러니 정치판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대화가 이성적인 토론과 논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지금 우리는 아무도 자기 삶의 방식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있어서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져있다. 검찰총장이었던 그가 대통령이 되자 이 나라의 법은 무법천지로 바뀌었다. 법은 오직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법으로 변했다. 자기 뜻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내란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온갖 법을 앞세워 저항한다. 그에게 법과 자유는 모두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국민은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만이 국민이다. 나머지는 모두 종북좌파로 몰아세운다. 폐쇄적 사고를 넘어 유아적 사고의 극치를 보여준다. 신부인 본 회퍼는 난폭 운전자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참된 종교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히틀러 암살계획을 수립했고 그것이 발각되어 그는 결국 사형에 처해 졌다. 우리 사회에서는 히틀러도 안 되지만, 본 회퍼도 안 된다. 본 회퍼의 죽음이 안타까워서이다.


배타적 자유를 외치는 일부 세력들은 아직도 그를 지지한다. 개방사회,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회가 초래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들은 보수라는 이름으로 권위주의적인 색체를 듬뿍 안고 있는 세력들에게 여전히 환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세속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세속화란 어떤 형태의 반성과 비판 없는 상태이고, 현재의 인간을 뛰어넘으려는 초월적 의지가 부재한 상태를 의미한다.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인간은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고, 권력이나 권위가 만들어낸 허상에 매몰되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기 쉽다. 노예의 삶은 맹목적인 복종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모든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대화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열쇠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타인의 의견에 경청하면서 차이를 인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자비와 아카페적 사랑을 실천에 옮길 때 진정한 자유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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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시대, 대화의 가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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